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84)

제2장 소림사(少林寺)

 숭산위로 해가 뜨면

 새벽 종소리가 새들을 놀라게 하고

 숲속의 작은 개울물은 졸졸 흐르네.

 산기슭의 푸른 풀이 밝게 빛나네.

 숭산(嵩山)의 절경을 묘사한 유명한 시구가 나타내듯이 태실봉(太室峰),

소실봉(少室峰)등 칠십이 봉이 있다는 숭산, 중원 오악 중 중악에 해당하는

 산이다.

 숭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산의 절경도 아니고 신령스러움도 아니

다. 소림사(少林寺), 중원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일컫는 소림사가 가

장 먼저 생각나게 해준다.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의 숭산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소림사. 원

래 소림사란 이름 자체가 '소실봉의 북쪽 숲속에 있다.'라는 뜻에서 유래되

었다고 한다.

 낙양을 떠난 백산 일행은 멀리 소림사의 산문이 보이는 곳까지 와서 휴식

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새 봄이 훌쩍 지나가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산중에는 이름 모를 야

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그들과 조화라도 이

루려는 듯 색색의 옷을 입은 향화객들이 소림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자네 저 마차도 같이 들어갈 텐가?"

 따뜻한 봄볕을 쬐고 있는 백산을 향해 석숭이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버리오?"

 이 많은 사람들 속에 마차를 어디에 두고 갈 거냐는 소리였다. 무림삼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세게 들고 온 마차가 아니던가.

 그런 마차를 밖에 두고 갔으면 하는 석숭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정색을 하고 나선다.

 "호랑이 뼈가 가득 들어있는 마차를 가지고 경내에 들어간다고?"

 석숭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승려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규율하는 십

계 중 가장 수위에 있는 것이 살계(殺戒)다. 그 살계를 어긴 흔적인 호랑이

 뼈가 가득 들어있는 마차를 소림사 경내로 들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

리다.

 "오다가 주웠다면 안 되려나?"

 백산도 석숭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는지 죽인 것이 아니고 주웠다 하

려 하고 있었다.

 "일단 가서 물어나 보지 뭐? 참! 소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이 뭐가 있

소?"

 "유명한 것이 어디 한둘인가. 일단 무공만 해도 강호 무림에서 찾아볼 수

가 없을 정도이고…."

 "아! 이 양반이 미쳤나. 무공 같은 것은 달라고… 하여튼 그런 것 말고 뭐

 약 같은 것은 없나. 왜 무공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먹는 약 말이오."

 석숭이 백산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분명 뭔가 속셈이 있어서 묻는 것인

데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요. 보기는 뭘 그리 빤히 쳐다보쇼."

 자신의 심정을 들킬세라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소리를 지른다. 백산이 이

렇게 소리를 지를 때는 무엇인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전부

안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인데….

 "소림사에서 가장 좋은 약이면 대환단과 소환단이 있지. 대환단을 복용하

면 이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고 그 모양은 엄지손톱보다 조금 크고…."

 옆에서 듣고 있던 독안랑 서문천이 소림에만 있는 영약을 비롯해서 강호

일절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소림까지 왔으니 이곳에 대해서 아는 것도 괜찮다 싶어 순수한 의도로 소

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요? 이갑자라 그럼 좋은 약이겠네? 임산부가 먹으면 괜찮으려나…."

 "무슨 소린가?"

 석숭이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임산부 어쩌고 하는 것을 듣기는 했는데

거의 혼자서 중얼거리는 바람에 정확하게 듣지를 못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백산이 저리 상세하게 물을 때는 뭔가 일이 터진다는 징

조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니오."

 태연한 표정. 뭔가 꾸미는 일이 있음에도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싱긋 웃고만

 있다.

 금일 소림사의 산문에서 사내로 들어오는 향화객을 유도하고 있는 이는 현

 소림 방장인 요인대사의 사질인 무현(茂玄)스님이었다.

 부처님 오신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향화객이 많았고

그 향화객들 사이에 혹간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에 방장 아래 배분인

 높은 지위의 승려들이 산문에 나와있는 것이다.

 소림을 방문하고 있는 향화객들을 향해서 열심히 합장을 하고 있던 무현스

님의 눈에 이상한 일행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마차에 거의 이십 명 이상이나 되어 보이는, 병장기를 소지한 무림

인들, 마치 소림사 같은 큰절은 처음 보았다는 듯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천

천히 다가오고 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시주님들."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하고 있으나 날카로운 눈으로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

을 관찰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비록 불사라 하지만 강호의 일에 속인들보다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 소림

이다 보니, 지금과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방문한 수상한 자들에 대해서 주

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호 경험이 있는 그가 이곳에 나와있는 이유이기

도 했다.

 "헉!"

 일행을 면면히 주시하던 무현스님의 입에서 놀람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

다. 그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자, 거의 칠 척에 달한 키와 그 키와 비슷

한 크기의 거대한 도(刀), 일명 사풍도(砂風刀)는 불리는 도를 등뒤에 매고

 있는 자는 바로 천마맹의 십대무욕고수인 광사 초상이었고 그의 바로 옆에

 있는 애꾸눈의 인물은 독안랑 서문천이었던 까닭이다.

 다른 인물들은 제켜두고라도 그 두 사람의 등장만으로도 무현스님을 긴장

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더구나 지금은 천마맹과 전쟁을 하고 있는 시기가 아니던가.

 '청오 너는 빨리 들어가서 천마맹 인물들이 왔다고 전해라.'

 옆에 있던 사질에게 전음을 날린 무현스님이 백산일행을 향해서 다가섰다.

 "아미타불! 초 시주께서 어쩐 일로 폐사를 다 방문하셨습니까?"

 "아! 예…."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광사 초상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자리를 백산이 끼여

들었다.

 "저기 소림사에 들어가려면 저 마차는 두고 가야 되는 거요?"

 무현스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감히 어른들이 이야기하는데 새파란 녀석

이 끼어 들고 있는 것이다.

 배분을 중요시하고 윗사람에 대해 절대 복종하는 소림의 규율로 볼 때 결

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님이라 하지만 그들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질 않던가.

 "일단 제가 확인은 해야 되겠지요. 시주의 성함이…."

 보통 향화객들이 가져온 짐은 조사를 하지 않는다. 소림을 위해서 가져온

물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마차는 광사 초상이 끌고 온 마차가 아니던가. 속에 무엇

이 있을지 알아서 그냥 보내준단 말인가.

 "이름은 왜 묻는 거요? 자기도 안 가르쳐 주면서…."

 무현스님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천마맹의 무욕인들을 대하고 너무 당

황한 나머지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러기로 소림사에

 와서 주인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고 자신도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인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무현이라 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

 무현대사의 귀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내심으로는 아미타불을 연발하며 참

고 또 참고 있는 그에게 이름은 안 가르쳐 주고 한마디를 툭 던진다.

 "마차 조사 안 하쇼?"

 "끄응! 알겠소이다."

 마차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이죽거리는 백산의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석두야. 중도 매운 것 먹냐? 왜 대머리가 붉어지지?"

 "시주!"

 마차로 다가가던 무현스님이 발걸음을 돌려서 백산을 향해 다가서려는 순

간 안으로부터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나왔다.

 "사숙님!"

 십팔나한과 그 수좌인 요정스님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어서 오시지요, 초시주.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요정(了定)대사.

 방장인 요인대사와 사형제지간으로 온화한 얼굴과는 달리 성격이 불같다해

서 폭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도 이곳으로 오면서 무현과 백산의 이야기

를 들었다.

 감히 소림의 앞마당에서 소림승을 우롱하고 있었다. 스님이면 누구나 깎고

 있는 머리를 대머리라 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주는 누구인가."

 사부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이리 몰상식한 제자를

 두었는가 하는 욕이었다.

 소위 명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먼저

이름을 묻는 것이다.

 신분을 알고자 함이다.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자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명문이란 소리고 그것이 아니라면 무명소졸(無名小卒)이란 말이다. 즉 대우

를 하기 위한 물음인 것이다.

 "백산이오. 성함이…."

 이번에는 백산이 무현스님이 했던 방법을 가지고 그대로 되받아 친다. 자

연 요정대사의 눈초리가 치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강호상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름을 묻고

 있다.

 "자네 사문이 어디인가. 도대체 어떤 사문이기에 존장도 몰라보는가. 소림

에 시비를 걸고자 함인가?"

 요정스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의 판단에는 천마맹의 인물들이 소

림에 시비를 걸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정스님의 호통소리와 함께 그의 주위에 있던 십팔나한들이 산문 앞을 막

아서며 일행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도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나는 이곳을 절로 알고 있었는데 절이 아니었

소? 그럼 저 사(寺)자는 왜 붙여 놓으신 게요. 그냥 소림파라 하지. 이 세

상 어느 절에서 향화객에게 이름을 대라하며 그것도 부족해서 소지품을 조

사한단 말이오. 그런 식으로 하는 절이 있소?"

 일순 요정스님이 할말을 잃고 말았다. 소림사, 절이지만 이미 절이 아니다

. 강호 무림의 거대 방파이고 정도(正道)의 지주이다.

 그런 소림사에 대 놓고 이 절은 잘못되었다 하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구도자의 길만을 걸었던들 산문에서 소

림으로 들어가려는 인물들을 조사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백산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요정스님이 듣기에는 분

명 그리 들렸다.

 더이상 세속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번 전쟁에도 불참을

 선언했던 소림이다.

 그러나 자신들이야 그런 마음을 먹고 있을지언정 타인에게 소림이 잘못되

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더구나 머릿속에는 강호무림

의 태산북두라는 의식이 뿌리깊이 박혀있음에야….

 "그래서 우리 소림이 세속에 관여하고 있으니 능멸해도 된다는 소리인가?"

 "참 이상하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지 모르겠네. 마차를 봐야겠다 하기

에 보라고 한 죄밖에 없소."

 백산이 생각하기에는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사람을 노

려보지 않나, 마차를 조사하겠다해서 하라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능멸이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다.

 마치 엄청난 대 문파에 왔으니 굽실거리면서 방문할 수 있게 빌어야 한다

는 말이 아닌가.

 "백산아, 물러나라. 내가 이야기해야겠다."

 결국에는 갈태독이 나서고 말았다. 조용히 마료성승의 유지만 전하고 떠나

려 했기에 지금껏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사람을 대하는 백산의 태도도 문제지만 오직 신분만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

는 소림의 행태도 문제였다. 결코 백산이 잘못했다고 나무랄 수만 없는 일

이었다.

 "요정대사라 하셨습니까. 갈태독이라 하오이다. 마료성승의 유지를 전하기

 위해서 귀사를 방문하게 되었소. 전해 주시겠소?"

 "헉! 지, 지금 마료 사조님이라 하셨습니까?"

 십팔나한과 요정대사의 얼굴이 경악한 표정으로 변했다. 갈태독이란 이름

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마료성승이란 말만 귀에 들어왔다.

 백년 전 소림의 금자탑인 쌍천불, 그분의 유지라 하였다.

 십팔나한 전부가 요(了)자 배분이므로 그들에게는 사조 내지는 사숙조가

되는 사람이 마료신승이다. 이제는 광사 초상도 저 싸가지 없는 놈도 아무

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소림 최대의 손님이 방문한 것이다.

 "빨리 들어가서 방장 사형께 알리게. 어서."

 십팔나한 중 한 명에게 지시를 하며 황송한 표정으로 일행을 맞이하기 시

작했다.

 그 어수선한 순간을 이용해서 마차와 같이 들어가고자 백산이 잔머리를 굴

렸으나 계속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무현스님의 투철한 임무수행에 의해

서 마차의 반입을 제지당하고 말았다.

 석숭의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해도 살생의 산물인 호랑이

뼈의 반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잘될 수도 있었던 일을 백산의 사고 때문에 어렵게 된 것인지도 모

른다. 어쩔 수 없이 산문 옆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마차를 옮긴 후에 환상

미로진으로 숨겨놓기는 했으나 백산의 투덜거림은 끊이지를 않았다.

 "처음부터 나 같은 촌놈이 아니고 여기 있는 만금돈노 석숭 대인이나 남궁

세가의 전대가주인 무천신룡 남궁지우 대협이 말했더라면 그런 대접을 했겠

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절에서조차 사람을 차별하다니 이거 말이 되는 소리

냐고."

 유독 만금돈노와 남궁세가의 전대가주라는 말을 할 때는 소림사가 쩡쩡 울

리도록 크게 외쳐댔다.

 백산 일행을 안내하고 있던 요정스님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저 버릇

없는 놈이 외치고 있는 것을 볼 때 지금 소림을 방문하고 있는 자들은 강호

의 거물 중의 거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머리를 스치는 생각.

 '헉! 천장지옥마 갈태독?'

 조금 전에는 마료사조 때문에 갈태독이란 말을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

었다. 그런데 분명 갈태독이라 했었다.

 '그럼 이들이 그 일행?'

 구파 중 유일하게 대부분의 속가제자들이 천무맹으로 떠나지 않고 있는 곳

이 소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무림이 돌아가는 사정이나 소문은 개방다음으로 빨리

접하는 곳이 또한 이곳인 것이다.

 지금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자들이 무림이천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일

행이 아닌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엄청난 충격에 계속해서 염불만 되뇌고 있었다.

 부처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 하지만 분명 차별은 존재했다. 산문 앞에서

는 존장에 대해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냐며 몰아세우던 소림사였지만 사조

의 유지를 가져왔다고 하니 대우가 달라졌다.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지객당(

知客堂)에서도 가장 좋은 곳을 배정 받고 편안한 휴식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러나 백산을 비롯한 일부만 편했지, 석두와 광견조는 아니었다. 손위에

서의 광천뢰 수련이 끝나자 이번에는 품속에 넣고 다니면서 수련을 하고 있

는 것이다. 그것도 두 개씩을 집어넣고.

 조용한 풍경소리와 함께 어둠이 밀려오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독경

소리는, 산사의 밤하늘로 울려 퍼지며 숭산의 적막감을 더해주고 있는 심야

.

 별빛의 배웅을 받으며 숭산을 떠나는 이가 있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사님."

 "아닙니다, 제갈시주. 오히려 저희가 죄송합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아미타불!"

 야심한 밤에 소림 방장인 요인대사가 배웅하고 있는 이 여인, 천무맹의 군

사인 제갈수연이었다.

 반드시 소림을 끌어들이라 했던 화진악 지시에 의해 소림을 방문했으나 원

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떠나고 있었다.

 '소림의 협조는 불가능한 것인가….'

 소림은 더 이상 전쟁에 끼여드는 것을 거절했다. 아물러 천무맹에 파견되

어 있는 인원에게도 철수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헛걸음만 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천각을 장악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입장에서 보면 소림의 부재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천각이 십천각보다 더 위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소림사가 강호 대세를 좌우하지 않는 이상 굳이 그들이 있을 필요는 없다.

 다만 소림이 있음으로 해서 전쟁 명분이 더 확실해지기에 필요한 존재일

뿐이었다.

 "응! 진식? 소림 앞에 웬 진식이 설치되어 있는 거지?"

 산문을 경비하던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눈에 공간이 왜곡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일반인에게나 진식을 모르는 인물들에게는 결코 발견될 수 없고 오직 제갈

수연 정도로 진에 능통한 인물들에게만 보이는 현상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제갈수연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가문에서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진식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 앞에 있는 진은 상당히 고도의 진식이었다. 감히 제갈세가의

진식과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그런 진이었던 거였다.

 소림의 산문이 보이지 않는 뒤쪽으로 은밀하게 돌아간 제갈수연이 진을 파

훼하기 시작했다.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고 했고

 자신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진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제갈세가보다 위

에 있을 수 없다는 자존심.

 "호! 이것은 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환상미로진?"

 진을 파훼하던 제갈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은 이미 절반정도는 파훼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환상미로진은 과거에 제갈세가에서도 연구해 보았던 진이 아니었던

가.

 '마차? 이 마차는…? 그럼 그들이 소림사에 와있다는… 왜지?'

 제갈수연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천마맹과 천무맹을 흔들고 있는 자들이

고 설가장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자들.

 그리고 동시에 광천뢰라는 존재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차의 이곳 저곳을 뒤지던 제갈수연의 눈앞에 드러난 한 상자의 검은 구

슬, 그녀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무천각의 장악에 이어 두 번째로 다가오는 행운이었다.

 광천뢰 한 상자, 이 정도면 천무맹도 날려버릴 수 있는 양이다. 물론 고수

들에게야 크게 소용이 없겠지만 일반 무사들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한다. 무

력이 약한 제갈세가에게는 엄청난 힘이 될 수 있는 물건이 광천뢰인 것이다

.

 자신이 해치려 했고 지금도 이용하려 하고 있는 그 일행이 자꾸만 제갈세

가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일호! 이것을 은밀하게 세가로 옮겨라. 세가 인물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

 '네. 가주님!'

 천밀 일호라는 인물은 제갈세가의 사람이었는지 제갈수연을 향해서 가주라

 칭하고 있었다. 백산의 재산목록 일호가 도둑맞고 있음이다.

 남의 것을 훔쳐가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를 않는지 너무 태연한 표정

이었다. 마치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물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져야 되는 것이에요.'

 소림의 산문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이 몸을 돌렸다. 떠난 발걸음이 가벼워지

고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듯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공연한 방문이 아니었다. 소림의 전쟁 참여보다 더 큰 것을 얻어서 돌아가

는 것이다.

 광천뢰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백산의 실책이었다.

 자신에게 있음으로 해서 편하다고만 생각했지 누가 훔쳐 가리라고는 꿈에

도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환상미로진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이야기다.

 제갈수연이 떠난 자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별빛만 비추고 있었

다.

*     *     *

 "쌍룡도미!"

 "쌍룡도미!"

 본전 뒤쪽에 십팔나한의 거처인 나한전(羅漢殿) 옆 연무장에서 나오는 외

침소리였다.

 다음대의 십팔나한들이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웃옷을 벗고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승려들의 몸에서는 땀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갈태독은 방장인 요인대사를 만나러 갔고, 여인네들은 이왕 소림사까지 왔

으니 불공도 드리고 탑돌이도 한다며 나가버리자 심심해진 백산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

 일반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음에도 갈태독의 일행이란 간판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고, 지금 나한전이라 쓰여진 건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

래쪽에서 연무(鍊武)를 하고 있는 스님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는지 스님들이 움직일 때마다 앉은 자세 그대

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다.

 지금 미래의 십팔나한들이 연무를 하고 있는 무공은 소림 오권(五拳) 중

정(精), 기(氣), 골(骨), 신(神)을 단련하는 용권(龍拳)이다.

 근육의 변화로 인한 힘을 사용하지 않고 내공을 이용하는 방법을 수련하는

 것으로 수심(手心), 각심(脚心)과 중심(中心) 등의 오심상인(五心相印)이

되어 신룡과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용권연신(龍拳練神)이라 하는 수련법이

다.

 십팔나한이 배우는 무공중의 하나로 초식과 내공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휴식!"

 거의 삼십 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무너지듯 그 자리

에 주저앉았다.

 제자들에게 휴식을 명한 요정대사가 백산의 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백산은 요정스님이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쌍룡도미라는

초식을 시전하는 것처럼 연신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백시주라 하셨소. 타파의 비공을 훔쳐보는 것은 대죄라는 것을 모르시는

가."

 전일 백산에게 당한 것이 마음에 남아 있음인가 요정대사의 어투가 상당히

 신랄했다.

 "저 이상한 몸놀림이 비공이라고? 껍데기만 있는 저런 것이? 남들이 소림

이라 해서 대단하지 알았더니 별 것 없구먼 뭐."

 백산이 보기에는 그랬다. 내공과 초식을 유연하게 연결하기 위해서 펼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초식에 연연해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자연스

럽지 못한 동작이 이유였다.

 무공이 되었던지 무희의 춤이 되었던지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동작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게 보

이는 것이다.

 그런데 소림의 승려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일부러 움직이는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는데 받아들이는 요정대사는 그렇지를 못

했다.

 내공의 움직임은 무시하고 초식에만 연연하는 그들의 몸 동작에 대해서 백

산은 껍데기만 있는 것으로 표현을 했고, 이를 받아들이는 요정대사는 무공

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가 용권의 어색한 동작을 보고 껍데기라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림 무공을 무시하는 발언 때문에 백산이 한 말에 대

해서 깊이 생각하지를 못했다.

 설사 깊이 생각했다하더라도 같은 일행에 있는 석숭이나 남궁세우 그리고

갈태독의 후광을 믿고 큰소리치는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무시했을 것임

에 분명했다.

 "그럼 자네는 저들과 비무를 해볼 요량은 있나?"

 다음대의 십팔나한, 소림의 후기지수 중 최고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 인재

들이다. 저들 중 열두 명은 떨어지고 열 여덟 명만 남게 될 것이다.

 즉 경쟁에 의해서 십팔나한을 선발한다는 말이다.

 당연 십팔나한 후보들은 열심히 무공을 연마할 수밖에 없다.

 요정의 생각은 저들과 이 싸가지 없는 놈을 비무시켜 버릇을 고쳐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돈 되는 것도 아닌데 비무는 무슨, 내ㆍ기라면 또 모를까."

 내기라는 말은 나지막하게 했지만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것이었

다.

 요정대사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이 변했다.

 내기라니, 소림 최고의 후기지수들과 비무를 하는데 내기를 하자는 것이다

. 지금껏 강호 생활을 해왔지만 소림제자를 상대로 내기 비무를 하자고 했

던 인물은 없었다.

 설사 누가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치부하며 웃고

말았을 것이다.

 일반 무림인들 같으면 대 소림의 제자와 비무를 통해 무엇인가 배우기 위

해 오히려 부탁을 하는데 이놈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기를 하자는 것인

가.

 다시 한번 놈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태양혈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외공을 익힌 흔적도 없다. 천장지옥마와 같은 일행이라고 자신도 무공이

고강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者)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라 생각되었다.

 "무슨 내기를 하고 싶은가?"

 "이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기."

 요정대사가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던가.

아예 떡을 만들어 소림사 경내에서 삼천 배를 시키고 싶었다. 무수히 많은

향화객들 앞에서 소림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어야하고 소림이 왜 소림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

 "좋네, 세 번의 기회를 주겠네. 그 중 한번이라도 이기면 자네가 이긴 것

으로 하지."

 "좋소, 그럼 나도 세 번의 기회를 주겠소. 저기 있는 중들뿐 아니라 소림

사의 어떤 중이와도 상관없소. 중수의 많고 적음도 상관없고. 그 중 한번이

라도 이기는 중이 있으면 내가 진 것으로 하겠소."

 요정대사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어제는 스님의 머리를 대머

리로 칭했던 놈이 이번에는 중이라니. 도대체 '중'소리를 몇 번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광오했다. 소림사의 누가 되었든지 다 받아주겠다 하

고 있다.

 이것은 소림 전체를 모욕하는 말이질 않는가. 자신이 말한 세 번에다 누가

 되어도 상관없고 합공을 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덩치 양반 들었소? 이 양반이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해주시오. 그럼 원하

는 대로 해 주겠소."

 "자네 그 말 정말인가? 분명히 약속한 거네."

 광사 초상이었다. 어디 담벼락 아래 그늘진 곳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

는지 초상이 환한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백산의 무공을 보고 난 후 틈만 나면 비무 한번만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으

나 남는 것도 없는 비무를 왜 하냐며 백산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럼 논검비무라도 좀 해달라고 했으나 아는 초식이 세 가지밖에 없다면

그것마저도 거절해버린 백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공증을 서주면 비무를 해 주겠다 한다.

 지금 백산이 하고 있는 짓은 과거 백무천과 비무 때 운학자가 써먹었던 것

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공증인이 없으면 비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기에 초상을 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나 초상이 이 비무의 공증인이 되겠소. 이긴 사람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

어주기로 하고 기회는 세 번이 있소. 그중 한번이라도 이기면 승자가 되는

것이오."

 묘한 내기였다. 두 번을 이기고 한번을 지게되면 패하게 되는 비무, 즉 세

 판을 다 이겨야 승자가 되는 것이다.

 광사 초상에게 공증인이 되어 달라고 할 줄은 몰랐던 요정대사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백산의

몸을 점검해 보았으나 특이한 것이 없었다.

 "맞소이까, 요정대사님?"

 "…좋습니다."

 결국 내기를 승낙하고 말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것 또한 소림의 치욕이

아니던가.

 "자, 내려가 볼까나?"

 연무장으로 내려서는 백산을 향해 삼십 명의 소림승들이 적의를 드러내 보

였다. 그들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감히 소림의 심처에서 자신들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림승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산은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헛 둘! 헛 둘!"

 몸풀기.

 삼류건달들이 싸우기 전에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을 돌리며 몸을 푸는 것

을 그대로 재현해 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손과 발을 뻗어내고 있는 백산의 모습에 소림승들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내기를 다를 줄 아는 무인이라면 결코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잠깐의 운

기만으로 굳어있는 모든 근육들을 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랑 한판 할거요?"

 "무광이라 하오이다."

 백산의 말에 온몸에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십대의 승려가 앞으로 나섰

다.

 무(茂)자 배분이며 방장인 요인대사 및 그의 사형제들의 제자이다.

 무광(茂廣).

 십팔나한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고 있는 스님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 강자이고 다음대의 십팔나한으로 이미 낙점 되어 있는 스님이 그였다.

 "자, 시작합니다."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서 퉁퉁 뛰기 시작했다. 두 팔은 편한 자세로 늘어

뜨린 채 양발을 앞뒤로 번갈아 움직이며 뛰는 모양새가 뒷골목에서 건달들

이 움직이는 모습과 완전하게 일치했다.

 무광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히고 백산을 향해 쾌속 하게 다가서면서

일수를 뻗었다.

 십팔나한공의 일초인 선인공수(仙人拱手)였다.

 앞면을 공격해 가는 자신의 손을 허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며 피하는 백산

의 모습에 무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비록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수월하게 피했던 것이다.

 공력을 더 끌어올렸는지 무광의 양손에 약간 흰색의 기운이 감돌고 백산을

 향해 정권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십팔나한공의 이초인 패왕거정(覇王擧鼎)을 비롯하여 좌우삽화(左右揷花)

등 모든 초식이 연결동작으로 펼쳐졌다. 백산의 전신을 노리며 질러가는 그

의 정권엔 막기만 해도 상대를 부숴버릴 것 같은 거력이 숨어있었다.

 단순한 비무차원의 공격이 아니었다. 소림을 모욕한 적을 응징하고자하는

처벌의 손길이었다. 불영선하보(佛影仙霞步)라는 절세의 보법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무광의 공격은 일반 무림인이 받아낼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

다.

 그러나.

 상대는 백산이었다. 불타의 그림자를 만들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모든 공격

을 간발의 차로 피해버린다.

 어깨를 향해 다가오는 손 그림자는 옆으로 돌면서 흘리고, 가슴으로 뻗어

지는 권(拳)은 뒤로 물러나고, 허리를 쓸어오는 손바닥은 뒤쪽으로 재주를

넘으며 피하는, 단 한번의 손길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덩치 양반, 이 사람들 화났나봐. 손에 살기가 있어. 중이 아니었나봐."

 피하는 와중에도 백산의 주절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

어나고 있었다.

 삼류건달같이 뛰면서 대 소림의 십팔나한공의 연결초식을 모두 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요정스님을 비롯한 나머지 소림승들의 얼

굴 색이 변했다. 허투루 볼 상대가 아니라고 느꼈음인지 자신을 쳐다보는

무광을 향해서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광의 자세가 기민해지고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이름도 없는 자

에게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방법이 없었

다. 자신의 공격을 너무 수월하게 흘리고 있지 않은가.

 자세를 낮춘 무광의 몸이 검게 변했다.

 호권(虎拳).

 전신의 모든 힘을 쌍권(雙拳)에만 집중할 수 있는 소림오권중의 하나이다.

 흑호(黑虎)가 앞발을 이용해서 사냥감을 쳐내려 할 때와 같은 형상을 하며

 백산을 향해 살기를 흘려냈다.

 "흑호시조(黑虎試爪)!"

 강렬한 외침과 함께 호랑이가 먹잇감을 덮치듯이 그대로 백산의 전신을 향

해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뒤쪽으로 빠져있던 백산의 오른발이 몸과 함께 돌아가면서 회

선각이 펼쳐졌다.

 "쿠앙!"

 무광의 조(爪)와 백산의 각(脚)이 부딪치며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요정대사 및 나머지 승려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강기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동료인 무광이야 조공에 강기가 포함되어 있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퉁퉁 뛰고 있는 저자의 발에도 강기가 포함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회선각을 이용해 흑호시조를 쳐냄과 동시에 왼발을 이용한 등각으로 무광

의 앞면을 노리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나는 그를 허공에 뜬 상

태에서 선풍각을 날리고 있었다.

 오른발에 의한 회선각과 왼발에 의한 등각, 그리고 다시 오른발에 의한 선

풍각까지 세 개의 동작을 동시에 연결하는 발 재간은 신기가 아닐 수 없었

다.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무광이 두 팔을 붙여서 앞면을 방어했

고 그곳을 향해 백산의 발이 무서운 기세로 내리 꽂혔다.

 "크윽!"

 다시 한번 강렬한 광음과 함께 무광의 신형이 앞면을 방어한 상태 그대로

일장 가량을 죽 밀려났다.

 백산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러나는 무광을 향해 그보다 더 빠

르게 다가서며 무릎을 이용해서 명치 쪽을 차올리고 있었다.

 무광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자신의 몸놀림으로

따라잡을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명치 쪽에 느껴지는 살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두 팔을 내리는 무광의 두 눈

에 하얀 이가 보인다고 느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요정스님을 비롯한 소림 승려들의 넋이 빠져나갔다. 권각(拳脚)이라면 강

호상에서 소림을 따를 곳이 없다. 소림칠십이권, 소림오권, 나한권 등 거의

 모든 무공이 권각법이라 할 정도로 권법의 천국이 바로 소림이 아니던가.

 그러나 모든 소림의 권각기에는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저런 동작

은 없다.

 오른쪽 무릎이 올라감과 동시에 오른손 정권이 나아가는 기묘한 동작. 어

찌 보면 권각에서 사용할 수 없는 어색한 동작이었다.

 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는 동작이지만 어느 한곳에 힘을 집중하지를 못

하고 너무 많은 허점이 생기는 동작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자는 해냈다. 허초는 절대 아니었다. 허초였다면 무수한 비무로

인해 실전무예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무광이 명치를 막기 위해서 팔을 내

렸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릎 공격도 실초였고 오른손 정권도 실초라는 말이다.

 "백산 승!"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광사 초상의 외침이 연무장에 울려 퍼지며 요정

과 나머지 승려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은?"

 요정이 약속했던 한번이라도 이기면 승리할 수 있게 해준다던 말은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또 다른

상대를 찾고 있었다.

 백산의 성격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표정 또한 변해있

었다. 지금껏 빙긋거리며 웃고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소림을 비웃고 있었다.

 '이런 자만심을 가지고 오천맹을 요리했더냐? 너의 소림이….'

 백산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었다. 백살대를 백살마대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이었던 소림을 징계하고자 함이었다. 중이 중답지 못하고 불사가 불사답지

못한 소림을 뭉개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말에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무광은 이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다. 그가 공격다운 공격한번 해보지 못하고 당해버렸

는데 누가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없나? 그럼 내가 지목하지. 바로 당신. 그리고 그 다음은 십팔나한이야.

준비들 해."

 그곳에 있던 모든 소림승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것은 모욕수준이

 아니었다.

 천년 소림의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굴욕이었다. 소림진법의 백미가 백

팔나한진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외부에 알려진 사실뿐이라는 것은 소림승

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백팔나한진의 진수를 모아서 만든 진식이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다. 진

을 구성하는 승려들 또한 현 소림의 방장인 요인대사의 사형제들이고 개개

인의 공력도 엄청나다. 그런데 그 진식에다 대고 준비하라고 하고 있다. 요

정스님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발언이질 않는가.

 요정스님의 머리전체가 붉어지고 있었다. 감히 자신들의 제자인 무광을 이

겼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었다.

 "갈! 소림제자 하나 이겼다고 우리가 우습더냐?"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리라. 건방진 놈.'

 분노한 요정스님이 연대구품(蓮臺九品)의 신법으로 날아 내리며 백산을 향

해 거칠게 손을 뿌렸다.

 "혼세일기(混世一氣)!"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의 제 일초, 혼탁한 세상을 한번의 기세로 정화시

키고자 함이니 이것을 혼세일기라 부른다는 장법.

 이미 비무 수준을 넘어섰다. 생사(生死)를 걸고 하는 싸움이었다. 전력을

다한 요정의 장공(掌功)이 누르스름한 강기를 형성하며 백산을 향해서 물밀

 듯이 닥쳐왔다.

 "댁도 매운 것 먹었소?"

 요정스님의 머리가 붉어진 것을 두고 한말이다. 입으로는 이죽거리고 있었

지만 백산의 대응도 신속했다.

 가슴을 향해서 날아오는 장풍을 향해 편퇴를 날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

십 개의 발 그림자가 요정스님의 장력과 거칠게 부딪쳐갔다.

 펑! 퍼퍽! 퍼퍼벙!

*     *     *

 "사숙님! 그럼 그 청년이 마불 사조님의 영면을 지켰단 말입니까?"

 요인대사의 처소인 방장실, 갈태독과 요인대사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소림의 방장인 요인대사가 갈태독을 향해서 사숙이라 칭하는 것이었

다.

 싫다고 극구 사양하는 갈태독에게 마료사조의 진전을 다 이었으니 소림의

속가제자라 우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요인이 갈태독을 사숙이라 우긴 것은 소림의 이익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했음이다. 귀혼곡이란 곳에 백년동안이나 갇혀있었고, 어찌되었

던지 소림의 인물인 쌍천불 사조님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혈혈단신 아무도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소림이란 문파에 적이라도

두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심의 발로였고 감사의 표시였다.

 "그놈도 사숙으로 모실 텐가?"

 자신도 그렇게 했으니 백산도 사숙이 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임종을 지켰다고 아무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사숙님."

 요인도 백산이 행한 일에 관해서 들었음인지 갈태독의 말에 인상부터 찌푸

렸다. 그런 자를 사숙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뜻이리라.

 "그놈이 마불성승의 모든 진전을 이었다면 어찌하겠는가?"

 "네? 설마… 진정이십니까. 사숙님?"

 요인대사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마불사조의 진전을 이었다면 제자

라는 소리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불한당 같아도 사문의 존장

인 사숙으로 모셔야 한다. 사숙이란 자리가 결코 인간성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문 어른의 진전을 이었다면 그가 악인이건 선인이건 간에 일단

윗사람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전통 아니겠는가.

 "아닐세. 그냥 해본 소리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갈태독이 말을 바꿨다. 사숙이 된다고 백산이 좋아

할 리도 없을 테고 번거로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을 귀찮게 해 놓으

면 자신만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마불사조님께서 그런 자를 제자로 받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표정이 밝아진 요인대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치 큰일날 뻔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요인대사도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다. 서른도 안 된 청년이 마불신

승의 영면을 지켰다함은 최근까지 살아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를 못했다. 갈태독의 말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

개차반 같은 자를 소림의 존장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앞섰

던 것이다.

 또한 갈태독을 통해서 두 분의 근황을 모두 알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물을

게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방장 사백님! 방장님! 큰일났습니다."

 그때 방장실 처소를 두드리는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경망스러운 게냐?"

 전일 백산 일행을 맞이했던 무현스님이 새파란 얼굴을 하고 가쁜 숨을 몰

아쉬고 있었다.

 "지금 나한전에서…."

 "뭐라고? 어찌 그런 일이… 어서 가보자!"

 내기 비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무광이 패했고 십팔나한까지 지목을

당했다는 것이다.

 요인스님과 갈태독이 나한전에 도착했을 때 백산과 요정스님의 비무는 절

정에 달해있었다. 요정대사가 접근하는 백산을 향해 소림퇴법의 일절인 항

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를 날리며 필사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광! 콰콰광!

 두 사람의 다리가 부딪치면서 굉음이 흘러나왔다. 황색강기에 휩싸인 요정

의 다리와 붉은 강기의 백산의 다리가 무수히 얽히고 그 충격으로 생성된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항마연환권(降魔連環拳)!"

 백산의 상체가 비었다고 생각했는지 퇴법을 순식간에 권(拳)으로 변화시켜

 우렁찬 일갈과 함께 수십 번의 정권을 쾌속 하게 찔러 넣었다.

 "으차!"

 백산의 묘한 외침, 요정보다 조금 늦게 나온 백산의 양손이 빛살 같은 속

도로 튀어나오며 항마연환권을 막아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터져 나오는 격

타음, 두 사람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뒤쪽으로 멀어졌다.

 "형님이 왜 저리 뜸을 들이는 거요? 한 주먹도 안 되는 놈에게."

 어느새 광견조원들도 전부 와있었는지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멋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소살우가 보기에도 백산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표정을 봐서는 결코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뭉개버리려고 그래, 임마! 바닥까지 완전하게 드러내서 뒤집어 엎어버리

려고."

 "그럼 왜 저리 힘들게 해요. 그냥 귀싸대기나 몇 방 올려버리지."

 소살우가 보기에는 백산이 행동이 좀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모욕을 주고자

 하면 재빨리 제압해서 따귀나 좀 때려주면 그것처럼 큰 굴욕이 어디 있겠

는가.

 "사람을 뭉개면 뭐하냐, 임마. 죽으면 그만인데. 무공… 무공을 뭉개야 영

원히 남을 것 아냐?"

 석두가 백산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스님이 패한다면 그가 능력

과 자질이 부족해서 졌다고 할 것이지만 무공을 깨트린다면 천년 소림의 치

욕으로 남을 것이다. 십팔 나한도 그런 맥락에서 대기하라고 했던 것이다.

 백산이 서문천으로부터 소림에 대하여 말들을 때만해도 백팔나한진이 최고

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곳 나한전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을 면면히 살펴보니 소림의 최고는 나한전에 있었다.

 십팔나한을 지목한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

 소살우와 석두의 근처에는 광견조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소림승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적의를 보이며 살기를 흘려댔다.

 "어라? 야, 대머리들. 왜 노려보고 지랄이야? 눈 안 깔아?"

 소살우가 자신들을 노려보는 소림승들을 향해서 한바탕 퍼부어 댔다. 그도

 석두의 말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곳 소림사가 자신에게 도법을 가르

쳐주셨던 사부와 관계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자연 소림승들에 대한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너희들도 다 기다려. 이판 끝나고 전부 뭉개줄 테니…."

 무자 돌림 스님들이 서 있는 땅바닥이 푹푹 꺼져 내렸다. 방장까지 와 있

는 이곳에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기에 모든 울화가 내면으로 쌓이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 방장사백보다 한 배분 위의 전대

십팔나한의 수좌인 각선(覺仙)사조까지 와서는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삭이며 연무장을 향해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새끼들. 대가리만 깎으면 단 줄 알아… 아예 대가리를 없애버릴까 보다."

 부르르, 푹! 푹!

 자욱한 살기를 뿌려대며 소살우가 한말, 목을 쳐버리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

 십팔나한 후보들의 발이 땅속으로 파묻혀버렸다.

 "백보신권!"

 두 사람의 정권이 부딪치고 그 반동으로 인하여 뒤로 물러나던 요정대사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일갈이었다.

 허공에서 내려서고 있는 백산의 몸놀림에 맞추어 절묘한 순간에 쏟아낸 권

강이었다.

 무수한 실전을 거친 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상대의 허점. 그러나 더 놀라

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아래로 내려서던 백산의 몸이 허공을 밟듯 그대로 퉁겨져 오르고 있는 것

이었다.

 "허공답보(虛空踏步)?"

 각선대사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허공을 평지처럼 밟고 다

닌다는 보법 최고의 경지, 그것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광경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허공으로 퉁겨져 오른 백산의 몸이 백보신권의 권강을 다리 삼아서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부숴버린다

는 강기를 밟으며 나아가다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백산의 몸이 회전하며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요인스님을 향해 회선각을 펼쳤다.

 빠악!

 비무의 끝이었다. 소림방장과 같은 배분이고 실질적으로 소림을 끌어가고

있는 인물이 백산의 일퇴(一腿)에 뒤쪽으로 날아가며 일어나지를 못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엄청난 신공도 아니었다. 조금 큰 도시의 뒷

골목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주먹질과 발길질이었다.

 그런 발길질에 대 소림의 무공이 깨지고 기절했다. 비록 허공답보를 보여

주고 강기를 타고 다니는 절세의 보법을 선보였지만 그것은 경공술일 뿐,

상대를 격살하는 그런 무공이 아니었다.

 절세의 경공과 보법을 지니고 있다해서 전부 고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런데 저 놈은 소림을 격파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대단하구먼. 사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나?"

 각선대사가 연무장으로 내려오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만은 백산의 무공

경지를 알아보았다. 비록 삼류건달들의 박투술만 가지고 소림의 무공을 상

대했지만 그의 몸에서 나온 박투술은 이미 삼류가 아니었다.

 강기마저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최고의 경지에 있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 열일곱 명의 승려들이 따르고 있었다. 요정을 뺀 현 십팔

나한승, 요정스님 대신에 전대 십팔나한의 수좌였던 각선대사가 나서고 있

는 것이다.

 "투귀 오구라합니다. 은거 기인이시죠. 저의 두 번째 사부님이시고요."

 백산의 입에서 투귀 오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북경 뒷골목에서 건달 노

릇을 하던 투귀 오구가 은거 기인으로 변했고 그의 박투술이 대 소림의 권

법을 깨트렸다 하고 있었다.

 오구는 아는지, 자신의 이름이 소림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을….

 "살우, 도(刀)!"

 백산이 소살우에게 도를 요구하자 소살우의 손이 움찔하고 도집은 그대로

인 채 도만 날아서 백산 앞에 멈춰 섰다. 그것 또한 신기가 아닐 수 없었다

.

 "사숙님! 좀 말려주십시오. 저도 각선사백님은 말릴 수 없습니다."

 말리기가 싫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아무리 사백이라지만 소림의

최고 권위인 녹옥불장으로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인대사는

그리하지 않았다.

 비록 소림의 금자탑인 마불사조의 영면을 지켰다고 하지만 천년소림을 우

습게 보고 있지 않는가.

 대우를 할 때는 하더라도 소림의 위대함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왜 세상이

 소림을 경외하며 태산북두라 부르는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갈태독의 입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저놈이 도(刀)를 들었을 때는 나도 말릴 수 없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숙. 도를 사용할 때는 말릴 수 없다니요?"

 요인스님의 의문은 바로 풀렸다.

 "천하제일도 팽무도의 제자인 백산이 오십 년 전의 죄를 묻고자 대 소림에

 비무를 청하오이다."

 쿠웅!

 모든 소림승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였다. 천하제일도라 하였다. 팽무도의

제자라 했다.

 오십 년 전 백살혈겁의 장본인이자 대주였던 자의 제자가 소림으로 들어왔

고 죄를 묻고자 한다 하였다.

 이곳에 있는 요자배 항렬의 승려들, 백살마대 도륙의 선봉장들이었다. 젊

은 시절, 자신들이 삼십 대의 나이에 발생한 백살혈겁, 소림의 명예를 걸고

 그들을 단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죄라 하고 있다. 빚을 갚겠다는 것이다.

 갈태독이 도를 잡은 백산을 말릴 수 없다 했던 이유였다. 바로 사부의 한

풀이를 하려 했기에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팽무도라 했는가. 자네가 부럽군.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 해주니

말이네….'

 자신도 복수귀가 된 적이 있었기에 팽무도라는 얼굴도 보지 못한 백산의

사부가 내심 부러워졌다.

 녀석의 복수는 소림의 멸망이 아니었다. 치욕, 죽음보다 더 무서운 치욕을

 주고자 함이다.

 "소림에 죄를 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때 우리 소림이 잘못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각선대사의 말이다. 강호 정의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던 소림이 죄를

지었다 하고 있다. 그때 백살마대를 단죄한 것은 칭송을 받아 마땅한 일이

지 결코 죄를 지었던 일이 아니었다.

 "캬악, 퉤!"

 속이 뒤틀리고 있음이다.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음에도 묻어버렸다. 아니 모른척하고 있다.

 "내 한가지만 물읍시다. 백살대라는 이상한 조직을 만든 곳이 천무맹 맞소

? 그럼 사마(邪魔)를 처단한다는 백살대에 왜 구파일방의 인원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소? 이상한 일 아니오?"

 쿵!

 또 한번의 심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모두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지 않는가. 사마척결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면서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천맹의 후예들은 악인이 되었고 다시

구파일방의 세상이 왔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요자배의 십팔나한들, 그들 모두가 백살대라는 조직에 들기를

 원했었고 그곳에 포함되지 못하자 좌절했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백살대 구성원들이 악인으로 판명되었을 때 더욱 거세게

 추격했다. 자신들이 원했고 동경했던 자리를 차지했던 그들에 대한 실망감

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백살대를 도륙하고 깨끗하게 잊었다. 아니, 잊으려 했다는 것이 옳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느껴졌기에 머리를 흔들며 모든 것을

 털어버렸다.

 "그런데 당신들을 누구도 말하지 않았어. 그랬던 당신들이 정도의 지주라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남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정의는 무슨

정의인가. 그대들 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좀 뛰어나면 안 되는

것인가? 수백 년의 세월 중에 단 몇 년인데 그것도 내주기 싫던가?"

 신랄한 비판이었다. 각선대사를 비롯한 십팔나한승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

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일이었

다.

 오십 년 동안 묻어두었던 자신들의 치부. 그래서 이번 전쟁에도 불참이라

는 선택을 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들의 이런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산은 폭탄선언을 하고 있었

다.

 "이제 와서 양심이 되살아나서 져준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역겨우니까. 그리고 만일 이번에도 지면 세 번이오. 나와 요정대사의 내기

는 이긴 사람의 요구를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것이었소. 내가 이기면 당신

네 소림파를 봉문 시킬 것이오. 영원히."

 백산이 소림사라 하지 않고 소림파라 하였다. 절로 인정하지 않고 무림의

문파로 치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말은 잘 들었소. 우리 소림은 그때의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백살대가 악인이 되었다는 것이오. 붉은 광

기를 휘날리는 악인 말이오."

 각선대사의 조악한 변명이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떻

게 할 것인가. 이제 와서 바로 잡는다한들 누가 인정해 줄 것인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소림만 매장당하고 말 것이다.

 역사는 가진 자의 편이다. 가진 자들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정의가

되는 것이 세상이다. 잘못된 역사일지라도….

 "좋소. 당신들 마음도 알았으니까 시작하자고. 내기 잊지 말고."

 드디어 하북팽가와 천년 소림의 한판 승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백시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미안함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오십 년 전의 백살혈겁에 음모가

개입되었음을 그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가 다시 희생

될 것 같아 동정심이 일었음이다.

 또한 자신감이었다. 소림의 절진인 십팔나한진에서 살아날 수 있는 무림인

은 없다는 자신감.

 "큭! 왜, 나는 소림의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다시 한번 각선대사의 얼굴 색이 붉게 변했다. 지금껏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자들은 다 처리해 놓고,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자

는 살려두려 함이냐는 비웃음이었다.

 "으음! 아미타불! 좋소이다. 진을 펼쳐라!"

 각선대사의 일갈에 의해 십팔나한승들이 백산의 주위로 몸을 날리며 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원리로 만들어진 원진, 십팔나한진을

 구축하며 자신들의 가슴 앞으로 곤(棍)을 세워들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파라밀다 시 조견오온개공도 일체고액(觀自在菩薩 行

深般若波羅密多 時 照見五蘊皆空度 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행할 때 오온이 다 공한 것을 비춰보고

모든 고액을 건네니라.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복여시(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음이라.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십팔나한승의 입에서 일제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선창하는 소리가 나한

전에 울려 퍼지고 그들의 주위로 백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독경(讀經) 소리가 아니었다. 극고한 공력으로 만들어낸 항마후(降魔

吼)가 소림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출(出), 진(陣)!"

 각선대사의 일갈과 함께 십팔 명의 나한승들이 일제히 백산의 주위를 회전

하기 시작했다.

 구구웅!

 기이한 음향과 함께 주변의 대기들이 요동을 치며 빨려 들어가고 진(陣)내

부가 진공상태로 변해갔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소림최고의 신법인 금강부동신법을 펼치며 움직이는 나한승들의 모습은 어

느 순간부터 뿌연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거 굉장한걸?'

 백산이 놀라운 눈으로 십팔나한진을 쳐다보았다. 백팔나한진의 모체라 했

던 불영전륜쇄옥진을 겪어본 그가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십팔나한진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사진(死陣)과 생진(生陣)의 차이. 마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륜나한은 감

정이 없기 때문에 공격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루기가 그만큼 편하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있는 자들이다. 십팔 명이 뿜어내는 기세 속에 자욱한 살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갑자 이상의 공력이면 살기만으로 살상이 가능한

경지가 아니던가.

 백산도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는지 입고 있던 흑의가 팽팽하게 부풀

어오르며 붉은 혈광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을 강기로 덮어버린 것이

다.

 "도는 것이라면 나도 자신 있지."

 백산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이동하는 방향은 십팔나한승들

과 반대 방향인 오른쪽이었다.

 천천히 회전을 하던 붉은 기운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백색과 붉은색의 강기가 서로 엉기며 그곳으로부터 무수한 불똥이 튀어 올

랐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수많은 불꽃들이 허공으로 비상하였다.

 "대마출현(大魔出現)!"

 -대마가 출현하니.

 각선대사의 선창이 울려 퍼지고 나머지 나한승들의 후창이 이어졌다.

 "교화복마(敎化伏摩)!"

 -교화해서 무릎을 꿇게 하리라.

 교화복마란 후창과 함께 십팔나한승이 일제히 권(拳)을 앞으로 내밀었다.

회전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백보신권을 쏟아내는 것이다.

 일정한 상대를 지목하고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진의 중심을 향해서 내지

르는 강기였다.

 "캬악!"

 이미 붉은 강기로 휩싸여있던 백산의 손과 발이, 기묘한 괴성을 실려 사방

팔방으로 움직여 댔고 열 여덟 개의 백색 강기를 차단하고 있었다.

 혈우신보를 익히면서 터득했던 보법과 미세한 기척을 찾아내는 감각이 아

무렇게나 뻗어내는 손과 발에 백보신권의 강기가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대마흉험(大魔凶險)!"

 "교화불가(敎化不可)!"

 -대마가 흉험하니 교화가 불가하네.

 십팔나한승의 항마후가 울려 퍼지며 그들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일반

무림인들 같으면 이미 가루로 부서져 날릴 수 있는 엄청난 힘이었다. 진의

내부로 백색의 강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히 내밀어진 십팔나한승의 장(掌), 수백이나 되어 보이는 보리

옥룡인(菩狸玉龍印)의 수강이 원진 내부를 가득 채웠다.

 "차앗!"

 붉은 강기 덩어리 하나가 그 자리에서 회전을 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양발로는 선풍각을 연거푸 펼치며 하체로 밀려드는 백색의 수인(手印)들을

박살내고, 연신 사방으로 휘둘러 대는 두 손은 상체로 파고드는 강기를 무

력화시켰다.

 "대마근접(大魔近接)!"

 "출항마진(出降魔陣)!"

 -대마가 가까이 왔으니 항마진(降魔陣)을 발동하네.

 출항마진이란 선창과 함께 십팔나한진의 모양이 변했다. 아홉 명의 승려가

 뒤쪽으로 빠지며 두 개의 원진을 형성하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십팔나한승과 백산의 접전을 지켜보고 있던 요인대사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지금 십팔나한승이 펼치고 있는 진식, 소림에서도 거의 펼친 적이

 없는 십팔나한진의 종진(縱陣)이었던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십팔나한진은 소림에서는 초진(初陣)이라 부른다.

 지금껏 십팔나한진이 몇 번 발동한 적은 있었지만 초진만으로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이 갑자 이상의 고수들이 만들어낸, 강기로 채워진 진의 중심

에서, 견딜 수 있는 무림인도 없었고 진이 구축도 되기 전에 그 압력을 견

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설사 견디어낸다 할지라도 진의 중심으로 비처럼 쏟아지는 백보신권과 보

리옥룡인을 누가 견뎌낼 것인가. 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 그런데 저자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정면돌파해서 쳐냈다.

 가공할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십팔나한진의 종진이란 무엇인가. 바로 동귀어진의 진이다.

 십팔명의 나한승들이 하나가 되어 적과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펼치는 죽음

의 진이라는 것이다.

 "일타수지(一打囚地)!"

 "대마위축(大魔萎縮)!"

 -한번의 타격으로 땅을 가두니, 대마가 위축되고.

 웅장한 외침소리와 함께 십팔나한들이 가지고 있던 곤을 앞으로 뻗어내었

다.

 그런데 모양이 이상했다. 안쪽에서 원을 형성한 아홉 명의 나한승들의 곤

은 백산을 향해 있지만 뒤쪽의 원을 형성하던 나한들의 곤은 안쪽에 있는

승려들의 명문혈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격체전공(隔體傳功),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공력을 앞에 있는 나한승에게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

다.

 수천 수만 번의 연습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혈극참(血極慘)!"

 백산의 입에서도 처음으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복수의 대상이 아버지였기

에, 천륜이 사라졌기에 더욱더 깊어졌던 오십 년의 한(恨), 그 한이 만들어

낸 한천팽무도법 일초인 혈극참이 자신을 음모(陰謀) 속으로 몰아넣었던 대

상을 향해서 무차별하게 펼쳐졌다.

 허공에 있던 백산의 도에서 백팔 개의 붉은 도강이 주변의 공간을 찢어발

기며 한을 토해내었다.

 전율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콰콰콰콰 쾅! 쿠앙!

 원형진 내부에서 엄청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오고 혈광과 백광이 사방

으로 비산하며 어우러졌다.

 백산의 흑의가 찢어진 채 가루로 변하여 흩어져 내렸다.

 "이타수천(二打囚天)!"

 "대마복지(大魔伏地)!"

 -이타에 하늘을 가두니, 대마가 머리를 조아리네.

 십팔나한진의 무서움이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계속해서 다음 동

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백산 주위에 여섯 개의 원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는 원진이 아니었다.

 백산을 포위하고 있는 나한승들의 수효는 세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세 명의 뒤로 오명씩의 나한승들이 위치하여 처음과 동일한 방

법으로 격체전공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극폭(血極爆)!"

 혈광의 천지가 생성되었다. 백산 주위의 모든 공간에서 조각 조각 잘려진

도강강기들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백색의 강기를 막아 가는 것이었다.

 처음의 강기 조각이 사라지면 다음 강기 조각이 벽을 형성하며 사방을 향

해서 나아가고 또 다시 그 다음 강기 조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강기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고수

들이다. 혈광과 백광이 부딪치는 여파에 의해서 내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너무나 엄청난 광경에 그것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각선대사였다.

 천년 소림의 역사상 단 한번도 일초 이상을 펼쳐 보인 적이 없다던 십팔나

한진의 종진, 최소 이갑자의 공력을 가진 열 여덟 명이 동귀어진을 각오하

며 펼친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아내고 있다.

 십팔나한승 모두의 입가에도 가느다란 핏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만일 지게되면 소림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 강호무림의 어떤 것보다 우선했던 소림의 법칙, 소림의 역사가 사라지게

됨이다.

 "삼타수천지(三打囚天地)!"

 "대마소멸(大魔消滅)!"

 -삼타에 천지를 가두니 대마가 사라지네.

 굳은 표정의 각선대사의 일갈이 울려 퍼지고 아홉 명이 한 조를 이루며 두

 방위만 점하고 있는 십팔나한승의 입에서 후창이 이어졌다.

 "혈극망(血極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뒤에서 밀려오는 하늘의 기운, 백산의 입에서

도 가느다란 핏줄기가 비치기 시작했고 한천팽무도법의 삼초가 펼쳐졌다.

 중인들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전과 후의 두 방향으로 공

간을 밀어내며 나아가는 붉은 기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두 기세가 부딪쳤는데도 아무런 흔적도 일지 않고 그냥 쓰러져가고 있었다

.

 "으윽!"

 "컥!"

 십팔나한승과 백산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비명소리였다. 백산이 무릎

을 꿇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자라 생각했던 백산이 처음으로 살아있는 인간

을 상대해서 피를 토하며 몸을 땅바닥에 대었던 것이다.

 "좋군, 아주 좋아! 큰소리 칠만도 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백산이 입안 가득 고여있던 피를 뱉어내며 도를

가슴 앞으로 세웠다.

 백산 주위로 미증유의 거력이 밀려들었다. 처음으로 선공을 하고자 함인가

. 사부의 삼초 도법을 하나로 집약시키고도 이름을 짓지 못해 혈극참폭망이

란 이상한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천팽무도법의 사초를 펼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솟구치고자 하는 의

지로 떠오른 게 아니었다. 몸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잠력이 그의 몸을 밀어

올린 것이었다. 잠시 허공에서 정지하고 있던 백산이 전방에 일렬로 서 있

는 십팔나한의 가장 앞쪽의 각선대사를 향해서 일도를 뿌렸다.

 "혈극참폭망!"

 "사타천지번복(四打天地飜覆)!"

 "오! 서방정토(西方淨土)!"

 -사타에 천지가 정화되니, 그곳이 서방정토니라.

 열여덟 명이 하나가 되어 모든 공력을 쏟아내는 십팔나한진의 마지막 절초

와 도강기와 어도술, 심도 등 모든 것이 모함되어 있는 사멸의 기운이 서로

를 빨아먹듯 부딪쳤다.

 기이잉! 구우우!

 기묘한 소리였다. 밖으로 표출되는 광폭함이 아니라 내부에 모든 힘이 간

직된 듯한 무거운 굉음이 주변으로 몰아쳤다.

 "커억!"

 "크윽!"

 백산과 십팔나한승들이 비명과 함께 폭포 같은 피를 쏟아내며 뒤쪽으로 날

아가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양쪽이 모두 엄청난 내상을 입고 쓰러진 것이다.

 "백랑!"

 가장 먼저 백산을 향해 달려간 사람은 여인들이었다.

 "만지지 마라, 아가야!"

 모든 공력을 쏟아낸 여력이 아직도 머물고 있어서 몸을 만지게 되면 무엇

이든지 찢겨져 나가기에 갈태독이 말린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네놈이 이겼다. 대 소림의 무릎을 꿇게 하다니 무림사에 영

원히 남을 일이다, 이놈아.'

 강호에 소문이야 나지 않겠지만 소림의 역사에는 치욕으로 남을 것이 분명

한 사실이다.

 무공으로는 어떤 세력도, 어떤 개인도 정복하지 못했던 소림을 이겨버리고

 말았다. 비록 양패구상이란 결과가 나왔지만 그것은 백산에게만 국한되는

사항이고 소림의 인물들에게야 그렇겠는가.

 그것은 방장인 요인대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현실을 믿을 수 없음이다. 십팔나한의 종진, 소림의

모든 것이고 소림무공의 집대성이다.

 엄청난 신공이란 의미가 아니다.

 일수유(一須臾)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열여덟 명의 공력합체, 그것이 의미

하는 바는 엄청나다. 무수한 연구와 실행을 바탕으로 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이다. 두 사람의 공력을 합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그런데 졌다

.

 양패구상이 아니다. 소림이 지고 말았다. 그러나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하느냐! 빨리 환자들을 옮기지 않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무자 항렬의 제자들에게 호통을 내질

렀다.

 "이놈들아, 그쪽이 아니고 이쪽에 계시는 소사숙을 먼저 모셔야 될 것 아

니냐."

 불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리고 소 사숙이란 말, 백산을 두고 말한 호칭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되바라진 놈이라며 욕을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장사형."

 기절해 있던 요정대사가 정신을 차렸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형인 요인

대사를 쳐다보았다.

 "저 분이 마불사조님의 진전을 이었네. 그러니 자네가 진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무공만 높다고 한 문파의 수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백산을 소사숙이라 칭

하면서 소림의 치욕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있었다.

 소림의 제자끼리 비무를 하다가 패했는데 흠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상대가 사숙임에야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길 수 있는 실력

이 된다 하더라도 져주어야 하는 사문의 존장이 아니던가.

 "그 말이 진정이오니까, 사형?"

 다시 한번 확답을 듣고자 함인지 한껏 밝아진 표정의 요정이 요인대사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그분의 진전을 이은 속가제자일세. 아미타불!"

 진전을 이었는지 안 이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조건 사숙으로 만들

어야 소림이 살기 때문이다.

 "뭣들 하느냐. 빨리 소사숙님과 각선사백님을 모시지 않고."

 요정스님의 호통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결이라도 해서 사문에 지은 죄

를 갚아야 했는데 소사숙이라 한다. 당연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소사숙이 자신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기를 했다고 치부하고 말았다. 기절

해 있었기에 천하제일도란 말을 듣지 못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

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석숭과 서문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비무 전까지의 소림이 보여주었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앞뒤가 맞지 않았

기 때문이다.

 언제는 소림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기를 뿌려대더니 느닷없이 사숙이

라 칭하며 극진히 모시고 있질 않는가.

 "아니? 나는 백산이 마불성승의 임종을 지켰다는 말밖에 안 했네."

 "네? 큭큭큭! 소림이 똥줄이 탔군요."

 석숭과 서문천이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영면을 지켰다고 사

문의 존장으로 모신다면 수백 수천의 사숙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사문의 존장의 한 사람이 탁발을 나갔다가 저자거리 같은 곳에

서 열반에 들었다면 그 저잣거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소림사의 존장이 된다

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 그런 경우를 보고 있으니 소림의 다급한 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음이다.

 "따지고 보면 소사숙이 맞지 않습니까."

 마불성승의 모든 진전을 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광견조에게 가르쳤던 무공

들이 바로 소림의 무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었다.

*     *     *

 "안 한다니까."

 다음날 정신을 차린 백산 앞에 황당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장인 요인대사와 요정대사가 들어와서는 소사숙께 무례해서 죄송하다며

사죄를 하는 것이었다.

 백산이 놀란 것은 불문가지, 마불신승을 만났고 소림 무공과 무상대법력이

라는 불력을 받기는 했지만 결코 사부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

숙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부를 음모에 빠트린 자들이었고 그 단죄를 하기 위해서 소림을

방문했던 것이다. 마불신승을 만나고 나서 소림에 대한 단죄의 강도가 좀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소림을 날려버릴 요량으로 광견조에게 광천뢰

까지 가지고 들어오게 했었다.

 "소사숙 우리 소림을 존장도 몰라보는 그런 곳으로 만드시려 하십니까, 이

곳을 방문하는 모든 불자들에게 웃어른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소사숙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세상이 비웃을 것입니다."

 필사적이었다. 설마 방장보다 더 높은 배분으로 모신다는데 거절하리라고

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백산아. 그냥 수락해라. 그들을 깨트린 것으로 되었다. 네놈의 사부도 그

것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곳의 사숙이 되었다.'

 갈태독의 전음이었다. 그도 이미 백산이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에 더군다나 사부를 망친 원수들이 아닌가. 그러

나 오십 년,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묻어둘 수 있는 상황이면 묻어야 되

는 것이다.

 '엥? 영감도 사숙이 되었다고? 사숙이 되면 뭐가 좋은데. 아무 것도 없잖

아.'

 '이놈아 공짜로 밥 먹을 곳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거면 되지 뭘 더 바라냐

?'

 이제는 갈태독도 거의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소림의 사숙 자리하고 한끼

밥하고 동급으로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밥을 공짜로 얻어먹는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그냥 수락할까?'

 "소사숙이 된다해서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나가다 제자

들이 인사하는 것만 받아주시면 됩니다. 그것도 싫으시면 인사를 안 받으셔

도 상관없고요."

 소림의 제자로서 해야할 의무를 지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윗사람으로 대우

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호, 그래요?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소사숙. 아무 것도, 전혀 아무 것도…."

 백산이 솔깃하는 표정을 보이자 요인스님이 '아무 것도' 라는 말을 강조하

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아마도 소림이 생긴 이래로 처음일 것이다. 이제 서른도 안 된 청년을, 그

것도 속인을 사문의 존장으로 모시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경우는.

 그러나 초조한 심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산이 또다시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일단 내기는 마무리 짓고 생각해 봅시다."

 "네? 헉!"

 요인과 요정스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비무 전에 했던 내기 세 번의

 승부 중에 백산이 두 번 이기고 한번은 양패구상, 결국 한번도 지지 않았

던 백산의 승리였다.

 그리고 백산이 비무 중에 내뱉었던 말, 자신이 이기면 소림의 문을 닫게

하겠다 했었다.

 비록 방장이 직접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일반승려도 아니고 십팔나한승의 수

좌가 요정스님이다 보니 그의 약속의 곧 소림의 약속이나 진배없다. 이래서

 약속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다. 더구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

욱 함부로 약속을 남발하면 안 된다.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만 해야하고

 자신에게 손해나지 않을 정도만 해야 세상살이가 편하다.

 부처님도 한가지 약속을 하셨다. 불심으로 정진하다 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엄청난 발언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얼마의 세월동안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시간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이다

.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평생동안 믿고 따랐는데 왜 나는 부처

가 되지 못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다.

 요정대사가 홧김에 한 약속,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곳에 몸에 좋은 보약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은근한 표정으로 백산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딱히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

리는 아닌, 그냥 지나가는 투로 하는 말처럼 들렸다.

 드디어 백산의 본색이 드러났다. 분명 갈태독의 말에 수긍을 했음에도 내

기 운운한 것은 무엇인가 얻을 게 있다는 소리였다.

 "예?"

 두 노승의 얼굴이 일순 멍하게 변했다. 몸에 좋은 것이라니, 풀만 뜯어 먹

고사는 중들에게 보약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소리인지 도대체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순간 요인스님의 눈이 빛났다.

 "소사숙. 혹시 이만하게 생겼습니까?"

 자신의 새끼손톱을 내보이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아닌데? 내가 듣기에는 밤톨만하게 생겼다고 하던데. 먹으면 힘이 솟는다

는 말도 들었고…."

 백산이 의도하는 바가 드러났다. 소림에 보약은 없어도 영약은 있다. 바로

 대환단과 소환단이 그것이다.

 요정대사가 말한 새끼손톱 만한 것은 소환단이고 백산이 말한 밤톨만한 것

은 대환단이다.

 대환단(大還丹).

 소림의 영약이 아니라 무림의 영약이고 무림인라면 목숨걸고 취하기를 원

하는 보물이다.

 그것을 복용하고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 갑자의 공력을 얻

게되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인 것이다.

 "아쉬운 대로 세 개만 있으면 되겠소."

 "헉!"

 방장인 요인스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환단을 동네 의원에

있는 단순한 소화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

이다.

 대환단.

 단순히 신약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약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희

귀한 약재들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거기에다 삼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진 무

공의 고수가 십 년 동안을 연단해야 간신히 한 개의 단을 얻을 수 있다. 불

로 다스려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이용해서만 연단이 가능하다는 것

이다.

 즉 대환단은 약이 아니라 한마디로 내단(內丹)이란 소리다. 수천 년을 살

아온 영물들이 몸 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내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대환단이다.

 아무리 소림이 대 문파라고 하지만 삼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진 자가 얼마

나 있을 것이며 설혹 있다하더라도 십 년을 하루같이 내공을 쏟아 부어 연

단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자신이 먹을 것도 아닌데….

 그런 대환단을 세 개나 달라하고 있다.

 "뭐 싫음 말고. 이건 안 하려 했는데 그럼 오늘부터 소림사는…."

 "드리겠습니다, 소사숙.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것 없습니다. 그 아까운 것을 일부러 주실 필요가… 꼭 제

가 강탈하는 것 같지 않소."

 정말 그럴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소사숙. 중에게 보약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발 받아주

십시오. 저희들의 성의입니다."

 이제는 받아달라며 손까지 비비고 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 처음엔 백산

이 달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제발 받아달라 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받아달라고 사정을 하니 받을 수밖에

. 근데 말이요 손톱 만한 보약도 있다며?"

 "알겠습니다, 소사숙."

 요인대사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대환단 세 개에 이제는 소환단까지

 달라는 것이 아닌가. 아예 소림의 뿌리를 뽑아가겠다는 심보가 아니면 저

럴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환단까지 주기로 했는데 그깟 소환단이 무슨 대수랴, 그러나 온

몸에서 열이 나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더운 모양이오이다. 머리에 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니. 혹시 스님도 매운

것 드셨소? 너무 매운 것은 몸에 안 좋소이다.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죠."

 그날 소림 방장실의 모든 집기가 부서지며 그 속에서 흘러나온 포효소리에

 시중들던 사미승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개차반 같은 놈!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방장은 안 해, 아니 중이 안 될

거야…."

 고고한 소림 방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개차반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

신들의 처소에 돌아와서 갈태독을 만나고 있었다.

 "영감! 이거."

 "뭐냐?"

 "영감 주는 게 아니고 천영누님 보약이니까 알아서 좀 먹여주시오. 나머지

 두 개는 소운하고 추렴이 애 가질 때 쓰고."

 백산이 갈태독에게 내밀고 있는 것, 바로 소림에서 강탈한 대환단과 소환

단이었다.

 백산에게 사숙자리를 수락하라는 전음만 남기고 그곳을 떠나왔기에 갈태독

도 그 후의 진행 사항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보약이라며 내놓은 약이 엄청

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대환단과 소환단?"

 주변에 있던 일행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대환단이라니, 소림의 무

공보다 더 유명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한 조각도 아니고 세 개를 가져왔

다.

 "너 이것 때문에 시비를 걸었지. 사부 어쩌고 하는 것은 핑계고."

 갈태독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이곳 소림을 방문하기 전

에 석숭에게 소림에서 유명한 것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는 백산이란 놈의 성격은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는데 시비를

걸 놈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 놈이 일부러 나서서 시비를 걸고 내기 비무까지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제가 좋아하는 돈이 있는 곳도 아닌데…이제서야

그 이유가 드러난 것이다.

 조천영의 몸이 좋지 않다는 갈태독의 말에 대환단이라는 약을 구하기 위해

서 비무를 벌인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은 대환단이란 영약을 얻기 위함이고

사부의 복수는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마누라가 셋이니 하나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서 두 개를 더 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요인방장의 약부터 만들어야겠다. 이 도둑놈아! …그래도 잘했다."

 "큭큭! 크크크! 푸핫핫핫!"

 소림의 대환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였다. 백산이 대환단

을 강탈할 때의 상황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소사숙 자리는 수락했는가?"

 "석 대인이 보기에는 어떻소. 그들이 귀찮은 일은 전혀 없을 거라 하던데

정말 그럴 것 같소? 그리고 약효 확인도 못했는데…."

 자못 심각한 백산의 얼굴을 쳐다보던 일행은 더이상 할 말을 잊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음에 아예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환단까지 받

아놓고 약효 확인을 해야만 한다고 했으니 방장인 요인스님이 불쌍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요인대사에게 좀 다녀오마, 아무래도 소림방장의 병부터 고쳐주고 와

야겠다."

 "아참! 지금껏 이야기 못했는데 광천마불 그놈 처리해 준 값은 깍아준다고

하쇼."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갈태독이 서둘러서 나가고 말았다. 백오

십이란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같이 웃고 있기가 민망해진 것이었다.

 어찌되었던 갈태독이 도착한 방장실에서는 서러운 통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는 후문이 있었고 백산은 밥만 축내는 소림의 존장이 되었다.

 그러나 천년 소림의 명예와 대환단 세 알과 맞교환 이었으니 소림으로 볼

때 그리 손해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백산이 소림의 소사숙이 된 바람에 지위가 상승한 광견조의 소살우가 다음

대의 십팔나한 후보들을 굴린 것은 불문가지였고, 백보신권과 용왕유권을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얼마나 심하게 다뤘는지 거의 삼일정도를 몸져눕게

하고 말았다한다.

 백산에게 당해본 사람은 안다. 광견조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 고

생을 했던 동지들이 밤마다 모여서 다음날 굴릴 계획을 세웠고 소살우는 그

대로 시행을 했으니….

*     *     *

 "어서 오시게, 사제! 혼자 왔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사형."

 현역에서 은퇴한 노승들이 기거하고 있는 계지원(戒持院)의 양심당(養心堂

), 갈태독의 방문지였다.

 어쩌다 자신에게 사형이 되어버린 천무맹의 십일 대 맹주였고 마불신승의

제자인 각인대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방장인 요인스님과 같이 방문을 했

던 거였다.

 두 사람만 온 이유는 백산이 귀찮다며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소사숙의 얼굴을 소림의 제자들이 모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소림의 이곳저

곳을 돌아다니며 소림제자들의 인사 받는 것은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요정

스님을 소 몰듯 끌고 다니던 놈이, 윗분에게 인사하러 가야한다 했더니 소

사숙이 될 때 조건이었던 귀찮은 일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숙님. 급한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요인대사가 얼굴을 붉히며 각인대사를 향해 변명을 했다.

 "허허! 젊은이들은 이런 예의를 싫어하지 않은가. 예의범절은 우리 늙은이

들의 몫이네 방장."

 아무런 사심이 들어있지 않은 투명한 목소리였다. 백여 년 이상을 불심에

정진한 노승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너무나 깨끗해서 잡티하나 없을 것 같

은 청정한 음성.

 "요몽아 인사하거라. 너에게는 사숙이 된다."

 다반을 들고 들어왔던 오십대의 스님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헤헤!"

 "이 녀석은 거의 백치라네. 자네가 이해하게."

 각인스님의 얼굴에 쓸쓸함이 어렸다. 천무맹의 맹주라는 영광된 자리까지

올랐지만 제자들은 그 영광을 따라주지 못했다. 첫째 제자는 거의 백치수준

이었고 소림의 역사 이래로 가장 똑똑했던 요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림

의 이단아가 되어버렸다.

 "이 녀석은 원래 이렇지 않았네 .충격 때문에 이리 된 것이네. 병을 고치

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안 되더군. 그래서 하는 소리네만 떠날 때

이 녀석을 데리고 가주게. 이제 와서 병이 고쳐질 리도 없겠지만 자네가 의

원 아닌가.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아진다면 앞으로 살아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고…."

 "적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적적하다고 이놈을 계속 잡아두었다가 내가 죽고 나면 어찌 할건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데."

 "사숙님!"

 "내 방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내가 살아있을 때만 하겠소."

 제자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바

라는 각인스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갈태독도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

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사형."

 "사부님과 마료사백께서는 편안한 열반을 하셨는가?"

 짐을 덜어서인가 이제서야 사부의 근황을 묻고 있었다.

 "네, 편안하게 영면에 드셨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가 없었다. 유형마지에서 백년간이나 괴물로 살다가

열반했다는 말을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자신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곳에 사셨다는 말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전

부였다.

 이미 가신 분들의 고통을 들추어내서 남아있는 자들까지 힘들고 괴롭게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 이후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거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소사숙!"

 백산일행의 소림 방문이 막을 내렸다.

 마차와 함께 멀어지던 일행을 바라보던 요인대사가 사제인 요정스님을 향

해 녹옥불장을 들어올렸다.

 "요정은 듣거라."

 "예! 제자 요정 명을 받드옵니다."

 "소림의 구석구석에 소금을 뿌려라. 지금 즉시 시행하라."

 녹옥불장의 권위를 가지고 내린 명이 잡귀를 쫓을 때 사용하는 소금 뿌리

기였다.

 그 비싼 소금을 구석구석 뿌리라 하면서도 요인대사의 얼굴은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빨리 뿌리지 않으면 다시 재앙덩어리가 돌아올 것 같아하는

 표정이었다.

 거의 한 달여 이상을 소림에 안주하며 편안한 나날을 보냈던 백산 일행과

달리 강호무림에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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