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84)

제2장 귀혼곡(歸魂谷)

 "이 자식들은 왜 아직 오지 않는 거야? 정오(正午)가 훨씬 지났는데."

 귀혼곡(歸魂谷).

 설봉산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접근이 거부되는 곳, 살아있는 인간이 들어가

면 혼만 돌아갈 수 있다하여 귀혼곡이라 불린다 한다.

 왠지 모를 음산함이 계곡 전체를 감싸고 삭막한 바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오고 있었다.

 그 귀혼곡이 바라보이는 계곡의 초입에 백산 일행이 모여서 사냥 나간 광

견조(狂犬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냐?"

 다른 일에 있어서는 만사태평인 백산이었지만 유독 친인들의 일에 대해서

는 안절부절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지금도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아래쪽을 흘끔거리며 애꿎은 나

무 밑동만 발로 차고 있었다.

 "열두 명이나 되고, 더군다나 고수들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그래요, 백랑. 강호상에서 그들 열둘을 어찌해볼 수 있는 인물은 별로 없

어요."

 철목승과 조천영이 백산을 안심시키고는 있으나 그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

지였다.

 벌써 몇 번씩이나 사냥을 나간 광견조였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늦게 오거

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

구나 천선비도로 인하여 이곳 설봉산에도 많은 무인들이 들어와 있기에 마

음이 놓이질 않았다.

 "저…."

 "쉬! 조용히."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조천영을 제지한 백산이 갑자기 탐색하듯 눈을

 감고 자신의 감각을 개방했다. 그의 귓가에 어지럽게 뛰어오는 발자국 소

리가 잡혔다.

 "온다!"

 그러나 백산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오긴 오는데 누구에게 쫓기는 것 같아."

 다급해진 표정이었다. 광견조원들이 전부 열두 명인데 그의 귀에 잡히는

발자국은 여덟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넷은 다쳐서 일행이 업고 있다는 뜻이다. 광견조원의 성정으로 볼 때

 누가 죽었다해서 황야에 버려두고 오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의 시야 끝에 몇 명의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산의 생각대로 이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자들은 사냥

나간 광견조였고, 그들의 뒤를 오십여 명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무림인들이 쫓고 있었다.

 쫓기는 광견조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더욱 확실하게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명의 조원들을 등에 업고 섯다의 지휘하에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땀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얼굴과 여기저기 찢겨진 옷은 그들이 겪었던 고초

를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웃는 듯한 그들의 표정과 깊숙이 침

잠된 눈동자는 마음속 깊이 원한을 숨기고자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파 놈들! 오늘은 그냥 간다. 특히 무당, 화산, 아미라고 했나 두고 보

자. 비록 엿 같은 인생이지만 은혜와 원수는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안다. 어

디 두고 보자, 정말 두고 보자.'

 섯다가 연신 이를 갈아대며 내달리고 있었다.

 도망을 치는 와중에 처음 만났던 자들과는 다른 인물들이 기습을 해왔다.

상대에 대한 확인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암습을 해왔던 것이다. 실전경

험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조장과 모사의 상태만 괜

찮았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모두 없애버렸을 것이다.

 "개자식들…개자식들…."

 "석두! 마차 안에 가면 검은 상자가 있어. 그 안에 있는 것 다섯 개만 꺼

내와!"

 광견조 일행을 쳐다보고 있던 백산이 석두를 향해 소리쳤다.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 쪽으로 다가간 석두가 검은 색 상

자의 뚜껑을 열어 젖히자, 그 안에는 백산이 만상투인루에서 비무할 때 사

용했던 철구와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런 것을 왜 솜으로 싸서왔지?'

 무심결에 철구를 집으려던 석두가 온몸을 경직시키며 그것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헉!"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한 석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단순한 철구를 솜으로 싸서 가져올 리가 없질 않는가.

 그리고 벽력탄을 살 때 상인이 비밀스럽게 이야기해주었던 사실 하나.

 "광-광천뢰(光天雷)? 형님! 기어코 이것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까?"

 처음 벽력탄을 보여주었을 때의 백산의 표정, 그때 만상투인루를 무너뜨리

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어디서 샀느냐고만 묻지 않았던가.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버렸고, 목소리마저 떨려나왔다.

 석두가 놀란 것은 광천뢰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다.

 화력면에서 벽력탄보다 다섯 배 이상이나 강하고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터져버린다는 광천뢰를 두 상자씩이나 싣고 관도며 산길이며 할 것 없이 덜

컹거리는 마차를 끌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가 없

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터졌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해! 다섯 알만 가져오라니까!"

 멍하니 있는 석두를 향해서 백산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알았습니다, 형님!"

 석두는 아주 조심스럽게 광천뢰 다섯 개를 꺼낸 다음 행여나 충격을 줄세

라 발 앞 축만을 이용하여 살금살금 백산을 향해서 걸어갔다.

 "빨리 줘, 새끼야! 이것 좀 가져오는데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백산이 석두의 손에 있는 광천뢰를 빼앗듯이 채가며 주절거렸다.

 그리고는 광천뢰를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자신들에게 뛰어오는 광견조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나가서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산은 움직이지도 않고, 석두나

 나머지 일행에게도 도와주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목승이 나서려 하는 것을 말리고 있었다.

 '너희들끼리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서로 의지하며 죽음을 같이하는 형

제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믿지 못해도, 설사 나조차 믿지 못

해도 너희들끼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백산이 나서지 않는 이유였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같이 겪게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신뢰가 쌓이게 된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인 그들

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나가는 방법은 동료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믿고 의

지하는 것뿐이다.

 "헉!"

 "헛!"

 백산과 같이 있던 석숭과 철목승 그리고 냉추렴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들도 백산이 가지고 있는 것이 광천뢰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자네? 자네가 지금 공기놀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석숭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백산을 향해서 물었다.

 "아, 이거요? 흠! 그놈들이 뭐라고 하더라? 광 어쩌고 하던데…."

 "광천뢰(光天雷)!"

 "아, 맞다! 광천뢰라고 했소. 저번에 석두가 사왔다고 했던 그 벽력탄인가

 하는 것보다 다섯 배 정도 강하다고 했던가?"

 사실 백산이 알고 있던 것은 화약이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석두가 준비해

온 벽력탄은 감동 그 자체였다.

 도화선도 필요 없고, 충격만 주면 폭발해버리고, 그 위력도 화약에 비해서

 몇 배나 되는 물건.

 미리 알았더라면 과거 마령호와 싸울 때 벽력탄을 쓸 것을 하면서 땅을 쳤

던 백산이었다.

 그래서 돈도 벌었겠다 그 벽력탄을 사기 위해 암시장을 찾았을 때 주인이

들고 나온 물건이 바로 이것이었다. 벽력탄보다 더 크고, 묘하게도 엄청난

살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철구. 그곳에 있던 마지막 폭약이라 하였다.

 벽력탄보다 다섯 배 이상 강하다는 상인의 말을 듣고 시험을 해보자고 했

다가 미친놈 소리만 듣고 쫓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광천뢰를 저기 오는 무림인들에게 시험해 보겠다고?"

 충격에 견디도록 솜을 이용해서 감싸놓았다고는 하나 그것을 무슨 물건 싣

는 것처럼 가져온 백산의 행동에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석숭이

 물었다.

 "이게 독이라도 돼? 왜들 그렇게 놀라고 난리야? 그 자식들이 날 속였는지

 안 속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이 기회에 시험을 해봐야지. 만약 가짜

면 다시 되돌아가서 다 죽었다 너희들…."

 광천뢰의 위험도, 무서움도 백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

다. 오로지 관심 있는 것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확인하는 것과 정말 다섯 배

의 위력이 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걸 다 던지면 저 광견조 뒤쪽으로 따라오는 무림인들은 전부 몰살을 당

할 걸세!"

 철목승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림인들을 쳐다보며 백산에게 말했다.

 그로서는 달갑지 않은 방법이었다. 자신이 나서면 그들을 돌려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백산이 한사코 그것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일이니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던지려는 거요, 다 없애버리려고."

 백산의 말투에 살기가 넘쳐 났다. 광견조, 비록 배우지 못하고 생긴 것들

은 험악해도 공연히 시비를 걸거나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행동을 할

이들이 절대로 아니다.

 가만히 있는 이들을 향해 저기 쫓아오는 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을 것이

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짐승을 몰듯 저렇게 사냥을 해

대고 있다.

 만일 광견조에게 힘이 없었다면 정파인을 희롱한 사악한 마두로 인식되어

어느 이름 모를 산골에서 시체로 썩어갈 것이고 광견조를 죽인 자들은 강호

 정의를 위해 힘을 쓴 인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백산이 알고 있는 세상이다.

 "백랑! 복수는 저들에게 하라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조천영도 백산이 하려는 행동을 만류하고 나섰다. 저기 오는 오십 명의 인

원을 다 죽이게 되면 바로 강호 공적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눈에도 화산파며 무당파의 인물이 보였고, 일단 저들과 은원 관계

를 맺게 되면 평생을 쫓기며 살아야 한다.

 무공이 강하니 죽을 일이야 없겠지만 백산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게 될 것이다. 결코 그녀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백산이 하려는 일이 많은 피를 보게 될 일이지만 그의 복수와 크게 상관이

 없는 자들까지 무조건 해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럴까? 하지만 그냥은 못 보내. 저기 쫓아오는 새끼들도 광견조만큼은

당해야 돼."

 조천영의 말이라면 거의 인정하는 백산이었지만 광견조를 부상 입힌 놈들

을 그냥 보내기는 싫었나 보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안 뛰어?"

 분노한 백산의 외침이 귀혼곡 전역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들고 있던 광천

뢰 중 세 개를 쫓고있는 무림인들을 향해서 냅다 던져버렸다.

 그때 광견조를 쫓고 있던 화산오검수와 무당오자는 자신들이 뒤쫓는 악적

들의 앞에 일단의 무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중이었

다.

 "무지진인, 저 앞에 있는 자들도 같은 일당일까요?"

 매화검 손무가 백산 일행을 쳐다보며 무지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들의 치욕을 감추기 위해서 설봉산에 와있던 정파 군웅들을 설득하여

이들을 쫓았고 두 놈에게 다시 부상을 입혔다.

 이제 저기 보이는 계곡으로 몰아붙여 아미삼노를 암습한 혐의로 처단하기

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잃었던 자존심과 명예도 아무런 흠집 없이 지켜질 것이고 자

신들은 악적을 처단한 정파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화산오검수란 이름 앞에 최고의 후기지수란 명칭이 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의 앞에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다.

 손무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자신들

에게로 날아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뜩한 느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면 나타나는

징후였다. 육감(六感), 무공이 고강해질수록 더욱더 강한 느낌으로 자신에

게 다가온다.

 매화검 손무가 달리던 신형을 멈추며 쫓아가고 있는 무림인들을 향해서 외

쳤다.

 "모두 피하시오, 화탄이요!"

 무슨 물건인지 확인함도 없이 화탄이라고 외쳤다. 일단 전진하는 무림인들

을 멈추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무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광견조를 쫓

아가던 오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며 어지러이 흩어졌

다.

 콰앙! 콰앙! 콰앙!

 귀혼곡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설봉산 전역을 뒤흔들었

다.

 손무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광천뢰였다.

 광천뢰 세 개가 떨어진 자리는 엄청난 재앙의 현장처럼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렸고, 주변의 나무와 바위들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정녕 엄청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방 삼십여 장을 가득 덮었던 먼지 구름이 걷히자 장내의 상황이 서서히

드러났다.

 "저것이 정녕 광천뢰였단 말인가?"

 넋을 잃은 표정의 손무가 아직도 검은 철구 하나를 공기놀이하듯 던지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무의 파편과 돌 조

각이 온몸 깊숙이 박혀있는데도 인식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변

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끌고 온 일행의 몰골은 처참했다

.

 이런 것을 두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고 하는가.

 꾸역꾸역 피를 토해내는 인물, 온몸에 주변 사물의 파편들이 박혀있는 인

물, 절반 이상의 무인들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던 앞쪽에서 터졌으니 망정이지 한 가운데라도 터졌으

면 그야말로 전원이 몰살을 당할 뻔했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 중에서 제대로 운신 가능한 자들은 이십 명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들마저도 폭발의 여력으로 인하여 내상을 입은 듯 하얗

게 탈색된 얼굴로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창백한 얼굴로 피를 흘리고 있는 무당오자를 쳐다보며 손무가 입을 열었다

. 이곳에 있는 일행 중 무공이 가장 강했지만 광견조원들과의 싸움으로 이

미 내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무량수불! 견딜 만합니다. 빨리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나머지 인물들의 부상 정도가 너무 심했기에 자신의 상태는 파악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손무의 시선이 가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공격한

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곳에는 조금 전 광천뢰를 던졌던 사람이 아직도 손에 검은 덩어리를 들

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들고 있는 두 개마저도 던져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량수불! 너무 급했어. 우리가 잘한 것이 뭐 있다고 저들을 공격했던고

….'

 성급했던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우선은 금정신니를 말리지 못했던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두 번째는 화산오검수와 자신의 사제들을 말리지 못했

던 것 또한 실수였다.

 가장 연장자인 자신이 침착했어야 했다.

 젊은이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자신이 그들과 동조하여 지금 이 지경에 이

르고 만 것이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못하고 얻어야 할 것은 손

에 잡히지를 않는구나!'

무지진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도 없는 자들에게 무당의 검진이 깨졌다는 것에 대한 치욕으로 자신도

 모르게 화산오검수와 사제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말았다.

 입으로야 무량수불을 읊조리고 태상노군(太上老君)을 찾았지만 실제행동은

 세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도인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호승지심을 버리

지 못했음이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목전의 일을 먼저 수습해야 한다. 부상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소속이 어디기에 대 문파에서도 구하기 힘든 광천뢰를 가지고 있

는가.'

 광천뢰나 벽력탄은 무림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황실에서 화약의 유통에 대해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림

이란 세계에서 암기류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무인답지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아무리 강력한 화탄이라 해도

일반고수 수준만 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백 년 전에 그런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세가가 나타났다.

벽력세가(霹靂世家), 화탄제조 기술로만 강호의 세력이 된 곳이었다.

 그 가문에서 만들어진 화탄 중에 가장 독보적인 두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벽력탄과 광천뢰가 그것이었다. 크기에 비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

기에 두 가지 화탄만으로 벽력세가는 강호의 거대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삼류 무공 수준밖에 익히지 못한 벽력세가 인물들에게 벽력탄이나

광천뢰는 분에 넘치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의 능력을 겁내던

강호인들의 공격을 받은 벽력세가는 멸문과 함께 무림에서 영원히 그 이름

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오백 년 전에 사라진 벽력세가만이 유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그 광천뢰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저런 것을 가지고 있을 만한 곳이라면 천마맹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일행 중 누군가의 말이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확인 작업에 불과할 뿐이었다

.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저 무리를 천마맹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

이다.

 또다시 백산의 행동을 천마맹이 뒤집어쓰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백산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고, 같은 일행인 철

목승조차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캬! 이것 정말 광천뢰라는 것이 맞구나! 그 자식들이 속이지 않았네?"

 광천뢰가 진짜였다는 것에 더하여 그 위력이 엄청난 것에 기분이 좋아진

백산은 광견조가 다쳤다는 것도 잠시 잊고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형님! 살우와 모사가 깨어나질 않습니다."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백산의 귀에 다급한 석두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뭐야?"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백산이 깜짝 놀라며 소살우와 모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부상을 당한 뒤 시간이 많이 경과되어서 내공만으로는 응급조치 이상은

힘들 것 같네. 우선 급한 불은 껐으니 서둘러 의원에 들러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으이."

 "저희들이 지나쳐온 곳은 전부 작은 마을뿐이라 이렇다할 의원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옆에 있던 조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이 설봉산을 넘게 되면 형산현에 도착하게 되네. 그곳으로 가면 큰 의원

이 있을 거야. 가장 빠른 길은 저기 보이는 계곡을 넘어 가로질러서 가는

것이네."

 상인답게 중원의 지리에 통달하고 있는 석숭이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

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고 다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객점 주인이 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던 귀혼곡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군."

 백산도 귀혼곡을 통과하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석두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들은 분명 마차를 끌고 가야한다. 백산 이놈이 마차를

 두고 갈 위인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길이 없는데 백산은 출발명령을 내

린 것이다.

 "형님! 저곳은 마차가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석두가 마차는 어떻게 할거냐는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백산

의 얼굴은 웃기는 소리 하지말라는 표정이었다.

 "뚫어!"

 일행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저 울창한 계곡에 마차 길을 내면서 가

지니, 그것도 의식을 잃은 환자를 데리고. 정신 상태를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무공을 왜 배웠어, 이럴 때 써야지. 사람 죽일 때만 쓰는 것이 무공이냐?

"

 한번 한다고 했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하고 마는 백산의 성격을 알기에

석두와 나머지 광견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야 할거다. 마차 안에는 아까 그 광천뢰라는 것이 아

흔 일곱 개나 있다, 석두야!"

 백산의 이 말에 석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

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폭발이 광천뢰 세 개가 만들어낸 작품이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광천뢰가 그것의 서른 배가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마차 안에 있는 것이 폭발이라도 하게되면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설

봉산 전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백산의 표정은 너무나 태연했다. 배짱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식

한 건지.

 하기야 옛말에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으니 배짱이라기보다는 무식

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거들겠네."

 "나도, 나도요!"

 아흔일곱 개란 백산의 말에 지금껏 남의 일인 양 가만히 있던 철목승, 석

숭 그리고 냉추렴이 자신들도 길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아니

다. 바로 목숨이다. 그 목숨이 걸린 일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입니다. 자 석두와 광견조, 너희들의 손에

살우와 모사의 목숨이 달려있다. 시작해라!"

 철목승과 석숭의 돕겠다는 말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리는 백산이었다. 조금

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일이기에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석두와 광견조원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선 무림인들과 싸울 땐 보지 못했던 투지가 넘쳐흘렀다.

 "형님 말 잘 들었지? 살우와 모사는 우리가 구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라!"

 "네, 형님!"

 먼저 마차 앞으로 나선 이들은 석두와 뱁새 그리고 섯다였다. 그들은 각자

의 도와 검을 뽑아들고, 마치 무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때 하는 것처럼

 검집과 도집을 마차 안으로 던지며 앞쪽에 일렬로 늘어섰다.

 잠시 심호흡을 한 세 사람의 검과 도에서 붉게 빛나는 광채들이 솟아 나오

기 시작했다.

 "창궁혈해탄(蒼穹血海彈)-!"

 "혈극참(血極慘)-!"

 혈우창궁검법(血雨蒼穹劍法), 남궁세우의 오십 년 한이 담긴 검법이 설봉

산에서 수목과 바위를 상대로 첫선을 보이고 있었다.

 아울러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의 혈극참도 펼쳐졌다.

 "오!"

 "아!"

 현재 자신들의 처지도 잊었는지 석숭과 철목승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들이 실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실제로 펼치는 것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그런데 누가 저런 인물들을 공격해서 부상을 입혔단 말인가.

 그것이 더 궁금해지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광견조는 묵묵부답. 백산이 묻지 않았기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다.

 "야, 길이 너무 넓잖아! 불필요한 힘을 낭비하지 마라, 일인당 삼척씩만

할당해라. 그리고 그곳에만 집중해라. 토끼를 잡을 땐 토끼 잡는 힘만 쓰란

 말이다, 이 바보들아! 왜 토끼를 잡는데 호랑이를 잡는 힘을 쓰나. 집중해

라, 몸을 집중하고 마음을 집중해라."

 백산의 외침소리가 귀혼곡에 쩌렁쩌렁하니 울려 퍼졌다.

 듣고 있던 철목승이 놀라운 눈을 하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들의 도움을 거부하고 광견조원과 석두만 데리고 길

을 만들고 있는 이유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무공전수, 몸으로 익히는 무공

을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최악의 위기상황에서만 끈끈한 정이 나온다. 자신들이 형제라고 생각했던

살우와 모사를 구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그들을 더욱더 강하게 결속시켜

줄 것이다.

 바라는 것이 그것이었고 무공은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산물일 뿐이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다. 먼저 움직여라! 마음을 따르려 하지 말고 마음

이 몸을 따르게 만들어라! 해내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라!"

 백산의 외침은 앞에 있는 세 명이나 뒤에서 휴식을 취하며 따라오고 있는

나머지 광견조원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삼 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질러오던 외침도 없었다.

 장애물이 있으면 검과 도를 휘두르고 없으면 다시 전진하고, 그들의 행동

이 일정한 틀을 벗어나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석두의 검에서는 일장이 넘는 검강이, 섯다와 뱁

새의 도에서는 팔 척 정도 길이의 도강이 솟아 나와서 그들의 전면을 향해

난사되고 있었다.

 "저러다 위험하지 않겠나?"

 한편으로는 석두와 광견조원들의 발전에 놀라워하면서도 현재 그들의 상태

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철목승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백산을 향해서 입을 열

었다.

 지금 저들의 상태는 광견조가 그렇게도 목마르게 바라던, 바로 무념무아의

 경지,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무림인으로 치자면 운기의 절정에 이르러 있

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살짝만 건들어도 바로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비록 자신도 모르게 검과 도를 휘두르고 있지만 만일 저 상태에서 심적 부

담감이나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행위에 일말의 의심이라도 갖게

되면 진기가 역류하게 되고 곧바로 주화입마로 이어진다. 폐인이 되거나 영

원히 태양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철목승의 우려에 대해서 백산은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 만다.

 "저들은 단순합니다. 한 가지밖에 모르죠. 그런 이들에게 문제는 없습니다

."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아니다.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고 살우와 모사를 살리겠다는 마음 한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이백여 장 정도 길을 뚫던 삼 인이 모든 힘을 다 소진했는지 한 명씩 쓰러

졌다. 맨 먼저 뱁새가 쓰러지고, 그 다음이 섯다였다. 그러나 석두는 아직

도 힘이 남았는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헛손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의 검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나오질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야!"

 의식이 가물가물하던 석두의 귓전으로 백산의 음성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너는 지금 모든 힘을 다했다. 더 이상 검을 들고 있을 힘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 살우가 죽어가고 있다. 이제 너는 어떻게 할 테냐."

 백산의 말에 석두의 몸이 급격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힘을 내지 못하면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석두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영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금군의 칼날에 쓰러져가던 가솔들, 그들에게 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부인

과 딸이 죽은 후 자살하시던 아버지, 같이 죽여달라며 매달리는 아들을 향

해서 힘있는 사람이 되라는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긴 무책임한 인간.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에게는 힘이라는 것이 생겼

다. 이젠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지 않을 힘이 생겼는데….

 "안 돼!"

 석두의 입에서 한을 쏟아내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와 전면을 향해서 밀려나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가루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

했던 것이다.

 "오! 심검(心劍)! 심검이다."

 석숭과 철목승이 경악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석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휘두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자신 앞에 있던 장애물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굳건하게 서 있는 석두를 안아든 것은 백산이었다.

 "수고했다, 이 녀석아! 일단 한번 접해보았으면 그것으로 된 거다!"

 백산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석두를 안고 마차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물의 맛만 알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바닷물의 맛을 모른다. 강물이 흘러

서 마지막에는 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도 바다 자체가 있는지를 모르는 인

물들이 많다.

 무공도 마찬가지다. 일반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의 경지를 강물이라고 하면

 초극 고수들의 경지는 바닷물이라 할 수 있다. 바닷물을 전혀 모르는 것하

고 바닷물의 맛을 본 것과는 천양지차다. 한번 바닷물을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기억하게 되고 그 맛을 찾아서 언젠가 바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백산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충실하게 따라

준 형제들이 고마웠다.

 조금이라도 사심이 개입하게 되면, 철목승의 말대로 무공을 잃는 것은 물

론이요 폐인이 되기 십상인 연공법이다.

 인간을 극한 상황까지 몰고,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법. 마음보다는 몸이 먼저 깨닫게 하는 연공법인 것이다.

 그러나 광견조와 석두는 해냈다.

 "허허!"

 철목승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하제일인인 그가 석두의 경지를 모

를 리가 없다. 현재 석두의 무공수위는 결코 심검을 펼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심검이란 것은 익히는 것이 아닌 깨달음의 무공이라 하지 않던가.

그도 그렇게 익혔던 것이다. 그럼 지금 석두가 보여준 것은 무엇이란 말인

가.

 결국 깨달음이니 뭐니 해도 무공이란 것은 필요성과 절실함에 의해서 성취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석숭이 놀라고 철목승이 감탄하든 말든 광견조의 길

 뚫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

 앞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본 나머지 광견조의 행동도 마찬가지로 처음 했던

석두의 일행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길을 뚫는 것에만 모든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광견조원 전부가 쓰러졌다. 모든 진력을 다 뽑아낸 이들은 적어도 반나절

은 쉬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백산 자신의 몫이다.

 광견조원들이 목숨을 걸고 뚫었던 길이 오백여 장, 그들의 앞에 거대한 석

비(石碑)가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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