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신무(神武)
백산의 명령과 함께 광마조원들이 전방을 향해 쾌속하게 몸을 날렸다. 이
어서 터져나오는 선명한 외침. 도합 열네 명의 도에서 무시무시한 혈광이
솟구치며 천무맹 인물들을 도륙해나갔다. 붉은 도강이 움직일 때마다 선명
한 피보라가 생겨났다.
"으악! 아악! 적이다!"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후미에 있던 인물들은
아예 광마조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몸을 돌려 상대하고자 하면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붉은 혈광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여라!"
순식간에 대여섯 명씩 천무맹 인물들을 해치운 광마조원들이 신속하게 모
여들었다.
"허!"
백산의 입에서 어이없어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애초의 계획은 천무맹 인
물들의 뒤를 쳐서 물러서도록 하려 했었는데 상황은 반대가 되어버렸다.
광마조 일행의 도살에 겁을 먹은 천무맹 무인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구릉
을 올라가고 있었다. 십천각에 끼어 있던 외부 무인들과 허공에서 솟아나왔
던 귀신을 경험했던 자들이 두려움에 도망을 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것이
천무맹의 진격 속도를 더욱 높여주고 말았다.
"더 빨리 쫓아라!"
방법이 없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한 놈의 적이라도 더 죽여야 하기에
더욱 빠른 속도로 다가들며 천무맹 무인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한꺼번에 모여서 서로 깨져버려라.'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그것은 백산만의 생각이고 천마맹 진영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후미에 있던 나찰마궁의 정예들이 전진을 멈추고 팽무도 일행에 대항
해왔던 거였다. 자연 나찰마궁과 철마궁, 혈마궁 인물들간의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공격에 허점이 생겨나고 말았다.
"쳐라!"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척단세가 자신의 궁(弓)으로 연신 무영시를 쏘아
대며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그의 시위가 당겨질 때마다 서너 명의 천무맹
인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진격……. 허억!"
다시 한 번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함을 내지르던 척단세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전력으로 물러났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에 무의식적으
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콰앙!
"크아악! 으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척단세가 있던 주변에 붉은 화마가 덮쳤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갔다. 척단세를 겨냥했던 백무천
의 공격에 애꿎은 부하들만 죽어나간 것이었다.
"전부 죽여라!"
거대한 화염의 폭풍에 얼이 빠져버린 천마맹 인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손
을 휘둘렀다. 백무천 근처에 있는 산동분타원들도 놀고 있지 않았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백무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을 향해 그들의 무기가
빛을 발했다. 수십 명의 천마맹 인물들이 순식간에 고혼이 되었다. 백무천
의 강력한 공격에 이은 산동분타원들의 지원은 어떠한 검진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귀영시(鬼影示)!"
모든 내공을 짜내어 백무천을 향해 활을 날리고 있는 척단세의 얼굴에는
이미 패배의 표정이 역력했다.
천마맹에는 고수가 없었다. 구마 중 이 인이 있었기에 승리를 장담했었는
데, 도착하자마자 접한 소식은 요마의 죽음이었고 그 이후에 비마와 고인엽
이 죽었다. 천마맹 인물 중 누구도 백무천을 막을 자가 없었다. 이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묶어둘 정도의 고수는 있어야 하는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나마 자신도 십 초를 넘기기 힘들 터인데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적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도망치는 놈들을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 공연히 적의 병력이나 줄여보자는 생각에 추격해왔다가 전
면전으로 가게 되었다.
가슴에 화끈한 통증이 일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놈이 무슨 소리를
한 것 같았으나 더 이상 들려오는 게 없었다.
"천무맹 용사들이여! 귀궁 척단세의 목이 여기 있다. 우리가 승리했다!"
척단세의 머리를 치켜든 백무천의 음성이 초리하에 울려 퍼지자, 사기 백
배한 천무맹의 무사들이 무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미 승리했다는 얼굴
들이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초리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승자의 표
정.
'각주님!'
척단세의 목을 그의 활에 걸어 지면에 꽂고 있던 백무천의 귓가에 마금천
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미 환상미로진이 파훼되어 환하게 드러난 분주객잔
에서 마금천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이자를 잡았습니다. 포로로 잡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금천이 잡고 있는 인물, 뜻밖에도 백의천룡 화인걸이었다. 측간에 숨어
있던 그가 백산 일행이 떠났다는 생각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숨어들었던 곳이 지하 통로였는데 결국 마금천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처음
에는 천무맹 인물이라 살았다는 생각을 했으나 이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
았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마금천이 자신의 아혈을 눌러버린 것이었다.
"잘했소!"
마금천의 신중한 행동에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보내던 백무천이 화인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냄샌가! 버러지 놈들하고 같이 있더니 너도 버러지가 된 게냐?
"
변 속에 들어가 있었던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바
닥으로 흘러내리는 오물 찌꺼기까지.
화인걸의 그런 모습을 쳐다보는 백무천의 얼굴엔 경멸의 표정이 가득했다.
앞길을 무던히도 가로막던 놈이 바로 화인걸이었다. 맹주라는 아버지의 후
광으로 실력도 없는 자가 신룡각을 차지하고 명령을 내리던 놈. 그가 가장
싫어하는 두 놈 중의 한 놈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버러지 놈과 야망
의 길을 막았던 화인걸. 이놈을 먼저 죽이고 싶어 했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프! 흐흐흐!"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산에서 출도하자마자 어쩌면 이리도 행운이 다가
오는 것인지, 정녕 천하를 가지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면 어떻게 두 놈이 한곳에 있단 말인가.
"오랜만이야, 화인걸. 고생이 심했나보군. 오! 말을 못하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아혈을 풀어주었다. 이럴 땐 즐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행운을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불행해지는 놈의 표정과
말을 들어야 한다.
"그렇군.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나보구나, 백무천."
이가 없었기에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화인걸의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다가온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운명을.
더구나 앞에 있는 자는 자신이 그렇게도 넘고 싶어 했던 백무천이 아닌가.
살 생각을 버려야 함이다.
"내가 살려줄 수도 있는데."
"큭! 백무천이 사람이 된 건가, 아니면 멍청해진 건가. 어리석은 말을 하
는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을 두고 뛰어넘고 싶어 했던 놈인데, 인생의
목표가 그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맹주 자
리가 뭐라고, 남 위에 올라서는 게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저리 사는 것인지
. 그런 꿈을 위해 살고 있는 백무천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오히려 한 끼
식사를 위해 검강 도강을 사용하던 그들의 모습이 더 인간답게 생각되는
것은 웬일인지.
"백무천 야망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천하를 정복한 후 뭐 할 건가."
백산이 제갈장령에게 물었던 그 말을 화인걸이 백무천에게 묻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던 자신의 삶과, 하찮은 인생들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삶. 어느 것이 더 크다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삶이 소중한 만큼
,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삶도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
었다. 다 가진 자들이 삶을 가꾸는 것보다 그들은 더욱더 정성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서로가 똑같은 삶인데, 그들에게서는 사람 사는 냄새
가 나고 자신들에게는 썩어 문드러진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다.
너무 늦게 알았다 싶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던들 이렇게 메마른 인생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로 잡혀 있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천하를 정복하면 뭐 할
거냐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아는가. 일은 계속 만들어내면 되는 게야,
더 원대한 꿈을 말이다. 그건 그렇고 묻는 말에 대답하면 편히 보내주겠다.
같이 있던 자들은 어디 갔나."
그러나 화인걸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들이
저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르쳐주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백무천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었다.
철이 들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따랐다. 아
버지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 의한 가식적인 행동이 아닌, 자신의 의
지.
"마금천, 죽어 있던 놈으로 해라. 같이 있던 자들이 죽이고 뜬 것으로 하
고."
"백무천!"
화인걸이 밖으로 나가는 백무천을 불렀다.
"빨리 와라, 오래는 못 기다린다."
"죽여!"
화인걸의 말에 백무천이 고함을 팩 질렀다. 죽음을 앞둔 놈이 웃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자신더러 빨리 오라 하지 않는가, 저승으로.
"개자식!"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밖으로 나온 백무천이 솟구치는 화를 삭이기 위해
분하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죽어가는 놈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였기에 더욱 기분이 상했다. 살려 달
라고, 살려만 주면 충성을 다하겠다고 해야 할 놈이 이미 득도한 것처럼 행
동하기에 더욱 화가 났다.
'야망의 끝에는 뭐가 있는지 나도 모른다. 그래서 가려는 거다. 뭐가 있는
지 보려고.'
내심으로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
곳에 가보지도 않은 자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또한 웃기는 일일 뿐이다.
산의 정상에 서보지 않은 자들이 그 정상에 무엇이 있다는 둥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산을 다 오르면 그 뒤에 더 높은 산이 있을지, 아니
면 끝없는 벼랑만 있을지는 가보아야 알 수 있다. 비록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올라갈 것이다. 나머지는 그때 생각해야 한다, 정상
에 오른 후에…….
"으응?"
분하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백무천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인기척.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분명 인간의 호흡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
다. 화룡극지에 다녀오기 전이라면 결코 듣지 못하였겠지만, 지금 그의 능
력은 오십여 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쯤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내공을 끌
어올려 집중하자 조금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의 숨소리였다. 그렇다고 양민이 저곳에 있다는 것
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으로 완전하게 가려진 곳이면 놈이 있는 곳밖에
없다.
버러지 놈.
백무천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전황도 거의 천무맹 쪽으로 굳어
졌기에 더 이상 나서지 않아도 될 터이다. 이제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할 때
였다.
"천장지옥마 갈태독이 있다 하였던가? 좋아!"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치솟았다. 신무(神武)라 일컫는 화
룡파천비공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아울러 자신의 능력을 천무
맹 인물들에게 다시 한 번 인식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였다. 과거의 전
설을 깨뜨리고 새로운 전설을 만들려는 생각, 백무천의 전설을…….
"굴 안에 숨어 있는 곰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불이 최고지."
입가에 희미한 살소를 머금은 백무천이 품속에서 두 개의 구슬을 꺼냈다.
광천뢰.
제갈수연이 두 사질을 통해서 보내주었던 물건이었다. 아마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보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그냥 가지 않을 자신
의 성격을 알기에…….
백무천이 환상미로진을 쳐다보며 살기를 피워 올리는 그 순간, 진(陣) 내
부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분주객잔 쪽을 쳐다보며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인물, 뱁새와 찍새였다.
같은 새 자로 끝나는 별명이라 해서 두 사람이 항상 같은 조가 되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툭! 툭!
자신들이 있는 쪽을 노려보는 자의 얼굴이 상당히 눈에 익었던지 곁에 있
던 찍새의 어깨를 치며 백무천을 가리켰다. 분주객잔과 오십여 장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되었기에 지금처럼 사람이 나타나면 귀식대법으로 호흡을 멈추
고 손짓으로 말을 나누어야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제 삼 개월 된 소
령이만큼은 방법이 없었다. 갈태독이 어느 정도 기운을 막고는 있으나 백무
천의 귀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백무천의 능력이 가공해졌다는
뜻이리라.
"……."
"에이, 신경 쓰지 마. 금뎅이 자식이네, 뭐."
처음엔 극도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살피던 찍새가 이내 표정을 풀
며 별것 아니라는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가 알고 있는 백무천의 실력은 결코 이곳을 발견할 수 없다. 동정호에서
보았던 백무천의 무위는 지금 자신들의 경지와 비슷한 정도였을 뿐 크게
우려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찍새의 생각이었다.
"어이쿠, 이젠 돌까지?"
찍새의 말에 뱁새도 마음을 놓았던지 백무천이 던지는 두 개의 검은 물체
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딴에도 이곳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돌덩이를 던지
나 생각했다.
그러나.
"헉!"
찍새와 뱁새의 표정이 동시에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들을 향해서, 아니 정
확하게는 조천영과 소령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는, 돌덩어리라 생각했던 그
물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 때문이었다. 친숙한 느낌, 이제는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더 편해지던 바로 그것. 얼마 전까지는 언제나 품 안에 소중
하게 넣고 다녔던 물건이 아닌가.
광천뢰였다.
어떻게 놈에게 광천뢰가 있는지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무슨 방법으로 저 두 개를 막아낼 것인가. 두 사람이
막아내지 못하면 형수 세 사람과 소령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서 터지게 된
다.
안에 있는 네 사람 모두 밖의 동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은 저놈을 막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순간.
찍새와 뱁새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적을 죽일 때 보여주었던 웃음이, 세상을 향한 분노를 토해내던 얼굴이 아
니었다. 자신들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던 표정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그 모든 원망을 다 버렸다. 억지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것들을 녹여버렸다.
이제는 진정으로 웃을 수도 있다. 가족의 슬픔에 같이 슬퍼할 수도, 가족
의 기쁨에 같이 기뻐할 수도 있는 미소.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버린 자들의
미소였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알아버린 얼굴이었다.
"아까 한 말 취소다. 너 잘생겼다, 임마."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죽음이란 것 자체는 생각나지도, 생각할 수
도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그들 둘밖에 없다. 당연히 가야 하는 길
이다. 다른 형제들이 있었어도 같은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나 미련 같은 것도 없다. 날 때는 개떡같이 태어났
지만 죽을 땐 최고가 아닌가. 슬퍼해줄 형제가 있고 울어줄 가족이 있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삶이다.
날아오는 광천뢰를 향해 몸을 날리던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서로를 쳐다보
았다.
"누가 먼저 하나 내기하자."
"좋다. 먼저 가는 놈이 형님이고 다 먹기!"
서로를 쳐다보는 눈에 뜨거운 정이 흐르고 두 사람의 몸에서 처절한 혈광
이 피어올랐다. 이어서 터지는 통렬한 외침.
"혈극폭!"
두 마디의 통쾌한 외침이었다.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분노의 외
침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고 형제를 지킨 환희였다.
붉은 혈운에 감싸인 도가 빛살처럼 날았고, 그 마음을 따라 두 개의 혈운
이 따랐다. 그리고 땅바닥에 나란히 떨어진 주머니 두 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선택, 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몸을 날린 것이다.
"안 돼!"
뱁새와 찍새의 환희의 외침과는 달리, 소살우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분하를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나온 갈태독과 모든 일행이 두 사람을
보았다.
허공으로 찬연하게 퍼져나가는 찍새와 뱁새의 육편(肉片)들. 빈 몸으로 왔
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산화해갔다. 갈태독이
몸을 날리고 조천영이 몸을 날렸다. 광견조와 그곳에 있던 모든 가족이 통
한의 눈물을 흘리며 몸을 날렸다.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눈앞에서
, 자신의 눈앞에서 두 형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금방까지 웃음 짓던 형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먼저 몸을 날린 소살우가 도착한 곳은 백무천이 있는 분주객잔 쪽이
아니었다. 뱁새와 찍새의 몸이 분시되어 사라진 곳이었다. 두 사람의 몸이
사라진 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으고 있는 소살우의 눈에 혈루가 흘렀다.
북경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다시 건달노릇을 하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엄청난 무공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인이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픈 욕심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들에겐 건달이 가장 잘 어울
리고 그게 천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자신들이 가져왔던 그 광천뢰에 의해서 형제가 사라지
고 말았다.
"죽인다!"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원 전원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분노,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엄청난 분노가 표출되어 사방으로 퍼져나
갔다.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크! 하하하! 네 놈들이 언제까지 숨어 있을 줄 알았더냐?"
백무천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나왔다. 온몸에서 짜릿한 쾌감이 밀려왔다.
바로 이 기분이다. 어검술까지 구사하는 놈들이 자신이 던진 광천뢰를 막지
못했다.
허공을 화려하게 채색하는 피의 축제, 이러한 기분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
다. 강해져야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강한
자의, 진정 강한 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똑똑히 느껴볼 것이다.
백무천의 몸에서 붉은 화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지옥염
화(地獄炎火) 같은 불길이 솟구쳐 오르며 주변의 모든 대기를 태워버렸다.
미증유의 열기가, 거둘 수 없는 불길이, 화령극지의 모든 것이 그의 몸을
통해서 발현되었다. 신의 무공이라 했던 화룡파천비공을 극도로 운기한 백
무천의 몸이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불
새가 나타났다.
가루라(迦樓羅).
두 눈을 부릅뜬 독수리 머리 형상에서 세상을 태울 듯한 열기가 뿜어져나
오고, 활짝 편 봉황의 날개에선 화염(火焰)의 바람이 불어나왔다.
"자! 와라. 너희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마."
하찮고 하릴없는 존재들, 어차피 없어져야 할 버러지들인 것이다.
"이 개새끼!"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렇게 생각
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다 죽고 싶었다. 그런
자신들을 건드린 놈은 저들이 아닌가. 가만히 있는 자들을 먼저 때리고 욕
했던 놈들이 저들 아닌가. 놈이 강하건 말건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는다.
먼저 간 형제의 넋을 위로해야 할 뿐이다.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원 전원이 백무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온몸을 혈
광으로 덧칠한 붉은 기운이 백무천을 향해 날았다. 자신들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을 시전한 것이다.
"우하하하! 화룡파천 제이 공, 화룡사멸무(火龍死滅舞)!"
거대한 광소와 함께 가루라 형상의 백무천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봉황의 날개로부터 수십 마리의 화룡이 쏟아져나왔다. 전부 마흔아홉 마리
의 화룡이 사방으로 날며 광견조원들이 던진 도를 집어삼켰다.
콰콰쾅!
거대한 폭음소리와 함께 광견조들이 뒤쪽으로 날아가며 거칠게 떨어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신의 무공이라 칭했던 화룡파천비공의 이 초에 의해,
이기어도를 구사하는 열 명의 고수가 패했다.
그러나 백무천의 상태도 그리 나아 보이진 않았다. 붉은 화염이 흐릿해지
며 내부에 있는 그의 모습이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빙백수라무!"
피를 꾸역꾸역 넘기고 있는 광견조원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조천영의 입에
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미안함이었다. 소령이의 숨소리만 아니었던
들 백무천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과 소령이를 지키기 위
해서 뱁새와 찍새가 몸을 던졌다.
"조천영! 네 년이더냐? 그깟 빙천수라마공으로 이 백무천을 희롱했단 말이
냐?"
동정호에서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바로 이년 때문에, 이 빌어먹을 무
공 때문에 버러지에게 당했던 것이 아니던가. 평생 지우지 못할 마음의 상
처를 입고 말았다. 이제는 그 빚을 갚아야 할 때다.
"가랏! 화룡사멸무!"
시뻘건 불꽃이 피어오르며 원래의 가루라 모습으로 회복한 백무천이 다시
한 번 화룡파천비공 이 초를 펼쳤다. 일 초만 시전해도 충분할 터인데 뒤에
있는 노인 때문이었다. 천장지옥마 갈태독이 엄청난 기세로 덮쳐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천영아!"
조천영의 선제공격에 갈태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녀의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거의 백산에 버금가는 무공이었다. 더구나
서로 상극인 무공이 아닌가.
똑같은 경지라면 빙공을 익힌 조천영이 유리하겠지만 적어도 상대는 두 단
계 정도는 위의 인물이다. 빙공이 먹혀버린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다급해
진 갈태독에게서도 사방을 울리는 일갈이 터졌다.
"지옥전륜대능력!"
자신의 최후 절초, 백산마저도 곤혹스럽게 했던 지옥전륜대능력을 펼쳤다.
백무천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수십 마리의 화룡이 사방으로 그 동체를 흔들
며 날아들고, 조천영의 손에서 쏟아져나간 극빙의 기운을 간직한 수창이 화
룡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수창의 뒤를 이어 갈태독이 만들어낸 혼돈의
검은 기운이 따랐다.
두근! 두근! 둥! 둥! 둥! 둥둥둥!
'할까?'
"아니야, 사부의 무공만으로도 돼."
'그렇지 않아, 해야 돼. 죽여야 돼.'
심장소리가 급격히 빨라지며 온몸으로 뜨거운 피가 요동치듯 휘돌아간다.
멀리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뒷골을 타고 심장에 다다라 그 속으로
열기를 밀어 넣는다. 뜨거운 기운이 점점 커지며 피를 데우고 몸을 데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가슴 가득 밀려들고 숨을
쉴 수가 없다. 목까지 넘어온 욕지기를 뱉어낼 수가 없다. 타는 듯한 가슴
에서 시작된 갈증이, 피를 갈구하는 마음이 눈을 뜬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모든 사물이 사라진다.
스팟!
내려뜨린 팔에서, 걷고 있는 다리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와 춤을 추는 것
같다. 뱁새가 죽었고 찍새가 죽었다. 살우가 다쳤고 동생들이 피를 흘렸다
. 영감이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선명한 피를 뿌리며
뒤쪽으로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는 눈에 박혔다.
"크-아-악!"
붉은 혈무가 춤을 추고 있다.
피보다 더 붉은 비도가 사방으로 휘감기며 허공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지면으로 떨어졌다 다시 하늘로 퉁겨져 오르고, 왼쪽으로 감아 돌다 오른쪽
으로 찔러간다. 산발하여 솟아오른 검은머리와 그것보다 더 진한 묵빛 비도
가 춤을 춘다.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저주받은 운명을 슬퍼하는 자,
가족을 잃은 자의 한탄이 흘러내린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에서 극빙의 기
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날렸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천멸우!"
한 사람이 아니다. 저주받은 악마의 영혼과 가족을 생각하는 인간의 영혼
이 하나가 되었다. 휘감친 왼손에서 생천비가 흐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네."
"생혼멸!"
힘차게 차대는 왼발에서 화염지옥이 탄생하고 휘감아 올린 오른손에서 생
자의 혼이 사라진다.
초리하 언덕에서 흑색지안의 두 번째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굳이 무상신법
을 펼칠 필요도 없다. 천비(天匕)에 먹일 피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목마
름을 해소시킬 시원한 피가 사방에 널렸다. 뻗어내는 손끝에, 차올리는 다
리에, 모든 생명이 걸려들었다.
사방에서 솟아오르는 흐릿한 핏줄기만 보일 뿐이다. 움직이고자 해서 움직
이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증거인 양 거칠게 뛰는 심장이 있는 곳은 비도
가 먼저 알아차린다. 비도가 원하는 곳을 향해 노래만 불러주면 되는 것이
다. 죽음의 노래만…….
"으아악! 사신이다. 악마가 나타났다!"
승리의 기쁨에 젖어 있던 천무맹 무인들이 병장기를 버리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한 번의 붉은 바람이 불 때마다 대여섯 명이 그대로 죽어나간다.
자신의 몸이 잘린 것도 모르고 도망을 치려다 두 조각으로 잘린 후에야 상
태를 알아차린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공포.
동료의 잘린 시신보다, 재가 되어 사라진 동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으니
암흑의 무저갱 같은 검은 눈동자와 사방에 날리며 피를 흡수하는 검은 비
도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형제들의 죽음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나지막이 광풍가
(狂風歌)만 불러야 했던 철가인의 눈(目), 그 침묵의 검은 눈이 먹이를 찾
아다닌다. 백산의 모습을 쳐다보며 망연자실 자신들의 무기를 놓아버린 사
람들.
"오! 하늘이여……."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그 자리에 박힌 듯 멈춰 섰다. 광견조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광풍대원들과 두 사람은 흑색지안이 발현된 파멸안을 처음보고 있다
.
엄청난 충격이었다. 백산의 모습이 저런 형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나직한 노랫가락 속에 자행되는 피(血)의 행렬, 누구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힘이었다. 저주였다. 하늘이 내린 피의 저주.
"산아……."
팽무도에게서 오열이 흘러나왔다. 파멸안이 다시 재림해버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기 전에는 멈출 수 없다는 흑색지안이 또다시 나타나버렸다
.
어쩌란 말인가. 어찌하란 말인가. 자식이 되었던 제자가 마물의 길을 걷고
있다. 죽음의 길인지 알면서도 가고 있질 않는가. 참고자 한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명안이 셋이나 있는데 광혈지안(狂血之眼)도 멈추게 했던
광명안이 이곳에 있는데, 녀석은 스스로 파멸안이 되어버렸다. 극도의 분
노와 살심으로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형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끝내야 합
니다."
얼이 빠져 있던 남궁세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 방법
이 없다. 조금이라도 적의 수를 줄여야 한다. 천비비가 흡수하는 피의 양이
줄어들도록 해야 광혈지안으로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
"모든 힘을 다해서 적을 죽여라. 그래야 백산이 산다. 도망치는 자들은 버
려두어라!"
백산이 살고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남궁세우의 외침에 따라 모든
광풍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을 구축할 여유도 없었다. 백산 주변
에 있는 자들부터 먼저 정리를 해야 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남궁세우와 팽무도보다 더욱 놀라는 자가 있었다. 잠자
코 있던 파멸안을 불러내버린 인물, 아득한 태고 적에 존재했던 신의 가문
을 이었고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힘을 흡수한 자.
금신가의 화룡파천비공을 익힌 백무천이었다. 조천영에게 정통으로 일장을
먹이고 갈태독의 절초를 받아내느라 흔들렸던 내기를 조정하는 순간에, 파
멸안의 재림을 목격한 것이다. 천오백 년 전 신가를 멸망시켰던 파멸안, 천
하를 죽음의 공포에 떨게 하였던 학살자가 앞에 있는 것이다.
"네 놈이 파멸안이었더냐? 버러지 네 놈이 그 노예들의 후손이었더란 말이
냐?"
백무천의 몸에서 가라앉았던 불길이 다시 솟아올랐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
이 몸이 분노하고 있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신가의 염원을 지고 있음이다.
파멸안에 대한 원한을.
"과거에는 네 놈이 최고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나 백무천이 최고란
말이다! 화룡지천무!"
질시였다. 버러지 놈이 잡은 행운에 대한 질투였다. 천오백 년이 흘렀는데
, 어찌 파멸안의 기연이 저런 버러지 놈에게 이어졌단 말인가. 없애버려야
함이다. 군림제일 적으로 등장할 놈인 것이다.
포효같이 울려 퍼진 백무천의 외침과 함께, 극양의 열기를 머금은 열두 마
리의 화룡이 백산의 몸을 향해 거세게 파고들었다. 백무천의 그런 질시에
찬 외침에도 불구하고 백산의 행동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나직한 저음의
노랫소리만이 붉은 혈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울부짖어."
"묵운명!"
왼손이 힘차게 내밀어지자 그곳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광풍이 흘러나오고 오
른발에 있는 뇌천비가 분천뢰의 초식을 쏟아냈다. 폭풍이 불고 뇌성이 울리
며 엄청난 기운이 백무천의 화룡을 향해 나아갔다.
꾸아악!
구르릉! 콰앙! 쾅!
마치 살아 있는 듯 괴이한 소성을 내지르는 화룡과 분천뢰에 의해서 만들
어진 뇌전이 거대한 폭음소리와 함께 격돌하였다.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대
기가 말라버렸다. 두 개의 천력(天力)이 사방 이십여 장을 초토화시켰다.
이미 죽어버린 차디찬 몸들이 땅거죽과 함께 튀어 올랐다 다시 가루로 부서
져 내린다.
서로에게 반발되는 충격에 백무천과 백산의 몸이 십여 장 뒤로 밀렸다.
"으윽!"
백무천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나왔다. 화룡이 파괴되자 그 고통이
자신의 심령(心靈) 속으로 전해져왔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무(神
武)라 일컬어지는 화룡파천비공은 내공만으로 운용되는 무공이 아니었다.
내공과 심령과의 결합이었다. 비공에 의해서 만들어진 화룡이 파괴당하면
내력의 손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황폐화가 오는 것이다. 백산이
익히고 있는 혈뇌문 무공과 똑같은 이치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혈뇌문 무공의 기본 바탕이 오신가와
육대천가의 무공이 아니던가. 그들의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혈뇌문의
무공은 거의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원류인
신가의 무공이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대성하게 되면 인간의 감정이 없어
진다 했던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버러지 놈! 한 가닥 재주는 있구나!"
극양의 기운이 솟구치며 완전한 가루라의 모습으로 변모한 백무천이 백산
을 향해 일갈을 토해냈다.
"제이 공 화룡사멸무!"
꾸아악! 꾸아악!
활짝 펴진 가루라의 날개로부터 수십 마리의 화룡이 뛰쳐나가며 백산을 향
해 돌진해들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오십여 마리의 화룡을 쳐다보던 백산
에게서 다시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천멸우!"
"금강보다 단단한 것이 부서지리라!"
"금강파!"
먼저 차올린 오른발로부터 시작된 빙천비의 기운이 앞서나가고, 후에 차올
린 왼발에서부터 금천비의 기운이 뒤따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빙천비에서 생성된 극빙의 기운이 만들어낸
형상은 조천영의 빙천수라마공이었다. 수십 개의 새하얀 수창이 뒤에서 다
가오는 금천비의 기운을 받아서 투명하게 변했다. 지상에서 가장 차갑다는
빙정의 기운이었다.
"혈광풍!"
다시 한 번 백산의 입에서 나직한 저음이 흘러나오자 빙정의 기운을 머금
은 수창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회전을 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빙정의
기운을 더욱 차갑게 만들어버리는 풍천비의 힘이었다.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가인의 한으로 빚어진 광혈지옥비는 자체
적으로 힘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아니었다. 서로의 기운을 더욱 강하게 해주
는, 상생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무기였던 것이다.
내공심법과 정반대의 현상. 내공을 익힐 때는 상극의 기운을 이용했는데
그 무공을 펼칠 때는 상생을 바탕으로 기운이 표출되는 것이었다.
"커어억!"
이번에도 백무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든 화룡들, 투명한 수창에 관통된 마흔아홉 마리의 모든 화룡들이
수창을 녹임과 동시에 사멸되고 있었다. 충격은 백무천만 받고 있는 게 아
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백산의 입가에서도 한줄기 핏물이 내비쳤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한 듯 백산의 몸은 계속해서 백무천을 향해 다
가들었다.
"놈! 끝장을 본다. 마지막 삼 초도 네 놈이 견디나보자, 화룡천멸무!"
"모든 한이 대지로 돌아가니!"
"무한토!"
"더 이상 분노는 없어라!"
"광풍무한!"
목소리는 저음이었지만 그의 손과 발에서 나온 힘은 약하지 않았다. 사방
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그의 주변이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마지막 초식인 광
풍무한이 펼쳐지자 지금껏 피만 마시고 유영하고 있던 천비비에서 엄청난
혈광이 솟구치며 모든 비도가 춤을 추었다. 열두 개의 모든 비도가 힘을 쏟
아낸 것이다.
"안 돼!"
두 곳에서 동시에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처음 비명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죽이며 관전하고 있
던 마금천과 그의 사질 두 명에게서였다. 백무천이 만들어낸 백여 마리의
화룡들이 백산이 만들어낸 기운에 사멸되어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
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백무천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팽무도였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백산이 당
해서가 아니었다. 천비비, 붉은 혈광을 줄기줄기 쏟아내는 천비비 때문이었
다.
피를 흡수해야만 살 수 있다 했던 광혈지안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광혈
지안에 도달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혈가의 후예도 방법이 없다 하지 않
았던가.
"천영이! 천영이를 살려야 해……."
그 수밖에 없었다. 백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은 소운이나
추렴이보다는 조천영이었다. 조천영이 있었기에 백산의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천영이…… 천영이는……. 오! 안 됩니다."
팽무도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있는 조천영을 갈태독이 치료를 하고 있었다. 단순한
치료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내공을 다하여 조천영의 몸속에서 날뛰고 있는
화마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천과 교환했던 일 장에서 화룡 한 마리에 그대로 잠식당해버렸다. 그
화룡을 밀어내기 위해선 극빙의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운을 가진 당
사자는 이미 미쳐 있는 백산밖에 없다. 지금 싸우고 있는 백산을 불러올 수
도 없고, 또한 부른다 한들 알아들을 입장도 아니기에 자신의 내공으로 막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손을 떼는 순간 조천영은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갈태독의 표정
이 고통스럽게 변하자 뒤에 있던 오구가 재빨리 그의 명문혈에 손을 붙이고
내공을 밀어 넣고 있었다.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코에서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으면
서도 밀어 넣는 내공을 멈추지 않았다.
'빨리 백산을……. 어서!'
망연자실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팽무도의 머릿속으로 갈태독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았습니다."
갈태독의 입과 코에서 더욱더 많은 피가 솟구쳐나왔다. 더 이상 버티는 게
무리라는 의미였다.
"소운아! 추렴아! 너희들이 해야 한다. 산이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사람은
너희 둘밖에 없다. 내 말 명심해야한다."
팽무도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소운과 추렴이 두 사람으로 백산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지 못하면 전부 죽는다. 이미 광혈지안의 징후는 나타났고, 지금
중지시키지 못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언니……."
"가자!"
울고 있는 소운의 손을 잡은 냉추렴이 백산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녀들이
백산을 향해 움직이는 그 순간에 백무천과 백산의 대결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로 간에 피를 토해내고 있으나 백무천의 패배가 확연했다. 그가
만들어낸 화룡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십여 마리의 화룡만 남아서 백무천의
몸을 방어하고 있었다. 화염 불꽃을 피워대던 가루라의 모습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백무천이 처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벽이 남아 있었던 거였다. 온통
심령을 휘젓는 고통으로 인하여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놈의
공세는 화룡파천비공의 약점을 너무 정확하게 꿰뚫었다. 화룡이 터져나가
도 시간 간격만 있으면 마음을 다스려 대항할 수 있는데, 지속적인 고통을
주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릴 만하면 두 마리의 화룡이 소멸되어나가고, 그 고통을 극복하
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싶으면 또다시 두 마리의 화룡이 터져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룡파천비공을 완성했어야 했다. 신
의 무공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걸 무시했다.
"피하십시오, 사숙!"
마지막 화룡이 터져나가는 순간, 백무천 앞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뛰어들
었다. 공동파 장로 두 명, 그들이 몸을 날리며 백무천을 향해 일 장을 날리
고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막아내었다.
"커억!"
왼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고통에 백무천이 비명을 내질렀다. 두 명의 사
질이 가루로 흩어지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왼팔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크아악!"
적을 놓쳤다는 생각에서인지 백산이 분노의 괴성을 발하며 백무천의 뒤를
쫓았다.
"막아랏!"
백무천 뒤로 포진하고 있던 산동분타원 전원이 백산의 앞을 막아섰다.
"분타주!"
백무천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마금천을 불렀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을 따
르기로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
다. 무천각이나 십천각 인물들은 이미 도망을 치고 없는데 그들만이 남아서
뒤를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님!"
마금천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한 번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 배웠습니다."
"알겠소, 분타주. 분타주와의 약속 반드시 지키겠소."
마금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 파벌이 없는 맹을 만들어 달라 했던
요구, 그것을 약속했기에 자신을 따랐던 것이고 그 약속을 위해 죽고자 한
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백무천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마금천이 산동분타원들을 향해 고함
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산동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내다. 약속을 아는 사내란 말이다."
"고맙소, 분타주. 반드시 약속하리다. 파벌을 없애는 것은 물론, 그대들의
복수까지……."
왼팔이 없어진 것보다 마금천의 뒷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또다시 이
곳에서 두 사질과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었던 산동분타원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있다.
"두고 보자, 버러지 놈. 꼭 갚아주마. 이 빚은 꼭……."
이번에도 패했다. 천마맹과의 전쟁에는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인간으로 생
각지도 않았던 뇌룡현의 버러지에게는 또 패하고 말았다.
도망치고 있는 무천각이나 십천각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갈수연의 말
로는 그들에게 광천뢰가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광천뢰가 사방에서 터지
며 천무맹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 전쟁의 끝에 얼마나 살아남을지
알 수가 없다.
"천무맹 무인들은 퇴각하라!"
백무천에게서 터져나온 퇴각 명령이 초리하 곳곳에 메아리쳤다. 굳이 백무
천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십천각과 무천각 인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날
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반대로 죽음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마금천을 비롯한 산동분타원 백여 명이었다. 양맹의 전쟁 중에 이미 백여
명의 무인들이 죽었고 살아남아 있던 나머지 인원들마저도 먼저 간 형제들
과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정녕 인간이 아니었더냐……."
이건 놀라움도 아니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
다. 도대체 뚫고 들어갈 틈이 없다. 모두 열두 개의 비도가 사방에서 춤을
추며, 다가오는 부하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모든 방향
에서 붉은색의 죽음이 생겨났다.
"어차피 산동분타에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어."
마금천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날렸다. 무공이 강한들 무엇 하랴. 꿈이 큰
들 무엇 하랴.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그런 곳이 산동분타였다. 그곳
은 천무맹이 아니었다. 천무맹의 죄인들이 가는 유형지였다.
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이 없는 유배지(流配地). 그러나 지금은
그곳을 떠났다. 죽음만큼은 산동분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이 괴물아! 같이 한번 죽어보자."
마금천이 괴물이라 부르는 인간.
그 괴물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무런 생각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열두 줄의 시구(詩句)만이 입을 통해 흘렀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화염지옥이 탄생하고, 핏빛 혈광이 몰아치
고, 검은 구름이 떠다닌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순간에 하나씩 쏟아져나간
시구가 혈관(血管)을 통해, 뇌룡사를 따라 핏빛 비도에 이른다.
그리고 터져나가는 육신들. 한 번의 손짓이 목마름을 달래고, 한 번의 발
길이 뜨거운 가슴을 식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구름이 눈에 끼
었는지, 분간할 수 있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주변을 어지럽히는 발
자국소리가 있고, 비도가 그곳을 찾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피
(血)가 있고, 그 소리가 멈춰지면 안락(安樂)이 찾아온다.
풍마도 마금천을 포함한 산동분타원 백여 명이 죽어가는데 겨우 이 각이
걸렸다. 처음 흑색지안이 발현될 때보다 더욱 강해지고 더욱 빨라졌다. 그
런 백산의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인물들, 남궁세우의 후퇴 명령에 더
이상 살행을 멈추고 한쪽으로 피한 광풍대원들이었다.
"사부님!"
일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팽무도를 불렀다. 저 빌어먹을 파멸안을 막기
위해서 그 노력을 했고 뇌룡현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왔는데 결국은 막지
못했다. 아니, 막는 것은 고사하고 그를 피해 도망을 쳐야 한다.
"추렴이와 소운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는 결코
마인이 될 수 없다."
바람이었다. 지금 백산의 상태는 비도만 붉어졌을 뿐, 눈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저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록과는 다른 점이
었다.
혈가의 후예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 백산의 눈은 붉은색이어야 한다. 그러
나 백산의 눈은 아직 흑색지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백산이
변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말이다.
긴장된 표정으로 모든 일행이 백산을 향해 가는 냉추렴과 소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운과 냉추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십여 장 앞에서부터 백산을 불렀으나 두 개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
런 반응이 없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도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계속해서 피를 넘기면서도 광풍대원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쪽에서 수십 개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 소리가 멈춰야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언니!"
소운이 울먹이며 냉추렴을 불렀다. 백산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는 게 눈
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백랑!"
백산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소운의 앞을 막아섰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죽고 나면 이 사람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시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다. 님이 처한 상황을, 님이 안고 가는
저주스런 운명을, 자신과 소운이 죽는 순간 광혈지안이 될 것이다.
인간의 피가 있어야 살아가는 광혈지안. 소운과 자신이 죽고 천영 언니와
나머지 가족들이 살아난다 해도 이 사람은 떠나고 말 것이다. 외롭게 떠돌
다 죽든지, 아니면 흡혈귀가 되어 세상을 피로 적실 것이다. 무서워해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인데, 그의 모습이 변했다 한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죽음까지도 같이 하려는 님이다.
천영 언니도 그랬다. 온 사방에 시체 조각이 널려 있는데도 님을 향해 웃
었다. 님을 위해서 울었다.
'힘을 내라, 추렴아. 아버지와 어머니 죽음도 겪지 않았더냐. 아버지를 죽
인 사람을 사부로, 의부로 모시고 있지 않더냐. 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냉추렴, 그녀도 부모님과 철목승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세 분의 사연, 그러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녀의 행복만을 위해 살
고 있는 사부를 원수로 여길 수가 없었다.
사부를 다시 인정하는 데 오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의부로 생각하고
있다. 두려워하면 안 된다. 님의 모습일 뿐이다. 사랑하는 님의 다른 모습
일 뿐이다.
"정신 차려요,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보란 말이에요."
"안 돼!"
순간 소살우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백산의 손이 두 사
람을 향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형님! 광천뢰! 광천뢰 남은 것 전부 가져오란 말이야!"
그 방법밖에 없다. 그것마저도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아직 열 개의 광천뢰
가 남아 있다. 그것만 있으면 같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
다.
"살우야!"
눈물을 흘리며 광천뢰를 모아들고 오는 소살우를 석두가 불렀다. 소운과
냉추렴의 목을 쳐가던 비도가 마지막 순간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사라랑! 사라랑!
냉추렴과 소운이 마주잡고 있는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애명환 울음소리였다
.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던 백산이 애명환 소리에 손을 멈췄다. 냉추렴이
소운을 막아서면서 서로의 손을 잡았고 왼손에 같이 끼고 있던 애명환이 만
나자 울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누구?"
백산의 입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왕! 오라버니……."
소운을 울음을 터트리며 백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
렸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포기하고 말았는데, 드디어 님이 정신이 돌아왔
다.
"백랑! 언니가 위독해요, 어서요."
지금 살아난 감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신히 돌아온 정신인데 천영 언니
를 구하지 못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서둘러 백산의 손을 잡고 조천영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괜찮으냐?"
팽무도가 걱정스런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멈추
질 않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조천영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
었다.
"어떻소."
속에서 울컥하니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천영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정신을 잃고 다른 짓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더구나 마지막 자신의 앞에
있던 두 여인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
마치 저 먼 꿈속의 목소리라 여겼다. 그런데 애명환 소리가 자신을 깨웠다
. 천영에게도 있는 애명환, 소운에게도 추렴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
는 그 애명환 소리 때문에 정신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알아듣지 못
하고 반지 소리에 정신이 들다니…….
"아예 안 보이는 게냐?"
피를 흘리고 있는 갈태독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떠냐고 묻는 백산의 행동
때문이었다.
파멸안. 정말이지 저주스러운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철가인들의
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살아 있는
생물을 전부 도륙하게 만들었지 않은가. 철가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과가 그리 나왔다.
"조금만 있으면 되오, 어서!"
자신을 갈태독의 뒤로 앉혀 달라는 말이었다. 갈태독이 바로 물러날 수 없
기에 그를 통해서 냉기를 밀어 넣으려 함이다. 지금 몸 상태로 가능할지 모
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백산의 몸에서 저주스러운 열두 개의 비도가
튀어나와 땅속 깊숙이 박혀들었다.
'빌어먹을, 엄청나게 망가졌군.'
내공을 끌어올리던 백산이 내심으로 욕설을 토했다. 지금 상태로는 내기를
모으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화룡파천비공 때문이었다. 백무천은 팔을 잃었지만 백산도 엄청난 내상을
입었던 터였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내기를 이용하지 못하면 진원지기라도.'
진원지기를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그것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뽑아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한다 하였다.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끊임없이
흘러나와 죽는다 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천영을 살리는 길이기에 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백산이 자신의 생명에 해당하는 진원지기를 뽑아내어 내공으
로 변환시키자 몸 상태가 급격하게 호전되며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순간 땅속에 박혀 있던 열두 개의 비도로부터 엄청난 힘이 들어오
기 시작했다.
'빨리!'
그러나 백산의 마음은 급했다. 천비들로부터 빨리 기운이 들어와야 한다.
자신이 살아나는 길이 아니라, 살아 있어야 그녀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대지로부터 유입되는 기운과 진원지기가 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
다.
'멈춰라! 제발, 제발 멈추란 말이다.'
내심의 절규가 이어졌다. 진원지기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도에 의해서 들어온 기운은 이제 절반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됐다!'
드디어 진원지기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비도에 의해 유입된 기
운이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진원지기를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더 이상의 진원지기 흘러나오지 않자 백산의 얼굴이 편안하게 변
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빙천비와 풍천비를 이용하여 극빙의 기운을 만든 후,
갈태독을 통해서 보내기만 하면 된다. 백산의 몸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극빙의 기운을 접한 갈태독이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조천영의 몸을 치료하
기 시작했다.
지금 조천영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갈태독이 내공을 이용하여 온몸에 잠식
해 있던 화마의 기운을 잡고 있었지만, 전신 세맥에까지 퍼져 있는 그 기운
들을 전부 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곳의 세맥은 손상된다 하더라
도 그대로 두고, 없어서는 안 될 맥만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갈태독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조천영의 모든 내공은 사라져
버렸다. 내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상태라면 그녀를 깨워서 어찌해볼 수
있을 터인데 그것마저 불가능했기에 갈태독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휴! 됐다."
거의 한 시진 동안 치료에 전념하던 갈태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천
영의 몸에서 손을 뗐다.
"다 끝난 겁니까, 어르신."
남궁세우가 반색을 하며 갈태독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 찍새와 뱁새를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경황도 없이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다. 모든 광풍대원들이 안도의 한숨
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희생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조천영은 이미 백산의 부인만이 아니었다. 모든 대원들의 대모였던 것이다
. 특히 광견조원들에게는 누나이고 어머니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안도
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하는 상황임에도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울고 있는 팽무도의 얼굴에 깜짝 놀란 남궁세우가 그를 불렀다. 조천영이
살아나서 감격에 겨워 우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이 나이를 더 먹어버렸어."
팽무도가 백산을 가리키며 울먹거렸다. 모두들 조천영을 응시하고 있을 때
그만은 백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산이 이곳에 왔을 때 그의 몸 상태로는
도저히 내공을 일으킬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뭘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백산의 몸속에 있는
기운은 다른 내공이 들어간다 해서 융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이미 알
고 있었다. 가능한 사람이라면 오구밖에 없었는데 그도 이미 탈진하여 쓰러
져 있었던 거였다.
남에게 줄 수는 있어도 받아들일 수는 없는 특이한 내공. 오직 혼자의 힘
으로 내기를 끌어올려야 했고 그래서 진원지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탱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세월을 건너버렸다.
사십 대에 달하는 얼굴로 변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흰머리까지. 그나마 비
도에 의해 급속하게 기운이 채워져서 진원지기의 손실이 멈추었지, 잘못되
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설마……."
남궁세우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진원지기를 다 써서 죽어간 무인은
보았지만, 그것을 뽑아 썼다고 몸이 노화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처음 보았
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놀라운 일이군,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서둘러 운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갈태독이 백산을 쳐다보며 중얼
거렸다.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진원지기가 생을 유지하는 기본이라는 것은 전부 알 걸세."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향해 갈태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진원지기(眞元之氣).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내기(內氣)를 말한다. 즉, 선천지
기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가지게 되는 기운. 부모로부터 받은 선기와 하늘
로부터 받은 천기, 그리고 대지로부터 받은 지기.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혼백이 되고 육신에 스며들면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진원지기를 소모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숨을 쉬고 활동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원지
기를 사용하는 행위이고 진원지기를 다 썼다 함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 내공을 가진 무인들이 더 오래 사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건 진원지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후천지기라는 내공을 선천지기 대신
사용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네."
내공이 강하다 해서 진원지기를 지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들이 있으니 도인들이 말하는 신
선술이 그것이다. 화식을 멀리하고 벽곡을 위주로 생활하면서 선천지기를
키우고자 하는 그 노력이, 선천지기의 방출을 막고 그동안 사용했던 선천지
기를 다시 쌓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현상이 무인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초
극의 내공을 가진 자들이다. 무의 극에 도달한 자들의 상태도 깨달음이란
면에서는 신선술을 연마하는 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 극에
이룬 자들이 반노환동(返老還童)을 경험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마 저 녀석의 무공과 관련이 있겠지……."
갈태독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자리를 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명
이거니 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찌 저런 일이……."
"무공 때문이야."
백산의 무공, 즉 혈뇌문의 무공을 알고 나서 팽무도가 가장 놀란 점이었다
. 지금 백산의 내공은 처음 자신이 보았던 상태에서 변한 게 없다. 그런데
그의 무공은 자신을 훨씬 능가했다.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혈뇌
문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비도였다.
열한 개의 비도에서 천지의 기운을 끌어와 원래의 가진 내공과 하나로 만
드는 것이었다. 즉, 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힘이 백산의 내공이었다.
"그럼 그 때문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못하는 것이었습니까?"
이제야 백산의 상태가 이해 간다는 듯 남궁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
제일이라 할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백산이 환골탈태를 못하고 얼굴의
흉터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혈뇌문의 무공
때문이란다.
비도에 의해서 유입되는 기운은 빌려온 것일 뿐 백산의 것이 아니었다. 외
부로 힘을 발휘할 수는 있을지언정 내부적인 상황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것도 운명이라면 따라야겠지……."
갈태독과 같이 그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붉은 혈광에 싸여
있는 상태여서 이제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
다.
초리하 갈대밭을 가득 채웠던 뭇 군상들의 탐욕을 쓸어내기라도 하듯, 검
은 하늘에서 빗줄기가 내리퍼부었다. 붉은 피에 젖어 있던 갈대들이 서로의
몸을 흔들면서 그 피를 씻어내며 다시 평화스러운 모습을 찾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뱁새와 찍새의 조그마한 봉분을 만들고 두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일행
이 피곤에 지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그 시간, 분주객잔이 있던 그 자리에
두 명의 인물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형님은 나에게 좀 맞아야 되겠소."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쪽밖에 없는 주먹이 날았다.
퍽!
얼굴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으로 백산의 몸이 뒤로 밀렸고, 그 다음부터
소살우의 무차별공격이 이어졌다. 손과 발이 움직이며 백산의 전신을 구타
하고 있었다.
때리는 소살우도 얻어맞는 백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때리는 사람도 맞
는 사람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윽!"
결국 견디다 못한 백산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러한 백산의 모
습을 보고도 소살우는 주먹과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한 팔과 두 다리에 붉은 강기마저 일렁였다. 금강불괴에 이르러
있기에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기를 이용하여 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강도 퉁겨버린 백산의 몸이 강기라 해서 뚫을 리가 없었다. 약간
의 고통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지금 소살
우가 자신을 때리고 있는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소운과 추렴에게 비도를
휘두르려 했던 행동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다. 녀석은 팔을 버리면서까지
부인도 아닌 형수를 지켰는데 자신은 그녀들을 해하려 했지 않는가.
더욱 고통스러워졌으면,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이라도 느꼈으면 시원해질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가리만 돌인지 알았더니 몸뚱이도 돌이구먼."
결국 때리다 지친 소살우가 쓰러져 있던 백산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자신
보다 더 힘든 사림이 이 사람일 것이다. 부인을 죽일 뻔한 사람인데 마음이
편하다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팼다. 얻어맞았다 해서 그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인생을 더 살았지만 말로써 위로할 자신
도 없다. 그냥 맞다보면 속이라도 후련해지기에 자신이 나선 것이었다.
"니미럴! 정말 좆같이도 쏟아지네."
"고맙다."
"형님! 한꺼번에 나이를 먹은 기분이 어떠쇼."
"너 팔 잘릴 때 기분은 어떻대?"
"팔? 오른손이 있으니 밥은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정도?"
"나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으니 밥 먹는 즐거움은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석 대인이 준 그 구룡인가 뭔가 하는 것 써볼 수 있겠구나 하
는 생각."
"하여간 대가리하고는……. 근데 그 진원지긴가 하는 거 나눠줄 수 없는
거요?"
소살우도 백산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아울러 죽고 싶
지 않으면 진원지기는 사용하지 말라는 말도 함께. 광견조원들의 성정으로
볼 때 악에 받치면 그것마저도 사용할 사람들이기에 팽무도가 미리 경고를
한 것이었다.
"살우야. 내 팔을 떼서 너의 왼쪽에 달면 그게 네 팔이냐, 내 팔이냐."
안 된다는 말이었다. 진원지기라는 것은 그 인간을 특징짓는 생명의 원천
이기에 나눌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나눈다 할지라도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
다.
"씨팔!"
"내가 늙어버린 게 서운한 모양이구나, 고맙다야."
"누가 형님 때문에 그러우? 젊디젊은 형수님들 때문이지."
"개자식,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뭐요?"
"이 손목과 발목에 있는 것 있잖냐, 이놈들만 안 빼고 있으면 너보다 오래
산다고 하드라."
"그나저나 잘됐소. 이젠 얼굴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진짜 형님이 되었으니
까."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소살우의 작은 눈에 눈물이 흘렀다. 더러운 인생이
다. 누가 강호를 먹든 신경 쓰지 않고 사는데 그들은 왜 자신들을 노리는
것인지, 살아남는다는 게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임마! 작은 눈 부으면 아예 안 보인다."
"그럼 형님 눈은 보일 것 같소?"
"뱁새 자식이랑 눈 크기 재보기로 했는데……. 쿡쿡!"
"큭큭큭! 프하하하! 우하하하!"
두 사람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졌다. 뱁새와 찍새가 죽었
는데도 복수하러 가지도 못한다. 이제는 백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하였
다.
또다시 변하게 되면 못 온다 하였다. 자신이 못 돌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
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언젠가 석숭이 했던 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했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게 인생이라 했다. 하고 싶다 해서 다 할 수는 없는 게 삶이라 하였
다.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삶이 최고의 삶이라 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일
을 한다고, 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찾기 위해 황제를 돕는다고…….
"형님, 혼례 올리시오. 더 늙기 전에."
"나 아직 서른도 안 됐다,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