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천선비도(天仙秘圖)
형산(衡山)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축융봉(祝融峰)이 멀리 보이는 곳. 온통
땀에 젖은 육십 대의 노인이 빛살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경공을 전개하여 왔는지 등에 척 달라 붙어있는 회색빛 장포는
차가운 겨울 공기에 의해 희뿌연 아지랑이를 만들어내며 뒤쪽으로 뿌려대
었다.
"빌어먹을! 나 수구해(洙具海)가 이렇게 쫓기다니…."
수구해, 강호 무림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경공의 달인. 그림
자조차 그를 따를 수 없다하여 무영비추(無影比追)라 불린다.
그런 그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 것이다.
천선비도(天仙秘圖).
바로 그 괴물 때문이다. 벌써 수십 명의 피를 머금은 천선비도가 우연히
수구해의 손에 떨어졌다. 지난밤 꾸었던 구렁이의 꿈이 좋았다며 천선비도
를 챙긴 수구해는 형산을 벗어나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그러나 형산을 빠져나가는 길목의 곳곳에는 벌써 천무맹과 천마맹, 그리고
수없이 많은 무림인들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오가는 무림인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정파인이라고 하지만 천무맹에 의탁할 수도 없다. 이곳의 책임
자가 천무맹의 삼공자인 정천무룡 백무천이기 때문이다. 백무천이 천무맹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의 야망을 알고 있기에 전달할 수가 없었고 더욱 중
요한 것은 맹주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백무천이 이곳에
있었고 다른 사람을 내보낸다는 것이 모양새도 좋지 않아서 그에게 천선비
도 일을 일임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비도를 탈취해올 것을 명령했다. 그
가 백무천에게 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렸다. 형산의 후미진 곳에 은신하고 있다가 무림인들이
철수하면 그때야 나설 심산이었다.
그러나 천려일실(千慮一失), 한적한 곳에 숨어서 자신에게 있는 천선비도
를 확인하다 마도의 인물인 만리추영(萬里追影) 도선금(都善錦)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때부터 필사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바보 같은 놈! 그냥 보관만 할 일이지 왜 꺼내 가지고…."
그놈의 호기심이 자신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다. 추격은 집요했다. 천선
비도를 노리는 이들은 정파(正派)고 사파(邪派)고 없었다. 자신을 향해서
무조건 검을 날려왔다.
"어어어!"
콰당!
두 사람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였다.
자신을 쫓던 무림인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었기에 마음을 놓았고 딴 생각에
잠겨있었기에 자신의 앞에 있던 털옷을 입은 사냥꾼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사냥꾼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괜찮은가, 젊은이?"
그래도 정파인인 것은 맞는 말인지 절실하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자신과 부
딪친 젊은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르신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보시죠."
예의 바른 젊은이라 생각하며 이곳에 있으면 위험하니 빨리 산을 내려가라
는 말과 함께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
"그쪽은 독령곡(毒靈谷)인데…그냥 가면 뒈지는데…."
손에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젊은 청년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산이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한적한 곳을 찾아 큰
일을 보고 나온 것이다.
그가 찾아가려 하는 곳도 독령곡(毒靈谷)이었기에 이 길을 가고 있었다.
풍신개의 아랫도리 속에 있던 피독주까지 훔쳐내었던 백산의 소매치기 실
력.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사람과 부딪치기만 하면 자신의 손에 주머니
가 하나씩 들려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지만 이
번에도 분명 주머니 하나가 손에 있었다.
자신의 손에 있는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
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사인의 인물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꼬마야! 이곳에서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육십 대의 늙은이를 보지 못했느
냐?"
강호상에서 악명을 날리고 있는 잔독사마(殘毒四魔)였다. 십여 년 전에 활
동하다 은거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인데 천선비도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이곳
까지 온 모양이었다.
생긴 것은 제각기 달랐지만 코밑에 팔자의 염소수염을 똑같이 기르고 있는
것이 묘한 동질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산이 아무 말 없이 무영비추(無影比追) 수구해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
자, 백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사인(四人)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무영비추가 갔던 길을 열심히 달려가던 잔독사마 중 막내 귀자해(句子解)
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왜 그러느냐, 막내야."
"형님! 아까 그놈 말입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다른 놈들에게도 이 길을 가
르쳐 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목을 쓰윽 그어버리는 시늉을 하자 첫째인 만효우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급한 마음에 후환거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깜
박 잊었는데 자신의 막내가 대견하게도 그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우린 먼저 가마. 뒤따라오너라!"
나머지 삼마는 질풍 같은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막내인 귀자해는 조
금 전 백산이 있던 곳으로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후환거리가 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좋지.'
자신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은 미리 제거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다. 오랜 강호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
으면서 철저히 지키는 철칙 중의 하나이고, 특히 악명을 쌓은 무림인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비도가 있는 곳은 이미 알았고 남들에게 숨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꼬마야! 네가 여기 있을 때 혹여 다른 사람이 지나간 적이 있느냐?"
일단은 누구누구가 지나갔는지 확인을 해보아야 한다. 경쟁자가 몇 명 정
도인지를 아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만약의 경우에 자신들과 힘을
합칠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할 무림인들을 알아두어야 적과 아군을 분
명하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냥꾼처럼 보이는 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잔독사마 귀자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놈만
죽이면 무영비추가 이곳으로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밖
에 없게 된다.
귀자해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가 점점 살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저를 죽여서 입을 막을 건가요?"
지금껏 겁에 질려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사냥꾼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 같은데도 귀자해는 그것을 겁먹은 얼굴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천선비도가 곧 자신들에게 들어온다는 생각에, 너
무 기쁜 나머지 자세히 살필 경황이 없었던 것 또한 이유였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냥꾼으로 치부해버린 귀자해가 천천히 손을
뻗어갔다.
"그냥 가지! 이제껏 제일 빨랐는데…."
그의 성명절기인 잔독마수(殘毒魔手)를 이용하여 제 죽을 줄도 모르고 있
는 사냥꾼 녀석의 머리를 터뜨려 버리려는 순간 나온 말이었다.
뇌수를 터뜨릴 때 온몸에 전해지는 쾌감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사냥꾼
녀석의 한마디는 그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음의 순간에 와있는 놈의 목소리치곤 너무나 태연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녀석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겁먹은 얼굴 그대로
였다.
자신이 잘못 들었겠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잔
독마수를 펼쳤다. 그리나 이 멍청한 놈의 얼굴이 겁먹은 표정이 아니고 비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전 아래에 있는 회음혈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고통.
"으흡!"
숨을 쉴 수도 없는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멍청한 놈의 머리를
깨버리기 위해서 뻗었던 동작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
보았다.
나이 오십이 넘은 그가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냄새는
지린내뿐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가 같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이미 통제기능을 잃어버린 그곳으로
부터 오줌과 피가 동시에 자신의 바지를 적셔가고 있었다.
"이익…."
"너는 지금부터 고자야! 앞으로 영원히…."
고통을 참으며 무엇인가를 얘기하려는 귀자해를 향해서 백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귀자해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래쪽에서 오는 고통과 너무나 어
이없이 당해버린 치욕에 심화가 겹쳐서 그대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의 입
에서 꾸역꾸역 피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게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지 아무거나 막 처먹으니까 이렇게 토하지.
끙차! 더럽게 무겁네, 이 새끼!"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귀자해의 양쪽 다리를 붙잡고 풀숲 한켠으로 옮기며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심화가 겹쳐 피를 넘기는 것을 보고 음식을 잘못 먹고 토한다고 투덜거리
면서도 품속을 뒤져 주머니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뒤를 이어서 무림인들이 계속해서 백산의 앞을 지나쳐 갔고 살인멸구(
殺人滅口)를 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오는 이들은 전부 아래쪽에서 피와 함께
지린내를 풍겨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곳
에서 백산이 열심히 그들의 품속을 뒤지고 있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오는 바람에 미처 품속을 뒤지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워놓
았다가 이제서야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자식은 생긴 것은 멀쩡한 놈이 가진 것은 딸랑 은자 한 냥? 개자식!
차라리 죽어라 죽어! 어? 이놈은 제법 되네."
죽어가면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인가.
수중에서 땡전 한 닢도 안 나온 인물들은 또다시 발에 차이고 짓밟히는 수
모를 당했고, 그나마 푼돈이라도 나온 이들은 발로 굴리고는 있었으나 정중
하게(?) 한쪽으로 치워지고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볼일을 다 끝냈는지 일어서면서 자신의 허리를 툭툭 치던 백산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뒤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
이다. 백산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이 너무나 어울려 보이는 학창의를 입은
노인이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야! 네가 이렇게 했느냐?"
나지막이 지나가는 말투처럼 보였으나 거기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있
었다. 적어도 일파 아니면 한 세가를 이끌어 보았음직한 기도가 등에 메고
있는 보검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니요? 저 같은 놈이 무슨 수로… 우연히 지나가다 이곳에 쓰러져 있기
에 숨쉬는 것도 곤란한 것 같고 해서 무거운 짐이나 덜어주자 싶어서 그런
거요."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으나 자신을 변명하는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하고 있
었다. 게다가 가슴속에 무거운 것이 있으면 숨쉬기가 곤란하니 자신이 가져
가겠다는 것이다.
당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인 같으면 접근하지도 못할 그럴 상황이
다. 십여 명이나 되는 무림인이 떼로 쓰러져 있는데 아무리 담이 크다고 해
도 그들의 품속을 뒤질 생각은 못한다.
그러나 이놈은 겁먹은 듯이 말은 하고 있지만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주머
니를 품속으로 집어넣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다.
"이곳에는 너밖에 없고, 다른 이들은 지나간 흔적이 없는데 네가 하지 않
았다고 하느냐?"
그냥 해본 소리다. 아무리 보아도 사냥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는 아이가 저들을 저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하는 행사가 너무나 못마땅했다. 심한 부상에 의해 기절해 있는 자
들의 주머니를 털다니…녹림의 도적무리보다 더욱 나쁜 자가 아닌가.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도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징계나 할
요량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저의가 뭐요? 혹
시…."
백산이 학창의의 노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옜소! 절반이요, 그 이상은 절대 안 돼요."
자신의 품속에서 돈주머니 서너 개를 꺼내어 노인을 향해서 던지면서도 아
깝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갈! 이런 후안무치한 놈, 감히 이 제갈장령을 우롱하려 드느냐?"
노(怒)한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상종 못할 놈이다. 부상
당한 인물들을 보고 치료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품속을 뒤져서 재물을 챙기
다니.
"천하 대의를 위해서도 네놈을 징계해야겠다."
천기신뇌(天紀神腦) 제갈장령(諸葛將靈).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전전대 가주(家主)이자, 오천맹의 일가(一家)였던
때의 가주, 그가 돌연 오십여 년의 은거를 깨고 이곳에 나타났다.
"지도 쪼가리 하나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무림인은 정당한 거고 먹고살
기 위해서 주머니 좀 뒤진 것은 나쁜 짓이라는 거요?"
백산을 징계하기 위해서 손을 뻗어가던 제갈장령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천선비도라는 것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가. 그 죽음 속에는 칼을 든 무림인들도 있지만 무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양민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밀유지를 위해서
그들을 살해하고 도망을 친 무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무림인들의 패악은 접어둔 채 살기 위해서 주머니를 뒤지는 저런
양민을 나쁘다고 징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또한 자신은 이곳에 왜 와있는가? 비도를 회수하여 분란을 막겠다
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지만 과연 그것뿐인가.
자신 또한 천선비도가 주는 유혹 때문에 이렇게 와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
는 일이지 않는가.
"휴! 하지만 자네가 하는 짓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겠네."
사실 제갈장령도 이곳에 오기는 왔지만 수없이 갈등을 하고 있었다. 천하
창생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또 달랬지만 가문을 위해
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른 세가나 가문에 비해서 유달리 약했던 무공, 오천맹의 사대세가가 전
부 봉문(封門)을 당했지만 자신의 가문만은 천무맹 아래로 들어갔다. 자신
들이 원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었다.
무공 면에서 다른 세가들보다 약했고 자신들의 심장부에 두어도 어떤 위협
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천무맹에 봉사라는 면죄부 아닌 면죄부를 내린
것이다.
또한 한때 천하를 지배했던 오대세가의 한 가문을 휘하에 둠으로 해서 자
신들이 천하의 지배자임을 알리고자 하는 효과도 노렸던 것이다.
아무런 권한도 없이 벌써 오십 년 이상을 그들의 머리가 되어주고 있다.
다른 마음을 먹고자 해도 제갈세가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었고 또한 개
방이라는 존재 때문에 불가능했다.
치욕이었다. 차라리 멸문을 당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무수히 했었다. 그러
나 후대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접었다.
비록 감시는 받고 있지만 더욱더 강한 가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지난
세월이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제갈장령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의 시대는 이미 지났어. 나머지는 수연 그 애들의 몫이야….'
천무맹의 군사로 있는 제천신뇌(制天神腦)라 불리는 손녀딸 제갈수연을 두
고 한 말이다. 백살대에 들어가서 죽은 큰아들 제갈용(諸葛龍)이 제갈세가
의 최고 무재(武才)였다면 손녀딸인 제갈수연은 최고의 문재(文才)였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손녀딸에 의해서 제갈세가는 다시 비상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백산을 가만히 응시하던 제갈장령이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무영비추가
사라진 방향이 아닌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짐
을 털어 버렸다는 듯이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에구, 돈 굳었네. 하여간 무림인들은 이상한 놈들이라니까. 제 이름은 왜
가르쳐 주는지 몰라, 젊은 여자도 아닌 것이. 근데 제갈장령…? 제갈세가
와 관련이 있나?"
제갈씨라는 것에 오천맹을 구성했던 제갈세가를 기억해 내고는 고개를 갸
웃거리고 있었다.
"근데 돈은 좀 가지고 있으려나? 옷은 상당히 고급처럼 보이던데…."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썼으면 그도 고자를 만들어버릴 심산
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저 나이에 고자가 된다한들 아쉬울 것도 없겠구먼….'
백산이 제갈장령이란 노인네에게 던졌던 돈주머니를 다시 주워들며 멀어지
는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여기서 뭐하쇼? 큰일 보러가서 죽은 줄 알았소!"
석두와 광견조 일행이 나타났다.
광견조원 여섯 명이 거대한 마차를 어깨에 메고 그 옆으로 갈태독과 조천
영 그리고 석숭 등이 따르고 있었다.
"야, 이 자식들아 발자국 남잖아!"
마차를 메고 있는 여섯 명의 뒤쪽으로 선명하게 난 발자국을 발견한 백산
이 소리를 팩 질렀다.
바위 위에 난 것을 보며 발자국이라니…지금 광견조원들이 서 있는 곳은
평평한 바위 위였다. 그곳에는 광견조 여섯 명이 지나왔다는 흔적인 양 열
두 개의 족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힘든 표정이 역력했으나 고른 호흡은 백산이 요구하는 수준에 점점 다가서
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백산의 못마땅한 반응과는 달리 기절할 듯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석두와
광견조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었다.
그 중 갈태독과 석숭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껏 광견
조의 변화를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여섯 명이 마차를 들었을 때는 땅바닥에 그냥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림인이 아니라도 만들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발자국이.
독했다.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쳤을 때도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나머지 여섯 명이 교대를 해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버티다 교대가 끝나면 그대로 쓰러진다.
그리고 운기조식.
자연 이동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세 번 이상씩 쓰러졌을 때부터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간혹 다리
쪽에서 혈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해서 다리만을 이용하고 힘을
쓰다보니 그쪽이 가장 약해졌고, 몸속에 있던 진기가 다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보내는 것이 아닌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기가 외부
로 표출되어 붉은 빛을 내비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지금 바위에 찍힌 것이
저들의 발자국이다.
다리 쪽으로 진기를 보내어 바위에 족적을 남기는 것은 고수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여주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부족한 곳이 생기자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즉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이 말했던 바람의 원리, 비록 그것이 천지간의 기운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몸속에 있는 진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진기를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것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본인이 원할 때 자신의 최고무공을 바로 펼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한순간에 목숨이 갈리는 승부에 있어서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
다.
그러한 것은 광견조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앞으로 자신들의 최고 무공인 도강을 시전할
때 내공을 모아야 했던 사전 예비동작이 사라질 것이다.
도를 뽑는 순간 도강을 뿌려댈 수 있는 수준에 근접하게 되고 또한 온몸에
서 강기를 뿌려대는 상태로 만들어갈 수 있다.
권강뿐만 아니라 각강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다리에 힘을 빼란 말이다!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있다는 생각
으로 그냥 가볍게 걸으란 말이다."
또다시 백산의 호통. 남이야 놀라건 말건 자신의 기준에 들어오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백산의 성격이 또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도착한 곳이 백산이 목적지로 정했던
독령곡(毒靈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