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5/84)

5장 필사(必死)의 탈출(脫出)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맹주님!"

 일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제갈수연 앞에 나타났다. 분명 백산이란 놈이

무기를 던진 직후, 곧바로 그곳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혹여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그도 아니었다.

 "무슨 소린가, 그곳엔 아무도 없었는데……."

 일비를 향해 고함을 지른 제갈수연이 고개를 돌려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눈빛이었다. 이곳은 제갈세가 영역이다. 그녀

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 광혈지

옥비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백무천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젠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럼 왜 철목승이 오지 않았다는 걸 말하지 않는 거죠?"

 '헉!'

 백무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설마 그것마저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그가 알기로는 제갈수연이 철목승을 확인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또한 벽하곡 위에서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불가능한 거리였다. 자신마저

도 버러지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

녀가 알고 있었다 함은…….

 "일부러 그냥 둔 거예요."

 "그럼 담운천을 상대하기 위해서?"

 백무천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철목승

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담운천을 견제하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철목승, 아니 마신가의 후예가 살아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물

론 철목승을 견제하는 역할이야 자신들이 하게 될 터이지만 담운천으로부터

 그만큼 자유스러워진다는 의미가 된다. 더구나 광혈지옥비까지 원한다 함

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단지 몇 번의 만남과 신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절

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강호를 정복하지 못했던 담운천의 약점을 찾

아냈다.

 백무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늪 같은 여자였다. 무공의 고하(高下)

를 떠나 그녀의 늪에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그 늪에 빠져 있

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백무천 자신이었다.

 "전부 흩어져서 광혈지옥비를 찾아라."

 일비가 찾아보았다면 가능성이 없지만 혹여 하는 마음에 세가의 인원을 총

동원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

도 광혈지옥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란 말인가. 그자의 동료들이 나타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제갈수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이란 자의 동료

들이 나타나려면 아직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할 일을 누가 대신하고 말았군."

 그러나 광혈지옥비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없어졌음에도 제갈수연의 얼굴은

그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담운천을 견제할 또 하나의 장치가 바로

광혈지옥비였다. 그들이 광혈지옥비를 겁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절대적

으로 원하는 물건이었기에 더더욱 가져다줄 수가 없었다. 광혈지옥비 또한

철목승처럼 담운천을 묶어두는 역할을 위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적당한 기

회를 이용하여 광혈지옥비를 강호에 풀어버리려 했었는데 그녀보다 선수 친

 자가 생겼다.

 물론 원하는 대로 되었고 아주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바

가 아니었다. 시야를 벗어나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자신

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계획에 입각하여 하나씩 발생해야 하건만 이미 그전

에 광혈지옥비는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거였다.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또 그래야 하고."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세상을 거머쥐었다. 모든 사람들이 되고

자 하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강호무림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들

 때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즐길 참이다.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올라섰지 않았는가.

 "가요, 백랑!"

 "기다렸다가 버러지 놈의 동료들이 나타나면 쳐야 되지 않나?"

 빙긋 웃으며 몸을 돌리는 제갈수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백무천이 물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그 산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적이라도

줄여야 할 때다. 더구나 버러지 일행은 장차 가장 큰 적으로 등장할지도 모

르는 상황인데 태연하게 자리를 뜨는 제갈수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왕 제거를 했으면 뿌리까지 완전하게 뽑아내야 함이 무림의 생리가 아닌

가.

 "그들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에 써먹을 거예요. 백산이란 자의 시체, 아

니 살점 몇 개라도 찾을 시간을 준 후에."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닌가?"

 "백랑! 들어봐요. 조금 전 백산이란 자가 던진 광천뢰 보았죠?"

 "참! 그런데 무림인들은 왜 데리고 왔나."

 그 또한 백무천이 갖는 의문 중의 하나였다. 지금 상황에서 버러지 놈을

잡는 데에 무림인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제갈수연은 무림인들을

데리고 와서 버러지의 잔인성을 일부러 부각시켰다.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세력이 될 자들이에요."

 앞으로 생겨날 맹을 키우기 위한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

고 나면 천마맹이나 천무맹의 잔존세력은 얼마 남지 않는다. 담운천이 바라

는 일이기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껍데기밖에 없는, 말 그대로 빈집의 통합

맹주는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백산 일행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광풍대원들이 도망을 치도록

풀어준 후 추격대를 구성할 참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새로운 무리를 자연스럽게 강호상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 터이고, 그

들을 통합맹의 세력으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담운천의 세력을 반감시키는 역할도…….

 "버러지의 동료를 없애는 데에 혈맹을 쓰겠다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일단

전쟁을 끝내야 되지 않나."

 제갈수연의 포석은 대단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현재의 상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일단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

갈수연의 행동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미 끝났다고 보시면 돼요."

 백무천의 물음에 담담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제갈수연이 걸음을 옮겼다.

 힘찬 발걸음이었다. 강호무림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제갈수연의 발걸음은

그녀의 고향인 산동성 제갈세가의 본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갈수연의 말대로 팽무도와 광풍대원들은 다음 날 벽하곡에 나타났다. 그

들의 눈에 가장 먼저 발견된 광경은 폐허로 변해버린 벽하곡이었다.

 "만겁불회귀역입니다."

 제갈세가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비전이 만겁불회귀역과 천라만상대혼진이다

. 만겁불회귀역이 '기관'의 걸작이라면, 천라만상대혼진은 '진'의 걸작을

일컫는 말인 게다.

 "알고 있네. 만겁불회귀역이 저 정도로 무너질 정도면 녀석들이 잃어버린

광천뢰가 쓰였겠구먼."

 팽무도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조금씩 일렁였다. 분노했음이다. 한때는 형

제의 가문이었던 제갈세가가 아닌가.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이었기에 만겁불

회귀역에 대해 말도 들었고 그 위력도 알고 있다. 또한 결코 외부에서는 파

괴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그런데 아예 동굴이 없었던 것처럼 처참

하게 무너졌다 함은, 이들의 물건이었던 광천뢰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시신이라도 찾아보겠느냐, 아니면 바로 천무맹으로 가

겠느냐."

 광풍대원들에게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간다 했기에 데려왔고 원하

는 대로 해줄 참이었다. 자신의 입장이야 한 줌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백산의 시신을 찾고 싶었다. 하다못해 머리카락 하나라도 들고 천무맹을 향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이 자식을 죽게 만들고 말았다

. 그러나 아버지처럼 숨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복수를

시도할 것이다.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소살우가 굳은 표정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확인해야 한다. 광천뢰가 아니

라 그보다 더한 것이 터졌다 할지라도 찾아야 한다. 숨이 끊어졌는지, 아니

면 조각조각 부서져서 사라졌는지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전까지는 살

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찾아야 한다.

 툭! 툭! 툭!

 다시 광견조원들의 죽음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전부 열세 개의 주머니. 뱁새와 찍새는 갔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 있기

에 그들도 내기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가 더 늘었다. 바로 백

산의 주머니인 것이다.

 "명심해라. 가장 오래 버티는 놈이 전부 먹는 거다. 가장 많이 치우고 가

장 오래 버티는 놈이……."

 광견조원들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생겨났다. 이미 본인들의 것으로

만들었던 그 웃음이 양자강에서, 황산에서 보여주었던 미소로 또다시 바뀌

었다. 다시 웃옷을 벗어젖힌 광견조원들이 온몸에서 붉은 혈광을 흘려대며

동굴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너진 동굴의 잔해는 너무 많았다. 광견조원 열 명이 달려들고 그

들이 지치면 다른 조원들이 전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오래 버티는 놈이 다 먹는 거다!"

 소살우가 고함을 질러대며 눈앞에 있는 바위를 향해 자신의 도를 뿌렸다.

붉은 혈광이 어리고 바위가 잘리면 옆에 있던 섯다와 모사가 재빨리 밖으로

 던져낸다. 결코 쉴 수가 없다. 며칠이 걸리든 백산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

다.

 팽무도와 남궁세우도 광풍대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거푸 심검을 날

려대며 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했다.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저물고, 달이 떠올랐다 다시 지기를 몇십 번 반복하

며 오직 하루에 단 한 번의 운공만으로 체력을 보충하면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아직도 오십 장이 더 남았습니다."

 남궁세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개방 인물들에게 벽하

곡 외부 감시를 부탁해두었지만, 제갈세가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야 우리 차례가 아니겠나."

 팽무도의 얼굴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동굴 속에 묻혀버린 가족들의 시신을 찾을 시간이 없을까봐 그게 더 걱정되

는 것이었다.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전쟁이 끝

나면 어차피 강호공적으로 선포될 터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접니다."

 고개를 돌려 모사를 쳐다보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시선에 금의위 복장을

한 석숭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한창 바쁠 시기일 텐데."

 "전쟁이 끝났습니다. 천무맹의 승리로요."

 "무슨 소리인가, 벌써 전쟁이 끝나다니."

 "천마맹의 철마 지청인이 배신했습니다."

 백 년간 한솥밥을 먹던 동료의 배신으로 천마맹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석

숭이 부랴부랴 금의위와 군사들을 이끌고 벽하곡으로 온 이유였다. 비록 황

제의 귀환을 준비하느라 바쁘기는 하지만 강호의 일 또한 등한시할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황제를 변방으로 떠돌게 만든 자가 바로 검제 담운천이 아니던가. 앞으로

황제의 가장 큰 적은 담운천이 있는 무림이 될 것이기에 천무맹의 동향은

가장 큰 우환거리이자 관심사였던 것이다.

 "고맙네."

 "일단 백공자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지요."

 "자넨 살아 있을 거라 보는가."

 "천오백 년 전 세상을 멸망시킨 사람의 후옙니다. 이까짓 동굴로 어쩔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더구나 갈어르신까지 옆에 있었다면……. 저는 살아

 있다는 데 걸겠습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석숭의 얼굴에 확신이 서렸다. 막연히 이들을 안심시

키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백산 혼자였다면 몰라도 갈태독이라는

거물이 바로 옆에 있었다. 백산과 거의 동수를 이루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며 백산을 보호하려 했다면 가능성이 더욱 커진

다는 것이다.

 "분명합니다. 죽지는 않았을 겝니다."

*     *     *

 "파멸안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백산의 생존을 예측하는 사람은 석숭 말고 또 있었다.

 천무맹의 장생원. 검제 담운천도 백산의 죽음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광혈지옥비를 제거했다고는 하여도 비도를 이용하여

 받아들인 기운을 전부 쓰지 않았다면 몸이 스스로 방어를 했을 터이고 더

구나 마신가의 후예인 철목승까지……. 파멸안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부상을 당했을지언정 완전하게 죽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천뢰가 오십 개입니다. 그 속에서는 신이라 해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외벽은 만년한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갈수연의 생각은 담운천과 달랐다. 비록 외벽만 만년한철로 쌓여

 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다. 밖으로 터져나가야 할 충격을 일시적이나마

막아버리기에 거의 모든 폭발력이 중심으로 쏠리게 된다. 한순간이지만 인

간의 신체 정도는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철목승이 없었습니다. 철목승을 가장한 갈태독만 있었을

 뿐."

 다시 한 번의 승부수.

 마신가의 후예를 잡지 못했다고 하면 담운천은 분노할 게 분명하다. 그럼

에도 말을 해야 했다. 철목승이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아니면 알릴 시

간도 없을 뿐더러 나중엔 밝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담운천을 묶기 위한 그녀의 술수인 것이다.

 "감히 나를 기만했더란 말이냐?"

 담운천의 몸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기운이 제갈수연의 전신으로 몰아쳤다.

자칭 신이라는 그가 철목승의 생존소식에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만큼 마신가라는 신가가 주는 부담이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

간이었다.

 "크읍! 금의위가…… 오고 있었기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비명을 토해내면서도 한 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준

비해둔 대답이었기에……. 또한 담운천의 입장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는 있

어도 해치진 못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광혈지옥비도 회수 못하고 철목승도 잡지 못했다는 말이구나."

 "회수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담운천의 얼굴처럼 제갈수연의 표정도 담담하게 변했다. 아니, 담운천을

대하는 어투가 조금 전보다 더 당당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도권을 잡았다는 자신감이었다. 자신 아니면 광혈지옥비가 되었든 철목

승이 되었든, 상대할 수 없다는 확신.

 "그럼 금군이 없다면 광혈지옥비를 바로 가져올 수 있겠구나."

 "무슨 수로…… 설마 그들을 치려는 건……."

 제갈수연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운천을 쳐다보았다. 황실을 상대

로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다. 아무리 자신들을 신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지만

 너무 무모한 사람이 아닌가. 이까짓 무림을 정복했다고 명(明)이라는 대제

국을 우습게보고 있다. 비록 그들이 일반 무인들에 비해서 약하다고는 하지

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들의 인원수가 삼백만이

넘는다. 또한 그들의 무기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접근전에 유리하다 해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건 결코 아닌 것이다.

 수많은 화포와 포탄 등 화약을 이용하는 무기가 널린 곳이 바로 제국의 군

대이다. 사정거리가 삼 리에 가까운 무기들까지……. 무림을 정복했던 많은

 세력들이 황실을 넘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자는 너무 쉽게 황실 정복을 말하고 있다.

 "너 따위가 나를 판단하려느냐?"

 수그러졌던 담운천의 기세가 다시 삼엄해지며 제갈수연을 핍박하기 시작했

다. 자존심이 상했음이다.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가 자신을 훈계하는 듯한

언행이 귀에 거슬렸다는 의미이리라.

 "잘못했습니다, 천주님."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한발 물러났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자와 두뇌

싸움을 할 때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 상대방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더구나 담운천은 본인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유형의 사람이 가장 못 견뎌하는 게 타인과 비교해서 저울질당하는 것이다.

 제갈수연이 재빠르게 굽히고 들어간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광혈지옥비를 찾게 되면 그들이 갈 곳은 감숙성 한 곳밖에 없습니다."

 "감숙성에서 한꺼번에 처리하자……."

 "그렇습니다, 천주님."

 "좋다, 그건 너의 재량에 맡기도록 하마. 금군이 물러가면 바로 시행하도

록 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나려는 제갈수연을 불러 세운 담운천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의 본분을 잊지 마라. 나의 종들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

 "알겠습니다, 천주님."

 담운천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조아린 제갈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굴욕감. 과거의 기억이 다시 살아났음이다. 구파일방에서 받았던 그 치욕

이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은 제갈세가라는 가문이 무서워서, 세력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무시를 했지만 담운천은 아니다. 아예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고 있다

. 단지 자신을 위해 일을 해주는 노예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라, 담운천! 반드시 네놈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

 천무맹의 맹주가 되었기에 어느 정도 야망을 이룬 것이라 생각했다. 가문

의 숙원과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그 위에는 과거보다

더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다. 돌아가고자, 넘지 않고 우회하고자 했었는데,

 그 길이 너무 멀고 험한 길이었다. 살아생전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장담

을 하지 못할 정도로 먼 길.

 결국 짓밟고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 산 뒤에는 또 무엇이 있을지, 지

금은 알 수 없지만 우선 바로 앞에 있는 산에 길을 뚫어야 함이다. 그 길을

 만들기 위해선 다시 침묵하고 기다려야 한다.

 "왜 일이 잘 안 풀리나?"

 얼굴이 붉어진 채 천무전으로 돌아온 제갈수연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

다보며 백무천이 나지막이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요구대로 모든 전달사항이

 남진룡에 의해 처리되고 있는데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독대를 청한 행위

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아직 담운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결코

상식이 통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의도대로 모든 게 이루

어져야 만족해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던가.

 "아이! 백랑까지 왜 이러세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해 죽겠는데."

 백무천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금세 표정을 바꾸며 환한 미소로 그에

게 매달리고 있다. 이래서 여자란 요물이란 말이 나왔는지도. 그런 제갈수

연의 모습에 백무천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은 세월을 그녀와 같이

했지만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제갈수연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백랑이 해줄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미천한 소생에게 부탁을 하는 거요?"

 "놀리지 마시고요. 공적선포 준비를 해주세요, 그들에 대해서요."

 "남궁세가와 팽가도 같이?"

 "너무 급하면 안 된다 했잖아요."

 백무천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

을 벌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강호로 나갔을 때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야 하는 거예요."

 일단 벽하곡에 있는 광풍대원 일행을 먼저 공적으로 만들어두고 강호무림

인들이 추격하는 사이에 남궁세가와 팽가를 그들의 배후로 지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추격대는 가장 약한 자들로 구성해야 돼요. 인원은 많을수록 좋구

요."

 "담운천의 세력마저 줄여보겠다, 이건가?"

 백무천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어렸다. 단순한 일임에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자신에게 뭔가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나가는

그녀의 머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들임에도 마치

그녀가 꾸민 일처럼 보이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지…….

 "보면 볼수록 당신은 무서운 여자야. 알겠습니다, 맹주님. 바로 준비해 올

리겠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섭니다.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고요.'

 백무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적

이 아닌 내부의 적, 즉 담운천과의 싸움인 것이다. 아주 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통합 맹주라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양맹의 인원은 거의 사라졌고, 이제 기댈 곳은 공적들을 추격하는 과정에

서 새로운 영웅들을 영입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아울러 담운천의 혈맹세

력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일까지.

 '담운천, 똑같은 조건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대와 나, 서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단은 묵안혈마 일당을 추격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당신의 세력을 줄이는 작업은…….'

*     *     *

 "어찌하면 좋겠나. 산이가 살아 있다면."

 천무맹에서는 야망을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이용

하고 있는 제갈수연이 있었고, 그 제갈수연의 본가가 있던 벽하곡에서는 살

아남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팽무도와 남궁

세우, 그리고 석숭이 백산의 생존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감숙성으로 아니면 황제폐하가 오시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석숭의 말이었다. 지금 강호에서 천무맹에 대항할 수 있는 무림단체는 철

목승이 있는 천마맹밖에 없고 나머지는 황제가 있는 곳이다. 결국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감숙성이라 해서 안전한 곳이 아니질 않는가."

 감숙성이란 말에 남궁세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철목승이 버티고 있

는 곳이라 하지만, 천무맹이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일 것이다.

 "맞습니다. 천무맹에서도 그걸 노리고 있겠지요. 결국 갈 곳은 황상이 있

는 곳, 한 곳밖에 없습니다."

 원래부터 석숭이 원하던 바였다. 황제가 돌아오면 곧바로 천신가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광풍대원 전원이 금의위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다. 어쩌면 광풍대원을 포함한 금의위 힘만으로 천신

가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십 리 정도 가면

 그곳에 있습니다."

 금의위로 하여금 이들을 호위하면서 움직일 작정이었다. 일부는 황상을 마

중 나가고, 나머지는 북경에서 황제를 맞을 준비를 위해 남아야 한다.

 "고맙네, 신세만……. 저기 전령 아닌가?"

 석숭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운 표정을 짓던 남궁세우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물을 가리켰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하얀 거품을 가득 머금은 말

과 잔뜩 굳은 표정으로 정신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군관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석숭이 급히 군관이 오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급할 일이 전혀 없는 황실이 아니던가. 황제의 평생 숙원이던 옥새

도 찾았고, 또한 원의 잔당도 거의 퇴치하여 더 이상 문제가 될 소지가 전

혀 없는 황실이 되었다.

 "영반, 급보입니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쓰러진 말을 박차 오른 군관이 석숭 앞에 내려서며

 첩지를 내밀었다.

 "이럴 수가……."

 첩지를 펴든 석숭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

다.

 "폐하!"

 황제가 있다는 달탄 쪽을 향해 절을 하는 석숭에게서 통곡소리가 흘러나왔

다.

 영락제 붕어.

 군관이 가지고 온 첩지의 내용이었다.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면서까지 황권에 욕심을 보였고, 수차례에 걸친

친정으로 새롭게 태동한 명나라의 반석을 굳건하게 하였던 정복황제인 그가

, 다섯 번째 친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달탄 서북의 유목천이란 곳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진정 보위에서 당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이

럴 수가 있사옵니까."

 석숭의 통곡소리가 벽하곡에 메아리쳐 울렸다. 옥새를 찾았기에 더 이상

친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원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는데, 끝내 돌아오

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

 "금의위는 들으라! 전력을 다해 황궁으로 돌아가서 모든 업무를 비상체제

로 돌리고 태자전하를 보호하라! 서둘러라!"

 금의위를 향해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 석숭이, 하남성이 있는 쪽을 향해 이

를 부득부득 갈며 살기를 쏟아냈다.

 "담운천, 이놈!"

 이건 분명 놈들의 짓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순간에 황제폐하를 시해

하여 다시 정국을 혼란으로 만들어가려는 의미인 것이다. 이미 무림은 평정

했다고 생각한 그가 드디어 황실로 손을 뻗친 것이다.

 "대체 이게……."

 남궁세우와 팽무도가 얼이 빠진 얼굴로 석숭을 쳐다보았다. 황제가, 대명

제국의 천자가 시해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는 말이 아닌가. 일개 무림문

파의 문주가 살해되어도 온 무림이 떠들썩하니 난리가 나는데, 이 나라의

주인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석숭의 표정으로 보건대 그 또한 천무맹

에 있는 담운천의 짓으로 보고 있다.

 만일 영락제의 피살이, 천무맹이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면 무림은 바로 끝

장이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무림이 도륙되는 일이 발생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더 이상 도와드릴 수 없겠습니다."

 "아니네, 석대인. 어서 가보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어쩌면 저희를 이곳에서 떼어놓기 위해 저지른 일

인지도 모르니까요."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신가나 저의 천가인들에게는 황제보다 더 공포의 대상

이 파멸안입니다. 결코 재림해서는 안 될 존재인 게지요."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별반 피해도 업었던 구룡천가에서마저

파멸안의 재림을 경계하고 살아왔는데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신가들은 더

욱 심했을 것이다. 지금껏 황제의 측근에 암살자를 배치해두고 이제 와서

일을 저지른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무림을 정복한 현 상황이

담운천에게 최대의 기회라 할 수 있겠지만, 아직 무림이 정리되지 않은 상

태에서 일을 벌인 게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행운을……."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백산이고

또 그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북경의 일이 먼저였다. 북경이 제대로 서지 못

하면 신가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목례를 한 석숭이 몸을 날려 멀어져갔다.

 "서둘러라, 백산이 살아 있다. 백산 때문에 놈들이 몰려온다."

 석숭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팽무도가 광풍대원들을 독려하는 고함을 내질렀

다. 믿어야 한다. 적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가족 되는 자들이

죽었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함이다.

 "이제 십 장만 더 가면 된다."

 "사부님, 적입니다.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빌어먹을 십 장, 십 장 남았는데."

 남궁세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들이 있는 위치 때문이었다. 동

굴 속에 있는 자신들이고 벌써 이십여 일간의 작업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인데 적까지 들이닥치면 방법이 없다.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가."

 백산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천무맹으로 달려가려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살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자식의 상

태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더욱 가슴이 저며왔다.

 "어쩔 수 없지……."

 포기하는 심정으로 밖으로 나가던 남궁세우의 귓전에 기적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입니다. 형님이 여기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맥이 뛰고 있다고요.

"

 소살우의 희열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직 십여 장 정도가 남았는데

백산의 동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온몸에 화상자국이 가득했지만 죽은 게 아

니었다. 미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더 이상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석숭이 준비해둔 마차를 타고 서둘러

 감숙성으로 가야 한다.

 "서북쪽으로 가면 마차가 있다, 서둘러라."

 남궁세우의 외침과 함께 모든 대원들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백산의 시

체밖에 찾지 못했지만 방법이 없다.

 "어떤가, 아우."

 혹여 백산이 걸어서 그곳까지 오지 않았을까 해서 묻는 말이었다. 혼자 힘

으로 걸어왔다면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폭발 때문에 날린 겁니다."

 그러나 남궁세우의 입에선 팽무도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단순한 폭발의 충격으로 날렸다는 것이다.

 남궁세우의 생각이 맞았다. 폭발의 순간에 갈태독의 무공과 미처 배출되지

 못하고 백산의 몸속에 남아 있던 광혈지옥비의 기운이 동시에 몸을 보호했

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기운이 동시에 백산을 보호했지만 완전할 수가 없었

다. 몸의 외부만 보호했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어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사부님, 형님에게 비도가 없습니다."

 "뭐라고?"

 팽무도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천목환이 없다면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몸을 치료할 기운을 끌어들이는 게 비도인데 그게 없다는 말

이 아닌가. 더구나 천목환은 백산의 생명이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할지

라도 천목환을 풀어내면 죽는다 하였다.

 '하늘이 백산을 버리는 것인가.'

 어떠한 내기(內氣)도 받아들일 수 없는 백산의 몸이다. 그의 몸을 치료하

기 위해서는 내공을 몸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간다.'

 "서둘러라!"

 미리부터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가는 데까지 가봐야 한

다. 며느리 둘이 죽고 손녀딸이 죽고 아버지 같았던 갈태독이 죽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무에 있으랴. 다섯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한

광풍대원들이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고 출발했다.

 "이럇! 이럇!"

 두두두두! 두두두두!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다섯 대의 마차가 무섭게 질주해나가기 시작했다.

 "산아! 정신 차리거라!"

 팽무도가 백산의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 내기를 주입해보

려 했으나 한 치도 스며들지 못했다. 백산의 몸은 처참했다. 사지는 멀쩡하

게 붙어 있지만 온몸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기에 의해 부풀어

올랐던 물집이 터지며 진물이 흘러나오고, 그 자리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과거 초리하에서 백무천의 공격을 받았던 조천영과 같은 증상이었다. 폭발

에 의해 생긴 열기가 몸속으로 침투하여 빠져나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 눈을 감지, 왜 눈을 뜨고 있어요."

 소운이 눈물을 흘리며 백산의 머리를 껴안았다. 전부 타버리고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았다. 아니, 머리마저도 진물이 흘러내려 사람의 머리인가 싶

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자신과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끝까지 눈을 뜨고 쳐다보라 하였는데 언니들

의 죽음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엄청난 화마가 몰려왔을 터인데 눈을 감지

않고 그녀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붉게 변한 눈, 광혈지

안이 발휘된 눈빛인데도 그는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있더라도 일어나서 움직일 것이지…….

 사라랑! 사라랑!

 "이 바보야……. 일어나란 말이야, 언니들의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일어나지 못해!"

 처절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불끈 쥐고 있는 백산의 양손에서 들려오는

 애명환 소리. 마지막 순간에 그녀들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같이하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저 펴지지 않는 그의 두 손에

 언니들의 마지막 흔적이 있을 것이다. 두 언니의 마지막 흔적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소운아……."

 남궁세우가 소운을 불렀다. 그녀의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남편의 생환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지만 두 언니와 소령이 죽었다. 그리고 사부였던 갈태

독도……. 어쩌면 이미 저승으로 간 언니들보다 더 힘든 사람이 소운인 것

이다.

 "사부님!"

 백산을 관에 넣기 위해 뚜껑을 열던 소살우가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들었

다. 금의위들이 입는 황색의 옷이었다. 석숭이 준비한 것이었다.

 "아우!"

 팽무도가 난감한 표정으로 남궁세우를 쳐다보았다. 석숭과 같이 장성 밖으

로 황제를 마중 나가기 위해서라면 금의위 복장이 필요했을 터이지만 지금

은 아니다. 오직 광풍대원들만 있지 않은가. 더구나 황제까지 시해당한 현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한 물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린가."

 "석대인에게 시간을 벌어주어야겠지요. 우리야 어차피 쫓기는 입장이니…

…."

 본의 아니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지금 석숭으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 담운천일 것이다. 그런데 광풍대원들이 움직임으

로 해서 담운천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릴 터이고, 그 사이에 석숭은 황실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처음 석숭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리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서 백산은 물론이고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그

런 상황이…….

 "전부 옷을 갈아입어라."

 "어르신, 제가 산이의 몸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오구의 말에 팽무도가 반색을 했다. 일행 중 유일하게 백산과 같은 내공심

법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오구 아닌가.

 "산이의 몸속에 있는 화기(火氣)를 뽑아내야 해."

 팽무도의 말을 듣고 있던 오구가 자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백산의 명문혈을

 통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제발 들어가라, 제발……. 성공이닷!'

 오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잠시 자신의 기운을 막아서는 것 같던 기

운이 어느 순간 사그라졌던 것이다.

 "허억!"

 그러나 희열의 표정도 잠시, 백산의 몸속을 관찰하던 오구가 격렬한 신음

을 토해냈다. 백산의 몸으로부터 엄청난 열기가 자신의 장심을 타고 들어오

는 것이 아닌가. 나갈 곳을 찾지 못해 백산의 피부를 뚫고 조금씩 새어나가

던 기운이 오구의 내공에 의해 외부의 길이 생기자 그곳을 향해 무서운 속

도로 움직였던 것이다.

 "내기를 밖으로 내보내라. 그러다간 네 몸이 견디질 못한다."

 팽무도의 외침에 정신을 가다듬은 오구가 모든 혈도를 열어 몸 안에 들어

찼던 열기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차 안이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어찌

 인간의 몸에서 저런 열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뜨거움이었다. 단

지 열기가 빠져나가는 통로만 제공하고 있는 오구의 몸에서도 물집이 생겨

나고 있었다.

 "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긴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나는 오구의 얼굴에

물기가 비쳤다.

 '이 녀석아, 그 몸을 해 가지고 죽질 못하고 있더냐.'

 의원이 아니라서 자세한 상태는 알지 못하지만 백산의 몸속에 있는 열기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

는 자신조차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 아닌가. 그런 몸을 가지고도 녀석은 죽

지 않았다. 아니, 죽질 못하고 있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백산의 죽음을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사부님, 여기 약과 이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건…… 회혼속명단(回魂速命丹)? 고맙네, 석대인."

 비단으로 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환약을 보며 남궁세우가 감격의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백산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한 알만

 복용해도 십여 일을 견딜 수 있다는 약이 바로 회혼속명단이다. 주로 의식

을 잃고 스스로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복용시키는 환단으로, 황

실 같은 곳이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는 귀중한 약이었다.

 황실에서도 황제나 태자 등 황족만 복용하는 희귀한 약일진대 주머니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은 황궁에 있는 약을 전부 보냈다는 의미이리라. 지금 가지

고 있는 분량이면 적어도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분량이 아닌가. 그리고 금

의위 영반임을 증명하는 영패. 자신의 모든 것을 마차에 두고 갔던 것이다.

 "소운아."

 남궁세우가 주머니를 소운에게 내밀었다. 원래는 물에 녹여 먹여야 하지만

 지금 이곳은 흔들리는 마차 안이기에 소운이 해야 했다. 남궁세우에게서

약주머니를 받아든 소운이 그중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고 잘게 부쉈다.

 '백랑!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부어터져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님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자신의

타액과 섞여 있는 그것을 조금씩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까칠해진 님의 입

 안을 자신의 타액으로 적셔야만 한다. 눈물이 얼굴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님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오직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분노한 붉은 눈

동자만이 마차의 천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부님, 왔습니다."

 추격자들이었다. 아직 산동성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벌써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얼마나 되느냐."

 "백여 명 정도입니다."

 일휘의 보고에 팽무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격자들의 수가 너무 적었던

 까닭이었다. 결코 광풍대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쪽의 무

위를 모르는 자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초리하에서 살아간 무

림인들은 대부분 광풍대원들의 무공 정도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백무천은

한 팔이 잘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역시 제갈세가답군요."

 "무슨 말인가."

 "우리를 강호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지요."

 남궁세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광풍대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자들을 선발해서 보냈을 것이다. 적은 인원을 보내서 그들이 살

해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물론 소문을 낼 인원까지 전부 준비해서 보냈

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빌미로 광풍대원들을 공적화하려는 수가 빤히 들

여다보였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한밤중. 광풍대원들의 살행이 살

아남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줄 강호인들이 없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공연히 강호인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악인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공적이지 않나. 일휘야, 전부 죽여라!"

 살기 띤 얼굴의 팽무도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고 기회가 있을 때 쫓는 자의 숫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제갈세가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이상, 변명도 항변도 통하지 않는 세상인 게다. 과거의 백살대처럼…

….

 "저기 보이는 역(驛)에서 말이나 바꾸세."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사두마차였지만 말들이 점점 지쳐가고 있는지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석숭이 주고 간 금의위 영반의 명패로 말

을 바꾸는 작업이 한창일 때, 일휘와 광풍대원은 무서운 속도로 뒤쪽을 향

해 몸을 날렸다.

 "이야압!"

 백여 명의 인물을 향해 몸을 날린 광풍대원들에게서 차가운 고함소리가 터

져나오며 사방으로 붉은 기운이 휩쓸었다. 걸릴 게 없었다. 순식간에 천무

맹 인물들이 차디찬 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이거 너무 약하잖아."

 의아한 얼굴의 일휘가 석두를 쳐다보았다. 일도(一刀)도 받아내지 못하는

자들이 추격대로 왔다는 게 이상했다. 이 정도의 자들이라면 굳이 도망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신경 쓰지 마, 가자!"

 석두도 천무맹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모두

들 지쳐 있는데 약한 자들이 옴으로 해서 몸을 회복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공적이야 되겠지만 모든 전력을 비축하고 있으면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천무맹과 천마맹을 겪어보았다. 그들은 결코 광풍대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광풍대원들이 얼마나 체력을

회복하느냐 하는 게 관건일 뿐이었다.

 "출발하자, 이랴!"

 말을 전부 교체한 마차가 다시 전방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대여섯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간단하게 처리했다. 결코

 광풍대원들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인물들은 없었다. 다만 황색이었던 옷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광풍대원들의 피해는 전무했다.

 "누구지?"

 마차를 몰던 남궁세우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관도 위에 있는

한 인물을 보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가고 있는 마차의 중앙에서 이쪽을 쳐

다보고 있었다.

 "설마…… 네놈은?"

 상대를 확인한 남궁세우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며 온몸에서 살기를 흘려대

기 시작했다. 마차가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굴, 잿빛 가사장삼을

 걸치고 있는 요몽이었다. 오늘의 모든 사건의 원흉인 요몽이 무릎을 꿇고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얼굴로 네놈이 나타났단 말이냐. 그 어린것을 죽이고 네놈에게 가장

 잘해주었던 그 애들까지 죽이고 무슨 낯으로 우리를 찾았더란 말이냐."

 남궁세우에게서 엄청난 고함이 터져나왔다. 저놈 때문에, 소림의 승려라는

 저놈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꿈이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그랬던 놈이 이

제는 무릎을 꿇고 자신들 앞에 있다. 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미…….

크흐흐흑!"

 일행을 쳐다보던 요몽이 오열을 토해냈다. 자신이 몸을 던져 구했던 소령

이었다. 비록 정신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하지만 거의 죽었다 살아났었다

. 그 때문에 정신을 차렸는데, 그 소령이가 자신의 품에서 숨져 있었다. 연

약한 아이를 추위 속에 방치한 채 몸을 날렸기에 동사해버렸던 것이다.

 모두 그자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되는 그 사람. 완전하게 풀려났

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풀어준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들을 노

리기 위해서 풀어준 척했을 뿐이었다.

 "어이하여…… 어이하여 이런 비극이……."

 요몽의 말을 듣고 있던 남궁세우가 한탄을 했다. 자신들보다 더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 요몽 스님이었다. 평생을 아버지란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 못하는 도구. 차라리 죽는 삶이 더 편할진대, 아버지의 옆에 있으면 죽

을 자유조차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그였다. 무엇을 위해 얼마나 더 영광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전해주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아니, 천목환?"

 놀랍게도 벽하곡에서 백산이 던져버린 천목환을 가지고 사라졌던 사람이

요몽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인 각인대사와 담운천이 절실

하게 원하는 물건임을 알았고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악마 같은 두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란 생

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갈수연의 뒤를 따랐다. 우연이었는지 모르지만 백산이 던진 그것

들이 자신의 앞에 떨어졌고 곧바로 주워들고 몸을 날렸다. 제갈수연이 천목

환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출발한다!"

 요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궁세우에게서 출발명령이 떨어졌다. 요몽도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를 죽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었다. 그도 한

으로만 뭉쳐진 사람인걸. 단지 인간의 야망이 만들어낸 희생자.

 "왜 그냥 가시오니까!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를 벌하란 말입니다!"

 떠나가는 마차를 향해 울부짖었으나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저들의

손에 죽어서 터질 듯한 분노를 조금이라도 삭이길 바랐으나 오히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

 "어쩌라고……. 날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꿈이길…….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멀어지는 마차는 너

무 선명하게 눈에 밟혔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비극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부디 부처님의 가호가…… 크윽!"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일행을 향해 합장을 해 보인 요몽이 자신의 뒷머리

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헤헤헤! 소령아, 나랑 같이 극락으로 가자. 소령아…… 소령아……."

 자신의 뇌해혈을 완전하게 파괴하여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게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완전한 백치 상태로 돌아갔지만 단 한

마디는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령이의 극락왕생.

 어두운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이었고, 과거의 행복을 다시 되찾는 방법이

었다.

 한편.

 요몽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것을 알지 못하는 팽무도 일행은 백산에게 천

목환을 채우고 그에게서 나타날 변화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비가 붉

게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놈아! 안 깨어나는 거냐, 못 깨어나는 거냐."

 팽무도가 백산의 가슴을 쳐대며 소리를 질렀다. 붉은 비도와 붉은 눈. 이

미 백산의 상태는 광혈지안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천비가 피를 먹어야만 살

아갈 수 있는 마물(魔物)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없애버려도 좋으니 깨어나란 말이다."

 "깨어나지 않는 거예요. 스스로 의식을 닫아버렸어요."

 소운이 흐느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백산의 몸 상태는 조금씩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곳, 그의 머릿속만은 죽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막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알 순 없지만 갈태독의 말에 의하면 가능하다 하였다. 무공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깨어나지도 못한다. 단 한 가지,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는데 그 계기가 문제였다.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지금의 백산인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놈이 누구를 지킨단 말이냐. 그

깟 광혈지안이 뭐라고. 내 피라도 줄 테니 깨어나란 말이다."

 "형님!"

 백산의 팔목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천비를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찔러가는 팽

무도의 행동을 말리며 남궁세우가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야 합니다. 산이가 자신을 이기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하지만 저 많은 놈들을 전부 어쩌란 말인가."

 "와! 와아! 묵안혈마를 잡아라! 백살마대의 후예들이다!"

 팽무도가 가리키는 곳에는 어느새 저리도 많아졌는지 수백의 무인들이 마

차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에선 한결같이 진득할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백의 죄 없는 무림인들을 살해한 묵안혈마 일당. 더욱 경악할 사실은 과

거 오십 년 전의 강호제일 공적이었던 백살마대의 대주와 부대주의 제자들

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제거되었다 여겼던 그들이 지금껏 살아 있었고 강호

에 복수하기 위해 제자를 키웠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중원전역으로 퍼져나갔

다. 더구나 벌써 수백 명의 무인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어나가지 않았

던가.

 "이미 공적으로 선포된 게지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별반 새로울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공적선포만이 아니었다. 묵안혈마 일당을 잡는 무림인에게는 새로이

 창설되는 제천맹(諸天盟)이란 단체의 중요자리가 보장된다는 공표가 있었

던 것이다.

 제천맹.

 천무맹과 천마맹 양맹의 잔여인원을 합쳐서 새롭게 탄생한 단체로 맹주로

는 제천신뇌 제갈수연이, 부맹주로는 정천무룡 백무천과 철마 지청인이 등

극함으로써 새로운 무림질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창설된 단체라

많은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묵안혈마 일당을 잡는 자로 국한시켜 인재

를 선발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공적으로 선포된 자들이 황실의 금의위를 사

칭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완전한 표적이 되어버렸다.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명나라 황실

은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 때문에 민생치안에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중앙

 관리들과 각성에 있는 벼슬아치들 또한 다음 대의 황제가 누구일 것인가에

 대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터라 수백의 무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다

니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랑캐의 침입만 아니라면

무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으악! 커억!"

 발 빠른 자들은 벌써 마차 근처까지 추격해왔는지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

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시작하세."

 팽무도와 남궁세우도 자신들의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까지 계속해

야 할지 기약할 수 없지만 끝까지 가야만 한다. 마차를 몰고 있는 네 사람

을 제외하곤 광풍대원을 비롯한 무욕인들까지 전부 나서서 마차를 향해 달

려드는 적을 향해 도검을 휘둘렀다. 이미 피에 젖어 있던 금의가 다시 붉게

 물들었고,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핏물이 마차 바닥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크아앙!"

 "으아악! 적이다!"

 마차 부근에서 한참 혈전을 벌이고 있던 그들의 귓가에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들려오며 쫓아오던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광풍대원들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목격되었다. 다섯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괴인들이 마차를 향해 다가오면서 앞을 가로막는 무

림인들을 무차별하게 격살해버리는 것이었다.

 "형님!"

 "그들이구먼……."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과거 자신들을 대주와 부

대주라 불렀던 부하들,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강시로 변해서 마차를 쫓아오

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시들의 출현으로 해서 뒤쫓던 무림인들이

 한순간 주춤하며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오백 장 근처에서

달려오던 무림인들의 모습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세! 우리의 형제들인데 직접 해결해야지. 계속 가거라. 뒤쫓아가마."

 광풍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저

들인데, 이번에는 대주와 부대주로 모시던 사람에 의해 다시 한 번 죽어야

한다. 무슨 운명을 타고났기에,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리 되었

는지……. 그저 한스러울 뿐이었다.

 "너희들은?"

 "빨리 끝내고 가야지요."

 의아한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팽무도를 향해 장한수와 일휘, 그리고

석두가 다가왔다. 팽무도나 남궁세우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기에 나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하고

 떠나야 하기에.

 "좋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치고 간다. 일단 약점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

 "크아앙!"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오는 다섯 마리의 사혈마강시를 향해 동시에 뛰어들

었다.

 "혈극참!"

 "섬전쾌!"

 다섯 사람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지며 붉은 기운이 전방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나.

 카앙! 캉!

 풍신개의 정보가 전혀 틀린 게 없었다. 검강, 도강을 이용한 공격이었음에

도 강시들의 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단지 그들의 옷자락만 찢겨져 허공

에 날릴 뿐이었다.

 강시들의 약점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공격을 해보지만 검강지기에 의해

서는 결코 잘리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자들이 가장 약한

자들일 터인데, 이들의 약점조차 알아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최선을 다했다.

 "커엉!"

 이성이란 게 없는 강시들임에도 도강과 검강에 의해 충격을 받았는지 괴이

한 고함을 지르며 일행을 향해 돌진해들었다. 그러나 무작정 다가서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무공을 그대로 구사하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금강불괴의 몸을 가진 절정고수라 할 수 있었다. 몸놀림도 지극히 자연스

러웠다. 사혈마강시의 무서움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야합!

 일휘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나오고 붉은 혈운에 감싸인 그의 몸이 움

직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검을 피하고 더 가까이 근접하여 강기에 휩싸인

 발과 주먹을 강시의 온몸에다 박아 넣었다. 혈도부터 시작하여 온몸 구석

구석에 강기가 실린 주먹을 먹였으나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듯 보

였다. 오히려 더욱 포악하게 달려들 뿐이었다.

 "좋다, 탄(彈)에도 견디나 보자."

 표정을 굳힌 일휘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검을 피하며 위에서 아래로 힘

차게 도를 휘둘렀다.

 "카아악!"

 "빌어먹을……."

 일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도강보다 한 단계 높은 탄의 경지

에 의해 잘리기는 했지만 그 반탄력이 엄청났던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이야 쉽게 잘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나머지 광풍대원들에게는 큰 문제

가 아닐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이런 강시의 공격까지 받

게 되면 버텨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더구나 이런 자들이 팔십 명이

라 하였다. 광풍대원들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들이 아닌가.

 "이 괴물 같은 것들이."

 순간적으로 화가 난 일휘가 강시의 몸을 향해 도를 날려버렸다.

 "가자!"

 팽무도나 남궁세우의 심정도 일휘와 별반 다를 게 없는지 더욱 굳어진 표

정으로 몸을 날렸다.

 "결국 흩어져야 하는가."

 강시 때문이었다. 강시들이야 무리를 해서라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겠지

만 무림인들의 추격이 끝나갈 무렵에 등장한다면 그때는 결코 감당하지 못

할 것이다. 결국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추격자들을 분리시키는 게 더 유리할

 성싶었다.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 개방이나 석대인에게서 소식이 올 거

다.'

 믿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개방은 몰라도, 석숭에게는 반드시 소식이 올

거라 여겼다.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석숭이기에 무슨 조치를

 취해놓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에 도착하니 개방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섬

서성의 한 성에 자신들이 타고 있는 마차와 똑같은 마차 서른 대가 기다리

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석숭도 흩어지라는 말인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적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리라.

 "이쪽으로 와봐라."

 일휘와 석두, 그리고 소살우를 마차로 불러들인 남궁세우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남쪽인 복건성은 석두, 운남 쪽으로는 일휘,

황제의 군대가 오고 있는 달탄으로는 팽무도가, 그리고 자신은 감숙성으로

길을 잡는다는 것이다. 아마 적들이 노리는 곳은 감숙성과 달탄으로 가는

자신들이 될 터이고, 나머지 광풍대원들은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저는 어디로 갑니까."

 자신만 갈 곳을 말해주지 않자 소살우가 남궁세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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