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세월(歲月)
천선비도가 몰고 온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두 개의 소문이 중
원 전역을 강타했다.
서안(西岸)에 있던 모산파(茅山派)의 멸망이 그 첫 번째였다. 거의 사술(
邪術)에 가까운 술법(術法)으로 이름이 알려진 문파라는 인식 때문에 정파
인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곳이라 하지만 모산파가 가진 힘은 구파일방에 뒤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모산파가 하룻밤사이에 풀포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멸망을 했다 한다
. 흉수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밝혀진 바 없었고 대부
분의 무림인들은 강호를 양분하고 있는 천무맹과 천마맹이 드디어 사활(死
活)을 건 승부를 시작했으며 어느 쪽으로 줄을 서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가
를 가늠하느라 양 맹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양 맹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와중에 두 번째 소문이 터져나왔다.
구화산에서 천마맹 소속의 흑사파와 천무맹 소속의 백의대가 격돌해서 서
로 양패구상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구화산에서 살아나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널려있는 것이 시체였고 피의 강
이 흐르고 있었다고 했다.
용지에서 일어났던 백산 일행과 혈마군의 혈전은 백의대와 흑사파간의 전
쟁 속에 포함되어버렸고 두 세력 외에 다른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묻혀버
리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있었다. 오십 년 간 평화로웠
던 강호 무림에 피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 *
십천각(十天閣).
천무맹에 파견되어있는 구파일방 수뇌들의 회의실.
영풍진인(靈豊眞人)을 비롯한 구인의 인물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파면신개
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무림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개방이 있는 우
리 십천각이 어찌해서 그 엄청난 사실을 소문으로 접해야 한단 말이오."
청성파의 풍뢰검객(風雷劍客) 문상(汶常)이 십천각주인 파면신개에게 삿대
질을 하며 거칠게 항의를 했다.
개방에 대한 책임 추궁이다. 모산파의 멸망이나 구화산의 접전은 다른 곳
보다 구파일방이 가장 우선적으로 알아야했다는 것이 이곳에 있는 모든 이
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개방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고 들려온 소문에 의해서 모든 사실
을 알게 된 것이다. 소문을 접하자마자 회의가 소집되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소이다. 모산파의 멸망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징후도 없다가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사건이고 구화산 일에 대해서도 자세
한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개방에서 모른다면 어디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구화산에 왜 백의대가 출병했는지는 제가 아니고 맹주에게 물어야 될 일
이오이다."
"자자, 그만 들 하십시오. 이미 일어난 일을 따지자고 모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논의해야 될 일은 앞으로의 일입니다."
영풍진인이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말대로 지나간 일
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구파일방의 행보가 더 중요한
사항이다.
모산파의 멸망이 가져다준 파장은 컸다. 특히 구파에 있어서는 경악에 가
까운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는 거의 방관자의 입장에서 주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 중에 모산이란 문파가 구파일방에 필적한다고 생각
하는 이들은 없지만 그렇다고 군소방파로 치부하여 무시할 곳은 절대 아니
었다. 그런 곳이 하룻밤 만에 멸망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문파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개방에서는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늦기는 했지만 개방에 수집된 정보에 의해서 현 강호정세를 정확하게 파악
하기 위함이다.
"모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고, 구화산에 대해서만 드러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어지는 파면신개의 말에 구파 수뇌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진정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와 석숭이라 하셨오?"
그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것은 천마맹에서 냉추렴을 제거하기 위해서
혈마군을 보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독문검진인 청풍검진에 의해서 그들이 전멸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있는 구파의 수뇌들, 무당의 영풍진인을 제외하곤 오천맹을 격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파에서 무공을 익힐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오천맹
에 대한 것이었다.
일개 세가들에게 강호 패권을 내주었던 치욕, 구대문파라는 이름이 생기고
난 후에 강호를 정복하고자 했던 많은 무리들이 있었고 어쩌다 구파 일방
을 멸문의 위기까지 몰고 간 적은 있었지만 강호 무림을 완전하게 복속시킨
단체는 없었다.
그런데 오천맹이 그것을 이루어냈다. 구파일방이 약했던 것도 아니고 천무
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어느 때보다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상황에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그들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다. 비록 십 년 정도의 짧은 기간
이었지만 그 시기동안 구대문파는 일반 제자는 물론이고 속가 제자조차도
거의 받지를 못했다.
때문에 오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오천맹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일에 우선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파인의 머릿속에 그렇
게 박혀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오천맹의 수뇌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전대 가주가 강호행을 나
섰다 하고 있다.
"무량수불! 남궁세가의 가주가 갑자기 바뀌었다 했더니 그곳에 있었군요."
"무슨 소리입니까? 진인."
"예,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럽게 가주직을 형인 검천신룡 남궁천우
에게 넘기고 길을 나섰다 합니다. 그리고 일 년간 봉문을 선언함과 함께 문
을 닫은 남궁세가에서는 연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소리가 진동을
하고 있다 하오."
영풍진인의 말에 구파수뇌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들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오천맹이 정식으로 강호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허허! 또 다시 오십 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려 함인가."
영풍진인의 중얼거림이 아니더라도 구파 수뇌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탐욕, 욕망, 욕심, 질시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
것들을 외부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남보다 위에 있기를 원하고,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우러러 받기를 원하고
, 칭찬 받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의 꿈이 되기를 원하는 생물이 인간이다.
구파 일방은 모든 강호 무림인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였고 꿈이었고 희
망이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자리를 오십 년 전에 오천맹에게 내 주었었다
. 찾아와야 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원래대로 만들어놓아야 했다. 그래서
갖은 노력을 다했고 결국은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그것을 찾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시 세상 사
람들의 꿈과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너무 드러나게 행동하고 있음이다. 뭔가 꾸미기 위해서 행보하는 것이라면
비밀리에 행동해야 함이 옳다.
비록 현재까지는 천무맹과 천마맹만 인지하고 있다지만 얼마 안 있어 강호
전체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활동을 세상에 알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던가.
이미 과거의 영광일 뿐이고 잊혀진 자들이 아닌가.
"혹시! 혹시!"
문상과 영풍진인의 얼굴이 굳어지며 동시에 터져나온 소리였다.
"진인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문 도우님도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분. 남궁지우의 움직임에 노림수가 있다는 말씀이
십니까?"
화산파의 수뇌인 대라운검(大羅雲劒) 권효웅(權孝雄)이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야 자파의 속가제자인 화진악이 맹주로 있으니 목에 힘
을 주고 다니지만 실제로 천무맹에 있는 권효웅의 처지는 그렇지를 못했다.
오히려 나머지 문파들의 눈치를 보며 미안해했다.
자파의 속가제자인 맹주가 구파일방을 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앞으로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고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의 의견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론도 없이 묵묵히 따르기만 했던 사람
이다. 그런 그도 남궁지우의 출현에 놀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야 전대 가주라 했지만 강호 무림인들에게 그의 위치는 현 가주외다.
그런 그가 천무맹과 천마맹의 병력을 물리치며 강호를 횡단하오이다. 이래
도 모르시겠소?"
"그럼…? 무천각(武天閣)을 노린단 말씀입니까?"
경악에 찬 외침이었다. 무림에 있는 삼백여 개의 군소방파 및 세가들의 집
합체인 무천각, 무천각을 구성하고 있는 군소방파나 세가들의 절반이상이
과거 오천맹 휘하에 있던 곳이다.
살아남기 위해 낙양 설가장을 필두로 해서 뭉쳐 있지만 과거 오천맹은 그
들의 꿈이고 향수다. 그 꿈이 다시 강력한 힘으로 강호를 횡단한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계신 분들 대 부분은 아실 것입니다. 지금 부 맹주가 과거 오천맹의
일당이었던 황보세가의 총관이었다는 것을요. 모두 쉬쉬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설가장이 무천각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게요. 만일 설가장이 망하기
라도 한다면 그들은 전부 남궁세가로 가게 될지도 모르오."
구파에서 판단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외유를 하고 있는 이유였다.
과거 휘하에 있던 군소방파 및 세가들에게 남궁세가의 힘을 보여 줌으로서
남궁세가의 건제를 알리고 새롭게 세력을 규합하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만들어낸 비약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경계를 하고 쳐다보면 그 사람의 단순한 행동에도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인
가. 딸과 함께 유람을 하겠다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력규합을 위한
외유로 인식되고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전쟁에 참여해서 하루 빨리 후환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세(魔勢)가 준동(蠢動)하고 있는데 구파일방이 손놓고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오니까. 강호동도 들의 비웃음을 어찌 감당하시려
합니까."
"우리 점창파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종남파도 참전에 동의합니다."
풍뢰검객 문상이 강력하게 참전을 요구하고 나섰고 지금까지 파면신개의
제지로 침묵하고 있던 이들이 남궁세가의 등장과 모산파의 멸망을 계기로
동의하고 나섰다.
"지금 이 전쟁이 정의 수호를 위한 전쟁입니까? 아니면 강호를 어지럽히는
악인 처단을 위한 전쟁이오이까, 아니오이다. 무림을 지배하는 자들의 이
권다툼일 뿐이오. 그런 곳에 끼어들고 싶으시오? 우리 개방은 절대 그럴 수
없소이다. 실수는 오십 년 전 한 번으로 족하오. 아울러 십천각주도 사임
하겠소. 바로 지금부터."
구파 일방의 수뇌들은 침묵하고 말았다. 그들 또한 파면신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왜 모르겠는가. 정의 수호라는 기치를 걸고 있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다.
강호무림에서 약해져가는 자신들의 위상, 그것을 지키고자 함이 아니던가.
천마맹이란 거대 단체가 생겨서 강호에 해악을 끼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평화스러웠다고 해야 했다. 극악한 악인이 출몰하면 천마맹 스스로 제거
했었고 두 거대문파의 위세에 어떠한 세력도 강호를 정복하겠다며 혈겁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쩌면 강호 무림 역사상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오천맹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이 혈겁을 자행하며 복속시킨 문파나
세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오천맹 그늘로 자청해서 들어가 한 세력이 되기를 바랐던 곳은 군
소방파들이었다.
"신개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오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고 인간
이외다."
문상의 인간이란 말.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되는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싶
지 않다는 말이다.
오대세가를 필두로 한 무림세가의 집합체였던 오천맹. 자신들의 문파에서
허접한 무공을 배워갔던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자들이 자신들보다 위
에 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후예가 혈겁을 자행했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은 채 정의라는 이름으
로 단죄를 했다. 그래서 다시 찾은 최고의 자리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이번에는 오천맹이 아닌 천무맹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전쟁에 지게 되면 구파일방의 터전이 사라진다.
또한 구파일방 참여 없이 천무맹만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하게 되면 무림인
들의 꿈이었던 구파일방의 존재가 사라지게 됨이다.
구파일방의 난점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모산파의 멸망과 남궁세가의 등장은 전쟁 참여에 대한 명분
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 청성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호인들의 꿈으로 남고 싶소이다."
강호에 우뚝 선 구파가 되겠다는 말이고 여타 다른 세력이 자신들의 위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그럼 개방은 더욱 강해지겠구려."
전쟁이 확대되면 부모를 잃은 자가 많아질 것이고 거지가 많이 생겨난다.
자연 개방의 방도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고 그 이익을 위해서 희생되는 하급무사들은 왜 생
각하지 못하느냐 하는 말이었다.
"다 대의(大義)를 위해서외다."
문상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량수불! 그만하시지요. 두 분 도우님. 어차피 개방의 입장이 그럴진대
강요할 수는 없지요. 전쟁에 반대하는 곳은 또 없습니까?"
"아미타불! 저희 소림도 불참한다는 것이 본사의 전언입니다."
"소림까지도 말입니까? 무량수불!"
소림마저 빠진다며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소림이 힘이 있던 없던 그것
이 문제가 아니다. 소림이란 문파가 강호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미미해진 소림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강호에
나섬은 곧 정의 실현을 의미하게 된다. 강호인들이 그리 믿는 다는 말이다
.
소림이 빠진다는 것은 전쟁 참여에 대한 대의명분이 힘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영풍진인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파면신개의 말을 모르는 바 아
니었다. 하지만 강호상에서 구파가 차지하는 위치가 있다. 그 자리는 언제
나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껏 지켜져 왔던 강호무림의 질서이다. 과
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래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소림과 개방을 제외한 나머지 팔파는 이 전쟁에 동참하는 것
으로 하겠습니다."
구파 일방 중 팔파가 참전을 선언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한 전쟁 참여였다.
상세한 일정을 논의하는 팔파의 수뇌를 뒤로하고 파면신개는 자신의 처소
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있었다.
팔파와 공동 노선을 취하지 않는 이상 천무맹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기 때
문이다.
짐을 꾸리던 파면신개가 멍한 눈으로 창 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 급하고 괄괄한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부, 모든 것이 백부의 생각대로 되고 있습니다. 제 삼의 세력도 나타났
습니다. 하지만 소운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중에 백모님과 영환
이를 어찌 보려하십니까? 아무리 그 녀석이 강하다 하지만 상대는 무림 전
체입니다. 개방은 철저히 방관자가 되겠습니다. 백부님의 말씀처럼….'
그도 작금의 상황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구소운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녀석아 죄 지은 놈은 죄 값을 치러야 세상이 바로 서는 거야, 나쁜 짓
하는 놈이 더 잘 사는 그런 세상이라면 없는 것이 더 나아.'
그의 회상 속으로 아련히 들려오는 백부의 목소리, 자식이었던 영환이 죽
음에도 침묵했던 그, 자신의 몸을 자해하면서도 백모님을 위한 복수심만으
로 나머지 삶을 지탱하고 계신 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파면신개의 나직한 읊조림이었다.
* * *
울창한 청죽(靑竹)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연못 하나. 그 폭이 사십여 장이
나 되어서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호수라고 하기에는 또 좀
작은 곳이다.
곳곳에 자리 잡은 기암괴석들 틈바구니까지 가득 채운 연꽃들과 그 사이사
이를 노니는 금빛 잉어들의 모습은 평화로운 정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나. 얼굴이 좋구먼."
"노야께서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그려. 좋은 것이라도 드십니까?"
고개를 돌리며 방문자를 반기고 있는 노야라는 인물. 조금 날카로워 보이
는 눈매와 단정하게 다듬어진 수염, 주름하나 없는 마의(麻衣)를 제외하고
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촌노(村老)와 같은 모습이었다.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노야라는 인물의 주위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허허로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미 득도한 고승에게서만 풍기
는 기운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인간에
게서만 볼 수 있는 고독 같기도 했다.
자신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서 몰려들고 있는 잉어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에는 감정이 없었다.
"저놈들 좀 보게. 내가 먹이를 충분히 주고 있는데도 서로 먹기 위해서 아
귀다툼을 벌인다네."
"아미타불! 먹이는 아무리 많아도 허기진 것 아니겠습니까?"
쓰고 있던 방갓을 벗자 나타난 얼굴, 스님이었다.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그
에게 나오는 기도도 노야라는 인물에게서 풍기는 기운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세상을 달관한 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이미 인간의 희로애락
(喜怒哀樂)을 초월해버린 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뜻 모를 말을 던지며 노야라는 인물 옆으로 다가간 노승의 눈에 놀라운 광
경이 목격되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거대한 금빛 잉어 두 마리가 나타나서 먹이를 향해 달려
들던 조그마한 잉어들을 머리와 꼬리를 이용해서 쳐내는 것이었다.
"허허! 한갓 미물까지도 패를 나누는가, 아미타불!"
거대한 크기의 금빛 잉어를 따라서 조그마한 잉어들이 양쪽으로 갈라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두 놈은 네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먹이를 주고 있다네. 십 년 정도 키
우면 저 정도로 커지고 무리의 대장이 되더군. 아마 다섯 번째 대장인가…
무리 지어 먹이 다툼을 하다가도 저 두 놈이 나타나면 저렇게 편을 나눈다
네."
세상의 이치인가 생존경쟁(生存競爭)에서 살아남기 위해 잉어들마저도 두
패로 나뉘어 떨어지는 먹이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충분하게 먹이를 주던 노야라는 인물이 그 양을 줄여나가자 양쪽으로 나뉘
어있던 잉어들이 먹이는 도외시 한 채 서로를 향해서 달려들며 치열한 싸움
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잉어들이 만들어낸 파장에 연꽃들을 움직이고 이곳, 저곳에서
또 다른 잉어들이 나타나며 더욱 많은 수의 잉어들이 싸움에 가담하고 있
었다.
잠시 후 힘이 약하고 작은놈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며 먼저 떠오르고 이제
는 피아 구분 없이 서로를 향해서 무작정 달려들고 있었다.
"자금줄이 끊기고 제자가 죽어도 안 오던 자네가 온 것을 보니 시작된 모
양이군."
"훌륭한 일꾼의 죽음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곳이 무너져야 일이 시작되
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없애려 했던 곳인데 잘 되었지요."
"두 마리 잉어들은 어찌하고 있나?"
"반대하는 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는 있으나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 애들이 그리 강했나?"
"천장지옥마까지 포함되어있으니 쉽지는 안겠지요. 저희들이 제거해서 양
쪽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불호와 머리모양은 분명히 스님일진데 입에서 나온 것은 불자의 말이 아니
었다. 살생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허허! 세상 말세군. 중이 살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다니."
"아미타불! 세상을 정화해야 서방정토를 이룩하지 않겠습니까."
마의 노인을 쳐다보는 스님의 눈가에 잠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
"아니야 그 애들은 그대로 두는 게 나아. 그 아이들을 축으로 해서 숨어있
던 것들이 하나씩 저렇게 몰려 들 테니."
잉어들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죽어서 물위에 떠있는 잉어들 사이로
어디서 나오는지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는 또 다른 잉어들이 보이고 있었다.
"노야 오신가의 후예가 전부 나타났다고 하던데…."
"혈가를 걱정하는 겐가?"
투명한 미소와 함께 마의 노인이 스님을 쳐다보았다.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되네. 우리 가문에서는 칠백 년 전에 혈가(血家)
의 비밀을 풀었네."
"정말 이십니까? 노야."
수십 년의 수양에 의해 어떤 충격에도 놀랄 것 같지 않던 스님의 몸이 격
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신(神)의 위치에 있어야할 자신들을 가(家)의 위치
까지 끌어 내려버린 혈가. 수백 년을 두고 그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들의 선조가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그것 때문에 가문의 모든 것이 사라
지고 자신의 대에 와서는 신의 가문이 선조였다는 것조차 잊고 살지 않았던
가. 노야가 없었다면 자신이 신가(神家)의 후예였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아울러 천역도….
그런데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혈가의 비밀을 이미 칠백 년 전에 밝
혀냈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왜 지금껏 숨죽이고 있었느냐는 말인가?"
스님의 한마디가 어떤 상념을 일으켰는지 마의 노인의 음성에 잔잔한 파문
이 일며 수면위로 울려퍼졌다.
반신오천역의 상실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과 혈가의 후예를 찾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았다.
그러기를 이백 년 드디어 혈뇌문(血雷門)이란 문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
던 혈가의 후예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들도 오신가(五神家)가 활동하지 않
으면 강호에 나서지 못한다는 엄격한 문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힘에 버금가는 무공을 창안하고도 다시 잠들어야 했다.
그리고 혈뇌문에 스며들어 그들의 비밀을 파헤치기를 수백 년, 신의 자식
이라던 자신들이 비천한 노예들이었던 혈가의 후예들에게 치욕을 감수하며
그들의 비밀을 풀었다.
천살(天殺)과 광혈(狂血)의 비밀을.
비밀을 밝혀낸 그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고 광혈지옥비 다섯 개와 혈뇌
문의 내공심법 후반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으나 자신들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들의 보물을 훔쳐서 도망치던 와중에 훔쳐내었던 광혈지옥비와 내공심법
을 분실했고 또 다시 이백 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지내야 했다.
가문의 모든 것을 재정비하고 다시 강호를 도모하려는 순간 혈수천마(血手
天魔)라는 희대의 마인이 나타나 자신들의 앞길을 막았다.
"그 혈수천마의 무공이 잃어버린 혈가의 무공이었네."
"그럴 수가?"
"우리 가문은 놀라고 말았네. 반쪽짜리 혈가의 무공이 이백 년을 고심해서
만들었고 수백 년 동안 발전시켜왔던 우리 가문의 무공과 차이가 없었단
말일세. 물론 혈수천마의 운명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바꾸었네. 혈가에 의해서 사라진 천역(天域)을 찾기로 했네."
가문에 모든 것이 거의 다 내려왔지만 천역에 대한 자료만 없었다. 천역을
찾기 위한 세월이 사백 년이 흘렀고 결국은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자네 가문의 천역도 찾아낸 것이고."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가문은 과거에 대해서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나 앞에 있는 노야의 가문, 그들은 무려 천 오백 년 동안 옛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온 가문이었다.
그러한 면 때문에 노야라는 이 사람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역을 찾았다해서 그냥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이번에는 들어가는 비밀
을 풀기 위한 세월이었지. 다행히 내 대에 끝마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
지 모른다네."
노야라는 인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천오백 년 가문의 숙
원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럼 혈가의 비밀이란 것은…."
"아,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구먼. 자네 광풍가(狂風歌)란 노래를 알고 있
나?"
"민초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그 노래 말씀이십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가장 하층민들에서 내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광풍가(狂風歌).
세상에 버림받고 천대받던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한이 하늘에 올라 천살(
天殺)이 되었고, 수백 년의 학대와 죽음이 땅에 닿아 광혈(狂血)이 되었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천살과 광혈을 하나로 만드니 그 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
권좌에 있는 모든 지배자들이여 기억하라!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힘을 가진 그대들이 아니고 그대들에게 억압받고 살
아가는 민초(民草)들임을….
그들을 분노하게 하지 말아라. 그들이 분노하게 하지 말아라. 그들이 분노
하면 세상의….
"그 광풍가는 과거 철가인(鐵家人)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네. 광풍가에
서 광혈이란 자신들이 만든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를 말함이고 천살은 천
살성(天殺星)이네. 혈가의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광혈지옥비와 혈가의
무공, 그리고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나야 하지.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 파멸
안이 나타난다네. 그것이 혈가의 비밀이었지.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천살성이네. 천살의 기운 없는 혈가의 무공은 일반고수 수준밖에 안 되네.
"
천살성(天殺星),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을 벌하기 위해서 하늘이 내리는 천
벌(天罰)중의 하나로 오백 년을 주기로 한 번씩 출현한다고 한다. 강호무림
에도 천살성이 나타날 때면 엄청난 혈겁이 있어왔다.
"그럼 현세에도 나타난단 말입니까?"
노야의 말로 볼 때 혈수천마가 나타났던 시기가 오백 년 전이었으니까 현
세에도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인물이 있다는 말이 된다.
노승의 말에 마의 노인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자네 이십 이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
"그럼 그때 그 마을에…."
노승이 놀라운 얼굴을 하며 노야라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강시를 만드는데
인육(人肉)과 인혈(人血)이 필요하다며 혈랑 떼를 이끌고 조그만 화전민
마을을 덮친 적이 있었다. 노야의 말로 볼 때 그 마을에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천살성의 기운은 아이가 태어날 때 잠깐 나타나네. 그곳을 찾기 위해서
사 년의 세월이 필요했지. 앞으로 오백 년간은 천살성이 나타나지 않을 걸
세."
무서운 가문이고 엄청난 집념이었다. 가히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를 찾기 위해서는 그 한해동안 하늘을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다 해냈고 혈가의 무공이 그 아이와 연결될
확률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살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를 제거하
기 위해서 한 마을을 모두 없애버렸다.
오직 자신의 가문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화전을 일구고
사냥을 하면서 살고 있던 양민들을 해친 것이다.
"신(神)이란 말일세. 인간의 감정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네. 자네도 무
공을 대성하게 되면 느끼게 될 걸세. 왜 우리가 신이 되어야만 하는지."
하찮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위
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젊은 사람의 사고(思考)도
아니고 인생의 모든 것을 겪은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평생을 두고
형성된 그의 가치관(價値觀)이 아니겠는가.
신이 되고자 하는 자의 집념이 뼈 속까지 박혀있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참! 강시들은 쓸만하던가?"
자신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노승을 향해서 빙긋 웃으며 강시이야기를 꺼
냈다.
"아, 네 노야, 이번에 스무 구를 사용했습니다. 거의 절반 정도 파괴되어
있었지만 모산의 풀뿌리도 남지 않더군요, 맹주의 비밀 세력들까지 다 처리
하는데요."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모산파를 멸망시킨 자들이었고 단 스무 구의
강시만 사용했다고 하고 있었다.
"하기야 생전에도 검강, 도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이들이었고, 혈육들
에게 당한 분노가 뇌리에 박혀있을 것이니 최고의 사혈마강시가 탄생할 수
밖에, 백을 못 채운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사혈마강시가 팔십이면 강호 무림의 몰살도 가능합니다. 너무 욕심이 과
하십니다. 노야."
구파일방에 버금간다는 세력을 몰살시키는데 스무 구를 사용했다는 사혈마
강시가 팔십여 구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백을 채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
고 있었다.
"조정은 잘 되던가?"
"아직은 좀 미숙하더이다. 하루빨리 무공을 완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걸세, 사사지옥혈공이라는 것은 완전하지 않으면 제 위력을 다 발휘
하지 못하거든."
사사지옥혈공(邪邪地獄血功).
반신오가 중 태산에 연원을 두고 있다 하였던 사신가의 무공을 말하는 것
이다. 정확히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심령을 조
정하는 방법도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미끼를 쫓고 있는 무리들에게 강시를 출동시키게. 그들의 뒤를 쫓으면서
하나씩 제거하는 거야, 하나씩. 또 미끼를 우리세력으로 오인시키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자자,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술이나 한잔하세, 도공!"
"네, 노야!"
지금껏 두 사람의 뒤쪽에서 시립하고 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 가볍게 머
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저기 큰 놈 있잖나, 저것으로 회나 뜨지 자네의 칼 솜씨도 볼 겸."
잉어들의 싸움도 거의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지 연못 위에는 죽은 잉어들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그 와중에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대장잉어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
다.
"두 마리를 다 뜰까요, 노야?"
두 마리를 다 뜨기에는 너무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도공이 노야를 쳐다
보았다.
"한 마리만 남겨두면 지가 대장인줄 착각하고 살 것 아닌가. 많기는 하겠
지만 그냥 잡게. 먹다가 남는 것은 다시 저들의 밥으로 주면 되지 않겠는가
."
도공이란 인물이 가볍게 손을 내밀자 거의 두 자 크기에 달하는 금빛 잉어
두 마리가 그대로 끌려나오며 이미 준비된 도마 위에 떨어져내렸다.
"저 시체가 다 썩어 없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소이다."
"천오백 년에 비하면 금방 아니겠나. 또한 불순한 녀석들이 사라지는 것이
니 그 또한 자네가 바라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일 테고."
"아미타불!"
두 대장이 사라지자 물 속은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술잔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영락없
는 시골 촌노의 모습일 뿐이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지 붉은 석양이 연못위로 비추며 어스름한 황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지. 그냥 갈 텐가?"
"나이를 먹을수록 뼈마디가 부실해 지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몸을 부지런
히 움직대야 장수한다고 하더이다."
짐짓 너스레를 떨며 노승이 방갓을 고쳐 매고 있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노야."
'몸이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네. 가문이 남아 있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겠나. 하기야 가문을 잊고 살아온 자네들은 알 수가 없겠지….'
떠나고 있는 노승을 배웅하는 것은 노야라 불리던 노인의 독백뿐만이 아니
었다.
그의 머리위쪽에는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겪었는지 거의 낡아서 너덜거리
는 현판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낡아있는 것은 현판 뿐 안쪽에는 글씨는 노
인의 가문처럼 아직도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지 어스름한 황혼 역에도 선명
하게 보이고 있었고 노야라는 인물과 같이 멀어지는 노승을 배웅하고 있었
다.
장생원(長生院).
* * *
천무맹의 천무전.
맹의 실권자인 검신 화진악의 거처, 이 시대의 최고 세력인 천무맹의 가장
위에 있는 그가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제갈수연으로부터 제
출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들. 무림의 상황이 그가 의도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이다.
모산파의 멸망이 가져다준 충격은 컸다. 그곳의 멸망은 자신의 지시사항도
아니었고 보낸 세력 또한 모산이라는 대 문파를 멸망시킬 수준이 절대 아
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보낸 세력은 귀환하지 않고 모산파의 멸망 소식만 돌아왔다
.
구파일방에 경각심을 심어 줄 수는 있었지만 결코 원하던 결과는 아니었다
. 전쟁이 확대되면 천무맹의 세력이 될 수도 있는 곳이 모산이었다.
그런 모산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천마맹 외에 제 삼 세
력의 등장이었다.
제갈수연의 보고서에도 언급되어있지만 천마맹에서는 모산파를 공격할 이
유가 없다.
그들도 구파일방이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정사지
간이라 하지만 정파 쪽에 다 가까운 모산파를 멸망시켜서 구파일방을 자극
할 필요가 없질 않는가.
그럼 남은 곳은 천사맹밖에 없다는 말인데 그들의 능력으로 아무런 흔적
없이 모산파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과연 누구란 말인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목적은 분명히 알 수
가 있었다.
천무맹과 천마맹의 전면전을 원하고 있음이다. 그것도 구파일방과 천마맹
의 무욕인이 전부 포함한 전면전을….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제 삼 세력의 의도를 알면서도 이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사
활을 건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고 끝까지 가야만 한다. 구화산에서 백의대와
흑사파의 격돌이 그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모든 것을 움켜쥐
게 될 것이다. 구화산을 생각하던 화진악이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
리며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바보 같은 놈 그깟 흑사파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아들인 신룡각주 화인걸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마맹과의 개전(開
戰)에서 패하지는 않았지만 양패구상(兩敗俱傷)이란 결과와 한 달 이상의
정양이라는 내상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오백의 백의대가 출병하여 사할인 이백여 명만 살아 돌아왔다. 그 속에 화
인걸이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었고 다음 대를 이어야
했기에 더욱 마음이 쓰라렸다.
그렇지 않아도 정천무룡 백무천에게 밀린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번 흑사
파와의 일전으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아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구파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출병을 시켰
던 것인데 상황이 더욱 나빠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전의 다급한 상황을 인식했는지 개방과 소림을 제외
한 팔파가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식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부맹주 자리로
의 복귀를 명분으로 요구했지만 그때 가서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모산파의 멸망과 남궁세가의 강호 활동이 팔파를 끌어들이는데 성공
했으나 또 다른 적이 배후를 노리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소걸영 구소운과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있다는 그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는데 천마맹의 혈마군과 제갈수연의 세력의 전멸, 또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안휘분타 인물들과 혈마 소지악의 세력도 그들의 농간에
의해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식인 화인걸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자신들도 속임수에 당해서 흑사파
와 일전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십여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이었기에
무력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남궁세가와 연결되어있다면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세력이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 삼 세력과의 동일 세력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가장 근접한 추측일 수도 있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결론이 나지 않자 자신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맹주실을 나서고 있었다.
또 다시 전략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천명실(天命室).
천무맹의 최고 수뇌부 네 명이 굳어진 표정으로 군사인 제갈수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두 명의 각주가 바뀌어있었다. 십천각주는 개방의 파면신개가 사임
했기에 무당의 영풍진인이 새로운 각주로 참석해 있었고, 내상을 당해서 정
양중인 화인걸 대신에 둘째 제자인 도룡대(刀龍隊) 대주인 팔극도룡(八極刀
龍) 남진룡(南進龍)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차단했던 모든 것을 밝히기로 했는지 계속되는 제갈수연의 말에 얼
굴 표정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중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영풍진인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남궁세
가의 활동에 대해서는 파면신개로부터 듣긴 했지만 지금처럼 상세한 내용은
아니었다.
구파일방이 강호를 외면한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있던 천사맹의 등장이 그것이었고, 모산파의 멸망에 제 삼 세력
이 연관되어있다고 한다.
황산에서 발견된 천사맹의 주력으로 보이는 이백 명의 시체와 구화산 용지
에서의 천마맹 혈마군의 전멸, 이 모든 것이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것이 하
나도 없었다.
그 싸움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기묘한 일행.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강호
무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집단이었다. 또한 그 일행 중에
있는 냉추렴을 노리는 천마맹과 격돌이 있었고 그 결과가 양패구상, 결국
그들 일행이 이 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소리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주시해야 될 상황은 남궁세가의 등장과 팔파의 전쟁
참여를 알게 될 경우 천마맹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당한 자세로 각주들을 쳐다보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여인, 제
갈수연의 위상이 변해있었다. 과거 보고자의 위치에서 전략가로 바뀌었다.
개방의 부재는 일반 정보의 차단을 의미하고 모든 강호 정세는 제갈수연의
천밀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우선 천마맹은 철목승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더욱더 그들 일행의
제거에 전력을 다할 것이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바로 확전을 유도할 것입니
다. 물론 냉추렴의 제거는 우리가 뒤집어 쓸 것이고요. 따라서 저희들의 대
응 방안은 냉추렴을 치러오는 그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량수불! 그럼 남궁세가의 활동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거요."
"진인께서는 무천각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궁극적으로 남궁가주의 강호 횡단이 무천각의 와해를 노리고 그럴 수도
있지만 아직은 제거할 때가 아닙니다."
그것까지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는지 제갈수연의 표정에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쳐났다.
"천마맹의 혈마군을 전멸시킬 정도의 전력이면 제 삼 세력과 연계되었다고
도 볼 수 있지 않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제 삼 세력과 동일 세력이고 모산파를 멸망시킬
정도의 능력이면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 된다.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제거해야 하오이다."
무천각주 설검후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권력이라는 것, 그것은 나눠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다 쥐고 있어
도 언제나 부족한 것이 권력이라는 괴물이다. 그런데 그 권력이 나눠지려
하고 있다.
팔파에서 전쟁에 참여하겠다며 수하들을 설득할 명분을 요구했다.
전쟁이후란 말과 함께 부맹주직을 늘리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는 결코 달가
운 일이 아니다. 또한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과거 자신들의 휘하에 있던
세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강호를 횡단하고 있다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
다.
아무리 설가장이 현재의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 하지만 남궁세가나 하북
팽가가 봉문하고 있을 때 이야기이다.
이제 갓 삼십 년 된 설가장과 오백 년 역사의 오대세가들과 비교자체가 무
리인 것이다.
"제가 일단 그들을 미끼로 이용하지 하는 것은 제 삼 세력 때문입니다. 제
삼 세력의 배후가 드러나게 되면 그때 가서 한꺼번에 정리하는 거죠. 모산
파의 멸망과 천장지옥마를 이용해서요."
실내에 있는 사 인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백 년 전의 전설,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전대 거마를 무슨 방법으로 이용한단
말인가.
각주들이 궁금해하는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제갈수연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군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저들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 대국은 내가 이끌어 간다.'
"공적! 제 삼 세력을 포함해서. 그들이 제 삼 세력과 같은 동료이던 아니
던 상관없이 같은 세력으로 만들어야죠."
"무림 공적을 만들자는 말이요?"
영풍진인의 놀람에 찬 외침소리였다. 무림의 공적이란 무엇인가. 정, 사,
마에서 공히 인정하는 나쁜 놈이란 뜻이다. 무림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살 수 없음이다. 깊은 산 속으로 숨자고 해도 은거기인이란 자들도 많아서
심산유곡에 숨기도 힘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상투인루라는 곳이 있어
서 그곳으로 도망치면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구나 전쟁의 막바지에 강호 공적으로 지목되면 살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후유증이 무엇이던가. 이긴 곳이나 진 곳이나 남은 것
은 살기밖에 없다.
그 살기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지배자로서의 일인
것이다.
"무림인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천장지옥마라는 다섯 자가 주는 공포를
… 약간의 손만 쓰게 되면 그들을 강호 공적으로 지목하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제 삼 세력도 그들과 같은 일당으로 몰고 가
면 되고요."
젊은 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여자였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전대거마를 강호 공적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화진악과 영풍진인이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태동하는
세력을 처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무림공적으로 만들어 놓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허탈해 하고 있는 무림인들
의 마음을 치료할 희생양으로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백의대의 원수는 갚아야 될 것 아닙니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팔극도룡 남진룡이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팔극도룡(八極刀龍) 남진룡(南進龍).
아무런 배경 없이 가진바 재질 하나만으로 천무맹주의 제자로 발탁되었고
도룡대의 대주가 된 자다.
언제나 말이 없이 조용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의 무공수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극성으로 연성하고 있는 천류도(天流道)란 도법은
화인걸이나 백무천에 비해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를 알고 있는 이들
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 일은 신룡각주가 부상에서 회복하면 직접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가."
화진악이었다. 자식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고자 한 의도였고 신룡각이
란 집단을 계속해서 휘하에 두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렇게 두질
않고 있었다.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 지금 흑사파는 백의대와의 격돌로 인해서 사
할 정도의 전력을 잃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는 현 신룡각주가 적임자이고요."
"저도 동감입니다. 무량수불!"
화진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갈수연의 현 신룡각주라는 발언 때문이다.
아들인 화인걸의 부상으로 대리 참석했고 이 자리가 공식적인 자리라 하지
만 남진룡에게 현 신룡각주라 칭했다는 말은 의미가 크다. 어쩌면 남진룡이
신룡각주로 굳어질 수도 있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노선을 유지했던 제갈수연이 독자 노선으로 방향
을 선회했다.
구파일방 중 팔파가 참여했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의미한다. 철혈전신
철목승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 승리한 후 그들의 살 곳만 인
정해 주면된다. 감숙성(甘肅省)안쪽으로만….
그런 생각은 십천각의 영풍진인도 마찬가지인지 그도 맹주의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해서 제갈수연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곳도 천마맹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전쟁 후의 상황에 대한 포석을 하
고 있었다.
"으음! 그렇게 하시오, 신룡각주."
제갈수연의 노림 수가 이것이었는지 화진악의 입에서 신룡각주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신룡각주의 대리가 아닌 정식 신룡각주가 되어버린 것
이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뿌리 채 뽑아서 다시는 마세가 준동하지 못하게 하
겠습니다."
남진룡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기회를
잡은 자가 짓는 회심의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전쟁이 끝나
기도 전에 그 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의 행위를 비웃는 것도 같은 기
묘한 미소였다.
"그리고 병력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자들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백의대 잔
여인원과 무룡대를 같이 데리고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갈수연의 얼굴이 변했다. 강호 경험이 있는 자란 단서를 달기
는 했지만 백의대와 무룡대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은 그들을 소진시키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있는 것 같았다.
병력차출은 각주의 고요 권한이기 때문에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다.
팔극도룡 남진룡, 결코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곳에 있는 사인
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모두가 같은 자리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적을 두고 있지만 머리 속의 흐르는
생각은 각각인가, 여러 힘있는 세력의 집합체인 천무맹의 문제점이 드러나
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가 정의(正
義)고 도의(道義)였다.
"좋습니다. 그럼 미끼 주변에 있는 천마맹 세력의 처리는 십천각에서 맡아
주시고 흑사파의 괴멸은 신룡각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화진악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냉추렴을 향해서 몰려드는
세력의 처리를 팔파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는 조만간 소림에 한번 다녀오시오. 그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
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무량수불!"
제갈수연과 영풍진인이 동시에 대답을 하였다. 영풍진인도 거절할 수 없음
이다. 어차피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러나
개운치 못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각주들이 모두 물러가고 천명실에 남은 두 사람 맹주 화진악과 부 맹주인
설검후였다.
"당돌하군요."
제갈수연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개방이 빠진 자리를 바로 자신이 차지하면
서 천무맹의 머리가 되어버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서로를 옹호하던 사이였다. 팔파의 전쟁 참여 선언과
개방의 부재가 그녀를 독자 노선을 걷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영악하지. 이미 예상했던 일이고. 팔파의 전쟁 참여는 우리의 승리를 의
미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도 어차피 사석일 뿐이야. 소모품 말일세."
전쟁이 끝나면 다 제거되어야할 자들이다. 충성하지 않은 부하는 부하가
아니고 제거해야할 적일뿐이다. 천마맹과 같은 부류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세. 어차피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자들이네. 그나
저나 자네 아들은 요즘 어쩌고 있나."
두 권력자의 최대 고민거리이자 우환거리인 자식, 중원은 마음대로 주무르
고 있지만 품안의 자식만큼은 그리 안 되는 것인지 자식이란 말에 설검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둘만 있었어도 제 손으로 묻어버렸을 것입니다."
한창 가문을 세운다며 정신이 없을 때 본 자식이었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생각하고 자식을 찾았을 때는 그가 바라
던 자식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설가의 치욕이라 해서 설가치룡이라 불리고 있었겠는가. 그나
마 작년의 사건 이후에 근신하고 있는 터라 좀 나아졌을 뿐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들놈이다.
"큰아들은 이미 만상투인루에서 죽지 않았는가. 지금 있는 애는 작은아들
이고, 무공은 좀 한다 하지 않았나?"
무공이란 말에 설검후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래도 무가의 자손이라
고 무공에는 상당한 자질을 보여 무공에 대한 재능만큼은 그도 인정하고 있
는 터였다.
자신의 독문검법인 전광뇌우검법(電光雷雨劍法)을 팔 성 이상이나 성취했
던 것이다.
"무가(武家)에서 무공에 뛰어난 자질만 있으면 되는 거네. 나머지는 세월
이 해결해 줄 것이고…."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으나 자신의 아들이나 부맹주의 아들이나
처한 입장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인 화인걸, 어려서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여서 만들어 놓은
녀석의 무공이 신룡각의 다른 각주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제껏 먹였던 영약 기운을 반만 소화시켰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은 되었
을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부맹주의 자식이 개망나니라고 소문은 나있
지만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나이가 삼십이오이다. 맹주! 그 나이면 남들은 자식이 두 세 명은
됩니다.'
부모 된 자의 절규였다. 성정만 괜찮았음 진작 천무맹에 데려와서 중용 했
을 것이다. 그러나 쓰고 싶어도 그러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은 오죽하랴.
"놈!"
감정이 격해 졌는지 결국 설검후의 입에서 아들을 욕하는 소리가 튀어나왔
다.
"가세, 술이나 한잔하세."
설검후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장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