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불영전륜쇄옥진(佛影轉輪鎖獄陣)
'침입지자(侵入之者) 천추지한(千秋之恨)'
침입한 자는 천추의 한을 남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석비는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었는지 검푸른 이끼만 잔뜩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 석비가
가로막고 있는 계곡 안쪽에는 알 수 없는 운무만이 넘실대며 침입자들을 경
계하고 있는 듯했다.
"이건 또 뭐야?"
백산이 인상을 쓰면서 자신 앞에 있는 석비를 노려보았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보다 더 무섭잖아!"
"어떻게 할 텐가?"
공연히 만들어놓은 석비(石碑)는 아닐 터이다. 이 계곡에 대해서 알고 있
는 누군가가 세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턱
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저는 들어가지 않으면 한을 남깁니다. 그러니 갈 수밖에 없습니다."
철목승을 향해서 하는 말인지 석비에 대고 하는 말인지 백산의 중얼거림에
는 확고한 의지가 배어있었다. 전진하는 수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살우와 모사를 위해서는 이 계곡을 타고 산을 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
루라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두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왜 이따위 것을 써서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지 몰라. 못 들어가게 하려면
아예 계곡을 없애버리든지 할 것이지…."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못 들어가게 막으면 안에 무엇이 있는데 그렇
게 해놓았나 싶어서 더욱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물며 지금 백산의 상황은
호기심보다 다급함이 먼저이지 않는가.
석비에 쓰인 글이 못내 못마땅한지 백산이 발로 툭툭 차면서 투덜거렸다.
"어? 이게 뭐야?"
석비의 아래쪽에 있던 이끼가 백산의 발길질에 벗겨지면서 희미한 글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마료, 마불? 헉! 이들은 소림의 쌍천불(雙天佛)?"
석숭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분들이 왜 이런 곳에…."
쌍천불(雙天佛)
백년 전, 소림사에는 그 불심이 하늘에 닿았다는 두 명의 신승이 있었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고 문승(文僧)으로서 평생을 장경각(藏經閣)에서 경
전만 연구하던 마료신승(魔了神僧)과 역대 소림 무승(武僧) 중 최강의 무위
를 지녔다는 마불신승(魔佛神僧). 그들이 백여 살의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
으로 강호행(江湖行)에 나섰다.
수많은 악인들을 계도(啓導)하며 다녔으나 단 한 번도 살생을 하지 않은
진정한 불제자였다. 두 사람의 선행을 접한 세인들이 하늘의 불타(佛陀)가
현생하였다 해서 천불로 칭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쌍천불로 불리기 시작했
다.
소림 최고의 지혜를 지녔다는 마료신승과 무승인 마불신승, 백년 전에 사
라졌던 그들의 흔적이 이곳 귀혼곡(歸魂谷)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분들이 소림사(少林寺)로 돌아가지 않으셨던가…."
석숭이 공손한 표정으로 석비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어찌할 텐가? 그래도 계속 갈 텐가?"
자신이 이 길을 제시했음에도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고 쌍천불(雙天佛)이라 추앙받던 인물들이 출입을 금지시켜 놓은 곳이
다. 이런 곳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에 썩 내키지 않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비록 불교를 숭상하는 신자는 아닐지라도 세상 살아
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불심이라는 것이 뿌리내리고
있고, 불심이 너무 깊어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던 인물들이 남겨놓은 유지
이다 보니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석 대인이 살우와 모사를 살려놓기만 하면 며칠이 걸려도 돌아가지요."
그래도 전진한다는 소리였다. 백산의 얼굴에 단호한 표정이 서려있었다.
"그 양반들이 무슨 이유로 이곳을 막아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갑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 백산이 석비를 향해서 손을 휘둘러 버렸다
.
소림 쌍천불의 염원이 담겨있던 석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석비 안쪽에서만 넘실대던 운무가 일행을 감싸며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시야가 차단되어 버렸다.
급속하게 다가오며 자신들을 감싸는 운무에 백산이 움찔했으나 별일이야
있겠느냐 싶은 표정을 지으며 마차를 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쿠웅!
그들이 이십여 장 정도 전진했을 때 마치 거대한 절구를 내리 찍는 듯한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며 땅바닥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공포스러웠다. 완전하게 차단된 시야 속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음향.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일행은 나아가던 길을 멈추고 전방을 주시했다.
"헉! 뭐야?"
맨 먼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얼굴이었다. 은빛 투구에 머리
양쪽으로 소뿔과 같은 모양의 뿔을 가지고 있는 얼굴 네 개가 그들을 향해
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야가 일장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 곳의 괴물체는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까닭 모
를 공포가 일행에게 밀려왔다.
"전륜나한(轉輪羅漢)!"
석숭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은빛 투구와 갑옷에 커다란
구구도(九鉤刀)를 들고 있는 네 명의 거인들을 향해서 석숭이 전륜나한이
라 소리친 것이다.
"그럼 이곳이 진식 안이고 우리가 '불영전륜쇄옥진(佛影轉輪鎖獄陣)' 안에
갇혔단 말인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의 석숭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그것은 또 뭐요?"
석숭을 향한 백산의 표정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진식
이라고는 환상미로진밖에 모르는 백산이고 보니 불영… 어쩌고 하면서 힘없
이 주저앉는 석숭의 모양새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함세."
전설(傳說), 그것은 전설이었다.
부처가 세상에서 악마를 소멸시킬 때 사용했다는 진식(陣式), 인간에 의해
서 창조된 것이 아닌 부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옥의 수문장이었던 백팔 명의 전륜마신(轉輪魔神)을 이용해서 구축하였
고, 생자의 영혼을 소멸시켜 윤회(輪廻)의 사슬을 끊어버린다는 진식이 바
로 불영전륜쇄옥진이다.
이 진식에 갇히는 생명은 다시는 환생할 수 없다하여 영겁(永劫)의 진이라
고도 불린다.
부처는 전륜마신들과 함께 이 진식을 구축하여 악마를 소멸시켰다 한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마신들은 나한으로 승격되어 전륜나한이란 이름으로 서
방정토에서 살게 되었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이다.
이 진이 어떻게 해서 소림사까지 흘러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세에
있어 가장 강력한 진식이라는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의 모태가 되는 진식
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군…백팔 명의 전륜나한이라 했는데 지금은 네 명밖에 없으
니 말이야…."
철목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설이 왜 전설이겠는가.
아이들에게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성인들에게는 내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교훈을 주기 때문에 전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전설이 실체화되었을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전설이
실제로 구현되게 되면 그것이 주는 것은 공포밖에 없다.
꿈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일이다. 석숭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멍하니 전륜나한만 쳐
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왕 미친놈들이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말이요, 그 소림산가 하는 곳의 중놈들은 왜 이렇게 안 걸리는 곳
이 없어. 중이면 중답게 절이나 지키고 불공이나 드릴 일이지 왜 세상을 돌
며 이렇게 사고를 치냐고?"
백산의 불만 섞인 말투였다. 저번의 요불만 해도 공짜로 무료봉사 해준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찜찜하던 차에 이건 또 무슨 개떡같은 경우란 말인가.
백팔나한진이 얼마나 강한 진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석숭이 하고 있는
표정을 보았을 때 보통이 아닌 것은 분명할진대, 그런 진이 애들 장난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런 절진이 바로 불영전륜쇄옥진이란다.
열불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땐가? 빨리 무슨 방도를 취하든지 해야지!"
목전의 급한 상황을 보고도 긴장감 하나 없는 백산을 쳐다보며 석숭이 힐
난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 백산이란 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농담이나 하고 있을 참인가. 진이 완전하게 구축되기 전에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빨리 깨트리고 전진을 하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고 행동
을 취해야 할 때가 아닌가.
아무리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방도는 무슨, 다 깨부수고 가는 거지."
마차에서 자신의 도를 들고 나온 백산이 앞으로 내달리며 하는 말이었다.
"캬-악! 혈극참(血極慘)!"
전륜나한이라는 십 장 크기의 거대한 몸체 쪽으로 날아간 백산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백팔 줄기의 붉은 도강이 전륜나한의 동체를 향해서 부챗살처럼 퍼
지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미 부딪쳐 보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철목승과 조천영 그리고 석숭이 백산
의 뒤를 따르며 각각의 전륜나한을 향해 자신들의 무공을 날렸다.
서걱! 서걱!
광! 광!
백산의 도강과 나머지 인물들의 장공(掌功)에 전륜나한이란 괴물체가 베어
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빙긋 웃으며 말하던 백산의 눈동자가 더없이 커졌다.
사지가 잘리고 부서졌던 전륜나한들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것도 두 배의 숫자로 불어나면서.
"씨팔! 허!"
백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석숭의 넋 빠진 소리가 뒤이었다.
일행은 목전의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의 손이 느꼈던 감각은 분
명히 사물이 잘리는 선명한 촉감이었다.
그런데 마치 환영이었던 것처럼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좋아, 그럼 가루로 만들어도 다시 살아나나 보자."
오기가 생긴 백산이 자신의 마음속에 네 명의 전륜나한의 모습을 품었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밀어내며 나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혈극망(血極忘)-!"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의 삼 초가 펼쳐진 것이다.
그 순간 그곳의 일행은 보았다. 거대한 공기의 파동이 생성되어 죽음의 기
운이 앞으로 밀려가는 것을.
스스스!
십 장 크기의 전륜나한 네 명이 모래처럼 부스러지는 소리.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전
륜나한이 가루로 부서진 장소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설이 저리 쉽게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전설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젠장!"
역시나였다. 가루로 부서졌던 놈들이 여덟 개로 늘어나면서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전륜나한의 수는 벌써 이십 명이나 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떼거리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일정한 모양새
를 갖추며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공격을 할 수도 없다. 공격을 하게 되면 숫자가 불어나는데
무슨 수로 공격을 한단 말인가.
일행이 공격을 멈추고 있자 이번에는 전륜나한이 백산 일행을 향해서 그들
의 구구도를 사선으로 내리 그으며 공격을 해왔다.
날도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도에서 도풍(刀風)이 엄청난 기세로 밀려오고
있었다.
피하고 말고가 없었다. 워낙 넓게 퍼져서 다가오는 도풍이라 전력의 힘으
로 막아내는 수밖에 별다른 대처 방안이 있을 수가 없었다.
"혈극참(血極慘)!"
"천마심공(天魔心功) 퇴(槌)!"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
"구룡신공(九龍神功)!"
네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이 터지고 적색, 청색, 백색, 황금색의 강기
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도풍을 향해서 거세게 밀려가고 있었다.
콰앙--!
"으흠!"
거대한 폭음에 이어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도풍을 방어했던 사인의 앞에는 여덟 줄기의 선들이 일직선으로 나 있었다
. 단 한번의 충돌로 천하제일인을 비롯한 극강의 고수들이 십 장 이상을 뒤
로 밀린 것이다.
쿨럭!
그들 중 무공이 가장 약한 석숭이 내상을 입었는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
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뒤에 있던 전륜나한 네 명이 앞으로 나서며
다시 한번 그들의 도를 휘두른 것이었다.
또 한번의 광음이 들리고 일행은 다시 십 장을 밀려났다.
마차와 떨어지기 위해서 앞으로 달려나가 공격했던 일행은 벌써 사십여 장
이상을 뒤로 밀려서 이제는 마차와 십여 장 정도의 거리까지 와 있었다.
공격을 당하면 배로 늘어나는 것 때문에 자제를 했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
다. 뒤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광견조와 석두가 있고,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설봉산을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이 마차 안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자신들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광천뢰 두 상자가 아니라 스무 상자도 능
히 터뜨릴 수 있는 백산이었으나 그것들이 터지면 자신들도 무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가루를 만들어서라도 일단은 저지해야겠어
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백산의 몸에서 조금 전에 펼쳤던 혈극망의 기운이 사
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철목승과 조천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무공을 극성으로 펼쳤는지 주변에 있던 전륜나한들 대부분이
가루로 스러지고 있었다.
다만 석숭이 막고 있던 곳의 전륜나한은 그냥 부서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석숭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금령과 은령도 나타나
서 가세를 해주고는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쌍천불(雙天佛)인가 하는 이 개자식들 아직도 살아있다면 머리 가죽을 전
부 벗겨버린다!"
화가 난 백산이 지금은 죽고 없을 쌍천불에게 대고 거친 욕설을 퍼부어 댔
다.
스스슥!
전륜나한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였다. 이제는 거의 사십 명 정도로 늘어
나 있는 것 같았다.
십여 장 크기의 거대한 동체에 은빛 투구를 쓰고 있는 전륜나한들의 모습
은 진정 지옥의 마신이란 말이 실감나게 했다.
다시 한번 백산의 몸이 비호처럼 날았고, 수십 명의 전륜나한들이 가루로
부서졌다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으악!"
다섯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동쪽을 막고 있던 석숭 일행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동시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소운이 재빠르게 네 사람을 마차 쪽으로 인도해서
데려갔고, 그곳에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끊임없이 숫자를 불려나가는 전륜나
한을 바라보던 석숭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백팔 명이야… 백팔 명이라고…."
석숭의 말대로였다. 백팔 명까지 늘어난 전륜나한들은 더 이상 그 숫자가
늘어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숫자는 불어나지 않았지만 무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거의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당하던 전륜나한들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을 그대로 흡수해버리는지 타격감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차를 중심으로 해서 사방을 완전하게 에워싸고는 포위를 해버리
는 것이었다.
"아악!"
이번에는 조천영이었다.
비록 고금오천무 중의 하나인 빙천수라마공을 극성으로 익혔다고는 하나
백산이나 철목승에 비해서 약한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고 피를 토하
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는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만 흘린다.
"언니!"
소운과 냉추렴이 놀라서 재빠르게 달려와 조천영을 부축하며 마차로 데려
가고, 그 모습을 바라본 백산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어렸다.
"이런 개자식들! 감히 누님을…."
백산이 들고 있던 도를 거칠게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한편 백산의 반대쪽에 있는 철목승도 난감하기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
다. 천하제일인이라고 알려진 그가 진식에 의해서 이리 곤욕을 치르게 될
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 고수라는 그가 언제 땀 한 방울 흘려 보았던가! 지금 그의 모습은 흡
사 비 맞은 생쥐 꼴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조천영이 떨어져 나간 지금 혼자서 절반의 전륜나한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
이다.
"헉! 헉! 천마심공! 멸절(滅絶)!"
고금오천무의 천마심공, 그 천마심공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으나 그냥
소멸되어 사라질 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서 떨어지는 네 개의 구구도가 시선에 잡혔다.
아무런 파동도 소음도 없었다.
마치 공간을 자르듯이 허공을 찢어발기는 네 개의 구구도.
"허-억!"
다급한 비명소리와 함께 철목승이 몸을 굴렸다.
뇌려타곤(懶驪打滾).
하급무사라 할지라도 치욕스러워 쓰지 않는 수법을 사용하여 목숨을 구했
다.
"제길!"
언제나 점잖던 철목승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
었고 단아하던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된 지 오래.
철목승은 투덜거리며 일어서려는 순간 뒤쪽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흠칫 놀라 백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몸에서 붉은 혈광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허공에 정지해 있는 백산의 모습
이 보였고, 그의 양손과 발에는 언제 튀어나왔는지 도합 열두 개의 비도가
전면을 향한 채 새빨간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전륜나한을 노려보던 백산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
왔다.
"살아있지도 않은 이 돌덩어리 같은 것들이 감히 누님에게 상처를 입혀?"
백산의 몸이 움직이고, 그의 몸 주변의 삼 장 안에는 태풍이 몰아치듯 거
센 기류가 회전을 한다.
회전을 하고 있는 백산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은 전륜나한 주변에 구
축되어있던 역장(力場)을 잘라버리고, 그 틈으로 쇄도하여 들어간 백산의
몸이 비도와 함께 어우러지며 춤을 추고 있다.
한줄기 붉은 회오리가 사방으로 움직여대며 전륜나한의 동체를 헤집어버린
다. 십 장 크기나 되는 전륜나한의 얼굴로 솟아오른 회오리바람 속에서 붉
은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무질서하게 뻗어나가고, 그때마다 거대한 전륜나한
의 몸체가 무너지듯 쓰러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쓰러지면 또다시 재생하고 있는 전륜나한, 부활
하면 다시 자르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는 그런 과정만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제 막 목욕을 한 듯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백산이 마차 부근으
로 다가왔다.
"석 대인, 어떻게 좀 해보라고! 부수는 것은 내가 할 테니 방법을 찾아요,
방법을!"
거친 호흡을 고르며 석숭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눈동자가 돌아갈 정도
로 공격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부수고 부숴도 또 살아나는
저 괴물들을 어쩌란 말인가.
"낸들 무슨 방법이…위험햇!"
전륜나한을 쳐다보던 석숭이 화들짝 놀라 주변 사람들을 밀치며 퉁겨져 올
랐다.
백산이 숨을 돌린 잠깐의 순간에 백팔 명의 전륜나한이 일제히 구구도를
앞으로 내뻗은 것이다.
"도강이닷!"
백팔 개의 도에서 일제히 금빛 광채가 쏟아지며 일행을 향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백산과 철목승이 양 옆으로 신속하게 뛰어나가며 자신들의 절기를
쏟아내었다.
"천마심공! 파천(破天)!"
"혈극참, 폭, 망!"
수십 줄기의 강기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소리가 온 귀혼곡을 흔들고 있었
다.
과앙! 광! 콰콰쾅!
"커억!"
"큭!"
두 마디의 비명소리와 함께 철목승과 백산이 뒤로 구르며 마차에 거칠게
부딪쳤다.
"빌어먹을! 썅!"
해쓱하게 변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거친 욕설
이 튀어나왔다.
"오라버니! 백랑! 사부님!"
소운과 조천영 그리고 냉추렴이 놀라서 두 사람을 부축하고 나섰다.
"허허! 천하에 철목승이 이딴 진식 따위에 쓰러지다니…기가 찰 노릇이군!
"
너무나 놀라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자신이 처한 현실이 믿어
지질 않는지 철목승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 중원대륙에서 자신
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자를 거저 얻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그가 뇌려타곤 수법에 이제는 내상까지 입었다.
"철 대협, 다시 한번 저놈들을 전력으로 공격해주실 수 있습니까?"
언제 깨어났는지 석두가 철목승을 향해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어? 석두, 언제 일어났냐?"
"형님이 반 미쳐서 저놈들을 박살낼 때요."
석두가 무엇인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긴말하지 말고 방법부터 이야기해봐!"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백산도 마음이 급했는지 석두의 몸 상
태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전륜나한을 깨트릴 방법을 먼저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놈들이 재생되는 근원을 찾은 것 같아요."
일행의 눈이 일제히 석두에게로 쏠렸다. 재생되는 데 필요한 힘을 제공하
는 근원만 제거할 수 있다면 진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밟고 있는 대지와 여기 넘실대는 운무 같아 보입니다. 그래
서 철 대협께 공격을 부탁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두 명 가지고는 거의 알
아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거의 절반 정도는 부숴야 할 것 같은데…."
석두가 주문하는 것, 지금 전륜나한들은 한 명이라도 부서지면 그놈이 재
생될 때까지는 공격을 하지 않는다. 즉 백팔 명이 다 채워져야 새롭게 공격
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석두가 절반 정도를 원한 것이다. 시간도 벌
어야 하고 놈들의 재생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운무를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한다면 가능이야 하겠지. 그런데 자네 그 말 확신할 수 있나?"
철목승이 굳은 표정으로 석두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저
괴물 같은 놈들의 절반 이상은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석두의 말이 맞다 해도 그 근원이 땅이고 잡
히지도 않는 운무라면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또한 다시 살아나는 전륜나한을 백산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공격만 한다 해서 무슨 수가 생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무엇이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석두의 말이 맞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내공이 고갈되어 이곳에 뼈
를 묻게 될 것이다.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좋네, 내가 해보지. 그럼 나머지는 자네들 둘에게 맡기겠네."
철목승이 굳어진 표정으로 전륜나한을 향해서 돌아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깊숙이 파여진 발자국들이 뒤를 따르고 급격
한 대기의 파동이 생겨나고 있었다. 천지간의 모든 힘이 그의 몸을 향해서
빨려들었다.
조천영을 치료할 때 백산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경지, 자연과 완전히 동화
되어 하나가 되어버린 상태. 철목승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이런 마물들에게 이 철목승의 모든 것을 쏟아야 된단 말이지. 감히 이따
위 것들에게….'
천하제일인인 철목승이 분노하고 있었다. 불영전륜쇄옥진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분노였다. 스스로 천하제일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세인들의 인식이 그랬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 뇌룡현에 와서 모든 것이 깨졌다. 자신은 결코 천
하제일이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인물이 두 사람이나 있었고 더
강한 자도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세상이 이리도 넓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그러나 철목승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익히기는 했으나 단 한번도 펼치지 않았던 무공, 아니 펼칠 상대가 없어서
스스로 금단(禁斷)의 무공으로까지 정해놓았던 무공을 준비하고 있는 철목
승의 온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전방에 있는 전륜나한을 노려보던 철목승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해 뻗어지
며 그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마(天魔)가 하늘(天)을 부수고!"
하늘을 향한 오른손을 중심으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상반신을 감싸고 뒤
이어 왼손이 땅을 향한다.
"수라(修羅)가 대지(大地)를 태우니!"
대지를 향한 왼손에서는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하반신을 감싼다.
두 손이 건곤(乾坤)을 향한 채 철목승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그를
감싸고 있던 푸른색과 붉은색의 기운이 맹렬히 움직이며 서로 섞이고 있었
다.
"세상에 남아날 것이 무에 있을쏘냐! 천마파천수라무(天魔破天修羅武)--!"
천지를 울릴 듯한 거대한 외침과 함께 하늘과 땅을 향하고 있던 철목승의
양손이 그대로 합쳐졌다.
그 순간 겁화(劫火)와 겁풍(劫風)이 일고, 아수라로 변한 푸르고 붉은 기
운이 전륜나한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주의 기운(氣運)이었다.
뒤쪽에 모여있던 일행들의 몸마저 떨게 만드는 천하제일인의 분노가 모든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오! 오! 저것이 천마심공의 최후무공인 천마파천수라무란 말인가! 과연
천하제일인이다. 과연…."
넋을 잃은 표정의 석숭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녕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 장 크기의 전륜나한 칠십여 명이 가루로 부서져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마음이 풀렸는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 듯 미소를 띠고 있던 철목
승이 몸을 돌려 백산과 석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는 너희들의 몫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
너지듯 쓰러졌다.
"사부님! 철 대협!"
냉추렴이 철목승을 부르며 뛰어가고, 거인의 쓰러짐을 바라본 석숭의 눈에
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천하제일인이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도 분명히 무리를 한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입은 내상도 있을 텐데 또다시 전 내공을 뽑아내었다.
천하제일인이었던 그가 마무리도 아니고 진의 허점을 파악하기 위한 소모
품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는 자책이었을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복구하는 방법으로 모든 내공을 쏟아내어 석두가 원하
는 수준 이상으로 일을 처리했다.
석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철목승을 쳐다보고 있을 때 석두와 백산은 각기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석 대인, 저것을 보십시오! 저놈들의 발이 먼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석두가 전륜나한이 부활하는 모습을 노려보며 석숭을 불렀다.
석두의 말처럼 전륜나한의 부활은 대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대
지에 뿌리내린 다리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는 주변의 운무를 급속하게 흡
수하면서 서서히 상체가 생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전륜나한이 부활하고 있는 주위의 운무가 급격하게 엷어지고, 저 멀리 진
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운무의 생성지였다.
"저것이 무엇처럼 보입니까?"
석두가 흐릿해진 운무 사이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형상을 가리키며 물
었다.
그들의 눈에 언뜻 보이던 형상들로부터 운무가 쏟아져 나오며 엷어졌던 주
변을 급속도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불상처럼 보이네만…."
석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석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얼굴색이 변하며 다급한 표정으로 석두를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석 대인의 생각처럼 저놈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일단 공중으
로 들어올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 허공에서 분해시켜 저기 백 장 밖으로 날
려버려야 합니다. 물론 저기 보이는 불상도 같이 없애야 되겠지요."
석두의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석숭의 얼굴이 절망
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진을 파괴하는 방법은 석두의 말이 맞다. 아니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누가! 감히 누가 있어 저 거대한 동체의 전륜나한을, 그것도 백팔
명 전부를 하늘로 들어올린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분해하여 저 멀리 보이는 백 장 밖으로 날려 버려야 한다니
. 철목승이 재기불능인 현재의 상태에서는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석두가 믿고 있는 사람이 백산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
다보았다.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백산의 모습에 석숭은 내
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산의 표정이 너무나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문제가 해결된 듯한
걱정 없는 그의 표정을 보고 조바심 내고 있던 자신의 행동이 못내 창피했
다. 그것은 석두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맞다, 바로 그거야! 그것이 좋겠어."
"자네? 저것들을 백 장 밖으로 날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나? 잘됐어,
정말 잘됐어!"
석숭과 석두가 함박 웃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있던 여자들의 표
정도 밝아졌다.
천하제일인인 철목승마저도 처리할 수 없던 저 괴물을 백산이 처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다시 살아나는 전륜나한들이 무섭지가 않았다. 잠시 후면 모두 먼
지로 변해서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석두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꿀꺽!
꿀꺽!
꿀꺽!
모두들 긴장이 되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역시 무공을 펼치는 데는 이름이 있어야 되겠어. '천마파천수라무' 너무
멋있지 않냐? 나 지금 감동의 물결 속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했어. 철 대협
의 멋진 위용에 하도 감동 받아서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
머-엉!
백산을 바라보는 모든 눈동자가 한 순간에 텅 빈 동굴처럼 초점이 사라지
고 말았다. 잠시 후 그 동굴에서 하나둘 불꽃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급기
야,
"백 공자! 오라버니! 자네! 형님!"
여기저기서 백산을 향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목숨이 오락가
락하는 이 순간에 저 괴물을 없앨 생각은 하지 않고 무공 이름이 어쩌고저
쩌고 하는 백산의 행동에 기가 찼기 때문이다.
퍼억!
급기야 소운이 참지를 못하고 백산의 뒤통수를 힘껏 갈겨버렸다.
"어떻게 오라버니는 이 순간에 그런 생각을… 흑! 흑! 우-왕!"
소운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 한다 싶었다
. 자기는 나름대로 백산에게 한평생을 의지하려 생각했고, 또 두 분 할아버
지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절대 백산에게서 떨어지지를 말라고….
그런 그가 목숨이 위급한 이 상황에 사리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면, 하면 될 것 아냐! 왜 울고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
백산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전륜나한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철목승이 부숴 놓은 것들이 거의 다 부활했는지 다시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형님, 저놈들을…."
"알아, 임마! 저기 백 장 밖으로 날려버리면 된다 이거 아냐?"
그 와중에도 들을 건 다 들었는지 백산이 석두의 말을 재빠르게 받아쳤다.
"저 자식들이 감히 소운이를 울려?"
울리기는 제가 울려놓고도 전륜나한 탓으로 돌려버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십 장 주변으로 다가선 전륜나한들이 네 겹으로 포위를 하
고는 톱니 모양이 선명한 구구도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허공으로 비상한 백산의 몸에서 수천비와 각천비가 튀어나오며 처
음엔 붉은 빛을 뿜어내더니 점차 백광으로 변해갔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약한 미풍처럼 살랑대던 바람이 마차 주위를 회전
하며 점차 거세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광풍(狂風)으로 변하여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석숭이 놀라운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반투명한 백광이 백산의 몸을 감싸고, 풀려버린 머리는 하늘로 치솟으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양 옆으로 들어올린 팔에서 수천비가 튀어나와 수평으로 뻗어있고, 다리의
각천비는 지상을 향한 채 새하얀 백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저 미증유의 기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저것
을 과연 무엇으로 표현해야 된단 말인가!
그들이 있는 마차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돌고 돈다. 엄청난 거력
(巨力)이 모든 것을 빨아올리며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일 장… 이 장… 삼 장….
드디어 백산의 몸에서 일어나는 광풍(狂風)이 거대한 전륜나한들의 동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움찔 움찔.
광풍이 일으키는 거력에 전륜나한들이 조금씩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허공으
로 들어올리기에는 버거운 듯 보였다.
'이것들이 안 움직인다 이거야? 내 모든 것을 짜내라 이거지.'
백산이 자신의 모든 힘을 뽑아내려 하고 있었다. 사부인 팽무도는 물론 자
신조차도 끝을 알 수 없을 거라던 그의 힘을….
"이야합!"
백산의 입에서 대지를 얼려버릴 듯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주위를 감싸고
있던 백광이 점차 유형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무(無)의 상태에서 다시 유(有)의 상태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생겼다 바로 증발되어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백산의 주위가 투명한 점막처럼 변하고 지금까지는 일정하게 도는 것처럼
보이던 회오리가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거대한 회오리의 틀 속에서 다시 조그마한 회오리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 조그마한 회오리 하나하나가 꼼짝하지 않던 전륜나한들을 감싸며 하늘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 사이 백팔 개의 전륜나한들이 전부 허공에서 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거대한 회오리바람 속에 백팔 개의 작은 회오리가 만들어져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자연의 산물
같았다.
"저것은…? 저건… 분노한 바람이야, 분노한 광풍이라고…."
석숭이 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백산이 만들어낸 광경에 전율을 금치
못하였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그들에게는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은 광풍은 미친
듯이 회전을 하고 어느 순간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백산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풍파천무(狂風破天武)--!"
백산의 몸이 광풍과 함께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천비(手天匕)와 각천비(脚
天匕)가 수평으로 펼쳐진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돌아가고, 새하얗게 빛나
는 비도에서 붉은 혈광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그 빛이 닿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순간 마차에 있던 일행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 작은 회오리 속에
갇혀있던 전륜나한들이 하나씩 소멸되어 바람을 따라서 흩어지고 있는 모습
이었다.
아무런 음향도 징후도 없이 그냥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마차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무의 상태로 되돌아가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진
의 끝에 있던 불상들마저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 저것을 믿으란 말인가!"
석숭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무공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던 결과였지만 막상 현실화되어서 나타
나자 믿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었다. 경외였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너무 강한 백산에
대한 공포가 더 깊이 인식되는 것은 석숭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허공에서 회전하던 백산의 몸이 멈추어 서더니 균형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
고 있었다.
백산의 모습에 흠칫 놀란 조천영이 가장 먼저 백산을 받아 안았다.
"누님! '광풍파천무'란 이름 괜찮지? 철 대협 보고 베낀 건데 아주 맘에
들어."
백산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며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래요 멋있어요. 너무 멋있게 지었어요, 백랑!"
조천영이 조심스레 백산을 안고 마차 쪽으로 움직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쩔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절대 철없는 남편이 아니다. 백산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백산을 안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광풍파천무면 어
떻고 백산파천무면 어떤가. 지금 한번 쓰고 나면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것
이다. 그 힘든 순간에 자신들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데 소운을 비롯한 일행은 백산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속하
게만 생각했다.
철목승과 백산을 태운 일행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에게 이상한 정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쌍천불이 구축했던 진식 때문에 무려 백 년 간이나 인간의 출입이 금지되
었던 곳치고는 너무나 황량했던 것이다
무수한 수목들로 둘러싸여 있어야 정상일진데 마치 버려진 황무지처럼 아
무 것도 없었다.
그 흔한 잡초 한 포기 보이질 않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먼지만 푸석거리며 휘날리는 광경은 그곳을
향해서 다가가는 일행에게 까닭 모를 두려움만 안겨주고 있었다.
"석 대인, 이곳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황폐해진 주변 경관을 이상하게 여긴 석두가 석숭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안쪽에 무엇인가 있어서 쌍천불이 절대의 진식을 펼쳐놓았음은 분명한 사
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보이는 귀혼곡은 황량함과 쓸쓸함 빼고는
여느 계곡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단지 이상한 것이라면 아무 것
도 없다는 것이고, 마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처럼 메마른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게 말이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나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구먼…."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일단은 계속 들어가 보세."
얼마 동안 나아가던 그들의 눈에 이윽고 계곡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마치 천신의 다
리처럼 양쪽으로 늘어선 두 개의 절벽이 존재했고, 그 절벽 사이에는 마차
가 지나갈 만한 조그마한 틈이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절벽의 아래쪽에 놀랍게도 백여 장 크기의 조그마한 초지(草地)가 형성되
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초지 위에 인간의 흔적으로 보이는 오두막집
이 한 채 서 있었다.
"아 -!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단 말인가…."
황량한 주변 환경만 아니라면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다 하여도 믿을 수 있
을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치 그림 속에 있는 오두막을 방문한 것
처럼 인간 세계와 동떨어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조금 전 황무지에 들어설 때부터 묘하게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 안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꼈지만 그
때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계곡의 끝을 향해서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
같더니 이제는 온몸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아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불쾌한 느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석두의 어투에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
다.
"마기(魔氣)예요! 더 이상 가면 안 돼요."
냉추렴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일행을 향해 경고를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변화는 흑진주처럼 검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잔뜩 충혈된 것처럼 붉
은 빛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린가, 냉 소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냉추렴을 쳐다보는 석숭의 눈도 냉추렴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붉어진 눈동자에 말하는 모양새마저도 묘하게 거칠어졌다.
"유형마지(有形魔地) 같아요. 빨리 조금 전 그곳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석숭의 동공에 흐르는 붉은 빛을 확인한 냉추렴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
뭔지 모를 짜증스러운 기분과 점점 붉어지는 자신들의 동공, 마기에 의해
서 완전히 황폐해진 주변 경관, 이 모든 것들이 전설에서 이야기하는 유형
마지(有形魔地)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단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저 멀리 절벽 아래에 형성된 초지이다. 그
녀의 생각대로 이곳이 유형마지라면 저러한 것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을 흐르는 마기는 절대 평범한 기운이 아니다. 마공을 익힌 자
신마저도 영향을 받고 있질 않는가.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사부인 철목승과 백산이 정신을 잃
고 있는 것이 그녀를 더욱더 불안하게 했다.
"그 반신육천역(半神六天域)의 유형마지(有形魔地) 말인가?"
석숭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득한 태고 적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반신육천역(半神六天域).
천지간(天地間)에 인간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여섯 곳의
천역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름하여 '반신육천역(半神六天域)' 이라 한다.
왜 그런 곳이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밝혀진 바 없으나 반신
육천역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했다.
마(魔)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유형마지(有形魔地).
화(火)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화령극지(火靈極地).
빙(氷)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빙극냉지(氷極冷地).
불(佛)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불연성지(佛蓮聖地).
사(邪)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사극혈지(邪極血地).
뇌(雷)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뇌극철지(雷極鐵地).
이들 여섯 지역을 통틀어서 반신육천역이라 부르고 있다. 각각의 천역에
있는 기운을 인간이 흡수할 수만 있다면,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는 천고의 절지. 한때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 천역을 찾고자 중원 방방곡곡
을 헤매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신육천역을 찾았다는 인물은 없었다.
그냥 구전(口傳)되는 전설일 뿐이었다.
그런데 반신육천역 중 마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유형마지가 나타난 것이
다.
"아직도 확신이 서지는 않아요. 유형마지의 유형이란 말은 마기가 유형화
되어 있어서 생긴 말이라 했거든요? 그럼 지금쯤 우리는 거의 이성을 잃고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위험해!"
지금껏 정신을 잃고 있던 백산이 벌떡 일어서면서 냉추렴을 껴안고 바닥으
로 몸을 굴렸다.
쉬익!
냉추렴이 있던 자리 위로 광견조원 한 명의 도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크크큭!"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져 있던 광견조원들이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내며
괴소와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미쳤나?"
백산이 냉추렴을 껴안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광견조원들을 쳐다보며 소리
를 질렀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기절해 있던 놈들이 벌떡 일어
나서는 동료에게 도를 휘둘러댄 것이다.
"백 공자, 이 손 좀…."
냉추렴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백산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
았다. 광견조를 욕하면서 쥐락펴락했던 그의 두 손이 냉추렴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처녀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왜 이곳에 있죠? 이놈도 예쁜 것은 알아 가지고…."
마치 자신과는 별개인 양 두 손을 쳐다보면서도 냉추렴의 가슴에서 손을
뗄 의향이 없는지 꽉 움켜쥔 채 그대로 있다.
"손 좀…."
냉추렴이 계속해서 손을 치워달라고 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손을 들어올
리며 '보기 보단 실하네?' 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새끼들이 왜 저리 미쳐서 지랄이죠? 게다가 저 자식들은 살우
와 모사 아뇨?"
극심한 내상으로 생사가 불투명했던 소살우와 모사를 포함하여 광견조 전
원이 도를 뽑아들고 일행을 거칠게 공격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도를 휘둘러대고 있는
그들에 대해서 일행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피하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
그러나 소운을 제외한 나머지는 내상을 입은 상태라 피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마기(魔氣) 때문일세. 마기가 저들의 육체만 깨운 거지."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냉추렴이 이야기하는 유형마지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철목승이 하는 말이었다.
마도인의 꿈의 성지라는 유형마지,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
이다.
"자네, 지금 몸 상태가 어떤가?"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백산이 어느 정도 시간만 벌어준다면
빠른 시간에 자신의 몸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곳 유형마지(有形魔地)에서라면 다른 곳에서보다 수배나 빨리 몸을 회복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익힌 천마심공(天魔心功)은 마기에 근원을 두
고 있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무공을 정공(正功), 마공(魔功), 사공(邪功)으로 분류하고, 정공은
올바른 것으로 사공과 마공은 사악한 이단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의 몸속에는 천지간의 모든 기운이
다 잠재해 있다.
밝음을 지향하는 정(正)과 어둠을 지향하는 마(魔), 그리고 죽음을 지향하
는 사(邪) 등.
이러한 기운들 중에 어느 한 기운을 극대화시켜 무형(無形)이었던 기운을
유형화(有形化)시켜 밖으로 배출해내는 것이 무공이다.
그럼 정공이란 무엇인가. 바로 정(正)의 기운을 유형화시켜 내공이라는 정
형화된 틀에 의해서 외부로 배출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밝음, 즉 정(正)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정의 기
운을 유형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늘 가지고 있는 것,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유형화시
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공을 익히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연성 속도가 늦다는 것.
반면에 마(魔)나 사(邪)는 내면에 묻혀있는 어두운 기운과 죽음의 기운을
꺼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을 꺼내기 위한 시작이 어려운 것이지
일단 꺼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정공으로부터 얻을 수 있
는 힘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
그래서 마공이나 사공은 익히기가 쉽고 정공에 비해서 그 연성 속도가 빠
른 것이다.
즉 막혀있던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듯이 막혀있던 어두
운 기운과 죽음의 기운은 한번 발출되기 시작하면 익히고 있는 본인도 통제
하기 힘들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極)에 도달하는 것은 마공이나 사공에서는 쉽지가 않다. 갑자기
성숙해버린 인간이 세상사에 적응을 못하고 스스로 자멸해 가듯 갑자기 커
진 마공이나 사공은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그것을 깨트리는 작업
은 정(正)을 유형화시키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부딪치는 마음의 벽, 그 벽을 깨지 못하는 무인들이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들면서 개세마두가 탄생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마음의 벽을 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더 큰 어둠의 힘을 원하게 되
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인간을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방법
이다. 그래서 생기는 것이 사악한 마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의 마기나 사기를 계속 키워서 천지합일의 경지까지
도달한다면 그때의 경지를 바로 초마(超魔)나 극마(克魔)의 단계라고 칭하
며, 마공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둠의 기운이 사라지고 신공의 단계에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正)의 기운만 먹고사는 소위 정파의 인물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똑같은 시간 동안 무공을 익히는데 타인의 무공이 그 정진속도가
훨씬 빠르다면 누가 그것을 정통으로 인정하려 하겠는가. 그것도 자신의 것
을 최고라 생각하고 있었고, 매번 승자의 위치에 있었던 이들이 아니던가.
물론 극에 달한 무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만 한다면 문제가 아니겠으나 극의
(極意)를 깨우친 인물들이 한 시대에 한두 명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 더 크
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마나 사를 추구했던 무공들은 가진 자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정파의 무공 중에서도 마공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들이 바로 고금오천무에 포함된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와 금
황파천신공(金黃破天神功)이라 하겠다.
즉 마공에서 택한 속성의 방법과 쉽게 극의를 깨닫게 해주는 정공의 장점
을 모두 취한 무공들, 마찬가지로 마와 사에서 정공 쪽의 장점을 가져다 접
목시킨 무공이 천마심공(天魔心功)과 사사지옥혈공(邪邪地獄血功)이다.
그럼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은 어떻게 된 것인가. 빙공(氷功)이나 화
공(火功)은 인간의 내면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기운이다. 즉 외부에서 유입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빙공이나 화공을 익힌 무인들은 체질이 변하
는 등 인체의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강호인들이 정공이니 마공이니 하며 분류하여 서로를 경시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바로 초인(超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접하게 되는 마음의 벽을 넘어 극
의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반신육천역이다.
즉 깨달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공급되는 힘으로 마음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곳 유형마지는 마공을 익힌 자들에게 초마나 극마의 단계로 쉽게 접어들
게 할 수 있는 마인들의 성지로 칭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마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심력이 약한 이들은 마기의 노예가 되어서
인간의 가장 사악하고 어두운 면만을 표출시키게 되는 곳이 또한 유형마지
이다.
지금의 광견조가 그런 상태로 변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기의 노예
가 되어버렸다.
"빨리 몸부터 회복하시오!"
굳이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일행이 죽어갈 판인데 내공
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한가. 일단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실 지금 백산이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일 할이 채 안 된다. 거의 모든
것이 바닥이 난 상태였다.
백산의 무공이란 게 몸속에 내공을 모아두었다가 조금씩 사용하는 것은 아
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있어야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든지 하는
것이다.
그냥 들어오란다고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백산의
몸은 일반 무인들보다도 더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광견조원들이 그들의 도를 피해버리는 일행에게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느꼈는지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파괴본능을 만족시켜줄 상대를 광견조원들끼리 찾고 있었다.
광견조원들에게 뛰어가는 백산의 손에는 어느새 가져왔는지 자신의 도가
도집째 들려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정신 차렷!"
커다랗게 외치며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광견조원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
간 그의 가슴을 베어오는 광견조원들의 도. 서로 싸우던 광견조원들이 자신
들을 방해하는 백산을 향해 일제히 도를 휘두른 것이다.
자신을 향해서 돌진해오는 도를 보면서 백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포를 오르는 물고기가 물살이 센 곳을 피하듯 백산의 몸이 자연스럽게 빈
공간을 향해서 움직였다.
혈우신보(血雨神步), 용미폭포에서 물고기의 움직임을 보고 터득한 절세의
보법이 적도 아닌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광견조의 도를 피하면서 백산의 도가 도집째 거칠게 휘둘러지고 서로 싸우
던 네 명의 광견조원들이 나가떨어졌다.
"크크큭! 캭캭캭!"
그러나 나가떨어진 광견조원들이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 백산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빨라진 몸놀림이었다.
자신들을 내팽개친 백산에 대한 분노가 그들 내면 속의 어둠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고 더욱더 강한 잠력을 뽑아내게 하는 것이다. 곁에서 보고 있던
모든 일행도 백산을 따라서 광견조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밀어붙이기 시
작했다.
그러나 난감했다.
같은 동료에게 칼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이미 정신이 없는 자들을 기절도
시키지 못하니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백산 일행이 광견조를 자꾸만 막아서고, 자신들의 성질대로 되질
않자 분노가 더욱더 커졌는지 광견조의 도에서 시뻘건 도강마저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쪽은 피하고 한쪽은 공격하는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백산 일행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는 것은 광견조의 도강이 아니었다. 문득문득 솟
구치는 살심을 억제하는 것이 한결 힘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도 유형마지의 마기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자신
들을 괴롭히는 광견조원들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이었다. 당연 수비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백산 일행의 의복이 피에 젖기 시작했다. 도강을 날리는 열두 명의 고수들
. 비록 이지를 상실하여 정확성은 별로 없었지만, 애당초 그들이 배운 것은
투로가 있는 도법보다는 손이 가는 대로 상대의 허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것이었기에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산의 상태도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이미 금강불괴를 넘어선 몸이라 상
처는 없지만 입고 있는 의복이 찢겨나가 거의 넝마로 변해있었다.
'안 되겠어, 이러다간 저들이 다치고 말겠어. 백산아, 백산아! 생각을 해
라. 저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가만? 저들을 멈추게 한다?'
"그래, 바로 그거다!"
아무리 두드리고 때려도 반응이 없는 광견조원들을 보며 고심하던 백산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표정을 굳히며 광견조원들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새끼들아!"
나지막이 중얼거린 백산이 마지막 모든 힘을 짜내어 막 소운을 향해서 도
강을 날리려는 광견조원 한 명을 향해서 무섭게 돌진해갔다.
그때 소운은 완전히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오른 쪽에는 광견
조원들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뱁새가 자신의 목을 향해서 도를 날리고
있었고, 왼쪽에는 또 다른 광견조원인 칼날이 하체를 향해서 도를 휘둘러
오고 있었다.
순간 소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곳 뇌룡현(雷龍縣)에 와서 세상에 태어
나 처음으로 남자를 만났고, 할아버지도 만났다. 그리고 그 분이 영약도 주
셨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남자인 백산이 구해왔다며 마령호 내단을 그녀
에게 복용시킨 것이다.
아직은 완전히 용해시키지는 못했으나 생사투인전 때보다 두 배 이상이나
강해졌다.
주변에 워낙 강자들이 많아서 자신의 실력이 미미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강
호상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인물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부하들에 의해서 죽
게 생겼다.
소운이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상하로 밀려오는 도강을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귀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소운 뭐해! 빨리 돌아!"
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마치 강시인 양 백산의 말을 따라서 회전했다.
생사투인전에서 구룡편을 상대할 때 돌았던 것처럼.
"크악!"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통은 느끼는 것인가. 고통에 찬 괴성과 함께 소
운의 왼편에 있던 칼날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다가온 백산이 그의 세 곳을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도를 쥐고 있
는 팔과 두 다리.
대지를 딛고 서야 할 두 다리와 도를 쥐어야 할 팔이 부러지자 도강을 뿜
어내던 광견조원들은 더 이상 어둠의 사자가 될 수 없었다.
부러진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분노의 괴성만 지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백산의 활약은 시작되었다.
도강을 뿜어내고 있는 광견조원들의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성이 없는 상태였기에 자신의 앞에 있는
적에만 신경을 쓸 뿐 옆에서 접근하는 적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는 것이었
다.
혹시라도 일행이 다칠까 백산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전력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부하들이므로 스스로 처리하고 싶었다.
"크크크!"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광견조원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소살우, 광견조의 조장인 그만이 남아서 괴소를 흘리며 백산을 향해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소살우의 싸움방식은 다른 조원들과 또 달랐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와
왼손, 그리고 두 다리까지 모든 것이 공격무기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헉헉!"
백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온몸에서 붉은 혈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극도로 팽창한 어둠
의 기운은 소살우가 평소에 보이던 능력 이상을 발휘하게 하였는지 손이며
발이며 할 것 없이 붉은 강기에 휩싸여서 백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헉!"
찌이익!
소살우의 공격에 백산의 의복이 찢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혈우신
보를 전개할 내력도 모이지 않았기에 오직 기본적인 체력으로만 상대를 하
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금강불괴지신의 몸이었기에 상처는 걱정하
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도와 몸이 한데 어울려 귀혼곡을 유영하고 있었다.
"내가 돕겠네."
한쪽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던 석숭이 보다 못해서 앞으로 나섰다.
"구룡신공!"
석숭도 마지막 힘을 짜냈는지 입가에 약간의 피를 흘리며 자신의 무공을
펼쳤다.
"크악!"
금빛 강기가 소살우의 몸을 강타하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소살우가
몸을 비틀거렸다.
'기횟!'
석숭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 백산이 그의 도를 힘차게 휘
둘렀다.
소살우를 마지막으로 열두 명의 광견조원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졌다.
사지 중 세 개가 부러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에서도 분노의 괴성을
질러대는 광견조원들은 지옥의 악귀나찰(惡鬼羅刹)을 보는 듯 섬뜩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친구들을 저렇게 만들어버리나?"
운공을 끝냈는지 신수가 훤해진 철목승이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어렵다고 자신의 수하들의 사지를 분질러 버리다니. 그로서
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쨌건 자네는 대장 자질은 있어. 이 상황에서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았
으니…."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저질러 놓고 보니 가장 현명한 선택
이었던 것 같았다.
"지금부터 철 대협이 책임을…."
백산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두 번째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전륜나한을
상대하느라 거의 진기가 바닥난 몸으로 도강을 시전하는 광견조원들까지 처
리하다보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조천영과 소운이 달려와 백산을 안아들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네, 유형마지의 마기가 약해져 있어서. 만일 정상적이 유
형마지였다면 자네와 나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마기의 노예가 되었을 것
을….'
나지막이 중얼거린 철목승이 쓰러진 광견조원들의 마기를 해소시켜 주었다
.
무서운 말이었다. 마기가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있는 전원이 마기의
노예가 되어 서로 상잔(相殘)하다 죽어갔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백산과 조천영 그리고 철목승은 마기의 노예가 되지
는 않겠지만 백산과 철목승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조천영과 석숭 일행은
내상으로 인하여 마기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란 이야기였다.
"무서운 이야기 그만하시고 어서 가시죠. 그런데 백 소협은 상관없을까요?
"
온몸을 부르르 떨며 석숭이 백산에 관해서 물었다. 지금 백산이 기절해 있
으니 위험하지 않느냐는 소리다. 만일 백산이 광견조원처럼 변하기라도 한
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기가 전혀 침입을 못하고 있군요. 내공이 기이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
고…."
철목승이 백산의 손을 잡아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의 몸속으로 내
공을 살짝 밀어 넣어보았으나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엄청난 반발력이 자신의
내공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이들의 내공 정도나 몸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몸속으로 자신의 내공을 주입하여 본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으
로 상대방의 내부 상태를 진단하여 이상한 곳이 있으면 바로잡거나 단전 등
을 자극함으로 해서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백산의 몸은 아예 타인의 내공이 닿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자신의 내공이 들어가지도 못하는 백산의 몸을 마기가 뚫을 수는 없을 것이
다.
"일단은 저기 보이는 초지(草地)로 가봅시다."
철목승의 회복이 일행의 마음을 안정시켰는지 초지를 향하는 발걸음이 무
척 가벼워 보였다.
* * *
"으음!"
백산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이 돌아온 백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광경은 자신의 사부와 비슷
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왜 나는 기절했다 깨어날 때마다 남자가 있는 거냐고. 여자가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진맥을 하고 있었던지 백산의 손목을 쥐고 있던 인물이 한순간 멍한 얼굴
이 되어 백산을 내려다보았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놈치곤 이상한 말을 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산의 몸에 힘이 돌아오고 사물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던 백산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인물을 관찰하듯이 쳐다보
았다.
옷인지 천 조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헤진 넝마로 간신히 중요부분만
가린, 불그레하니 혈색 좋은 얼굴에 상당히 젊어 보이는 호남형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하나 이상한 점은 꽤 젊어 보이는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온 얼굴을 뒤덮
다시피 하고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이었다.
백산은 사부를 경험해봐서 알고 있다. 저렇게 젊어 보이지만 다 속임수다.
실제로는 이미 죽어도 몇 번을 죽어야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이것 보쇼, 왜 남의 손은 쓰다듬고 있던 거요?"
자신을 구해주었어도 절대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철면피,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막말을 하고 있다.
"이런 육시랄 놈! 다 죽어가는 놈을 구해주고, 혹시 잘못될까봐 조석으로
진맥해주었더니 뭐가 어째?"
노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보통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처하
면 먼저 구해주어서 감사하단 말부터 한다. 그게 아니면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횡설수설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놈은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왔음에도 감사하단 말은커녕 자신이
여자가 아닌 것에 더 불만이었고, 진맥하기 위해서 쥐고 있던 손은 쓰다듬
고 있다고 표현을 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남색을 밝히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벌컥!
"백랑! 오라버니! 큰 형님!"
조천영과 철목승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일제히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반가
운 표정으로 백산에게 다가섰다.
"몸은 이상이 없는 거죠?"
"이제 괜찮아요?"
"괜찮나?"
두서없이 물어대는 일행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것만 하면 괜찮은데 조
천영과 소운은 백산의 몸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이 손으로 이리저리 찔러보
기도 하고 탁탁 치기도 하면서 몸의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만!"
결국 견디다 못한 백산이 소리를 팩 지르고 말았다.
"험! 험!"
조용해진 일행을 향해서 백산이 입을 열었다.
"우선은 몸 상태는 정상! 아픈 곳 없음. 그리고 누님, 나 허리도 멀쩡하오
!"
멍--!
오두막이 꽉 차도록 들어와 있던 일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산과
조천영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이상 없다니, 그것도 조천영에게만 따로 한 말이었다.
조천영의 얼굴이 벌겋게 붉어졌다.
백산과 처음 관계를 갖던 그날 밤 사부노릇을 한답시고 남자는 허리가 생
명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저런 말을 할 줄
이야….
얼굴이 붉어진 조천영이 수십 쌍의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
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허리가 이상 없다니."
조금 전부터 얼굴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던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이
백산을 향해서 대뜸 반말을 해댔다.
백산이 고개를 돌려 흰 수염의 인물을 쳐다보았다.
"거 이상하단 말이야! 생긴 것은 분명 사오십 대인데 저놈의 수염은 팔십
대란 말이야…."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긴 수염의 인물을 쳐다본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
할 수가 없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고개를 돌린 것 같은데 수염만 응시
하다 보니 자신의 할 말을 잊어버리고 딴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마 댁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섯다!"
"넷! 큰 형님!"
"설명해 줘, 남자에게 왜 허리가 생명인지…."
그곳에 있는 인물들이 왜 허리에 대해서 모르겠는가! 다만 보름간이나 기
절했다 깨어난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었
다. 어쨌든지 형님이라는 사람의 명령을 받은 섯다는 설명을 시작했다.
"예! 그러니까 남자에게 있어서 허리라는 것은 무인에 비교하자면 이 도(
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 즉 여자를 제압하기는 했는데 이 도가
없다면 상대를 죽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
"섯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쉽게 좀더 그럴싸…아냐
됐어!"
좀더 쉽게 설명하라고 다그치던 백산이 갑자기 섯다를 중지시키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결혼한 사람? 쉽게 말하면 마누라 있는 사람. 어이! 거기 중년 늙
은이, 댁은 결혼해본 적 있소?"
백산에 의해 중년 늙은이라 불린 인물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육시랄…."
"아 됐어요, 됐어! 화내면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만하고 내 말 마저
들어요. 가만히 보니 여기는 마누라 있는 사람이 석 대인 한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네? 그런고로 허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리 떠들고 이야기를 해
보아야 말짱 도루묵이라 이거야. 그러니 전부 잊어버려요, 전부!"
말을 마친 백산은 '누님, 나 허리 괜찮아!' 하면서 조천영을 찾으러 나가
버린다.
남아있던 일행은 모두가 멍한 얼굴로 백산이 나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악!"
중년 늙은이의 입에서 분노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 것도 묻지도 못한 채 새카맣게 어린놈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말았다. 그것도 중년 늙은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철 대협! 저놈이 원래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가?"
철목승을 쳐다보는 중년 늙은이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정하십시오, 어르신. 말하는 것은 저래도 악의는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 어르신!"
놀라운 일이었다. 이 중년 늙은이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철목승이 어르신이
란 표현을 쓰고 있는가.
"내 아무리 이곳에서 백 년을 살았다지만 저렇게 버릇없는 놈은 처음일세.
"
철목승의 얼굴을 보아서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성격상 이런 것
을 보고 그냥 넘어갈 인물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강호를 횡보하던 백여 년 전만 해도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하면 우
는 아이도 울음을 그쳤을 정도로 공포의 대명사였다.
비록 세월이 흘렀고, 주변 여건으로 인하여 그의 성정이 많이 무디어지기
는 했다지만 그래도 욱 하는 그의 성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 조천영을 찾기 위해 나간 줄 알았던 백산이 문을 벌컥 열며 다시 들
어왔다.
그리곤 중년 늙은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주위를 빙빙 돌더니 느닷없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이게 몇 개로 보이오?' 하는 것이었다.
조천영으로부터 그의 나이를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들어왔음에 틀
림없었다.
순간 천장지옥마의 눈동자가 홱 돌아가며 백산을 향해서 거칠게 일장을 내
질러 버렸다.
그렇게 나이를 처먹고도 멀쩡하느냐는 표현을 손가락 두 개를 가지고 했으
니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화가 날 만도 했다.
쾅!
거친 타격음과 함께 백산이 문을 뚫고 그대로 날아갔다.
"아이고, 세상 사람들아 여기 좀 보소! 저기 나이는 백오십이나 처먹고 죽
지도 못한 노망난 늙은이가 젊은 사람을 잡네. 아이고! 아이고!"
밖으로 튕겨나간 백산의 입에서 중년 늙은이를 욕하는 곡소리가 귀혼곡에
메아리쳐 울렸다.
천장지옥마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공
경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 정신을 차린 놈답게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
도 된다. 그런데 노망난 늙은이라니….
"이런 육시랄 놈!"
"어르신 제발 참으십시오. 저를 봐서라도 제발…자네들 뭐하나 빨리 저 친
구 좀 말리지 않고!"
철목승이 노인네를 결사적으로 붙잡으며 광견조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석숭과 나머지 일행이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와서
백산을 향해 다가왔다.
백산의 이죽거림으로 천장지옥마라는 늙은이도 화가 났지만 백산 또한 이
늙은이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노인의 무공은 자신이 보기에도 거의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늙어
가던 얼굴이 다시 젊어질 정도이면 가히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그런 자가 밖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던 자신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구해주는 것은커녕 경고 한번 해주지 않았던 행사가 괘씸했다.
"백 소협, 자네 왜 그러나? 저분의 연세를 알고서도 그렇게 하는 건가?"
광견조와 같이 나온 석숭이 쓰러져 있는 백산을 향해 도대체 노인네의 성
질을 돋우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장지옥마는 생명의
은인이질 않는가.
"저분이 자네나 여기 이 친구들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는지
아는가? 마치 친 혈육처럼 돌봐주셨네. 그런 분에게 감사의 말씀은 못 드릴
망정 도발하는 언행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백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산이 정신을 잃고 난 후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막 동굴에서 나오던 천장
지옥마를 만났다.
불영전륜쇄옥진을 뚫고 온 자신들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인사니
뭐니 하는 것도 없이 광견조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기에 당한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실혼인(失
魂人)이 아니면 백치가 된다고 했다.
주변에서 키우던 약초를 가져와서 광견조 전원에게 먹이고, 부러진 팔다리
를 치료하는 의술은 놀라웠다.
마치 수십 년간을 의생으로 살았던 사람처럼 정확하게 광견조원들을 치료
한 것이다.
그리고 철목승과 석숭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 갈태독(葛太獨).
그 노인의 이름이었다. 천장지옥마라는 말에 깜짝 놀란 사람은 강호무림에
대해서 누구보다 박식하던 석숭이 아니라 철목승이었다.
마도의 인물답게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년 전의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인물, 또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천고의 의술로 생사지옥마(生死地獄魔)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이 그였다.
그가 익힌 천장지옥마공은 마공 서열 이위의 무공으로 철목승의 천마심공
다음으로 강한 무공이다.
그것도 천마심공처럼 정공의 장점을 취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순수한 마
공, 즉 정통마공인 것이다.
따라서 강호를 횡보(橫步)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 유형마지는 그에게 있
어서 최고의 연공장소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천장지옥마공을 연성하기도 전에 쌍천불인 마료신승과 마불신승이 이곳에
들른 것이다. 갈태독과 마불신승은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삼 일간
을 싸웠다.
역시 소림이었다. 마공 서열 이위의 무공을 익힌 갈태독이 마불신승에게
지고 말았다.
조건이란 단순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유형마지를 없앨 테니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마료신승이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무공을 전혀 모르던 마료신승이 평생을 연구했다는 불영전륜쇄옥진의 설치
는 귀혼곡 내부에 만 개의 불상을 만들어 세우는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만
개의 불상이 진의 모태였던 것이다.
그 불상들이 마기를 흡수하여 전륜나한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백산 일행을 그렇게 고생시켰던 전륜나한이 유형마지의 마기 덩어리였고,
그 마기가 부활의 비밀이었다.
거의 오 년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평생을 연구한 마료신승조차도 해진이 불가능한 '불영전륜쇄옥진'이 귀혼
곡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진의 설치를 끝낸 세 사람은 이 귀혼곡을 유형마지로 만들어버린 마의 근
원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찾아낸 곳이 지금 이 초막이 지어진 곳의 앞에 있는 거대한 동혈.
십여 일 동안 무엇인가를 상의하던 두 사람은 급기야 마불신승이 그 동혈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기는 현저하게 약해졌으나 한번 들어간 마불신승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몇 년 후 마료신승은 자신을 화장해서 그 뼈와 재를 섞어 이곳에 고루 뿌
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열반에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이곳을 떠나려 했던 갈태독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생겼
으니, 바로 마료신승의 육체를 태워, 재와 뼈를 뿌려준 곳에서 조그마한 풀
들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기에 의해서 완전히 황폐해진 이곳에서 생명의 창조를 목격하고 말았다.
마기를 흡수하기 위해서 한달 여 동안을 지체했던 것이 백 년으로 변해버
린 순간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야기해주마! 백산이라고 했더냐?"
언제 나왔는지 천장지옥마 갈태독이 철목승과 같이 나와서 두 사람의 옆으
로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가문의 원수를 찾아 평생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았던 나는 불심이 뭔지 모
른다. 그러나 마료성승과 마불성승의 위대함은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어
느 누가 이런 곳에서 자신들을 희생하여 악을 제거하려 하겠느냐? 누가 알
아준다고…."
갈태독이 얼굴을 들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
이 일생을 통해 유일하게 존경했던 두 인물을 회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료신승의 유해를 뿌린 이곳에서 마불신승을 기다리며 무공을 완성하기로
했다. 천장지옥마공을 대성하는 데 십 년이 걸렸다. 저 동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마기를 가지고 무공을 대성한 것이다.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그는 동굴 속을 들어가 보기로 했다
. 그러나 절반도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쪽에서 흘러
나오는 마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마료신승이 남기고 간 심득과 자신의 천장지옥마공, 그 두 가지
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
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가 다시금 마혈 속으로
들어간 것은 백산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여 전륜나한과 한창 싸움을 하고 있
을 때였다.
이번에는 그 끝을 보았다, 악마의 입처럼 거대한 공동(空洞)에서 흘러나오
고 있는 마기를. 그러나 마음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마기를 더 이상 버틸 수
가 없어서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기절한 백산과 광견조원들을 싣고
들어오는 철목승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백산이 보기에도 갈태독의 무공 경지는 가공했다. 천하제일인인 철목승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그가 감탄할 정도였다.
무공을 익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산은 강호 무림상의 최고 강자라
는 인물들을 대부분 접해 보았다.
자신의 사부와 남궁세우 그리고 철목승, 풍신개, 조천영까지, 모두 강호상
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막강한 고수들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노인네에 근접한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백오십이라는데 이미 반로환동(返老還童)을 겪었는지 오십 대 정도
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백산이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 같은 고수를 만난 것이
다. 지금껏 백산을 기분 나쁘게 했던 원인이었다.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아
서 심통을 부렸다고 했던 것은 핑계일 뿐이고 자꾸만 위축되는 자신에게 화
가 난 것이었다.
백산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투기였다. 자신도
모르게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절로 투기가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있던 철목승이 흠칫 놀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도 백산의 몸에서 발산
되는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놀랍군! 나조차도 아무런 느낌 없이 대하던 친구가 어르신을 보고 투기를
내뿜는다? 그럼 이 친구의 능력이 저 분과 대등하단 말인가….'
자신의 능력으로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갈태독에게 경쟁자로서 투
기를 느끼고 있는 백산에 대해 철목승이 놀라고 있었다.
이제서야 백산의 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감! 나하고 한판 합시다!"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있던 백산이 느닷없이 갈태독을 향해서 하
는 말이었다.
그의 눈은 어떤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상대를 만났다는 즐거움이 넘
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기 전 뇌룡현에서 장한수와 싸울 때의 바로 그 표
정이었다.
백산의 상태를 인지한 갈태독의 얼굴이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놈이 벌써 고독을 느끼는 것인가? 나이 서른도 채 안 되는 녀석이 벌써
절대자의 고독을….'
갈태독의 느낌은 정확했다. 백산이야 워낙 무신경한 탓에 설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갈태독의 강함
을 보고 싸우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갈태독이 백산의 열망에 불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
다보았다.
"좋다! 그럼 너도 나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줄 수 있겠느냐?"
"마혈(魔穴) 말입니까?"
갈태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백산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 석숭과 석두 그리고
광견조원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백산이 어떤 인간이었던가! 하늘이 무너져도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는 사
람이 바로 백산 아니던가. 그런 그가 비무 신청을 하는가 하면 저 노인네의
부탁을 들어준단다.
그것도 공짜로.
그러나 단 한 사람 철목승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있
던 그만이 백산의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또다시 목표가 생겼군….'
철목승이 두 사람의 절대자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자신의 무공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냉추렴이 졸라서 마지못해 나온 외유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무는 몸을 좀 회복한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 너나 나나 몸 상태가 최
상이 아닌 것 같으니…그리고 네놈 몸속을 한번 살펴볼 수 있겠느냐?"
"무슨 소리요, 몸속을 살펴보다니?"
"네 녀석의 몸은 말이다,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느 무엇도 침투가 불가
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보쇼.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백산이 순순히 오른팔을 내밀었다. 기절해 있을 때 실컷 만져놓고 뭘 또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이놈아, 내 진기를 받아들여야지?"
진기를 밀어 넣으려던 갈태독이 백산을 향해서 소리를 팩 질렀다.
또다시 단 한 치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튕긴 것이다.
"어떻게 하는 건데?"
"뭐라고? 네놈이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다.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
오면 몸속으로 유도하면 될 것 아냐?"
"진작 이야기할 것이지 큰소리는…."
* * *
"똑바로 안 박아? 야 모사, 너 이 자식, 제대로 안 해?"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 열두 명 전부가 땅에 머리를 박고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그러고도 너희들이 형제야? 어떻게 형님과 형수를 공격할 수
가 있는 거지? 소살우,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봐. 새끼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정파인들에게 당해서 의식을 잃고 있던 소
살우와 모사 그리고 마차 길을 만들기 위해서 과도하게 힘을 쓴 나머지 기
절했던 광견조.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사건을 듣기는 했지만 그때의 기억이 없는 고로 전혀 현실감도 느
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빌미로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가 다된 지금까지 이렇
게 기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머릿속에 우리를 형제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만 있었어
도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부모가 정신을 잃었다고 자식을 죽이는 것 보았어
? 혈육을 보게 되면 잃었던 정신도 돌아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새끼들
아! 자, 복창한다. 광풍 제 일계!"
"광풍대원은 한 형제다!"
"소리가 그것밖에 안 돼? 더 크게!"
벌써 수천 번도 더 외친 것 같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광풍 제 일계의 복창
은 종일토록 계속되었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광견조원들 전부가 목이
쉬어서 목소리조차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그깟 정파 놈들에게 얻어터지고 도망을 쳐, 일어섯!"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기합을 받은 광견조원들인데도 마치 강
시의 움직임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퍽! 퍽! 퍼퍽! 퍽!
백산의 몸이 비호처럼 날아다니며 광견조원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으나
누구 하나 쓰러지는 이도 신음을 지르는 이도 없었다.
묵묵히 침묵으로 백산의 손과 발길질을 받아내고 있었다.
광견조원들에게 내리는 구타도 기합과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석숭이 와서 말리고 소운이 와서 백산을 말리려 했지만 백산의 눈빛 한번에
아무 소리 못하고 초막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잘 들어라! 이 세상 그 누구도 너희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강호 무림인
뿐만 아니라 그놈이 설사 이 나라의 황제라 할지라도 절대 안 된다. 알겠나
!"
"옛-!"
광견조원들의 쉰 대답소리가 절벽을 타고 울렸다.
"너희들과 나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 있는 자는 우리 자신들밖에 없어야
한다. 저번처럼 너희들이 미친다거나 또 패악무도한 인간이 되었을 경우
그 단죄는 우리가 한다. 내가 죽여준다는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가 미쳐서 인간이 되지 못할 때 나를 죽여줄 수 있는 자는 너희들이어야 한
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네놈들의 실력으로는 나의 털끝 하
나 건들지 못한다 말이다. 그런 너희들에게 어떻게 내 목숨을 맡길 수 있겠
나? 실력을 쌓아라! 실력을…거대한 힘 앞에서 진식(陣式)이 다 무슨 필요
가 있느냐, 태풍 앞에 놓여진 가랑잎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느냐. 이겨라!
자신을 이겨라!"
광풍대원들의 죽음은 광풍대만이 내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세상 그 누구
도 광풍대원을 단죄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자신도 잘못될 경우에는 형제들에 의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그들이 보이는 곳 초지 끝자락에서 철목승과 갈태독이 그들을 응시하
고 있었다.
"저 녀석도 알고 있는가! 자신의 운명을."
"아닙니다.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두 사람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고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의원다운 말이다. 보통 시한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대할 때 두 가지 방
법을 쓴다. 환자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인생을 정리하게 한다거나, 아니
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
록 배려해 주는 것. 매일매일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어느 것이 낫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장단점
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의원으로서의 갈태독은 전자를 더 선호하는 것 같았
다.
"아닙니다! 저 친구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떠나버릴 인물입니다.
행동은 저래도 정이 무척 많은 친구니까요…."
백산을 바라보는 철목승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더 이상 불행해
질 것도 없는 가장 바닥에 있던 저들이 간신히 잡은 행복인데 그것이 사상
누각(沙上樓閣)처럼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네, 자네가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운명
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지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 말이네….'
철목승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어둠을 타고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부 해산!"
백산의 외침소리와 함께 광견조 열두 명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기는 했지만 백산의 기합은 너무나 지독했다. 차가운 겨
울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도 광견조의 온몸이 땀에 절어있는 모양새가 그들
의 고단한 하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백산의 마음을 알기에 고강한 무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기본 체력으로 하루 동안의 기합을 견디
어냈던 것이다.
거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광견조를 향해서 초막 안으로부터 조
천영과 소운이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광견조원들에 대한 백산의 기합이 아무래도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설봉산 입구의 객잔까지 가서 준비해온 술과 음식이었다.
"너무 언짢게들 생각하지 말아요! 동생들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
백산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 싶었는지 조천영이 대원들을 향해서 미안한 표
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형수님! 저희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껏 커
오면서 누가 야단친 적도 때려준 적도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매 맞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그렇게
해주신 겁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하는 소살우나 듣고 있는 광견조 일행에게서 따스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야단을 맞지 않고 매를 맞지 않고 컸겠는가. 부모가 없
는 아이들이 당하는 그런 학대를 무수히 받고 자랐을 것이다. 진정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매를 들고 야단을 치는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가 줄 수도 스스로 가질 수도 없는 존재인 부모, 그런 부모의 정을 느껴
보지 못한 이들에게 따뜻함이 쌓여가고, 백산에게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얼
굴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 광견조원들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씩 밝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의 괄시(恝視)와 냉대에 대해 유일한 반항이었던 살기 띤 미소가 실제
의 훈훈함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미약했지만….
"왜? 그렇게 패고 나니 미안하냐? 혼자서 먹게."
초막으로 들어와서 남은 음식 중 이것저것을 집어먹고 있는 백산을 보며
갈태독이 비아냥거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 무렵까지 기합을 주고 패
고 했으니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계면쩍은 마음
을 감추기 위해서 어기적거리며 초막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미안하긴 뭐가? 난 또 나를 위해서 맛있는 것을 준비했나 싶어서 들어왔
더니 똑 같잖아!"
변명 같지 않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술을 한 아름 안고 밖으로 어기적어
기적 걸어나갔다.
딴에는 미안하기도 했다.
방심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 모자라서, 그것도 강호 구대문파라는 대 문파
의 검진에 갇혀서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너무 힘들게 했다는 생각도 들었
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형수님이 따로 준비한 것이 없었나 보죠?"
광견조 일행은 백산이 없어서 섭섭했는지 말투에는 반가움이 묻어나고 있
었다. 언제 기합을 받았냐는 듯 태연한 행동이었다.
"자, 한잔씩 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백산이 술병을 들어올렸다.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가족 같은 분위기, 가장 바라던 분위기이기도 했다.
밤새도록 이어질 것 같은 술자리가 파하고 광견조원들이 하나둘씩 그 자리
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어느새 들고 나왔는지 조천영이 이부자리를 가지고 와서는 일일이 광견조
원들에게 덮어주고 있었다.
"저들이 이제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광견조원들에게 이불을 덮어준 조천영이 백산 곁으로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 사람만 만나면 모두들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그렇고, 불행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작지만 자산들만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저들은 나보다 더 한이 많은 이들이야. 나야 복수할 대상이라도 있지만
저들은 그런 것도 없잖아요. 자신들을 버렸던 부모와 멸시했던 세상, 그것
이 바로 저들의 한(恨)이지. 그 한이 저들을 이만큼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또한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기도 하고요…."
한으로 쌓인 마음이 단기간에 그들을 고수로 만들었으나 그 한들이 초극으
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되었던 북경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놈들을 일류무사 초입까지는 만
들어놓고 말겠어!"
순간 자는 줄 알았던 광견조원들의 몸이 여기저기서 움찔거렸다.
백산과 조천영이 호젓하게 있는 것을 본 광견조 일행들은 두 사람만의 은
밀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자는 척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던 무아의 경지에 드는 작업은 하지 않고 북경 가는 길이 힘
들어진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자려는 순간 드디어 그들의 귓가로 기다리던 소
리가 들려왔다.
저쪽으로 멀어지고 있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열두 명의 광견조원들이 자신들이 덮고 있던 이
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섯다! 시작할 것 같냐?"
그래도 그 방면에서 가장 선수인 섯다를 향해서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소살우가 물었다.
"잠깐만요. 형님이 보채기는 하는 것 같은데…조금만 더 기다려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귀를 세우고 있던 그들에게 허탈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비무(比武)하는 날이잖아요, 몸이나 제대로 추슬러요!"
조천영이 실망스런 말을 남기고 초막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쩝! 밖에서 하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을 것 같구먼! 너무 추우려나…."
"…?"
백산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웃음을 참던 광견조 일행이 일제히 자리에 누우
며 '야! 아무 일 없단다. 자자, 자!'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한편 초지 한쪽으로 나온 백산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운기(運氣)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
만큼 갈태독이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백산의 양팔과 발목에서 열두 개의 비도가 튀어나와 땅속 깊숙이 박혔다.
백산의 몸이 점점 삼매경(三昧境)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의 몸에서 새어나
온 혈광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혈광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더니 계란 모양의 형
태로 변함과 동시에 백산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각천비(脚天匕)와 수천비(手天匕)는 그대로 땅속 깊숙하게 박혀있는 상태
로 허공에 정지해있는 백산의 몸은 마치 붉은 우담화(優曇華)가 피어있는
것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오! 저것은 우담화(優曇華)의 경지?"
백산 혼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책을 하고 있던 갈태독과 철목승이
붉게 변한 백산의 모습을 발견하곤 갈태독이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造元),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극강한
경지를 넘어선 단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담화(優曇華)의 경지라 했다.
삼천 년 만에 단 한번 꽃을 피운다는 우담화, 여래나 전륜성왕이 재래할 때
피어난다는 우담화가 백산의 운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담화의 경지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림인이 대부분이니 그 경지의 극
고함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우담화의 경지라는 백산의 몸이 또다시 변화하고 있었다. 우담
화라고 불린 붉은색의 빛 덩어리가 마치 꽃잎이 만개(滿開)하는 것처럼 하
얀 속살을 드러내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유형도 무형도 아닌 하얗고 투명한 막 속에 눈을 반개한 백산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 만다라(曼陀羅)! 만다라여!"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만다라를 외치던 갈태독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새하얀 빛으로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만다라라고 불리는
흰색 투명한 빛 덩어리.
"저 전설의 경지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결국 만다라는 혼돈(混沌)
의 심연(深淵)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인가…."
약간은 떨리는 듯한 목소리와 감동에 젖은 표정의 갈태독이 고개를 끄덕이
며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철목승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갈태독을 쳐다보았
다. 그도 우담화의 경지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만다라의 경지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
백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경건해진 철목승이
갈태독을 향해서 나지막이 물었다.
"나도 마료성승께 들어서 알았네. 무공은 전혀 익히지 못했던 분이셨지만
무공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계셨던 분이셨지. 우담화의 경지를
넘어선 극선(極善), 극마(極魔), 극사(極邪)의 경지인 만다라의 경지가 있
다고…."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다라의 경지가 우
담화의 경지보다 높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경지가 있다는 것인지 또한
극선은 무엇이고 극마, 극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마료신승의 설명은 간단했다.
우담화의 경지는 그 사람이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에 상관없이 극에 이른
깨달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린 경지, 즉 천지합일의 경지를 넘어서면
나타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다라의 경지에 대해서는 그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경지가 존재하고 극선과 극마와 그리고 극사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경지이고 혼돈의 상태라 하였다.
또한 만다라의 경지는 혼돈의 심연 속에서만 완성되는 경지라고 했다.
"내가 저 녀석을 계속해서 진맥했던 것 기억나나?"
그랬었다.
사실 백산의 몸은 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내상을 입었다거나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모든 힘을 쏟아내고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즉 가만히 두
면 저절로 깨어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갈태독은 백산의 몸 상태를 본다며
계속해서 진맥을 하고 있었다. 백산의 몸 내부에서 일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원으로서 백산의 몸을 진맥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기운이 있기 마련이다. 뜨겁(火)다거
나, 냉(冷)하다거나, 순(順)하다거나 그런 기운들이 몸속에 존재하여 그 사
람의 성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의 몸속에서는 아무런 기
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니 모든 기운이 잠재되어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대한 혼돈의 덩어리였고
우주의 심연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기를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철목승의 경
우처럼 단 한 치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백산에게 부탁을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마료신승께서 말씀하신 혼돈의 심연이었어…."
자신이 새롭게 창안하고자 했던 무공, 지난 구십여 년 동안 거의 모든 시
간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던 상태를 백산의 몸속에서 찾았던 것이다.
절대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백산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금한 점이다. 도대체 백산이 무슨 무공을 익혔기
에 저 나이에 꿈에나 나올 법한 경지에 달해있단 말인가.
자신들도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있는 고수들이기에 잘 알고 있다. 지금 백
산이 보여주고 있는 저 경지는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기재라
해도 이룰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껏 철목승이 보아온 백산은 그리 뛰어난 기재는 절대 아니었다
. 단순히 남들보다 월등한 집착력을 가진 평범한 인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철목승과 갈태독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산의 얼굴에
남아있는 흉터였다.
백산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분명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해도 몇 번은
했을 것인데 흉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공 상식으로는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결국 환골탈태의 과정도 없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지 않는가
.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밖에 없다. 무공(武功), 백산이 익히고 있는 무공
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백산의 무공에 대해서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
에 있었다.
"그분의 말씀 중에 극선, 극마, 극사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네. 저 만다라
의 경지에 이른 자가 이 세 가지를 포함한 자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셋 중
에 아무 것으로나 화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백산의 운공은 끝이 났고 천천히 본래의 자리
로 하강하고 있었다.
땅속 깊숙이 박혀있던 천비들이 회수되어 발목과 손목으로 사라짐과 동시
에 백산이 눈을 번쩍 떴다.
"으아! 개운하다."
두 손을 번쩍 쳐들고 기지개를 펴며 양쪽 다리의 무릎 부분을 가볍게 주물
러댄다.
"이 친구야, 운기행공을 하고 났으면 몸 상태가 최적일 텐데 웬 기지개를
펴고 그러나?"
"어? 여기 있었소? 움직이지를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뼈마디가 욱신거려서
…."
백산이 무릎을 툭툭 치면서 철목승을 쳐다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
나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다.
올바른 신체에서 바른 정신이 나온다고 했던가.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
오자 갈태독을 대하는 데도 그리 위축되는 것 같지 않았다.
"너만 괜찮다면 우리의 비무를 지금 하는 것이 어떻겠냐?"
갈태독이 바로 비무를 제안해 왔다. 이번에는 그의 투기가 끓어오르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담화와 만다라의 현세가 갈태독의 무혼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조용할 때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죠."
광견조원들의 팔 다리를 부러뜨렸던 그 황량한 장소에 오 장 거리를 사이
에 둔 백산과 갈태독이 초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고 그들과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는 긴장된 표정의 철목승이 두 사람의 일거수일
투족을 관찰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그가 자신보다 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의 비
무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는지, 약간은 호기
심과 질시의 심정으로 비무를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다.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은 전부 일곱 초식이다. 처음 삼 초식은 천장지옥마
공(千丈地獄魔功)의 무공이고 후반부의 네 개 초식은 천장지옥마공과 마불
신승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을 참고해서 창안한 무공이다. 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론 너도 그렇겠지만 노인네라고 봐 줄 생각일랑 하지 마라.
"
갈태독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배어나왔다. 무려 백년 동안을 연구하고 노력
해서 이루어낸 무공이다.
중원무림에 이보다 더 강한 무공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원래 익히고 있었던 천장지옥마공은 최고의 강함을 추구하는 패도적
인 무공이다. 반면에 마불신승이 익히고 있던 무상대능력은 소림 무공 중에
서도 가장 부드러운 축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두 무공을 가지고 강(强)과 유(柔)를 모두 겸비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내
었고, 그곳에다 혼돈의 기운을 심으려 했었다.
"제가 봐주고 할 그럴 정신이라도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죠!"
수천비와 각천비를 가슴 앞쪽으로 세운 백산이 갈태독을 쳐다보며 하는 말
이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 기분이다. 과거 장한수와 싸웠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온몸을 잠
식해 들었다. 즐거움, 생사비무가 될지도 모르는데 주체할 수 없는 환희가
밀려왔다.
이런 것을 두고 무혼(武魂)이라 하는 것인가.
내공을 운기하고 있는지 주변의 대기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갈태독 주변의 공기들은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나가
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일초는 혈파(血波)라는 무공이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서 귀찮은 파리를 쫓듯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처럼
단순한 동작, 그러나 그 손동작에 의해 일어나는 위력은 간단치가 않았다.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파도가 넘실대듯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는 선명한 핏빛 강기들, 백산의 전방을 완전히 장악하며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날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붉은색의 파도를 본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일
장 가량을 떠오르며 손과 발이 눈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풍노산(狂風怒山)!"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사방으로 비산하던 비도들에 의해 쏟아져 나온
강기들이 마치 물감이 번지듯 좌우로 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갈태독이
만들어 놓은 강기와는 모양이 달랐다.
갈태독의 핏빛 강기가 밀려오는 파도라면 백산이 만들어 놓은 붉은 강기는
거대한 벽이었다. 풍뢰곡(風雷谷)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새긴다며 절벽에다
대고 시전했던 광풍노산, 절벽의 사방 이십여 장을 평평하게 깎아 버렸던
그의 무공이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철목승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두 강기의 나아가
는 속도는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 강기가 파도처럼 나아가는 것과 이십 장 크기의 붉은 벽이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은 가히 공포와 전율이었다.
그러나 두 강기의 내부에 담고 있는 거력(巨力)과는 달리 혈파(血波)와 혈
벽(血壁)의 부딪침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부딪쳐간 두 강기는 새파란 뇌전(雷電)을 양 옆으로
쏟아내며 두 사람의 중앙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픽' 소리와 함께 마지막 생명을 다한 촛불이 스러지는 것처럼
소멸되어 갔다.
"제 이초, 멸파(滅波)!"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이다. 갈태독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
오고 그의 양손으로부터 적청색에 가까운 강기가 번쩍거리는 뇌전을 동반한
채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적청색의 강기는 열십자를 만들며 혈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백
산을 향해서 거세게 밀려가고, 백산에게 가까워질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있
었다. 그러나 백산의 키만큼 작아진 열십자의 강기에 내포된 힘은 일초인
혈파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근처에 오기도 전에 백산의 의복이 갈가리
찢겨져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이 손을 가슴으로 모으며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했다. 강기를 깨트
리기 위해서는 약점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완벽한 강기의 막처럼
보이는 열십자의 중심에서 미세한 공간이 감지되었다.
'한 몸체처럼 보이는 저 강기의 약점은 바로 중심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열십자의 중심을 향해서 몸을 날림과 동시에 두 손
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붉은 혈광을 머금고 있던 수천비 여섯 개가 십자형
강기의 중심으로 박혀들었고 곧이어 양손을 옆으로 활짝 펼쳤다.
크크킁!
강기와 비도가 부딪치는 미약한 소음이 울리며 열십자로 형성되어 있던 강
기가 찢어져 흩어졌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역도에 의해서 백산과 갈태독
이 견디질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뒤쪽으로 물러나던 백산이 무릎도 굽히지 않은 채 그대로 갈태독을 향해서
나아가며 자신의 열두 개의 비도를 휘둘렀다.
"혈극참(血極慘)!"
초극 고수인 갈태독에게 사용한 백산의 선공(先攻)은 한천팽무도법의 일초
인 혈극참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광견조가 시전한 일초와 근본부터가 달랐다.
백산이 가지고 있던 열두 개의 비도 전부에서 펼쳐지는 혈극참, 두 사람의
주변이 완전한 혈광으로 휩싸여 버렸다.
광견조가 시전한 혈극참이 단순한 도강이었다면 백산의 열두 개의 비도가
만들어낸 혈극참은 각각 천비들의 기운이 별도로 담겨있는 그야말로 하늘의
위력이었다.
갈태독이 혼돈의 심연이라 했던 것들, 백산의 몸속에 있는 수(水), 화(火)
,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기운을 포함하여 생(生), 사(死), 독(毒),
풍(風) 등 천지간의 모든 기운이 혈극참이라는 무공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
흠칫 놀라던 갈태독이 이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백산이 시전하는 무공이 단순한 도강인지 알았다가 열두 개의 같은
초식 속에 담겨있는 기운들을 읽어낸 것이다.
"대단하구먼, 대단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다. 비록 비무라고는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
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인데도 기분은 잔뜩 고조되
어 있었다.
자신 정도의 고수는 강호에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상대가 존재하고 있었고
,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비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더할 나
위 없는 흥분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리라.
"지옥파(地獄波)!"
흥분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갈태독의 외침소리가 조금 커진 듯했다.
그의 몸에서 흑색의 운무덩어리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며 거대한 마신상을
형성하였다.
지옥마신의 현신(現身)이었다. 이마에 있는 거대한 뿔과 혈광이 번뜩이는
붉은 눈, 거의 전륜마신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인 검은색의 마신이 사 장(四
丈)이나 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팔을 휘두르며 백산의 혈극참(血極慘)을 막
아내고 있었다.
픽! 픽! 픽픽픽!
하늘의 힘 두 개가 부딪쳤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소리였다. 그러나
두 기운의 충돌여파는 멀리서 관전하고 있던 철목승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
이고 있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엄청난 기운을….
철목승이 있는 곳까지 급격하게 밀려오던 충격파가 갑자기 벽에라도 막힌
듯 그 자리에서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철목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공간 이십 장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어놓고 두 무
공의 충격파가 이십 장 이상 벗어나는 것을 서로가 막고 있었던 것이다.
철목승의 손바닥에서 물기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도 싸우고
싶었다.
두 사람이 비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몇 번이고 뛰어나가
같이 어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과연 저런 것들을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
각마저 들었다.
싸우고 싶다는 열망과 질 수도 있다는 굴욕감,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
면서 철목승을 땀에 젖게 하고 있었다.
철목승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고 있던 그 순간, 비무자 두 사람은 자신들
의 앞에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똑같이 다섯 발자국이었다.
"평범한 도강이 자네 손에서 나오니 천무(天武)로 바뀌는구먼!"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갈태독의 어투가 반 경어로 변했다. 운공을
하는 것을 보고 이미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무를 해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천장지옥마공이었네. 이제부터는 내가 창안한 무공일세. 아직
이름은 못 지었고 초식 명칭만 있다네."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었
다. 마도 서열 이위의 무공과 소림최고의 무공 중의 하나라는 무상대능력의
요체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무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무상천혈파(無上天血波)!"
갈태독의 입에서 낮지만 단호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백산의
면전으로 다가와 조금 전 혈파와 같은 형태의 백색 강기를 쏟아내었다.
"크윽!"
온몸에 강기가 적중된 백산의 몸이 허공을 날아서 십여 장 뒤쪽으로 거칠
게 떨어졌다.
백산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이 당했다는 것보다 갈태독의 움직
임을 놓쳤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눈을 빤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갈태독을 놓치고 거
의 무방비 상태로 일장을 허용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장님도 아니고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니….
무공을 익힌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한 것이다.
'다쇠불알! 정신을 차려라 분명 무엇인가 있다. 아무 것도 없이 공간을 가
르며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공간을 가른다…?'
공간을 가른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공간을 무시할 수 있는가. 물론 축지법이라
는 도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이야기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질 않던가.
그런데 그 전설 같은 축지법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무중이 아니던가. 상대가 축지법을 쓰던 도술을 쓰던 막
아내야 한다. 백산이 표정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좋다, 빠르기라면 나도 자신 있다고….'
"무상지멸파(無上地滅波)!"
갈태독의 무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산의 몸이 뒤쪽으로 십여 장을 그대
로 밀려났다. 일단은 무언(武諺)을 가지고 갈태독의 공격에 대항하려 해본
것이다.
"커억!"
가슴에 전해지는 통렬한 고통, 열십자의 붉은색의 강기가 백산의 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목까지 넘어온 피를 억지로 삼켜 버렸다. 역시 편법은 통하
지 않았다. 결국 음파가 전달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리보다 더 빨리 움직이
는 무공이 있다니.
백산이 최고의 보법이라 했던 혈우신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대의 기척을 감지해야 빈 공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곳으로 몸을 움직이
게 되는데 도대체 갈태독의 몸은 감지가 되지 않고 있었다.
"무상신법이라 부른다. 내가 있는 주위로 삼십 장의 공간은 나의 것이다.
즉 나의 지배하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이 있는 주변 삼십 장 내에서는 지금과 같은 가공할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빠르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했던 백산의
움직임으로도 손도 써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이것이 소림의 무공인가!'
하늘의 높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금오천무라는 무공도 보았으나 이 정
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갈태독의 모습을 철목승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커지며 방금 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도 분명히 목격했다. 갈태독의 몸이 자신의 눈으로도 쫓지 못할 정도로
움직였음을.
보았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빠른 몸놀림, 도저히 말로는 표
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저 무상신법이란 것이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의 진실한
모습인가? 불영전륜쇄옥진이 백팔나한진의 모체였던 것처럼? 그런 것인가
…?'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철목승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부동신법이란 무공과 비슷하지만 그 위
력으로 볼 때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백산, 이제는 어쩔 거냐? 상대는 의식이 없는 전륜나한도 아니고 너와 비
슷한 경지의 초극 고수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
철목승이 깊어진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불영전륜쇄옥진이 아무리 극
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축하고 있는 매개체는 의식이 없는 존재였다. 즉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란 소리다. 그
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신만큼 강한 사람이 엄청난 신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갈태독이 펼치고 있는 무상신법, 그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
라 공간을 좁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빠르다는 소리다.
손오공이 아무리 근두운을 타고 날고 또 날아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듯
이 완전하게 장악된 저곳에서의 움직임이란 것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할 뿐
이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일단 공기의 흐름을 느낀 후에 쾌의 묘리를 적
용하는 방법밖에.'
백산이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하여 갈태독이 만들어두었다는 주변 삼십
장을 완전하게 통제한 후에 용미폭포에서 깨달았던 쾌의 원리를 적용하려
하고 있었다.
백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눈으로 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백산은 두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십여 장 떨
어진 곳에서 갈태독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다!'
자신의 전방에 있는 공기가 일직선으로 갈라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맨 처음 대기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백산의 몸이 뒤쪽으로 밀
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수천비를 발출했다.
"무상무극파(無上無極波)! 헉!"
외침과 동시에 백산의 앞으로 다가간 갈태독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그대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무상무극파를 시전하려는 찰나에 자신의 왼쪽 가슴에 섬뜩한 살기가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백산의 비도 세 개가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번에는 갈태독이 놀라고 말았다.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빠른 무
상신법을 피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 순간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단 이 초만에 무상신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갈태독뿐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철목승의 입에서도
놀람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면 갈태독이 한 수 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백산은
그것을 피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감이 공간을 장악했다면 나는 공간을 파악할 수 있죠."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는지 백산의 말투에 한층 여유가 묻어 나오
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무인으로서의 궁금증이다. 무상신법을 익히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 세상에
이것을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록
깨트리지는 못했지만 무상신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을 찾은 놈
이 나타난 것이다.
"영감이 만든 공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으면 되는 거죠. 대기의 흐름
말입니다."
백산의 말에 갈태독과 철목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흐르는
공기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상신법이 너무 빨라서 공간을 장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의 시작점을 파악하고 공격해 들어오는 위치를 잡을 수만 있다면 막
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공간 속에 자신의 감각을 어떻게 퍼뜨려 놓을 것인가.
그것 또한 백산의 능력이었기에 무상신법만큼 가공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초식밖에 없는 것 같구나. 이 무공은 내 나름대로 혼돈이란
것을 구성해본 것으로 미완의 무공이다."
더 이상은 공격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리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공격하고 백산은 피하고 이런 대치가 계속될
터인데 시간만 보내는 그런 짓은 할 필요가 없음이다.
마지막 초식을 준비하고 있는 갈태독의 몸에서 붉고 검은 운무가 뭉클뭉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붉은색도 검은색도 아닌 상태로
변하면서 서로 엉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것이 혼돈…."
철목승이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그랬다. 갈태독은 나름대로 마료신승이 이야기했던 혼돈의 심연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이다. 혼돈의 상태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은 한 것은
의원으로서의 경력이었다. 의원이란 무엇이던가, 환자의 몸속에 흐르는 기(
氣)의 상태로 치료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여타 일반인들보다 천
지간의 기운을 감지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이다. 몸속에 흐르는 모든
기운을 유형화시킨다는 것은 지루할 정도로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
업이었지만 결국에는 해내고 말았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경지여서 제대로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산의
몸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갈태독이 만들어놓은 공간을 바라본 백산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그 운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약간은 부족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거의 모든 기운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 같은 엄청난 거력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공을 해야 한다. 먼저 공격을 하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몸을 회전시키면서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백산의 몸에서 바람이 불어 나오
고 있었다.
점점 거세지는 광풍(狂風)이 주위의 대기를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빠른 회전력을 이용하여 갈태독이 만들어 놓은 검은색 혼돈의 공
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허공으로 빨아올리고 있었다.
백산의 손과 발에서 천비들이 일제히 튀어나오며 혈광을 쏟아내기 시작했
다.
백산의 행동에 다급함을 느낀 갈태독이 자신의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우렁
찬 고함을 내질렀다.
"전륜지옥대능력(轉輪地獄大能力)--!"
"광풍… 캬악!"
잊어버렸다. 철목승의 마지막 무공을 보고 작명했던 무공의 이름을 순간적
으로 잊어먹고 대신한 무언(武諺)이 캬악이다. 그러나 외침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귀혼곡을 뒤흔드는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각천비와 수천비를
편 상태로 이미 회전을 하고 있었다.
과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쏟아낸 파천의 힘이 서로 부딪치며 강력한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한 인형이 회오리 밖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
졌다.
갈태독이었다. 금강불괴지신을 가진 그가 도상을 입었는지 몸의 이곳저곳
에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진 것이다.
"으웩!"
백산도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말 엄청나군!'
갈태독의 마지막 전륜지옥대능력(轉輪地獄大能力)을 두고 한 말이다.
'선공을 했으니 망정이지 이곳에 뼈를 묻을 뻔했네!'
무언(武諺)은 늦게 나왔지만 각천비와 수천비가 튀어나온 순간 백산은 이
미 그의 무공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서 선공을 취하고 얻은 결과가 양패구상이었다. 피를 토해내서
인지는 아니면 싸우고 싶었던 갈증이 해소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속이 후련한
느낌이었다.
"가가!"
"백 공자!"
"형님!"
두 사람의 마지막 외침에 잠에서 깨어난 일행이 초막으로부터 뛰어나오면
서 쓰러진 두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허허! 아직도 혼돈이란 놈은 미약한가!"
허탈한 웃음이었다. 백년의 세월 동안 창안한 무공이었다. 무공의 끝을 보
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완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더 보완할 것이 남아있었군.'
백산과 비무에서 깨달은 것이다.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비무였다. 백산은 백산 나름대로 쾌라는 것에
대해서 더욱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갈태독의 입장에서는 역시 세상은 넓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