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84)

제9장 석숭의 위기

 아마 살아오면서 이보다 바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삼 일.

 신방을 치른 날짜를 말한다. 신부가 셋이나 되다보니 삼 일에 걸쳐서 합방

을 해야 했고, 신부들 또한 처음도 아니었기에 힘든 사람은 백산밖에 없었

다.

 눈 아래가 검게 변하여 피곤한 표정이 역력함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

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혼례란 이래서 좋은 것인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뚱이지만 안았을 때의 느낌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말로 표현

하기 힘든 소속감. 더욱더 잘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솟아나면서 그녀들을 대

하는 손길도 한층 더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도 잠시 마을에 나타난 한 방문자로 인하여 광풍대원

 전원이 긴장감에 빠져들었다.

 금령이었다.

 석숭과 함께 흑막 살수를 치러갔던 금령 중의 한 명이 거의 피투성이가 되

어 홍안리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상처는 심했다. 복부가 쩍 갈라져 그곳으로부터 내장이 삐져나

오고 있음에도 손으로 막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영감, 어서!"

 백산이 다급한 목소리로 갈태독을 채근했다. 빨리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

느냐는 말이었으나 갈태독은 조용히 금령을 지켜보기만 했다.

 "할 말을 하게."

 이미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시기가 지났던 터였다. 웬만하면 손을 써보기라

도 하겠지만 대라신선이 와도 방법이 없는 상황이기에 마지막 유언이나 들

어주고자 하였다.

 "금의위가 포위되었습니다. 영반을 포함해서요. 도와주십시오."

 이어지는 금령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흑막의 살수를

쫓아간 금의위가 오백이었다. 무림인으로 치자면 일류 고수 소리를 들을 정

도의 수준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절반 이상이 당했다는 말이었다. 금령이 떠나올 때 당한 숫

자가 그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어디에 있나?"

 정신을 잃어가는 금령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갈태독이 소리를 질렀다.

 도와 달라는 말만 했지 그들이 있는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달령…… 도와주……."

 팔달령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금령이 고개를 떨궜다. 죽음이었다. 평

생을 석숭의 그림자가 되어 움직이던 그가 결국 주인의 옆에서 죽지 못하고

 그들의 위험만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팔달령이면 북경 외곽에 있는 곳 말이오?"

 북경에서 북쪽으로 이백 리 정도 떨어진 장성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변

산세가 험하고 팔달령을 거쳐 거용관을 지나면 바로 북경에 진입하게 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북경의 북문이라고도 불린다.

 그곳에 석숭을 비롯한 금의위 잔여 인원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갈태독이 난처한 얼굴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가장

 빠른 시간에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백산밖에 없다. 다른 사

람이 가봐야 시간 안에 도착할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도착한다 해도 살수들

이다. 특히 오대흑객이란 자들은 백산도 간신히 감지해낸 초극의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백산은 이제 혼례를 치른 지 삼 일밖에 안 된 새신랑이다. 그런 사

람에게 먼 길을 떠나라 함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기에 하는 말이었

다.

 "도우러 가야지요. 그 양반이 무슨 목적으로 우리 일행에 있었는지 모르지

만 우리를 도왔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 되었다

는 거요."

 "나하고 남궁아우랑 어르신, 이리 세 사람이 가면?"

 "사부, 이미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옥샌가 뭔가 하는 것도 사라질 거고

요."

 "옥새가 그곳에 있단 말이냐?"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천자(天子)의 상징인 옥

새가 그곳에 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현 황제는 조카로

부터 황위를 찬탈한 사람이기에 더욱 문제가 컸다.

 "그래도……!"

 "사부, 제가 이 황실을 좋아해서 가려는 게 아니오. 석대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옥새가 아니라 황제의 목이 떨어진다 해도 안 가오. 석대인

이 있기에 가는 거요. 아울러 무욕인들도."

 석숭과 무욕인 세 명, 그들의 목숨이 위험하기에 가고자 하는 것이다. 어

차피 나라야 잘난 놈들이 다스리는 곳이고 그들이 사는 것까지 신경 쓸 일

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다만 광풍대원들이 힘들 때 목숨 걸고 도와준

사람이 그였기에 도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세, 산이랑 나랑 가면 적어도 하루는 앞당길 수 있을 거네."

 갈태독도 백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꼭 석숭이 아니더라도 무욕인 세

명이 있기에 더더욱 가야 한다. 그들은 냉추렴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사람들

이기에.

 "일 끝내고 대동에서 보세나."

 "백랑!"

 세 여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백산을 불렀다.

"걱정 마, 비도는 절대 사용 안 할게."

 그녀들이 무얼 걱정하는지 백산도 잘 알고 있다. 또다시 변할까봐 걱정하

고 있는 게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 있다. 다시는 변하지 않을 자신이….

 "그래, 내가 옆에 있으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갈태독이 나서서 세 여인을 안심시켰다. 물론 백산 혼자 힘으로 흑막 살수

를 다 제거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자신이 같이 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백

산이라 할 수 있다. 자칫 흥분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백산이 정신

을 차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같이 간다고 볼 수 있다.

 "다녀올게요. 소령아! 며칠 있다가 보자…….!"

 "까르르!"

 백산이 무등을 태워주자 소령의 입에서 신비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백산을 아버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는지 그가 안아주면 보통 때 보이

지 않던 행동을 보이곤 하였다.

 "어? 이제는 정말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네?"

 백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커가는 딸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하게 자신을 알아보리라.

 조천영에게 소령을 넘겨준 백산이 갈태독과 함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며칠 여행을 다녀올 것처럼 인사를 하고 떠나는 길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던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

다.

 "별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팽무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뇌룡현에서

떠나보낼 때와는 기분이 또 달랐다. 불안감.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걱정 말아라. 저들 두 사람은 천하제일이다. 걱정해야 할 곳은 저들보다

우리다."

 "우리가 왜?"

 팽무도가 깜짝 놀라며 풍신개를 쳐다보았다. 양맹이 지금껏 전쟁을 치르면

서 거의 사 할의 전력을 소모했지만 어느 쪽도 승기(勝氣)를 잡지 못하고

있다.

 초리하에서만 해도 천무맹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양패구상이었다

.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섬서나 하남성에서의 결

전밖에 없다. 이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 팽무도의 생각이었다.

 "천무맹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너무 빨리 승부가 나고 있음에 대한 걱정이었다. 천천히 조금씩 서로가 망

가져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면 자신들 일행에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닌 터였다.

 "천마맹이 그리 강했단 말입니까?"

 남궁세우의 놀라움도 팽무도와 다를 바 없었다. 풍신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철목승이 빠진 천무맹은 전력상 결코 천무맹보다 우위가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해서 지금껏 일행에게 공격을 해온 그들이었다.

 "천마맹이 강한 게 아니고 천무맹이 약해졌다. 화진악 때문에."

 "그가 맹주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말이냐?"

 풍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지금과 같은 양상이 계속된다면 천마맹이

 승리할 것이고 천마맹을 지탱하고 있는 나머지 구마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감숙성에 있는 철목승이 된다는 의미였다.

 사실 풍신개가 말한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요마와 비마에게 내

려진 명령이 냉추렴의 생포가 아니었던가.

 '전부 알 필요가 없음이야. 북경만 가면 모든 게 끝이 난다.'

 그가 제삼의 세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였다. 강호의 일에 끌

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두 맹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부

담을 주고 싶지 않은 그의 배려였다.

*     *     *

 풍신개의 말대로 천무맹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본진끼리의 첫 격돌에서 천무

맹의 패배가 그것이었다.

 비록 화산과 종남파의 멸망과 산서성에서의 산발적인 전투로 인하여 많은

병력을 잃기는 했지만 섬서, 호북 분타가 남아 있고 구대문파 중 사천의 삼

개파를 합치면 아직도 만여 명의 병력이다.

 소림, 개방에 이어 무당이라는 거대문파가 불참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천마

맹의 전력보다 약하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당파 영풍진인이 부맹주직을

 내놓고 떠났기에 맹주인 화진악에게 더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과거보다 원

활한 지위체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바로 화진악의 독단 때문이었다.

 제갈수연이 사천의 삼개파로 하여금 섬서에 있는 패천마궁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화진악은 고개를 저었다. 제마각의 죽음을 묵인한 군사의 말

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마각의 패배 원인을 밀천각에서

정보를 주지 않은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화진악의 생각대로 천무맹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일대는 북쪽의 왕

굴산(王屈山)을 통해서 태행산맥 남부로 진격해나갔고, 다른 일대는 서쪽

낙하(落河)를 거쳐 복우산맥(伏牛山脈)을 향해, 마지막 일대는 남쪽의 석인

산을 통해 대별산맥(大別山脈)으로 적을 맞이하러 나갔다.

 그러나 맹으로 날아오는 전서구에 승전보가 없었다. 세 곳에서 공히 퇴각

하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왔을 뿐이었다.

 "이건 사기(士氣) 때문이야, 병신 같은 놈!"

 제갈수연이 얼굴을 붉힌 채 고함을 내질렀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원래 자신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화

진악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있어서 스스로 맹주직을 내놓아야 했는데 무

당의 불참이 오히려 그의 지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말았다.

 더구나 이젠 거의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오직 그의 생각으로 전쟁

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천마맹의 선두에서 병력을 지

휘하는 자들은 전설의 구마(九魔)들이다. 그 전설적인 인물들이 병력을 이

끌고 있는데 천무맹에서는 각주급도 안 되는 자들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

 애초에 전투 자체가 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천 명이 집단으로 싸

우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던가. 개인의 실력보다 사기가 우선

한다.

 자신들이 우러러보는 인물이 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능동적으로 싸우는 모

습을 지켜보는 자들과, 먼 곳에서 내려온 지시를 받고 전쟁에 임하는 자들

중 어느 쪽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천무맹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화진악과 삼파의 수뇌들

은 자신들이 패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다. 아직도 무엇이 문제

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제마각의 만행을 밝히

는 거야."

 그녀도 용문산 근처에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화진악을 끌어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볼 때 자신의 말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던 터였다.

 맹의 수뇌들이 가뜩이나 자신을 불신하고 있는데, 오히려 맹주를 모함한다

는 말만 듣게 될 것이다.

 기다리려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산서성 전체에 소문이 나고 강호무

림이 알게 될 그 시기를.

 "흉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분명 예사인물은 아니다."

 세 개의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킨 자들은 제마각 무사들이 아니라는 건 그

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모산파를 멸망시켰던 자들, 결코 숨어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백무천의 소식에 의해 더욱 확실해졌다. 제

삼의 세력의 수뇌는 결코 은거기인이 아니다. 강호무림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물, 그런 자이기에 밀천각의 이목에 지금껏 노출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다. 누가 되었든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을 것이기에.

 "묵안혈마(墨眼血魔), 이놈!"

 또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갈수연에게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조

부의 제갈장령과 무천각 병력 칠할 사망, 그리고 백무천의 부상, 초리하에

서의 전쟁 결과였다.

 초리하의 승리는 그녀가 가장 확신하는 바였다. 또한 비상(飛上)을 위해

가장 필요한 승리이기도 했고.

 그녀의 예상대로 천마맹 병력을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껏 미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일행에게 뒤통수를 맞아버렸다. 그녀를 가장 곤경에 빠트린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백무천이 당당하게 개선했더라면 지금쯤 맹주를 끌어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을 터인데, 밀천각에서 백무천이 돌아오기만을 기다

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모든 게 묵안혈마 그놈 때문이다. 제갈세가의 모든 미래를 한순간에 물거

품으로 만들어버린 놈.

 "반드시 복수를 해준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잔인하게 복수를 해준단

말이다."

 제갈수연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져나왔다. 결코 조부를 해

쳤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고 믿었던 하찮은 자

들에게 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던가. 백산은 자신이 그

렇게도 원하던 별호 바꾸기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한 여인의 저주를 받고 있

었다.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의 머리라는 여인에게…….

 "각주님! 백 공자께서 찾으십니다."

 "뭐라고? 이곳으로 오지 않고……."

 백 공자란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짓던 제갈수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시비를

쳐다보았다.

 지금 백무천이 갈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거처로 가장 먼저 와

야 하는데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어디라 하더냐?"

 "장생원이라 하였습니다."

 "장생원?"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장생원이면 천무맹이나 세상에서 잊혀진 장소이고

금역으로 지정된 지 오십 년이 넘은 곳이다. 같은 천무맹 내에 있지만 이제

는 찾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인 게다.

 "그렇군……. 그들이었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수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벌써 백오십이 넘은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둘 나이가 절대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삼 세력의 수뇌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진식(陣式)?"

 장생원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조그마한 야산에 도착한 제갈수연이

놀라운 표정으로 전면을 주시했다.

 평범한 야산으로 보이는 곳에 구축되어 있는 진식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에

 있는 모든 진식을 공부했고 세상에 그녀가 모르는 진이 없을 거라 여겼는

데 바로 앞에 있는 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또한 주변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뚫고 오라 이건가?"

 자신 앞에 펼쳐진 진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의 얼굴이 한순간 승부욕으로 타

오르기 시작했다.

무공면에 있어서는 타인들에게 양보한다지만 진식이나 머리를 이용하는 쪽

에서는 강호무림의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된다. 제갈세가의 유일한 자존심

이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세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야산 앞에 가부좌를 한 제갈수연이 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 수많은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재배치와 조합을 해보았지만 그 어디

에도 해답은 없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가고 있지만 야산

 앞에 박힌 듯 제갈수연의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몸만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 그녀의 마음속은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진이었던 것이다. 진임에는 분명한데 어떠한 허점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진이 눈앞에 존재했다.

 "저럴 수가……."

 모든 심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진(陣)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야산 내부가 원래보다 조금 더 밝아졌던 것이다. 지금껏

계속 관찰하고 있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변화였다.

 "역천무한귀역진(逆天無限歸逆陣)이란 말인가!"

 가문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최고의 절진, 제갈세가에서조차 손대지

못한다는 절대의 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진을 구축하는 매개체가 자연이라 하였다. 죽어 있는 진이 아닌 살아서 움

직이는 진이라 하였다. 시간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진이 역천무한귀역진이다.

 "무슨 속셈인가. 사람을 불러놓고 시험하자는 건가?"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백무천이 찾는다 하였는데 그 사람은 오지 않

고 천고의 절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뚫고 오라는 말인 것이다.

 "감히 진으로 제갈세가와 견주어보자는 것이더냐?"

 장생원에서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찾고 있는지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

다. 감히 진으로 제갈세가를 시험코자 하는 자의 저의가 더 괘씸했다. 제갈

수연의 몸에서 당찬 기백이 흘러나왔다.

 이십 대의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현 가주로서 오연한 기도

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제갈세가의 자

존심이었다.

 "좋다! 내가 간다."

 장생원에 대한 일은 잊기로 했다. 일단 앞에 있는 진을 파훼하고 당당하게

 물어야 한다. 비록 천무맹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천하제일세가 중

한 곳이었다.

 휘이잉!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인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놀라

운 일이 발생했다. 지금껏 야산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무며 바위 등 모든

사물들이 사라지며 새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수십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계곡과 그 건물 속 한 방에서 열심히 책장

을 넘기고 있는 소녀.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으나 정확하게 누구

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소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제갈수

연이 온몸을 격렬하게 떨며 멈춰 섰다.

 비가 오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오고, 새싹이 돋고, 계절의 변화가 일

어나는 가운데 그 소녀를 무등 태워주며 즐거워하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 때

문이었다.

 "아버……."

 제갈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디서 많이

보았다 생각한 책장을 넘기던 소녀, 과거의 그녀였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

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제갈

수연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멈춰 섰다.

 "이곳은 진이다. 진일 뿐이라고. 저 따위 과거의 환상으로 나를 유인할 수

 있다고 보았더냐?"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

직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아버지와의 추억,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직 최고가 되기 위해, 만인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서야 한다는 꿈에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

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조부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태연한 표정으

로 듣고 있는 모습과, 부상당한 백무천을 초연하게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거의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었기에 비교적 생생하게 다가오는 장면이기도 했

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살다보면 다칠 수도 있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냉혈한이란 소리를 누르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그래, 바로 저 모습이야. 저것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고."

 환한 표정으로 변한 제갈수연이 이번에는 기쁨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화

려한 금의와 번쩍이는 금관을 쓴 여인의 모습,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내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진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진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곳에서 나타나는 환영에 울고 웃었다.

 자신이 부하들을 죽이는 장면에 이어 백무천마저도 제거하는 환상이 나타

났다 사라져도, 그녀의 눈동자는 금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좇고 있

었다.

 "이게 끝이야? 이게 끝이냐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이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녀의 전면에 나타난 환상.

 아직껏 화려한 금의에 금관을 쓰고 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화

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의 뒤쪽으로 쇠락해가는 제갈세가만 투영되고

있을 뿐이었다. 가문을 희생시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제거하여 얻은 최고의

 자리에 자신 혼자밖에 없었던 거였다.

 "아냐! 저건 나의 끝이 아니라고. 저런 것을 원하지 않았단 말이야……."

 결국 오열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저 앞에 나타난 환

상이 사실이라면 너무 허무한 종말이 아닌가. 저런 미래를 위해 지금껏 살

아왔다는 말인 게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위해.

 "아니야, 저건 현실이 아니라고.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약한 정의 소

산일 뿐이야. 저것마저도 끊어야 해, 그래야만 더 큰 영광이 있는 거야."

 제갈수연의 말이 맞았다. 지금껏 그녀가 보았던 장면은 마음속에 숨어 있

던 자신의 마음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

었다.

 역천무한귀역진의 무서운 점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을 관조하게 하여 정신

적으로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진, 인간의 심성을 버렸을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는 진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제갈장령에게 말했던 철혈(鐵血)의 피였다. 철혈의 피란 타인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남편도

야망을 위해선 버려야 함이다.

 "나는 끝을 볼 거야, 저 위 가장 높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만다고."

 무서운 집념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부정하고 있음에도 이성으로 그

것을 내리누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이었다.

 야산에서 나온 제갈수연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강렬한 아침 햇살이었다.

얼마 안 되는 숲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웠던 것이다.

 자신이 걸어 나왔던 숲을 쳐다본 제갈수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취감이었다. 제갈세가에 대항하는 자에게 이겼다는 만족감. 조그마한 진

식에 이겼어도 이런 성취감이 오는데 세상을 정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은 얼

마나 클 것인가. 상상만 해도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어서 오너라. 진을 통과해낼 줄은 몰랐구나."

 놀라운 눈으로 제갈수연을 맞이하고 있는 인물은 각인대사였다.

 역천무한귀역진을 이리도 쉽게 통과할 줄은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

었다. 거의 종교적인 맹신에 가까울 정도의 신념을 가진 자나, 인간의 감정

이 없는 강시정도가 통과할 수 있는 진이다.

 그런데 제갈수연은 통과해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환상의 고리를 스스

로 끊어내고 걸어나왔다. 만일 마지막에 제갈수연이 신념으로 밀어붙이지

못했더라면 그 숲에서 심력이 고갈되어 죽었을 것이다.

 "태상맹주께서도 계셨습니까?"

 각인대사를 발견한 제갈수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초대 맹주만

있는 곳이라 알고 있었는데 뜻밖의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도 왔으니 무천이를 불러오지."

 '어찌 이런 일이…….'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수연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초대 맹주인 검제 담운천과 소림 최고 고승인 각인대사의 관계가 마치 주종

관계처럼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초대 맹주이고 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소

림의 최고 인물이 하인처럼 행동하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상황은 다음에 일어났다. 초췌한 모습으로 각인대사

를 따라 나온 백무천이 담운천을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게 아닌

가. 웃어른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군신의 예였다. 그리고 그의 입

에서 나온 소리라니…….

 "신 백무천, 천주를 뵈옵니다."

 쿠웅!

 제갈수연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신 백무천이라 하였다. 자신이 신

하임을 자청하는 말이었다.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

가. 오직 군림천하의 야망만을 안고 살던 그가 세상을 포기한다는 말을 하

고 있는 것이다.

 "백랑……"

 "인정하기 힘이 드느냐. 세상은 넓은 것이니라."

 얼굴이 해쓱하게 변해 있는 제갈수연을 쳐다보며 담운천이 조용히 중얼거

리며 일어섰다. 아마 두 사람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방법이 없어, 따를 수밖에……."

 처연한 눈으로 제갈수연을 쳐다보던 백무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버러지 놈에게 또 패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천무맹에 돌아와서 다

시 시작하고자 했었다. 제갈수연의 말대로 천하를 먼저 장악한 후로 복수를

 미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갈수연을 만나기도 전에 이곳 장생원에서 또

한 번 무너지고 말았다.

 검제 담운천, 초대 맹주로만 알고 있던 그가 천신가의 후예였다.

 일꾼으로 쓰기 위해서 자신을 시험했다고 한다. 지금껏 모든 사건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림의 각인대사마저도 사신가의 후예였다.

 금신가의 무공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강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담

운천의 말대로 세상은 넓었다.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움켜쥐고자 했으나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

지 장생원에 와서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요. 저들의 지시에 따라 강호를 지배하자고요? 그저 꼭두각시처럼?

"

 더 이상 놀랄 여유도 없었다. 신의 자손들이라니, 천오백 년 전부터 이어

져온 신의 가문이라 한다. 현재 그들의 세력만 하더라도 천무맹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모산파를 공격했던 제삼의 세력이 그들이었다. 거의 백 년 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엄청난 말들이었

다.

 '지금은 숙여야 하오, 수연.'

 순간 지금껏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무천이 제갈수연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완전히 굴복한 게 아니었다. 힘이 없기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

이었다.

 '저자의 나이를 생각해보시오.'

 기다림. 백무천이 생각하는 바였다. 나이가 백오십인 사람이다. 자신을 신

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이지만, 결코 죽음은 비켜가지 않는다. 금신가의 마

지막 후예인 금장천이 그랬다. 기회를 보며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얘기 끝났으면 이젠 앞으로 할 일을 알려주겠다."

 다시 제갈수연이 무슨 말인가 하려 할 때 각인대사가 나타났다. 이번엔 담

운천은 오지 않고 그만 홀로 나온 것이다. 주종관계에 대한 의식은 이미 끝

났고 철저하게 종으로만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맹은 최소인원이 남을 때까지만 몰아치면 될 것이고, 더욱 중요한 일

은 혈가와 마신가의 후예를 잡는 것임을 명심해라. 머리가 뛰어나니 좋은

방안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있어야 하겠지?"

 잠시 동안 제갈수연을 향해 무슨 말인가 하는 듯싶더니 다시 장생원 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멀어지는 각인대사를 제갈수연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냐."

 "나는 아직 당신들과 손잡는다 하지 않았습니다."

 "수연!"

 곁에 있던 백무천이 기겁을 하며 제갈수연을 불렀다. 앞에 있는 담운천이

나 각인대사는 자신이 겪어봐서 이미 알고 있다. 제갈수연 정도는 마음만으

로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조차 반항을 포기했던 자들이 그들이었다

. 그런 자들을 향해 당신이라 하는 것도 모자라서 흥정을 하려 한다.

 "갈! 감히…….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가 조건을 달려는 것인가."

 백무천의 예상대로 각인대사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크윽! 날 죽이면 직접 해야 할 거예요. 번거롭게 말입니다."

 각인대사의 몸에서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제갈수연

은 굴복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눈을 치뜨며 그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에 대해서는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진을 통과하면서 느낀 것이다

. 결코 스스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본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일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오직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에만 성취감

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대화 자체도 자신들이 인정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있다. 백무천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자신들이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번거롭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제갈수연이 굴복하지 않자 각인대사의 기세가 더욱 삼엄해졌다. 정말 죽이

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만 하시게, 사가주."

 그때 안으로 들어갔던 담운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수연의 요구조건

을 들어준다는 말이었다.

 "좋다……. 원하는 게 무엇이더냐."

 담운천의 지시에 의해 각인대사가 기세를 풀며 요구조건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드러난 감정은 불만이었다. 담운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생각.

 "혈가의 후예를 잡기 전에 강호를 먼저 주셔야겠습니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그리고 혈맹의 지휘권도 주십시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번엔 어떠한 기운도 내뿜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극심

한 한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더 있습니다. 명령은 오직 남진룡을 통해서 보내주십시오. 이놈 저놈 보

내지 마시고요."

 "헉!"

 남진룡이란 말에 각인대사의 동체가 한순간 떨림을 보였다.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놈 저놈이라 하였다. 결국은 자신도 나타나지 말라는 소리가 아

닌가.

 "허허! 사가주가 한 방 먹었군. 앞으로 저들 앞에 나타나면 자네는 이놈이

 되는 거고, 나는 저놈이 되는 거네. 좋다, 너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마. 이

제 그들을 잡을 복안을 말해보거라."

 장생원 안에서 들려오는 담운천의 음성이었다. 그 또한 쉬운 사람이 아니

었다.

 제갈수연이 하는 말을 단번에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천주님!"

 그제야 장생원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제갈수연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신들

밖에 없음에도 전음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담운천에게 전음을 보내면서도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각인대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위에 있는 자로는 오직 천주인 담운천 한 명만 두겠다는

그녀의 의지 표현이었다.

 "좋다, 물러가라."

 제갈수연의 전음이 끝나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축객령이 떨어

졌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읍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두 사람이 얼굴을 하얗게 탈색시키며

 몸을 떨었다. 그들이 있던 정자 주변에 하얗게 떠 있는 물고기들 때문이었

다. 어떤 징후도 느끼지 못했는데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해버

렸다. 경고의 의미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물고기처럼 된다는 경고.

 "그래도 그물은 없어서 다행이군요."

 혼자말로 중얼거린 제갈수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장생원을

 떠났다.

 "저 아이를 계속 써야 할까요?"

 "자고로 밑에 있는 자가 똑똑해야 편한 거라네."

 담운천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하는 소리였다. 그가 보기에도 대

단한 아이였다. 몇 마디의 말로 사신가의 가주인 각인대사와 동등한 위치로

 올라서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물고기를 죽였던 것인데 그물을 운운하고 있다. 자

신에게 가하는 어떤 금제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백무천보다 더 나은 아이일세."

 "그럼 저 아이를……."

 각인대사의 표정이 변했다. 담운천의 표정으로 보건대 제갈수연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금제도 하

지 못하게 되어버렸기에.

 '양날의 칼인가…….'

 담운천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똑똑하다는 것은 강호를 통치하기가 쉬워

진다는 말이고, 또한 자신에게도 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일 뿐…….'

 "들어가세, 당분간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

*     *     *

 "그들도 인간일 뿐 신이 아닙니다, 백랑!"

 담운천이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하는 제갈수연도 그들을 인간이라 칭하며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매가 죽을 수도 있었소."

 백무천이 놀랍다는 얼굴로 제갈수연을 쳐다보았다. 의연하게 이곳까지 왔

지만 결국 각혈을 한 그녀였다. 그들 앞에서는 꿋꿋하게 참고 있었던 터였

다. 자신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이겼습

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 있던 자신이었는데 구원의 손길을 뻗쳐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덥석 잡아서는 안 된다. 지금은 달콤할지 몰라도 나중엔

분명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 하에 이루

어낸 일이었다.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음이다.

 "화진악은 어떻게 되었소."

 "그는 지금 출정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급해진 게지요."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계속 밀리기만 하자, 결국 그와 맹에 있는 수뇌들이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여전히 제갈세가는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결정이었다

.

 "그러나 이번에 나가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다시는……."

 "당신……? 어떻게 하려고."

 "노인네들을 써먹어야죠. 공연히 봉사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터이고 그때마다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럼 버러지 놈은 어떻게 하기로 한 거요."

 "백랑은 두고 보시면 됩니다. 확실한 복수를 할 테니까요. 지금껏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제갈수연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역천무한귀역진을 겪

은 후 심성이 변했는지 처음 조부의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분노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묵안혈마와 관련 있는 자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한 놈도."

9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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