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애명환
제갈수연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동안, 묵안혈마 백산이 갈태독과 함
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여 이른 곳은 팔달령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거
용관(居庸關)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거용관의 망루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올라선 후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에
갈태독이 백산을 향해 물었다.
거용관(居庸關).
백산은 알지 못하지만, 비도의 첫 주인이었던 혈가의 후예가 멸망시킨 진
제국의 초대황제인 시황이 가장 먼저 건설했던 곳이 바로 거용관이다.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과거 제후들이 쌓았던 수많은 성의 연
결 작업을 이곳 거용관으로부터 시작했던 거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장성 건
설은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에서 감숙성 가욕관까지 무려 일만 오천 리가
넘는 엄청난 길이가 되었다.
지금도 명 황실에서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허물어진 장성의 곳곳을 보
수하고 있었다. 이곳 거용관도 마찬가지였다. 상당수의 일꾼들이 돌과 흙
등을 나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엄청난 게 만 리가 넘는다고?"
백산이 놀란 얼굴을 하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가장 아래쪽의 폭만 해도
삼 장에 달하고 높이도 그와 비슷하다. 또한 위쪽에 사람이 다니는 곳도 웬
만한 관도(官道)보다 넓었다. 족히 장정 열 명은 횡으로 서서 지나갈 수 있
을 정도의 넓이였다.
"대단하지 않느냐. 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는 저력이 말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황제의 영광이 어쩌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그놈들은 이곳에 와서 돌 하나,
흙 한 줌 나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자들만
이곳으로 끌려왔을 터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역을 했을 것이다.
고향 땅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애
환은 접어둔 채 황실의 업적만 찬양하는 저런 건축물이 무에 대단하단 말인
지. 장성이 있든지 없든지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같다.
원나라가 통치를 해도, 명나라가 통치를 해도 사람들의 삶은 변하지 않는
다. 다만 궁궐의 주인만 바뀔 뿐.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민초를 위한다
는 말, 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인 게다.
'너는 역시 비도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산이지만 어떤 사물을 보는 관점은
일반인들과 달랐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서면 장성의 웅장함과 저 장성
을 건설한 황조의 위대함을 먼저 찬양하게 되는데, 녀석은 아니다. 이곳으
로 끌려와 장성을 쌓다가 죽어간 힘없는 군상들의 인생을 생각하고 있는 것
이다. 사가(史家)들이 말하기를 일만 오천 리 장성을 쌓기 위해 백만에 달
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였다. 그 죽어간 사람들의 한과 눈물로,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쌓여진 성이 이 장성인 거다. 가진 자들에게는 영광의 산
물일지 몰라도, 이곳에서 일을 해야 했던 본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저주
받은 장소가 장성인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이 장성 때문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흔히 알고 있는 이 말은 인연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갓 혼례를 올린 여인이 남편을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집 앞을 지나가던 농부를 유혹하여 초야를 치른 데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얼떨결에 횡재했다고 여겼던 농부는 하룻밤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여인의 남편 대신 장성 노역으로 잡혀갔고 평생을 그곳에서 일만
하다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인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 아니다. 장성에 쌓인 돌 하나와 흙 한 덩이에 수천수만 민
초들의 한과 눈물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한과 눈물이 있는 이런 곳이
, 영광의 장소가 될 수가 없다.
"갑시다. 그놈들은 그놈들이고,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
가래침을 뱉어낸 백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지나간 삶이고 잊힌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꿈이 아닌 현실이기에.
"따라오쇼."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던 백산이 바닥을 쳐다보며 천천히 움직여나갔다.
사냥술.
아버지께 전수받았던 기술을 이곳에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무공을 익
히고 나면 전혀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많은 부분에서 유용하게 사용
되는 기술이었다.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시
진 정도 전진했을 때 최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금의위의 시체 한 구가 한쪽 풀숲에 버려져 있었던 거였다. 차가운 기온
때문에 시체의 상태는 양호했지만 죽어 있는 상태로 판단했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것 같았다. 금령이 이곳을 빠져나간 시기에 당한 금의위 중
의 한 명인 게다.
다시 반 시진 정도를 더 달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용경협(龍慶峽)이란
계곡이었다. 북방산수의 아름다움과 남방산수의 부드러움을 전부 가지고 있
다는 절경으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신비로움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저곳의 풍경만 아름다울 뿐, 계곡에 흐르는 기운은 아니었다.
온 계곡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물안개 속으로 진득한 살기들이 넘쳐흘렀다.
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제 시작해볼거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백산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숲 속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석대인! 나요, 백산이 왔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딱히 석숭이 들으라고 내지른 외침이 아니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흑막살수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그들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일부러 표 나게 행동했던 거였다.
계곡의 물길을 따라서 두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진입해들었다. 백산의 손
에는 하북팽가의 보물이자 사부의 애도인 혼원벽력도가 가진 바 살기를 유
감없이 드러내며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츄악!
석숭에게 고함을 질렀던 장소에서 일 리 정도를 더 전진해갔을 때 최초의
기습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갈태독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 물속으
로부터 삼 인의 흑의인이 솟구쳐 오르며 백산을 향해 공격해왔다.
세 사람의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가장 먼저 솟아오른 인물의 양손에서는
비수가 발출되었고, 그 다음 인물이 던진 무기는 유성추였다. 그리고 마지
막 흑의인은 검과 함께 무기의 뒤를 따르며 몸을 날려오고 있었다. 먼저 달
려드는 무기를 피하거나 쳐내는 순간에 검을 가진 이가 최후의 공격을 가하
는 합격술, 무기와 인간이 하나 되어 펼치는 연환공격이었다.
"호! 시작이라 이거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백산의 신형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비도를 쳐냄과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아슬아슬하게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흑막
살수의 검을 갈태독 쪽으로 흘리며 유성추를 회수하고 있는 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헉!"
유성추의 끝을 잡고 있던 자와 검을 들고 뛰어들었던 흑막살수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음이다. 뒤로 물러나는 개념이 아니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앞으로 당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였다. 가공할 신법이 아
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상대가 바로 방향을 틀어
앞으로 달려든다. 말로만 듣던 능공허도(凌空虛渡)의 경지의 무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약해!"
자신을 쳐다보며 눈을 치뜨고 있는 두 복면인을 향해 싱긋 미소를 보내면
서 들고 있던 혼원벽력도를 수직으로 그어버린다. 그리고 놀고 있던 오른다
리로는 비수를 날렸던 자의 면상을 향해 편퇴(鞭腿)를 날렸다.
철벅!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베어진 자와 목뼈가 부러진 자가 그대로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죽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비명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독한 놈들이네, 인사라도 좀 하지……."
"네가 더 독한 놈이다, 이 녀석아."
갈태독이 인상을 쓰며 백산을 노려보았다.
백산이 공격받고 있을 때 그보다 조금 뒤에 자신에게도 두 명의 살수가 달
려들었다. 아마 백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틈을 이용해서 공격하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무상신법을 전개하여 몸을 뺀 후 두 사람을 향해 장을 날리려
는 순간, 백산이 있던 곳으로부터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밀려들었다. 호신
강기를 더욱 끌어올리며 전면에 있는 두 명을 향해 장을 내뻗었다.
갈태독의 무공 역시 가공했다. 앞에서 오던 두 명은 가슴 쪽이 완전하게
파열되어 피떡으로 변한 채 나가떨어졌고, 호신강기에 걸린 자는 머리가 부
서지며 절명했다. 그들 역시 비명소리도 지르지 않고 절명했다.
"다 오래 살라고 그러는 거요."
나이를 먹었으니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암습한 자를 그대
로 둔 것은 순전히 갈태독의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갈
태독도 말로는 백산을 욕하고 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이미 금강불괴에 도달한 몸이기에 어줍지 않은 검은 뚫을 수가 없다. 다만
옷이 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신강기를 펼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기에 짜증이 난 것뿐이었다.
"에라! 이…… 그……."
갈태독이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백산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앞에 있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으려는 것처럼 하더니 혼원벽력도를 깊숙이
찔러 넣는 것이었다.
"역시 이놈은 명도가 맞아. 이런 바위도 쑥쑥 들어가는 걸 보니."
빙긋 웃으며 도를 뽑아내자 바위 아래쪽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들었
다. 비록 발각되기는 했지만 살수들의 은신술은 대단했다. 갈태독도 일 장
안으로 다가와서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영감! 우리를 잡으러 여섯밖에 안 보냈나봐."
더 이상 공격이 없자 실망한 표정으로 갈태독을 쳐다본다. 나름대로는 상
당수의 인물이 올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저들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
다.
"한 번 더 외쳐라. 이번에는 영객과 사객을 언급하면서."
"나이를 먹었어도 쓸데가 있다는 말, 틀린 게 아냐."
백산도 갈태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막 최고수 두 명을 죽인 자가 이곳에 와 있다고 하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오대흑객 중 한두 명 정도는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봐! 자밀원! 내가 영객 놈하고 사객이란 놈을 죽였다고!"
조금 전보다 더 큰 백산의 목소리가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번에
도 역시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대단하구먼. 반응이 없잖아."
백산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쪽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도발 정도면
미세한 기운이라도 내보일 법한데 전혀 그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가
히 중원 최고의 살수단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오게 되어 있다. 가자."
그러나 갈태독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리 살수니 뭐니 해도, 감정을 죽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흑막살수들은 살수행(殺手行)을 하는 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자신들
의 사활을 걸고 금의위와 일전을 결하고 있다. 청부가 아닌 인간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행위를 하고 있는 이상, 백
산의 도발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갈태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전방 숲으로부터 은밀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워낙 기척 없이 움직이고 있
어 정확한 수는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임에는 틀림없었다.
"참으로 아까운 기술이네. 저런 기술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주지."
흑막살수들의 움직임에 감탄하여 내뱉는 소리였다. 천사맹의 사사대가 보
여주었던 경지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네놈들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백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림의 절기인 무상신
법, 공간을 점유한다는 절대적인 신법이 살수들을 향해 펼쳐진 것이다. 오
른쪽에 있는가 하면 어느 사이 왼쪽에서 어른 허리 굵기의 소나무를 베어내
고, 아래로 내려서면서 바위를 향해 도를 찔러 넣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
은 움직임이었다.
'저럴 수가…….'
백산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커다란 바위 아래쪽 그늘에 은신해 있는 자(者), 오대흑객 중 사위인 혈객
으로 무영권을 익힌 자였다. 영객과 사객을 죽였다는 외침을 듣고 부하들만
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가 직접 왔던 터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들이…….'
혈객이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엄청난 신법이었다. 눈으
로 보고 있음에도 그의 신형이 잡히지 않았다. 도무지 어디서 튀어나올지
짐작할 수가 없다. 전후좌우(前後左右)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불쑥불쑥 솟구
쳐 올랐다.
난생 처음 접하는 가공할 신법(身法)이었다. 살수비기를 익혔다 하여 피해
갈 수 없는 엄청난 무공. 이십여 명의 부하들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
으로 당해버렸다.
"영감! 저 바위 밑에 있는 놈에게 한 방 먹이쇼."
"헉!"
"혈파!"
백산의 말에 혈객이 흠칫 놀라며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앞으로부터 엄청
난 기운이 밀려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신이 있는 곳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았기에 감지를 못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혈객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필이면 뒤쪽으로
바위가 있는 곳이라 마땅히 몸을 뺄 곳이 없는 게다.
"무영마권(無影魔拳)!"
흑막의 살수 중 처음으로 목소리를 뱉어낸 자가 되었다. 이미 살수행은 의
미를 상실했다고 느꼈는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갈태독의 장(掌)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천하제일이라 인정받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갈태독의 장이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크윽!"
처음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는지 갈태독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의 뒤
를 이어 백산이 앞으로 나섰다.
"광풍신권(狂風神拳)!"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혈객을 향해 백산의 광풍신권이 무차별
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날아오는 권강을 향해
무작정 자신의 절기를 뻗어내야 했다.
"커억!"
이미 바위에 등을 대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그런데도 앞
에서는 계속하여 권강이 밀려든다. 이건 아예 강기의 폭풍이었다.
"쉰하나! 쉰둘! 쉰셋……."
가증스럽게도 백산은 자신이 뻗어낸 주먹의 횟수를 세고 있었다. 권(拳)을
빠르게 펼치지도 않았다.
'말도 안 돼, 어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기막힌 상황에 혈객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기어
검이나 이기어도는 보았어도, 권이 시전자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모습은 처
음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면서도 언제나 눈앞에
붉은 강기가 있는 거였다.
권으로 시전하는 탄(彈)의 경지였다. 검강이나 도강보다 한 단계 높은 경
지.
퍼억!
"으아악!"
혈객의 가슴 쪽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고, 그가 고통에 처절한 비명
을 내질렀다. 가슴 부위가 짓이겨지면서 피에 젖은 허연 뼈가 그 모습을 드
러냈다. 신기였다. 권을 이용해서 가슴 부위의 살들을 도려내버린 거였다.
백산이 세는 숫자가 거의 팔십 회까지 이르렀을 때 더 이상의 대항을 포기
했는지 혈객이 두 손을 내렸다.
그러나 백산은 쉽게 끝내지 않았다. 마지막 혈객을 친 공격은 완전한 강기
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혈객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통 일반적
인 주먹보다 약간의 힘만 주었을 뿐이었다. 바로 죽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
인 것이다.
"임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백 번은 채워야 한단 말이야."
백보신권이 아니라 백번신권이었다. 백 번을 계속해서 쳐내는 권. 살우의
팔을 잘라내고 마을 아이들을 죽였던 자들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혈객의 비명소리를 듣고 다른 자들이 더 오기를 바라는 이
유도 있었다.
백산의 의도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협곡의 끝부분에서 금의위를 포위하고 있던 인물들 속에 격렬한 반응이 일
었다. 무객(無客)과 천객(天客), 실질적인 흑막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무기를 거머쥐며 거칠게 살기를 쏟아냈다.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삼 일만 더 견디면 금의위를 일망타
진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밖의 방문자에 의해 모든 게 틀어지려 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저 소리는 혈객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다. 특급살수인
혈객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정신을 파괴시켜버렸다는 소리다. 최고의 강적
이 왔다는 의미인 게다.
"천객! 공격하시오. 저놈은 내가 잡겠소."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무객이 뒤쪽으로 몸을 뺐다. 앞
에 있는 석숭보다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자가 더 무서운 놈인 것 같았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자에게 오대흑객 중 세 명이 당한 꼴이었다. 무림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자들마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은신술을 펼칠
필요도 없이 무공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다. 그런데 놈에게는 은신술과 무
공을 다 펼치고도 당했다. 결코 단순한 놈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알았소이다."
천객에게 말을 한 무객이 뒤쪽으로 몸을 날리자, 동시에 수십 명의 인물들
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공격하라!"
천객도 남아 있던 살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며 무서운 속도로 계곡의 끝
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금의위를 치고 달탄으로 빠지고자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지금에
와서 옥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황제인 건문제가 살아 있다면 흥정이
라도 해볼 터인데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시시각각으로 조여오
는 금의위의 추격, 결국 그들을 없애고 도망을 치고자 하였고 이곳에 함정
을 만들었었다. 옥새를 돌려준다 한들 놓아줄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죽든지 끝장을 보아야 했었다.
"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군요."
계곡의 안쪽에 있는 인물들 속에서 나온 소리였다. 오십 명 정도 남아 있
는 금의위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언제나 금빛으로 빛났던 그들의 옷은 자신
들이 흘린 피와 흙으로 검게 변해 있었고, 피곤과 허기에 절은 얼굴은 눈두
덩이가 푹 꺼질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백공자가 왔으니 서두르는 것이겠지요. 자, 한번 버텨봅시다."
초상이 자신의 도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거의 십여 일 이상을 풀뿌리만으
로 연명해서인지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이 생겼다. 조금만 시간을 벌어주면 될 것이다.
"석대인, 움직일 수 있겠소."
아무래도 석숭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는지 초상이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바로 그였다. 부하들을 대신하여 그가 맞은 칼만 해도 대여섯
번은 될 터였다.
"움직여야지요. 이제야 원하는 것을 찾았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지요.
"
자신의 실수였다. 오백의 금의위면 충분할 것으로 보았는데 흑막살수의 비
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이곳에 매복을 하고 금의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의위 전체를 노린 게 아
니라 자신이었다. 만금돈노이자 금의위 영반인 석숭을 노리고 이곳에 함정
을 설치했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추격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기에.
"조금만 버텨라. 도와줄 사람이 왔다."
부하들을 독려한 석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산이 올 때까지 모든
힘을 다 짜내야 한다. 그가 빨리 오는 만큼 부하들의 희생이 줄어들 것이다
. 백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빨리 오게…….'
석숭이 기다리는 백산은 새로운 적과 조우하여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
었다.
"영감,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먼저 가시오."
"괜찮겠냐?"
"별소릴……."
이미 수십 명이 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한 위치마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래, 먼저 가마……."
갈태독이 몸을 날리며 이십여 장 정도를 전진했을 때 적의 공격이 시작되
었다.
"혈파!"
갈태독에게서 통렬한 외침이 터져나오고, 그를 향해 달려들던 대여섯 명의
흑의인이 가루가 되어 날렸다.
그러나 백산의 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살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고수가 주변에 있는데 찾아낼 수가 없다. 경악할 노릇
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살수비기를 익혔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완벽한
자는 처음 겪는다.
'단 일 초의 승부다. 놈은 금강불괴까지 뚫을 수 있는 실력자다…….'
갈태독 이후에 처음으로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앞에서 갈태독이 다른 살수
들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도와줄 형편이 못 되었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자들 전부가 귀살 정도의 실력자임에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왔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찰나, 위쪽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검은 복
면인 한 명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순간 백산의 오른손은 위쪽으로,
왼손은 전방을 향해 동시에 내밀어졌다.
챙!
"끄으윽! 도가 아니었나?"
백산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인물. 자신 위에 아무것도 없다 했던 무
객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은신 장소는 백산 바로 앞 땅바닥이었다. 나무에 의해 약간
그늘진 곳에서 검을 뽑아든 상태로 은신하고 있다가, 백산의 오른손이 허
공으로 올라가는 순간 기습을 가했던 것이다.
"원래 무기는 그거야."
왼손에 있는 수천비 하나가 무객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무객이 일
점홍이란 검법을 펼쳤을 때 혈흔이 생기는 위치인, 양 눈 사이의 미간을 관
통해버린 거였다.
털썩!
툭!
"이런!"
백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무객이 쓰러지면서 놓았던 검이 자신의 손
등으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고 있던 애명환
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애명환을 쳐다보던 백산은
오한이 드는지 한순간 부르르 떨었다. 마령호의 발자국을 처음 보았을 때
받은 그 느낌,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아닐 거야. 우연히 그리된 것뿐이라고, 우연히. 사부랑 전부 다 있는데
무슨 일이 있을라고."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갈태독을 쳐다보던 백산이 무섭게 몸을 날렸다. 사
방에서 그의 비도가 춤을 추었다. 나무며 바위며 할 것 없이 적의 숨결이
느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비도가 박혀들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던 까닭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지배하며 초조
하게 하였다. 이제는 비도에 대한 비밀도 대부분 알게 되었다. 분노하지만
않으면 열두 개의 천비는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분노해버리면 자신이 비도
의 노예가 된다. 그것만 조심하면, 분노하지만 않으면 되는 최고의 신기가
바로 비도였다.
무차별하게 휘둘러대는 백산의 비도에 흑막의 살수들이 속속들이 쓰러져갔
다.
"무슨 일이냐?"
급해진 백산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갈태독이 고함을 내질렀다. 또다시
변해버릴까 더럭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요. 이게 깨져서."
"괜찮다, 녀석아. 광풍대원 전원이 다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 걱정
말아라."
백산이 내민 애명환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별걱정 다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양산에서야 광견조원들밖에 없었기에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은 광풍대원
전원이 다 있다. 이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조직이 광풍대인 것이다.
"빨리 가자. 네놈의 마누라보다 석대인이 더 걱정이다."
백산의 어깨를 두드린 갈태독이 계곡의 끝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최정예를 보냈다면 저쪽도 이미 공격을 시작했단 뜻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존이 더 급했던 터였다.
'그래, 빨리 하고 가는 거야. 빨리 하고. 아무 일 없을 거야.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백산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그의 눈에서 붉은 광망이
언뜻 스쳤다 사라졌다. 참지 않겠다는 뜻이다.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참지 않을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