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84)

제2장 전운(戰雲)

 "크윽!"

 선실에 도착하자마자 참고 있었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숨어있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당당한 모습으로 이곳까지 왔다.

 "퉤!"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자 피와 함께 여러 개의 작은 덩어리들이 쏟아

진다.

 이빨.

 천무맹의 삼 공자인 정천무룡 백무천의 이가 부러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

었다.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천무맹의 삼 공자가 된 후 단 한번도 타인에게 옷

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백무천의 이름이,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진 채 바닥

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백-산! 이 버러지 같은 놈!"

 너무나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승부에서는 분명히 이겼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지만 버러지 놈을 처리하지 못할 정

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놈이 졌다고 선언을 했고 겉보기에 분명 자신이 이

겼지만 스스로가 이겼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놈에게 안

면을 강타당했고 그 결과물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버러지처럼 야비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정상적인 상

태일 때는 계집의 치마폭에 숨어 있다가 몸이 이상해지자 무인(武人)도 아

닌 놈이 정식 비무를 신청해 왔다.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면 놈의 내공이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몸놀림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했지만 자신의 안면을 친 세 번의 공격에 그가 입은 피

해는 이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만일 내공의 고수였다면 자신은 지금 이곳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간

오한이 드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백

무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놈! 죽인다. 반드시… 울컥!"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심화가 더욱 커지고 결국 피를 토하고 있었다. 조

금 전에 뱉어낸 피와 이빨은 버러지 놈에 의해서 만들어진 흔적이었지만 지

금의 피는 자신이 울화에 못 이겨서 남긴 흔적이었다.

 단 한번도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만상투인루에서 부

상당했던 것은 자신의 자만심에서 그리된 것이었지 결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자꾸만 꿈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만해라 사제, 진정하고 몸부터 추슬러라."

 비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던 운학자가 백무천의 선실에서 나오는 고함소

리에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핏속에 섞여서 바닥에 흩어져있는

 여러 개의 하얀 이들을 보았다.

 안쓰러웠다.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던 자신의 사제가 처음으로 좌절을

겪고 있었다.

 자신이 인정하는 인물과 비무에서 패했다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

었을 것이고 더욱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빙혼마녀에게 철저하게 패한 것은

물론 평소에 버러지라 인간 취급도 안 했던 놈에게는 이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가 보았을 때도 이긴 비무가 아니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이긴 것으로

되었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을 뿐이었다.

 "비도가 가리키는 곳을 알아냈다."

 역시 삶의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인가, 패배와 굴욕감으로 힘들어하

는 사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최고의 방법을 쓰고 있었다. 지금 백

무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욱 강한 무공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금오천무에 해당하는 무공은 최대한 익

혀봐야 서로 동수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공을 익혀서 그 두 가지를 합쳐

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천검무극류를 익혀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조천영과의 비무에서 나타났다

.

 '다른 것에 몰두하다 보면 이번 일은 잊겠지.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

은 빨리 버려야 할 것이야….'

 운학자의 처방은 금방 먹혀들었다.

 "어디입니까, 사형?"

 백무천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다 죽어가던 얼굴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

다. 고금오천무가 묻힌 곳을 찾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의 표정이 아니었다.

반드시 찾아서 익혀야 한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항산(恒山)이다."

 "산서성(山西省)이란 말입니까? 먼 길이 되겠군요…."

 천검무극류가 묻혀있는 곳의 위치가 밝혀졌다. 이제 그곳으로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익힐 것이다. 반드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빙혼마녀 그리고 버러지 놈, 기다려라.'

 절로 마음이 급해지고 조급증이 일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행운

이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빨리 익혀서 이 치욕을 갚

아주고 싶었다.

 "새벽에 출발하도록 하지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는지 백무천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운학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의연한 모습에 대한

대견함이다. 아무리 분해도 일에는 선후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이 오늘의 사제가 있게 한 것이다. 사문의 지원도 거의 없이,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다른 모든 이들을 제치고 맹주 후보 일 순위가 되

게 한 원동력이다.

 작은 일보다는 큰일을 우선하는 결단력과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은 나이를 먹었다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맹은 어찌할 거냐?"

 "지금은 알릴 필요가 없지요. 도착 후에 그때 가서 알려도 무방할 것입니

다. 그전에 비도가 이곳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확인은 시켜주어야지요."

 "복안이라도 있는 게냐?"

 "이곳에서 비도 쟁탈전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비도의 주인은 버려지고

요."

 백산에게 비도가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자신은 항산으로 떠날 예정이다.

자신이 비동(秘洞)을 찾을 때까지 비도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하고 그래야

맹의 이목을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방법이고 최고가 되는 방법이었다.

 이익은 먼저 취해야지 타인과 나눌 것이 없다. 취하고 난 찌꺼기만 가져다

주어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감격해하기 마련이다.

 '네놈도 편하게 살 수 없게 해주마.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살아있어라.

팔이 없어져도 좋고 다리가 없어져도 좋다. 나를 확인할 수 있는 눈만 가지

고 있어라… 제발 부탁이다, 버러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으나 가슴속을 풀어주는 시원함보다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고통만 밀려오고 있었다.

 백산을 부숴버리기 위한 백무천의 음모, 그러나 그것은 음모가 아닌 사실

이었으니, 지금 백산의 수중에는 아직도 팔지 못한 비도가 다섯 장이나 남

아있었던 것이다.

 "맹에도 그렇게 알리십시오,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연매에게는 제가 별도

로 알리겠습니다."

*     *     *

 다음날 새벽 두 마리의 전서구가 동정호를 가로질러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두 마리의 전서구가 도착한 곳, 정도 무림의 요람이

자 정의를 집행하는 핵(核)인 천무맹(天武盟)이었다.

 백 년 전, 거세게 일어났던 천마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파일방이 힘을 모

아 창설했던 정도의 하늘(天), 오백 년 전 혈겁천(血劫天)을 멸망시켰던 천

검(天劍) 담사월(潭士月)의 유지를 기린다는 명분을 가지고, 그의 후예인

검제(劍帝) 담운천(潭雲天)을 초대 맹주로 추대하여 어언 백년의 세월 동안

 정도의 기둥이 되어온 곳이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칭해지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의 동쪽

태실봉(太室峰), 그 중턱에 수백의 고루거각들이 천하를 굽어보며 오연한

자세로 서 있다.

 천무맹의 맹주 거처인 천무전, 그리고 원로들의 거처인 장생원(長生院) 등

 일전(一展), 일원(一院), 오각(五閣)의 전체 상주 인원 만오천여 명, 명실

상부한 강호 최대의 방파가 천무맹이다.

 그러나 천무맹의 역사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초대맹주인 검제 담운천이 있을 때만 해도 창설초기였고 천마맹이란 거대

한 적이 있었기에 구파의 협조가 비교적 수월하여 잘 운영이 되었다.

 그러나 담운천의 이십 년 치세가 끝나고 그 다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마땅한 맹주감이 없자 구파일방이 돌아가면서 천무맹을 장악했던 것이다.

 십일 대 맹주였던 소림의 각인대사, 저 유명한 쌍천불의 제자인 그가 맹주

로 있을 때까지는 천무맹이라는 거대 단체가 구파의 하위단체로 있으면서

구파일방의 이름으로 하기에 곤란한 일의 처리를 도맡아 했다.

 그러나 각인대사 집권 시에 있었던 원나라의 멸망과 오천맹의 사건 등 자

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커다란 사건들이 생겨나자 그의 집권이 길어졌고

그것에 대해서 구파일방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강호무림의 정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각인대사의 집권이 장

기화되면서 소림의 위세가 너무 커져버린 까닭이었다.

 이에 다급함을 느낀 나머지 문파에서 맹주로 있던 각인대사를 축출하게 된

다. 이십 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던 각인대사 시대의 몰락이었다.

 다시 십여 년을 공동으로 천무맹을 관리해 오던 구파일방은 한계점을 느끼

게 되고 자신들의 명령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허수아비 맹주를 찾았다.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으면서도 각 문파의 정식제자가 아닌 자(者), 그들의

 선택은 속가제자였다. 속가제자들 중에서 인물을 고르다 선택된 사람이 화

산파의 속가제자였던 검신(劍神) 화진악(華辰岳)이었다.

 강호무림에서 명성도 얻고 있는 인물이었고, 또한 검신 화진악보다 더 위

대한 화산파가 있었기에 그 정도 인물이라면 구파일방이 다루기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속가제자(俗家弟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무림 거대문파의 자금줄이다.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무인들이 돈을 벌 리가 없고 그들도 사람인지라 먹는

 것은 일반인과 같으니 문파를 꾸려나가는데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

다. 그러한 돈줄들이 바로 속가제자인 것이다.

 평상시에는 자파(自派)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유사시에는 전력(戰力)이 될

 수 있으니 문파 내에 있는 단순한 무공 몇 가지 가르쳐준 것치고는 상당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속가제자라며 대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속내를 들여

다보면 본산에 있는 제자들에 비해서 많은 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또한 속가제자들이었다.

 언제나 본파 제자들에 비해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속가제자, 그것을 잘 알

고 있던 화진악은 자신이 맹주가 되자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이 구파일

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 작금(昨今)에 와서는 구파일방을 내려

다보는 최대 방파가 되었고, 강호인들마저도 정도의 횃불로 구파일방 위에

천무맹을 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내성 깊숙한 곳에 있는 맹주의 처소이며 회의장인 천무전(天武展)을 중심

으로 하여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천각(十天閣), 무천각(武天閣), 제마각(

制魔閣), 신룡각(新龍閣) 등 사각(四閣)이 위치하고, 그 사각을 중심으로

방사형태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천혜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천밀각(天密閣).

 오각 중 유일하게 내성이 아닌 외성에 위치하고 있는 곳, 두 마리의 전서

구가 도착한 장소였다. 천무맹의 최고 정보기관이며 대외비를 다루는 곳으

로 강호전역에 활동하고 있는 밀정의 수만 해도 삼천이 넘는 최대 인원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정보 수집 능력에 있어서도 구파일방 중 최대 방파인 개방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뛰어난 곳이고, 정보를 다루는 기관이면 최고 권력기관임이 분명한

데도 외성의 한적한 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사층으로 되어있는 칙칙한 건물의 최상층, 두 마리의 전서구 중 한

마리가 향한 곳이었다.

 흑단처럼 윤기 있는 머리, 약간 튀어나온 이마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검은

 눈동자는 많은 서책을 탐독한 인물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깊이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세상을 오시할 것 같은 오뚝한 콧날과 앵두를 연상시

킬 만큼 붉고 작은 입술은 육감적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고집스러운 면이 있

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이 흑의미녀가 방금 도착한 전

서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제천신뇌(制天神腦) 제갈수연(諸葛秀蓮).

 여인의 몸으로 대 천무맹의 군사가 될 만큼 뛰어난 오성과 냉철한 판단력

을 가지고 있는 제갈세가의 현가주가 바로 그녀다.

 과거 오천맹의 일원이었던 가문의 전력 때문에 맹 내의 최고 실세가 될 수

 있는 천밀각의 각주임에도 불구하고 외성의 이 한적한 곳에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오천맹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천무맹의 군사를 감시하는 사람도 있는지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던 제갈수

연이 전서구의 목에서 무엇인가를 살짝 빼냈다.

 '득(得), 행(行), 혼(混), 애(愛).'

 네 글자, 백무천의 전서였다.

 비도를 얻었고 비밀도 풀었으니 맹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려달라는 말이

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한다는 말 애(愛), 제갈수연에게 따로 한 말이었

다.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그 글자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군사님, 한 시진 후에 천무전으로 드시라는 전갈입니다."

 "알았다."

 '또 회의인가? 아무런 결론도 없는 탁상공론을 하기 위해서 또 부른다 이

거지?'

 일층으로 내려온 제갈수연이 회의 자료를 찾는지 이것저것 서류를 정리하

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경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위사가 제갈수연을 제

지하고 나섰다. 그런 그들을 흘깃 쳐다본 그녀는 조용히 품속에서 명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통과!"

 벌써 삼 년째,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하련만 언제나 굴욕감이 앞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가문의 존립을 위한 선택이

었다고 하지만 이런 모욕까지 참아가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남궁세가와

팽가가 부러웠다. 그래서 차기 맹주가 될 가능성이 높은 백무천에게 더 끌

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한번이 더 남은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명패를 그대로 쥔 채 나직한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맹주의 집무실인 천무전의 검문을 지나서 그녀가 도착한 곳은 천무맹의 대

소사가 결정되는 회의장인 천명실(天命室)이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명령은 하늘의 진언이라 해서 천명실이라 했다던가. 맹주

를 포함한 오대 각주만이 참석할 수 있는 곳이다.

 "어서 오시오, 제갈 군사."

 맹주인 검신 화진악,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시작하여 그곳에서 배웠던 태을

검법(太乙劍法)을 바탕으로 무극태을검법(無極太乙法)을 창안, 나이 삼십오

 세 때 검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맹주이자 제마각주인 화진악을 중심으로 부맹주이며 무천각주인 낙양 설가

장 장주 뇌음천자(雷音天子) 설검후(雪劍厚), 십천각주인 개방의 파면신개,

 신룡각주인 백의천룡(白衣天龍) 화인걸, 네 명이 제갈수연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동안 평안들 하셨습니까?"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제갈수연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든 분들이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진악이 주위를 돌아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고하시오, 군사."

 "네, 일단 강호 정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강호정세는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 상태입니다. 일말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바로 폭발해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

십 년간의 평화 속에 양대 세력이 너무나 비대해졌고 유일한 불만 해소책이

었던 만상투인루마저 사라진 작금의 상황은 양 맹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해

도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방안

은…."

 "됐소, 군사. 대처방안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고 군사는 현재 상황만 간단

히 보고하면 되는 것이오."

 십천각주인 개방의 파면신개 악만금이었다. 언제나 제갈수연의 의견은 무

시되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제갈수연의 판단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할 뿐이었다. 파면신개의

말에 다른 각주들도 당연하다는 듯 인정하고 있는 모양새 또한 이상했다.

 "만상투인루 파괴에 대한 단서는 찾았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뇌산의 한 중턱에서 귀조

수 연동립과 그의 심복이었던 냉면살마 종천수가 화살을 맞고 숨져있는 것

만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천무맹의 정보통이란 천밀각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요."

 있을 수 없는 질책이었다. 같은 각주의 신분이고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

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웃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지금 이곳은 공적인

 자리이다. 공대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제갈수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

었다.

 "십천각에서 따로 알아낸 것이라도 있소이까?"

 맹주 화진악이 끼어들면서 다소 거칠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 십천각에서는 만상투인루가 폭파되고 난 후 그곳 뇌룡현을 떠난 무

리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했소. 그런데 이상한 인물이 한 명 발견되었소. 철

혈투에서 광천마승 요불을 물리치고 투신이 되었던 다쇠불알 백산이란 자가

 사라진 것이오. 아, 여기서 다쇠불알이란 그 사람의 별호요. 원래는 운수

대통 다쇠불알인데 너무 길어서 다쇠불알만 말한 것이오…."

 "십천각주! 그자가 만상투인루를 무너뜨렸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소."

 제갈수연은 전쟁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파면신개는 만상투인루를

 멸망시킨 인물에 대해서만 논하자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무천각주며 부맹주

인 설검후가 말을 잘랐다.

 파면신개.

 얼굴에 있는 화상에 의한 흉터 때문에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해

서 생긴 별호이다. 얼굴 때문에 성정이 괴팍하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적의를 보이는 그의 성격 때문에 천무맹 내에서

도 그와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현재 구파일방 중 가장 강한 문파가 개방이었고, 모든 정보를 쥐고

 있기에 그들의 입김이 가장 셌다. 그리고 이년 전에 자신이 자청하여 십천

각주를 맡겠다하여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들어보시오, 무천각주! 왜 말을 자르는 게요."

 흥분하여 벌게진 얼굴로 파면신개가 소리를 질렀다.

 부맹주인 뇌음천자 설검후.

 원래 부맹주는 이인(二人) 체제로 되어있었다. 전통적으로 구파일방에서

두 명이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라는 직책은 상징적으로 묶어두고 모든 실무는 부맹주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처리하는 식으로 천무맹을 이끌어 왔었다. 그러던 것이 삼 년 전 제갈

수연이 군사로 등장하면서 바뀌어 버렸다.

 원활한 지휘체계를 세운다는 명목 하에 부맹주직을 하나로 줄였고, 그 하

나의 부맹주직을 놓고 소림과 무당이 서로 양보하고 있는 사이에 무천각주

인 뇌음천자 설검후에게 전격적으로 낙점이 된 것이다.

 부맹주직이 싫어서 양보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

에 형식상 거절했던 것인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갈수연이 추대한 인

물이 설검후였다.

 그래서 천무맹 주도권의 상당 부분이 구파일방에서 맹주에게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파일방의 입장에서는 설검후가 못마땅한 것은 당연했다. 그도 부맹주직

을 거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거절도 없이 수락했던 것이다.

 설검후를 노려보던 파면신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뇌룡현이 근거지였던 그자가 악양에 나타났고, 전

무림의 관심이 쏠려있는 천선비도를 가지고 있다는 거요. 그리고 그들의 일

행 중에…."

 "지금은 그 뇌룡현의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

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마맹과의 전쟁여부입니다."

 이번에는 제갈수연이 파면신개의 말을 바로 잘랐다. 강호인들은 관심을 가

지되 맹에서는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 백무천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지

금은 천선비도보다 천마맹과의 전쟁이 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문을 외성으로 몰아내었던 구파일방, 그리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

길을 보내고 있는 저들, 그래서 그녀가 천밀각주로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권력의 실세로 있던 부맹주직에서 구파일방을 제외시키는 것

이었다.

 형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그들의 허점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끌어내려 버렸

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복수였다.

 "맞습니다. 천선비도 건은 무룡대주인 정천무룡이 잘 하고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마불가침협정이 깨진 지금 천마맹과

의 일전 여부입니다. 군사께서는 계속해 보십시오."

 가재는 게 편인가. 자신을 부맹주로 만들어준 제갈수연을 설검후가 계속해

서 옹호하고 나섰다.

 "천마맹에 있는 저희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권력다툼에서 주전파인

 검마 요대철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신진고수들

도 그를 지지하고 있고요. 결국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선제

공격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싸우느냐 아니면 그들이 공격하는 것을

방어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천밀각과 개방의 차이점이다. 개방의 인물들에 의해서는

 이런 고급정보가 쉽게 나올 수가 없다. 수없이 많은 정보를 조합하여 고급

정보를 만들어 내지만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시간을 다투는 때

에는 신속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강호 최고의 정보통인 개방이라는 거대 단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였다.

 "저희 의견은 선제공격입니다.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 일단 시작되

면 긴 시간과 많은 물량이 들어가는 소모전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고 맹의

사기를 위해서도 선제공격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신룡각(新龍閣).

 젊은 소장 무인들의 집합체. 신구(新舊)의 조화를 위해 젊은 무인들만의

세계를 별도로 만들어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다는 명목으로 창설

된 단체이며 젊은 혈기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는 불평불만을 자체적으로 해

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갖도록 한 곳이다.

 현재 각주는 백의천룡 화인걸로 맹주의 아들이다.

 "저희 무천각도 신룡각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결국 맹주의 제마각과 구파일방의 십천각을 제외한 세 곳이 선제공격에 찬

성하고 나섰다. 하지만 화인걸은 맹주의 입장에 있기에 중립을 유지하고 있

을 뿐 그도 선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전쟁을 반대하는 곳은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 한 곳 뿐이라는

것이다.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하여 미리 그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방법. 그것이 자

신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 있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할지 안 할지 그런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위험

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제거되어야 할 세력인 것이다.

 지금껏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역을 지켜오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해서 세력을 유지해왔던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십천각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리는 선제공격에 반대하오이다. 소위 정의를 수호한다는 천무맹이 먼저

 도발한다면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

울 것이외다."

 구파일방의 수백 년 생존방식을 포기하는 발언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갈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천무맹이 구파일방의 영향력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

직은 구파일방이 없으면 전력(戰力)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파면신개가 십천각의 의견을 모을

때 반전을 주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나머지 문파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무맹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전

쟁 참여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득이 별로 없다.

 전쟁에 승리하게 되더라도 모든 영광은 천무맹이 차지할 것이고 자신들은

상처뿐인 영광만 얻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지금도 거의 모든 속가

제자들이 천무맹으로 떠났는데 천마맹과 전쟁에서마저 주도권을 쥐지 못하

면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임이 불 보듯 뻔한 이치가 아니던가.

 결국 자신들의 필요성이 인식되고 강호인들이 간절히 원할 때 나서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각각의 의견을 정리해서

다시 뵙도록 하지요."

 이미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화진악이 폐회를 선언하였다.

어차피 뭔가 경각심을 일깨워 줄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구파일방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회의를 할 때마다 자네에게 미안하군! 자네가 이해를 하도록 하게."

 각주들이 물러가자 화진악이 제갈수연을 향해 구파일방의 홀대에 대한 위

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를 내성으로 옮겨주고 싶어도 아직은 저들이 필요하네."

 구파일방 때문에 제갈수연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소리였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임의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였다.

 "맹주님의 마음은 간직하겠습니다."

 제갈수연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외성에 있더라도 검문만은 맹주 직

권으로 없애줄 수는 있다. 그러나 맹주는 그리하지 않았다. 구파일방 때문

이라는 핑계를 달고는 있지만 그도 제갈수연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무천과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비밀유

지를 위해서 극도로 신경을 썼지만 맹주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군사의 말대로라면 현 상황에서는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은데…."

 다시 공식적인 입장으로 돌아왔는지 자네에서 군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알고도 묻는 것이다. 아무리 천무맹의 독자적인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구

파일방의 도움 없이는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파면신개가 저렇게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저들이 원하는 것은 부맹주 자리의 복귀겠지요. 삼 년 전으로의 회

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자신들은 제집에 앉아서 맹의 무사들

만 희생시키려 할 것입니다. 극약처방을 써야죠."

 "극약처방이라…."

 화진악이 자신의 코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군사가 생각한 곳은 어디인가?"

 화진악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이제 육십 대, 평소에는 털털한 노인네

 같은 그런 맹주였지만 천무맹의 맹주로 집권한 세월이 이십 년이다. 제갈

수연의 극약처방이란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제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방법은 사로화(死路花) 침서안 -

길에 피어있는 꽃을 꺾고, 서안을 침략한다-이것이 먹히지 않을 경우 두 번

째로 침(侵) 동화(冬花)-겨울 꽃을 침략한다-입니다."

 "그럼 이용할 세력은?"

 자신들의 적을 치는 것이 아니라 구파일방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을 벌이

는 것이다. 결국 아군을 쳐서 그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야한다는 뜻이다. 그

런 일을 하는데 천무맹의 세력을 이용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제갈수연이 제시한 방법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지 그곳을 칠 세력을 묻

고 있는 것이다.

 "맹주님께 따로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제갈수연의 말에 화진악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

던 자신의 비밀세력, 아들인 화인걸도 모르고 있는 것을 제갈수연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

었다.

 "그것도 알고 있었나? 역시 천밀각주구먼… 군사에게도 있는 것으로 아는

데?"

 이번에는 제갈수연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도 가문을 위해서 별도의 세력을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리 강대한 세력은 아니지만 과거 자신의 가문과 같이 오천맹의 한 축을 담

당했던 가문의 잔여세력이다.

 구가대(求家隊).

 황보세가의 후예들이다. 삼십 년 전, 의문의 멸문을 당했던 그들의 후예를

 후일 가문의 재건이란 약속과 함께 제갈세가의 세력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자네가 꽃(花)을 맡게. 내가 서산(西山)을 맡지. 그리고 오늘 우리의 밀

담은 없었던 이야기네."

 화진악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파일방에 눌려서 아무런 힘

을 쓰지도 못할 것 같은 화진악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

정세는 물론 수하들의 비밀까지도….

 물러나는 제갈수연의 등이 축축하니 젖어들었다. 화진악이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눈빛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비밀이 누설되면 죽음을 면키 어려

울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왕왕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니… 두 사람이 떠나고 난

천명실에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솟아나는 인물이 있었다. 동안의 노인

, 한 점의 사기도 보이지 않는 맑디맑은 정광, 결코 사악해 보이지 않는 그

런 인상이었다.

 '서산(西山)이라… 한쪽에 걸려있는 중원 전도를 가만히 응시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꺼지듯 사라졌다. 이 노인은 또 누구인가? 천무맹

의 최심처인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가볍게 드나드는 인물은. 천명실의 실

내에는 노인이 떠나면서 중얼거린 말만 맴돌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다네…."

*     *     *

 "우씨, 어째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배 위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 바로 옆에 놓으며 투덜거리고

있는 털옷을 입은 인물, 백산이었다.

 벌써 상당한 공격을 받았는지 그의 옆에는 수북하니 화살이 쌓여있었다.

 백무천의 이를 뽑은 후 악양에서 하루를 쉰 일행은 동정호에서 배 한 척을

 통째로 빌려 양자강을 따라 안휘성(安徽省)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철혈투의 투신이었던 다쇠불알 백산에게 천

선비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문에 놀란 일행은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서 도망치듯 악양을 빠져 나왔는

데 양자강 한복판에서 수적 떼를 만나고 말았다.

 그들은 일단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인지 가타부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화

살을 퍼붓고 있었다.

 "석 대인, 저 자식들은 뭐요?"

 일행 중 그래도 강호지식이 가장 많은 석숭을 향해서 백산이 물었다.

 자신도 황당한 짓을 많이 하기야 했지만 황당한 경우를 당해보기는 또 처

음 아닌가. 이유라도 알아야 대처를 할 터인데 무작정 화살만 날려대고 있

으니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은 장강수로연맹 중 이곳 동정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네 개의 집단이

네."

 동정호로 유입되는 네 개 하천에서 수적질을 하고 있던 농수채, 상강채,

원수채, 자수채의 수적들이 모두 여덟 척의 배를 끌고 와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설상가상이라 하는 것인가! 그들의 뒤쪽으로는 비도를 노

리는 또 다른 무인들의 배가 퇴로마저 막고 추격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을 가자해도 갈 곳이 없다.

 "정말 천선비도가 너에게 있는 게냐?"

 갈태독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요 며칠간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동정호 구경이란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악양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리고 독령곡에서의 수구해 사건, 석숭과 이야기할 때 들었지만 수구해의

 죽음에는 분명 이놈이 관련되어 있는데 자신이 따지고 들자 모르는 일이라

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다그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는 천선비도를 가졌다며 모든 무인들이 쫓아오고 있는 상황을 접하고 있다.

 다시 백산에게 무엇인가 물으려는 순간 내리던 화살비가 갑자기 뚝 그쳤다

.

 "난 농수채의 채주인 야저 강진구(姜鎭久)라 한다. 수중에 있는 비도를 내

놓는다면 생명은 보장하겠다."

 붉은 색의 깃발을 달고 있는 배에서 자신의 머리통보다 더 큰 도끼를 들고

 있는 사십 대의 거구가 이쪽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멧돼지, 너 돈 많아?"

 또다시 나오는 백산의 선문답. 두 손을 입에 대고 나발모양을 만들고는 목

에 힘줄이 돋아나도록 소리치는 것이었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면 절대 저런 짓을 하질 않는다. 내공만 실어서 보내

면 가볍게 이야기해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목 아프게

힘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백산은 마치 무공이 없다는 듯이 소리를 지

르고 있었다. 습관이다. 워낙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신경하

다 보니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때의 모습들이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돈 많으면 사라고. 내 싸게 줄게."

 백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농수채를 비롯한 모든 배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이놈아 우리는 수적이야! 수적보고 물건을 사라는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디 있냐?"

 "그건 맞는 말이네. 도둑놈에게 물건을 사라고 하면 살 리가 없지? 그럼

그때부터는 도둑놈이 아닐 테니까."

 제 딴에는 수적의 말에 일리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할 수 없지, 뚫고 가는 수밖에.'

 "석두 활!"

 활을 잡은 백산이 그동안 자신의 옆에 쌓아두었던 화살을 집어 들고 시위

에 먹이더니 야저 강진구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이! 멧돼지, 왼쪽 어깨야."

 당겼던 시위를 놓자 빛살 같은 속도로 화살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야저 강진구가 자신의 도끼를 이용하여 화살을 그대

로 쳐냈다.

아직도 자신들을 수적으로 보고 있는 놈들이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천무맹이나 천마맹이 어쩔 수 없는 수적이 있던가.

 분명 강호 초출이 어쩌다 비도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무

공의 고수인 자신에게 활을 쏘다니… 미친놈이 아닌가. 그의 비웃음대로 화

살은 그대로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채주님, 저기 저…."

 화살을 쳐내고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사색이

된 부하들의 얼굴이 보였다.

 "허억!"

 두 대의 화살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왼쪽 귀를

향해서 또 하나는 자신의 하초를 향해서.

 기겁을 한 강진구의 몸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으윽!"

 왼쪽 어깨에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고통. 놈의 말대로 자신의 어깨에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버렸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화살은 근처에 오지도 않고 일

장 앞에서 힘없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겨냥하지도 않았던 화

살에 몸을 날려 일부러 맞은 꼴이 되어 버렸다.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화살을 향해서 뛰어드

는 멍청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별호가 어울려!"

 다시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여왔다. 야저란 별호, 돼지란 말이다. 즉 멍

청한 돼지가 딱 맞는 별호라며 놀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잠! 잠인(潛人)을 출병시켜라."

 인상이 잔뜩 구겨진 강진구가 수하를 향해서 거칠게 외쳤다.

 잠인(潛人), 수적질을 하는 장강수로연맹의 가장 필수적인 병력. 적의 배

를 무력화시키는 수공의 달인들이다.

 "석두, 애들 집합시켜!"

 농수채의 배에서 수십여 명의 검은 인영들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본

백산이 광견조를 집합시켰다.

 "마차를 메고 왔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느냐?"

 "옛!"

 "지금부터 물고기 잡는 놀이다, 들어가라!"

 아무런 의문도 필요 없다. 그들도 놈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싸워야 할 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석두와 광견조원들이 웃옷을 벗어 한쪽으로 던져 놓더니 그대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애들 수공은 할 줄 아느냐?"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갈태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속으

로 뛰어들고 있는 석두와 광견조 일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수공은 무슨… 헤엄만 칠 줄 알면 되지."

 "허…."

 갈태독과 석숭의 입에서 동시에 어이없다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공이란 것이 하루이틀에 익힐 수 있는 것이던가. 육지에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 할지라도 물속에서는 평범한 어부보다 못한 경우가 허다

하다.

 그런데 저들은 물속에서 밥도 먹을 수 있는 물귀신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

을 수공이라곤 일초 반식도 모르는 애들을 보고 상대하라며 보내버린 상식

을 초월한 백산의 행동에 기차 찼던 것이다.

 갈태독의 예상대로 물 속에 들어간 석두와 광견조는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적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겨울의 차가운 물에 의해서 굳어진 몸이 말을 듣

지 않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빨랐다. 온몸에 착 달라붙는 수어피(水魚皮)라는 특수한 옷을 입고 있는

농수채의 인물들은 마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들의 무기인 호

수구(護手鉤)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호수구는 끌어당기는 무기인 구에 초승달 모양의 월아(月牙)를 부착하고

손을 보호하는 장치를 부착한 무기이다.

 즉 구의 끌어당기는 묘용과 월아의 날카로움, 그리고 구의 반대편도 창끝

처럼 뾰쪽하게 되어있다. 주로 적의 무기를 낚아채거나 의복이나 신체를 잡

아당겨 움직이게 할 수 없게끔 하여 적을 살상하는 무기이다.

 무기 전체를 공격에 사용할 수 있어 공격력이나 방어력도 뛰어났다. 더구

나 지금 석두와 광견조가 있는 곳은 물속, 움직임도 쉽지 않은 판에 사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호수구를 이용해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공격

을 해대고 있으니 석두 일행의 고난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강기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이 정도의 상처로 끝나고 있는

 것이지 조금만 무공이 약했더라면 전부 몰살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석두

와 광견조의 고난은 몸의 움직임이 둔해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물속이라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지혈되지 않아

석두와 광견조의 시야마저 가로막고 있었다.

 "허억!"

 내심으로 지른 비명소리다. 머리 쪽으로 다가오는 섬뜩한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뒤로 젖힌 석두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과 함께 벌어진 입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또다시 검은 놈 네 명이 다가오

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결과인지 떨어졌던 체온이 올라가고 몸이 풀어지

자 움직임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놈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자를 향해서 힘껏 주먹을 내질

렀다.

 광풍신권이라 명명했던 백보신권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으나 너무

 느렸다. 지상에서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소림의 절세 신공이 물 속에

서는 너무나 약했다.

 물기둥이 형성되어 나아가는 모습에 전방에 있던 놈들이 가볍게 피하고 있

는 것이다.

 스악!

 다시 석두의 몸에 상처가 생기며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사방을 향해서 백

보신권을 난사하며 대항해 보았으나 놈들은 너무 가볍게 피할 뿐이다.

 "땅 바닥을 단단하다고 생각해라. 너무 단단해서 너희들의 힘이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그 안쪽을 생각해라. 그 안쪽에만 힘을 넣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단한 벽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벽을 통과해서 진력을 쏘아낸다고 생각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해라."

 마차를 메고 올 때 백산이 한 말이었다.

 "그럼 벽 뒤로 어떻게 너희들의 힘을 보낼 수 있느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가는 것이다. 마음이 가면 힘이 가는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백산의 말을 생각하고 있던 석두의 행동이 기민해지고 있었다.

 '그래 저놈들과 나 사이에 있는 이 물은 벽이다. 이 벽을 넘어 저놈들을

격살해야 한다.'

 석두의 손이 부드럽게 앞으로 내밀어지고 일장 저편에서 붉은 핏물이 사방

으로 확 번지며 수로채 인물 한 명이 얼굴 가득 피를 쏟아낸 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랬다. 유권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올 때 마차를 메고

오지 않았던가. 어느 사이 백산이 요구했던 발자국이 남지 않은 경지, 그

경지에 올라 있었음에도 이곳이 물속이라는 것과 적과 자신의 거리가 멀었

기에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의 급작스런 공격에 흠칫 놀란 잠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물살을 헤치며

 석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방법을 터득한 석두에게는 그들의

 공격이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유권 중에 최고라는 용왕유권이 물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용왕유권인가, 분노한 용왕이 화를 내듯이 사방에서 터지는 강기. 물의 벽

을 넘어 흑의인의 몸에서 붉은빛을 쏟아내며 터지고 있었다.

 석두의 춤사위가 벌어졌다. 어깨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잠인의 무기를

피하며 오른발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상대가 있었던 곳이 붉게 물들며 검은

시체가 물 위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오직 검만을 사용하던 석두가 물 속에서 박투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도 오

구에게 박투술을 배웠기에 일휘나 백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다.

 용왕유권을 터득한 석두에게 물 속은 바깥보다 더욱 자유로웠다.

 몸을 회전시키거나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누운 상태

에서 회전을 하며 사방으로 용왕유권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손과 양발에서 전부 붉은 색의 강기가 쏟아져 나와 물의 벽을 넘나들었

다. 석두의 사지가 움직인 곳의 일장밖에는 언제나 검은 죽음이 떠올랐다.

 이미 유권을 터득한 석두는 비교적 편안하게 상대를 격살하고 있는 반면에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는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몸은 터득

하고 있었는데 아직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택한 방법이 삼 인이 한 조가 되어 삼각을 만들며 등을 방어하면서

상대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런 개자식들….'

 소살우의 입매가 사정없이 위로 치올라갔다.

 너무 순식간에 공격을 하고 멀어지는 놈들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풍신권을 이용해서 난사를 해보았지만 자신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이는

강기를 자신들보다 수배 이상 빠른 저들이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안 돼!'

 그의 눈에 찍새가 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수구 세 개가 찍새의 몸에 박

혀들었던 것이다.

 '죽여버린다, 개새끼들….'

 입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헤엄쳐 나갔

다. 온몸에서 붉은 혈광이 피어나며 소살우의 주변이 붉게 물들고 손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혈광이 움직일 때마다 호수구가 튕겨져 나갔다.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 상대를 죽이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자 드디어 놈들의

얼굴이 뭉개지며 물위로 떠올라가는 것이었다.

 적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반드시 없애버리겠다는 살심이 물의 벽을 넘어

적을 격살하고 있는 것이었다.

 찍새가 당한 것을 본 광견조원들에게 이미 자신의 생명이란 없었다. 열두

명 전부가 붉은 혈광에 휩싸인 채 사방으로 유영하며 적을 향해 손과 발을

휘둘러댔다.

 그들의 손속은 잔인했다.

 자신들의 손과 발에 의해 발현된 유권에 의해서 이미 절명한 잠인들의 머

리를 다시 박살내버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

지도 몰랐다.

 꽉 다문 입이었지만 입 꼬리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것이 물속에서도 웃

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살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광견조의 광기에 놀란 잠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머리마저 수어피

로 감싸고 있어 그들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갈 수도 없게 되었다. 광견조원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함은 물론이고 물에서 움직이는 방법까지 스스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인 일조, 물 속에서의 움직임에 아직도 미숙한 그들이었기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손과 발을 마주치며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격

살하고 있었다.

 노리는 곳은 정확하게 머리 쪽, 하체를 먼저 공격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머리를 공격해서 박살을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소살우의 짝은 모사였다. 지금도 소살우와 모사는 두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잠인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정권이 앞으로 뻗어나가

고 모사가 머리를 숙이자 바로 뒤에서 공격해오던 잠인의 머리가 박살이 났

다.

 고개를 숙인 모사가 더 깊이 잠수를 하며 소살우의 다리 아래로 빠져나가

서 또 한 명의 잠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수중 이곳저곳에 잠인들의 찢겨진 얼굴조각들이 흩어져 유영하고 붉은 물

감을 풀어놓은 듯 사방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광견조의 모습도 붉은색, 잠인들의 몸에서 흐르는 것도 붉은 색, 양자강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저기…."

 강진구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맨 처음 시체가 떠오를 때만 해도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놈들은 천선비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자신의 부하들이 적을 죽이고 적을 죽이고 그 결과물이 떠오른다고 생각했

었다. 죽은 시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배 위에 있던 농수채인물들

의 놀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물 속에서는 귀신도 잡을 수 있다던 장강수로연맹의 잠인의 시체가 떠오른

 것이다.

 처음엔 한두 명의 희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의 얼굴색이 해쓱하게 변해버렸다.

 마치 독(毒)이 풀어진 해조에서 붕어떼가 떠오르듯 그렇게 잠인들의 시체

가 떠올랐다 잠시 후 하나씩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완전히 깨져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무수한 시체들이었다.

 삽시간에 그들 배 주변이 잠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석두와 광견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물보다 더 진한 혈광이 이곳저곳에서 터지

는 광경뿐이었다.

 "다른 배에 연락을 해라, 전부 죽여버리라고."

 수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강진구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외침이 터져 나오고,

 농수채의 배에서 붉은색의 깃발 두 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 후, 다른 배들로부터 조금 전의 잠인들과 같은 복장을 한 인물들이

무수히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자존심의 동물인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계속해서 시도를 하곤 한다.

 지금 장강수로연맹의 채주들이 그런 꼴이었다. 농수채 잠인 오십 명의 시

체를 보았으면 현실을 인정하고 물러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하들

을 사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용왕유권이구나?"

 "광풍유권이오."

 갈태독과 백산의 대화 내용이다. 배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갈태독과 석

숭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헤엄치는 것만 알고 있던 석두와 광견조원들

이 수공의 달인이라는 잠인들을 상대로 버틴 것은 물론이고 상대를 완전히

격살하여 전부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차를 들고 오면서 배웠던 것이 강기만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용

왕유권, 그 전설의 무공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했던 백산의 말, 그것이 바로 용왕유권의 핵

심이었다.

 또다시 생명의 위협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만들고 그 속에서 전설의 무공을

 습득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무공 습득, 무공을 습득해

야만 살 수 있기에 용왕유권이란 천고의 절예를 터득할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갈태독이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많은 인명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로채 채주들의 무지함과 광견조의 잔인함이 답답

했던 것이다. 광견조원들이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쓴다고 하지

만 수로채의 채주라는 자들의 행사가 너무 어이가 없음이다.

 견디다 못한 갈태독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삼십 장 이상 거리를 단숨에

날아간 그가 달려드는 농수채의 부하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강진구의 목을

 틀어쥐었다.

 "부하들을 물려라! 빨리."

 "웃기는 소리, 우리 수로연맹에는 후퇴란 없다. 죽여라!"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 있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놈아! 너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야. 네놈 부하들이 다 죽는단 말

이다."

 갈태독이 강진구에게 살기를 흘려내며 고함을 질렀다. 화가 났음이다. 자

신의 생명은 귀중하게 여기는 놈들이 왜 부하들의 생명은 하찮은 벌레 취급

을 하는가.

 죽어가는 저들이 무슨 신념이 있겠는가. 가족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오직

도둑질을 하기 위해 나섰다가 수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하찮은 욕심을 위해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대장이

란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대장인 이유가 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들이 다 죽으면 자신도 더 이상 대장

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 것인지.

 죽음과 같은 공포였다. 초극고수인 갈태독이 화를 내자 그의 몸에서 엄청

난 살기가 발산되었고, 그 살기에 강진구의 하체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주

체할 수 없는 공포에 선 채로 오줌을 지리고 있었는데도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 봐라!"

 갈태독이 강진구의 목을 잡은 채 물 쪽으로 돌렸다. 시체, 시체, 목 없는

시체들, 또다시 물에 들어갔던 다른 수채의 잠인들이 무더기로 떠오르고 있

었다.

 더 이상의 대항 의지를 상실했는지 남아있던 잠인들이 배로 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 개 수채의 인물들도, 백산 일행을 뒤쫓

던 인물들도, 잔인한 살겁의 현장에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잠인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탐욕이 만들어낸 결

과치곤 너무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없는 강물은 자신의 몸 색깔이 붉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

정의 변화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장강수로연맹의 최정예인 잠인 백여 명의 사망, 중원을 밟은 석두와 광견

조가 처음으로 벌인 살육이었고, 시작이었다.

*     *     *

 흑선(黑船).

 온통 검은색 일색인 배, 그 배에 대한 첫 느낌은 크다는 것이다.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다른 배들에 비해 두 배 이상이나 큰, 거의 백 척 길이의 배

였다.

 과거 남쪽 먼 곳의 신의 나라라고 불리던 동영까지 출병한 막강 수군을 보

유했던 원나라, 그 원나라의 수군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함대가 있었으니

흑룡무적함대(黑龍無敵艦隊)라 불렀다.

 그 함대의 상징인 검은 용머리가 자신이 섬기던 나라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과거의 권력을 그리워하는 듯, 위엄에 찬 눈빛으로 전방을 굽

어보고, 그 용두 아래로는 마치 흑룡의 꼬리인 양 거대한 쇠기둥이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모든 배를 찢어버릴 듯한 살기를 머금고 앞을 노려보고 있

다.

 선미(船尾)고 갑판이고 할 것 없이 이곳저곳을 감싸고 있는 검은 철갑은

중원 바다가 좁다며 질타했던 흑룡무적함대의 위용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했고,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세 개의 돛은 속도 면에 있어서도 결코 녹녹하

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세 개의 돛대 중 가장 높은 곳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 하나.

 바로 장강수로연맹의 총채주인 사자혈륜(獅子血輪) 적인수(赤仁洙)가 타고

 있는 장강의 검은 용, 흑룡호를 나타내는 흑룡기였다.

 "뭐라고?"

 흑룡호의 최상층,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십여 척의 배들이 모두 내려다보

이는 곳에서 사자갈기 같은 수염을 가진 오십 대의 인물이 부리부리한 눈을

 치뜨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적인수(赤仁洙).

 외모적 특징인 수염과 두 개의 혈륜(血輪) 때문에 사자혈륜(獅子血輪)이라

 불리는 자.

 녹림(綠林)보다 더 뭉치기 어렵다는 열여덟 개의 수적단체를 삼십이란 젊

은 나이에 단신으로 통합, 장강수로연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강호

의 어떤 세력도 넘볼 수 없게 한 물의 제왕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사자수

염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동정호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네 개의 수채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이다.

 "상대는?"

 거대 조직의 수장답게 금방 평정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천무맹

이나 천마맹도 비켜가는 자신들이 아닌가. 그런 자신들에게 칼을 겨눈 조직

이 과연 어디란 말인가.

 "그것이… 저…."

 군사인 사뇌(邪腦) 석정(錫丁).

 천무맹의 제천신뇌 제갈수연이나 천마맹의 광뇌 궁유에 버금간다는 인물로

 두 맹(盟)에서도 이들을 어쩌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사람 때문이라고

한다.

 사뇌 석정이 군사의 신분을 잊고 쩔쩔매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두 사람 말고 또 있었다. 투명하니 맑은 목소리, 적인수 뒤에 있는 주렴

속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맹주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석정의 입에서 맹주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맹

의 총채주라 알려진 적인수 위에 맹주라 불리는 상관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소린가?"

 석정의 보고에 놀란 적인수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동정사채의 잠인 백여

명의 전사와 네 명의 채주들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소리였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이천도 아니고 강호의 유수문파도 아

닌, 소속도 분명하지 않은 이십 명 내외의 인물들에게 당했다고 하고 있다.

 육전에서 그랬다면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 연맹의 정예라고 알려진 잠

인 백여 명이 물속에서 당했다고 한다. 이것은 맹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

어버릴 수 있는 큰 사건인 것이다.

 무림의 거대세력들이 배가 없어서 자신들을 도모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

던가. 아니다, 연맹에서 보유하고 있는 잠인들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일반무인 수준밖에 안 되지만 물속에서는 천하제일이라는 그들

, 바로 장강수로연맹의 기둥인 것이다.

 "총채주! 일단 배를 그쪽으로 움직이세요. 눈으로 확인을 해보아야지요."

 주렴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도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리고 군사는 강호에 새롭게 나타난 세력이나 인물들에 대해서 집중적으

로 조사하세요."

 "네! 맹주님!"

 잠시 후 흑선에서 거대한 고함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전고(戰鼓)를 울려라!"

 전투의 비상시에만 울리는 전고가 흑룡호를 호위하고 있던 십여 척의 배를

 향해 울려 퍼졌다.

 "전속항진이다! 노를 풀어라!"

 둥! 둥! 둥둥둥둥둥!

 급격히 빨라지는 북소리와 함께 거대한 흑선이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고,

주변에 있던 호위선 십여 척이 무서운 속도로 뒤를 따랐다.

 '도대체 누구냐, 누가 감히 우리 연맹에 대항한단 말인가.'

 적인수의 중얼거림이었다.

*     *     *

 "모두 죽겠다는 말인가?"

 갈태독이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도 어깨에 화살이 박혀있는 야저 강진구와

 나머지 삼 개 수채의 채주들이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고, 그들의 뒤

편으로는 네 개 수채의 전 병력으로 보이는 열여섯 척의 배들이 일렬로 장

사진(長蛇陣)을 펼친 채 백산 일행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채주께서 뵙고 싶어하십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들을 다 죽

이고 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이들 네 사람도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이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를. 일류고수라고 하는 자신들이 다 덤벼도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엄청

난 고수임을. 그러나 죽음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상부

의 명령이다.

 대항하지 말고 막으라고만 했다.

 저 노인이 손을 쓰게 되면 그대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명령이 그랬으니까

.

 장강수로연맹이 강해진 이유가 드러나고 있었다. 조직보다 자신의 한 목숨

을 더 중요시했던 수적들이 상부의 명령을 목숨 걸고 이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

 감탄의 웃음이었다. 일개 수적 집단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체계화되어

있고 조직적이었다. 백년 전에도 녹림이 있었고 수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도둑이었고 수적일 뿐 결코 무인이 될 수 없었다.

 명예와 자존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보다 강하다고 인정되면 동료가

아무리 많이 죽고 치욕을 당해도 그냥 물러간다. 그리고 그날의 운 없음을

탓하며 위안을 삼고 만다.

 그래서 광견조의 살육에도 잠시 방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의 녹림이나 수적 집단과 달랐다.

 '어떤 인물이 이들에게 무인의 혼을 심어주었나….'

 더 이상 수적 집단이 아니었다. 강호 무림의 당당한 무인 집단이었던 것이

다.

 그리고 이자들에게 무저항을 지시한 조직의 수뇌.

 극악한 살인마가 아니라면 반항하지 않는 적을 차마 죽이지 못한다. 그것

이 무림의 법칙 중의 하나이고 무인의 명예인 것이다. 그것을 노리고 이들

에게 무저항이라는 모험을 강행하게 한 것이고, 그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

고 있다. 이들을 다 죽이기 전에는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

 '이 녀석이 성질 안 부리려나 모르겠네.'

 그들의 배에서 물러나면서도 내심 걱정이 앞서는 갈태독이었다.

 백산이 이들을 치고 가겠다고 하면 자신으로서는 말릴 수 없는 일이다. 어

찌 되었든 일행의 대장은 백산이었고, 자신은 손님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백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광견조원의 상처가 생각보다 심했기 때문이다. 처음 접한 수중전투에 자신

의 실력발휘도 못하고 많은 상처를 입은 광견조였다. 그래서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그들 중 전직이 소매치기였던 찍새라는 녀석의 상처가 가장 심했다. 최고

의 의원인 갈태독이 치료하여 고비는 넘겼지만 한 달 이상은 정양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백산이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곧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먹구름이 잔뜩 끼었는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서성

이고 있는 백산을 향해서 조천영이 무엇인가를 받쳐 들고 다가오면서 하는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찍새의 부상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하루 종일 갑판 위를 서성이고 있는 백산이었다.

 소살우와 모사에 이어서 이번에는 찍새다.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강해져야 한다는 욕심 하나로 개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채 똑같은 경지를

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부쩍 들기 시작했다. 자신만

의 욕심으로 광견조를 사지로 몰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갑판 위를 서성였던 것이다.

 "아니에요. 지금껏 저들은 백랑의 가르침을 잘 소화해 왔어요. 강호에 어

느 누가 소림의 백보신권과 전설의 용왕유권을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가

르치고 배울 수 있겠어요. 훌륭한 자질의 제자와 뛰어난 사부가 있었기 때

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찍새도 다시 일어설 때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갈 할아버지가 그랬으니 맞을 거예요."

 그동안 백산을 겪어 오면서 조천영이 파악한 백산의 본 모습은 깨지기 쉬

운 유리 같다는 것이다.

 무공에 있어서는 강호 무림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지만 정신

상태는 초겨울의 살얼음 같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바로 녹아 없어질 것 같

은 살얼음. 그래서 자신을 더욱더 숨기고 감추고 있는 것이다.

 조천영이 가만히 백산을 안았다.

 "그렇겠지?"

 언제나 이랬다. 그녀만 옆에 있으면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처럼 포근해

진다. 언제 고민하고 걱정했었는가 싶게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별로 간섭도 없고 말도 없지만 그녀만 옆에 있어 준다면 세상

의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모두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느새 조천영이라는 여인이 백산의 정신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고,

복수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그에게 삶의 의미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찍새가 뭐예요? 이번에 안휘성(安徽省)에 도착하면 작명소에 들러

서 도련님들 이름 하나씩 지어줘야겠어요."

 조천영에게서 대모의 기질이 나오고 있었다.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한

조직의 소궁주였던 그녀의 진가가 서서히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맞아. 녀석들 이름이라도 좀 지어줘야지. 살우, 모사, 뱁새, 섯다,

송곳, 칼날, 찍새… 이게 뭐야? 근데 작명소에 가면 돈 주고 지어야 되는

거잖아. 열두 개나 지으려면 돈이 꽤 들 텐데… 아! 그럼 되겠다. 이왕 짓

는 김에 내 이름도 하나 짓지 뭐. 내 이름은 덤으로 지어달라고 해야지."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바꾸는 법이 어디 있어요?"

 백산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조천영이 누나 같은 어투로 소리를 팩 질렀

다.

 "나? 이름 같은 거 없어. 백산이란 것은 눈 덮인 산에서 최고의 호랑이를

잡으라며 아버지가 그냥 지어주신 거야."

 조천영이 놀라운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럼 아버님 함자는요?"

 그러고 보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되시는 분의 성함도 모르고 있었다. 상처

뿐인 과거였기에 해준 이야기 말고는 더 이상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처도 보듬어줄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냥 아버지고 어머니지 이름이 어디 있어? 어머니는 백

산댁, 아버지는 마을에 있을 때는 산이 아버지, 나중에는 추랑객으로, 그러

고 보니 이름이 아니었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자신은 백산이었고 아버지는 추

랑객, 어머니는 언제나 백산댁이었다.

 하기야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름이란 사치일지도 모른다.

기억해주는 사람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름 석자가 무슨 필요가 있으

랴. 어렸을 때 개똥이라 불렸으면 개똥이가 이름이고, 얼굴에 점이 있으면

점보로 충분한 것이지 않던가.

 "내 이름 말고 아버지 어머니 이름이나 지을까? 두 개는 덤으로 안 되겠지

?"

 부모님의 함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인 백산을 쳐다보는 조천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름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섯다나 모사라는 이름처럼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식에게도 알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자를 남긴다는데 그 석자 이름이 없는 이들은 인간

이 아니란 말인가!

 더욱더 서글픈 것은 이 사람이나 광견조원들 모두는 자신들의 이름이 없다

는 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산을 안고 있는 조천영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천영

의 이런 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돈타령을 하고 있는 백산이었다.

 "그럼 전부 열네 개인데 얼마나 달라고 하려나?"

 남자로서는 자격미달이다. 여자를 꼬시려고 식어빠진 만두를 들고 고독의

바다 어쩌고저쩌고 했을 때부터 이미 알아보았다. 그래도 그런 모습이 더

좋아 보였다.

 저 얼굴에 심각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비도 판 돈과 석 대인에게 맡겨둔 돈을 언제 다 쓸 거예요?"

 조천영이 조용한 음성으로 백산의 귀에다 속삭였다. 자신에게는 달랑(?)

십억 냥 주고는-그것도 엄청난 금액이지만-그것의 다섯 배가 넘는 돈을 꼽

쳐 둔 남편을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허거덕!

 백산의 몸에서 잔 떨림이 일고 있는 것이 조천영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

 "다 알고 있었어? 알았다고, 돈 좀 쓰지 뭐! 대신 돈 다 쓸 때까지는 죽지

도 못하게 엄청 오래 사는 이름으로 지으라고. 어이쿠, 비 온다, 비. 들어

가요, 누님."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서 너스레를 떨며 조천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선실로 잡아끌었다.

 '두 석씨 두고 보자.'

 석두와 석숭이 있는 곳을 쳐다보며 내심 이를 갈고 있는 백산이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엄청난 장대비

가 내리고 있었다. 양자강 위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수없이 많은

동심원을 만들어 내며 생명의 환희에 몸부림치다 이내 소멸되어가고, 그래

도 못내 아쉬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뿌연 물안개를 피워 올린다

.

 자욱한 물안개가 감싸고 있는 새벽의 양자강, 시인의 눈으로 보았다면 한

편의 아름다운 시라도 나올 법한 그런 광경 속에서 난데없는 북소리가 사방

의 고요를 깨트리며 울려 퍼졌다.

 검은 용.

 장강의 무법자 흑룡이 땀이라도 흘리는 듯 물결을 헤치며 전력으로 내달리

고 있었다.

 그 흑룡호의 가장 높은 곳, 전부 오 인의 인물들이 가끔씩 날카로운 눈빛

을 빛내며 무엇인가를 숙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종합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의 출현은 뇌룡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무맹의 무룡대와 천마맹의 천마군을 공격

했던 자들과 동일 인물로 보이며, 설봉산에서는 무당, 아미, 화산의 삼 파

와 격돌, 자신을 쫓는 그들에게 광천뢰를 이용하여 위협을 했던 인물들인

것 같습니다."

 "그럼 너의 말은 그놈들이 우리를 건드렸단 말이냐?"

 날카롭고 조그마한 눈을 가진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혈의 노인, 그의 작은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자욱한 살기였다.

 가만히 있는 자들을 자신들이 먼저 건들다 당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건드렸

다 하고 있다. 이래서 세력이 좋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잘못은 사라지고 수

하들을 죽인 자의 잘못만 남아있다.

 "네! 태상. 그리고 그들의 흔적이 또다시 발견된 곳은 형산 독령곡 근처였

습니다. 독령곡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유령시마가 외쳤던 말 중에 소림의 실

전무공이 언급된 것이 있었습니다. 아라한신권, 용왕유권, 구련조화인 등…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저희는 그곳을 조사했습니다. 소림의 실전무공을 익

힌 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독무 속에서 십여 구의 뼈만 남아있

는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던 무기를 확인한 결과 놀랍

게도 귀령마제 마자광과 잔독사마, 그리고 독각삼수 등 위명이 쟁쟁한 무림

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령시마의 말이 헛소리가 아

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유령시마는 사색이 된 얼굴로 도망을 쳤습

니다.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무림인들을 피해서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생각에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칠십

년 전에도 강호가 좁다며 활보하던 유령시마 예인상이 자신에게 덤비는 무

림인들을 그냥 두고 도망을 치다니….

 "그래서 결론은 뭐냐?"

 이번에는 후덕한 인상의 흑의인이었다.

 "제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유령시마가 외쳤던 말 중에 용왕유권이란 말이

었습니다. 수중에서 우리 잠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공 중의 하나이고

설봉산에서 그들이 보여주었던 무위는 도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중전에서

그들이 행동한 것을 들어볼 때 용왕유권을 익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

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에 숨겨도 그 끝이 튀어나오기 마련인가. 백산 일

행의 행적이 이곳에서 낱낱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네, 맹주님. 일단은 저희가 독령곡에서 그들의 흔적을 모두 지웠습니다.

따라서 현 강호에 그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선은 우리 맹으로 회유를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거절하면?"

 "우리 것이 안 될 바에야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요.

"

 강호 무림의 생존방식 중의 하나이다. 내 것이 안 될 보물은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게 하라. 철칙이다. 언젠가 적이 되어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우환

은 사전에 제거해버려야 한다.

 "도강의 고수가 이십여 명 정도면 우리 측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우리의 상대는 무림이천밖에 없다. 누가 감히 천사맹의 상대가 된단 말이

냐."

 천사맹(天邪盟), 천사맹이라고 했다.

 천사맹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지하에 숨어있다고 생각했

던 천사맹이 장강수로연맹이라는 현판 뒤에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물경 삼십 년이 넘게 태양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의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정식으로 현판을 걸 때도 되었어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숨죽이며

 살아왔어요. 그들을 영입하든 제거하든 이번 일을 계기로 천사맹은 정식으

로 강호 활동을 개시할 겁니다."

 "맹주님!"

 사 인의 인물이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맹주라 불리는 여인 앞에 부복

을 했다. 오십 년 전, 천마맹과 천무맹의 합공으로 인하여 거의 멸망지경까

지 갔던 천사맹이다.

 어둠 속에 숨어서 절치부심한 세월이 오십 년이다.

 이제 다시 햇살 아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     *

 "뭐라고 했는가, 천사맹이라고 했는가?"

 백산 일행이 있는 곳에서도 천사맹이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 모르고 있었소?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무슨 근거로 장강수로연맹이 천사맹이라고 하는가

?"

 그동안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천사맹이란 말이 강호의 일이라고는 아무것

도 모르는 백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그것? 이 책에 나와 있던데."

 자신이 품속에서 꺼내놓은 책 한 권, 바로 만상투인루에서 얻었던 연판장

이었다. 석숭이 재빠르게 책을 빼앗아 들더니 첫 장을 넘겼다.

 '혈맹인명록(血盟人名錄)'이란 붉은 글과 함께 천무맹, 천마맹 등 구파 일

방을 포함한 모든 무림 문파의 인물들이 많게는 사오십 명에서 적게는 한

명까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각파에 있는 첩자의 목록?"

 부지불식간에 터진 석숭의 외침이었다. 거의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다.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상인인 석숭도 알 만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자네, 이것을 어디서 얻었나?"

 "만상투인루에서 주웠소. 연동립이 보물이라더군,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보물."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그런

엄청난 책자를 들고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모른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기야 광천뢰도

 무슨 구슬 가져오듯이 가져온 친구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게 그렇게 대단한 책이요? 돈이 좀 될까?"

 경악하고 있는 석숭의 표정에서 돈 냄새를 맡았는지 귀중한 보물을 보여주

었다 빼앗긴 것처럼 얼른 책을 회수해 가며 하는 말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닐세. 이것을 자네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자네

와 우리는 바로 죽은 목숨이네. 이것은 바로 혈맹이라는 단체의 첩자 목록

이네. 자네에게 이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혈맹에서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럼 돈이 된다는 소리네? 여기서 발췌하여 각 문파에 팔아먹으면 되겠네

 뭐."

 석숭의 목숨이란 말도 소용없었다. 새로운 돈벌이를 발견했다는 표정이었

다.

 "우선 이놈들부터, 옳지 여기 있다. 흑사, 초무인 두 놈밖에 없네?"

 "그 책 잘 간수하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무림인이 아닌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나 펼

쳐보면 안 되는 책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을

들고도 심각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백산을 보고 석숭이 고개만 흔들고

 있었다.

 "그 책 천무맹 같은 곳에 가져다주어야 되는 것 아니냐?"

 이제 완전히 마인의 틀을 벗은 갈태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왜죠? 그 놈들이 우리에게 뭘 해준 것이 있다고. 이 책에 있는 혈맹이란

놈들이나 천무맹, 천마맹, 지금 오고 있는 천사맹이나 모두 같은 놈들이오.

 다들 자신들의 목구멍 걱정해서 싸우는 것이지 정의는 개뿔이 정의. 더 많

은 놈들을 꼬드겨서 지네들 편 만들려는 속셈일 뿐이오. 그리고 내가 이것

을 내밀면 고맙다고 할 것 같소? 미친놈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마료와 마불신승의 삶을 보고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강호인들을 바라보

는 백산의 시각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을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들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만 관심을 가질 뿐이고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의나 대의라는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

각이었다.

 "그건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저도 믿을 수 없는데 누가 믿겠습니까? 자

파의 수뇌들 중 외부 첩자가 있다는 것을… 되레 첩자로 오인 받기 십상이

지요."

 이것이 강호 무림의 현실, 아니 세상 돌아가는 현실인 것이다. 아무런 영

향력이 없는 사람이 그들에게 꼭 필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해도 인정하지 않

는다. 심지어는 맞는 말임에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이다.

 자신들 보다 하위 계급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서는 훌륭한 사고가 나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의 틀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둥! 둥! 둥!

 세 사람이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어스름한 새벽 물안개를 가르며 쏟아지는 빗속에 나타난 검은 동체, 장강

수로연맹의 검은 용인 흑룡호였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이미 대충 알고서 묻는 것이다. 그러나 석정이 이야기했던 대단한 인물들

로 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전부 열다섯 남짓의 흑의인들, 백발 백염 노인

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자신이 보기에도 대단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그

리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석정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대가 맹주인가? 우리는 그저 이름 없는 사람들일세. 단지 이곳을 지나

안휘성으로 가고자 했을 뿐 그대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네."

 일이 커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목숨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을 썼을 뿐이다.

 무림에서 지금과 같은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이들이 단순한 수적집단이

아니었기에 대화로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이야 어쩔 수 없

지만 그들에게는 따로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백산이 펄쩍 뛰면서

 반대를 했으나 일행 중에 사망자도 없었고 사건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는

조천영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피는 과거에 보았던 것으로 되었다. 이제는 생명을 구하는 의원으로만 살

고 싶은 것이 갈태독의 마음이었다.

 "신분을 밝히라고 하지 않았더냐!"

 자신의 상관인 총채주에 대한 갈태독의 반 하대가 기분이 나빴는지 적인수

 옆에 있던 황의 대한 한 명이 소리를 내질렀다. 비록 나이는 들어 보였지

만 총재주에게 단 한 점 밀림도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노인네

의 여유에 심사가 뒤틀렸던 것이다.

 "그대 부하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이네만 우리는 무인이네… 그래

서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천만 냥을 주겠네,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겠나

?"

 천만 냥이라는 엄청난 금액, 상대가 천사맹이기에 제시한 금액이었다. 백

명 정도가 죽었으니 일인당 십만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장례비로 지급하

겠다는 말이다.

 갈태독의 말을 들은 적인수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들에게 장례비를 지급하겠다는 말에 놀랐던 것

이다.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적인수가 일행을

쳐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장강수로연맹이외다, 노인장. 먼저 신분을 밝혀주시오."

 단순한 수적이 아닌 무인 단체라는 소리였다. 돈보다는 명예를 먹고사는

인물들, 그들에게서 지킬 명예가 없다면 그때부터는 무인이 아닌 것이다.

그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석자 이름이기도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갈태독이네, 여기 있는 이 친구는 석숭이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갈태독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던 그 이름이 강호에서 다시 거론되는 것이 싫었기에 극구 숨기고

자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의 이름가지고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강호 무림에서 석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여 그의 이름까지 같

이 밝힌 것이다.

 백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는지 반응은 잠시 후에 나타났다.

 "헉!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 갈태독(葛太獨)? 세상에…."

 흑룡호의 최상층인 맹주의 처소에서 나온 소리였다. 혈의와 흑의를 입고

있던 나이를 알 수 없는 두 노인네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경악스런

표정으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저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었던 말인가! 벌써 백오십이 넘었을 텐데…."

 천장지옥마라는 이름이 주는 놀라움도 컸지만 무려 백년 전의 이미 전설이

 되었던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오십 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로.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두 사람에 반해 석정의 머리는 비상

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년 전의 개세마두였던 갈태독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패할 리야 없겠지만 노기인을 협공해서 죽였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수많은

비난이 쏟아지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마와 사로 구분이 되어있지만 어떻

게 보면 같은 동류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어둠 속에 있던 천사맹

의 출두가 비난과 함께 시작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정사항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맹주님!'

 '아직은 우리가 유리한 입장이에요. 저분은 아니더라도 그 옆에 있는 저

청년들을 끌어들일 수는 있겠지요.'

 재빠르게 오고간 전음이었다.

 나이 백오십이 넘은 전대 고인을 자신들의 휘하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옆에 있는 열세 명의 청년들, 비록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지만 용왕유권이란 전설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고 도강까지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소림사와도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

였다.

 그리고 그녀가 노리는 다른 한 가지는 저 청년들과 천장지옥마의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하게 같이 여행

하는 동료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저들만 잡아 둘 수 있다면

꼭 천사맹 소속은 아닐지라도 전대의 고인인 갈태독을 자기편으로 할 수 있

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중원 최대 부호인 만금돈노 석숭까지… 이것은 대어 중에서도 초특

급 대어가 아닌가.

 "진정 노선배님이셨습니까? 저는 적인수라고 합니다. 강호 동도들이 사자

혈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적인수가 놀라운 눈으로 갈태독을 쳐다보며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과거야

 어찌 되었던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이름을 날렸던 무인이고, 전설

이 되어버린 인물과 상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극진하게 모셨을 터

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자신은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있고, 자신의 부

하가 저 노기인이 있는 일행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이고 무림의 세계다.

 "저희 수로연맹에서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목

숨에는 목숨으로 변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맹이 수로채를 통합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추진했던 사안이었다.

 '형제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목숨의 대가는 반드시 목숨으로 받

아라. 그래야 깔보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은 적중했고 수적의 무리라고 무시했던 강호의 무림인들도 수

로채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수적 하나 잘못 건드렸다 평생을 쫓기며 살 짓을 왜 하겠는가.

 "내가 부탁해도 안 되겠는가."

 갈태독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후배에게 부탁이란 말을 썼다. 그만

큼 싸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 광견조, 석두, 백산 등 일행의

수는 별로 안 되지만 싸움이 일어난다면 강물이 피로 물들 것이다.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무공을 익히고 있기

에 광견조원들의 능력을 안다. 더구나 이곳에는 광천뢰가 두 상자나 있다.

다가오는 배에 하나씩만 던져도 천사맹은 거의 전멸할 것이다. 즉 양자강을

 피로 물들이는 것은 이곳의 주인이라는 저들이 될 것이기에 말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적인수는 그러한 갈태독의 마음을 알지 못했으니….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연맹에서 죽어간 그들을 대신

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본론이 나온 것인가. 갈태독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고 자신

들의 요구가 먹히리라는 계산이었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휴-우!"

 "그만 하시오, 영감!"

 한숨짓는 갈태독을 만류하며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백산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들 위에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오연하게 서 있는 적인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적인수라고 했나? 너하고는 더 이상 대화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저 안에

처박혀 있는 너의 대장을 불러라. 여기 있는 영감하고 너 같은 조무래기 놈

하고 격이 맞는다고 생각하나?"

 자신은 영감이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적인수가 갈태독과 말싸움하고 있는

 것은 싫었나 보다.

 "죽고 싶은 게냐, 놈?"

 적인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입고 있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그만큼 화가 났음이다.

 자신은 갈태독을 선배로 대접해 주고 있는데 그의 일행이란 놈이 자신을

조무래기라 했다.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도

발하는 언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쿡쿡쿡! 죽고 싶냐고 했냐? 좋아,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하자고."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이던 백산이 몸이 그대로 갑판을 박차고 흑룡호 위

로 날아올랐다.

 "이런 죽일 놈이!"

 조금전 갈태독에게 고함을 지르던 황의 대한이 신속하게 검을 뽑아들며 백

산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자신의 가슴을 향해 들어오는 검을 흘끗 쳐다본 백산이 오른 발을 들어 가

볍게 검면을 쳐내며 바닥을 향해 내리 눌렀다.

 "이익!"

 황의 대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놈의 발바닥에 붙어있는 검이 떨어

지지를 않는 것이다. 온힘을 다해서 검을 빼내려 했으나 처음부터 한 몸이

었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서 고기나 한 두어 마리 잡아와라, 네놈에게는 그게 더 어울려."

 천천히 검을 내리누르던 백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리고, 동시에 오

른발은 검면에 붙인 채 그 힘을 바탕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퍼-억!

 이어지는 왼발에 의한 선풍각, 황의 대한의 앞면에서 피가 날리며 양자강

물 속으로 떨어져 나갔다.

 첨벙!

 단 두수였다. 배 위로 올라와서 찔러오는 검을 발로 막으며 선풍각을 이용

하여 상대를 날려버릴 때까지 움직인 횟수였다. 적인수의 얼굴이 흠칫 굳어

졌다.

 쏟아지는 비도 퉁겨내지 못하고 있기에 별 것 아닌 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부하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해버렸다.

 그리고 저자가 보여주었던 무공, 접인신공이었다. 격공섭물(隔空攝物)이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잡아당기는 무공이라면 접인신공은 격공섭물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물체도 아니고 내

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의 검이 아니던가.

 "자, 올라왔으니 죽여줘!"

 적인수를 쳐다보는 백산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 때 보여주는 표정이다. 단순히 갈태독을 윽박질렀다해서 나오는 행

동이 아닌 것 같았다.

 "건방진 놈! 부하 한 명 이겼다고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백산을 노려보며 두 팔을 늘어뜨린 적인수의 손에 붉은 색의 혈륜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사혈륜(死血輪).

 지름이 손바닥 크기정도에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전부 칼날

이 달려 있는 적인수의 독문 병기이름이다.

 혈륜을 꺼내든 적인수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두 개의 혈륜에서

붉은 광망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맹주님! 말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뇌 석정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맹주라는 여인을 쳐

다보았다. 천사맹으로 끌어들려야 하는 자들인데 비무 중에 다치기라도 하

면 더욱 곤란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저들의 실력도 볼 겸 잠시 더 두고 보지요. 기도 좀 죽일 필요

도 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건방져 보였다. 어찌되었던 장강수로연맹의 총

채주는 적인수가 아닌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반말을 하지 않나,

죽여달라는 등 도발적인 언사를 일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부하로 받아들여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도 무력으로 눌러놓아야 뒤탈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 고생을 시킨 뒤 적당한 순간에 적인수를 멈추게 하면 될 것이

라 생각했다.

 "혈륜혈풍(血輪血風)!"

 그때 배의 앞쪽에서 적인수의 우렁찬 외침이 그들의 귀전을 때렸다.

 "부 맹주의 무공을 오래 만에 견식하게 되는군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는 듯 석정이 빙긋 웃으며 막 비무를 시작하는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이잉! 위이잉!

 두 개의 붉은 혈륜이 무서운 속도로 백산을 향해 지쳐들었다. 그런데 놀라

운 현상이 나타났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움직이는 혈륜은 일정한

방향이 없었다. 혈륜에 내재된 힘 때문에 제대로 된 위치를 잡지 못하는 것

인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다가들고 있는 것이었다. 무공이름에 풍자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재미있군!"

 붉은 혈륜이 살기를 풍기며 다가서고 있었지만 적인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

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백산이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자신이 죽을 지도 모

르는 결투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무인들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 같으면 일단은 힘을 못쓰게 해 놓고 상대가 무력해졌을 때 절반의 힘

을 쓰던지 아니면 우롱을 하는데 무인이란 놈들은 처음부터 약하게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백무천과 싸울 때도 겪었던 사항이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백산의 몸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손에

비도가 있으나 없으나 싸움을 할 때 그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천방지축팔방

무였다. 사실 박투를 함에 있어서도 그만큼 좋은 보법도 없다. 두 팔과 다

리를 사방을 향해 휘젓고 있으니 언제나 뻗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즉 휘두르는 사지에 힘만 실어주면 바로 타격이 된다

는 의미인 것이다.

 얼굴을 노리며 날아오는 하나의 륜을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피하고, 이어

서 다리를 노리며 날아오는 다른 륜은 두 다리를 구부려 올리며 피한다. 허

공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그대로 인채 다리만 구부려서 아래

쪽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쳐다보는 적인수의 얼굴에 비릿한 살소가 맺혔다. 놈

은 앞에서 오는 혈륜만 생각했지 그 다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놈! 칠성의 힘도 받아내지 못하는 놈이….'

 백산의 생각대로 적인수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죽여야 하는 생사비무가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징계만 하자 싶어서였던 것이

다.

 적인수가 내 뻗었던 손을 가볍게 가슴 앞으로 끌어들이자 뒤쪽으로 날아가

 있던 혈륜이 무서운 기세로 백산의 등 쪽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앞으로 전진하는데 만 열중하고 있는 백산의 모습을

본 적인수의 얼굴에 득의 표정이 어렸다.

 '두 귀를 잘라주마 놈!'

 아주 가벼운 상처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평생을 간직해야 하는 상

처, 그가 노리는 곳은 백산의 두 귀였다. 팔이나 다리를 자르고 싶지만 자

신들의 일꾼으로 부려야 할 자이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적인수는 백산을 너무 몰랐다. 뒤쪽에서 날아오는 두 개의 혈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도합 열두 개의 철구가 뒤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경험했던 그에게 두 개의 혈륜은 애들 장난에 불과할 뿐이었다.

 "헉!"

 잘린 귀를 기대하고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적인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그림 같았다. 뒤에서 날아오는 혈륜을 간발의 차로 고개를 숙여 피한

 놈이 그 혈륜이 회수되는 속도와 똑같이 자신의 코앞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동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놈의 눈 옆에서 자신

의 면상을 향해서 날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놈의 주먹.

 "멈추세요!"

 그 순간 흑룡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당한 내

공이 포함되어 있는지 양자강 물결이 사방으로 요동을 쳤다.

 "운이 좋군, 털보."

 적인수의 얼굴 앞에 있던 주먹을 활짝 편 백산이 그의 뺨을 툭툭 치면서

미소를 지었다.

 "애들 장난감은 아무나 쓰는 게 아냐. 이 정도는 되어야지."

 "크윽!"

 적인수의 뺨을 장난스럽게 건들던 백산의 오른손 팔목에서 붉은 빛이 번쩍

 하더니 적인수의 귓가에 핏방울이 날렸다.

 "이익!"

 굴욕감으로 적인수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자신이 너무 방심했다. 분

명 놈은 뒤쪽에 있는 혈륜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끝났다는 생

각에 다음동작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놈이 혈륜을 피하고 바로 코앞까지 들

어 와있지 않은가.

놈을 너무 경시했다. 자신이 무인이었다는 것을 망각했다. 무인이면 언제나

 암수에 대비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것을 무시한 대가가 바로 이 꼴이었다.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하나? 내가 방심만…"

 "병신…."

 "이쪽으로 모시세요, 부맹주."

 "그나저나 여자라…"

 백산도 놀란 표정이었다. 천사맹이란 거대 단체의 수장이 여자일 거란 생

각은 못했던 것이다.

 "휘호! 대단하구먼. 없는 사람들 등쳐서 꾸린 살림치고는 너무 고급으로

살고 있는 것 아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적인수의 뒤를 따르는 백산의 입에서 상대의 감

정을 자극하는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담호혈이라 할 수 있는 천사맹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만상투인루의 사 층에서 보았던 그런 가구들이며 물품들을 보며 또다시 배

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언제 들고 왔는지 손에 있는 광천뢰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모양새가

천상 뇌룡현에 있을 때의 건달 모습 그대로였다.

 "주둥이 조심하거라, 놈. 뉘 앞이라고 망발을 하느냐?"

 맹주라는 여인의 옆에 있던 혈의인이 안하무인격인 백산의 행동을 보고 일

갈을 토해냈다. 그도 백산과 적인수와의 비무를 보았고, 놈이 하는 이야기

도 들었다. 적인수가 방심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박투술 가지고 접근하

지도 못했을 놈이 아닌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서 이긴 비무를 가지고 마

치 실력으로 이긴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놈이다.

 아마 갈태독의 위세를 믿고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분명 적인수보다 더 높은 인물인 줄 알면서도 인사는 고사하고 얼굴 가득

비웃음을 흘리며 자신들의 맹주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온 소리라니, 천사맹으로 끌어들일 마음만 없었으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

다.

 "내 말이 틀린 것이 아니잖아, 늙은이! 창녀들의 몸 판 돈, 소매치기들이

훔친 돈, 도둑들이 도둑질한 돈, 그런 돈으로 이렇게 개기름이 질질 흐르게

 살고 있는 것 아냐? 그래도 창피한 것은 알아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고. 안 그런가, 천사맹의 맹주 양반?"

 "헉!"

 백산 일행을 제외한 천사맹 인물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새어나왔다

.

 "취익!"

 더욱더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광풍대원들의 출신이 그런 곳

이었기에 잘 알고 있다. 창녀들의 생활과 소매치기의 설움을. 구리돈 몇 문

을 벌기 위해서 손님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하고, 간혹 성질 더러운 놈이

라도 만나게 되면 화대는 고사하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는다. 또 남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는 어떠한가. 훔치다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손목

이 잘리고 평생을 병신으로 살아간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어

느 이름 모를 골목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런 것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석숭에게 들어서 안 사실이었지만 천사맹이란 단체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 이루어진 곳이라 하였다.

 개방의 거지를 제외한 또 다른 거지들과 소매치기, 힘없는 건달들이 모여

서 만든 하오밀문(下午密門), 도둑집단인 공공문(空空門), 기루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환희궁(歡喜宮), 그리고 마방에서 일하는 이들과 주루의 점소이

들이 모여서 만든 구유문, 강호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자신들

의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지켜보기 위해서 만든 그런 단체들의 연맹이 바로

천사맹이었다.

 그런 서러운 돈을 받아서 사는 놈들의 생활이 너무 화려했다.

 "놈! 죽고 싶은 게냐? 그것을 어디서 들었느냐."

 혈의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

았다고 믿었던 자신들만의 비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너무 수상했다.

 천장지옥마라는 전대 고인이 문제가 아니다. 이곳은 천사맹의 최고 심처,

아무리 하늘을 뒤집는 재주가 있어도 자신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저들은 이

곳에서 죽는다.

 "참으세요, 사부님. 손님들입니다."

 천사맹주라는 여인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녀도 백산의 말에 분노했

는지 복면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천녀가 천사맹의 맹주를 맡고 있는 수영이라 합니

다. 그리고 이곳은 원나라 수군이 쓰던 곳 그대로입니다. 저희가 꾸민 것이

 아니고요."

 갈태독에게 하는 말은 정중했지만 백산에게는 서릿발같은 음성이었다.

 물론 환희궁, 하오밀문, 공문 등으로부터 매달 군자금이 올라오고 있다.

그 돈이 어떤 돈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안다.

 은자 한 냥을 쓸 때도 그녀들의 눈물을 생각하곤 했다. 이런 욕을 들어야

할 정도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은 참아야 한다. 천사맹으

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처리방안은 그

 뒤에 생각해지 늦지 않을 것이다.

 "이분들은 혈사삼존이라 불리신 마령혈존과 혈영사존 되십니다. 저의 사부

님들이시고요."

 혈사삼존.

 천사맹을 지탱하는 세 기둥으로 대형인 구유혈존(九幽血尊) 수제인(帥帝仁

)과 마령혈존(魔靈血尊) 만구득 혈영사존(血影邪尊) 상인효 삼인을 일컫는

말이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구득(滿邱得)입니다."

 "상인효(常仁孝)입니다."

 마령혈존 만구득, 혈영사존 상인효 두 사람 다 백년 전의 인물들이다. 만

구득은 공문 문주였고, 상인효는 하오밀문의 문주로 갈태독이 귀혼곡에 갇

혔던 직후에 강호 활동을 시작한 인물들이었기에 갈태독이 알 리 없었다.

석숭만이 놀라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갑네, 갈태독이네."

 "앉으시죠, 어르신."

 "저희들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앉자 수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백산 일행의

천사맹 가입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자신했다. 강호란 무공만 강하다고 살

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한 무공에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천사맹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면 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갈태독이란 거물만 생각했지 옆에 있는 비뚤어진 놈은 생각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굴에 기분 나쁜 흉터가 있는 자가 일행의 대장이란

것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들이 천사맹이란 단체를 만들어서 없는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이유

가 뭔가?"

 "이런 육시랄 놈!"

 끝까지 돈을 갈취한다고 한다. 천사맹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됨이 없다. 적지에 들어와 있는 사람치곤 너무나 유들유들했다.

 "네놈이 갈 선배를 믿고서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있는 것이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맹주."

 혈영사존 상인효의 분노의 외침에도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구유천사

수영만 쳐다보고 있었다. 듣고 싶었다. 과연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천

사맹이란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불쌍하게 핍박받으며 살고 있는 화녀들, 거리

의 인간들 그들의 등불이 되고자 함이에요."

 "그럼 그렇게 살아왔나? 홍등가에 창기들, 구걸하는 거지들, 손목이 잘리

고 발목이 잘린 도둑들, 그들의 등불이 되고 힘이 되어주었느냔 말이다. 너

희들이 한 것이 뭐지? 힘을 키운다 어쩐다 하면서 이런 엄청난 배를 타고서

 장강을 따라 유람이나 하고 살지 않았느냔 말이다."

 "닥치지 못할까!"

 "이봐 늙은이, 당신 상관하고 이야기 중이야. 주둥아리 닥쳐!"

 백산의 몸에서도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는 다 부숴버리고 싶

은 것을 힘들게 참고 있는 것이었다.

 저번에 석숭과의 대화 때 겪었던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제

하고 또 인내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전부 다 죽일 것이냐 하던 갈태독의 말이 지금껏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혈영사존 상인효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백산을 향해서 손을 써왔다.

 '혈영극마수(血影極魔手).'

 그의 독문장공이자 금나수(禽拏手)이다.

 붉은 혈장(血掌)이 백산을 향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멈추세요, 태상!"

 사부가 아니라 태상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도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분노를 삭이며 상인효가 물러나고 있었으나 백산을 향한 살기는 더욱더 강

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사자혈륜 적인수를 비롯한 마령혈존 만구

득 등 선실의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살기가 백산 일행을 향해서 쏟아지고 있

었다.

 "운이 좋군!"

 상인효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천사맹주인 수영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천사맹주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백산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를 몰랐다.

 만일 상인효가 중간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하세요."

 천사맹주인 수영이 백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든지 들을 준비

가 되어있으니 해보라는 소리였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들을 위한다는 너희들이 천선비도라는 보물을 탐

했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천선비도는 아주 비싸니까. 그것을 구해

서 팔면 큰돈이 되겠지. 그런데 말이다, 비도를 도둑질하려던 와중에 너희

들 부하 백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수하를 죽였던 우리를 영입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더

란 말이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그들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느냐? 그들의

 삶을 알기나 하는 건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백산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혈영사존도, 맹주인 수영

도, 백산의 말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기반이 되고 있는 서러운 인생들을 외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들이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

지요. 그러나 저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한때는

 저도… 몸을 파는 창기였어요."

 "맹주!"

 "맹주님!"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의 입에서 통곡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원히 숨겨야

할 맹주의 비밀이다. 총관 적인수도 군사인 석정도 모르고 있던 일이다. 그

런 것을 스스로 밝히고 말았다.

 "다 죽인다!"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이 분노했다.

 인간이 가장 분노할 때가 언제인가. 감추고 싶은 치부가 드러났을 때이다.

 그것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 드러난 경우이

다. 자신들의 제자인 수영, 화류병으로 죽어가던 그녀를 구했고, 다행히 무

공에 엄청난 자질이 있어서 천사맹의 비천을 모두 익혔다. 어두웠던 과거를

 잊고 이제야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그녀였다.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녀딸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내려섰는지 오 인의 인물들이 나타나서 맹주인 수영을 사방에서 호

위하며 감싸고,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은 죽음의 살기를 뿌려대며 백산을 향

해서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는 영입이고 뭐고 없었다. 자신들의 맹주를 모욕한 놈을 죽여야만 한

다. 맹주의 자존심을 위해서 천사맹의 명예를 위해서 놈들을 제거 할 수밖

에 없다.

 "이거 광천뢰야!"

 한마디면 족했다. 백산을 향해 다가서던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다섯 개의 광천뢰.

 어느새 품속에서 꺼냈는지 전부 다섯 개나 되는 광천뢰를 양손에 들고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여차하면 던져버릴 기세가 역력했다.

 아무리 흑룡호가 전함으로 건조된 것이지만 다섯 개의 광천뢰면 흔적도 없

이 사라진다.

 "그럼 네놈도 같이 죽는데 던질 수 있을까?"

 혈영사존이 해볼 테면 해보란 식으로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의 발걸음은 이미 호위들에 의해서 겹겹이 둘러싸인 수영의 앞으로 움직

이고 있었다.

 저놈 일행에게 광천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

게 가지고 노는 모습에 그것이 광천뢰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왜, 못할 것 같은가? 시험해 봐도 좋아. 설봉산에서 시험 삼아서 세 개를

 던져 보았는데 아주 만족스럽더군. 그리고 우리하고 너희들하고 누구 목숨

이 더 비쌀까?"

 "으음!"

 혈영사존의 입에서 나온 신음소리다. 누구의 목숨이 더 비쌀까 하는 물음,

 저들은 석숭을 빼고는 가진 것이 없다. 죽어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는 뜻이

다. 또한 던지고 피하려 한다면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어떠한가. 평생을 두고 복원시켜 놓은 천사맹이고 손녀딸 같은 맹주도 있다

.

 "물러서세요, 두 분 사부님."

 "맹주님!"

 맹주 자리가 인간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대담해서 맹주가 되

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모욕하다 못해 이제는 광천뢰까지 들고 위

협을 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욕심이 없는

 것이다. 천사맹도 맹주 자리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

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을 쳐다보던 백산의 얼굴에 미미하지만 감탄의 표정이 서

리고 있었다.

 "과거에 창기생활을 해보았다고 하였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거

요? 당신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되오. 당신이 천사맹이란 곳의 맹주로 있는

한은 언제나 기억하고 또 생각하고 사시오. 그래야 그 맹주자리가 당신 자

리가 되는 것이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이다. 과거를 생각하며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없었던 일처럼 그렇게 잊어버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더구나

 자신이 입고 있는 옷 한 벌, 먹는 밥 한술까지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그런

 곳의 사람들이 준 것이 아니던가.

 "댁의 부하들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되었소. 천만 냥이오. 이런 것을 준다

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소. 그들의 가족

에게 주시오,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품속에서 천만 냥을 내놓고 있는 백산이었다. 그리고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지만 첩자에 대한 것도 전음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맹주라는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그런 치부마저도 밝힐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하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잘 놀다 갑니다. 참! 혹시 사령귀혼대법이란 것을 알고 있소?"

 "헉!"

 두 마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사맹의 최고 비밀 중의 하나

가 사령귀혼대법이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천사맹에 대해서 는 물론

이고 사령귀혼대법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간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잘 모르는 이야기군요."

 수영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함부로 발설할 그런

사안이 아니었기에 알려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소?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혹시라도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주시

오."

 두 마존의 표정을 보았을 때는 분명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숨기고자 하니

더 이상 추궁할 수도 없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백산 일행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빗방울이 가늘

어지고 있었다.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살게. 말도 좀 가려서 하고."

 선실을 나서면서 석숭이 백산에게 한 말이었다. 너무나 정신없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천사맹이란 거대 세력의 중심부에 들어와서 제 할말 다하고 거

기에다 협박은 물론 모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대죄인 것이다

. 아무리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저런 여유는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사람이 백산이었다

.

 "내가 떳떳한데 겁낼 게 뭐요. 가진 것이 많은 놈들의 목숨 값이 더 비싼

거요. 그리고 광천뢰 이것 진짜요."

 많이 가진 자들은 결코 같이 죽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사맹의 맹주와 이름

도 없는 백산,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저울추는 천사맹주 쪽으로 기울게 되

어있다.

 또한 자신의 품에서 꺼내 놓았던 광천뢰.

 단순히 협박용으로 쓰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맹주라는 여인이 오만하

고 자신만 아는 그런 여자였다면 지금쯤 흑룡호는 파편만 남아 있을 것이다

.

 "나는 말이요, 무식해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은 모르지만 단 한 가지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알고 있소."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말함이다. 많은 지식을 익히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함이다.

 "그럼 맹주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난 건가?"

 "우리는 아니지. 저들이지."

 "그게 터지면 자네는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가?"

 "내가 바보요? 같이 죽게? 도망가면서 던지면 되는 거지."

 "그럼 나는?"

 갈태독이나 백산이야 무상신법을 익히고 있으니 몸을 날려 피한다고 하지

만 석숭은 그들처럼 움직이지를 못한다.

 "애요?"

 "헉!"

 석숭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했다. 너 알아서 하라는 소리이질 않는가.

 '나쁜 새끼….'

*     *     *

 "마존, 저들을 그대로 두실 거요?"

 마령혈존과 혈영사존이었다. 맹주실에서 물러난 그들은 적인수와 석정과

같이 따로 모여서 무엇인가를 상의하던 도중에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백산과 석숭의 대화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롱당했음이다. 천사맹이란 거대 단체가 이름도 없는 무명 잡배에게 치욕

을 당했다.

 "맹주는 그대로 두라고 했지만 그것은 안 될 말이요. 이제 천사맹도 햇살

아래로 나가게 되는데 저놈들에 의해서 맹주의 과거가 소문이라도 나면 큰

일 아니오. 군사,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도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그자는 우리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양자강에서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맹주님 귀에 들

어갈 소지도 있고 저들에게 광천뢰가 있으니 배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입니

다. 결국 육지에 내렸을 때 입막음을 해야 되겠지요."

 광천뢰의 존재 때문에 그들의 가장 장점인 배로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것 한방이면 배 한 척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게 될 터이고, 그

들에게 광천뢰가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계획은 군사가 세우게. 나중에 들통 나더라도 책임은 우리 두 사람이 지

겠네."

 "네, 태상!"

 '우리를 그렇게 모욕하고도 살기를 바랐더냐. 네놈의 말이 맞다 할지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다….'

 마령혈존의 중얼거림이었다. 맹주의 명예를 지키고 천사맹의 비밀을 지키

기 위해서 백산 일행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일이 잘 해결되었다 생각한 백산은 광견

조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다 모였나? 이제 세 번째 수련에 들어간다. 자, 받아라!"

 "허억! 허거덕!"

 석두와 광견조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산이 아무렇게나 던지

고 있는 것, 바로 광천뢰였다.

 조그마한 충격만 주어도 터져버린다는 광천뢰를 돌 던지듯 그렇게 던져주

고 있는 것이었다.

 "잘 보아라."

 백산이 자신의 손바닥에 광천뢰 두 개를 올려놓고 광견조원들을 향해 내밀

었다.

 놀랍게도 광천뢰는 손바닥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육안으로 거의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미세한 틈이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과 광천뢰 사이에 미세한 강기층을 만들어서 전혀 충격이 가지 않게

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경극단의 광대가 하는 것처럼 두 개의 광천뢰를 엇갈리며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백산이 광천뢰를 가지고 했던 행동, 단순히 공깃돌을 던지는 동작

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피부에 광천뢰를 접촉시키지 않은 고도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강기란 무엇이던가.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파괴시켜 버리는 유형의 기(

氣)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기를 가지고 광천뢰를 감싸고 있으라 하고 있다

.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공깃돌 놀이까지 하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수준에 올 때까지 이놈들을 몸에서 떼어놓지 말 것. 알았나?

"

 사색이 된 광견조원들이 산에서 날고기 먹던 시절이 그립다며 울상을 지었

다. 그러나 한번 떨어진 명령을 어찌할 것인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날부터 광견조원들은 말을 잊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유령선으로

변해 버렸다는 뜻이다.

 서로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말조차 조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걸을

때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구련조화인이냐?"

 구련조화인, 소림 무공 중 부드러운 무공의 백미. 무상대능력을 깨닫지 못

하면 결코 익힐 수 없다고 하는 무공. 소림에서도 구련조화인은 알고 있지

만 무상대능력을 깨달은 이가 없었기에 인세에 나타나지 못했던 무공이다.

 몸속에서 유통되는 진기가 흐르는 공기 같은 부드러움과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시전할 수 있는 무공이기도 했다.

 "전부 다 가르칠 거냐?"

 불안했다. 무공을 전수하는 것 하나하나가 바로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조

그마한 실수라도 하게 되면 모든 일행이 몰살당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만

들어 놓고 광견조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자질이니 개인 능력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없던 능력

까지 다 동원해서 익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동료들까지

전부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천뢰 훈련 때문에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석두와 광

견조원들이 시간만 나면 모여서 토론을 한다는 것이다. 무공에 관해서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또는 자신이 터득한 것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부족한 면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구련조화인은 무슨, 그냥 강기를 좀더 능숙하게 다루게 하려고 하는 것이

지."

 지금껏 백산이 해왔던 모든 방식들, 결코 소림의 무공을 전수하기 위해서

행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강기의 경지를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만들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 가지고는 누구나 인정하는 근사하고 멋진 방법을 찾기도 힘들

고 말로 설명한다고 되는 놈들도 아니라는 것은 이미 경험했던 바였기에,

주로 주변에 있는 것을 활용하여 광견조원과 석두를 훈련시키는 것이고 광

천뢰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은 강약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

다.

 아무리 광천뢰가 충격에 약하다고는 하나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터지지

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었을 경우에만 터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

다면 비록 솜으로 감쌌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마차에 싣고 왔겠는가.

 하지만 광천뢰의 위력을 직접 목격했던 광견조원들이고, 자신의 실수 한번

이면 이 배가 통째로 날아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신의 손에 있는 광천뢰를

 다루는데 모든 심력을 다 쓰고 있었다.

 "이보게 백소협, 저들이 들고 있는 게 뭔가?"

 석숭이 해쓱하게 변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광견조와 석두가 손

위에 검은 쇠뭉치를 하나씩 들고서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본 모양

이었다.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요, 석대인."

 "으악! 나 내릴 거야. 지금 당장 배를 대 주시오. 왜 배가 안 가고 있는가

 했더니 바로 저것 때문이었어."

 석숭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광천뢰를 가지고

무공을 익히는 인간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놈도 미친놈이지만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들도 미쳤다

. 아니 이 배에 타고 있는 것들 중 자신만 빼고 다 미친 것들이다.

 "이봐 금령! 자네들도 배우고 싶으면 광천뢰 하나씩 들고 합류해. 은령은

안 돼!"

 "네! 공자."

 은신해 있던 두 명의 흑의 복면인들이 내려서더니 광견조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다 미쳤어, 전부 다 미쳤어."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울고 싶은데 나이가 있으니 체면 때문에 울지도 못하는 석숭이었다.

 "공자, 저희들은 왜 안 됩니까? 냉 소저와 구 소저도 있던데요?"

 은령 둘이었다. 자신들만 빼놓은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약해서 안 되지 왜 안 돼. 그대들은 광풍신권에 만족하라고. 요체는 기억

하고 있지?"

 배는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게 천천히 흐르고 불안에 떨고 있는 석숭은 언

제나 물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는 갑판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밤 잠 못 이루는 여인들이 또 있었다.

 식은땀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냉추렴을 조천영과 소운이 다독거리

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동생. 그분은 천하제일인이야."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서 자신을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부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것이다.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에 놀란 백산이 선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에요, 냉 동생이 불길한 꿈을 꾸었나 봐요."

 "냉 소저, 걱정 안 해도 돼요. 마혈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저와 싸워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해요. 그 양반이 스스로 죽기 전에는 그 누

구도 해칠 수 없어요."

 냉추렴의 꿈 이야기를 들은 백산의 말이었다. 유형마지에서의 깨달음은 철

목승의 무공 경지를 또 한 단계 올려주었다. 지지야 않겠지만 백산 자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 그를 누가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백산이 미소와 함께 냉추렴을 다독거리며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     *     *

 매서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음에도 계절의 지나감은 막을 수 없는지

두꺼운 얼음 아래로 겨울이 남기고 간 눈물인 양 가느다란 세류(細流)가 흐

르기 시작했다.

 미리 고개를 내밀었던 성마른 잡초들이 아직도 차가운 겨울바람에 파랗게

얼어서 고개를 떨구고 있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이미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

었다.

 그러나 아직도 봄이 오지 않는 곳이 있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 감숙성(甘肅省)의 최북단인 천목애(天目崖).

 바로 마도의 최고 성지이자 본산인 천마맹의 검은 건물들이 따스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누구의 명령이더냐?"

 패궁(覇宮).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철혈전신 철목승이 기거하는 곳, 그곳에서 겨울바람

보다 더 차가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을 쏟아내며 철목승이 자신 앞에 부복해 있는 인물

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원(一元), 구전(九殿), 오각(五角)의 만여 명의 인원이 기거하는 곳, 천

마맹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군사 광뇌(狂腦) 궁유(宮柳)였다.

 "죄명은?"

 누가 내린 명령인지 왜 모르겠는가, 단지 무엇으로 자신을 옭아매려 하는

지 그것이 궁금했다.

 "본맹의 기밀을 유출한 죄이오이다."

 궁유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죄명을 밝혔기에 이제부터는 죄인이다

. 더 이상 무릎을 꿇고 있을 수는 없다.

 그도 발뺌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음이다.

 "증거는?"

 "부맹주의 제자인 냉추렴이 맹의 복귀명령을 거부하고 적과 내통하고 있지

 않소이까?"

 "허허!"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맹의 부맹주인 자신이 제자를 두고

 온 것을 적과 내통이라고 하고 있다. 냉추렴이 맹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이 조금이라도 있던가. 자신보다 더 모르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내가 거부하면?"

 시종일관 담담하던 광뇌 궁유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맹주인 철목승이

 투옥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게 되면 천마맹은 곧바로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

 비록 맹(盟) 내에 특별한 세력이 없는 것 같지만 만일 그가 칼을 뽑으면

천마맹의 오 할은 그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파악한 수

치이다.

 무욕인(無慾人).

 천마맹의 조직 구성원에는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천마맹에 적을 두고 있는

 무인들, 무도 추구를 위한 목적 하나로 천마맹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무공에 대한 욕심 말고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자들이기에 무욕인이라 부르

기도 하고, 무공에 미친 자들이란 뜻에서 무광인(武狂人)이라 부르기도 한

다. 그들의 인원이 천(千)이다.

 개개인이 절세 고수인 그들이 있었기에 천무맹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그들의 무공과 심득(心得)이 천마맹에 흡수되었기에 맹의 무공이 비약적으

로 발전했다.

 그 최강 세력인 무욕인의 최정상에 있는 자가 바로 철목승이다.

 "그럼 천마맹이란 단체는 강호상에서 사라지게 되겠죠."

 천마맹의 수뇌들과 무욕인의 두 세력이 부딪치게 되면 그날로 천마맹은 자

멸하게 된다. 그것은 철목승도 원하는 바가 아닐 터이다. 천마맹이란 든든

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오직 무도만 추구하는 무욕인들이 살아갈 수 있다.

 광뇌 궁유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의 설자리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 철목승은 내전을 선택하지 못한다.

 "어디서 쥐똥 냄새가 난다 했더니 여기에 쥐새끼 한 마리가 와 있었구먼."

 "내가 고양이 한 마리 가지고 오자니까 형님이 막지 않았소."

 천 명의 무욕인 중 가장 강한 무욕 십대 고수들, 자신의 키 크기의 도갑도

 없는 사풍도(砂風刀)를 등에 메고 있는 광사(狂死) 초상(草像)과 사천당문

조차 우습게 본다는 암기의 달인인 독안랑(獨眼狼) 서문천(徐文川)이 건들

거리며 나오고, 그들의 뒤를 이어서 광혈마도(狂血魔刀) 반동(半銅), 독인

마검(禿人魔劍) 거이산(巨二山) 등 무욕 십대고수가 줄줄이 나타나고 있었

다.

 "어이 쥐새끼, 욕심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노인들 부탁으로 왔나?"

 구마전(九魔殿)의 전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백 년 전, 천마맹 창설 때

도 있었고 오십 년 전, 오천맹을 괴멸시킬 때도 있었던 거물 중의 거물인

구마(九魔),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벌이던 그들은

 주전파의 수장이었던 검마(劍魔) 요대철(尿帶哲)이 승리함으로 해서 하나

로 통합된 것이다.

 구마를 들먹이던 초상이 광기 가득한 눈으로 궁유를 노려보고 있었다.

 "매, 맹주의 명령이요. 부맹주를 수마옥(囚魔獄)으로…."

 궁유가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광사 초상의 도가 자신에게 다

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던 입 바로 앞에서 새파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

던 것이다. 한마디만 더 하면 입을 찢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육 척이 넘는 거대한 도를 언제 뽑았는지 보지도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쥐새끼. 어디라고?"

 "형님! 그냥 죽여버리고 맹주한테 가 봅시다."

 궁유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초상을 향해서 소매 속으로 손을 집

어넣으며 독안랑 서문천이 조용히 속삭였다.

 서문천을 바라보던 궁유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초상보다 더 무서운

자가 저 독안랑이다.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암기를 다루고

 있는 자,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최고의 암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

만큼 지독해야 한다. 그 독한 성격이 그의 암기에 그대로 드러난다. 단순하

게 숨통을 끊는 것이 아닌 엄청난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한다.

 저 손이 빠져나오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사라질 것이다.

 저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비치는 자들이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무욕 십

대고수 전원이 나와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 오금이 저리고 사지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라!"

 구원의 빛은 있었다. 철목승이 스스로 수마옥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궁

유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저승 입구까지 다녀온 기분이

었다.

 "쥐새끼, 오늘은 운이 좋았다. 다음에는 네놈의 주둥이를 반드시 찢어주마

. 이것은 계약금이다."

 독안랑 서문천이 궁유의 귓불을 씹으면서 내뱉는 말이었다. 궁유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귓불을 자근자근 씹어대던 서문천이 그곳을 잘라내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잘라낸 자신의 귓불을 씹고 있는 독안랑

서문천의 행동이다. 입술에 피를 잔뜩 머금은 채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듯

이 그렇게 씹고 있는 것이었다.

 "퉤! 너무 질겨, 혓바닥은 좀 연하려나?"

 기회가 되면 혓바닥도 맛보고 싶다는 말이다.

 "따라오십시오."

 돌아서서 앞장을 서는 궁유의 얼굴에 굴욕감이 가득했다. 아직은 무욕인들

이 필요했기에 그들을 내칠 수도 없는 일이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더

라도 그들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 천무맹에는 충분한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

기 때문이다.

 '두고 보자. 이 치욕, 이 원한을 반드시 갚아주마.'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당장은 힘도 없거니와 필요한 존재이다. 즉 필

요악 같은 존재이기에 그들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 말은 듣더냐?"

 요대철의 처소인 검마전에서 한쪽 귀가 반쯤 떨어져 나간 광뇌 궁유와 요

대철이 같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네, 수마옥으로 가기는 갔으나 그곳은 무욕인 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궁유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철목승이 수마옥으로 자리를 하자마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조차 희미하

던 수백의 무욕인들이 나타나더니 조용해서 무공연마하기 편하다는 구실로

수마옥 내부의 각 옥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경비하던 무사들조차 내쫓아 버리고 자신들이 그곳에서 무공을

연마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돌발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철목승만 묶어두면 될 줄 알았던 그들의 계

획이 무욕인들을 단합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제 수마옥은 무욕인들이 펼친 천라지망으로 인해 맹주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 아닌 금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가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길 확률은?"

 "그가 없는 경우에 이길 확률은 오 할, 그와 같이 했을 경우에는 팔 할입

니다."

 궁유는 철목승의 필요성을 주장했었다. 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은 둘째치

고라도 일단 전쟁에 이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마들의 생각은 달랐

다. 철목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냉추렴의 죄를 물어 구금하는 편법을 썼다. 그가 반항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도 있었지만 제거하기에는 너무나 큰 거인이었고 위험

하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그가 마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천하제일인이 마도에 있

다는 것은 천마맹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마도인으로서 강호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무인들에게 자긍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제거는 마

도인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결국에는 천마맹만 고립

될 것이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음이다.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를 비공식적으로 움직이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궁유의 눈이 사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힘으로 안 되면 머리를 이용해서 자

신을 모욕한 무욕인들에게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미 부맹주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공식적으로 맹의 일을 주게 되면 세력을 규합할 가능성이 커지지만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면 오로지 개인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냉추렴입니다."

 두 사람의 전음이 이어지고 잠시 후 검마 요대철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

다.

 "역시 광뇌다. 맹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을 테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정파 무림을 휘젓고 다닐 테니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누구를 보낼 거냐?"

 "그녀와 원한이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혈마군주(血魔軍主)인 혈수마룡(血

手魔龍) 진세개(晉勢介)입니다."

 "진세개가 왜?"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가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목숨을 잃을 정도

로요."

 "그래? 그거 잘됐구먼. 아주 잔인하게 처리하도록 말해라. 머리꼭지가 돌

아버리도록… 그 얼굴이 보고 싶군, 으- 훗! 훗! 훗!"

 검마 요대철의 입에서 스산한 웃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마인은 마인다워

야 한다.

 그러기에 마인이면서도 정인군자인 양 행동하는 철목승이 그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내분만 없었다면 철목승 같은 인물이 생겨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방치하게 되면 맹 내의 모든 인물들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원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절대 그

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무려 백년의 세월을 기다린 것이다. 주군을 배신하면서까지 차지하고 싶었

던 강호의 패권.

 이제 절반 정도는 이루었다.

 "형님! 추렴이는 괜찮겠습니까?"

 수마옥(囚魔獄).

 이제는 철목승의 거처이자 무욕인들의 무공수련 장소가 되어버린 곳.

 그곳의 가장 중앙에 있는 감방에 철목승을 비롯한 무욕 십대고수가 모여

있었다.

 부맹주를 가둘 정도라면 그의 제자인 냉추렴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에

독안랑 서문천이 한 말이었다. 독안랑 서문천의 무서운 점은 암기 보다 비

상한 머리에 있다는 것을 이곳에 있는 무욕인들을 제외하고는 천마맹의 어

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곳을 무욕인들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애를 건들일 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아무도 없네."

 자신을 가둔 천마맹의 행사로 볼 때 냉추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임에도 철목승은 웃고 있었다.

 추렴이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같이 떠오르는 놈, 생긴 것 하나 없는 놈이

자신이 잘생긴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기적인 놈, 백산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렴이가 그렇게 강해졌습니까?"

 광사 초상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헤어진 지 이제 육 개월 정도, 아무리

 자질이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선뜻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추렴이가 강한 것이 아니고 그 애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강해, 나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갈태독과 백산을 두고 한 말이리라. 거기에다 빙혼마녀 조천영, 그리고 백

산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광견조, 그들 속에 있는 냉추렴

은 자신의 옆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호상에서 그들이 가장 강한 것 같군…."

 "그렇게 강한 자들이 있었습니까, 강호에?"

 놀라움이다. 강호 무림에 철목승이 어쩔 수 없는 무인이 있다니. 철목승은

 사람이란 말 대신 사람들이라 했다. 적어도 한 명은 아니라는 소리다.

 아무리 은거해 있는 기인들이 많은 무림이라지만 그들이 보았을 때 철목승

에 버금가는 인물은 없다. 자신들의 최후 목표가 철목승 아니던가.

 이번 외유에서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철목승, 과거에 몸에서 조금씩 풍기

던 고유의 기세마저 갈무리되어 버렸고 이제는 그 끝마저도 알 수 없게 되

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냥 싸우면 나와 동수(同手)고, 그녀석이 화내면 내가 지네."

 "헉! 헤엑!"

 무욕 십대고수가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철목승이 진다는 말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 녀석 분명 그녀석이라 했다

. 나이가 얼마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녀석이라니요? 나이가 몇인데…."

 "겉보기에는 삼십 대인데 저는 스물다섯이라 하더군. 아!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스물여섯인가?"

 십대고수 누구도 말이 없었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를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십 대의 나이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거짓일 리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인 철목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무욕 십대고수들이 한 명씩 밖으로 나갔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철목승이

 있던 감옥을 나서서 자신들의 거처로 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들 가는가? 술이나 한잔…."

 "놔두십시오, 대형! 그럼 그 친구가 사윗감입니까?"

 광사 초상과 독안랑 서문천만 남기고 다 나갔다. 잠시 후 머리로 벽을 찍

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철목승과 남아있던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여자도 잊고 오로지 무공 일로에만 평생을 매진해온 자

신들이다.

 자괴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좋겠는데, 그놈이 여자를 좀 밝혀서 문제긴 하지만. 여자와 돈은 많

을수록 좋다나?"

 "엥? 푸! 핫! 핫! 핫! 그놈 물건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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