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84)

제4장 사사대(死邪隊)

 오악(五岳)을 보고 온 사람은 평범한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을 보고 온 사람은 오악도 눈에 차지 않는다.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

山)을 두고 한 말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화봉(蓮華峰)이 오천 척이 넘고 삼천 척이 넘어가는

 봉우리만 일흔두 개에 달하는 안휘성 최고의 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연중 이백 일 이상이나 자욱하니 끼어있는 운해(雲海)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절경을 이루고, 황산(黃山) 일출(

日出) 중원제일(中原第一)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황산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황산의 절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열심히 발걸음을 놀리는 한

무리의 인마(人馬)들, 바로 백산 일행이었다.

 새로 사 입었던 옷들은 양자강에서의 전투로 이미 넝마가 되었는지 산을

오를 때마다 갈아입던 헌옷을 입지 않고 새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겉치레야 원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놈들이라 새옷이든 헌옷이든 크게 문제

가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표정들이 밝아 보였다.

 처음으로 이름 석자가 생긴 것도 있었지만, 웬일로 황산을 오르기 전에 그

동안 소중하게 들고 다니던 광천뢰를 백산이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저 멀리 구룡폭포(九龍瀑布)가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공터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한나절의 강행군에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모사! 앞으로."

 거의 이십 척 정도 크기의 바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백산이 모사를 호명했

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던 광견조원들이 일제히 백산을 쳐다보았고, 또 무

슨 고통을 주려고 자신을 부르나 싶어서인지 불안한 표정의 모사가 어기적

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제의 약속대로 오늘부터 각자의 이름을 쓰는 시험을 치르겠다. 처음 쓰

는 이름이니까 성의껏 써라. 이 바위를 꽉 채워서 영원히 남기도록."

 모사의 표정이 풀렸다. 어려운 것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껏 이름 새기는

것이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름 새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는 모사였다. 그에게 있

어서 글씨도 모조품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그려내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모사가 바위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수없이 많은 글들을 모사했지만 그것

의 의미를 알고 모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사해야 될 것이 자신

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것일진대도 모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단 두 자. 그

것을 새기는 것이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모사품은 의미가 아니었다.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

고 따라 그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아직 못 외웠냐?"

 "아닙니다. 형님, 쓰겠습니다."

 다급히 소리친 모사의 오른손이 붉게 물들었다. 마차를 메고 오는 과정과

광천뢰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제는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는지 마음

을 먹자 바로 손이 강기에 휩싸인 것이다.

 "이얍!"

 힘찬 고함 소리와 함께 모사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의 정권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흙을 파내듯이

 그렇게 바위가 떨어져 나가고 전서체의 글씨로 글이 새겨지고 있었다.

 '전영(全泳)'

 모사의 새로운 이름이다.

 두 자의 글자를 새기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는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

혀 있었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고 있

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종이 위에 있던 필체를 그대로 흉내 냈지만 이번에는 그린 것이 아니

다. 자신의 심력(心力)을 다해서 썼던 것이다.

 모사가 새겨 놓은 글을 바라본 광견조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나 잘 썼던 것이다. 수십 년을 노력해도 자신들은 해낼 수 없는 일이

다.

 "야, 임마! 비석 세우냐? 두 자 밖에 안 되면서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려

?"

 그들도 알고 있었다. 모조의 달인인 그가 두 자를 새기는 데는 촌각(寸刻)

도 안 걸린다는 것을….

 "맞다. 저 새끼 뒈지면 저것 잘라다 비석으로 만들어 주자. 아니다, 그냥

이곳에 가지고 와서 저 이름 밑에다 묻어버리지 뭐! 그게 좋겠다. 낄낄낄!"

 너무나 잘 새겨진 모사의 이름을 보며 광견조원들이 부러웠던지 한마디씩

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다음 말은 그들의 얼굴색을 하얗게 탈색시

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사가 써놓은 글을 잘 보았을 것이다. 앞으로 가는 길에 산이 나오면 그

곳에 있는 가장 명당자리에다 이렇게 이름을 새긴다. 만일 모사보다 못한

놈이 있으면 너희들 말대로 그곳에다 묻고 간다. 알았나?"

 모사에게 가장 먼저 이름을 쓰게 했던 이유가 드러났다.

 낄낄거리던 광견조원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자신의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 찔러두었던 이름자가 적힌 종이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자신조차 알아보기 힘든 악필, 글이라는 것이 하

루 만에 쓸 수 있는 것이었던가.

 다음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찌 되었든지 남들이 알아볼 수는 있도록 해야

한다.

 모사를 제외한 광견조 전원이 땅 바닥에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 바로 그 순간 스산한 살기와 함께 혈의 복면인 이십여 명이 일행을 덮쳐

왔다.

 "뭐야! 이거?"

 광견조 일행이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을 굴리며 자신의 도를 뽑아들었다.

 "이런 씨펄!"

 소살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기습해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굴린 순간 자신의 이름자가 적힌 종이가 반으로 찢어지고 말

았던 것이다.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극도로 살심(殺心)이 일었을 때 나

타나는 표정이었다.

 "누구냐?"

 많은 인물들이 일행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살수

를 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갈태독과 과거의 원수가 왔다며 농담까지 했지 않았던가.

 뇌룡현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곳까지 오면서 특별히 원한 살 만

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더욱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저들의 은밀함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자신의 이목을 피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강호에 누가 있어 자신과 갈태독의 눈을 벗어나서 공격을 해온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백산의 외침에 이십여 명의 혈의 복면인은 아무 소리가 없었다. 다만 더욱

더 진한 살기를 발산하며 일행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살수(殺手)인가? 아니면 살수 교육을 받았나…."

 갈태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결코 살수는 아닌 것 같았다. 살수라면 일격

이 실패했을 경우 다음 기회를 노리지 이렇게 대담하게 공격하지는 않는다.

 어느새 인원이 오십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주변에 은신해 있었던지 하

나둘씩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혈의인들의 몸놀림이 빨라지며 일행을 향해서 밀려들었다.

 특히 백산과 갈태독 그리고 석숭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는지 세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인원이 붙었다.

 "컥!"

 최초의 비명소리. 소살우 앞에 있던 복면인 하나가 목뼈가 부러지며 내는

소리였다. 자신을 베어오는 검을 피함과 동시에 복면인에게 접근한 소살우

가 목울대를 쥐고는 그대로 꺾어버린 것이다.

 "건들지 마! 다 내 거야."

 자신의 이름자 적힌 종이가 찢어진데 대한 화풀이인지 환한 미소에 차가운

 눈동자의 소살우가 소리를 질렀다.

 소살우나 광견조에게는 특별한 보법 같은 것이 없다. 건달들의 싸움에서

배운 발놀림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보법을 만들어 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또 다른 복면인의 검을 어깨 쪽으로 흘리며 뒤늦게

도가 뻗어지고 혈의인의 복부를 관통한 도를 그대로 옆으로 그어버렸다.

 폭포 같은 피가 쏟아지며 허리가 반쯤 잘린 복면인이 또 하나 쓰러지고,

위에서 내리치는 검을 막아서 오른쪽으로 돌리며 그 상태 그대로 상대의 왼

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베어버린다.

 순식간에 세 명의 혈의인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소살우가 먹이감을 찾기 위

해 미소 띤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악!"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배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천영이 배를 안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혈의인에게 손을 쓰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

간 배로부터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며 더 이상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다.

 "누님!"

 혈의인 한 명의 이마에 사천비(死天匕)를 박아 넣고 있던 백산의 귓전으로

 조천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백산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오며 고개를 돌리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조천영을 향해서 혈의인 한 명이 검을 휘둘러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썅…!"

 무상신법을 극도로 발휘하여 조천영의 옆으로 이동하며 오른손의 수천비를

 발출했다.

 캉!

 수천비와 혈의인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간발의 차로 목숨은 건졌

으나 팔을 베이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컥!"

 거의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혈의인이 조천영을 향해서 휘두른 검을

수천비를 이용해서 막고 목을 틀어쥐기까지 거의 순간 동작처럼 이루어졌다

.

 "감히 네놈이 누님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회수되었던 수천비 세 개가 다시 튀어나오며

혈의인의 이마와 입 그리고 가슴의 세 곳을 그대로 관통하여 뒤쪽으로 튀어

나오더니 전방을 향하여 붉은 빛을 뿌리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 개의 비도가 관통한 부위

를 따라서 혈의인의 몸을 한바퀴 돌더니 이마와 입 그리고 가슴을 그대로

절단해서 끊어버린 것이다.

 뇌룡사(雷龍絲).

 천목환(天沐環)과 수천비를 연결하는 뇌룡사가 처음으로 무기로 활용된 것

이었다.

 "석두! 살우! 형수를 보호해라. 나머지도 전부!"

 분노한 백산의 외침에 석두와 광견조원들이 전부 물러나며 조천영의 주위

로 원을 그리듯 둘러섰다.

 아직도 손에는 가슴 위쪽과 입 아래쪽만 남아있는 혈의인의 목을 틀어쥐고

는 백산의 몸이 천천히 혈의인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거의 이십여 명의 복면인이 죽고 이제는 삼십 명 정도가 마차 쪽을 향해서

 살기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걸어가고 있던 백산의 양팔에서 수천비 여섯 자루가 모두 튀어나와 약간

벌리고 있는 백산의 팔과 일직선으로 땅을 향한 채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최대 길이 이장인 수천비가 일 척 정도만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말려야 해요. 제발…."

 조천영이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는지 갈태독을 향해서 애원하고 있었다.

 살얼음 같은 정신에 엄청난 살인을 하게 되면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

것을 알기에 말리고 싶은 것이었다.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백산이 분노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막을 수 없다. 저놈들의 검에 치명적인 독이 있었다. 네가 독령곡에 다녀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핏물로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갈태독이 말리지 않은 이유였다. 혈의인들의 검에는 '절명독(絶命毒)'이라

는 치명적인 독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령곡에서의 기연이 없었다면

스치기만 해도 녹아 내릴 수 있는 그런 절독(絶毒)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홀몸이 아니라고."

 "옛?"

 냉추렴과 소운의 경악에 찬 외침소리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

은 바로 조천영 자신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홀몸이 아니라니… 여자

가 홀몸이 아닌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질 않는가.

 임신!

 지금 갈태독이 임신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제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자신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상

적인 여자가 된 지 이제 두 달이다.

 그러나 최고의 의원인 갈태독의 말이다.

 "달거리를 안 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의원이라서 그런지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말일진대도 서슴없이 묻고 있다.

그러나 조천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을 익힌 후 거의 달거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빙천수라마공

의 부작용, 바로 그것 때문에 석녀가 되어가고 있던 그녀였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번 정도. 그것도 작년에는 아예 없었다. 자신의 아이라는 것은 생

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언니는 빙천수라마공을 익혔어요. 완성한 지는 두 달밖에 안 되었고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천영을 대신해서 냉추렴이 대답을 했다.

 "뭐라고? 지금 빙천수라마공이라고 했느냐?"

 고금오천무의 하나라고 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빙공 중의 최고인 빙천수

라마공을 익히고도 수태를 했다는 것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빙공(氷功)을 익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온몸에 차가운 냉기를 쌓는 작업이

다. 따라서 체온이 일반인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아진다. 때문에 수태의 조

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빙공을 익히는 집안에서 자식이 귀한 이

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무공을 익혔어도 그 정도인데 빙공 중의 최고라는 빙천수라마공

을 익혔다. 십이 성 대성한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도저히 수태의 조

건이 성립되질 않는 것이다.

 정확하게 진맥을 해보아야 되겠지만 태아도 정상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늘의 축복인가? 아니면….'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

 "다시는 내공을 일으키지 마라. 명심하거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조천영은 아무런 생

각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실감이 나질 않는 것이다. 애라니,

자신의 아기라니! 자꾸만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 서른하나. 과거 설귀후에게 속아서 수없이 많은 관계를 가졌을

때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었다, 정상이었던 몸이었음에 불구하고. 그러나 지

금은 어떠한가. 그때의 원한을 갚는다며 익힌 빙천수라마공으로 인하여 석

녀로 되어가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딱 두 번 밤을 같이 새웠을

 뿐인데 임신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님의 아이를 가졌다면 응당 기뻐해야 되는데 도무지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살우, 이야기 들었지? 이쪽으로 모여라 형수님의 시야를 차단해."

 석두였다. 그도 갈태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땅히 축복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지를 못했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아버지가 될 사

람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도살(屠殺)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지 태교를 위해서는 저런 장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석두의 말을 들은 광견조원들이 자리를 옮겨서 조천영의 시야를 완전하게

가렸다. 그들이 보고 있는 백산은 인간이 아니었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괴물이었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마치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자신을 향해서 달

려드는 상대에게 천천히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새하얀 백색의 눈동자와 붉디붉은 악마의 힘줄에 연결된 다섯 개의 핏빛

눈동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스각!

 또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서 달려드는 혈의인을 향

해서 왼손을 휘두르자 가장 먼저 그의 생천비(生天匕)가 허리를 깨끗하게

잘라낸다. 이어서 운천비(雲天匕)가 둥근 혈운(血雲)에 휩싸인 채 그대로

심장을 뚫어버리고, 마지막으로 회오리치는 핏빛 바람을 머금고 있는 풍천

비(風天匕)가 머리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또다시 오른손이 휘둘러지고 독천비(毒天匕)에 의해서 혈의인 한 명이 녹

아내리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백산을 바라보는 일행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다섯 개의 붉은

비도 속에 같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새하얀 비도, 마치 파멸안의 백색지

안(白色之眼)이 발현된 백색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비도가 사방으로 유영하

며 허공에 날리는 피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비비(天秘匕)였다. 열두 개의 비도 중에서 아무런 기운도 포함하지 않고

 단순하게 천비비라는 이름으로 불린 비도가 파멸안이 나타남과 함께 변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율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백산의 도살보다 피를 흡수하는 비도

가 더욱 괴이한 광경으로 일행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르신 저것은…."

 '모른 체 하게, 앞으로도 내색하지 말고'

 백산의 변화된 모습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쳐다보던 남궁지우가 무엇인가

를 물으려다 갑자기 엄해진 갈태독의 전음에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럼 이미 알고 계셨단 말인가….'

 남궁지우도 지금 백산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강호무림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공포의 전설, 파멸안(破滅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지우보다 더욱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석숭이었다. 그의

표정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럼 지금껏 저 친구의 능력이 파멸안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단 말인가

… 그것도 백색지안? 오! 하늘이여….'

 백산을 쳐다보고 있던 석숭이 내심으로 지르는 소리였다.

 유리처럼 투명한 백색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가문에서 내려오던 전설 한 가

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무려 천오백 년 전에 신(神)들을 몰살시켜버렸다는

학살자(虐殺者)의 전설이….

 '결국은 동시대에 모두 나타나는 것인가… 신도 나타나고 그들의 천적(天

敵)인 학살자까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석숭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남궁세우가 오래된 고서에서 보았다는 파멸안에 대해서 그보다 더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석숭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도 파멸안의 주인인 백산의 도살

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산의 일방적인 도살에 지금껏 아무 소리 없이 검만을 휘두르던 혈의인들

이 멈칫멈칫 물러나고 있었다.

 공포였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아 돌며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오십 명이 투입되었다. 극고한 사법으로 인

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살수보다 더 은신술에 강하고, 기척을 숨기고자

한다면 어떠한 고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죽이고자 했던 적은 한 명도 처치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도살

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 있는 백색의 눈동자, 분명 숨을 쉬는 인간이 분명할진

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백색의 눈동자와 붉은 색의 악마 다섯

이 전부였다. 몸으로 막으면 몸이 잘리고 검으로 막으면 검이 잘린다.

 피할 곳이 없었다.

 입고 있는 털옷에 자신들의 피가 스며들었는지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

다.

 또다시 놈이 움직였다. 혈의 복면인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백산이 움

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예비동작도 없이 그대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마치 유령의 움직임처럼

 무릎조차 굽히지 않은 채 바람을 따라서 흐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

이다.

 또다시 백산의 오른손이 뻗어지고 수천비 세 개가 혈의인을 향해서 일직선

으로 날아갔다. 이에 놀란 복면인 한 명이 온 힘을 다해서 한 걸음 움직이

며 피했다.

 그러나 비도를 피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뻗고 있던 팔이 그

대로 횡으로 휘둘러지고 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던 뇌

룡사가 혈의인을 그대로 삼등분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수되던 비수

가 이미 잘린 목 위에 있던 머리를 뒤통수부터 거꾸로 관통하며 돌아왔다.

 "우욱! 우엑!"

 남궁세가의 두 부녀가 토하는 소리였다. 남궁미령에게는 살인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지만 남궁지우는 과거에 많이 보았었다.

 그의 나이 십오 세 때 백살혈겁이 있었고, 이후에도 무수한 죽음을 보아왔

다. 그러나 단연코 처음이었다. 가장 깨끗하게 죽은 것이 머리와 가슴과 허

리가 잘린 세 토막의 시체였다.

 대부분의 혈의인이 팔과 다리와 같이 몸통이 분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인간에게 자신의 형이 검을 들이댔다고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졌다.

저 친구 혼자만 있어도 남궁세가가 멸망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백색 투명한 눈동자와 약간 웃는 듯한

입매, 죽음에 대한 느낌도 없이 그냥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전설이 말하는 파멸안이질 않는가.

 그의 행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도망가

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공포에 절어 있는 혈의인을 장작을 패는 것처럼

머리에서 가랑이까지 찢어버린 다음 허리 부분을 잘라버린다.

 사등분이 된 몸통은 백산이 다른 먹이를 찾아서 움직인 후에야 분리되고

있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삼십 명이 넘던 일류고수들이 다 사

라진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분해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지막 혈의인이 죽어가면서 본 것은 백색 투명한 하얀 눈동자의 중앙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조그마한 흑점이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백산이 주는 엄청난 공포에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두 부녀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모두가 백산의 무공에 대해서

알고 있다.

 십장 크기의 전륜나한 백팔 개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무공,

 그러나 그것은 전륜나한일 뿐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비도를 휘두르는 백산의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언제나 웃

으며 헛소리만 하던 백산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 마리의 분노한 야수(野獸)

였다.

 아직도 못 다한 미련이 남았는지 먼 곳을 쳐다보며 홀로 그르렁거리고 있

었다.

 "그만해요, 산! 제발 그만해요."

 주위의 이상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린 조천영이 백산을 향해 뛰어가면서 외

쳤다. 이래서 말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분노에 모

든 것을 맡겨버리는 백산의 모습을 알기에.

 "보았느냐?"

 갈태독이 소운과 석두 그리고 광견조에게 하는 소리였다.

 "천영이는 팔을 조금 다쳤다. 그런데도 저놈이 저렇게 분노했다. 다치지

마라, 죽지 마라. 너희 형님을 살인마로 만들기 싫거든 강해져라. 그것만이

 저 녀석의 손에 피를 묻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저 녀석의 손에 피가 묻게

되면 그 결과는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파멸안(破滅眼).

 백색지안(白色之眼) 일성(一城) 멸(滅)이라 했던가.

 그러나 갈태독도 모르고 석숭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에 죽은 혈의

인이 보았던 백색 눈동자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던 검은 점 하나. 흑색지안(

黑色之眼)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겠지만 평소처럼 행동해라. 어색한 모습 보이지 말고 소운이도. 아이

에 대한 것은 내가 별도로 이야기하마."

 분노밖에 남아있지 않은 머릿속을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한다. 정(情)

이라는 감정으로 꽉꽉 채워서 발산되기 시작한 분노를 막아야 한다.

 마지막에 쳐다보았던 곳, 아직도 백오십여 명 정도가 숨어있는 곳이다. 그

곳까지 달려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

가 아닌가.

 '결국 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가!'

 피 냄새가 싫어서 의원이 되고자 했던 갈태독이 살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백산보다 먼저 손을 써야 이 참혹한 살행(殺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백산의 분노를 막을 수 있다.

 "괜찮은 거야?"

 "그래요, 아무 이상 없어요. 자 봐요!"

 조천영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웃어 보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 조각들을 보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럴 수밖에 없다.

 깨지기 시작한 살얼음을 다시 얼리기 위해서는 웃어야 한다. 이 사람의 기

분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구토가 나올 것 같은데도 꾹 눌러 참고 있는 조

천영은 필사적이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누님, 안 그래도 되요. 나도 내가 한 짓을 알고 있어요. 다음부터는 자제

해 볼게요."

 마불신승을 만나고 난 후에 생긴 변화였다. 무상대법력(無上大法力), 그것

이 백산의 머릿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고 있었다. 옆에서 자극을 주지 않아

도 스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 것이다.

 가슴속에 있는 항마불주(降魔佛呪)를 가만히 만져본다. 따스한 온기가 전

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시작하지는 않을 거야,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약속할게."

 그의 결심이었다. 살인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

린 조천영이 슬퍼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다짐을 하고 있었다. 건드

리지만 않으면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만

 지키고 살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마저도 접겠다는 소리였다.

 "약속해요, 세 번, 세 번은 참겠다고 알았죠?"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금이 갔던 얼음이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더욱더 단단하게 붙고 있었다.

 "큰 형님! 그만 놀고 갑시다. 어디 장가 안 간 놈 서러워서 살겠소?"

 소살우였다. 그도 과거 어린시절 지천 참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이다.

 그때는 무서워서 걷지도 못했다. 수없이 많은 날들을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무공은 강했지만 자신들보다 더 약한 사람이다. 친인(親人)의 조그마한 상

처에도 견디질 못하고 부서지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뭐 하오? 빨리 안 오고."

*     *     *

 "어떻게 되었나?"

 "많은 것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워낙 공포에 질려있었는지라

…."

 "공포? 사령귀매대법(邪靈鬼魅大法)을 거친 사사대원들이 공포를 느꼈단

말인가?"

 사령귀매대법, 인간의 감정을 완전하게 말살시키는 천사맹의 비전대법 중

의 하나이다.

 이 대법을 받은 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오욕칠정이 모두 사라

질 뿐 아니라 생명체로서의 기척이 사라진다. 마음만 먹으면 체온뿐 아니라

 심장 박동 수까지 멈출 수 있는 대법이다.

 그런 대법을 거친 자들이 암습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공포를 느끼고 죽어

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나?"

 "이들의 눈동자에 남아있는 잔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약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일행

중 여자 한 명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맹주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맹의 최정예인 사사대(死死隊)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사사대의 능력,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흔적을 자신의

 동공 속에 남겨두는 극고한 사법마저도 익히고 있었다.

 "그래? 황산을 넘기 전에 그놈들을 정리한다. 우선은 여자가 약점이니까

여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허점이 생길 때 나머지를 공격하라."

 백오십에 달하는 인원이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먼저 시작하지 않겠다. 지키기만 하겠다는 백산의 다짐.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과 나눌 수 있는 조그마한 행복 이외에는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 백산이었

다.

 몽운령(夢雲嶺).

 저 멀리 운해에 잠겨있는 천도봉(遷都峰)이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천도봉

으로 오르는 안개가 쉬었다가 잠이 드는 곳이라 해서 몽운령이라 했던가.

흐르는 바람을 타고 희미한 운무 덩어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오른다

.

 "영감! 아까는 왜 그들을 느낄 수가 없었죠?"

 일행은 살육의 현장을 출발하여 황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도봉

이 올려다 보이는 이곳 몽운령을 지나고 있었다.

 갈태독과 백산, 두 사람은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매복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은 했지만 광견조의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많은 희생이 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백산이 언제나 주장하고 있는 것, 마음보다 몸이 우선하게 행하라. 생각하

고 행동하면 이미 늦다. 생각이 행동을 따르게 하라. 어찌 보면 여타 무림

인들과는 전혀 상반된 무론(武論)이다. 깨달음이 있으면 몸이 저절로 반응

한다는 통념과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

니라 몸이 먼저 깨닫게 하는 것.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광견조에게 원

하는 경지였다.

 "아마도 그들은 사령귀매(邪靈鬼魅) 같았네."

 석숭이었다. 상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무인들보다 더 많은 무림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령귀매대법을 거친 자들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들이지."

 사령귀매대법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은 한 번 죽어야 한다. 혼이 떠나간 시

체를 약물 처리하여 일정 기간 보관한 다음 사령귀혼대법(邪靈歸魂大法)을

통해서 혼(魂)을 불러들인다. 이 전 과정을 사령귀매대법이라 하고 이때 탄

생하는 결과물을 사령귀매라 부른다.

 사령귀매대법으로 탄생한 사령귀매는 한마디로 가장 완벽한 암살자가 될

수 있다. 강시이면서 강시가 아닌 자,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 그들이

바로 사령귀매이다.

 "미치겠군. 그놈들이 왜 우리를 노리냐고."

 "아마 천사맹 인물들이겠지…."

 "그 여자는 우리를 해치려 하는 것 같지 않던데?"

 백산의 생각이었다. 자신을 해치려 했다면 배에 있을 때 공격했어야 했다.

 아무리 광천뢰로 협박을 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얌전히 보내주고 이제 와서

 암습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맹주보다 그 노인들이겠지? 그들이 하늘같이 모시는 맹주의 치부를 우리

가 알았기 때문이고."

 모시는 주군의 치부는 자신의 치부보다 우선한다.

 아마도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자신보다 못난 자를 주인

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섬기

는 주인의 단점이 될 만한 것을 알아서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완

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만 안 건드리면…."

 갑자기 백산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이 조천영이

앉아있는 바위 뒤쪽, 조천영을 향해서 달려드는 혈의인 한 명의 목을 틀어

쥐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거다. 그러니 건들지 말라고!"

 혈의인의 목을 꺾어버리면서 하는 소리였다. 사령귀매라는 괴물들의 두 번

째 기습이었다.

 백산이 이미 죽어 버린 혈의인을 내팽개치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명의 혈의

인이 조천영을 향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스악!

 "형수님이 아무리 예뻐도 네놈들은 안 돼, 새끼들아!"

 소살우가 뛰어들면서 혈의인의 몸을 이등분해 버렸다. 소살우와 석두 그리

고 섯다, 모사가 각각 한 방위씩을 맡으며 조천영을 호위하고는 사방을 살

피고 있었다.

 혈의인들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모든 공격이 거의 조천

영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조천영을 공격함과 동시에 옆에 있

던 다른 이는 조천영을 막는 광견조원들을 공격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처음보다 더 강한 자들이었다. 네 사람의 혈의인이 광견조원 한 명을 감당

하고 있는 것이다.

 몽운령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목이 떨어진 자, 허리가 절단된 자,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안개와 섞여서 적운(赤雲)을 만들며 천도봉으

로 올라가고 있었다.

 혈의인을 가장 무섭게 몰아치는 자(者)가 있으니 바로 소살우였다. 어느새

 뱁새와 임무교대를 했는지 조천영을 호위하던 자리를 이탈한 채 달려드는

혈의인 사이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찢어버린 놈들이다. 초식이고 뭐고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혈의인을 찌르고, 베고, 자르고, 모든 방향을 향해서 자신의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몸을 앞으로 굴리며 그대로 혈의인의 목을 찌르고, 바로 오른쪽으로 움직

이며 머리를 이용하여 또 한 명의 턱을 받아버린다. 뒤로 넘어가는 놈을 쫓

아서 또 한 바퀴 구르더니 복면인의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에다 도의 손잡이

를 그대로 찔러버리고 있었다.

 광기였다. 살인이 즐겁다는 듯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맹수처럼 사방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형님, 나랑 교대 좀 합시다."

 "싫어, 임마! 이 새끼들 전부 내 꺼야. 내 밥 건들면 죽어!"

 뱁새가 자신이 할 테니 좀 쉬라는 식으로 말을 하자 살기 찬 눈동자를 번

들거리며 피가 흐르는 자신의 도를 핥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도를 이용해서 베는 것이 아니라 날이 없는 부분을 이용하여

혈의인을 깨부수고 있었다. 달려드는 놈을 피하며 머리를 향해서 도를 휘둘

렀다.

 퍽!

 잘리는 소리가 아닌 몽둥이로 치는 소리였다. 혈의인의 두개골이 함몰되며

 그대로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죽이지 마! 전부 막고만 있어."

 소살우의 살기 어린 외침소리에 모든 광견조원들이 살수를 자제하고 혈의

인들의 공격에 방어만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혈의인들은 이십 명 정도.

순식간에 삼십 명의 복면인들이 고혼이 되어 사라져갔다.

 처음보다 강했으나 그들도 백산 일행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광견조에게 명령을 한 소살우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한쪽으로 놓고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도를 내려놓았다.

 도(刀)를 분신으로 여기라 하셨던 백산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행동

이었다.

 흉터들,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해 주듯이 온몸 가득히 채우고 있는 흉터들

이 몸을 움직이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채찍으로 맞은 모양인 양 길게 뻗은 흉터들이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툭!

 소살우가 벗어놓은 옷 위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열 냥이오, 나도 끼워주시오."

 이제는 추기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송곳이었다.

 "툭! 툭! 툭!"

 칼날, 도치, 쌍칼, 세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를 던졌다. 자신들도 끼워달라

는 소리였다.

 "저 새끼들 필요할 때 쓰라고 주니까 살우에게 전부 상납을 해?"

 광견조원들이 들고 있는 주머니, 독령곡 가던 길에 쓰러져(?) 있던 무림인

들로부터 수거했던 주머니들이었다.

 "저것도 훔친 거잖아, 이놈아."

 "무슨 소리요, 영감. 쓰러져 있는 놈들의 품속에서 주운 건데."

 "그 사람들을 백 공자가 쓰러뜨렸으니 문제지."

 석숭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 석숭과 조금 떨어져서 은신해 있

던 금령과 은령들이 죽어가는 한 무더기의 무림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백산의 독문신공

에 의해서 전부 당했음을. 바로 공포의 불알까기 신공이었다.

 툭!

 이번에는 금 한 냥이라는 거금, 석두였다. 네 사람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

했는지 끼워달라며 던진 것이다.

 "마음만 끼워주겠소. 저기 저 낭자나 잘 보살피시오."

 거절이었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남궁미령을 가리키며 그쪽이나 잘 지키라

고 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이나 광견조원 전원이 아직도 건달시절의 개폼 잡던 버릇이 없어지지

않았는지 살기등등한 적을 앞에 두고도 하는 짓은 완전한 건달들이 하는 폼

새였다.

 그냥 가서 죽이면 간단할 것을 소살우가 제 밥이라 했다고 아무도 손을 대

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다.

 "석두, 살우 저 녀석이 왜 도를 놓는 거지?"

 소살우가 자신의 옷 위에 도를 놓는 것을 보고 백산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 모르고 있었소? 일휘와 살우 두 놈은 도보다 주먹과 발을 더 잘 씁니

다.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런가…."

 석두의 말이 맞았다. 일휘, 소살우 두 사람은 도(刀)보다 박투술에 더 강

하다.

 모든 대원들과 같이 도를 가지고는 있지만 진정으로 화가 났을 때는 맨손

으로 적을 상대한다.

 그들을 보고 더욱 놀라고 있는 사람들은 남궁 부녀였다.

 이제 만난 지 이틀,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

다. 항상 웃고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화가 났

을 때 보여주는 것은 무모함과 공포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상대방도 일류 고수다. 이미 싸워보았으니 자신들도

알고 저들도 알고 있다. 더구나 독까지 발라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광견조의 대장이라는 저 친구는 이십 명이나 되는 혈의인을 혼자

서 해치우겠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도와주겠다는 자들이 돈을 내며 부

탁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저 사람들. 두 부녀의 상식으

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맨주먹에 불그스레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소살우, 그리고 도를 들고 나서

는 송곳, 도치, 쌍칼, 네 명이 각자 한 방위를 맡으며 혈의인을 향해서 돌

진하고 있었다.

 혈의인들도 빨랐지만 광견조 사 인에 비하면 거북이의 걸음걸이 같았다.

특히 소살우의 빠르기는 여타 삼 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건달들의 싸움에서

나 볼 수 있는, 퉁퉁 뛰면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약간의 어색함마저 갖추

고 있었으나 그에게 걸리는 상대는 그렇지 못했다.

 휘두르는 검을 피하며 가슴까지 파고든 소살우의 오른손 주먹이 그대로 얼

굴을 부숴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함몰되는 수준을 넘어 통째로 뜯겨져 나가

버렸다.

 얼굴 없는 시체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뒤따르던 송곳이 혈의인

한 명의 허리를 베면서 그 도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얼굴 없는 시체의 허

리를 같이 절단해 버린다.

 회전을 하고 있었다.

 광견조 사 인이 왼쪽으로 돌면서 옆 사람이 죽여버린 시체가 넘어지기 전

에 다시 한번 잘라버리는, 마치 짜 맞춘 듯한 그들의 잔인한 행위는 보고

있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중 단연 압권은 소살우였다. 왜 도를 가지고 싸웠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박투술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찔러 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숙임과 동시에 그의 발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그대로 혈의인의 목을 감아버린다. 그 상태로 끌어당기면서 목

을 부러뜨리고 자신 앞으로 끌려온 적의 가슴을 향해서 왼손을 이용해 구멍

을 내버린다. 다리를 풀면서 이미 죽은 놈의 시체를 퉁기면 어김없이 송곳

이 허리를 잘라내고 있다.

 웃고 있었다. 온몸에서, 얼굴에서 죽은 자들의 피와 뇌수가 흐르고 있는데

도 광견조원들은 웃고 있었다.

 새하얀 살소(殺笑)였다. 그러나 웃고 있는 것은 입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서 흘러나온 것은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였다.

 뒤에서 날아오는 검 같은 것은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

의 등을 맡고 있다. 오로지 앞에서 오는 놈만 처치하여 옆으로 넘기고 있었

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나머지 광견조원들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심지

어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찍새마저도 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잔인하게 보였다. 환하게 웃는 소살우, 온몸에서 꿈틀거리

는 피에 젖은 뱀들이 일제히 살기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수강(手剛), 붉은 주먹은 상대의 얼굴을 날려버리고, 각강(脚剛), 피를 먹

은 듯한 발은 상대의 어깨와 가슴을 박살내고 있었다.

 도강(刀剛)을 익히면서 터득했던 강기(剛氣)가 백보신권을 익히면서 강(强

)해졌고, 용왕유권을 익히면서 유(柔)해졌으며, 광천뢰를 다루면서 완숙해

져 온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이 그동안 바랐던 경지였고 백보신권과 용왕유권을 가르친 이유이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을 향해서 네 명의 광견조가 동시에 빛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소살우의 정권이 안면을 날리고 송곳과 도치가 양어깨를

, 마지막으로 쌍칼이 허리를 양단하며 이십 명의 혈의인에 대한 살육이 끝

났다.

 "빨리 가자! 이곳은 더러워서 더 이상 있기가 싫어."

 자신이 가장 지저분하게 했으면서도 더럽다며 서둘러 물건을 챙기는 소살

우였다.

 세 번에 걸쳐 받은 습격에 이제는 살인이라는 것에도 익숙해졌는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고 있으면서도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     *     *

 "임신이다, 두 달 정도 된 것 같고."

 몽운령을 떠난 일행은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 도착하여 피에 절었던 옷과

몸을 씻고, 간단한 요기를 위해서 쉬는 사이에 갈태독이 백산과 조천영을

따로 불렀다.

 "하! …영감 지금 뭐라고 했소? 그러니까, 누님이 애를 가졌다는 거요? 우

리들의 애를?"

 백산의 표정이 멍해졌다. 재차 확인하듯 갈태독에게 묻고있지만 실감이 나

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란 말,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만 알았지 그 말을 들으리라고

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훗! 헷헷헷! 쿡! 하하하!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라… 누님 잠깐만 이리

와 봐요. 아니, 그대로 있어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지 함박만큼 벌어진 입은 닫힐 줄을 몰

랐다. 옆에 있는 갈태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조천영의 배를 만져보고 아이

의 숨소리를 듣는다며 귀를 가져다 대는 등 온갖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내 말 계속 듣거라."

 "그게 무슨 소리요. 둘 다 위험할 수 있다니?"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던 백산의 얼굴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아기가 생겼다고 한다. 잘못되면 태아와 산모가 모두 위험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

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최고

의 의원인 갈태독의 말이 아닌가. 결코 오진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천영, 천영입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천영 없이는 못 살아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조천영이란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이고

 삶이다. 천영이 없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아무리 자식이 중

요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존재했을 때의 이야기다.

 "백랑, 저는 낳고 싶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백랑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요."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제야 간신히 잡은 행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분신

을 가졌는데, 남들은 둘도 셋도 잘만 낳고 사는데 자신은 단지 하나다. 그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평범한 여자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일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아기 이야기는 안 들은 것으로 하겠소. 분명히 말하는데… 천영이요

. 만일… 만일 말이요, 천영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한을 전부 세상에다 풀

어버리겠소. 명심하시오, 천영도 영감도."

 무서운 말이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조천영을 희생시키는 짓을 절대로

 못 한다는 소리였다.

 "휴우! 아직은 이상이 없는 것 같으니 일단은 기다려 보자, 최대한 조심하

고."

 괜히 말했다 싶었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러나 갈

태독의 의원으로서의 소견은 그 사람에게 다가오는 일은 먼저 본인이 알아

야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어

야 하며 이것이 환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신념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의원이 해줄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나를 믿어라. 내가 누구냐 최고의 의원인 갈태독이다. 생길 수 없는 상태

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다."

 "그렇죠?"

 백산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갈태독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천영을 안정시켜야 한다. 자신이 불안해

하면 그녀가 자신에게 미안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나 편안

하고 행복하게만 살아야 한다. 불행한 것은 과거에 겪었던 것만으로도 충분

하다.

 "갑시다, 영감. 별일도 아니구먼.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아이가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애써 의미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조천영이 왜 모르

겠는가.

 "그래요, 빨리 가요. 나도 배가 고프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백산의 팔짱을 끼었다.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갈태독의 나직한 한숨소리가 배웅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죠?"

 "글쎄다, 아직도 절반 정도 남아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조용한 것 같구나."

 휴식을 취한 일행이 그 계곡을 출발하여 하룻밤을 노숙하고 도착해 있는

곳은 황산의 끝자락, 조천영을 마차 위에 태운 채 모든 광견조원들이 마차

를 집중적으로 호위하고 황산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광명정이 올려다 보이

는 곳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이곳만 지나면 황산을 빠져나가게 된다. 더 이상 암습의 걱정에 시달

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총력전을 펼치려 하는 모양이군요."

 널따란 분지의 이곳저곳에 죽어가는 나무들만 남아서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황량한 고목대.

 그곳에 지금껏 백산 일행을 공격했던 자들과 일행으로 보이는 혈의인들 백

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암습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일

행의 앞을 막고 있었다.

 "왜 우리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지? 우리가 먼저 너희들에게 피해 준 것

이 있었나, 아니면 너희들 물건을 훔쳤나."

 "우리는 그런 것 모른다. 너희들을 죽이라 했기에 명령을 따를 뿐이다. 그

 이상을 알아야 하나?"

 사사대의 대주인 사인귀(邪人鬼) 반소구였다. 그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령사매의 암습

을 피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그 잔인함이란, 시체의 조각조차 맞추기 힘들 정도로 잘려진 부하들,

 사령귀매대법에 의해서 인간의 감정이 거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

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벌써 백여 명이 죽었다. 이제는 맹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복수를 해

주어야 한다.

 "너희들은 강하다. 우리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지… 허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인귀 반소구의 말이 끝났다. 이제 공격명령만 남은 것이다.

 옷을 벗고 있었다. 광견조 십일 명이 자신의 웃옷을 벗어서 한쪽으로 쌓아

놓고 있었다.

 "살우, 뭐 하는 짓이냐?"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또 맨몸을 드러내고 있는 살우와 광견조를 쳐다보며

 석두가 물었다.

 "옷에 피 묻잖소."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듯이 석두를 쳐다본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들의

옷 위에 돈주머니를 던지고 있다.

 "가장 많이 죽이는 놈이 다 먹는 거다. 찍새, 네가 세어라."

 백 명이라는 적이 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죽음의 내기를 하고 있었다.

 모든 광견조원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버림받

고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 남의 것을 원한 적도, 욕심을 부려 본 적도 없었

다. 주어진 것이 삶인 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자신이 죽게 되면 슬퍼할 형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형제들이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다른 형제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기에 내기를 핑계 삼아서 더

욱더 마음을 다져잡는 것이다.

 "죽여라! 한 칼에 한 놈씩, 기억해라. 한 놈씩이다."

 소살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너는 아가만 지키거라."

 갈태독이 손을 쓰기로 했는지 나서려는 백산을 막아섰다. 또다시 분노에

자신을 맡기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영감, 광천뢰로 날려버립시다."

 "저들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지척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느냐?"

 갈태독의 말이 맞았다. 사사대와 백산 일행과의 거리는 오 장. 광천뢰의

영향권에 같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

내공과 함께 날아오는 광천뢰를 감싼다면 광천뢰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업보라면 따라야 하겠지….'

 되도록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기에 새롭게 의원으로만 살고자 했다. 그러

나 무인으로 타고난 숙명인 것을 어찌하랴,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써야

 할 때가 다가왔으니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갈태독이 전면으로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웃옷을 전부

 벗어젖힌 광견조 열한 명, 석두와 남궁지우 그리고 석숭과 금령, 은령 포

함해서 전부 열아홉 명이 사사대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백산 일행 열아홉 명과 사사대 잔여 인원 백 명과의 혈투가 시작

되려 하고 있었다.

 "그대들에게 감정은 없소이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기에 가고자 하는 것일

뿐… 쳐라!"

 사인귀 반소구의 말과 함께 사사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열아홉 명의 인물들이 방사형으로 달려나갔다.

 바람이 분다.

 새빨간 피를 머금은 혈광풍(血狂風)이 불어온다.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으며, 왜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가.

 전생의 업보도 현세의 원수도 아닌데, 그저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일 뿐.

한세상 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떠나면 그것으로 족할 인생인 것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이려 하는가.

 축복 속에서 태어났던 생명 아니던가, 어느 누가 우리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흐느낀다. 죽은 이의 혼을 머금은 혈광풍이 울부짖는다.

 깨끗했다.

 백년의 세월 속에 묻혀있던 갈태독의 손속은 너무나 정교하고 깨끗했다.

자신을 베어오는 검을 피하며 그대로 상대의 사혈(死穴)을 짚는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진다.

 숙여진 머리 위로 스치듯 살기를 머금고 지나가는 검 하나. 또 한번의 손

짓에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있는 혈의인. 죽어버린 몸뚱이지만, 상처 없

이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인가. 이미 풀려버린 눈동자에 안도감

이 서려있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약간은 괴로운 듯, 조금은 미안한 듯한 갈태독의 얼

굴에는 적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치료될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안락사시키듯, 그렇게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이 그의 숙

명인 양 혈의인들의 사혈만 찍어버린다.

 검이 몸에 부딪치고 튕겨나간다. 피할 수도 있지만 편한 자세로 사혈을 찍

기 위함인지 그대로 방치하고 앞에서 다가오는 혈의인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마치 통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그렇게 혈의인들

이 쓰러지고 있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보이지 않는 갈태독의 손속은 칭얼

대는 아이를 잠재우듯 깨끗하고 조용했다.

 조화로웠다.

 석숭과 금령, 은령의 손과 검은 화합이었다. 다섯 명이 오행의 방위를 점

유한 채 달려드는 적을 향해서 권과 검을 날려 격살하고 있었다.

 석숭의 손에서 구룡신공(九龍神功)이 펼쳐지고, 아홉 마리의 용이 똬리를

틀며 앞에 있는 혈의인의 가슴에 격중된다. 이어서 흩날리는 피 무지개, 옆

에 있는 금령의 검은 피 무지개를 따라서 들어오는 상대의 목을 단칼에 베

어 버린다.

 상인일 뿐이다.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일 뿐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지 않았

다. 그러나 지금은 팔아야 될 것이 자신의 목이다. 중원 최대 부호인 석숭

의 목은 비싸다. 혈의인 정도가 살 수 없는 엄청 비싼 목이었다.

 단순했다.

 그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다가오는 검을 모로 피함과 동시에 상

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는다. 세상을 비상할 수 없는 검이었기에 지룡검(

地龍劍)이란 이름을 얻었던 검, 그 지룡검이 혈룡검으로 변했다.

 오로지 찌르기 일변도인 석두의 검, 이미 초식 자체가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랐기에 상대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향해서 죽음을 뿌려댄다. 전방의 혈

의인의 심장을 찌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미 뒤로

돌려진 검을 상대의 목을 향해 밀어 넣는다. 목에서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왼쪽에 있는 적을 향해 백보신권을 날리고, 가슴이 뻥 뚫린 채 뒤쪽으로 날

아가는 상대가 있던 곳으로 몸을 굴린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상대의 가슴에 또다시 찔러 넣는 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는 적이 있으니 찌르고, 살기 위

해서 죽일 뿐이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 외 싸움의

 목적이나 의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죽여야 할 적이 있을 뿐

이다.

 섬뜩했다.

 일장이나 솟아 있는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劒쾝), 혈의인이 그의 근처에

오기도 전에 일자로 잘려나간다. 평범한 청강검을 뽑아든 남궁지우는 산악

같은 거인이었다. 가문에서 가장 뒤쳐졌다 하는 그의 무위는 알려진 것과는

 또 달랐다. 거칠 것 없는 파도였고, 해일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찾겠다고 가문을 나와서 이

렇게 검을 휘두르는가, 명예 때문인가? 무인의 자존심 때문인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동안 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

하나밖에 없었다. 그 딸을 지키기 위해서 청강검을 휘두른다. 또다시 좌우

로 살기가 느껴진다.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몸을 그대로 누이며 그 자리에

서 한 바퀴 돈다. 혈의인 두 명이 허리가 양단되어 쓰러지고 있다. 하얀 백

의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비록 늙어서 볼품은 없겠지만 자신도 광견조를

따라서 옷을 벗을 걸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백산의 팔목에서 튀어나온 비수 하나, 뇌룡사라는 꼬리를 달고 이장 앞에

서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날아오는 상대의 심장에 박힌다. 광혈단의 독기

가, 독령곡의 절대독이 독천비를 통해서 쏟아져 나가고, 비도가 박힌 혈의

인이 그대로 녹아들고 있다.

 심장을 통해서 각 혈관으로 전달된 독혈이 순식간에 옷을 녹이고 몸을 녹

이고 있다.

 무상신법이 펼쳐진다. 마차 주변을 빛살처럼 움직이며 달려드는 혈의인을

녹여버린다. 독천비에 찔려도 녹고, 뇌룡사에 잘려도 녹는다. 욕심 없이 살

고 싶었다. 명예도 권력도 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복수도 포기했다. 그런 우리를 왜 그냥 두질 않는가

….

 웃고 있었다.

 소살우와 광견조 십 명.

 혈인이었다. 등에서 핏빛 뱀이 꿈틀거리고 복부에 붙어있는 전갈이 피를

머금고 있었다.

 몸에 달라 붙어있는 것이 피인지 흙인지 살점인지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은 무조건 죽인다. 머리를 쳐오는 검을 향해서 그대로 뛰어들었다. 등 쪽

이 따끔한 것이 한칼 먹은 것 같다.

 어차피 피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목욕물에 내 피가 좀 들어가면 어떤가.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자신 앞으로 당긴다. 목에서 불끈불끈 뛰고 있는

동맥을 향해서 도를 대고는 옆으로 죽 그어버린다.

 잘린 동맥으로부터 피가 솟는지 입안에 비릿한 향내가 풍긴다. 피가 아니

다. 목마름을 식혀주는 감로수일 뿐이다.

 오른 쪽에서 들어오는 검을 향해 머리가 떨어진 시체를 던지고, 그 틈을

이용해 왼쪽에 있는 놈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버린다. 그 여력을 이용해서

조금 전에 던진 시체로부터 검을 뽑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으깨버린다. 자

르는 것도 지겹다. 굳이 칼날 부분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곳을 사용한다. 베어야 될 상황이면 베면 되고 부숴야 될 상

황이면 부숴버린다.

 뒤쪽으로 몸을 굴린다. 이번에는 왼쪽 팔이 쓰리다. 휘두르는 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너무나 가까워 도를 휘두를 공간

이 없다.

 강기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왼손이 그대로 상대의 단전으로 박혀들

어 간다. 왼쪽으로 거칠게 회전을 시키며 손에 잡히는 것을 한꺼번에 뽑아

버린다.

 쓰러지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붉었다. 붉은 옷에 붉은 눈동자. 죽어가면

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어쩌면 눈을 감는 방법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분노한 광견조원들에게는 무기가 따로 없었다. 몸을 굴리다 돌이 잡히면

그것으로 상대의 머리를 찍고, 나무 조각이 잡히면 그것으로 상대의 심장을

 찌른다.

 굳이 필요가 없는 것인데, 강기가 있는 주먹이면 해결되는데, 어렸을 적부

터 버릇이라 그런지 상대를 죽일 때는 손보다 돌이, 돌보다 나뭇조각이 더

편하다.

 웃고 있다.

 소살우, 뱁새, 섯다, 모사, 송곳, 칼날, …광견조원 전원이 웃고 있다.

 더욱더 환해진 얼굴에서는 세상을 태울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는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냐. 너희들이 무엇을 해 주었다고,

준 것이 무에 있다고.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더러운 인생에 대한 한풀이였

다.

 악몽이길 바랐다.

 맹의 최정예인 사사대가, 사령귀매대법을 거친 사령귀매들이 속절없이 죽

어가고 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이 사령귀매라면, 저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

었다.

 한 무리의 미친 살귀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을 뿐이다. 애당초 이들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맹의 명령이기에 따르기는 했지만 저들은 너무

강했다. 검을 찔러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이 발라져 있는 검을 향해서

 달려들 뿐이다. 자신이 죽지 않을 곳에 검을 맞으며 상대를 죽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죽음, 죽음. 모든 대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전부 죽는 시간에 적은 두 명이 죽었다. 꿈이기를,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정적이 흘렀다.

 죽은 자도 죽인 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사대의 대주인 사인귀 반소구

만 남겨두고 모두 죽었다.

 "가서 전해라. 더 이상은 건드리지 말라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너희는

너희 길을 가면 될 뿐이다."

 은령, 두 사람이 희생당했다. 사사대의 귀령사매도, 황실의 인물인 은령도

,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죽어갔

다.

 "나 같으면 같이 죽겠다. 부하들 다 죽이고 혼자 살아서 뭐 하냐?"

 일행이 떠나면서 작은 눈을 가진 놈이 미소를 지으며 남긴 말이었다.

 사인귀 반소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에 소식은 알리고 죽어야 되겠지.'

 품속에서 전서구를 꺼낸 반소구가 자신의 오른 손가락을 잘라서 무엇인가

를 적더니 하늘로 날려보냈다.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백산 일행을 쳐다본 반소구의 검이 자신의 목을 일

자로 갈랐다.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 속에 고개를 내밀었던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붉은 피

로 몸을 씻었고, 무심한 까마귀는 먹을 것이 많이 생겼다는 즐거움인지 '까

악 까악' 대며 모여들었다.

 "내가 나섰어야 됐어…."

 백산이 자책하고 있었다. 은령 두 사람, 언제나 어둠 속에 있었지만 광견

조보다 더 먼저 알았던 이들이었고 서로 이야기해본 적도 별로 없었지만 언

제나 석숭 옆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뇌룡현을 떠난 이후 많은 사건이 있었고 부상자도 있었지만 희생자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심리적인 타격은 컸다. 일행 전체를 죽일 수 있는 광천뢰를 맡기면

서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있던 일행이 죽은 것이다.

 "자네는 이 일행의 책임자네. 지금 이 일은 단순한 사고일 뿐이네. 이것보

다 더한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한 단체를 책임진다는 것 그것은 단순하게 세끼 밥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

 부하들의 슬픔도 나누어야 되고 기쁨도 함께해야 하는 자리이다.

 때로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잊기도 해야 하는 그런 위치가 수장의

자리인 것이다.

 "때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과거를 묻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네.

예를 들어서 희생된 것이 은령 둘이 아니고 저기 있는 저 친구들 중 둘이었

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석숭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찾을 거요. 장강이든 뭐든 천하를 뒤질 거요. 그래서 다 죽일 거요. 전부

다…."

 "허나 자네가 그렇게 했을 때 살아있는 저 친구들마저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

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황제가 그렇게 힘이 없는 자리였소?"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백산도 알고 석두도 알고 있었다. 황제나 되는 자리

에 있으면서도 사마세가를 복원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황제의 심정을 헤아

려 달라는 말이었다.

 은령의 죽음에 누구보다 가슴 아픈 사람은 석숭일 것이다. 그동안 그의 수

족이었던 사람들이었고 목숨을 맡겼던 사람들이었다.

 "은령 둘은 형제였네. 저기 있는 저 친구들처럼 이름도 없는 애들이었고.

나는 이 애들에게 이름 한자 지어주지 못했네. 그냥 처음부터 은령이었고

또 은령으로 죽었지. 자네처럼 이름이라도 지어줄 걸 그랬어…."

 석숭의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백산이 광견조원들의 이름을 지어왔을 때

감탄했었다. 소살우와 광견조의 행동을 보고 또한 얼마나 놀랐던가. 쓸데없

는 데 돈을 썼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그 이름자 써진

종이를 집어넣고 있는 것 하며, 이름을 익히라 했다고 밤새도록 땅바닥에

알아먹지도 못하는 이름자를 쓰고 있던 그들의 모습.

 그리고 이름자 써진 종이가 찢어졌다며 미친 듯이 살육을 전개하던 소살우

, 자신이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단순한 것을 가지고도 그렇게 감

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고, 왜 자신은 저렇게 해주지 못했나

 하고 못내 아쉬워했다.

 북경으로 돌아가면 이 애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해 보기도 전에 은령 둘이 죽었다.

 "석 대인, 이제 그만 석 대인의 길로 가시오."

 석숭에게 미안했는지 백산이 따로 떠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

면 백산 일행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다. 인연이라면 마령호 껍질을

사고 판 사이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 조그마한 인연으로 해서 벌써 몇 개월을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 위험도 사라졌는데 같이 가지 뭐, 자네의 목적지도 어차피 북경 아

닌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석숭이 판단했을 때 지금 이들의 집단은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천마맹의 가장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철혈전신마 철목승의 제자 냉추렴,

 개방의 꽃이라는 소걸영 구소운 두 여자가 가지는 의미는 어느 한 일파에

못지않게 컸다.

 그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천마맹 전력의 오 할 정도까지 보고 있는 천여

 명의 무욕인, 그들의 수장이 철목승이다. 냉추렴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그 사람들이 전부 강호를 향해서 검을 뽑을 것이다.

 또한 소걸영 구소운은 어떠한가. 개방의 행복이다. 개방 방주 및 수많은

원로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이가 소걸영이었고, 구걸생활에 피곤하

고 힘들어하는 개방인들의 활력소가 바로 그녀다. 비록 얼굴은 모를지라도

중원에 있는 모든 거지들이 소걸영 구소운이란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런 소걸영이 나쁜 일이라도 당한다면 중원 전역에 퍼져있는 백만의 거지

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천무맹과 천마맹의 전쟁이 불가항력이라면 강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앞으로 더 많은 고수들이 필요하다. 옆에서

더욱더 도와야 할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따라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자신만 알고 있어야 될 가장 큰 이유.

 "옜소, 영감!"

 소살우가 주머니 하나를 갈태독 앞으로 툭 던지며 하는 말이었다.

 "뭐냐, 이게?"

 갈태독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놈도 자신더러 영감이란다. 백산이란 놈

이 하는 것도 억지로 참고 있는데 그의 부하들까지 똑같다.

 "아까 못 들었소? 일등 한 놈이 이것 다 가지기로 했지 않소."

 사사대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다.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주머니를 갖기로

 했던 내기, 자신들끼리만 내기를 해놓고 돈주머니를 갈태독에게 던지고 있

었다.

 갈태독의 인상이 더욱 더 구겨지고 있었다. 소살우란 녀석이 일등 한 놈이

라고 했던 것이다.

 영감에서 이제는 놈으로 바뀌었다.

 "쟤들이 불만이 많소이다. 잠재우는 것을 죽인 거라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말이오."

 간단하게 사혈만 찍었던 것을 잠재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소살우

의 불만이 가장 컸다. 이 영감만 없었으면 자신이 일등이었다. 그런데 영감

이 보낸 숫자는 자신의 두 배인 스무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모두들 내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부하들 또한 소살우의 일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지지도 못하지만 조장에게도 주지 못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래

서 갈태독에게 주머니가 돌아간 것이다.

 "그 새끼들 지금 희희낙락거리고 집에 가고 있을 거야."

 광견조 틈 속에서 나온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모두

들 어안이 벙벙해있는 가운데 석숭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광견조원들이

사혈을 찍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 죽기는 죽었다고

 인정은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들 혹시… 사혈이 뭔지 아나?"

 딴 짓만 하고 있는 광견조.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석숭을 비롯한 남

궁부녀의 얼굴에 놀람의 표정이 나타났다. 일반 하급무사도 아니고 거의 어

검술을 구사하는 초극의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이 무인의 가장 기본이라

고 하는 사혈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야! 새끼들아. 내가 다 가르쳐 줬잖아!"

 석두가 붉어진 얼굴로 백산의 눈치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분명 자신이

모두 가르쳐 주었다. 오십 명의 광풍대원들 모두에게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꼴통들은 모른다고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

 "어떻게 여기저기 가려서 때리오, 아무 데나 패면 다 죽는데."

 어차피 죽을 놈인데 사혈이면 어떻고 얼굴이면 어떠냐는 말이다. 사혈을

찍어 죽인다고 죽는 놈이 고마워할 일도 아니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매 일반이라는 소리였다. 소살우의 말이 맞는 말이다.

 제대로 된 시체를 보존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일 뿐 죽은 자와는 상

관이 없다.

 "고맙다, 잘 쓰마."

 이번에는 광견조가 놀랐다. 거절할 줄 알았던 갈태독이 주머니를 챙기는

것이었다. 이상한 놈들과 생활하다 보니 갈태독도 이들과 닮아가고 있는가,

 그의 행동도 나머지 일행과 비슷해지고 있는 것이다.

 "씨펄! 개평이나 좀 주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백오십 먹은 노인이 돈주머니를 챙기는 것

도 그렇지만 거기에다 대고 씨펄거리는 소살우의 배짱이 더 재미있었던 것

이다.

 침울했던 분위기가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사사대의 습격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

을….

 "석대인,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겠지요?"

 석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석숭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호 최대 단체라는 자들이 이대로 물러설 리가 절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거칠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

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더욱 강한 자를 보내든지 하겠지. 아니면 더 많은 인원을 보내

든지…."

*     *     *

 "뭐라고? 전멸했단 말이냐?"

 "네, 태상. 반소구는 마지막 소식을 전하고 자결했습니다."

 천사맹의 흑룡호, 사뇌 석정이 그동안의 경과를 혈영사존과 마령혈존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어떻게 사사대가…."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왜 사사대를 모르겠는가. 요인 암살 목적으로 키운

최정예들이다. 사사대 이백이면 강호 문파 하나 멸망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

다. 그런데 이십여 명을 처치하지 못하고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광천뢰 하나 쓰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자, 맹주님께 보고를 해야 되겠다."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사사대 이백이면 맹의 이할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들이 몰살을 당했으니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보고를

 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맹주실에서는 엄청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건들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깟 돈 천

만 냥 주었다고 그런지 아십니까. 그들은 강했습니다. 강하다는 것이 무엇

인지도 모를 정도로 강했단 말입니다."

 새파래진 얼굴로 구유천사 수영이 두 사부와 석정을 질책하고 있었다. 아

차 했다. 그들의 실력을 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어야 했는데 아무 말 안 했

던 것이 실수였다.

 자신을 모욕했던 그 청년이 손에서 가지고 놀던 광천뢰. 다른 이들은 대충

 보아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만큼은 확실하게 보았다. 광천뢰가 그 사람

의 피부에 전혀 접촉하지 않고 있던 것을, 그리고 그의 품속에 있던 네 개

의 광천뢰 그것들마저도 서로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 할지라도 광천뢰를 한꺼번에 두지를 못한다. 자신의 걸음걸이에 따라

서 움직이다 서로 부딪치게 되면 바로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무서운 것을 태연하게 품속에 두고 있었다. 이미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

루는 경지를 넘어섰고, 광천뢰라는 무서운 화탄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

물과 동화된 경지였던 것이다.

 감히 그녀는 꿈도 꾸지 못할 경지의 초극고수였다.

 어쩌면 옆에 있던 천장지옥마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그 청년이라 할 수 있

었다.

 유들유들하니 비웃는 듯 웃고는 있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도 내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공포라는 감정을 상대에게 전이(轉移)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입으로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창기들과 소매치기 그리고 도둑들

의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들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을 쳐야 한다.

 자신은 한 단체의 수장이다. 수하가 잘했건 잘못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맹의 명령을 따르다 죽어간 충성스런 부하일 뿐이다. 그런 부하가

삼백이나 되었고, 그 부하들을 죽인 자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해서

는 안 된다.

 천사맹이란 조직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단죄를 해야 하는 것이

다.

 '미안해요, 공자. 당신에게 감정은 없어요. 이것이 무림에 사는 사람의 운

명일 뿐입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피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그런 곳이 무림이다. 어

떤 결심을 했는지 잠시 고뇌하던 그녀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복수를 해야지요. 우리는 천사맹이니까… 군사! 방법은 찾았나요?"

 그들은 강하다. 맹의 인물을 보내봐야 희생만 더 커진다는 것을 수영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군사를 찾은 것이다. 천사맹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그

들을 단죄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묻고 있음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삼 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맹주란 이래야 되

는 것이다. 단호한 면이 있어야 한다. 사사로운 정은 마음속으로 묻어야 하

는 것이다.

 "방법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현 강호 정세를 아셔야 합니다."

 "강호 정세? 그것과 그들이 무슨 상관이 있나?"

 혈영사존 만구득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석정을 바라보았다. 사사대

를 전멸 시킨 놈들을 단죄하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말에 강호 정세를 들고

나온 것이다.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엄청난 관계가… 그들이 바로 전쟁의 시발

점이자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뇌룡현의 평범한 건달들인 백산 일행이 강호

 무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전쟁의 시발점이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존재

라고 하고 있다.

 "이유는?"

 그녀도 석정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본 그들, 비록 전대 거마인 천장지옥마와 중원 최대 부호인 석숭이란 사람

이 있었지만 무림 정세를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집단은 결코 아니었

다.

 "먼저 강호정세를 논하는 데 있어서 천마맹과 천무맹의 상황을 아셔야 합

니다. 그들 양쪽 모두가 전쟁을 시작하자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천마맹에서는 천여 명의 무욕인을 움직일 수 있는 철혈전신 철목

승이, 천무맹에서는 구파 일방이 반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한 힘

을 보유하고 있는 개방이 절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구파일방에서 개방의 힘이 가장 강한 이유는 바로 속가제자가 없기

때문이다. 개방을 제외한 여타 문파들은 유사시 막강한 전력이 되었던 속가

제자들의 대부분을 잃었다.

 힘 있는 속가제자들이 검신 화진악을 지지하며 그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

었다. 따라서 속가제자가 있을 수 없는 개방이 구파 일방 중 가장 강한 집

단으로 변한 것이다.

 "두 맹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들이 판단했을 때 두 맹의 힘은

거의 백중지세입니다. 즉 전면전을 펼쳤을 경우 양패구상한다는 것이 저희

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그럼 전쟁을 하고자 하는 세력은 어떻게 해야 하겠

습니까? 바로 자신들의 맹 내에 있는 반전세력을 전쟁에 끌어들여야만 하고

, 타 맹에 있는 반전 세력은 그대로 묶어 두어야 이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

오게 됩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삼 인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려는가. 사뇌 석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철혈전신 철목승이 딸로 생각하고 있는 백면마 냉추렴, 그리고 백만 개방

의 꽃인 소걸영 구소운, 그 두 사람이 한 일행이 되어 같이 행동하고 있습

니다."

 "그럴 수가! 정말인가요?"

 놀람에 찬 외침소리였다. 마도의 꽃과 정도의 꽃이 동시에 같이 있다는 것

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죽게 된다면 지금껏 전쟁을 반

대했던 이들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두 사람을 죽인 상대에게 칼을 뽑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쟁에 승리하고자 한다면 천무맹은 소걸영 구소운이 천마맹에 의

해서 살해당한 것처럼 죽여야 하고, 천마맹에서는 백면마 냉추렴이 천무맹

에 의해서 살해당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 두 맹의 맹점입니다."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

이라면 무조건 승리를 해야 한다. 패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전

쟁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천무맹에서는 개방의 인물이며 자신들의 동료

인 소걸영 구소운을 암살해야 하고, 천마맹에서는 냉추렴을 살해하여 철혈

전신 철목승을 전쟁에 끌어들여야 한다.

 상대방 쪽에서 그들을 살해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자신들의 동료를 희생시켜야 전쟁에 승리하는 그런 기이한 상황이 백산 일

행 때문에 발생하고 말았다.

 석숭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가.

 "그럼 저희들의 입장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패구상(兩敗俱傷)을 시켜야

합니다. 둘 다 살리든지 아니면 둘 다 죽이든지… 아마도 살리는 것보다 제

거하는 것이 일은 더 쉽죠. 또 두 세력의 전면전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그렇

게 해야 하고요."

 이제는 자신들의 부하를 죽였던 그들에 대한 복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무

림을 건 한판 승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과거에 두 집단에 의해서 피눈

물을 흘리며 죽어갔던 수많은 천사맹의 형제들, 그들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 아닌가.

 그 열쇠를 자신들이 제거하려 했던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천사맹은 다시 가라앉아야 하겠군요."

 "아닙니다. 좀 늦추는 것일 뿐입니다. 한 일 년 정도요."

 수면 위로 나오려 했던 천사맹이 다시 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숨죽이며

강호의 사태를 주시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그럼 그녀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어차피 이것은 암살이다. 힘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살 전문

인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암살을 전문으로 하던 사사대가 전멸한 지

금 천사맹에서 특별히 보낼 세력이 없는 것이다.

 "흑막이란 단체가 있습니다. 아울러 혈사대(血死隊)를 출동시켜 천무맹과

천마맹 어느 쪽도 유리한 입장에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두 집단이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산 일행을 둘러싸고 그 사이에서 국지

전을 펼치도록 천사맹에서는 유도를 하겠다는 말이다.

 "그 흑막이란 단체는 믿을 만한가요?"

 이제는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동정심이나 미안한 감정도 없다. 개인적인

연민이나 동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천사맹의 사활(死活)이기 때

문이다. 강호상에 우뚝 솟아 있는 천사맹, 천사맹의 위명이 높아야 천한 인

생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잘살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원수인 천무맹과

천마맹의 인물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애써

그렇게 위안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불쌍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강호를

 장악하고자 하는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불쌍한 사람의 이름을 이

용하고 있는지도….

 "역대 최고의 살수 집단입니다. 과거에 살수제왕이라 불렸던 귀살 마천득

이 그곳에서 일급살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위로 특

급살수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청부집단. 그런 단체가 지금껏 어둠 속에서 암약하고 있

었다는 사실이 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귀살이 누구이던가. 강호 무림 수백만의 무림인 중 서열 백 위 안에 든다

는 고수 열 명을 암살한 살수의 제왕이며 만상투인루 투신이 된 자가 아니

었던가.

 그런 인물의 위에 또 다른 살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막강한 세력이 왜…?"

 "그들이 바로 과거 원나라 자밀원(慈密院)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구유천사 수영은 모르지만 혈영사존이나 마령혈존은 알고 있었다. 자밀원

이란 말이 주는 공포를, 이름도 성도 없었다. 흑립, 흑면, 흑의로 대표되며

 흑객(黑客)이라 불리던 원나라 최고의 암살집단.

 흑객(黑客) 견즉사(見卽死)-흑객을 만나면 무조건 죽는다-라는 다섯 마디

로 더 유명했던 원 제국 황실을 수호했던 최후의 보루가 그들이었다.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그들이 청부집단으로 변하여 강호 무림에

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그 일은 군사가 알아서 하세요. 청부금액은 그자가 두고 간 것

으로 하고요."

 이래서 자선사업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불쌍한 사람들의 장례

비라며 백산이 주고 갔던 그 돈이 이제는 살기를 가득 머금은 흉기로 변하

여 다시 돈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상들은 근신하세요!"

 "네! 맹주님."

*     *     *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지금?"

 출발 이후 가장 곤욕을 치렀던 황산을 넘었다. 중원에서 황산만 한 절경이

 없다고 했지만 그런 것은 꼴도 보지 못한 채 피만 마시며 동료의 죽음을

남기고 왔다.

 안휘성 성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낙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구화산 초입(初入)에 있는 객잔.

 백산 일행이 지친 몸을 쉬고 있는 곳이다.

 방안에서는 광견조원들을 제외한 전원이 앉아서 석숭이 하는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자네 말은 우리 일행을 향해서 무림삼천이 전부 달려든다는 말인가? 애들

 둘을 제거하기 위해서."

 놀람의 연속이었다. 무림삼천이면 강호무림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림의 공적도 아닌 이들을 향해서 전 무림이 공격을 해온다는 말이 된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무얼 했단 말인가. 무림에 해악을 끼

친 적도, 극악한 마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무림공적보다 더 한 상황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무맹에서는 냉추렴을 살리기 위해 힘을 쓸 것이고

천마맹에서는 구소운을 살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할 것이라 한다.

 작지만 활로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는 이들이었으나 석두의 다음 말은

 일행의 분위기를 또다시 암울하게 만들어 버렸다.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우리 쪽에 둘 필요가 없죠. 납치를 해버리면 가장

편하니까요."

 "으음!"

 석숭의 신음소리였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것이었다. 집안에 데려다 놓고 협

박하는 방법.

 "우리가 떠나면 되잖아요."

 울 듯한 표정의 냉추렴이었다. 우습게도 이들과 정이 들어버렸다. 삶의 목

표도, 야망도 없고 오직 주어진 대로만 살고자하자 하는 이들, 남자라면 모

름지기 야망도 있고 미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생각을 송

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다. 서로의 끈끈한 정 속에 큰 욕심 없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특히 저 백산이라는 사람, 문득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하고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나 우스운 사람이라 생각하

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 가슴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이들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자

신이 철혈전신의 제자라는 것 하나 때문에. 그러한 마음은 구소운도 마찬가

지였다. 개방의 소걸영이라는 신분이 사랑하는 님과 그 님이 사랑하는 사람

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형님이 되는 조천영은 임신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제는 사부가 된 갈태독이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약재를 구하는 일

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의술을 배우고 있는 그녀가 왜 모르겠는가, 조천영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인가. 냉 낭자나 구 낭자가 떠나도 달라질 것은 없

네. 그들은 자네 둘을 쫓을 것이고 남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냥 히히덕거리며 우리 길을 가야 하나?"

 이제는 석숭도 완전히 일행이 되어버렸다.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는 입장

이었는데도 빼지 않고 있다가 너무 깊숙이 담가버렸는지 빠지지가 않는 것

이다. 아니 빼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모르겠구먼."

 지금껏 딴 짓만 하고 있던 백산이었다.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고마워하고

있었다. 더구나 석숭은 개인의 몸도 아니고 황실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자신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소. 그만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남궁부녀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다. 이 일행 중에 가장 이질적인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위험을 함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모처럼만에 강호 유람을 나온 두 사람인데 위험 속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이다.

 "나는 아직 형님의 소식을 듣지 못했네. 그리고 지금은 준비가 안 돼서 듣

고 싶지도 않고. 나중에 아버님과 같이 듣겠네."

 "저도 아직 아버님의 사랑을 다 받지 못했습니다. 또 혈우창궁검법도 배워

야 하고요."

 두 부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형님이 이들에게 검법을 전수

하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창궁무애검법, 남궁세가의 최고 비전이다. 지금

은 모든 세가인들이 익히게 되었지만 며칠 전만 해도 남궁 성씨만 익힐 수

있었고 허락되었던 검법이었다. 그 어렵다는 것을 모두 익히고 있는 청년들

과 형님의 검법을 가장 완벽하게 익히고 있는 저 청년, 석두라고 했던가.

그가 마음에 들었다.

 형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직전제자가 바로 저 청년인 것이다. 사윗감

으로도 괜찮다 싶었다.

 "좋습니다. 그럼 같이 노력해보지요. 석두 광견조 집합시켜라."

 석두가 광견조원들을 부르기 위해서 나가자 백산이 냉추렴과 소운을 쳐다

보았다.

 "소운, 냉 소저. 잘 들어, 나는 욕심이 무지하게 많아. 일단 내 품에 들어

오면 전부 다 내 꺼야. 어떤 놈이든 내 것을 빼앗아가려 하면 그놈들은 다

죽어. 그가 누가 되었든지, 알았어?"

 투박한 말이다. 구소운이나 냉추렴을 전부 자기 것이라 이야기하면서, 자

기 것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냉추렴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소운보다 더 미안한 사람이 냉추렴이었

다. 소운이야 이미 부인으로 내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남편이 부인을 지키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지만 자신은 절대 아니다. 사부가 이들에

게 맡기고 갔을 뿐이다.

 "오라버니, 나야 오라버니 거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냉 언니는 언제부터

 오라버니 것이 되었죠?"

 기분이 좀 풀렸는지 소운이 동그래진 눈을 하고 백산을 쳐다보았다. 어느

새 둘 사이가 언니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자신보다 두

살이 많은 냉추렴을 이제는 스스럼없이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또 따지냐. 아직 너한테도 침 안 발랐잖아?"

 "침? 그건 또 무슨 소리죠?"

 "크크! 크 핫핫핫!"

 아는 사람만 알고 있었다. 침 바른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무거워진

분위기가 한결 가볍게 바뀌고 있었다.

 '고마워요, 백공자님. 아니 오라버니….'

 백산을 가만히 쳐다보며 내심으로 중얼거리는 냉추렴이었다. 그런 냉추렴

을 바라보는 눈동자 하나가 있었다. 석숭이 냉추렴의 꿈꾸는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저런 욕심 많은 놈이 뭐가 좋다고 쯧쯧쯧….'

 욕은 하고 있지만 자신도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목을 원하는 놈들이 있단다. 한두 푼 가지고는 안 되겠지?"

 "돈 가지고는 안 되지 않겠소? 지들 목이라면 모를까…."

 누군지 왜 그런지 묻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목을 노리면 그놈들의 목을 먼

저 따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구에게 원한 산 일도, 못살게 군 적도 없는데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면

당연히 그놈이 나쁜 놈이라는 소리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형님! 아무래도 이번에는 육포 좀 드셔야겠소?"

 "그래 맞다. 이번에 육포를 잔뜩 준비하자. 이참에 우리도 질리도록 한번

먹어보게 낄낄낄!"

 광견조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껏 백산이 단 한번도

 자신들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던 그가

자신들에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는

 말이 된다.

 "섯다의 말이 맞다. 충분히 준비해라. 그리고 일인당 구슬 두 개씩 가지고

 다녀라. 앞으로 구화산을 넘을 때 우리의 앞을 막는다거나 수틀리는 놈들

있으면 그대로 던져버렷!"

 백산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가 났음이다. 전쟁을 하

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자신들을 걸고넘어지는가. 나중에 가서는

맹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말을 할 것이다. 냉추렴이나 구소운 덕분에 자신들

이 이겼다는 말을 하며 추모비 하나 세워주고 그것으로 끝낼 것이다.

 개떡 같은 놈들이고 엿 같은 세상이다.

 '우리를 건드리면 다 죽여준다. 그게 누가 되었든지 다 죽여준단 말이다.'

 백산의 눈동자에서 마지막에 보이는 것은 질식할 듯한 살기였다.

 "저 친구도 긴장할 때가 있군요."

 "왜 안 그렇겠나. 지가 책임지고 있는 식구가 이십 명이 넘는데 똥줄이 탈

 만도 하지."

 석숭과 갈태독의 대화였다. 지금껏 오면서 백산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처

음 본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야. 저놈 식구 중 한 명이라도 잘못되면

저놈은 살귀가 되어서 세상을 떠돌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무서운 거지

. 나도 막을 수 없는 저놈이….'

 갈태독의 한숨소리가 깊어지고 있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백산의 비밀, 언제 어디서 왜 생겼는지 모르는 파멸안

의 존재, 그것의 재림이 더 걱정되는 것이다. 지금은 조천영이 백산을 제어

하고는 있지만 이제 갓 백색지안일 뿐이다. 한 단계 나아가서 흑색지안이

된다면 또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에 더욱 마음이 조마조마했

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르신, 저 친구들에게 세가의 진식을 가르쳐야 될 것 같습니다."

남궁지우가 갈태독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서운 실력을 가지고 있는 친

구들이지만 적들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들이기에 단순한 강함만 가지고는

대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진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남궁세가의 진식, 그것이면 최소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남궁지우의 계산

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석숭이 우려의 목소리로 물었다. 진식만 완벽하게 익힐 수 있다면 결코 지

지는 않을 것이다. 무당의 진무칠절진만 해도 일곱 명이 동급고수 예순 네

명을 감당할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오십 년 전 강호를 제패했던 남궁세가의 진식이다. 무당의 진식에

결코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였다. 진식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질 않는가. 진을 구축하는 모든 구성원이 한마음으로 움직여야만 그 위력

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에게는 기껏해야 이삼 일 정도의 시간밖에 없다. 이곳에 계

속해서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다. 무림삼천이 공격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장

소에 상관없이 달려들 것이다. 일단은 움직이면서 적들의 상황을 파악해야

만 한다. 또한 암습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동을 해야만 한다.

 "완전하게 가르치지는 못해도 방어는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십니까? 다행이군요."

 석숭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남궁지우가 자신 있게 말한 것이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광천뢰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다.

 먼저 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지지는 않을 것이고 이쪽이 승리할 수도 있

음이다.

 '어쩌면 무림 이천이 이들에게 패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패했어도 패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동료를 살해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인데 감히 공론화시킬 수가 없다. 즉

무림삼천의 공격에서 살아남든지 죽든지 이들의 행적은 묻혀질 것이다.

 냉추렴이나 구소운의 이용가치가 없어질 때까지는 이들에 관해서는 각 맹

의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강호 누구도 알지 못할 터이다.

 "각 맹에서는 출발했겠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어르신. 이미 이쪽을 향했을 것입니다."

 석숭의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     *     *

 섬서성(陝西省) 진령산맥(秦嶺山脈)의 서쪽 소화산, 희미한 그믐달이 비추

고 있는 밤하늘에 메뚜기 떼 같은 수백의 검은 점이 날아가고 있었다. 이제

 갓 겨울을 벗어난 삼월, 메뚜기 같은 곤충이 있을 리가 없는 계절이다. 사

람이었다. 그것도 극강한 무공을 지닌 수백의 인물들이 주위의 절경을 뒤로

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정지!"

 카랑카랑한 한마디에 수백의 메뚜기 떼들이 일사불란하게 내려섰으나 조그

마한 파공성조차 나지 않는다. 어디서 이 많은 고수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이곳은 섬서성, 구파일방 중 화산파(華山派)와 종남파(終南派)가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는 곳으로 두 파 제자 이외의 인물들은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삼백에 달하는 흑의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에선 정파의 무

공을 익힌 정순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칙칙한 어둠의 기운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양성진! 지금 진세개는 어디쯤 있나?"

 "네, 군주님. 구화산 근처에 이미 잠입해 있다고 합니다."

 천마맹의 오군 중 비마군(飛魔軍)의 군주인 무면마룡(無面魔龍) 암사월이

었다. 별호에서 말해주듯이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다. 구마 중 혈마(血魔

) 소지악의 제자로 혈영도법(血影刀法)을 극성으로 연성한 도의 달인이다.

 맹주령으로 내려진 단 하나의 명령은 '개방의 꽃인 소걸영 구소운의 보호

였다.' 이상한 명령이었다.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보호하기 위해서 비

마군 전원이 출병을 했다.

 맹주령이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수하 된 자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일단 도착해 보면 알겠지.'

 "가자!"

 다시 삼백여 인물들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살리기 위해서 가는 자들이었다.

*     *     *

 "청부가 들어왔소."

 흑립, 흑면, 흑의. 희미한 야명주 불빛 아래 온통 검은색 일색인 다섯 명

의 인물들이 있었다.

 "청부금은 얼마 이오이까?"

 "은 천만 냥이오."

 사뇌 석정이 중원 최고의 살수조직이라 했던 흑막(黑幕), 흑막의 특급살수

 다섯 명이 모여서 새로운 청부에 관해서 상의를 하는 자리였다.

 "특급이군요."

 어디서 나온 음성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다섯 명 중 한 명의 입에서 나

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니요, 목표물은 하급인데 그들의 배경이 특급이오."

 "누구입니까?"

 "철혈전신 철목승의 제자인 백면마 냉추렴과 개방의 소걸영 구소운이오."

 "엄청난 인물들이군요."

 "자 가부를 결정해 주시오."

 탁자 위로 한 사람씩 손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섯 개의 손이 주

먹을 쥔 채로 중앙으로 모였다.

 "청부를 실행하도록 하지요. 먼저 영객(影客)과 사객(死客)이 움직이시오.

"

 그들의 위치는….

 죽음을 원하는 자들이었다.

*     *     *

 흑막의 흑객들이 죽음의 청부를 접수하고 있던 그 시각, 감숙성의 천마맹

에서는 또 다른 인물들이 은밀하게 맹을 나서고 있었다.

 무욕 십대고수 중 네 명, 광사 초상, 독안랑 서문천, 광혈마도 반동, 독인

마검 거이산.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안휘성이었다.

 "그러니까 아우 말은 대형이 시집이나 보내 보려고 그 녀석에게 딸려 보냈

는데 그곳이 사지(死地)가 되었다 그 말이냐?"

 "시집보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맹에 들어오면 전쟁에 휩쓸리게 되니까 그

랬다니까요?"

 광사 초상과 독안랑 서문천의 대화였다. 한가롭게 걷는 듯 움직이고 있으

나 그들 옆에 보이는 나무며 바위가 순식간에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쥐새끼 그놈이 추렴이를 해치기 위해서 미리 출발했고?"

 "그렇다니까요? 도대체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우."

 "너무 복잡하잖아. 서로 죽여야 될 놈들은 살리려 하고, 같은 편은 죽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게 미친놈들 아뇨."

 "그럼 추렴이를 구하기 위해서 천무맹에서도 와있겠네?"

 "그 녀석들은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납치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니까요."

 "자세히 설명해 보라니까? 왜 쥐새끼는 소걸영을 보호해야 하고 추렴이는

납치되어야 하냐고."

 계속되는 광사의 질문에 독안랑 서문천이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그 자리

에 우뚝 섰다.

 "잘 들으시오, 형님. 소걸영하고 추렴이하고 누가 더 비쌀 것 같소."

 "당연히 추렴이가 비싸지. 근데 왜?"

 "추렴이가 납치되고 그놈들이 꼼짝 마라 하면 우리는 발이 묶일 것 아뇨."

 "그래. 또 그놈들이 시키면 무엇이든 다해야 되겠지."

 "그럼 반대로 이쪽에 소걸영을 잡아놓고 구파일방을 보고 꼼짝 마라 하면

그들이 꿈쩍도 안 하겠소? 아마 소걸영의 비석(碑石)부터 만들고 천마맹을

공격할 거요."

 개인을 우선하느냐 집단을 우선하느냐 하는 차이였다. 마도인들은 개인적

인 성향이 강하다. 더구나 무욕인들은 개개인들의 집합이지 한 단체가 아니

다. 단지 철목승이란 인물에 의해서 하나로 결집이 되어 있을 뿐이다. 백면

마 냉추렴의 목숨으로 위협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조카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구소운은 다르다. 납치해서 협박을 한다 해도 개방에만 국한될 뿐

이다.

 납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질로서는 가치가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그곳에 두면서 그 일행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천마맹에는 더 유리

하다는 것이다.

 "알겠소?"

 "그럼 빨리 안 가고 뭐 하냐?"

 무욕 십대고수 사인이 빛살 같은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살리기 위한 자들이었다.

*     *     *

 천무맹의 안휘분타.

 백의천룡(白衣天龍) 화인걸(華仁傑)이 구화산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맹을 떠나올 때 맹주인 아버지와의 은밀한 만남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우리는 그곳에 개방의 꽃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만 제거하

려 했지. 그런데 뜻밖에도 꽃 옆에 백면마 냉추렴이 같이 있다는 정보가 입

수되었다. 천마맹에서는 그녀를 제거하여 철목승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고. 그래서 네가 가야 한다."

 구소운을 제거하고 냉추렴도 납치 또는 아무도 모르게 제거, 아버지의 말

씀이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한마디, 믿음을 줄 수 있는 아들이 되라고 하셨다

.

 '빌어먹을….'

 언제나 백무천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고 있는 자신, 아마도 아버지가 가

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그런 점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파견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지금은 비밀로 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고 그때 자신의 공적을 밝히

겠다는 속내였다.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두 거대 단체 수뇌부의 이 결정이 앞으로 어떻

게 나아갈 것인가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강호 무림 전체라고 할 수 있는 무림삼천이 생존을 위해 치열

한 암투를 벌이는 구화산, 그들의 목표물은 백산 일행이라면 밝은 하늘 아

래서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산서성(山西省)의 항산(

恒山), 그곳에 있는 천선비동이 무림인들의 목표였다.

 그 항산으로 천하의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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