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84)

제6장 광풍신권(狂風神拳)

 형산(衡山), 중원 오악 중 남악이라는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산으로 가장 높

다는 축융봉(祝融峰)이 사백여 장 조금 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위

를 싸고 흐르고 있는 상강(湘江)에 의해 풍수학상으로는 명당자리로 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완벽(完璧)이란 말을 낳게 했던 화씨벽의 전설이 서려있는 산으로 한때 이

곳에 문호를 열었던 형산파(衡山派)에 의해서 많은 이들의 발길로 붐빌 때

도 있었지만 과거의 일일 뿐, 지금은 단지 호남에 있는 조금 높은 산으로서

의 가치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 형산을 향해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한 대의 마차와 넝마를 입고 있는 다

수의 인물들이 있었다.

 만화루를 떠난 백산 일행이다.

 형산, 백산에게 있어서 형산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꿈을 꾸었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같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장소였고

, 지금 가고자 하는 곳도 그 당시 생활했던 독령곡(毒靈谷)이란 곳이다. 사

방지천으로 널려있던 독초와 독물의 숲에서 살았던 육 개월 정도의 생활이

그를 만독불침(萬毒不侵)에 가까운 신체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자신이 만독불침의 신체가 된 이유가 이곳 때문이란 것을 기억해내고는 일

행을 위해 독령곡을 찾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와의

 추억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다는 것은 백산만의 생각이고 또다시 어떤 곤욕을 치를

지 알 수 없는 광견조는 모두 저번에 입었던 넝마로 갈아입고 다가오는 고

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저 산에서 살기가 진동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갈태독이 석숭과 백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석숭과 백산이야 천선비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귀혼곡에 갇혀있던 갈태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고 보니, 형산파 몰락 이후 무림의 문파가 전혀 없

는 이곳에서 다수의 무림인들이 뿜어내는 살기가 온 산을 가득 덮고 있는

것이 이상할 만도 했다.

 "지도 쪼가리 하나 때문이요."

 백산은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돈줄이 되어야 할 비도가 아직 저

곳에 있다는 소리다. 귀혼곡에서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에 이미 포기하고 있

었는데 지금 은은히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는 아직 비도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지도?"

 "천선비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르신."

 옆에 있던 석숭이 정중하게 천선비도에 대한 설명을 했다.

 "뭐라고! 고금오천무의 그 천선비도?"

 나이가 어리든 많든 무인은 무인인가! 더 이상 추구할 경지도 인간으로서

의 욕심도 없을 것 같은 백오십의 노인이 깜짝 놀란다. 그만큼 천선비도가

주는 유혹이 대단한 것이리라.

 "하여간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많아 가지고…."

 그런 갈태독이 안됐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며 백산이 혀를 끌끌 찬다.

 "험! 험!"

 자신의 추태가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하던 갈태독이 한숨소리와 함께 나지

막이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었어도 무인이고, 강한 무공을 갖고 싶은 것이 무인의 속성인

것을 어찌하냐."

 무림인(武林人), 무인(武人)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는 너무 크다. 괭이나

호미 대신 칼을 선택한 이인(異人)들, 체면과 명예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그런 인물들이다. 항상 칼날을 밟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남

보다 더 강한 무공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다.

 남들보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숨을 열심히 쉬는 것도 아니고, 몸에 좋은

보약을 먹는 것도 아닌 더 강한 무공으로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갈태독의 그런 심정과는 상관없이 또다시 광견조의 고난은 시작

되고 있었다.

 "자! 광견조와 석두는 앞에 일렬로 서라."

 갑자기 백산이 석두와 광견조 일행을 마차 앞에 일렬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사냥을 보내지 않았기에 내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던 광견

조원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모두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걸으면서 시키는 대로 해라. 먼저 단전에 있는 진기를 끌어올려서 심장

쪽으로 보내라. 흩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계속해서 끌어올려라. 몸이 견딜

수 있는 한 최대로… 걸으라니까!"

 백산의 매몰찬 목소리가 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멈추어 섰던 일행을 강

타했다. 일반적으로 초극의 고수가 아니면 움직이는 상태에서 무작정 진기

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무공 초식을 익힐 때도 먼

저 진기의 이동을 익히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지

않던가. 그런 연후에야 초식과 진기를 연결동작으로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백산의 요구는 특별한 초식에 대한 언급도 없이 무작정 진기만을 끌

어올리라 하고 있다.

 석두와 광견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자마자 심장 쪽으로 모여들었던 진기는 스르르 단전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만다.

 "되돌아가는 것은 그대로 두어라! 다시 끌어올려라! 그리고 걸어라!"

 백산이 하는 이상한 소리에 나머지 일행은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 궁금한

듯 쳐다보았으나 백산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화가 없었다.

 "발바닥으로부터 기운을 끌어들인다고 생각하라! 다시 끌어올려라! 돌아가

는 놈은 그대로 두어라!"

 갈태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은 백산이 하는 뜻 모를 이야기가 석두와

광견조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백산의 말을 계속 따르고 있는 광견조와 석두는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백

산의 말대로 계속해서 진기를 끌어올리기는 했는데 심장 쪽으로 가득 채워

진 진기가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자, 그 진기에 의해서 형성된 압력이 심장

을 터뜨려 버릴 듯 그들의 가슴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혼미해진 정

신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또다시 백산의 고함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

었다.

 "걸어라! 걸어라! 계속 걸어라!"

 어느 정도 걸었을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앞을 향해서 걷고 있던 석두와 광

견조원들은 자신들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을 접하고 있었다.

 모든 내공을 가슴 쪽으로 끌어올려 텅 비어버린 단전을 향해 다리 쪽으로

부터 시원한 기운이 급속도로 올라와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덩달아 타는

듯한 몸을 식혀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시원한 기운이 급격하게 자신들의 기운과 동화되더니 더욱더 큰 힘으로 심

장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윽! 으윽!"

 석두와 광견조원들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새어나왔으나 앞으로 전진하

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백산의 입에서 멈추라는 말이 없었고, 자신들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에 대한 믿음이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광견조와 석두를 바라보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표정이 경악스럽게 바

뀌어갔다. 석두와 광견조원들에게서 나타나는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엔 막연히 걷기만 하던 그들에게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곧이

어 선명한 족적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흙이며 돌이며 할 것 없이 그들이 밟고 있는 모든 곳에 두 치 깊이의 발자

국이 새겨지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되면 심장을 압박하는 그 기운을 양팔로 보

내라. 그리고 도를 휘두르는 것처럼 가볍게 앞으로 내뻗어라!"

 백산의 말은 계속되었다.

 "끌어올려라! 돌아가는 놈은 그대로 두어라! 걸어라!"

 결국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는지 맨 바깥쪽에 있던 찍새가 자신의 양손

을 앞으로 쭉 뻗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찍새의 양손으로부터 붉

은색의 강기가 빛살 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뻗어가는 것이었다.

 콰앙!

 오십 보 밖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석숭과 갈태독이 그 자리에 우뚝 서며 경악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넋이 빠져버린 석숭이 광견조원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백보신권(百步神拳).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공이고 설사 무림인이 아니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무공이다. 소림의 권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권법

(拳法)으로 속가제자에게마저 전수해줄 만큼 일반적인 무공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백보신권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알려진 무공이고 소림승이면 누구나 다 익히고 있는

무공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단시간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아무리 단순하다

지만 쉽게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위력이란, 비록 오십 보 밖이라고는

하지만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저 정도의 위력은 소림승에게서

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실한 백보신권의 정수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백산의 말소리와 광견조원이 내지르는 폭음이 계속해서 들

려왔다.

 한번 백보신권을 펼쳤던 이들이 다시 백산의 목소리에 맞추어 내공을 끌어

올리며 걷기 시작했고, 이 기이한 행렬은 끝이 없을 정도로 계속되었다.

 아직 한번도 권을 발출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는 석두와 소살우 두 사람이

었다. 마차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일행은 궁금했다. 이들에게서는

과연 어떤 위력이 나올 것인가.

 "이야압!"

 소살우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온몸의 힘을 쥐어짜는 듯한 고함 소

리와 함께 양손을 힘차게 내밀었다.

 전방을 향해 비쾌하게 뻗어나가는 두 줄기의 붉은색 강기덩어리.

 유성의 꼬리 같은 붉은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갈라버리고 있었다.

 콰앙!

 거의 백이십 보 밖에 있던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루로 화한 채 무너

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일행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남은 석두

가 보여줄 경지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더 궁금했던 것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소살우가 다시 자리를 잡으며 백산의 말에 따라 걷고

있었다.

 "끌어올려라! 되돌아가는 놈은 그대로 두어라! 걸어라!"

 한순간 주변의 대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일행이 다급히 석두를 쳐다보았다.

 약간 반개한 눈으로 가볍게 내뻗고 있는 그의 양손에서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빛살 같은 속도로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 힘은 이미 백 보를 넘어섰고 거의 백오십 보 밖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박혔다.

 "좋다, 석두!"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백산이 외쳤다.

 그리고 마차 근처에 있던 일행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바위가 모

래 부서지듯 사라지는 것을…더 이상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던 백보신권의 위력이 저 정도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한 시

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익히는 괴물들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는지 모르는지 백산과 광견조 그리고 석두의 기행은 거의 두 시

진 이상이나 계속되었고, 광견조원들이 한 호흡에 한 번 정도 백보신권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끝이 났다.

 "자네, 그 백보신권은 누구에게 배웠나?"

 석숭이 놀라운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도 소림의 백보신권을

알고 있다. 비록 속가 제자는 아니지만 원나라 말 뒤숭숭한 세상 때 막대한

 돈을 주고 간신히 사본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약조를 했었다.

 무림세가들의 무공에 대한 집착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문 정파라고 알려진 구파일방을 비롯한 세가들, 그들

은 자신들의 무공이 허락 없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고 있다

. 자신들의 허락 없이 자파의 무공을 익힌 자가 발견되면 악인을 처단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끝까지 추적하여 무공을 회수한다.

 무공을 회수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각 문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자비

롭다는 소림에서조차 단전 파괴는 물론이고 기억의 중추인 뇌호혈 파괴라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고 보니 다른 문파나 세가들은 더 이

상 말이 필요 없질 않겠는가.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석숭의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그게 뭐요?"

 그러나 정작 백보신권을 가르친 당사자인 백산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으

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석숭이었다.

 "이 권법의 이름은 광풍신권(狂風神拳)이요. 이 백산의 작품이지…."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던 갈태독은 기가 막혔다

. 자신도 백보신권을 알고 있고 또한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신체였지만 마료신승의 머리는 소림 무공의 보고였다. 그의

머릿속에 이론만으로 들어있던 무공은 마불신승에게 먼저 전해졌고, 마불신

승이 마혈로 들어간 이후에는 갈태독에게 전해졌다. 이번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가 그 무공들을 소림에 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백산이 광풍

신권이라고 했던 그 백보신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 전수방법과 수련방법이 문제였다.

 백보신권을 운용하는 핵심 요결에는 승내기(昇內氣), 공천답(空天畓), 적

지기(積地氣) - 내기를 끌어올리고, 하늘의 논을 비우고, 대지의 기운을 쌓

아라 - 라는 아홉 자의 구결이 존재한다.

 이 아홉 자의 뜻은 백보신권을 연구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단전을

 비우고 그곳에 대지의 기운을 채우라는 말이다.

 그러나 뜻을 알면 무엇하랴, 단전을 비운다는 의미와 그 곳에 대지의 기운

을 채운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 단전을

비우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공을 버리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또한 비워진 단전에 대지의 기운을 채우라는 말은 공령의 단계로밖에 이해

하지 못했다. 대지의 기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경지는 천지합일의 경지

가 아니던가. 그런 경지에 달한 사람이 굳이 백보신권을 익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치면 가능했기에 백보신권의 진정한 위력

이 소림의 고승 중에서만 나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것도 백 보까지만.

 이제 갓 도강의 경지에 있는 광견조에게서 완벽한 위력이 나올 수가 있는

그런 무공이 아니다. 왜 백보신권이겠는가. 아무리 전력으로 펼쳐도 백 보

까지밖에는 위력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두는 백오십 보 밖의 바

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갈태독 자신도 그렇게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놈은 그것을 간단

하게 해결해 버렸다. 단전의 진기를 가슴에 있는 장태혈(將台穴)로 전부 끌

어올리고 주화입마를 방지하기 위해서 되돌아가는 진기는 그대로 둔다.

 즉 진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만 이용하는 것이기에 주화입마의 상태는 올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되돌아가는 진기만큼을 재차 끌어올린다. 그때 운용자에게 가해

지는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심장을 터트릴 듯한 압력이 온몸

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걷게 만든다. 발에 있는 용천혈(湧泉穴)을 열어준다는 소리다.

대지에 붙이고 있을 때는 꽉 닫혀있던 용천혈이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열리고 발이 허공에 있을 때 다시 닫힌다.

 그리고 다시 땅에 닫는 순간 다시 한번 열리게 된다.

 인간의 신체란 오묘해서 몸속에 무엇인가 부족하게 되면 채워 넣으려는 성

질이 있다. 평소에 꽉 차있던 단전이 텅 비어버린 순간, 그곳을 향해서 대

지의 기운이 무섭게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백보신권을 펼칠 수 있는 몸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 다음이 더 걸작이다. 도강을 뿌릴 때처럼 가볍게 쏟아내란다. 그러한

연유로 이들의 손에서 나온 것은 바로 백보신권의 최고 경지인 권강이다.

그 위력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백보신권보다 몇 배나 더 강하고….

 구결이 아닌 몸으로 익히는 무공을 보고 있었다. 이미 저들은 수십 번의

반복 연습으로 온몸이 백보신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백보신권을 펼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와버린 것

이다.

 '참으로 대단하다. 몇십 년을 익히고도 깨닫지 못하는 소림인이 부지기수

로 많은데 두 시진도 채 안 돼서 열세 명 전원에게 백보신권을 대성시키다

니….'

 갈태독이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결코 백산이 똑똑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불신승이 준 무공 속에 있던

백보신권을 백산 나름대로 몸속의 변화를 파악해서 이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불신승과 백산의 합작품이란 소리다. 또한 백산이 무공의 기초

이론에 무지했기에 얻어진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백산이 알고 있는 무공이론이란 단순했다.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무공을 익힐 때 최상의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백산이 광견조와 석두에게 지시한 몇 마디의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속

내를 파악해 보면 실로 놀라운 무리(武理)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단전을 비우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그곳에 있던 내공을 가슴 쪽으

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혈도

의 명칭도 가르쳐 주지 않고 또한 되돌아가는 진기는 무시하라고 하였다.

즉 이미 도강을 시전할 수 있는 고수들이기에 진기 스스로가 자신들이 나아

갈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작업을 했던 것뿐이

었다. 그리고 대지로부터 힘을 받아들이는 것은 걷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

 텅 비어있던 단전이 대지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져버렸기에 진기의 역류는

있을 수가 없고 가슴 쪽에 몰려있던 진기는 도강을 쏟아낼 때의 통로를 통

해서 배출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들어버렸다.

 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지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소림 역사상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해서 백보신권이란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

는 무공, 그것이 완전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백보신권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석두는 백오십 보, 살우는 백이십

보, 나머지 녀석들도 구십 보 정도 정확하게 백 보를 간 놈은 셋밖에 없단

말이오. 그러니 백보신권이 절대 아니오."

 끝내 백보신권이 아니라는 백산의 말이었다.

 "석두야, 그 진인가 하는 것 설치하고 운기해라!"

 널브러져 있는 석두와 광견조에게 운기를 지시한 백산은 마차로 가서 요깃

거리를 챙기고 있었다. 흡족한 마음이었다.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임에도 자

신의 말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따라준 대원들이 고맙기도 했다.

 사실 백산이 시도했던 방법은 지극히 위험한 방법이다. 귀혼곡에서도 한번

 시도한 바 있는 최악의 조건, 그런 조건을 만들고 준비하여 그 속에서 무

공을 익히게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고 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주화입마로 이어질 것이다.

 "오라버니, 저것 나도 좀 가르쳐 줘요!"

 두 시진도 안 돼서 백보신권을 대성하는 광견조원들을 보고 소운이 부러웠

던지 백산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말로만 듣던 백보신권이 아니고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

공이 아닌가. 무인으로서 배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소운아. 저것이 보기는 쉬워도 아무나 견딜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온몸의 근육을 발라내는 분골착근(粉骨鑿筋)보다 더욱 큰 고통 속에서 이루

어낸 것이야."

 어느새 소운과 친해졌는지 갈태독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구결은 나도 알고 있으니 차차 가르쳐 주마. 그것보다 의술을 먼저 배워

야지."

 자신이 의가 출신이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귀혼곡을 떠난 이후로 소운

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가 가르치는 의

술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주로 독(毒)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일반의학의 상리를 벗어난 의술, 인간에게 나타나는 병을 모두 독으로 간

주한다. 그리고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독을 사용하는 치료술(治療術),

의술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방법이었다.

 "아니? 저것은 환상미로진(幻想迷路陣)!"

 광견조 일행이 운기를 하기 위해서 석두가 설치한 진을 보고 석숭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저 진을 아쇼?"

 환상미로진을 알아보는 석숭을 향해 백산의 몸으로부터 묘한 기운이 흘러

나오며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보면 살기 같기도 했고, 다시 보면 그냥 대기인 것도 같았으나 왠지

기분 나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과거 사마장군가에 있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석 소협이 알고 있는 거지?

"

 백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혼자만의 소리를 중얼거렸다.

거의 십여 년 이상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가문의 후손, 그 후손만이 알고 있

는 것이 바로 저 진식이다.

 "저것을 어찌 아느냐고 물었소!"

 백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과거 권문세가의 후손인데 금군에 의해서

 집안이 멸망했다 하였다. 석두의 본명이 사마기(司馬基)이고 석숭이 그 사

마세가를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금군, 황실의 사람이란

말이고 석숭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은 석숭이 석두 가문

의 멸문에 관련이 있는 사람이란 판단이 들었는지 백산의 몸에서 일던 미묘

한 기운이 살기로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백산의 살기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인물들은 언제나 석숭의 주변에

은신하여 그를 호위하고 있던 금령과 은령이었다.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들

고 백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죽기 싫으면."

 사람의 심경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말의 색이다. 분

노했다거나 짜증이 났다거나 하는 것이 말속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산의 말투에는 아무런 색채가 담겨있지 않았다.

 이미 분노를 넘어선 무채색의 살기, 자신도 모르게 죽여야 하겠다는 당위

성을 부여해버렸는지 석숭이 지금껏 자신의 동료였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한

듯했다.

 백산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금령과 은령의 복면이 젖어들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날지언정 석숭

을 호위하는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백산의 전면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감히!"

 "갈!"

 백산의 기운이 더욱더 강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갈태독이 고함

을 내질렀다. 그때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백산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살

기를 풀었다.

 자신들을 억압하던 살기가 사라지자 금령과 은령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

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인지 전후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살기를 뿌려대면 어찌할 거냐!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일 작정이냐?"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한때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기에 더욱더 모질게 질

책하고 있는 것이다. 철목승이 떠나면서 해주었던 백산의 비밀, 그것 때문

에도 더욱더 매몰차게 나무랐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해서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

태에서 살행(殺行)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도살과 다

를 게 무엇이더냐!"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무림인이라면 언제든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과

직면하게 된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정당성이 있을 수는 없지만 피치 못

할 경우에 저지르게 되는 살인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 수호가 되었든 복수가 되었든… 그렇지 못하면 인간은 인간이 될 수

가 없다.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불성승의 가르침을 언제나 기억하거라."

 갈태독은 줄곧 마불신승이 아닌 성승이라 칭하고 있었다. 복수밖에 몰랐던

 자신을 교화시킨 인물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석 대협, 네 분!"

 백산이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실태를 스스로 인정

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조금씩 느끼고 있던 것이다. 친인에 관계된 일이라

면 본인도 모르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자신의 행동을….

 "아닐세, 자네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유나 들어보세."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석숭의 가슴은 아직도 조금 전의 긴장감에서

해방되지 못했는지 무섭게 뛰고 있었다.

 백산이 살기를 뿜어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는 단 한번

도 화를 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랬던 백산에게서 나오는 그 기운은 아무런 색채가 없는 것 같았으나 죽

음보다 더한 공포를 불러왔다. 인간의 몸에서 풍길 수 있는 그런 살기가 아

니었다.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생기는 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도 고수이기에 무림인이 쏟아내는 살기를 알고 있다. 살기로 생명을 멸할

 수 있는 의형살인(意形殺人)이란 것도 있질 않은가. 그러나 백산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일류 고수인 그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공포에 온몸이 젖어버릴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던 것이다.

 "저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저 녀석의 본명이 사마기라는 것과 북

경의 권문세가의 자손이었다는 것밖에. 그리고 저 진은 자신의 가문에 있었

던 것이라고 하더군요."

 백산이 간단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석숭에게 설명했다. 사실 광풍대

원 중 제대로 성장한 인물이 있었던가. 그래서 누구도 과거를 묻지 않는다.

 아픈 상처를 건드려 봐야 더 커지기만 할 뿐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맞는 것 같네! 사마기란 저 친구가 과거 천기대장군으로 계셨던 사

마휘(司馬輝) 장군의 혈육이!"

 석숭의 얼굴에 격정의 표정이 어렸다. 자신의 주군에게 평생 짐으로 남아

있던 사마세가.

 자신을 위해서 죽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더 큰 아픔으로 남아있는 상처, 이제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

 천기대장군 사마휘.

 현 황제로 있는 영락제의 연왕 시절 최 측근 중의 한 사람.

 과거에 연왕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측근인

사마휘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일가족과 함께 자결했던 것이다.

 그의 자결 덕분에 연왕은 혐의를 벗을 수 있었고, 훗날 반정에 성공하여

지금의 영락제가 되었다.

 "사마 장군의 후손이 죽지 않았다는 소문을 듣고 황제께서 백방으로 찾고

자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그분의 후손을 만나게

되다니…."

 "그럼 저 친구의 가문은 복원되었나?"

 가문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전혀 문외한인 백산은 석숭의 말에 고개만 끄

덕이고 있었으나 그래도 세상 물정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는 갈태독이 석

숭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석숭의 표정은 난처한 듯이 굳어졌다. 이들에게 현 황실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복원시켜 주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는 황제,

나지막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야. 목숨 바쳐 충성하면 뭐 하냐고, 죽

어버리면 그걸로 끝인 것을…."

 백산도 갈태독이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상식

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황제라면 이 중원의 주인이다. 중원에 살고 있는 인간은 물론이고 바로 옆

에 죽어가고 있는 나무뿌리조차도 그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죽었던 사람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나야 황제의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니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 없소. 하나!

 석두가 그를 죽여야겠다고 하면 기꺼이 죽여줄 것이오, 그가 누가 됐든지

말이요."

 백산의 몸에서 또다시 살기가 넘실대고 있었고, 그의 음성에는 반드시 그

렇게 하겠다는 단호함이 서려있었다.

 "무엄하다! 감히 그분에게 역심(逆心)을 품는가!"

 가만히 한숨만 쉬고 있는 석숭과는 달리 옆에서 운기를 하고 있던 금령과

은령이 석두가 원하면 황제라도 죽여버리겠다는 말에 검을 뽑아들며 백산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백산의 몸에서 나온 살기와 금령과 은령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주변에

 몰아치고 있었다.

 "크! 큭큭큭! 그래도 개(犬)라 이건가?"

 백산의 살기 어린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분노한 그의 심정을 대

변하기라도 하듯 메마른 겨울바람 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너희들 가진 놈들은 언제나 그래왔어!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남의 아

픔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어. 마치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처럼

그냥 그렇게 버리는 거야. 그리곤 잊는 거지, 아주 영원히 말이야. 내가 언

제 그 넝마를 입었냐는 것처럼."

 백산이 얼굴을 들어 금령과 은령을 쳐다보았다. 약간의 광기마저 담고 있

는 것 같은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있는 자, 가진 자들이 바라보는 자신들은 한낱 길바닥의 들꽃보다 못한 인

생들이다. 그런 인생들에게는 아무런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랬고, 이백 명의 마을 사람이 그랬다. 현에 있는 관아에 가서 사

정하고 살인자들을 찾아달라고 애원했지만 관복을 입고 있던 인물 누구도

자신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백 명이 넘는 마을 사람 전부가 죽임을 당했는데도 조사를 하는데 일각

도 걸리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짐승의 발자국만 확

인하고는 모든 조사가 끝이 났다.

 그리곤 짐승의 습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하였다.

 계속해서 따지고 드는 아버지를 향해서 산적질을 하고있지 않았냐고 으름

장을 놓아서 자신들을 내쳤다.

 힘없이 관아의 문을 나서는 아버지와 백산의 귓가에 돈도 없는 거지같은

것들이 사람을 귀찮게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백산의 꿈에 돈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금령이나 은령 이놈들도 그놈들과 다를 바 없다. 언제나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한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잘못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주인을 모욕하

는 자들만 나쁜 자들이고 처단해야 할 자들이라 한다.

 백산의 손이 서서히 앞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머금고 있는 것은 분노였고 죽음의 기운이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산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가 일행의 접

근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백산을 쳐다보는 갈태독의 눈에는 안타까움만 남아있었다. 말리고 싶

었다. 그러나 이것은 석숭과 백산의 일이다. 석숭이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형님!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석두였다. 백산이 내뿜는 살기를 뚫고 그의 어깨를 잡은 것이다. 운공을

일찍 끝낸 석두도 진(陣) 안에서 석숭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노도 했었고 원망도 했었다. 한 때는 백부라고 부른 적도 있는 인물이었

다. 그랬던 인간이 아버지를 잊은 것이다. 힘이 있든 없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적어도 석두의 생각은 그랬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기로 했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마기가 아닌 석두가 된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그냥 석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산의 살기가 느껴

졌다.

 "그것은 그분의 인생이었습니다. 자신의 주군을 위해서 죽는 것이 아깝지

는 않았겠죠. 저는 그냥 석두일 뿐입니다, 형님."

 백산의 살기에 타격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석두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고마웠다. 누가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보일 수 있겠는가, 단지 이곳에서

맺어진 인연일 뿐인 것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황제까지 죽인다고 하는 것이다.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혹여

자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하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꼭 할 사람이다. 그

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이도 어린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지 않았던가. 일휘

에게는 말을 안 했지만 자신은 알고 있었다.

 백산이 살기를 거두고 석두를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만족하냐는 눈빛이었

고 석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끄덕이고 있었다.

 "석 대인이 그쪽 사람이면 한번 생각해 보시오. 자신 때문에 죽은 친구까

지 찾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자리가 황제인지는 모르지만, 가장 기

본적인 것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어줄

수 있겠냐 이것이오. 능력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겠지요. 아마

도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든지 적의 눈치가 보였든지 했겠지. 그래서 차일

피일 미루기만 한 것이고. 나 같으면 말이요, 일단 저질러 놓고 뒷감당을

하겠소."

 백산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의 광

풍대의 범주에 비추어서 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무식한 놈의 말이라고 그렇게 치부할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손이 왜 이리 가있지? 살우야, 밥 먹자!"

 어색한 듯 자신의 손을 안으로 들이며 운공을 마치고 나온 소살우를 향해

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광견조원들이 배가 고팠는지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사 준비를

했다. 조용한 침묵 속에 일행의 식사는 계속되고 있었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백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먹으면서 들어라!"

 무게가 실려있는 백산의 목소리에 광견조 일행은 순식간에 긴장된 표정으

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석두야, 너는 바람을 잡을 수가 있느냐?"

 "……."

 "아니면 물을 잡을 수가 있느냐?"

 딱히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고 백산의 질문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그럼 무공은 왜 익히느냐?"

 이번에는 백산의 눈동자가 광견조를 향했다.

 "강해지기 위해서요!"

 섯다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나머지 광견조원들도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나 한 사람 유독 소살우만이 심각하게 장고를 하고 있었다. 소

살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백산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님, 좋은 밥…먹고 웬 쉰 소리요?"

 아마 밥 처먹고 쉰 소리 한다고 하려다 갑자기 말을 바꾸었는지 약간 더듬

거렸다.

 "그래 새끼야! 하도 몸만 굴린다고 하기에 나도 입으로 무공 좀 가르쳐 보

려고 했다."

 백산의 밥그릇이 그대로 소살우를 향해서 날았고 소살우 역시 그럴 줄 알

았다는 듯이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그릇을 몸으로 막아내었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이 있다.

 "감사합니다, 형님!"

 자신의 옷에 붙어있는 고기 찌꺼기를 떼어먹으며 소살우가 한마디를 툭 던

지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말씀을 하셔야죠, 갑자기 목에다 힘을 주니까 놀랐지 않소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뒈진다는 말이… 있던데…."

 백산의 험악한 눈초리에 소살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나 안 해! 내가 미쳤지. 저런 돌대가리 새끼들한테 무슨 무공이야!"

 자신의 머리나 광견조원들의 머리나 별반 차이도 없는 것임에도 머리가 나

쁘다는 타령이다. 그러나 광견조원들이 배운 것이 없어서 그렇지 결코 머리

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팽무도가 자세하게 가르쳤다 하더라도 도강

을 터득한 고수들이다. 기본적인 영민함이 없으면 그 정도 수준까지 오르지

도 못했을 것이다.

 "왜 표정들이 그래?"

 광견조와 소살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간절한 눈빛으로 백산을 쳐다보

고 있었다. 심지어 백산에게 죽을 뻔했던 금령, 은령마저도 사라지지 않고

어서 말을 하라는 듯이 백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철목승마저 능가하는 무공, 그런 무

공을 가진 백산이 처음으로 자신의 심득에 관해서 말을 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툭 던지는 화두(話頭)가 너무나 거창했다. '바람을 잡을 수 있느냐

, 물을 잡을 수 있느냐'였으니….

 "알았다고, 알았어!"

 백산이 다시 자세를 잡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순간 일행의 허탈해진 표정,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던 일행의 눈가에 일

제히 분노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렇게 심각하게 쳐다보니까 말이 안 나오잖아. 편하게 밥 먹으면서 들으

라고."

 그러나 이 순간에 누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

두 무인들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무공이란 것에 대해서 한번 정도는 심각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이란 말이

다. 당연 백산의 무공 강의에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을 쳐다본 백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입을

열었다.

 "바람이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거야, 몸으로 느끼는 것이 아

니라 마음으로. 자, 여기를 보라고. 아무 것도 없지만 이런 가벼운 손짓에

도 바람이 생겨나고 있어. 그리고 제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거지. 그럼 이

 바람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도 역시 바람이야. 바람은 이렇

게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어,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우리 몸속에

 있는 진기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곳이 비워지게 되면 그것을 바로 채우려

고 해. 그것이 자신의 몸속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이 대기에서 나온 것

이냐 하는 차이일 뿐. 대기에서 가져다 쓰는 것을 공령인가 하는 말로 부르

더군."

 무림인의 꿈의 경지인 공령지체에 관한 말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내

공과 천지간의 기운을 합하여 사용할 수 있는 천지합일(天地合一)의 경지,

자연 일행의 눈동자가 빛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기의 기운을 어떻게 가져다 쓰느냐? 그건 아까 저놈들이 했던 방

법이야. 끊임없이 비우고 또 비워서 대기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거지, 익숙해질 때까지. 흔히 어떤 이들은 깨달음으로 해서 그

런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에 반대야. 아무리 깨닫고 깨달

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어있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야.

자 보라고."

 백산이 자신의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순간 주변의 대기들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더니 백산의 손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한 것은 손에 있는 모든 기운을 다 없애버린 것이야. 그러자

대기로부터 새로운 기운들이 밀려들어와서 그곳을 채워버린 거야. 몸속에

존재하는 기운을 얼마나 잘 비우느냐 하는 방법이 대기의 기운을 사용하는

관건이야. 가만히 앉아서 연구하면 엉덩이만 아프다고."

 쓸데없는 깨달음에 매달리지 말고 몸을 비우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것이었

다.

 그러나 일행은 백산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만 갸웃

거리고 있었다. 이미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이야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지

만 자신들이야 어디 그렇던가.

 그 모습을 쳐다보던 백산이 안 되겠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귀혼곡에서 석두의 예를 한번 보자고. 여기 있는 모두는 석두가 심

검을 전개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기만 했지 왜 그런 상황이 나오게 되었는

지 생각해본 사람은 없을 거야."

 백산의 말에 일행은 얼굴이 흠칫 변했다.

 맞는 소리였다. 그 순간 아무도 석두가 어떻게 심검을 전개했는지에 대해

서 생각해본 사람이 없었다. 단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석두는 아직 심검을 펼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아. 그런데 심검을 펼쳤단

말이야.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비워진 상태의 몸과 강렬한 의지가 만들

어낸 것이야."

 내공이 완전히 바닥이 났고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석두의 몸은 완전

히 비어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대기의 기운이 몸 안

으로 유입되게 했고, 심검을 펼칠 수 있는 천지합일의 경지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것을 끝으로 백산은 입을 닫았다.

 아무 생각 없는 광견조와 이미 그 경지에 도달해 있는 갈태독을 제외한 나

머지 일행은 눈을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결국 백산이 이야기하는 요점은 어떻게 몸을 비우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것까지는 백산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발견해내야 하

는 것이다.

 "큰 형님! 그럼 물에 대한 것은요?"

 백산의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는지 소살우가 백산을 빤히 쳐다보

며 물에 대한 것을 물었다.

 "됐어 새끼야. 니들 들으라고 이야기하니까 들어야 될 놈들은 하나도 안

듣고 다른 사람들만 좋은 일 났네."

 백산의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왜 눈을 감고 지랄이야, 새끼야!"

 백산에게 한방 먹은 소살우가 다른 사람과 같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섯

다의 뒤통수를 내리까며 외쳤다.

 "냅둬요, 형님! 저 새끼 또 무아의 경지에 들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뭐!"

 "형님,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쇼. 저 사람들 안 보이요? 큰 형님의 말에 감

동 먹고 저렇게 눈을 감고 있는 것 아뇨."

 백산의 말에서 조그마한 깨달음을 잡아보려 하고 있는 일행을 보고 감동받

았다고 생각하고, 그 감동을 표현하느라 자신도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이다

.

 "그래? 그 감동 속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냐?"

 섯다가 대견했는지 소살우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신을 존경스러운 듯이 쳐다보는 소살우와 광견조 일행을 바라보던 섯다

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큰 형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말이다."

 "……."

 "춥다는 것을 느꼈다. 뇌룡현은 하나도 춥지 않았는데 이곳 바람은 왜 이

리 춥냐고! 모사야, 거기 있는 뜨뜻한 국물 좀 줘."

 "……."

 퍽! 퍼억!

 "이 새끼야, 너는 그 아랫도리 돌리는 기술이나 연마해. 그게 어울려!"

 열한 명의 광견조가 광분하여 섯다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무공은 왜 익히느냐?"

 다시 백산의 입에서 철학적인 화두(話頭)가 튀어나왔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일행이 눈을 크게 뜨며 백산을 주시하기 시작

했다. 이번에는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무공을 왜 익히느냐.'

 일정한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라면 항상 생각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수없

이 고뇌를 하는 그런 화두이다.

 심신의 수양, 도의 성취 등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림이란 세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떠한 결론도 없었다.

 "강해지기 위해서요."

 단순한 인간의 표본인 광견조의 입에서는 곧바로 답이 나왔고, 그들을 제

외한 나머지 일행은 또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나 광견조원 중의 단 한 사람, 소살우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색에 잠겼다.

 자신들의 대답이 백산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림 광견조가 눈

을 지그시 감고 있는 소살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장인데 그럴싸

한 말 한마디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에 빠져있던 소살우가 눈을 뜨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광견조와 백산

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뭐라고 생각하느냐?"

 "편해지기 위해서요!"

 다시 허탈해진 광견조 일행이었다.

 "큰형님! 살우 형님 팰까요?"

 명령만 내리면 반 죽여 놓겠다는 듯이 광견조가 백산을 쳐다보았다.

 이 기회에 조장인 소살우를 한번 패보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있었다. 그동

안 소살우에게 맺힌 게 많았나 보다.

 "살우 말이 맞다."

 백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광견조는 물론 장고에 들어갔던

나머지 일행까지도 뜨악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심신을 단련하여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정의 수호를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편하게 살기 위해서 무공을 익히다니

 너무나 허탈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행의 허탈한 눈빛에도 상관없이 백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무공을 익히면 일단 몸이 건강해지지 않냐. 그러니 의원이 필요 없어서

편하고, 멀리 떨어진 곳은 경공을 이용해서 빨리 갈 수 있으니 편하고, 저

만치 떨어져 있는 것은 격공섭물(隔空攝物)을 이용해서 가볍게 당기면 나에

게로 오니 편하고, 기분 나쁜 놈을 만나도 얼지 않고 패줄 수 있어 편하고,

 온통 편한 것뿐이야. 그것이 바로 무공을 익히는 이유야. 무공이란 것은

거창한 게 아니거든."

 단순한 논리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무공을 익히고 수련하는 것이 아

닌 생활의 편안함을 위해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다.

 백산의 말이 계속되면 될수록 소살우의 표정은 의기양양해졌고, 반대로 석

두의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석두만이 백산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어떠냐, 살우야. 내 말이 옳은 것 같지?"

 "물론이죠, 형님 말이 백 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앞에는 마차가 갈 만한 길이 없지 않느냐. 그러니

 석두와 너희들이 들고 가야겠다."

 석두가 우려하던 말이 드디어 백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는 마차 길

을 만드는 것도 재미가 없었는지 저 커다란 마차를 들고 가라고 하는 것이

다.

 "그리고 천선비도를 노리는 놈들이 우리를 오해해서 쫓아오면 신경 쓰이니

까 발자국은 남기지 마라."

 삶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무공의 본질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광견조원들은 소살우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씨펄 소리를 연발하면서

 마차 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편안한 무공을 주창했던 당사자인 소살우는

그래도 자신의 말이 맞았다며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럼 그렇지 하고 인상을 구기고 있는 와중에 유독 갈태독만이 감

탄의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만이 백산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저 마차는 천근 이상이나 나가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같이 가는 여자들을

 위해서 침실까지 따로 만들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비록 마차가 무겁기는 하지만 무공의 경지가 어느 정도 되는 무림인들이라

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백산의 다음 주문,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소리는 다리 쪽으

로 전 내공을 밀어내 땅과 발 사이의 공간을 만들라는 말이다. 바로 강기의

 부드러움을 연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있으면서도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강기가

 솜처럼 부드러운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얼마가지 않아서 저들은 내공이나 체력적으로 한계가 올 테고, 그 한계를

극복하게 되면 또 한 단계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즉 백보신권을 익히면서 얻었던 강함과 마차를 들고 가면서 얻어질 부드러

움이 함께 강약의 조화를 이루어 강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공이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몸이 가르치는

것은 배우기 싫어도 익혀지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견조의 고통은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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