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인생(人生)
낙양으로부터 퍼져나간 소문이 또 한번 중원을 흔들었다.
천하제일가라고 까지 불리던 낙양 설가장의 멸망, 설가장에 남아있던 모든
무인들이 몰살당하고 하인들만 살아서 설가장을 떠났다고 알려진 것이다.
관군에 의해서 멸문을 당했다고 하였기에 강호인들은 더욱 궁금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금의위까지 동원되어 설가장을 멸망시켰단
말인가.
점점 멸문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강호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설가장 소장주였던 설가치룡 설태만의 군관 살해와 그 사실을 은닉하기 위
해 힘없는 사람을 협박하여, 만상투인루로 보내서 설태만으로 죽게 한 죄,
이런 죄상들이 밝혀지면서 금의위 영반의 일갈(一喝)이 강호 무림을 질타했
다.
"대명의 군관을 살해한 살인자, 설태만을 은닉하고, 다른 사람으로 꾸며
황실을 기만했던 자들의 수좌가 그의 아비인 설검후다. 황실에 죄를 지은
설검후을 돕는 자는 신분여하를 불문하고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금의위 영반의 일갈에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설검후가 부맹주로 있는 천
무맹이었다.
천마맹과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천마맹과 일전을 결하기도 전
에 멸망으로 갈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무리 무림의 최대세력이니 어쩌니 해도 그들은 평민일 뿐이다. 관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자들이란
말이다.
평민이 군관을 살해했다하면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되는 사항
이 아니던가.
"으음!"
뇌음천자 설검후의 침음성이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집무실인 무천
각으로 돌아와 방금 전 맹주와의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부맹주를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천무맹이 아
무리 강해도 황실에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황실의 사자가 오기 전에 떠나
지 않으면 부맹주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이곳이 멸망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후일을 도모하시고 무천각주 자리를 제 아들에게 넘겨주시오. 반드
시 설가의 재건을 약속하겠소."
결국은 맹주인 화진악도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피와 땀이 어린 곳이라
했지만 그가 맹주로 있는 천무맹을 보존하기 위해 떠나라는 말을 하고 있음
이다.
부맹주라 칭한 것도 마지막일 게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따르고 있는
무천각의 세력뿐이다. 그동안 천무맹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던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더이상 천무맹에서는 비빌 데가 없어졌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그를 걱정해 주는 이들은 무천각을 구성하고 있는 세가들뿐이었다.
서로 나서서 은신처를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자식 농사는 실패했지만 주변에선 인망은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한 그들의 입장이라며 전달해 온 사안이 다른 각의 휘하로 들어가느니
각 세가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다른 각의 휘하에서 전쟁의 희생양이 되기는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무천각의 모든 세가들은 자신이 새로운 각주를 추대하면 그를 따르겠
다는 뜻을 피력해온 것이다.
"부맹주님! 제갈군사가 청하셨습니다."
시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소린가? 무천각을 자네에게 맡기라니."
천밀각이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정자 위, 일부러 이곳을 택했는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제갈수연이 은밀하게 무천각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맹주님도 부맹주님을 돕지 못합니다. 대명황실의 최고 권력자인
금의위 영반의 포고문입니다. 그것은 황제의 어명과 같습니다. 아무리 조정
에 연줄이 있다 해도 번복될 수 없습니다."
금의위 영반의 힘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다. 명나라의 모든 관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에 그에게 나온 말은 어명과 동일하게 취급되어진
다. 그런 사람이 설검후를 죄인으로 지목했다 함은 밝은 하늘아래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어먹을!"
제갈수연의 말이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미 맹주도 만나보았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누가 감히 대명황실에 대항한단 말인가. 모
든 기반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만남일 뿐이었다.
아마도 천무맹에 있는 모든 인물들은 자신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랄 것이다
.
"맹주님도 하신 약속은 설가장의 재건이겠죠? 저는 거기에다 하나를 더 추
가시켜 드리겠습니다. 바로 설가장을 멸망시킨 흉수의 정체. 이 정도면 거
래가 성사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백산 일행이 자신들의 드러남을 막기 위해서 군병
속에 있었는데도 제갈수연은 흉수의 정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금의위가 다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결과야, 명 황실의 금의위가 관련되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될 리
가 없지 않습니까."
제갈수연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거의 구 개월이 지났는
데 이제 와서 금의위가 조사를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고 더군
다나 한 달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모든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을 밝혀냈
다 함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은 금의위의 조사과정이 설가의 이목에 노출되지 않았
다는 것이다.
낙양에서 이것저것 캐고 다녔으면 분명 설가의 이목에 걸려들었어야 한다.
낙양내에서는 개방도 따르지 못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설가장 아니
던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을 보시죠."
제갈수연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 바로 석두가 설가장에 보냈던 두 장의
서찰이었다.
모든 가솔들이 빠져나간 후 제갈수연의 밀정들이 그곳을 수색하여 찾아낸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일이 시작되었단 말이요?"
그러나 제갈수연은 아무 말 없이 설검후만 쳐다보고 있다.
지금부터는 무천각주 자리를 놓고 흥정을 하자는 뜻인 게다.
"부맹주님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과거에 우리 제갈세가가 무슨 나쁜 짓을
했죠? 죄라면 일개 무림세가들이 강호를 제패했다는 것이겠죠. 구파일방은
몰라도 무천각은 저의 집안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설검후가 제갈수연이 하는 말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니던가. 무림세가의 구성원인 무천각을
등에 업고 강호 최고가 되어보는 것. 무림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십 년
전, 오천맹의 시대가 가장 전성기였다 할 수 있다.
제갈수연의 말처럼 구파일방은 오대세가를 욕할지언정 자신들은 그래선 안
된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했고, 할 수만 있다면 또 다시 그런 시대를 만들고
싶은 것이 무천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가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물론
마음속의 생각일 뿐이지만.
"하지만 군사가 무천각주가 된다면 반발이 심할 텐데?"
아무리 천무맹의 군사직을 맡고는 있다지만 이제 갓 스물이 넘긴, 그것도
여자를 상관으로 모시려는 무인들은 없을 것이다. 자존심을 먹고사는 무인
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가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조부님이 맡게 되실 겁니다."
"천기신뇌 그분이 말이요?"
현재 자신의 처지도 잊었는지 설검후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천기신
뇌 제갈장령이라 했다. 오십 년 전 오천맹의 수뇌였던 그가 천무맹의 무천
각주로 새로이 나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가장의 멸망이라는 소식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는 제
갈수연의 치밀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오천맹이 괜히 강호를 제패했던 게 아니었다. 천기신뇌라면 무천각을
구성하고 있는 세가들을 설득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가 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맹주나 십천각에서 인정하리라 보오?"
무천각주의 선임은 무천각의 고유권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 아니던가.
"부맹주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소 평가하고 계시는 군요. 부맹주님
의 한마디면 무천각의 모든 세가들이 보따리를 쌀 것이라는 건 천무맹 내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맹주인 화진악도 설검후를 설득하기 위해서 가
장먼저 그를 청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전쟁 중이고 만일 무천각이 천무맹에
서 탈퇴한다면 천무맹 전력 삼 할의 손실을 의미한다.
그렇게되면 팔파의 가세로 해서 간신히 잡았던 승기가 천마맹 쪽으로 기울
어짐을 의미한다. 맹주나 팔파도 결코 바라는 결과가 아니다. 결국은 설검
후의 말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좋소. 그리 하겠소. 이제 우리 설가장을 그렇게 만든 놈들의 이야기를 듣
고 싶소."
결국 설검후도 제갈수연에게 자신의 모든 기반을 넘기고 말았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맹주나 제갈수연이나 자신의 가문을 재건시켜준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런 말을 믿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어느 누가 망해버린 가문을 다시 일으
켜 세워주겠는가.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해주지 않는 것이 강호상의
법칙이다.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한다 해도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것도 살아 있을 때의 일이지 않겠는가.
이젠 설가장도 설검후도 모두 사라졌음이다. 남은 것은 아들을 죽이고 자
신을 몰락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뿐이다. 그 단서를 쥐고 있는 사람이 제갈
수연인 것이다.
"나라에 죄를 짓고 가문이 멸망하게 되면 그에 속한 모든 재산이 황실에
귀속된다는 것은 부맹주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설가장의 모든
재산은 나라에 귀속된 것이 아니고 구룡전장이란 전장에 저당 잡혀 있었습
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럼 내 아들과 총관이 그 서찰에 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했단
말이요?"
제갈수연에게 묻고는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눈밖에 난 아들이었고 자신 몰래 일을 처리하고자 했
을 것이다.
"아드님이 실성을 하고 낙양거리를 헤매다가 관에 체포된 것은 아시죠? 아
무리 가문이 멸망되었다고 실성할 정도로 그렇게 나약했습니까?"
"그럴 놈이 아니지, 같이 싸우다 죽었으면 죽었지 실성할 녀석은 아니야,
하면?"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하지만 설태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자신을 막는다고 대명의 군관마저 살해한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 강심장을
가진 놈이 실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결국 금의위를 체포되기 전에 이미 실성을 했고, 그의 죄상을 밝히기 위
해서 바로 체포하지 않은 거죠. 아울러 부맹주의 죄상까지도 말입니다. 본
인이 설태만이라고 떠들고 다녔을 테니까요."
설검후의 움켜진 두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아무리 눈에 차지는 않았
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다.
그런 아들이 헤헤거리며 낙양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왔다.
"아드님은 도박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구룡전장에서 빌린 돈을 다 잃었고,
그 돈을 찾기 위해서 도박장을 급습했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멍청한 놈. 아비를… 아비에게 왜 말을 안 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
해 줄 수 있는데 왜."
급기야 설검후가 오열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랑 한번 주지 못했고 언제나
나무라기만 했던 자식이 죽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들, 의논 상대가 되었던들 이런 일
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도박장을 열었던 놈들은 누구요?"
그도 제갈수연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식을 노리고 도박
을 했던 놈들이 원흉일 것이다.
"우리가 주시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천장지옥마가 있고,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있는 그 일행."
"무슨 근거로?"
이제는 활활 타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이유를 알고자 함인가. 무시무시
한 살기를 담은 눈으로 제갈수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건의 시작은 낙천수사 표운이라는 하찮은 무사에서 시작되었죠. 패
검 구자인의 말대로 만상투인루에서 찾아오겠다 했던 그 친구가 찾아온 것
이고요. 바로 우리가 쫓고 있던 그 일행과 같이요. 최근에 낙양으로 들어온
무림인들 중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그들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고맙소."
설검후의 얼굴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타서 재가 되었
는지 두 눈에서 쏟아지는 살기만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부맹주님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인데 말입니다. 낙양으로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지금 그곳은 금의위 천지입니다. 그들에게 접근도 해보기 전에
죽습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앞으로 제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쯤 황실에서 사자가 올 것 같으니 오늘 밤 떠나시고요. 물론 그전에 무
천각을 이양해주셔야 겠죠."
과연 천무맹의 머리이고 군사였다. 협박 서찰 하나와 구룡전장에 저당 잡
힌 것을 가지고 그곳의 상황을 모두 유추해내고 있었다.
또한 가슴이 타서 재가 되고있는 설검후를 향해서 무천각주 자리를 이양하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냉철한 여자이기도 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떠날 준비를 한다며 설검후가 자신의 숙소
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제갈수연은 흐뭇한 표정으로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들 덕에 뜻밖의 수확을 얻었군. 이제는 새로 쌓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쌓아진 탑을 우리의 소유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갚아 줄 것이다. 우
리 가문을 우롱했던 너희들에게 제갈세가의 원한을….'
백산과 석숭이 벌인 설가장의 멸망은 제갈세가를 한 단계 더 비약할 수 있
게 해 주었고 개방의 부제와 무천각의 장악은 제갈세가가 천무맹 내의 새로
운 강자로 나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 가문을 일어서게 해준 대가로 하남성에서는 편하게 해 주었으니 빚
을 갚았네요.'
아마 설검후를 낙양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준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백산 일행이 가장 한가해 하는 곳이 아마도 하남성일 것이다.
이곳은 천무맹의 터전, 천마맹에서는 공격할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천무맹에서는 그들을 두고 보기로만 했고 제갈수연이 설검후까지
막아 놓았으니 그들을 공격할 단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 * *
낙양이 금의위 천지라는 제갈수연의 말대로 석숭과 금의위는 설가장의 잔
당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온 낙양성내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단순하게 설가장의 잔여인원을 수색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과하다 싶을 정
도로 세밀하게 수색을 했던 것이다.
"그놈들의 근거지가 이곳이오?"
모처럼 만에 시간을 낸 석숭과 백산 일행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금의위가 찾는 자들이 설가장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석숭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흑객들의 근거지가 이곳이라 보고 있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신분을 숨기고 살기에는 이곳 만한 곳이 없지."
독안랑의 대답이었다. 천무맹이 코앞에 있고 설가장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낙양. 환히 드러나는 곳 같지만 또한 숨기에는 가장 안전한 곳인지도
모른다. 설마 이런 곳에 자리잡고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
이기 때문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일세."
그들이 너무 빠른 시간에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천사맹의 사사대가 전
멸한 후에야 청부가 들어갔을 터인데 일행이 구화산에 도착했을 때 곧바로
암습을 시도했다.
즉 구화산과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구화산 근처에서는 가장 은신하기 좋은 곳은 이곳 낙양이 아
니던가.
"나는 나가보겠소. 선약이 있어서 말이오."
모처럼 만에 접한 한가한 시간이었기에 세 명이나 되는 부인들과 같이 낙
양성내를 구경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캬! 좋다."
백산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낙양 성내를 돌고 다녔으나 별반 볼
것도 없어서 이번에는 용문석굴로 방향을 잡았다.
대동의 운강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원 삼대석굴로 이름난 용문석굴
(龍門石屈)답게 그 웅장함은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하였다.
각각 향산과 용문산이라 불리는 양쪽 벼랑에는 천 삼백여 개의 동굴과 십
만여 개의 불상 그리고 사십여 개의 불탑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저절로
불심이 돋게 하는 그런 곳이다.
뇌룡현을 떠난 이후 거의 여유가 없었던 여인네들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
나질 않았다.
어디에다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신부감들이 어쩌다 생긴 것도 없
고 머리에 든 것도 없는 촌놈을 사랑하게 되어, 그의 얼굴만 바라보는 해바
라기가 되었는지.
어떤 매력이 있어서 그리 되었나하고 생각해보아도 특별한 구석이 없다.
"미안해. 누님도 추렴이도 소운도, 이런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어도 고것
이 참 어렵네?"
바로 이런 모습이다. 특별한 야망이니 뭐니 하는 것 없이 현재의 평범한
생활만을 원하는 백산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조그마한 터전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살고 싶어하
는 그러한 백산의 생각이 그녀들의 발목을 묶어버렸다.
여인네들, 특히 사랑하는 남자를 가진 여인네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 특별한 것이 없다.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
는 것, 그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던가. 어쩌면 가장 쉽고 단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남자들이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
백산이 일행을 끌고 간 곳은 용문석굴에 있는 불상이나 탑 모양 등을 호신
부처럼 만들어서 팔고 있는 작은 상가였다.
"골라봐!"
백산의 말에 이것저것을 쳐다보던 냉추렴이 무엇인가를 골랐는지 백산을
향해서 배시시 웃었다.
아찔한 미소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넋을 잃고 냉추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쿠! 다시 복면을 씌우던지 해야지. 웃을 때마다 쏠려서 이거 원.'
마중제일화라 불리는 냉추렴의 미소, 그녀의 미소만 보고있으면 자신도 모
르게 다리가 풀리고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 굳어지는 백산이었다.
"에게. 겨우 이거?"
미소를 띠고 있던 냉추렴이 들고 있는 물건, 조천영과 소운의 손에 끼워져
있는 옥가락지와 같은 종류의 싸구려 반지였다.
"백랑이 하나 골라 줘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가장 잘 안다고 냉추렴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두
사람이 차고 있던 옥반지임을 이내 알아본 조천영이 백산에게 조용히 속삭
였다.
"내가 따로 골라 줄게. 그것 도로 내려놔."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드는데…."
냉추렴이 골라 든 옥반지는 조천영이 끼고 있는 반지와 가장 유사했다. 그
래서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도로 내려놓고 있었으나 자신이 골랐던 반
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수많은 옥반지 속을 한참동안을 뒤지던 백산이 마음에 드는 게 있었던지
반지를 하나 골라 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 줘봐. 반지는 말이야 서방님이 골라 주는 거야."
기껏 찾아낸 것이 냉추렴이 내려놓았던 반지를 다시 골라서는 그녀의 약지
에 끼워주고 있었다.
다시 냉추렴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흔하디 흔한 싸구려 반지였지만
사랑하는 님이 골라 준 것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어 보였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반지가 부럽지 않았다.
"웃지마!"
다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냉추렴을 향해서 백산이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
"저… 손님들 혹시 네 분이…."
"예, 맞소. 부부요."
그들의 모양새를 보고있던 상점 주인이 일행을 향해서 더듬거리자 백산의
얼굴이 순식간에 자랑스럽게 바뀌며 큰소리로 대답을 한다.
상점 주인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어렸다. 설마 이런 놈이 여자를 셋씩
이나 부인으로 데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장사치는 장사치,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담으며 은근슬쩍 일행에
게 칭찬의 말을 건넨다. 일행이라기보다는 백산에게 한 말이리라.
네 사람의 얼굴로 보았을 때 가장 땡 잡은 사람은 얼굴에 흉터를 간직하고
있는 남자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상점주인으로서 또는 한 남자로서 그의 관점으로는 저 정도의 얼굴이면 정
말 운이 좋아야 장가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셋이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녀석을 보고 환한 미소
를 짓고 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일 것이다
.
"그렇습니까, 정말 어울리십니다, 그려. 우리 집에 희한한 물건이 하나 있
는데 보시겠소. 이 세상에 네 개밖에 없는 물건인데."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말이 안 되는 소리도 해야 밥을 먹고
살수 있으니 손님이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뭔데 그러쇼?"
"다른 게 아니고 이것인데."
상점주인이 내놓은 것은 붉은색이 감도는 가느다란 반지 네 개였다.
주인의 말로는 우는 반지라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끼고 손을 가져다
대면 조그마하게 울음소리가 난다해서 애명환(愛鳴環)이라 불린다고 한다.
호기심이 발한 백산일행이 애명환이란 반지를 각자의 손가락에 끼고 서로
에게 가져다 대자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라랑! 사라랑!
나직한 소리였지만 네 사람의 귀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울지 않는다오."
결정적인 소리였다. 상점주인의 마지막 한마디에 소운이 백산을 믿을 수
없다며 우기는 바람에 결국 은자 두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고 말았다.
"오라버니 이리 대봐!"
반지가 신기한지 소운이 계속해서 백산과 자신의 손을 대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네 사람의 귀가에 다시 한번 선명하게 들려오는
상점주인의 목소리.
"두 사람 연인이오? 그럼 나에게 아주 좋은 게 있는데, 세상에 딱 두 개밖
에 없는 건데 애명환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끼고…."
"큭! 킥!"
순간 네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사치에게 속았던
거였다.
그러나 기분 좋은 속임수였다.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서로 가져
다 대면 소리가 나는 신기한 반지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소리가 난
다고 믿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마 상인도 그것을 노리고 거금을 받고 팔았는지도 모른다.
네 사람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불공도 드리고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부처님 저는 딱 세 가지만 빌게요. 첫째는 우리 네 사람이 영원히 헤어지
지 말고 행복하게 해 주시고요, 그 다음은 언니가 가진 아기가 건강하게 태
어나게 해 주시고, 마지막은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저도 아기를 갖
게 해 주세요.'
"소운. 너 뭘 그렇게 오래 비는데?"
한참 동안을 불상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소운의 모양새가 궁금했는지 백산
이 귀엣말로 살짝 물었다.
"음…! 딱 세 가지."
"뭐? 세 가지나? 부처가 얼마나 바쁜데 세 가지씩이나 바라냐?"
"그래도 내 소원은 들어줄 거야. 설마 가장 불쌍한 거지의 부탁인데 안 들
어주려고."
자신이 빌었던 세 번째 소원을 생각했음인지 혀를 쏙 내밀고 말하는 소운
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너 뭘 빌었기에 얼굴이 붉어지냐? 혹시 내 털 보여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
?"
용지에서 소운이 궁싯거린 것을 들었는지 그것을 가지고 백산이 놀려댔다.
"오라버니!"
소운의 얼굴이 붉은 꽃이 피었다. 백산의 농담이 그녀의 마음속을 그대로
찔렀던 것이다.
"정말로 그것을 빌었어? 정말!"
"언니들! 몰라!"
조천영과 냉추렴도 덩달아서 소운을 놀리고 나서자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어찌되었던 즐거운 하루임에는 틀림없었다.
"재미있게 놀았나 보네?"
환한 표정으로 객잔을 들어서는 네 사람을 맞이하면서 석숭이 하는 말이었
다.
"석 대인 이것 좀 보실래요?"
소운이 재빨리 자신들의 손에 끼워져 있는 붉은색 반지에 대해 상점 주인
에게 들었던 말을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제 딴에는 너무 신기한 모양이
었다. 더구나 처음 백산에게 받은 선물이 아닌가.
"맞네, 구 소저. 그 반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끼고 있을 때만 소리
가 나는 반지네."
석숭도 저 반지를 만든 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저 네 개의 반지
는 한 조각의 돌로 만들었을 것이다.
홍명석(紅鳴石), 붉은색의 돌로 같은 조각을 둘로 분리해서 서로 가까이
대면 묘한 음향이 흘러나오는 흔하지 않은 광물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가지고 저리 좋아하는 모양을 보고 있으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이란 저런 모습이리라. 굳이 수많은 금은 보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돌덩어리로 만든 반지이지만 그 반지에 서로간의 의미만 부여한다
면 금강석보다 더 소중한 보석이 되는 것이다.
* * *
"오라버니 언니가 이것 가져다주래요."
거의 삼경이 다 된 시간에 소운이 간단한 주안상을 가지고 백산의 방을 들
어섰다.
아마도 오기 전에 목욕까지 했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과 촉촉한 머리, 또한
무엇인가 잔뜩 겁에 질려있는 것 같은 커다란 눈은 묘한 욕념을 자극하게
하고 있었다.
조천영이 자신을 보낸 이유를 왜 모르랴. 그녀가 바라던 일이었고 용문석
굴에서도 빌었던 상황이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어 다가오자 받아들이기가 쉽
지 않았다.
"잘됐네. 안 그래도 한잔하고 싶었는데."
침대 위에 있던 백산이 몸을 일으키며 반가운 표정으로 소운을 맞았다.
"이리 와. 같이 한잔하게."
"이것만 주고……."
평소에 활달하던 성격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잔득 굳어진 표정으로 주춤거리
고 서 있었다.
"이리와 안 잡아먹을 테니."
굳어있는 소운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내며 침대 한 켠의 이불을 들어올
렸다.
"술은 이렇게 누워서 먹어야 더 맛있어."
침대 뒤쪽으로 몸을 반쯤 기댄 채 소운을 이불 속으로 끌어들인 백산이 술
한잔을 가득 따라서 반을 마시고 나머지를 소운에게 권했다.
소운의 심장 뛰는 소리가 백산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거칠게 뛰고 있었
다.
"소운, 너 오늘 낮에 뭐 빌었는지 알아맞혀 볼까?"
이미 선수가 다 된 백산이 소운의 그런 심경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우선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랬을 테고, 언니가 건강하게 딸을 낳기를 바
랐을 테고, 왜 딸이냐면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딸을 낳는데. 이건
몰랐지? 그리고 마지막은…."
숨죽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운을 빤히 쳐다보던 백산이 그녀의 코를
가볍게 퉁기며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닮은 아들 하나 낳게 해달라고 했지?"
"아니다 뭐! 오라버니 닮은 아들이 아니고 추렴언니 닮은 아들이다. 아니
야, 방금 바꿨어. 추렴언니 닮은 딸로. 헉! 내가 무슨 소리를…."
자신이 말해 놓고도 잘못되었다 생각했는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백
산의 어깨 쪽으로 묻어버린다.
"사랑해! 죽는 날까지 함께 할게. 그 이후에도."
온몸이 붉어져 있는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백산의 사랑한다는 말. 그 한
마디면 족했다.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마주치는 뜨거운 눈길이,
빠르게 뛰고 있는 가슴속의 진실이 그대로 소운에게 전달되었다.
"오라버니. 아읍!"
가슴 벅찬 감동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녀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
데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술 위에 님의 두툼한 입술이 덮여있었고 입안 가득 설육이 밀려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랑! 사라랑!
마주잡은 손에서 애명환이라 불리는 붉은 반지가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이
라도 하듯이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내었다.
이십 평생 단 한번도 타인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의 몸에 타인의
손길이 닿아있었다. 그러나 싫지가 않았다.
이곳 저곳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투박한 손길이 가슴을 더듬고 있다.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서 꼭꼭 싸매고 다녔고, 자꾸만 커져 가는 것이 못마
땅했었는데, 이제 그곳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손길이 있다.
사랑하는 님의 손길이다.
문득 님의 몸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에 등에서부터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온몸에 근육이 뭉쳐있다. 손으로 만지기에도 아름다운 굴곡이란 생각이 들
었다.
어느새 옷이 없어졌는지 온몸에서 소름이 돋자 님의 품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몸이었다. 희미한 별빛에 빛나는 하얀 동체는 마치 환상을 보는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가볍게 입을 맞추어 본다. 이것은 아무리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입에
서 시작한 입맞춤이 목으로 움직이자 간지러움이 이는지 소운의 몸이 꿈틀
거린다.
백산의 입술은 계속해서 탐험을 하고 있었다. 아래쪽을 향해서 움직이던
그의 얼굴이 장애를 만났다.
어렸을 적 언제나 붙잡고 잠이 들었던 어머니의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
그 언덕의 끝에 있는 유실이 부르르 떨었다.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에
가볍게 빨아본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건만 왜 목마름은 해소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자신의 반밖에 안 되는 여자의 가슴이 이렇게 포근한 것일까. 손으로
가볍게 쥐어보고 비틀어 본다. 어릴 때 잊어버렸던 장난감을 다시 찾은 것
인지 쉬지 않고 입술과 손을 이용하여 희롱을 했다.
"아!"
소운의 입에서 나지막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
곳에 왔을 때의 부끄러움도 지금 알몸으로 있다는 생각도 오직 님의 몸을
만지고 싶어하는 본능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탄탄한 엉덩이가 만져지고
있었다.
자신의 엉덩이는 부드러운데 님의 그것은 준마의 엉덩이 같다. 그녀의 탐
험도 멈추지 않는다. 앙증맞고 작은 손이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헉!"
누구의 입에서 나온 신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비음이 동시에 나오고 소운
의 손이 무엇인가를 잡고 있었다.
자꾸만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마음에 붙잡은 것이다. 뜨거웠다. 그곳
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고 있는데도 몸이 편안해져 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손을 움직대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으며 님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오른다.
움직이던 손을 멈추자 님이 아쉬워한다. 계속해달라는 표정이다. 말이 필
요 없었다. 눈빛만 보아도 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로가 악기를 다루는 악사가 되었다. 손으로 입으로 악기를 조율하고 있
다. 두 개의 악기에서 천상의 음률이 흘러나와 방안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흐흑!"
한 순간 두 악기에서 불협화음이 생겼는지 음률이 약간 흩트려지고 소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픔. 하체에서 밀려오는 고통이 즐거웠던 그녀의 단꿈을 깨버린 것이다.
그러나 님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읽어내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일부러 준 고통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기 위한, 성숙하기 위한 고통이었다
. 좀더 많이 님을 사랑하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일 뿐이다.
아픔을 참기 위해서 님의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사라랑! 사라랑!
마주잡은 손에서 애명환의 울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음률
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라랑! 사라랑!
사랑을 일구는 애명환 소리는 두 사람이 잠이든 후에도 쉬지 않고 울었다.
"공주님 그만 일어나시죠."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손길에 소운이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커다란 얼굴하나, 꿈이었나 싶었는데 현실이었던 것이다.
후닥닥 몸을 일으키다 아직도 알몸인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이내
이불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이뻐!"
이제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여자의 얼굴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만
은 백산의 눈앞에 부끄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소운의 모습은 깨물
어 줄 정도로 귀여웠다.
"오라버니. 옷은…."
"이대로 조금만 더 있자."
백산이 소운을 껴안으며 그대로 침대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입맞춤, 잠시동안 반항하던 소운이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오고 다시 한
번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해가 중천인데 지금까지 뭐해요? 다들 기다리는데."
새로운 방해자가 두 사람의 열기를 식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냉추렴이었
다.
"어머! 어머! 소운 너 뭘 어쨌기에 오라버니 얼굴이 반쪽이 됐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꼈는지 백산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호들갑
을 떨고 있었다.
여자들의 내숭은 정말 무섭다. 그토록 조신하던 냉추렴마저도 주변에 아무
런 이목이 없자 전에 보여주지 않던 발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도… 내가 뭘? 얼굴은 그대로구만."
얼굴이 붉어진 소운이 입을 빼죽 내밀며 냉추렴을 흘겨보았다.
"너? 너? 어떻게 이 얼굴을 어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니? 간밤에 얼마나
힘들게…."
"험험!"
"어맛?"
문 쪽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깜짝 놀란 냉추렴이 무안한 표정을 지으
며 재빠르게 백산의 등뒤로 숨었다.
그러다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놀라게 했던 사람들이 무욕인들임을 확인하
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어이 사위! 우리 추렴이 머리는 언제 올려줄 건가. 나도 손자보고 싶어."
"숙부님!"
광사 초상이 너스레를 떨며 냉추렴을 놀려댔다. 어린 시절의 냉추렴을 보
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발랄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냉
추렴이 변했던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혼자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았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거의 육 년만에 보는 냉추렴의 환
한 얼굴이었다.
'그래. 밝게 살아야 한다. 대형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말이다.'
광사 초상, 그도 철목승과 냉추렴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울러 철목승이 바라는 것도….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영달이 아니었다. 냉추렴의 행복이었다. 냉추렴
이 어떤 구김도 없이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의 유일한 꿈이었던
것이다.
* * *
"그러니까 그놈들을 놓쳤단 말입니까, 설검후도 없고?"
낙양을 떠난 일행은 숭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소림사는 굳이 갈 필요가
없었지만 갈태독과 백산이 볼일이 있다며 그곳을 가자는 바람에 그리 된 것
이었다.
소림사로 향하는 도중에 석숭의 말을 듣던 백산이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
다. 흑객의 본거지를 발견하고도 그들을 놓쳤다고 하는 말 때문이었다.
하나의 적이라도 줄여야 할 판에 기회가 왔음에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
한 아쉬움이었다.
"우리가 급습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네."
아쉬움이야 백산보다 석숭이 더했다. 황제가 즉위할 때부터 찾아왔던 자들
이었고 겨우 그들의 본거지를 발견했는데 허탕을 치고 말았다.
"흔적을 쫓아 추격하고 있으니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걸세. 그리고 계속해서
자네들을 노릴 것이고."
석숭이 흑객들을 직접 쫓지 않는 이유였다. 그들은 청부받은 일은 결코 포
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백산 일행을 따를 것이고 이들과 같이 있다보
면 놈들의 흔적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처음에는 호기
심에서 이들과 같이 움직였고, 그 다음에는 정 때문에, 이제는 임무 때문에
일행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설검후는 왜?"
"사자가 도착했을 때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네."
"그럼 그곳의 맹주라는 놈을 잡아서 족치면 되잖소."
"그럴 수가 없으니 문제가 아니겠나. 군을 동원할 수 없으니…."
명 황실의 난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영락제에게 아직은 전군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즉 군을 움직일 수 있는 문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반정의 와중에 궁으로 침투한 자밀원 흑객들이 가지고 사라진 물건, 그것
때문에 군에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황제가 되어서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였다. 석숭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놈들이 옥새를 가져간 거요?"
독안랑의 물음이 정곡을 찔렀는지 석숭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그러나 이
내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권을 상징하는 옥새, 옥새는 원래 전대 임금으로부터 인도를 받아야한다
. 그래야만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정의 와중에 옥새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자밀원 흑객들이 왜?"
이미 망한 나라의 잔당들이지 않는가. 이제 와서 옥새보다 더 한 것이 있
다한들 원나라의 복원은 불가능한 일이다. 옥새를 가져갈 이유가 없는 것이
다.
"전 황제의 측근중의 한 놈이 청부를 했소."
그 동안 석숭이 알아낸 사실이었다. 자신들의 불리함을 느낀 전 황제의 측
근 중의 한사람이 자밀원 흑객들에게 사면 약속과 함께 도와 줄 것을 요청
했었다 한다. 그때 흑객들이 옥새를 가지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친정(親征)을 그리 많이 다니시는 거요?"
영락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군소 국가들을 토벌하러 다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영락제가 야심이 큰 인물이기는 했지만 심하다 싶은 정도
로 전장을 떠돌고 있다. 반정을 일으켜서 성공했으면 외부의 적보다 나라안
의 일을 더 신경을 써야하지 않겠는가.
석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새가 없기에 군령을 하달하 수 없고 따
라서 직접 군사를 데리고 전쟁터를 찾아다녀야 했다.
자신이 황제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지금도 전쟁터에 나가있다.
일국의 황제이지만 단 한번도 황실에서 편히 쉬어보지 못한 황제이기도 했
다.
"그럼 그 물건을 찾으면 석두의 가문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거요?"
황실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 오직 석두의 가문인 사마
가가 복원되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역시 단순했다.
하기야 옥새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백산에게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하
는 것이 무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