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표운
낙양(洛陽).
하남성(河南省)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황화 중류에 위치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 중원의 사대 도읍중의 서경(西京)이자 역대구조(歷代九朝)의
수도였던 고도(古都), 앞으로 낙수(洛水)를 끼고 북으로는 공동묘지로 말미
암아 죽음의 대명사가 된 망산(邙山)이 있는 천험의 요새지이다.
중원 최고(最古)의 사찰인 백마사와 북위 효문제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
도한 후 건축하기 시작하여 팔 대 왕조 사백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불심
의 보고인 용문석굴(龍門石屈)등 수많은 명승고적이 산적해 있는 곳이다.
그 많은 문화유산이 과거에 낙양을 도읍으로 가졌던 수많은 왕조들의 영광
의 산물이라면 현세에서 낙양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낙양(洛陽) 제일(第一) 설가장.
평범한 무가(武家)가 삼십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낙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고, 중원 각처에 있는 수백 수천의 무가(武家) 중 가장 위
에 있는 독보적인 문중으로 성장했다.
정파 최고 집단인 천무맹, 그 천무맹의 부맹주인 뇌음천자 설검후가 설가
장의 장주이기 때문이다.
수천 평 의 대지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수십 채의 건물들, 설가장 오
할의 전력이 장주인 설검후를 따라서 천무맹으로 파견 나가 있지만 현재 남
아있는 전력만 해도 웬만한 군소방파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세워져있는 삼 장 높이의 담을 따라서 걷다 보면 담 높이와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대문이 있고 그 대문의 가장 높은 곳에 용사비등(龍蛇飛騰)
한 필체로 쓰여진 현판이 하나 있다.
낙양제일 설가장.
그 아래로 검을 차고있는 위사 두 명이 전면을 쳐다보며 오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새하얀 백의와 가슴에 검은 색으로 설자를 새기고 있는 자들. 대문
밖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위사임에도 불구하고 툭 튀어나온 태양혈(太陽穴)
은 설가장에 속한 인물들의 무공수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설가장에 있는 최하위 무사라 할지라도 강호 무림에 나서면 고수소리를 들
을 수 있다는 소문이 호사가들이 지어낸 헛소리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설가장의 얼굴이 되고 있는 자들은 환영검(幻影劒) 장유열(張有列)이
란 자와 그의 부하였다.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설가장이었기에 하루
에도 무수히 많은 방문자들이 찾아온다.
그들 중에는 설가장에서 한자리를 해보고자 오는 자들도 있었고 낙양을 지
나던 무림의 명숙들도 포함되어있기에 설가장 내에서 조금 지위가 있는 자
와 하급무사 한 명이 일개 조로 해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저놈은 뭐지?'
흑의인 한 명의 이상한 행동을 쳐다보며 장유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의 한 시진 전부터 설가장 앞에서 오락가락하여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허리에 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이 분명하기는 한데 차림새가 이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온 시골 촌놈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도를 찬 흑의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성큼성큼 장유열 앞으로 다
가왔다.
"저기… 말 좀 물읍시다."
장유열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곳은 대 설가장이다. 자신의 소개도 없이
대뜸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한 자는 여태껏 없었다. 자연히 대답이 고울 리
가 없다.
"무슨 일인가?"
도를 차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 명사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래도
조금은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내 친구 녀석의 동생이 낙양 설가장의 큰며느리가 되었다 해서… 연락을
받고 낙양까지 왔는데 설가장이라고는 이곳밖에 없고 너무 엄청난 가문이라
…."
흑의인의 말을 듣고 있던 장유열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얼마 전 총관으로부터 내려진 지시사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이름이 뭔가? 동생의 이름은 뭐고?"
"아 예, 친구는 낙천수사 표운이라 하고 그놈의 동생은 표령이라 하오. 아
무래도 녀석이 장난친 것 같군요. 이런 곳에 어울리는 놈이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장유열을 쳐다보며 대답
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령이란 말에 급속하게 굳어졌던 장유열이 얼굴 표정이 이내 다시 펴지며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놈이다. 총관이 이야기했던, 천하조(天下組)의 조장을 일수에 베어버렸
다는 놈.'
그런데 이상했다. 천하조의 조장을 베었다는 놈의 무공수위가 별 것 아니
었다.
설가장에는 네 개의 조가 있고 각 조 조장의 무공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다.
자신의 일검도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저런 변변치 않은 무공을 가진 자
가 그들을 헤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럼 다른 친구인가? 빌어먹을 년 놈들, 웬 친구는 이렇게 많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이다. 이곳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다. 성함이라
도 남겨주시면 우리가 한번 알아봐 드리겠소. 낙양이라면 우리 이목 안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상하네? 녀석의 서신에는 매부 되는 놈이 좀 개차반이라며 설가치룡이
라 불린다 했는데….'
표령을 찾아준다는 장유열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
리고 있었으나 장유열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하려는
장유열을 향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며 몸을 돌렸다.
"나 백산이요."
옷이 날개라더니 백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생긴 것 없는 얼굴과 흉터야
그대로겠지만 언제나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를 정리하고 수염까지 깍은 백
산의 모습은 입고 있는 흑의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촌놈 티를 어느 정도 벗
은 것 같았다. 촌스러운 행동을 제외하고….
"너는 저자를 은밀히 미행해라."
같이 있던 수하에게 미행을 지시하고 장유열이 급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
어갔다.
"그래? 낙천수사 그놈을 찾는 자가 나타났단 말이냐?"
장유열의 보고를 받고 있는 오십대의 인물, 설가장의 총관인 제천권(除天
拳) 수지상(洙志霜)이란 자였다.
제천삼권(除天三拳)이란 장법을 익힌 자로 설가장 창업공신 중의 한 사람
이다.
세간에서는 그가 익힌 제천삼권이 과거에 멸망한 황보세가의 독문장법인
천왕삼권이란 소문도 있었으나 본인이 극구 부인하고 감히 설가장의 총관에
게 확인하려 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소문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제일조 조장이 말했던 그자 같지는 않고?"
제일조의 조장인 패검(佩劍) 구자인(具玆仁), 소장주의 일을 처리하기 위
해서 만상투인루로 갔던 그가 사색이 되어서 돌아왔었다. 낙천수사의 친구
라는 놈. 그와 천하조의 조장이 일초도 감당하지 못했던 자가 복수하러 오
겠다 했다는 것이다.
"도를 차고 있었는데 무공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자인의 말에 의하며 비도에 당했다고 했다. 도를 차고 있다면 놈이 아니
라는 소리다.
그러나 놈이 친구를 찾는다며 낙양을 헤집고 다니면 일이 커진다. 그나마
잠잠해졌던 소장주에 대한 소문이 다시 드러날 수 있음이다.
"알았다. 그놈이 머물고 있는 곳을 확인하면 나에게 보고하고."
'이럴 땐 소장주는 또 어디가신 겐가. 그렇게 자중하라고 말씀 드렸건만…
휴우!'
구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낙양성주의 딸을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
건. 성주의 딸을 호위하던 열 명의 군관들을 죽이고 간신히 도망을 쳤지만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성주의 딸이라는 게 이제 겨우 열 다섯 밖에
안 되는 어린애였기에 진노한 성주는 물론이고 낙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지탄하는 흉악무도한 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놓은 대안이 사람을 사서 만상투인루로 보내는 것이었
다.
때마침 이미 건드려 놓았던 다른 계집이 있어서 그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부모와 일가 친척하나도 없는 고아들이었기에 자신이 나서서 그 계집을 설
득했고 그 애의 오빠를 설태만으로 변장시켜 만상투인루로 보내는데 성공했
다.
느닷없이 생겨난 설가장의 둘째 아들 때문에 이런 저런 소문도 많았지만
설가장에서 둘째 아들이라 하는데 누가 뭐랄 것인가. 설가장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으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때 살인멸구 해버릴 것을 잘못했나?'
몸에 지병이 있어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계집의 오라버니 실종과 설가장을
연관시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죽이지를 못했다. 계집마저 죽으면 그녀
의 오라버니를 만상투인루에 보내서 죽게 하고는 증인을 없애기 위해서 여
동생마저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루(靑樓)
로 넘겨버렸다. 아마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그 약한 몸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남자가 드나드는 그곳에서 견디지 못
했을 테니까.
"좌일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총관."
"소장주를 찾아와라. 급한 일이라 전해라."
"인피구를 쓰고 나가셔서 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너도 모른단 말이냐? 빌어먹을."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근신 기간 중이던 설태만은 어디서 구했는지 인피구
를 착용하고 낙양을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찮다는 구실로 부하들에게
까지도 인피구상의 얼굴을 알려주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여어! 장형 그동안 어디 있었소?"
화려한 금의를 입고 있는 평범한 얼굴의 삼십대 인물이 반가운 얼굴로 자
신의 앞을 지나가는 흑의인을 불러 세웠다.
"어? 낙형 아니오. 잠 좀 자러가오. 간밤에 한숨도 못 잤더니…."
장형이라 불린 인물이 반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누구
인가. 한때는 잘생긴 얼굴과 아랫도리 기술을 가지고 밥을 먹고살았던 장대
근이란 인물, 섯다였다.
"혹시… 어젯밤에 혼자만 재미 본 것 아니오?"
섯다의 핏발선 눈동자며 부스스한 얼굴 그리고 힘없는 동작을 보며 낙씨
성을 가진 인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과 너무나 죽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무공에 여자를 밝히고 도박을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자신과 너무나
흡사했다.
또 여자를 휘어잡는 능력이란, 자신과 수준이 달랐다. 자신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여 힘으로 해결했었는데 이 친구는 몇
마디의 말이면 아무리 요조숙녀라 할지라도 스스로 치마끈을 풀어버린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의 고수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같은 행색이었다.
"이거 또 낙형을 만났으니 그냥 갈 수도 없게 되었네? 갑시다, 내가 한턱
거하게 쓰지요."
금의인의 얼굴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이 친구가 한턱 쓸 때는 그 씀
씀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낙양 최대 집안인 자신도 몇 번 가보지 못한 그
런 곳에서 은자를 물 쓰듯 하는 것이다.
"오늘도 제일루요?"
낙양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인 곳, 술 한 병 값이 일반 양민 한 가족이 일
년 이상을 먹고 놀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중원제일루(中原第一樓).
그들이 가고 있는 기루의 이름이다.
모든 것이 중원에서 제일이라 하지만 특히 세 가지는 진정으로 중원제일이
라 알려져있다.
그 첫째가 음식 맛이요, 둘째가 기생들의 미색이고 세 번째가 그들을 즐길
수 있는 돈이다.
수없이 많은 부호들이 이곳에 와서 기생들에게 혼을 빼앗기고 가산을 탕진
했다고 하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곳이 아니겠는가.
"장형!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나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거요?"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기녀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 궁금해 하던 것을 슬쩍 물었다.
이곳에 와서 술을 먹을 수 있는 비밀, 아무리 부모가 중원의 갑부라 해도
하룻밤에 수만 냥씩 주고 술을 먹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장대근이란 사람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와 잠자리 한 것도 아닌데 저 피곤한 표정과 핏발선 눈동자.
자신도 수없이 겪었던 증상. 몰두하다 보면 세상사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이겼을 때 그 느낌이란, 온몸에 흐르는 전율과 성취감은 결코 여자와 잠자
리에서 느끼는 쾌감이 따르지 못한다.
수없이 많은 공을 들여서 원했던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느끼는 감정
이 허탈하다는 것에 비하면 이놈이 주는 마력은 무섭다. 성취했을 때 그 흥
분된 느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도박.
장대근의 표정이 몸짓이, 밤새도록 도박에 몰두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
이었다.
그러나 그 도박을 하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이곳 낙양에
있는 도박장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따도 중원제일루에 와서 기생을 끼고 술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안 된다.
자신이 근신하고 있는 사이에 엄청난 곳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물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말끝을 흐리고 마는 장대근
이었다.
"이게 다 낙형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요. 그곳은 보통사람이 갈 수 있는 그
런 곳이 아니요."
금의인의 계속되는 채근에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는지 기녀들을 물
린 장대근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요, 이 설… 낙설민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잘못했으면 본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리 인피구를
쓰고 있지만 낙양제일가인 설가장의 소장주가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보통
사람이라 하고 있다.
"말해보시오.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장형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인
지. 정녕 장형의 말대로 그런 곳이 아니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요."
감히 자신을 놀라게 할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주의 딸까
지 겁탈하려 했던 자신이 아닌가.
"좋소, 이야기하리다. 대신 지금부터 내가 한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간다
고 약속하시오."
얼굴에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비밀을 발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안한 듯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이어서 실토되는 장대근의 비밀은 낙설민, 아니 설태만의 온몸에 전율이
일게 만들었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회원제로만 운영되고 있었고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없다한다. 회원이 되기 위한 절차도 까다로웠다. 일단 확실한 신분이어
야 하고 가입비만도 십만 냥이나 되는, 진정 엄청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도박을 즐길 때 전부 복면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신분에 대해서는 도
박장의 운영자만 알고 있을 뿐 내부에서는 그 누구도 서로를 모른다는 소리
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장대근의 한마디는 설태만의 눈동자에 붉은 핏발을 세
우게 하고 말았다.
"투자요."
투자, 주사위 두 개를 가지고 하는 가장 단순한 도박. 가장 낮은 수나 높
은 수가 나온 사람이 이기는 도박이다.
설태만이 가장 좋아하는 것. 도박장에 가면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
로지 투자만 한다.
주사위 소리만 들어도 숫자가 얼마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어젯밤에 십만 냥 정도를 땄소. 별로 운이 따라주지 않더구먼…."
십만 냥을 땄다는 말을 하면서도 별로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나, 나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겠소?
다급했다. 그곳은 완전히 황금시장이 아닌가. 벌써 십여 년 간 투자에만
매달려온 자신이다.
투자만으로는 낙양에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없다. 도귀니 도제니
하는 놈들과도 붙어본 적이 있었으나 가소로웠다.
"신분은 나의 친구라 하면 그럭저럭 될 것은 같은데… 자금이 문제요. 회
원으로 가입하는데 만 최소 십만 냥이 필요하고 입장하는데 수중에 오십만
냥이 있어야 하는 지라…."
오십만 냥이면 설가장의 두 달 운영비가 되는 막대한 금액이다.
그러나 이미 투자에 눈이 돌아버린 설태만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주사위가 굴러가며 자신이 이겼을 때의 쾌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좋소, 장형. 오늘 저녁, 아니오, 지금 바로 돈을 가져오리다."
설태만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다시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낙양의 어느 도박장에도 갈 수 없었다. 아무리
변장을 하고 가도 두어 판만 놀아보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들통
나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설태만이 살아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
이다.
그런데 신분탄로의 제약을 완전하게 가릴 수 있는 곳이 등장했다.
자연 조급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안 되오. 삼일 후에 한 명이 탈퇴를 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어야
가능하오."
정원제란 말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 때 즉 결원이
생겼을 때만 새로운 회원을 받는다 한다.
"다른 친구들도 회원 될 사람을 데리고 올지도 모르겠군…."
"장형! 그럴 수는 없소. 내가 꼭 회원이 되어야 하오. 반드시 되어야 한단
말이오."
이제는 아예 필사적이다. 모처럼 만에 무료한 세상살이의 탈출구를 찾았는
데 그것이 다시 무산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는 가입비의 대소로 결정되지 않겠소. 내가 힘을 써보겠지만 다른 쪽
에서 돈으로 치고 들어오면 방법이 없는지라…."
"두 배! 내가 두 배 내겠소."
"그렇게까지야… 필요 없게 해보겠지만 만일에 대비 하셔야 하오."
돈을 만들려 함인가 설태만이 서둘러서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런 설태만
의 모습을 미소로 배웅을 하며 섯다가 조용히 뇌까렸다.
'악의 구렁텅이에 발을 담근 것을 환영한다. 설태만….'
"어이! 장형 수고가 많구먼. 나도 이런 역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 좋은 술에 미녀에…."
소살우였다. 설태만이 나가고 난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은 술을 홀짝이
며 한쪽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지금껏 저놈에게 쓴 돈이 오만 냥인데 이십만 냥으로 불어나니 십오 만냥
을 번 것 아뇨."
백산과 광견조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었다. 설태만의 파멸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큰 형님은 어디 있소?"
"청루(靑樓)."
* * *
세상이란 참 묘하다. 밝은 곳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운 곳이 존재한다. 그
런 것이 음양의 이치라면 할말이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또다시 그 음양의
이치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어둠도 다 같은 어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늘진 곳과 아예 빛이 없는 죽어버린 곳이 또 존재하기에.
청루(靑樓).
낙양의 화려한 야경이 멀리 보이는 곳, 한 때는 저 불빛 아래서 웃음을 팔
고 교태를 부렸던 수많은 야화(夜花)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 쓸모없이
죽어버린 꽃들인가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조차 질척하니 젖어있었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에 푸른색의 조그마한 등이 달려있고 그 불빛 아래로
몸도 마음도 죽어버린 듯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네들이 그 앞을 지나
고 있는 백산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구리돈 열문, 밥 한 끼 값도 안 되는 돈을 위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
인들의 얼굴에는 살아있는 자의 생기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손님이 오면 받고 오지 않아도 그만 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봐! 물어볼게 있는데?"
그녀들 중 둥그런 얼굴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창기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건넸다.
"나는 쟤들보다 싸. 다섯 문이면 돼."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백산을 향해서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하려는 게 아니고 돼지새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한 냥 주지."
"돼지는 왜?"
수백 번의 가랑이를 벌려야 벌 수 있는 거금임에도 불구하고 은화에는 아
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돼지에 관해서만 묻고 있다.
"오늘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졌거든."
하얗게 웃고 있는 백산의 표정을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퇴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을 떨게 하는 공포는 없었지만 누구를 죽이기 전에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살기(殺氣).
처음으로 늙은 퇴기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관심의 표정인가, 백산의 손에
있던 은화 한 냥을 가져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죽으면 이것으로 관을 만들어 줄게, 저기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이야."
"자, 술 좀 받아 놓고 기다려, 화주로 파전이 있으면 더 좋고."
백산의 품속에서 한 움큼의 은화가 쏟아져나오며 사방으로 빛을 발했다.
한 순간 청루 주변이 환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에 널린 것이 화주고 파전도 금방 만들어."
살아서 오라는 말이었다. 얼굴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퇴기가 가리킨 건물
을 향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인간과 짐승의 배설물이 어우러진 묘한 냄새를 맡으며 거의 발등까지 빠지
는 곳을 아무 거리낌 없이 걷고 있는 백산의 뒷모습을 무심한 눈들이 쳐다
보고 있었다.
희망이 없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패배의식이라 했다.
"취익!"
쿵! 쿵! 쿵!
또 화가 난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숨을 쉬고 있는
고깃덩어리 일 뿐이다.
죽을 용기조차 없는 그런 이들이다. 그런 세상에 화가 났고 아무리 발악해
도 바뀔 수 없다는 현실에 더 암담해 지는 것 같다. 자신이 나서서 이들을
구해 준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런 음지는 반드시 생겨난다.
하지만 음지이고, 죽을 때까지 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크윽!"
욕설과 함께 문을 열어주며 인상을 쓰고 있는 놈을 향해 일권(一拳)을 먹
여 버렸다. 화가 나있는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날리는 주먹에 붉
은 기운이 어렸고 문을 열었던 상대는 얼굴이 함몰되며 바로 즉사를 해 버
렸다. 주먹 가득 묻어나는 피를 털지도 않은 채 화려하게 치장된 복도에 오
물 가득한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 넓은 회랑이 있고 화려한 불빛 아래 십여 명의 인물들
이 백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굴 찾아온 모양인데 그리 폭력적으로 나오면 쓰나?"
십여 명의 흑의인들 뒤쪽에서 나온 소리였다. 사십대 정도 되어보이는 날
카로운 눈매를 가진 인물, 살이 붙기는 했지만 돼지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
었다.
"살이 안 찐 돼지도 있었네?"
돼지, 이곳 청루 같은 하급 창굴을 관리하고 있는 포주를 칭하는 비어였다
.
백산의 입에서 돼지란 말을 들은 인물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어리고 있
었다.
이곳에서 돈마(豚魔)라 불리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 불릴 입장이 아니었다.
"사람도 찾기 전에 죽고 싶은가!"
이곳은 청루, 창굴이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낙양 번화가에서 밀려난
퇴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이곳을 유지할 수 없다. 젊고 싱싱
한 여자들도 꽤 있다. 바로 팔려온 여자들이다.
가족에 의해서 팔려온 여자,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들과 놀아나다 그들에
의해서 이곳으로 묻혀버린 그런 여자들이 청루를 유지하는 기반인 것이다.
그 고관 자제들과 놀아나다 이곳에 팔려온 여자들은 지금의 경우처럼 보호
자나 가족이라며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결코 데려가지 못한다. 애당초 고관 자제들로부터 여자를 넘겨받을
때 처리비용까지 같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 청루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
면 땅속에 들어가기 전 까지 이곳에서 살아야한다.
그것이 청루의 불문율이다.
돼지를 쳐다보는 백산의 입가에 차가운 살소가 맺혔다.
"지금부터 질문은 나만 한다. 우선 첫 번째 질문. 약 팔 개월 전에 표령이
란 여자가 이곳으로 팔려왔다. 있었나 없었나."
'이자! 위험한 자다.'
돈마의 얼굴색이 변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는데도 태연한
신색으로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
"죽여!"
경험상으로 볼 때 바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시간을 끌면 일만 더 복잡해
진다. 혹시라도 관가에 연락을 하고 오는 놈들이 가끔씩 있었기 때문이었다
. 비록 돈으로 입막음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마의 말이 떨어지자 흑의인들 중 한 명이 발검(拔劒)과 동시에 백산의
인후를 찔러왔다.
뒷골목에서 건달 노릇을 하는 자의 검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자의 검술이었다.
백산의 얼굴이 흠칫 변했고 미소가 살소로 변하는 순간 왼발을 뒤쪽으로
딛으며 몸은 옆으로 누임과 동시에 오른발이 상대의 목을 향해서 뻗어나간
다.
편퇴(鞭腿), 일명 옆차기라 부르는 기술로 삼류 건달들이 흔히 쓰는 발기
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술만 흔할 뿐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우두둑!
검을 찔러오던 흑의인의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앞으로
무너져내렸다.
백산의 행동에 놀란 뒤쪽에 있던 다른 인물이 비스듬한 자세로 있는 백산
의 몸통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치며 달려들었고, 나머지 인물들도
백산의 빈곳을 향해서 일제히 검을 날렸다.
발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허리에 있던 도를 뽑으며 몸통을 베어오던 인형
의 허리를 갈라버리며 나머지 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검면을 손으로 쳐내고 도탕(滔蕩)이라는 발기술을
이용하여 발끝으로 상대의 턱을 올려 차고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왼
다리에 의한 선풍각이 옆에 있던 자의 얼굴을 한바퀴 돌려버렸다.
"으악! 컥! 우두둑!"
돈마의 얼굴색이 변했다. 자신의 부하들, 일반 삼류건달들이 아니다. 체계
적인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딱 한 호흡이었다. 눈으로 쫓기에는 상당한 동작이 있어 보였지만
편퇴로 시작해서 선풍각을 이용해 네 명의 부하들을 처리하는데 한 호흡밖
에 걸리지 않았다.
또다시 백산의 몸이 흑의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현란한 발기술이었다.
발과 정권이 팔꿈치가 움직이고 흑의인 세 명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네놈은 누구냐?"
단순한 놈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고수였다. 자연 돈마
의 목소리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놈은 피식 웃더니 남아있던 세 명을 행해서 다시 돌진해 들었다.
찔러오는 검을 겨드랑이 사이로 흘리며 뒤쪽에서 공격하던 흑의인 한 명의
심장으로 유도하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해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의 얼
굴을 향해서 왼손 정권을 그대로 박아넣고 있다.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고 처음 질문에도 아직 대답 안 했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백산의 도가 허공을 가르며 떨고 있던 마지막 한 명의
목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열 명의 흑의인들이 쓰러졌고 사십 평 정도 되어보이는 회랑에는
비릿한 혈향이 가득 들어찼다.
돈마를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서며 피를 털어낸 도를 치켜들고 있었다.
"말하면 살려 줄 거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돈마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나왔다. 이럴 수가 없
는 일이다. 열 명의 인원만으로 청루의 질서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한순간
에 모두 당했다.
"아니. 말하던 안 하던 죽어. 단 편하게 가느냐 아니면 힘들게 가느냐 하
는 차이지. 너도 무공이 있으니 알 것 아냐."
돈마도 상당한 무공의 고수였지만 백산의 엄청난 무공에 자신이 무인이라
는 것도 잊고 있었다.
"죽었소. 이곳에 온지 두 달 만에."
체념했는지 반항하지 않고 다 털어놓고 있었다.
"누가 데리고 왔나?"
"설가장 총관이 제천권 수지상이요. 그리고 이곳은…."
"설가장이 주인이죠."
회랑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백산에게 이곳을 가르쳐 주었던 늙
은 퇴기. 그녀가 사방을 둘러보며 비릿한 혈향이 역겨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에 묻었는지 알 수 있소?"
"낙양에서 죽은 자가 갈 곳이 있겠어요? 망산(邙山)밖에… 저 자식은 우리
줄래요? 그 동안 밀린 빚이나 갚게. 어차피 다른 놈이 또 오겠지만 그때까
지는 희망이 살아나니까요."
웃고 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것 같았던 퇴기의 얼굴에 희미했지만 마음속
에서 흘러나온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 * *
망산(邙山).
낙양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망산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이곳이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동한(東漢)이래로 성탕(成湯), 한(漢
)의 광무제 등 제왕에서부터 왕후장상들이 묘를 쓴 이후로 이곳이 명당자리
라는 인식이 생겼고, 조상들의 음덕으로 조금이라도 잘살아 보고자 하는 일
반 민초들이 아무도 몰래 이곳에다 묘지를 만들면서 묘지의 산으로 변했다.
또한 먼 옛날 백이와 숙제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이 이곳 망산의
정상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는 것을 보면 망산은 없는 사람의 마지막 안식처
로 정해진 곳이 아닌가 싶다.
초라한 봉분.
일 년도 되지 않았는지 듬성듬성 잡초가 돋아나있는 봉분 앞에 백산과 몇
몇 일행이 숙연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불쌍한 아이였어요. 죽기 전까지 오빠를 부르며 용서해달라는 말만 되풀
이했어요. 자기 잘못 이라며…."
이름은 없고 과거에 화월이라 불리었다는 늙은 퇴기가 눈물을 찍어내며 울
먹이고 있었다.
표령의 인생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건지, 만상투인루가 무엇인지
를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곳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자 그때서야 설가
장 총관이란 인물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울러 그녀가 사랑
한 사람은 설태만이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같이 살아왔기에 오빠 이상의 감
정은 없다 생각했던 표운이었다는 것을….
표운의 무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녀석이 그렇게도 원하던 령이와 같이
합장을 해주었다.
그 앞에서 백산이 무엇인가 태우고 있었다. 표운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
서 겸 서신. 표령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음을 향해 간다던 서신
을 지전을 태우듯이 태우고 있었다.
'거지새끼야, 이젠 만족하냐? 사랑하는 여자 옆에 누우니 만족하냐고. 저
승에서라도 잘살아라. 이 멍청한 놈아.'
'야, 곰 새끼. 너도 좋은 일 할 때도 있구나. 고맙다, 임마.'
밤하늘의 별빛 사이로 표운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석두야!"
"네! 서신도 보냈고 그곳도 죽음의 함정으로 변했습니다. 일단 들어오면
거의가 다 죽어야 나갈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석 대인의 협조를
구해서 재조사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일단 쥐새끼부터 제거하고 잠적해야겠구나."
순간적으로 백산의 몸이 사라졌다.
지금껏 백산을 미행하고 있던 설가장의 인물들이 백산을 제거하기 위해서
망산을 찾은 것이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자가 바로 만상투인루에서 살아남았던 패검 구자인이
었다.
지금 구자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죽어 가는 부하들 때문이
아니었다. 부하들을 도살하고 있는 저 흉진 얼굴, 만상투인루에서 자신과
동료의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가졌던 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꿈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검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려왔다. 이것은 악몽이다. 그냥 평범한 놈이라 했
었고 간단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만상투인루에서의 실책도 만회 할 겸해서
나왔었다. 그러나… 벌써 열 명이 다 죽었다.
'동귀어진밖에 없나? 어차피 죽을 것….'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놈을 행해 온 힘을 다해 검을 찔러가고 있었다.
가슴의 허점이 상대에게 그대로 드러나든 말든 일단 놈을 죽여야 한다.
"네놈은? 그놈이잖아. 그럼 살려두어야지."
상대의 목을 향해 도를 찔러 넣으려던 백산이 그 자리에 멈춤과 동시에 옆
으로 살짝 돌며 구자인의 단전을 향해 일퇴를 날렸다.
내공의 파괴.
인질을 확보하기 위해 백산이 택한 방법은 언제나 같았다.
"죽여라! 이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낀 구자인이 이를 갈면서 외쳤다. 너무 허무
했다.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동귀어진 수마저 통하지
않는 엄청난 상대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예 자살도 할 수 없도록 목을 틀어쥔 백산이 구자인을 질질 끌면서 일행
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이 만상투인루에 왔던 놈이다. 서신하나 더 보내야겠지?"
'거지새끼야, 잘 있어라. 일 끝나고 올게.'
* * *
요즘 가장 살맛나는 사람이 있었다. 물을 만난 물고기 마냥 삶이 즐거웠다
.
설가치룡 설태만, 간밤의 도박에서 무려 십만 냥을 땄다. 거의 십 일간 딴
돈이 벌써 백만 냥이나 되었다. 결코 돈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은 아니지
만 부가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엄청난 거금이다 보니 그것 또한 쏠쏠한 기분
이었다.
'이제 큰판으로 옮길까?'
지금껏 그가 했던 투자는 판 당 만냥씩 거는 작은 판이었다.
장대근에게 듣기로 판 당 백만 냥씩 걸어야되는 엄청난 판도 있다고 했다.
십 일간 계속 따기만 하니까 더 이상 흥이 나질 않는 것이다. 더 큰판으로
가야 다시 흥분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흥분과 환희를 감추지 못하고 설가장에 돌아온 그를 기
다리는 것은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이었다.
총관 수지상이 그에게 내놓은 서신 두 장.
설가치룡 설태만 보시오.
그대가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오.
만상투인루에서 설가치룡으로 죽어간 자는 낙천수사 표운이더군요.
그의 시체를 내가 가지고 있소. 인피구까지 쓰여진 상태로 말이요.
이억 냥을 준비하시오. 보름을 주겠소.
앞으로 보름 후까지 돈이 내 수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표운의 시체를 낙
양성주에게 넘기겠소.
"이게 무슨 소린가 수 총관."
설태만의 고함소리가 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깨끗하게 정리되었
다 생각하고 모두 잊어버렸었는데 자신의 죄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려 하
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지상의 말은 설태만의 얼굴을 백짓장처럼 하
얗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놈을 제거하러 갔던 패검 구자인이 인질로 잡혀있고 낙양성의 포쾌들이 다
시 재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쾅!
설태만이 거칠게 탁자를 내려쳤다. 완전하게 걸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
혀 없는 올가미다.
만상투인루에 갔던 구자인이 인질로 잡혀있고 표운 놈의 시체까지 가지고
있다면 설가치룡 설태만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밝혀질 것이다.
아무리 설가장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무림에서 일이지 관부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죄상이라는 것이 낙양성주 딸의 겁탈과 군관 열 명의 살해 죄이
다.
구 개월 전에야 관부에 있는 친인의 청탁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
지만 그것마저 거짓으로 밝혀지면 자신 한 사람 희생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 죽음을 가장하기 위해서 설가의 가솔들은 물론 아버지까지 관련된 것이
모두 드러날 것이다.
멸문(滅門), 가문의 멸문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일이지 않는가.
"이것을 쓴 놈의 소재는 어찌되었소."
가장 절실한 것이 협박 한 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놈이 있는 곳을 찾
아서 입을 막고 표운의 시체를 없애야 한다.
그러나 수지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북망산에서 종적을 감춘 후로
흔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장내의 모든 수하들을 다 동원해서 낙양과 그 주변을 이 잡듯 뒤졌지만 하
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주님께 연락하는 것이…."
"아니되오. 이것은 내 일이오. 내가 처리해야할 문제란 말이오. 나도 나이
가 삼십이란 말이외다."
얼굴이 붉어진 채 발악 발악 외쳐대는 설태만을 주시하고 있던 수지상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장주의 외아들인 설태만, 태어날 때부터 보았는
데 왜 모르겠는가.
천무맹의 부맹주라는 지위를 가진 엄청난 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초라한
아들.
위대한 아버지에게 당당한 아들이 되고자 했던 그의 모든 노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다.
나이 서른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천무맹으로 단 한 번을 불
러주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장주인 아버지보다 자신과 더 많은 세월을 보냈고 거의 자신이 키운 아들
과 같은 설태만이다. 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다
.
"어찌하면 좋겠소."
"지금 저희가 만들 수 있는 돈은 전부 오천만 냥 정도입니다. 청루가 있는
땅과 몇 곳의 부동산을 정리했을 때죠."
설태만의 반응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벌써 자금 만들 곳을 파악해 본 모
양이었다.
"그리고 이곳 저곳 안면 있는 곳을 수소문해보면 그 정도는 더 만들 수 있
으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모두 만들 수 있는 돈이 일억 냥. 그래도 일억 냥이 부족하다. 물론 가문
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업채를 정리하면 못 만들 것도 없지만 수지상의
말대로 시간이 없다.
"일단 돈과 놈을 동시에 찾아야 합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 저는 나가서 돈을 구해보겠습니다."
협박한 놈을 찾으면 좋겠지만 설가장의 이목으로도 찾지 못한다면 세상 누
구도 찾을 수 없다.
낙양에서는 개방이나 여타 문파보다 설가장의 이목이 우선한다.
그런 설가장의 이목을 완전하게 피했다는 것은 놈이 낙양 안에 없다는 소
리다.
바쁜 일이 있을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인지 협박 서찰을 받은 지 벌써
이틀이 지났고 수지상이 낙양의 모든 곳을 돌아다닌 끝에 일억 냥을 만들
어 왔으나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결국은 그 방법밖에 없나?'
"수총관, 이것 좀 보시오."
하루 종일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는지 피곤한 얼굴의 수지상
을 향해서 설태만이 주섬주섬 꺼내놓는 것이 있었다. 새하얀 전표다발이었
다.
"전부 백만 냥이오. 지난 열흘 간 딴 것이고."
"소장주!"
수지상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밤마다 안 보인다 했더니 그 동안 투
자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신분 보장도 확실히 되고 판 당 백만 냥씩 거는 판도 있소."
이어지는 설태만의 말에 수지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룻밤에 수천만 냥
이 오가는 도박장이라니. 언제 낙양에 그런 곳이 들어섰단 말인가. 그것도
설가장의 이목을 속이고….
"아니되오이다. 너무 위험합니다."
설태만의 의도를 짐작한 수지상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투자를 이용
해서 나머지 일억 냥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아니면 지금에 와서 무슨 방법이 있는 게요? 나 하나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오, 가문이 멸망한단 말이오. 도망 갈 수도 없소. 가문에 있는 모든 이
들이 관련되어있는데 내가 사라진다고 일이 해결되오? 속임수 같은 것이 의
심스러우면 수총관이 한 번 가보시오."
"으음!"
수지상이 내지르는 침음성이다. 설태만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가 사라진
다 하더라도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설태만의 인피구가 씌워진 표운의
시체와 구자인이 낙양성주에게 넘겨진다면 그동안 설가장이 저질렀던 모든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됨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설태만의 투자실력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른 면
에 있어서는 개차반이란 말을 듣고 있지만 무공과 투자 실력은 장주인 설검
후도 인정하는 바가 아니던가. 물론 장주가 인정하는 것은 무공 실력밖에
없지만….
"하지만 소장주…."
그러나 아무리 출중한 투자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도박에 모든 것
을 걸어버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한 번 가보기나 하시오. 그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가보지요."
설태만이 저렇게 나올 때는 어쩔 수가 없다. 일단 다녀와서 설득을 해도
해야한다.
"가실 때 이 반지를 끼고 가시오. 내 친구와의 암호요."
* * *
따각! 따각! 따각!
한 필의 말이 끌고 있는 평범한 마차. 휘장이 쳐있어 안쪽에 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마차가 어둠 속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복면을 쓰고 있는 인물이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앉아있
었다.
'철저한 자들이군. 명패의 확인에다 눈까지 가리고 손님을 모신다… 이건
가?'
수지상이었다. 설태만이 쓰고 있던 면구와 복면을 착용하고 도박장을 정탐
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십칠 번 손님이시군요. 오르시지요."
어느 정도 왔는지 모르지만 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마차를 오르는 걸음
걸이로 볼 때 살집이 좀 있는 몸에 약간의 무공도 익히고 있는 것 같았다.
수지상은 내력을 총 동원하여 외부의 동정을 살폈다. 길을 기억해야 함이
다. 눈이야 어차피 가려져있으니 방법이 없는 것이고 코끝을 스치는 냄새까
지 파악하여 마차가 가는 곳을 알아내야 한다. 그에게는 그럴 필요성이 있
었다. 지금 상태로 보았을 때 설태만을 말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았고 또한 투자 아니면 설가장이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손님을 태우던 마차가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조금씩 빨라
지고 있었다.
'응? 이 냄새는?'
결코 낙양의 번화가에서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바로 청루에서만 나는 냄
새. 인간과 짐승이 오물이 섞여서 나는 냄새였다.
그러나 그 냄새는 이내 사라지고 마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수지상
은 내심으로 웃음을 흘렸다.
청루거리를 지나서 갈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다. 바로 멀리 망산이 보이는
곳에 서있는 폐가 한 채.
과거 어느 돈 많은 자가 부모의 묘를 망상에다 쓰고 그 곳을 지켜보기 위
해서 지었다는 거대한 저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귀신이 나오는 집이
라 해서 낮에도 들어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이제 일각 정도만 가면 그곳에 도착한다.'
'응?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출구가 있었나?'
이곳에 대해서는 수지상도 알고 있는 집이다. 그러나 지금 마차가 움직이
고 있는 장소는 밖이 아니었다. 거의 동굴 같은 곳을 통과하고 있는지 눅눅
한 냄새와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다 왔습니다. 안대를 풀고 내리십시오."
수지상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정확하니 일각 후에 마차가 멈춰
섰고 문이 열린 것이다.
가장 먼저 수지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환한 불빛이었다.
그리고 실내의 이곳, 저곳을 움직이며 술을 따르고 있는 반나의 미녀들,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 되어있는 아방궁이었다. 그리고 허공 가득히 맴돌고
있는 뿌연 연기는 전형적인 도박장의 풍경이었다.
단지 시끌시끌한 소음이 없이 조용하다는 것이 여타의 도박장과 다른 점이
었다.
'이것은… 앵속?'
수지상의 몸이 우뚝 멈추어 섰다. 뿌연 연기가 연초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앵속이었던 것이다.
'오셨소, 낙형. 며칠 안 보이더니….'
그의 귀속으로 들려오는 전음이 하나 있었다. 아마 소장주가 말한 장형이
란 친구인가 보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소.'
'목소리가 좀 이상한 것을 보니 피곤한 모양이오. 우리 저쪽에 가서 좀 쉽
시다. 피곤할 때 투자를 하게 되면 백이면 백 패배요.'
"여기, 차."
옆을 지나가는 여인네를 불러 세운 장대근이 차를 주문하고 두 사람은 쉬
는 장소로 보이는 곳에서 편안하게 자리를 했다.
복면 아래쪽을 들고 차를 마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오늘 낙형에게 좋은 것 하나 보여주겠소.'
그리고 수지상을 데리고 간 곳은 한쪽 구석에 있는 밀실로 보이는 곳이었
다.
'저기를 보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있고 그곳을 통해서 무엇인가
를 보라하고 있었다.
구멍을 통해서 안쪽을 쳐다본 수지상이 비명소리가 새어나오려는 입을 틀
어막았다.
복면을 벗은 채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인물, 중원의 삼대 거부중의 하
나인 우부전노 만여해였다.
'저자도 이곳의 고객이란 말인가?'
'저자가 바로 그 유명한 우부전노요. 나도 이곳에 와서 언뜻 들은 이야기
요. 아마 판 당 백만 냥씩 하는 곳에만 있는 모양입디다.'
놀람의 연속이었다. 낙양에 만여해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누구이기에 저런 거물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단 말인가.
장형이란 친구가 한판 한다며 자리를 뜨고 수지상은 실내를 가만히 살펴보
았다.
도박장이라 했지만 안에서 하는 것은 투자 한 가지밖에 없었다.
수만 냥의 판돈이 단 한 번의 손짓에 승부가 갈린다. 땄을 때의 그 느낌은
어떤 도박도 따르지 못한다. 당연히 돈 있는 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여어! 오늘 낙형을 만나서인지 몰라도 운이 좋구먼? 금방 가서 십만 냥을
땄소.'
장대근이 다가오면서 하는 소리였다. 수지상이 또 한번 놀랐다. 거의 이
각 정도밖에 안 된 시간에 십만 냥을 땄다고 하고 있다. 소장주의 말에 의
하면 이 장형이란 사람의 투자실력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 하였다. 그런
자가 순식간에 거금을 따왔다. 소장주의 생각이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 같
았다.
장대근의 눈이 무엇인가 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 물주 앞에 놓인 돈이 너무 많아서 인지 반나의 미
녀가 전표다발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따라오시오, 낙형.'
이번엔 또 어디로 데려가려 함인가. 전표다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수
지상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미녀 뒤쪽으로 움직이면서 그녀가 들어가고 있는 문을 가
리켰다. 새하얀 종이 뭉치들, 엄청난 양의 전표다발이 수지상의 눈에 들어
왔다.
'내 저 속에서 잠을 한번 자 보면 여한이 없겠소.'
입맛을 쩍쩍 다시는 장형이란 친구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족히 수억 냥이
나 되어보이는 전표다발들이 수북하니 쌓여있었다.
저 돈만 있으면 설가장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었다.
어떻게 하룻밤을 보냈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올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간밤에 갔던 길과 다르게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어떻소, 수 총관."
도착하자마자 설태만이 수지상을 향해서 물었다.
"소장주의 말대로 속임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부전노 만여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만여해를 보았단 말이요?"
더 확실해 진다. 우부전노 만여해가 고객으로 있는 곳이라면 절대 속임수
를 쓰지 못한다. 그를 속였다가는 중원에서 살아가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누
구라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소장주. 한 번 추진해 보지요. 단 아니다 싶으면 바로 손을 떼
야 합니다."
"알았소, 총관."
도박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진 것 때문인가 평소
에 그렇게 냉철하던 수지상도 도박장에 한 번 다녀온 이후에는 그것으로 모
든 것이 해결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래도 아직은 한 가닥 이성의 끈이 남아있는지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감
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불안감도 다음날 아침이 되자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천만 냥.
아침에 도착한 설태만의 품속에 무려 천만 냥이라는 거금이 들려있었던 것
이다.
하룻밤의 투자로 설가장을 이년 정도 꾸릴 수 있는 금액 생긴 것이었다.
"내 뭐라 했소, 수총관. 그곳은 완전히 금맥이라니까요."
설태만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이 상태로 십 일만 다니면 이억
냥을 채울 수 있다.
그럼 자신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아버지의 걱정거리도 덜게된다. 아직
말은 안 했지만 두 달 후면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내려오실 것이다. 그때는
자신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천무맹 부맹주의 아들로, 이제는 당당한 아들
로 인정해 줄지 모른다.
다음날도 설태만의 품속에 같은 금액의 돈을 가지고 귀환했다. 그 다음날
도….
그러나 설태만의 운은 그것까지였다. 삼천만 냥이란 거금을 벌고 난 후에
는 더 이상 돈을 딸 수가 없었다.
잃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백만 냥 정도밖에 따지를 못했다.
장형이란 친구는 엄청나게 무서운 투자실력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자신에게
는 푼돈일 뿐이었다.
하룻밤에 천만 냥은 벌어야 기간 내에 이억 냥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삼 일간 삼천만 냥을 땄고 나머지 사일동안은 백만 냥씩 사백만 냥
밖에 따지를 못했다. 그것이 수지상과 설태만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잃기라도 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는데 계속해서 따고 있으니 발을 뺄
수도 없다.
설태만이 간밤에 오갔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판 당 백만 냥이라니 너무 약하지 않소이까? 우리 고향에서는 돈에
제한을 두지 않소이다. 사내들이 배포가 있어야지…."
새로 들어온 인물이 하는 말이었다. 거의 이천만 냥 가까이 잃었다가 간신
히 한판을 먹었는데 오백만 냥밖에 되지 않자 그것이 불만인 것 같았다.
"어떻소? 여기 있는 우리끼리 큰판 한번 해보는 것이. 돈 싸들고 저승 갈
것도 아닌데…."
"그럼 어느 정도의 판돈이 좋을 것 같은가."
만여해였다.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만여해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다. 긴장을 하게되면 복면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코를
만지는 독특한 버릇 때문이다.
특히 그가 물주가 되었을 때 자신이 만들어놓은 숫자에 상대방이 돈을 걸
게되면 꼭 두 번씩 코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투자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물주가 흔들고 있는 주사위의 소리로 숫자를
알아맞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버릇이나 습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런 세심한 관찰력이 큰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최소한 삼억 냥 이상으로 합시다. 돈도 원하는 대로 거는 것으로 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내일 돈을 준비해 오시오."
제한 없이 돈을 걸 수 있다면 한판으로도 억 단위 이상을 벌 수 있음이다.
그러나 잃었을 때도 그만큼 타격이 커진다.
승승장구하다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날릴 수 있는 것이 투자다.
'그래! 만여해. 코를 만지는 버릇,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면?'
"수총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돈을 따온 설태만의 실력을 인정했는지 위험성 여부만 묻고 있었다
. 이젠 그도 완전히 투자란 놈의 마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소, 오직 물주가 만여해일 때 그때만 노리면 되오."
설태만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수지상을 쳐다보았다. 확실하게 보장된 수순
이라는 것이다. 시간 또한 닷새밖에 남지 않았고 그 안에 승부를 봐야한다.
"알았소이다, 소장주."
그날 밤 수지상이 선태만의 앞에 일억육천만 냥을 내놓았다.
"우리의 터전인 이곳까지 모두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렸습니다. 값을 후하게
쳐준 덕에 간신히 마련한 돈입니다. 기한은 오 일입니다."
모든 가산을 다 정리했다는 말이었다. 만일 잃으면 낙양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도박장과 열 개의 주루 등 설가장의 모든 기반을 포함하여 이곳까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의 표정은 뜻밖에도 담담했다
. 결코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투자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 * *
천장에 박혀있는 야명주의 빛이 사방을 밝히는 화려한 실내, 서른 평 남짓
한 실내의 중앙에 푸른색의 둥그런 대리석 원탁이 놓여있다.
그 원탁 위를 보면 정방형으로 새겨진 네모 칸이 다섯 개씩이 한 묶음으로
되어 위 아래로 나뉘어져있고 그 사이에 금색으로 치장된 하나의 네모 칸
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다섯 개의 네모 칸 속에는 이부터 시작하여 육까지의 숫자
가, 위쪽에 있는 칸 속에는 팔부터 십이까지의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었
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하나의 금색 네모 칸 속에는 모든 숫자의 중간 값
인 칠이 적혀있었다.
"호! 오늘은 한 분이 더 늘었군요. 참여인원은 많을수록 더 흥분되는 것이
투자 아니겠습니까, 먼저 투자를 확인합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처음 오
신 분이 선택하시오."
숫자가 새겨져있는 원탁 위에는 수십 종에 달하는 투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속임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도구마저 철저하게 확인
하고 있는 것이다.
설태만이 잡은 것은 상아로 만들어진 유백색의 투자였다. 가장 좋아하는
재질의 투자였고 상아로 만들어진 투자는 언제나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모서리 부분도 선명하고 전혀 흠잡을 때가 없는 최고의 명품중의 명품이었
다.
"그럼 물주를 정하겠습니다. 먼저 물주가 선택되면 그분을 기준으로 오른
쪽으로 돌겠습니다."
이들이 하고 있는 투자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의 경우에
는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가장 높은 수나 낮은 수가 나온 사람이 모든 돈
을 먹는 그런 도박임에 반하여 이곳에서 하고 있는 투자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물주가 통 안에 있는 주사위를 흔들면 나머지 사람들은 두 수의 합이
높은 쪽이 될 것인가 낮은 쪽이 될 것인가를 선택하여 돈을 걸게 된다. 모
든 사람들이 돈을 걸고 난 후에 물주가 통을 열어서 주사위의 숫자를 확인
하고 합이 높은 수가 나오게 되면 낮은 쪽에 걸었던 사람들은 돈을 잃게되
고 높은 쪽에 걸었던 사람은 돈을 따는 방법이다. 원탁 위에 숫자들이 두
곳으로 나뉘어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주사위 숫자와 일치하는
곳에 돈을 걸면 세배를 되돌려 받게되는 규칙이 있는 동시에 칠 이라는 숫
자가 나오면 물주가 모든 돈을 먹게되는 규칙도 있다.
또한 속임수를 쓰지 못한다는 것이 장점이다.
설태만의 바로 옆에 있던 인물이 물주가 되면서 도박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 반 시진 정도는 서로간의 탐색전이다. 먼저 주사위 소리를
감지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높은 수와 낮은 수를 판단해야 했고 칠이 되는 수를 알아내야 한다.
'높은 수!'
어느 정도 주사위의 특성을 파악했는지 설태만이 속으로 뇌까리며 높은 쪽
에 백만 냥짜리 전표 한 장을 올려놓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낮은 곳으로
돈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이번 판은 쉬겠소."
무제한 판을 제안했던 인물이 머리를 툭툭 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신 같은 놈. 투자는 무슨….'
설태만이 보기에는 완전히 봉이었다. 아무런 개념도 없이 즉흥적으로 돈을
걸고 잃고 있었다.
어쩌다 돈 많은 부모를 두었는지 몰라도 저런 식으로 살면 얼마가지 않아
서 거지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점점 말도 많아지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놈이었다.
드디어 만여해가 물주가 되었다.
'다시 한번 버릇을 파악해야 한다.'
설태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전 내공을 귀로 집중시켰다.
'사 육, 삼 오, 일 이, 삼 사, 이 삼, 오다!'
다른 이들의 주사위는 파악하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운 반면에 만여해의 주
사위 소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초보라는 소리다.
'어디.'
오백만 냥을 들고 오(五)위에 올려놓았다. 역시 만여해의 손이 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사위의 합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는지 그가 잃을 때마다
왼손이 얼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습관이란 것을 본인은 절대 알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몇 번을 더 해보자 이제는 확신이 섰다. 물주가 넘어갔으니 만여
해가 다시 물주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난 지금부터 목숨을 걸겠소. 어차피 당분간 이 짓도 못하게 되었는데 캬
악!"
또 그 허풍쟁이다. 지금껏 삼억 냥 정도를 잃고 나서 눈에 뵈는 게 없어졌
나 보다. 그런데 당분간 이 짓도 못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럼 오늘
밤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우리 차 한 잔씩만 마시고 합시다."
계속되는 도박에 피곤했는지 허풍쟁이가 또다시 쉬자고 하고 있었다. 설태
만도 약간 피곤했는지라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지금껏 거의 이천만 냥 정도 번 것 같았다. 그것도 전부 만여해를 집중 공
략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아까 그 말이 무슨 소리요? 당분간 이 짓도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아야한다. 이 무제한 판이 없어진다는 것인지 아니만 이 허
풍쟁이만 그만둔다는 것인지 확실하게 파악을 해야한다.
"아! 오늘 처음 와서 모르겠구려. 무제한 판을 할 사람들은 여기 있는 우
리들밖에 없는데 돈이 떨어져간단 말이요. 그래서 돈도 가지러 갈 겸해서
한 십 일정도 쉬기로 했소. 이곳 도박장 주인 놈이 돈은 다 벌어간다니까.
구전이 삼 할이라니 이거 말이나 되오?"
'빌어먹을.'
설태만이 내심으로 욕설을 내질렀다. 구전이니 뭐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자신은 이제 시작인데 저들은 그만두려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밤에 승부를 걸어야한다는 말이다.
다시 판이 돌기 시작했다. 그 허풍쟁이 친구는 자신의 말대로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판에 무려 오천만 냥을 올려놓고 있었다.
대 여섯 판을 잃자 호흡이 거칠어지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물주를 노려보
다가 물주가 주사위 통을 조금만 늦게 흔들어도 어서 하라며 호통을 쳐댔다
.
그 호통소리 때문에 간혹 주사위 소리를 놓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조용히 하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벌써 육억 냥이나 잃은 사람에게 헛소리했다가는 날 좀 죽여주시오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설태만이 물주가 되었다. 자신의 앞에 물주를 잡았던 사람에게 연속 세 판
을 내리 잃은 허풍쟁이가 충혈된 눈으로 주사위 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숫자는 오(五)였다. 허풍쟁이는 지금껏 계속해서 잃었던
숫자였다.
그의 습관으로 보았을 때 한곳을 향해서 세 번을 가고 난 후에야 다른 곳
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만 냥, 그 다음엔 이천만 냥, 그리고 마지막엔 오천만 냥을 걸
고 있는 것이다.
"에이! 시펄 오(五)에 한 번 더."
'헉!'
설태만이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소리를 그대로 삼켰다.
설마 또 오라는 숫자에 걸지는 생각도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전부 낮은
수로 돈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었다.
물주를 잡아서 일억 냥 정도를 땄었는데 이번 한판으로 다 날아가고 허풍
쟁이 놈 때문에 일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돈은 이억 냥밖에 없다.
그 판이 지난 후부터는 설태만의 운이 다했는지 주사위 소리와 숫자가 일
치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다시 이천만 냥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 설태만이 기다리는 것은 만여해가 물주가 될 때밖에 없다. 한방에 모
든 것을 만회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드디어 만여해가 물주가 되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계속 백만 냥씩을 걸며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허풍쟁이는 계속해서 같은 수법으로 하고 있었고 만여해에게도 많은 돈을
잃었는지 거의 폭발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일 육, 이 육, 삼 사, 사 사, 이 오, 사….'
"거 빨리 세우지 않고 뭐하쇼?"
허풍쟁이가 거칠게 소리치는 바람에 사사인지 사삼인지 확인을 하지 못하
고 말았다.
자신이 전 내공을 집중하고 있는데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건만 투자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설태만에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투자도 거의 막판으로 치닫고 있는지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피곤한
기색이 연연했다.
'칠이나? 팔이냐?'
설태만이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고 있을 때 만여해의 입에서 흘러
나온 한마디는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이 판만 하고 물주를 넘기겠소."
도리가 없었다. 이번 판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좋소, 나도 이판에 모든 것을 걸겠소. 구에 전부 오억 냥이오."
오억 냥이란 말에 느슨하던 실내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순간 설태만의 눈동자는 만여해의 왼손을 쫓고 있었다.
'올라 갈 것이냐 말 것이냐, 어디로 갈 것이냐, 만여해.'
설태만의 눈에 얼굴 쪽으로 향하고 있는 만여해의 손이 보이고 있었다.
'올라갔다, 아냐 한 번만, 한 번만 더 두고 보자.'
"좋소, 나도 십에 삼억 냥이오."
설태만의 왼쪽에 있는 자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설태만에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직 만여해의 손만
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여해, 어찌 할 거냐.'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설태만의 눈은 만여해의 왼손을 쫓고 있었다.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목이 타는 것 같은데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도박을 하면서 느끼는 이 기분 바로 이런 흥분감 때문에 도박을 하는 것이
다. 자신이 돈을 따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사실도 생각나지 않는
다. 오직 통 안에 있는 주사위 합이 얼마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일뿐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기분은 날아갈 듯 즐거워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
이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그의 눈에 또다시 위로 올라가고 있는 만여해의 왼손이 보였다.
'확실하다. 저 속의 주사위는 사사다.'
이제 확신할 수 있다. 나머지 한 명이 낮은 숫자 쪽으로 일억 냥을 놓았는
데 만여해의 왼손은 반응이 없었다.
"저쪽 분은 안 거시오? 그럼 통을 열겠소."
"잠깐! 걸겠소. 팔이오, 팔에 걸겠소."
만여해가 통을 들어올리려는 것을 중지시키며 설태만이 외쳤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던 모든 전표를 팔이라고 쓰인 숫자위로 던지듯이 쏟아
놓았다.
"형씨, 좀 더 놓지. 내가 듣기에도 분명 구 아니면 팔이었는데."
허풍쟁이가 번득이는 눈으로 설태만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자, 열겠습니다."
주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다. 무려 십오억 냥이 이번 한판에 걸린 총
금액이다. 지금껏 이번보다 큰판은 없었다.
'팔이다, 팔. 분명 팔이다.'
입안이 바싹 타오른 설태만이 주사위 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팔이란 숫자
를 외쳤다.
"그런데 한 여름도 아닌데 이곳에 왜 이리 날파리가 많누."
만여해가 왼손을 들어올리며 날파리를 쫓듯이 얼굴 쪽에서 살짝 휘둘렀다.
쿠웅!
'주먹,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어.'
설태만의 심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왼팔이 올라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가 손을 펴고 있었다는 것을 놓친 것이다. 만여해의 습관, 자신이 졌을 때
는 주먹을 쥔 상태로 왼손을 코 쪽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이런 시펄! 에이! 쌍!"
나머지 인물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사(四)와 삼(三), 합이 칠이
었다.
간밤에 단 한 번도 만들지 못했던 칠이라는 숫자가 가장 큰판에서 터진 것
이다.
"허허! 내가 오늘 운이 틔었구먼.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투자를 한지 오
년 만에 처음이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만여해가 개평을 준다는 말도 나머지 삼인이
투덜거리며 다음에 꼭 이겨보겠다는 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가 쓰였던지 홀린 게 틀림없었다. 어찌 삼억 냥이란 돈을 하룻밤에 날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설가장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복면도 벗지 않은 채 들어왔
는지 그를 기다리던 수지상이 복면과 인피구를 벗겨서 서둘러 안으로 들어
왔다.
"정신차리시오, 소장주! 소장주!"
찰싹!
"수 총관, 이제 어쩌면 좋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단 말이오, 모든 것이….
"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수지상을 쳐다보며 설태만이 울먹였다.
가문의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사업채를 비롯해서 자신이 딛고 있는 설
가장까지 모두 사라졌다.
"아직 소장주는 죽지 않았소이다. 살아있으면 기회는 있소."
설태만의 행색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도 홀렸던 것이 틀림없다. 못
하게 말려야했을 자신이 옆에서 더 부추겼던 것이다.
설태만의 표정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 '내 저속에서 잠을 한번
자보면 여한이 없겠소.' 그 도박장에서 보았던 새하얀 전표다발들, 족히
수억 냥은 될 것 같아 보였던 전표뭉치였다.
"잘 들으시오, 소장주. 내가 그곳을 알고 있소. 도박장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단 말이오."
수지상의 말에 설태만의 얼굴색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곳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다시 돈을 찾아올 수 있다는 소리다.
"아직 그곳에서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않았소. 감시하는 애들이 있으니 무
슨 움직임이 있으면 연락이 올 것이오. 그러니 힘을 내시오."
수지상의 말을 들은 설태만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구전이 삼 할이라 했
었다. 어젯밤 자신들의 판돈이 십오억 냥은 되었으니 최소한 사억냥 이상이
있을 것이다.
'그래! 가서 찾아오면 되는 거야. 어차피 내 돈이었어.'
이제 완전하게 정상을 되찾았는지 설태만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저승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 나온 자의 눈빛이었다.
"전부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이 짓도 제
가 잘하는 것 중 하나잖아요?"
'어차피 가문을 살리는 일이고 망설일 일도 아니다. 다 죽이고 찾아오면
된다. 나를 협박한 놈도 돈을 전달할 때 죽이면 그것으로 끝난다.'
설태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기도박도 아니었고 정당한 도박에서
돈을 잃었는데도 자신의 것이었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힘으로
돈을 찾으려하는 것이었다.
* * *
"그동안 수고들 하셨습니다."
망산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이 한 눈에 보이는 폐가.
앞마당에 가득 들어찬 이백에 달하는 인물들이 대청마루에 있는 사람을 쳐
다보고 있었다.
백산이었다.
백산이 이들을 만난 것은 소운 때문이었다. 풍신개가 키웠다는 개방과는
또 다른 세력들.
거의 삼백여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신분을 숨긴 채 하남성의 곳곳에 산재
하여 주루 및 도박장 등에서 갖가지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 덕분에 설가장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이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설가장 파멸의 가장 큰 일등 공신들이 바
로 이들이다.
"아니오이다. 아버님의 소식을 영원히 못 들을 줄 알았소이다."
삼백여 인물들의 수좌인 동한과객(冬寒過客) 구환(邱丸)이었다. 그들은 풍
신개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거의가 원명 교체기에 태어났던 이들은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란으로 인해
서 부모를 잃고 세상을 떠돌던 중 풍신개의 구함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여러분께 부탁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청루를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바꾸어 주십시오."
청루는 이제 구룡전장, 즉 석숭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곳을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설가장에서 나왔던 삼억 냥, 그 돈이면 청루를 바꾸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이다. 그곳에 있는 여자들이 창기가 아닌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런 곳은 인위적으로 바꾸려한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
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살아났으
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유일한 친구였던 표운의 여자인 표령이 기거했던 곳이었기에 이렇게 신경
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갈 분은 돌아가시고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합시다."
앞마당에 있던 백여 명의 인물들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고 나머지 인물들은
그 자리에서 다른 옷을 걸치고 있었다.
관부의 군관들이 입는 군복이었다.
"자, 갑시다."
백산을 비롯한 백여 명의 인물들이 떠난 폐가는 쓸쓸한 적막감만 맴돌고
있었다.
"어서 오게, 백 공자."
"금의위 영반 아니십니까, 엄청 근사하오이다."
백산이 너스레를 떨며 도착한 곳은 그들이 도박장으로 썼던 폐가가 내려다
보이는 구릉으로 울창한 수목들로 덮여있었다.
"얼마나 동원했기에 저리 많소?"
"천 명이 조금 넘네, 오늘 설가장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변함없네.
"
"감사하오이다, 영반. 딸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성주의 딸에 대한 복수도 복수지만 감히 대명의 군관을 살해하고도 목숨
을 부지하고 활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오. 그것은 황권
에 대한 도전이오."
평범한 상인으로만 보였던 석숭의 기세가 달라지며 추상같은 위엄이 뻗어
나왔다.
그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설태만에 대한 것을 전혀 몰랐었다. 그러다 백
산이 꾸미는 일에 참여하면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고 무섭게 분노했다.
감히 일개 무부가 대명 관리의 딸을 겁탈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군관을 살
해한 후에 그 죄까지 은닉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명의 황실의 위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결코 그냥 묵과해서는 안 되
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가 백산보다 더 적극적으로 설가장의 멸문을 종용했다.
설태만만 처리하려 했던 백산도 석숭의 서슬에 여기까지 오고 말았던 것이
다.
"그놈들도 만만치 않던걸요."
처음 설가장을 방문했을 때 정문을 지키던 위사들의 실력이 보통이상이었
기에 군관들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금의위 백 명과 자네동료, 또한 풍신개 어르신의 자식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그리고 저 안에서 살아나올 자들도 몇 명 없을 것이네."
엄청난 전력이 모여있었다. 석숭이 흑객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불렀던 금의
위 위사들마저도 전부 이곳으로 투입한 모양이었다. 금령은령 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금의위 위사들의 실력도 무림의 고수들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오는군. 그런데 자네 위험하지 않겠나?"
"위험은 무슨… 몇 놈만 작살내고 그냥 도망 나오면 되는걸."
밤하늘을 가르며 수백의 인형들이 폐가를 포위하는 것을 쳐다보던 백산이
새하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백산이 저런 미소를 보일 때는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죽음을 집행하기
전에 보이는 살기(殺氣).
* * *
"수 총관, 너무 조용한 것 아니요?"
설태만과 수지상이었다. 폐가에 도착한 그들은 사방을 포위한 채 내부 동
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에 있을 겁니다."
설태만의 손짓에 따라서 천하조의 조장인 독검(毒劒) 방이가 십여 명의 부
하들을 데리고 은밀하게 폐가 내부로 스며들었다.
폐가의 주변 곳곳을 살피던 방이로부터 정원 쪽이나 지상에 아무것도 없다
는 수신호가 오고 나머지 일행도 조용하게 안쪽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 위한 수색이 시작되었으나 그 어디에도 출입
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 총관, 이곳이 맞습니까?'
불안한 음성으로 설태만이 수지상에게 전음을 날렸다. 자신들이 갔던 도박
장 안에는 상당한 인원이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인기척이 없었던 것
이다.
만약 이곳에 도박장이 없다면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
또다시 어디서 그들의 흔적을 찾는단 말인가. 오늘밤에는 언제나 고객들을
태우러 다니던 마차도 오지 않았다.
못내 불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비비대며 이리저리 서성이던 설태만의 발걸
음이 우뚝 멈췄다. 자신이 밟고 있는 바닥의 느낌이 다른 곳과 달랐던 까닭
이었다.
"어?"
그의 발치에서 약간 푸릇푸릇한 잡초가 한 움큼 떨어져나간 자리에서 나무
판이 나타난 것이다.
설태만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며 소리 없이 수하들을 불렀다.
조용히 위에 덮여있던 흙을 치워내자 일장정도의 나무판으로 덮여있는 통
로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곳은 설태만과 수지상이 왔던 통로가 아니었다. 실내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내려본 적이 없었고 수지상이 느끼기에는 동굴 같은 곳을 통해
서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확인을 하기 위해 방이가 통로를 따라서 들어갔고 잠시 후 아무것
도 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럴 리가…."
수지상과 설태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친숙한 느낌. 비록 실내는 깨끗하게 정리되어있지만 수십 번을 드나들었던
곳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앵속의 냄새, 분명 어
제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투자를 했던 곳임에 틀림없다.
"이상하군요. 이곳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의 말에… 헉! 이곳을 감시하던
애들을 데려와라, 어서!"
수지상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하며 옆에 있던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소장주님! 적입니다. 기습입니다."
감시병을 데리러 간 부하는 오지 않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부하들
이 허겁지겁 통로를 통해서 도망치듯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기습이라니?"
단 한 치의 비밀도 새어나감이 없이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기습이라니,
설태만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부하 중 한 명이 활을 맞고 뛰어들고 있는데 그 화살이 문제였다.
바로 관군이 쓰는 화살이기 때문이었다.
"관군입니다, 소장주님. 수천의 관군이 새카맣게 깔려있습니다."
부하들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하며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실내에는
설가장의 인원으로 가득 들어차버리고 말았다.
"무슨 소리냐? 관군이라니. 관군이 왜 이곳에 있다는 거냐. 혹시…."
"소장주의 생각도 그렇소? 그놈이요! 그 협박하던 놈."
설태만과 수지상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놈의 입을 막기 위해서
일을 벌이다 이지경이 되었는데 이미 낙양성주의 귀에 들어갔다면 설가장은
끝장이 났음이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질 않은가.
"통로를 찾아라. 우리가 들어왔던 곳 말고 다른 통로가 반드시 있다."
거의 체념의 표정을 짓고 있는 설태만을 대신해서 수지상이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아직 자신들이 살아있기에 방법
을 찾아야 한다.
도박장으로 쓰였던 실내가 순식간에 북새통으로 변했다. 거의 사백여 명의
인물들이 이 구석 저 구석을 헤매면서 통로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움직
이고 있었다.
한결같이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 있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소장주님!"
"그래, 통로를 찾았느냐?"
부하 한 명의 부름에 희색이 된 설태만이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러나 통로에 대한 소식이 아니었다. 부하 한 명이 가져온 것은 서찰이었
다. 협박을 했던 놈이 썼던 것과 같은 재질의 종이, 단 한 줄의 글만 적혀
있었다.
'생각을 바꿨다.'
"이럴 수가. 그럼 이 도박장도 그놈이…."
서찰을 읽어본 설태만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올가미였다. 장대근이란 놈도, 우부전노도, 그리고 이곳 도
박장도,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덫이
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였던 것이다.
"소장주!"
"수총관, 모든 것이 끝났소. 모든 것이… 설가장도 나 설태만도 우리모두
가 말이요."
아무런 배경도, 힘도 없었던 고아 계집 한번 잘못 건드린 대가치곤 너무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실수도 뭐도 아니었다. 한순간의 유희였다. 파리하니 병색이 완연했던 얼
굴에 순간적인 욕념이 동했고 몇 마디의 감언이설에 그냥 취할 수 있었던
평범한 계집이었다. 그 계집 하나 때문에 설가장이 멸문되고 있었다.
"이런 것을 투고 천벌이라 하는가? 큭! 큭! 큭!"
허탈한 웃음소리가 설태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세인들이 자신을 두고 설
가치룡이라 부르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대 설가장의 치욕일 뿐이었다.
"크 하하하! 프! 핫핫핫!"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설태만이 아닌 친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것, 그것 하나
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다.
"정신 차리시오, 소장주! 우린 아직 살아 있소이다."
자신도 안타까웠다. 일이 이지경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소장주
를 노린 완벽한 덫이었다. 그의 성격까지도 세밀하게 파악하여 모든 것을
준비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목숨이 붙어있으므로 끝난 것이 아니다.
부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상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설태만
의 지금 행동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수지상의 생각도 설태만과 일치하고 있었다.
설가치룡….
"살아있다고 하셨소? 지금 이곳에다 독이라도 뿌리면 우리는 어찌되겠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들어왔던 사방이 밀폐되어있는 곳이다. 처음 들어
왔던 통로도 이미 막혔다. 설사 그곳을 뚫는다 하더라도 관군이 지키고 있
는데 나갈 수도 없다.
"커억! 독이다."
설태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으로부터 스멀스멀 내려온 새하얀
백무에 의해 부하들 몇 명이 목을 감싸안으며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는 것
이었다.
"호흡을 멈추어라. 그리고 통로를 찾아라!"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으로부터 독이 흘러나오자 설태만은
넋을 잃어버렸고, 다급한 심정이 된 수지상이 부하들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
다.
그러나 천장에서 내려오는 독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부
하들에게 그의 명령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
폐쇄된 지하 공간이라는 것과 독이라는 것이 준 공포는 순식간에 도박장을
아비규환의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공포를 견디다 못한 부하들 중의 한 명
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동료를 찌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카악! 퉤! 이게 다 설가치룡 때문이라고, 설가치룡 때문에 이곳에서 죽는
것이라고. 저놈만 없었더라면 우리가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야
."
검으로 동료를 찔렀던 부하가 설태만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번득이는
그의 눈빛은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
터와 번득이는 눈동자가 너무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런 자였다.
"커억!"
설태만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인물이 뒤쪽에서 자신을 말리기 위해 다가서
던 인물의 가슴어림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날림으로 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팟!
"으악! 억! 크악!"
실내를 비추고 있던 야명주의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죽음을
알리는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어제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상황이 도래했다
.
죽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의 섭리이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기에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쏟고 때로는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되는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한다.
그리나 이곳 지하 도박장의 상황은 달랐다. 죽음 전에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무공을 익힌 무인이나 일반 양민이나 하등의 다
를 바가 없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광기
만이 존재했다.
무인들이었기에 그들에게서 표출되는 광기는 더욱 잔인했다. 한번의 칼부
림이, 한 번의 손짓이 모두 죽음과 직결되고 있었다.
모든 내공이 실린 수지상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자신과 설태만을
향해서 검을 찔러오는 부하를 향해서 권을 뿌려야 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들 중 가장 무섭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부하들에게 마저
설가치룡이라 욕을 먹은 설태만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이미 이성이란 단어
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 있는 모든 흑의인들이 적으로 보였다. 설가치룡 설태만을 죽이
러 온 관군으로 보였다.
"킥킥킥! 네놈들이 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나는 대 설가장
의 설태만이다. 설가장의 소장주란 말이다."
달려드는 부하들을 향해서 검을 뿌려대며 설태만이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전광일섬(電光一閃)!"
자신이 설가장의 설태만이란 말만 중얼거리며 부친인 설검후의 독문 검법
인 전광뇌우검법(電光雷雨劍法)의 일초를 앞에 있는 검은 인물들을 향해 뿌
려댔다.
"으악!"
자신의 검에 죽어가고 있는 관군과 그 옆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또
다른 관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힛힛힛! 나는 설태만이라고. 설가치룡이 아니라 낙양제일룡인 설태만이란
말이다."
"전광뇌우(電光雷雨)!"
전광뇌우검법 이초가 펼쳐짐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있던 인형들이 집단처
럼 쓰러지고 있었다. 관군이라 생각된 사오 명의 인물들을 해치우고 다른
관군을 찾고 있는 그의 눈에 또다시 한 명의 인물이 보였다. 겁을 잔뜩 집
어먹고 있는 것 같았다.
설태만의 마음이 고무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공만큼은 아버지
에게 인정받지 않고 있던가. 그 무공으로 가문을 몰락시키고자 하는 관군들
을 치고 있는 것이다.
"소장주님!"
놈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으나 설태만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
다. 비쾌하게 몸을 날리며 놈의 목을 향해서 검을 밀어넣었다.
팟!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사라졌던 불빛이 들어왔다.
"우욱! 으흡!"
쨍그랑!
불빛과 함께 정신도 돌아왔는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목불인견(目不忍見)
의 참상에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고 있는 설가장의 인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동료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고 그들의
피가 바닥에 고여서 발을 적시고 있었다.
"소ㆍ장ㆍ주…."
불이 들어오기 전에 설태만의 검에 찔렸던 자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소리였
다. 지금껏 설태만의 검은 앞으로 내밀어져있었고 그의 검 끝은 이조의 조
장이었던 독검, 방이의 목을 관통하여 뒤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
다.
모든 설가장 인물들의 시선이 설태만을 향했다. 한결같은 그들의 눈은 어
이없어하는 빛이 역력했다. 방금 까지 자신들도 설태만과 똑같이 동료들을
살해했던 자들이었건만 부하의 목에 검을 찔러 넣고 있는 설태만의 모습을
쳐다보는 눈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너희 집안을 위해서
지금껏 봉사해 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동료를 살해했다는 자신들의 죄책감을 설태만이란 한 인간에게 전부 전이
시켜버리고 있었다.
"아니야. 난 아니야, 아니라고. 이게 아니라고… 킥킥킥! 이놈은 방이가
아니고 관군이었단 말이야. 우! 헷! 헤헤헤!"
설태만의 눈동자가 백태를 보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실성.
작금의 상황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정신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
다.
"통로다! 여기 통로가 있다."
싸움 중에 한 동료가 나가떨어지면서 벽이 부서졌고 그곳에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멍청히 서있지 말고 빨리 빨리 움직여라!"
설태만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던 부하들을 향해서 일갈한 수지상이 설태만
쪽으로 다가왔다.
찰싹! 찰싹!
"정신차리시오, 소장주!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어쩔 수 없었소. 소장주 잘
못이 아니란 말이요."
설태만의 정신을 되돌려 놓기 위해서 양쪽 뺨을 정신없이 후려갈기며 하는
소리였다. 그도 답답했다.
불이 들어온 순간에 설태만이 검만 내뻗고 있지 않았어도 다른 동료들과
같이 부하를 죽인 죄가 어둠과 함께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검을 멈
추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그의 검만이 방이의 목을 찌른 상태로 있었다.
결국 바닥에 누워있는 이백의 부하들이 전부 설태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꼴이 되어버렸다.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 죄책감을 덜어주는 희생양으로 설태만이 선
택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설태만을 부축하며 수지상도 부하들이
움직인 통로를 향해 이동해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거의 모든 인원이 통로 안
으로 들어섰을 때 또 다른 죽음이 시작되었다.
"윽! 억!"
"암기다!"
양쪽 벽으로부터 무수한 암기가 쏟아져나왔다. 피하고 할 틈이 없었다. 자
신의 손으로 동료를 죽이고 죄책감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그들에게 양쪽 벽
에서 쏘아지는 암기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저승으로 인도해버렸다.
"죽은 자의 시신으로 암기를 막아라. 그리고 전력으로 달려라!"
다시 한번 수지상이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자신부터 이미 죽은 부
하의 시체를 이용하여 방패로 삼고 몸을 날렸다.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를 죽인 것도 부
족해서 이제는 죽어있는 동료의 시체를 방패삼아 자신들의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팟!
"허억!"
"윽! 컥!"
어둡던 통로에 불이 켜지고 자신이 방패로 쓰던 시신과 얼굴이 마주친 수
십 명의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체를 놓치고 그 순간 날아온 암기에 맞
아서 쓰러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비무를 했던 동료의 죽어있는 얼굴은
자신들이 죽음의 함정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무섭도록 치밀한 안배였다. 가장 먼저 관군이 왔음을 알리고 지하에 한꺼
번에 몰아넣은 다음 서로 공멸 하도록 유도하는, 자신들은 힘 하나 안 들이
고 설가장의 인원을 몰살시키고 있었다.
바로 독안랑 서문천의 귀계였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서문천이 계획을 세
웠고 석숭과 석두는 옆에서 보조만 해 주었던 것이다.
"몇 명이나 나올 것 같은가."
바깥쪽 통로 입구, 수백 개의 횃불이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가운데
군복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 새카맣게 모여서 통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여 명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요?"
그들의 맨 앞에 있는 독안랑 서문천과 석두의 대화였다.
"석 대인 설태만은 어찌하실 겁니까?"
"서 대협 말대로 실성했다면 낙양을 활보하게 좀 두었다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독안랑 서문천, 진정 무서운 사람이었다. 인간의 심리 상태까지 노리는 치
밀한 함정, 거의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설태만의
상태까지 꿰뚫고 있었다.
독안랑 서문천의 짐작대로 설태만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미 눈동자에서
는 검은 색의 동공이 사라져 버렸고 입을 헤 벌리며 배실 배실 웃고 있었다
.
"키키키! 우 헷헷헷!"
위대한 아버지가 주는 중압감을 견디고 당당한 아들로 거듭나고자 했던 그
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에는 가문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그 책임을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실성이었다.
지하 도박장에서부터 조금씩 징후를 보이던 것이 통로를 지나면서 완전한
발작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오! 하늘이여!"
수지상의 입에서 절망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통로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온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관부의
관병들이었다.
그리고 군병들의 가장 앞에 있는 인물인 낙양성주 주상열과 설가장의 제일
조 조장인 패검 구자인,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포위망을 뚫으면?'
잡힌다면 기다리는 것은 참수형이다. 패검 구자인이 잡혀있으니 자신도 공
범으로 어차피 죽게될 것이다.
아직 설가장의 정예가 백여 명이 남아있다. 관병쯤이야 아무리 많아도 무
림인의 상대가 아니다. 일단 살아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수지상이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관병 쪽에서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곳에 설가치룡 설태만이라는 살인범이 있음을 알고 있다. 범인 은닉에
관련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목숨을 구할 수도 있으니 투항하라. 일각의 여유
를 주겠다."
"총관,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 조 무적조의 조장인 마영권 류진철이었다. 백에 달하던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 이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부하들과 함께 수지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
"어차피 투항하면 우린 전부 참수형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저쪽에서 관련자를 제외한다고 했으나 설가장 인물 치고 설태만이 살아있
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누가 있던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낙양에 살고 있는 대부분이 알고 있었으나 설가장의 위세 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격하라!"
수지상의 입에서 공격명령이 떨어지고 백여 명의 설가장 인물들이 관군을
항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관병들 속에서 튀어나온 백여 명 가량의 금의를 입은 자들, 그들의 무공은
가공했다. 설가장의 정예들이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주살당하고
있었다.
"금의위? 설가장 때문에 금의위까지 나섰단 말인가…."
더 이상 서있을 힘이 없었다. 금의위, 대명 황실의 특수 감찰기관이다. 대
명의 법전인 대명률(大明律)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 금의위 영반의 한마디
가 곧 법이다.
그들마저 투입되었다면 더 이상 살아날 방법이 없다.
'소장주, 소장주가 옳은 말도 하는군요. 소장주 말대로 우린 이제 끝났소,
맹에 있는 장주님까지도… 소 장주는 차마 내손으로 죽이지는 못하겠소.'
"크윽!"
수지상이 심맥을 끊어 자결을 선택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단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설가장의 모든 인원
이 전부 몰살을 당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사건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흔히 발생하고 지금도 세상 어느 구석
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사건에서 이일은 시작되었다.
힘없는 여인네의 순정을 져버린,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그런 조그마한 것
으로 인해서 구대문파보다 더 위세를 자랑하던 설가장이 멸망했다.
천무맹의 부 맹주로 있는 설검후에게는 아직 그 죄과가 적용되지 않았지만
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곳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다.
대명의 법률, 역대 어느 왕조보다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다. 특히 현 황제
인 영락제가 즉위하면서 태조인 주원장이 몰수했던 사법권을 금의위에게 다
시 부활시켜 줄 정도로 대명의 질서를 세우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중 가장 무섭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연좌제(連坐制)였다. 살인자를 은닉
해 주거나 도피시키는데 협조하게 되면 살인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대
명의 법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아직 한 명은 남아있었다.
"우! 헷헷헷! 나는 설가치룡이 아니다. 낙양제일룡 설태만이란 말이다. 아
버지가 천무맹의 부맹주인 설태만이라고! 힛!힛!힛!"
완전히 실성을 해버린 설태만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무림세가 중 최고가문이 완전하게 사라졌구먼."
키득거리면서 멀어지고 있는 설태만을 쳐다보며 독안랑 서문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아무리 강호무림에서 날고 긴다 해도 황실에 대항에서는 안 된다. 무공이
고강하여 일수에 수십 수백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수백만이나
되는 병정과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와 전쟁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설가장은 최악의 패를 두고 말았다.
"설검후는 어찌할 거요, 대인."
"그자는 쫓기게 될 걸세, 영원히…."
이미 황실에 대한 죄인으로 밝혀진 이상 천무맹에서는 그를 보호할 수도
없다. 그를 축출해야만 천무맹이란 단체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철수하라. 설태만은 삼일 후에 잡아들이도록 한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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