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청천벽력(靑天霹靂)
찻잎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밖을 나서던 냉추렴이
흠칫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이 들어서였다. 무인의 직감이었다.
'침착해라…….'
어쩌면 소령을 납치한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
은 채 객잔 쪽으로 걸어가며 사방을 예리하게 살폈다.
덜컹, 덜컹!
그러나 객잔 안은 텅 비어 있을 뿐, 휘몰아치는 눈발에 출입문만 요란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소령의 납치 사건 때문에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
해져 바람 때문에 흔들리던 문소리를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주방에서 찻잎을 가지고 별채로 가기 위해 월동문을 열던 냉추렴이 그 자
리에 얼어붙듯 멈춰 서버렸다. 월동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종이 한
장. 조금 전 나갈 때는 외부 동정에 신경 쓰느라 보지 못했던 거였다. 갑자
기 전신을 타고 오한이 밀려들었다. 불안감이다. 소령이가 납치된 상황에서
서찰처럼 생긴 종이가 대문에 붙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빨리 떼어달라는 듯 자신을 쳐다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
들리고 있는 종이. 자신이 떼지 않으면 곧바로 바람 따라 날아갈 것만 같은
데도 차마 다가갈 수가 없다. 서찰을 보았을 때 알아야 될 사실, 만일 그녀
가 상상하고 있는 그런 서찰이라면 어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
었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도 없다. 처음 접한 소령이의 단서가 될 것이기
에…….
주저하는 걸음걸이로 대문을 향해 다가가는 냉추렴의 손에서 들고 있던 그
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고, 그 속에서 쏟아져나온 찻잎들이 불어오는 바
람을 타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자신의 꿈도 조천영의 꿈도 모두 같이
허공으로 사라져간다. 거창한 꿈도 아니었는데…….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싶어 했을 뿐인데…….
'냉소저, 아이가 젖을 달라 합니다. 추워서 떨고 있습니다. 빨리 오셔야겠
습니다. 아기 엄마와 두 분만 오세요. 꼭, 배를 타야 합니다.'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아니에요.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오구가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어오자 재
빨리 종이를 떼어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만 오라 하였다. 비밀을 엄수해야만 소령이를 볼 수 있다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안다만 네 몸도 추슬러라. 그래야 언니를 잘 돌보지…
…."
"걱정하지 마세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종종걸음으로 조천영이 있는 곳에 들어왔다. 조
천영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포대기를 가슴에 안은 채 멍한 눈으
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놀라지 말고 제 말 들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우선 소령이를 보아야 한
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소령이를 납치해간 자들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자신의 전음에 화들짝 놀라는 조천영의 아혈을 재빨리 짚으며 대문에서 가
져온 서찰을 내밀었다. 냉추렴이 내민 서찰을 쳐다보던 조천영이 급기야 오
열을 토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추위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는 것이 아닌가!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야만 한다. 그곳이 설사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조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소령이가
자신을 찾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 엄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언니, 저도 같이 가야 해요.'
냉추렴의 전음에 조천영이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무림들이 저지른 일이
었기에, 그들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혼자만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추렴을 끌고 들어갈 수는 없음이 아닌가.
'언니, 서신을 제대로 봐요. 둘이 같이, 언니와 둘이 오라 했어요.'
그러자 조천영이 오구가 있는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 사람이면 몰라도
그가 있으니 두 사람이 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길 줄 모르지만 가야 할 뿐이다
. 설령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 할지라도 가는 수밖에 없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냉추렴이 차를 챙겨 오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 좀 드세요."
"오, 그래. 천영이는 좀 어떠냐. 헉!"
냉추렴이 들고 있는 찻주전자를 건네받으려던 오구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
으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냉추렴이 순식간에 마혈과 아혈을 찍어버린 것
이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지금 가야 해요."
쨍그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오구를 향해 울먹이는 목소리만 남긴
채 냉추렴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언니, 가요."
재빨리 조천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냉추렴이 그녀의 아혈을 풀어주며 밖
으로 이끌었다.
"추렴아……."
"언니, 힘내세요. 소령이는 제 딸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 셋이면 외롭지
도 않을 거예요, 무섭지도……."
쏟아지는 눈발 속에 자식을 찾기 위해 두 여인이 길을 나섰다.
* * *
"빨리 가요!"
거의 비슷한 시간, 대동에 있는 개방분타를 떠나는 삼 인의 인물이 있었다
. 소령이를 찾기 위해 개방을 찾았던 일휘와 소살우, 그리고 소운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에도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개방에 소식을 알리고 두어 시
진 기다려보았으나 아무런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쏟아지는 폭설이 전서
구의 움직임마저 차단시켜버렸는지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오직 인력에 의해
서만 움직여야 하는 탓에 일 처리가 너무 더뎠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세 사람이 나루터를 기점으로 위쪽으로 올라가며 수색
하기로 하였다. 나루터에 도착한 세 사람의 얼굴에 실망의 표정이 나타났다
. 혹시 하는 마음에 와보았으나 나루터에는 떠나는 배도, 들어오는 배도 없
었다.
"납치하는 자들이 이곳을 이용할 리가 없겠지요."
소령을 납치한 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을 이용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산서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분하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긴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웬 사람들이지?"
세 사람이 나루터로부터 몸을 날려 거의 이십 리 정도 왔을 때, 소운의 눈
에 저 멀리서 자신들이 왔던 길로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이 언뜻 보였던 것
이다.
"여자들인데요? 무림인도 아니고."
눈발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을
부축하고 서둘러 걷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왔던 나루터로 향하는 것 같았다.
왠지 불쌍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해진 소운이 그녀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일휘의 목소리가 그녀를 세웠다.
"형수님! 시간 없습니다."
"네……. 알았어요."
뭔가 아쉬운 듯 계속해서 두 여인을 쳐다보던 소운이 일휘 뒤를 쫓아 그
자리를 떠났다.
"언니, 괜찮아요?"
조천영과 냉추렴이었다. 멀리서 일휘와 소운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계속해서 경공을
이용해서 왔었는데 차가운 바람에 조천영이 견디질 못하자, 잠시나마 몸을
녹이기 위해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 순간에 소운 일행이 지나간 것이었
다.
"동생, 이제 경공으로 가자."
"언니가 힘들잖아요."
"이젠 됐어. 나보다 더 추운 소령이도 있는데……."
소령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는지, 아니면 다가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로 했는지 조천영의 표정은 비교적 담담했다.
"알았어요."
조천영을 등에 업은 냉추렴이 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엔 나루터까지 쉬지
않고 가야 할 판이다. 얼마나 왔는지 등에 있는 조천영의 몸이 차가워졌다
고 생각되는 순간, 저 멀리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나루터예요."
"동생……."
"언젠가 언니가 그랬죠. 우린 가족이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이젠 제가
말할게요. 우린 가족이에요, 미안해해서는 안 돼요. 다만……."
냉추렴이 눈물을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백산을 못 보고 간다는 것, 사랑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만날 수 있을 터인데, 그 사람이 돌아올 것인데, 이렇게 떠나야 한
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나도 보고 싶어……. 죽도록 보고 싶어."
"언니……."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시련을 주시려고 그 행복
을 주었는지, 이런 아픔을 주시려고 그 웃음을 주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
웠다. 차라리 행복이란 말을 모른 채 그냥 그대로 살아갔더라면 하는 생각
마저 들었다.
"가요, 언니.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면 받아들여요."
자신들을 죽도록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이렇게
떠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못할 짓이지만 소운이 있기에 그녀를 믿고 떠날
수 있다. 비록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살아온 세월 중 가장 행복했
던 시간이었다. 그런 것도 맛보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태반인 세상이 아닌
가.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만나리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긴 행복
을 맛보며 살고 말리라.
다시 조천영을 안아 든 냉추렴이 나루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두 여인이 죽도록 보고 싶어 하는 백산은 흑막살수를 전부 제거하고 석숭
과 조우하고 있었다.
"고맙네, 백공자."
추레해진 얼굴의 석숭이 백산을 쳐다보며 감사의 표정을 지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이들이 하루만 더 늦게 왔더라도 어찌 되었을지…….
이래서 타인과의 인연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맺어
진 인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아니, 명(明)의 운명을 구해
낸 것이리라.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러한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크게 생각
하지도 않고 있다. 다만 석숭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표정뿐이
었다.
"살았으니 되었소. 바빠서 먼저 가오. 북경에서 봅시다."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작별 인사를 한 백산이 서둘러 몸을 날렸다. 끊임
없이 자신을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무조
건 대동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
다.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무서운 속도로 멀어지는 백산을 바라보던 석숭이 갈태독에게 물었다. 얼굴
이 변한 거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다음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바로 떠
나버리기에 하는 말이었다.
"글쎄……. 반지 때문에 그런가……."
갈태독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떠나는 백산의 뒷모습을 망연히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세. 자네들도 쉬어야 될 것 아닌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야 완전하게 고립되어 있으니 대동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백산만이 무엇인가 불안한 듯 전
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동에 내린 눈발은 이곳에서도 어
김없이 쏟아졌고 그 새하얀 눈 속을 뚫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이야압!"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가슴을 저리는 이 아픔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주변의 모든 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옥죄어들고 있
었다.
왜 이리 몸이 느린가. 주변 경물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빠른 속도로 멀
어지고 있는데 앞에 보이는 산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하나의 산을 넘고 나
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그 산을 넘고 나면 새로운 산이 기다리고 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함을 질러보지만 여전히 마음이 급해
질 뿐이었다.
연신 몸으로 달라붙는 눈발을 털어낼 시간도 없이 대동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들른 곳인 개방분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그들을 무시하고 객잔을 향
해 몸을 날린 백산을 기다리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너무 어이
가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었다, 내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
던 원인이.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꿈이 사라져버렸다.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노리는 게 있다면 해치진 않을 게다."
팽무도가 백산을 달랬다. 무엇을 노리고 추렴이와 천영이를 납치해갔는지
모르지만 분명 연락을 취해올 것이다. 또한 개방에서도 총력을 다해 그들을
찾고 있으니 시간이 문제일 뿐 분명 밝혀지게 되어 있다.
"사부님! 피독주 안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그때 소살우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조그맣게 접혀진 종이를 내밀었다. 풍신
개가 준 피독주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피독주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종이가 나왔다는 것이다.
풍신개의 서찰이었다. 아니, 유서였다.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유
서를 작성하였고 피독주 속에 넣어 소살우에게 건넸던 모양이었다.
풍신개의 서찰을 읽어가던 팽무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급기야 그 자
리에 철버덕 주저앉아버렸다. 풍신개의 유서에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
기 때문이다.
팽무도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은 남궁세우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팽무련이
라 했다. 오십 년 전에 죽었다던 팽무련이 사혈마강시로 부활해 있었고 전
력을 다한 자신의 일 장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나머지
이야기들이란…….
"그랬던 거야. 우리는 실험체였어. 백살대는 강시를 만들기 위해 창설되었
어. 쿡쿡쿡! 프하하하!"
남궁세우가 비통한 웃음을 토해냈다. 사혈마강시에 대한 사건은 검제 담운
천과 소림의 각인대사, 두 사람이 꾸민 일이었다.
완전한 강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백살대라는 조직을 구성했고 그들에게 마
단을 복용시킴으로써 도검이 불침하는 강시가 아니라 검강, 도강도 뚫을 수
없는 불사강시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럼 우리가 제거했던 강시는?"
오십 년 전에 백살대가 제거했던 사혈마강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때도
거의 불사에 가까운 강시들이었다. 검강과 도강을 이용해서만 제거가 가능
했던…….
"그건 우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실험체였소. 실패작이지요."
백살대 사건이 이제야 확실한 윤곽을 드러냈다. 단순히 오천맹만을 노리고
저질러진 음모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병기를 만들기 위해 꾸며진 음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백 년 전에도 강호제일인이었지 않나."
팽무도의 의문점이었다. 검제 담운천, 결코 바닥에서 올라온 사람이 아니
다. 등장부터 강호제일인이었던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
가.
"검제 담운천, 그가 천신가(天神家)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석숭이었다. 황실로 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그에게 엄청난 소식이 들려
왔던 거였다. 백산 일행에 있던 세 사람의 납치 사건이 그것이었다.
"그가 신가의 후손이었단 말인가?"
팽무도와 남궁세우, 그리고 일휘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석숭을 쳐다보
았다. 혈가의 후예가 있던 동굴에서 보았던 천오백 년 전의 비사, 그 비사
의 중심에 있던 가문의 후예가 담운천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각인대사는 사신가의 후예입니다. 반신오천역의 힘을 흡수한 상태
이고요."
"그럼 자네는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이 이미 등장해 있다는 사실
을?"
"네, 저의 가문이 금신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던 구룡천가였습니다."
석숭에게서 그동안의 사건 전말이 흘러나왔다. 그가 천신가의 후예인 담운
천을 주시하게 된 것은 연왕을 도와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살대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고 담운천의 야망도 알게 되었으
나 그를 제거할 힘이 없었다. 옥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협하는
이민족도 아니고, 같은 영토 내에 있는 한족을 쳐야 했기에 옥새의 힘이 절
대적으로 필요했다.
"그가 노리는 곳은 무림뿐만 아닙니다."
"그럼 황실도 노린단 말인가."
팽무도의 물음에 석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속해서 백산 일행과 동
행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삶이 좋아서 그랬고 정도 들었지만
백산의 파멸안만 아니었다면 흑막의 꼬리를 잡았을 때 떠났을 것이다. 언젠
가 그들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백산의 곁에서 지금껏 머물
렀던 거였다.
저들이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처리하려 했었는데 그게 더 큰 화를 불러오
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으로 인해…….
"이곳에 오기 전에 폐하께 연락을 보냈습니다. 아마 전 병력을 이끌고 회
군하여 오실 겁니다."
옥새를 찾았으니 더 이상 거칠 게 없다. 그동안 내부에 적이 있는지 알면
서도 원의 잔당을 쫓아다녔지만 이젠 아니다. 황실로 복귀하여 내정에 치중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내정 속에는 천신가의 멸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백공자도……."
"안 돼! 참아라!"
석숭과 팽무도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백산의 온몸에서 붉은 기운
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된다, 참아야 한다. 천영과 추렴이의 생사도 모르는 놈이……. 참아라
. 참아라, 백산.'
주르르!
백산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자꾸만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소령이, 소령이의 생사도 모르지 않느냐……. 백산아…….'
그러나 조천영과 소령이를 떠올리고 냉추렴을 생각해도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오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파멸안을 타고났
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한다. 파멸안인 자신과 마신가의 후예인 철목
승을 노리고 이일을 저질렀다는 말이다. 이제 젖도 떼지 않은 아이와 무공
도 없는 천영이, 그리고 부모의 원수를 의부로 모시고 있는 불쌍한 여자들
을 인질로 잡아갔다.
더러운 놈들이다. 진정 잔인한 놈들이다.
'다 죽여라, 백산. 전부 죽이란 말이다!'
분노가 커지자 마음속으로부터 또 다른 자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둥! 둥! 둥!
심장 뛰는 소리가 급격하게 빨라지며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란 말이다!"
백산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왼손과 오른손에서 수천비가 한 자
루씩 튀어나왔다.
푹!
"오라버니!"
"산아……."
팽무도와 소운이 해쓱해진 얼굴로 백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개의 수천
비를 이용하여 자신의 손등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어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의 살을 찢어 정신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두 손으로부
터 밀려오는 고통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말하시오, 석대인! 내가 어찌해야 할지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재웠다고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정상적인 상태와 붉은 색채를 띤 눈이 반복되고 있었다. 광혈지안
으로 넘어가려는 상태를 자신의 모든 의지를 동원하여 참고 있다는 의미였
다. 지금 이성을 잃어버린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사라지기에 견디고 있는 것이다.
"기다려주게."
현재로서는 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광풍대원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천신가의 전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뿐이다. 우선 사혈마강시만 해
도 팔십여 구인데 그들 하나하나가 광풍대원들과 맞먹는 실력들이다. 결국
헛된 희생만 될 뿐이라는 게 석숭의 생각이었다.
"사부님!"
그때 또 다른 서찰 한 장이 개방방도에 의해서 도착했다.
간단한 내용의 서찰.
'태산 벽하곡. 철목승과 동행. 서두르세요.'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렸나?"
서찰을 본 석숭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태산 벽하곡, 제갈세가의 본가가 있
는 곳이다. 기관의 대가인 제갈세가로 두 사람을 불렀다는 말은 이미 잡을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천신가와 천무맹과의 합작. 아마
천무맹이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담운천은 전혀 나서지 않고 천
무맹의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가야겠소."
이제 더 이상 분노할 수가 없다. 그녀들이 살아 있고 자신을 찾는다. 일말
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잡아야 한다. 두 손등에 박혀 있던 수천비를 거두
어들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려라! 네 녀석이 떠나고 나면 소운이는 어쩔 거냐. 칠이도 죽고 없는
데 저 애는 어쩌란 말이냐.'
일어서는 백산을 향해 팽무도가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아직 소운이에
게는 풍신개의 죽음도 알리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일어났기에 조
금이나마 충격을 줄이고자 했던 까닭이었다.
'소운?'
지금껏 생각을 못했다. 납치된 그녀들 말고도 자신에게는 소운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만 쳐다보며 울
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기다려라. 생각을 해보자.'
다시 들려오는 팽무도의 전음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보다 더 힘
들어하고 있는 소운 때문에 지금 바로 떠날 수가 없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오라버니!"
"형수님! ……가지 않을 겁니다."
소살우가 소운의 어깨를 잡으며 따라나서려는 그녀를 말렸다. 지금은 누구
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녀를 잡은 것이다. 혼자, 오직 혼자
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으아아! 으아아!"
밖으로 나온 백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주먹으로 땅을 치기 시작했
다. 어쩌란 말인가. 무얼 어찌해야 하는가. 천영이 울고, 추렴이 울고, 소
령이 자신을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소운이 울고 있다.
아무리 땅을 치고 통곡을 해봐도 해결방안이 없다. 고통이라도 밀려오면
좋으련만, 아프기라도 했으면 시원하련만, 이 빌어먹을 몸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광풍대원 전원이 나와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쳐다만 볼 뿐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백산의 통곡 속에 아침이 왔고, 광풍대원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때, 다른 모든 이들의 한숨 속에 열심히 움직이는 여인이 있었다. 객잔
의 주방에서 숙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가며 저녁 준비를 하는 여인, 두 여
인이 떠나고 혼자 남은 소운이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네, 최고의 저녁입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도 이런 상은 못 받아봤습
니다."
객잔 주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좀 들어주실래요?"
소운의 얼굴에 생긋 미소가 어렸다.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듯 차
분하게 변해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일 나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의 얼굴일 뿐이었다.
"소운!"
"쉿! 시장하시죠, 식사하세요."
무슨 말인가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던 백산이 깜짝 놀라며 소운을 쳐다
보았다. 방 한가운데 온갖 산해진미로 채워진 식탁, 침대 위를 화려하게 장
식하고 있는 원앙금침과 황촉불. 신방이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
란 표정도 잠시,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식탁으로 다가앉았다.
"후와! 맛있겠다. 이게 전부 당신이 준비한 거야?"
"저도 한다면 한다고요. 이 소운의 실력을 뭐로 보고, 이것 좀 먹어보세요
."
소운이 혀를 쏙 내밀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하는 미소였다. 자신
이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당신도 먹어! 자, 아!"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면서 웃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
물이 흘렀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대."
"피이! 그럼 백랑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사랑해! 영원히, 다시 태어나도……."
"쉿!"
소운이 백산의 입술을 손으로 막아버린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곤 백산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간다. 이 사람과의 마지막 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심정으로 백산의 옷을 벗겼다. 오늘
과 같은 밤을 다시 맞이하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이."
옷을 다 벗긴 소운이 백산 앞에 똑바로 섰다. 자신의 옷을 벗기는 님의 손
실을 느끼면서도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부끄러워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
던 님의 몸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속에 새겨놓기 위해서였다. 잊지 않기 위
해,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손으로 쓰다듬고 만져보았다.
오늘밤은 절대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입을 맞출 때도 눈을 뜬 채 있을
것이고 환희에 몸부림칠 때도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눈을 감으면 안 돼요, 절대로."
님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모습이 보이고, 그곳으로 입술이 다가가는 것
이 보인다. 님의 그것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보이고 불끈 성을 내는 것도
보인다. 님의 머리가 나의 그곳에 머물고 님의 상징이 나의 얼굴로 다가온
다.
온몸에서 환희가 밀려오고,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코 감을
수가 없다. 님의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영혼 속에 기억될 수 있도
록…….
"허억!"
님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쾌락의 탄성이 솟구쳐나온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는다. 환희에 몸부림치는 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두 사람의 열정적인 행위는 밤새 계속되었고, 아침이 되자마자 간단한 먹
을거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눈 속에서 두
사람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백랑! 아름답지 않아요?"
백색의 설원을 보고 소운이 소리를 질렀다. 눈 깜박임이 안타까울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점으로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는 듯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던 눈이건만 오늘은 왜 이리
도 시리게 보이는 것인가.
"나 업어줘요, 하루 종일……."
"왜 이리 가볍지?"
처음 안아보는 소운이다. 이리도 가벼울 줄, 이렇게 여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참으로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운의 몸무게조차 알지 못했다.
"우리 저 끝까지 걸어가자, 눈이 끝나는 곳까지……."
소운을 업고 걸었다. 서로의 발자국을 세어가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싸온 음식을 나눠먹었고, 손이 발갛게 되도록 눈을 뭉
쳐 서로에게 던지기도 했다. 눈 속에 파묻혀서 입맞춤도 했다.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시간이 멈추길 바라면서…….
그리고 또다시 밤…….
황촉불이 켜져 있는 원앙금침 속에서 백산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인 것이다.
시간이 멈추길 바랐는데, 영원히 정지하길 바랐는데 멈추질 않았다. 오히
려 다른 때보다 더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랑한다는 것이 기쁨만은 아니라
는 걸 깨달았다. 결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나 웃음만이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는데…….
소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한없이 평화롭게 보이는 저 얼굴에 눈
물을 흘리게 해야 한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과 함께하겠소."
소운의 볼에 입맞춤을 한 백산이 몸을 돌렸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 이곳
의 사랑은 묻어두고 또 다른 사랑을 찾으러 가야 한다. 어쩌면 마지막 사랑
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을…….
'안녕, 내 사랑…….'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웃으며 보내주고자 했었는데
늘어진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고 싶었는데
저는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지금 눈을 떠버리면, 당신의 모습을 보아버리면
말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다리에 매달려 떠나지 못하게 잡을까봐 그게 더 두렵습니다.
제가 원하면 당신이 떠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떠나지 못하겠지요.
사랑하는 여인을 뿌리치고 떠날 만큼
당신은 독하지도 차갑지도 못합니다.
평생을 괴로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남을 당신임을 알기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겠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소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할 때 내내 뜨고
있던 눈을, 지금은 뜰 수가 없다.
'안녕…….'
떠나는 백산을 배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뜰 이곳저곳에 널브
러져 있는 광풍대원들과 그들 옆에 뒹굴고 있는 술병만 있을 뿐. 백산이 소
운과 같이 방 안으로 드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거의
이틀 동안.
"형님!"
막 대문을 나서려는 백산을 소살우가 불렀다.
"왜?"
"내가 이겼소, 형님이 간다는 데 걸었거든."
소살우의 바로 옆에 커다란 네모 두 개가 그려져 있었고 '간다'라고 표시
된 칸에 돈주머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소살우가 딴 돈인 모양이었다.
"가져가시오. 형수님께 맛있는 것 좀 사가지고 가야지, 소령이 선물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돈주머니 하나를 백산에게 던졌다.
"맞다, 그 생각을 못했구나."
"그리고 말이오, 혹시 기회가 생기면……. 그 돈 갚으시오."
살아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놓치지 말라는 말
을 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다만…….
말을 하던 소살우가 고개를 돌리며 백산의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그래……. 기회가 생기면, 갚아줄 기회가 생기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를 맞으며 백산이 몸을 날렸다.
아득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 자는 것
처럼 누워 있던 광풍대원을 비롯해서 팽무도와 남궁세우, 모든 이들이 눈물
을 흘리며 백산을 배웅하고 있었다.
"전부 준비해라. 벽하곡으로 갔다가 바로 천무맹으로 간다."
"어르신……."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네. 허나 저 녀석은 내 아들이네. 아들이 죽
음을 향해서 가는데 기다리란 말인가. 그럴 수 없네. 우리 힘으로 안 된다
는 건 알지만 가야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볼 것이네."
더 이상은 피하지 않을 터이다.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 할지라도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볼 참이다. 그러다 안 되면 그것 또한 족한 인생이 아니던가. 팽
무도의 뒤를 이어 광풍대원 전원이 태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영감도 왔소?"
무이산을 넘어서 산동성으로 길을 잡으려던 백산의 앞에 미리 와 있었는지
갈태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탐스럽던 수염을 밀어버리고 머리까지 검게
물들인 모습은 본인이 갈태독이라 해도 믿지 못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젊어졌소."
"이 정도면 철대협처럼 보이느냐?"
결국, 철목승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풍신개가 만들어둔 마지막 세력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가능할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지막 복수를 그에게 일
임하기로 했다.
"갑시다."
어차피 따라온 사람인데 말리고 싶지도 않다. 가라 한다 하여 갈 사람도
아니고 그냥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산서성을 출발하여 쉬지 않고 동으로 달렸다. 산이 있으면 산을 넘고 강이
있으면 강을 건넜다. 태양이 솟았다 지고 다시 떠올랐다 서편으로 떨어지
기를 수십 일. 그런데 묘하게도 산동성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온몸을 잠식해들던 분노도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는지 나오
질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살아 있는 그녀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
"걱정되지 않는 게냐."
어느 산자락에서 잠시 쉬는 틈에, 변색되어 떨어진 낙엽을 줍고 있는 백산
을 쳐다보며 갈태독이 물었다. 처음엔 조급한 표정을 보이며 바삐 서두르던
백산의 얼굴도 점차 침착하게 변하는 것 같더니 더 이상 갈등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하는 말이었다.
"부인을 만나러 가는데 걱정될 리가 있겠소."
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는 길이다. 소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들과
마지막을 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축복이지 않겠는가.
"뭘 만드는 거냐?"
"오랜만에 만나는데 선물이라도 줘야지."
세 개의 화환이었다. 들꽃이라도 있으면 꽃으로 장식하고 싶었는데 이미
한겨울이다. 들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해서 생각해낸 것이 색색이 떨어진
낙엽들을 하나씩 주워 그것들로 화환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 쉬었으면 갑시다."
이곳저곳에 흩어진 낙엽들을 주워서 품속에 집어넣으며 다시 몸을 날렸다.
이제 하루 정도만 가면 태산이 나올 것이다. 그럼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사랑하는 부인들과 소령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만 더 가면…….
* * *
"올까?"
"물론이지요."
벽하곡.
제갈세가의 본가가 있는 태산 벽하곡이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쪽에 제갈수
연과 백무천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오지 않겠지만 조천영과 냉추렴이 있으면 오게 되어 있
어요. 더구나 아이까지 있잖아요."
"걔는 죽었잖소."
"그거야 우리만 알고 있는 일이고 아버지 되는 자는 모르잖아요."
무서운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다섯 달 된 소령이 이미 죽었다 하면서도
그 애마저 이용하여 함정을 만들고 있었다.
"함정은?"
"백랑! 당신 같으면 사방이 만년한철로 막혀 있는 일 장의 공간 속에서 오
십여 개의 광천뢰가 터지는데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그녀가 백산과 철목승을 잡기 위해 준비한 함정은 광천뢰였다. 하나만 있
어도 주위 오 장 정도가 초토화된다는 그런 광천뢰를 오십여 개를 사용한다
는 것이다. 백산이 뇌룡현에서 사왔던 그것이 이제는 그의 목을 잡는 함정
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맹은 어찌 되었어요?"
함정을 점검하기 위해 화진악을 제거한 뒤 바로 이곳으로 왔기에 그동안의
천무맹 진척사항을 알지 못했다. 물론 밀정들에 의해 소식은 계속 들어오
고 있었지만 그녀가 맹에 대해 말을 꺼낸 의도는 따로 있었다.
"담운천이 전면으로 나섰어."
"구파를 비롯한 천무맹 무사들이 끔뻑 갔겠군요."
"왜 모른 척하나. 본인의 작품이면서."
자신의 말에 제갈수연이 천연덕스럽게 장단을 맞추자 백무천이 비꼬는 표
정으로 말했다. 화진악을 제거하면서부터 이미 계획했던 일일 터였다. 천무
맹의 패배를 예견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아니,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손
수 화진악까지 제거한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예상대로 연일 계속되는 패배
로 인하여 천무맹 무인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화진악의 전사소식까지 전해지자 맹을 떠나는 인물들까지 생겨났던 거였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검제 담운천이었다. 더구나 그와 같이 나타난 사람은
소림의 각인대사. 초대 맹주와 십일 대 맹주가 동시에 나타나자 천무맹의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곧바로 두 사람을 태상맹주로 추대하고 천무맹의 모든 전권을 맡겼다. 그
날부터 시작이었다. 거의 삼 할 정도의 전력밖에 남지 않았던 천무맹이 천
마맹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담운천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발휘되는 순
간이었다.
"그놈들은 연매 때문에 이기고 있다는 걸 몰라."
각인대사가 제갈수연에게 맡긴 혈맹을 이곳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맹과 그녀가 아니라면 삼 할 정도 남아 있던 천무맹의 병력으로 어떻게
전세를 뒤집겠는가. 그러나 천무맹 무인들이나 구파의 잔존세력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담운천만 신처럼 받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쯤 내가 맹주대행으로 지목될 거야."
백무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비록 아직은 최고의 자리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명령권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 공동파에 들어가면서 꾸었던 꿈을
드디어 성취하는 순간이 도래했다.
"백랑! 혹시…… 말이에요."
"무슨 말인데, 그래. 해봐."
기분이 잔뜩 고양되어 있었기에 제갈수연을 대하는 목소리에도 활기가 넘
쳐났다. 그러한 기분 탓이었는지 제갈수연의 얼굴이 무엇인가를 주저하며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담운천이 저를 맹주대행으로 지목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무슨 소리야? 이미 내가 되기로 언약이 되어 있는걸."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백무천이 펄쩍 뛰었다. 얼마 전 장생원에서 담운
천과 약속했었다. 자신이 굴복하는 대신 통합 맹주자리를 준다 했던 것. 지
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타인에게 양보한다
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 타인이라는 범주에는 물론 제갈수연까지도 포
함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도와주실 거죠?"
"그럼 도와줘야지. 연매는 내 부인…… 설마……."
백무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장난으로 묻는 게 아니었다. 이미 언질
을 받았기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인상 쓰지 말고요. 명령만 내 이름으로 나갈 뿐 모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거절도 안 했을 테지?"
품 안으로 파고드는 제갈수연을 쳐다보는 백무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자신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들의 제의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받
아들였을 것이다. 분명 남편이 될 자신이 있는데, 백무천이란 사람이 있는
데도, 양보할 생각조차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야망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자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여인이 그녀였다.
"아니에요.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을 해친다 했단 말이에요."
백무천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대답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그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모든 분노를 담운천에게 돌리도록 해두는 것. 이젠 자
신의 힘없음을 한탄하며 이를 갈아댈 것이다.
그녀의 예측대로 백무천의 두 눈 속에 불길이 일렁대고 있었다. 검제 담운
천, 천신가의 가주에 대한 진득한 살기였다.
'두고 봐라, 담운천! 이번의 선택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아대는 백무천의 품속에서 제갈수연이 싱긋 미
소를 지었다.
'사랑과 야망은 별개랍니다, 서방님…….'
그들이 주었던 게 아니고 자신이 요구해서 얻어냈다. 담운천과 각인대사의
표정에서 자신을 더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에 다시 한 번 모험을
감행했다. 이곳 제갈세가를 이용하여 철목승과 파멸안을 없애는 조건을 걸
고 맹주자리를 요구했던 거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맹주가 되든 백무천이 되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말 잘 듣는 수하라 생각하고 있을 테이니까. 그녀의 모험은
또 한 번 성공을 거두었고 드디어 오늘 자신에게 맹주대행의 지시가 떨어
졌다. 바야흐로 양맹의 초대 통합 맹주가 된 것이다.
'이젠 천무맹이 제갈세가야, 천무맹이…….'
"천마맹에서는 누가 배신하기로 했나."
"조금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거예요."
이미 그쪽에도 손을 써두었는지 백무천의 물음에 빙긋 미소로 대신하고 있
다. 아직은 알아서 안 된다는 의미이리라.
'아무리 완전한 조직이라 해도 비상을 원하는 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언제
나 이인자의 역할만 해야 하는 자가 있으니까요.'
* * *
복우산(伏牛山).
진령산맥의 동부를 이루는 산맥 중의 한 산으로 하남성 서부의 분수령이다
. 이곳 복우산의 철령이라는 계곡에 천마맹의 진지가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굳은 표정의 검마 요대철이 막 군막을 들어서는 궁유를 향해 물었다. 그런
데 과거 요대철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면전을 시작한 지 두어 달밖에 지나
지 않았는데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패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화진악을 몰아칠 때만 해도 승리를 거머쥔 것으로 알았다. 도망치는 그를
쫓아 천무맹까지 바로 진격하려 했었는데 뜻밖의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어
디서 나타났는지 지금껏 싸우던 천무맹의 무인들과는 전혀 다른 무리들이
자신들을 공격해온 것이었다. 더구나 패천마궁과 고루천마가 있던 진영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큰 타격이 패천마궁의 전멸이었다. 그들
의 전멸은 곧 보급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때부터 물러나기 시작한 전쟁이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천마맹이 있는 감숙성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감숙성도 이미 맹주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광뇌 궁유의 얼굴에 참담함이 어렸다. 그도 제삼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란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데 그 세력이 천무맹과 손을 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양맹의
양패구상을 노리던 세력이었기에 빠른 시간에 천무맹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패천마궁만 패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세력이 패천마궁이었는데 그곳이 패하는 바람에
모든 일이 틀어져버렸다. 설마 파뢰권마(破雷拳魔) 패무극(覇武克)이 패하
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패무극의 무위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천마맹에 있는 철목승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구마들보다
한 수 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자였기에, 설사 자신이 있는 곳이 패한다
하더라도 그곳만은 승리하리라 여겼다. 즉 천무맹에는 패무극을 상대할 무
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단 한 수에 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백무천.
결코 전쟁의 변수가 되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로 인하여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만 없었더라면 새로운 적이 추가되어
나타난다 하더라도 문제될 리가 없었다.
"멈추시오! 커억!"
"무슨 일이냐."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검마 요대철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소리를
질렀다.
"나다!"
"너는……?"
군막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을 쳐다본 요대철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철마 지청인.
하남성 북편을 공격하고 있던 철마 지청인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혼
자만이 아니었다. 검은 방갓을 쓰고 있는 두 사람과 같이 들어온 것이었다.
"이번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요대철!"
"천무맹에 붙기로 했나. 마도인의 꿈을 버리고."
"큭! 마도인의 꿈이라 했나. 착각하고 있군, 요대철. 마도인의 꿈이 아니
라 너와 나의 꿈이었지. 그리고 저기 있는 쥐새끼의 꿈이었고."
마도가 뭐고 정도가 뭐란 말인가. 마치 그것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같
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마도가 득세하면 뭐 할
것이며 정도가 득세하면 뭐 할 것인가. 바뀌는 게 없다. 단지 자신들에게
절하는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것밖에는…….
그런데.
그런 것도 살아 있을 때야 가능하다. 죽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다. 그래서 길을 바꿨다. 어차피 최고가 되지 못할 바에야 어디에 있든 문
제가 되지 않는다. 천마맹이든 천무맹이든, 철마 지청인은 이인자일 뿐이기
에.
"잘 가라! 요대철."
검마 요대철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청인이 몸을 돌렸다. 요대철은 지금 와
있는 강시들이 처리할 것이다. 자신은 나설 필요도 없다. 반항하던 모든 부
하들도 정리를 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무인들만 남았다. 천무맹과 천
마맹을 통합한 하나의 단체를 이끌어갈 인재들.
"허허!"
검마 요대철이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설마 내부의 배신으로 백 년의 세월
이 사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전쟁에 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다 죽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다시
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기에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왔다. 백 년의 세
월을 그곳에서 보냈으면 되었다는 생각.
"저까짓 강시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나?"
눈앞에 있는 저것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마 군막 주위를
포위하고 있을 것이다. 한두 마리 정도면 해볼 수 있다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열 마리 이상이다.
'네가 살아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뭐 할 건가.'
멀어지던 지청인에게서 들려온 전음이었다. 부하 한 명도 없고 돌아갈 곳
도 없는 백이십의 늙은이가 어디서 무얼 하겠냐는 말이었다.
'오십 년의 세월로 만족하게.'
자결하라는, 비록 반쪽이지만 오십 년 동안 강호를 통치하지 않았냐는 말
이었다.
"프! 하하하! 크! 하하하!"
맞는 말이다. 이 나이에 다시 산다 한들,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심산
유곡에서 은거한다 한들, 그게 사는 것인가. 죽어버린 삶보다 더욱 비참하
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선 살아가는 장소도 강호무림이고 죽어야 할
곳도 무림인 것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퍼엉!
"으악!"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자폭하여 시신마저도 없애버린 거였다.
천하를 가져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이었다.
천하란 누가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죽었는지…….
"현명한 선택을 했군."
잠시 후 천막에 들어선 지청인이 궁유의 시신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혼
자 죽은 게 아니었다. 궁유마저도 같이 저승 가는 동무로 삼아버린 거였다.
"맹주님께 전서를 보내라, 이곳 일도 끝났다고. 전쟁의 끝이라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 * *
지청인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렸고 제갈세가가 있는 벽하곡에서는 그
역사를 위한 첫 제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매, 왔다."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백무천이 저 멀리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는 제갈수연을 불렀다. 맹주자리는 이미 포기한 듯한 어투였다. 설사 포기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부인이 될 사람이 맹주자
리에 올랐는데 그것을 가지고 뭘 어쩌겠는가. 곁에서 도와주는 수밖에.
"걱정 안 해도 돼요.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까요."
빙긋 웃던 제갈수연이 전음을 보내는지 입술을 딸싹거렸다. 그녀가 전음을
보내는 곳은 자신의 부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막 계곡 안으로 들
어선 백산을 향해서였다.
'아마 당신의 능력이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지금부터 당
신 앞으로 오는 자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여주세요. 아주 잔인하게…….'
"호호! 대단한 년이군."
백산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자신들의 동료를 해쳐달라는 주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까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줄 참이다.
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아니나 다를까, 전방 계곡의 끝에서 두 명의 인물이 백산과 갈태독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먼 길을 오셨소이다, 두 분."
제갈세가의 인물인지 두 사람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천하제일인이
라 알려진 철목승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제갈세가의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철목승이 되었든, 아니 그보다 더한 사람이 온다손 치더라도 무서워할 게
없다는 표정.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직 자신들만의 착각이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울러 제갈수연이 자신들을 잔인하게 죽이라 했다는 것도…….
"어디 소속이냐? 제갈년이냐, 아니면 천무맹이냐."
죽음을 다르게 내리기 위해 묻는 것이었다. 천무맹이면 그래도 시신이라도
보존시켜줄 터이고, 제갈세가 사람이면 바로 어육으로 만들어버릴 심산이
었다.
"이놈! 감히 통합 맹주가 되실 가주님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백산의 온몸에서 쏟아져나온 열두 개의 비도가
두 명을 난자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각조각 떨어져 날리는 두 사람의 조
각들, 제갈수연의 말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처리했다. 굳이 그
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던 자들이었다.
오른쪽 풀숲에서 결렬한 파동이 밀려온다. 이미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감
지했다. 다수의 무림인들이 자신과 철목승으로 알고 있는 갈태독을 보기 위
해 와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하여 협박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한 행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 것인가. 백산과 철목승이 천하에 악인이면 그들의 처와 딸을 납치해
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개자식들……."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백산의 행동에 갈태독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직 조천영과 냉
추렴의 생사확인도 못한 상태에서 백산이 흥분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
이었다. 적어도 그녀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얼굴을 본 연후에 살인을 해도
해야 할 일이다.
"그 제갈 뭐라는 계집이 시킨 일이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자신들의 죄의식을 덜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따를 것이다
. 절대악인이면 어떻고, 지옥에서 뛰쳐나온 야차면 또 어떤가. 시키는 대로
해서 그녀들만 보면 되는 것이다.
"이왕 잔인하게 보일 거 확실하게 해주지."
말과 함께 백산의 손에서 두 개의 철구가 날았다. 방향은 오른쪽 풀숲, 무
림인들로 보이는 다수의 인물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이었다.
"피하라!"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날아오는 검은 물체에 무림인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
으로 몸을 날렸다.
과앙! 과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미처 피하지 못한 수십 명의 인물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이제 그만하세요. 그리고 차고 있는 광혈지옥비를 풀어놓으세요.'
'살아 있나?'
'서두르면…….'
"큭, 방법이 없군."
양팔을 걷어붙인 백산이 천목환을 사정없이 뽑아내자 팔목의 동맥부분에서
여섯 줄기의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어 두 다리에서도 천목
환을 뽑아든 백산이 그것들을 숲 속 멀리 던져버렸다.
'고마워요, 백공자. 이제 들어가셔도 되겠네요.'
언뜻 들으면 정말 고마워서 하는 말인 줄 착각할 정도로 지극히 공손한 말
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성취했다는 만족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을
성취한 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엄청나군."
제갈수연이 들어가라는 곳을 쳐다본 백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나의
석문(石門)이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그 두께가 일 장 정도나 되
어 보였다.
"갑시다."
"아냐, 나를 보고 가야지."
석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백산을 막아선 인물은 지금껏 위에서 지켜보고 있
던 백무천이었다. 벽하곡 위에 있던 그가 백산이 천목환을 벗어던지자 그제
야 내려온 것이었다.
"왜 안 오나 했다, 쥐새끼."
"아직도 입은 살았군. 어? 철목승이 아니네?"
백무천이 놀라운 얼굴로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철목승으로 알고 있
었는데 다른 인물이 아닌가. 갈태독을 응시하던 백무천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마치 어떤 기회를 잡은 자의 득의만만한 표정과도 같았다.
'쿡!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
"비밀로 해주지. 그렇지만 너는 좀 맞아야 돼, 반항은 하지 마라. 잘못하
면 네 마누라들이 전부 죽는다."
퍽! 퍼억!
붉은 화기를 머금은 백무천의 한 팔과 두 발이 백산의 온몸에 작렬하기 시
작했다. 정말 지겹도록 더러운 악연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만상투인루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이 결국은 군림의 자리까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이놈이 파멸안이 아니었던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 가능한
놈이었던들, 담운천이 통합 맹주를 제갈수연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데 이놈 때문에 통합 맹주자리마저 없어져버렸다. 자신의 이를 뽑아버린 치
욕을 심어준 놈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한
갓 버러지라 여겼던 놈이…….
"이봐, 그래 가지고 맹주가 될 수 있겠어? 좀더 세게…… 더 세게 쳐보란
말이다."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도 가슴을 꼭 껴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으며 이죽
거린다. 거의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는 백무천의 주먹이었기에 금강불괴의
몸도 소용이 없었다.
온몸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시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실컷 맞기라도 했으면 했는데 백무천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젠 얼굴을 한번 뭉개볼까?"
진기를 이용해서 끌어당긴 백무천이 오른손 정권을 입 안으로 박아 넣었다
. 과거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갚아주려 하는 것이었다.
"크윽!"
"아직 멀었다, 버러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백무천의 주먹에 백산의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해갔다.
"아,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나아. 저 위에 있는 제갈수연에게 들키면 만
사 도로 아미타불이니까."
보다 못한 갈태독이 나서려는 것을 백무천이 제지했다. 만일 철목승이 오
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조천영과 냉추렴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협박인 것이다.
"퉤! 그렇군. 쥐새끼 네놈도 철대협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야 저 계집으로
부터 맹주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계집 품에 산다고 나를 욕하더니
네놈도 별수 없구나, 쥐새끼."
백산에게서 백무천을 비웃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놈이 갈태독을
보고도 모른 체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개자식! 이게 그년들 줄 것이더냐. 잘 봐라, 버러지."
"멈춰! 한 발만 더 움직이면 죽인다."
화환을 밟으려는 백무천의 행동을 보던 백산의 몸에서 전율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울러 눈도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천! 광혈지안이 무엇인지 보고 싶으면, 붉은 눈을 보고 싶으면 밟아
라. 어차피 이곳에 살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지금껏 아무런 반항 없이 맞아준 백산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명처럼 만들
어온 화환을 밟아버리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익!"
얼굴을 붉히며 백산을 노려보던 백무천이 다시 한 번 백산의 얼굴에 정권
을 박아 넣은 다음 절벽 위로 올라가 버렸다. 다 잡아놓은 대어를 놓치기
싫어서였다. 진정 백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쟁을 각오하면 자신은 상대
가 되지 않는다. 몸이 정상이었을 때도 졌던 놈인데 지금은 한 팔마저 없지
않은가.
"괜찮으냐?"
"쿡, 외려 시원하오."
바닥에 버려진 화환을 소중히 챙긴 백산이 석문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영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가시오."
첫 번째 문을 지난 백산이 두 번째 문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쳐다보
며 입을 열었다. 저들의 눈은 다 속였고 더 이상 따라올 필요가 없다. 차라
리 남아서 사부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산아……. 내 나이가 백오십이다. 살 만큼 살았다. 나도 소령이가 보고
싶구나."
한 줌의 가능성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따라왔지만 이곳에 와보니 그게 아니
었다. 지금 자신들이 가고 있는 곳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었
다.
제갈세가 기관의 총채가 바로 이곳이었다.
만겁불회귀역(萬劫不回歸域).
제갈세가에만 있다고 하는 전설의 금역의 이름이다.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 수는 없는 곳, 그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미 전부 다 산다는 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가봅시다."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산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의 열
개의 석문을 지나고 다시 오십여 장 정도를 전진하자, 만겁불회귀역의 심장
부에 도착했는지 새하얀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영감, 내 얼굴 괜찮소?"
철문 앞에 선 백산이 갈태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백무천에게 많이 당해서
얼굴이 엉망일 거라고 생각해서 묻는 것이었다.
"이놈아, 네 얼굴이야 원래 망가진 얼굴 아니냐."
말은 그리하면서도 자신의 옷을 찢어 백산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있다.
"퉤!"
"더럽게 무슨 짓이요."
"피가 말랐잖아, 이놈아!"
마치 신부를 맞으러 가는 새 신랑의 얼굴을 닦아주는 양 정성스럽게 닦던
갈태독이 빙그레 웃으며 백산을 쳐다본다.
"최고다!"
"고맙소."
철문으로 다가선 백산이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어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
았다.
"들어 올려봐라."
지금껏 왔던 문이 전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것도 그러리라는 생각
에 하는 말이었다. 갈태독도 만겁불회귀역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
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년한철이구나."
외벽을 감싸고 있는 철의 재질을 알아본 갈태독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
지 문만이 철로 된 게 아니라 외벽 전체가 만년한철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만년한철로 되어 있다면 백산
의 무기가 없는 이상 힘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야압!"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내부의 광경.
폭이 일 장 정도인 정방형의 방 한가운데 역시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의
자가 두 개 있고 그 위에 두 사람이 등을 기댄 채 묶여 있었다. 문 쪽을 쳐
다보며 앉아 있던 조천영이 먼저 백산을 발견하고 눈물을 쏟았다.
'왜! 왜 오셨습니까, 님이여! 어이하여 이곳으로 오셨단 말입니까.'
"에궁! 얼굴이 많이 상했네. 내 이럴 줄 알고 먹을 것을 준비해왔어."
환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조천영에게 다가간 백산이 냉추렴을 돌려 앉히며
품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이미 식어버린 만두였다. 백무천에게 얻어터지면
서도 끝까지 가슴을 감싸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조천영과
냉추렴에게 줄 만두, 그 만두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두 손을 가슴에
붙이고 몰매를 맞았다.
"일단 물부터……."
만두와 같이 꺼내든 물을 두 사람의 입으로 조금씩 넣어주는 백산의 두 눈
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으려 했었는데, 웃으며 같이 가고자 했었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두 여인의 아혈(啞穴)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천
영이의 품에 안겨 있는 소령이에게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
의 부인이 되었다는 죄 때문에, 백산이라는 바보 같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만든 그들보다 자신
의 운명이 더 저주스러웠다. 그깟 파멸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인간의 운
명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이 죄 없는 여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차피 일어난 일,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 동안을 최고로 살면 되는 것이다. 설사 일각의 시간밖에
없다 할지라도 백 년이든 천 년이든, 그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번엔 만두. 천천히 조금씩, 그래 조금씩.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만두를 조금씩 떼어 두 여인의 입에 넣어주는 백산의 손이 자꾸만 떨려왔
다.
"죽을 좀 만들어올 걸 그랬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십여 일 이상을 굶은 사람들
인데 너무 자기 생각만 했던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어버……!"
"알아! 당신들 손을 떼어내면 안 된다는 것도. 다 먹고, 전부 먹고, 그때
떼어줄게."
만년한철을 이용해서 만든 족쇄를 채워 아래쪽에 고정시켜두었는데 그곳에
뭔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버버……."
"소운이는 어쩌고 혼자 왔냐고?"
백산의 물음에 조천영과 냉추렴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이곳으로 왔다. 그녀라면 백산을 잡아줄 수 있
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오고 말았다.
구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왔다.
"재미있게 원 없이 놀았어. 사랑도 나눴고. 눈이 왔잖아. 눈 속에서 하루
종일 뒹굴고 또 업어주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도록……. 그래도 조금은 미
안해. 세 사람을 전부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봐…….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얼굴로 다시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했어. 천영
당신도, 그리고 추렴 당신도, 그리고…… 소령이도……."
소령을 말하는 백산의 얼굴에 고통이 묻어났다. 소령이…… 그 애가 태어
날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죽음의 나락에서 다시 돌아온 두 모녀였는데 결
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자신보다 먼
저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괜찮아, 이제 전부 같이 살게 될 테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갈태독이 더 이상 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
았다. 괜스레 왔다 싶었다. 저들 넷을 그냥 보내주는 게 더 나을 듯싶은데
쓸데없이 자신이 끼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가장 행
복한 아이들이다. 곧 죽어갈 아이들임에도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오
히려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표정들이다.
"누님, 이 만두 생각나? 고뇌의 바다도. 나 그때 정말 멋있었지, 지금 생
각해도 너무 멋진 말이었어. 아마 일생을 통틀어 그때보다 더 멋진 말은 못
해낼 거야. 고뇌의 바다 한 마디에 그 얼음 같았던 빙혼마녀가 홀라당 넘어
온 거 아니겠어?"
백산의 말에 조천영과 냉추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렸다. 불과 엊그
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누가 나에게 혼자서 백 년을 선택할래, 아니면 당신들과 함께한 일 년을
선택할래 하고 묻는다면 당연히 일 년을 선택할 거야. 당신들이 없는 세상
은 아무 의미가 없거든……."
"어버…… 어버버……."
"당신들도 그렇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이 백산 같은 신랑감이 어디 흔한
가. 어이구, 배가 많이 고팠나보네? 만두를 벌써 다 먹었어."
만두를 가져왔던 천을 버린 백산이 이곳으로 오면서 만들어왔던 화환을 들
어 조천영과 냉추렴의 머리에 하나씩 씌워주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작은
화환은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있는 소령이의 얼굴에 가만히 놔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천영부터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깊숙한 입맞춤. 아마 이승에서
의 마지막 입맞춤이 될 것이다. 길고 긴 입맞춤을 끝낸 백산이 두 여인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어버버……! 어버버……!"
"사랑한다고? 나도 사랑해, 영원히. 소운이 그랬어. 눈을 감는 게 아니라
고. 눈을 뜨라 했어. 영감도 미안하오."
"이놈아, 나도 한마디 하자!"
백산에게 고함을 지르며 갈태독이 세 사람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젠 그
의 얼굴에도 아픔의 빛이 없었다. 목숨까지도 같이하는 세 사람을 축복해주
고 싶었다.
"나도 그동안 행복했다. 백오십 평생 가장 행복한 일 년이었다. 그것만 알
아주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이놈아."
갈태독이 힘차게 백산의 어깨를 잡았다.
'산아, 위에서 지붕이 내려온다.'
백산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갈태독이 전음을 보냈다. 지독한 기관이었다.
만년한철로 된 벽에 이제는 아래로 내려오는 천장까지……. 갈태독의 말을
들은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절반으로 나눠진 애명환을 꺼내 두
여인의 손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사라랑! 사라랑!
"사랑해!"
백산의 손으로부터 붉은 수강이 뿜어져나와 두 여인의 손을 묶고 있던 만
년한철의 아래쪽을 강타하고 동시에 갈태독의 입에서 천지를 울릴 듯한 일
갈이 터져나왔다.
"지옥전륜대능력!"
자신의 모든 내력을 짜내서 백산의 몸을 휘감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최고의 인생을 맛보게 해준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나머지는 하늘에게 맡기는 것일 뿐…….
과앙! 과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만년한철로 된 문이 터져나가고 동굴이 무너져 내렸
다. 갈 길을 잃은 화염의 폭풍은 백산과 갈태독이 들어왔던 석문들을 차례
로 찢어발기며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나갔다.
슈아악! 콰앙!
마침내 마지막 석문을 뚫어버린 불길이 거친 굉음을 토하며 하늘로 솟아올
랐다.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제갈세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만겁불
회귀역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백랑, 기쁘지 않으세요? 당신의 복수를 했는데."
뿌옇게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을 응시하던 제갈수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야망을 성취한 자의 만족스런 미소였다. 더 이상 거
칠게 없다는 얼굴 표정.
"나의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야망을 위한 것이겠지."
할아버지인 제갈장령을 잊기라도 했는지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언급
하지 않는 제갈수연의 독심에 놀라고 말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할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제갈수연은 미소를 짓고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미소를. 점점 변해가고 있다는 의미인 게다. 과거에는 심
지가 굳고 고집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훈훈한 정 같은 게 느껴졌었
다.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몸을 태
워 불을 밝히는 촛불처럼 보였다. 타인을 위해서 타오르는 불이 아닌 오직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불태우는 촛불.
"저만의 야망이 아니라 백랑과 수연의 꿈이에요."
"허!"
제갈수연의 얼굴에 피어나는 화사한 미소를 보며 백무천이 탄성을 자아냈
다. 꽃봉오리가 만개(滿開)하는 것처럼 생기가 넘치는 웃음이었기 때문이었
다. 결코 자신이 줄 수 없는 미소이기도 했다.
"일비! 광혈지옥비는?"
차갑다. 백무천에게 요염한 미소를 흘리던 그녀가 다시 냉랭한 얼굴로 돌
아가며 일비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