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사냥
잠시 후 들려오는 세 마디의 비명소리와 함께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산이
다시 나타났다. 가공할 만한 빠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무상신법을 전
개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일행마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람은 이 사람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
다.
광사 초상을 비롯한 무욕인 네 명,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
에 움직인 백산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떠날 때는 물론이거니와 다시 나
타날 때도 귀신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볼수록 잘생기지 않았소? 석두 이동한다. 발자국 남기지 말고 소리 없이
움직여라. 목표는 저기 보이는 천태봉이다."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무욕인들을 향해 이상한 말을 하며 나
머지 일행에게 이동지시를 내렸다.
"누님!"
모두들 천태봉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백산이 조천영을 번
쩍 안아들고 구소운과 냉추렴을 쳐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운아, 추렴아, 질투하지 말아라. 억울하면 너희들도 임신하든지. 그럼
이렇게 안아주마."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서 히죽거린 백산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에 있던 소운이 볼멘소리를 하며 백산의 뒤를 따랐다
.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하늘은 고사하고 터럭도 안 보여주면서 씨이…."
소운의 황당한 말에 고개를 흔들던 나머지 일행이 백산을 따라가는 광견조
의 뒤를 쫓으며 어둠과 함께 조용히 사라져갔다.
잠시 후 그들이 백산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천태봉 근처에 있는 금선동(金
仙洞)이라는 동굴 속이었다. 이십 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왔는데도 상당한
공간이 남을 정도로 금선동의 내부는 널찍했다.
입구에 환상미로진을 설치하고 안쪽에 자리 잡은 일행은 긴장이 풀어졌는
지 곧장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황보세가의 기습으로부터 용지에서의
혈투까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싸웠던 일행은 더 이상 견디
기 힘들었을 터였다.
비록 웃고 떠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말이 많
던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의 상태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깊게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산은 아득한 회상 속에 잠겼다. 이곳도 어
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어린 장소이다.
'산아, 이곳은 말이다, 참선을 하던 스님이 불타가 되지 못하고 신선이 되
어버린 곳이라 해서 금선동이라 부르는 곳이다. 우습지 않느냐? 스님이 신
선이 되어버린 동굴이라니.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그
것을 금천(金泉)이라 부른다. 먹을 것만 있으면 몇 년이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여기서 네 엄마의 극락왕생이나 빌자꾸나.'
아버지와 같이 와 보았던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이곳에 있으면 누구
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굴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는 수십 개가 연결되어있어 숨으려
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이곳에 얼마나 머물 거죠?"
조천영도 자지 않고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백산
이 하고자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녀도 알고 있다. 사냥을 당하는 것이 아니
라 사냥을 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따르고 있는 자들을 제거하고 이곳으로
비밀리에 이동했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누님."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조천영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백산은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안으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었는데
…."
"나쁜 놈들이에요."
소운도 자지 않고 있었는지 백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피곤할 텐데 잠 좀 자지?"
"우리가 뭐 한 게 있나요. 그냥 자리만 지켰는걸."
다들 자지 않고 있었나 보다. 그녀들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조
천영이야 백산이 걱정되어서 잠을 못 이루고, 소운과 냉추렴은 자기들 때문
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을 이
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리와, 추렴이도."
백산이 냉추렴마저도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들의 얼굴을 차례로 쳐
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저번에 언니도 마차에서 이야기했지만, 천영누님, 소운, 추렴 그리고 광
풍대 녀석들까지 나에게는 전부가 다 가족이야. 내가 내 가족을 지키는 것
은 당연한 의무고, 그러니 너무 맘 쓰지 말라고 알았어?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서 힘없는 사람을 이용하려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백산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한다. 지금까지는 너희들
이 우리를 사냥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사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기 위한 전쟁
이 아닌 죽이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만하고 자세요, 이쁜 공주님들."
* * *
쿠르릉! 쾅!
구화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십왕봉(十王峰)에 걸쳐있던 검은 먹구름이
아흔 아홉 개나 된다는 각각의 봉우리로 퍼져나가며 천둥 번개를 이용하여
비를 만들어 아래로 쏟아내린다.
사리사욕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의 작태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인
가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이내 연약한 대지를 찢어발기고 있다.
백산 일행이 은신해있는 금선동 안. 중앙에 모닥불이 사방을 향해서 열기
를 토해내며 서늘한 공기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는 가운데 백산이 광견조 일
행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석두, 너는 이곳에서 남쪽을 돌고 와라.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살우 너는 서쪽, 모사 너는 동쪽, 그리고… 앞으로 별도의 말이 있을 때까
지 지형지물만 완전하게 익히고 적들의 위치만 파악한다."
"우리는 밥만 축내란 소리인가?"
"그럼 굶으쇼?"
"헉!"
독안랑 서문천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자신들도 같이 끼워달라고
하는 소리였는데 육포를 그만 먹으라고 하고 있다.
"자네…."
"한 사람씩 따라나서든지 좋을 대로 하쇼."
이건 완전히 배짱이다. 상황은 분명히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입장임
에 분명한데도 할 테면 하고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었다.
자신들을 좀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해야 그나마 육포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알았네, 그럼 갔다오지 뭐."
* * *
백산 일행이 있는 천태봉에서 북쪽으로 서있는 연꽃모양의 봉우리 하나,
연화봉(蓮華峰)을 일컫는 말이다.
그곳의 중턱에 주변의 암석군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진 연화불지(蓮花佛地)
라 불리는 천여 평 정도의 분지가 있다.
가끔씩 번쩍이는 새하얀 번갯불 사이로 십여 개의 검은 천막들이 별 모양
을 형성한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묵묵히 서있다.
그 별의 중앙에 있는 다른 곳보다 조금 커 보이는 천막 속에서 커다란 외
침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혀 흔적이 없단 말이냐?"
다비천검 정철이 부하인 금선검(金扇劒) 최대지(崔大地)와 정전도(靜戰刀)
주운기(周雲氣)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내
질렀다.
구소운 일행을 따르던 척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다.
시간상으로 볼 때 그들이 구화산을 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 산 어
딘가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리다. 일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그가 보았을 때도 자신이 노리고 있는 일행의 무공은 엄청났다. 개개인이
상대해서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오직 그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여 매복에 의한 암습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 함은 무슨 뜻인가. 이미 자신들이 이렇게 나오리라
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변해
버렸다는 뜻이다.
더구나 이처럼 비까지 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암습을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광천뢰의 공격에 대비해서 오 장 간격으로 설치했던 천막도 함부로
옮기지 못할 상황이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한곳으로 모아두었
다가 천마맹의 혈마군처럼 한꺼번에 몰살을 당할 수도 있기에 그것 또한 바
람직한 방법이 못된다.
'내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직면했군.'
정철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그들도 머리가 있고
암습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
하다 보니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아
무런 대책 없이 움직일 것이라 지레 짐작만 하고 있었다.
"암습에 대비해서 경계를 더욱더 강화해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수색조
를 편성해서 구화산을 이 잡듯 뒤진다. 놈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초조한 듯 자신의 손바닥을 비비며 천막 안에서 연신 왔다갔다하고 있는
정철을 비릿한 미소와 함께 노려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연화불지에서 오십 장 정도 떨어진 소나무 숲, 백산과 독안랑이 소나무 가
지 위에 앉아서 천무맹의 천막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이 가지에는 되도록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앉으라고요.
그리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백산이 독안랑의 앉은 자세를 교정해주며 계속해서 궁시렁거렸다.
일부러 흔적을 남기려 함인지 소나무에 물기가 젖지 않도록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저놈이 대장이겠구먼?"
"다비천검 정철이란 인물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백산과 독안랑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도 백산과 독안랑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천막을 관찰하고 있었고
, 백산이 아닌 다른 조원들이 와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곳을 쳐다보는 것
이었다.
"우기도 아닌데 웬 비가 저리도 쏟아지냐."
닷새가 지났건만 백산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틀 전과 어제 일단
의 무리들이 이곳을 수색하고 간 후에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자
소살우가 좀이 쑤신 듯 백산을 쳐다보았다.
어서 시작하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비단 소살우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백산의 다음 행동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있었다. 바로 칠 것처럼 각 세력들의 위치 및 지형지물을 완벽
하게 익히더니 천마맹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고 천사맹까지 모두 자리를 잡
은 것을 확인하고도 동굴 속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백산의 의
도를 짐작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우야, 사냥 할 때는 말이다 철칙이 있다.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맹수에
겐 함부로 덤비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놈의 경계가 느슨해
졌을 때 시작하는 거다. 그때가 바로 오늘밤이고… 이쪽으로 모여라."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일행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오늘
밤부터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결코 남을 죽이는 것이 즐거워서나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노리는 자들이기에 막으려는 것뿐이다. 단지 자신들을
뒤쫓지 못하게 하려는 것.
"일단 우리는 두 곳만 친다. 천마맹과 천무맹 두 곳을 치고 이쪽 용주석주
경(龍柱石柱鏡) 쪽으로 흔적을 남긴다. 아주 미세하게 거리는 십장에 한 번
씩이다. 알았냐?"
'이 친구 봐라? 삼천의 세 세력을 공사(共死) 시키겠다는 말인가?'
독안랑 서문천이 백산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천무맹이나 천마맹 두
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천사맹 무리가 용주석주경 쪽에 은신하
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세력에게 천사맹의 세력을 자신들인 것처럼 꾸며서 세 곳을 동
시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의도는 그럴싸하지만 과연 두 맹에서 그대로 따라주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
였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결코 그리 녹녹한 자들이 아
니다.
"일단은 한 천막 안에서 절반 정도만 가장 잔인하게 잠에서 깨어난 옆 사
람이 기절할 만큼 잔인하게 처리해라. 자, 출발하자."
백산이 광견조 일행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며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만
상투인루 지하에서 보여주었던 미소. 이제는 저 미소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
다. 모든 것을 박멸할 때만 나타나는 살소, 천살설의 살기가 실체화 되어
나타나는 살소였다.
일행이 두 패로 나뉘어 조용히 동굴을 빠져나갔다.
* * *
십왕봉.
구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이다. 그곳의 중턱에 죽해(竹海)라 불
리는 대나무 숲이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펼쳐져있는 곳, 천마맹의
천막 십여 개가 세워져있는 지역이다.
"사월아, 내 말 이해하느냐."
"사부님, 냉추렴은 우리 천마맹의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을 죽여서 까지
강호를 가지고 싶습니까?"
벌써 많은 토론을 벌였는지 암사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맹
주의 명령도 아니고 사부가 직접 와서 냉추렴이 있는 일행의 전원을 제거해
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음이다. 차라리 천무맹과 싸우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부
맹주의 제자가 있는 일행의 제거가 새로운 임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진세개를 시켜서 그들을 공격했을 때만 해도 반신
반의했었다. 그런데 사부가 직접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맹의 수뇌부들은
진정으로 냉추렴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비록 석숭과 남궁세가가 연결되는 것을 핑계로 삼고 있지만 부맹주를 전쟁
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것은 자신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뻔한
수였다. 하지만 맹의 수뇌부들은 자신들이 노리는 일행을 너무 무시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천마맹이란 단체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리라.
그들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고를 했음에도, 남궁세가와 만금돈노 석숭
이 연결될 것만 걱정하고 있다.
모든 일행이 도강을 펼칠 수 있고 어검술까지 구사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
다. 그리고 진세개를 단 일초에 죽였던 그자. 비록 진세개가 자신보다 무공
이 조금 약하기는 하지만 마치 파라 잡듯 간단하게 처리하는 그자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사부님, 그자들은…."
"내말 듣거라. 어차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제는 인륜(人倫)이니 도의(道
義)니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이 묻어야한다. 살아 남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
한 일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천마맹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두고 한 말이다. 전쟁에 진다면 어차피 목숨
을 잃게 될 것이고 이긴다 하더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혀 제
거 당할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무조건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의 지시를 수행해야한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알겠습니다. 사부님."
더 이상 사부를 설득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암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마맹의 최고수인 사부에게 당신이 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일이
다. 오십 년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구마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너무 강합니다. 전쟁에 상관없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습니
다. 더구나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몸을 숨겼습니다.'
검강 도강의 고수들이 암습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을
는지가 의문이었다.
부하들에게 암습에 대비해서 최대한의 경계근무를 세웠지만 그들의 나타나
지를 않았다.
'그냥 구화산을 빠져나갔기를….'
그의 바람이었다. 냉추렴을 제거하는 임무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음이고 또
한 그들을 제거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하고 있는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이봐! 장쾌, 나 소피 좀 보고 올게."
천마맹의 진지 가장 외각, 경계를 서고 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지춤을 부
여잡고 한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거 오줌이나 나오겠어? 이 빗속에 물건도 다 쪼그려 들었겠구먼. 빨리 다
녀와."
'암습 같은 것도 없구먼 사람을 이렇게 쥐잡듯 몰고 있으니… 이제는 좀
편해지려나.'
암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대원들이 벌써 닷새동안 잠을 자질
못하고 연일 죽해 부분을 순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암습의 징후가 없었는지 그나마 오늘밤부터는 경계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근무시간도 한 시진으로 줄었다.
"니미럴! 왜 이리 춥냐. 저네들은 비 한방울 안 맞고 천막에 처박혀 있으
면서 우리만 조진다니까."
어느 조직이던지 지시만 내리는 수뇌라는 인간들이 있고, 그들이 아무리
신경을 써 준다 하더라도 부림을 당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만이 생기
기 마련인지 볼일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까 출세를 해야하는 거다."
"우리가 어느 세월에 출세…? 헉!"
자신의 동료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무심결에 대답을 하던 황의 장한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빗속에 하얀 이를 드러내
며 싱긋 웃는 얼굴하나.
"누, 누구…."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반대편으
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거야, 오줌 싸러가서 죽었나?"
아무리 기다려도 동료가 돌아오지 않자 장쾌라 불리던 인물이 어슬렁거리
며 동료가 갔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루릉! 번쩍!
새하얀 번갯불이 사방을 비추자 저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동료의
모습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움직임이 약간 이상한 듯했고 지금껏 걸치고 있던 도롱이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천막 쪽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으나 동료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등을 툭 쳤다.
"어이, 빨리 가자고. 교대시간 다 되었어."
우두둑!
장쾌가 본 마지막 모습은 검은 암흑 속에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이빨이었
다.
잠시 후 도롱이를 걸친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왔고
미약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했으나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서
거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얼추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천막으로부터 두 사람씩 조용히
사라지는 인물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번쩍이는 번갯불 사이로 천막주위에 경계인원이 모두 사라졌음
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천막 아래로 흘러나온
피만 빗물을 따라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으-악! 으웩! 우욱!"
천막 안의 상황이 발견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온몸이 피에 절어있는 나머지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고 토악질을 해대며 밖
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뭐라고 팔 호 천막에 있던 이십 명이 당했다고?"
혈마 소지악과 암사월이 있던 천막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팔 호 천막에 도착한 소지악과 암사월은 천막 안에 벌어진 참상에 경악하
고 말았다.
죽어있는 자들 전부가 목이 잘려있었다. 이미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버
린 퍼런 몸뚱이들과 부릅뜬 눈을 하고있는 머리가 따로 분리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죽이는 수법에 치가 떨렸
던 것이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수면향을 천막 안에 뿌리고
거의 잠들어있는 상태에서 부하들을 한 명씩 깨웠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있는 그들의 목을 잘라서 잠을 자고 있는 나머지 동료들의 품에 안겨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 지라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소 돼지를 잡을 때도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에게, 그것도 죽어있는 시체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천무맹
과 천마맹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그들에 대해 약간의 동점심도 있었
는데 그것마저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흔적을 찾으란 말이다."
분노한 암사월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비마군들이 주변을 수색하기 위해
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군주님."
무려 두 시진 이상이나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
했다. 쏟아지는 비가 모든 것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특급 경계령을 내려라."
천마맹의 진지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대원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곳, 천마맹의 진영과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천무맹 진
영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구화산에 울려퍼졌다.
"도대체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반드시 찾고 만다 반드시."
천무맹의 진지, 다비천검 정철이 분노한 표정으로 구화산을 노려보고 있었
다. 부하 이십 명의 잔인한 살해. 목과 팔다리를 잘라내는 만행을 저지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이틀간 재차 구화산을 수색하다가 또다시 이십 명의 부하가 실종되어
버렸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아왔다.
"으악!"
"무슨 일이냐?"
정철이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하 한 명이 해쓱하게 변한
채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있는 곳, 실종되었던 부하들이 갈가리 찢겨진 채
바위 위에 마치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널려있었던 것이다.
"으읍! 우욱!"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부하들이 토하는 소리였다. 팔 다리 할 것 없이
조각조각 분리되어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시체들에서 빗물과 함께 피가 빠
져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들!"
미칠 것 같은 분노가 온몸을 지배해 왔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들만 도
륙 당하고 말았다.
예상한대로 놈들은 너무 강했다. 그들이 암습하고자 마음을 먹으니 자신들
은 흔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해버린 것이다.
"경계를 강화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
밤새도록 정철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밖의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
다. 몇 번의 순찰을 돌았으나 적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답답했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다. 자신으로서
도 방법이 없었다.
부하들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또다시 삼일 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고 있다. 평소라면 삼일정도 밤샘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는 아무리 무인이라 하더라도 견디기가 힘들다.
"으악! 또 죽었다. 또 죽었어."
이십여 명의 부하들이 고함을 지르며 자신들의 천막에서 튀어나오고 있었
다. 또 절반의 부하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어있었던 것이다.
"뭐야, 새끼야 너! 왜 사람을 치는 거야?"
튀어나오던 인물들이 서로 부딪쳤는지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말
이 오갔다.
"뭐라고? 네놈이 하극상을 벌이는 거냐, 지금?"
"하극상 좋아하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상관은 무슨 상관이야, 새끼야!"
"이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두 사람이 언쟁이 붙었는지 급기야는 서로의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멈춰라! 무슨 짓이냐?"
정철의 내공이 실린 외침에 두 사람이 자신의 검을 집어넣고는 있으나 서
로를 바라보며 눈길에 적의가 가득했다.
정철의 얼굴에 우려의 표정이 서렸다. 좀 쉴만하면 분타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아무리 경계를 강화해도 놈들을 잡을 수가 없다.
"분타주님 수하들이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더 방
치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최대지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정철 자신이 부하들의 상태는 더 잘 알고 있
다. 현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을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죽고, 잠을 자고
있어도 죽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공포에 견디다 못한 부하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으나 그들마저도 천막 근처
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안휘분타 분타원들의 얼굴이 점점 공포로 질려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주는 공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서로 칼
부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림인이라 한두 번의 살인은 경험을 해 보았을 터이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죽음이라는 생각 없이 비무를 하다가 실수로 사람이 죽는
경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곳은 전쟁터이다. 단 한 번도 전쟁
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하고 집단으로 이렇게 죽어가는 것도 보지 못한 이들
이 아닌가.
거의 모든 부하들이 공포에 절어있었고, 잠을 자지 못한 눈은 붉게 핏발이
서있었다. 식사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먹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들의 눈은 언제나 정철만 쫓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
만 상관이 가만히 있고 도망을 치자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나가면 바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타주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쳤는지 금선검 최대지의 보고가 생각에 잠겨있던 정철을
깨웠다.
"어디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이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부하들 때문이라도 이곳을 떠나야 했었는데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고 있다.
"천태봉 쪽입니다."
다비천검 정철이 도착한 곳, 평평한 평지에 십여 개의 발자국들이 희미하
게 찍혀 있었다. 비가 많이 왔을 때는 물에 잠겨있다 비가 멈추며 물기가
빠지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발자국들을 본 정철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 인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다.
그곳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다른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
강 도강을 사용하는 고수들이 아닌가. 아무리 비가 오는 상황이라지만 이
정도 발자국을 남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있다.'
이번에는 혼자서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가기를 한
시진 정도.
'엇! 저것은….'
정철의 쳐다보는 곳, 소나무 숲의 중간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었다. 그동안 비에 의해서 완전하게 젖어있어야 할 가지 하나가 다른
가지보다 물기가 적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미세한 차
이였지만 정철은 발견해 냈다.
'이쪽은 천문봉(天門峰) 방향?'
정철이 천천히 천문봉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의 눈에 미세한 흔적이 보
이기 시작했다. 거의 십 여장 간격으로, 정철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발견
하기 힘든 희미한 흔적이었다.
"대지는 오늘 밤 천문봉 쪽으로 가서 감시하고, 운기 너는 천태봉 쪽이다.
"
"네!"
거의 열 닷새 이상을 내리던 봄비가 대지를 식혔는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와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그 자태를 자랑하
는 밤이다.
천문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용주석주경(龍柱石柱鏡)이란
바위가 있는 곳에 금선검 최대지가 이십 여명의 부하들과 같이 은신하고
있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놈들의 존재 여부였다. 즉 이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돌아
오는 것까지 확인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고즈넉한 부엉이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지는 고요한 숲
속, 절이 많기로 유명한 구화산에 그 흔한 목탁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벌써 두시진 째 매복을 하고 있었으나 놈들의 움직임은 전혀 감지되지 않
았다.
분타주가 무엇인가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에 철수하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검은 인물들이 잡혔다.
비가 오는 상황이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별빛이 가득한
밤이었기에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된 그의 눈에는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
십여 명의 인물들이 무엇인가 상의하는 것 같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었다. 흔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추적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 목적인
것 같았다.
거의 십여 장 정도에서 한 번씩 발을 딛고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것이었다. 십여 장마다 한번씩 흔적이 남았던 이유였다.
자신들을 공격했던 놈들이 분명했다.
이제는 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떠난 자들의 본거지가 이
곳이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천태봉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적들이 가고 있다는 것을 분타주에게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주변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역시 이곳은 속임수였나? 천태봉이 그들의 근거지였구먼.'
고도의 속임수였다. 일부러 많은 흔적을 남기고 그쪽이 아닌 것처럼 생각
하게 하고는 다시 그쪽으로 가는, 인간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를 했다. 자신들이 두 곳을 전부 감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헉!'
막 자리를 이탈해서 움직이려던 금선검 최대지가 재빨리 몸을 숙이며 기척
을 숨겼다.
털옷을 입은 인물 한 명이 은밀하게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
였기 때문이다.
"이쪽 길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무도 없
구먼 뭐."
바로 뒤쪽에 있는 최대지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것이
었다.
이 곳은 위험해서 다니지 말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털옷의 인물이 다시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
십여 장 간격을 두고 최대지가 따르고 있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다시 한번 사방을 살피더니 거대한 바위가
서있는 곳으로 몸을 숨긴 것처럼 사라졌다.
'잠시만, 잠시만 더 기다려라, 대지야. 저놈의 속임수일 수도 있음이야.'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놈이 사라진 통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일 다경이 지나고 이 다경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최대지가 서서히 바위 쪽
으로 움직여갔다.
'아!'
놈이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는 듯, 최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치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던 그곳에 조그마한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앞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은밀한 곳에 만들어진 통로였
다.
자신이 은신해있던 곳이 놈들의 근거지 바로 앞이었다.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서 전진하던 최대지의 눈에 절벽으로 막힌 분지가
보이고 그 사이로 움직이고 있는 인형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에 있었구나 이놈들….'
드디어 자신들을 우롱하고 부하들을 해친 놈들을 찾았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기에 온 구화산을 뒤지고도 찾지를 못했던 것이다.
분지를 뒤로하고 몸을 날리는 최대지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
왔다.
그러나 적의 위치를 찾았다는 흥분도 잠시 진지로 돌아온 최대지의 앞에는
또 다른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 십 명의 독살이 그것이었다. 무슨 독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식수를
마신 인물들이 거의 한 시진 정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숨졌다 한다.
정철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있었다. 부하들이 쓰러진 순간부터 핏물로 녹아
내릴 때까지의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부하들이 눈앞에서 죽어가
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무능력에 더욱 화가 났고
부하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쏟아져나왔다. 온몸을 잠식하
고 있는 것은 분노와 살기였다.
그곳에 있던 안휘분타의 모든 대원들의 눈에서도 살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앞에 있다면 바로 찢어 죽일 기세였다.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원한과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온 몸을 지배하여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철이 최대지를 쳐다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문봉 방향을 노려보
고 이를 갈아댔다.
"준비 시켜라. 오늘밤 친다. 그동안의 빚을 한꺼번에 갚는다."
'피를 마시고 말리라. 목을 따서 피로 목욕을 하리라.'
정철의 몸에서 무서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것을 태울 듯한
전율스런 기운이었다.
다비천검 정철의 몸에서 나온 살기보다 더 무섭게 분노하는 곳이 있었으니
천마맹 진지의 무면마룡 암사월이었다.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
서 무면마룡이라 불리던 그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노려보는
곳은 천문봉 쪽이었다.
오십 명, 독살을 당한 부하들의 숫자였다. 아침의 시작과 함께 오십 명의
부하들이 독에 중독 되어 핏물로 녹아 사라졌던 것이다.
* * *
"그렇게 잔인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천태봉의 금선동 내부. 독안랑 서문천이 그동안 백산이 행했던 잔인한 행
동에 질렸는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거의 웃음으로 일관하던 일상생활과
는 달리 한번 살심을 먹자 그가 보여주는 행위는 독하다고 욕을 먹고 있는
자신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무서운 점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살기였다. 약간의 미소마저 감돌고 있는 것 같은 얼
굴로 적의 목을 자르는데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행동은 과연 인간의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마저 생기게 하였다.
"사람이 분노하게 되면 아무생각 없어지게 되죠, 저들이 걸어온 싸움이고.
"
극도의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들의 분노를 유발시켜 상대에 대한
판단 같은 것은 접어두고 무조건 싸우게 만들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친구를 건들이고 말았어….'
석숭의 중얼거림이었다. 만상투인루에서 백산이 보여주었던 것은 광기였다
.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박멸(撲滅).
하지만 그때만 해도 백산의 행동은 자신이 죽인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같은 것이 보였었다. 즉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자책의 표정을 보였다는 것
이다. 그러나 살인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백산의 행동에서 그러한 면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파멸안의 기운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침묵 속의 분노 그리고 내재된 살기, 외적으로는 어떠한 감정상태도 나타
나지 않는, 웃는 모습마저도 공포가 느껴지는 그런 상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 구화산을 걸어서 내려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사맹이 있는 천문봉은 그들 무림삼천의 무덤자리로 정해졌고 그렇게 될
것이다.
과거에 학살자라 불리던 파멸안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이 앞
섰다.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다음단계로 진행하게 되면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있고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학살자였다는
것과 신들을 파멸시켰다는 것 뿐….
그러나 석숭이나 독안랑은 백산의 잔인함만 탓하고 있지 자신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없었던들 백산이 무슨 수로 적의 존재를 알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았겠는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상황을 예측하고 백산은 그 상황을 이용할
뿐이었다.
"한숨들 자둬. 이따 밤에는 바쁠 테니까."
* * *
으스름한 밤안개 속에 천문봉의 정상 쪽을 향해서 움직이는 수백 명의 흑
의인들이 있었다. 이미 지리를 알고 있는지 그들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
었다.
그들이 멈추어 선 곳, 용주석주경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 기둥이 있는 곳
으로 새벽 나절에 최대지가 살피고 갔던 바로 그 장소였다.
최대지였는가 흑의 복면인중 한 명이 용주석주경 사이에 나있는 조그만 통
로를 가리키자 옆에 있던 인물이 손을 들어 진입을 지시하고 있었다.
거의 일 다경 정도를 걸어서 흑의 복면인 일행이 도착한 곳 사방 칠십 여
장 크기의 조그마한 분지였다.
중간 중간에 바위들이 솟아있는 곳으로 북서쪽을 제외한 모든 면이 가로
막혀있다.
절벽에 의해서 거의 모든 것들이 차단된 때문인지 검은 암흑만이 존재하는
분지 내에는 뭔지 모를 이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서너 개의 동굴과 그 주위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인
형들이 희미하게 잡혀왔다.
"드디어 잡았다 놈들!"
다비천검 정철인가 복면을 한 인물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나
왔다. 이윽고 동굴 쪽을 노려보던 그의 입에서 사방을 울리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라."
정철의 명령과 함께 수백의 검은 복면인들이 야조(夜鳥)처럼 날아가기 시
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한결같이 풍기는 것은 살기였고 동료에 대한 복수심
이었다.
"누구냐? 적이다!"
동굴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인물들의 당혹스런 외침소리와 함께 동굴 속
으로부터 수많은 혈의인이 각자의 병기를 들고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헉! 그들의 인원이 저렇게 많을 수가….'
정철이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동굴 속으로부터 꾸역꾸역 몰려나오
는 인물들, 그 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놈들의 수요는 기
껏해야 이십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저 많은 무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뭔
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혼
전이 벌어지며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칠십여 장의 분지에 혈풍이 몰아치고 피비린내가 흠씬 풍겨나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적의 수효에 기겁을 한 정철보다 더 놀라는 인물이
있었다.
천사맹 혈사대(血邪隊)의 대주인 혈인귀(血人鬼) 방대운(邦大運)이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다. 애초에 혈사대가 이곳에
온 목적은 천무맹과 천마맹의 균형을 맞추어 장기전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
이었기에 여태껏 이곳 천문봉에 은신한 채 두 세력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
그러나 천무맹의 백의대나 흑사파 진영은 서로 주시만 하고 있을 뿐 전혀
움직임의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습이라니, 누가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기습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적이 누구냐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누가 되었던지 간에 적
이 쳐들어 왔고 물리쳐야 한다.
"전 혈사대원들은 실혼망혼진(失魂亡魂陣)을 펼쳐라!"
혼전의 와중에 방대운의 목소리가 분지 내에 울려퍼지고 흑의인들의 공격
에 우왕좌왕하던 혈사대원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이인 일조씩 짝을
이루기 시작했다.
"움바라 디아무 바리사…."
사기(邪氣) 가득한 영창소리와 함께 이인 일조로 되어있던 수백의 인물들
이 일제히 자신들의 손목을 그으며 허공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 주변으로부터 뿌연 피안개가 생성되기 시작하더니 사방으로 뻗어나가
며 주변을 붉게 물들여갔다.
절벽을 뒤로하고 분지 절반정도에 반원을 그리고 있는 혈사대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영창이 흘러나오고 온 분지를 가득 메운 혈무(血霧)에서는 죽음의
살기가 흘러 넘쳤다.
"칠성오행진(七星五行陣)을 펼쳐라!"
정철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천마
맹도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벌써 수십 명이 실혼망혼
진에 갇혔는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료에게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실혼망혼진의 무서움이었다. 시전자의 피와 영창을 매개체로 이용해서 펼
치는 환술(幻術). 진에 갇힌 자는 극도의 환각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 앞에
있는 자들은 전부 적으로 간주하여 주살 하게 된다.
오십 년 전에 천마맹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서운 진식이었다.
정철의 말이 떨어지자 그나마 정신이 남아있던 천무맹의 인물들이 아홉 명
씩 한 조를 이루면서 검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곱 명이 북두칠성 모양을 만들고 나머지 두 사람이 허리를 보강하
면서 북두칠성의 중심에서부터 오행검진을 형성한다. 화산파 칠성검진(七星
劒陣)의 공격성과 무당파 오행검진(五行劒陣)의 방어성을 절묘하게 조합한
천무맹의 독문검진, 공격과 방어의 조화를 중시하는 검진 중의 하나였다.
진식 대 진식, 정공과 환술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보았을 때 남서쪽, 용주석주경이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수백의
눈동자가 분지 안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맹의 혈마 소지악과 암사월 일행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쳐지는 분지내의 상황은 실로 처참했다. 수십 개의 오행검
진에 꼬리가 달려있는 모양을 한 칠성오행진이 붉은 혈무 속을 거칠게 휘젓
고 다니며 적을 주살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무사하지를 못했다. 진이 무너
지면 곧바로 동료끼리 검을 날리며 자멸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사맹의 상황도 천무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천사맹의 실혼망
혼진도 양쪽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손목에 있는 동맥으로
부터 피를 뿜어내던 인물이 쓰러지면 그 뒤에 있던 인물이 다시 손목을 베
어서 피를 뿌려대며 진을 유지시키려 하고 있지만 거세게 부딪쳐오는 천무
맹의 검진에 견디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으로 치닫는 혈전을 지켜보던 천마맹 인물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피를 원하는 것이다. 그동안 백산 일행의 공격으로 극도로 예민해
있던 감각에 붉은 혈무와 인간의 피를 더하게 되니 자연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그런 부하들의 심정을 느꼈음인지 암사월이 적을 치자고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부하들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극도의 살기를 밖으로 표출해야 만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벌써 죽거나 부상당한 양 세력의 무인들이 절반 이상이 되어보였다. 공격
하고 있는 천무맹의 인물들도 자신들의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을
이용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물러설 때를 잊고 무작정 적을 향해 몰려가고 있
었다.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리다 저들이 거의 공멸할 때 그때 정리한다."
혈마 소지악, 그는 저 실혼망혼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십 년
전에 뼈저리게 당했던 경험이 있던 진이었기에 기다리라 하고 있는 것이다
.
슉!
컥!
그 순간 분지의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앞에 있던 부하의 미간을 뚫고 소지
악의 면상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소지악이 재빠르게 그 화살을 쳐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또 다시 몇 번의 미약한 소리가 들리더니 부하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있었다. 하나 같이 이마를 관통해버린 화살들. 부하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
작했다.
아래쪽의 혈전을 바라보고 있던 암사월과 소지악의 눈에 활을 들고 있는
인물이 천무맹의 후대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천무맹 놈들도
이곳에 자신들이 은신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들은 왜 내려오지 않느냐는 듯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놈인가!'
소지악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자신들에게 활을 쏜 자를 쳐다보았다. 지금
천무맹 상황으로는 자신들을 불러들일 여력이 없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서 부하들을 쳐다보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놈이 또 다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바위 뒤쪽으로 몸을 숨긴
녀석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으악! 악! 컥!"
소지악과 암사월이 있는 곳의 십여 장 밖에서 부하들이 죽어가며 지른 비
명소리였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부하들이 목이 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
다.
"잡아라!"
이미 붉어진 눈동자로 동요하던 천마맹 인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
료를 해친 복면인을 쫓아 몸을 날렸다.
"멈춰라!"
소지악이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분노해버린 그
들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너무 긴장해 있었다. 천무맹과 강호를 양분하고 있던 오십 년간 전투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사지가 절단되어 참혹하게 변해 있던 동료
의 모습과, 독에 의해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동료들의 죽음은 감정의 균열
을 가져왔고, 모든 신경이 곤두 서있는 상태에서 두 세력간의 피 흘리는 혈
전을 지켜보며 이성의 끈이 조금씩 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화살 공격과 바로 앞까지 와서 저지른 동료들의 도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동료를 살해한 놈을 쫓아가게 되었다
.
극도의 긴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모든 천마맹의 대
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무맹과 천사맹이 벌이는 혼전에 끼여들었고
분지에서는 또 다른 살육의 축제가 벌어졌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칠십 장 정도 넓이밖에 안 되는 분지에 천여
명이 넘는 무림인들이 서로에게 검과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석두! 저기 들어가는 입구 막아버려!"
무림삼천이 싸우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백산이 석두에게 또 다
른 지시를 내렸다. 천무맹의 인원들이 들어왔던 조그마한 통로 그곳을 막아
버리면 분지 내에 있는 인물들이 도망을 치고자 한다면 조금 전 천마맹 인
물들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곳밖에 없다.
여자들과 갈태독을 제외한 전 인원이 이곳에서 육포를 씹어먹으며 유일한
통로를 막고 있었다.
"자네 뭐하나?"
활에 시위를 먹이고 있는 백산의 행동을 보며 서문천이 물었다. 구경만 해
도 될 상황인데도 또 다시 활을 준비하는 백산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 것이
다.
"균형을 좀 맞춰 주려고."
'독한 놈!'
서문천이 생각하는 백산이란 놈은 지독히 독한 놈이란 것이었다. 세 개의
세력이 공평하게 싸우다 공멸(共滅)하라고 좀 강하다 싶은 놈들을 활로 쏘
아서 먼저 저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의 화살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막을
수 없었는지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인물들이 부지기수였다.
지금은 주로 천마맹의 인물들에게만 화살이 날아가고 있었다.
오십여 개의 화살이 다 떨어졌는지 허전해진 전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
리던 백산이 죽어있는 천마맹 인물의 옷을 하나 벗겨 자신이 걸치고 있다.
"또 왜?"
"화살 찾아와야지. 다 돈인데."
무섭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있는 모습이 마치 악마의 미소 같았다. 그리고 순
식간에 사라지는 백산의 모습.
한 손에 도를 뽑아들고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가볍게 찔러 넣는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가 해쳤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
다.
서로의 목숨을 취하는 데만 모든 정신이 팔려있는 무림삼천의 인물들은,
죽어버린 시체의 몸에서 화살을 뽑고 있는 백산의 행동을 누구도 주시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다른 사람의 행동에는 눈길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이 더 옳은 말이다.
그리고 화살을 찾아 움직이다 자신 옆에 있는 천마맹의 인물들을 날아오는
검을 향해서 가볍게 밀어 넣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봐, 괜찮아?"
바로 앞에 있는 황의인 한 명이 팔에 상처를 입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주
춤주춤 물러나는 것을 보고 백산이 말을 걸었다.
"약간 스쳤을 뿐 괜찮네."
뒤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황의인을 향해서 흑의 복면인 한명이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뒤에서 살기를 느낀 황의인이 자신의 도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팔이 움직
이지 않았다.
"왜?"
자신의 가슴에 검이 관통한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의인이 백산을 쳐다
보며 물었다. 가슴을 찔렀던 검보다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동료의 행
동이 더 의아했던 것이다.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죽어. 저놈도 같이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죽어 가는 황의 대한의 팔 사이로 자신의 도를 흑의인의 목으로 찔러 넣으
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기를 일 각여 화살을 다 찾았는지 다시 일행이 있는 부근으로 돌아왔
다.
백산을 바라보고 있는 무욕 십대고수 네 명을 비롯한 남궁지우의 몸이 자
신들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무섭도록 차가운 행동이었다. 저 혼전 속을 마치 산보 다니는 것처럼 움직
이며 순식간에 수십 명의 인물들을 해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살우야, 육포 좀 줄래?"
"허!"
'저 자들 중 이곳에서 살아 나갈자는 아무도 없겠군.'
석숭은 이미 예상했었고 서문천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서문천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나고자 애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최대지, 병력을 뒤로 돌려라. 후퇴한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나고 말았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좀 더 신중하니 부
하들을 투입했었어야 했다. 순간적인 분노에 앞 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던
것이 실수였다. 단 한번의 실수가 거의 모든 부하들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일단 후퇴를 했다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철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황의인의 몸을 잘라가고 있었다. 서로 간에 옷
을 바꿔 입은 듯이 천무맹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천마맹은 황의를 입고
있었다.
그가 배운 무당의 검법은 유운검법(流雲劍法), 속가제자들에게만 전하는
검법이다. 삼재검법(三才劍法) 다음으로 보잘것없는 검법. 그것 하나 주고
생색은 얼마나 냈던가.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삼재검법과 유운검법을 합쳐서 유운삼재검법(流雲三才劍法)이라는 자신만
의 독특한 검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오늘의 자리까지
올랐다.
"분타주님, 퇴로가 막혔습니다."
'허허! 결국은 여기서 뼈를 묻어야하는가.'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 유일한 통로는 천
마맹 인물들이 내려왔던 곳이다. 그 쪽 방향으로 빠지기 위해서는 천마맹의
정예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가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다.
"검진을 펼쳐라. 내가 앞장선다."
다비천검 정철이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검진의 가장 앞으로
나서며 무차별하게 검을 휘둘러댔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힘이 있는 자 힘이 없는 자, 상대의 심장을 찌르
고 난 후 살아남았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문득 가슴 쪽에서 오는
통증에 아래를 쳐다보면 붉은 검이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세상이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그대로 쓰러지고 그 위로
또 다른 피가 뿌려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발버
둥을 쳐보지만 허망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검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먼동이 터 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희뿌연 빛 무리가 용주석주경을 타고 들며 조금씩 절벽을 비추면서 분지에
뿌려지고 주변의 정경이 드러났다.
죽음의 산이 만들어져있었다. 칠십 장 정도 크기의 분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신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서로 농담을 하며 웃어주던 수많은 동
료들이 같이 쓰러져있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살육이고 도살이고 악몽일 뿐이다.
때로는 죽은 자보다 살아 남은 자들이 더 힘이 든 것인가. 지금 남아있는
자들의 심정이 그랬다.
다비천검 정철이 그랬고, 무면마룡 암사월이 그랬고, 혈인귀 방대운이 그
랬다.
"나와라!"
정철의 메마른 고함소리가 메아리 되어 사방으로 울러퍼졌다. 밤새도록 검
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지만 아직 힘이 남아있던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것은 힘이 아니라 분노의 찌꺼기였다. 분노의 감정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힘이 되고 있었다.
"왜, 이제는 조금 마음이 쓰린가?"
놈들이었다. 천마맹인물들이 은신해있던 그곳에서 이십 여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잔인한 놈! 전부 다 죽여서 만족하느냐?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여서 속이
시원하냐고."
"취익! 뭔가 착각하고 있군. 저기 죽어있는 이들을 이곳으로 밀어 넣은 이
가 당신들 아니었나? 내가 이곳에서 싸우라고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아직 다 죽은 것이 아니잖아. 너희들이 살아있으니 말이야. 너희들
까지 죽어야 다 죽은 것이 된다고."
"이익!"
정철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분지 안으로 부하들
을 밀어 넣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 고함을 지른 사람
은 놈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수하 사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을 망친 놈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정철이 내 인생을 망친 놈이라 하고 있다. 스스로 인생을 망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저들을 노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 줄 부하들의 목숨
만 소중하고 아까운 것이다.
"크 하! 하! 하! 하!"
비통한 웃음소리와 함께 백산 일행을 노려보며 피로 점철된 정철의 검의
방향을 틀었다.
푹!
야망이 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정철의 몸이 서서히 대지위로 쓰러졌다. 속
가제자에서 천무맹의 안휘분타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한 야망자의 꿈이
차디찬 대지위로 스며들었다. 정철이 마지막 죽음의 길목에서 남긴 것은 분
노의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부릅뜬 눈이었다.
"너희들은?"
정철의 죽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백산이 고개를 돌리며 남아있
는 삼인을 향해 왜 자살을 하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허! 완전히 당했군. 이 소지악이 너 같은 햇병아리에게 당하다니 지나가
던 개가 웃을 일이구나. 갈태독은 오지 않았느냐?"
부하들이 모두 죽고 자신과 제자만 남아있는데도 소지악의 얼굴에는 여유
가 있어 보였다.
"너는 자결 안 하냐고 묻고 있잖아 새꺄! 왜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고 딴
소리하는 거야."
"이런 육시랄 놈이."
백산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혈마 소지악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자신
이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공은 좀 강해 보이지만 천
장지옥마가 없는 이들은 별 게 아니라 여겼다.
무욕고수 네 명이 있다하더라도 철목승 이외에는 상대로 생각해 본적도 없
었다. 단지 갈태독이 있다고 하기에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그가 없는 이들
은 오합지졸일 뿐이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부하들의 죽음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그 때문에 자살
을 한다면 이세상에 장수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이나 하는 짓이다. 세상에 출세를 원하는 무인들은 넘쳐난다. 그들을 데려
다 또 키우면 부하가 되는 것이다.
기회는 다시 찾아오는 것이고 살아서 기다려야 한다. 소지악이 백 삼십 년
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인생철학이었다.
이십 명 정도 되어 보이지만 자신이 몸을 빼고자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을 두고 도망가야 한다는 점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맹에 다른 부하들이 남아있고 재기의 기반은 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할 필
요가 절대 없는 것이다.
"너는 자살을 하게 될 거야.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만 살면 안 되지.
반드시 자살을 할 거야."
확신에 찬 얼굴을 한 백산이 자신의 도를 뽑아들고 혈마 소지악 앞으로 다
가서고 그 뒤를 이어 소살우가 암사월 앞으로, 부상에서 회복한 찍새가 방
대운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늙은이 자살할 무기 없어?"
"너 같은 애송이에게 도가 필요할까?"
백산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소지악의 표정은 침착했다. 극고의 경지에 다다
른 자에게서 나오는 안정감이었다.
벌써 삼십 년 전에 무기가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아무거나 손에 잡
으면 도이고 검이 된다. 날카롭고 무딘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살이 잘
리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맨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
는 소지악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솟아나오고 주변에 흩어져있던
시체들이 밀려나가며 공터가 형성되었다.
어느새 주워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들려있었고 백산의 미
간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내밀어진 채 붉을 도강을 뻗어내고 있었다.
'사월아, 준비해라.'
소지악이 암사월에게 전음을 날렸다. 백산을 죽임과 동시에 몸을 빼내려는
것이다.
'사부님!'
암사월이 안타까운 눈으로 소지악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이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조차도 저자의 강함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습게 생각하고 있질 않는가. 정녕 무서운 자였다. 천여 명을 몰살을 시켜
놓고도 조그마한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감정이 죽어버린 살성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刀)를 쓸 거다. 무쇠로 만들어진 튼튼한 도(刀)를…."
백산이 달려나가며 소지악을 향해서 외쳤다. '천방지축팔방무.' 엉성한 보
법이 펼쳐지며 그의 도가 소지악의 사방을 조여가며 붉은 혈광을 쏟아내었
다.
캉! 카앙!
백산의 파상적인 공격을 소지악은 가만히 서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내심으로 상당히 놀랐다. 비록 나뭇가지였지만 도강으로 감싸고 있기
에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려나가게 된다.
그런데 놈의 도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흠집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상체만을 공격하던 백산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하체를 향해 횡으로 쓸
어가며 한바퀴 돌아버린다.
그의 도를 피하기 위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른 소지악의 아랫도리를 향해 재
빠르게 도를 찔러가고 있었다.
찌이익!
"허억!"
소지악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허공에서 회전을 하며 뒤쪽
으로 내려섰다. 찌르기라니… 도를 이용해서 찌르기를 시도하는 어처구니없
는 상황에 직면한 소지악의 눈에 놀람의 빛이 나타났다.
도는 베기를 위주로 하는 것인지 찌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즉 도법에는 결코 찌르기라는 초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저놈도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란 말인가?'
도를 가지고 찌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초식이 필요 없는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이다.
"네가 너를 너무 경시했군."
백산의 무위가 자신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일류 수준을 넘어선 고수라 생
각했는지 뒤로 물러선 그의 몸에서 붉은 혈광이 어리면서 주변의 시체들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도 진실한 무공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혈영도천세(血影刀天勢)!"
소지악의 젊은 시절의 독문 무공이며 혈마란 별호를 만들어주었던 혈영도
법(血影刀法), 도강을 동반한 엄청난 강기들이 백산을 향해서 덮쳐가고 있
었다.
"혈극참!"
백산의 입에서도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그의 도에서도 붉은 도강이 쏟아져나
오며 소지악이 만들어 놓은 도강을 향해서 물밀 듯이 밀려가고 있었다. 피
보다 더 붉은 두 개의 도강이 두 사람의 중앙에서 무섭게 얽혀들었다.
키이잉! 카카강!
나뭇가지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거북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소지악이 선 상태 그대로 뒤쪽으로 죽 밀려났다.
'공세를 잡으면 끝날 때까지 밀고 가라.' 투귀 오구의 가르침이 아니더라
도 백산은 약하다고 봐주는 것이 없다. 백산의 몸이 비호처럼 소지악의 뒤
를 따르며 허공에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의 무기가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
챙! 챙! 차앙! 챙! 차앙!
두 사람의 몸과 도에서 뿜어져나온 강기들이 폭풍처럼 분지 안을 유영하며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소지악의 나뭇가지에서 일장 크기의 붉은 도강이
나와서 사방을 쓸어가고 이에 질세라 백산의 도에서도 도강의 폭풍이 흘러
나와 그 뒤를 따랐다.
거의 일각 정도를 허공에서 부유하는 형태로 싸우던 백산이 갑자기 그 자
리에 내려섬과 동시에 소지악을 향해서 일초의 도법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완전한 혈극참을 펼친 것이다.
백팔 개에 달하는 붉은 도강이 솟아나와 소지악이 서있는 곳의 모든 공간
을 찢어발기며 거칠게 밀려들어갔다.
'저럴 수가!'
기겁을 한 소지악이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붉은 도강의 벽을 쌓았으나 선공
을 잡힌 소지악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앞쪽으로 길게 파여진 두 줄기의 흔적이 이번 격돌에서 그가 밀렸음
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음인지 소지악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
으로 변하며 패배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단 말인가. 이제 갓 약관을 넘어 보이는 놈에게 자신이 밀리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이 생성된 도강이라니….
"그게 무슨 도법이냐?"
자신도 도(刀)를 다루는 무인이었고 평생 도와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 저
렇게 강한 도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 새꺄!"
얼이 빠져있는 소지악을 향해서 뇌까리며 백산이 자신의 도를 그냥 허공으
로 던졌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돌팔매질을 하듯이 그렇게 던지는 것 같았으나 소지악
의 눈에 보이는 도(刀)는 산악이었고 하늘이었다. 어도술로 보기에는 너무
나 강한 위력이었던 것이다.
"어도술에다 도강기를 포함시켜서…."
그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날아오는 도에 솟아있는 이장 크기의 도강.
무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몸에서 떨어
진 무기로부터 도강이 솟아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한가하게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혈영무극세(血影無極勢)!"
이초인 혈영도극세(血影刀極勢)만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지막 삼초인
혈영무극세를 펼쳤다.
'허억!'
소지악의 입에서 나온 헛바람소리였다. 자신의 손짓에 따라 주변에서 떠올
라야 될 도검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백산의 술수였다. 소지악과 허공에서 얽혀들었을 때 지금 자신들이 있는
십여 장 정도의 공간에 널브러져있던 모든 시신들과 무기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소지악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주변에 아
직도 죽은 시체와 그들의 무기들이 널려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급해진
소지악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재빠르게 대응을 했으
나 너무 늦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크억!"
뒤로 물러나던 소지악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소지악의 실책. 나뭇
가지 등을 이용하여 폼잡는 것은 자신보다 한참 하수에게 시범을 보일 때나
쓰는 방법이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는 자와 싸우면서 진도(眞刀)
에 대항하여 나뭇가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진배없다. 아
무리 병기가 필요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어도 병기가 주는 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검(神劍)이나 신도(神刀)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신검 신도
가 하류무사를 고수와 대등한 수준으로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극강한
고수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 훌륭한 병기인 것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수용할 수 있는 병기, 그런 병기가 있어야 대등한 실력
의 고수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음이다.
분명한 소지악의 실책이었다.
또한번의 패배였다. 오십 년 전 한 가문의 도법에 패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십 년간을 노력했다. 이제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가
문의 도법보다 더 강한 도법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경악한 사람들은 또 있었다.
무욕고수 네 명과 남궁지우가 그들이었다. 전설의 구마(九魔), 그 중 혈마
소지악이 단 이 초만에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무위를 가지고 있는 소지악이었고 그가 땅바
닥에 무릎을 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석 공자, 저 친구 원래 도를 썼나?"
허세가 좀 있는 친구이니까 폼으로 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알았지 백
산이 도법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남궁지우가 석두를 향해서
물었다.
남궁지우뿐 아니라 석숭을 제외한 누구도 백산이 도법을 펼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석두와 광견조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귀혼곡에서 한번
펼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광견조와 석두가 기절해 있어서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백산이 가지고 있는 열 두 개의 비도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백산의 사부가
팽무도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부가 도의 달인인데 도를 쓰지요. 그리고 지금은 도법만 사용해야 될
상황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도법만 써야될 상황이라니."
"사부의 복수이니까요."
석두도 백산이 도만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십 년 전 사부들의
가문을 파멸시키게 한 백살마대의 음모, 그 음모의 주역 중의 한 명인 혈
마 소지악 아니던가.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 백산이 도만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가 누구이기에…."
남궁지우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백산의 말이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내 사부가 백살대 대장이야, 네놈들이 백살마대로 만들었던 천하제일도
팽무도란 말이다."
"뭐라고? 또 팽가란 말이냐, 그것도 팽무도였고?"
온몸을 경직시키며 커다란 고함을 내지른 소지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
다.
자신들이 괴멸시킨 백살마대의 대주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 아니
었다.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주었던 가문의 도법이었고 그 당사자인 팽무도라
했기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놈을 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는데 또 다시 놈의 도법에 의해서 패했
다.
세상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 년 전에 도를 뽑았다가 팽무도에
게 패했는데 그로부터 오십 년 후에 뽑은 도는 그놈의 제자에게 패했다. 영
원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 영감이 직접 네놈을 죽여야 하는데 기력이 딸려서 말이다. 이제 그만
부하들 옆으로 가라."
말을 마침과 함께 백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혈극망(血極忘)!"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만든 도법, 자신에게 도를 던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
도 세상에 대한 분노도 모두 잊고자 했던 팽무도의 염원이 담긴 한천팽무도
법의 삼초 혈극망이 죽음의 기운을 머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허허허!"
더 이상 대항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어린 녀석은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반항할 의지를 상실했는지 소
지악이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붉은 기운을 가만히 쳐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혈마 소지악.
상관마저도 배신하며 중원의 패자가 되고 싶어했던 인물,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잡고자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가루로 무너져내렸다.
모두가 죽었다.
간밤에 이곳에 왔던 무림삼천의 모든 인원들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죽었고 무수한 시체만 남았다.
팽무도의 얼굴이라도 그리고 있는지 허공에 멈춰선 백산이 남쪽 하늘을 바
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사부. 찾아오는 놈만 해결할 거요. 찾아다니면서 처리하지는
않을 거요. 왜냐면… 귀찮으니까 그렇지 뭐.'
조천영과 약속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가도 가기 전에 벌써부터 쥐어 산다고 욕을 먹을 것 같기 때문인가 보다
.
"누님 때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허공에다 대고 삿대질을 한번 한 백산이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
려섰다.
꿈꾸고 있는 사람들.
백산의 무위에 꿈꾸는 자들이 무욕인들이라면 팽무도란 이름 석자에 놀란
사람은 남궁지우였다.
"그랬어, 그랬던 거야… 프 하하핫! 으 하하핫!"
기쁨에 찬 남궁지우의 웃음소리가 구화산에 울려퍼졌다. 친형과 의형이 같
이 살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의 무공을 익힌 제자들이 강호로 돌아왔다. 복수
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분들의 제자들이 왔다 함은 그분들이
더 이상 숨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형님! 많이 외롭지는 않았겠구려.'
축축이 젖어있는 남궁지우의 눈길도 남쪽을 향했다.
남궁지우의 웃음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있는 무욕인
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툭 치며 휘적 휘적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백산을 따
라서 마치 혼이 없는 강시처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 괴물 같은 놈들의 행위에 다시는
놀라지 않을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도 돌아온 일행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포 값 좀 하시려우?"
일행의 떠나는 준비를 돕고 있는 무욕인들을 향해서 백산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이간질시켜서 동패구사?"
서문천의 말에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직 구화산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비천검 정철과 혈마 소지악의 뒤
를 받치기 위해서 나와있는 천무맹과 흑사파를 없애버려라 하고 있는 것이
다.
"몇 놈은 살려주어도 상관없소."
거의 다 보내라는 소리였다.
"낙양에서 봅시다. 여기 육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