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84)

2장 야망(野望)의 성취(成就)

 산서성에서 들려온 소문으로 인하여 천무맹 인물들이 다시 한 번 충격 속

으로 빠져들었고 모든 이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무맹이 벌컥

뒤집어질 대사건이 일어나 버렸다. 용문산 근처의 세 개 마을의 초토화. 마

을에 있던 사람들 전부를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천무맹.

 그 도륙의 원흉이 천무맹이라는 소문이었다. 강호정의를 표방하고 강호를

지키기 위해 천마맹이라는 마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천무맹의 제마각이,

무인도 아닌 일반 양민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의 막바지에 터져

나온 소문이었기에 그 충격의 여파는 더욱 심각했다.

 전쟁 명분이 사라졌음이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

지만 그것은 내면적인 이유일 뿐,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강호무림을 어지럽

히는 마세를 제거함이 이번 전쟁의 명분이 아니었던가. 천무맹의 존립을 위

협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경악스런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여인, 제갈수연이었다.

 전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맹에 남아 있던 그녀에게 이보다 희소식은 없었

다. 소문이 빨리 퍼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기회가 그녀를 찾아

왔다.

 "일비! 당장 백랑에게 가서 이 서찰을 전해라."

 심복인 일비를 찾은 제갈수연이 전장에 가 있는 백무천에게 급히 쓴 서신

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리고 나는 본가에 들렀다 그곳으로 간다고 전해라."

 떠나는 일비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제부터.'

*     *     *

 제갈수연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 시각, 전장에 있는 화진악도 전해진 소식

을 듣고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으음!"

 절망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진

중에 소문이 났을 터인데 각파의 수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

다. 음모임에 분명했지만 밝힐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생사도 알지 못

하는 자식이 일반 양민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임에도 조사할 수가 없다.

 더구나 제마각은 자신의 직속 부하들이다. 그들의 행위는 곧 맹주인 화진

악의 명령과 같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 아닌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자신

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해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임

에 분명했다.

 부하들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상관을 믿지 못하는 부하들을 데

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른단 말인가. 더구나 아미파나 청성파, 점창파는 추

가병력을 파견해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이 발을 빼는 것도 염두

에 두어야 함이다. 화진악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맹주!"

 거칠게 화진악의 처소를 향해 들어오는 인물들. 아미파의 수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아미삼노와 점창파의 분광검 좌비영, 그리고 청성파의 차보

운이었다. 아미삼노를 제외한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다가 급하게 달려온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 인의 인물 중 가장 흥분해 있는 사람은 아미삼노의 금정신니(金頂神尼)

 매일랑(梅一琅)이었다. 불같은 그녀의 성격답게 화진악을 노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아들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아닌

가.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천마맹의 인물들보다 더 사악한 자의 아버

지가 맹주라는 직위에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소이다, 이건 음모외다."

 "설사 음모라 하더라도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어찌 전쟁을 수행한단

말입니까. 일단은 철수를 해야겠습니다."

 매일랑이 강력하게 철수를 주장하고 나섰다. 지금 상태로 계속 전장에 있

어봐야 공연한 희생만 날 뿐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허허!"

 화진악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적들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

는 상황에서 철수를 운운하는 그녀의 행태가 답답했음이다. 적들도 소문을

들었을 터이고,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지금은 철수를 논

하는 것보다 적의 공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함에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맹주님! 적의 공격입니다!"

 다급한 부하의 보고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검을 들고 일어선 화진

악이 삼파의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철수를 하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허나…… 우리는 이곳에서 싸울 것입니

다."

 어차피 없었다 생각하면 그뿐이다.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고 결국은 성공했지만 패색이 짙어졌다.

 제갈세가를 너무 견제하다 이리 되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

다. 그러나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전쟁에 져서 모든 것을 잃으나, 그

녀에게 모든 것을 잃으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같을 뿐이다. 영광스러운 퇴

진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싸우다 죽는 수밖에.'

 "나를 따르라!"

 화진악이 검을 뽑아들며 앞서 나갔다. 가장 선두에 서서 보여주어야 한다.

 화진악의 아들이, 천무맹 맹주의 직할대인 제마각 무사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문주."

 전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화진악을 쳐다보던 매일랑이 차보운을 향해 향후

 거취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맹의 공세는 시작되었고 지

금 발을 빼자니 천무맹이 패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천무맹이 지고 나면

, 그 다음 수순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들이란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일단은 적을 물리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철수는 그 다음에 다시 논하

지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전장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차보운의 행동에 금정신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천마맹의 공세가 시작되었으면 이곳뿐만 아니라 청

성파 제자들이 있는 곳도 전투에 돌입했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천각주로 있는 백소협이 잘하고 있습

니다."

 차보운이 본 백무천은 한마디로 대단한 젊은이라는 거였다. 이제 서른도

안 된 청년이 자신의 무위를 능가했다. 더구나 몸을 사리지 않고 언제나 최

전방에서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바로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그 친구가 그 정도였습니까?"

 아미삼노 세 사람이 차보운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대의 맹주감

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반신반의했었는데 소문 이상이지 않는

가. 더구나 차보운이 부하들을 믿고 맡길 정도의 인물이라니. 백무천이란

젊은이가 다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보운이 감탄해 마지않는 인물인 백무천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천마맹 인

물들을 쳐다보며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는 화산파 멸망의

주역이었던 패천마궁이었다.

 "저들을 처단하여 화산파와 종남파의 원수를 갚자!"

 "와아! 와아!"

 수천의 인물들이 백무천의 말에 동조하는 함성을 질러댔다. 놀랍게도 천무

맹 세 곳 중 백무천이 있는 이곳의 사기가 가장 높았다. 누구도 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 없었다. 자신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

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백무천이란 한 사람이 만들어낸 변화였다. 그가 오기 전까지 지지부진하던

 천무맹 인물들에게 백무천은 구세주였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서는 어김없

이 천마맹 인물들의 재가 남았다. 상대의 강약에 상관없이 절대무적의 무위

를 보이며 적을 유린하고 다녔다. 무천각주라는 지위보다 그의 무위가 천무

맹 인물들을 안심시켰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런 백무천이 다시 앞서 나가며 적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솟

구쳐 오르는 화룡은 천마맹 인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천무맹 인물

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화룡이었다.

 "화룡지천무!"

 백무천의 입에서 포효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열두 마리의 화룡이 사방

을 향해 그 불길을 토해냈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치며 주변에 있던 패천마

궁도들의 재가 날렸다. 비록 한 팔밖에 없지만 그의 무위는 절대적이었다.

 "궁주! 이젠 저놈을 잡아야겠소이다."

 구마 중 일인인 고루천마 고염라(高廉羅)가 패무극을 쳐다보며 외쳤다. 백

무천 때문에 천마맹도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일부

러 그냥 두었다. 무천각주로 등장한 백무천이 천무맹의 절대구성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천무맹 인물들이 전적으로 기대는 사람이 되기까지 기다렸

다가 제거하게 되면 전쟁을 바로 끝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의

의도는 적중했지만 갈수록 백무천의 신위가 커지는 것 같아 더 이상 방치해

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쯤 제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방을 향해 날아다니는 화룡을 쳐다보며 패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나 패무극을 비롯한 고루천마와 독마 심방 삼 인은 백무천의 본 실력을 제

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다는 착각

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현실로 드러났다. 백무천을 향해

몸을 날렸던 고루천마가 단 삼 초 만에 재로 스러지는 장면이 목격되었던

까닭이다.

 "저럴 수가……."

 패무극과 독마 심방은 깜짝 놀라며 행동을 멈췄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마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설로까지 불리는 인물

들이 구마다. 거의 백여 년 동안 자신들 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여겨졌던 인

물들. 그런 구마 중 고루천마 고염라가 단 세 수만에 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자신들과 싸운다 하더라도 수십 초 내에 끝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였는데…….

 "이곳을 맡아주십시오, 심선배."

 표정을 굳힌 패무극이 빛살처럼 몸을 날려 백무천이 있는 곳으로 당도했다

.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빨리 제압하여 전쟁의 양상을 돌려놓아야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천마맹이 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

문이었다.

 "대단하구먼. 고금오천무를 익혔다더니……."

 패무극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자신

의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강렬한 투기가 일었다. 진정 싸워보고 싶은 상

대를 만났다는 흥분과 자신도 고루천마처럼 될 수 있다는 위축감이 동시에

그의 온몸을 장악했다. 사십 년 만의 강호생활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

이었다.

 "패천마궁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소, 패궁주."

 패무극에게서 발산되는 기도에 백무천도 내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가 자

신보다 강하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마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구

마보다 더 강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

 "쿡!"

 패무극의 물음에 백무천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곡이 찔렸다는 표

정이었다. 패무극이 이곳에 있는 이유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서로

같았다.

 야망(野望).

 사내로 태어나서 세상을 가져보고 싶다는 그런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곳

에 온 것이다. 정의니 마도니 하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약한 놈

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 더 이상 거칠게 없

는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야망을 위해 산다.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 살아가

는 게 아니라 하늘이 되기 위해 산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소속, 다른 이념

을 가지고 있지만 야망이라는 같은 목표를 잡기 위해 살고 있다. 세상의 모

든 사람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만의 방법으로 그들이 바라

는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

 "시작합시다."

 서둘러 끝내기로 했는지 백무천의 몸에서 전율적인 열기가 흘러나왔다. 여

태껏 보여주었던 것은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제갈수연의 계획이었다. 자신 혼자서 천마맹 무인들을 전부 물리칠 수

 없다. 천무맹 무인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어야 함인데 이곳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제갈수연이 예측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거의 싸울 의사도, 싸워

야 하는 목적도 잊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전쟁에 임해봐야 패

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천마맹 수뇌들의 계획을 예측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실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적당히 힘을

 쓰면서 천무맹 무인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 지금 앞에 있는 패무극과 그

의 일행은 그를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껏 방치했던 것

이다.

 "우리가 당했군……."

 백무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쳐다본 패무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이제야 백무천의 본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조금 전 고루천마와의 대결

때도 완전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도 그의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 시작도 하기 전에 패했음을 느꼈다. 철목승만을 자신의 상대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설마 이십 대의 젊은이가 자신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그냥 이렇게 끝낸다면 살아온 인생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았다. 마지막까

지 최선을 다해야 되지 않겠는가. 화산파의 문주인 악무위가 그랬던 것처럼

…….

 "파뢰붕천권(破雷崩天拳)!"

 패무극의 입에서 천지를 울릴 것 같은 거대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다

음 공격을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최고 절기인 파뢰붕천권에 모

든 것을 걸었다. 패무극의 두 손에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수의 권(拳)

이 쏟아져나오며 백무천의 전신으로 쇄도해들었다.

 "화룡사멸무!"

 화룡파천비공의 이 초인 화룡사멸무, 이미 가루라의 형상으로 변한 백무천

의 몸에서 정확하게 마흔아홉 마리의 화룡이 튀어나와 사방을 휩쓸고 다녔

다.

 패무극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신가의 무공만 상대가 된다 했

던 금신가의 무공. 단지 열 마리의 화룡만 가지고도 패무극이 쏘아낸 모든

권을 차단시켜버렸다. 신가의 무공을 제외한 나머지 무공은 결코 상대가 아

니었다. 단 일 초 만에 패무극도 고루천마와 같은 길을 걷고 말았다.

 "돌격하라!"

 패무극의 죽음에 넋을 잃고 있는 천마맹 무인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젠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마맹 인물

들은 퇴각하는 중이고, 자신들은 쫓는 입장이다. 무력이 좀 약하다 할지라

도 충분히 이길 수 있게 되었다.

 독마 심방은 처음부터 백무천의 상대가 아니었다. 독공과 극성인 열양공,

그 열양공 중에서도 최고인 화룡파천비공이니 독마의 독공이 통할 리가 없

었다. 결국 백무천 한 명에 의해서 천마맹 수뇌들이 전부 당하자 더 이상

전쟁이 될 수 없었다. 천무맹의 일방적인 도륙만 남았을 뿐이었다.

 백무천이 있는 곳에서는 천마맹 무인들이 도망을 치고 있다면, 화진악이

있는 곳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천무맹의 패배. 검마와 심

마, 그리고 군사인 궁유가 있는 천마맹에, 사기마저 한풀 꺾인 천무맹은 상

대가 될 수가 없었다.

 화진악이 모든 것을 걸고 선두에서 부하들을 독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

투 시작 반나절 만에 천무맹 진영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쳐야 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천무맹이 있는 숭산 쪽을 향해 산발한 머리를 휘날리며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인물들, 화진악과 살아남은 부하 이십여 명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참담한 얼굴의 화진악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화산파와 종

남파가 멸망했을 때 이미 자신의 시대는 끝났던 것이다. 아들인 화인걸의

패배는 그것을 확인해준 절차에 불과했다. 끝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취했던 맹주자리가 아니었던가.

 "아악! 커억!"

 앞서 가던 부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이제야 나타났나?"

 이십여 명 남은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는 자들, 지금껏 싸웠던 천마맹 인물

들이 아니었다. 제갈수연. 산동성의 본가에 간다 했던 그녀가 화진악의 앞

을 막아선 것이다.

 "제가 이겼군요."

 오연한 미소로 화진악을 쳐다보며 제갈수연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종착지

까지 온 것이다. 이곳에서 화진악만 정리하면 천무맹은 자신의 것이 될 것

이다. 오십 년간 제갈세가의 숙원이, 자신의 야망이 결실을 보는 순간에 와

 있다.

 "인정해주리라 보는가."

 다른 쪽에 있는 무사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제갈수연이나 백무천을, 천무맹의 맹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

디에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안 되겠지요. 하지만 초대맹주님이 나서면 되지 않겠어요?"

 "나타나지 않은 세력이 그였는가."

 화진악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삼세력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자신의 턱밑에 있었으니 알아차

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일 게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검제 담운천이 천무맹과 천마맹을 양패구상시키

려 했다는 것을…….

 "이유가 뭐라 하던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무림 최고가 되었던 사람이고 지금도

나서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양보를 해주는 그런 인물이기에. 더구나 거의

 백오십의 나이가 아닌가. 더 이상 부릴 욕심도 없는 사람일진대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와 같아요. 나이와는 상관없고……."

 "자네도 알 텐데. 그가 천무맹과 천마맹을 전부 없애려 했다는 것을."

 누구를 데리고 남은 전쟁을 치르며, 앞으로 무엇으로 천무맹을 유지할 거

냐는 소리였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천무맹

도 천마맹도, 거의 모든 인물들이 사라질 것이기에.

 "새집을 짓고 새사람을 뽑을 겁니다. 천무맹과 천마맹 인물을 아우르는 거

대한 집을 말입니다."

 이미 새로운 인물들을 뽑을 방법마저도 구상해두었다. 그들만 있으면 적어

도 십 년 안에 과거의 천무맹이나 천마맹에 버금가는 단체를 만들 수 있다.

 그럼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다. 오직 제갈세가만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물론 담운천의 제거도 그 계획에 포함되는 일인 게다.

 "천마맹 인물을 포섭한단 말인가?"

 "그래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가능하겠지. 자네라면 말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네."

 한 단체를 다스린다는 것, 야망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올라서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웠다. 언제나 적의 출현에 신경을 써야 했고 자신

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를 파악해야 했다. 위협이 될 만한 자를 모함하여

제거해야 하고 때로는 친구마저도 없애야 하는 비정한 자리가 그 자리였다.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나?"

 "두려운 것? 그런 것도 있었나요?"

 "있다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거지. 지금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면 깨달아지는 것이네, 바로……."

 제갈수연을 쳐다보던 화진악이 자신의 검을 들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먹

었는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없이 많은 적의 목

을 잘랐다. 이제는 자신의 피를 먹는 일만 남은 것이다.

 "욕심이었네, 그 자리에 계속 있고 싶다는 욕심……."

 화진악의 마지막이었다. 화산파의 속가제자에서 검신으로, 그 다음은 강호

 최대세력이었던 천무맹의 맹주까지, 가장 밑바닥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올

라서며 영광된 삶을 살았던 화진악.

 그가 자결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욕심……. 그러나 세상은 말입니다. 그런 욕심을 꿈꾸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화진악이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제갈수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

다. 화진악은 욕심을 경계하라 했지만 그건 가진 자의 넋두리일 뿐이다. 그

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 아닌가. 별로 와 닿는 말이

 아닌 것이다.

 '끝났나? 아니지, 이제 시작이지……. 한 가지 일만 더 처리하면.'

 떠나는 제갈수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원하는 바를 성취한, 꿈을

 이루어낸 자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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