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광견조(狂犬組)
"형님! 저쪽에서 웬 자식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데요?"
한쪽 풀숲으로 버려졌던 섯다가 소살우에게 얻어맞은 거시기의 정상유무를
확인하고 있던 차에 자신들을 향해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발견한 모
양이었다.
"내버려둬! 지금 우리가 남 신경 쓸 때가… 아니지? 그놈들 무림인이냐?"
"네, 형님!"
"잘됐네. 그럼 그 놈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소살우가 표정을 바꾸며 일행을 쳐다보자 나머지 광견조의 눈빛이 다시 빛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답을 줄 놈을 찾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순진한 건지 무지한 건지 자신들의 몰골은 생각지도 않고 감히 무림인들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물어보려 하고 있었다.
휘익! 휘익!
날렵하게 날아 내리는 소리와 함께 삼십여 명의 인물들이 광견조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백산 일행이 머물렀던 객잔을 떠난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
파(峨嵋派) 삼 파의 인물들이었다.
설봉산을 넘기 위해 움직이던 이들이 섯다의 비명소리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거의 넝마에 가까운 흑의를 입고 은연중에 살기마저 뿌려대는 광견조가 모
여 있는 곳에 도착한 삼 파 무인들의 얼굴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다.
'신니, 혹시… 마맹의 일당이 아닐까요?'
광견조 일행을 쳐다보던 무지진인이 재빨리 금정신니에게 전음을 날렸다.
행동거지로 보건데 결코 정파의 인물들은 아닌 것 같았다.
'천마맹의 잔당이 맞는 것 같은데… 어디서 싸우다 낙오된 자들인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통성명이라도 한번 해보지요.'
서로 간에 전음을 나누던 무당의 무지진인과 금정신니가 앞으로 나서며 광
견조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이분들은 아미삼노 선배들이시고, 저쪽은 화산오검수, 그리고
우리는 무당오자라고 하네만."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경외의 눈빛
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며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해야 한다. 더군다나 굳이
소개를 하지 않더라도 입고 있는 옷이 화산, 무당, 아미의 삼 파임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강호에서 칼밥을 먹는 이라면 결코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상대는 광견조였다.
화산파니 아미니 무당이니 하는 말은 들어본 적도, 아는 것도 없는 그들이
하물며 아미삼노며 무당오자, 매화검수를 어찌 알겠는가.
또한 팽무도가 무공은 가르쳐 주었지만 무림의 문파에 대해서나 무림에 관
한 지식은 한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모사, 저 치들 유명한 놈들이냐?"
"제가 뭘 알겠습니까?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무아의 경지에 대해서 물어도 모를 것 아냐?"
소살우와 모사가 속삭이는 소리였다. 애당초 자질구레한 무공은 익히지도
않았기에 전음(傳音)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다. 그래도 약간의 예의를 지
키느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이 시커먼 놈들에게 촉각을 세
우고 있던 삼 파의 무림인들이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강호상에서 무당, 화산, 아미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 것이던가. 어느 누
구도 삼 파의 이름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런 삼 파에서도 상
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들, 이곳에서는 자신들이 무당파고 화산파
고 아미파이다.
꼭 자존심이 아니더라도 인정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들을 능멸하는 것은
곧 본산을 능멸하는 것이기에.
"이놈들아, 어른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들이야, 천마맹의 마졸(魔卒)이더냐?"
그렇지 않아도 살기를 풀풀 날리는 시커먼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금
정신니 매일봉이 급한 성정을 못 이기며 득달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정파라는 인물들, 소위 명문정파 및 무림세가라고 알려진 자들은 무엇을
먹고사는가? 바로 명예(名譽)와 전통(傳統)이다. 남들이 자신들을 인정해주
는 것이 명예요, 그 명예가 자자손손 후대까지 이어지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나 이놈들은 묵묵부답(默默不答).
마치 벙어리라도 되는 양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다시 한번 따끔하게 훈계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놈들의 우두머리
가 입을 열었다.
"어이, 할망구! 혹시 무아의 경지를 어떻게 얻는 건지 아쇼? 남녀가 으응
할 때 얻는 것은 빼고 말이요."
기폭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을 무시한 놈들을 징계하고 싶었는데 놈
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자신을 희롱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할망구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색을 멀리하는 불제자를 보고 남녀의
그 짓을 들먹이고, 그것도 모자라 무아의 경지라고 표현하였으니, 금정신니
의 노화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색마 같은 마졸들이 감히!"
이건 분명히 자신을 희롱하는 소리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천하
의 아미삼노를 향해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던지 세상에 염증이 생겨서 그만 살고 싶은 자가
아니라면 정신이 나간 미친놈일 것이다.
그러나 이놈들의 정신은 말짱하다. 한마디로 자신을 희롱하는 말로밖에 들
리지 않았다.
화가 난 금정신니 매일봉이 소살우를 향해서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사냥감을 덮치는 호랑이의 기세를 담고 있다는 아미 일절인 복호권(伏虎拳
), 그 복호권이 소살우를 향해서 거칠게 밀려들었다.
"이 할망구가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지 어디다 손찌검이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권풍을 가볍게 피하며 소살우가 소리를 질렀다. 순
간 삼 파 일행의 눈빛이 변했다. 비록 오성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미파
의 복호권은 강호 무뢰배들이 저렇듯 쉽게 피할 수 있는 하찮은 무공이 아
니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아미파의 무공이 아니던가.
소살우의 행동에 금정신니의 얼굴이 분노로 인하여 붉게 물들었다.
자신을 할망구라 한 것도 모자라 대 아미파의 무공을 손찌검이라고 표현하
고 있다.
게다가 무당과 화산의 인물들이 보고 있는 데서 아미의 무공을 가볍게 피
해버렸던 것이다. 아미파에 대한 자긍심이, 자신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오라! 한가락하는 재주가 있다 이거냐? 마졸답게 한 수가 있었구나!"
표정이 굳어진 금정신니의 몸에서 조금씩 살기가 흘러나왔다.
단순한 악졸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인 아미파를 치욕스럽게 한 사문의
적이다.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그나마 참을 수 있지만 아미파를 모욕하는 것은 결
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강호의 철칙이고, 아미파를 구파일방의 한
자리에 올려놓았던 원동력이었다.
차앙!
금정신니가 자신의 등에 있던 검을 빼들었다. 결코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포위해라,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미파의 인물들이 일사불란하게 광견조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이
파의 인물들도 포위망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봐요, 할망구! 우린 싸우고 싶지 않다고. 단지 무아의 경지가 무엇인지
…."
"닥쳐라! 이 색마 놈."
또다시 무아의 경지를 들먹이고 있는 소살우를 향해 금정신니가 자신의 검
을 들어 신중한 동작으로 일자를 그려내었다.
일자수미검(一字須彌劍).
일(一)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니, 세상만사가 다변(多變)하다 하나 결
국은 하나로 통일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네. 이 일검으로 모든 변화를 잘라
내어 하나를 이루게 하니 그것이 곧 일자수미검이라. 단순히 일자로 베어내
는 것 같지만 그 한 수에는 시전자가 가지는 모든 힘이 집중되는 무서운 검
법이 또한 일자수미검이고 아미파를 구대문파의 한자리로 올려놓은 검법이
기도 했다.
단순히 횡으로 긋는 듯한 금정신니의 동작을 평범한 일자 베기로 생각한
소살우가 아무 생각 없이 물러나려는 순간 갑자기 검세가 엄청난 기세로 변
하며 그의 가슴을 잘라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뉘이며 피하기는 했으나 가슴 앞섶이 베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잘렸을 것이다.
"이런 씨펄! 한 벌밖에 없는 옷인데…이 할망구가 여자라고 가만히 있었더
니…."
소살우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여차했으면 자신의 목이 떨어졌
을 거라는 생각보다 단 한 벌뿐이 옷이 잘린 것이 더욱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산을 비롯한 광견조원들은 각자 옷이 한 벌밖에 없다. 이것을 입고 북경
까지 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할망구가 단벌인 옷을 잘라버린 것
이다.
미소 띤 얼굴의 소살우가 검을 휘둘러 오는 금정신니를 향해서 빛살 같은
속도로 뛰어들었다.
금정신니의 검을 피하는 소살우의 몸놀림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고 대 아
미파의 검법이 소살우의 털끝 하나 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피하는 와중에 몇 번의 기회를 포착했으나 소살우가 멈칫하는 바람에
금정신니는 위기에서 벗어나곤 했다.
소살우가 보았을 때는 검법이라고 시전하는 것들에 너무나 허점이 많았고
언제든지 그 곳을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
에 물러나고 있었다. 마땅히 공격할 데가 없었다.
여자라서 얼굴은 안 되고, 그렇다고 가슴을 공격하자니 그것도 못할 짓이
고, 남자 같으면 아랫도리라도 공격해서 진작에 끝을 냈을 것인데 앞으로
튀어나온 것도 없는 할망구다.
처음 하는 여자와의 싸움이었기에 마땅히 공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나 봐주고 있는 것은 소살우의 마음일 뿐 당하는 금정신니는 그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결정적인 기회를 잡고도 그대로 물러서는 바람에 자신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고수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화
가 났다. 놈의 모든 행위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
았던 것이다.
아미삼노의 이름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가 더
욱 강해지며 그녀는 거칠게 소살우를 공격했다.
그러기를 수십 합, 소살우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표정이 굳어지며
금정신니를 향해서 도를 휘둘렀다.
퍼억!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소살우가 자신의 도집째 금정신니의 엉덩이를 강타
해버린 것이다.
"그만 하라고 했잖아! 왜 가만히 있는 놈을 건드려?"
내공을 싣지 않았기에 소리만 컸지 별반 위력은 없는 타격이었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소살우로선 최대한 봐준 행위였다.
그러나 삼 파 인물들이 보기에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시커먼 악졸과 놈의 부하들이 재미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금정신니
를 희롱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말리지도 않고 있는 자신들을 비웃는 듯
한 미소였다.
화가 나면 얼굴에 미소를 띠는 소살우와 그를 닮아가고 있는 광견조원, 그
것을 알지 못하는 삼 파의 인물들에게 비친 광견조는 자신들을 우롱하는 마
졸로 보였을 뿐이다.
"죽이고 말겠다. 이 마졸 놈!"
금정신니 매일봉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며 전 내공을 끌어올려 소살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치욕스러웠다. 저놈의 도(刀)에 죽는다 한들 이렇게 치
욕스러울 수가 있을까!
불제자로 살아온 지 어언 오십 년, 그동안 단 한번도 남정네의 손길이 닿
지 않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의 몸, 그것도 엉덩이를 도에 난타 당한 것이다.
이젠 체면이고 뭐고 없다.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뿐이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거의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달려들고 있
는 금정신니의 검은 더욱더 매서워졌고 반면에 소살우는 그 나름대로 고민
스러워 하고 있었다. 때릴 데가 없어서 엉덩이를 가격한 것이었는데 그것으
로 인하여 사태는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 버렸다.
여자와 잠 한번 자보지 못한 자신을 색마로 취급하고 엉덩이 한방 맞은 것
을 가지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공격을 하고 있다.
"어이 거기, 남자들! 이 할망구 좀 말려. 이러다 너희들 다치면 나만 우리
형님에게 죽는단 말이다."
자신이 한 말이 저 고고한 정파인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것
을 알지도 못한 채, 금정신니의 검을 피하며 소살우가 또다시 무당오자와
매화검수들을 향해서 외쳤다.
"무량수불!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인간 말종이로고."
"닥쳐라! 이 마졸들 감히 우리를 어찌 보고."
그들도 한계에 왔음인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지 검을 뽑아들며 광견
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살우와 광견조는 마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아의 경지에 대해 물
어보려다 졸지에 마두에 색마가 되어버렸다.
난전이었다.
무당, 아미, 화산 삼 파의 정예와 열두 명의 광견조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
이다.
그러나 광견조가 누구인가. 난전이라면 뇌룡현 시절의 건달 때부터 익숙했
던 그들의 삶이었다. 난전이라면 날고 기는 이들이 광풍대원들이다. 도를
자신의 손과 똑같이 움직여대는 그들의 동작은 아무런 격식(格式)도 투로도
없었지만 상대의 허점이 보이면 절대 놓치지 않았고, 삼 파의 수뇌급을 제
외한 누구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를 해친다거나 하는 행
위는 없었다.
"얘들아 안 되겠다. 전부 기절시켜 버렷!"
인원으로 덤비는 삼 파의 공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지 소살우가
공격명령을 내렸고 지금껏 상대를 밀어내기만 하던 광견조원들이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구타하는 소리와 함께 삼 파의 제자들 중 일부 약한 자들이 쓰
러지고 있었다.
"안 되겠습니다, 신니! 검진을 펼쳐야 되겠습니다. 이 상태로는 우리가 견
디지 못합니다."
이제는 전음이고 뭐고 없었다. 저 검은 옷을 입은 마졸 놈들의 무공이 생
각 이상으로 강했던 것이다. 자신들과 일 대 일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지진인이 금정신니를 향해 다급한 심정으로 소리쳤고, 서로의 눈빛을 교
환한 삼 파 인물들의 몸놀림이 지금까지와는 현저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살우와 맹렬하게 싸우던 금정신니 매일봉이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무당오자가 채우면서 소살우와 모사를 포위하고, 뱁새를 포함한 다섯 명은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이, 섯다를 포함한 다섯 명은 아미파에서 포위해버린
것이다.
바야흐로 오행검진(五行劒陣), 매화검진(梅花劒陣), 복호검진(伏虎劒陣)이
뇌룡현의 이름 없는 광견조를 잡기 위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강호의 대 악인이나 마두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희대의 검진이
….
그때부터 광견조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강호 일절로 통하는 각 문파의 검진에 갇힌 광견조. 검진이 무엇인지도 모
르는 그들이었기에 아무리 용을 써도 포위망은 열리지 않았다.
"씨펄! 형님이 시킨 대로 살인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야, 다들 도 뽑아!"
지금껏 광견조가 도를 뽑지 않은 이유였다.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라는 백
산이 엄명에 도집으로만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를 뽑아든 광견조원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도법이라곤
백산의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이라 명명한 도법의 일초인 혈극참(血
極慘) 하나뿐.
광견조의 도에서 붉은 혈광이 솟구치며 완전하던 검진에 구멍이 생기기 시
작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구대문파라고 하는가.
광견조의 갑작스런 공격에 잠시 주춤하던 검진들이 다시 복구되며 더욱 단
단하게 광견조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소살우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다른 검진 속에 있는 조원들보다 더욱 힘들었다. 상대는 삼 파의 인
물 중에 가장 강한 무당오자였다. 아무리 도를 휘둘러도 되돌아오는 것은
반발력뿐이었다.
태극 문양만이 자신 앞에 일렁일 뿐 상대의 형체도 움직임도 잡아낼 수 없
었다.
검상을 입었는지 이곳저곳이 쓰라려 오는 것 같았다. 웬만한 상처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소살우가 고통을 느낄 정도였으니 상당한 상처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는 자네들을 죽이고 싶지 않네, 그만 항복하게. 그러면 무공만 없애
고 돌려보내 주겠네! 이 무당오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검진 어디에선가 소살우를 향해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가 막혔다. 자신들이 무얼 어찌했던가! 단지 무아의 경지가 뭐냐고 한마
디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자신들을 공격해놓고선 이제는 항복하면 무공만 폐하고
살려준단다.
소살우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입가에 처절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다가오는 검을 피하며 등을 맞대고 돌던 소살우와 모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서 날아오는 다섯 개의 검을 그대로 주시하며 이를
악물고 자신들의 도에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화산의 매화검진 속에서도 아미의 복호검진 속에
서도 광견조원들이 우뚝 선 채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검들을 무시하고는
도에 내공을 주입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살우의 도에서 도가 길어진 듯한 혈광이 튀어나오고 뒤이어 모사
를 비롯한 전 광견조원들의 도에서 핏빛 도강이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터지는 통렬한 외침.
"혈극참(血極慘)!"
열두 명 광견조 전원이 동시에 뱉어낸 외침이었다. 마치 울분을 토해내는
듯한 외침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한스러운 목소리였다.
이래서 전음이 필요 없었던가. 같이 생활한 지 십여 년, 주변 대기의 흐름
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라 있는 광견조였다.
그들 열두 명이 쏟아낸 혈광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소살우의 검에서 혈광이 솟구치는 광경을 본 무당오자를 비롯한 삼 파의
인물들은 경악했다.
도강이라니!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열두 명 전원이 도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명문정파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현재
의 상황이 그들을 더 이상 놀라게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살기를 잔뜩 머금은 붉은 혈광이 자신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약한 제자들을 뒤쪽으로 물리고는 자신들의 전 내공을 끌어올려 검
에 주입시켰다.
그리고 밀려오는 시뻘건 강기들을 향해서 자신들 최고의 검법을 시전했다.
그들의 경지도 역시 검강.
도강과 검강이 난무하고 두 가지의 역세(力勢)는 그들 사이의 한 중앙에서
거세게 충돌했다.
콰앙! 콰앙! 콰앙!
세 번의 폭음과 함께 그 충돌의 여파로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날리던 먼지가 걷히며 서서히 장내의 정경이 드러났다.
오행검진 검진의 내부에 있던 소살우와 모사가 무릎을 꿇은 채 칠공에서
피를 꾸역꾸역 쏟아내고 있었고, 무당오자는 창백한 얼굴로 삼장 밖으로 물
러나 있었다. 그들의 입 주위에도 가느다란 핏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무당오자의 승리였다. 과연 무당이었고 구대문파였다.
선공을 당한 상태에서도 도강을 펼치는 고수를 상대로 이겨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일 뿐 실제 무
당오자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호상에 이름도 전혀 알려지지 않
은 자들에게 밀려서 무당의 오행검진마저 펼쳤으나 자신들이 약간의 우위만
점했을 뿐이다.
그들의 명예가, 자존심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이었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을 형편이 되어버렸
다.
그러나 무당은 그런 대로 양호한 편이었다. 내심으로야 어떻든지 자신들이
이겼으니까 체면은 지킨 것이란 말이다.
화산오검수가 구축한 매화검진에서는 서로가 양패구상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고, 복호검진은 완전히 파훼되어 아미삼노
는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광견조의 도에서 도강이 솟구치자 제자들을 물리고 자신들만으로 광견조
오인의 도강을 받아낸 결과였다.
일 대 일로 해도 비슷한 실력인 그들이 오 대 삼으로 열세인 상태에서 선
공을 당했으니 아무리 복호검진으로 방어를 했다해도 세 사람만으로 구축한
진식이 완전할 리가 없었다.
모두들 당황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가운데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
한 사람은 섯다였다.
쓰러져 있는 아미삼노의 목에 자신의 도를 들이댄 섯다가 나머지 문파 인
물들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이 할망구들 살리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서! 안 그
러면 이것들 다 죽여버릴 거야!"
환한 미소, 그리고 살기.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지만 광견조의 얼굴에서
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출되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살기가 넘치는 그들이 진정으로 살심을 먹고 쏟아내자 삼
파 인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정파인들이 별 반응이 없자 금정신니의 목을 틀어
쥐고 있던 섯다가 도를 살짝 갖다 대었다. 여차하면 베어버릴 기세였다.
"무량수불! 우리가 물러나겠으니 살생은 그만두시지요!"
당황한 무당오자와 매화검수들이 뒤로 물러났다.
"비겁하구나, 마졸! 감히 그분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매화검수 중 육합신검(六合神劍) 단소백(單小伯)이 섯다를 향해서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비겁? 지금 비겁이라고 했나? 이렇게 떼거리로 덤비는 네놈들은 정당한
거고? 우리가 네놈들에게 무슨 짓을 했지? 잘 있는 우리를 먼저 공격한 것
이 너희들 아니었나?"
섯다의 말에 삼 파의 인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저들을 먼저
공격한 것은 분명히 자신들이었다.
단지 옷이 지저분하다는 것과 살기를 흘리고 있다는 것 하나 때문에 마졸
로 몰아갔고, 무아의 경지란 한마디에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다.
선입견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대했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겉보기에 마두처럼 보이고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해
서 그들을 공격했다. 어쩌면 자신들의 자존심을 먹칠한 무명잡배들을 응징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무당오자의 수좌(首座)인 무지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야! 섯다 뭐해? 살우 형님하고 모사가 위험해, 빨리 가자!"
살우를 업고 있던 뱁새가 섯다를 향해서 소리쳤다.
소살우와 모사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피를
넘기며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놈들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이런 거라 이거지? 무당, 아미, 화산이라
고 했나? 반드시 기억해 두마. 우리는 광견조다, 미친개를 기억해 둬라. 미
친개에게 물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마!"
끝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던 섯다와 광견조 일행들이 삼 파 인물들의 시야
에서 멀어져 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지진인! 저들을 그냥 보내줄 겁니까?"
재빨리 아미삼노에게 응급조치를 취한 화산파 인물들이 광견조를 처리하자
하고 있었다.
"무량수불! 저들을 먼저 핍박한 것이 우리일진데 더 쫓아가서 뭘 어쩌겠습
니까?"
무당오자의 수좌(首座)답게 사리 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공연한 자존
심으로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낀 무지
진인은 화산오검수의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우리의 명예, 우리의 자존심이 저 하잘 것 없는 놈들
에게 당해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데도 이대로 있자고요? 안될 말입니다."
그러나 화산파의 젊은이들은 그렇지를 못했다. 시작이야 어찌되었건 자신
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던가.
시작이야 잘했건 잘못했건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결과가 문제다.
자신들이 이겼으면 당당하게 사과를 받고 처음엔 몰라서 그랬다고, 미안하
게 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발적으로 저질러졌던 일들이 무마가
된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당당한 사과는커녕 자신들이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
니 어찌되었건 끝을 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사형. 비록 사악한 마두는 아닐지라도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
장차 강호의 재앙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더 크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
다."
"맞습니다. 사형, 제거해야 합니다."
무지진인을 제외한 무당오자 전원이 이구동성으로 광견조원들의 제거를 주
장했다.
저들을 처단하여 입막음을 하기 전까지는 상처 입은 그들의 자존심이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 가시죠. 몇 마디만 외치면 저놈들은 이곳 설봉산에 있는 정파인들의
추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미파를 제외한 화산의 매화검수와 무당오자가 몸을 날려 광견조를 뒤쫓
기 시작했다.
"저는 화산의 매화검 손무라고 합니다. 아미삼노 세 분을 암습하고 도망치
는 열두 명의 악적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흑의를 입고 있으며 그들 중 부상
당한 자가 섞여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는 협사 여러분! 그들을 척살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여기에 무당오자 다섯 분도 같이 계십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졸지에 마졸로 몰리고, 살기 위해서 휘두른 도는 아미
삼노를 암습한 것으로 변해버린 광견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