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84)

제5장 초리하(草鯉河)

 평양에 도착한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관아로 가서 화전민 마을의 아이

들을 북경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일행의 힘으로야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사전에 석숭과 모두 이야기되었던 사항이고, 금의위 영반의 서찰 한 장은

그 어떤 업무보다 빨리 처리하도록 해주었다. 일단 석숭의 본가에서 애들을

 돌봐주기로 하고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데리고

오기로 했던 거였다. 아이들 일을 마무리한 일행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초리하를 향해 움직여갔다.

 초리하.

 평양에서 남쪽으로 이틀거리에 있는, 황하로 흘러가는 분하의 지류 바로

옆에 있는 수만 평 갈대밭의 지명이다. 이렇듯 갈대밭밖에 없는 초리하가

유명해진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산서성에 인접해 있는, 삼 개 성으로

 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산서성의 영무(寧武)에서 발원한 분하가 태원의 남쪽을 지나 평양에서 두

개의 지류로 분리되어, 한 곳은 황하를 향해 흐르고 또 한 곳은 산서성을

관통하여 하남성의 경계로 이어진다. 상류로 배를 타고 오르면 북경이 있는

 하북성으로 갈 수 있고, 하류로 내려가게 되면 섬서성과 하남성으로 갈 수

 있으니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해로를 통해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전부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언제나 오가는 상인들로 붐빌

수밖에 없는 곳이 초리하다.

 그러나 백산 일행이 도착한 초리하는 말로만 듣던 그런 활기 넘치는 장소

가 아니었다. 분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선박이나 섬서 또는 하남으로 갈 배

들, 그리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배로 넘쳐나야 할 초리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의 칠 일 정도 되었습니다요."

 분주객잔.

 산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특산물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분주(汾酒)라는 술을 이야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중원 십대 명주중의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분주는 백주로 향이 맑고 깨끗하며 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술이다. 여기에다 대나뭇잎 등 갖가지 약초를 섞어 희석한 술로 꽤

나 독하다고 알려져 있는 죽엽청이 분주의 절반 정도 수준이라 하니, 분주

의 독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분주를 생산해내는 행화촌이 바로 이곳에 있기에 산서성 내에 있는 각

주점 등에서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술이 곧 분주와 죽엽청이다. 심지어

 어떤 객잔에서는 취급하는 술이 분주와 죽엽청, 단 두 가지밖에 없는 곳도

 있다 한다. 분주에 대한 산서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

다.

 지금 광풍대원들이 들어와 있는 분주객잔이란 곳도 그랬다. 이곳 초리하에

서 가장 큰 객잔임에 분명할진대 취급하는 술은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초

리하에 있는 객잔들 중 오십여 명이 넘어가는 대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

이 이곳밖엔 없었고 배는 물론,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음을 이상

하게 여긴 한 일행이 물었을 때 객잔 주인인 노칠이 초리하의 상황을 이야

기해주었다.

 "그게 아니고요……."

 얼마 전에 돈 많은 부호들이 와서 물건을 수송해야 한다며 이곳에 있는 모

든 배들을 빌려버렸다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동안은 일해야 벌 수 있는 거

금을 단 한 번의 일거리에 준다 하였으니 배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류로

내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초리하에서 객잔을 하고 있던 주인들

은 파리만 날리게 되었다 한다.

 또한 용문산 어디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과, 그러면서 그곳에 있던 마

을 사람들이 깡그리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고, 이곳에서 배를 빌려

간 사람들도 상인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한 자들이란 소문마저 돌기 시작

하자 객잔 주인들도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고 문을 걸어 닫고 몸을 피했다

한다.

 노칠도 금일 중 떠나려 했는데 백산 일행이 오는 바람에 지체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어찌할까요?"

 서문천이 일행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객잔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전쟁

때문이 분명한 것 같았다. 더구나 자신들이 있는 초리하가 전장이 될 가능

성이 가장 농후해 보이질 않는가.

 "뒤쫓는 놈들이 너무 많아."

 수양산에서부터 뒤따르던 자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

들까지 딸려 있어 커다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데도 공격을 해오지 않

고 따르기만 하고 있었다.

 "만일 지금 없어진 배들이 각 맹의 병력수송을 위해 갔다면?"

 "그쪽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이곳에서 서로 충돌하게 될 테고 우리를 따르던 자들도 그들과 합류

하기가 쉽겠군."

 석두와 서문천의 대화 내용이었다. 애당초 그러한 면을 노리고 산서성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려나가는 것 같은데도 왠지 개운치

가 않았다.

 "그럼 놈들이 치고 박고 싸울 때 우리가 빠지면 되겠네."

 "자네 생각만 같이 된다면 문제될 리가 없겠지만 그들이 놔주질 않으니까

문제지."

 "모르게 빠져나가면 안 되나?"

 "무슨 수로?"

 지금도 뒤따르는 자들을 따돌리지 못하여 끌고 다니는데, 지금보다 더 많

은 인원이 올 텐데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석두가 알고 있는 진식과 남궁세가의 진식을 섞어버리면 좋을 텐데…."

 "무슨 소리냐, 진식을 섞다니?"

 백산의 말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이들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었다. 검

진을 연구했던 가문의 사람답게 백산이 내놓은 의견에 깜짝 놀라며 쳐다본

다.

 "아니요, 괜히 해본 소리요."

 사실 지나가는 투로 해본 소리였다. 다른 이들은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

지만 백산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이곳에서 적들을 전부 치고 가려는 생

각이었다. 그런데 더 많은 적들이 온다 하니 답답한 마음에 전부터 생각하

고 있던 바를 꺼내본 것이었다.

 진(陣)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었지만, 무공은 두 가지를 잘만 섞으면 더

강한 무공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해본 생각이었다. 석두가

알고 있는 환상미로진을 수비무공이라 생각하고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공

격무공이라 생각했을 때, 그 두 가지를 잘만 섞는다면 최상의 무공초식이

탄생하지 않겠느냐 하는 뭐 그런 것이었다.

 단순한 발상, 어찌 보면 쓸데없는 잔머리를 굴려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석두, 서문천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산이 네 말은, 석두가 알고 있는 환상미로진과 청풍검진을 합쳐

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을 만들어보자, 이거냐? 진의 매개체를 저 애들로

하고?"

 "왜 그래요, 답답해서 해본 소리라니까."

 남궁세우가 놀람에 찬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괜스레 무안해진 백산이 소

리를 팩 질렀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미친놈 소리만 듣게 생기지 않았는가

.

 "허허!"

 남궁세우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생을 검법과 검진을 연구

했다 생각했고 남궁세가의 두 개의 검진을 합치기까지 한 그였다. 그가 합

친 남궁세가의 검진은 그냥 합친 것이 아니라 섞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

이다. 청풍검진과 창궁무애검진을 섞어서 청풍검진이 가지고 있던 약점을

없앤 새로운 검진을 만들어냈기에.

 그런데 진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백산이 내놓은 생각이란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진, 실현만 가능하다면 절

대의 검진이 아니겠는가.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진이 탄생할지도 모르

는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있겠는가."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천여 명 정도라고 가정했을 때 아직

작업을 하고 있을 테고 이곳에 오기까지 이르면 십 일, 늦으면 보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형님!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남궁지우가 남궁세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형인 남궁세우가 생각하는 바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미 경험이 있다, 저 녀석들이고."

 남궁세우의 설명에 남궁지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남궁세가의 최

고 검진 두 개를 섞어서 더 엄청난 검진을 만들었다고 하질 않는가. 그리고

 저 광풍대원들이 세가인들보다 더 능숙하게 진법을 펼친다는 것이다.

 "정말 해치울라고?"

 이번에는 백산이 놀라고 말았다. 지나가는 말로 한 걸 가지고 머리 좋다는

 인간들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상의를 시작하는 게 아닌가.

 "누가 말 좀……."

 "산아, 정신없으니까 저쪽으로 좀 가 있거라."

 "백랑! 자요, 소령이."

 곁에서 지켜보던 조천영이 재빠르게 소령을 떠안기며 방해하지 못하도록

백산을 막아버렸다.

 "소령아! 너는 이 애비 닮지 말고 똑똑해야 한다. 머리 나쁘면 인간 취급

도 안 해주는 게 세상이란다."

 "형님! 여기 술 식었소."

 한쪽에서 열심히 분주를 들이키고 있던 소살우가 백산을 불렀다. 헛소리하

지 말고 빨리 술이나 시원하게 해달라는 소리였다. 수양산에서 내려올 때

둘이서 지껄였던 돈벌 궁리가 바로 실생활에 적용되었다.

 "물건은 사러 보냈냐?"

 "조금 전에 보냈소, 요몽 스님도 같이……."

 "요몽? 괜찮아?"

 "거의 정신이 돌아왔답디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 지체해야 될 것 같았기에 식량을 준비하러 보냈던

것이다. 소살우의 말처럼 수양산에서 그 일을 겪은 뒤,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대환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몽스님의 상태가 호전되어 예전

처럼 헤헤거리지도 않고 있었기에 일행을 조금씩 도와주고 있었다.

 "저거 될 것 같소?"

 소살우도 옆에서 듣고 있었기에 저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알고 있다.

 "따라와라!"

 그러나 소살우의 말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소령을 안은 백산이 일행을 밖으

로 불러냈다.

 "이곳을 전부 훑어와라. 돌멩이 하나도 놓치지 말고."

 백산의 말을 들은 광견조원들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방금까지 그 독하다는 분주를 마셨던 자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이미 경

험했던 일이 아닌가. 백산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한 가지밖에 없다. 구

화산에서 이미 겪었던 일, 한 명도 살려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결심한 거요?"

 일휘의 물음에 백산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도망치기 위해서 진을 사

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진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백산의 표정을 읽은 광풍대원들이 각자의 위치를 정했는지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백랑!"

 조천영이 걱정스러운 듯 백산을 불렀다. 또다시 전쟁을 치르려 하고 있기

에 걱정스러웠다. 이번에는 더 많은 적이고 광천뢰도 몇 개 없다.

 "누님! ……사부한테 물어봤어요. 도망 못 간다고 하더군요, 철 대협이 살

아 있고 개방이 있으면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또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잘못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과 같이 먼저 보낼 것을……."

"안 돼요!"

 세 사람이 동시에 백산을 향해 외쳤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이들만 보내면서도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남편

의 생사도 모르는 곳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같이 겪고 견디어야 한다. 그것이 부부인 것이다.

 "알았다고, 알았어. 어디 한 번 볼까나?"

 맞는 말이다. 서로가 사라지면 의미 없는 사람들이기에 모든 것을 같이 겪

을 것이다. 누가 죽든 살든 이미 한 몸으로 묶여진 사람들이다. 세 사람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던 백산이 객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있는 초리하의 분주객잔 주변으로 전부 다섯 개의 객잔이 더 있었

다. 가운데 자신들이 있는 곳은 분주객잔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왼쪽으로 오십여 장 거리에 있는 초리객잔과 오른쪽으로 있는 죽엽객잔이

었다. 그리고 초리객잔과 죽엽객잔 사이에 두 개씩의 객잔이 존재했다. 즉,

 분주객잔 주변으로 전부 여섯 개의 객잔이 있다는 말인 게다.

 "좋아, 이곳은 그렇게 하면 되겠고……."

 "다녀왔습니다, 형님!"

 사방으로 지형지물을 숙지하러 나갔던 소살우와 이사 등 일행이 돌아왔다.

 "그쪽은?"

 "저기 보이는 동산 뒤로 돌아가는 길이 있고, 그쪽으로 매복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도 몇 곳 보이더군요."

 일휘가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여인네 젖가슴 같은 동산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와 바위가 전부인 산으로, 자신들이 서

있는 분주객잔과 비슷한 높이였다. 그리고 객잔의 양옆으로는 거의 늪지대

인 질척한 갈대밭이었다.

 "좋다, 지금부터 작업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객잔 지하에 통로를 만들어

라, 지상으로는 전혀 다니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석두에게 말해

서 모든 객잔에 진을 설치하라고 해."

 전쟁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모든 대원들이 주변의 지형지물

을 완전하게 숙지할 때까지 정찰을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지하 땅굴까지 두

 가지의 작업을 동시에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광풍대원들에게 작업지시를 내리고 객잔으로 돌아온 백산에게 뜻밖의 소식

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건을 사러 나갔던 일행이 돌아왔는데 한 사람이 빠

져 있었다. 요몽 스님, 그가 중간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다.

 "무슨 소리야? 요몽이 없어지다니."

 "어디 좀 다녀온다고 하시더니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습니다."

 "이런 미친놈들, 그렇다고 정신도 말짱하지 않은 사람을 그냥 두고 와!"

 백산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소령이를 구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도 어느 정도 가족이 되어가고 있던 사람이었다

.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잃어버

리고 왔다니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갔다 와! 아니, 나랑 같이 간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이사를 향해 고함을 내지른 백산이 나가려고 준

비를 할 때였다. 갈태독이 그를 말렸다.

 "놔두어라, 백산아."

 "무슨 소리요, 영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터인

데."

 "자신의 과거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 과거의 여부에 따라서 다시 볼 수 있

을지도 모르지……."

 갈태독의 얼굴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

지만 언제나 요몽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요 근래 와서 무엇인가 생각

을 많이 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자신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별일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걱정스러움이 앞섰다. 어떤 충격에 의해 기억이 사라졌다면 결코 좋은 일

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감당할 자신이 있었기에 떠난 것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겠죠?"

 백산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어렸다. 갈태독이 그렇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 과거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알아야 될 일이다. 피한다고 피해질 수가 없는

 일이기에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빌어주는 수밖에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요몽의 소식을 뒤로하고 주변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오 일 만에 외부 작업은 전부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이곳의

지리를 전부 알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석두도 틈틈이 나와 객잔에 환

상미로진을 설치하여, 지금 이곳 초리하 언덕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지처럼

변해버렸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진식. 남궁세우와 석두, 서문천, 이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만

들어낸 검진이 완성되어야만 지금껏 외부에서 했던 작업이 효과를 발하게

될 것이었다.

 "전부 모여라!"

 드디어 진식을 합체하는 작업이 끝이 났다. 이론적으로는 완성되었지만 실

전에서 얼마나 통할 수 있을지는 시연을 해봐야 될 일이다.

 "먼저 열네 명으로 구성된다. 먼저 청풍검진을……."

 새롭게 만들어진 진식에 대해 남궁세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내

부에 여덟 명의 인원으로 청풍검진을 구축하고, 그들의 위치에 맞게 여섯

명이 외부에 위치하여 환상미로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궁세우의

지시에 따라서 광풍대원들이 각자의 위치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긴장하며 주시하고 있던 일행의 얼굴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모든

인물들이 자리를 잡았음에도 진식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

이다.

 "역시 그 때문인가……."

 남궁세우가 광풍대원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청풍검진은 검진이고 광풍대원 전원이

 완벽하게 익히고 있는 진식이기에 문제가 안 되지만 환상미로진이 문제였

다.

 환상미로진이라는 게 무엇인가.

 자연경관과 똑같은 현상을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 상대에게 환영을 보여주

는 진식이다. 환상미로진을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배열로 진

을 구축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변과 동화되어 있는 매개체를 이용했느

냐에 그 성패가 갈린다 할 것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가장 어울리는 자리,

어떤 나무나 바위 등이 그 장소에 있어서 잘 어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가. 그곳에서 수십 혹은 수백 년 동안을 있었기에 그 장소의 일부

가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 흔하게 보이는 돌멩이나 나무를 베어내면 한순

간일지라도 그 장소가 어색해진다는 뜻이다.

 환상미로진의 출발이 바로 그런 점이다. 자연스러움, 오랜 세월 동안 그곳

의 정기를 먹고 있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일체감이 그 요체였다. 그 일체감

을 가진 것들을 일정한 규칙으로 배열했을 때 진의 효력이 나타나게 된다.

 "사부님!"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광풍대원들을 쳐다보고 있는 남궁세우를 향해 석두가

 다가왔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환상미로진을 구축한다는 것은 무리인가보다."

 인간은 숨을 쉬어야 한다. 숨을 쉬기 때문에 주변의 대기를 끊임없이 변화

시키게 된다. 자연 속에 이질적인 기운이 섞이게 되는 것이므로 환상미로진

의 기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살아 있기에 안 된다, 이거요? 그럼 간단하네, 뭐.

"

 "무슨 소리냐?"

 느닷없는 백산의 말에 남궁세우와 석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

았다.

 "전부 죽으면 되잖아."

 "에라, 이 썩을 놈아!"

 갈태독이 백산의 뒤통수를 내리까며 소리를 질렀다. 맨 처음 진에 대한 생

각을 내놓았던 사람이 백산이었기에 이번에도 뭔가 기대를 했던 일행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은 게 아닌가?"

 "뭐?"

 순간, 남궁세우와 석두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두고 머

리를 싸매고 있었던 것이다.

 귀식대법과 초극의 고수, 자신들에게는 그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어 있었

다. 일체의 호흡을 멈추는 귀식대법을 펼치고 나머지 몸으로부터 발산되는

기운은 초극의 고수가 일체감을 갖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극의 고

수란 자연에 동화되는 경지를 이룬 고수를 말한다. 즉 갈태독, 팽무도, 남

궁세우, 그리고 백산이 그 조건에 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부 호흡을 멈추고 주변과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생각을 해라. 형님이 한

 번 들어가 보십시오."

 귀식대법이란 해결책을 찾아낸 남궁세우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진

을 완성하여 적을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武)에 대한 열정이 더 큰 것

 같았다.

 스스스!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흐르자 광풍대원의 모습이 천천히 일행의 시야에서 사

라졌다.

 "성공이닷!"

 남궁세우의 입에서 희열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저 녀석들이 있는 곳이 그냥 느껴지는데?"

 "완전하게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완벽한 진이 탄생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무리 자연도에

이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일 뿐, 자연이 될 수 없다. 결국 불완

전한 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반 무사들이야 쉽게 알아차리지 못

하겠지만 일류고수의 반열에 오른 무인들은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알아차

릴 수 있을 터이고 더구나 공간이 약간씩 일렁이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사부, 잘 좀 하시오! 애들을 전부 감싸란 말이오. 어째 무공이 더 약해졌

어, 나이 때문인가?"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했는지 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수차에 걸

쳐서 석두가 설치했던 환상미로진을 보았다.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

의 진(陣)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광풍대원들이 구축한 진식은 너무 많

은 허점이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지금 정도만 해도 엄청난 일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백산 일행에 필

요한 기습작전에는 최고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그럼에도 사부를 도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팽무도가 있는 곳에서

격렬한 움직임이 일면서 진을 구축하고 있던 광풍대원들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사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장 잘해야 된다는 소리네?"

 팽무도를 도발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팽무도의 감정상태에 조그마

한 변화가 일자, 진이 바로 파훼되어버린다.

 백산이 하는 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세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

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움직임. 그들에게 있어서 가

장 중요한 것이 바로 움직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지한 상태

에서 저 정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자신

들의 입장에서는 이동할 수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형님! 한 번 움직여보시오."

 남궁세우의 생각대로였다. 십여 장 정도 움직이자 일행의 모습이 드러나버

리고 말았다. 전부 열네 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데 쉽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나마 물 속에서 익혔

던 청풍검진 때문에 이 정도라도 이루어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쯧쯧, 애들 좀 가르치라고 맡겨두었더니 도대체 뭘 가르친 거요?"

 백산이 사부인 팽무도를 힐난하고 나섰다. 진식까지 완벽하게 익혔다는 놈

들이 기껏 움직인 거리가 십여 장 정도밖에 가지 못하고 서로 호흡이 틀어

진 것이다.

 "호! 그래? 그럼 네 녀석은 얼마나 잘 가르쳤나 한 번 볼까?"

 광견조원들을 처음 보았을 때 팽무도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처음

부터 무력 면에서 가장 강한 아이들이었지만 다시 만난 그들은 또 달라져

있었다.

 다른 광풍대원들과 차이가 더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위협을 꿋꿋하게 견디고

 이루어낸 결과였다. 자신에게도 그런 경우가 닥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은 백산 이놈이 나쁜 놈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공의 고하가 문제가 아니다. 열네 명이 얼마

나 호흡을 잘 맞추느냐에 진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전부가 하나

 되는 마음이 진을 구축하는 일행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구경이나 하시오. 광견조 전부 앞으로."

 광견조와 석두가 앞으로 나서며 진을 구축하고 가장 중요한 토(土)의 위치

에 백산이 자리를 하자 진의 구축이 완성되었다.

 "마차를 들고 왔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느냐? 지금 우리의 어깨 위에 그 마

차가 있다."

 백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광견조원 전원의 몸

이 땅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호흡을 멈춰라!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모든 기운을 합친다 생각하라."

 백산의 주문은 간단했다. 광견조원들이 쏟아내는 모든 기운을 자신의 몸속

으로 가둬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밖으로는 자신의 기운을 이용해서 주변

과 완전하게 동화시키는 방법으로 미세하게나마 감지될 수 있는 기운조차

차단해버렸다.

 즉, 더 강한 기운으로 광견조원들의 기운을 덮어버리면서 자연과 하나 됨

을 만들어냈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감지하여 갈태독의 무상신법을 잡았던

방법을 여기서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 저럴 수가?"

 백산과 광견조 일행을 쳐다보고 있던 남궁세우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

왔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식이었다. 약간씩 보이던 공간의 일렁임마저도

 거의 사라져버린 거였다. 다시 한 번 진에 대해 깨닫는 바가 있었다. 결국

 진의 중심에 있는 자, 자신과 팽무도, 그리고 백산에 의해서 진의 성패가

결정나는 것이 아닌가.

 남궁세우의 놀라운 표정에 상관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백산

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그대로 앞으로 전진한다. 방법은 전과 동일하다.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마차를 들고 가는 것이다."

 백산의 명령에 따라서 광견조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지만 진을 쳐다보고 있던 남궁세우나 팽무도뿐만 아니라 모든 일

행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아마도 지금 저들이 펼치고 있는 무공은

초상비 정도에 해당하는 경공일 것이다.

 "두 분은 잘 들으쇼?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나요.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것은 저들의 의지보다는 나의 의지로 행해야 한단 말이요.

쟤들은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났다는 말이오."

 "그래, 바로 그거야!"

 남궁세우가 무릎을 쳤다. 생각을 합칠 필요가 없다. 엄청난 고수가 저들을

 그대로 움직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의 구성원들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자신에게 어떤 기운이 다가오면 응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가 풀렸다는 듯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세우의 눈에 또다시 엄

청난 광경이 들어왔다. 광견조원들이 구축한 진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진을 구축하고 있던 전원이 도를 뽑은 것이다.

 "그만!"

 갑자기 백산의 외침이 흘러나오고 일행의 시야에 광견조원들의 모습이 드

러났다.

 "자식들아, 살기를 흘리면 어떡하나.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란 말

이다."

 움직임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도를 뽑자마자 나오는 살기가 주변의 대

기를 변화시켜버리고 말았다.

 결국 진을 구축한 상태에서 공격한다는 것은 현재로선 무리였다. 청풍검진

의 쓰임새가 단지 이동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

 일단은 가능성을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앞으로 점점 보강한다면 언젠

가는 천하무적의 진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지 않는가.

 "그럼 진의 이름을 무어라 지을까?"

 천하제일 진인데 그럴싸한 이름이라도 있어야 하겠기에 백산이 말을 꺼냈

다. 이미 광풍대진이니 하는 것은 다 써먹어서 부를 만한 이름이 마땅히 없

었다.

 "네놈이 생각해낸 것이니까, 불알진이 어떠냐?"

 "사부!"

 백산이 팽무도를 향해 고함을 팩 질렀다. 다쇠불알이란 말만 들어도 피가

머리꼭지로 솟는 판에 진(陣) 이름까지 불알진이면 그야말로 불알 천지가

되지 않겠는가.

 "그럼 대통진(大通陣)이라 하지, 뭐."

 남궁세우가 새로운 이름을 들먹였다. 대통진. 모든 것이 다 통한다는 의미

를 가지고 있기에, 보이지도 않고 하고 싶은 것도 모두 할 수 있다는 진 이

름으로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백산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백산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남궁세우가 말한 대통도, 자신의 별호에 있던 운수대

통의 두 글자라는 것이다. 이름 짓는다며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는 것도

싫고 해서 대충 지어버리고 말았다.

 "석두야, 마지막 정리해라."

 백산의 말을 들은 석두가 분주객잔의 한편으로 가더니 환상미로진의 마지

막 작업을 해치웠고 순식간에 분주객잔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빈

허공만 남았다. 지금껏 진의 연습을 위해서 분주객잔만 다시 진을 해제시켜

놓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이 객잔 위로는 누구도 다니면 안 되오."

 "허! 이것을 언제 다 준비했느냐?"

 남궁세우와 서문천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섯 개의 객잔

전부를 지하로 연결해두고 밖은 환상미로진을 이용해서 가려버렸다. 설사

이곳에 객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진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쉽게 발견해내지 못할 것이다. 의심을 하는데도 방법이 없다

는 말이다. 백산의 치밀함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어를 잡으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죠. 이제부터는 전부 귀신이 될 겁

니다. 낮에도 출몰하는 귀신……."

 그날부터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대통진을 무리 없이 펼치기 위한 도

전이…….

 "영감! 요몽 스님은 안 오려나보네요?"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모두들 쉬고 있을 때 백산이 갈태독에게 다가왔다.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치료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세상살이에 별로

밝지도 않은 사람인데, 이 전쟁 와중에 이곳으로 찾아온다 하더라도 쉽지가

 않을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글쎄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이구나."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 일인데 쉽지가 않을 것이다. 혹여 그 세월을 다 찾

았다 할지라도 풀어야 할 일이 있다면 오기가 힘들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는가.

 "잊어버려라. 인연이란 이으려 한다 해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버리려 한

다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요몽보다 다가오는 적을 걱정해야

할 때다."

 "그래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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