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7/84)

제6장 백무천

 제갈장령이 숨을 거둔 그 시간에 초리하의 다른 곳에서도 차디찬 지면으로

 몸을 누이는 인간들이 있었다.

 천무맹과 천마맹의 무사들.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아닌, 남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

는 그들의 투쟁은 잘려진 육신과 검붉은 피를 남기면서도 끝날 줄을 몰랐다

.

 그들 중 가장 저돌적으로 적을 몰아치는 인물들이 있었다. 정천무룡 백무

천을 비롯한, 산동분타의 생존자 이백 명. 온몸에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면

서도 지칠 줄 모르고 검과 도를 휘둘러댔다.

 석산평에서 당한 한풀이였다. 중앙에서 밀려난 자들의 칼부림이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두 사람, 백무천과 산동분타주인 마금천이었

다.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다. 백무천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열두 마리의

화룡이 사방을 휘저으며 천마맹 인물들을 재로 만들었다.

 화룡파천비공의 일 초인 화룡지천무(火龍地天舞). 고금오천무였던 금황파

천신공의 최후 절초와 같은 위력이라 하였던 그 무공이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살아 있는 자, 죽어 있는 자, 사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붉은

화룡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져간다.

 '엄청나군. 고금오천무의 위력이 저 정도란 말인가!'

 옆에서 폭풍도를 휘두르고 있던 마금천이 경이로운 눈으로 백무천을 쳐다

보았다.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별로 힘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그 손에

서 튀어나온 화룡들의 위력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겉모

습은 붉게 보이지만 그 내부는 거의 백색으로 되어있는 화룡, 열두 마리의

화룡들이 포효할 때마다 천마맹 인물들이 사라져갔다.

 "네 놈이 백무천이란 애송이더냐?"

 눈앞에 있던 천마맹 인물들을 전부 재로 만들어버린 백무천이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인물이 있었다.

 철마궁의 궁주인 철권 고인엽, 그가 백무천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

다.

 백무천 한 사람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다.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일이야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백무천이 쏟아내는 붉은 화룡이 문제였다. 시

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재로 사라지는 동료들의 모습에 다른 부하들이 동요

하고 있었던 터였다.

 첫 전투에서 피해가 많았기에 부하들의 심리 상태가 많이 위축되어 있는데

, 백무천에 대한 공포까지 더하게 되면 전의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나섰다.

 "분타주, 도(刀) 좀 주겠나?"

 "네, 대주님."

 마금천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들고 있던 도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자신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코 백무천을 상관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백무천의 몸에서 흘러나온 미묘한 기

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마금천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산동분타원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분타주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상대의 지

위에 의해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진심에서 우러난

 듯한 정중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

 정천무룡 백무천이란 인물이 새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철마궁의 궁주인 고인엽이란 애송이 놈이더냐?"

 고인엽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고인엽을 향해 다가들었다. 한 걸음

씩 나아감에 따라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세가 변하고 있었다.

 '우욱!'

 고인엽이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백무천

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율적인 살기가 그의 몸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묶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놈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룡각의 각주도 아니고 무룡대의 대주 신분

이다. 뛰어난 무공 때문에 다음 대의 맹주 후보까지 거론되는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자다. 그런데 이 엄청난 기세라니.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건방진 놈, 고금오천무 나부랭이를 익혔다 하여 뵈는 게 없나보구나."

 감히 철마궁의 궁주인 자신더러 애송이라 하고 있다. 실력이 좀 있어 보이

지만 너무 건방지고 오만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무인은 무공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가볍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백무천이 쥐고 있던 도를 단순하게 내리그

었다. 과거 동정호에서 백산과 비무 때 보여주었던 달마삼검의 일 초인 번

뇌일섬, 그러나 그때의 검법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가 아니라

 극양의 기운을 간직한 화염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우웃!"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하얀 빛을 본 고인엽이 기겁을 하며 옆으로 몸을 틀

었다.

 "크윽!"

 엄청난 열기가 그의 왼쪽으로 다가들었다. 백무천의 도에서 쏟아져나온 기

운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피하기만 했음에도 왼팔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이-놈! 수라혈영권(修羅血影拳)!"

 철권 고인엽의 성명절기인 수라무영권. 그중 일 초인 수라혈영권에 의해

만들어진 수십 개의 붉은 정권이 백무천의 전신을 향해 무섭게 밀려들었다.

 그러나 백무천은 빙긋 미소만 지을 뿐 붉은 정권의 무리를 가만히 쳐다보

고 있었다.

 과과광!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고인엽의 신형이 거칠게 뒤로 밀렸다. 거

의 무방비 상태로 그의 권을 받았던 백무천의 몸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는 반면, 저돌적으로 공세를 취했던 고인엽이 밀린 것이다.

 "금강불괴란 말이냐?"

 도검불침의 경지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저런 자가 무룡대의 대

주로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권을 몸으로 받았던 백무천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수라무영권(修羅無影拳)!"

 입을 앙다문 고인엽이 자신의 최후 절초를 펼쳤다. 수라무영권, 말 그대로

 형체가 보이지 않는 권강이다. 너무 빨라서 그 기세를 감지하는 순간, 이

미 몸에 박혀버리기에 무영권이라 불리는 권법이었다.

 자신에게 무형의 기세가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공으로 솟아오

른 백무천이 들고 있던 도를 천천히 찔러 넣었다. 달마삼검의 이 초인 무극

무변이었다. 이미 초식이란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손에 익은 검법이다보니

그대로 펼쳐낸 것이다.

 그러나 그 위력은 달마삼검에서 보여주었던 초식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

했다. 무형권이라 불리던 고인엽의 권강이 백무천의 도(刀) 끝에서 전부 스

러져버렸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분명 사방에서 몰아치는 권강임에도 폭이

삼 촌 정도밖에 안 되고, 그것도 직선으로 내밀고 있는 도를 뚫지 못하고

있었다.

 "컥!"

 백무천이 내밀고 있던 도가 그대로 고인엽의 머리를 관통하자 짤막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사라졌다. 극양의 기운에 의해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머리만 없애려 했는지 목 아랫부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전율스러

운 광경이었다. 이제 막 죽었음에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머리가 타면서 몸

속에 있던 모든 수분마저도 같이 증발되어버린 것이었다.

 "돌격하라!"

 두려운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산동분타원들을 향해 일갈을 내지

르며 백무천의 몸이 재차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미 허공에 머물고 있

던 그의 몸이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더 높은 공간으로 퉁겨져 오른 것이다.

 허공답보의 엄청난 경공을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후퇴하라!"

 고인엽의 죽음을 목격한 척단세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상태에서는

싸워봐야 천마맹의 패배가 기정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응?"

 허공으로 떠올라 있던 백무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천마맹의 후퇴 명령

과 동시에 그들의 후미에서 쾌속하게 몸을 빼고 있는 자들이 보였는데 그들

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마치 무슨 진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

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헉!"

 백무천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계속해서 이동하던 자들이 어느 순간 시

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은둔술도 아니고, 허공에서 꺼지

듯 사라지다니. 한두 명도 아닌 십여 명이.

 "버러지 일행인가? 아니야……."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별것 아닌 무공을 가진 자들이었는데 그런

가공할 신법을 보일 리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환상미로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통진을 엄청난 빠른 신법으로 간주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차 해결하면 되겠지…….'

 그들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이제 강호상에서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수들의 하찮은 행동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다

리고 있으면 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때 하나씩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후퇴하라!"

 어느 정도 천마맹 인물들을 도륙한 백무천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밀고 가면 승리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제갈장령이나 십천각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자신이 주도

했을 때 승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건 제갈수연이 요구하는 사항이기도 했

다. 맹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초리하의 전쟁을 발판으로 정도의 구성

(求星)이 되어야 함이다.

 "이제는 무천각주 자리를 물려받아야겠군."

 오늘 밤 선봉에서 자신의 신위를 보여주었던 이유였다. 제갈장령과는 사전

에 이야기가 되었고, 무천각 인물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자리였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기에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왔으나 그가 기다

리는 무천각주 자리는 없었다.

 삼분지 이 이상 불타버린 군량과 제갈장령의 실종소식이었다.

 '조호이산지계(調虎移山之計)?'

 불타버린 군량을 바라보던 백무천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군량에 불을

질러놓고 제갈장령을 유인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마금천!'

 '네, 대주님.'

 '전 대원들을 데리고 주위를 살펴라. 이곳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샅샅이.'

 불이 났을 때까지 있었다면 방화범을 발견했다는 말인 게다. 도망가는 놈

을 은밀하게 추격했을 터이고 여태껏 돌아오지 않았다 함은 당했을 가능성

이 크다고 봐야 한다.

 "아쉽군, 역시 쉽게 되는 일은 없다는 건가?"

 무천각주의 이양을 말함이다. 제갈장령이 있으면 무난하게 해결될 일인데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내리눌러야 하게 생겼다.

 '대주님, 찾았답니다.'

 '가자.'

 두 사람이 몸을 날려 도착한 곳은 백산과 제갈장령이 싸웠던 바로 그 자리

였다. 격렬한 싸움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고 그 흔적의 중심에 제

갈장령의 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독이군."

 "네?"

 "독에 당했단 말이네. 인체마저 녹이는 극독에."

 검이 놓여 있던 곳의 흙을 조금 맛보던 백무천이 나지막하니 중얼거렸다.

 "그 양반도 대단하군, 독에 당한 상태에서 이 정도까지 해내다니."

 주변의 흔적으로 보았을 때 엄청난 비무였음에 틀림없었다. 몸을 녹일 정

도의 절독에 중독된 제갈장령이 이 정도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버러지 놈 일행인가?'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알기에 버러지 일행 중 최고

고수는 조천영이다. 그런데 그녀가 싸운 모양이 아니었다. 빙공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질이 오면 그들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앞으로가 더 문제

인데.'

 "마금천!"

 "네, 대주님!"

 "자네는 나보다 상급자인데 왜 나를 상전 모시듯 하는가."

 "네?"

 마금천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하고자 해서 그리된 상황이 아니었다

. 백무천이 무룡대의 대주일 뿐이고 자신은 산동분타의 분타주다. 서열로

본다면 분명 자신이 상급자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백무천 앞에 서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거

대한 산악이고 하늘이었다. 백무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

견하게 된다. 그 기분을 없애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려도 보았다. 그러나 아

무 소용없었다. 오 성의 내공을 끌어올려도, 십 성의 내공을 끌어올려도,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항상 똑같은 무게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외감이었다.

 "나를 따르겠나?"

 "네? 무슨……."

 "내가 천무맹의 맹주가 되는데 동반자가 되어주겠냐는 말이네."

 마금천을 바라보는 백무천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에 두지 않고자 하는 철혈(鐵血)의

기운이었다.

 "진정이오니까?"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마금천이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지금 백무천의 발언

은 반역을 의미하는 말이다. 맹주인 화진악을 몰아내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자 하는 것이었다.

 "그대에게 처음으로 하는 소리네. 이미 화진악의 시대는 갔네, 구파일방의

 시대도 갔고. 앞으로는 우리의 시대를 만들고 우리의 역사를 써보자는 말

일세."

 "한 가지만 약속하면 따르겠소이다."

 "호! 뭔가?"

 백무천이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마금천을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전혀 위축됨이 없이 요구사항을 말

하는 그의 기백이 놀라웠던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징은 한 번 믿음을 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군이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기꺼이 따라

가는,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맹주가 되면 산동분타를 없애주시오, 영원히."

 다시는 산동분타원들과 같은 사람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

는 말이었다. 권력다툼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제대로 해 달라는 말이었

다.

 "약속하겠소. 앞으로 천무맹에서 쓸데없는 파벌은 아예 없을 것이오."

 "주공!"

 "주공!"

 마금천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자 주변에 숨어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산동

분타원 전원이 무릎을 꿇으며 군신(君臣)의 예를 차렸다. 누구 하나 거부하

는 자가 없었다.

 '굉장한 부하들을 얻었군.'

 산동분타원들을 쳐다보는 백무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군신의 예를 취하고 있는 그들

의 손에는 검집이며 도갑이 없었다. 만일 마금천이 거절하면 전부 달려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들은 천무맹에 속한 무인이 아니었

다. 마금천을 따르고 그에게 목숨을 맡긴 사병들이었다.

 사실 백무천도 마금천의 영향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만

산동분타원들이 상당히 신뢰를 보이는 것 같아서 마금천을 포섭하기 위해

그에게만 별도의 기운을 흘렸었다. 마금천이 위축되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

었다.

 그러나 단순히 무공만으로 마금천을 포섭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흉금

을 먼저 터놓고 상대를 끌어들이는 백무천의 솔직함이 통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이백여 명 남짓의 적은 인원이지만 자신은 이곳 초리하

에서 최고의 방수를 얻었다. 도약을 위한 발판인 것이다.

 허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 가장 먼저 무천각이 있고, 그 다음

은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십천각이 남아 있다.

"들어들 오시오."

 진영으로 돌아온 백무천은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무천각의 실

세인 호북 권가장의 살검(殺劒) 권윤(權允)과 하남 천가장의 지살권(地殺拳

) 천운해(千雲海) 두 사람이었다. 제갈장령 다음으로 최고의 실세였던 운남

천이 실종된 후, 실질적으로 무천각을 끌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독에 당했다 하셨소?"

 "그렇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검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기다림만 남았다. 분명한 사실은 저들 둘로는 십천각을 누를 수 없다

는 것이다. 제갈장령이 실종된 것을 알게 되면 십천각의 수장인 문상이 지

휘권을 가지려 들 것이다. 십천각보다 세 배 이상의 병력을 가진 무천각이

그들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저들도 바라지 않는다. 결국은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두 사람을 남기고 백무천이 천막을 나왔다. 상의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

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천 대협."

 곤혹스런 표정의 권윤이 천운해를 쳐다보았다. 평화의 시기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안 된다 하였을 터이지만 지금은 전쟁의 시기이고 더구나 이곳

은 전장이다. 자칫 잘못된 판단은 무천각 전체가 사라지게 되는 사태가 초

래될 수 있기에 더욱 고민스러웠다.

 "자질은 충분하오이다. 허나, 나이와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문제외다.

공동파의 제자가 아닙니까."

 "공동파는 문제가 없지 않소이까. 각주님의 손녀사위로 내정된 사람입니다

. 제갈세가 사람이란 말이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전쟁에서 살아남

는 것입니다."

 권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상에게 지휘권이 돌아가면 이곳에서 죽어가

는 무사들은 무천각 인물들이 될 것이고, 승리했을 때 그 공은 십천각이 거

머쥐게 된다. 자신들은 재주부리는 곰의 역할만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

가.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각주 대행을 시키는 거지요. 전

쟁이 끝날 때까지만……."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어차피

 각주인 제갈장령의 유지를 이었으니 자격요건은 충분히 갖추었다 볼 수 있

고, 무천각의 나머지 인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가장 합당한 방법이 각주

 대행이다.

 "호호! 각주 대행이라……. 지휘권은 어디까지요."

 잠시 후 들어온 백무천에게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상당

히 기분 나쁜 말일 수 있음에도 백무천은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단

지 자신의 명령권이 어디까지인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모든 권한은 전임 각주님과 같소이다. 다만 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만 한

시적이라는 점이지요."

 "그래요? 그런데……."

 갑자기 백무천의 기세가 삼엄하게 변했다. 탁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무

형의 힘으로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허억! 왜?"

 권윤과 천운해가 해쓱하게 변한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엄청난 내공

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항하고 있음에도 백무천이 만들어낸 기세에는

대항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는 게요. 신임 각주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그 순간 그들의 귓전을 울리는 전음. 산동분타주인 마금천이 백무천의 의

도를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신임 각주님을 뵈오이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각주 대행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무천각주가 되어버렸다.

 "고맙소, 잘해봅시다."

 그제야 기세를 거둬들인 백무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의도대로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시작은 각주 대행이지만 훗날 전부 부하가 될 자들이

아닌가. 잠시 머무르는 자리일진대 각주면 어떻고 각주 대행이면 어떠랴.

다만 무천각 무인들의 마음을 잡아두어야 하기에,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기

에, 기세(氣勢)를 쏟아냈던 것이다.

 "각주님! 십천각은 어찌하실 겁니까?"

 두 사람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제갈장령이야 나이와 연륜 때문에 문

상이 어쩔 수 없이 승복했지만, 백무천은 어디 그렇겠는가. 무룡대 대주 신

분에, 이제 이십 대이다. 문상을 포함한 십천각 인물들이 인정해줄 리 없을

 것이다.

 "그건 나에게 맡겨두시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굴복시키면 되오.

"

 "무슨……?"

 "마금천! 분타원들을 동원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수상한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백산 일행을 찾기 위한 지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장령을 해할 곳은

그들밖에 없었다. 군량을 태웠다는 사실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사실 백무천은 제갈장령을 처음 만났을 때 백산 일행에 대해서 물었던 것

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갈수연에게 보냈던 두 사질 때문이

었다. 그녀가 더 자세히 알고 있을 터였고, 사질들이 돌아오면 자연히 해결

될 일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제갈장령 또한 팽무도라는 껄끄러

운 존재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자신을 노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백무천이 관심의 눈길을 돌리고 있는 백산 일행은 비교적 편안한 표정으로

 작전을 짜고 있었다.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은가."

 남궁세우가 서문천을 향해 물었다. 간밤에 있었던 양맹의 전투에서 나타난

 결과로 보았을 때 천무맹이 단연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르신의 생각대로 천무맹이 유리해 보입니다. 대단한 자가 있더군요."

 이곳에서 두 곳의 전투를 주시하고 있던 서문천도 백무천을 보았던 것이다

.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정확한 신분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붉

은색 화룡은 그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 한 쪽이 남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곁에 있던 백산이 싱긋 웃으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천무맹의 입장에서는

서두를 수밖에 없다. 군량을 태워버렸기에 장기전은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 쪽만 남으면?"

 이번에는 팽무도가 백산을 쳐다보았다. 한 쪽만 남는다 하더라도 칠팔백은

 될 터인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하는 말이었다.

 "콰-앙!"

 "자네?"

 백산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서문천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광천뢰

를 말하고 있음이다. 양쪽이 다 있을 때는 지금의 광천뢰로 부족하겠지만

한 곳만 남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십여 개의 광천뢰라면 주위 오십여

장이 초토화될 것이다. 상대가 얼마가 되든지 기회만 제대로 잡으면 완전

몰살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내가 나쁜 놈이란 것은 나도 아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가

족을 못 지키오.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요. 전

부 다……."

 백산의 말에 서문천을 비롯한 일행이 입을 닫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수

백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비규환 참

상이 벌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자신들의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

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할 수 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서,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기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에.

 "지옥의 한 자리는 내 자리로 굳었군."

 "어쩌면 말이오. 이곳보다 서 대협이 맡아둔 그곳이 더 편한 자리인지도

모르오."

 이미 죽어버린 육신이라면 지킬 게 없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혼자만의 일이기에, 그곳이

더 편한 곳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색시들에게나 갈라요."

 이미 결심이 섰다. 어쩌면 북경으로 길을 잡았을 때부터 정해진 길이 아닌

가 싶다. 굳이 비도를 휘날리는 악마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비롯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악마인 것이다.

 "살우야!"

 "네, 형님.

 "심심하면 화인걸 그 자식이나 좀 패, 요즘 기가 살았어."

 한창을 투자에 몰두하고 있는 소살우에게 요상한 지시를 내리며, 부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쑥쑥 자라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령을 껴안고 얼굴을 비비며 환하게 웃는다. 보

면 볼수록 예쁘게 자리고 있다. 매일매일 보는 소령이지만 그때마다 생경스

러웠다. 산파 할머니의 말대로 자신을 닮은 구석이라곤 아무 데도 없는데,

쳐다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꺄아!"

 "웃는다, 웃었어. 봤지, 봤지? 못 봤어? 나를 보고 웃었다고."

 백산의 입이 더욱 벌어지며 세 사람을 향해 환성을 질렀다. 환희였다. 사

물도 분간하지 못하는 자식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되었다

는 사실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이젠 아예 소령이밖에 몰라요?"

 두 부녀가 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던 소운이 볼멘소리를 했다. 자신만을

기다리는 세 명의 부인들이 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 백산에 대한 불만이

었다.

 "소운이, 너는 그래서 안 돼. 소령이는 나하고 같이 사는 시간이 길어야

이십 년인데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이백 년이라고. 그런데 내가 누구하고 놀

아줘야 되겠어?"

 "무슨 소리예요, 이십 년이라니."

 "시집보내야 될 것 아냐, 멋있는 놈 하나 골라서."

 "말도 안 돼. 소령이는 이제 삼 개월 되었어요, 삼 개월. 그리고 우리가

무슨 수로 이백 살 넘게 살아요."

 여자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이제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아이를 두고 혼례를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 마! 당신들은 내가 이백 년 이상을 살도록 해줄 테니. 정 안 되면

대환단 몇 개 더 달래지, 뭐."

 "헹!"

 소운이 혀를 쏙 내밀었다. 비록 빈말이라 할지라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다.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

고 오직 자신들과 오랫동안 살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쩝! 생긴 것만 좀 잘생겼으면……."

 "뭐야? 이 얼굴이 어때서.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보고 못생겼다 한 사람은

소운이 너를 포함해서 두 명밖에 없다."

 "그 한 명은 누군데 그리 똑똑하지?"

 "누군 누구냐. 나보다 더 엉망인 사부지."

 머리 나쁜 자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백산의 기억력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팽무도와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마두 얼

굴이지 사람 얼굴이냐 했을 때 너도 만만치 않다고 했던 사부의 말. 다른

건 다 잊어먹는 놈이 지를 욕했던 것은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제대로 봤네, 뭐."

 소운이 혀를 내밀며 백산을 놀려댔다.

 "시아버지라 불러, 셋 다."

 "정말?"

소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산을 쳐다보았다. 시아버지면 서방님의 아버

지를 일컫는 말임을 알고 있고 또한 백산이 아버지로 모시려 하는 것도 알

겠는데, 자신에게는 할아버지다.

 "소운아!"

 "왜?"

 "너의 전직이 뭐였냐?"

 "전직? 내가 전직이 어디 있어. 그냥 거지……."

 "거지가 뭘 따지길 따지냐. 시아버지라 부르라면 부를 일이지."

 "오라버니!"

 "누가 너 같은 놈을 자식으로 삼는다 했다고 허튼소리 하는 게냐."

 소운과 백산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팽무도가 기침을 하며 방 안으로 들

어섰다. 그도 소령이가 보고 싶어 왔다가 밖에서 백산의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어라, 싫다 이거지? 늙어가는 인생이 불쌍해서 며느리 호강 좀 시켜주려

했더니 굴러온 복을 도로 차? 방금 그 말 취……. 왜 이래?"

 백산이 주절거리고 있을 때 세 명의 여인들이 일어나 팽무도에게 다소곳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아버님, 인사드립니다."

 "그래, 허허허!"

 팽무도의 노안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어찌 됐든, 정을 주었던 제자 녀석

이 이제는 자식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되었다 싶었다. 실패한 인생이 아

니다 싶었다.

 "뭐 하쇼, 안 들어오고. 마누라도 셋인데 아버지도 셋으로 하지, 뭐."

 밖에 있던 남궁세우를 부르는 소리였다. 꼭 피가 섞여 있다 해서 부모 자

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로 생각하고 자식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

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참, 주방에 가봐라. 살우 녀석 사람 잡게 생겼더라."

 그 말을 하러 왔다가 졸지에 아버지가 되어버린 남궁세우였다. 비단 백산

뿐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광풍대원 전원이 자식이다. 그들의 기쁨

에 같이 기뻐하고, 그들의 슬픔에 같이 힘들어하는 부모.

 "그래요?"

 놀란 듯이 말하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는 투였다. 소령을 팽무도에게 맡기고 어슬렁거리며 주방에 들어선 백

산이 가장 먼저 본 것은 거의 제 모습이 사라져 엉망으로 망가져 있는 화인

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화인걸의 반항도 집요했다. 새파란 살기를 흘리며 원한 서린 눈으

로 소살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에는 피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물렸던 그

 신발이, 이번에는 비명소리가 새어나감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화인걸의 입

안에 굳게 틀어박혀 있었다.

 "살우야, 그만해라."

 버릇만 고쳐주라 하였는데 몸을 고쳐버린 것 같았다.

 "왔소? 비무하다 저리 된 건데, 뭐."

 "비무?"

 "저 자식이 혈도만 풀어주면 어쩌고 하기에……."

 아예 혈도를 풀어주고 나서 화인걸을 패버렸다는 말이다. 원래의 내공이

다 있어도 상대가 안 될 터인데, 주화입마로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은 내공

으로는 소살우의 옷깃 하나도 건들지 못했을 터였다. 더구나 한 팔이 없다

고 하지만 두 다리는 멀쩡한 그인데 달려드는 화인걸을 그대로 두었을 리가

 만무한 일이 아닌가.

 화인걸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임자를 만난 꼴이었다.

 "서 대협, 저 자식들은 왜 시작하지 않는 거죠?"

 화인걸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던 백산이 서문천 쪽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간밤의 상황으로 봐서는 당장이라도 끝장을 볼 것 같았는데 오늘은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네가 제갈장령을 제거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 누가 지휘할 것인가에 대

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

 서문천의 예상은 정확했다. 지금 천무맹 진지에서는 십천각 수뇌인 문상과

 백무천의 첨예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문상과 장일권이 제갈장령을 만난다며 천막을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제갈장령이 있어야 할 천막에 찾는 사람은 없고 백무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라니.

 자신이 무천각을 맡게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도와 달라는 것

이었다. 즉 제갈장령이 있을 때와 똑같이 무천각주인 자신이 지휘권을 행사

하겠다는 말이었다.

 당연 문상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장령에게 지휘권이 넘어갈 때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파란 애송이마저 자신을 부하

로 삼으려 하질 않는가. 더구나 제갈장령의 생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

이 검만 자신에게 맡겼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자네 능력으로 무천각과 십천각 전부를 지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는가?"

 아예 무천각주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었다. 무룡대의 대주라는 지위만 인정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 협조하면 가능하지 않겠나?"

 "건방지구나, 백무천. 감히 대주 나부랭이가……."

 문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백무천의 당신이란 말 때문이었다. 이곳에 파견

된 십천각의 수뇌이고 천무맹에서도 청성파의 대표 자리에 있는 자신이다.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까마득한 자가 감히 반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당신이란 말 때문인가? 지금 당신이라 칭하고 있는 것도 대우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대답하라, 문상! 지금 나의 지위가 무엇이더냐!"

 문상을 향해 나지막이 말하던 백무천의 몸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헉!"

 문상이 비명을 토해내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속삭이는 듯한 백무천의 음성

에 항거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이럴 수가…….'

 문상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내공이 끌어올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순

식간에 온몸을 장악한 기묘한 기운이 자신을 묶어버렸다.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갈장령보다 더 강한 내공이었다. 아무리 고금오천무를 익히

고 있다지만 자신의 내공마저 제압해버릴 정도의 경지일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잘 들어라, 문상. 네 놈을 바로 죽일 수도 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

해야 할 게다.'

 문상의 귓가에 살기 가득한 백무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잘못하면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문상도 이미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내공을 전혀 끌어올리지 못

한 상태였기에 백무천이 힘만 가하게 되면 모든 심맥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 바로 죽음이란 말이다.

 그러나 백무천의 표정은 전혀 자신을 협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자

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천각주입니다."

 결국 문상의 입에서 무천각주로 인정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들려왔던 백무천의 전음. 죽이지는 않을 것이나 대맥을 끊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렇게 죽이면 문상이 백무천에게

당했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게 된다. 천무맹에 있는 모든 무인

들은 백무천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문상의 심맥을 끊어낼

정도의 고수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결국 문상의 죽음은 전쟁 중에 천마

맹 인물에 의한 부상으로 처리될 것이다. 문상이 아무 소리 하지 못한 이유

였다.

 "좋네. 그리고 나이 운운하는데 공동파에서 나의 신분을 알아주었으면 하

네. 안 그렇소, 사질?"

 "그렇습니다, 사숙님. 천무맹에 사숙과 같은 배분은 십천각주이자 부맹주

였던 무당파의 영풍진인밖에 없습니다."

 천무맹으로 갔던 공동파의 두 장로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백무천의 신분은 영풍진

인과 동일선상에 있다. 거의 몰락 직전에 있는 공동파였기에 백무천의 대우

가 그것밖에 안 되었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타문파의 제자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사실을 문상이나 장일권, 또는 십천각 인물들이 망각하고 있었다.

아니, 천무맹 전체가 모른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배분만으로 보았을

때는, 무천각주가 되어도 하등의 이상할 게 없는 신분이란 말이다.

 "가서 전하라. 신임 무천각주인 본인이 모든 것을 총괄한다고."

 "알겠습니다, 각주님."

 결국 문상과 장일권 두 사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

였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정파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배분을 들고 나왔

음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이다.

 "잘 다녀오셨소."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쳐다보던 백무천이 목운자와 목형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사숙. 그런데 전황이 나쁩니다."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무맹이 불리하게 돌아가

고 있다는 것이다. 천마맹 본진의 진격에 맞추어 사천에 있는 세 개 문파에

 출병을 요청했는데 무당파에서 거절했다 한다. 황실에 관련된 일 때문이라

 하였지만 전쟁 참여를 거부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것이 천무맹 수뇌부

들의 중론이었다.

 소림에 이어 무당까지 전쟁에 불참한다 함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는

천무맹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패할 수도 있다는 분위

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빠른 시간 안에 이곳을 정리하고 맹으로 오시라 하였습니다."

 이곳을 정리하고 섬서성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애초의 작전이 변경되었다는

 뜻이었다.

 "버러지 일행은?"

 "그들은 나중에 정리할 복안이 따로 있으니 무시하라고……."

 그들을 강호 공적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제갈수연의 계획을 두고 말한 것이

었으나 백무천의 얼굴은 그게 아니었다.

 "사질!"

 들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놈인데, 이곳에 있다

는 걸 알면서도 그냥 갈 수는 없다는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목형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무천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단순

한 버러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남궁세가부터 시작하여 석숭

에, 천장지옥마까지 엄청난 집단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별것 아

닌 뇌룡현의 촌놈이 무림이천의 정예를 깨뜨리며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갈장령 그 양반은 버러지 놈들의 소재를 알면서도 광천뢰 때

문에 그대로 두었다, 이건가?"

 "네, 사숙! 제갈군사께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셨습니다."

 군량을 실었던 배가 타버리는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들을 응징하지 않았던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앞에 천마맹이란 강적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섣

불리 공격을 가했다가 광천뢰에 의한 공격이라도 받게 되면 그보다 큰 낭패

가 있을 수 없기에 버러지 일행을 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 조부에게까지 광천뢰에 대해서 숨겼단 말인가."

 목형자가 내미는 광천뢰 두 개를 받아들던 백무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

왔다. 이미 습득한 광천뢰를 혈족인 제갈장령에게까지도 비밀로 했다는 말

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알려준다…….

 그만큼 믿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계산적이라 할 수 있다.

 조부보다 그를 더 믿는다는 표시인 것이다.

 '닮았어, 너무 닮았어.'

그녀의 그런 행동이 영악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가올 세상은 그녀와

 자신이 이끌어가야 한다. 가장 믿어야 할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남편이 되

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동파라는 문파보다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였다.

그곳을 버려야 성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버릴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이용

하면 된다. 설사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 면

에서 볼 때 제갈수연과 자신은 서로 닮은 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래서 연분이 되었는지도…….

 "그럼 버러지 놈들이 저곳 어디에 있다, 이 말인가?"

 "네, 사숙! 이곳의 지형을 제갈군사께 설명했더니 원래 저곳에 객잔이 있

어야 한답니다."

 목형자가 가리키는 곳, 백산 일행이 환상미로진을 이용하여 모든 이들의

시선을 차단시켜놓은 초리하 언덕의 객잔이었다.

 "거기 숨어 있었더냐, 버러지 놈. 고맙구나, 아직 살아 있어주어서."

 초리하 언덕을 쳐다보며 백무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모든 빚을

 갚아줄 수 있게 되었다. 기다리던 순간인 것이다. 얼굴을 만질 때마다 생

각나는 놈의 얼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은 후 모든 이가 새롭게 생겼지

만 그때 동정호에서 겪은 치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놈을 짓밟아버릴

때까지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가.

 "마금천! 문상을 오라 해라."

*     *     *

 "달도 없고 지랄 같은 날이다."

 "그러게 말이다. 저 검은 구름 좀 봐라, 꼭 너처럼 더럽게 생기지 않았냐?

"

 초리객잔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오늘 밤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뱁새와 찍새 두 사람이 검게 변한 하늘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하늘 가득 끼어 있는 먹구름이 별빛마저 먹

어치웠는지 온 사방은 검은 어둠만 가득했다.

 "찍새야, 우리 북경 가면 뭐하지?"

 하늘을 쳐다보던 뱁새가 찍새를 돌아보며 물었다.

 "북경? 글쎄 일자리야 형님이 만들어주실 테고……. 그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냐? ……장가나 갈까?"

 북경을 목표로 길을 잡고 떠났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북경에 가게 되면 당연히 광풍대원들과 같이 있을 터이고, 돈이야 문드러

지게 많으니 주루나 몇 개 인수하여 그것으로 먹고살면 된다는 생각뿐이었

다.

 "나는 싫다."

 "뭐? 장가가기 싫다고?"

 "그것 말고 새꺄, 주루나 인수해서 밥이나 축내며 사는 게 싫다고."

 "미친놈, 그래도 장가는 가고 싶은가 보네. 그럼 뭐 할 건데. 아니,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데? 이제야 이름 석 자 쓴 놈이……."

 찍새가 뱁새를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은 건달밖에 없다. 건들거리는 다리에 침을 찍찍 뱉어내면서

수금이나 하러 다니는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는 것이다.

 배운 것 없지, 아는 것 없지, 가진 것이라고는 돈하고 힘인데 돈이야 있어

봐야 쓸 줄도 모르고 뭔가 하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를 모르는 자신들이 아

닌가.

 "짜식, 소박하기는……. 나도 조직을 만들 거다, 임마. 우리 광풍대 같은

조직을. 저기 오는 저 새끼들처럼 많은 부하가 있는 조직 말이다."

 뱁새가 아련한 눈길로 아래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스스로의 미망

에서 헤어나질 못했는지 수백의 인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곳을

 향하고 있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새끼들……?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찍새가 뱁새의 저 새끼들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퍼억!

 "에라, 이 개자식아. 저 새끼들은 부하가 아니라 천마맹 놈들이다, 이 등

신아."

 뱁새의 뒤통수를 내리까며 소리를 내질렀다. 드디어 놈들이 이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동안 우려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이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전략상 최적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오

지 않았던 까닭은 저들끼리 싸우느라 경황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서로

에게 노출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즉, 어느 곳이 되었든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게 되면 바로 전면전의 시작인데 지금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실행을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야, 아래쪽으로 이동이다."

 그때 일휘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에 들려왔다. 이곳을 포기하고 아래

쪽에 있는 민가로 장소를 옮긴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백산이 석두에게 환상

미로진을 설치하라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기회닷!'

 분주객잔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광풍대원들을 쳐다보던 화인걸이 내심으로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서 짐을 챙기는 모양새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임에

분명했다. 주방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도망을 치기 위해서는 일단 저들이 있는 곳을 통

과해서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가만……. 그곳이라면?'

 저들이 이용하는 측간을 생각했다. 그곳에 숨어 있다가 떠난 뒤에 나오면

되지 않겠는가. 설사 들킨다 하더라도 냄새가 진동하는 놈을 끌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도망칠 방법은 찾았는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

 "저들을 따라갈 것이오?"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패웅이 문제였다. 자신이 숨은 것을 저들에

게 알리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아니겠는가.

 "왜 도망치고 싶은가?"

 "당신이 저들에게 알리지만 않으면."

 "좋도록 하게, 대신 들켜도 책임 못 지네."

 패웅은 화인걸이 측간 쪽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숨는다 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질 않았다. 지금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건대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좁은 곳에

서 수백 명이 싸우는 혼전이 될 터인데 내공도 별로 없는 삼류 무사 수준의

 화인걸이 살아날 방법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살아난다면 그것은 그의 운명

일 것이다. 살아날 운명.

 "패 대협, 갑시다."

 "그럽시다, 서 대협."

 서문천이 주방 쪽으로 다가오며 패웅을 불렀다. 그 또한 이상했다. 화인걸

이 보이지 않았지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도 패웅과 같은 생각

인 모양이었다.

 "가시오, 패 대협.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서문천이 패웅의 혈도를 풀어주며 떠나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패웅에 대해서는 해를 끼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포로로 취급했을 뿐이었다. 이젠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흑기

철기병을 잃은 그가 돌아갈 곳도 없다. 더 이상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서 대협."

 패웅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문천을 쳐다보았다. 설마 자신을 놓아주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디로 가실 거요."

 "어디로……."

 놓아준다 해도 갈 곳이 없다. 패장이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자신이 갈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궁으로 돌아가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고향에나 가봐야 하겠소이다."

 갑자기 고향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槍) 한 자루 들고 떠

나왔던 고향, 수십 성상의 세월 동안 돌아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곳 바다

의 짠 내를, 거칠게 달려드는 파도소리를 느끼고 듣고 싶어졌다.

 "화인걸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시오?"

 "글쎄요, 살아난다면 그것도 그의 운이겠지요."

 "그럼 기회가 닿으면 또 봅시다."

 서문천이 먼저 몸을 돌렸다.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의 고향이 어

디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돌아갈 곳은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크게 걱

정해줄 필요가 없었다. 패웅보다 자신들이 더 급한 상황인 것이다.

 "해남도요."

 멀어지는 서문천을 향해 외쳤다. 시간이 되면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앞으

로의 여생은 그곳에서 보내고 싶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중원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묵창 패웅이란 이름도 얻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육십이란 나이에 자신에게 남은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포

로로 잡았던 사람들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저들은 명예나 지위를 위해

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가진 조그마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무림이천이란 엄청난 세력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

람들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어떤 행위보다 위대한 일이었다. 그들 때문에

생각이 났다. 육십 평생 동안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힘들게 되었구먼?"

 석두와 함께 막 들어오는 서문천을 쳐다보며 백산이 입맛을 다셨다. 자신

들이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음이다.

 "우리를 노린 것이네."

 굳어진 표정으로 서문천이 입을 열었다. 이미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는 의미였다. 전면전을 하고자 한다면 굳이 이곳을 전쟁터로 삼지 않아도

될 터인데, 무림이천의 정예들이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곳 초리하 언

덕의 객잔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자신들과

적을 동시에 노리는 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요? 그럼 다시 돌려보내면 되지, 뭐. 준비해."

 "어떻게 하려는가."

 "뒤를 쳐야지, 별수 있소."

 분주객잔이 있는 곳을 향해 두 맹의 정예가 전부 올라오고 있는 형국이니,

 그들의 뒤를 쳐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유인하겠다는 말이었다. 분주객

잔에서 혼전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있는 이곳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 돼! 광견조는 여기서 대기해."

 백산을 따라 일어서려는 소살우 등을 백산이 저지시켰다. 이곳에는 더 중

요한 사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안으로 들어오는 놈들은 전부 죽여!"

 광견조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백산이 광마조원들과 같이 빠져나갔고 그들의

 뒤를 이어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밖으로 나섰다.

 "와아! 와-아! 와!"

 "엄청나군."

 천무맹의 후미에 도착한 백산 일행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 가히 벌떼라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셀 수도 없는 인물들이 초리하 구릉

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자! 주목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도록 처리하자."

 최대한 잔인하게 치라는 말이었다. 지금 언덕을 오르고 있는 자들의 상태

는 매우 흥분되어 있기에 약간의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잔인하게 처리하여 그들이 돌아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시 모이라고 할 때까지 최대한 잘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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