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조우(遭遇)
"다 왔다, 빨리 가자!"
수양산 백석평을 향해 달리는 수십 명의 검은 인영들이 있었다. 무엇이 그
리도 급한지 아무것도 없는 산중임에도 더운 숨을 뱉어내며 전력으로 질주
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광풍대원들.
뇌룡현을 출발하여 장장 두 달간의 대장정이 종착지에 달한 것이다. 일행
중 가장 마음이 급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팔십대의 노인인 팽무도였다
. 그의 다급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흉 진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런 마음이 어디 팽무도뿐이겠는가. 오십 년 만에 만나게 될 동생이 기다
리고 있는 남궁세우, 한 형제가 되어버린 광풍대원들. 이 모든 일행이 기쁨
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모닥불이 환히 켜진 마을을 쳐다보며 발걸음을 멈
췄다.
인연의 고리.
뇌룡현이란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던 타인들이 광풍대라는
고리에 묶여서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 그 가족들이 자신들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저들 때문이다. 저들을 위험
속에서 지키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왔다.
"산아!"
이제 구 개월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팽무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 아직 아무 일 없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동굴에서 보았던 파멸안의
운명이, 파멸안이 걸어야 될 길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내내 불안했었다.
더구나 무림삼천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
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왔는데 모두들 편안한 신색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어? 사부!"
"형님, 저기!"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백산과 일행이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이 세상에 저런 거북살스러운 목소리를 가진
이는 한 명밖에 없다. 사부, 드디어 사부와 형제들이 도착한 것이다.
"사부-!"
백산을 비롯한 광견조 전원이 마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수십 명의 인물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돌아가신 부모가 살아온들 이러
할까. 어쩌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보다 더욱 보고 싶었고 걱정했던
형제들이 바로 이들이다. 다행히 빈자리는 없었기에 더욱 기쁘고 고마웠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길에, 몸에서 확 풍겨나오는
퀴퀴한 땀 냄새 속에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 있었다.
"고생 많았구나, 장하다."
"뭘요, 다 저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죠."
"네놈 말고 천영이 말이다."
팽무도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백산과 광견조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탄생, 손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이상 꿈이 없
다 여겼었는데 고마운 일이었다.
소령이를 안고 있는 팽무도의 눈빛은 뇌산의 동굴에서 백산이 보았던, 꿈
을 잃어버린 자의 눈이 아니었다. 희망이란 빛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래를 꿈꾸는 인간의 눈빛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모두 가지고 있는 눈빛
이지만 저 눈빛을 되찾는 데 오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만남.
헤어짐과 만남이 인생사라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만남이다.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말이건만 만남에도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나보
다. 팽무도나 백산처럼 환성을 지르며 그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잊혀버린 시간을 찾고자 울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똑같은 기쁨이건
만 그 표현 방식은 제각각 달랐다. 남궁세우와 남궁지우 두 형제가 있는 곳
에서는 잔잔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우야……!"
"형님……!"
오십 년.
자신이 열다섯 살 때 사라진 형이고,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죽은 줄
알고 있었던 큰형이다. 가문을 망친 배덕자로 오십 년간을 버려두었던 형
님을 다시 찾았다.
"그 코흘리개 녀석이 벌써 늙은이가 다 되었구나."
가장 따랐던 막내 동생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열 살짜리 동안(童顔)
은 어디 가고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자신만큼 늙어버린 노안의 얼굴이 되
어버렸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넘을 수도 없다는 세월의 벽은 두 사람을
똑같이 황혼 속으로 밀어내버린 거였다.
"그 늠름하던 얼굴은 어디로 갔소."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가슴속에 파묻었던 수많은 사연들은 눈
물이 되어나올 뿐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한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기에 흐
르는 눈물도 많았다.
"인사하거라, 미령아."
"그래……. 잘 컸구나, 훌륭하다."
큰절을 하는 남궁미령을 바라보는 남궁세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
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몸속으로 갈무리된 기세와 절제된 몸가짐
, 남궁세가 최고의 기재가 그녀일 것이다.
"이 아이가 형님의 무공을 익혔소. 그것도 혼자서 말이오."
잊었던 형님이기에 줄 선물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순간을 위해
서 딸이 형님의 검법을 익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말 창궁무애검법을 익혔단 말이냐?"
놀라운 표정으로 다시 남궁미령을 쳐다본다.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익
히고 있던 검법이었다. 기재고 천재라서 쳐다보는 게 아니다. 원해서 익혔
든, 아니면 그냥 익혔든 자신을 기억해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무공이 전부가 아니질 않느냐. 그런 것은 차차 익히면 되는 게야."
살아가는 데 무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었다. 비록 무가에서
태어난 자손이라 할지라도 무공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무공은 최상이지만, 그것이 인생이
되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게 된다. 무림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필요
이상의 힘, 그런 힘이 생겼기에 타인의 고통은 생각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의 희생 위에서 꿈을 성취하고자 하
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무림이란 곳이다. 그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형님을 보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버님도……! 잘됐구나……."
남궁세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애증의 감정이었다. 비록 자식을 살
리기 위해서 검을 던졌다지만 아버지의 검을 가슴으로 받아야 했던 그였기
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문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자식에게 몹쓸 짓을 한 본인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자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셨으니 한이 좀 줄었을 게다.
이제는 자신이나 팽무도나 모두 풀어야 할 일이다. 오십 년의 세월이야 잃
어버렸지만 아직은 살아 있고 이제는 가문보다 더 중요한 제자들이 있다.
가문에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녀
석들이 주는 행복……. 그에게는 가문보다 그 광풍대원들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큰 행복이 되어버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수양산에 있는 화전민 마을의 시간이 멈췄다. 날이 밝
아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저녁이 찾아왔건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세상 사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남들이 인정해주는 권력이나 명성보다, 서로 간에 오가는 사소한 대화 속
에서 넘쳐나는 정이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리라.
가족간의 상봉이 있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산기슭에서는 사제지
간의 정이 오가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느냐."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곳에 버리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있을 테니 춥지는 않겠다는 생각
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옛날에 칠성리로 가셨는데 저만 헛고생했다는 생각
도 들고……."
아버지의 유골이 타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팽무도도 백산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애당초 백산이 북경으로 가고자 했던 목적 중의 하
나가 아버지 유골 때문이었다.
산동성에 있다는 칠성리라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북경에서 잘살아보겠다
는 핑계를 달아서 출발했던 녀석이 아니었던가. 복수마저도 포기했다면 녀
석이 어린 시절 이루고자 했던 꿈들 중 마지막 꿈은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
는 일이었을 터인데, 그것마저도 이곳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부! ……꿈은 자꾸 변하는가봅디다. 이젠 저들이 내 꿈이오."
소살우에게 했던 말이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살지 않기로 했다. 이루
어지면 끝나는 꿈이 아니라 영원히 꿀 수 있는, 대대로 이어지는 그런 꿈을
꾸기로 했다. 그 꿈이 소령이고, 앞으로 태어날 자식이고, 광풍대원들이
낳아야 할 자식들인 것이다. 바로 미래라는 꿈……. 자식들에게 희망찬 삶
을 보장해줄 수 있는 미래만 꿈꿀 것이다.
"산아! 나에게 약속해줄 수 있느냐."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변한 팽무도가 백산을 쳐다보았다. 갈태독에게서
백산의 상태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미 흑색지안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진행이 너무 빨랐다. 혈가의 후예가 적어두었던 기록에는 사 년 정도가 걸
렸다 하였는데,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백산은 벌써 흑색지안이 발현되었다
는 것이다.
'혹시 그때부터……?'
팽무도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과거,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 일으켰던 지천
사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가 파멸안의 백색지안이 처음으로 발
현된 시기였다.
지금껏 무공을 대성한 다음부터의 백산을 생각했기에 일 년이란 수치가 나
온 것이지, 실제로 파멸안이 나타난 시기는 십 년이 넘었다는 소리가 아닌
가. 오히려 혈가의 후예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늦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
이 올바른 판단인 것 같았다.
"뭔데, 갑자기 무게를 잡고 그러쇼?"
이쯤이면 분명 한 방이 날아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머리에 힘을 잔뜩
주었지만, 기다리던 반응은 없고 자신을 응시하는 눈만 있었다.
"어라? 알았소. 약속할게요, 한다니까!"
단순한 장난이 아닌 것 같았기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약속이란
말만 들으면 괜스레 불안해진다. 이제까지 자신과의 대화에서 저런 표정은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던 사부가 아닌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두 가지다."
"두 가지?"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네 살 때의 기억. 아버지도 두 가지의 약속을
하라고 하였었다. 다시는 울지 말라고 했던 것과 같이 꿈을 꾸자고 했던 약
속, 그 약속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천영누님에 걸고 약속하겠소."
"첫째는 비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천목환을 벗지 않는 것이다
."
"저의 신상과 관련 있는 것입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이다. 열두 개의 비도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비도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이번 백야평에서 벌인 참극만 해도 그렇다. 흑객을 잡았다는 것과 마지막
조천영의 목소리만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 중간에 있었던 일은 거의
기억을 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이 두 번째 약속이다. 그것만은 절대 벗지 마라."
"에이, 사부도. 천목환은 벗고 싶어도 못 벗어요. 제 몸과 하나인 걸요."
떼어내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게 천목환이다. 일부러 벗고자 한다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천목환에 연결되어 있는 뇌룡사의 끝은 자신의 살 속 깊숙이
박혀 있다.
조천영과 관계를 가질 때도 그 귀찮은 놈을 그대로 차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떼어내면 남는 것은 상처와 피밖에 없을 터인데 그 멍청한 짓을 왜
하겠는가.
"그래, 그랬지……."
백산이 천목환을 끼고 처음 운기를 했을 때를 기억해낸 팽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줄의 뇌룡사를 타고 흘렀던 붉은 기운, 그때는 단순하게 비
도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시험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게 아니었다. 광혈지옥비라는 마물과 천살성의 피가 하나 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놈을 떼어내면 죽기라도 하오?"
"벗어봐라, 나도 궁금하다."
이제 안심이 되는지, 백산의 농담에 가볍게 응수하는 팽무도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서렸다.
"천목환은 방법이 없는데 비도는 장담을 못하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설사 죽음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뽑
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남은 꿈은 그것밖에 없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
기 때문에.
"내 무공도 약하지 않아, 이놈아."
비도가 아니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고 그것조차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나마 광명안이 셋이나 있으니…….'
팽무도가 또 한편으로 마음을 놓는 이유이기도 했다. 광명안, 파멸안에 의
해 종말로 치닫던 무림을 구했다는 전설상의 존재인 광명안은 무공도 익히
지 않은 여인일 뿐이었다. 파멸안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이곳에는 그런 여
인이 셋이나 있다. 조천영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겠지만 소운이나 추렴이
도 백산의 분노를 제어하는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다.
파멸안의 천적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사랑, 그녀들에 대한 백산의 사랑이
곧 광명안인 거였다.
"뒤따르는 자들은 어찌할 거냐."
마을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들을 은밀하게 감시하고 있는 자
들의 흔적을 이미 느꼈다. 아마 풍신개가 말하던 두 맹의 인물들일 것이다.
"사부! 두 맹 중 하나가 승리하면 우리를 가만둘까요?"
"산아!"
안타까운 일이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곳의 입
장에서 보면 철목승이나 개방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까지 완전하게 쓸어내지 못하면 전쟁에 이기고도 강호를 장악했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을 다 죽이지 못할 바에야 묶어둘 명분으로 냉
추렴과 구소운의 가치는 더욱 커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냉추렴과 구소운의
인질적인 가치는 전쟁이 끝난 후라 할지라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팽무도의
표정이 안타깝게 변했다.
"사부, 표정 좀 푸시오. 인상 쓴다고 놈들이 사라지오?"
팽무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백산이 엉덩이를 털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놈들은 결코 추렴이와 소운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사부,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하고 손 털라우."
"그래……. 뭐가 걱정이냐, 우리가 전부 모였는데."
모든 식구들이 다 모였는데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열두 명으로 무림삼
천을 물리치고 왔는데 지금은 오십 명이 넘는다. 전력만 해도 과거 백살대
전력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딸리지는 않을 것이고 이제는 과거처럼 도망가
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 곧 자신의 가문이기에…….
수양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떠나려오?"
"그렇게 되었네. 쫓고 있던 놈들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네."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을 향해서 석숭이 작별인사를 고했다.
자밀원의 후예를 추격하고 있던 금의위로부터 마침내 꼬리를 잡았다는 연
락이 왔던 거였다. 구 개월 이상을 같은 일행이 되어왔기에 헤어진다는 것
도 쉽지가 않았는지, 인사만 나누고 있음에도 벌써 벌건 해가 솟아올랐다.
"자네……."
"말하시오, 우리 사이에 뭘 망설이오."
석숭이 백산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끝내 입을 열
지 못했다.
"아닐세, 가족들이나 잘 돌보라고……."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벌써 천오백 년 전의 이야기고 설령
말을 해준다 하더라도 마음에 닿는 것도 없을 것이다. 서로 접촉하게 되면
그때 또 해결하면 될 것이다. 옥새만 찾게 되면 그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
다.
"싱겁기는…….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시오, 만사를 제쳐두고 갈 테니."
"돈 때문이 아니고?"
"어?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석숭에게 맡겨둔 백산의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석숭이 한 말 중에
그가 없어지면 돈도 같이 없어진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석숭도 잘
알고 있다.
"자! 이것 받게."
"뭐요?"
석숭이 백산에게 조그마한 황금패를 내밀었다.
"구룡전패(九龍錢牌)라는 걸세."
구룡전패.
석가장에서 운영하는 구룡전장의 돈을 마음대로 찾아 쓸 수 있는 절대명부
를 칭하는 말이다.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거네."
"네가 석 대인 돈을 다 써버리면 어쩔라우?"
"제발 부탁이니까 좀 쓰게, 아니 돈 쓰는 법을 좀 배워."
돈이 있어도 쓰지를 못하는 인간이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이다. 사치니 하는
말도 모르고 오직 밥 먹고 옷 입는 것 외에는 돈 나가는 곳이 없다. 그것
마저도 절약하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는 놈이 아닌가.
자신에게 수십억 냥의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부인들 선물이라고 애명환만 달랑 사준 친구에게 뭘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
닐지 싶다.
"쓰고 싶어도 쓸 데가 있어야지……."
"하여간 좀 배우게."
돈 쓰는 방법을 모른다는데, 할 말이 없다. 일행 중 한 명이라도 아는 친
구가 있어야 하는데 전부 그놈이 그놈이다. 돈이라는 것의 쓰임새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자기네들끼리 하는 도박, 특히 광견조 친구들은 악양에
서 투자를 배운 이후로 시간만 나면 그 짓이다. 땅바닥에 숫자를 써놓고 투
자를 한다. 그러다 한쪽으로 돈이 모이면 집단으로 구타를 해서 개평을 뜯
어내고 그걸 가지고 또 투자를 하는, 자기네들 말로는 북경 가서 할 돈벌이
라 하지만 완전히 시간 죽이기 위한 소일거리다.
석숭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 저들 팔자대로 사는 것이지, 돼지 목에
진주가 걸려 있다고 해서 그 돼지가 알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
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사는 녀석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돈이 많다
고 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돈이 없다 해서 불행하게 사는 것
도 아니라는 그 단순한 진리조차 모르고 사는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저들에
게는 그런 개념조차 없다.
만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게 있을 리가 없다.
"이번 일이 어려운 거요?"
석숭이 요상하게 생긴 패를 준 것 때문이었다. 지금 가는 길이 다음을 기
약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것 하며 가
족이나 잘 돌보라는 말들이 꼭 유언처럼 들렸던 까닭이다. 적어도 백산이
듣기에는 그랬다.
"애들 몇 명 데리고 가쇼."
이제는 광풍대원도 전부 모였고 그동안 석숭이 해준 것도 고맙기도 해서
하는 말이었다.
"서 대협만 빼고 세 분이 가기로 했네."
"잘됐네. 그래도 연락하시오, 금령 두 분도 잘 가고. 근데 아까부터 왜 웃
는 거요?"
"아닙니다, 백 소협. 다음에 뵙지요."
금령 두 사람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백산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석숭을 배웅하고 돌아선 백산의 표정이 변했다. 느긋한 걸음걸이에 온몸
가득 들어간 힘 하며 뭔가 엄청난 것을 얻었다는 자랑스러움이 넘쳐났다.
"뭐예요?"
"응, 그 양반이 나를 잘 봐서……."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에게, 석숭이 했던 말에다 조금 더 살
을 붙이고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열심히 떠벌렸다. 물론 그때까지도 힘이
들어간 몸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은 처음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남궁지우의 말에 백산의 얼굴이 붉게 변하고 말았다.
"그 구룡전패는 말일세, 구룡전장에 엄청난 거금을 맡기면 주는 것인데…
…."
맡긴 금액에 따라서 동패, 은패, 금패의 세 가지가 있다.
동패는 하루에 일만 냥, 은패는 이만 냥, 금패는 무제한으로 돈을 찾아 쓸
수 있는 신표라는 거였다.
"그 양반이 자네를 잘 보기는 한 모양이구먼."
백산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남궁지우가 감탄의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금액을 맡겨야 구룡전패를 받을 수 있는지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소 십억 냥 이상을 맡겨야만 구룡전패를 내준다
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패는 말일세, 자식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 하더군."
금패의 특전 중의 하나였다. 동패나 은패는 본인에 한해서만 쓸 수 있는
데 반해, 금패는 누가 가지고 있느냐를 따지지 않고 패만 확인하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내어준다는 말이었다.
백산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하든지 말든지 남궁지우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백산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있던 네 사람 갈태독과 조천영, 구소운,
그리고 냉추렴의 얼굴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역력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백산이 석숭에게 돈을 맡겨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기에.
어차피 줄 것을 가지고 온갖 생색은 다 내고 마치 인심을 쓰는 것처럼 주
었으니 그때의 상황이 눈앞에 훤하게 그려졌던 터였다. 백산이 완전하게 당
한 꼴이 아닌가.
"그러게, 왜 그렇게 괴롭혔어요. 잘 좀 해드리지."
양자강에서부터 남궁세가까지 가면서 석숭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두고 한
말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말이 없다가 마지막 떠나면서 그때의 앙갚음
을 하고 간 것이다.
"호! 나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지? 누님, 잠깐 줘봐요. 모사!"
조천영에게 다시 구룡전패를 건네받은 백산이 모사를 불렀다.
"가능하겠냐?"
"야, 이 도둑놈아! 있는 돈이나 다 써라."
두 사람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냅다 백산의 뒤통수를 까면서 소리를 질렀다
. 이 황당한 놈이 지금도 주체할 수 없는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룡전패
를 모조하려는 게 아닌가.
"쟤들 장가가면 하나씩은 줘야 될 것 아뇨."
"그래서, 저것을 쉰 개나 더 만들겠다고?"
"팽가도 줘야 되는데……."
"해보겠습니다, 형님!"
모사도 옆에서 남궁지우의 말을 들었다. 저건 완전히 도깨비 방망이다. 더
군다나 장가갈 때 하나씩 준다고 하는데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만들어야 될
것 아닌가. 좀 어렵기는 하겠지만 해내야 할 일이다. 모사의 얼굴이 모처럼
투지로 불타올랐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자, 이놈아! 돈이 억만 금이 있으면 뭐
하냐? 쓸 줄도 모르는 놈이."
"우씨! 이 영감이?"
벌써 두 번째 듣는 소리다. 석숭도 그랬고 이번에는 갈태독까지 또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네 녀석이 쥐고 있는 그것은 모조도 안 될 뿐더러 세상에 두 개밖에 없는
거다, 이놈아!"
갈태독도 저 금빛 패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남궁지우보다 더 자세
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명 구룡천패라 불리는 것으로 석가장에 단 두
개밖에 없는 물건이다. 하나는 석숭 본인이 가지고 있을 테니 그 나머지를
백산에게 준 것이다. 은 사십억 냥하고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이 엄청난 보물인지도 알지 못하고 또한 이미 조
천영의 품속으로 들어갔으니 이미 다시는 햇빛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갈태독만의 생각이고 아침부터 두 사람에게 돈도 쓰지 못하는 놈이
라고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백산은 드디어 큰 결심을 했다.
돈 쓰는 방법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처절했다. 광풍대원 전
원을 모아놓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으나 석숭이 말한 것처럼 그놈이 그놈이고 수준이 같은데 특별한 방법이
나올 게 없다.
모름지기 남자가 돈을 쓰는 경우가 언제이던가. 여자에게 아주 고가품을
선물한다거나, 아니면 악양에 있던 중원제일루 같은 기루로 가서 기녀를 품
고 술을 먹어야 하는데, 취미생활이라고 해봐야 서로 쌈박질하는 것하고 돈
도 줄지 않는 투자밖에 없으니 쓰고자 해도 방법이 없다.
"야, 외팔이!"
"형님, 독수객(獨手客)이라 불러주기로 했던 것 아뇨?"
"나는 지금도 다쇠불알인데, 바랄 걸 바라라, 임마!"
백야평에서 한 팔이 잘린 소살우에게 광견조원들이 머리를 짜서 독수객이
란 별호를 선물했던 것이다. 물론 거의 석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는 했
지만……. 그러나 유독 한 사람, 백산만이 그 별호에 반대했다. 너무 멋지
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 이번에 내려가서 그 비단인가 하는 걸로 옷 한 벌씩 어떠냐?"
머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돈 쓰는 방법을 궁리하다 생
각해낸 것이 비단옷. 먹는 것과 입는 것의 범주에서 도대체 벗어나질 못한
다.
"형님!"
"왜?"
"제발 철 좀 드시오, 거 애들 보는데 창피하지도 않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시원한 화주나 한잔합시다."
"왜 임마! 우린 비단옷 입으면 안 되냐?"
"그런 고급 옷 입고 있다가 먼지 타고 더러워지면 그땐 어쩔 거요."
소살우의 정확한 지적이었다. 좋은 옷 입고 부티 나게 하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관리를 못하면 더욱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고급 옷이다. 집안
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고 나다닐 때도 마차만 타고 다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옷이 비단옷인 것이다. 허구한 날 황야에서 먼
지를 먹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옷이 아닐 뿐더러, 더러워졌다
고 해지지도 않은 옷을 버리고 새로 해 입을 사람들도 아니었기에 없느니만
못한 게 고급 옷인 게다.
"우씨, 돈을 쓰고 싶어도 못 쓰네. 근데 이 더운 여름에 시원한 화주가 어
디 있냐?"
"그 빙천비는 폼이요? 그걸로 얼리면……. 가만? 형님, 그걸로 술을 얼려
서 팝시다. 돈 좀 더 받고."
"엥? 야! 그거 기찬 방법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든 일행이 결국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돈
을 쓰기 위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두 놈이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돈을 버
는 방법이었다. 때로는 돈을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더 어울리는 인간도 있
다는 게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돈도 아무나 쓰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대인원이 된 일행들. 석숭과 금령, 그리고 무욕인 세 명이 떠
났다고는 하지만 광풍대원 전원과 화전민 마을의 생존자인 아이들까지 수십
명의 인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평양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