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35화 (36/84)

제1장 매도자(賣圖者)

 장사(長沙).

 독령곡을 출발한 일행은 유령시마 예인상 덕분에 비도를 노리는 무림인들

과 별다른 충돌 없이 형산을 넘어 장사에 도착했다.

 삼백 년의 역사를 지닌 호남성의 성도 장사, 상강(湘江)의 하류에 형성된

비옥한 땅으로 인하여 호남성 최대 곡창지대로 발달한 도시가 바로 이곳이

다.

 환한 등잔불이 켜져 있는 지하 밀실.

 흑의인 한 명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지 가끔씩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

며 서탁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서탁 위에는 알 수 없는 선들과 지형들

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매우 오래된 듯한 빛바랜 양피지가 한 장 놓여있

었다.

 지도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지도,

 현재 강호상에서는 지도란 말만 들리면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천선비도.

 천하제일인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비도가 바로 천선비도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다 그렸는데 저것들이 너무 새것이란 말이야.'

 바로 모조의 달인인 광견조 모사였다.

 갈태독의 치료법으로 회생(回生)해 가던 무영비추 수구해를 다시 저승으로

 되돌려 보내버렸던, 그 주머니 속에 곱게 모셔져 있던 것이 천선비도였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지만 백산은 그 천선비도의 모조를 명했고 지

금 이렇게 십여 장을 만들고 있었다.

 '일단 이것을 탈색제 속으로 집어넣고 색을 바래게 한 다음….'

 서탁 아래쪽에 즐비하게 놓였던 통들 중 맨 앞에 있는 통으로 그려놓은 비

도들을 쏟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     *     *

 같은 시각, 장사의 번화가에 있는 장사루(長沙樓).

 저녁때가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무림인들이 빈자리가 없

을 정도로 꽉 들어차 있었다.

 유령시마를 쫓다 낙오된 무림인이며 이제서야 비도 쟁탈전에 가담한 무림

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그동안의 경과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닥난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하루 정도 쉬는 자들, 비도에 관한 소문을

듣기를 원하는 자들, 서로가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상대방

의 말속에서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령시만가 하는 자에게는 비도가 없다는 소문이 있던데?"

 조금 전에 들어온 장사치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였다. 낮은 목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나 주루 내부에 있는 한다하는 무림고수들은

 벌써 두 사람의 이야기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원래 소문을 가장 빨리 접하는 사람들이 상인이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

파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던가. 당연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설마… 그때 독령곡에서 나온 인물은 유령시마란 자밖에는 없다고 하던데

 그럼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하는 소리 아닌가. 나도 어제들은 이야기인데 비도를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데."

 시끌벅적하던 주루 안이 조금씩 조용해지며 두 사람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비도만 있으면 천하제일인이 된다는데, 그걸

팔아?"

 그러나 상인들은 주루 내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자신들만의 이야

기 속에 빠져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에게 명예와 권력을, 그리고 힘

을 가져다줄 수 있는 그런 물건을 팔다니. 정신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자넨 소문도 못 들었나? 그 비도 때문에 엄청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보다 돈이라도 챙겨보겠다는 것이지 뭐."

 "하긴…."

 보물도 자신의 능력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공연히 소문이라도 나면 그날로 이승

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인지 몰라도 팔자 폈구먼."

 두 장사치의 눈동자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적어도 수천만 냥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광실 같은 집에 수발 들어주는 하인들, 몸 하나 꼼짝하지 않아도 하루

 세끼 밥이 차려지는 신분, 하루 벌어서 하루 연명하는 자신들의 처지로서

는 꿈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런 호강인 것이다.

 "에이. 부러워하면 뭐 하나. 우리 같이 재수 없는 놈들에게는 그런 행운

같은 건 없어, 열심히 움직이는 수밖에."

 "그래 맞아. 우리 같은 인생에게 행운은 무슨…."

 간단하게 술 한잔 하러왔는지 이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짐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했다.

 "잠깐!"

 창가 자리에 있던 삼 인 중 한 명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장사치

들을 불러 세웠다.

 "자네들도 행운을 한번 잡아보지 않겠나?"

 은 두 냥을 달그락거리며 상인들을 쳐다보고 있는 자(者)는 사천당문(四川

唐門)의 세 아들 중의 첫째인 당천이었다.

 당가삼룡(唐家三龍).

 사천당문의 세 아들인 구절독(九折毒) 당천(唐天), 무영독(無影毒) 당운(

唐雲), 그리고 독군자(毒君子) 당풍(唐風)을 일컫는 말이다.

 맏이인 당천이 삼십 대, 막내인 당풍이 이십 대로 나이들은 어리지만 강호

 후기지수들을 논할 때면 언제나 상위권에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 들었나?"

 셋째인 독군자 당풍이 형님을 대신해 나서며 물었다.

 가문의 비전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데릴사위제를 채택할 정도로 폐쇄적

인 가문이었기에 당문 인물들의 성격은 대부분이 독선적이고 괴팍스러웠다.

 그런 당문의 인물 중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가삼룡의 셋째인 당풍

이다. 호방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 그 친구들이 그를 독군자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요, 오다가다 들은 소문일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요. 다만

경매를 한다는…."

 말끝을 흐리며 당천의 손에 들고 있는 은 두 냥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고 있었다.

 조금 전 분명히 행운을 잡으라고 했었다. 이야기만 잘하면 은 두 냥을 준

다는 소리가 아닌가.

 "우리는 사천의 당씨 문중 사람이네."

 "허억! 그럼, 사천당문?"

 두 장사치들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강호 무림인뿐 아니라 일반 양민도 알고 있는 곳이 사천당문(四川唐門) 아

닌가, 은원관계만큼은 가장 철저하게 원칙을 지킨다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사천당문에 죄를 짓는 자, 원한을 맺는 자는 그가 무림인이건 관인이건 일

반 양민이건 결코 중원에서 살아갈 수 없다.

 시간의 길고 짧음만 있을 뿐 모두 죽는다는 것은 당문이 생긴 이래 변하지

 않는 법칙 중의 하나였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순간에 독에 중독되어 이승

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곳이 사천당문이다.

 푹!

 은 두 냥이 상인들이 앉아있는 탁자 위로 깊숙이 박혀들었다. 거짓을 말하

면 죽인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요, 나리!"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은 하였지만 자신들의 탁자에 박혀있는 두 냥을

 탐욕스럽게 쳐다보면서 덩치 큰 상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봉산에서 비도 쟁탈전이 한창일 때 그곳으로 사냥 나간 사냥꾼이 있었다

고 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무림인들의 서슬에 감히 하산할 생각을 못하고 숨어 있

다가 모든 무림인들이 떠나자 산을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때 주머니를 하나

 주웠다는 것이다. 돈을 기대하며 주머니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 속에서

아주 오래된 지도가 나왔다고 한다.

 눈치 빠른 사냥꾼은 그 지도가 무림인들이 노리던 물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어봐야 수명만 단축시킨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이란 어쩔 수 없는지 그것을 팔아서 한몫 잡을 욕심에, 장사에

 도착하여 새로 생겨난 신흥 청부업자에게 절반씩 나누는 조건으로 비도 처

리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청부업자라는 집단이 무공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서 생겨난 조직이고 그들

의 입장에서 보면 일만 잘 처리하면 완전한 대어였기에 당연히 승낙했다.

 그리고 동정호가 있는 악양(岳陽)에서 천선비도를 경매에 붙인다고 하였다

는 것이다.

 "그 말 한치의 거짓도 없으렷다."

 첫째인 당천이 두 장사치를 노려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아이고 나리 저희들도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요."

 떨고 있는 두 상인의 눈에서 진실임을 확인한 무림인들이 하나 둘씩 자리

를 떴다. 아마 밤을 새워 악양으로 달려갈 것이다.

 잠시 후, 무인들로 넘쳐나던 장사루 실내에는 장사치 두 사람을 제외하고

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야기가 좀 억지가 있는 것 같지 않냐?"

 "그래도 다 믿고 갔잖아요, 그럼 된 거죠 뭐."

 자신들이 한 이야기임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서로를 쳐다보

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선비도가 주는 유혹에 그곳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은 장사치들치곤 너무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도를 경매한다는 악양을 향해

서 서둘러서 몸을 움직인 것이다.

 "주인장! 여기 만두 두 판!"

*     *     *

 악양(岳陽).

 농수(濃水), 상강(湘江), 원수(沅水), 자수(資水)의 사대 하천이 들어왔다

가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고, 연화봉이 자리한 형산의 북쪽을 가로막

는 중원 최대의 호수인 동정호(洞定湖)와 당나라 때 이곳으로 좌천되어온

재상 장설(張設)이 만들었다는 누각으로, 두보(杜甫)의 '등악양루'라는 시

로 더 유명해진 악양루(岳陽樓)가 있는 호반의 도시.

 조그마한 이 도시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모든 주루와 객잔은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더 이

상 방을 구하지 못한 자들이 민가에서 유숙을 하는 지경까지 도달했으나 악

양으로 들어오는 무림인들의 수효는 하루하루 더 늘어나고 있었다.

 매도자(賣圖者).

 천선비도를 판다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었

던 천선비도, 그 비도의 주인을 경매에 의해서 정한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비도에 관심을 가진 무림인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한밑천 잡아

보려는 장사치들이 악양으로 속속들이 몰려들었고, 그 장사치들 속에는 장

사할 물건을 가득 실은 마차인지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호위하는 거대한

마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급 주루인 등악루(登岳樓).

 두보(杜甫)의 시에서 따온 이름인 것 같았으나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그

와는 달리 화려한 내부에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일반인이라면 함부로 출입하

기 어려운 곳으로 보였다.

 등악루 삼층.

 의문의 서찰을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육 인의 인물이 있었

다.

 "사형 이것이 사실일까요?"

 백무천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운학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천무룡 백무천 귀하.

 비도 경매. 이월 보름 삼경. 흑의 흑두건.

 사인, 금 천만 냥. 만전루 지하.

 광살루주 배상

 간단한 서찰 한 장. 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들도 매도자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유령시마를 쫓다가 놓치긴 했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칠십 년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개세고수가 자신에게 비도가 없다는 말만

남기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친 것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가 가

장 유력한 용의자였고, 강호상에 소문이 났기에 어디를 가도 그의 행적은

탄로 날 수밖에 없다.

 지친 몸도 풀 겸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 쉰 다음 다시 유령시마를 쫓으려

하고 있는데 문제의 서찰이 전달된 것이다. 그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사실은 이곳으로 몰려드는 무림인들 때문이었다. 비도를 경매한다는 소문이

 근거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많은 자들이 몰려들 리가 없지 않는가.

 "광살루라는 단체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까?"

 또 하나의 의문이었다. 의문의 서찰에 의문의 단체, 강호상에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단체에서 이 달 보름에 비도 경매를 하겠다고 한다. 조금

이라도 알려진 단체 같으면 자신에게 거짓이나 사기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런 집단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는 만전루 지하까지 살펴보았는데

아직은 어떤 조짐도 없었다고 그러더구나."

 벌써 서찰을 받은 지 이틀이 지났다. 서찰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광살루라

는 단체와 만전루라는 객점에 대해서 조사해줄 것을 개방에 부탁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하니 우리 천무맹을 속이겠습니까."

 누가 감히 천무맹을 속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강호무림을 지배하고 있

는 정파의 최고 세력이 천무맹 아니던가. 광살루라는 조직이 지금이야 존재

 자체가 미미한 단체라서 천무맹의 이목에 노출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더 성장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 때 살아

남기 위해서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서찰의 내용을 사실로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런 서찰은 우리 말고도 많은 곳으로 전달되었을 게야. 이렇게 경매 운

운한 것을 보면."

 개방에서 준 정보에 의하면 소림과 곤륜을 제외한 구파 전원과 사천당문,

마세 중에서는 천마맹, 나찰마궁(羅刹魔宮), 흑사파(黑砂派), 개인으로는

유일하게 검만후(劍萬侯) 진남룡(鎭南龍)이라는 인물이 받았다는 것이다.

 "화산, 무당, 아미는 그렇다 쳐도 종남, 청성, 점창도요?"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삼 파가 경매에 참석하겠느냐는 말이었다.

 "이곳은 무림이다."

 무림(武林), 그 한마디에 모든 대답이 들어있다. 자신들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서 백무천을 지지하고는 있지만 임자 없는 보물까지 거저 주지는 않는

것이 무림의 생리 아니겠는가.

 서로 필요에 의해서 아군이 된 것일 뿐, 그런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백무천이 맹주 후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면 바로 등을 돌리는 것이 무림

인이고 또 그래야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비도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돈이면 돈, 무공이면 무공, 모든

것이 우리가 가장 유리합니다."

*     *     *

 "그렇습니다. 정천무룡 백무천이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이

고요."

 점창일검(點蒼一檢) 곡현수(梏鉉洙)의 말이다. 등악루에서 반 시진 정도

거리에 있는 다른 객잔 안. 점창, 종남, 청성 삼 파의 인물들이 모두 모여

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맹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것과 천선비도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 저희

종남파의 의견입니다."

 냉살검(冷殺劍) 정철인(鄭鐵寅)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장문인으로부터 전서

를 받았다. 일억 냥 정도를 추가로 지원할 수 있으며, 나머지 이 파와 협조

가 가능하다면 공조해서 반드시 비도를 입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요."

 이로서 삼 파의 의견이 공동전선 쪽으로 모아졌다. 모두가 검을 다루는 문

파이고, 천검무극류의 비급은 삼 파가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합의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삼 파가 모아온 돈도 기존의 삼억 냥에 또다시 삼억 냥을 추가하여

전부 육억 냥, 이제는 공동파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 대협! 그런데 광살루라는 단체는 도대체 어떤 조직일까요?"

 신비에 싸여있는 광살루, 천하제일의 정보통이라는 개방의 이목마저도 차

단시키고 있는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날 악양에 있는 객점 십여 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중얼거림이었다.

*     *     *

 "살우! 그쪽 똑바로 세워, 숨소리 하나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하란 말이

다."

 살우? 광견조의 소살우를 지칭하는 말인가! 살우라 불린 인물의 얼굴에 미

소가 묻어나는 것을 보니 광견조가 분명했다.

 만전루의 지하.

 이백 평이 넘어 보이는 지하에서 모든 광견조원들과 석두 그리고 백산이

집을 지을 때 쓰이는 목재들을 잔뜩 가져다둔 채로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경극을 공연하기 위한 장소처럼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그 무대 아래

쪽으로는 열 개의 방이 별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도 경매를 위한 자리였다. 이곳에 도착한 후 지난 십여 일간 광견조원들

이 한 작업이었다.

 입구 쪽에 환상미로진을 설치한 다음 내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곳저곳에 자른 흔적으로 보이는 도막난 나무며, 대패를 이용하여 깍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 켜들이 뒹굴고 있었으나 목공사를 하기 위한 도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소살우가 통나무 하나의 길이를 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각 방의

앞면을 막기 위함인지 천장과 높이를 확인한 소살우의 손에서 붉은 빛이 일

렁였고, 통나무를 횡으로 긋더니 곧바로 종으로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연장을 쓰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백산이 언급했던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무공. 생활 속의 무공이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모든 작업을 끝냈는지 백산이 전면의 무대 위로 올라가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좋아 아주 괜찮아. 여기에 탁자 하나를 만들고, 각 방에도 탁자와 의자를

 만들어서 배치해."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각 방들은 조그마한 정방형의 창 모양으로 뚫린 공

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폐쇄되어 있었다. 오직 자신들만이 본인들을 확

인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밀폐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좋다. 이제는 돈 버는 것만 남았다."

 모든 작업을 마친 백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인네의 풍성한 가슴처럼 둥그런 만월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보름, 비도의 경매가 있다고 한 날이다.

 한결같이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한 인물들이 만전루의 지하로 속속들이

도착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문이 열리며 일행

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나타난 열 개의 문.

 별도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하는 곳을 임으로 선택하게끔 해

놓았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각각의 일행이 원하는 곳을 선택하여 들어갔고, 그들이

들어간 만전루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적만이 감돌았다.

 '사형, 대단한 친구들이네요? 누가 비도를 사게 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모두 같은 복장을 요구했군요. 인원도 전부 네 명씩이고.'

 '서로 간에 비밀은 엄수해야지.'

 백무천과 운학자의 전음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광살루주라는 인물의

 머리 씀씀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요구했던 사항은 이곳에 참

여한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고 있었다. 방 자체도 완전하게

밀폐되어 있고 각각의 방을 원하는 사람들이 직접 선택하게 하여 경매를 주

재하는 본인들조차도 누가 어느 방에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천선비도를 팔기는 팔되 자신들도 구매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

겠다는 소리다. 오직 비도 주인만이 자신에게 비도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

다.

 팟!

 갑자기 내부에 불이 켜지면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잠시 후 전방에 마련된 단 위로 이곳에 온 인물들과 동일한 복장에 복면을

 한 인물이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본인이 여러분에게 서찰을 보냈던 광살루주입니다."

 각 방안에 있는 인물들은 광살루주라는 인물을 탐색하기 위해서 면밀하게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특징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특이한 것이라면 목소리로 판단해 보았을 때 상당히 젊다는 것과 무

공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 정도였다.

 "먼저 여기 있는 여러분이 한 가지를 허락하셔야 경매가 시작될 수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잠시 후 저의 부하들이 여러분들의 방으로 군자산이

 들어있는 화분을 하나씩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분들에

게만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헉!"

 "헉!"

 열 개의 방에서 일제히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군자산(君子散).

 산공독(散功毒)의 일종으로 인체에는 해가 없으며 일시적으로 내공을 사용

할 수 없도록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독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당신이 우리를 공격하면?"

 어느 방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극강한 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는

회음전성(廻音傳聲)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의 신분에 대해서 여러

분 각자는 모르지만 저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자산을 풀어놓은

이유는 한 장밖에 없는 천선비도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곳에 들어와 있는 사람 중 누구 하나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전면에 있는 칸막이 정도는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도 경매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게

될 테고 또다시 비도 쟁탈전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여기 있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이다. 그럴 심산이었다면 애당

초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똑똑똑!

 일제히 열 개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차와 화분 하나씩을 들고 있

는 복면을 한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방안에 있는 인물들의 내심으로부터 또

 한번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수였던 것이다.

 화분을 가지고 온 광살루주의 부하들이라는 인물들에서 풍기는 기운은 결

코 자신들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누구이던가. 천하를 지배하고 있고 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무력

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새로이 생겨났음에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지

금까지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의 정체보다 비

도 경매가 더 중요한 사안이다.

 모두들 허락했는지 밖으로 나가는 인물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자신감이었으리라. 결코 자신들을 속일 수 없을 것

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분을 감추려 한다 해도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고 모든 강호인들의 추격 속에 죽게 된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

만 목숨보다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들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경매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한 시진은 넘지 않을 것이고 그 정도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럼 모든 분들이 경매에 참여하시는 것으로 보고 진행 방법에 대해서 말

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탁자 위에 보시면 세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먼

저 백색은 현재 가격에서 백만 냥을 올릴 때 사용하게 됩니다. 흑색은 천만

 냥, 그리고 적색은 두 배로 올리는 깃발입니다. 이점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

 기억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동안 차를 마시던 광살루주가 재차 입을 열

었다.

 "먼저 오늘의 경매품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광살루주의 말과 함께 각각의 방에 뚫린 장방형의 창을 통해 비도를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이들은 목이 타는

듯 연신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철저한 놈이군. 군자산의 효력이 퍼질 시간에 맞추어서 비도를 선보이다

니… 잔머리를 많이 굴렸군. 하지만 이 백무천을 너무 쉽게 봤어. 이까짓

군자산쯤이야 숨만 안 쉬고 있으면 얼마든지…헉!'

 내공을 운기해보던 백무천의 안색이 흠칫 변했다. 내공이 모아지질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방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는지 이곳저곳에서도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당했군. 이것은 나무 냄새가 아니라 군자산이 섞여있었어.'

 그들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느꼈던 나무 냄새, 급조된 방답게 신선한 솔향

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솔향기 속에 군자산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더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

서였습니다."

 미리 중독을 시켜놓고도 더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들은 벌써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해치고자

마음먹었다면 자신들은 벌써 죽었을 것이다.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광살루주라는 인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로지 비도만 팔겠

다는 것이다.

 "그럼 화가 풀리신 것으로 보고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시고 계신 것처

럼 천만 냥부터 시작입니다. 고개를 내밀고 깃발의 색을 확인하셔도 무방합

니다."

 "저기 천백만 냥 나왔습니다."

 "예 저기 이천만 냥 나왔습니다."

 열 개의 방에서 색색의 깃발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깃발이 나오는 것을 멈춘 방은 화산, 무당, 아미 삼 파의 연합이

 있는 방이었다. 그들이 모아온 돈은 전부 오천만 냥, 그것으로는 이곳에

내밀지도 못하는 적은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경매 금액은 어느 사이 일억 구천만 냥까지 와있었

다.

 "이제 세 개의 방만 남았습니다. 삼 번, 오 번, 칠 번 방. 그럼 깃발의 금

액을 한 단위씩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모두들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그리하여 백색 깃발은 천만 냥, 흑색

깃발이 일억 냥, 적색 깃발은 없애는 것으로 되었다.

 "지금 칠 번 방에서 이억 냥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그때 오 번 방에서 백색 깃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예! 이억 천만 냥, 오 번 방입니다."

 "헉! 삼 번 방, 흑색 삼억 천만 냥입니다."

 경매 주재자인 광살루주도 놀랐는지 외치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나왔다

.

 이제 칠 번 방에서도 더 이상 깃발이 나오지 않았다.

 칠 번 방에 있는 인물은 바로 천마맹의 천마군주인 사진악이었다.

 '어떤 놈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역시 백무천이냐?'

 서찰을 받자마자 곧바로 맹에 전서를 보냈었다. 조금 더 구할 수 있다는

전서가 왔었으나 이 정도면 비도를 얻고도 남을 것이라고 전서를 다시 보냈

던 것이다.

 그런데 이억 냥은커녕 지금 무려 오억 냥까지 가고 있다. 이억 냥이라는

거금을 싸들고 왔지만 실패한 것이다.

 맹에 복귀해서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비록 제 일제자였지만 부맹주인 철목승과 친하다는 것 때문에 맹 내에 자

신을 경원시하는 자들이 상당수가 있다.

 그러한 것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천선비도 쟁탈전에 참여했던 이유도 있었

고, 천무맹의 최고 인재라는 백무천과 겨뤄서 이겨보겠다는 욕심이 한몫 했

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히 참패하고 말았다. 백무천이 만상투인전에 참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참석했으면 엄청난 금액을 가지고 있을 것

임을 짐작했어야 했다.

 참혹한 심정으로 앉아있는 사진악의 귓전을 때리는 한줄기 전음이 있었다.

 귀가 번쩍 뚫리는 제안이었다. 기사회생의 회복제였다.

 '천선비도와 똑같은 모조품이 있는데 사지 않겠소? 먼저 가는 놈이 임자지

 뭐, 승낙한다면 고개만 끄덕이쇼. 취익!'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진악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

졌다. 진품, 모조품이 무슨 상관이랴. 전음 속의 말처럼 빨리 도착하면 그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천선비도는 육억 이천만 냥에 삼 번 방으로 낙찰되었다. 그리고 들어

올 때와는 전혀 다른 출구를 이용하여 각각의 방에 있던 인물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그들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있는 모양새가 마치 자신들이 비도

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부 비켜라! 정리하게."

 복면을 벗어버린 백산과 석두가 사방을 돌며 손을 휘젓고 다녔다. 잠시 후

 모든 것이 가루로 부서지고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어디에도 경매를 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가루는 쓸어서 저쪽 구석에 묻어버려."

 광견조에게 지시한 백산이 석두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십오억 냥 정도 됩니다."

 지금껏 광살루주로 변장하고 있던 인물은 바로 석두였던 것이다.

*     *     *

 동정호(洞定湖).

 강수량에 따라서 변동하는 심한 유량 때문에 면적을 알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호수 위에 수십 척의 유람선이 떠 있다.

 서로서로 품새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휘황찬란한 오색등을 달고서 서늘

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는 배들이 보여주는 야경은 세상사 모

든 근심을 녹여주는 아늑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이 비도가 나타내고 있는 지형이 어디란 말인가

…."

 흥청거리는 동정호의 분위기와는 달리 외등 하나만을 달고 있는 어둠 속의

 배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도를 쳐다보고 있는 화려한 금의 청년, 정천무룡 백무천이었다. 육억 이

천만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비도를 샀던 그가 왜 아직 이곳에 있는 것인가.

 바로 비도의 비밀 때문이었다. 지도상의 그림만을 가지고는 그곳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지도, 아무리 상세하게 그렸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지형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비도를 차지하고도 그 비밀을 밝히지 못해 벌써 하루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 결국 견디다 못한 운학자가 오백 년 전의 중원지도를 구해본다며 나간 것

이다.

 그러나 지도라는 것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던가. 군사용으로만 쓰이

는 것이었기에 황실에서 엄격하게 통제를 하고 있는 물건이다. 그래도 강호

에서 오래 묵었던 운학자였기에 지도를 살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돈을

싸들고 나갔는데 벌써 저녁나절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

던 것이다.

 답답해진 백무천이 선실을 나섰다.

 강바람이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자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크

게 심호흡을 하며 폐 속으로 맑은 공기를 가득 집어넣고 있던 그의 시야에

뱃놀이를 하고 있는지 즐겁게 웃고 있는 일남 삼녀가 보였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언제 한번 저렇게 한가한 시간을 가

져보았던가. 아홉 살의 나이로 공동파에 입문하여 오로지 무공만 익혔고,

맹주의 제자로 발탁되어서도 한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사형제들과의 경

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들을 무공기서와 씨름하면서 하얗게 새

우곤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이 그렇게 보낸 세월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후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강

호 최고가 되어보겠다는 꿈과 야망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돌아가면 수연에게도 신경을 좀 써야겠구나.'

 뱃놀이에 여념이 없는 네 사람을 보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조금 미안한 생

각이 들었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던 배에서 들려오는 소성이 그의 상념

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말았다.

 "사람은 역시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니까. 뇌룡현 하고 이곳은 정말 비교가

 안 돼. 이 시원한 강바람, 아름다운 미녀… 사공 그렇지 않소?"

 그놈이다. 저 특유의 목소리, 자신을 깔보고 무시했던 버러지 그놈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지금이 꼭 그 짝이질 않은가.

 아득한 상념에 잠겨있던 백무천의 눈이 먹이를 찾는 매처럼 빛나기 시작했

다.

 백무천이 그놈이라 부르고 버러지라 부르는 인간은 세상천지에 한 명밖에

없다. 바로 백산이었다. 모든 작업을 끝내고 흡족한 마음으로 광견조와 석

두에게 회식을 시켜주다 소운의 등살에 못 이겨서 이곳 호반으로 뱃놀이를

나온 것이다.

 "오랜만이군, 버러지! 역시 세상은 너무 좁아."

 "엥 금뎅이? 아직 안 떠났나 보네?"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다. 한참 뱃놀이에 푹 빠져있던 네 사람은 갑작스런

백무천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촌놈이 이곳까지 오더니 기녀를 끼고 뱃놀이라…."

 정면에 있는 백산을 노려보느라 등을 돌리고 있던 세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 백무천은 단지 동정호 주변에 있는 기녀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보세요, 백 공자! 기녀라뇨?"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소걸영 구소운인 것을 확인한 백무천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표정을 풀며 얼굴 가득 비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어이구! 그 이름도 쟁쟁한 소걸영 구소운 여협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저런 잡 벌레 같은 놈하고 같이 계신지… 개방의 원로들께서 보시면 칭찬하

시겠소이다. 이런! 백면마에 빙혼마녀까지… 마의 주구들과 내통이라도 하

시는 게요?"

 단순한 기녀로만 알고 있던 여자들의 정체를 확인한 백무천의 얼굴에 희열

의 빛이 떠올랐다. 소걸영이라는 개방 최고의 후기지수에, 천마맹의 주요인

물인 백면마 냉추렴, 그리고 빙혼마녀 조천영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이들을 처리할 방안이 착착 세워지고 있었다. 일단

백면마 냉추렴을 제압하고, 구소운은 적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한다. 빙혼마

녀 조천영과 버러지는 수장을 시켜버리면 간단하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철목승하고 풍신개 선배는 어디 갔나?"

 이 정도면 완전히 안하무인이다. 철목승 대협도 아니고 그냥 철목승이라

하고 있다.

 철목승과 풍신개가 없는 이상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말을 너무 막 하는 것 아니에요, 백 공자?"

 소운이 얼굴이 붉어진 채 백무천을 노려보았다. 천무맹의 삼 공자라는 사

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너무 몰상식했던 것이다. 저런 인물이 어떻게 정

파의 기둥이 되었단 말인가.

 "말을 막 한다고? 맹의 정보통인 개방의 인물이 촌구석의 버러지 같은 놈

과 놀아나지를 않나, 그것도 부족해서 적과 같이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잘했다고 박수라도 칠까?"

 "그, 그것은…."

 "소걸영 구소운, 너를 맹의 반역죄로 체포한다."

 백무천이 엄중하게 말함과 동시에 소운을 향해 다가섰고, 소운은 얼굴이

붉어진 채 백산만 쳐다보았다.

 "우습구나, 천둥벌거숭이 놈. 이놈저놈 떠받들어 주니까 네가 최고인 줄

아느냐, 쥐새끼!"

 뜻밖에도 백무천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는 조천영이었다. 안하무인, 예

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백무천의 행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산과 함께 있으면서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있었지만 조천영

이 누구였던가.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공포의 그 이름, 바로 빙혼마녀가 아

니던가.

 그런 그녀에게 마의 주구니 뭐니 모욕함은 물론이고 자신들과 같이 있었다

는 이유만으로 반역죄를 저질렀다며 소운을 체포한다고 말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백무천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그녀에게 하늘과 같은 서방

님을 버러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말도 좋게 나갈 리가 없

었다.

 "아싸! 우리 각시 잘한다. 저 금뎅이 새끼 완전히 보내줘 으응."

 옆에 있던 백산이 한술 더 뜨고 있다. 마치 엄마에게 떼쓰는 아이처럼 그

렇게 조천영에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겁에 질린 사공이 노를 저어서 배를 뭍으로 댔는지 어느 사이 호숫가 근처

까지 와 있었다.

 "내려라! 쥐새끼, 서방님을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는지 보겠다."

 투신전 이후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는 조천영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새파

란 살기가 일렁대고 있었다.

 "서방님? 호호! 마녀와 버러지와의 결합이라… 버러지도 한 가지 재주는

있었나 보지? 밤 기술 말이야."

 여전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이 다 협공한다 해도 능

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더구나 고금오천무까지 익히고 있는 자

신을 누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철목승이라는 바람막이가 없는 저들은 그

저 바람 앞에 있는 등불일 뿐이다.

 버러지와 마녀는 죽이고 구소운과 백면마는 잡아가면 그만인 것이라 생각

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나 세상일이란 것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금방 나타났다.

 조천영으로부터 밀려오는 극강의 기운, 아무런 무언(武諺)도 없이 그냥 내

젓는 손에서 뼈를 얼릴 듯한 한기가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습이었다.

 공동파의 최고 신법인 행운유수(行雲流水)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되었기에 맞받아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뇌려타곤(懶驪打滾), 조천영의 일장을 피해 거칠게 옆

으로 굴렀던 백무천이 벌게진 얼굴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치욕이었다. 대천무맹의 삼 공자가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땅을 구

르다니. 그런 그의 귓가로 머릿속에서 이성이란 단어를 지워버리는 한마디

의 말이 들려왔다.

 "소운, 냉 소저, 잘 보시오. 피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저렇게 구르는 것

이 최고야. 저것이 정파 최고의 무공인 금황신공의 최후 절초라고, 알았어!

 누님 잘했어요. 조금만 더 죽여 놔, 그 다음에는 내가 처리할게."

 "금황신공(金黃神功)!"

 포로고 개방이고 이제는 다 필요 없다. 그냥 다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미

이성의 끈이 풀려버린 백무천이 자신의 최고 무공인 금황신공을 펼치고 있

었다.

 그러나 투신전에서 일곱 마리까지 보였던 금룡(金龍)이 지금은 다섯 마리

밖에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청면혈마와의 결투에서 입은 내상이 아직 낫지 않았는가. 그것은 결코 아

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이 옳았다. 분기탱천하여 이성을

 잃어버린 백무천이 완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공이 강해지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심리 상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기

마련이다. 정화된 마음속에서 최고의 실력이 나온다는 것은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백무천의 상태는 정화된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태였으니

… 상대를 한꺼번에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을 일절 할 수 없었

기에 제대로 내공을 끌어올리지도 않고 무공을 펼친 것이다.

 "빙백수라무(氷白修羅武)!"

 조천영 또한 그녀의 최고 무공을 펼쳐냈다. 백산과 같이 생활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적의 실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회를 얻었을 때 확실

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십이 성 완성된 빙천수라마공을 펼쳐버렸다

. 죽이지 말라는 백산의 전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얼음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백무천이 만든 다섯 마리의 금룡을 향해 새하얀 빙백의 화살이 빛살처럼

밀려들었다.

 콰앙!

 두 개의 고금오천무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부는 결정이 나있었다. 비슷한 위력을 가진 무공을 한

쪽은 십이 성 다 익히고 있었고, 한쪽은 팔 성 정도 익혔으나 제대로 통제

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오성 정도밖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다섯 마리의 금룡들이 맥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것이

백무천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했

으나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커억!"

 이번엔 실제로 뼈가 저렸다. 가슴에 격중된 빙백수라무의 한기가 호신강기

마저 뚫고 온몸을 장악해 버렸다. 뒤쪽으로 날아간 백무천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울컥! 저 마녀가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입으로는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자신의 패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철목승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상대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마녀에게 패한 것이다.

 천무맹의 삼 공자이며 차기 맹주 후보인 자신의 위명에 엄청난 먹칠을 하

고 말았다.

 재빨리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으나 생각보다 내상이 심했다. 현재 운용 가

능한 내공이 삼 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고, 이 정도의 내공으로는

자신의 절기인 금황신공을 운기하지 못한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공동파의 무공과 달마삼검밖에 없다.

 "다음부터 주둥이를 놀릴 때 조심해서 해라, 한번만 더 그러면 그때는 머

리통을 얼려 버릴 것이다, 쥐새끼!"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조천영이 백무천을 노려보았다.

 "연약한(?) 소저를 괴롭히는 색적(色賊)은 나의 검을 받아랏!"

 이건 또 웬 쉰 소린가. 한쪽 구석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백산이 이상한 말

을 지껄이며 조천영의 옆으로 뛰어나왔다.

 마치 누가 들으면 정말 정의의 사도가 나타난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진지

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백 공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가 다 처리해 놓으니까…."

 백산과 광견조를 따라다니면 모두들 이상하게 변하는 것인지 냉추렴도 지

금의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즐기는 눈치다.

 상대가 천무맹의 삼 공자라는 영향력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욕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헤벌쭉 거리며 냉추렴을 향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야비한 자식, 하는 짓도 치사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그래도 조천영이 무서웠던지 버러지란 말을 쓰지는 못했다. 두 눈 가득 살

기를 머금은 백무천이 백산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그렇게 모욕을 줄 때는

한쪽에서 숨어 있더니 내상을 당하자 마치 구세주인 양 목에다 힘을 주며

등장하는 것이다.

 "야비하다고? 내가? 그럼 정식으로 하지 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던 백산이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생은 철혈투의 투신 백산이라고 하오. 정천무룡 백무천 대협께 정식으

로 비무를 청하오이다."

 컸다.

 저 넓은 동정호 끝까지 들리도록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특히

 정천무룡 백무천이라고 할 때는 지금보다 더 크게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비도 경매 때문에 와있던 동정호 근처의 모든 무림인들이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목소리도 컸지만 어색한 포권까지 취하며 정중하게 비무신청을 하는 모양

새가 어디서 보기는 본 모양이었다.

 칼을 잡은 무인이란 족속들이 먹고사는 게 무엇인가. 밥이 아니다. 대부분

 자존심과 명예란 놈을 먹고산다. 상대가 아무리 야비한 놈이라도 이런 경

우에는 응해주어야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이런 정식비무를 거절하게 되면 강호인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 아니라

얼굴을 들고 강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름 있는 자들은 강

호 활동하기가 더욱 힘이 든다고들 한다.

 하물며 천무맹의 삼 공자이며 차기 맹주 후보이고 또 정도 제일룡이 아닌

가.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몸 상태와는 무관하게 비무에 응해주어야 체면이 살게 되기 때문이

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인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틈타서 비무 요청을 하는 행위

에 대해서도 불명예라 생각한다. 즉 이런 경우에는 다음에 하자는 정중한

말을 남기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예의고 명예란 말이다.

 그러나 비무 요청 자는 백산이다. 명예를 개떡같이 아는 놈인데 그런 것에

 신경 쓸 위인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기회를 잡았다고 좋아할 놈이 바로

백산이다.

 "이 비무는 불공평하이. 상대의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비무를 하자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을 아는가?"

 백무천의 사형인 운학자였다. 관부까지 가서 거금을 주고 군사지도를 구입

해 서둘러서 배로 돌아왔으나 정작 백무천이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나

갔거니 하고 기다리다 호숫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놀라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제인 백무천이 내상을 당해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고, 저 버러지

같은 놈이 비무신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철혈투의 투신이라며… 기

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많은 수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

에 나설 수도 없다.

 버러지 놈이 이것을 노리고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정말 버러지에 어울

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비무만은 피해야 했기에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공동파의 연장자로서 정중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오늘은 졌다고 선언해 주십시오. 다음엔 제가 도전을 받아드리겠습

니다."

 정중했다. 약은 놈이 많은 무인들이 보고 있다고 느꼈는지 생전 써보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졌다고 선언하게 되면 천무맹의 삼공자

이고 차기 맹주후보인 정천무룡 백무천이 자신의 기세(氣勢)에 겁먹어 칼

한번도 뽑지 못하고 항복했다고 소문을 낼 놈이다.

 "자네가 무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비무라는 것은 말일세. 공증인

이 꼭 있어야 하네. 그런데 여기에는 자네 일행과 그리고 우리들밖에 없질

않나. 그렇게 되면 정식적인 비무가 될 수 없는 거라네."

 일단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이지만 생각해보니

그럴싸했다. 그리고 천무맹의 일인데 누가 감히 나서서 공증인이 되어주겠

냐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다. 백무천이 회복되면 그때 적당히 손을 봐주면

 되는 것이다.

 이기지 못할 리야 없지만 상대가 철혈투의 투신이라고 했다. 이기는 방법

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간단하게 이겼느냐 아니면 간신히

이겼느냐 하는 것이 이름이 있는 무인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백무천의 상태로는 저 버러지 놈을 단숨에 밟아버릴 수 있는 입장

이 아니다. 이겨도 본전인 상대에게 시간까지 길게 끈다면 두고두고 강호인

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공증인을 들먹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들에게 마가 낀

날인지 또다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천마맹의 사진악이오. 저 정도면 공증인이 될 만합니까?"

 이제는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버린 운학자였다. 공증인이 없어서

비무를 못한다고 했던 것인데 백무천의 가장 호적수인 마군자 사진악이 공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그냥 졌다고 하라니까 그럼 내가…."

 "정천무룡 백무천이 비무를 받아들이겠소이다."

 그도 주변의 이목을 느꼈는지 정중하게 화답을 했다. 아무리 자신의 몸 상

태가 정상이 아니라지만 뇌룡현의 버러지 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정식비무에서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

어버린 빙혼마녀 조천영의 발을 묶어둘 수 있는 것이다.

 아예 죽여버리면 시간을 좀 끌더라도 자신의 명예에 흠이 가지는 않을 것

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진악 또한 백무천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궁금했다.

그가 궁금한 것은 백무천의 무공수위가 아니라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뒤통수를 날려버린 백산이란 친구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철목승에게 물었으나 웃기는 친구라고만 했을 뿐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

다.

 "추렴아, 저 친구 어떠냐?"

 포괄적인 물음이었다. 무공이며 인간 됨됨이 등등 전체적인 것을 묻는 것

이다.

 "음… 편해요, 무공을 익혔다 해서 뻐기는 것도 없고 그냥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편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 너무 엉뚱하고… 또 강해요."

 사진악의 얼굴색이 변했다. 백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냉추렴의 얼굴에

 언뜻 스치고 지나는 안타까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맹에서의 사건도 있었지만 남자를 우습게 보는 냉추렴이 백산이란 저 청년

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를 고심하는 표정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설마….'

 아닐 것이다. 생긴 것도 배경도 없는 저런 평범한 청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사진악이 고

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천하제일인의 제자인 냉추렴

의 입에서 강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자신의 무공은 약해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철목승의 무공만 보아온 그녀

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강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대단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맹주도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 했던 모양이었다.

 '싸우는 것을 보면 알겠지….'

 "오라버니, 저곳에 천마군 말고 또 다른 이들도 있어요? 아는 사람들 같기

도 하고…."

 "너의 무공이 많이 진보했구나. 천마군의 기운 속에서 이질적인 기운들을

찾아내다니…."

 사진악이 놀라운 눈으로 냉추렴을 쳐다보았다. 천마군이 은신해 있는 저

속에서 자신도 파악하기 힘든 기운이 섞여서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냉추렴도 그것을 감지해내고 있었다. 만상투인루에 가기 전과 비교하

면 냉추렴의 무공은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악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동안 백산 일행과 같이 오면서 겪었던 일련

의 사건들, 직접 나선 적은 없었지만 귀혼곡, 독령곡, 그리고 광견조의 무

공훈련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더욱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친구군….'

 백산에 대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일

행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봐, 금뎅이. 얼마 전에 우리 약속한 것 있잖아? 그거 안 지켜도 돼, 금

황신공 써도 상관없어."

 만상투인루에서 했었던 약속, 백산과 싸울 땐 달마삼검만을 쓰겠다며 호언

장담했던 백무천의 약속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 백무천의 상태는 금황신공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다. 알고

그런 것인지 그냥 하는 소린지 백무천의 약점을 계속해서 찔러가며 화를 돋

우고 있었다.

 "네놈에게는 달마삼검도 과분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것만 사용하도록

 하지."

 어차피 사용하지도 못하는 금황신공인데 더 잘되었다 싶었다.

 모름지기 인간에게도 격이 있듯이 대응하는 무공에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

 버러지는 버러지에 어울리는 그런 무공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백무천

의 생각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자 간다!"

 백산의 몸이 백무천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는 듯 걷는 듯, 두

발을 동시에 모아 뛰는 것 같은 백산만의 특이한 보법, 일명 천방지축팔방

무(天方地軸八方舞)가 펼쳐지고 있었다.

 백산의 특이한 보법을 응시하던 백무천이 자신의 허리에서 무엇인가를 뽑

아내며 가슴 앞에 일자로 세웠다. 검이었다. 무기가 전혀 없어 보이던 백무

천의 무기는 뜻밖에도 연검이었던 것이다.

 백산의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던 백무천이 검을 앞으로 뻗어내며 일갈

을 내질렀다.

 "이것이 바로 달마삼검(達摩三劍)이다, 번뇌일섬(煩惱一閃)!"

 인간사에서 생겨나는 백팔 개의 번뇌를 한 줄기 번개로 모두 베어낸다는

달마삼검의 제일초인 번뇌일섬, 한줄기 뇌전(雷電)이 백산을 향해서 위협적

인 기세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몸도 빨랐다.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서 날아오는 뇌전을 모

로 돌며 피하고, 그대로 백무천의 가슴팍까지 파고듦과 동시에 그의 턱을

향해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일 권을 뻗어 올렸다.

 "퍽! 와작!"

 순식간의 일이었다. 처음 시작이라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백무천

의 안면에서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정권의 충격으로 얼굴이 그대

로 젖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빠지고 있는 백산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바

로 그 모습이었다.

 "금뎅이! 인간은 항상 입을 조심해야 돼. 감히 이 백산의 부인보고 뭐가

어째? 우리 부인의 말대로 네놈은 쥐새끼야, 그것도 생쥐새끼… 왜 금황신

공으로 한번 날려보지?"

 백무천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놈은 자신이 금황신공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저렇게 기

고만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공이 미약한 놈이었기에 망정이지 고수였다면

자신의 얼굴이 사라졌으리라. 일초도 아깝다고 생각했던 놈이 자신의 검세

를 뚫고 공격을 해왔다.

 백무천이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무극무변(無極無變)!"

 모든 것이 극에 이르면 변화는 사라진다. 달마삼검의 이초 무극무변이 펼

쳐지고 있었다.

 무변이란 말답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하나하나의 검만이 천천히 백산

의 미간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용의 그림을 그리던 화공이 마지막 눈동자 하나를 그려 넣기 위해서 온힘

을 다 짜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수, 백무천의 검 끝에 천지간의 모든

힘이 담겨있었다. 단순한 찌르기가 아닌 모든 공간을 향해 찌르고 있는 것

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일 뿐이다. 광풍권(狂風拳)!"

 이제는 작명실력이 극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정권 지르기를

광풍권이라 외친다.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던 백산의 왼쪽다리가 들어올려졌

다 힘차게 앞으로 내뻗치며 강력한 진각(震脚)을 쏟고, 허리춤에 있던 오른

손 정권이 회전하면서 급격한 풍압을 만들어내며 검봉(劍鋒)을 향해서 그대

로 질러갔다.

 콰앙!

 검과 정권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백산의 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회

수되고 있는 백무천의 검을 따라 그대로 이동하더니 오른발이 그의 면상을

향해서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허억!'

 백무천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검이 회수

되는 그 순간을 이용해서 접근해오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으로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백무천이 호신강기를 최대로 끌어

올려 어깨를 보호하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백산의 발을 향해서 내밀었다.

 "허초?"

 날아오던 놈의 발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다른 공격에 대비했을 때는 그

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

만이 아니었다. 한번 승기를 잡은 놈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속

해서 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달마삼검을 펼치기 위한 기수식을 취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검

을 들고 있는 오른쪽 팔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해서 검을 놓칠 뻔했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발길질이었으나 자신이 자세를 잡을라치면 살짝 살짝

건드려서 무게 중심을 흩트려 놓고 있었다.

 다시 또 안면에 느껴지는 충격.

 이번에는 놈의 발끝이 아까 맞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혔다.

 또다시 뒤로 물러나는 놈.

 "생쥐새끼, 입, 입을 조심하라고, 알았나? 금황신공을 펼치라니까?"

 놈은 계속해서 이죽거리고 있었다. 조천영과 구소운에게 한 말에 대한 화

풀이를 하듯 계속해서 입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백무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절대의 수비초식이자 공격초식인 달마삼검 중

이 검이 저놈에게 당했다. 지금 저놈의 신경전에 말릴 때가 아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놈! 이제 그 수법은 안 통한다. 무변무망(無變無望)!"

 백무천의 검에서 금빛 광채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전 내공을 다 쥐어짰

는지 그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무변무망, 변화도 없고 바랄 것도 없으니 이것이 곳 해탈의 경지가 아니겠

는가!

 백산의 앞쪽 모든 방위에서 죽음의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촘촘한 그물

이 되어있는 죽음의 기운은 사방팔방으로 얽히고설키며 주어진 모든 공간을

 사멸시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백산도 긴장했는지 불끈 말아 쥔 두 주먹과 대지를 딛고 굳건하게

서 있는 발에는 불그스레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대한 죽음의 그물을 향해서 몸을 날린 백산이 붉게 변한 손과 발을 뻗어

냈다. 같은 장소만을 계속해서 타격하는 그의 손발에 의해서 죽음의 그물이

 찢어지고, 백산의 몸이 조금씩 사망(死網)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를 본 백무천의 안색이 변하며 다시 한번 일초인 번뇌일섬을 펼쳤다.

 절체절명, 죽음의 그물 안에 갇힌 채 손발을 이용하여 백무천을 향해 다가

가던 백산의 머리 위로 뇌전이 떨어지고 있었다.

 "크윽!"

 "커억!"

 백산의 몸이 뒤로 빠진 것처럼 느껴지더니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

왔다.

 뒤로 약간 움직여 틈을 만든 백산이 위에서 떨어지던 백무천의 검을 어깨

로 받으며 그대로 돌진하여 또다시 백무천의 턱을 날린 것이다.

 "백랑! 오라버니!"

 한쪽으로 쓰러진 백산이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자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백무천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흘렀다.

 자신의 일검을 어깨로 받았다. 아무리 전 내공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할지라

도 그 정도면 아마도 내부는 가루가 되었으리라.

 이겼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눈에 가시 같던 버

러지를 처치한 것이다. 만상투인루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야 마무

리를 지었다.

 버러지는 버러지의 인생을 살아야만 제명대로 살 수가 있다. 버러지가 인

간처럼 살려고 하면 지금과 같이 되는 것이다.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던 백무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버러지가 신음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

는 것이다. 이제 자신도 더 이상 힘이 없다. 만일 버러지가 다시 공격해 온

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쥐새끼, 내가 졌다. 네놈이 승자다."

 일어서던 버러지 놈이 다시 쓰러지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은데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잘했다. 가자, 사제!"

 온몸에다 힘을 잔뜩 주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오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

음을 옮겼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백무천의 상태가 너무 선명하게 들어

왔다. 백무천의 후들거리는 다리를 바라보며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

들, 조천영과 소운 그리고 냉추렴이었다.

 "갔어요, 빨리 일어나요!"

 소운이 백산을 발로 툭툭 차며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 뇌룡현 갈대밭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 백산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갔다고?"

 먼지를 툭툭 털고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백산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비무를 했냐 싶게 그의 몸은 말짱했다.

 "왜 그랬어요?"

 "재미있잖아."

 "재미…?"

 "빨리 와!"

 "야! 모사, 도로 돈 내놔 임마. 형님이 이겼잖아."

 "왜 이러쇼, 형님이 졌다고 하지 않았소."

 "재미로 그랬다잖아! 근데 석두 형님, 왜 저 자식 죽여 버리지 않았죠?"

 광견조원들도 어느 사이 이곳에 나와 있었는지 서로들 내기를 하고 있었다

. 그리고 백산이 백무천을 살려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저놈 죽였다가는 천무맹에서 떼거리로 몰려올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 하

냐, 임마."

 "그 새끼들도 다 죽이면… 천무맹 놈들이 몇 명이나 되는데요?"

 "만 명이 넘어."

 "씨펄."

 사라지는 백산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사진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이겼는데도 진 것처럼 꾸미고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 일행들.

 목숨보다 명예를 우선하는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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