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무당산(武當山)
이곳에서 해가 뜨고 해가 저문다 해서 일조산이라 하였던가. 북극진무현천
상제(北極眞武玄天上帝)가 있는 산이라 하여 도교의 성지로 숭배되고 있는
곳, 호북성 균현에 위치한 도교제일의 명산인 무당산을 일컫는 말이다.
선실(仙室), 태화산(太和山), 삼상산(蔘上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주
봉인 천주봉(天柱峰)을 포함하여 칠십이 개의 봉우리와 갖가지 전설이 서려
있는 기암괴석 등 수많은 절경이 곳곳에 산재해있는 도교제일의 명산.
도교성지라는 명성과 같이 하는 곳이 있으니 강호무림세력인 무당파의 존
재였다.
북숭소림(北崇少林), 남존무당(南尊武當)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정도무
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곳이 무당파이다.
또한 당금 황제인 영락제가 호북성의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호북인들
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무당파에 많은 지원을 한 까닭에, 비록 양적인
측면이기는 하지만 개파(開派)이래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는 곳이고, 그
규모면에 있어서도 여타 다른 문파들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
났다.
무당파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거쳐야할 곳으로 해검지(解劍地)가
있는데 병장기를 휴대하거나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장을 해제
하고 하마해야만 본산을 방문할 수 있다하니 무당파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해검지를 지나면 가장 먼저 당도하게 되는 곳이 옥녀봉(玉女峰)에 자리한
옥소궁이다.
현천옥녀(玄天玉女)의 영정을 모시는 옥소궁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룡궁, 자
소궁을 거쳐 무당파의 가장 심처인 태화궁까지 무려 백 리 길에 해당한다고
한다. 무당의 거대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낮에야 찌는 듯한 더위와 연일 계속되는 가뭄으로 모든 생명이 힘들어하
는 시기지만 절기상으로는 백로(白露)를 훌쩍 지났기에 아침저녁으로 불어
오는 서늘한 바람은 어느새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가을을 기다리던 무성한 잠자리 떼도 피곤에 지친 몸을 풀잎사이로 숨기며
휴식을 취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소리가 한층 깊어, 심산의 적막감
을 더해가고 있는 무당산.
으스름한 달빛을 가르며 수십의 야조들이 하룻밤 쉴 곳을 찾는 듯 옥녀봉
중턱의 한 공터로 소리 없이 날아 내렸다.
야행인들. 사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이곳 저곳으로 무질서하게 주저앉으며
가부좌와 함께 운기행공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먼길을 달려왔는지 그들의 몸에서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땀 냄새가 풍겨
나왔다.
낮선 이방인들의 침입과 변화된 주변의 공기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사방에
서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가 뚝 그치며 삽시간에 고요한 정적이 들어찼다.
팽무도와 광풍대원 일행이었다. 무협에서 천사맹과 일전을 벌인 이들이 호
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무당산에 도착한 것이다.
"형님.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궁세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당산에 들어오자 걱정이 앞
섰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겠지. 이곳에 오래 지체해서 …응?"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팽무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옥녀봉으로부
터 이곳을 향하는 인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일이 복잡하게 되었군요."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가장 피하고자 했던 인물들, 무당파 제자
들일 것이다.
갈 길이 급한데 무당의 인물들과 드잡이를 하게 되면 불필요한 시간만 허
비하게 된다.
더구나 팽무도 일행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당하게 내가 누구라고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풍신개가 있었다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천마맹에 있는 철
목승을 만나러 간다며 헤어졌기에 자신들의 신분을 증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과거 강호 공적이었던 팽무도와 남궁세우는 물론이고 천무맹에서 축출 당
한 강구두, 청성파의 파문제자인 장한수, 누구하나 이름 석자를 댈 수 있는
이가 없질 않는가.
더구나 지금은 야심한 밤.
고민하고 있던 그들의 앞으로 삼십여 명의 무당 제자들이 나타났다.
"무량수불! 무당의 현오(玄午)라 합니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현오도사, 오룡궁(五龍宮)에 기거하는 현자배 제자들 중 셋째로 강호 활동
을 한번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무당파 인물들을 칭할 때 도명 뒤에 진인(眞人) 또는 도사(道
士)가 붙는다. 진인이란 무당의 제자가 하산하여 강호 활동을 할 경우 따라
붙는 명칭이고 도사는 단 한번도 강호에 나서지 않은 제자를 칭하는 말이다
.
그런 면에 있어서 지금 광풍대 일행 앞에 나타난 현오라는 인물은 배분 상
으로 영자돌림인, 장문인 영운진인(靈雲眞人)의 사손이고 사십대임에도 불
구하고 단 한번도 하산하지 못했기에 도사에 머물고 있는 자(者)였다.
현오도사가 하산하지 못했던 이유, 그가 속세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부
리부리한 눈과 두툼한 입술의 외모에서 나타나듯 도인(道人)치곤 너무 급한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다.
일단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손부터 쓰기에 문파의 위신에 먹칠을 할
까 저어하여 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하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속을 떠나 무당파에 입문했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보니 속세의 명
리에 초연할 수가 없다.
더구나 무당이란 곳이 도(道)만 추구하는 도관으로 보기에는 강호무림에
너무 많이 관여하고 있질 않던가. 즉 무림의 문파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는 말이다.
같이 입단했던 동문들은 전부 도인 또는 진인으로 불리고 있는데 자신만이
도사로 남아있으니 그로서도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급한 성격을 알기에 고치려 노력했었고, 나이 사십에 이르
러서야 주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취한 행동만 봐도 그의 노력이 잘 나타나고 있는 대목
이라 하겠다.
천마맹의 마졸임에 분명함에도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중하게 신분을 밝히라 요구한 상대방은 자신에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기서 왔고… 일휘요."
팽무도 곁에 있던 일휘가 나서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도 나름대로 기분
이 좋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지나가는 사
람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 말
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일휘의 말을 들은 현오대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자신들이 왔던 방향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왔노라 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의
소속에 대해서 밝힐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광서에서 왔소이다. 목적지는 북경이고."
남궁세우가 재빨리 나서며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산서성이 아닌 북경으로
간다고 하였으나 자신들에게 별 도움이 안될 것이라는 걸 알고있다. 그러
나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예의를 차렸던 것이다.
무당파 인물들에게 비친 자신들의 모습, 천마맹의 인물로 오인 받더라도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는 몰골들이 아닌가. 남궁세우의 짐작대로였다.
선입견(先入見).
현오도사가 광풍대 일행에 대한 첫 느낌은 결코 평범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 천마맹이 화산과 종남파를 공격할 때 소수정예를 이용하여 사천성
을 먼저 공격하는 교란작전을 펴지 않았던가. 수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 더구나 소속도 없고 어디서 왔는지 밝히지도 못한다.
"그렇소이까. 천마맹에서 오신 것이 아니었소?"
현오도사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달리 냉랭하게 변했다. 일단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니까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얼굴에 나 마두(魔頭)요 하고 써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네하며, 정파인들
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무질서함과 자신을 놀리는 듯한 행동거지.
천마맹의 인물들이 아니라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우리는 천마맹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야심한 밤에
움직이는 것이오."
남궁세우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이들과 충돌 없이 떠나고 싶은데
그냥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 그렇소이까. 그럼 저희 무당에 가셔서 조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현오도사의 눈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밝히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남궁세우의
표정마저 정체가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자네들 무당파는 무당산 근처만 지나가면 전부 잡아다 조사를 하나?"
"이해를 해 주셔야 되겠소이다. 요즈음 천마맹의 마졸들이 워낙 많이 설치
고 다녀서 말입니다."
유달리 마졸이란 말을 강조하면 일행을 쳐다본다. 마치 너희들이 천마맹
인물이지 않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싫다면 어쩔 텐가."
"그럼 무당의 침입 죄를 물어 처단해야 되겠지요."
이제는 천마맹의 일당으로 확신하는 듯했다. 처음부터 수상한 인물들로 생
각했기에 순순히 놓아줄 생각도 없었지만 정체도 소속도 밝힐 수 없는 자들
이고 보니 기필코 무당으로 압송하고자 하였다.
결국 지금까지의 말씨름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오. 천마맹의 일당인지 아닌지는 무당으로 가보면
알게 될 터. 제압하라!"
현오도사를 따라온 삼십여 명의 무당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며 광풍
대 일행을 포위했다.
그러나 현오도사가 묵과한 것이 있었다. 무당의 위대함만 생각했지 상대가
자신들보다 인원수도 더 많았고 무력(武力)면에서도 월등히 앞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현오라 했더냐? 너희 무당은 지나가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핍박하여 명성
을 얻었더냐?"
지금껏 한 쪽에 가만히 있던 팽무도가 현오도사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
을 열었다.
과거의 아픔이 되살아났음이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기준이 최고의 선(善)이 되어버린 구대문파의 독선, 아니 가진 자들의
독선이다. 그 오만함의 희생자들이 자신을 비롯한 백살대가 아니었던가.
자신들만이 세상을 이끌어 가야한다는 그들의 아집(我執)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철옹성의 철벽으로 변하여 그들의 가슴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
고 있는 것이다.
"헉!"
팽무도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氣勢)에 현오도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
다.
단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인데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얼
굴에 흉터밖에 없는 노인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음에도 현오도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
려 이를 악다물고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이 누구이던가. 현자 배 사형제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
질 않는가. 또한 대 무당파의 제자가 아니던가.
결코 굴복할 수 없음이다.
"말해봐라. 우리가 너희 무당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나지막한 팽무도의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모든 한과 미련을 띄워보내고자 했다. 하북팽가의 장자가 아닌,
백살대의 대주가 아닌, 뇌룡현의 팽무도로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 무당파에 대항하는 것이오?"
쏟아지는 무언의 압력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현오도사의 얼굴
이 굴욕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가장 경멸하고 있는 말을 꺼내
고 말았다.
얄팍한 배경을 이용해서 상대의 위에 올라서려는 행위, 힘도 없고 자존심
도 없는 자들이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익!"
차-앙!
자신의 추태에 화가 났음인지 거칠게 검을 뽑아들었다. 무당산이 너무 좁
다고 생각했었다. 강호에 나서기만 하면 무당이란 이름자 위에 우뚝 설 자
신이 있었다.
허나 현실은 어떠한가, 무당파의 네 곳 중 가장 아래에 있는 옥소궁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거대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릴 수 있다는 꿈은 자신만의 이상이었다. 오직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뽑아든 검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당의 제자들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검법을 익힌다. 한가
지는 검진을 펼칠 때 사용하는 검법과 나머지 하나는 자신만의 독문검법이
다.
현오도사도 마찬가지였다. 칠성검진(七星劒陣)을 펼칠 때 사용하는 칠성검
법과 자신의 검법이라 할 수 있는 양의검법(兩儀劒法)이 그것이었다.
부드러움이 주를 이루는 무당의 검법 중 유일하게 강함을 추구하는 무공이
있으니 양의검법과 삼절황검법(三絶荒劒法)이다. 그 중 현오도사의 선택은
양의검법이었고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형제들 중 누구보다 빨리 십이 성 대성하였고 지금은 양의검법과 칠성검
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양의칠성검법(兩儀七星劒法)이라 명명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했지만 그가
새롭게 보완한 삼초의 검법은 양의검법이나 칠성검법에 비해서 그 위력 면
에서 훨씬 강했다.
가슴 앞에 검을 일자로 세우며 양의칠성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던 현오도사
의 선공(先攻)을 필두로 무당제자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음(陰)으로 세상을 가두니 천지가 차가워지리라. 태음새한루(太陰塞寒淚)
!"
양의검법 중에서 음(陰)의 기운을 극대화시켜 만든 검법, 현오도사의 검에
서 차가운 한풍(寒風)이 몰아치며 팽무도의 상하좌우(上下左右)로 서늘한
예기를 머금은 새하얀 검광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광 속에 점점이 솟아 나오는 조그마한 물방울들, 한기를 머금
은 빙정의 기운이 뭉쳐진 듯 차가운 살기를 머금고 팽무도의 전신을 향해
쏟아져왔다.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물방울들을 쳐다본 팽무도의 대응은 단순했다. 도(
刀)를 뽑지도 않은 채 횡으로 한번 긋는 동작으로 현오도사의 공격을 무산
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현오도사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의 사부라 해도 태음새한루를
저리 간단하게 해소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상대는 단 한번의 손짓이었다.
너무 큰 벽이었다.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 어이없는 경우는 현오 뿐만 아니었다. 다른 무당제자들의 상황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현오를 비롯한 무당제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자신들이 공격하는 인물들
중 그 누구도 현오도사보다 무공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위대한 무당의 검법만 믿고 무모하게 달려든 것이었다.
"일휘야, 사정을 두거라."
거친 광풍대원들의 손속을 생각해서인지 남궁세우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
다.
이미 검강 도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들이고 유혈참극이라도 벌어지면
무당 전체와 싸워야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에 그 것만은 막고 싶었다.
옥녀봉 아래의 조그마한 공터에 무당인물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광채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런 무당제자들의 모습을 쳐다보는 광풍대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감돌았
다.
검법(劒法)이랍시고 휘둘러대는 모양새가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검로(劒路
)를 따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들, 듣기에는 검법에 있어서 강
호제일이라 했는데 지금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애들 장난 수준이질 않
는가.
자신들의 연습상대도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뇌룡현에서 그들이 행했던 연습은 실전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이 물 속에서 나온 다음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그때부터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나무토막이 아니라 진검(眞劒) 진도(眞刀
)였다. 죽음을 염두에 둔 실전연습.
일휘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진검 비무는 언제나 죽음의 위기 속에서 연공(
練功)을 해야했다.
일대일 비무는 물론이고 다대일 비무와 진(陣) 속에서의 훈련까지 오직 검
강과 도강을 펼치며 모든 연공을 소화해냈던 것이다.
세 사람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렸기에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전보다 더한 연습을 거친 광풍대원들에게 미약한 검기(劒氣)수준정도 밖
에 안 되는 무당제자들의 검은 검이 아니었다. 일반 양민이 들고 있는 몽둥
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커억! 윽! 으웩!"
애당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삼십여 명의 무당제자들이 안면을 감
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해댔다.
그들의 수중에는 이미 검이란 무기가 보이지 않았다.
단 두 번의 공격. 광풍대원들이 한 공격의 횟수였다. 처음 오른손은 상대
의 명치에 박히고, 그 충격으로 앞으로 숙여지는 무당제자들의 얼굴에 왼손
정권이 작렬하며 코뼈를 함몰시켜버린 것이다.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토악질을 하고 있는 무당제자들의
눈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검은 상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상대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살아있는 것이지 만일 저들이 마음
만 먹었다면 이미 자신들은 땅 바닥에 누워서 식어가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무당제자들이 아직도 무차별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
는 현오도사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도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데리고 왔던 모든 제
자들이 나가떨어졌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익!"
현오도사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벌써 십여 초 이상을 공격했지만 상대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했다.
자신의 사부도 상대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제 다 펼쳤느냐."
현오도사의 귀에만 들리는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아니오. 아직 한 초식이 남았소."
씹어 뱉듯이 소리치는 현오도사의 목소리엔 굴욕감이 가득했다. 상대는 자
신을 비무상대로 생각지도 않고 있다. 다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란 듯이
자신의 검을 살짝 살짝 흘리고만 있는 것이다.
팽무도를 거칠게 공격하던 현오도사가 자신의 최고 절초를 준비하기 위해
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나 졌다고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
락하지 않았다.
"그 마지막 초식은 아껴두어라."
팽무도가 손에 들고 있던 도를 현오도사를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느렸다. 세 살배기 어린애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 현오도사와의 거리는 칠척, 거의 지척이라 할 수 있는 거리를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으으으!"
현오도사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며 온몸이 땀에 젖기 시
작했다.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물체는 예기 하나 없는 단순한 도집일 뿐인데 눈으로
확연하게 보이는 움직임에도 피할 방위가 없었다. 도(刀)의 끝은 앞에만 있
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모든 곳에 있었다.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무극도(無極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경지. 도를 추구하는 도인들이 원하는 최고의 경지
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저 뭉툭한 도가 작은 원을 하나 그려내기만 하면 자신의 몸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와락 밀려왔다.
"휴-!"
나직한 한숨소리와 함께 팽무도가 도를 걷어들였다.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
다. 이제 와서 무당을 향해 도를 뽑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부질없
는 짓일 뿐.
"우리를 그냥 놔두시게. 무당을 침입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가자!"
팽무도를 선두로 해서 광풍대 일행들이 무당파 인물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으웩!"
현오도사의 입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단지 상대의 기세에 의해서
엄중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자신을 흘끔거리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남기
고 가는 흑의인들을 쳐다보던 현오도사의 얼굴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현오사숙님! 사숙님!"
한쪽에서 몸을 추스르며 현오도사를 주시하던 청자 배 제자들이 다급한 표
정으로 모여들었다.
자신에 대한 굴욕감으로 일어난 주화입마 현상이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
한 상대에게 패했다 해서 생긴 주화입마가 아니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흑의인들의 눈길,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오르지
도 못할 나무를 오르려했다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안 되겠다. 빨리 가서 알려라."
무당제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최악의 경우 사숙인 현오도사가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재빨리 현오도사의 혈도(穴道)를 집고 옥소궁을 향해
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너희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부 당했단 말이냐?"
흥분된 어조로 제자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인물, 현오도사의
사부인 무정진인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인지 정체도 모르는 인물들에게 무당
의 제자들이 치욕을 당했고 자신의 제자는 주화입마 상태가 되어서 돌아왔
다.
감히 무당산에 들어와서 무당파 제자들에게 해를 입힌 자들이 있을 줄이야
. 무당 역사상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장 태화궁(太和宮)으로 전서를 날려라. 그리고 제자들은 그들을 쫓는다
."
* * *
"형님, 무당이 가만히 있을까요?"
남궁세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무당의 영역이
고 자신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해도 지름길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는 무당
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산서성으로 가야할 입장이고 보니 더이상 시비에 휩싸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정파인의 성정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질 않던가.
명예를 최고의 선(善)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더욱 강한 제자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치려할 것임이 분명하다.
"뚫고 가야지 별수 있는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애당초 무당산으로 길을 잡았던 선
택이 잘못되었다. 산서성으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이 무당산을 통과하는
길이었고 밤을 이용해서 움직이게되면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나칠 줄 알았다
.
그러나 이미 충돌은 일어나고 말았다. 무당파에서 막아서면 치고 갈 뿐이
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빠르군. 역시 무당이라는 건가?'
옥녀봉을 떠나 십여 리 정도밖에 오지 않았는데 벌써 앞에서 인기척이 느
껴졌다.
"무량수불! 멈추시오."
옥소궁을 떠난 무정진인을 비롯한 무당제자 백여 명이 광풍대 일행을 막아
섰다.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지름길로 왔는지 출발이 늦었음에도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팽무도와 광풍대원들이 내려서는 것을 본 무정진인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
다.
거의 사십여 명 이상의 인물들이 날아내렸음에도 아무런 파공성도 나지 않
았기 때문이다.
현오를 비롯하여 나머지 제자들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실력들이었
다.
특히 가장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두 노인들, 몸에서 발산되는 기세마저
갈무리된 초극의 고수였다.
그러나.
자신이 있는 이곳은 무당산이고 무당산은 무당파의 안방이다. 안방에 적이
침입을 했고 제자들이 당했는데 고수라해서 그냥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
니질 않는가.
아무리 초극의 고수라 할지라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 무당에 빚을 안겨주셨더군요."
"빚이라… 그대들 무당은 가만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피해를 입으면 그것도 빚으로 치는가?"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라면 이름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질 않소이까."
정의를 표방하는 인물들이 타인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이름을 당당
하게 밝힐 수 있는 인물이라면 절대 악인이 될 수 없다는 기준. 그 기준이
이곳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명예를 먹고사는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건 자네들의 억지 아닌가. 우리는 무당산을 지나는 길일세. 왜 그대들
에게 이름을 밝혀야하는 건지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팽무도의 물음에 일순 무정진인이 할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저 노인네
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무당산 전체가 무당파의 소유물이 아닌 바에야 지나가는 행인까지 붙들고
시비를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마맹과 전쟁 중이고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더구나 무당의 제자를 공격했음에야 말할 나위도 없음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외다. 천마맹은 우리의 적이고요."
무정진인이 가장 의심하는 점이다. 천마맹의 양동작전을 겪어보았기에 지
나가는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냥 보내줄 수가 없다.
산서쪽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처럼 해서 사천을 노리는 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저 정도의 고수들이 있을만한 곳이 천마맹밖에 더 있겠는가.
"장한수라고 하오이다. 한때 청성의 제자였소. 강구두요 무정진인."
결국 보다못한 장한수와 강구두가 앞으로 나섰다. 비록 두 사람이 모두 파
문제자였지만 팽무도나 남궁세우처럼 강호 공적은 아니었기에 나선 것이었
다.
"섬전수 장 대협과 일검무적 강 대협이란 말입니까?"
무정진인이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섬전수 장한수와 일검무적 강구두, 두
사람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다. 한때 청성파와 천무맹에서 후기지수
중 최고의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두 사람 공히 자신들이 소속된 곳에서 파문을 당했던 자들이다. 즉 청성파
와 천무맹에 원한을 가진 자란 뜻이다. 그런 자들이 무리를 이루며 움직이
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젠 가봐도 되겠소이까?"
"죄송하오이다.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 무당까지 같이 가주셔야 되
겠습니다."
"갈! 건방지구나. 그깟 무당이란 이름으로 겁주려하는가?"
결국 팽무도가 폭발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보내줄 의사가 없었던 자들이었
다.
그래도 정파라는 한 가닥 양심이 있어서 이런 저런 말꼬리만 잡고 늘어지
며 잡아가기 위한 구실만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만이 최고의 선이고 세상의 모든 것인 자들이다. 애초에 대화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여 하는 마음에 지켜보았다. 역시 변
하지 않았다. 자신들 이외에는 누구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십 년간을 참았다.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제자가
걱정이 되었기에 제자를 지켜야하기에 힘든 발걸음을 한 것이다.
분노한 팽무도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구려."
드디어 덜미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상대는 무당의 제자를 해하였고 치욕
을 안겨주었다.
천마맹의 일당이 아닐지라도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시간을
끌어서 태화궁에 있는 장문인께 소식이 가기를 기다린 것뿐이었다.
"본색? 무슨 본색을 말하는 것이냐. 우리를 잡아둘 구실을 말하는 것이더
냐? 그럼 우리를 막아보아라. 너희 무당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한번 보자
구나."
진정으로 화가 난 팽무도의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에 주변에 있던 마른나무
들이 터져나갔다.
천하제일인이었던 철목승보다 위라고 까지 하지 않았던가.
"헉!"
팽무도의 기세를 접한 무정진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모든 내
공을 끌어올렸다.
고수인 줄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살기를 유형화시킬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
'이렇게 강한 자였던가!'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으로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
에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자신들은 강호무림의 최대 방파인 무당이고 무당
의 제자가 사마(邪魔)와의 대결에서 물러설 수가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도 자신의 제자와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당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천강칠두진을 펼쳐라!"
무정진인의 일갈이 터지자 백여 명의 무당인들이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광풍대원 일행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포위하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거대한
북두칠성 모양을 이루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천강칠두진.
무당에 있는 수많은 검진(劒陣)중에 오행검진(五行劒陣), 진무칠절진(眞武
七絶陣)과 함께 삼대검진으로 불리고 있는 진식.
칠 명이 일조로 구성되어 북두칠성 모양의 형태를 이루어 전진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검진의 일종이다.
모두 열네 개의 천강칠두진이 하나로 구축이 되자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기
운이 흘러나오며 광풍대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광풍검진(狂風劒陣)을 펼쳐라."
굳은 표정의 남궁세우가 광풍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광풍검진이라 했던 검진, 남궁세가의 독문검진인 청풍검진을 일컫는 말이
다. 남궁세가의 검진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기에 광풍검진으로 개명하였고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진에 대해서 달통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게
하였다.
남궁세우의 지시를 받은 광풍대원 전원이 쌍모를 이루며 사방으로 살기를
뿌려댔다.
그러나 그 모양은 용지에서 백산일행이 보여주었던 검진과는 또 달랐다.
최전방의 중앙에 일휘가 있고 그 양 옆으로 강구두와 장한수가 자리를 잡
았다.
그리고 맨 뒤쪽에도 중앙에는 이사가 있었고 그의 좌우로 팽무도와 남궁세
우가 위치해 있었다.
서로를 응시하는 양 진영에서 팽팽히 당겨진 시위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떠나고자 하는 자들과 문파의 자존심을 위해 저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대결
이었다.
"출진(出陣)!"
"진행하라!"
무정진인과 남궁세우의 입에서 시위를 당기는 듯한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
다.
무당파의 천강칠두진에서 희뿌연 검광(劒光)이 피어오르고 검진전체가 전
후좌우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백여 명이 펼치는 진식임에도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매끄러운 움
직임이었다.
유운신법(流雲身法).
천강칠두진의 기본이 되는 보법으로 흐르는 구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그 특징으로 되어있는 무공이다.
반면에 변형된 청풍검진을 구축하고 있던 광풍대원들의 몸에서 붉은 혈기
가 피어오르며 주변의 대기를 잠식해 나갔다. 그들의 신형이 사라지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만 남았다.
마치 거대한 촛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천추(天樞)는 칠성의 시작이니 시작은 곧 혼란이라. 천강 제 일식!"
"천추혼돈(天樞混沌)!"
무정진인의 선창과 함께 백여 명의 무당제자들이 후창을 하고 열네 개의
천강칠두진 중 일곱 개의 진이 앞으로 나서며 붉은 혈운을 향해 새하얀 검
기를 뿌려댔다.
사십구 명의 검에서 흘러나온 수백의 검기가 사방에서 몰아친다. 마치 눈
보라가 휘날리는 것처럼 새하얀 검기를 머금은 검들이 광풍대원들을 향해
몰아쳤다. 무질서함 속에 담겨있는 단 한가지 유일한 기운, 무당을 능멸한
적을 응징하고 말겠다는 살기였다.
자신들을 향해 몰아치는 백색의 검기를 응시하던 남궁세우의 입에서도 낭
랑한 외침이 흘렀다.
"광풍대원은 한 형제니 일검(一劒)으로 형제를 지키네!"
"횡소천군(橫掃千軍)!"
뒤쪽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무당제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
했다. 붉은 혈운(血雲)을 만들기에 대단한 검진일 줄 알았는데 검진에서 나
온 검법은 뜻밖에도 삼재검법(三才劒法)이었던 것이다.
일반 양민도 구사하는 삼재검법의 단순한 베기가 일 초였다.
그러나 횡소천군이란 단순한 초식을 구사하는 인물들이 결코 평범한 무인
이 아닌, 이미 강기의 경지를 이룬 고수들이었으니….
천강칠두진에서 나온 백색 검기와 혈운 속에서 나온 붉은 혈광이 사방에서
폭발할 듯 부딪혔다.
쾅! 콰 콰 쾅!
"커억! 컥!"
대지를 뒤집을 듯한 폭음과 함께 일곱 개의 천강칠두진을 형성하고 있던
무당파 인물들이 뒤쪽으로 밀려나며 비명을 토해냈다.
'이럴 수가!'
무정진인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단 한번의 격돌에서 무당의 제자들
이 내상을 입고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이 믿어져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천강칠두진의 최대 강점이 무엇이던가. 바로 상대의 압박에 있다.
먼저 일곱 개로 이루어진 일조가 천강일식을 구사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뒤
이어 후미에 있던 이조가 천강이식을 펼치며 포위망을 좁혀나가는, 상대를
압박하면서 전개하는 것이 천강칠두진이다.
또한 후미에 있는 나머지 조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포
위망 안에 있는 적들을 향해 모든 내공을 쏟아내어 그들의 움직임을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강칠두진의 최고 강점이 처음 시작부터 무너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들 개개인의 무공이 무당제자들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은 물
론이고 구축하고 있는 진(陣)조차 무당의 진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나 대 무당의 검진이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음이다.
"칠성의 두 번째는 천선(天璇)이라 혼돈천지가 하나로 변하리니. 천강 제
이식!"
"천선일극(天璇一戟)!"
무정진인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후미에 있던 일곱의 천강칠두진이 전방
으로 나서며 칠성검의 이초인 천선일극을 뿌려댔다.
순간 광풍대원들이 있는 광풍검진을 향해 일곱 개의 거대한 검풍(劒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칠성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인물들의 검에서 나온 각각의 검풍이
천강칠두진의 묘리에 의해 하나로 합쳐져 일곱 개의 날카로운 창 모양의 회
오리치는 검기로 변한 것이다.
"광풍대는 싸움에 있어서 패배하지 않는다! 광풍 제 이식!"
"팔방풍우(八方風雨)!"
삼재검법의 팔방풍우가 펼쳐지자 한순간 청풍검진의 혈운이 더욱 붉어지더
니 수십 개의 붉은 선들이 사방으로 유영하며 무당제자들이 만들어낸 일곱
개의 검풍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본 무정진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천강이식을
전개한 이조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도록 살생을 자제하여 일이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남궁세우의
배려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검진이 위력을 발휘한다고만 생각했
던 것이다.
위축되었던 목소리에 자신감이 살아나고 선창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
"칠성의 세 번째는 천기(天璣)니 사방천지(四方天地)에 폭풍이 몰아치네.!
"
"천기만세(天璣滿世)!"
천강 제 삼식인 천기만세란 외침과 함께 처음 물러 나있던 일조의 인물들
이 앞으로 나서며 북두칠성의 선두에 있던 자들은 찌르기를, 꼬리 쪽에 있
는 자들을 베기를 시도하며 검풍(劒風)을 날렸다.
진(陣)으로 만들어내는 환검(幻劒)이었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수십 개의
검풍과 바로 뒤를 따르는 반월모양의 검풍이 진실한 실체를 구분할 수 없
을 정도로 뒤섞이며 광풍대원을 향해 날아들었고, 동시에 남궁세우의 입에
서도 세 번째 음성이 흘러나왔다.
"광풍대원들은 형제를 배신하지 않는다. 광풍 제 삼식!"
"직도황룡(直道黃龍)!"
우렁찬 외침소리와 함께 청풍검진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허공으로 솟
아오르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지면을 향해서 힘차게 내리 꽂히고, 그
속으로부터 붉은 혈운보다 더 진한 혈광이 퉁겨져 나와 백색의 검풍과 거칠
게 부딪쳤다.
"으윽! 커억!"
무정진인만의 착각임에 금방 드러났다.
천강칠두진의 머리부분에 있던 무당의 제자들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나가떨어지며 피를 토해냈다. 천강 일식을 펼칠 때 입은 내상에
이번의 충격이 더해져서 거의 일어설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남궁세우가 노리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먼저 일곱 개의 작은 진을 무용
지물(無用之物)로 만들어서 능력이 부족함을 느끼게 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무정진인 더 이상 계속하면 우리도 손속에 사정을 둘 수가 없소. 이만 물
러나시오. 마지막 경고요."
혈운 속에 있던 남궁세우가 무정진인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가 알고
있는 천강칠두진의 다음 단계는 강기의 단계이다.
무당의 제자들이 그 정도의 여력이 되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만일 그
렇게 된다면 이쪽에서도 검강이나 도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럼 무당제자들이 당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껏 세 번의 부딪침이 있었지만 무당의 제자들은 내상만 입었
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기에 이 정도 선에서 그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남궁세가의 장자면서도 정파인의 속성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자존심 강한 저 무당파를, 무정진인을 더욱 분노하게 한다
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정진인의 얼굴이 창백하니 굳어졌다. 이름도 소속도 없는 자들이 무당에
대고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하고 있다.
감히 파문제자 나부랭이들이 대 무당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건방진 놈들….'
"칠성의 네 번째는 천권(天權)이니 폭풍 속에 우뢰(雨雷)가 내리치네!"
이을 악다문 무정진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무당제자들의 몸놀림이 지금까
지와는 다르게 변했다. 일조의 천강칠두진을 구성하고 있던 인물들이 흩어
지며 이조의 진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처음 일곱 명으로 구성되었던 각각의 천강칠두진을 열네 명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즉 이인 일조씩 짝을 이루며 공력전이의 준비를 하는 모양새였다.
무당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무정진인의 결심, 자신이 데리고 온 청자 배
제자들로는 강기의 단계를 시전해야 하는 사식을 펼칠 여력이 없었기에 택
한 방법이었다.
"천권제일(天權第一)!"
무정진인의 선창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준비를 마친 무당 제자들이 어둠을
터트릴 것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검(劒)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순간 들어올린 검에서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처럼 가느다란 백
색의 강기들이 솟아 나오며 검을 감싸기 시작했고, 그 검과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동시에 혈운을 향해서 돌진해들었다.
"으음!"
진(陣)안에서 무당인들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던 남궁세우의 입에서 침음
성이 흘러나왔다.
무당이 강호제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없는 능력을 만
들어내어 공격하는 저 저력.
공격을 전이하면서도 한 몸처럼 움직이는 몸놀림은 무공 고수라 해서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니다. 오직 수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서만 해낼
수 절기중의 절기인 것이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강의 바로 아래단계인 검사의 단계가 아닌가.
'결국 피를 보아야 하는가.'
상대가 피를 보기를 원하는데 자신들이 피하려 한다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
니다.
남궁세우의 입에서 괴로운 듯한 선창이 흘러나왔다.
"광풍 제 사식!"
"혈극참(血極慘)!"
"창궁혈해탄(蒼穹血海彈)!"
남궁세우의 선창과 함께 혈운 속에서도 강렬한 외침이 터지고 한천팽무도
법(恨天彭武刀法)과 혈우창궁검법(血雨蒼穹劍法)의 일 초가 쏟아져 나왔다.
혈광, 혈광, 혈광들.
지금까지의 붉은 기운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의 시뻘건 혈광이 사
방 천지에 난무하며 몸과 함께 날아오는 무당제자들을 향해 밀려나갔다.
가히 피의 폭풍이었다.
카카강! 끼이익!
"으악! 아-악!"
처음에는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는 음향이, 뒤이어 무당제자들의 비명소리
가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검사(劒絲)를 만들며 공격했던 무당제자들의 잘려진 팔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뒤쪽에서 공력을 공급해주던 인물들은 자신의 몸으로 반탄되어 돌
아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며 뒤쪽으로 쓰러졌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의 무정진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대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완전한 검강과 도강을 시전하는 고수들이었다. 저곳에 있는 자들 전부가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지금껏 손에 사정을 두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
었다.
진정한 공격 한번에 삼십여 명의 무당제자가 불구가 되었고 나머지 삼십여
명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내상을 입고 말았다.
이번에도 목숨을 취하지 않고 팔만 잘라낸 것이다. 무당의 권위만 믿고 자
만했던 대가 치곤 너무 엄청났다.
"우리가 손에 사정을 두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또 다시 우리를 가로
막으면 그땐 다 죽이겠다. 상대가 무당이라 할 지라도…."
정파의 대 문파에 이런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무
당은 자신들을 잡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허나 오십 년을 참았다.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팽무도가 표정을 굳히며 천주봉을 쳐다보았다. 무당의 모든 것이라는 태화
궁이 있는 곳이다. 하늘은 결코 인간사에 끼여들지 않는다는 백산의 말이
맞다. 자신들을 파멸시킨 이자들이 더 잘살고 있지 않는가.
과거보다 더욱더 오만해져 있었다. 과거보다 강한 자신들의 울타리를 만들
어 놓았다. 그 울타리 안에는 그들이 인정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도 발
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다.
"가자!"
진을 풀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광풍대원들이 몸을 날려 무당파 제자
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냥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넋 잃은 표정으로 멀어지는 광풍대원을 쳐다보고 있던 무정진인이 그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나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 * *
"무슨 말입니까? 사형!"
무당산의 주봉인 천주봉에 자리한 태화궁(太和宮), 그곳에서 백염의 인자
한 노 도장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영운진인(靈雲眞人).
장문인 직을 물려받은 지 어언 이십 년, 황실의 비호 하에 급성장을 했지
만 그들의 간섭 또한 만만치 않았음에도 실리(實利)와 내실(內實)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낸 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자.
사형제 중에서 셋째임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남을 인정받아 사십대에 이미
차기 장문인 감으로 낙점이 되었고 강호 경험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천무맹
에 파견되었던 경력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거대조직의 수장답게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던 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설 정도로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가 장문인이 된 이후 강호상에 무당이 관여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금일과 같은 엄청난 사고는 없었다.
옥소궁에서 올라온 전서구.
청자 배 제자 백여 명중 삼십여 명은 오른팔이 절단되는 중상을, 나머지는
거의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다는 보고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파의 중지인 무당산에서 제자들이 피를 흘렸다는 것
이다.
"상대는 누구라 하였습니까. 천마맹입니까?"
장문이란 신분도 잊었는지 영운진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산파와
종남파의 멸망을 보지 않았던가.
과거에 비해서 무당의 성세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
디까지나 양적인 측면이다. 질적인 면에 있어서 아직은 그 명성에 비해서
많이 부족했기에 만일 천마맹이 치러왔다면 무당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영운진인이 다급해하는 이유였다.
"아니네, 그들은 이곳을 지나가려고만 했다는 군. 특이한 것은 그들 일행
에 일검무적 강구두와 섬전수 장한수가 있다고 하였네."
"일검무적 강 대협이라 하셨습니까?"
순간 영운진인의 머릿속을 스치는 아득한 상념이 있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운진인.'
'아니오이다 강 대협! 과연 전사대의 대주답습니다.'
벌써 이십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비무, 그 비무
에서 무당의 차기장문인으로 내정이 되어있던 자신이 패했다.
비공개로 이루어졌지만 자신의 사부를 비롯한 구파의 수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비무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검무적
강구두가 내공이 파기된 채 천무맹에서 축출되었고 그가 대주로 있던 전사
대(戰士隊)는 해체되었다.
강구두 파문(破門)의 빌미를 제공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자신과의 비무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되었다. 구파의 하위 단체였던 천무맹
의 일개 대주가 다음대의 무당 장문인이 될 인물의 명예를 훼손했던 게 이
유였다.
구파인들의 시기심.
특히 무당파에서 가장 심하게 그의 축출을 주장했다.
자신에게 영원한 빚으로 남아버린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가지고 강구두가 무당에 검을 들이댈 이유가 없을 것이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질 않는가.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설마…."
영운진인의 표정이 변하며 사형인 영허진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
은 영허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인이 되고자 했으면 버려야 할 것을…."
낮은 탄식소리와 함께 영운진인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사
형의 표정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검무적 강구두나 섬점수 장한수의 입장에서 보면 정파의 지주이고 천무
맹의 구성원인 무당파 인물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천마맹과 전쟁의 시기이질 않던가.
그런 그들을 핍박한 것은 무당의 제자들이었고 충돌이 일어났음에 틀림없
다.
공명심(功名心).
감히 무당의 영역에 들어와서 정체도 밝히지 않고 가려했던 그들을, 제자
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인이 되고자 했으면 가장 경계해야할 항목이 공명심과 호승지심이 아닌
가. 그런데 그 공명심과 호승지심 때문에 지금의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무정이 그들을 쫓아갔다 하네."
"허허! 무량수불!"
영운진인의 입에서 어이없어하는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능력이 안 되면
물러서야 함에도 다시 뒤쫓아갔다 한다.
천강칠두진의 사식을 시전하고도 패했다는 말은 개개인의 능력이 무당의
제자보다 몇 배 이상이란 말이질 않는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무정이 그들
을 쫓아갔다 함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어찌할 텐가."
영허진인의 눈빛은 그들을 처단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비록
시작이야 무당에서 했다 할지라도 무당의 제자가 상했다 함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당이 무당인 이유가 무엇이던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무당이
란 이름이 들어가면 이미 사소한 일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도전을 받아온 곳이 무당이었고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곳이 무
당이었다. 하물며 이 곳은 무당산이 아니던가. 외부의 도전이 아닐지라도
무당이 패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형, 강 대협은 저 때문에 그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운진인은 영허진인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딴 소리만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린가. 강구두가 장문인 때문에 그리 되었다함은."
이어지는 영운진인의 말에 영허진인의 얼굴이 놀랍게 변했다. 단순한 비무
가 한 인간의 인생을 망쳐버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비록 강구두의 축출에 확실한 증거가 있었고 정식절차에 의해 그를 파문시
켰다지만 구파의 장문인 될 재목보다 더 뛰어났다는 것이 숨겨진 이유였을
것이다.
그 당시 무당파의 수뇌들이야 사제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랬다지만
사제본인에게는 영원한 짐으로 남았음에 틀림없다.
"사제는 무당파의 장문인일세."
영허진인 또한 사제인 영운진인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일생을 망친 사람인데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기는커녕 또다시
그를 쳐야될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인간으로서 차마 할 짓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私的)인 일이고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무당파의 장문
인으로서 무당이란 이름을 지켜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다.
자신의 모든 사고의 틀을 무당의 명예와 무당의 이름에 맞추어 살아야 한
다는 뜻이다.
"장문인…."
이제는 사제라 부르지도 않고 있었다. 오직 장문인으로서의 결단을 촉구하
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시간이 없질 않는가. 어쩌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무정이 당할 수
도 있음이다.
"알겠습니다, 사형. 대천강검진을 준비해주십시오."
한참동안을 고뇌하듯 생각에 잠겨있던 영운진인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장문인! 진정인가."
대천강검진이란 말에 이번에는 영허진인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
쳤다 .
대천강검진.
검법으로 이름이 높은 무당검의 총화라 알려진 진(陣)으로 소림에 백팔나
한진에 비교되는 최고의 검진.
무당의 명예와 자존심이 이 검진 하나에 모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닌 진(陣)이 대천강검진이다.
무당의 전부를 가지고 펼치는 초대형 검진.
그러나 무당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대천강검진에는 한가지 제약이 있
다.
대천강검진을 펼치고도 적을 제압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더 이상 추격할 수
없다는 문규. 즉, 무당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대천강검진은 결코 패할 수도 없고 패해서도 안 된다는 자신감의 발로에서
나온 문규이기도 했다. 또한 더 강한 무당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걸어둔
제약이기도 했다.
대천강검진이 뚫렸다하여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의 제자들이
존재하는 무당에서 검진에 참여하는 제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무수히 많
은 제자들이 대천강검진의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진을 와해시키고 빠져나가는 적에 대해서 손을 쓸 수가 없다. 대
천강검진과 대적을 했다면 적도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일 것임에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로 인한 무당제자들의 굴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제약을 만
들어 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을 놓친 무당인들은 치욕과 분노로 인하여 더욱더 분발할 것이고 무당파
는 더욱 강하게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무공을 연
마하게 될 것이 아닌가. 대천강검진 또한 더욱 진일보하게 될 것이고….
무당파가 강호무림의 최고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현재의 위치에서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무당을 만들기 위해 스
스로 만들어놓은 제약.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무당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대천강검진이 나타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끝없이 쫓을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사제…."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하려는 영운진인의 의도를 왜 모르겠는가. 아니 그
들을 놓아주고 싶어하는 사제의 고뇌를 알기에 영허진인의 표정이 안타깝게
변했다.
영운진인이 강구두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인 것이다.
만일 영운진인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끝을 내지 않으면 무당인들이 전부 나
서서 그들을 추격하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사상자가 날 터이지만 그들도 죽어
가지 않겠는가.
개개인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사십여 명의 인물로 무당에 대항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행히 영운진인의 의도대로 그들이 빠져나간다면 무당은 치욕을 감수하며
다시 한번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질적으로 무당이 성장하는 계기
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일반 검진도 아니고 대천강검진이다. 창안된 이래 단 한번
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不敗)의 검진이 아니던가.
'부디 사제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겠네….'
* * *
선인령(仙人嶺).
수도에 정진하던 도인이 넘게되면 신선이 될 수 있는 신령스런 고개라 하
여 선인령이라 불리는 곳.
옥녀봉을 떠난 광풍대원들이 하루 정도를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고 이제 이
선인령만 지나면 무당의 영역권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이미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은 칠흑 같은 어둠을 사방 가득 뿌려대며 금
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기세를 풍겼다.
"정지!"
갑작스런 일휘의 명령에 전 대원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내려섰다.
온몸에서 더운 김을 풍겨내고 있는 무정진인과 십여 명의 무당제자들이었
다.
"무당을 우롱하고도 그냥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이제는 도인이라는 본분마저도 잊었는지 무정진인을 비롯한 이곳에 도착한
무당제자들의 몸에서는 광풍대를 향한 매서운 살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 새끼들 미친놈 아냐?"
일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강호 경험도 없었고 무인들에 대
해서 알지도 못하였기에 지금껏 참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이가 없질 않은가. 자신들이 공격하기를 했던가, 아니면 욕
을 하기를 했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왔고 먼저 칼을 휘
둘러 온 것도 저들이다.
마치 광풍대원들이 잡혀서 자신들의 본거지로 끌려가야만 정상적이고 제대
로 된 행위라는 투다.
먼저 공격을 가해놓고 피해를 입자 이제는 자신들을 우롱했다고 한다.
"말해봐라. 우리가 어찌해야 네놈의 맘에 들지… 네놈의 칼에 목을 들이밀
고 용서해 달라고 해야하나?"
"닥쳐라! 너희 같은 악적을 징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될 일이다."
무정진인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자신이 무당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무림을 어지럽히는 악인을 처단하여, 강호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당이
할 일이고 자신이 무당에 있는 이유다.
악인에 대한 판단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지 악인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
니기에 그 정당성의 유무도 자신들이 해야한다.
조사만 받고 가라 했는데 거절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스스로 악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무당에서 조사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마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리고 강구두 그대와 장한수, 당신들이 정
파에 원한이 없다고 말할 텐가?"
정(正)과 사(邪)를 판단하는 가치관. 무서운 흑백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사(邪)로 결정 내렸다면 상대가 아니라고 아무리 해명을 해도 그들은
사가 되어야한다. 특히 세상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일수록 더욱 그
런 경향이 강하다.
지금 무정진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너희들에게 원한이 있었다면 살려주지도 않았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 주마."
무정진인을 노려보며 앞으로 나서는 일휘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피어올
랐다.
진정으로 화가 났다. 놈이 하고 있는 행동은 죄인을 다루는 관인하고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질 않는가.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이미 죄목을 만들어 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를 외치며 곤장으로 협박하는 관인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눈
앞에 다가오는 고통이 무서워서 죄를 지어내야 하는 자들이 힘없는 양민이
아니었던가.
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와 같이 일하던 백정(白丁)들이 그랬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휘의 몸으로부터 붉은 운무가 새어나오며 주
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정진인의 앞에 도달했을 때는 일휘의 모습은 사라지고 붉은 운무
만 일렁이고 있었다.
"들어와라 허풍쟁이. 무당이란 이름으로 부하들만 죽이지 말고 직접 나서
봐라."
운무 속에서 들려오는 일휘의 말에 무정진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검진을 펼칠 때 자신은 나서지 않고 다른 제자들만 희생시킨 것을 빗대놓고
한 말이었다.
"놈!"
일휘의 도발에 얼굴은 붉어지고 호흡은 거칠어졌지만 쳐다보는 눈만은 차
갑게 가라앉았다. 무당의 저력이었다. 비무를 앞둔 무인에게 흥분은 패배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몸으로 채득하고 있었다.
일휘의 붉은 운무를 노려보던 무정진인의 자세가 기묘하게 변했다.
검을 쥔 오른손은 일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밀고, 왼손은 뒤쪽을 향한 채
무엇인가를 잡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환검의 기수식이었다.
대환검(大幻劒).
무당에 존재하는 검법 중 환검(幻劒)의 최고봉에 있는 검법, 유운신법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오초의 검법이다.
"큭! 자식. 폼은…."
무정진인의 모습이 우습게 보였던지 붉은 운무 속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소
리가 들려왔다.
그런 일휘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무정
진인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흘러가듯 구름이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무정진인의 몸놀림에 따
라 희뿌연 운무가 생성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운무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빨라지더니 그 속으로부터 낭
랑한 외침소리가 흘러나왔다.
"구름처럼 덧없이 살고 싶었노라. 운행만리(雲行萬里)!"
광활한 하늘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구름의 움직임을 검으로 표현했다는 대
환검의 일초, 운행만리가 펼쳐지자 희뿌연 검기가 무정진인의 검을 감싸며
사방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딱히 목표지점이 없는 것처럼, 일휘가 서 있는 주변을 동시에 점하는 무수
히 많은 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백색의 운무와 백색의 검기, 어느 것이
진실한 검기인지를 파악할 수 없게 하는, 유운신법과 함께 펼쳐지는 환검의
극치였다.
"호!"
일휘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일휘가 겪어본 무림인이라고는 귀살
이 전부였는데 그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그당시 귀살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지만 지금 상대인 무정진인이 펼치고 있는 무공은 정통검법
이다.
대 문파에서 수백 년간 보완된 진실한 무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뿌려대는 수십 개의 검기 중 진
실한 검은 단 하나이다.
그러나 곧이어 일휘의 얼굴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묻어 났다.
"자식! 요란스럽게 휘둘러봐야 형님의 손과 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야,
임마."
백산의 타혈법에 당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것이 타혈법이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순식간에 빗발치던 백산의 손과 발에 비하면 무정진인이 만들어낸 검기의
허상 같은 것은 우습다는 소리였다.
"혈극참!"
붉은 기운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더니 그 속으로부터 순식간에 튀어나온
일휘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는 검기를 향해 저돌적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일휘를 중심으로 전면을 완전하게 장악하는 시뻘건 혈광들, 무려 백
팔 개의 도강이 생성되며 백색의 운무를 찢어버릴 듯이 회오리쳐 들었다.
이미 살심을 먹었기에 처음부터 한천팽무도법의 일초였다. 비무니 하는 개
념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빠른 시간에 끝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
다.
"헉!"
자신의 검기를 소멸시키며 엄청난 기세로 밀려드는 붉은 강기들을 접한 무
정진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설마 일초부터 도강을 뿌려댈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무림들의 습관중의 하나가 생사비무를 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상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어떤 비장의 수가 준비되어 있을지
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삼푼 정도를 감추고 비무에 임한다. 비무
의 초수가 길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휘의 대응은 달랐다. 시작부터 도강을 뿌려대며 무정진인을 공격
해버린 것이다.
"풍운조화(風雲造化)!"
바람과 함께 구름처럼 살고 싶어하는 도인(道人)의 열망을 표현하는 대환
검 이초인 풍운조화가 펼쳐지자 무정진인의 몸놀림도 더욱더 빨라지고 그의
검에서도 백색의 검강이 솟아 나와 일휘의 도를 막아갔다.
"크윽!"
백색운무 속에서 참담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환검의 약점, 일초부터
오초까지 순서대로 펼쳐야 최대의 위력이 나온다는 것에 있다.
정파무공의 약점아닌 약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아니 정파뿐만 아니라 체
계적으로 연구하여 만들어진 모든 무공의 약점이다 .
무공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끊임없이 초식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미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 천지간의 힘을 끌어다 사용하는 경지에 있는
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일반 무인들이야 어디 그렇던가.
일정시간이 지나면 내공이 고갈되어 더 이상 초식을 전개할 수 없기에 내
공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지속적으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초식의 연계성이다. 즉 유한한 내공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운기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초식을 연계시켜
, 비무 중에도 운공의 효과를 취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무정진인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었다.
일초인 운행만리가 검기(劒氣)의 단계였고 이초인 풍운조화는 검풍(劒風)
의 단계였다. 하지만 일휘가 펼친 도강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신도 검강을
시전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올 리가 없었기에 처음부터 손해를 보았던 것이다. 그
러나 대 무당의 제자였고 이미 백전노장이 아니던가.
약해지던 백무(白霧)가 더욱 농밀해지고 그 속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
왔다.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싶었노라. 묵운일광(墨雲一光)!"
이제는 모든 초식에 검강을 사용하고 있다. 무당을 망친 죄인이 되어버렸
다.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할 무당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렸다. 놈을 죽이든지
자신이 죽어야 한다.
어차피 살고자하는 욕심이 없었기에 시전하는 모든 초식에 자신이 짜낼 수
있는 전 내력을 사용했다.
먹구름 속에서 새어나온 한줄기 광명(光明)처럼 백색의 검강이 일휘를 감
싸고 있던 혈운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도탄강!"
일휘의 외침소리와 함께 붉은 혈광이 난무하며 혈운 앞에 강기의 막이 형
성되었다.
도강보다 한 단계 위인 도탄의 경지가 무정진인의 빛살 같은 찌르기를 방
어하는 것이었다.
키이잉!
거북한 음향과 함께 두 개의 강기가 부딪치며 푸른 불꽃들이 사방으로 몰
아쳤다.
일휘보다 한 수 아래였던 무정진인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덤비자 거의 대
등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폭풍 속에서 우뢰가 되고 싶었노라. 우중뇌우(雨中雷雨)!"
대환검의 사 초인 우중뇌우, 진정한 검강의 단계였다. 일장에 달할 정도로
솟아오른 무정진인의 백색검강이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혈운을 향해 지쳐
들었다.
'일휘야, 일초만 사용해라. 또 다른 이들이 접근하고 있다.'
한천팽무도법인 이초인 혈극폭을 펼치려하는 일휘의 귓가에 남궁세우의 전
음이 들려왔다.
내공을 낭비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지금 오고 있는 무당인들이 최고의 적
이 될 것이기에 힘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과는 상관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광풍대원들이 대오를 갖
추고 있었다.
또다시 청풍검진이 구축되자 붉은 혈운이 피어오르고 그들의 동체를 가려
버렸다.
"혈극참!"
이기어도를 펼치지 말라는 남궁세우의 전음 때문에 다시 일초인 혈극참을
펼치며 무정진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번의 혈극참은 조금 전에 시전했던 것과는 달랐다.
도강이 아닌 도탄의 단계로 펼친 혈극참이었던 것이다.
일장길이의 강기들이 하나씩 분리되며 위에서 떨어지는 백색의 검강을 잘
라버리고 있었다.
과-앙!
검강과 도탄(刀彈)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백색운무가 희미하게 변하며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무정진인의 목에 일휘의 도가 죽음의 빛을 뿌리
며 멈춰서 있었다.
백색의 검강을 잘라냄과 동시에 일휘가 무정진인의 앞으로 쇄도한 것이었
다. 이미 이초인 풍운조화를 펼칠 때부터 무리를 해버린 무정진인의 몸은
부조화의 상태로 접어들었고, 사 초인 우중뇌우를 시전할 즈음해서는 온몸
을 잠식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내력을 쥐어짜서 검강을 시전했다. 그 결과, 물이 흐르듯
구름이 흘러가듯 움직여야할 유운신법이 깨지며 일휘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
았던 것이다.
"잘 가라, 허풍쟁이!"
"무량수불! 멈추시오."
일휘의 입가에 희미한 살소가 맺히는 순간 장엄한 도호가 울려 퍼졌다.
태화궁을 출발한 무당 최고 수뇌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선인령에 도착한 그들이 처음 목격한 광경은 무정진인을 향해 돌진하고 있
는 일휘의 모습이었다.
무자 항렬이면 장문인 바로 아래배분이고 오십대에서 육십대에 속한 인물
들로 현 무당파의 핵심이다. 그런 그가 패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휘야 돌아와라.'
무정진인의 처리를 놓고 잠시 고심하던 일휘의 귓가에 남궁세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당인들의 적의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미 저
항의지가 없는 무정진인을 살해하게되면 지금 와있는 무당인들의 분노를 자
아내게 될 것이고 그럼 전 무당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기에 그것만은
피해보려는 생각이었다.
남궁세우가 무당의 장문인인 영운진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무당이 사건의 확대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고수들이 왔지만 칠십여 명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일 자신들이 무당의 제 일적(一適)으로 간주되었다면 선인령 주변에 천
라지망을 펼쳐야 하는데 지금 와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인기
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운이 좋군."
무정진인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던 일휘가 도를 거두며 몸을 돌려 광풍대원
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익!"
모든 힘을 다 했는데도 패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이름도 없는 무명
에게 허풍쟁이 소리까지 들었다.
더구나 장문이이 부탁해서 목숨을 구하지 않았는가.
치욕과 분노로 인해 온몸을 떨고 있던 무정진인의 눈에 상대의 등이 보였
다.
사문의 존장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농락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마치 찔러보라는 듯이 등을 보이며 도를 늘어뜨린 채 무방비 상태로 걷고
있는 것이다.
놈의 등이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네놈은 자존심도 없는 놈이다. 무당이란 이름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 무당의 제자라는 신분만 가지고 큰소리치는 허풍쟁이 일 뿐이다.'
"안 된다, 무정!"
장문인의 목소리도, 무당제자들의 탄성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
간은 무인의 도리라는 것도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을 우롱하고 무당을 모욕한 놈의 커다란 등을 향해 마지막 남은
모든 기력을 짜내서 찔러갈 뿐이었다.
그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환상을 보았다. 걸음을 옮기던 일휘가
오른쪽으로 한발 피하며 몸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무정진인과 등을 맞댄 채
서 있는 것을….
주로 박투술을 사용할 때 많이 쓰여지는 보법으로 검이나 도를 사용하는
무인들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몸놀림이다.
"이제는 비겁자까지 되었구나. 허풍쟁이."
등을 대고 있는 채로 무정진인을 향해 이죽거리던 일휘가 허리춤에 있던
오른손을 힘차게 뽑아내었다.
순간 그의 손을 따라서 나온 도에는 붉은 선혈이 가득 묻어있었다.
회전하는 순간에 도를 거꾸로 바꿔 잡은 일휘가 무정진인과 등을 맞붙임과
동시에 그의 허리를 향해 도를 찔러 넣었던 것이다. 실로 가공할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영운진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비겁한 무당의 모습을 목격했다.
이미 등을 돌린 상대에게 암습을 가하다 당하고 말았다.
저자의 움직임은 본능적이었다.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다가오는 살기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여, 보호 본능에
의해 무정을 찔러버린 것이다.
"장문사백 죄송합니…."
제자들이 부축해온 무정진인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소리였다. 명예와 자존
심을 지키기 위한 무정진인의 노력은 비겁자라는 오명만 남았을 뿐 아무 것
도 얻은 게 없었다.
무당산에서 처음으로 사망한 무당의 제자였다.
툭! 툭! 투투투!
급기야 검은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와 함께
무당파 인물들에게서 발산되는 살기가 선인령에 몰아치고 분노한 그들의 눈
빛이 광풍대원들에게로 향했다.
암습을 가했던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당파의 영역에서 무당의 제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자신들의 사숙이 또는 사질이 속절없이 죽어간 것이다.
무당제자의 비겁함이, 이일의 시작이 자신들이었음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
라진지 오래였고 무당파 인물을 살해한 저들에 대한 복수심만 남아있을 뿐
이었다.
"무당의 제자들은 대천강검진을 펼쳐라!"
"무량수불!"
무정진인의 죽음에 망연자실(茫然自失) 서있는 영운진인을 대신하여 가장
연장자인 영허진인이 진의 구축을 명했다. 뒤를 이어 선인령을 울리는 거대
한 도호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나타난 무당파 인물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
니다.-
그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도덕경 구절이 흘러나오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대천강검진.
무당의 최고검진인 대천강검진은 단일검진이 아니다.
오행검진(五行劒陣)과 칠성검진(七星劒陣) 그리고 진무칠절진(眞武七絶陣)
의 세 개의 검진으로 이루어진 복합검진이었다.
가장 먼저 무자(茂字) 배분의 제자들에 의해서 여섯 개의 오행검진이 구축
되고, 그 사이사이로 청자배 제자들에 의해 구축된 칠성검진과 영자항렬 제
자들로 이루어진 진무칠절진이 교대로 들어서게 되면 진이 완성된다.
전부 칠십이 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대천강검진은 천의무봉(天衣無縫)무당
검법의 정화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대천강검진이 와해되면 무당에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사면시켜
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 였던가. 무당의 자존심이고 뿌리였다.
선인령에 울려 퍼지는 도덕경의 낭송소리와 빗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그 사이로 죽음의 살기가 흘렀다.
"장문인!"
장문인인 영운진인이 진무칠절진의 한 축을 맡아야 대천강검진이 완성되는
데 아직 그가 합류하지 않고 있기에 영허진인이 부르는 소리였다.
영운진인이 만나고 있는 인물, 천무맹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강구두였
다.
"오랜만입니다. 강대협."
강구두를 쳐다보는 영운진인의 얼굴 표정에는 무당의 제자를 살해한 일당
을 대하는 적의가 없었다.
단지 상황이 이리 변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자신과의 비무만 없었던들 인생이 바뀌었을 사람이다. 만일 지금까지 천무
맹에 있었더라면 고위층에서 명예로운 삶을 살고 있어야할 인물이 단 한번
의 비무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그 빚을 갚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그를 쳐야했기에 더욱더 마음이 아파 왔
다.
"무당이 번성한 이유가 있었군요."
비록 비무 때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배경도 없던 자신에게 기꺼이 패배
를 자인했던 사람이었다.
영운진인과의 비무가 몰락의 원인이었다지만 그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오
히려 그런 이기적인 인간들 틈바구니에 있는 영운진인을 동정했었다. 그랬
던 그가 무당의 장문인이 되었고 속가제자가 거의 사라진 상황임에도 과거
의 위치이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강대협, 저희 무당은 마지막으로 대천강검진을 펼칠 것입니다."
검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쫓지 않겠다고 말하는 영운진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누가 있어 무당의 최고 검진을 뚫고 갈 것인가.
그러나.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무당의 검진이 와해되었을
경우 더 이상 무당의 죄인이 아니라는 전통.
"저는 언제나 중토(中土)의 위치에 있습니다."
"영운진인!"
강구두의 입에서 나지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지금 영운진인의 말의 의미
를 왜 모르겠는가. 자신도 한때는 천무맹의 인물이었고 전사대란 단체의 대
주였던 사람이다.
자신이 중토에 있다는 말은 자신을 치고 가라는 말이다. 목숨으로 빚을 갚
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불!"
"진인의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강구두가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존경심이었다. 거대문파의 수장의 위치
에 있는 자가 과거의 일 때문에 목숨을 버리려는 것이다.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행동이 아니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보여주려 하겠는가. 덮어버리기에 더 급급한 세상이 아니던가.
'하지만 진인이 생각해 주시지 않아도 우리는 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
을 잃어버렸기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이미 인생의 실패자들, 팽무도, 남궁세우, 장한수와 자신 그리고 패배자들
의 자식인 광풍대,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던 자들이었기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고 잃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자신들을 버린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침묵하며 물
러섰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서 대항할 테다. 더이상 당하며 사는 삶을 거부할 것이
다.
대천강검진이 아니라 무당 전체가 몰려와도 싸워서 이길 것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행운을…."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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