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대천강검진
점점 굵어진 빗방울이 사방에 뿌려지고 있는 이곳 선인령에는 명예를 지키
고자 하는 자들과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는 자들의 싸움만 남았다.
'오늘 무당은 패하게 될 겁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질 수 없
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영운진인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강구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휘이잉!
마치 바람소리 같은 소성이 들리며 대천강검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영운진인이 진무칠절진에 자리를 하자, 완벽해진 대천강검진에서 희뿌연
운무가 뭉클뭉클 솟아나며 엄청난 압력으로 광풍대원 일행을 압박하기 시작
했다.
칠십이 명이나 되는 무당고수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내력이 진(陣)에 의해
서로 보완되면서 주변의 대기를 잠식해나가자, 모두 열두 개의 개별진으로
형성된 무한원에는 빗물이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무당의 검진을 주시하고 있던 남궁세우의 입에서도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
왔다.
"전원 광풍대진(狂風大陣)으로!"
광풍대진(狂風大陣).
남궁세가의 청풍검진과 창궁무애검진의 합벽진이다.
내부는 광도대원들로 청풍검진을 구축하고, 그 청풍검진의 각각의 변으로
부터 세모꼴로 네 개의 창궁무애검진을 구축하는 진이었다. 이미 혈운에 싸
여 있던 광풍대원들에게서도 전보다 더 붉은 운무가 피어오르며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맨 앞에 있는 남궁세우와 맨 뒤쪽에 자리 잡은 팽무도, 두 사람의 몸
에서 발산되는 혈기(血氣)는 각각의 앞에 있는 무당의 진식에 영향을 줄 정
도로 대단했다.
두 사람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먼저 도발해왔음에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
지 않는 무당의 행태(行態)에 화가 났음이다.
스스릉!
두 사람이 처음으로 검과 도를 뽑아들었다. 천사맹 인물들을 칠 때도 뽑지
않았던 검과 도였다.
오십 년(五十 年).
무려 오십 년을 가슴속에 묻고자 했던 물건이고 다시는 꺼내지 않기를 바
랐다. 자식마저도 버려야 하는 추악한 무림이었기에 영원히 버리고자 했었
다. 명예를 위해 뽑은 게 아니다. 뇌룡현의 팽무도와 장노인으로 새롭게 시
작한 삶에서 맺어진 인연을 지키기 위해 검과 도를 뽑았다. 두 개의 진에서
발산되는 압력에 의해 떨어지던 빗방울이 터져나가고 땅거죽이 뒤집어졌다
.
먼저 움직인 쪽은 무당의 대천강검진이었다. 백무 속에서부터 장엄한 선창
이 흘러나오며 백색운무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제일 검! 금강천추(金剛天樞)!"
대천강검진의 제일 식인 금강천추검. 오행검진에 의해 발생되는 금(金)의
기운을 이용하는 검법이었다.
스으윽!
여섯 개의 오행검진과 칠성검진이 앞으로 나섰고,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
던 백색의 운무 속에서부터 새하얀 검광(劒光)이 광풍대진을 향해 강렬한
풍압(風壓)을 형성한 채 몰아쳤다.
"광풍일식(狂風一式)! 진(陣)!"
"직도황룡!"
남궁세우의 외침에 의해 광풍대진의 각 모서리에 있던 팔 명의 인물이 붉
은 혈운을 만들었고, 두 세력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거칠게 부딪쳤
다.
카아아! 기이잉!
거북한 음향과 함께 백색의 운무가 희미해지고 무당의 검진이 주춤거린다.
처음 일 초부터 광풍대원들은 검강과 도강을 사용했다. 자신들도 최선을
다해야 함을 알고 있다.
무당검진의 강함이 몸으로 느껴지고 있음이다. 두 번에 걸쳐 겪어보았던
무당의 검진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변의 대기마저 묶어버릴 정도의 강한 검
진이었다.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모든 사람이 선을 선이라 알지만, 그것은 선이 아니다.'
"제이 검! 목광천선(木光天璇)!"
일 초의 공격에서 검진의 주춤거림에는 아랑곳 않는 영운진인의 외침이 선
인령을 타고 울렸다. 그의 외침에 따라 후위에 대기하고 있던 세 개의 진무
칠절진이 앞으로 나서며 백색 검강을 발하고 있던 검을 혈운의 중심부를 향
해 무차별하게 찔러 넣었다.
"광풍이식(狂風二式)! 출(出)!"
"팔방풍우!"
내부에서 청풍검진을 형성하고 있던 광도대원들이 기존에 나가 있던 팔 명
의 주위로 움직이며 백색의 강기를 향해 도강을 뿌려댔다.
진무칠절진에서 나오는 검강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초식이었다. 시작일 뿐
이었다.
"광풍삼식(狂風三式)! 진(進)!"
"횡소천군!"
이어지는 남궁세우의 일성에 넓게 퍼져 있던 광풍대 일행의 입에서 힘찬
외침이 터져나오며 붉은 도강이 동심원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퍼져나가
는 붉은 운무 속에 넘실대는 기운은 죽음을 부르는 살기였다.
콰앙! 쾅! 콰콰쾅!
백색의 검강과 붉은색의 강기들이 거칠게 부딪쳤다. 대지를 향해 내리퍼붓
고 있는 빗소리는 이미 어느 편에서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자신들이
구축한 검진의 내부에서 가진 바 모든 것을 쏟아낼 뿐이었다.
두 번의 공격을 가했던 영운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들의 공격에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대응하고 있는 상대의 강함에 놀란 것이다.
또한, 검진은 무당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도 무당검진 못지않은 검진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
니라,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밀어내고 있다. 빚을 갚기 위해 목숨마저 버
리고자 했는데 저들의 실력은 결코 무당보다 낮은 게 아니었다.
강구두의 얼굴에서 나타났던 표정, 바로 이것이었다. 결코 지지 않을 것이
라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던 것이다.
"도충, 이용지혹불영(道沖, 而用之或不盈)!"
'도는 텅 비어 있어 아무리 써도 차질 않는다.'
"제 삼 검! 수폭천기(水爆天璣)!"
일 초의 공격을 가하고 뒤로 물러나 있던 세 개의 칠성검진이 앞으로 나서
며 오행검진의 사이로 들어가고, 그들의 검에서도 검강이 솟구쳐 올랐다.
대천강검진의 본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칠성검진을 구축하고 있는 청자배 제자들의 실력으로 검강단계인 수폭천기
를 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행검진을 구성하고 있는 무자배 제
자들의 공력을 이어받아 검강을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다.
더욱더 커진 영운진인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허이불굴, 동이유출(虛而不屈, 動而愈出)!"
'텅 비어 있되 다함이 없고, 움직이면 더욱 나온다.'
"제사 검! 화염천권(火焰天權)!"
포위망을 좁히고 있던 세 개의 진무칠절진에서 엄청난 외침이 진동하며 그
들의 검에서 솟아나온 검강이 혈운을 향해 지쳐들었다.
대천강검진의 무서움이었다. 검강 단계에 있는 고수가 이십여 명밖에 안
되는데도 대천강검진에 의해서 사십여 명으로 늘어난 거였다. 무당인들과
광풍대원들과의 거리는 불과 반장, 그들의 검강이면 충분히 광풍대진을 잘
라버릴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순간 혈운 속에서 남궁세우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광풍사식(狂風四式)! 멸!"
"혈극참(血極慘)!"
"창궁혈해탄(蒼穹血海彈)!"
한천팽무도법과 혈우창궁검법의 일 초가 펼쳐지며 광풍대원들 무리 속에서
붉은 혈광이 미친 듯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인당 백팔 개의 도강을 생성
해내는 혈극참과 그와 비슷한 경지인 혈우창궁검법이 백색운무를 완전하게
장악하며 무차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폭죽이 터져나가는 장면이 이러할까, 화려한 불꽃 잔치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 불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한(恨).
오십 년의 한이 빚어낸 살기였다. 가문에 버림받고, 세상에서 버려졌던 한
많은 인생들의 절규였다.
가공할 광경이었다.
카기강! 기이잉! 쿠앙!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주변의 바위들과 비에 젖은 초목들이 산산이 부서진
채 허공에 난무하였다. 거의 팔십여 명의 손에서 펼쳐진 검강과 도강이 격
돌하여 사방으로 새파란 뇌전을 방출해내며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허억! 크윽!"
"으음!"
양쪽 진영으로부터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온다. 백색의 운무와 혈
무가 약해지며 두 곳의 상황이 드러났다.
검강을 만들며 공격을 가했던 청자배 제자들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일 장
여 정도를 뒤로 물러나 있었고, 진무칠절진의 영자항렬 고수들은 얼굴이 하
얗게 탈색되어 경악스런 표정으로 자신들을 물리친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당의 최고
검진이, 무당의 자존심이 힘에서 밀렸다.
강호무림의 세력도 아니다.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알려지지도 않은 인
물들에 의해서 무당의 검진이 물러난 것이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찌 저런 가공한 단체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두려움이었다. 비록 사십여 명이 전부였지만
전원이 검강 도강을 구사하는 고수들이었다. 고수들의 숫자로만 따지면 무
당 전체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인 거였다.
'그럼 지금까지는 일부러…….'
영운진인이 그제야 깨달았다. 저들은 지금의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무당
제자들에게 살수를 쓰지 않았던 거였다. 만일 살심을 먹었다면 무정을 따라
왔던 모든 제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옥녀봉에서 저들과 대결했던 모두가 죽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디서 저런 자들이……. 허억!'
희미한 혈무 속에 검을 들고 서 있는 한 인물을 발견한 영운진인이 눈을
찢어져라 치뜨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십 년의 세월 속에 잊혔던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우상이었기에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물, 비록 나이를 먹어 젊은 시절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이셨습니까. 그래서 이리 강해지셨습니까!'
무당의 장문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백살마대 사건이 조작되었고 그 희생자
들이 백살대였다는 사실을.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하였는데
바로 눈앞에 생존자 중 한 명이 서 있는 것이다.
"천지소이능장차구자(天地所以能長且久者)!"
'천지가 능히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저희를 치고 가십시오. 무당의 오만함을 벌하십시오.'
영운진인의 입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진정 반가운 사람
이건만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야 저들이 음모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강호무림인들이나
무당의 여타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다. 공식적으로는 강호공적
이고 처단해야 될 악적(惡賊)인 게다.
저들이 다시 강호를 지배하여 그때의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 한, 백살마대
사건은 영원한 비밀로 묻힐 터이고 저들은 강호공적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것이 세상이고 역사인 것이다.
당장 여기서만 해도 그렇다. 저들이 빠져나가는 방법은 대천강검진을 깨트
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 무당이 살고 저들이 사는 방법이다.
"제육 검! 삼절태황(三絶太荒) "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무당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한다.
무당의 검법 중에 강하기로 이름난 삼절황검법(三絶荒劒法). 펼칠 수 있는
자들도 영운진인을 비롯한, 그와 동년배인 영자항렬 제자들밖에 없다.
이제는 대천강검진을 구성하는 각진의 역할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세 개의
진무칠절진은 공격만을 감행하고, 여섯의 오행검진의 역할은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포위망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칠성검진에 있는 청자배 제자들은 공력전이를 맡게 된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펼치는 최후의 삼 초식이다.
칠성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청자배 제자들이 진무칠절진 속으로 스며들고,
곧이어 영자배 제자들의 검이 하늘로 곧추세워졌다. 그리고, 그 검으로부터
백색의 검강이 흘러나와 진무칠절진 자체가 새하얀 검으로 화해갔다.
영자항렬의 무당 제자들과 그들의 뒤에서 공력을 공급해주는 청자배 제자
들의 몸이 사라지고 대신 세 개의 거대한 검만이 허공에 남았다. 완전한 강
기만으로 이루어진 백색의 검.
대천강검진의 진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삼절황검법의 삼 초식
이 끝날 때까지는 현재의 상태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진무칠절진을 구성하고 있는 사십이 명의 제자들은 거
의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진으로 펼치는 동귀어진(同歸於
盡)의 수였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이름이 없음은 하늘과 땅에서 비롯함이오, 이름이 있으면 만물의 어머니
이다.'
오행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무자배 제자들의 입에서 다시 도덕경을 낭송하
는 소리가 선인령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설마 대천강검진의 마지막 삼
초식을 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도덕경을 낭송하는 그들의 목소리
에 비장함이 가득했다.
'형님! 우리가 운이 좋군요. 저 무당의 최고 정수를 보게 되다니 말입니다
.'
'큭! 이 상황에서 운이란 말이 나오는가.'
남궁세우와 팽무도간 사이에 오간 전음이었다. 온몸을 자극하는 긴장감,
절대절명의 적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두 사람이 가지는 공통적인 감정은 살
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물경 오십 년 만에, 잠들어 있던 무혼(武魂)이 깨어
나고 있었다.
거대한 백색의 강기검을 쳐다보던 팽무도가 그의 좌수에 또 다른 도(刀)
한 자루를 빼들었다. 백산이 수천비와 각천비로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깨달았던 방법, 그도 쌍도(雙刀)를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산이 같으면 저것 하나는 감당하겠지?'
'하나뿐입니까? 틈도 주지 않고 벌써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 녀석에게 질 수야 없지. 저놈 하나는 내가 맡지.'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진으로 펼치는
것에는 한계에 달했다. 광풍대원들이 할 수 있는 경지는 탄의 경지와 이기
어검까지인데 그 두 초식을 펼치고 나면 모두들 걷지도 못할 것이기에 두
사람이 나서려는 것이다.
"일휘와 한수, 그리고 너희들은 앞에 있는 것만 맡아라."
일휘와 장한수, 그리고 세 명의 조장들이 앞으로 나섰고 나머지 조원들은
자신의 병기를 땅바닥에 꽂아둔 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며 밀려오는 내
공에 대항해나가기 시작했다. 혈운 속 세 곳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듯 혈광이
치솟아오르자 떨어지던 빗방울마저 증발되어 사라져갔다.
강호상에 사상 유래가 없는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진식에 의해서 초식
과 내공을 동시에 겨루는 대결이었다.
"혈극폭(血極爆)!"
"창궁혈해천(蒼穹血海天)!"
광풍대진 속에서 강렬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붉은 강기들이 몰아치기 시작
했다.
먼저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우수에 있던 도와 검이 허공으로 비상하기 시작
했고, 뒤이어 팽무도의 좌수와 일휘 등에 의해서 펼쳐진 도탄강기와 검탄강
기가 자신들의 앞으로 다가오는 백색의 기검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갔다.
오십 년의 한으로 엮어낸 검법과 도법이었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가문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무공이었다. 다시는
운명에 굴복하여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적을 물리
치려는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오십 년의 한을 펼치는 것이었다.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그렇기 때문에 무욕으로써 그 오묘함을 보고, 유욕으로써 그 가장자리를
본다.'
콰앙! 지지징!
후두둑! 번쩍! 콰과광!
도덕경의 낭송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지고, 백색의 기검과 혈광이 부딪
치며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인간들의 사심(私心)에 하늘도
노했는지 장대비와 우뢰를 내려 보내 대지를 찢어발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상의 선은 물과 같으니.'
"제 칠 검! 삼절겁황(三絶劫荒)!"
자신들의 몸의 상태를 살펴볼 겨를도 없다. 두 개의 거력에 의한 반탄력
때문에 뒤쪽으로 밀려난 진무칠절진에서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더욱 농밀
한 백광이 쏟아져나왔고, 거대한 백색의 강기검이 회전을 하며 광풍대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색의 강기검으로 펼치는 이기어검이었다. 열네 명의 인물이 일심(一心)
이 되지 못하면 결코 펼칠 수 없는 엄청난 위용, 가히 무당의 저력이라고밖
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백색의 강기로 만들어진 이기어검을 쳐다보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두 팔
이 하늘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광풍대원들 앞에 꽂혀 있던 검과 도가 허공
을 날아 두 사람의 주변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은 혈광을 발하며 수십
개의 검과 도가 허공에서 뭉치는 것 같더니 곧이어 모든 공간을 소멸시키
며 날아오는 강기검을 향해 거칠게 돌진해들었다.
끼이익!
과광! 쾅!
귀청을 울리는 음향과 광음이 터져나오며, 십여 장 밖에 있는 소나무들이
가루로 부서져나가고 있었다.
"커억! 크윽!"
"으음! 큭!"
"혈극망(血極望)!"
"창궁혈애무(蒼穹血哀無)!"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그러므로 무엇인가 유익이 되는 것은, 텅 비어 있을 때이다.'
"제팔 검! 삼절만황(三絶蠻荒)!"
양쪽 진영에서 비명소리와 피를 토하는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붉은 혈무
속에서 팽무도와 남궁세우, 그리고 일휘 일행의 마지막 외침이 터져나왔고
, 이에 뒤질세라 대천강검진에서도 무당의 영운진인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
들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한천팽무도법과 혈우창궁검법의 마지막 초식, 바로 심검(心劒)과 심도(心
刀)가 펼쳐졌다. 그 무엇도 거칠게 없었다. 오직 붉은 기운만이 모든 공간
을 잠식하며 무당의 진영을 향해서 밀려가고 있었다.
대천강검진의 마지막 초식을 준비하던 무당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 대천강검진이 아무리 무당 최고의 검진이라 해도 심검의 경지까지는 펼칠
수 없다.
결국은 목숨을 걸어야만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설마 상대가 심검의 경지
까지 올라 있는 절대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무당에서도 무당삼선 이외에는 그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없다. 심지어는
무당삼선마저도 심검의 초입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 심검의 경지가 네 사람
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무당 인물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흐르고 그들의 머리 위, 허공에 형성되어
있던 거대한 백색기검이 투명하게 변했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뒤에서 공력을 공급해주던 청자
배 제자들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사숙들의 등에
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초월해서 최후의 내공을 짜내고 있는 것
이다.
번-쩍!
쿠르릉 쾅!
두 개의 힘이 부딪치는 소리는 하늘이 대신했다. 새하얀 번갯불 사이로 무
당 제자들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 자신들이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투명한 강기검이 산산이 바스러지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강기검을 부숴버린 미지의 기운은 공간마저 없애버리
며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선인령 주변이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들어찼다.
"무량수불!"
나직한 도호와 함께 영운진인이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대항할 수 없음이다. 자신들이 어찌해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
다. 이미 태산이고 하늘인 자들이었다. 굳이 자신이 봐주지 않더라도 무당
을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자들이었다.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실력으로 저들의
생로(生路)를 걱정했던 자신이 아닌가.
"도인에게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미 도를 추구하기로 하였으면 세속의 모든 것에 초연해야 했건만, 그깟
무당의 명예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싶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고자 했기에 그제야 주변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선명
하게 들렸다. 바로 저 모습인 게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 때로는 약한
이슬비로, 때로는 광폭한 폭우로 변해 대지에 내려오지만 그 본성은 언제
나 변함이 없다.
대지를 적셔 더욱 비옥하게 해주는 역할, 그게 자연이고 무당이 추구해야
하는 바인 것이다. 아무리 강호정의를 위한다 하더라도 그 바탕은 언제나
같아야 했건만, 무당은 명예를 기틀로 삼으려 했다.
잘못된 게다. 무당이 잘못을 저지른 게다. 잘못한 제자를 벌했어야 하건만
무당의 명예를 위해 저들을 막고자 했다. 저들을 위한다는 얄팍한 자존심
으로 대천강검진을 펼쳤지만 사실은 무당을 위한 행위였다. 잘못했다는 말
을 하기 싫어서 억지로 그런 상황을 만들고자 했던 자신의 명예욕.
그러나 그만 그쳐야 할 빗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건 죽음
이 아니질 않는가. 가만히 눈을 뜨고 전면을 쳐다보았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무심하게 자신들을 쳐다보는 인물들. 백색의 기검을
부숴버린 죽음의 기운은 바로 코앞에서 소멸되었다. 모두들 쓰러져 있지만
자신을 비롯한 무당인들의 사망자는 없는 것 같았다.
"저희 무당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까."
"구두 이 친구 때문이네. 그대는 복이 많은 사람이더군."
팽무도가 영운진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강구두의 전음이 없었다면 다
가루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로를 열어주기 위해서 장문인인 영운진인이 희생되려
했었다는 말에 공력을 거두고 말았다. 자신을 몰락시켰던 인물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강구두의 측은지심에 감동했던 거였다.
"이제 무당과의 빚은 없는 것으로 하겠네."
"설마…… 대주셨습니까?"
영운진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나왔다. 남궁세우와 같이 있으면서 절대
적인 도법을 가진 인물, 백살대의 대주이며 천하제일도란 이름을 얻었던 인
물, 하북팽가의 장자인 팽무도밖에 없을 터였다.
그였기에 자신들을 용서해준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게다. 자신들을 몰락시
켰던 음모의 주역 중 한곳인 무당과는 더 이상 은원관계를 따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천강검진이 무너졌으니 우리를 쫓지는 않으시겠지요."
"가십시오.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저를 용
서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남궁세우를 비롯한 광풍대원들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갔
다.
'강 대협! 빚을 갚고자 했건만 더욱 큰 빚을 지고 말았구려. 무량수불……
!'
비록 대천강검진이 패했고 무당 제자인 무정의 죽음이 있었지만 영운진인
의 표정은 이곳에 올 때보다 밝아 보였다.
누가 알 것인가, 오늘 무당이 멸망의 순간에서 살아났음을…….
"모두 몸을 추슬러라. 돌아간다."
영운진인의 지시에 의해서 쓰러져 있던 무당인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며 서
로를 부축하고 옥소궁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주, 부대주, 그리고 강 대협. 가시는 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제자들이 옥소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음에도 영운진인의 시선은 광풍대가
사라진 곳에서 떠날 생각을 않았다.
* * *
울컥! 울컥!
팽무도와 남궁세우를 비롯한 광풍대원들이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피를 토해
냈다.
"역시 무당이군."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팽무도가 입을 열었다. 깨달음이 있기 전의
철목승보다 강하다 했던 두 사람이 무당파와의 대결에서 내상을 입고 말았
다. 비록 속가 제자들의 이탈로 인하여 세력은 많이 약해졌지만 무당 제자
들의 무공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무당이 이대로 물러서질 않을 것입니다."
"무슨 소린가, 아우! 그들은 더 이상 쫓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대천강검진이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쫓지 않는다는 것은 무당 스스로 만들
어놓은 자신들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을 쫓을 것이
라는 남궁세우의 말에 팽무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군다나 장문인마저도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형님과 저 때문입니다."
"운양(雲讓)과 운정(雲正), 그들을 말함인가?"
장문인인 영운진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자들이다. 지금은 무당삼선(武當
三仙)으로 불리고 있는 인물들인 운양, 운정, 운청진인 삼 인을 일컫는 말
이다. 오십 년 전, 천무맹의 실세들이었고 백살대 음모에 직간접적으로 관
련된 자들이 또한 그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생존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오천맹을 파멸시킨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백살대 사건은 영원히 묻혀야 할
사건이고 강호상에서 논의되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백살대 사건이 드러나서 음모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을 경우 강호는 혼란에
휩싸일 테고, 구대문파를 비롯한 모든 세력들의 파멸이 올 것이기 때문이
다.
"오질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온다면……. 빚을 갚아야지."
천주봉을 노려보는 팽무도의 얼굴에 스산한 살기가 흘렀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하지만 죽어주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자신들의 죄상을 숨기기 위해서 다시 공격해온다면 이제는 정말 용서하지
않은 작정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그들의 사고가 바뀌겠습니까."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자들이다. 자신들 위에 누군가 있는 것을 절
대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에.
남궁세우의 우려는 공연한 기우가 아니었다.
무당산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무당의 제자가 희생을 당한 것도 모자라, 무당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대천강검진이 와해되었다. 무당의 뿌리를 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누구였습니까? 장문인!"
무당삼선 삼 인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경악스런 표정으로 영운진인을 다
그쳤다. 그들도 태화궁 후원 쪽에서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기에 무
당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문인을 비롯한 영자항렬의 제자들
이 대천강검진을 펼쳐야 될 정도로 강한 적이 왔다는 것도.
그러나 무당 최고의 검진이 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힘이야 들
겠지만 무당을 무시한 자들을 포박하여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무당의 패배, 대천강검
진을 펼치고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그게…… 저……."
영운진인이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밝힌다면 무당의 검진이 패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이 될 터였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은원관계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것으로 끝냈으면 싶었다.
그러나 사숙들의 표정으로 봐서는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세 분 사숙님, 저에게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느닷없는 영운진인의 말에 무당삼선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도대체 누구
이기에 장문인이 약속까지 운운한단 말인가.
결코 들어서는 안 될 말인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꼭 들어야 될 말인 것만 같았다.
"장문……."
"약속해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요지부동 영운진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세 사람의 확답을 들
어야 말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을 약속해야 하는가."
결국 세 사람 중 가장 연장자인 운양진인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저의 말을 듣고 무당을 나서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영운진인의 요구사항에 일순간 무당삼선이 할 말을 잃었다. 금족령, 무당
의 제자로 있는 한 산문을 나서지 말라는 소리였다.
천무맹에서 나온 이후로 무당을 떠나지 않고 거의 은거하다시피 해온 삼
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새삼 금족령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
의 정체는 자신들이 무당을 뛰쳐나가지 말아야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란 뜻
이 된다.
"장문인!"
"세 분은 이미 강호에서 떠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리 생활해달라는 것입
니다."
무당삼선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보통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
들이 장문인으로 추대했던 영운진인이었기에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만일 약속을 했다가 어기게 되면 장문직을 그만두고 무당을 떠나버릴 것이
다. 그러나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닌 것 같았다.
"알았네, 장문인. 우리가 무당의 제자로 있는 한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않
겠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운진인의 말에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변한 무당삼선이
급기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백살대라 했다. 팽무도라고 했고 남궁세우라 하였다. 그들이 용서를 해주
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제정신인 게요? 강호제일의 공적이외다. 우리 무당이 무림공적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그런 문파였소?"
운양진인의 입에서 추상같은 일갈이 터져나왔다.
너무나 순진함에 대한 비난이었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건 그들은 무당을
포함한 구파일방에 의해서 무림공적으로 선포되었고, 무림인들에 의해 처단
되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풀어준 것만 해도 아니 될 일이거늘 용서를
구했다 하고 있다.
"그럼 세 분은 무당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을 공격했어야 했단 말입니까?"
"그래야지요. 강호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란 것을 모르셨단
말이오? 아니면 무당파의 존재 이유를 잊으신 게요!"
"무당의 존재 이유라 하셨습니까? 나보다 우월한 자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 위에서 세우는 것이 무당이었습니까?"
"닥치시오! 우리가 행했던 일이 잘못되었다 하시는 게요? 무당을 위해서
한 일이란 것을 진정 모르셨단 말이오?"
무당삼선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어렸다. 설마 장문인의 입에서 과거의
행위를 부정하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정도가 아닌 걸 알면서도 행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장문인 아니던가.
한 문파를 세운다는 것, 강호상에 손꼽히는,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거대문
파를 세우는 일이 정당한 방법만을 가지고 되는 것이던가. 때로는 비정상적
인 방법도 사용해야 하고, 때로는 해서는 안 될 일도 하면서 세워지는 것이
문파인 게다.
그런데 장문인의 입에서 선대의 업적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무당이 왜 살아난 줄 아십니까? 저 때문에, 아니 무당의 명예 때문
에 파멸했던 일검무적 강구두 대협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우리 무당은 그를
몰락시켰는데 그는 또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었단 말입니다."
강구두, 팽무도, 남궁세우,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의 눈빛. 그들의 눈빛은
결코 삶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대무당의 검진을 와
해시킨 엄청난 일을 해놓고도 누구 하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이
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들이었고 더 이상 질 수 없는 운명이란
얼굴들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가. 자신이 그랬고, 무당이 그랬고,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남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자들이 그랬다. 그럼에도
무당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파멸 위
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속가 제자들 몇 명 떠난 것에 아쉬워하며 그렇게 살아왔던 거였다.
"더 이상 위선 속에 무당의 이름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무당이란 이름은
어디에 있든지, 무당은 무당일 뿐입니다."
강호무림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도 무당은 무당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를 닦기 위해서 입산했고,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월
하기 위해서 도복을 입었다. 죄(罪)에 의해서 다져진 터전 위에 또다시 죄(
罪)로 이루어진 탑을 쌓으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우리가 거부하면 어쩔 것이오."
세 사람이 했던 약속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세 분은 무당파의 기둥이십니다. 그리고 장문인으로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자가 무당을 지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발언이었다. 더 이상 쫓지 않겠다 했던 팽무도와의 약속, 무당삼선
이 자신에게 한 약속, 그것은 영운진인 개인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무당 장
문인이 한 약속이었고 언약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음
은 무당의 수좌인 장문인의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무당파를 떠
난다 하는 것이다.
"허허!"
세 사람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었다.
자신들이 장문인으로 만들었고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강구두마저 내쳤
는데 그것이 평생의 짐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대주께서 그러셨습니다. 이번 일로 무당과의 은원(恩怨)은 더 이상 없는
것이라고요. 그러니 세 분께서도 그들에 대해서는 잊으셔야 될 줄로 압니다
."
영운진인의 말에 세 사람은 침묵하고 말았다. 무당을 떠나겠다고까지 하면
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일 자신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로 장문인 자리를 버리고 무당을 떠
날 것이다.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에 대문파인 무당의 장문인이
된 사람이다. 결국은 자신들이 질 수밖에 없음이다.
"알았소이다, 장문인."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세 사람이 자신의 처소로 물러갔다.
'무당은 거듭나야 합니다.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또 죄악을 저지르는 그런
악순환은 없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사숙님들을 잡을 수 없는 저의 무능이
안타깝습니다.'
사숙들이 이대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그분들이 무당파를 생각하는 마음은 장문인인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당당한 무당이 되어야만 한다. 지금부터라도 그리 만들
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형, 사형께서 제자들 좀 잘 달래주십시오."
영허진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숙들과 사제 사이에
오간 대화들, 무당뿐 아니라 강호를 발칵 뒤집을 수 있는 엄청난 대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대천강검진을 펼칠 때 마지막 순간에 사라진 죽음의 기운, 그것이
강구두 때문이었다 한다. 결국 사제는 자신을 희생해서 그들을 살려주고자
했고, 그 마음이 무당을 구했다는 말이다.
'자네가 장문인이 된 이유가 있었구먼…….'
사부와 사숙들이 사제인 영운진인에게 장문 자리를 넘겨줄 때만 해도 견디
기 힘들었었다.
무공면에서도 자신들과 거의 비슷했던 사제였다. 그런 사제를 선택한 어른
들의 결정에 수긍하기보다는 야속한 마음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사제의 진가는 나타났다. 대문파의 수장은 결코
무공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제자들의 아버지도 되어야 하고 어머니
도, 때로는 형님도 되어야 하는 그런 자리였다. 자신의 감정보다는 언제나
중용의 도를 지키면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진정으로 그가 무당 장문인에 욕심이 있었다면 대
천강검진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희생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문인 자리를 놓고 사숙들을 말렸다.
"허허! 하늘도 참 높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허진인이 먹구름밖에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중
얼거렸다.
* * *
전날 뿌렸던 비가 부족했던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먹구름은 무당산을
그대로 감싸 안았고, 한 줌의 빛도 내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을 사방
으로 뿌려내었다.
검은 어둠을 뒤로하며 아득한 눈길로 태화궁을 응시하고 있는 삼 인의 인
물들이 있었다.
"다시 저곳을 볼 수 있을까?"
"허허! 사형도……. 너무 오래 있어서 지겹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떠
날 때도 된 게지요."
운양, 운정, 운청. 무당삼선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이상했다. 도인이고, 더군다나 삼선이라
고까지 불리는 그들이 도복은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무
당의 제자로 있는 한 태화궁을 떠나지 않겠다 했던 장문인과의 약속을 이런
식으로 지키고 있었다.
도복을 버렸다 함은 더 이상 무당의 제자가 아니기에 떠날 수 있음이다.
영운진인이 장문인의 자리를 놓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과 같이, 무당삼
선은 무당의 제자 자리를 버리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영운진인이 말릴 수 없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어디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우선 사천으로 먼저 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분들은 강합니다. 대천강검진을 우습게 볼 정도로요."
"우리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는가."
그들의 뒤쪽에 영운진인이 서 있었으나 삼 인은 놀라워하지 않았다. 이미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얼굴들이었다.
"진정 가셔야 되겠습니까? 그분들이 약속을 하셨는데도?"
"장문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닐세. 하지만 말이네, 세상을 살다보면 결
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라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가는 것
이네. 무당과 상관없는 일이고……."
자신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잊힌 과거의 진실이 드러남으로
해서 그때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면 계속 묻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세
사람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만일 오천맹 멸문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무림에 남는 것은 파멸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껏 무림을 지탱하고 유지시켜왔던 정의(正義)라는 개념이 사라
지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게 될 것이기에. 그래서 묻혀
야 한다.
오천맹의 괴멸은 역사일 뿐이다. 지나간 역사가 현세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될 일이다.
"우리가 했던 일이 정도(正道)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네. 허나 그때 무당으
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원말(元末).
원의 도교 탄압 정책에 의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무당이었다. 거의
모든 궁이 소실되었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당파를 살리기 위해서 무당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오천맹을 괴멸시키는
음모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머지 문파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에……. 무당의 명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정도에 어긋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을 생
각할 겨를도 없었다. 무당이란 이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런 입장이 된다 해도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당을 사
랑하는 제자로서 무당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나머지는 장문인에게 맡기겠네."
"사숙!"
영운진인도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막을 수가 없었다. 무당은 그들의 인생
이고 삶이었다. 그런 분들이 도인의 신분을 버리고 속인으로 나서면서까지
무당의 명예를 지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무공도 두고 가야 함이 옳으나 그 벌은 다음에 받겠네. 기회가 있다면…
…."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 같은 것은 없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꼭
필요한 것이 무공이기에, 무당을 떠나면서도 무공은 가지고 가겠다는 말이
었다.
"그럼 무당을 최고로 만들어주시게, 장문인."
영운진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던 세 사람의 몸이 검은 어둠 속으로 사
라졌다.
'사숙님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것
을 왜 모르신단 말입니까.'
아무리 감추려 한다 해도, 그 사실이 과거보다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해
도, 밝혀져야 될 일이면 밝혀지는 것이 세상사가 아니던가. 그것이 역사의
심판인 것이다.
그 모든 비난과 치욕을 감당하려 했기에 사숙들을 말렸던 것인데, 그러나
그들의 신념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량수불!"
팽무도와 남궁세우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사숙들에게도 행운을 빌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자신들의 치부와 함께 잠들어 있던 역사가 깨어나는 것을 막으려 하는 자
들이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