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84)

제5장 죽음

 풍신개가 오십 년 세월을 만나고 있는 그 순간.

 팽무도 일행은 그들만의 전쟁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전부 모여라!"

 백산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광풍대원들을 집합시켰다. 초리하에서 벌어지는

 양맹의 전쟁이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답답했다. 양맹의 수뇌들이 백산 일

행의 작전을 눈치 채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기 때문이었다. 식량을 가지러

보냈던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후발대에 연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조달해오게 했다. 더구나 천마맹에는 나찰마궁의 인물들까지 당도하여 팽팽

한 긴장 상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크게 일을 벌이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

다. 백산 또한 제갈장령을 제거하기 위해 몇 번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거처

가 워낙 진중 깊숙한 곳에 있어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양맹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밤을 이용해서 천마맹 진영으

로 이동하는 천무맹 인물들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두 분은 놈들이 싸우는 곳으로 가서 최대한 교란시키십시오."

 "너는……. 그걸 할 거냐?"

 팽무도는 난처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고 남궁세우는 아예 외면을 해

버렸다.

 "사부! 나는 무림이란 곳을 잘 모르오. 하지만 지금껏 겪어온 걸로 보았을

 때, 어느 쪽이 이기든지 남궁세가나 팽가를 가만두지 않을 거요. 문 닫고

있다고 봐줄 상황이 아니란 말이오. 제갈장령 그 사람이 그렇지 않았소, 역

사라고……. 그리고 이런 말도 합디다. 역사를 파내려면 많은 피가 필요하

다고 말이요."

 "너도 있었더냐?"

 "사부 때문에 참았소."

 팽무도가 제갈장령을 만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백산도 있었다. 사실 그때

가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사부인 팽무도 때문에 참았던 것이다. 현재 상황

이야 어찌 되었든, 과거에 숙부라 불렀던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과거를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자도 이곳 분주객

잔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사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천마맹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주시하며 경계만 하고 있을 뿐 공격해오

지는 않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단 그의 제거로부터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영감! 영감은 천마맹에 가서 비마인가 하는 놈 좀 잡아주쇼."

 "아니다. 비마는 내가 잡으마. 어르신은 애들이나 지휘해주십시오."

 "괜찮겠나."

 "그자는 제 몫입니다. 제가 해야 될 일이고요."

 팽무도가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해야 될 일,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럴 바에야 철저하게 몰두해야 한다. 백산의 말이 맞다. 제갈세가가 있는

 천무맹이 승리하게 되면 척살 대상 일 순위가 팽가와 남궁세가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애써 외면하려 했을 뿐이다.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형제의 가문이었던 과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가자!"

 팽무도가 서둘러 객잔을 나섰다. 그래도 망설여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였다.

 "도는 안 가져가냐?"

 "도? 이번에는 그냥 가지요, 뭐."

 남궁세우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는 백산의 얼굴은 자욱한 살기가 흘렀다.

도갑도 없는 도가 어둠 속에서 쉽게 눈에 뜨이기 때문에 그냥 가려는 것이

었다. 이번만큼은 비도를 사용하기로 했다.

 "백랑!"

 조천영과 두 여인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비도만 보면 백야평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당신들과 소령이가 있는 한, 정신을 잃을 경우는 없을 거야."

 세 여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백산이 객잔을 나섰다. 달빛 하나 없는 칠

흑 같은 어둠이 사방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갈대밭을 걷

던 백산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아들이 무섭지 않소? ……나는 무섭소, 내 자신이……."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적이라 생각되는 자들을

보면 결코 살려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 완전하게 끝내지 못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을 쫓아올 거

라는 불안감에 이러고 있지 않은가.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저들을

전부 죽이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오, 지킬 거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우리 가족을 넘보

지 못하게 하겠소. 다시는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그렇게 잃지는 않을 거요.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악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다시 전면을 쳐다보는 백산의 얼굴은 더 이상 고뇌에 찬 표정이 아니었다.

 해야 한다는 굳은 결심만 서려 있었다. 백산의 몸에서 강바람 같은 미약한

 바람이 흐르더니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실행만 남아 있을 뿐이다.

 "휘호! 많이도 모였네."

 엄청난 수의 천막이었다.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곳답게 수십 개의 천막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제갈장

령이 있는 곳을 찾는 것도 문제였다. 저놈의 천막들이 여태껏 백산의 접근

을 막았던 터였다.

 오늘 밤 대대적인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지, 백산이 도착한 그 순간에도 천

무맹 인물들이 계속해서 진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기 계십시오, 지휘는 제가 하겠습니다."

 "우리 무천각 무사들이야 상관없지만, 십천각 무사들이 협조하겠느냐."

 그러나 백무천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자신감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오만함.

 "군량이나 살펴보고 계십시오."

 백무천이 몸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천천히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

나 순식간에 십여 개의 천막을 지나쳐 무사들 속으로 사라졌다.

 "어라? 분명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군량창고를 찾기 위해 정탐을 다녀오던 백산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반응에 흠칫하며 다시 좀 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으나, 그가 주시할 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산이 익숙한 기운이라 느꼈던 그 기운. 화룡파천비공을 감지한 광혈지옥

비의 반응이었다. 천적을 만난 광혈지옥비가 격렬한 반응을 내보냈던 것인

데 백산은 자신의 감각이라 착각하고 말았다.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그 반

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백산이 원래 이동하려 했던 그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 그러나 마땅히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수백의 인물들이 은밀하게 빠져나

가고는 있지만 경계 상태는 거의 허점이 없었다. 많은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전혀 소란스럽지가 않았다.

 '어쩔 수가 없군…….'

 먹이를 탐색하는 맹수처럼 이리저리 살피던 백산이 은밀하게 한 인물을 향

해 다가갔다.

 "이봐!"

 "누구? 윽!"

 순식간에 무사 한 명을 제압한 백산의 몸이 스르르 사라졌다. 잠시 후, 그

가 사라졌던 곳으로부터 옷이 약간 작은 듯, 꽉 조인 옷을 걸친 인물이 어

색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중앙 천막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봐! 어디 가나."

 "이크! 저 새끼는 뭐야?"

 흠칫 놀란 백산이 다가오는 자를 쳐다보았다. 가슴에 십천이란 글을 새기

고 있는 무인이었다.

 "응……. 각주님이 찾으셔서요."

 대충 얼버무려 대답을 했으나, 그자는 가던 길을 가지 않고 백산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에효! 여기서 처리하기에는 눈이 너무 많은데.'

 바로 처치를 하자니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천마맹을 공격하기 위해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다고는 하지만 군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빠져나가는 거야 큰 문제가 아니지만 암살하러 왔다는 사

실이 발각되면 다음부터는 정말 기회를 잡지 못한다.

 "이름이 뭐냐?"

 "저어……. 백산인데요."

 "백산? 참으로 얼굴하고 어울리는 이름이다. 어느 게 눈이냐? 흉터하고 구

분이 안 간다."

 십천각 인물이 두 눈 가득 경멸의 빛을 담고 백산을 쳐다보았다. 제갈장령

 때문에 상한 십천각의 자존심을 이런 하급에게 풀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옷 입는 법도 안 가르쳐주더냐. 완전하게 다 갖추었구나.

쯧쯧. 무천각이 그렇지, 뭐."

 "빨리 안 오고 뭐해?"

 "그래, 지금 간다고."

 옷을 빼앗았던 인물의 체구가 좀 왜소했기에 백산의 몸에 꽉 끼었고 또 팔

이 많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비웃음을 흘리던 십천각 인물이 저

쪽으로 멀어졌다.

 "개새끼들, 별걸 가지고 다 시비야. 이 얼굴이 어때서……."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멀어지는 두 놈을 노려보며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 새끼들도 알력이 있나보네?"

 들키지 않은 이유였다. 놈들이 서로 친했더라면 많은 것을 물어왔을 터인

데 무시하고 깔보느라 백산의 수상한 모습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늙은이를 어떻게 유인한다……. 별수 없이 또 불이네."

 군량이 쌓여 있는 천막도 제갈장령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저번

에 당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는 군량을 진중의 중앙에 배치한 모양이었다

.

 "엥? 저 개새끼들?"

 불을 지르기 위해 군량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던 백산의 얼굴이 환하

게 밝아졌다. 조금 전에 만났던 놈이 있었던 거였다. 경계를 가는 도중에

백산을 만나 희롱한 것이었다.

 "어? 야, 실눈! 네 놈이 여기 왜 왔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백산을 발견한 십천각 인물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

이 역력했다. 무료하던 차에 적당한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잘됐다는 표정

이었다.

 "당신이 뭔데 우리 어머니를 욕하는 겁니까."

 "뭐라고? 오호! 그래도 배알은 있다, 이거냐?"

 백산의 행동에 놀랐는지 십천각 인물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무공도

 보잘 것 없는 놈이 설마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

었다.

 "무슨 일이야?"

 뒤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동료 한 명이 앞으로 돌아오며 두 사람들 쳐다

보았다.

 "마침 잘 왔네.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 자식이 눈을 치뜨고 달려드네그려.

"

 "이봐, 들키면 어쩌려고."

 그는 동료가 하려는 행동을 눈치 챘는지 우려 섞인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며 혹여 다른 자들이 있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 밤은 십천각에서 근무를 서는데 뭐가 두렵나. 표시 안 나게 버릇을

고쳐주면 되지, 이렇게."

 대부분의 병력이 기습을 위해 나갔고 돌아다니는 무인들이 거의 없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백산을 향해 순식간에 손을

뻗어 아혈을 눌러버렸다.

 "따라와라, 이 자식아. 감히 십천각에 눈을 치떠?"

 천무맹의 십천각 인물들의 불만은 최고에 달했다. 각주 대행인 문상이 제

갈장령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천각이 어떤 곳이던가. 자신들에게서 무공을 배워갔던 그런 자들이 모여

서 만든 단체가 무천각이다. 그런 자들이 권력의 측근에 섰다 하여 자신들

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해 있던 차에 별 볼일 없는

조무래기들에게까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음이다.

 "자식아,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삼류를 벗어나지 못해. 임마,

웃어?"

 군량이 쌓여 있는 천막 안으로 백산을 끌고 들어간 십천각 인물이 인상을

쓰며 손을 날리려는 순간,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백산의 얼굴을 기

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았다.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자신을 비웃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새끼야!"

 "헉!"

 순간 백산의 왼손이 빠르게 뻗어나가며 상대의 목을 틀어쥐었다. 십천각

무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아혈을 찍어놓았던 놈이 말을 하지 않나,

게다가 자신의 목을 틀어쥘 때 보여준 그 빠르기는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

었다.

 "그래! 나 눈 작다, 새끼야. 나 이렇게 생겼는데 보태준 거 있냐? 이 개새

끼야?"

 "우우욱!"

 놈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이던 백산이 왼손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오

른손 정권을 놈의 얼굴로 박아 넣었다.

 "크윽!"

 뒤쪽으로 넘어가는 놈의 목을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틀어쥐고 위로 끌어올

린 백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십천각 인물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녀석이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질 않았다.

 "얼굴에 흉터도 있다, 새끼야. 나 이렇게 되는데 도와준 적 있냐고, 개자

식아."

 퍽!

 똑같은 상황의 재현이었다. 왼손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오른손을 날리고,

뒤로 넘어가는 놈의 목을 다시 틀어쥐어 끌어올리는, 아혈을 짚지 않았어도

 십천각 인물은 비명을 지르지 못할 형편이었다.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너, 우리 어머니 알아?"

 안면이 뭉개진 십천각 무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그런데 왜 아는 체하는 거야, 새끼야!"

 이번에는 약간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주먹이 상대의 가슴 부위로 작렬했다

.

 "개자식."

 "이봐, 뭐해? 시간이 너무 걸리잖아. 자네……. 죽이면 어떡하나."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인물이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인물을 발견하

고는 기겁한 표정을 하며 들어왔다. 만일 이 일이 발각되면 바로 즉결감이

아닌가. 혼자만의 책임이 아닌 것이다. 같이 근무를 섰던 자신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안 죽였어, 지가 죽었지……."

 "헉!"

 꼬르르.

 경악스런 표정으로 바로 나가고자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을 관

통한 비도 하나가 붉은빛을 발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 한번 신나게 타봐라!"

 백산의 화천비(火天匕)에서 극양의 불길이 쏟아지며 군량을 태우기 시작했

다.

 백산이 군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제갈장령은 순찰을 돌

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응, 이 냄새는?"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자욱하니 흐르며 자신의 코를 자극했다.

 "설마……. 갈!"

 커다란 고함소리로 부하들에게 경고를 보냄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천막

을 뛰쳐나왔다.

타닥! 탁! 타타닥!

 천무맹 진영에 불꽃잔치가 벌어졌다. 시뻘건 불꽃들이 하늘로 날리며 넘실

넘실 춤을 추고 곡식이 타서 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물을 가져와라, 물을!"

 경악스런 표정으로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또다시 군량이 당했다.

습격을 우려하여 중앙으로 배치했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대담한 놈들이 아

닐 수 없었다. 수백의 인원이 있는 곳에 들어와 불을 지르다니……. 그 배

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응?"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던 제갈장령의 눈에 특이한 자가 눈에 띄었다.

 불길을 향해 열심히 불을 붓고 있는 부하들 중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꽉 끼는 옷을 입고 있는 부하 한 명이었다. 불길

을 향해 물을 끼얹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바닥에 버리는 양

이 더 많았다.

 "저놈인가?"

 물을 끼얹던 놈이 자신의 물통을 힐끗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빼는 모습

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중간 중간에 물통을 한 번씩 받아주면서 자연스럽

게 움직이고 있지만 분명 도망을 가려는 자의 행동이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바로 저놈이 방화범이다. 제갈장령의 발걸음도 방화범

이라 생각되는 자의 뒤를 쫓아 천천히 움직여갔다.

 여기서 놈을 잡겠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물을 나르기에 정신이 없는 부

하들은 제쳐두고라도 한바탕 혈전이 벌어지게 되면 그나마 남아 있는 군량

마저 다 잃게 될 것이다.

 천무맹 진영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지 놈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상당

히 먼 곳까지 달려온 놈이 사방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걸치고 있던 무천각

옷을 벗고 있었다.

 "대담하구나. 감히 천무맹 진지 한가운데까지 들어오다니."

 "그곳이 뭐 대단하다고 그러쇼."

 "뭐라?"

 제갈장령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도망을 치다가 들켰는데 하

는 행동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벗고 있던 옷을 옆으로 내

려놓고 있었다. 마치 유인하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게냐?"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자신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감지되지 않았다. 결국

혼자라는 말인데, 이제 갓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자신을 앞에 두고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할 일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소."

 "호! 그 불이 군량을 노리고 지른 불이 아니라, 마치 나를 유인하기 위해

서였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러나 백산은 아무 대답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제갈장령의 말이 맞았다

는 긍정의 표시였다.

 "자신이 있는 게냐?"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무모하다고밖에 표

현할 길이 없질 않는가. 아무리 강호 경험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오천 맹의

 일원이었던 자신을 노리다니. 무모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거 천하제일이 되면 뭐할 거요? 아니, 천하제일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뭐요?"

 비꼬려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말이다. 강호무림인이라

면, 누구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애

어른 할 것 없이 전부 최고를 외치며 산다. 도대체 무엇을 얻겠다고 그렇게

 사는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것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지, 자신의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라……."

 백산의 말을 들은 제갈장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이다. 천하제일인, 천하제일가. 이루고자 했었고 또 이루기 위해

살았다. 왜라는 의문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더구나 천하제일이 되면

 뭐 할 거냐는 물음, 단순한 질문임에도 할 말이 없었다.

 "쯧쯧!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런 일에 저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는

게요?"

 "허허! 너의 좁은 잣대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들지 말거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뭐라 설명해줄 말도 가르침을 줄 만한 지식도 없다. 남들은 가진 자라 생

각하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가진 자가 아니다. 남궁세가나 하북팽가에

비해서 가지지 못한 자가 제갈세가인 것이다.

 그것이 한(恨)이고 칼을 든 자의 한(恨)일 뿐……. 그 한을 풀기 위해 천

하제일인이 되고자 함을 뭐라 설명한단 말인가.

 단지…….

 "꿈이라고만 알아두면 된다."

 그것뿐이었다. 모든 무인들이, 세가인들이 가지는 꿈. 그 꿈에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피로써 전해지는 숙명이고 몸으로써 깨닫는 진리인 것이다

. 꿈을 이루고자 하는데,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며

무슨 목적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고 난 다음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마 또 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때는 그 꿈을 위해서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언제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고, 원했던 꿈을 성취하면

또 다른 꿈을 꾸는 존재일 뿐이다.

 "좋아, 좋다고. 꿈이라 치지, 뭐. 하지만 당신들의 꿈속에 우리를 넣으면

안 되는 거였어. 나는 당신들 꿈속에 나타나는 것도 싫고, 내 꿈속에 당신

들이 나타나는 것도 싫은 사람이야."

 말을 마친 백산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꿈, 자신도 꿈

을 꾸었고 또 그 꿈을 위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꿈속에 타인은 없다.

광풍대원들을 비롯한 가족들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들의 꿈은 그게 아니다.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

람들을 꿈속에 강제로 밀어 넣고 같이 꾸기를 강요한다. 정의(正義)라는 이

름 아래.

 "으음!"

 붉은 혈광에 휩싸여 희미해져가는 백산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장령에게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저 별 볼일 없는 젊은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수 있을 거라던 팽무도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보통 이런 정식비무보다는 암습이나 뒤통수치기를 즐겨하는데 오늘

은 특별히 무공으로 상대하리다. 당신이 그렇게 뛰어넘고 싶어 하던 팽가의

 도법으로 말이오."

 "뭐라고! 그럼 무도의 제자였단 말이냐."

 제갈장령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때 자식이라 불렀던 아이의 제자가 자

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이게 무슨 운명인지. 팽무도가 있었기에 저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도가 먼저 자신을 치러온

것이다.

 "당신이 우리 사부님을 무도라 부를 자격은 있는지 모르겠군."

 "그래, 이젠 자격이 없겠지. 그러나."

 백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제갈장령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

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였다. 백무천이 돌아오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번민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제갈세가의 번영은 이미 만들어진 길이다

. 그 길을 밟고 가면 되는 것이다.

 "팽가가 사라지게 되면, 형님이 되고 자식이 되는 게야."

 제갈장령의 몸에서 새하얀 백색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

랐다.

 하북팽가나 남궁세가가 사라지고 천하제일가인 제갈세가만이 남게 되면 남

궁일몽이나 팽인덕, 그 두 사람을 다시 형님으로 만들 수 있다. 천하제일가

의 아량으로 형님들을 추모하며 그들의 공적을 찬양해주면 된다. 천하제일

가가 하는 일인데 누가 거부한단 말인가. 가진 자의 아량이라며 세상 사람

들은 더욱더 제갈세가를 칭송하며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는 할 수 없다. 살아 있다 함은 제갈세가에 짐이 될

뿐이고, 앞을 가로막는 벽일 뿐이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제갈장령의 몸이 사방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제갈세가

최고의 보법인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가 허공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의

검에서 솟아나온 일 장 길이의 검강, 순백색의 검강이 새파란 살기를 머금

고 백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꿈은 말이야, 준비된 자가 꿀 수 있다고 했어. 너희 제갈세가가 꾸는 꿈

은 허황된 몽상일 뿐이야."

 배우지 못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준비된 자. 남을 파멸시켜가면서 이

루는 건 꿈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한다.

 제갈장령을 따라 허공으로 솟아오른 백산의 오른팔에서 사천비가 튀어나오

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혈극참!"

 "유성락(流星落)!"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상대를 향해 자신들의 무

기를 휘둘러갔다. 사천비에서 생성되었던 백팔 개의 붉은 도강이 진득한 살

기를 머금은 채 허공으로 몰아쳤고, 그 붉은 혈광의 전면으로 백색의 검강

이 유성처럼 지쳐들었다.

 끼이잉! 카아앙!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거북한 음향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뒤쪽

으로 십여 장 밀려났다.

 백중지세(伯仲之勢).

 일 초의 대결에서는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대단하구나. 혼원벽력도법을 그 정도까지 발전시키다니."

 제갈장령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평생 동안 연마한 자신의 검법이

이제 갓 삼십을 넘긴 듯한 청년이 펼치는 하북팽가의 도법에 밀린 감이 없

지 않았다.

 전부 십이 초로 되어 있는 대천성검법(大天星劒法)을 평생 동안 연구하여

삼 초로 집대성하였다. 이 검법만큼은 남궁세가나 하북팽가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들도 놀고 있진 않았다.

 가문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축출된 자식이 만들어낸 도법이 아닌가. 역시

천하제일이란 칭호는 거저 얻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갈세가도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팽가의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법과 제갈세가의 대천성검법(大天星劒法).

두 무공의 대결이다.

 "유성우(流星雨)!"

 제갈장령의 몸에서 더욱 진한 백색의 기운이 일어나며 백산을 향해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며 찔러대는 검에서, 횡으로 잘라지는 검에

서, 힘 있게 내려치는 검에서, 움직이는 모든 검에서 환영처럼 보이는 강기

가 쏟아져나왔다.

 순식간에 수백의 검탄강기가 형성되면서 새하얀 강기의 폭우(暴雨)가 쏟아

졌다. 유성우라는 이름처럼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은 강기의 비였다.

 "혈극폭!"

 폭풍, 이기어도의 단계를 비도로 펼치는 초식. 그의 비도에서 쏟아져나간

수백의 강기는 탄(彈)의 경지가 아니었다. 모든 붉은 기운이 탄보다 한 단

계 높은 이기어도의 경지였던 것이다. 의지(意志)에 의해서 움직이는 강기

였다.

 혈극폭이란 외침은 또 다른 곳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양맹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스라한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중

에서도 혈극폭이란 외침소리가 터져나왔다.

 팽무도와 비마 상남이었다.

비마 상남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전장에서 온 것도 아니

건만 그의 온몸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한천팽무도법의 일 초인 혈극참에 당

한 상처였다.

 강호에서 따를 자가 없다던 그의 광전비도 백팔 개의 도강 앞에선 허무하

게 스러졌다. 몸을 피하거나 움직일 방위가 없었다. 그의 몸이 움직이는 모

든 장소에 붉은 도강이 있었다. 무극도의 경지로 펼쳐진 팽무도의 도법이었

다. 같은 혈극참이라지만 백산이 펼치는 것과는 또 달랐다.

 백산의 혈극참은 잔인한 살기에 의해 펼쳐지는 광기(狂氣)의 폭풍이라면,

팽무도의 그것은 장중함이 감도는 무거움이었다. 외적인 살기보다 내재된

기운이 더 강한 초식이었다. 펼치는 사람의 기세에 따라서 무공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상남도 피하기를 포기하고 정면 승부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모

든 내공을 끌어올려 부딪쳤고 그 결과가 지금의 몰골이었다.

 그러나 상대인 팽무도는 자신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어느 게 진실한

도(刀)인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수의 강기들이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천풍혈화(天風血花)!"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력을 다해 정면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

다. 사력(死力)을 다한 외침소리와 함께 그의 온몸에서 셀 수도 없는 붉은

꽃들이 날았다.

 천풍혈화, 그의 암기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무공초식이었다.

 그의 몸에서 쏟아져나간 모든 암기가 이기어검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며 움

직인다. 암기로 만들어진 검(劒)이었다. 수백의 암기가 검의 형태를 이루며

 팽무도의 도(刀)를 향해 움직였다.

 주변에 있는 다른 도강은 전부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다가오

는 도만을 노렸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최적의 수단이었

다.

 '그래!'

 상남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예상이 맞았다는 표정이었다. 진도(

眞刀) 하나가 전진하지 못하자 나머지 도강기도 그 자리에 멈춰버린 것이었

다. 이제는 한 가지밖에 없다.

 내공이 강한 사람이 이길 것이다. 자신이 강하면 팽무도의 도가 가루로 휘

날릴 테고, 그의 몸 앞에서 암기로 만들어진 검이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팽무도가 강하다면 그 다음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놈! 네 놈이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내공마저 강해졌겠느냐.'

 애당초 내공대결로 몰고 가려 했던 상남의 의도였다. 초식이나 도법이야

자신보다 강할지는 모르지만, 순수한 내공은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을 것이라

는 확신. 팽무도가 신진고수일 때 자신은 이미 구마(九魔)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남의 얼굴에 화색이 돌든 말든 팽무도의 얼굴은 변화가 없다. 많

은 흉터 때문에 원래 표정이 없다지만, 이미 버린 얼굴에서 그나마 정상인

과 같았던 눈마저도 그저 편안한 신색으로 상남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유로움이었다.

 내공으로도 상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었다. 오십 년 전에 강호제

일의 신진고수였던 그에게 천무맹에서 주었던 마단은 또 다른 힘을 주었다.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잠력을 극복하지 못하면 광인(狂人)이 되지만 그 저

주를 극복하기만 한다면, 마단에 의해서 생성된 기운을 자신의 내공으로 소

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엄청난 기연이다.

 전화위복(轉禍爲福).

 남궁세우와 그는 마단에 의해서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풍뢰곡 바

닥에 있던 만년석균까지, 물론 광풍대원들에게 거의 주었지만 자신도 상당

량 복용했었다.

 처음 만년석균을 발견했을 때는 백산이나 광풍대원을 만나기 전이었기에

남궁세우와 같이 열심히 섭취했었고, 더 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자 이번

에는 약수천이란 얼토당토않은 샘까지 만들었던 장본인 아닌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 남궁세우와 자신밖에 없으니 두 사람을 제외하

고는 누구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장수천(長壽泉

)이란 이름이 백산 때문에 약수천이라 변했는지도…….

 '허억!'

 상남이 내심 비명을 질렀다. 팽무도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를 보았기 때

문이었다.

 자신은 모든 내공을 뽑아내고 있는데 놈은 여유 있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

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덤볐는데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놈은 자신을 상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단지 지금 상황을 즐

기고 있는 것 같았다.

 치욕이었다. 구마의 일인으로 세상이 좁다 여겼는데 우물 안 개구리에 불

과했다. 자신의 처지를 직시한 상남의 얼굴이 굳어졌다.

 '좋다, 어차피 질 것…….'

 놈은 오십 년이란 세월 동안 자신들이 강해진 것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길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생명을 담보로 한 도박.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모두 끌어올린 상남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흘러

나오며 암기로 만들어진 그의 검이 더욱 달궈졌다.

 결국 동귀어진의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적을 죽이고 내가 사는 방법이 아

니라, 적도 죽이고 나도 죽는 것. 승리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수. 구마의, 천하를 지배했던 지배자의 자존심이었다.

 핑!

 "커억!"

 비마 상남이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상체를 숙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 하나가, 그가 쏟아내고 있던 내공의 균형을 깨트려버린 것

이다. 균형이 무너진 그의 내공을 뚫고 한줄기 강맹한 기운이 들어와 내부

를 온통 휘저어버렸다.

 내공대결의 끝이었다. 내공에 의해서 유지되던 암기의 검이 바닥으로 힘없

이 떨어지며 흩어졌다.

 절명(絶命). 겉은 멀쩡했지만 그의 내부는 이미 가루가 되어 모든 기능이

정지해버렸다.

 "비겁해졌구나."

 팽무도가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질책하는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죠, 어르신이 더 비겁했습니다."

 장한수였다. 광풍대원들의 대통진에 끼지도 못한 그였기에 슬그머니 팽무

도를 찾아 나섰다가 이곳에 도착한 거였다.

 "내가, 왜?"

 "공연히 시간을 끌고 있지 않았습니까?"

 장한수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냥 밀어붙여 끝낼 수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

지 그렇게 끝내고 싶지가 않았다. 아마 오십 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던지,

자신에게 한을 심어준 당사자를 보자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고

통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상남의 기세를 받아주고만 있었다.

 "잘했다."

 상남이 진원지기까지 동원해서 공격을 해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칫 힘

든 싸움이 될 뻔했는데 장한수가 끊어버린 것이었다.

 "어째 제가 갈수록 사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 내가 제자를 잘못 둔 덕분이다."

 과거의 장한수나 팽무도 같으면 지금 같은 짓은 생각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 명예를 생각하는 무인으로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명예란 무엇인가.

보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스스로 기준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

나 지금은 아예 그런 기준이 없다.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다는 말이다. 자

신들의 그런 면들이 모두 백산의 사고에서 전염되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악한 놈이라 탓하고 있는 백산은 제갈장령을 상대로

정식비무를 치르고 있었으니…….

*     *     *

 "으윽!"

 거친 굉음 속에 희미한 신음소리가 섞여나왔다. 백색과 붉은 기운이 사그

라지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쪽으로 십여 장 물러난 제갈장령이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

고 있다. 아니, 다 늙어서도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 가련한 인생에 대한 조

소였다.

 "대단하구나."

 어이없다는 표정도 잠시, 제갈장령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팽무도의 제

자라 했었는데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수 위였다.

 이 또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가문에는 없는 저런 인재가

왜 팽가에서만 나오는 것인지. 집안에서 키운 것도 아니고 버린 자식의 제

자가. 팽가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자가 자신과 대등한 실력이질 않는가.

 "사부의 진정한 실력을 알면 기절하겠구려. 삼 초밖에 안 걸리오, 바닥에

눕는 시간이……."

 "뭣이라? 무도가 그리 강했단 말이냐?"

 제갈장령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도 팽무도를 만나보지

않았던가. 결코 자신보다 우위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제자의 실력이

 이 정도인데…….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말인 게다.

 결국 팽가는 제갈세가가 잡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오십 년 동안이나 노력을 했었는데 팽가는 더 멀리 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제갈세가도 쉬지 않았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았다.'

 "보아라. 이것이 제갈세가의 힘이다. 팽가에 뒤지지 않는 힘이란 말이다."

 제갈장령의 절규였다. 형님 동생하며, 큰집 작은집으로 편하게 내왕하며

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

서,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팽가나 남궁세가를 뛰어넘고 싶은 욕망은 마음속

 깊은 곳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력했다. 그들이 잠들어 있는 오십 년 간, 원수의 그늘 아래 살면

서도 그들을 넘고자 하였다.

 그의 한(恨)을 대변하듯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제갈장령이 허공으

로 솟구쳐 올랐다. 하늘로 치켜든 백색의 검에 주변의 모든 기운이 빨려들

었다.

 "유성풍(流星風)!"

 이십 장 가까이 솟아오르던 제갈장령의 몸이 백산을 향해 내리꽂히며 통렬

한 외침을 토했다.

 "왜 너희들은 안 되냐고? 비겁하기 때문이야. 타인의 죽음을 기반으로 성

을 쌓기 때문이라고! 혈극멸!"

 하늘에서 떨어지듯 다가드는 수백의 백색 광채를 쳐다보던 백산도 몸을 솟

구치며 커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하늘에서 새하얀 유성이 쏟아지고 땅에선 붉은 폭풍이 일었다. 주변을 가

득 채우고 있던 연약한 갈대들이 허공으로 터져 올랐다가 이내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최고가 되고자 했던 제갈세가의 염원이, 하늘이 되고자 했던 제갈세가의

바람이 광폭한 기세로 땅을 향했고, 속죄하고자 하였던 팽무도의 마음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백산의 신념이 하늘을 향했다.

 백색의 폭풍(暴風)과 붉은색의 광기(狂氣)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기이잉! 끼이익! 쿠광!

 쇠를 긁어대는 거북스런 음향이 끊임없이 이어지다, 마침내 거대한 폭음을

 남기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크억!"

 지면을 향해 내리꽂히던 제갈장령이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며 재차 허공으

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두 거력이 부딪치면서

그 충격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튀어 오른 것이었다.

 "허헉!"

 자세를 잡기도 전에 제갈장령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자신의 몸보

다 더 빠른 속도로 허공을 뚫고 올라오는 붉은 덩어리.

 "커억!"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가슴을 쳐다보았

다. 새하얀 백의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 무기는 이미 관통해버렸는지 가

느다란 줄만이 눈에 들어왔다.

 "허허! 역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나……."

 제갈장령의 몸이 조금씩 녹아들었다. 마지막 공격에서 사천비 대신 독천비

를 사용했던 까닭이었다.

 시체를 남겨서 천무맹 인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자신도 알 순 없었지만,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부 때문에 그랬는지도.

 "잘 가시오."

 제갈장령의 몸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그의 모든 것이 땅속으로 스며

들자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십 년 전 천하를 지배했었고, 살아남기 위해 원수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만 했던 그. 마음속에 있는 자격지심을 이겨내고자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가문의 부흥을 보지 못하고 초리하의 갈대밭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과연 백여 년 성상을 살아오면서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천하제일이 되

고자 자식의 죽음에도 침묵했던 그가 이룬 것은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미 녹아 없어져버린 제갈장령은 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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