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탐욕(貪慾)
챙!…챙!…챙!
"으--악!"
저 멀리서부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사람이 죽어가는 듯한 비명소리 등
이 들려오고 있었다. 천선비도라는 보물이 이제는 완전한 마물이 되어 수
없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단순한 양피지를 피를
먹는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야!"
백산이 일행을 데리고 온 곳은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니 들어차 있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약간 경사진 구릉이었다.
"독연(毒煙)인가 보군."
뿌연 안개에 막혀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다수의 무림인들을 쳐다
보며 갈태독이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순간에도 과감하게 독연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목을 붙잡고 튀어나오는 무인도 보였다.
자신의 능력도 가늠하지 못하고 욕심만 앞선 무림인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
도 없이 무작정 독연으로 뛰어들었다가 중독되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
혀를 끌끌 차던 일행이 백산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구릉 아래쪽에 있는 거
대한 동굴이었다. 절벽처럼 생긴 곳의 아래쪽 움푹 들어간 부분에 있어서
여간해서는 발견되지 않을 그런 동굴임에도 마치 아는 길처럼 거침없이 일
행을 이끌고 있는 백산이었다.
동굴 입구에 환상미로진을 설치하여 마차를 감춘 일행은 동굴을 통해서 백
산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각 정도를 걷자 위로 통하는 조그마한 구멍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아-! 후화-!
탄성소리였다. 밖으로 나온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햇빛이 투과되어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운무 덩어리였다.
독연(毒煙)이 분명할진데도 눈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움이란, 이래서 죽도록
아름답다는 말이 생겨난 것인지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왜 저 독연이 이곳에는 없는 거죠?"
소운이었다. 자욱하니 흐르고 있는 저 죽음의 공포가, 그들이 서 있는 이
십 장 정도의 공간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중화독지대(中和毒地代)라서 그런 것이다."
독에 대한 식견이 가장 많은 갈태독의 말이었다. 그도 처음 이곳을 발견하
고는 무척 놀랐다. 백산을 따라서 나온 곳이 바로 독공을 익힌 고수들에게
만독지(萬毒地) 다음으로 찾기를 갈망하는 중화독지대였던 것이다.
모든 독물이 썩어서 연못을 이루었다는 만독지, 그곳의 독을 흡수하게 되
면 독공고수의 최고 경지인 독성지체(毒聖之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지만
잘못 흡수하게 되면 자신도 녹아들어 만독지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위험도
안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중화독지대(中和毒地代)는 만독지와는 전혀 다르게 형성된 곳이다.
수없이 많은 독초와 독물들이 모여 생태계를 유지하게 되는 곳에서부터 중
화독지대는 시작된다.
독초와 독물들이 뿜어내는 독연들이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지역에서 쌓이
고 또 쌓여 독초와 독물들이 만들어내는 독보다 더 강해지게 되고, 이에 맞
추어 독물들의 독 또한 점차 강해지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에 적응하여 생존하는 동식물이 생겨나는 것처럼, 그
독연에 적응해 가는 독초와 독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고, 어느 순간부터 모든 독들이 중화(
中和)되어 중독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는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현상이 자연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독연에 견디며 살아가던 독물들이 자연 이 공간으로 모여들게 되고
중화독지대는 말 그대로 독물의 천지가 된다.
"그런데 이곳에는 독물이라곤 아무 것도 없잖아요."
온통 바위들뿐이고 듬성듬성 풀이 돋아있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운이 이상
하다는 듯이 물었다.
"바로 네 옆에 있는 돌을 한번 들어보렴."
갈태독이 빙그레 웃으며 소운의 옆에 있는 사람 머리만 한 돌을 가리켰다.
"꺄악! 이게 뭐야?"
소운이 비명소리와 함께 한 발짝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녀가 뒤집어 놓은
조그마한 돌 밑에는 새빨갛고 손가락 크기만 한 뱀들이 수십 마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혈홍사(血紅蛇)군!"
혈홍사, 중원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희귀종이다. 남만이나 묘강에서만 서
식하고 크기는 두 치 정도밖에 안 되지만 가지고 있는 독은 치명적이어서
물리기만 하면 해약이 없다고 알려진 무서운 뱀이다.
그런 특성으로 해서 묘강이나 남만의 고수들이 암기로 많이 사용했기에 중
원까지 알려진 뱀이 혈홍사이다.
"이곳 중화독지대에 있는 독물들의 독성은 같은 종류의 다른 곳에 사는 놈
보다 열 배 이상 강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독보다 더 강한 독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가지고 있는 독이 더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독물들의 독성이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상하네? 옛날에 이곳에서 대가리가 금빛인 뱀에 물린 적도 있었고, 저
놈들을 엄청 잡아먹었는데도 왜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
백산이 이곳을 쉽게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과거에
아버지와 혈랑 떼를 찾는다고 산을 헤매고 다닐 때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
다.
아버지가 이곳이 중화독지대인지 알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곳에
서 육 개월 간이나 기거하면서 무수히 많은 독물들을 잡아먹었다.
"그것이 바로 이 중화독지대가 만독지보다 낫다는 이유다."
이곳에 있는 독물들의 독성이 다른 어떤 곳의 독물보다 강하지만 이 안에
서만큼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중화독지대의 이독제독 현상에 의해서 균
형을 이루어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못하지만 최고의 독 덩어리가 바로 중화
독지대의 대기이다 .
어떤 독도 이곳으로 침투하게 되면 바로 중화되어 버린다. 인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몸속에 독은 그대로 남아있고 중독되지 않으니 독공을 연마하는 고수에게
그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갈태독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자식들, 이런 것 먹어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백산이 이곳으로 온 이유 중 하나가 광견조 때문이기도 했다. 석두나 일휘
는 그의 타혈법을 가장한 구타 덕분에 꾸준히 복용했던 만년석균을 거의 흡
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신들이 복용했던 만년석균을 칠 할 정도
밖에 흡수하지 못하고 몸속에 그대로 썩히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세우로부터 받았던 광혈단이 독단이었다는 것과 그것이 복용자의 잠력
을 극도로 격발시킨다는 것을 알고는, 독을 이용해서 광견조가 흡수하지 못
한 만년석균을 흡수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자신이 먹고 이상이 없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독이 없는
것을 골라서 주셨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갈태독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아, 맞다. 저속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이 극악한 놈이 독물들도 독을 흡수할 때만 들어가는 독연 속으로 광견조
원들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살우가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백산을 향
해 입을 열었다.
"형님! 어렸을 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먹었던 것이 뭐요?"
"왜?"
"그냥 궁금해서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백산의 말에 주저주저하는 모양새가 무엇인가 있
기는 있는데 소살우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간절한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두꺼비다, 두꺼비!"
두꺼비라는 백산의 말이 떨어지자 소살우를 주시하고 있던 광견조들이 몸
을 날리며 바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녕 빛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한 마리 있다! 내가 먼저 봤어 새끼야!"
"무슨 소리야. 먼저 잡은 놈이 임자지!"
두꺼비를 찾았는지 광견조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열두 명의 광견조원들이 손에 두꺼비처럼 생긴 독물들을 하나씩
들고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더니 다시 소살우가 그놈의 뒷다리를 잡고서 백
산을 향해서 다가왔다.
"형님! 이놈을 어떻게 드셨습니까?"
"그냥 날걸로 씹어 먹었어!"
이번에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바로 대답해 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야! 날것으로 그냥 먹었데."
"근데 좀 그렇다. 아무리 정력제라지만 날것으로 먹는다는 게…."
소살우가 뭘 먹었냐고 물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밤새도록 할
수 있는 비밀, 바로 정력제였다. 어린 시절 백산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은
들은 소살우가 그때 먹었던 음식을 물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고개를 돌리
며 키득거렸고, 백산을 비롯한 일행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바로 독중제왕이라는 삼목섬여, 눈이 세 개가 달린
두꺼비로 독공 고수들이 찾는 영약 중에 영약이었다. 그런 삼목섬여를 정
력제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광견조원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목섬여라는 절대독물을
씹어 먹고 있었다.
"지네도 먹었어!"
"거미도 먹었어!"
"뱀도!"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의 바위들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로 생식을 해왔던 광견조, 이런 것 먹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보이는 족족 잡아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석두와 석숭 그리고 여자들까지 그들의 행동에 동참
하고 나섰다. 그들도 정력을 강화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었다. 갈태독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지금 먹고 있는 저 독물들은 이곳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이 독령곡
밖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거의 만독불침(萬毒不侵)에 가까운 신체를 얻게
될 것이라 했다.
뒤집혔다. 이제는 금령과 은령까지 합세하여 눈이 뒤집혀서 독물들을 먹고
있었다.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무인,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도 단순한 독에 당해서
저승으로 간 무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기연을 앞에 두고 있는데 눈이 뒤집히지 않으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수천 년을 편안하게 살아왔던 독령곡의 독물들이 때 아닌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백산 일행들이 총출동해서 독물을 잡아먹고 있는 장소에서 오십여 장 떨어
진 곳.
뿌연 독연 속에서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독연보다 더 무서운 살기를 뿌려
대며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한쪽 구석에는 몸 고생이 심했는
지 온몸이 피에 젖어있는 무영비추 수구해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는 무림인들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기에, 안개가
자욱하니 끼어있어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전력의 경공을 발
휘하여 덥석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로만 알았던 뿌
연 운무가 지독한 독연이었던 것이다.
재빨리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해독단을 먹었으나 독연이 얼마나 지독한지
별로 버티지도 못했다.
그래서 다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저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잔독사마 중 삼 인과 독각삼수(獨脚三手) 방만구와 그의 동생 등 십여 명
의 인물들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던들…."
이미 내장이 녹아들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힘이 들
었다.
'비도를 맹주에게 전해야 하는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는지 서서히 눈을 감고 있던 그의 눈에 빙긋 웃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열 명의 고수가 난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 사이에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다.
바로 옆에는 백발의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인도 같이 서 있었다.
백산이었다.
그의 일행이 광분하여 독물을 찾아다니는 것을 쳐다보던 백산이 반드시 운
공을 해야 한다며 주의를 주고는 갈태독과 함께 이곳으로 온 것이다.
"영감! 이 사람 아까 그곳으로 데리고 가쇼."
자신보다 나이가 좀 많으면 다 영감이다. 말도 반공대로만 한다. 이곳까지
오면서 백산의 그런 언행에 몇 번이고 화를 냈으나 개선되는 것은 없고 자
신의 울화만 커졌던 갈태독이었기에 더 이상 말투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
았다. 그것이 오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모
르는 것이 있었다. 백산이 영감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래도 인정해 주는 사
람이라는 것이다.
갈태독이 은밀하게 수구해를 안고 사라지고 수구해가 있던 자리에는 백산
이 앉아서 무림인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백산의 귓전으로 또 다른 무림인이 은밀하게 날아 내리는 소리가 들
렸고, 재빨리 수구해가 있던 자세로 고쳐 앉았다.
백산 앞으로 다가온 인물은 칠십 년 전 유령마공(幽靈魔功)으로 악명이 높
았던 유령시마(幽靈屍魔) 예인상(禮仁像)이었다.
낙양(洛陽)의 망산 어딘가에 은거했다고 알려진 그도 천선비도의 쟁탈전에
참여한 것 같았다.
백산 앞으로 날아 내린 예인상은 아직도 자신의 뒤쪽에서 싸우고 있는 십
여 명의 무림인들을 흘낏 일별하고는 백산의 품속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만큼 유령시마의 신법은 가공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 중 누구 하나
고수 아닌 사람이 없었다.
독령곡의 독연을 견디고 들어온 무인인 만큼 그 경지도 대단하다는 소리다
.
비록 서로 간에 싸우는 와중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유령시마의 출현을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칠십 년 전에도 강호 제일이었던 유령신법, 아무런 파공성도 흔적도 남기
지 않는다는 그 유령신법을 펼쳤던 것이다.
천선비도를 꺼내기 위해서 손을 내밀던 예인상이 흠칫 놀랐다.
품속에 들어가 있어야 할 자신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
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목표물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양쪽 무릎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빨리 비도를 가지고 떠나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자신이 착각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신중히 손을 뻗었다.
그가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비록 고강한 무공으로 억제하고는 있지
만 이 독연에서는 자신도 오래 견디지를 못한다.
그리고 자신 뒤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 개개인의 무공실력은 자신보다 못
할지 몰라도 합공을 당하게 되면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실력자들이다. 그러
나 비도만 손에 쥐면 그를 막을 수 있는 무림인은 없다.
유령신법은 경공에 있어서 천하제일이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손을 뻗어서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놈의 품속에 손을 집
어넣었다.
따끔!
자신의 손끝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예리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애써 무시해
버렸다. 사소한 고통에 신경 쓸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도를 손에 넣어야 했다. 예인상은 자신의 손으로 놈의 품속을 이리
저리 더듬었다.
찰싹!
한참 백산의 품속을 뒤지던 유령시마 예인상의 뺨에서 나는 소리였다. 손
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는지 뺨을 맞은 예인상이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이 쌍! 왜 남자의 가슴을 더듬어 쌔꺄, 너 변태야?"
독령곡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소리에
피 튀기며 싸우던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모든 동작을 중지하고 한 곳을 쳐
다보았다.
"죽지 않았더냐? 어떻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쪽에서 저승사자를 만나고 있어야 할 수구해의
입에서 생생하고 활력 넘치는 일성(一聲)이 터져 나온 것이다. 목소리로 보
건대 저것은 절대 독에 중독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놈에게 얻어맞은 놈이 누구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다만 천선비도를 가진
놈이 생생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기들끼리 죽어라 싸우고 있던 무림인들은 수구해와 백산이 바뀐 줄을 모
르고 있었고, 예인상은 수구해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정확
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백산 자신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 때문인지 서로를 경계하며 천천히 수
구해라고 생각하고 있던 백산을 향해서 다가왔다.
"앗! 네놈은?"
"엇!"
백산을 향해 다가오던 인물들의 입에서 동시에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
다. 그놈, 자신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던 그 말없던 사냥꾼 놈이
었다.
얼굴에 난 흉터 때문에 바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수구해는 어쨌느냐?"
천선비도를 가지고 있던 수구해는 어디 가고 이놈이 있단 말인가. 이놈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금껏 싸웠단 말이 된다.
"이봐, 아무리 비도가 중요하다지만 일행의 안부를 먼저 물어야 되는 것
아냐?"
그제야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흠칫했다. 너무 천선비도에만 몰두하다 보니
자신들의 동생을 또는 일행을 잊고 있었다. 길을 가르쳐 주었던 사냥꾼 놈
을 처치한다며 뒤쳐졌던 일행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지 않고 저놈이 이곳에 있다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내 동생은 어찌되었느냐?"
잔독사마의 큰형 만효우(滿曉右)였다. 사냥꾼 놈을 죽여서 살인멸구 하겠
다며 뒤처진 동생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조금 늦어지는 것이라 여겼을 뿐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 동생이 늦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선비도를 습득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생각도 잔독사마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식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것들이 목에다 너무 힘을 주더군. 죽지는
않았을 거야, 고자는 되었겠지만…."
다른 말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놈의 말
만 들렸다. 게다가 자신들의 동생과 일행이 가지고 다니던 주머니를 빙빙
돌리고 있다. 결국은 저놈에게 당했다는 말이 된다. 무공도 없어 보이는 하
찮은 놈에게 모두 당했다는 소리였다.
잔독사마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이 놀라운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사냥꾼 놈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들은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독령곡 안이고 지
금 이곳은 독연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무공이 높은 고수가 아니면 결코
저런 여유 만만한 표정을 보일 수가 없음이다.
가장 먼저 백산을 향해서 독아(毒蛾)를 드러낸 이는 잔독사마였다. 삼 인
이 몸에서 살기를 발산하며 백산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독각삼수(獨脚三手)와 삼절마창(三絶魔槍) 가
득오(可得午), 뇌음천권(雷音天拳) 정오(鄭五) 등 이곳에서 서로 싸우고 있
던 무림인들이 덩달아 백산을 포위했다.
"요즘 애들은 어른을 보고도 인사하는 법도 모르나?"
오른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도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유령시
마 예인상이 십여 명의 무림인들을 노려보며 앞으로 나섰다.
자세히 보니 다섯 개가 있어야 할 오른손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 것이었
다.
"헉!"
"허억! 유령시마?"
백산을 향해서 다가서던 무림인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나타났다.
간단하게 나가떨어진 인물이었기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가 바
로 유령시마였다니…자신들보다 한 배분이나 높은 마두가 나타난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그대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운이 좋았을 경
우에 한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강호 제일의 경공술인 유령신법(幽靈
神法)을 익히고 있는 그에게는 도망이란 말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선비도가 주는 유혹은 무서웠다. 위축되어야 할 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었다.
"연로하신 분께서 먼 곳까지 오셨습니다."
독각삼수 방만구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유령시마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노인네가 무슨 욕심이 남아서 이곳까지 왔느냐는 소
리였다.
그러나 유령시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백산만 쳐다보았다.
그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
기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일단은 기를 죽여놔야 한다.
"네놈의 품속에 있는 독물이 무엇이더냐?"
조금 전 놈의 품속에서 따끔했던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것에 의해 자신의 오른손 중지가 사라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뺨을 맞고 나가떨어진 유령시마는 기겁했다. 거의 죽어가는 놈이라고 생각
하고 있어서 방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놈보다는 뒤쪽에서 싸우
고 있는 자들에게 더욱 모든 신경이 가있었다. 그러나 유령시마인 자신이
뺨을 맞은 것이다.
더욱 경악한 것은 그의 오른손이 급속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강호의 노물
답게 그것이 극독임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내공을 이용해 몰아내려 했으나
워낙 지독한 독이라 완전히 배출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자신의 중지에 그
독 기운을 모아서 잘라내는 극단의 방법을 써야만 했다.
"이것? 이놈이 언제 품속에 있었지?"
삼목섬여, 광견조가 잡아왔던 두꺼비 중 한 마리였다. 하나 먹어보라며 준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품속에 넣고 왔던 것이다.
"노 선배! 유령마공(幽靈魔功)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잔독사마의 일마인 만효우가 붉어진 얼굴로 유령시마를 향해서 소리를 질
렀다.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냥꾼 놈하고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유령
시마의 행사에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비록 일 대 일로 하면 유령시마에게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자신들도 강호상
에서 이름이 쟁쟁한 고수들이다. 서로 힘을 합치기만 하면 유령시마가 무서
울 리 없다.
"우리 열 명은 힘을 합치기로 했소."
누구와도 합의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 방법밖에 없
었다. 자신들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유령시마를 제거
해야 비도도 있는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강호를 비운 사이에 천둥벌거숭이 놈들이 많이 나타났군."
태연한 표정으로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유령시마는 내심으로 무척 긴장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우려해서 극성의 유령신법으로 접근했었
고 조용히 비도만 취해서 가려했던 것이 이제는 정말로 목숨을 건 사투만
남고 말았다.
이곳의 독연 속에서는 누구도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천선비도를 두고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이쪽으로 서면 균형이 맞으려나?"
마른 장작처럼 비쩍 마른 흑의인이 유령시마 옆으로 날아 내리고 있었다.
"오! 어서 오시오, 마 대협."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수개월의 가뭄 속에 한줄기 단비가 이렇게 반가
울 수가 있을까!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귀령마제(鬼靈魔帝) 마자광(馬自光)이었다. 유
령시마의 입에서는 희열의 외침이, 만효우 등의 입에서는 침음성이 흘러나
왔다.
십 대 일에서 오 대 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어느 쪽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이곳은 독연 안, 부상이라도 입으면 바로 죽음과
직결된다.
혹여 싸움 중에 상처를 입게 되면 그곳을 통해서 독 기운이 침투하게 되고
내공으로도 몰아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전의 싸움에서 서로가 전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숨이 있어야 천선비도도 있는 것이지 죽어버린 다음에는 천선비도가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노리는 것은 하나이지만 일단은 힘을 합쳐야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친 새끼들, 지랄하고 있네!"
지금껏 이들의 하는 모양을 지켜보고만 있던 백산이 내뱉는 소리였다.
"나는 네놈들 중에 한 놈만 살려주기로 작정했다. 한 놈만…."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백산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잊는다고 했는가. 유령시
마를 비롯한 그곳에 있던 무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저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누구
이던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들에게 감히 대항할 무림인은 없다. 개
개인이 있을 때도 그랬는데 하물며 자신들은 열두 명이다.
자신들의 동생을 해쳤다고 했을 때 약간 놀라기는 했다. 그러나 방심해서
당했을 뿐 실력으로 당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물 속에 물고기라 생각했고 누구라도 먼저 건지면 그 사람이 주인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잡아놓은 물고기가 자신들에게 미친놈들이라며
사람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사방에 퍼져있는 독연과 공포 때문에 미쳐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갑게 가라앉은 놈의 눈동자는 결코 미친놈의 눈동자가 아니었고
자신들에게 보내는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살소였다.
"주머니는 두둑하겠지? 돈이 없는 놈은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아!"
그제야 잔독사마 및 독각삼수 등은 깨달았다, 자신의 일행과 동생들이 방
심해서 당한 것이 아니란 것을. 유령시마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것
이다.
"선배들! 저놈을 먼저 처리하고 다음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잔독사마 중 이마(二魔) 정귀심(鄭龜沈)의 말에 유령시마와 귀령마제가 고
개를 끄덕였다.
"죽이는 것까지만이다. 더 이상은 안 돼."
품속을 뒤지면 바로 손을 쓰겠다는 엄포다. 동생들의 복수를 위해서 손을
쓰는 것은 인정하지만 비도에 손대는 것은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확인을 하고 싶었다. 조금 전 저놈의 품속을 뒤지기
위해서 손을 뻗었을 때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던 놈의 몸놀림,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그리고 놈이 적들의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자
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귀령마제와 한편이 되었다지만 저들
의 실력도 만만치 않고, 귀령마제 또한 언제 변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라버린 중지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독기운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내공을
그쪽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잔독사마라고 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놈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놈! 조용히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잔독사마의 셋째인 신기남(申琦男)이 백산을 향해 다가서면서 하는 소리였
다.
'최대한 빠르고 간단하게 죽여야 한다. 유령시마와 귀령마제가 보고 있고,
지금은 손을 잡았지만 나머지 저들도 결국은 우리의 적이다. 어설프게 하
다가는 저들에게 약점만 잡힐 뿐이다.'
신기남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잔독마수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양손이 새파란 빛에 싸여 있었다.
"애송아, 잘 가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신기남이 양손을 백산의 머리 쪽으로 거칠게 휘둘렀
다. 일수에 머리를 으깨버리려는 동작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머리를 상상하고 있던 신기남의 얼굴이 놀라는 표정으로 변
했다.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격권의 밖에서 조금 전의 표
정 그대로 여전히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놈!"
많은 적들이 보고 있는 데서 공격이 실패하자 창피함이 앞섰다. 이름도 없
는 애송이가 전력을 다한 자신의 일장을 가볍게 피한 것이다.
표정이 굳어진 신기남의 움직임이 점점 격렬해지고 빨라졌다.
푸른 강기에 휩싸인 오른손을 이용하여 백산의 머리를 잘라버릴 듯이 휘두
르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젖혀 가볍게 피해버리는 놈을 향
해 왼손으로 심장을 비쾌하게 찔러갔다.
한 발짝 뒤로 빠지며 몸을 모로 돌려 피해버리자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찔러가던 동작 그대로 몸통을 잘라버릴 듯이 횡으로 베어나갔다.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찔러가던 동작을 멈추고 횡으로 베는 과정이 마치
한 초식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의 움직이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취해진 동작이었기에 더욱더 위력적이었다.
그 순간 백산의 대응은 더욱더 놀라웠다. 한쪽 발을 허공에 둔 채 그 자리
에서 꺼지듯 뒤쪽으로 넘어지며 허공에 있던 오른발이 아주 가볍게 신기남
의 단전을 향해 뻗어졌다.
"헉!"
신기남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에 철판교 수법으로
피하는 것도 경악할 일인데 바닥에 닿지도 않았던 놈의 발이 자신의 단전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서 내공을 모아 두었던 오른손
을 내려 재빨리 단전을 방어했다. 자신이 아무리 고수라지만 단전을 가격당
하면 잠시 동안 힘을 쓸 수가 없다.
그 잠시의 시간이란 고수들에게 있어서는 수십 번도 죽을 수 있는 그런 긴
시간이질 않는가.
퍽!
손과 발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으윽!"
놀랍게도 물러난 사람은 신기남이었다. 단순한 발길질과 강기에 휩싸인 손
이 부딪쳤는데 강기에 싸여있던 손의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것이다.
신기남의 손을 차버린 백산이 거의 땅에 붙을 듯이 누웠던 자세 그대로 몸
을 일으켰다. 백산의 동작도 모두 한 초식처럼 연결되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였다. 몸을 일으킨 다음 동작은 더 가관이었다.
아직도 허공중에 있는 발을 까딱거리며 신기남을 향해서 어서 공격해오라
하고 있었다.
"이익!"
신기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잔독사마라는 자존심이 이름 석자도 알려
지지 않은 무명 잡배에게 무참하게 구겨졌다.
이제는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있다.
신기남은 비호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등에 무기도 있었지만 잔독마수라
는 수강이 있었기에 박투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등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
기에는 아직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찌르고, 베고, 찍고 손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동작을 이용해서 백산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백산도 그냥 피하지 않았다.
신기남이 공격한 후의 허점을 찾아서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손을 휘
둘러오면 머리를 숙여 피하고 가슴을 공격하고, 왼손으로 베어오면 몸을 뒤
로 젖히며 다리로 무릎을 공격하는, 신기남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백산의 반
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투귀 오구가 이야기했던 팔과 다리를 모두 이용하는 격투술, 신기남이 손
만을 이용한 단조로운 공격임에 반하여 백산의 공격은 두 팔과 두 다리 그
리고 온몸을 이용하는 싸움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신기남에게 별반 타격을 주
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격투술은 맞는 것 같은데…뭔가 이상해!"
유령시마 예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고
도의 기술임에는 틀림없지만 뒷골목의 건달들이 주로 보여주는 그런 격투술
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권을 뻗었다가 실패하면 팔꿈치가, 그 다음은 어깨가, 전신의 모든 곳을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 분명 굉장한 공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인들은 이러한 기술을 쓰지 않는다. 장법(掌法)과 권법 그리고
온몸 곳곳에 암기를 숨겨두고 여차하면 발사할 수 있는 그런 무인들의 싸움
에서 저런 식으로 몸을 밀착시켰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암습을 당하거나 장
법이나 지공(指功) 등에 당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놈의 공격은 너무나 정확했다. 상대와 한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
은 거리에서도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맞아! 저것은 유권(柔拳)이야."
유령시마가 백산이 펼치고 있는 손과 발놀림이 단순한 삼류 격투술이 아닌
또 다른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유권(柔拳) 흔히 격공장(隔空掌), 또는 통배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공.
어떤 물체를 가격하여 외부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내부만 파괴하는 무공으
로 주로 외공 고수와 싸울 때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가장 유명한 격공장으
로는 무당파의 면장이 있다.
사실 무당파에서도 면장을 그렇게 대단한 무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익히지 않고 굴러다니던 무공기서로 속가 제자들에게나 전수하던
그런 무공이었다. 체면과 멋을 중요시하는 정파인들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공이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무공으로 인정하지도
않던 면장을 극성으로 익힌 속가 제자 중 한 명이 외공 중 최고라는 금강상
피공을 익혀 도검이 불침하는 피부를 가졌다는 마인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각 문파에서는 격공장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모든 문파에 격공장 종류의 무공이 하나씩은 존재하고 있다.
격공장, 통배권, 면장 등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권이란 것은 손으
로 펼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워낙 섬세하고 고도의 기술이다 보니 가장 자
유롭고 다루기 편한 손을 이용하여 장이나 권으로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래! 저것은 용왕유권(龍王柔拳)이야! 하지만 어떻게…."
유령시마가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그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
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유권 중 최고라는 용왕유권, 권(券), 장(掌),
지(指)를 포함한 신체의 모든 관절을 이용하여 펼칠 수 있다는 소림의 무
상절기, 무당의 면장보다 이전에 만들어졌으나 너무 난해한 무공 구결 때문
에 익힌 자도 없었고 수백 년 전에 실전되어 그 이름만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던 그 무공. 지금 저놈이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용왕유권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럼 저것이 소림에서 실전되었다던 그 용왕유권이란 말이요?"
귀령마제 마자광이 놀라는 얼굴로 유령시마를 쳐다보았다. 소림의 제자 같
이도 보이지 않은 자가 어찌 소림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실
전된 지 수백 년이나 지났다고 알려진 무공을….
그들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비무의 향방이 정해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치던 신기남의 몸놀림이 현저하게 둔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
켜보고 있는 중인들의 눈에도 확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산을 공격하고 있는 신기남의 표정에 나타난 낭패의 기색을.
"등에 있는 무기는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인가?"
신기남의 가슴을 가볍게 쥐어박고 훌쩍 물러나며 하는 말이었다. 일각 이
상을 빛살 같은 속도로 싸운 사람 같지 않게 호흡은 고요했다.
"셋째야, 괜찮으냐?"
잔독일마 만효우가 나지막한 비명을 토하며 뒤로 물러서는 신기남을 부축
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모든 것을 보았다. 아무런 타격도 없
을 것 같은 놈의 손과 발놀림에 자신의 셋째가 충격을 받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보통 놈이 아닙니다. 합공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별다른
고통도 없었고 충격도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내부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기 한번 꺼내보지 못하고 철저히 당해버렸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어갈 것이다. 이 독연 속에서는 운기조식도 할 수 없다
. 내부의 상처는 점점 커질 것이고 독 기운까지 침입하게 될 것이다.
"용왕유권은 어디서 배웠느냐? 소림의 제자냐?"
그곳에 있던 무림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유령시마가 소림의 문하냐고 물었고 용왕유권이라고 했다.
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무림의 불문율, 소림의 문하는 건드리지 마라. 부처
의 징벌이 내리게 된다. 모든 면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소림이었지만 자파의
제자에 대한 것만큼은 가장 철저했다. 소림의 제자를 핍박하게 되면 그가
마인이건 정파인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응징해왔다. 자파 제자의 잘못은
소림에서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
는다는 뜻이다.
광오했다. 무림인들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소림의 철칙은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용왕유권? 아니야, 이것은 광풍유권이라고. 내가 창안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 시험을 하고 있는데 그런 대로 쓸만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하는 말이다. 백보신권을 광풍신권, 용왕유권은
광풍유권으로 개명하여 자신이 창안한 무공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소림의 제자가 아
니라고 했으니 그것이면 족했다.
"선배들! 더 이상은 이곳에서 견딜 시간이 없소. 빨리 해결합시다."
같이 합공(合攻)을 하자는 소리였다. 이 독연 속으로 들어온 지 벌써 한
시진이 넘었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도 없거니와 셋째가 죽어가고 있었다.
만효우의 심정은 다급했다. 보물이 주는 유혹은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아
니면 친 혈육이 아니라서 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비록 의형제라지만 셋
째인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도에 더욱 욕심을
내고 있는 만효우였다.
"좋네! 나도 소림의 절대 절기인 용왕유권을 한번 견식하고 싶구먼…."
이름도 없는 강호의 젊은이를 합공한다는 것에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
지 용왕유권을 견식하고 싶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유령시마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드디어 그곳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백산을 에워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서로가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놈을 죽이더라도 다시 자신들끼리의 승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
구 하나 놈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말이 합공이지 그들이 형성한 포위망은 이곳저곳이 순
허점투성이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전력을 다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제는 잔독이마로 바뀐 잔
독사마의 첫째 만효우와 둘째 정귀상이었다.
자신들의 독문 무기인 잔독겸(殘毒鎌), 농부들이 쓰는 낫처럼 생겼으나 손
잡이 부분이 더 길었고, 직각으로 꺾인 부분에 칼날이 하나 더 달려있는 이
른바 쌍초겸이라 알려진 무기다. 독까지 발랐는지 퍼런 빛으로 빛나는 잔독
겸 두 자루를 백산을 향해서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저돌적인 공세에 나머지 인물들은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형성한
채 백산이 허점을 보이면 그곳을 향해서 가볍게 장력을 날리는 형식을 취
하고 있었다.
애당초 합공이란 말 자체가 우스웠다. 서로 죽이려 했던 이들이 조그마한
쥐새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합공을 하다니? 저놈과 싸우다 놈을 죽이면 그
것도 괜찮고 공격하던 놈이 죽으면 그것도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누가 죽어도 자신들에게는 하등의 손해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백산의 몸놀림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요혈을 향해서 날아오는
네 개의 잔독겸을 피하며 교묘하게 두 사람의 사각지대를 뚫고 들어가 자신
이 광풍유권이라고 했던 용왕유권으로 만효우와 정귀상을 공격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이번의 용왕유권은 신기남에게 펼쳤던 것과는 또 달랐다.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의 위력적인 공격에 흠칫 놀란 만효우와 정귀상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
났다.
막무가내로 공격하던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잠시 후 이인 합격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백산을 정식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정귀상이 백산의 하체를 향해 잔독겸을 휘두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 허공
으로 솟아오른 백산을 향해 뒤에 있던 만효우가 정귀상의 머리 위로 뛰어넘
으며 백산의 몸통을 향해 잔독겸을 휘두른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이인 합격진이 무서운 위력으로
백산을 몰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질풍 같은 합격진에 견디지 못하는지 백산의 발놀림이 어지러워
지고 온몸에 허점을 보이며 연신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백산이 밀려나고 있는 곳은 독각삼수 두 명이 서 있는 위치였다. 계속해서
물러나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는 독각삼수의 첫째인 방만구의 눈에 악독한
빛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잔독사마의 공격에 당했는지 그의 바로 일장 앞에 무방비 상
태로 다가오는 놈의 등이 보였다.
방만구는 동생인 방만해와 눈빛을 교환했다. 일격에 끝내버리자는 신호였
다.
"염천장(炎天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져 나오고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
져나갔다. 자신들의 최고 절기인 염천장, 화공을 익힌 덕에 이 독연 속에서
도 그들은 무사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만구와 방만해는 만족스러운 미
소를 교환했다.
바로 지척에서 공격했으니 온몸이 부서졌을 것이고, 저렇게 처절한 비명소
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독각삼수 방만구와 방만해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의 염천장에 맞아서 죽어있는 자는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놈이
아닌 힘을 합치기로 했던 잔독사마 중 남은 이 인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가슴팍이 으스러지고 뼈가 산산이 부서진 채 그 자리에서 절명해버린
것이다.
"자기편을 죽이면 벌받아, 벌. 하기야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이자고 싸웠던
놈들이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방만구와 방만해는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백산이 두 사람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떼는 순간 그들의 머
릿속은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네 명의 고수가 이승에서 하직인사를 하고 말았다.
"으음,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이미 죽어버린 사 인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보았다. 독각삼수의
공격이 등에 작렬하려는 순간 환상처럼 사라져버린 놈의 몸놀림을. 그리고
사라졌던 그의 신영이 처음부터 독각삼수의 뒤쪽에 서 있었다는 듯이 나타
났고, 그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마치 정지된 그림이 지나가는 것처럼 선명하
게 보였던 것이다.
쾌에 쾌를 넘어선 무변(無變)의 경지라는 금강부동신법, 그것은 그들이 알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이 전개한 신법은 금강부동신법의 모체인 무상
신법(無上身法)이었으니 결코 그들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소림의 제자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금강부동신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본인이 아니라고는 했으나 소림의 제자도 아닌 자가 용왕유권에 금강부동
신법까지 펼칠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소림의 제자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소림의 제자가 자신들을 헤치려 하
고 있는 바에야 그를 죽인다 한들 소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강호 무림의 최고 신법이라는 유령신법과 소림의 무상신법과의 대결이었다
.
두 사람의 몸놀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던
삼절마창 가득오를 비롯하여 뇌음천권 정오 등 그곳에 있는 무림인들은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귀령마제만이 흐릿하니 두 사람의 형태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칠
십 년 전에도 강호 제일의 고수였다. 고수 소리를 들은 지 일 갑자가 넘었
다는 소리다. 그런 자신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저 젊은 놈은 도대체 어
떻게 무공을 익혔다 말인가.
"으악!"
그가 이런 상념에 잠겨있을 때 또다시 포위망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유령마제와 장력을 교환하고 뒤쪽으로 날아가던 놈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
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뒤로 날아가고 있
는 삼절마창 가득오.
그렇게 죽어가는 순간을 본인도 느끼지 못했는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삼절창은 아직도 그의 손에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귀령마제의 나지막한 외침이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놈은 분
명히 소림의 문하다. 다행히 이곳에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는 것이다.
귀령마제 마자광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어차피 죽이려 했던 놈들…조금 일찍 죽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
자신의 양손에 극성의 귀마조(鬼魔爪)를 운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물
들을 흘낏 쳐다보니 삼절마창 가득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유령마제와
같이 싸우는 놈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삼절마창의 죽음을 목격한 그
들은 이젠 포위망이고 뭐고 없이 남은 네 명이 한 곳에 모여서 백산만 경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윽! 컥! 억! 크윽!"
"당--신이…왜?"
네 마디의 참담한 비명과 함께 뇌음천권 정오를 포함한 사 인이 지르는 마
지막 소리였다.
전방만 주시하고 있던 네 명의 뒤로 돌아간 귀령마제가 자신의 귀마조로
그들의 사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너무도 허무한 종말이었다.
천하제일이라는 꿈을 좇아 이곳까지 왔고 독연까지 뚫으며 목숨을 건 도박
을 했다. 그런데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는 무림의 생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이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자들인데 시간을 좀 앞당긴 것뿐이오. 그리고 우리가
소림의 제자를 해친 것에 대해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고…."
싸움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령시마 예인상을 향해서 하는 말이
었다. 천하가 비좁다 하던 이 노 마두 두 명이 소림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태산북두라는 소림이 주는 무게는 무거웠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나 홀로 독불장군은 없다.
비록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세력이 없으면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이라는 세계다.
"이봐! 뼈다귀, 내 밥을 왜 네놈이 처먹어. 새로 창안한 무공을 연습하려
면 아직 멀었는데."
그랬다. 지금 백산은 마불신승이 전해주었던 소림의 절기들을 익숙하게 펼
치고자 실전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익히기 위해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광견조에게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초식을 일러주는 것으로는 결코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다. 일러준다고 해서
이해할 놈들도 아니고….
소림의 무공을 펼칠 때 몸속에서 움직이는 진기의 변화를 통해서 무공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진기의 이동경로를 숙지하여 무공을 전수하는
방법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몸으로 때
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네놈이 시험대상이 되어야 해!"
백산이 외침과 함께 귀령마제를 향해 자신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순간 찬연히 솟아나는 불광(佛光), 나한 모양의 거대한 신장이 천천히 나
아가고 있는 것이다.
"헉!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귀령마제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저놈에게서 나오는 권은 모두가 소림에서 실전되어 전설
로만 내려오던 무공들이 아닌가!
마치 산책 나온 나한(羅漢)처럼 자신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는 기세는 그
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법은 한 가지 정면대결밖에 없는 것이다.
"쇄비장(鎖秘掌)!"
이를 악문 마자광의 일갈이었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은색의 강기가 거대한
나한상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밀려갔고 두 개의 장력은 거칠게 충돌했다.
"으윽!"
입안 가득 피를 쏟아내며 귀령마제가 뒷걸음치고 있었다. 단 일초도 제대
로 받아내지 못하고 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귀령마제와 장을 교환한 백산은 그대로 있지를 않았다. 돌아오는
반탁력에 몸을 싣고 자신을 치기 위해서 기회만 노리고 있는 유령시마를 향
해서 양손을 합장하듯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 나오는 자그마한 외침소리.
"광풍청강수!"
자기 딴에도 소림사에 미안했나 보다, 엄연히 존재하는 무공 이름을 앞글
자만 바꿔서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지금 펼치고 있는 무공들은 불공
냄새가 너무 진했다. 그래서 나오던 목소리가 줄어든 것이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제천대성 손오공을 굴복시킬 때 사용했다는 관음청
강수(觀音靑剛手), 무려 천여 개의 손바닥이 유령시마를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손바닥의 벽이었다. 그가 가장 자신하는 유령신법으로도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호를 뒤흔드는 초극 고수들이 소림을 건들지 못하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
나고 있었다. 아무리 실전 무공이고 절기라고 하나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저 무공에 정녕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령개천공(幽靈開天功)!"
자신을 향해서 밀려오는 천여 개의 수강을 향해서 전력을 다한 유령개천공
이었다. 지난날에도 최고였던 그의 독문 무공을 칠십 년 동안 보완하고 또
보강해서 다시 재정비한 무공이었다.
"크윽!"
그러나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강을 다 막지 못하고
왼쪽을 허용하고 말았다. 왼팔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보기에
는 멀쩡한데 이미 팔의 내부가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놀랍게도 놈은 관음청강수에 용왕유권을 섞어버렸다.
이건 차라리 잘린 것만 못하다. 유령신법을 전개하는데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잘라버리고 싶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놈의 신법이 더욱 경악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예 흔적이 없다. 허공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그냥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그리고 지금 귀령마제를 향해서 펼치고 있는 저 무공, 아홉 개의 연꽃 모
양의 강기가 찬연하게 빛나는 저것, 바로 구련조화인(九蓮造化印)이다.
이제는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도 없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
는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더 이상 발악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인 것이다.
그런 유령시마의 눈에 귀령마제 마자광의 최후가 보였다. 이마에 선명한
연꽃 모양의 인(印)이 찍히며 뒤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유령시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을 지탱해주던 기력이, 자존심을 키워주던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빌어먹을 소림(少林)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너만 살려주도록 할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넋이 빠져있는 유령시마의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백산이 하는 말이었
다.
주머니를 뒤집어서 그 내용물 중 하나를 유령시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꼭 쥐어주며 그의 볼을 툭툭 치면서 한마디 더 하는 것이었다.
"힘내라고!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이까짓 일로
뭘 그러나. 그럼 잘 가라고."
새파란 놈이 백 살이 넘은 노인네에게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사라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요한 적막감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유령시마는 가만히 자신의 볼
을 꼬집었다.
꿈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이 사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볼을 꼬집기 위해서 손을 펼 때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놈이 힘내라며 자신에게 주고 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본 순간 왠지 모를 설움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리돈 한 문.
유령시마라는 별호를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노인이
울고 있었다. 며느리에게 구박받고 쫓겨난 노인네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것
이다.
"그래도 살았으니까 가야겠지?"
실컷 울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천천히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령마제를 포함한 열한 구의 시신에는 피 냄새를 맡은 독물들이 새카맣게
들러 붙어있었다.
"내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는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놈이 주고 간, 원래는 자기 것이었던 구리돈
일 문을 꼭 쥐어보았다.
그러나 조용히 사라지고자 했던 그의 맹세는 독령곡을 나서면서부터 철저
히 무너졌다.
독연 속에서 들려오는 외침 때문이었다.
"유령시마 예… 인상이 비도를 탈취…했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독령곡 외부
에 있던 모든 무림인에게 전달된 그 한마디, 유령시마의 고난은 이제 시작
이었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소림의 무공을 익힌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일반 무공도 아닌 전설 속에나 존재하던 무공이었던 것이니….
* * *
"이제 오느냐?"
유령시마 일행을 처리한 백산이 중화독지대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열심히 운기를 하고 있는 석두와 광견조원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
이 안쓰러운 눈으로 죽어가고 있는 수구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독의 섭취가 한계를 넘어선 수구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곳이 모든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중화독지대라는 절지라 해도,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피마저 검은색의 독
혈로 변해버린 수구해에게는 효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껏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중화독지대의 효과라면 효과
였다.
독연 속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다는 갈태독의 말처럼, 중화독지대
가 그의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인
데도 얼굴을 찡그리며 힘들어하고 있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수구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일행들이 강호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이 기인을 위해서 명복이나 빌어주자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갈태독은 이
곳저곳의 바위를 뒤집으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백년이 넘었어도 아직 의가(醫家)의 자손인가! 그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
고 있었다.
명색이 독을 다루었던 의가 출신이고, 그 비전을 모두 계승했는데 독에 당
한 환자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감! 그냥 유언이나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방법이 있는 거요?"
여러 가지 독을 모으고 있는 갈태독을 쳐다보며 백산이 물었다. 의술에 대
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산이었지만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호흡도 끊긴
듯 간간이 이어지고 있는 수구해의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시도해 보아야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의원으로서의 본분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의가에서 태
어나 의술을 배웠고, 생명을 살려야 할 그 손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제 다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그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가문의 비전이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시술해 주는 침술대법.
성공 가능성 일 할, 실패하게 되면 시술 받은 환자는 핏물로 녹아내려 시
신조차 보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바로 만독봉침구혈대법(萬毒蜂針求血大法)이다.
독 중의 독이라는 최고의 극독만을 가지고 시술하는 대법, 필요한 독의 종
류도 상당히 까다로워 과거 자신의 가문에서도 몇 번 시술하지 못했던 방법
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중화독지대의 넘쳐나는 풍부한 독물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조그마한 돌을 깎아서 만든 그릇에 독물들의 독을 수거한 갈태독이 수구해
쪽으로 걸어가며, 자신의 품속에 있던 침통을 꺼내들고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단 하나 남은 가문의 유산인 자모천통(紫毛天桶), 지난 백삼십 년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침통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산아, 옷을 벗기거라. 너희들은 저쪽으로 가있고,"
옷을 벗기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자신이 들고 있는 침통을 열
었다. 그리고 약간 붉은빛을 띠고 있는 새하얀 침들을 독을 받아두었던 석
기 속에 쏟아 부었다.
"흡독자모침(吸毒紫毛針)?"
석숭의 입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아무래도 시술이 궁금했던지 한켠으로 가
있으라는 갈태독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물이며 절대 암기.
희귀함이 금강석보다 더 높다는 자모철로 만들어진 삼백육십 개의 자모침.
흔히 독성의 유무를 판단하는 은보다 독에 더 민감하다고 알려진 광물로
자모철 자체가 독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흡수하는 독이 극독일수록 색이 진해지며 최고의 독을 흡수하게 되면 검은
색의 광채가 난다고 한다.
자모침을 마물이며 절대 암기라 칭하는 이유는 자모침만이 가지는 특이한
성질 때문이다.
인간의 체온 정도의 온기를 만나면 흡수했던 독을 토해내는 특성 때문에
최고의 암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 자체도 희미한 광물이라 널리 알려진 바도 없고, 구할 수
도 없어 독을 다루는 인물들에 의해서 조금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르신께서 잔독문(殘毒門)의 후예?"
석숭의 입에서 또 한번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잔독문,
어디서 들어보았던 이름이다. 바로 백산이 복용했던 광혈단을 만들었던 문
파였던 것이다.
"쓸데없는 소릴…."
갈태독의 눈빛이 엄해졌다. 잔독문이란 한마디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말았
다. 과거의 잔상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 것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떨쳐버렸다.
"시작하자!"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백산에게 하는 말인지 한마디를 툭 던지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고 석기그릇 속에서 새카만 묵광을 발하고 있던
침 하나가 둥실 떠올라 수구해의 양미간 사이 인당혈(印堂血)에 깊숙이 박
혀들었다.
"만독봉침구혈대법의 시작은 양미간 사이의 인당혈에서 시작하여…."
"……."
"……."
"마지막으로…."
대법을 시전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갈태독이었다. 소운에
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모양이다. 자신 가문의 비전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수하는 비법이다. 시술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기회
가 없는 시술법이기에 더욱더 진지하고 상세하게 전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그의 침술은 계속되고 있었고, 허공에 떠있는 수구해
의 몸은 마치 적을 발견한 고슴도치처럼 빽빽하니 침이 꽂혀 있었다.
"의술은 인술이라 했다. 치료하는 수단이 독이 되었건 약이 되었건 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다시 이루게 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의술이다.
우리 의술의 근간은 바로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즉 잠재력이란 소리다
. 그 잠재력을 격발시켜 몸을 치유하는데 독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약을 사
용하느냐는 의원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방법은 그 효
과는 탁월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높다…."
마치 이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갈태독의 입에서는
끊임없는 의술의 비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수구해의 몸에 박혀있던 자모침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갈태독의 손이 가볍게 저어지고 온몸에 박혀있던 모든 침들이 일수에 수거
되어 자모침통 안으로 들어갔다.
"의술이란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독으로 치료하는 의술은 깨어
난 순간 환자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독에 의해 맞추어진 몸의 조
화가 안정될 때까지는 네 시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에 심적인 충
격을 받게 되면 독에 의해 맞추어졌던 균형이 무너지며 독을 견디지 못한
육체는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독을 이용한 치료술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
에 연구를 거듭한 그의 가문이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자,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이제 자리를 피하거라. 너도!"
석숭이 소운과 함께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백
산을 향해서 갈태독이 하는 말이었다.
"으음!"
수구해가 깨어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갈태독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그의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성공이닷!"
들뜬 목소리였다. 이번 시술이 열한 번째 시술이다. 앞의 열 번의 시술마
저도 그가 전부 시술했었고 절반만 성공했다. 그가 시술했던 인물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핏물로 녹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남아있던 독정(毒精)이
없었다.
만독봉침구혈대법의 결과 반드시 나타났던 독정,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독정이 몸의 내부에서 폭발하게 되고 그 사람을 녹이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독정이 없었다.
내부 장기마저 녹아가고 있던 회생불가능의 환자를 그의 가문 비전이 살려
낸 것이다.
"여기는!"
어느 정도 의식이 들었는지 수구해의 입이 열렸다. 무심결에 나온 소리였
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을 놓고 싸우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아닌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는 백발 백염의 인물이었다.
"일단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게. 이제 자네를 해칠 사람은 없네
."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역시 정파의 인물답게 자신의 목숨보다 천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천무맹의 맹주님께 전해…."
"헉!"
자신의 품속에 있어야 할 천선비도를 담아두었던 주머니가 없어진 것이다.
수구해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 자! 우선 진정하고 차분히 생각해보게. 아까 치료할 때도 보았는데
자네의 옷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네."
다급한 심정으로 수구해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갈태독이었다. 처음으로 성
공한 만독봉침구혈대법이다. 자신의 의술로 처음 성공시킨 자신만의 작품인
것이다.
갈태독의 말에 마음을 진정시킨 수구해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
어 보고 있었다.
독연 속에서 그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없었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누구도
자신 곁으로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했던 이 사람, 비도를 노리는 자였다면 목적달성이 되
었는데 굳이 자신을 살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
'괜찮은가, 젊은이!'
'괜찮습니다. 어르신,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보시죠!'
이곳에 오기 전 자신과 부딪친 예의 바른 사냥꾼 청년과 나눈 대화였다.
"그럼, 그놈이! 그놈이…오! 하늘이여."
수구해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지고 있었다. 바로 진기의 역류인 주화입마
상태. 허무함과 자신에 대한 자책이 주화입마로 이어지고 독에 의한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 보게! 진정, 진정하게!"
갈태독이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치며 수구해의 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엄청난 내공을 소유한 고수답게 역류한 진기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
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영감!"
갈태독의 다급한 행동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백산이 다가온 것이다.
"너? 너는! 크억!"
백산의 얼굴을 바라본 수구해가 비명과 함께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갈태독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다. 재차 역류해버린 진기는 그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급속하게 온몸을 잠식해버렸고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던 독
들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갈태독이라 해도 더 이상 손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멍한 얼
굴로 손을 떼며 수구해의 몸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수구해의 몸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온 정신을 쏟고 있던 갈태독은 알
수 없었지만 백산과 같이 다가오던 석숭은 분명히 보았다.
안정을 찾아가던 수구해가 백산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주체할 수 없는 격동
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피를 토해내는 것을. 수구해의 몸이 머리부터 시작
해서 천천히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나중에 녹아 없어지던 손가락은 그때까지도 백산이 왔던 방향을 가리
키고 있었다.
허무한 종말이었다.
죽음의 손 대신 생환의 손을 갖고자 했던 의가 자손의 심력을 다한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한 것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영감. 의술을 행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 아뇨. 그래서 우리네 인생살이가 힘든 것이고…."
두 번째 하는 말이다. 유령시마에게도 했던 말이었고 이번에는 백오십이
넘은 노인네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었다. 이 일
의 원흉이 자신인지는 알고나 하는 말인지.
"장사를 지내주려 해도 아무 것도 없으니…그냥 명복이나 빌어줍시다. 그
리고 천무맹 놈이라며?"
천무맹 놈이란 말, 자신의 원수라는 소리였다. 자신 때문에 수구해가 죽었
음에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잊지 않았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해보인 백산이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인가
를 찾는 양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쯤 어딘데? 아, 바로 여기구나!"
십 척 높이의 커다란 바위 앞에선 백산이 감회가 새로운 듯 그것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곳에는 돌로 찍어서 그렸는지 건장한 장년 한 명과 어
린아이 하나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조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산아! 다음에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곳에 와서 이 아래를 파 보아라,
나의 선물이 있을 것이다."
"뭔데요, 아버지?"
"알면 재미없지 않느냐, 비밀이다."
과거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친구 하나 제대로 없었던 그에게
아버지는 친구였고 어머니였다.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이곳도 아버지가 꿈
을 이루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을….
잠시 그곳을 응시하던 백산이 바위 밑을 파기 시작했다. 이윽고 흙 속에
묻혀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마한 철함 하나와 술항아리 하나.
백산의 입가에 피식 하니 미소가 맺혔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유난히 술을
많이 드셨던 아버지, 당신다운 행동이다. 장성한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 고
작 술항아리라니.
술항아리를 쳐다보던 백산이 이번에는 옆에 있는 조그마한 철함의 뚜껑을
열었다.
"아!"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옥가락지 두 개.
돌아가셨던 어머니의 손과 아버지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던 옥가락지였다.
살점밖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마을에서 찾아내셨나 보다.
울먹이는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온 마을에
널린 살점들을 헤집고 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어머니의 채취가 묻어있는 것을 찾고 싶어서 뒤졌던 것인데 어머니의
손가락에 있던 가락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이미 지난 일인데…고맙소, 아버지.'
조용히 자신과 아버지가 그려진 그림을 쓰다듬는 백산이었다.
"여기였어요, 추억의 장소가?"
백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조천영이 백산 혼자만의 시간을 준
다음 이제서야 말을 걸어왔다.
"응? 응! 선물이라고 하기에 거창한 것이 있을 줄 알았더니 달랑 이거야."
백산이 술항아리를 보여주며 조천영을 향해서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
다.
"이거!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백산의 손에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예물이었던 옥가락지 두
개였다.
조천영이 왜 모르겠는가.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는 초라한 옥반지, 시장
에만 가도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싸구려 반지였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시부모님의 유산이라는 것을….
"에게? 겨우 이런 옥반지로 선물이 돼?"
소운이었다. 의술 전수가 어느 정도 끝이 났는지 백산과 조천영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백산의 손 위에 올려져 있는 두 개의 옥반지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달랐다.
"이것 나도 하나 가질래."
둘 중에 조금 커 보이는 것을 냉큼 집어드는 소운이었다. 이 손가락 저 손
가락 끼워보다 맞는 손가락이 없었던지 결국은 엄지손가락에다 끼고는 만족
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조천영도 하나 남은 어머니의 반지를 자신의 약지에 끼워 넣고 있었다.
"영원히 끼고 있을 게요."
두 개의 반지 중 어머니의 반지는 조천영의 손에 아버지의 반지는 소운에
게 돌아갔다.
"자, 이제 술이나 한잔 하자고."
모든 일행이 모여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주(蛇酒), 술은 흔하
디흔한 화주였지만 이곳에 널려있던 뱀들을 잡아넣고 십 년이 넘었다는 백
산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광견조원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갈태독은 자신이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가문의 비전이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넋을 놓고 있었다.
"영감! 그렇게 생각한다고 죽은 양반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속도 상할
텐데 술이나 한잔 하쇼."
조금밖에 안 되는 술로 마음을 달래고 일행은 형산을 넘기 위해서 그곳을
출발했다. 그때 갈태독의 귓가로 들려오는 백산과 석숭의 목소리.
"석 대인,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소?"
"솔직히 자네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 내가 여자라면 절대 자네 같은 사
람은 선택을 안 하지, 근데 그건 왜 묻나?"
"조금 전 수구해 그 놈 말이오, 다 살아난 것 같더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게거품을 물고 가버리지 않았소."
"그것은 나도 보았는데… 혹시 자네 그 사람을 따로 만난 적이 있나?"
"에? 아! 여기 오기 전에 나하고 부딪쳤지요, 그런데 일어나 보니 저 양반
이 자신의 주머니를 내 품에 넣었는지 가슴속에 주머니 하나가 있습디다?"
"크악!"
갈태독의 비명소리였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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