6장 아! 광풍대(狂風隊)
"살우, 너는 산이와 함께 뇌룡현으로 가야 한다."
그 장소밖에 없다. 혈가의 후예가 잠들어 있는 곳, 출구라 해봐야 용미폭
포와 묵림에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 전부인 곳을 말함이다. 백산
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시점에서 숨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그곳이
란 생각에서였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식량은 이미 해결되었으니 그곳에서
백산의 정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광혈지안의 상태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소운이 있기에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뇌룡현이라……."
소살우가 백산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불과 일 년 전에 떠나왔
던 그 빌어먹을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단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왔
던 그곳으로 도망을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일단은 그 방법밖에 없다니 따라야 함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사 년 후 신년에 팽가에서 보자. 살아 있다면, 그때
까지도 백산이 깨어나지 못하면…… 차고 있는 비도를 이용해라."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이었다. 한성까지 가서 각자 헤어질 터이고, 사 년이
란 세월은 무공을 완성하는 시간을 말함이었다. 각자가 모든 힘을 다해 지
금 익히고 있는 무공을 극성으로 연마해서 오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그때까
지도 백산이 깨어나지 못하면 보내주라는 말까지. 다른 무기는 몰라도, 백
산이 차고 있는 광혈지옥비는 그의 심장에 박혀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이다. 전부 최선을 다해라."
결코 백산 때문에 도망치는 게 아니다. 어차피 강호공적이 되었고 중원에
서는 살아날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이 말한 몇 년의 시간만 있다면 적을 칠
자신이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다.
"산아, 며칠 전에는 네 녀석이 작별인사를 하더니 이젠 내가 하는구나. 다
시 만날 수 있다면……."
백산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팽무도의 노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런 식의 인생이 아니었는데……. 최고의 인생을 살 거라 생각했었다. 강호
무림에 대한 원한도 모두 잊고 그저 손자를 키우는 할아버지로서 살기를 얼
마나 바랐던가. 그 꿈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
백산이 파멸안이었다 해서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인연을 자신이 만들어준
것이다. 천비노인을 만난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 같았다. 차라리,
오십 년 전 아버지의 손에 죽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과연 오십 여 명의 광풍대원들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백살대였
던 자신들이 당한 것과 똑같이 광풍대원들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또다시 한을 키우고 있다.
"소운아……."
"네! 아버님."
"그래……. 힘을 내자."
소운을 한번 껴안아준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자신들이 타고 갈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결국 풍신개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리지 못하고 말았다. 모르
는 게 낫다 싶었다. 언니들의 죽음이 풍신개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날 수 있
다면 그때나 이야기해줄 참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아서였다.
"자네들에게 우리의 복수를 부탁해도 되겠나!"
"어르신?"
광사 초상을 비롯한 무욕인 네 명이 깜짝 놀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자
신들에게 떠나라 하고 있지 않은가.
"추렴이는 저희들의 딸이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마인이란 소리를 듣고 사는 자신들이지
만 남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추렴이를 죽
인 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한 명이라도 죽여서 추렴이의 복수
를 해야 할 판인데…….
"자네들의 마음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야 하네."
광풍대원들이 전부 정리되고 난 후의 일 때문이었다. 지금 감숙성에 있는
무인들이라 해봐야 천마맹주와 무욕인, 그리고 남궁세가와 팽가가 전부이다
. 그들의 전력으로는 결코 담운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전체를 이
끌 머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서문천이 천마맹으로 돌아가야 하
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있어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버틸 수
있기에…….
"자네들 네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이길 수 있다면 이런 말 하지도 않겠지
……."
"알겠습니다, 어르신……. 대형께 소식 전하겠습니다."
결국 네 명의 무욕인들이 팽무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신들이 있어봐
야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히려
이곳보다는 철목승이 있는 감숙성이 더 큰일이라는 팽무도의 말이 맞는 것
이다.
팽무도와 남궁세우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무욕인 네 사람이 마차를
빠져나가며 몸을 날렸다. 감숙성으로 먼저 가서 철목승을 데리고 나올 심
산이지만 백산을 실은 마차가 그쪽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서문천은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광풍대원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지기 시작했다. 적이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서로 간의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 마차 저 마차를 움직여 다
니는 것이었다. 아울러 지난 십여 년간의 만남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앞
으로 사 년 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기에 서로 간의 마지막
인사를 미리 나누는 것이다.
"이봐, 절대천뇌."
"어, 왔는가. 절대천룡."
석두와 일휘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일 년 전 백산에게 자랑스
럽게 말했다가 정신없이 얻어터진 그 별호였다. 별호는 멋지게 지었는데 그
런 멋진 인생은 살지 못하고 강호공적이 되고 말았다.
"살아날 자신 있냐?"
"큭! 살아야 될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인
생 아니겠냐?"
"가자, 우리보다 녀석들을 더 걱정해야지."
함께 갈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뒤에서는 수백의 인원이 자신들을 쫓고 있
는 가운데 광풍대원들 간에 이루어진 짧은 이별이었다.
"자! 오너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이거나 먹어라!"
마차 위에 서 있던 섯다가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무림
인에게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렀다.
* * *
숭산 태실봉.
얼마 전까지 천무맹이란 현판이 걸려 있던 그 자리에 제천맹(諸天盟)이란
이름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강호를 굽어보고 있다.
하늘을 제압한다는 제천(制天)의 '제'자가 아닌, 제갈 성씨에서 따온 '제'
자였다. 제갈세가가 하늘이 되었다 하여 쓰인 제천(諸天)인 것이다. 오십
년 전, 오천맹의 일원으로 천하를 지배했던 제갈세가의 두 번째 치세가 시
작된 것이다.
"공사는 어찌 되어가나?"
"과거 설가장이 있던 곳을 전부 허물어내고 기초 공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
다."
제천맹주 제갈수연.
외적으로는 명실상부한 강호무림의 최고인이 되었다. 내적으로야 담운천이
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지만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에 그의 대리인
인 제갈수연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천맹의 맹주가 된 제갈수연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제갈세가를 하남으
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아직은 전쟁의 막바지에다 세간의 눈이 있어 은밀하
게 추진되는 일이었지만 맹내의 수뇌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
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아무리 바쁜 시
국이라 하지만 맹주의 사가를 세운다는데, 누가 감히 나서서 반대를 할 것
인가. 가히 권력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쫓고 있는 자들은?"
"그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한성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마차의
대수가 늘어나면서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보고를 하고 있는 일비가 말을 더듬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
기 때문이었다. 다섯 대밖에 없었던 마차들이 전부 서른다섯 대로 불어나면
서 중원 각처로 흩어져버린 것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적들이 어디에 있는
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호호! 개방과 석숭이 도움을 주고 있나보지?"
일비의 보고에도 제갈수연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즐기
는 듯한 표정,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어떻게 할 테냐, 일비."
제갈수연이 명령을 하달하지 않고 일비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일종의 시
험인 것이다. 밀천각주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
"일단은 네 곳으로 압축해보았습니다. 감숙성, 달탄, 광서성, 그리고 북경
입니다."
"그중 한 곳만 선택하라면?"
"저 같으면 광서성, 즉 왔던 곳으로 택하겠습니다."
"호! 이유는?"
"가장 잘 아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거의가 강호초행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쫓고 있는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되
돌아가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훌륭하오, 밀천각주. 하지만 틀렸소."
"네?"
밀천각주란 말에 환하게 밝아졌던 일비가 의문의 표정을 지으며 제갈수연
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밀천각주라 칭했다 함은 정확한 추론이었다는 의미
이다. 그런데 틀렸다 한다.
"왜냐면 광혈지옥비는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 되기 때문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수연의 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확한 광혈지옥비의 소재도 모르
고 있는데 마치 그들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설사 있다 하더라
도 광혈지옥비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 된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자
신의 머리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외부에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자들은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것이고, 이곳
에 있는 사람은 정치를 해야 한다네."
정의나 대의보다는 이해득실을 먼저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란 타인을
다스리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
력을 모으고 자신에 반하는 세력을 처단할 때 필요한 수단이 정의가 되어야
함이다.
"지금은 세력을 모을 시기이지, 정의를 실현할 때는 아니야."
묵안혈마 일행은 세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장치일 뿐이다. 그들을 쫓기
위해 나선 무인들을 천무맹으로 영입하는 게 가장 큰 과제인 것이다. 그 와
중에 약간의 희생은 날 터이지만 그 또한 옥석이 가려지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 더구나 담운천이라는 더 큰 적이 존재하고 있다. 만일 광혈지옥비가
돌아오게 되면 담운천의 간섭이 더욱 심해질 터이고 자신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담운천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광혈지옥비라는 무기는 강호상
에 떠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맹주님."
"좋다. 부맹주께 그리 전해라. 그럼 알아서 처리할 게야. 그리고 잠시 후
에 간다고 하고."
일비가 몸을 굽히며 사라지자 제갈수연이 문 쪽을 향해 다시 소리를 질렀
다.
"들라 해라."
"아이고, 맹주께서 공사가 다망하시오이다."
남진룡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제갈수연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조
소(嘲笑). 노예를 대하는 상전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비릿한 웃음이었다
.
"무슨 일이시죠?"
그런 남진룡의 비웃음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제갈수연
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단지 할 말 있으면 해보
라는 식의 얼굴로 남진룡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다른 게 아니고, 광혈지옥비가 있는 마차가 갑자기 불어나서 말이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암천회까지 찾아내신 분들인데 그것도 찾지 못하시오. 오히려 부탁을 하
고 싶었는데……."
과거 남진룡이 귀주 흑사파에 이어서 암천회를 공격하여 확전을 유도했던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껍데기밖에 없는 천무맹의 맹주가 되었다고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제
갈수연. 감히……."
남진룡의 얼굴에 스산한 살기가 어렸다. 아직 제천맹이라 하지 않고 있었
다. 그들 천가에게 있어서는 천무맹이나 제천맹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단
지 말을 얼마나 잘 듣느냐 하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맹주로 올라섬과 동시에 제갈수연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자신과
거의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이번에 버릇을 잡아놓고 말리라
는 생각으로 들어왔고 일부러 물었던 터였다.
그러나.
제갈수연만 생각했지, 그녀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
던 게 그의 실수였다.
'갈(葛)! 한 번만 주둥일 잘못 놀리면 죽는 일이 있다, 애송이 놈!'
어디선가 살기 가득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극히 신경질적이고 탁
한 음성. 목소리마저 변조시켜서 말을 하는 게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
다.
'어떤 놈이…….'
제갈수연의 집무실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을 몰랐던 남진룡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자신을 농락했던 상대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도 협박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상
대가 아니었다.
'놈! 이곳이 아니더라도 네놈을 죽일 수 있는 곳은 많다. 아무런 증거도
안 남기고……. 명심해라. 입조심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전음이 들려왔으나 여전히 흔적을 잡을 수 없다.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은신하고 있는 자가 자신을 해치려 마음먹는다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디 아프십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남진룡을 향해 제갈수연이 묻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자신만의 착각인
지. 남진룡이 들어올 때 보여주었던 그 비웃음 같은 조소가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남진룡의 내심을 알고 있는 듯한 미소.
"아니오이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천주님의 전언입니다, 저와 같이
협조하여 광혈지옥비를 찾으라는."
원래는 이 말이 아니었다. 광혈지옥비를 회수하려면 자신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 했었다. 그런데 귓가에 들려오는 전음 때문에 협조라는
말로 바꾸고 말았다. 내심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방법
이 없다. 찾을 수도 없는데 자신을 욕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방금 밀천각주와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저
희들의 생각으로는 네 곳으로 보았습니다. 해서 내린 결론은 명군이 귀환하
고 있는 달탄과 석숭이 있는 북경인데……."
"그렇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곳과는 전혀 딴판이군요."
"그럼 어디를……."
"저희는 광서성과 감숙성으로 지목했소이다."
"그래요? 암천회까지 찾아낸 혈맹에서 한 일이니 맞겠지요. 그럼 저희가
광서성과 감숙성을 맡아야겠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 두 곳은 제가 맡을 터이니 그리 아시오."
"그런데 저희들이 병력이 없어서……."
남진룡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천마맹과 천무맹의 전쟁으로 인하여
실제 제천맹의 인원수는 별로 없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부상을 입고 있
다.
"어느 정도가 필요하시오."
"그자들을 일망타진하려면 천여 명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강시도 좀 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강시들이라니?"
남진룡이 펄쩍 뛰었다. 강시는 혈맹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들이 있음
으로 해서 두 맹의 양패구상을 유도할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굴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이기어검술을 구사하는 강자들입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자들이요."
광풍대원들을 도망치게 만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담운천이 가진
세력 중 가장 우선적으로 없애야 할 것들이 강시인 것이다. 그들이 있으면
자신이 아무리 강한 세력을 만들어도 혈맹에게 밀릴 뿐이다. 현 강호상에서
강시들을 완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은 지금 공적으로 쫓고 있는 묵안
혈마 일당밖에 없다.
"알았소이다."
말을 마친 남진룡이 쫓기듯이 나가버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이다. 제
갈수연에게 당했다는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담운천에게 말한
다 한들 자신의 무능력을 밝히는 행동밖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신가인이 평범한 양민 하나 다루지 못한다고 역성을 들을 것이다.
"호호호! 지선배께선 너무 짓궂으십니다."
두 명의 부맹주 중 천마맹의 대표인 철마 지청인이었다. 제갈수연의 부름
을 받고 이곳에 들렀다가 남진룡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었다.
"크크크! 어린놈이 너무 방자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장난 좀 쳤소이다."
'대단한 여인이군.'
지청인이 내심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남진룡이 오는 때에 맞추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이리라
. 충성 서약을 하고 맹주로 모시던 사람이 하찮은 자에게 모욕을 당하는 장
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코 말로 지시하
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별일 아닙니다. 차나 한잔 하자고요."
"그럼 남진룡인가 하는 그 애송이에게 광서를 맡기실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진룡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오십 여명의
인물 중 그들이 가장 강하지요. 천마맹의 혈마군을 도륙했던 자들입니다."
"책임을 못 지겠다, 이 말씀이군요."
철마 지청인.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제갈수연이 하는 일을 왜 모르겠는가
.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진룡이 파악했던 곳으로 자신이 먼저
가겠다는 의사를 피력해서 오히려 그를 도발시켰다. 달탄이니 북경이니 하
는 말로 일부러 도발한 터였다. 남진룡에게 광서와 감숙을 맡기기 위해서…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광혈지옥비가 아니라 시간입니다. 몇 년의 시간이…
…."
강호공적으로 지목된 묵안혈마 일당이 얼마나 해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다. 혈맹의 세력을 최대한 줄이고 광혈지옥비까지 사라진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렇다 해서 이쪽에서 그들을 비호할 수도 없다. 혈맹의 눈을 피
하기에는 아직은 자신의 세력이 너무 미비하기에.
'당신들의 등장은 제갈세가의 축복이군요…….'
* * *
"이럇! 타하! 이럇!"
두두두! 두두두!
전부 네 대의 마차가 뿌연 먼지구름을 피어올리며 남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제갈세가의 축복이라 했던 광견조 일행이었다.
한성에서 네 대의 마차가 더 붙어서 전부 다섯 대였던 마차였는데 지금은
네 대밖에 남지 않았다. 적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남았던 것이다. 아울러
광견조원 중에 걸레로 통하던 조민상도 함께 없어졌다.
그러나 광견조원 누구 하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낄낄거리며 백
산이 들어 있는 관 뚜껑 위에서 투자에 골몰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이번에는 내가 먹었네?"
머리가 배배 꼬인 곱슬머리라서 과거에 곱창이라 불렸고 지금은 유귀남이
란 당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조원들을 쳐다본다
. 횡재했다는 표정이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내 소살우에게 건넨다.
"나 오줌 좀 싸고 오겠소."
"임마! 한참 끗발 오르는데 오줌 싸면 운이 다 씻겨나간다."
섯다가 곱창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얼굴만 웃
고 있을 뿐,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아니었다. 예전에 보았던,
바로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서 보여주었던 지독한 살기였다. 세상을 태워
버리려는 한스러운 살기…….
"걱정 마쇼. 손은 씻지 않을 거요. 꼼짝 말고 기다려, 얼른 다녀올 테니까
."
일행을 한 번씩 쳐다보던 곱창이 싱긋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몸을 돌려 마
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우리도 같이 가겠소."
곱창이 밖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마차 안으로 다른 인물 한 명이 들어
섰다.
동한과객 구환이었다.
낙양에서 청루를 일구며 살고 있던 이들이 광풍대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
었다. 무공이 약한 최소 인원만 빼고 전부 달려왔다.
"왜 이런 일에 목숨을 버리는 거요."
소살우가 구환을 쳐다보고 말했다. 물론 저들의 고마움이야 이루 말로 표
현할 수 없지만,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목숨을 버리고 있는 저들이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광풍대원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풍신
개 어른신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일 뿐이다. 크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아니고 스치듯 도와주었던 기억밖에는, 아니 거의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
로 저들이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거두어줄 때도 그랬소."
'그분이 살아 있어도 당신들을 도와주라 했을 것이오.'
이미 개방으로부터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셨다 하였다. 붉은 피
와 살점 몇 조각이 남기신 전부라 하였다. 당신의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하
였고 복수를 위해서 자신들을 키웠다 했지만 단 한 번도 뭘 요구한 적이 없
었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냥 베풀기만 하셨다.
그런데.
그분의 손녀딸이 고통 받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알지 못했으면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해야 한다. 떳떳한 모습으로 그분을 만나
기 위해서도 해야 하는 일인 게다. 그분 때문에 오십 년의 세월을 더 살지
않았는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스스
로 만족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게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면 그걸로 족한 인생이다.
"힘들 내게!"
동한과객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고 좀더 세
월이 흐른 후에 낙양을 다시 찾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뿐이었다.
변화된 청루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희망의 눈빛으로 살아가고 있는 창기들
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이 서렸
지만 그들을 도와주었던 이들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숙부님!"
"그래. 다음에, 먼 훗날에 보자."
관 속에서 들려오는 소운의 목소리에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구환이
곱창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와 같이 몸을 날린 이들, 전부 열 명이었다.
"이럇!"
두두두두! 두두두두!
곱창과 구환을 떠나보낸 마차는 다시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볼일 보
러 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곱창이 다시 쫓아올까봐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처럼 보
였다. 아울러 곱창이 내림과 동시에 네 대의 마차 중 한 대가 멈춰 섰고 그
마차를 끌던 말은 광견조 일행이 있던 마차에 묶여졌다.
"야! 빨리 시작해. 곱창 놈 오면 제 것이라고 다 가져간다."
모사가 관 위에 쌓여 있는 주머니들을 다시 분배하여 주사위를 통 안으로
넣어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날은 괜찮아 보이는군요."
광견조원 일행이 결코 기다릴 수 없는 동료인 곱창은 구환을 쳐다보며 웃
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렇구먼, 정말 좋은 날이야. 장소도 괜찮고."
구환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
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열한 명의 인원으로 적을 막아내기에는 최적의 조
건을 갖춘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으로 철벽같이 서 있는 절벽이 있
기에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만 방어를 제대로 하면 얼마의 적이 오더
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열한 명의 인원이 전부 죽어가는 시간 동
안 놈들의 추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을 포기하고 우회해서 간다
면 적어도 두 시진은 더 걸릴 성싶었다.
"고맙수다."
광견조원들을 대신해서 하는 말이었다. 거의 오십여 명이 광서성으로 가는
마차를 따라왔다. 낙양에서 온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이쪽으로 왔던
거였다.
"말로만 하지 말고 술 한잔 사지."
"맞소, 우리도 술이 땡기오."
구환의 말에 같이 왔던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거들었다. 결코 죽음을 맞이
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출산인가? 그곳 언저리에 주막이 있으면 한잔하기로 했소."
"그 저승 입구에 있다는 산을 말하는 겐가?"
"그게 저승에 있는 거였소?"
"그렇다네, 산이 너무 험해서 맨정신으론 넘기 힘든 산이라 하더군."
"그럼 주막은 반드시 있겠구먼. 좋소이다. 그곳에 가서 한잔 사지요."
맨정신으로 넘기 힘든 산이라 했으니 술기운에 넘어야 할 게다. 그럼 주막
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먼저 간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갑자기 술이 먹고 싶네."
일행을 향해 환한 미소를 남긴 곱창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멀리
추격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터였다.
"우리도 가볼까?"
구환을 기점으로 나머지 아홉 명이 곱창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전부 열한 명인가."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십여 명의 인물을 쳐다보고 있는 인물.
과거에는 팔극도룡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팔극검룡(八極劒龍)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는 인물. 남진룡, 아니 담진룡이었다. 증조부 담운천의 검법인 천
검무극류를 도법으로 변환시켜 그의 무공으로 했었으나 이젠 더 이상 정체
를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집안에서 부르는 별호로 개칭한 거였다.
"무덤자리는 좋은 곳으로 선택했구나."
독 안에 든 쥐라는 생각에서인지 남진룡의 얼굴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
의 반 시진 차이로 쫓고 있기에, 쫓기는 자들은 결코 운공 같은 걸 하지 못
한다. 최악의 상태에서 도망을 치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멀어지고 있는 먼
지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혈광마인. 광풍대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핏빛 혈광을 쏟아내는 자들이라
하여 혈광마인이 되었다.
"제갈수연, 정말 대단하구나."
제갈수연에 대해서는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끝내는 것과 동
시에 이런 사건을 만들어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다.
지금 강호전역은 혈광마인들을 추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전쟁 중에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던 무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이제 더 이상
숨죽이며 살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즉 줄타기할 대상이 없어졌다는
의미인 게다. 어떻게든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제천맹의 그늘로 들어가
야 하는데 제갈수연은 그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것도 공적처단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림인들이 들어올 통로를 제공했다.
그러나 혈광마인들은 강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감히 자신도 어찌해볼
수 없는 강자들인 거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으로 저들의 강함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혈광마인을 쫓
던 무인들이 벌써 백여 명 이상이나 당했고 그가 데리고 왔던 강시마저도
두 구가 사라진 거였다. 어디서 저런 용기나 나오는지 그로선 알 수가 없었
다. 피하고자 한다면 피할 수도 있는 실력자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부러 죽음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있다. 오백
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을 향해 겨우 열한 명의 인원으로.
'이번 일이 끝나면 무조건 천역에 들어가야겠군.'
가장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제천맹에서 제갈수연에게도 당했고 광혈
지옥비를 회수하기 위해 쫓고 있는 저들에게도 당했다. 결국 오 성 정도 익
힌 천검무극류로는 강호에 이름도 내밀 수 없었다.
남진룡이 응시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혈전은 시작되었다. 붉은 혈광이 사
방으로 날리며 진득한 살기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자! 와라, 개자식들아. 여기 곱창 유귀남이 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은 곱창이 들고 있던 도를 횡으로 그었다. 단
순한 동작이었으나 도강이 가득 서려 있는 도가 스치고 간 자리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으아악! 아악!"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몸뚱이가 잘리며 피비린내가 가득 풍겼다.
전방을 향해 일자로 도를 그어버린 곱창의 움직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
다. 잘라진 자들의 몸을 밟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커다란 외침을 토해
냈다.
"혈극참!"
지금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인 것이다. 원래는 이기어도까지 펼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한 번 사용하고 쓰러질 무공을 펼치
는 것이 아닌, 시간을 벌기 위한 무공을 써야 하기에.
전방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가는 그의 혈광을 따라 구환과 그의 동료들의
몸이 따랐다.
차앙! 채앵!
검과 도가 부딪치고 사방으로 불꽃이 비상했다. 그 사이로 흐르는 붉은 기
운이 혈맹의 무리들을 도륙하고 다닌다. 손에선 광풍신권이 튀어나가고 도
에선 붉은 혈광의 기운이 솟구친다. 그리고 그 뻗어나간 혈광의 끝에는 쫓
는 자들의 붉은 피가 맺혀들었다.
"죽여라! 혈광마인들을 죽여라!"
광기에 젖어 있는 자들은 곱창과 구환의 동료뿐만 아니었다. 그들을 추격
하고 있던 무림인들조차도 자신들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파란 살기를
휘날리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갈 수 있는 길은 한정
되어 있고 그곳을 막고 있는 열한 명의 인물들이 있다.
선두에 있는 자들이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 뒤쪽에서 밀려드는 인파는 피할 공간도 남겨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기에 이기고 말리라, 가장 오래 버텨서 반드시 이기고 말리라.'
혈운을 피어올리는 곱창의 몸이 좌우로 흐르며 그의 잔상을 남겼다.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도 끝에 걸려드는 자들은 전부 적인 것이다. 이곳에 몸을
누일 때까지 움직이리라. 적을 향해 도를 휘둘러대는 곱창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뭐 하나! 강시를 보내야 할 것 아닌가!"
남진룡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곱창이 떠났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투자에 골몰하는 광견조의 모습
을 쳐다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장한수와 관 속에서 백산을 껴안고 있는 소운
이었다. 밖에 있으면 투자하는 데 방해된다면서 소살우와 광견조원들이 소
운을 관 속으로 넣어버린 것이었다.
"백랑, 곱창 도련님이 떠났어요. 그리고 구환 숙부님도요. 왜 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떠났어요. 어쩌면 좋아요."
흐느껴 울 수밖에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누구를 위한 죽음
인지 알 수가 없다. 백산을 구하기 위한 죽음이라면 너무 큰 빚을 지고 있
는 것이다. 살아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사람인데, 그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니 어찌하란 말인가!
"형수! 우린 가족이오, 또한 강호공적이고. 어차피 죽게 되어 있단 말이오
. 심산유곡으로 도망쳐서 농사나 짓고 살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
르지요. 하지만…… 우린 그렇게는 못 사오. 우린 건달이란 말이오. 이 새
끼들이 보고 싶어서 그리 살지 못한단 말이오."
더 이상 힘이 필요 없을 줄 알았다. 광풍대원 오십 명이면 세상 누구와도
싸워 이길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세상은 자신들보다 더 강
한 자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산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
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놈이, 사 년 뒤에 다
시 나타나는 놈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했다. 가진 자들이 뭐라고 지껄이
든, 강호공적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말을 하더라도 웃어버릴 수 있는 절대
적인 강함. 그 강함이 필요하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다 백산을 살
릴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일이기에. 결코 백산을 구하기 위해 가는 길
이 아닌 것이다.
"도련님, 저 꺼내주세요."
"형수님!"
"저를 가족으로 인정하신다면 꺼내주세요."
지켜보아야 한다. 가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모두가
웃고 있는데 자신만 울고 있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울어서도 안 된다. 이
사람이 깨어난다면, 하늘이 보우하사 다시 정신을 차린다면 알려주어야 한
다. 형제들이 어떻게 죽었고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반드시 말해줘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콰-앙!
관 뚜껑을 열려던 소살우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아울러 살우가 잡고 있던
모서리 부분이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나머지 광견조원들의 행동도 마찬가
지였다. 모든 행동을 멈추고 일제히 환한 미소를 띠었다.
"이 관 뚜껑은 썩었다야, 돈 많은 부자라더니……. 뭘 멍청히 있어. 시작해
야지."
"내놓으쇼, 곱창 자식 반 시진 버텼소."
송곳이 소살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천뢰 터지는 소리로 시간 계산을 하
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 먹어라. 치사한 놈아."
다시 투자가 시작되었다. 일행이 할 일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듯 투자에
만 열중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광견조원의 수는 여덟 명이었다.
"이사 새끼야. 마차 똑바로 몰아, 흔들리잖아."
"개새끼들 지들만 놀고, 누가 교대 좀 해줘! 새끼들아."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혹
여 속임수라도 쓸까봐 오직 서로의 주머니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
었다.
"난 삼에 두 냥! 근데 다른 새끼들은 잘 가고 있겠지?"
"야, 이 치사한 새끼야! 두 냥이 뭐냐? 뒈질 때 싸들고 갈 것도 아니면서.
말이 끌고 가는 마찬데 잘 가지, 지들이 밀고 가겠냐? 야, 거기 육포 좀
줘."
칼날이 하는 말을 듣고 이죽거리던 모사가 투자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로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에게 육포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육포를 달라는 모사의 손이 가 있는 위치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소살우의 턱밑이었던 것이다.
"저 새끼, 아예 뒈지려고 작정을 했다야."
"저 새끼가 원래 그렇잖아. 얻어맞아야 흥분하는 놈이라니까. 몰랐냐?"
아니나 다를까, 오른손밖에 남지 않은 소살우의 주먹이 모사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야, 이 새끼야. 이제 막 나가자 이거냐. 어디 형님의 턱밑에다 족발을 내
밀어, 새끼야."
"아! 씨팔. 어디 형님이 그곳에 처박혀 있는지 알았소. 덕대 새낀 줄 알았
지."
소살우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으나 또다시 몸이 움직이지 않
았다. 이번에는 섯다가 모사의 혈도를 눌러버린 것이었다.
"야, 너 혈도 짚는 법 어디서 배웠냐?"
모사가 맞고 있는 건 아랑곳도 않고 혈도 짚는 법이 신기했는지 그쪽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접때 일휘 형님이 이 새끼한테 하는 것 보고 배웠다. 꼭 한 번 써보고 싶
었는데 소원 성취했다야."
"아따! 씨팔, 달도 더럽게 밝네!"
안에서 일어나는 소동에 빙긋 미소를 짓던 이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광견조원들이 탄 마차를 몰고 가는 마부가 바로 그였다. 벌써 보
름이 되었는지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무섭게 질주하는 마차 위를 비추
고 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앞으로
사 년 뒤라 했지만 그때까지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
만 노력을 해볼 것이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다시 돌아갈
테다.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을 타고 반드시 돌아가고 말 것이다.
* * *
하늘에서 비추는 달은 떠나왔던 뇌룡현을 향해 달리는 광견조원들에게만
비추는 게 아니었다. 운남을 향해 내달리는 일휘 일행에게도 내리비추고 있
었다.
"나는 말이다. 두 살 때 버려졌다. 내가 꼽추였다는 것 때문에 사가는 사
람이 없었거든."
이곳에서도 관을 둘러싸고 모든 대원들이 앉아 있다. 일휘를 포함해서 전
부 열 명의 인원이 출발했는데, 지금은 마차를 몰고 있는 일휘를 포함하여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형님! 듣고 있소?"
"그래, 임마."
이들의 이별 방식은 광견조원들과 달랐다. 자신이 살아온 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짧게는 이십이 년에서 많게는 이십칠 년까지의 세월들, 누구에게
도 말하지 못했던 한스러운 과거들을 유언으로 대신하고 있었던 거였다.
"근데 지나가던 거지 새끼 하나가 날 주웠나보더라. 생긴 것도 좆같고 더
구나 꼽추니, 구걸을 시켜먹기는 와따 아니겠냐. 그래도 그 영감이 추몽이
란 이름도 지어주고 글까지 가르쳐줬다야."
그때가 생각났는지 추몽의 얼굴에 언뜻 물기가 비쳤다. 비록 욕을 해대고
는 있지만 그리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정이란 것을 가르쳐준 사
람이었다. 언제나 구걸을 하며 하루하루가 힘들 인생이었을지라도 그와 있
던 몇 년이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때 먹었던 쉰밥보다, 그
때의 식어빠진 만두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영감이 나 일곱 살 때 뒈져버렸다. 한겨울에 얼어 죽
어버린 거야. 꼽추 새끼인 나를 살리려고……. 재밌지 않냐? 내가 없으면
밥을 굶게 생겼으니 나만 살린 거라고. 지는 늙어서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둥 하면서 말이다, 씨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게
그 영감 때문이었다. 제사도 지내지 못하도록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죽어버린 거지 영감 때문에 삶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지난 십팔 년의 세월 동안 그 영감이 죽은 겨울에는 언제나 제사
를 지냈었다. 어린 시절이었기에 죽은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겨울이 시작되고 가장 춥다고 생각되는 날이 영감의 제삿날인 거였다.
그런데 오늘 밤은 유난히 날씨가 찬 것 같았다. 광견조원들을 만나기 위해
바삐 움직인 통에 작년에는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오늘 밤이면 될 것 같
았다. 앞으로 제사 지낼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젠 직접 가서 만나게 될 테니
……. 가서 죄다 말할 것이다. 영감하고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았다고.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을 정도로 잘살았다고……. 너무 행복해서
영감을 잊고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형님, 나 가오."
"기다려!"
밖으로 나가려는 추몽을 말리며 일휘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냅둬!"
자신의 출현에 깜짝 놀란 한열이 밖으로 나가려는 것마저도 못하게 하였다
. 더 이상 밖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리라.
"왜 그러오, 형님. 이 자식들에게 쪽팔린 이야기 다 했는데. 창피해서 얼
굴 못 보오."
"아니, 지금부턴 전부 같이 깨진다. 우리 다섯이……. 앞에서 쫓아오는 새
끼들하고 뒤를 막아선 새끼들하고 한번 해보자."
이미 포위가 되었기에, 더 이상 도망치는 게 불가능했기에, 어쩔 수 없었
다. 이제는 같이 가야 할 판이었다.
"씨팔! 그럴 거면 왜 과거는 이야기하라 했소."
볼멘소리를 하며 일휘를 쳐다보고 있으나 결코 기분 나빠하는 얼굴이 아니
었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외롭게 혼자 죽지 않아도 된
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었다. 오늘처럼 달빛이 고운 날엔 혼자 하는 죽음
은 너무 외로울 것 같았는데 같이 갈 동료들이 생긴 것이다.
"옛날부터 꼽추 너 사연을 알고 싶었거든."
일휘가 싱긋 웃으며 추몽 등의 혹을 두드렸다. 마치 그 짓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표정이었다.
"잊지 마라, 사 년 뒤를……. 살아남는다면 사 년 뒤에 하북팽가다. 무공
을 완성하지 못하면 혼(魂)만 돌아와라. 그렇지 않으면 동료들의 손에 죽는
다."
일휘의 얼굴에 살기가 잔뜩 배어들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지
만 이중 누군가 살아남는다면 다시 싸워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강한 힘으로,
열 배 스무 배 강한 힘으로 강호무림 전체와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무공
을 완성하면 가능해진다. 심검, 심도의 경지에 다다르면 강호무림보다 더한
곳이 있다 해도 전부 없앨 수 있다.
"혹시 여기가 어디쯤인가 아는 사람 있냐?"
"알아서 뭐 하려고, 나중에 해골이라도 찾아줄 거요?"
"그래, 임마. 살아남는 사람이 이곳에 와야지."
"일없수다. 달빛도 좋구먼……. 이런 날은 피가 더 그리워집디다. 먼저 가
오."
추몽이 새파란 살기를 드러내며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디에 묻히는
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가슴속에 살게 될 터이다. 살아남은 형
제들의 가슴속에……. 그 정도면 된다. 누가 되었든 잊어먹지 않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테다. 거지 영감과는 달리 자신은 남길
이름이 있다. 그리고 혼자도 아니다. 여러 놈이 한꺼번에 가게 된다. 저승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한들 동료들과 같이 가는 길이다. 어차피 자신이 막아
야 할 곳이었기에 가장 먼저 몸을 날린 거였다.
"앞은 내가 연다. 뒤로 물러나면서 상대해라. 숨 열심히 쉬고."
뒤쪽으로 달려나가는 두 명을 향해 소리친 일휘가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인물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미 살기를 머금고 있는 그의 몸에서 새빨간
혈운이 노란 달빛과 어우러지며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그 속에서 죽음의
향기가 흘러나왔다.
"쳐라!"
붉은 혈운을 품고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두 인물에게 추살명령을 내리는
자(者). 초리하에서 광풍대원들에게 당했던 무천각 인물인 호북 권가장의
살검 권윤이었다. 맹주가 된 제갈수연이 나가지 말라 했으나 제천맹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데리고 왔던 권가장 무인 백여 명이 초리하에서 전부
당했던 거였다. 그 속에는 둘째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혼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광천뢰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지던 아들의 모습
, 허공을 수놓던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복수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고자 다시 전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역시 놈들은 강했다. 오백여 명의 무사들이 이들을 쫓았지만 지금
은 이백 명 정도만 남았다. 물론 저들을 도와주는 자들이 있었다지만 열 구
의 강시마저 동원되었는데 희생이 너무 컸다. 아마 강시가 없었다면 저들을
처치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제는 끝날 시간이
왔다. 벌써 한 달간의 추격을 했기에 저들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운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추격을 해오지 않았던가.
"여기서 네놈들을 전부 죽여주겠다."
검을 뽑아든 권윤이 붉은 혈운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열.
일행 중 가장 말이 없는 청년이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하여 거의 존
재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도(刀)는 죽음
의 향기를 머금은 사화(死花)였다. 포위망 속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사
방으로 자신의 도를 뿌려댔다.
좁은 협도에서 상대의 뼈 잘리는 소리가 손을 타고 전해진다. 머리카락이
날리어 떨어지고 살기를 머금은 검이 스치고 지나간다. 뒤쪽으로 내질렀던
도를 뽑아내어 다시 횡으로 긋고, 앞을 향해 몸을 굴린다. 일어섬과 동시에
회전을 하며 모든 것을 잘라내 버린다.
온전하지 못한 내공 때문에 일 장 길이의 도강은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도
에 서린 붉은 기운만으로도 적을 잘라낼 수 있다. 살기 위해 휘두르는 도가
아니기에, 살고자 하는 욕심이 없기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 죽는 게 아
니다. 먼저 간 형제들을 더 빨리 만나는 행운을 누릴 뿐이다.
화인.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언제나 손해를 많이 보았다
. 그럼에도 별로 고칠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적거리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 싫어하는데 지금은 아닌 것이다.
급한 성정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앞에 있는 놈도 죽여야 하고 뒤에 있는 놈도 죽여야 한다. 이리저리 굴러
다니며 놈들을 죽여야 한다. 마음껏 도를 휘두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
추몽.
다섯 명 중 가장 전율적인 살기를 뿌리며 움직이고 있다. 마치 지금이 아
니면 안 되는 것처럼 조그마한 눈은 연신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눈앞에서
피가 튀고 있는데도 웃고 있다. 등에 있는 혹은 삶의 짐이었다. 떼어버리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인생의 굴레.
그런데 지난 십 년간은 그 굴레를 버릴 수 있었다. 꼽추 추몽이 아닌, 인
간 추몽으로 살았던 세월이었다. 선택하라면, 꼽추 추몽으로 기십 년을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인간 추몽으로 하루를 살 것인가를 선택하라면, 인
간을 선택할 것이다. 하루를 선택할 것이다.
죽음이 아니다. 영감을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다. 보고 싶었던, 한없이 보
고 싶었던 영감을 만나러 가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추몽을 비롯한 네 사람이 붉은 도를 들고 칼춤을 추고 있는 그 사이로, 붉
은 혈운이 사방에 꼬리를 남기며 움직이고 있다. 혈운 속에서 바람소리가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죽음이 따른다. 오른발이 치솟아 오르자 왼발이 따르
고, 무릎을 구부리며 거꾸로 잡은 도가 빛을 뿌린다. 내가 누구이고 네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죽음이 부르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일 뿐이다. 벌
써 한 달이 넘도록 운공 한 번 하지 못했기에 본신의 힘을 다 사용할 수가
없다. 일 장이 넘게 나오던 도강이 반 장 길이도 채 되지 않는다. 심도는
고사하고 이기어도도 쓸 형편이 안 된다. 한 번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마지
막 순간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
"이야합!"
일휘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춤을 추듯이 일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아껴두었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거였다.
흐르는 달빛이 너무 서러워 하늘을 못 보네.
흐르는 핏물이 너무 붉어서 고개를 못 드네.
떠나간 부모가 너무 그리워 서럽게 울었다.
떠나간 형제가 너무 보고파 그 길을 따른다.
저 높은 하늘에 배고픔만 없다면
저 높은 하늘에 추위만 없다면
우리 함께 그곳으로 가자, 기꺼운 마음으로 가자.
저 깊은 하늘 구석에 우리의 터전이 있다.
그곳에 가면 뱁새가 있을 터이고.
그곳에 가면 찍새가 있을 터이다.
소령이가 있고 형수들이 있다.
터지는 분노가 너무 거세어 죽지를 못하네.
흐르는 눈물이 너무 붉어서 길을 잃었네.
아직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일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추몽
이 죽었고, 한열은 말이 없다. 화인이 사라졌고, 광영은 쓰러졌다. 온몸이
칼에 잘리고 창에 찔려도 먼저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달렸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차디찬 시신이 되어 죽어갔다. 삼십 년도 되지 않은 세월
이지만 그래도 십 년은 행복하게 살았으니 그것으로 되지 않았냐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라 이런 기회가 또 온다면 다시 이 길을 선택하리라며
호기 있게 말하던 모든 형제들이 갔다.
자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정신이 아득해오고 있었다. 아직도 적은 십여 명이나 남았는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른쪽 무릎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며 땅이 한쪽으로 기
울어지는 것 같다.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이다."
"엄청나군, 저런 자들을……."
다섯 명이 벌이는 살육의 현장을 쳐다보던 권윤이 넋을 잃고 말았다.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단지 다섯 명의 지친 광인들뿐인데 그들에 의해 이백
의 추격대가 몰살당하고 있는 것이다. 검에 찔려도 창이 박혀도 멈추지 않
는다. 도를 휘두를 힘이 남아 있으면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찔러 넣고 있
다. 거의 무의식중에 휘둘러진 도임에도 추격자들의 숨을 끊어놓는다. 도와
하나 된 자들의 움직임이었다. 평상시의 모든 힘을 발휘하고 있었더라면
자신도 미치지 못하는 강자들이었던 거였다.
그러나 이젠 전부 끝이 났다. 마지막 남은 가장 강한 자로 보이던 놈이 다
리가 잘린 채 바닥으로 쓰러졌기에. 추격자들의 대부분이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기에 놈의 목을 취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놈만
처리하면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 저들에 의해 죽었던 아들의 복수를 마무
리 짓고 돌아가면 영광스러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바야흐로 무천
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십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세가들의 황금시대가
.
"네놈은 나의 몫이야! 비상을 위한 제물!"
일휘를 노려보던 권윤이 검과 하나가 되어 몸을 날렸다. 영광된 세월을 가
지기 위한 마지막 손짓이었다.
그러나.
막 일휘의 목을 취하려던 권윤의 검보다 더 빠른 물체가 있었다. 일 장 길
이에 달하는 철창(鐵槍). 검은 철창 하나가 가공스러운 속도로 날아와, 일
휘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권윤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묵창 패웅이었다.
살검 권윤을 관통해버린 패웅의 철창은 쉬지 않고 계속 날아다니며, 나머
지 추격자들을 전부 도륙한 후에야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참으로 묘한 인연일세. 이런 곳에서도 만나다니 말일세."
패웅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일휘를 쳐다보았다.
서문천의 배웅을 받던 그가 거의 삼십 년 만에 고향으로 찾아가는 길이었
다. 무도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가정마저 팽개친 채 중원에만 머물렀는데,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특히 광풍대원들의 무공을 익
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익히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든지 상
관없었다. 연공도 무공도, 전부 마음먹기에 달렸던 거였다. 그런 생각이 들
자 더 이상 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을 찾기로 했었다.
해남도(海南島).
오직 검밖에 없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창술을 익혔고, 그 창술을 완성하고
자 중원으로 나섰는데 그 세월이 삼십 년이 되어버렸다. 다시는 나오지 않
을 양으로 마지막 중원이나 돌아보자 싶어 운남 쪽으로 왔는데 이곳에서 일
휘를 만난 거였다.
"자넨 앞으로 도를 쓰지 못하겠구먼."
"이곳이 어디오."
"귀주와 운남의 경계일세."
"그렇소? ……결국 왔군."
일휘의 얼굴이 환해졌다. 운남에 왔다고 한다. 처음 목표로 잡았던 운남까
지 왔고 약속을 지켰다. 지금 도를 쓰지 못하고 다리가 잘린 게 문제가 아
니었다. 형제들과 약속했던 장소까지 왔다. 뒤쫓던 모든 추격자들을 물리치
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사 년의 세월이 남았다. 그 세월 동안 이루어낼 것이다.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해서 반드시 하북팽가로 가고 말 테다.
미소를 짓던 일휘가 고개를 떨궜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이고, 이 곰 같은 놈을 어찌 데려가냐."
곤혹스런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던 패웅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섯 구의 강시들이 서 있었다.
"볼 텐가?"
순간 패웅의 손에 있던 창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전방을 향해 무서
운 속도로 날았다. 말이 끝난 순간보다 창이 날아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마음먹는 순간에 창이 날아가는 경지. 창으로 펼치는 이기어창의 경지였다
. 환영창과 유사한 경지이기는 하지만 그 공격범위가 훨씬 넓었다. 객잔의
주방에서 터득한 경지였다.
검은 기운을 머금고 날아가던 그의 창이 이쪽을 쳐다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강시들의 목을 한꺼번에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강시를 조종하고 있던 놈을 저승으로 먼저
보낸 것 때문이니까."
이미 기절하여 정신을 잃어버린 일휘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린 패웅이 그
를 번쩍 들어 메더니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운남을 향했던 일행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일휘가 극적인 구조를 받고 있을
때 복건성으로 방향을 잡았던 석두와 광살조의 조장인 여풍기, 그리고 도대
웅 삼 인은 마지막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마차를 버렸는지 모른다. 아마 낙양에서 도우러 왔던 그 친구들
이 전부 떠났을 때부터인 듯싶다. 산을 타고 도망을 치면서 적들을 한 명씩
죽여갔다. 그 와중에 전부 일곱 명의 광풍대원들이 떠나갔다. 일행에게 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스스로 길을 나선 거였다.
죽고 죽이는 추격전 속에 결국 이곳에 도착했다. 짠 내가 물씬 풍겨오는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것을 보니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
었다.
그러나.
아직 적들의 수효는 오십여 명이나 남아 있고 뒤쪽은 끝을 알 수 없는 낭
떠러지이다. 바다를 향해 뛰어들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마저도
이미 적이 막아서고 있다.
"이름이 뭔가."
여풍기의 입에서 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피곤함, 어딘가에 누워버리고
싶다는 피곤함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석두
만 없다면, 먼저 간 형제들의 눈빛만 없다면, 그냥 이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무풍대의 부대주였던 하우돈이다."
석두 일행을 뒤쫓았던 자는 과거 대월산에서 광풍대원들과 인연을 맺었던
무풍검 하우돈이었다. 제갈수연의 세력인 제천맹 인물들 두 곳 중 한 곳의
인물이 그였던 것이다. 그 또한 목적이 있었다. 귀를 잘렸고, 대주인 백무
천에게는 거짓말을 해야 했던 그 기억.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그 기억은 결
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섰다. 과거의 치욕을 잘라버리기 위해 놈들을 쫓고 또 쫓았다.
"큭! 그 귀의 주인이셨구먼."
그때의 기억이 났는지 여풍기가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다
. 생전 처음으로 힘을 가져보았던, 이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
이었다. 불과 일 년 전이었는데…….
"하우돈! 이곳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죽여야 할 거다. 만일 말이다, 혹시라
도 내가 살아나는 경우에는 네놈을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테니까. 자, 시작
해볼까."
'형님! 제가 길을 뚫겠소. 절벽으로 가시오.'
'대웅아!'
여풍기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도대웅을 쳐다보았다. 이미
혈인이었다. 온몸 가득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이래왔다. 같이 싸우다가도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적을 막으면 그
를 두고 일행이 먼저 움직였다.
'너무 늦었소.'
먼저 떠난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염라국 입구에 있다는 사출산(
死出山)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사출산은 이승에 있는 어떤 산보다 험한 산
이라고, 혼자 넘기는 너무 힘겹다고 같이 가자 했었다.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니 각오하라고 했었다.
고통. 이미 어린 시절부터 너무 익숙해진 단어이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
러지는 물리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건 고통이라 부르지도 않는
다. 고생이라고, 힘든 고생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어떤
희망도, 살아야 할 목적도 없는 그런 삶이 가장 고통인 게다. 세상에서 버
려진 삶이 가장 힘든 삶인 것이다.
그런 삶을 버렸다. 십 년 전에…….
이제는 편안하게 갈 수 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형님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시오. 창궁혈해천!"
석두와 여풍기를 주시하던 도대웅이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추격자들 사이
로 뛰어들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는 것이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진원지기
를 전부 짜내어 내공화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강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떠날 수 있는 길은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쳐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대웅을 쳐다보며 하우돈도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과거에도 겪어보았지만 정말 대단한 놈들이었다. 거의 먹지도 못하고 지금
껏 쫓긴 자들인데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만일 자신이 저런 처
지에 있었다면 진즉 자결을 하고 말았을 텐데.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웃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듯한 묘한 웃음. 오히려 쫓고 있는 자신들이 더 불쌍한 사
람들이라는 표정들이다.
붉은빛을 머금은 검이 춤을 추며 길을 만들고 있다. 휘둘러지는 두 사람의
분노에 명예를 머금은 목들이 솟아오른다. 여풍기의 검이 천지를 양단하고
, 도대웅의 검이 인간을 자른다.
"가시오!"
어느 결에 절벽 근처까지 왔는지 도대웅이 여풍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다 하더라도 산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실낱같은 가
능성만 있을 뿐이다.
"기필코……! 으아아!"
왼손을 불끈 쥐어 보인 도대웅이 몰려드는 적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기필코 살아남으라는 말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살아나서 저들에게 돌려
주라는 말이다.
'다음에, 다음에 보자.'
여풍기가 마지막 눈물을 끝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딜!"
순간 어느새 다가왔는지 하우돈이 그를 향해 두 손을 뿌렸다. 먼저 그의
손을 떠난 물건은 검이었고, 왼손에 의해 장이 발출되었다. 이미 기절해 있
는 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이놈만 잡으면
놈은 절로 죽어갈 것이다.
"커억!"
등에서 느껴지는 통렬한 고통에 여풍기가 비명을 토해내며 절벽 아래로 추
락해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함께 떨어져 내리는 또 하나의 물체, 힘없이
늘어져 있던 석두의 오른팔이었다. 하우돈이 날린 비검술이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풍기는 그런 상황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득해져오는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정신이 돌아온 여풍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막연히 바다라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아니었다. 수많은 바위들이 이곳저곳에 솟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힘내라! 여풍기."
마지막 남은 모든 내력을 뽑아 올렸다. 순간.
"허억!"
단전 부위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하우돈의 마지막 장이 그의 단전
을 흔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해야 한다. 해내지 못하면 둘 다 죽는다.'
죽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간 형제들, 그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서는 살아나야 한다.
"이야압!"
모든 힘을 짜낸 여풍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바위를 향해 일 장을 날렸다.
곧이어 요란스런 물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났나?"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는 하우돈의 손에는 아직도 눈을 치뜨고 있는 도대웅
의 목이 들려 있었다.
거의 두 달에 걸친 대 추격전의 마지막이었다. 놈들의 생사는 확인할 필요
도 없다. 거의 백여 장에 달하는 절벽이고 마지막 자신의 공격까지.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폐인이 될 것이다.
"가자!"
열 명. 오백의 인원이 출발했다가 제천맹으로 돌아가는 추격자들의 수였다
.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같은 감정 따윈 없었
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영광의 열매만 생각하는지 득의의 미소만이 머
물고 있었다.
"풍ㆍ기ㆍ야."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음성이 석두의 입을 타
고 흘러나왔다. 검게 변한 입술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대고 있는 것
같았다. 여풍기가 붙잡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을 것
이다.
"깨어났소?"
"날 두고 그냥 가라. 아마 이곳으로 계속 가면 동사군도(東沙群島)가 나올
거다. 그곳에서 무공을 익혀라."
살아난다 해도 희망이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신보다는 여풍기에게 더
가능성이 있다. 오른팔이 없는 검사. 물론 몸을 치료하면 완전하지는 않을
지라도 육칠 할 정도의 내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심검을 전개하지 못한다. 사 년이란 세월 속에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는 것
이다.
"그래서! 형님을 이곳 물속에다 버리고 나 혼자 가라고? 저 아무것도 보이
지 않는 바다 속으로?"
"사 년의 시간밖에 없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다.
부탁한다. 그리고 형제들을 기억……."
"씨팔!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아가리 닥쳐!"
자신의 입 안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고함을 내질
렀다.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눈에서 태양보다 뜨거운 분노가 흘러나왔다.
아홉 명의 광살조원들이 전부 죽었다. 누구 하나 망설이는 녀석들이 없었
다. 자신들의 죽음에 누구 하나 원망하는 녀석들이 없었다. 더러운 운명이
라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노라고, 가장 행복한 세월이
었노라고 말했다. 무공을 대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남겨두기 위해 저들이
먼저 간다고 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들도 기회가 생기면 살
아날 것이니 죽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고 했다. 사 년 뒤…… 팽가에서 다시 만나자 했다.
"명문세가 출신이라며! 명문세가 출신이라서 이리 약한 거냐? 나는 노예
출신이었다. 너희 귀족 새끼들이 부리고 사는 노예였단 말이다. 노예보다
못한 놈이 귀족이라고 뻐기고 살았어! 살아보란 말이다. 귀족답게 살아보라
고. 왜, 팔이 없으니 자신이 없냐? 그 여잔 어쩔 거냐? 귀족 놈이라고 헐레
벌떡 달려든 그 여자는 어쩔 거냔 말이다."
"그만해라, 개새끼야!"
여풍기의 욕설에 약간 정신이 돌아왔는지 석두가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진담이오. 내 꿈이 뭐였는지 아쇼. 귀족 새끼 만나면 방금 그 말 꼭 하고
싶었소."
여풍기의 어깨에 지금도 남아 있는 경의 자국. 노예였던 전력을 숨기기 위
해 칼로 도려버렸다. 흔히 노예였다가 탈출한 그런 자들은 불로 지지곤 하
는데 너무 위험했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선 도려내는 수밖
에 없었다.
'나는 내공이 없어졌소.'
아직 석두에게 말하지 못했다. 내공을 끌어올려도 아무런 징후가 없다. 마
지막에 당했던 하우돈의 일 장과, 살아남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탓인지 더 이상 내공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검이 아닌 장에 당한 상처였기
에 지금껏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석두를 살려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이나 살았는데 사 년 뒤
팽가에 가는 사람이 없다면 먼저 간 새끼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 몇 대 패지, 그러냐."
"이곳이 물속만 아니면……. 갑시다."
의무감. 살아나는 게 기연이나 운이 아닌 의무가 되었다. 먼저 간 형제들
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선 반드시 살아나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움직
여야 한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이라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두 사람이 끊임없이 발을 놀렸다. 보이는 건 망망대해뿐 아무것도 없다.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살 수 밖에 없는 운
명인 게다.
* * *
"너더냐, 만승. 오십 년의 한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나왔더냐."
핏빛 강기가 사방으로 날리고 있다. 남궁세우의 몸에서 쏟아지는 분노는
추격자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작렬해들었다.
지금 마차에 남아 있는 두 사람. 오구와 남궁세우밖에 없었다. 누가 말리
고 누가 부추길 필요가 없다. 뒤쪽에 적이 나타나면 한 명씩 몸을 날려 떠
났다. 마차에 앉아 있던 순서대로 동료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주고 죽음을
향했다. 주름 진 손을 잡았던 여덟 명의 아이들. 그들은 말없이 자신을 쳐
다보았고 큰절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비가 되어버
렸다. 자식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무능한 아비가 되어버렸다.
어느 한 아이가 내리면서 그랬다. 부모님을 찾아가라고. 그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들이 먼저 가는 거라 하였다. 울지 말라고 했다. 몇십 년만 있으
면 다시 만날 터인데 그 세월이 뭐가 아프냐고, 그 정도의 시간이 뭐가 슬
프냐고 했다. 긴 만남을 기다린다고, 다시 만날 때 웃으며 만나자고…….
그렇게 떠났다.
녀석들이 만들어준 시간이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만나라고 주고 간
생명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저 친구, 오십 년 전 형제였던 황보세가의
큰아들이었다. 자신에게 동생이 되었던 황보만승.
"오너라! 만승. 아직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보내주마. 더러운 운명의
사슬을 끊어주마."
남궁세우의 몸 상태도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거의 한 달여 이상을 쉬지도 못한 채 움직여왔다. 그리고 계속되는 싸움.
마차만이 유일한 휴식처였기에 계속해서 끌고 왔다. 운공은 할 수 없다 하
더라도 피곤에 지친 몸을 잠시 잠깐 쉴 수가 있는 곳이 마차였기에. 이제는
그 마차마저도 떠나야 한다. 오구에게 계속 가라는 눈빛을 보낸 남궁세우
가 몸을 날렸다.
"천뢰지(天雷指)!"
쿠르릉!
허공으로 솟아오른 남궁세우의 열 손가락에서 뇌성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푸른 뇌전의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남궁세가의 독문지법인
천뢰지였다. 백여 명의 군웅들 뒤를 따르고 있는 강시들을 앞으로 끌어들이
기 위해서였다. 강시들을 향해 발출한 지공이 아니었다. 강시를 조종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자, 언제나 군웅들 뒤에 숨어서 따라오고 있는 자를 향한
공격이었던 거였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자신이 공격목표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놈이 지시를 내렸는지 붉은 혈운
에 휩싸인 강시들이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오고 있었다.
"크아앙!"
커다란 괴성을 내지르며 앞에 있는 군웅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공격을 가하
며 다가들고 있었던 거였다.
"으아악!"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며 마차를 쫓던 군웅들이 사방으로 흩
어졌다. 적에게서가 아니라 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
었다. 남궁세우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의
미였다. 오구를 쫓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먹혔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세우의 그런 배려가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
구였다. 말고삐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힘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었다.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다.
사부라는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껏 죽어간 광풍대원들이 전부 자신에게 조
금씩이나마 박투술을 배웠다. 그럼에도 가장 약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자신
이 가장 약한 사람이었기에 마차를 모는 것 이외에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
었다. 그들의 죽음에 동참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내공만 있으면 무엇 할
것인가.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이 먹은 자신이 나서지
못하고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을 먼저 보내는 심정은 너무 참혹했다.
더 이상 마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세우가 있던 곳을 우회해서 다가온
자들이 달리던 말들의 목을 쳐버렸던 것이다. 앞쪽으로 처박히는 마차에서
몸을 솟구친 오구가 내려섬과 동시에 다시 땅바닥을 찍었다. 자신을 기다라
고 있었다는 듯이 추격자들이 덮쳐왔다.
"좋다, 한번 가보자."
오구의 손과 발에 불그스레한 기운이 서렸다. 일휘나 소살우에 비하면 미
약한 경지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백산이 심어준 뇌의 기
운은 나올 생각도 없다. 오직 몸속에 잠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으로 착
지한 오구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산과 일휘, 그리고 소살우. 세 사람에게 또 한 명의 사부가 되었던 오구
. 그의 박투술이 사방으로 몰아친다. 오른발에서 나아가는 등퇴에 왼발의
편퇴가 이어지고, 주저앉아 회전하는 왼다리에 상대가 무너진다. 쓰러지는
놈의 몸을 잡아 왼쪽에서 들어오는 검을 막으며 그대로 돌진해든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놈을 향해 왼손 정권을 박아 넣는다. 오구의 몸이
움직이고 있는 공간은 사방 일 장. 그 좁은 공간에서 무수한 발길이, 쉼 없
는 손길이 터진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지가 움직이
면 적을 죽일 수 있다.
철목승의 절예라는 천마장법은 알고 있음에도 익히지 못했다. 자질이 딸리
고 시간이 없었다. 무공을 익혔다는 것에, 젊어서 이루지 못했던 한을 풀었
다는 사실에, 만족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행운이란 놈은 언제나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냥 거저 주는 행운은 없었다
. 살아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할 수만 있다면 익힐 수 있을 터인
데. 몸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터인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일었다. 이 길로 감숙성까지 살아서 갔
더라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제대로 무공이나 익힐 수 있을 것인가. 동생 같았던 녀
석들을 전부 가슴에 묻고 어찌 남은 인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차라리 잘되
었다 싶었다. 이들과 싸우다 죽으면 그것 또한 괜찮다 생각했다.
"크윽!"
옆구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곳을 뚫고 피 묻은 검 하나가 고개
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고!"
화가 났다. 자신은 이각도 채 버티지 못한다. 먼저 간 아이들은 전부 반
시진 이상을 버텨냈는데…… 겨우 이각이다. 이까짓 것을 버티고 정신이 몽
롱해지고 있다. 무작정 뒤쪽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선명하게 타격감이
느껴진다. 검을 찔러 넣고 득의해하는 놈의 얼굴이 함몰되는 느낌이리라.
빌어먹을 인생이다. 오십 년 세월 동안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생 삼았고 아들 삼았다. 그들
에게 묻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리했다.
유일한 위안거리였는데…… 그 애들을 전부 저승으로 보냈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래서 살아남은들, 다시 산다 한들 어떻게 하라고……. 뭘
어쩌란 말인가.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고 사방이 돌아간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테다. 비틀거리고 다리에 힘이 없다 할지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움직
일 테다. 먼저 간 아이들이 그랬을 터였다. 한 명의 적이라도 줄이기 위해
쉬지도 멈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 싶다. 더 빨리 더 힘 있게 움직여야 한다. 더 힘 있게…
….
마음뿐이었다. 머릿속에서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득함. 마
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다.
'이런 거야, 모든 아이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거야. 다행이야…….'
별다른 고통이 없었다. 분명 검이 관통했는데 그곳으로부터 고통이 다가오
지 않았다. 이곳뿐만 아니라 중원의 하늘 아래에서 죽어간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저들을 구해라!"
언젠가 들어보았던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도 어르신인가? 아니지, 그 양반이 이곳에 있을 리가…….'
* * *
오구가 환청의 주인공이라 착각했던 팽무도는 달탄 땅에 진입해서도 몸을
멈추지 못하고 하나밖에 없는 팔로 연신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무당삼선
등으로부터 당한 내상이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는데
도 지금 제대로 서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등에 기댄 채 달려드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
천무맹의 파문제자였던 강구두였다. 그의 입장도 오구와 별반 다를 게 없었
다. 가장 약하다는 이유로 지금껏 살아남아 있었다. 수차례 나서기를 원했
으나 얼마나 버틸 거냐며, 오히려 적의 사기만 올려줄 거냐며 나가지 못하
게 하였다. 이제는 우는 것도 지쳤다. 다만 숨을 쉬고 있을 때 한 명의 적
이라도 더 쳐야 하기에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
혈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사혈마강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차디
찬 대지 위로 몸을 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다른 곳에 비해 두 사람을
쫓는 무림인들의 수효가 적은 것 같았다. 이곳이 달탄이기에 그런 모양이었
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저 먼 대초원의 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뿌
연 먼지 구름이 보이고 있었다.
명나라 황군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피에 절어 변색되기는 했지만 여태
껏 금의위 복장 그대로였다. 그러한 이유로 달탄 땅에 들어서면서 이름을
날리고자 이들을 쫓았던 무림인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실제 제천맹의
인물들만 남았던 거였다.
그러나 제천맹의 인물들이 다 죽었다 해서 싸움이 끝난 게 아니다. 개개인
의 능력이 광풍대원들과 비슷한 사혈마강시가 세 구나 남아 있다. 과거의
백살마대라 불렸던 오천맹의 후예들이.
"구두야, 좀 쉬어라."
"괜찮겠습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구두가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지금 팽무도의 몸 상
태로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을 버리려 하고 있다. 아마 살
아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무공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친구들은 내 손으로 보내야만 한다. 안 그런가, 제갈 아우!"
앞에 서 있는 검은 인물을 쳐다보는 팽무도의 얼굴에 아픔이 서렸다. 자신
의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서 있는 강시는 제갈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재(武才)라 하였던 제갈용이었다. 제갈장령이 힘들 때면 언제나 찾아 불
렀던 인물인 제갈용. 백살대의 삼인자였던 그도 사혈마강시로 변해서 적의
주구가 되어 있었다.
"알고 있는가! 자네가 지시를 받고 있는 그놈들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는 걸……."
알 수가 없으리라.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제갈용은 아직 삼십 대의
젊은이다. 세월을 보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온통 먹통인 머릿속과 검게 변한 몸뚱이를 가지
고 원수의 지시를 이행하는 꼭두각시들인 것을……. 아버지에게 검을 받은
것도 모자라, 안식마저도 얻지 못하는 저주받은 인생인 것이다.
"미안하네, 용제! 자네 아버지도 우리가 해쳤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갈용의 아버지인 제갈장령은 백
산의 손에 죽었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그의 아들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과 마주 서 있다.
"잘 가게!"
팽무도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솟아나오며 무서운 속도로 세 구의 강시
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아앙!"
팽무도가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제갈용을 비롯한 세 구의 강시도 그를 향
해 몸을 날렸다.
"혈극폭!"
팽무도의 입에서 처절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손에 있던 도가 허공을 날았다
. 팽가의 최고 보물인 혼원벽력도가 팽무도의 염원을 실었다. 서럽고 더러
운 인생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염원. 혼원벽력도가 사방을 유영하며 강시
의 몸을 잘라가고 있다. 처음엔 앞으로 뻗어나온 팔을 자르고 그 다음엔 다
리를,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냄으로 해서 세 구의 강시를 전부 날려버렸다.
그러나 팽무도도 무사하지 못했다.
입가로 연신 피를 쏟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번 한 번에 모든 힘을 다 쏟
았다. 이제는 더 이상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진원지기까지 다 써야
함이나 마지막 일을 위해서 남겨두었다. 아니, 아이들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다. 한 가지 일을 더 하라며…….
"구두야, 저기 보이는 그늘에서 좀 쉬자."
"네, 어르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강구두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며 팽무도가 가리
킨 곳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커억!"
어른 몸통만 한 아름드리 거목이 잘려나가며 그곳으로부터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강시를 조종하던 인물이었다. 그곳에 숨어서 두 사람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던 자가 강구두의 마지막 일격에 몸이 잘리며 한순간에
이승을 떠나버린 거였다.
"우웩!"
"쿡쿡! 이젠 우리 둘 다 공평해졌구나. 아쉽지 않느냐."
"다시 뇌룡현 시절로 돌아간 것뿐이지 않습니까."
일 년간의 긴 꿈일 뿐이었다. 그 꿈속에서 많은 걸 해결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한을 품고도 살았는데 지금은 모두 풀지 않았는가. 비록 새로운 한
이 남아 있다지만 그건 다른 아이들에게 맡길 참이다. 자신들로서는 더 이
상 한을 풀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내공전패와 그리고 목숨.
팽무도와 강구두가 이곳 달탄에서 얻은 것이었다.
"어르신, 가시죠. 먼저 가서 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죠."
"그래, 그곳에서 기다려야지. 사 년 뒤를……. 그때 산이 녀석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산이 녀석도……."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함이고 아
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자 함이다.
* * *
팽무도와 강구두가 기다리고자 하는 백산 일행은 여전히 마차를 타고 있었
고, 계속해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말대로 정말 관을 짰던 나무가
썩었던지 뚜껑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투자를 하던 다섯 자리도 비어 있었다. 덕대 거치웅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 쌍칼 종천기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도치 양남천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칼날 도염천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송곳 추기영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새끼들 목욕 한 번도 안 했나보오, 형님! 냄새가 지독하오."
관 속에 수북하니 쌓여 있던 종이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모사가 백산을 쳐다
보며 소리를 질렀다. 관 속을 쳐다보며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소운의 품에
안겨 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백산을 보며 하는 소리였다.
지금은 백산도 나와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 아닌, 소운이 백산
을 꺼냈다. 의식이 없어도 눈을 뜨고 있으니 보라는 것이었다. 사랑했던 형
제들이 떠나는 장면을 쳐다봐야 한다고. 마지막 인사는 받아야 하지 않겠냐
고.
붉은 광망을 토해내는 두 눈과 말아 쥔 두 주먹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형
제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떠나간 형제들이 남긴 유품인 이름자 써진
종이들, 그 종이들을 그러쥔 모사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남겼다.
"그러게 알아먹지도 못하는 것들은 왜 봐, 새끼야."
광견조원들은 지금까지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처음 백산에게 듣고 석두
에게도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자기 이름 기억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다른
이들의 이름은 신경 쓰지 못했다. 여전히 검은 것은 글씨고 흰 것은 종이일
뿐.
"섯다 너 이름은 안다, 새끼야. 장대근이라며? 물건 큰놈에게 쓰는 이름."
그러나 이름만 알 뿐 써진 종이에서 골라내라 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개새끼."
"섯다야, 우리 글 배울까?"
"그것도 괜찮지. 여자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문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
다."
마차 밖을 흘끗 쳐다보던 섯다가 관 뚜껑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며 모사의
말을 받았다.
"걸어!"
통 속에 주사위를 넣어서 힘차게 돌리며 두 사람을 쳐다본다. 이제 투자를
할 사람은 전부 세 사람밖에 없다. 소살우, 섯다, 모사. 칠(七)의 행운을
거머쥘 사람을 뽑는 놀이.
"이번엔 내가 물주를 하마."
"무슨 소리요, 형님이 무슨 돈이 있다고."
지금껏 한쪽 구석에 있던 장한수가 앞으로 나서자 세 사람이 펄쩍 뛰었다.
"이것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의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며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옥팔
찌, 이십 년 전에 잃었다가 얼마 전 찾았던 사랑의 정표.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화옥에게 주었던 유일한 선물을 꺼내들었다. 그 옥팔찌로 노름 돈을
대신하려는 거였다.
"우리에겐 거슬러줄 만한 돈이 없소."
시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옥팔찌에 손때마저 덕지덕지 묻어서 원래의
색도 보이지 않는 팔찌에 대고, 남겨줄 돈이 없어서 못 끼워주겠단다.
"그 주머니 하나와 같은 값으로 치기로 하지."
전부 열세 개의 주머니. 광견조원들과 백산의 생명이 담긴 주머니들이었다
. 비록 독령곡에서 무인들에게 강탈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삶이, 그들의 꿈
이 들어 있는 주머니들이었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
한 물건인 것이다.
"어떻게 할래."
"하고 싶다는데 끼워주지, 뭐."
서로를 쳐다보며 의견을 나누던 세 사람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형님. 단 속임수 쓰기 없기요."
"고맙다. 나도 돈 좀 벌어볼까."
주사위가 들어 있는 통을 잡으며 장한수가 관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그리 아쉽지만은
않은 삶이다. 미치도록 사랑도 해보았고, 한때지만 이름도 얻었었다. 타락
도 해보았고 좌절도 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이들을 만나면서 더욱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이 이들
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 길었던 인생도
아니지만 이들이 살다간 삶보다는 길었고 행복한 삶이었다.
"들어봐라. 나도 얼마 살지 않았지만, 산다는 것은 말이다, 꿈을 이루는
게 아니고 꿈을 꾸는 거라 생각한다.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꿈을 이루어버린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성취
해버린 사람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꿈꿀 것이 있어야 하
고, 그 꿈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 꿈 때문에 울고 꿈 때문에 웃고, 꿈
때문에 기뻐하고 꿈 때문에 슬퍼하는 그런 것이 인생인 것이다.
"오늘 운수 대통했구나."
칠, 두 개의 주사위가 나타낸 숫자의 합이다. 그것도 가장 좋다는 일과 육
, 가장 낮은 숫자와 가장 높은 숫자가 나왔을 때의 칠이 최고의 패인 것이
다.
"여기 주머니는 살우 네가 가지고, 저곳에 있는 이름 적힌 종이는 섯다와
모사가 가져라."
장한수가 자신이 딴 주머니를 전부 소살우에게, 그리고 먼저 간 광견조원
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섯다와 모사에게 주었다.
"사 년 뒤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줘라. 중원 각처에."
"형님!"
소살우와 섯다가 장한수를 쳐다보았다. 절대 죽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살아서 형제들의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의무를 지
우고 있다.
"잠시 후에 흩어져라. 살우와 소운이는 백산을 데리고 대월산으로 가라."
일행은 어느새 대월산 언저리에 도착해 있었다. 뇌룡현으로 들어가기 위해
선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산. 떠날 땐 일 년이 걸렸는데 돌아올 땐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소운아."
"네, 아주버님."
소운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수 아주버님이다. 모든 대원들이
한 명씩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때마다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도 되었
건만 어디서 이 많은 게 다 나오는지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말이다, 모든 걸 주는 것이다. 저 녀석을 원망하
지 말아라. 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붉은 눈을 하고 세상을 떠
도느니 그 편이 더 나았을 거란 말이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왜 모르겠는가. 죽으려 했기에 자신 옆에 있는 것이다. 그가 만일 복수를
생각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붉은 눈과 붉은 비도를 휘두르며 피
를 찾아 세상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원치 않았기에, 언니들도
바라지 않았기에 깨어나지 않는 것이다. 깨어난다 해도 가족을 죽이고 형제
를 죽이고 자신을 해칠 것을 알기에 심연(深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 전부 사 년 뒤에나 보자구나."
"형님, 이거."
나가려는 장한수를 불러 세운 소살우가 품속에 있던 것을 내밀었다. 광천
뢰. 지금껏 모든 조원들이 하나씩 들고 나갔던 광천뢰를 장한수에게도 내밀
고 있었다.
"고맙다."
광천뢰를 받아든 장한수가 멀어지는 마차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부디 저
들만이라도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막아낸다. 저 녀석들을 살리기 위해 전부 막는다."
아직도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는 이백여 명의 무림인들을 쳐다보았다. 무엇
을 원하는 사람들인지, 무얼 바라는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죽여야 한다. 가능하다면 전부…….
온몸에 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젠 진원지기마저도 남길 필요가
없다. 전부 뽑아서, 전부 끌어올려서 써야 할 뿐이다.
'화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한수가 갈 것이오.'
"섬전쾌!"
이백여 명의 앞길을 막아선 장한수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담섬쾌영검
법의 일 초인 섬전쾌가 일 섬을 그리고, 이 초인 월광절이 달빛을 갈랐다.
삼 초인 일양파가 태양을 쪼개고, 사 초인 무변극애가 사방으로 퍼졌다. 숨
돌릴 틈도 없다. 네 개의 초식이 한 초식인 양,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앞에서 다가오던 적이 쓰러지고 그 뒤에 있는 자들이 잘린다. 다음에 있는
자들이 쪼개지고 그 다음에 있는 자들이 부서진다. 내 팔이 잘린 들 어떠
하리. 내 몸이 잘린들 어떠하리. 내 다리가 잘린들 어떠하리.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는 장한수의 얼굴에 환희의 격정이 어렸다. 강호상
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신가의 무공도, 고금오천무도 아니었다. 소중한 것
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누구 하나 전진하지 못했다. 등에 칼을 맞으
면서도 마차를 쫓아가려는 자를 죽이고 팔이 잘리면서도 먼저 가는 자를 베
어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섬전쾌에서 시작되어 무변극애로 끝나던 장한수의 연속동작이 어느 순간
삼 초인 일양파로 끝나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원광절까지만 이어지고 있었
다.
"섬전쾌! 섬전쾌!"
더 이상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반 시진이 조금 넘었다. 동생들보다 더
견딘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이미 녀석들도 갈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살우가 주었던 광천뢰를 가만히 잡았다. 적을 죽이라 준 게 아니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면, 버티기 힘들어지면 자폭하라고 준 것이었다.
"으! 하하하!"
미련도, 회한도 없는 통쾌한 웃음소리였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지도
못했고 위명도 남기지 못했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의 마지막 웃
음소리였다.
과앙!
장한수의 몸에 있던 광천뢰가 터지며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의 몸이 터져
올랐다. 아울러 그들이 갖고자 했던 영광도…….
"쫓아라!"
같이 왔던 동료들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아 있는 무림들은 자신들
만의 영광을 위해 또다시 몸을 날렸다. 이미 죽음이란 말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는지 자신의 몸에 묻어 있는 동료들의 살점을 그냥 가볍게 털어낸다.
마차를 따라 모든 무림인들이 떠나고, 대월산 한구석에서 두 사람이 몸을
드러냈다. 백산을 들쳐업고 있는 소살우와 소운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며 떠났던 뇌룡현. 한만 가지고 떠나자 했었는데
가져가지 못한 한이 남아 있었는지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열두 명의 광견
조원과 백산, 그리고 세 사람의 형수들이 함께 길을 올랐는데 셋 만이 남았
다.
마차를 끌고 운남의 밀림 속으로 향한 섯다와 모사, 그리고 이사의 생사는
사 년 뒤에나 알게 될 것이다.
사 년 뒤에나.
그전에는 누구도 찾지 않을 것이다. 사 년 뒤에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그
냥 죽으면 그뿐…….
"갑시다, 형수님."
다시 뇌산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사 년을 보내고 죽고 사는 것을 결정
해야 한다.
소살우와 백산, 그리고 소운이 과거 혈가의 후예가 잠들었던 용미폭포로
길을 잡을 때 그들의 사부이자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팽무도와 남궁세우는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태어났던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