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84)

제3장 남궁세가(南宮世家)

 기이한 행렬.

 말로 끌어야 될 마차를 메고 가는 행렬이 있었다. 보통 마차의 두 배는 족

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마차를 네 명의 흑의인이 각 모서리를 차지한 채 메

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그들과 똑같은 흑의를 입은 십여 명의 인물들이 검

은 쇠뭉치를 하나씩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따르고 있었다.

 광사 초상이 물건이라 칭했던 백산 일행이었다. 십여 일간의 뱃놀이를 마

치고 안휘성으로 들어왔다.

 쑥 들어간 양볼, 핏발선 눈동자는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심적 고통이 얼마

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천선비도가 가리키는 곳이 항산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서 백산 일

행을 괴롭히는 무림인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폐하게 변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 기이한 행렬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나

강호상에 정신 나간 놈들이 어디 한둘이랴. 또 그런 놈들의 하나이거니 하

고 생각할 뿐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쳐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무거운 마차를 메고 가는데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발자국이 생기

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을 밟고 가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보면 없던 발자국이 그들이 지나가고 난 뒤쪽에는 선

명하게 찍혀있는 것 또한 이상했다.

 바로 백산과 석두의 작품이었다. 그들의 뒤쪽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백산과 석두가 양옆으로 서서 열심히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백산의 얄팍한 수, 누구

하나 관심 갖는 이도 없는데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이 아마도 석두를 훈련(?)

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석두야! 꼭꼭 찍어라. 그렇게 해서 표시가 나겠냐?"

 불안한 표정으로 살짝살짝 움직이며 발자국 표시를 내고 있는 석두를 쳐다

보며 하는 말이다.

 "형님, 이것 좀 빼고 하면 안 되겠습니다."

 우거지상을 하며 내미는 석두의 두 손에는 검은 구슬이 네 개가 올려져 있

었다. 석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인지 눈 부

위가 움푹 들어가서 그늘져 있는 모양새가 다른 광견조에 비해서 두 배는

뚜렷해 보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광천뢰를 가지고 노는데 이력이 붙자 하나를 더 주더니, 그것마

저도 익숙해지자 또다시 두 개의 광천뢰를 던져주었다. 그것도 석숭이 옆에

 있을 때 던졌던 것이다. 합이 네 개의 광천뢰를 손에 쥐고 있는 석두는 죽

을 맛이었다.

 두 개씩 한 손에 들고 서로 붙지 못하게 하려면 언제나 손바닥을 펴고 있

어야 한다. 두 손바닥을 편 상태로 그 위에 광천뢰 두 개씩을 두고 위로 폴

짝폴짝 뛰면서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이다.

 자연 석두의 몸놀림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받기 놀이하자!"

 또 시작이다. 네 개를 쥐어준 다음 간혹 가다 심심하면 받기를 하자곤 한

다. 광천뢰를 서로 던지고 받는 것을 놀이라 표현하는 백산이다.

 석두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석숭이 재빠르게 갈태독 옆으로 도망을 가고 있

었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백산과 석두의 받기 놀

이(?)는 자신이 석두 옆에 있을 때만 시작이 된다.

 사마장군가의 후손이라고 밝혀진 순간부터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

다. 황제의 입장에 대해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고, 그분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만 되면 광천뢰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석두를 향해서가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서. 덕분에 석숭의 얼굴도 석두 못지않게 많이 상해 있었

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석두와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

는 것 같았다.

 혹시 자신이 석두를 데리고 갈까봐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도 했으나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으헉!"

 자신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검은 공 하나, 석숭은 눈앞이 캄캄

해졌다.

 이것은 갈태독도 받을 수 없는 속도였다. 저번에도 이런 경우가 한번 있었

고 그때는 옆에 있던 갈태독이 잡아주어서 오줌을 지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혼자서 생각에 잠겨있다가 갈태독과의 거

리가 멀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왜!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살아온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맨 처음 떠오른 얼굴은 자신

이 하늘처럼 섬기는 황제의 얼굴이 아니었다. 바로 딸의 얼굴이었다.

 이제 여섯 살, 늘그막에 본 딸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딸이다.

 눈처럼 하얗게 살라고 설(雪)이라 이름을 지었다.

 "설아…."

 퍽!

 자신의 가슴에 뭔가 부딪친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죽음

이 의외로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쿠! 미안하오, 석대인. 석두를 놀려 주려고 했던 것인데 흙덩어리라

서 그만 빗나갔소."

 백산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하며 석숭에게로 다가왔으나 그의 얼굴은 절

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리고는 석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주절거렸다

 "왜 사내 남(男) 자에 입 구(口)자가 있는 줄 아시오? 열(十) 놈이 와서

입을 열라고 힘(力)을 쓰며 고문을 해도 입(口)을 굳게 닫고 있어야 되는

것이 남자(男)요. 그래서 입 구(口)자가 가장 밖에 있는 것이고."

 열 사람(十)의 입(口)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힘(力)을 가지고 있어야 남자

라고 했던 사내 남(男) 자가 이상하게 해석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 돈 때문에… 꼬르륵."

 이제서야 백산의 횡포에 대한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석숭이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러나 석두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었다. 홀

로 공받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랑극단에서만 볼 수 있는 네 개의 공받기

를 석두가 광천뢰를 가지고 하고 있었다.

 "입(口), 입(口)을 조심해야 되는 거야. 남자는 위에 있는 입, 여자는 아

래 입, 그 입을 잘못 놀리면 패가망신한다고."

 뼈저린 교훈이었다. 광천뢰를 돌리느라 석두는 팔뼈가 저리고, 뒤로 넘어

져서 기절한 석숭은 허리에 머리까지 온몸의 뼈가 저리고 있었다.

 몸으로 익히는 무공이 아니라 뼈로 습득하는 교훈이었다.

 "백랑, 지금까지 석두와 석 대인을 괴롭힌 것이 저에게 돈에 대해서 이야

기했다는 것 때문이에요?"

 드디어 조천영이 백산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들이야 자신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을 이야기한 것인데 그것으로 트집을 잡고 지금껏 괴롭혀 왔

던 것이다.

 "석 도련님, 그만해요."

 그러나 석두는 백산의 눈치만 보며 계속 광천뢰를 돌리고 있었다.

 "그만 하라잖아, 새꺄. 너희들 앞으로 누님 말 안 들으면 죽어!"

 백산이 광견조를 향해서 공연히 소리를 지르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무

리 부하들에게 무서운 호랑이처럼 굴어도 조천영 앞에만 서면 완전히 고양

이 앞의 쥐다.

 그동안 너무 일이 많은 관계로 합방을 한번도 하지 못해서 가뜩이나 욕구

불만이 쌓여 있는데 그나마 성질을 건드려 놓으면 옆에 가지도 못한다.

 남궁세가에 도착해서 어떻게 해 보려면 지금부터 최고의 기분을 만들어 주

어야 한다. 조천영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였다.

 석두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무너지듯 진흙탕 위로 주저앉았다.

 그도 지금에서야 백산이 자신을 괴롭힌 이유를 알았다. 어이가 없어서 말

이 나오질 않는다. 돈이나 쓰면서 저러면 말도 안 한다.

 은자 한 냥을 쓸 때도 형수님에게 꼬박꼬박 보고를 하면서도 돈에 대한 이

야기를 했다고 이렇게 고통을 준 것이다.

 "완전 변태야, 변태."

 "이제 알았소? 남을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형님 아니요. 근

데 요즈음은 왜 때려 주지를 않지?"

 "그런 네가 더 변태다, 이 새끼야."

 자신을 향해 이죽거리는 소살우를 향해서 흙덩이 하나를 던지며 석두가 소

리를 질렀다. 소살우의 얼굴에서 부럽다는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받든 말든 그것도 다 무공을 익히는 것이지 않느냐는 소리였다.

 "형님! 정 안 되면 그것 터트려버리쇼?"

 죽으라는 소리다.

 "너 이…."

 "빨리 남궁세가로 가자고! 오늘밤은 그곳에서 보낸다."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듯 재빠르게 외친 백산이 일행을 독려하고 있

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오백 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안휘성(安徽省)의 대표적인 무림세가.

 귀신도 곡할 기관진식과 천재적인 용병술은 제갈세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검공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하여 안휘 하면 남궁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다. 오십 년 전까지는 그랬다.

 오천맹의 한 축이었던 남궁세가는 맹의 해체와 함께 강호의 압력으로 오십

 년간의 봉문에 들었고, 봉문이 끝난 지금에 와서야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는 있으나, 철옹성처럼 펼쳐져 있는 천무맹의 세력에 더 이상의 힘을 발휘

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남궁세가를 향해서 커다란 마차와 함께 기이한 행렬이 다가가고 있었다

.

 남궁세가의 영역을 오십 리 정도 가로질러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남궁세가(

南宮世家)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 거대한 대문 앞.

 봉문이 풀렸다고는 하나 굳게 닫혀있는 대문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남궁세가의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대문 앞에서

가문의 얼굴이 되었던 경비무사는 보이질 않았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

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적막감만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쇼!"

 우렁찬 목소리 하나가 황혼 무렵 적막감에 싸여있던 남궁세가를 일깨우고

있었다.

 그러나 굳게 닫혀있는 대문은 새로운 방문자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

무런 반응이 없다.

 쾅! 쾅! 쾅!

 "여기가 남궁세가가 맞는다면 문 좀 열어보쇼."

 대남궁세가의 대문을 발로 사정없이 차면서 재차 소리를 질렀건만 안에서

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빈집인 모양인데 내가 넘어가서 문 딸게."

 방문자를 받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로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는 것을 두

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하고 있다. 그 다음 백산의 행동은 더욱 가관이다.

대문을 발로 차는 것도 부족해서 담을 넘겠다고 하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 이곳은 남궁세가가 아닌가."

 석숭이 담을 넘으려는 백산을 말렸다. 아무리 이가 빠졌다고는 해도 호랑

이가 토끼로 변하지는 않는다. 이웃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그렇게 찾아오면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정중하게 방문을 요청하는 첩지를 보내고 그쪽에서 허락하게 되면 그

때서야 방문을 해야 하는 것이고, 만일 거절이라도 하면 그냥 왔던 길로 되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강호 무림의 예절이 아니고 인세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고 지키는 예의범절이다. 그런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무작정 와서는 문

을 열어달라고 소리치면 누가 열어줄 것인가.

 그러나 상대는 단순무식의 대명사 백산이다.

 그가 알고 있는 예의는 배고픈 사람이 밥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면 밥이 없

으니 다음에 오라든지 아니면 다른 집으로 가라든지 해야 하는 것이 최소한

의 예의라 알고 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 살고 있고 자신도 그렇게 산다.

 말을 하지 않는데 저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

 "이것이 바로 지주공이라는 거야."

 말리는 석숭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두 손을 이용해서 돌 벽에 손가락

자국의 구멍을 만들며 마치 거미가 올라가는 것처럼 한 걸음씩 올라가고 있

었다.

 끼-이-익!

 "남궁세가는 외인을 받지 않습니다."

 백산이 담벼락 위에 도착하는 순간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열리며 육십 대

의 회의 장한이 나와서 백산 일행에 대고 하는 말이었다.

 남궁세가의 총관인 건곤권(乾坤拳) 유호(柳號)였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남궁세가 오십 년의 봉문으로 인하여 쇠락했다고 하

나 이건 뭔가? 칼에 의해서 잘린 듯 여기저기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십여

명의 인물들과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메고 있는 마차는 굳이 이야

기를 해보지 않아도 세가 안으로 들일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시뻘겋게 핏발선 눈동자에서는 적의 가득한 눈빛이 흘러나오는 이들의 몰

골은 떠돌이 부랑자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이봐요, 안휘성에서는 최고라 해서 밥 한술 얻어먹을까 하고 왔는데 인심

이 너무 박한 것 아뇨?"

 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계절은 삼월로 들어서 봄기운이 완연한데 아직도 털옷을 껴입고 있는 녀석

이 담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대담하게 월담을 하려하고 있었다.

 "이곳은 남궁세가외다. 그만 내려오시죠."

 건곤권 유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나왔는데도 내려오지 않고 담 위

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남궁세가에 대한 모욕이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남궁세가에서 총관으로 일한 지 이십 년이다. 이제 이

곳은 자신의 일터가 아닌 집이 되어버렸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았다. 일 년이 이

년이 되고, 또 십 년이 되고,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남궁세가의 가

족이 되어버렸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어도 남궁세가를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

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담벼락 위에 있는 놈은 비웃는 듯 웃고만 있다

. 게다가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건곤권 유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

했다.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고, 천륜(天倫)도 없는 이곳에 이제는 밥도 없다

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만심은 오십 년 전하고 똑같다네!"

 고함소리였다. 담벼락 위에서 건권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가 건물

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서, 남궁세가의 전 가솔들이 들으라는 듯이 외치는

소리였다.

 백산의 외침이 조용하게 잠자던 남궁세가를 뒤흔들고 이곳저곳에서 하나둘

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건곤권 유호의 몸에서 사방을 얼릴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빨도 발톱도 없는 호랑이라 했다. 천륜도 없는 곳이라 했다. 하찮은 떠돌이

가 남궁세가의 치부를 건드리고 모욕한 것이다.

 '유 총관 안으로 들이게.'

 막 백산을 향해서 손을 뻗어가려던 건곤권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가주의 전

음이었다.

 그도 느낄 수 있었다. 가주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분노의 감정을.

 "가주께서 안으로 드시랍니다."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십 년 전에도 강호의 고수였던 그였고, 누구 하

나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건곤권 유호

가 아닌 남궁세가의 총관 유호인 것이다.

 억지로 참고 있던 건곤권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놈이 그대로 담을 넘어서 들어온 것이다. 일행의 내려오라는 소리에 고개

를 흔들며 이왕 내려가는 것 안쪽으로 가겠다며 세가 안으로 뛰어내렸던 것

이다. 결국은 월담을 했다.

 참을 인자를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른다.

 분노한 건곤권이 그의 뒤쪽으로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백산 일행을 안

내한 곳은 세가의 가족들만 이용하고 있는 내실 깊숙한 곳의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현 가주인 무천신룡(武天新龍) 남궁지우(南宮知雨)를 비롯한 남

궁세가의 전 가솔들이 굳은 표정으로 백산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넨가? 우리 가문을 우롱한 자가."

 오십 년의 세월이 남궁세가에 남긴 것이 있다면 인내(忍)였다. 참고 또 참

고 그렇게 보낸 세월이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 포함된 감

정은 백산 일행에 대한 분노였다.

 비록 몰락했다고 하지만 한때는 강호를 제패했던 가문이고 그 가문의 수장

이 바로 자신이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이기에 남궁세가에 와서 천륜이란

말을 쓴다는 말인가.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그것 때문에 참고 있는

지도 모른다.

 "카아악! 취익!"

 백산이 심사가 뒤틀렸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우롱이라… 지나가던 놈이 한 마디 한 것은 우롱이고, 쥐새끼처럼 숨어있

는 것은 자존심인가?"

 기분이 나빴다. 처음 접한 대장장이 장 노인의 친 혈육들이다.

 반가울 만도 하건만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역

시 명가의 후예답게 재기발랄하고 당당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의 상태

가 왜 피둥피둥하게 살찐 돼지처럼 보이는 것인가. 무공도 별 볼일 없다.

가주라는 저 사람도 장 할아버지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들의 후예들 또한 어떠한가. 광견조원들보다 나아 보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무려 오십 년간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이런 이

들을 위해서 평생 쇠를 두드리며 살았고, 이런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자신에

게 무공비급을 보냈던가.

 말로는 참고 살았다지만 참고 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타의에 의

해서 만들어진 봉문이란 울타리 안에서 여유작작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십 년 동안 편하게 살아온 모양이군, 제법 살도 붙고 몸도 나온 것을

보니. 안 그렇소, 가주?"

 "닥치거라, 이놈! 감히 남궁세가를 모욕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더

냐. 우리 가문의 배덕자만 아니었다면 어디 너희 같은 놈들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큰할아버지만 아니었던들 왜 남궁세가가

이렇게 되었겠는가. 남궁세가에서 가장 뛰어나면 무엇하랴, 강호 활동을 하

지 못하는데. 창천일룡(蒼天一龍)이란 별호도 강호인들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닌 세가 내에서 지어준 것이다.

 강호를 마음껏 질타하고 싶었다. 남궁세가의 별이 아닌 강호에 떠오르는

별이 되고 싶었다. 창천일룡 남궁무라는 일곱 자가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

리는 꿈을 무수히 꾸었고 환상도 가졌었다. 이십삼 세의 젊은이를 가두어

놓기에는 남궁세가의 울타리는 너무나 좁았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식으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인가."

 창천일룡 남궁무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면서 백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전검법 중의 하나인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剛)을 익히기

전에 익히는 제왕검형(帝王劍形)의 기수식이다.

 제왕무적검강도 익히기 시작했지만 저런 놈에게는 제왕검형도 과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다행히 가

주인 작은할아버지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계신다.

 그러나 정작 상대가 될 놈은 자신이 안중에도 없는 듯 무엇이 즐거운지 혼

자서 키득거리고 있다.

 "배덕자라고 했나? 그래서 파문이라도 시켰나? 그렇게 잊고 나니까 밥도

잘 넘어가고 행복하게 살아지던가?"

 백산의 목소리가 메말라 가고 있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해도 좋았다. 과

거의 사람이니 잊을 수도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궁세가

모두가 장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문의 어른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배덕자로, 가문을 망친 죄

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친 혈육마저

내친단 말인가.

 자식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것으로도 부족했단 말인가. 이런 것들을 가

문이랍시고 못 잊어하는 장 노인이 불쌍했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

현듯 들었다.

 "형님!"

 그런 백산을 일깨운 것은 뜻밖에도 소살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웃어야 했던 소살우가 백산의 마음속을 가장 먼저 꿰뚫어 본 것이다.

 "죽일 거요? 안 죽일 거면 목에 힘주지 마시오."

 '죽일 수는 없겠지. 그분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는 없으니까….'

 소살우의 말에 다시 이성을 찾았는지 나직이 중얼거린 백산이 한 곳을 힐

끗 쳐다보았다. 검은 건물 하나, 죄인을 가두어 둔 수옥인가, 굳게 닫아둔

것도 부족해서 쇠사슬을 이용하여 대문 자체를 막아두었다. 그 속으로부터

나오는 격렬한 파동을 감지한 것이다.

 "야! 앉아, 안 죽인대. 사지에 은 열 냥, 나는 팔 두개 은 다섯 냥."

 도무지 심각이란 말을 모르는 광견조였다.

 "형님이 지금 무지하게 화났거든? 나 아니었으면 저 새끼는 오늘 죽었을

거다. 그러니까 나도 사지를 부러뜨리는데 열 냥이다."

 광견조의 어이없는 행동을 쳐다보고 있는 일행들 중 가장 난감한 사람은

강호무림이라는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석숭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백산과 이야기했었다.

 자신의 이름이면 하룻밤 쉬어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었다. 그러나 백산은 고개를 흔들며, 남궁세가와는 개인적인 볼일이 있

으니 절대 나서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남궁세가를 모욕한 것도 부족해서 가문

의 후예의 부상을 두고 내기라니….

 백여 명 이상이나 되는 남궁가의 인물 전원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그중 가장 강한 살기의 주인공은 바로 창천일룡 남궁무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자신의 애검인 용명검(龍鳴劍)을 그대로 백산을 향해서

 찔러 왔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찌르기였다. 강호 명사들이 보았다면 고개라도

 끄덕이며 탄복할 수 있는 멋진 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백산이었다.

 곧 바로 옆으로 반보를 움직이며 어느새 벗었는지 자신의 맨 발바닥을 남

궁무의 얼굴에 갖다 대며 한마디를 한다.

 "한번 죽었다. 무인이 흥분하면 되나? 너희 집이잖아. 냄새는 괜찮지?"

 어르고 뺨치고 다시 약 올리고, 남궁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비록

단순한 찌르기였지만 그곳에는 자신의 모든 힘이 담겨있었다. 가문의 내공

심법인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을 바탕으로 펼친 제왕검형의 일초, 제

왕이 출현하니 모든 것이 굴복한다는 제왕출현(帝王出現)이 너무나 어이없

이 깨지고 자신의 안면에는 놈의 냄새나는 발 도장이 찍힌 것이다.

 "이익! 제왕낙일(帝王洛日)!"

 하늘의 태양을 베어서 떨어뜨린다는 제 이초인 제왕낙일에서 나오는 수십

개의 검이 백산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남궁무의 검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웃고 있던 백산의 몸이 검

과 검 사이의 조그마한 틈바구니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거창한 신법도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검날을 손을 들어올린다거나 발을 들어올리는 간

단한 동작으로 피하는 것이었다. 마치 일부러 검이 피해가는 것처럼 그렇게

 보였다.

 "두 번 죽었다. 흥분하지 말라니까? 똥개도 제집에서는 더 크게 짖는다고.

"

 남궁세가의 제일룡에서 똥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보고 있던 세가 가솔

들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이건 숫제 비무 자체가 되질 않는다. 놈은

 내공도 거의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한 건달들의 몸놀림만으로 남궁세가의 검법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

다.

 "안 된다, 무야!"

 검천신룡(劍天新龍) 남궁천우(南宮天雨)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

다. 손자의 몸이 정지하며 취하는 동작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제왕무적

검강, 중검(重劍)의 검법으로는 최고인 남궁세가의 초절기이다.

 아직 삼성 경지에 머물고 있지만 그 나이에 제왕무적검강을 익혔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언제나 형인 남궁세우에게 뒤쳐졌던 자신, 그 형이 사라지고 자신에게 가

주 자리가 왔을 때 냉정하게 그것을 내쳤다.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가문의 가주 자리에 있으면 무엇 하나, 그래서 동생에게 버리듯이 주

어버렸다.

 자신은 포기했지만 후손만큼은 자신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자

에게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큰 형님이었던 신수신룡 남궁세우의 자질보

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대견했고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었

다.

 너무 거만한 성격이 흠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면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그

대로 두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상대가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인 것을 알면서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렸다.

 벌써 검강이 한 치 가량 솟아 나왔던 것이다.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劍剛)!"

 남궁무의 입에서 포효 같은 일갈이 터져나오고 한 치 가량의 검강이 생성

된 남궁무의 검이 백산을 덮쳐왔다.

 "병-신!"

 한심했다. 모름지기 자신보다 고수와 싸울 때는 가장 익숙한 무공으로 상

대를 해야 한다. 이제 갓 입문한 초절기가 아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펼

칠 수 있는 그런 익숙한 무공을 가지고 싸워야만 자신의 허점을 최대한 줄

이고 상대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

 "잘 보아라, 석두 그리고 너희들. 저놈이 바로 무공을 익힌 놈들 중에 가

장 멍청한 놈의 표본이다. 자기보다 강한 놈뿐 아니라 자신보다 못한 놈과

싸울 때도 저런 멍청이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무공은 멋이 아니다. 목

숨을 걸고 하는 도박인 것이다. 알았느냐?"

 백산의 말에 검천신룡 남궁천우가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왜 백산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제대로 펼칠 줄도 모르는 무공을 펼치고 난 후에

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몸도 똑바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수로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그의

 예상대로 검강을 시전하고 무방비로 서 있는 남궁무를 향해서 백산의 몸이

 움직여 가고 있었다.

 이어서 터지는 네 번의 타격음, 소살우의 예상대로 사지가 부러진 채 쓰러

지는 남궁무였다.

 "앞으로 개멋은 너의 식구들 앞에서나 부려, 이곳 네 집에서만."

 "잔인하구먼."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지우였다. 그도 남궁무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하

늘 높은 줄 모르는 녀석의 성격을. 그러나 가문을 이어야 했기에, 또한 남

궁세가의 가주에게는 약간의 거만함도 있어야 했기에 그냥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사지가 부러지는 수모로 돌아왔다.

 그냥 승리하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는데 무방비로 있는 상대의 사지를

부러뜨린 것이다.

 결코 비무를 하기 위해서 방문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시비를 걸

러 온 사람들이 하는 행동거지다.

 "아버님,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나서려 하는 남궁지우를 막아서는 인물, 놀랍게도 여자였다. 옥봉미검(玉

鳳美劍) 남궁미령(南宮美玲), 바로 가주의 딸이다.

 남궁세가 가솔들의 얼굴에 놀람의 표정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이곳저곳에

서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지금껏 단 한번도 무공을 펼쳐 보인 적

인 없어서 그녀가 정말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도 반신반의했던 인물들이 대

부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남궁무도 일초 상대가 안 된 인물과 비무를 하겠다고 나선 것

이다.

 "미령아!"

 "놔두시오, 조금 전 조무래기 놈보다 몇 배는 강하니까."

 "허억! 뭐라고?"

 남궁세가인들의 경악에 찬 신음소리였다. 저 말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 어떻게 남궁세가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가르친 남궁무보다 강하단 말인

가, 그것도 몇 배씩이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가주와도 실력이 비슷하다는 소리다. 이제 스물다섯의

 나이밖에 안 된 아녀자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버지인 남궁지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무공이라면 딱 한번 가르쳐

주었다. 그것도 다섯 살 때인가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딸에게 세가

에서 가장 익히기도 어렵고 까다롭다는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이라는

내공심법과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자신의 큰형인 남궁세우만이 익혔

던 그 검법을 가르쳐 주었다. 익히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어려운 책을 보면 외로움을 잊을까 해서 주

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비무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시 한번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용하니 차분한 얼굴, 언제나 변함없

는 그 얼굴이었다.

 "알았다."

 "가주!"

 남궁천우가 동생을 나무랐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남

궁지우의 표정은 담담했다. 가주 자리에 취임한 후에야 본 딸이다. 지금 그

의 나이 예순다섯 살, 마흔이 다 되어 얻었다. 단 하나 있는 딸이었는데 그

런 딸에게 가문의 일 때문에 단 한번도 아버지 노릇을 못했다. 죽은 마누라

도 가장 원망했던 부분이었지만 거의 몰락해 버린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얼

마나 노심초사했던가.

 다섯 살 때의 무공 이후로 단 한번도 부탁 같은 것을 하지 않았던 딸이 원

하는 것이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던 들어주고 싶었다.

 남궁미령이 천천히 백산 앞으로 걸어왔다.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

고 있었다.

 "석두야, 준비해라."

 "형님?"

 뜻밖에도 백산은 자신이 비무를 하지 않고 석두를 부른 것이다. 비무하기

위해서 걸어나오던 남궁미령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저는 공자님과 비무를 하고 싶은데요."

 "검에는 검이 어울리지요. 보시다시피 저는 맨손이라서… 그리고 낭자가

너무 멋진 나에게 반하면 맞아 죽기 때문에…."

 "훗!"

 남궁미령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무공을 익힌 후 처음 하는 비

무다. 겉모습은 편안해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무척 긴장하고 있던 그녀였다.

 초조한 그녀에게 던져진 백산의 황당한 한마디는 첫 비무에서 오는 중압감

을 해소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형님, 이거…."

 석두가 백산에게 내미는 것은 지금껏 들고 있던 광천뢰였다. 나머지 광견

조원도 여태까지 손에 광천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미령입니다."

 "석두라고 합니다."

 이 장 거리를 마주한 채 상호 간에 인사를 한 두 사람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감, 잘하쇼."

 갈태독에게 느닷없이 한마디를 던지고 휘적휘적하니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는 백산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할아버지."

 "저 두 녀석이 싸울 때 나오는 기세를 여기서 막으라는 소리다. 제 놈은

저쪽에서 막을 심산이고."

 갈태독의 말에 놀란 사람은 의문을 표시했던 소운이 아닌 남궁세가의 가솔

들이었다.

 하얀 수염의 중년인과 저 건들거리는 놈이 서 있는 곳의 거리는 이십여 장

, 두 사람의 기세가 그 정도까지 가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특

히 남궁미령을 알고 있는 그들은 더욱더 경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 저럴 수가…."

 그들도 보았다, 서로를 마주한 채 서 있는 두 사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엄청난 기운을. 특히 남궁미령의 아버지이자 세가의 가주인 남궁지우의 놀

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도저히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섯 살 때 슬쩍 주었던,

 그 뒤로 단 한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남궁미령도 내색하지 않았기에 익

히고 있으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무공이다.

 그런데 저 피어오르는 기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초극의 극고한 경

지에 이른 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닌가.

 이미 그녀는 자신의 경지에 육박해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문에 봉황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것도 다

름 아닌 내 딸인 것을….'

 비단 남궁지우의 탄식소리만이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가솔들의 동일한 생각이었다.

 검후가 될 수 있는 재목을 지금껏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 대협! 제가 익힌 검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가문의 검법인 창궁무

애검법이지요."

 남궁세가의 가솔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감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남궁세가의 가전 검법 중에 가장 난해하고 위력적인 검법. 오백 년 세가의

 역사상 두 사람만이 익혔고, 무공을 창안했던 조사를 제외하고는 신수천룡

 남궁세우가 최초였던 검법이다. 그런 검법을 익힌 이가 또 나타난 것이었

다.

 "창궁탄(蒼穹彈)!"

 남궁미령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녀의 검이 수십 개의

 검영(劍影)을 만들면서 석두를 향해 쇄도해 갔다.

 하늘을 담고 싶어 했던 무인의 마음인가, 푸른색 검영들의 현란한 춤사위

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자식의 하늘을 향한 절규였다.

 쾌검과 중검이 대표적인 남궁세가의 검법과는 상반되게도 창궁무애검법은

최고의 환검(幻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타의 환검과는 또 달랐다. 석두

를 향해서 달려드는 모든 검기에 살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환검이되 환검이 아닌 검법이 창궁무애검법이었다.

 "차앗! 검벽!"

 석두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면에 검기를 이용한 벽을 쌓아갔다

.

 수백 줄기의 검기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붉은 그물을 형성하고 다가오는

푸른색의 검기를 막아냈다.

 콰앙!

 두 개의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한 걸음씩 물러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석두는 창궁무애검법을 완벽하게 펼치는 남궁미령의 자질에 놀란 것이다.

자신은 남궁세우의 세세한 지도를 받아서 이만큼 익힌 것이 아니던가.

남궁미령 또한 석두의 검법에 감탄했다. 가문의 최고 검법인 창궁무애검법

을 너무나 쉽게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첫 격돌에서 절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서로의 능력을 시험해 본

것에 불과했다.

 "이제 제가 갑니다."

 무서운 속도로 남궁미령에게 다가간 석두가 그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검을 들고 할 수 있는 모든 동작을 이용해서 남궁

미령을 공격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검을 거두며 물러서고 있었다.

 가르치는 것이다. 비무 경험이 전혀 없이 초식으로만 검을 익힌 남궁미령

에게 실전 검무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덧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공격을 당하던 남궁미령의 옷이 몇 번이

고 땀에 젖었다 다시 말랐는지 모른다. 비록 결정적인 순간에 검을 멈추기

는 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까지 검에서 뿜어대는 살기는 그녀를 몇 번

이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비무를 포기하고자 했을 때 그녀의 귓가로 들려오

는 목소리.

 "검이란 사람을 베기 위한 도구일 뿐이네. 팔이 길어진 것이라 생각하면

그뿐인 것을… 초식이 무엇이더냐. 길어진 팔을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방법

이라.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초식을 구사하기 위해서 동작을 끊는 것은

 흐르는 물을 거스르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움직여라. 끊임없이 움직

여라. 휘둘러라, 보려하지 말고 보이는 곳을 향해서 길어진 팔을 휘둘러라.

 움직여라,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여라. 몸의 움직임에 진기도 같이

하게 하라."

 백산의 입에서 느닷없이 무학의 요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히 누구에게 들으라는 소리인지 혼잣말로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신검합일과 초식을 버리는 망초식의 경지를 말함이다. 신검합일이나 초식

을 버리는 망초식의 경지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끝없이 비무를 하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기를 잊어버리는 상태, 병

장기인지 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상태가 신검합일이라면, 그 팔이라

생각하고 있는 검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가는 것이 망초식

의 경지다.

 손이 저절로 상대의 허점을 찾아가는데 초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신체는 거대한 강이니 진기는 강을 따라 흐르는 강물이라. 강물은

억지로 길을 만들지 않는다. 길이 있으면 흐를 뿐이다. 일부러 길을 만들려

 하지 마라. 흐르는 강물을 막으려 하지도 말아라. 조그마한 세류라 할지라

도 그것이 흐르는 곳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니. 흐름을 막지 마라

.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그대로 두어라."

 백산의 말이 흥에 겨웠는지 아니면 두 사람의 비무에 흥이 겨웠는지 갈태

독의 입에서도 무공의 심득이 흘러나왔다. 백산이 꺼낸 적이 있었던 '물을

잡을 수 있느냐.'라는 화두에 대한 대답이었다.

 초식을 펼치기 위해서 몸속에 있는 내공을 속박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조그마한 진기라도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신체는 작은 소우주다. 우주의 질서는 스스

로 맞추어 나가는 것이지 외부에서 모종의 힘이 가해진다고 변화시킬 수 있

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상승으로 들어가는 요결이 남궁세가의 연무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남궁세가 내에서 그래도 고수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목마르게 갈구했던 상승으로 들어가는 요결,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오직 깨달아야만 한다던 그 경지를 간단한 말로써 듣

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놀람 속에 남궁미령의 움직임도 변하고 있었다. 지금껏 석두의 검

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그녀의 검이 점점 일정한 틀을 벗어나더니 석두의 공

격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조금씩 보이는 틈을 이용하여 공격

을 하는 여유마저도 보여주고 있었다.

 백산과 갈태독의 말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찾아내어 곧바로 실전에 적

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천재이고 기재였다.

 지금껏 남궁세가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천고의 기재를 모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지도해 주지 않았고 혼자서 익힌 검법이 이미 가주의 무

공에 육박하고 있었다.

 어디 이런 곳이 남궁세가뿐이랴. 여자라고 해서 무시하고 하인이라 해서

무시하여 그냥 묻혀버린 기재들이 강호 무림의 모든 문파 및 가문에 존재하

고 있으나 혈통이나 신분을 중요시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결코 발견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용비봉무(龍比鳳武).

 두 사람의 비무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용과 봉황이 서로 어우러지듯 서로의 검에서 솟아난 청색과 적색의 검강은

 연무장 공간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수천 번의 부딪침이 있었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정말 고마워요, 석 대협! 마지막 초식이란 말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

제 일초만 남았습니다."

 순간 남궁미령 주변의 대기가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현상은 석두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창궁무(蒼穹無)!"

 "창궁혈해천(蒼穹血海天)!"

 창궁무애검법의 삼초식인 창궁무와 그 검법을 더욱더 강하게 발전시킨 혈

우창궁검법의 이초 창궁혈해천, 두 개의 검이 허공을 날며 거세게 부딪쳐갔

다. 두 이기어검 경지의 격돌이었다.

 콰앙!

 가루로 부서져 내린다. 두 개의 검이 부딪치며 검끝부터 시작해서 모래처

럼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으음!"

 "미령아!"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나는 남궁미령을 부축하고 있는 남궁지우의 눈에 눈

물이 맺혔다. 어검술까지 구사하는 딸에 대한 감탄의 눈물이 아니었다. 얼

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어렵다는 비전검법을 극성까지 익

혔단 말인가. 자신도 검을 익혔기에 잘 알고 있다. 검법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딸인 남궁미령은 검을 익히고자 해서 익힌 것이 아니다.

 아버지인 자신의 외면 속에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고자 검법에만 매달렸

을 것이다, 할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그런 두 부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백산 일

행이었다. 소운과 광견조,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던 이들

에게는 부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야, 너희들은 다 어른이야 새끼들아, 돈이나 내놔!"

 "언제 우리가 애랬소? 더럽다, 더러워. 여기 있소."

 모두들 알고 있다, 저런 광경에 익숙하지 못한 자신들이었기에 그런 주의

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소살우가 한 말이란 것을. 그러나 부러운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석두야, 아직 한번 정도 힘쓸 여력 있지?"

 자신의 부모님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잠시 동안 정신이 나간 채 두 사람을

쳐다보는 석두를 툭 치며 하는 말이다.

 "저기 보이는 검은 색 건물 있잖냐, 날려버려 그리고 잊는 거다. 모두, 우

리는 뇌룡현을 떠나올 때 모두 버리고 왔다."

 '그래 모두 잊었지 않느냐, 석두야.'

 백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 속에 있던 석두가 내심으로 지르는 말

이었다. 자신의 수중에는 검도 없다. 그런데 저기 있는 검은 색 건물을 날

려버리란다. 백산이 또 한번의 심검의 경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귀혼곡에서 무의식중에 한번 펼쳤던 심검을, 이유는 묻지 않았다.

 형님이 이곳에 들린 이유가 저 건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너는 할 수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백산이 자주 쓰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석두였다.

 '이 한번으로 모든 것을 잊는 거다. 모두 잊는 거다. 사마기가 아닌 석두

일 뿐이다.'

 "이얍! 창궁혈애무(蒼穹血哀無)!"

 석두의 입에서 모든 한스러움을 토해내듯 서러운 외침이 안휘성의 밤하늘

에 울려 퍼졌다. 미련도, 원한도, 복수도 모든 감정의 잔재들을 이 한 수에

 날려버릴 듯한 외침이었다.

 자신의 딸인 남궁미령을 안고 있던 남궁지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도 느끼고 보았다. 거대한 기운이 연무장에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 기

운의 목적지가 바로 남궁세가의 금역인 만금뢰(萬禁牢)임을….

 그리고 저 석두라는 청년이 펼쳤던 검법, 너무나 눈에 익었다. 이미 초식

자체가 없어진 채로 펼쳐지고는 있었으나 그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 펼치던 검법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모든 남궁세가의 가솔들이 자신들의 검을 뽑아들며 살기어린 눈동자로 백

산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창궁혈애무'란 한마

디. 피 어린 가슴으로 창궁무를 부른다고 명명된 '창궁혈애무' 그 한마디가

 그들의 가슴속에 박힌 것이다.

 "남궁세우 백부님이 만드신 검법이에요."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석두와 비무를 했던 남궁미령이었다. 자신이 익히

고 있던 검법인데 아무리 변했다고는 하지만 왜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남궁세가의 연무장에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가문의 배덕자라고 낙인찍

힌 채 잊혀졌던 신수천룡 남궁세우의 검법이 돌아왔다. 오십 년 만에 형이

고 숙부였던 그의 검법이 더욱 강해져서 세가의 대문을 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 나온다 이거지?"

 쓰러지는 석두를 한쪽 팔로 부축하던 백산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리고 그

의 손에서 날아가는 검은 쇠 구슬 하나. 비무 전에 석두가 맡겨두었던 광천

뢰가 다시 만금뢰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콰앙!

 남궁세가의 지반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그 곳으로부터 육인의 인영들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온몸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맨 채 산발하고 있는 머리며,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들은 유형지의 죄수를 연상시키는 그런 몰골들이었다.

 "아버님!"

 "태상 가주님!"

 백여 명의 남궁세가 인물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전대 가주인 무적

제왕검(無敵帝王劍) 남궁일몽(南宮一夢)과 오대가신들이었다. 바로 오십 년

 전에 강호 무림을 지배했던 인물들. 그들이 낭패한 몰골로 나타났다.

 엄청난 기운이 자신들이 있던 만금뢰를 사라지게 했을 때도 그대로 참고

있었다. 그런데 광천뢰까지 던질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여기저기

타버린 옷하며 수염들, 온몸에 그을음 자국이 가득했다.

 "자네가 세우의 제자인가?"

 남궁일몽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배덕한 자식이 아니라, 자식

하나도 지켜주지 못한 부덕한 아버지였고 자식의 가슴에 검을 박아 천륜마

저 저버린 아비였다.

 그래서 만금뢰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으

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랬던 자식의 소식이 왔다. 오십 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돌아온 것이

다.

 큰아들을 배덕자라고 말하고 있는 후손들을 보고도 침묵했다. 가문을 되살

리기 위해 과거의 아픔을 잊고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다시는 자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제자였으면 남궁세가는 오늘 끝났소, 영감! 그 따위 쇠사슬로, 저따

위 건물로 자식을 구하지 못한 죄가 사해질 줄 알았소이까. 가문의 윗사람

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배덕자라고 칭해지고 있는 이따위를 위해서…."

 감정이 격해졌다. 정말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중원의 오지에 숨어서 평생

 쇠를 두드렸던가. 이따위 가문을 위해서 검법을 만들어 보냈던가.

 "그 양반은 말이요, 당신들 모두 쓰고 있는 성마저 쓰지 못하고 살았소.

평생 동안 대장장이로 살아가면서도 가문에 대한 죄스러움에, 가문을 몰락

시켰다는 책임 때문에 괴로워했소. 그런데 당신들은 뭐요. 번지르르한 얼굴

에 근심 걱정 하나 없는 표정들, 이것이 절치부심하는 가문의 모습이오? 오

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요?"

 그나마 백산에게 위안이 되었다면 장 노인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이가 있

었다는 것이다. 원해서 익혔든 모르고 익혔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문에 죄를 짓고 축출당하게 되면 보통은 그 사람의 무공도 사장되기 마

련이다. 다른 무공이 없다면 몰라도 누가 배덕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의 무공

을 익히려 하겠는가.

 썩었다고 생각한 가문에서도 장 노인을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래서 무공 요해를 설명했다.

 "닥치거라, 이놈! 우리 세가가 얼마나 절망 속에 살아왔는지 아느냐? 숨죽

인 오십 년의 세월이었다. 단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세가 전체가 기침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단 말이다. 그런 우리의 심정을 네놈이 어떻게 안단 말

이냐."

 둘째인 남궁천우의 한 서린 외침이었다. 강호를 웅비하고자 했던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검천신룡이란 자신의 별호가 휘날리려는 그 순간에 나

락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세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

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자신이 주장하여 형을 축출했다. 그런데 형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남궁천우의 절규에 찬 외침에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은 백산이 마차로

다가가서 그 속에 있던 검 한 자루와 책 한 권을 꺼내들고는 남궁일몽 앞으

로 던졌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당신들 가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 이 검은 장 노인의 가슴에 박혀있던 검이요, 책자는 보면 알 것이고. 전

에 당신들 가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가문의 후예를 만난 적이 있었지. 그

 가문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당신들의 말대로라면 배덕자라 칭했던 그

사람에 대해서 마두라고 하자 일초 지적도 안 되는 녀석이 도를 빼들고 덤

비더군, 불쌍한 그분을 모욕하지 말라며. 그런데 너희들은 뭔가, 그 분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정말이지 구역질

나는 집안이야, 너희들은. 이런 곳에서 숨쉬는 것도 더러워."

 거칠게 침을 뱉어낸 백산이 몸을 돌렸다.

 "살우야, 가자!"

 가문이란 말조차 생소한 백산은 알 수 없었다. 피를 나눈 형제를 버릴 만

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문이라

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마음대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우리 남궁세가가 그렇게 우습더냐?

"

 검천신룡 남궁천우, 그가 백산 일행을 가로막고 나섰다.

 "착각하고 있군, 늙은이. 장 노인을 생각해서 봐주는 거야. 저 영감에게

말했듯이 만일 너희들이 배덕자라고 했던 그분이 내 사부였다면, 그분의 눈

에서 피눈물을 쏟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 죽여버렸을 거야. 알아들어, 늙

은이? 이따위 쓰레기 같은 가문으로 나를 겁주려 하는가?"

 백산의 몸에서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 부숴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

로 참고 있는 그였다. 정말 엿 같은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막으면 다 죽는다. 장 노인의 부탁이고 뭐고 전부 죽여버릴 테니까

한번 막아봐라."

 살기를 풀풀 날리며 말을 마친 백산이 마차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 죽인다!"

 "천우야!"

 "형님!"

 남궁천우의 몸이 검과 일체가 되어 빛살 같은 속도로 백산을 덮쳐 갔다.

손자인 남궁무가 보여주었던 제왕무적검강이 펼쳐진 것이다.

 화가 난 것이다. 형까지 버려가면서 지키고자 했던 가문을 쓰레기라 했다.

 검에서 나온 검강이 정확하게 놈의 목을 쳐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실력도

 없는 놈이 입만 살아서 가문을 욕되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동생의 부름

은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가문을 우롱한 놈을 죽이고 싶었다.

 잘 살고 있던 가문에 남궁세우라는 돌을 던진 놈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카앙!

 "헉! 금강불괴!"

 남궁천우의 놀람에 찬 외침이었다. 목에 부딪친 검이 튕긴 것도 아닌 검강

이 튕겨져 나온 것이다.

 "커억!"

 어느새 다가온 백산이 남궁천우의 목을 틀어쥐었다. 정말 죽이기로 작정을

 했는지 백산이 뿜어내는 살기에 남궁천우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살기 어린 목소리로 조용하게 속삭였다.

 "늙은이, 당신이 형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은 그분의 일초도

감당 못해. 알고나 죽어!"

 "젊은이! 이 늙은이가 부탁하겠네, 살려주게."

 백산의 손에 힘이 가해지려는 순간 남궁일몽이 무릎을 꿇었다.

 절대적인 무위를 지녔고, 천하를 지배한 남궁세가의 가주였던 백이십의 노

인이 평생 동안 단 한번도 굽힌 적이 없었던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둘째 아들의 한을. 제대로 된 가문을 세우기 위해 모든

 관심과 사랑이 첫째에게만 쏟아지고 그 속에서 언제나 소외되어야 했던 둘

째가 아니었던가.

 능력이 없으면 모르되 형과 버금가는 기재로 평판이 나 있었다. 형의 그늘

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했지만 언제나 가문 내에서 이 인자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주 자리를 주려했을 때도 죽어버린 가문의 가주는 싫다며 셋째에

게 줘버릴 정도로 호승심도 강했다.

 남궁일몽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이 손에 쥐고 있던 남궁천우를 거칠게 던

져버렸다.

 "좋겠군, 나이 팔십이 넘었는데도 응석을 받아줄 부모도 있고… 가자!"

 "떠날 테냐?"

 가주인 남궁지우가 떠나는 백산 일행을 막연히 쳐다보고 있는 딸을 바라보

며 물었다. 아무리 무관심하게 살았지만 딸의 마음을 읽지 못할 정도는 아

니었다.

 자신의 딸이 저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집 밖으로 나

서지 않았던 그녀가 비상하려 하고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미령에게 자신의 검을 끌러주었다. 가주의 신

물인 제왕검(帝王劍)이 돌아왔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청풍검(淸風劍)은

더 이상 가주지검(家主之劍)이 아니다.

 "그 검은 그대로 가지고 있거라, 이 검을 가져가거라."

 백산이 던져주고 갔던 제왕검을 들고서 남궁일몽이 다가오며 하는 말이었

다.

 "한 가지만 명심해라, 그 검이 바로 세우의 가슴에 박혀있던 검이라는 것

을. 자식의 가슴에 검을 날려야만 했던 아비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남은 두 자식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

기도 했다. 비록 심장이 반대편에 있었지만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다. 그런데 그놈의 소식을 가져온 이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형님을 그렇게 했다고, 왜요…."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신도 기억하고 있다. 형님을 찾겠다고 나가셨

던 아버지가 빈 검집만 가지고 돌아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가주직만 넘기

고 만금뢰를 만들었다. 그 이후로 단 한번도 나오시지 않았다.

 손자들이 태어나고 증손자가 태어나도, 며느리가 죽었을 때도, 형님을 배

덕자로 가문에서 축출했을 때도, 봉문(封門)이 풀렸을 때도, 만금뢰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랬던 양반이 이제 와서 형님의 가슴에 제왕검을 던졌노라고, 그래서 만

금뢰에 들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형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울고 있었다. 회한의 눈물이었다.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던 남궁천우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풍검을 다오!"

 "형님!"

 남궁지우는 그 말의 의미를 즉각 알아차렸다. 열다섯 밖에 안 된 자신에게

 버리듯 주었던 가주 직위를 다시 가져간다는 소리다. 자신에게는 버거운

자리였다. 모자라는 능력으로 이만큼 꾸려온 것도 무관심한 척 옆에서 조언

했던 형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언제나 가주직을 맡으라고 종용했으나 쓸쓸한 웃음으로 얼버무린 형님이었

다. 이십 대의 나이에도 하지 않았던 세가의 가주를 팔십이 다된 나이에 하

고자 하는 것이었다.

 욕심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재빨리 청풍검을 빼어든 남궁지우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가주인 남궁지우다. 지금부터 가주 이양식을 거행하겠다."

 정상적인 절차는 아니었지만 남궁세가 전 가솔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검천

신룡 남궁천우가 가주직을 승계했다.

 "본인은 이십삼 대 가주인 남궁천우다!"

 남궁천우의 말을 들은 가솔들이 이상한 듯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이십삼 대가 아니라 이십이 대 가주인 것이다. 그런데 가주 취

임 첫 연설에서부터 실수를 하고 있었다.

 남궁세가 가솔들이 웅성거리건 말건 남궁천우의 취임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

 "내가 이십삼 대 가주라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줄 알고 있다. 나는 가주

직권으로 이십일 대 가주로 한 분을 모시고자 한다. 바로 신수신룡 남궁세

우 님이시다. 신수신룡 남궁세우를 이십일 대 가주로 모심과 동시에 제 삼

대 가종(家宗)으로 선포한다."

 엄청난 발언이었다. 가문의 배덕자로 축출했던 남궁세우에게 가주직을 수

여함을 물론이고 가종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종(家宗).

 남궁세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주에게 수여하는 영광의 호칭, 지

난 오백 년 역사 속에 단 두 명밖에 없었던 호칭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가솔들을 향해서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일성

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남궁세가의 모든 신분을 명년 이 시간까지 철폐한다!

가주 직위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도 전 가솔에게 개방

하노라."

 충격이었다. 남궁세가 가솔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특권이 사라지고 있음이다.

 그러나 남궁 성씨를 가진 이들의 얼굴색이 변하든 말든 남궁천우의 일성은

 계속되었다.

 "배워라! 그리고 익혀라! 남궁이란 성씨마저 버려라! 앞으로 정확하게 일

년 후 이 자리에서 가솔 전체의 비무를 실시하겠다. 그때의 승자가 가주직

을 비롯한 세가의 가신이 될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니 개혁이고 혁신이었다. 남궁세가라고 해서

남궁씨만 있던가. 오히려 남궁씨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 세가이다.

 수없이 많은 무공 중에서도 직계만 익히는 무공이 있고, 방계만 익히는 무

공이 있고, 다른 성씨의 무사들이 익히는 무공이 따로 있다. 그러한 연유

때문에 최고의 검객은 언제나 남궁씨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직계에서만.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모든 가솔들에게 기회가 생

긴 것이다,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어떤 것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어쩌면 남궁씨로만 이루어낸 가문의 존폐가 달린 일일 진대도 남궁천우의

표정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일 년이란 세월 동안 무공을 익히면 얼마나 익히겠는가. 그러나 그동안 소

외되었던 많은 세가인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형님! 단 한번도 형님을 이겨보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이길 것입니다.

가문을 오십 년 전으로 되돌리는 것을 두고 형님에게 도전하겠습니다. 세가

는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특권의식에 젖어있던 저들이 분발하게 될 테니

까요.'

 남궁천우의 생각은 정확했다. 신분 세습이란 관습 때문에 남궁씨를 가진

이들은 너무 나태한 생활을 해왔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떨어지는 자리들, 자연히 태만해질 수밖에 없고 남

궁세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위에서 호령하는 위치에 있

다가 남 밑에서 생활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남궁씨

가 아닌 다른 성씨가 상관이라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무공연마를 열심히 할 사람들이 지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

는 저들일 것이다.

 남궁세가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잃었던 이빨과 발톱을 찾기 위해서 변

화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갈 테냐?"

 "형님 때문에 지금껏 주지 못했던 사랑이나 듬뿍 줘야죠."

 "그럼 이 검도 가지고 가거라. 아까 그 형님의 제자라는 녀석에게 주어라.

"

 자신 스스로 지룡검(地龍劍)이라 이름을 지었다. 더 이상 비상할 곳을 잃

어버린 실망감에 지었던 이름이었다.

 무천신룡 남궁지우와 그의 딸 남궁미령, 그리고 남궁천우의 애검인 지룡검

, 이인 일검(二人一劍)이 남궁세가를 떠났다.

 "문을 닫아라! 다시 일 년간 봉문이다."

 타의에 의한 봉문이 아닌 자의에 의한 봉문이다. 숨기 위한 봉문이 아닌

비상하기 위한 봉문인 것이다.

 남궁세가에서 금 십억 냥이 들어있는 전낭이 발견된 것은 다음날이었다.

세우라는 이름과 함께….

*     *     *

 "다 죽일 것같이 하더니 돈은 왜 놓고 왔소?"

 남궁세가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한적한 야산, 백산 일행이 빙 둘러앉아

서 커다란 돼지 두 마리를 굽고 있었다.

 "장 노인의 본가인데 어쩌냐?"

 씁쓸했다. 환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세가란 원래 그런 곳이다. 오백 년의 세월 동안 한 가문을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때로는 혈육도 단죄하고 자신마저도 단죄하면서 지켜가

는 곳이 세가다."

 백산의 서운해하는 표정이 안 되어 보였던지 옆에 있던 갈태독이 입을 열

었다.

 가문의 성씨를 내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그도 익히

경험했던 사실이다. 자신의 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하루에

도 수십 개의 세가가 생겨나고 또 그만큼의 수가 사라진다.

 무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세상사인 것이다.

 "너도 할 만큼 했으니 되었다. 전대가주라는 사람도 이제 더 이상 숨을 곳

도 없지 않느냐."

 만금뢰란 건물을 없애버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제는 그도 어쩔 수 없

이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백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노인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살우야, 애들과 이쪽으로 와 봐라."

 "네, 형님!"

 광견조 열두 명이 백산 앞에 일렬로 섰다.

 "살우, 앞으로 네 이름은 소살우다. 뱁새 너는 목인영이다. 섯다, 너는 장

대근이다. 모사, 너는 전영이다. 송곳, 너는 추기영이다… 찍새, 너는 해자

인이다."

 광견조원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주면서 백산이 하는 소리였다. 양자

강에서 조천영과 했던 말, 광견조원들의 이름을 지어왔던 것이다.

 "형님! 이게 뭐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이름이 쓰인 종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소살우가

 백산을 쳐다보았고, 다른 광견조원들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멀뚱하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희들 이름이다. 앞으로 찍새니, 송곳이니, 걸레니 하는 것은 별명이고

지금 들고 있는 것이 진짜 이름이다."

 일순 광견조원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름이라니,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뱁새, 섯다, 모사가 아닌 석자 이름인 것이다.

 "하! 이름이래… 우리 이름… 너 제대로 들었냐? 너는 뭐래?"

 종이 한 장씩 주면서 그냥 불러준 것을 기억할 리가 없다. 그러나 글을 모

르니 읽을 수도 없다. 자신들의 손에 들고 있는 종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병신들 너들은 모르지? 나는 안다. 자식들아 봐라 소, 살, 우."

 소살우 자신이야 같은 이름이었으므로 기억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자랑스럽게 한자 한자 짚어가며 소살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거

꾸로 읽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돈 들어가게 이런 것은 왜 했소? 술이나 한 병 더 사오지…."

 볼멘소리로 지껄이고 있으나 목소리에 묻어나온 물기는 어쩔 수 없었는가,

 말투가 떨리고 있었다.

 "다시 빼! 이름은 알고 넣어야 될 것 아냐?"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아랫도리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

고 있는 광견조를 향해서 백산이 소리쳤다.

 "석두! 다시 한번씩 가르쳐 줘. 내일 아침까지 자기 이름 못 쓰는 놈 있으

면 광천뢰 하나씩 추가다."

 석두에게 나머지 일을 일임한 백산이 이번에는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

했고, 이윽고 그의 품속에서 수십 장의 종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혈전신 철목승이 적힌 이름하며 천선비도를 모조한 것까지. 그 중에서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환해진 얼굴로 두 장의 종이를 집어 든 것이었다.

 "이게 다 뭐냐?"

 백산이 꺼내놓은 종이 뭉치를 보며 갈태독이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돈버는 도구였소, 이것은 주루에 팔아먹던 것이고 이건 그 천선비도고.

물때가 지나서 이제는 못 파니 버려야지 뭐."

 고금오천무가 있다던 천선비동의 위치가 그려진 천선비도 다섯 장과 철목

승의 친필이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철목승의 친필은 몇 번이고 팔

려고 했으나 믿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더 이상 필요가 없었고, 이미

 항산에서 비동이 발견되었다고 소문이 돌고 있으니 비도 모사한 것도 더

이상 팔 수가 없었다.

 "허!"

 갈태독과 석숭이 내지른 탄성 소리였다. 이 정도면 완전히 괴물이다. 철목

승에게 부탁해서 글씨를 써달라고 했던 저의가 밝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천선비도를 팔아먹기 위해서 모사를 하다니. 아마도 벌써 팔아먹었을

거라는 것이 석숭과 갈태독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누님! 어머니하고 누님하고 같은 성씨로 해도 괜찮은 거야? 둘이 친척이

되면 곤란하잖아."

 "괜찮네요, 오라버니. 조씨도 여러 개가 있네요. 아버님 어머님 이름은 더

 좋은 걸로 지었다니까요?"

 이름 지을 때 같이 다녀온 모양이었다. 백산의 아버지 이름은 백건(白乾),

 어머님 이름은 조자령(曺慈玲)으로 지어왔던 것이다.

 "낄낄낄!"

 그런 백산을 쳐다보며 광견조원들이 웃고 있었다. 아마 자신들과 똑 같은

놈이라는 동료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희들도 장가가거든 부인더러 결혼 예물로 지어오라고 해라, 지금 욕심

내지 말고. 이게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간 것인데…."

 "알았수다."

 광견조원들은 신이 났다. 짐승이나 물건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으로 바뀌자

 그것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돼지가 다 타서 재가 되고 있는데도 이름

 석자 쓰기 위해서 누구 하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백산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남궁세가를 떠나온 남궁지우와 남궁미령 두 부녀였다. 세가에서의 일도 있

고 해서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저들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름자 하나 없이 커온 사람들의 한이 오죽했으랴. 그 힘이 무공을 익히고

자 하는 집념으로 승화된 것 같았다. 저곳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들

보다 약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오십 년 봉문은 이들이 보기에는 한도 아니었다. 단순하게 문을

닫고 쉬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떨

고 있는 자신들이 우습게 보일 만도 했다.

 "그러다 날 새겠소, 이쪽으로 오시오."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모두들 알고 있었는지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주도 같이 나오셨소?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닌 것 같소만…."

 백염의 노인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기도였다. 자신의 아버

지인 남궁일몽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가에서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젊은이와 같이 심득을 알려주기에 조금 강한 고수로만 알았다. 그랬던 것

이 바로 옆에서 보니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앉으시오, 어차피 일행이 될 것 같으니 내가 소개를 해주리다."

 갈태독이 백산을 비롯해서 석숭, 냉추렴 등 일행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남

궁지우의 얼굴은 갈수록 놀라운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 있었던 것이다. 개방의 인물도 천마맹의 인물도 빙혼마녀, 그리고 대부

호인 석숭까지. 기묘한 일행이었다. 어찌 되었던 자신들도 일행으로 합류하

게 되었다. 이제는 세가까지 포함된 집단이 된 것이다.

 잠시 한숨을 돌린 후 남궁세가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백산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그리고 석두에게 지룡검을 주면서 승천하는 용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했다.

 '장 할아버지 일이 제대로 풀린 것 같군요. 잘되었어요.'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부와 장 노인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영감,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바빠질 것 같은데요?"

 "그러기에 사고 좀 작작 치지 이놈아."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러우. 혹시 백년 전에 영감의 원수가 복수한

다고 나타난 것 같은데 맞소?"

 "나에게 복수해야 될 놈은 다 죽었어, 이놈아!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

 "글쎄요, 꽤 많은데?"

 두 사람의 전음 속에 밤은 계속 깊어가고, 다음날까지 자신의 이름을 다

써야하는 광견조원들은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석두 또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했기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덕분에 광견조원의 얼굴과 이름을 가장 먼저 기억한 사람은 석두가 되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