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광풍대(狂風隊)
뇌룡현(雷龍縣)에 있는 홍루. 처음엔 강구두의 근거지였고 지금은 백산 부
하들의 연무장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에 오십 명의 인물들이 네 개조로 나뉘
어서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다.
그들의 팔에는 신검합일을 짧은 시간에 이루게 한다며 백산의 지시로 만든
도(刀)와 검(劍) 모양의 뭉툭한 쇠몽둥이들, 일명 신검합일도가 벌써 십
년 이상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조직의 이름이 광풍대(狂風隊)고 저기 있는 녀석들이 광풍
대원이라 이거지?"
백산은 석두로부터 조직 구성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조직의 이름은 광풍대, 그 아래로 광검군(狂劍軍)과 광도군(狂刀軍)을 두
고 있고 광검군의 군주는 석두 그리고 광도군의 군주는 일휘로 되어있었다.
또한 광검군 아래로 광살조(狂殺組)와 광혈조(狂血組)를, 광도군의 아래로
는 광마조(狂魔組)와 광견조(狂犬組)를 두고, 각 조는 조장을 포함하여 열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 각 조장들 나와서 인사해라!"
석두가 대원들의 선두를 보고 외치자 네 개 조의 가장 선두에 앉아있던 이
들이 뛰어나오며 백산의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광살조(狂殺組)의 조장 여풍기입니다."
"광혈조(狂血組)의 조장 이사입니다."
"광마조(狂魔組)의 조장 막사입니다."
"광견조(狂犬組)의 조장 소살우입니다."
백산에게 자신들을 소개한 네 사람은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백산을
향해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그들만의 인사법으로 예의를 차렸다.
"어이, 이사? 네가 그때 비도 던지던 이사 맞지?"
"네, 그렇습니다. 큰 형님!"
과거 백산이 살인비도와 비무를 준비할 때 비도 막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
뽑았던 대원들 중 마지막 비도로 그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 이사였다.
"그래! 다들 반갑다. 이제야 우리도 제대로 된 조직을 갖게 되는구나. 모
두 합심해서 한번 잘 살아보자!"
도강, 검강을 구사하는 고수 오십여 명을 데리고 기껏 하는 인사말이 밥
잘 먹고 편하게 살아보잔다. 대답하는 놈들도 똑 같았다. 백산의 말이 당연
하다는 듯한 표정들이다.
"예! 큰 형님!"
그때 철목승의 옆에 앉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냉추렴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산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인사법이 이래요? 저번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에서도 보았지만 정
말 너무 우습다고요! 백 공자님, 좀 바꿀 수는 없어요?"
"불가! 우리는 무림인이 아니오, 냉 낭자. 또 무림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
백산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말은 냉추렴에게 하고 있었지만 아마 부하들과 자신에게 한 말이리라. 혹
여 강해진 무공으로 명성이나 권력을 탐하려 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기 때
문이다.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서 주어진 것만을 지키며 살고 싶고 또 그렇
게 해주고 싶은 백산의 소망이었다.
복수는 혼자서 진행할 것이다. 결코 이들을 끌어들이지 않을 작정이다. 그
들만의 인생을 살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무림인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 백
산의 생각이다.
하나 무림인이라는 것이 내가 하려한다 해서 되는 것이고 하기 싫다고 해
서 안 되는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무림이란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을 백산도 모르고 있었다.
"일휘! 석두! 준비한 것을 가지고 와라."
일휘와 석두가 커다란 상자 두 개씩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광풍대원들
앞으로 상자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열어라!"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곳에는 도와 검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그동안 팔에 무거운 쇠몽둥이를 차고 다니느라 고생들이 많았다. 너희들
의 팔에 있는 것들을 풀어라!"
백산의 말에 광풍대원 일동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사실 그들에게 괴로운 것은 쇠몽둥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갑자기 길어진
팔에 적응이 안 되어 꽤나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잠자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아닌 식사였다.
기다란 젓가락으로-그것도 삼 일 정도를 굶어서야 터득한 방법이었다-조종
을 해가며 식사를 하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서 겪어본 것 중 가장 힘든 일이
었다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그랬던 짐을 이제는 떼어내고 있다. 모두들 감개가 무량한지 자신의 쇠몽
둥이를 한번씩 쓰다듬고 있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두 번째 분신(分身)의 지급식을 시작하겠다."
백산이 검(劍)과 도(刀)를 대원들에게 일일이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대장간 장 노인으로 알려져 있던 남궁세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
로 신검(神劍), 신도(神刀) 수준은 아니지만 가히 명검, 명도라 불릴 만했
다.
모두에게 일일이 수인사를 하면서 검과 도를 지급한 백산이 마지막 하나
남은 도를 자신의 허리에 차고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진중히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들에게 지급한 그 도와 검은 대장간에서 그냥 파는 것들이 아니
다.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의 가문을 파멸시켜버린 멍청한 두 노인네들의 피
와 한이 서려있는 물건이다. 너희들이 이름도 모르고 익혔던 검법과 도법을
만들어낸 노인네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 검과 도는 너희들의 생명이다. 생
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검과 도를 손에서 놓지 마라. 그 도법의 이름은 한
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이고 검법은 혈우창궁검법(血雨蒼穹劍法)이라고
부른다. 이제 각자의 무기를 뽑아라!"
사부의 한스러운 인생 때문이었는지 감정이 서려있는 백산의 목소리는 시
종일관 무거웠고, 그런 백산을 바라보고 있는 광풍대원들의 눈에서는 서서
히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십여 명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자 홍루의 앞마당은 순식간에 검과 도에
서 뻗어나온 광채와 살기로 가득 들어찼다.
"너희들이 들고 있는 그 검과 도는 한번도 인간의 피를 맛보지 못한 처녀
지물이다. 이제 자신의 피를 이 검과 도에 먹여 형제의 의식을 거행한다."
백산은 자신이 들고 있던 도(刀)로 왼쪽 팔목을 미련 없이 베었다. 도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솟구치자 백산은 도의 손잡이 부분부터 시작해서 전체
에 고루고루 피가 묻도록 앞뒤로 뒤집었다.
백산의 뒤를 이어 오십 명의 광풍대원 전원이 자신의 팔목을 그어서 각자
의 검과 도에 피를 먹이는 작업을 하자 검광(劍光), 도광(刀光)이 난무하던
홍루 앞마당은 순식간에 비릿한 혈향(血香)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도에 피를 가득 먹인 백산이 일어서면서 하늘을 향해서 도를 힘차
게 치켜들었고 뒤를 이어서 오십 명의 광풍대원들도 자신의 피가 흘러내리
고 있는 검과 도를 들어올렸다.
검과 도를 적시던 피가 흘러 그들의 팔과 얼굴을 적시고 있었건만 누구 하
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피하는 이들이 없었다. 마치 사교 교주를 숭상하는
광신도의 표정처럼 그들의 눈빛은 환희와 열정으로 빛났다.
백산의 통렬한 외침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우리 광풍대원 전원은 한 형제다!"
"…형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오십 명의 광풍대원 전원이 자신도 모르게 백산의
외침을 따라한다.
"우리 광풍대는 형제를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 광풍대는 싸움에 있어서 패배하지 않는다!"
"우리 광풍대는 은혜는 열 배, 복수는 백 배로 한다!"
"우리 광풍대는 위선을 박멸한다!"
"우리 광풍대는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이 광풍육계(狂風六戒)를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지킬 것을 나 백산은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광풍육계를 전부 읊은 백산이 자신의 도에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하자 나머
지 광풍대원들도 백산을 따라 자신의 검과 도에 내공을 주입하여 피를 머금
고 있는 각자의 무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철목승, 풍신개, 강구두, 오구 그리고 장
한수는 경이로운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저 덤벙대기
만 하는 덜렁이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오십 명의 광풍대원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홍루를 가득 뒤덮고, 그들의 내
공이 실린 외침은 뇌룡현(雷龍縣) 곳곳에 메아리쳐 나갔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팽무도와
남궁세우였다. 일휘와 석두를 따라서 검과 도를 가지고 왔던 이들은 백산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자 이곳 담 밖에 있었던 것이다.
"형님은 저 녀석을 광신교의 교주로 만들었구려! 그리고 한천팽무도법(恨
天彭武刀法)이 뭐요? 한천팽무도법이."
팽무도를 향해 비아냥거림을 보내고 있으나 눈가에 묻어나는 물기와 함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가문을 망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쇠를 두드려도 마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모
든 것을 포기했었다. 의형인 팽무도가 무공을 정리해서 저놈들에게 전수하
자 했을 때 한줄기 빛을 보았다.
자신은 가문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무공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
문을 망친 죄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저기 있는 저 녀석들이 앞
으로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동량이 될 것이다.
백산 본인의 말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 했지만 녀석을 겪어본 남궁
세우는 잘 알고 있다. 정이 많은 녀석이다. 자신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두
가문을 도와서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거기 담 뒤의 멍청한 두 노인네,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하십니까?"
조천영과 소운이 미리 주문해두었던 음식들을 나르고 있는 사이 백산이 남
궁세우와 팽무도를 불렀다.
어색한 표정의 두 사람이 들어오자 조천영과 소운을 도와서 음식을 정리하
고 있던 광풍대원들이 모두 사부님이라 부르며 허리를 숙인다.
"좋겠소! 제자들이 저렇게 많아서."
남궁세우와 팽무도가 어떻게 된 거냐고 백산을 향해서 의문을 표시하자 '
낸들 알겠소? 지들이 좋아서 그런걸!' 하며 광풍대원 쪽으로 가버린다.
그리곤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백산의 행동에 감격해하고 있던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얼굴 색이 썩은 대춧빛으로 변해버렸다.
"야, 야. 신경 쓰지 말고 빨리들 먹어. 먹는 데는 사부고 나발이고 아무
필요 없어.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앞으로 나에게 육포를 권하는 놈 있으
면 죽을지 알어. 알았냐?"
육포에 대해서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광풍대원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
리둥절하니 백산을 쳐다보았다.
"야! 이놈아. 그때 네놈이 육포를 먹은 건 다 수련을 하기 위해서였지 미
워서 육포만 주었겠냐? 그것이 몇 년 전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것을 가지고
지랄이냐. 아예 아까 그 광풍육계(狂風六戒)인가 뭔가 하는 것에 '광풍대(
狂風隊)는 육포를 먹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하나 더 추가시키지 그러냐!
이 썩을 놈아!"
"수련을 위해서라지만 자그마치 이 년하고도 육 개월이었어요. 어떻게 인
간이 이 년 육 개월 동안 육포만 먹고살아요. 그것이 다 귀찮아서 그렇게
한 것 아니요? 제자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어
요? 이왕 말 나온 김에 한번 해보자고요. 여기 풍신개 영감도 있고 철목승
대협이 있으니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자고요. 제자에게 무려 천 일을 넘게
하루 세끼를 전부 육포로만 줄 수 있는지."
팽무도와 백산은 서로 막나가기로 했는지 주위의 시선과 만류에도 불구하
고 연신 핏대를 올리며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풍신개와 조천영이 나서서야 간신히 두 사람을 뜯어 말렸고, 이 철없는 사
제지간의 행동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숨죽이며 킥킥거렸다.
"에끼, 이 사람아. 저 많은 아이들 앞에서 그것이 무슨 추태야! 나잇살이
나 먹어 가지고!"
아직도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팽무도를 나무라는 풍신개
의 얼굴은 말리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꼭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
해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놈아, 교육 좀 잘 시키지. 그동안 내가 저놈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아느
냐? 너도 한번 당해 봐야 돼. 이 자식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풍신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구시렁댔다.
"인사하게, 철 동생. 저기는 백산의 사부인 팽무도란 놈이고 옆에 있는 친
구가 남궁세우일세!"
"반갑습니다, 철목승이라 합니다. 대단한 제자를 두셨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철목승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도 이 두 사람의 정
체를 알고 있다. 과거 백살마대 대주와 부대주였던 인물들. 비록 음모에 의
했다지만 자신과 가문을 동시에 망쳐버린 비운의 인물들이다. 오십 년 한으
로 점철된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돌고 있다. 백산과 광풍대원들 때문이리라
.
"그 말 칭찬인가 아니면 저 개차반 같은 놈을 키웠다고 하는 욕인가?"
심기가 불편한지 팽무도의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싸우는 것 같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이 느껴지던데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고맙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저 녀석이
행동은 저래도 나를 생각하는 것은 끔찍하거든."
철목승의 아부성 발언에 기분이 풀어졌는지 방금까지도 잡아먹을 듯이 싸
우던 백산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팽무도의 얼굴에 웃음이 돌기 시작
했다. 이리저리 광풍대원 사이를 돌아다니며 다시 한번 얼굴을 익히던 백산
은 모두와 대충 이야기를 끝냈는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광풍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두 잘 들어라! 지금 이곳에 귀한 손님이 한 분 와계신다. 강호에서 철
혈전신(鐵血戰神)이라 불리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철목승 대협이시다.
이분께서 너희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신다."
썰-렁!
모든 광풍대원들이 눈만 멀뚱멀뚱 뜨고는 백산만 쳐다본다.
"저 아저씨는 누구야?"
"글쎄, 내가 어찌 아냐 이 새끼야! 저번에 석남장에서도 보았는데 센 사람
인가 보지 뭐."
여기저기서 철목승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열렬한 환호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수 정도는 기대했던 철목승은 어색한
듯이 헛기침을 하며 광풍대원들에게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방금 소개받은 철목승이외다. 제가 이 자리
에 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강호 동도를 위하여 여러분의 힘을 좀 빌리고자
합니다."
철목승의 이야기는 광풍대원들에게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의 제거를 부탁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할 수도 있으나 대월산(大越山)이나 대습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그가 삼백여 구나 되는 귀혼마강시를 찾아서 없앤
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중원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부탁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인간들이 더 많았을 테니까. 그러나 백산
이놈은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자신은 무림인도 아니거니와 남는 것도 없는
일에 힘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강호의 두 기인인 철혈전신 철목승과 풍신개의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해버
렸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철목승은 자신의 무공 중의 하나인 천마장법(天
魔掌法)을, 풍신개는 백산 덕에 벌었던 오천 냥 중 삼백 냥을 꺼내 놓았다.
그제야 백산은 한번 이야기나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분께 감사의 보답으로 이…."
"그 다음부터는 제가 말하지요."
철목승의 말을 도중에 끊으면서 백산이 나섰다. 철목승의 표정이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싹수머리 없는 놈이 감히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하는 얼
굴이었다.
"다 철대협의 건강을 위해섭니다."
이미 철목승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내말 들어라. 너희들은 전부 네 개 조다. 그래서 간단한 시합을 하기
로 했다.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의 귀를 가장 많이 잘라오는 조에게 여기
있는 철 대협의 독문무공인 천마장(天魔掌)이 적힌 무공 비급을 주겠다."
그러나 광풍대원들은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뉘 집 개가 짖나 하며
그저 술만 먹고 있다.
"좋다. 알았다 이 새끼들아, 은 이백 냥이다!"
순간 술과 음식을 먹고 있던 모든 광풍대원의 동작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멈췄다. 시끌시끌하던 홍루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며 조용히 속삭
이는 소리가 광풍대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야! 이백 냥이래, 그것도 은으로! 이백 냥? 이백 냥? 은?"
"와아! 와! 와!"
홍루 전체가 광풍대원들의 환호성에 묻혀버렸다. 광풍대원들은 마치 자신
앞에 은 이백 냥이 있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고 있었다.
"대신 꼴찌를 하는 조는 아까 저쪽에 버린 신검합일 도와 검을 다시 채운
다. 알았나?"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풍대원들은 서로 다른 조를 향해서 적의
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그런 광풍대의 모습에 철혈전신 철목승과 풍신개의
입에서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작 천마장법이란 말에 놀란 이들은 그래도 한때나마 강호 무림의 밥을
먹었던 강구두와 장한수, 그리고 여자들뿐이었다.
천마장법이 어떤 무공인가!
철목승이 젊은 시절에 강호를 주유하면서 사용했던 성명절기이다. 비록 백
산이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의 독문 무공은 아닐지라도 천마장법(天魔掌法)
이 적힌 비급이 강호에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혈겁이
일어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단한 무공인 것이다.
하물며 백산이 들고 있는 저 비급은 이곳에서 새롭게 작성된 것이었기에
이미 천하제일인이 되어있는 철목승의 심득(心得)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
이 아닌가!
그러한 엄청난 비급을 보고도 콧방귀도 안 뀌던 놈들이 기껏 은 이백 냥에
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이래서 제가 말한다고 한 겁니다."
백산이 철목승에게 다가오면서 약간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럼 나도 술이나 상금으로 걸 것을 괜히 머리 싸매고 적었지 않았는가?"
철목승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백산과 그의 부하들이 펼치는 무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저 정도 되는
무인들이 있는 곳은 자신이 알기로는 두 곳밖에 없다.
천사맹(天邪盟)은 너무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 수준을 알지는 못하지만,
현재 강호 무림에서 천무맹(天武盟)과 천마맹(天魔盟)만이 저런 수준의 고
수들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천마장법을 적을 때도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
했던 것이다.
"이것 보게, 철 동생.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말게. 백산 저놈을 닮아서 부
하들도 전부 덜 떨어진 놈들이라 그래."
풍신개가 철목승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
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 녀석들이 싫다고 하니 나나 익혀야겠네?"
백산이 천마장법이 적힌 비급을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자 강구두와 장한
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백산의 품속만을 쳐다보고 있었고, 옆에 있던 풍
신개는 비급을 챙기는 백산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백산아! 그 비급은 천자문(千字文)만 배운 놈의 실력으로는 읽어볼 수가
없다."
백산의 눈이 커지며 철목승을 쳐다보자 그도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어려운 글로 써놨어요. 무식한 놈은 무
공도 익히지 말라는 거요 뭐요?"
자신이 공부를 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어려운 글로 썼다고 철목승을 향
해 인상을 찌푸린다.
"에끼 이놈아! 자신의 평생 심득(心得)을 생각해서 만든 것인데 그게 쉬운
말로 적어지겠냐? 쉬운 말로 쓰고 싶어도 자기도 모르게 어려워지는 것이
심득이라는 것이다."
옆에 있는 팽무도가 자신의 제자가 철목승의 성의도 모르고 날뛰는 것이
미안했던지 백산을 나무라고 있었다.
"사부, 제발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쇼. 심득이라고 하셨습니까? 심득(心
得)이란 놈을 어렵게 적어야만 익힐 수 있다고 누가 그래요. 심득이 되었던
깨달음이 되었던 가장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훌륭한 무공
인 것이요."
백산이 또다시 자신의 궤변을 들고 나와서 사부와 실랑이를 시작한다.
"이 녀석이 또 시작이네. 사부가 그렇다면 아! 그런 모양이다 하면 될 것
을. 어떻게 된 놈이 지 사부에게도 한번 안 지려고 하냐?"
"사부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인정을 하든지 말든지 하죠. 그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자꾸 하니까 그러죠?"
"자, 자. 그만들 해! 너희 두 놈은 사제지간인지 웬수지간인지 구분이 안
가. 구분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풍신개는 오늘이 최고의 날이었다. 자신에게 돌
아올 화살이 전부 팽무도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심으론 부럽기도 했다. 팽무도에게 오늘 같은 날은 가문의 생각
이 절실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쪽
으로는 갈 수도 소식을 전할 수도 없다. 죄인들, 남궁세우나 그나 집안을
망친 죄인인 것이다. 마음이 서글퍼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저 백산
이란 놈은 사부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차단시켜버리고 있다.
백산이 진정으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풍신개에게는 그리 보
였다.
"백 소협, 미안하이! 너무 어렵게 적어놔서…."
철목승이 백산에게 사과를 하고 나섰다. 백산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자
니 글도 못 배운 불쌍한 사람을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완전히 뭣 주고 뺨 맞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 대협이 왜 저에게 미안해요. 미안은 괜히 나에게 시비를 건 저 노인네
가 미안해야지."
끝까지 자신의 사부를 물고 늘어지는 백산이다.
"그나저나 나에게는 소용도 없는 것인데 누구를 줄까나…."
백산이 비급을 손에 들고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강구두와 장한수가
한 걸음씩 철목승의 앞으로 나서며 '철 대협! 저 비급 저희들이 조금만 보
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비록 철목승이 비급을 백산에게 주기는 하였지만 그의 허락 없이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구두와 장한수의 말을 듣는 순간 백산의 눈
고리가 사정없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 양반들이 미쳤나? 이것 주인이 누군데 그쪽에다 부탁을 하는 거야? 잘
들어요. 이건 내 것, 이 백산의 소유물이란 말이요. 구두 아저씨! 철 대협
이 허락한다 해도 내가 아니면 표지도 못 봐, 알아들어요? 그리고 평생 검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이것을 봐서 뭐하게. 쓸데없이 몸 망치기 싫거든 이
것 볼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시오."
인상을 벅벅 긁으며 하는 백산의 말에 강구두와 장한수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것은 백산의 말이 맞다. 지금 너희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벽은 다른 사
람의 무공을 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가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언젠가 손에 잡힐 날
이 있을 것이다!"
사실 장한수는 지금 극심한 심리적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십여 년 전에 팽무도의 가르침으로 이기어검의 단계를 극복했다. 그 이후
로 일취월장하던 그의 무공이 또 다른 벽에 다다른 것이다. 검을 잡은 무인
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의 경지인 심검(心劍).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다
멀어지는 어떤 벽을 그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그 벽을 뛰어넘고자 철목승의 심득이 담긴 비급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네! 글을 모른다는 말이 사실인가?"
백산에게 당한 것이 맺혔는지 철목승이 백산의 약점-본인은 절대 약점이라
고 생각하지 않지만-을 물고 늘어졌다.
"야! 이 새끼들아! 다 처먹었으면 빨리 귀 자르러 안 가고 뭐해? 일휘! 나
는 석두에게 열 냥이다."
백산이 자기네들끼리 열심히 무엇인가를 주고받고 있는 광풍대원을 향해서
소리를 팩 질렀다.
그때 광풍대원들은 서로 내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내기에는 석두
와 일휘도 포함되어 있었고, 백산에게 들켰다고 생각한 일휘는 재빨리 백산
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일휘! 나나 너같이 무식한 새끼들은 이런 비급이 있어봐야 익히지도 못하
는 그림에 떡이란다."
백산이 일휘에게 말한 의도는 곧바로 나타났다.
"어떤 개 후레자식이 그런 소리를 했소. 형님! 내 비록 글은 모르지만 이
것으로 따야할 목은 정확하게 알고 있소."
도를 쓱 빼어든 일휘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도면을 혓바닥으로 슬슬 핥으
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백산의 얼굴에 만족했다는 미소가 어렸다.
"됐어, 가봐."
백산이 철목승을 흘낏 쳐다보며 일휘를 돌려보냈다.
"헛! 허! 허! 허! 천하에 철목승이 오늘 완전히 박살나는구나! 개 박살이
나!"
"일휘, 저 녀석 성격은 저렇게 단순해 보여도 무공을 익히는 데는 천부적
인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광풍대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놈입니다."
지금껏 한쪽에 가만히 있던 오구가 일휘를 칭찬하고 나섰다. 오구가 본 일
휘의 자질은 대단했다. 광풍대원 중에서 그의 격투술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
는 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일휘였다. 백산의 성취가 끊임없는 노력에 의
한 것이라면 일휘는 타고난 자질이라 해야했다. 도(刀)를 쓰는 것보다는 격
투술이 어울리는데도 무기가 있는 것이 한결 멋있어 보인다며 도를 고집하
는 놈이다.
자신이 가르쳤고 어쩌면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일휘가 새삼 자랑스러웠나
보다.
"어라? 오 사부 여기 있었네? 이제서야 임자가 나섰구먼. 오 사부, 여기요
."
지금껏 오구를 모르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쳐다보던 백산이 가지고 있던
천마장법(天魔掌法)이 적힌 비급을 건넸다. 불쑥 백산이 내민 천마장법의
비급을 보며 당황한 오구는 철목승과 팽무도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
었다.
"나에게도 이것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내가 익힐 수준도 아니고."
일말의 재고도 없는 거절이다.
"예? 오 사부도 글을 몰라요? 그럼 나처럼 글을 배우면서 익히면 돼요. 오
히려 그렇게 익히는 것이 더 빨라요."
내공심법상의 글만을 익혔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비급을 내밀었
으나 오구는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이놈아! 세상 천지에 너처럼 내공심법에 있는 글만 익히는 놈이 어디 있
겠냐. 그리고 오구가 너 같은 줄 아느냐.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
팽무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석두를 통해서 알려준 내공심법을 익혔고, 백산이 자신의 혈도를 대부분
뚫어주기는 했지만 사십이 다 되어서 익힌 내공이 쌓이면 얼마나 있겠는가.
그들을 위해서 팽무도가 만년석균을 무더기로 가지고 왔지만 애들 먹이느
라 자신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진 내공이 이제 이십여 년, 그 정
도의 내공으로는 천마장법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진정으로 필요하고 원할 때는 언제나 비켜가던 행
운이 모든 것을 포기한 지금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다. 오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오 사부는 내공이 적어서 천마장법을 시전할 수 없다는 겁니까?
"
사실 내공만큼은 백산도 어쩔 수가 없다. 어떤 기운을 그의 몸 속으로 넣
어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내공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
다.
그래서 조천영에게도 단지 빙(氷)의 기운만 주입했다.
아예 내공이란 것이 없었던 오구에게는 백산이 주입했던 뇌의 기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사부인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내놔요."
백산이 팽무도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뭘 말이냐?"
"석 대인에게 팔았던 호랑이 알!"
바로 마령호 내단(內丹)을 말하는 것이었다.
팽무도가 아까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령호 내단을 내놓는다. 자기가 먹
는 것도 아니고 오구에게 먹인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끝끝내 거절하는 오구를 설득하고 달래서 이곳까지 왔다.
이미 마령호 내단을 복용하고 혈풍뇌전심법(血風雷電心法)을 운용하고 있
는지 그의 몸에서는 붉은 빛의 혈광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모양을 지켜
보고 있던 백산이 그의 뒤로 다가가서는 오구의 명문혈에 자신의 장심을 밀
착시키고 서서히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풍신개에게서 내단을 단시간에 내공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백산의 내공으로 녹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구의 생사현관을 뚫어야 내
단의 약효가 완전하게 흡수된다고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오구의 몸에서 북 터지는 것 같은 미약한 소리가
들리며 몸에서 나온 혈광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하자 지친 모습의 백산이 손
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생사현관까지 뚫렸고 이 갑자 이상 되는 내공도 생겼으니 열심히 한
번 해보세요. 오 사부, 이제부터라도 즐거운 인생을 살아야지요.'
스스로 운기하고 있는 오구를 바라보던 백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밖
으로 나왔다. 천마장법(天魔掌法)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오구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대월산(大越山).
뇌룡현(雷龍縣)에서 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될 산으로 그
렇게 높지는 않지만 울창한 수목들로 인하여 많은 맹수들이 서식하는 곳이
다.
그 대월산 초입에 오십 명의 광풍대(狂風隊)가 두 패로 나뉘어서 모여있었
다.
"내말 잘 들어라. 나와 석두가 내기를 했다. 금액은 형님이 우리 회식비하
라고 준 오십 냥이다. 그런데 말이다. 형님도 우리를 믿지 못하고 석두에게
걸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는 일휘의 눈빛은 마치 네놈들이 못나서 그렇게 되
었다는 표정이었다. 내심으론 광도군이 훨씬 강하다 생각했는데 광검군에다
돈을 건 백산을 보고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이곳 대월산(大越山)과 대습지는 우리들의 훈련장소였다. 무조건 때려잡
아라. 광살조(狂殺組)와 광혈조(狂血組)에게 진다면 그때는 나에게 죽는다.
알았나?"
"넷! 형님."
광마조(狂魔組)와 광견조(狂犬組) 대원들이 두 눈을 번득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사정은 석두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이 우리에게 돈을 걸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일휘와는 달리 조용한 석두의 말에 광살조와 광혈조 대원들은 침묵으로 대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각자 정해진 방향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
막으로 석두와 일휘가 시선을 교환하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산중으로
사라져 갔다.
대월산(大越山) 산중턱의 빈 공터. 일휘 휘하에 있는 광견조(狂犬組)원들
이 빙 둘러서서 그의 조장인 소살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살우.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의 심성은 누구보다도 더 독날하고
잔인한 인물이다. 특히 그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때는 살기가 극에 달해
서 누군가를 죽이려할 때라는 것을 광풍대원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소살우가 지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살기 가득 찬 눈동자로 자신의
조원들을 한 명 한 명 노려보던 소살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말이다, 광풍대(狂風隊) 오십 명 중에 제일 무식하다. 개좆같은
세상에 기어나와 지금껏 글자 한자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무공이란 것을
익혔다. 석두 형님이 읽어주는 것을 외우고 또 외워서 지금 이 정도가 된
우리다. 지금 이곳이 어디냐? 우리가 가장 많이 뒹굴었던 곳이다. 잡아라,
그리고 죽여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소살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견조 십일 명의 온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
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 대월산(大越山)과 대습지는 광풍대(狂
風隊)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장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기 있는 광견조
에게는 대월산과 대습지는 저주받은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휘가 이들을 뽑을 때 조건은 간단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지 못하
는 놈' 한 가지였다. 그리고 개 같은 놈들이라며 광견조란 이름을 지어주었
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견조는 수련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이후 단 한번도
쉬지 못했었다. 그만큼 일휘의 훈련은 지독했다.
자신도 배우지를 못했던 까닭에 한이 많은지 무식한 새끼들이 힘도 없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나갈 것이냐며 혹독하게 몰아치는 일휘의 서슬에 불평
한마디 못하고 다른 대원들보다 두세 배의 훈련량을 견디어 냈다.
그 결과 광풍대(狂風隊) 네 개 조 중 무력 면에 있어서는 이들이 가장 강
하다.
"이곳 지리는 모두 알고 있을 터. 일단은 개별 출발한 후 내일 이 시간에
저기 보이는 정상에서 만난다."
소살우의 말과 함께 광견조 십일 명이 숲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오십 명의 광풍대가 대월산(大越山)으로 스며든 그 시각, 대월산 곳곳에서
는 수많은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투신전이 끝난 만상투인루에서 행운을 거머쥔 자,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
지가 된 자 할 것 없이 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들은 대월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피해자였다.
지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장서일(張瑞一)도 그중 하나였고 그는 전자
, 즉 행운을 거머쥔 자에 속했다. 고향에서 모든 가산을 정리한 뒤 울며불
며 매달리는 처자식을 떼어놓고 이곳으로 왔다.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에서부터 조금씩 돈을 걸었으나 모두 잃었고, 결국
마지막 투신전에서 모험을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운수대통이란 한마디에 자신의 남은 돈 전부를 걸었고, 기적적으로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수중에 있는 이만 냥이라는 거금을
지키기 위해서 동료를 규합하여 모두 여섯 명이 길을 떠났고, 이곳 대월산
까지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저 시커먼 놈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약 세 시진 전에 저놈들을 만났다.
땀도 식힐 겸 쉬었다 가기 위해 나무그늘 아래로 다가가고 있을 때 그곳에
서 네 놈이 튀어나와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러댔다. 일행 한 명이 목이 잘리
며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 그러나 그 후에 목격된 광경은 그들에게 더
이상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목이 잘린 동료의 목과 몸이 따로따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겁에
질린 나머지 다섯 명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눈 돌릴 새도 없이 내달렸
다. 온몸이 땀에 젖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렸다.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본 장서일은 혼자서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과 같이 왔던 동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들 죽었을 것이리라. 문득 급하게 떠나온 길이 후회가 되었다.
돈도 벌었으니까 뇌룡현(雷龍縣)에서 한잔하고 다음날 출발하자던 동료들
에게 이곳의 술값이 얼만데 술을 먹느냐 하면서 바로 출발했던 것이 화근되
었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의 동료들이 전부 있었을 때도 감당하지 못했던 저
괴물들을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더 이상 도망
갈 힘도 없었다.
장서일은 너무나 억울했다. 어떻게 잡은 행운인데…그리곤 부들부들 떨리
는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발악은 해보아야겠지?'
이 상황에서도 체념하지 못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본능인가? 어쩔 수 없
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죽이려고 다가오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동안 운이 너무 좋은 것 같았어! 너무 운이 좋을 때 항상 조심해
야 되는데….'
두 눈을 꼭 감고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야! 비켜! 비켜 이 새끼야!"
하는 외침이 두 곳에서 동시에 들려오고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무엇인
가가 휙 하니 스쳐갔다. 하도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장서일은 아랫도
리가 축축해진 것도 모른 채 자신 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한참동안 넋 놓고
쳐다보았다.
자신을 죽일 듯이 다가오던 네 마리 괴물의 목 언저리에서 붉은 혈광이 번
쩍 하더니 목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신도 저 괴물과 싸워봐서 그것들의 가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있었던
터였다. 철검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를 더욱 경악스럽
게 한 것은 괴물의 목을 잘라버린 인물들의 행동이다. 괴물 쪽으로 다가간
두 사람은 그것들의 귀를 양손으로 잡고는 그대로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곤 얼어있는 장서일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향해서 미소 짓는 인물을 본 장서일은 호의적이고 좋은 사람이란
생각에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찰나, 그 인상 좋아 보
이는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흠칫 굳어져버렸다.
"야! 이 새끼야! 너 땜에 두 놈밖에 못 잡았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앙
?"
소살우와 광혈조(狂血組)의 이사였다.
둘은 서로 다른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이곳을 지나가는 도중에 귀혼마강시(
鬼魂魔彊屍)를 발견하고 동시에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소살우! 계속해서 그러고 있으면 네 것까지 내가 다 가져가 버린다."
"그렇게만 해봐라. 네놈의 목을 잘라버릴 테니까. 안 그래도 몇 마리 못
잡아서 가뜩이나 열 받아 죽겠는데."
두 사람은 자신이 잡은 귀혼마강시의 귀를 각자의 주머니에 담고는 살고
싶으면 이곳에서 며칠 동안 죽치고 있다가 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귀혼마강시를 찾으며 산 정상 쪽을 향해서 올라가던 이사와 소살우는 이곳
대월산에 뇌룡현에서 떠난 사람 말고도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들어와 있다
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사! 이곳이 좀 이상하지 않냐? 어제보다 많은 무림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소살우가 눈알을 번뜩이며 이사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가죽 주머니를 탐
욕스럽게 쳐다보았다.
"꿈도 꾸지 마라, 이 새끼야!"
가죽주머니를 다시 한번 갈무리한 이사가 소살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생각도 그렇다. 뇌룡현(雷龍縣)에 왔던 무리 말고도 새로운 무리가 들
어와 있는 것 같아, 그것도 고수들이. 아마 천선비도(天仙秘圖)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일 거다."
"천선비도? 그게 뭔데 고수들이 들어와 있는 거지? 가만 고수라면. 우리
밥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소살우가 소리를 팩 질렀다.
"우리 밥이 줄다니 무슨 소리야?"
"야, 이 새끼야. 다른 때는 머리 좋다고 지랄하더니 지금은 왜 대갈통이
그렇게 안 돌아 가냐. 잘 들어봐. 지금 이놈의 강시 새끼들이 사람 봐가면
서 덤비냐? 아무나 보고 막 덤비잖아. 그럼 그 천선비도돈가 뭔가를 노리고
온 놈들이 귀혼마강시를 죽이면 우리 밥이 줄어드는 것 아냐. 새끼야."
소살우의 이 같은 말에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생각했냐며 대견스러운 듯
이 바라보던 이사는 '자식 지 몫 챙길 때는 엄청 계산이 빨라요! 그럼 뭐해
! 새끼야 빨리 움직여야지!'하고 속도를 배가시키며 산 위로 사라졌다.
'어디 내 몫을 건들기만 해봐라. 그럼 저놈들 귀도 나에게 상납시키게 하
고 만다! 개자식들 뭐 얻어 처먹을 게 있다고 이곳까지 들어와서 지랄이야
….'
소살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린다. 그러나 웃는 것은 입뿐이었다. 좁아
터진 눈에서는 새파란 살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날까지 대월산 곳곳에서는 광풍대원들의 귀 자르기 행진은 계속되었고
,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살아난 행운을 확인하고 있
었다. 그 사람들 중에 운수대통을 믿었다가 대박을 터트린 장서일도 포함되
어 있었다.
* * *
"그러니까 석두 네 말은 그 천선비도(天仙秘圖)인가 뭔가 하는 지도 나부
랭이 때문에 이곳 대월산(大越山)에 쥐새끼들이 득실대고 있다는 거냐?"
"이 자식아, 천선비도는 나부랭이 따위로 불리는 그런 하찮은 물건이 아냐
."
천선비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일휘의 무지함에 기가 막
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석두는 그가 알고 있는 천선비도에 대한 것을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천선비도(天仙秘圖).
검을 잡은 무인이라면 말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는 기물 중의 기물이다. 단
순한 지도 쪼가리라고 하기에는 천선비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크
기 때문이다.
오백 년 전, 절대 기인인 천검(天劍) 담사월(潭獅月)의 독문무공이며 고금
오천무(古今五天武)의 일좌인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가 묻혀있는 비동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가 천선비도다.
오백 년 전, 천하무림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었다.
혈겁천(血劫天). 바로 저주의 혈수천마(血手天魔)와 그를 따르던 마두들이
모여서 마든 단체. 복종이 아니면 죽음을 내렸던 그들의 혈보는 강호 무림
을 피로 물들여 갔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정도와 마도인 등 강호유수
의 문파들이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혈겁천(血劫天)의 위력 앞에서는 역부
족이었다.
그때 한 자루의 철검을 들고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담사월이었
다. 그의 검세가 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마두의 죽음이 있었고, 무림인의
환호가 있었다.
급기야 모든 무림인들이 그를 무림맹주로 추대하여 무림맹을 결성하게 되
고, 그에게는 천검 즉 하늘의 검이라는 별호가 주어졌다.
무림맹주에 등극한 천검 담사월은 혈수천마(血手天魔)를 태산으로 유인하
여 그곳에서 그를 제거했다. 자신들의 천주를 잃은 혈겁천(血劫天)의 잔당
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림맹에 대항했으나 천검 담사월이 있는 무림
맹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복수는 무서웠다. 혈겁천에 관련된 인물은 갓난아이까지도 무참
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 누구 하나 무림맹을 제지하지 못했다.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복수행은 끝날 줄을 몰랐고, 천검 담사월이 무
림맹주로 있던 이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혈겁천(血劫天)의 발호가 있었던 때보다 무림맹의 통치기간 중에 혈겁천의
잔당이라고 해서 죽어간 사람의 수가 두 배가 많았다고 하니, 그들의 복수
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검 담사월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무림맹의 잔인무도함에 대한 실망감으로 떠났다는 사람도 있었고, 맹의 권
력 다툼 속에서 독살당했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가 떠난 이유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천검 담사월이란 구심점이 사라진 무림맹은 서로 권력 다툼이라는 암투를
십여 년간 겪다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석두야. 그놈! 담사월 말이야. 부자였냐? 돈이 많았냐고?"
무공과 술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던 일휘의 눈동자가 묘한 기
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석두는 일휘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일휘 이놈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 말 한마디 잘못하게 되면 대형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야, 명색이 무림맹의 맹주였던 사람인데 사라질 때 돈이나 보석 같은 것
을 싸들고 가겠어? 쪽팔리게."
"그럼 저곳에서 싸우고 뒈지고 하는 새끼들은 왜들 저리 지랄이야. 돈 되
는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미친놈들 아냐. 저거? 그리고 담사월인지 뭔지 하
는 그 개자식도 그래. 아무것도 없으면서 지도 나부랭이는 왜 남기냐고. 아
무도 모르게 사라졌으면 그냥 조용히 뒈지든지 할 것이지. 하여간 무림인인
가 하는 새끼들의 대갈통은 이해가 안 가요."
일휘의 가치관도 백산을 닮아가고 있는지 정파의 최대 기인이며 정신적인
지주였던 오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천검 담사월이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죽
었다는 이유로 뇌룡현(雷龍縣)의 삼류건달에 의해서 철저히 뭉개지고 개자
식으로 전락해버렸다.
하기야 천하제일인인 철목승을 눈앞에 두고 개 후레자식이라고 했던 일휘
이고 보니 이미 죽어서 없어진 놈이야 말로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늦어?"
일휘가 따분한지 하품을 쩍쩍해대면서 주위를 둘러보다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석두야. 너 이곳 생각 나냐?"
주위를 둘러보던 일휘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석두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 발목까지 빠지는 늪지대로 이루어진 이 대습지에서 유일
하게 바닥이 단단한 지역이었으나 독성이 강한 안개가 하루 종일 흐르고 있
었던 탓에 일반인들은 감히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다.
과거 그들이 독에 대한 저항력과 경공술을 익힌다며 하루에 두 시진 이상
을 훈련했던 장소였다. 물론 광견조(狂犬組)는 이곳에서 아예 살다시피 했
지만….
그리고 이곳에서 훈련이 끝나면 철퍼덕거리는 옷들과 어질머리를 흔들며
대월산(大越山)까지 내력도 운용하지 않고 뛰어가곤 했었다. 그들의 독에
대한 적응 훈련은 이곳 대습지에 사는 독물들을 술안주로 먹을 수 있는 수
준이 되자 끝이 났다.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힘 때문에 더 이상 설움 받고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었다면 지탱하지 못했을 거다."
석두가 먼 옛일을 회상하듯이 안개로 휩싸인 흐릿한 하늘을 멀거니 쳐다보
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 몸이 좀 약한 편에 속한다. 그런 그에
게 이곳 훈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똑똑한 자보다는 힘있는 자가 되라는 말과 함께 자결하셨던 아버지의 얼굴
이 없었다면 자신을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차한 삶보다 명예로운 죽음
을 택하셨던 아버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깟 명예가 뭐라고 그렇게 부질없이 죽어야 했단 말인가. 자신 하나 죽어
버리면 본인은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남아있는 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순간 감정이 격해졌는지 석두의 손아귀에 있던 술병이 파삭 깨져버렸다.
"이 새끼야, 왜 아까운 술을 흘리고 그래. 누가 술은 공짜로 준다든?"
석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한 일휘가 호들갑을 떨며 깨어
진 술병 속에 남은 술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칙칙한 인생에 칙칙한 과거,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
서 되도록 밝은 생각과 즐거운 면을 보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는 일휘였다.
그때 휙! 휙!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냥 나갔던 광풍대원(狂風隊員)들이 모
여들고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옷차림으로 광살조(狂殺組), 광혈조(狂血組), 광마조(狂魔
組)까지 도착했으나 광견조(狂犬組)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뒤를
이어서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결사적으로 쫓아오고 있었
다.
그런데 뒤에서 쫓아오는 무림인들의 얼굴 모양이 괴이했다. 이십 명 정도
의 무림인 모두가 정상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할 귀가 없는 것이었다. 대신
에 귀가 있어야할 자리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며 어깨를 적시고 있었
다.
"이 새끼들아! 우리에게는 천선비도인가 뭔가 하는 것이 없다니까? 그리고
네놈들의 귀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광견조(狂犬組)였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대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오던 소살우가 일
휘를 쳐다보았다. 저기 뒤에 있는 놈들 때문에 늦었다는 소리였고, 저놈들
을 처리해도 상관없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작정 달려오던 소살우와 광견조 전원이 그 자리
에 우뚝 멈추어 섰다.
멈춰 서 있는 광견조의 복장은 엉망이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치르다온 사
람들처럼 검은 옷에는 핏물인지 진흙인지 알 수 없는 얼룩들이 말라 붙어있
었고, 얼굴마저 피로 뒤범벅된 그들의 모습은 지옥의 악귀나찰을 연상시킬
정도로 섬뜩했다.
"이 새끼들 우리를 잘도 쫓아왔겠다. 이곳의 약속시간만 아니었으면 너희
들은 벌써 다 죽었어, 새끼들아. 우리 대장이 조금 늦는 것을 용서해준다고
하셨으니까…야! 이 새끼들 다 보내!"
소살우의 입가에 있던 환한 웃음이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가고 그와는 상반
되게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광견조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여기저기서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자루를 들고 있던 세 사람의 광
견조원을 제외한 전원이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소살우! 반만. 딱 반만 부셔라. 두 다리를 포함해서!"
그때부터 광견조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맨 땅이었다 할지라도 상대가 될 리 없었지만 하물며 이곳은 광견조에게는
안방이나 진배없는 곳이다. 곳곳에 있는 독초 한 포기까지 기억하고 있는
그들은 발이 빠지지 않는 단단한 곳을 찾아서 움직이며 일방적으로 무림인
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은 쫓아온 자신들을 원망하며 차례차례 늪지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에겐 그런 종이 쪼가리 없다고 했잖아, 이 새끼야!"
이미 다리가 부러져 앞으로 넘어지는 무림인 한 명의 면상을 걷어차면서
소살우가 하는 말이었다.
걷어차인 무림인의 입으로부터 부러진 이와 핏물이 소살우의 바짓가랑이로
쏟아지고 있었으나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고래고래 소
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들 다리 확실하게 부러졌는지 확인해!"
이미 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지독한 놈이었다.
소살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광견조원들은 쓰러져있는 무림인들을 한 명씩
뒤집어 이미 부러져있는 다리를 확인한답시고 발로 툭툭 차댔다.
광동삼마(廣東三魔)의 막내인 두악칠(杜岳七), 방금 소살우의 발에 안면이
깨진 녀석의 이름이다.
두악칠은 밀려오는 공포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두 형과 함께 전개하는 삼인 합격진은 웬만한 고수라 해도 쉽사리 감당해
내지 못했기에 그들의 근거지인 광동지역에서는 광동삼마하면 모두가 한 수
접어주는 그런 대접을 받았다.
천선비도의 소문을 듣고 삼형제가 부랴부랴 이곳을 향해 출발했고, 대월산
(大越山)에 도착하자마자 저기 있는 놈들을 만났다.
여러 명의 무림인들이 저들을 공격하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공격
에 가담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미친 개 같은 놈에게 두 형은
다리가 부러지고 귀가 잘린 채 쓰러졌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광동 지방에는 발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귀
가 하나도 없이 창피해서 어떻게 돌아간다 말인가.
복수를 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이들을 쫓아왔다. 그런데 이놈들은 힘이
없어서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없어서, 약속시간에 늦으면 혼
쭐나기 때문에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두악칠이 자신들의 조급함과 어리석음에 탄식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천선
비도다! 잡아라!' 하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두악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광견조(狂犬組)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광풍대원들은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저 빌어먹을 놈의 새끼들은 이미 쓰러져있는 이십
명의 무림인들의 다리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멀쩡한 다리가 발견되면 즉시
부숴버린다.
정말이지 미친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대장. 무림인들이 계속 쫓아와서 처리하느라 좀 늦었습니
다."
소살우가 일휘와 석두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살우! 이 자식, 너무 심한 것 아냐? 확인은 또 뭐냐, 새끼야."
옆에 있던 이사가 질렸다는 듯이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무공하고 팔은 그대로 두었어, 임마!"
활로는 열어주었다는 소리였다. 무공이 있고 두 팔이 있으니 목숨을 부지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거란 말이다.
"어이 소 조장, 저기 뒤 애들이 들고 있는 저 커다란 자루는 뭐냐?"
석두가 광견조가 들고 있는 세 개의 자루를 보며 물었다. 다른 조들은 자
루가 하나씩밖에 없는데 유독 광견조만 자루가 세 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게… 저…."
"야, 늦었어, 가자!"
무슨 말인가 하려는 소살우를 향해서 일휘가 길을 독촉했고, 그들은 뇌룡
현을 향해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광풍(狂風)이었다.
광풍대(狂風隊)의 행로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대월산 곳곳을 휘감고 지나
갔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목이 잘린 귀혼마강시의 시체만이 널려있었
다.
광풍대가 남기고 간 흔적은 귀혼마강시로부터 목숨을 구했던 수많은 강호
인들을 경악케했으나 그들이 어떤 조직인지 어디서 온 단체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다만 광풍대라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부, 소위 강호에서 한가락한다는 무림인들은 삼천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광풍대가 떠난 대습지에는 중독 되어 얼굴이 거무튀튀하게 물들어가고 있
는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살기 위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두 팔만으로 자신들의 몸을 끌면서….
* * *
광풍대의 본거지인 홍루.
연무장이라 할 수 있는 앞마당에는 자신들의 앞에 가죽으로 되어있는 자루
를 하나씩 내려놓고 있는 광풍대원들이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도열해있었다
.
그들을 천천히 바라보던 백산이 약간은 의아한 표정으로 광견조(狂犬組)를
바라보았다. 다른 조원들의 옷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는데 유독 광견조(
狂犬組)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 곳도 있고, 핏자국 같은 얼룩이 온몸에 가
득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고 각각의 조원들에게 자루의 개봉을 명했다.
백산의 말이 떨어지자 광살조(狂殺組)의 조장인 여풍기가 가장 먼저 자신
앞에 있는 자루를 뒤엎었다.
"으악! 엑!"
쏟아져 나온 검은 색의 귀를 보고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여풍기가 자신
앞에 있는 귀를 천천히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백이십팔 개. 예순네 마리 분량입니다."
여풍기의 목소리는 왠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귀혼마강시 삼백 마리가 있다고 했는데 자신들이 잡은 것은 예순 네 마리
분량밖에 안되니 우승은 물 건너간 것이라 봐야했다.
그들이 내려다보이는 단 위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철목승
과 풍신개의 입에서는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좋다! 다음은 광마조(狂魔組)!"
같은 방법으로 광마조의 조장 막사가 귀혼마강시의 귀를 헤아렸고 그들은
일흔 마리, 그리고 이사가 조장으로 있는 광살조(狂殺組)는 일흔 다섯 마리
였다.
이제 남은 조는 가장 무력이 강하다는 광견조,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광견
조가 가장 많은 귀를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의 소살우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자루를 힘없이 뒤집었다.
놀랍게도 광견조가 가져온 귀혼마강시 숫자는 오십 마리 분량밖에 되지 않
았다.
광살조의 조장인 이사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갑자기 소살우가 백산을 향해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뒤쪽에 있던
자루 두 개를 들고 나온다.
"큰 형님! 저기… 이것은 네 개당 한 마리씩 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뭔데?"
아까부터 광견조의 옷차림하며 따로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자루가 궁금했던
백산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형님! 이젠 우리는 다 죽었소! 그냥 버리자니까 가지고 와서는."
광견조원 중의 모사가 소살우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망설이던 소살
우가 무엇을 결심했는지 자신이 들고 있던 자루 두 개의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내었다.
"허-억! 억!"
철목승과 풍신개 등의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이어 소운이 애써 치미
는 욕지기를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귀였다.
한데 지금까지의 검은 색이 아닌 하얀 색의 귀였던 것이다. 그것도 수백
개나 되어 보였다.
"이, 이게 뭐냐? 이 모든 귀의 주인들을 다 죽였어?"
백산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소살우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죽이지는 않고 귀만 좀 빌려 가지고 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귀
혼마강시는 보이지 않고 이상하게 무림인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어서…그
리고 이 자식들이 우리 밥들을 먼저 먹어치운 것도 있을 것 같아서요."
즉 소살우의 말은 이 귀의 주인들이 귀혼마강시를 잡은 것도 있으니 이것
들로 귀혼마강시를 대신해 달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억지스러
운 면이 있었던지 흰 귀 네 개를 검은 귀 두 개로 쳐 달라 한다.
엄청난 머리였고 굉장한 발상이었다. 소살우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백산과
그곳에 있던 일행은 기가 막혔다.
전부 오십 마리 분량밖에 채우지 못한 소살우와 광견조(狂犬組) 일행은 잔
뜩 화가 나있었다. 아무리 뒤져도 더 이상 귀혼마강시를 찾을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때 그들의 눈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던 소살우의 부하 중의 하나가 기가 막힌 생각을 해냈던 것
이다.
"형님! 꿩 대신 닭이라고 저기 있는 저 녀석들의 귀라도 가지고 가죠?"
내심 갈등하고 있던 소살우에게 있어 부하의 그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
려왔다. 어차피 일휘 형님에게 깨질 것, 저것들의 귀라도 가지고 가면 그나
마 매질이 조금은 줄어들 성싶었다.
열두 명의 광견조(狂犬組)는 무림인들을 향해서 돌진했고 모조리 기절시킨
다음 복면을 벗기고 양쪽 귀를 잘라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
로 복면을 씌워주고 소리 없이 떠났다.
나쁜 짓도 처음 시작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두 번째부터는 별 가책도 없이
쉽사리 행해진다고 했던가. 이제는 귀를 얻기 위해서 광견조 스스로가 무림
인들을 찾고 있었다.
이윽고 약 두 시진 후 광견조는 의외의 인물들과 대면했다.
어느 이름 모를 동굴을 수색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투덜거리고
나오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우린 천무맹 소속의 무룡대(武龍隊)다. 너희들은 누구냐?"
오십여 명의 인물 중 청의에 덩치가 가장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인물이
나서며 광견조를 향해서 외쳤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온 자들은 처음이
라 얼결에 소살우가 광풍대(狂風隊) 소속의 광견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무룡대라고 했던 인물들은 미친 개새끼들이라고 놀리며 수상한 놈
들이라고 잡아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는 말할 필요도 없이 무룡대 오십 명은 그 자리에서 기절한 후 자신
들의 두 귀를 도둑맞았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모아온 귀는 백삼십 명 분량이었다.
그 귀속에는 강호에서 이름께나 날리고 있는 무림인인 광동삼마(廣東三魔)
, 하북마웅(河北魔雄), 화옥공자(花玉公子), 검진자(劍進子)까지 들어있다
는 소살우의 이야기를 듣고 무림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풍신개마저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이 그 무룡대라고 하는 놈들의 대장인 무풍검(無風劍) 하우돈(河牛頓
)의 것입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우리를 잡아가려 했던 놈이라 다리까
지 박살내버렸습니다."
핏기 하나도 없는 하얀 귀에다 대고 마치 그것이 하우돈인 것처럼 욕을 하
며 백산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이것들 네 개당 귀혼마강시 하나씩 쳐달라는 거냐, 지금?"
백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귀혼마강시 대신 무림인의 귀를 잘라 가지고 오는 발상은 백산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큰 형님! 저희들도 버린 게 얼마나 많은데…."
백산의 표정에서 불안함을 느꼈는지 다른 조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
다.
"그러면 너희들은 몇 개 정도나 버렸냐?"
"열 마리요. 열 다섯 마리요. 스무 마리요."
두서없이 터져 나오는 광풍대원들의 외침에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풍신개
와 철목승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광풍대(狂風隊)가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상을 초월
했다.
소살우란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의 흑의 복면인 오십 명은 천마맹(天
魔盟)의 천마군(天魔軍)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천마군
은 그렇게 쉽게 당할 전력은 결코 아니다.
아니 강호의 어떤 문파와 견주어도 패하지는 않을 정도의 전력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기절시키고 귀만 잘라왔다 한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심지어 천무맹의 무룡대까지도…결국 무림삼천(武林三天) 중 천마맹과 천
무맹의 주력이 여기 이름도 없는 광풍대에게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앞으로 무림에 귀가 없는 놈들이 넘쳐나겠구나. 응?"
광풍대원들의 어이없는 행동에 백산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귀가 없이 설
치고 다니는 무림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는지 광풍대원 전원이 키들
거렸다.
"시합은 시합이니까. 이사! 가져가."
마침내 광풍대의 상금은 이사의 광혈조(狂血組)가 차지했다.
무림인의 귀 사건으로 긴장했던 일휘와 석두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쉴 때
백산이 대뜸 석두를 불렀다.
"석두야. 천선비도는 챙겨왔냐?"
소문만 무성하게 돌았지 본 적도 없는 천선비도를 당연히 가져왔을 거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거요. 챙겨올까도 생각해 보았는데요. 담사월인가 하는 그 자식이
지 무덤 만들 때 빈손으로 갔다지 뭡니까. 돈이나 보석도 없는데 그 따위
종이 조각 얻어서 어디에 쓰게요. 그래서 그냥 와 버렸습니다. 그렇지 석두
야?"
순간 석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이 대답했더라면 그 딴 것은 들
어보지도 못했다고 잡아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 것을 미처 전후
사정도 파악 못하는 일휘가 잽싸게 나서는 바람에 또다시 사건은 터지고 말
았다.
"일휘야! 너는 그 많은 무림인들이 이 먼 곳까지 무엇 때문에 왔다고 생각
하냐?"
"그야 천선비도가 뭔가 하는 것을 탈취하기 위해서 아니오."
마치 나를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로 생각하느냐는 듯 일휘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 그것이 아주 귀중한 것인가 보구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구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여태껏 백산의 내심을 파악하지 못한 일휘의 대답은 시원시원하니 우렁찼
고 그와는 반대로 석두의 얼굴은 점점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석두의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던 백산이 마지막 질문을 일휘를 향해서 던졌다.
"그럼 말이다. 돈은 아니지만 일휘 너에게 아주 희귀한 물건이 하나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게 되면 그때 너는 그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저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만약에 있다면 그야 돈을
제일 많이 내는 놈한테…."
마침내 일휘가 백산이 하는 말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끝을 흐렸다.
"형님, 애들 몇 명 데리고 가서 그 새끼들 다 죽여버리고 천선비돈가 뭔가
하는 것 찾아올까요?"
"야, 이 병신아. 거기 있는 놈 다 죽이고 비도만 달랑 찾아오면 누구한테
팔아먹냐, 새끼야!"
앉은 자세 그대로 날아간 백산은 일휘를 마구 구타했다. 같은 사정권 내에
있던 석두도 예외 없이 백산의 구타에 의해서 초죽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천영이 나서서야 가까스로 백산의 구타는 끝이 났고 만신창이가 된 일휘
와 석두는 질질 짜면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밤 일휘와 석두는
백산에게 맞을 때면 언제나 나오던 그 자리에 나와 주방에서 훔쳐온 달걀로
얼굴을 문지르며 위로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머지 새끼들은 지금 한창 재미보고 있겠지?"
일휘와 석두를 제외하고 광풍대원 전원이 회식을 하러 나갔던 것이다. 같이
따라가고 싶어도 그 상황에서는 몸이 말을 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퉁퉁 부
은 얼굴로는 창피해서 갈 수도 없었다.
"그러게 왜 먼저 나서냐, 새끼야.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했을 텐
데. 그리고 형님도 형님이다. 이 세상 천지에 어떤 미친놈이 천검 담사월의
무공이 있다는 비도를 팔 생각을 하냐. 이건 완전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라고…."
석두가 백산의 머리 구조가 이상한 것이 틀림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래도 이번엔 형수님 때문에 덜 맞았다. 남자는 역시 장가를 보내야 철
이 든다는 말이 맞나봐. 형수님께 고마워해야 돼, 임마!"
일휘가 키득거리며 하는 말에 석두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석두야!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냐? 맞을 땐 그렇게 못 견디게 아프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온몸이 시원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일휘는 백산의 구타 후에 자신의 몸이 더욱 가벼
워짐을 느꼈다. 그러한 기분은 다음날 아침이면 더 확실해진다. 그 정도로
맞았으면 뒷날은 못 일어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몸이 한결 개운해
지고 힘이 넘쳐났던 것이다.
"어? 너 아직 모르고 있었냐? 사부가 형님 때릴 때 말하던 타혈법(打血法)
말이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이 그 타혈법이다, 이 멍청한 놈아!
너와 나처럼 느지막이 무공을 배운 놈한테는 몸에 좋은 거야."
"그런데 왜 좋은 일 당하면서 우냐, 새끼야! 웃어도 시원찮을 판에."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석두를 바라보는 일휘였다.
"얼굴! 얼굴을 패잖아, 새끼야. 얼굴은 타혈법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단 말
이다. 이 병신아!"
와작!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달걀이 깨지며 석두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이 시팔! 오늘은 어째 되는 것이 하나도 없냐?"
줄줄 흘러내리는 달걀을 핥아먹던 석두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석두의 타혈법이란 말에 얼굴이 망가지든 말든 기분이 좋아진 일휘는 어떻
게 하면 백산의 화를 돋우어 계속해서 맞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가 미친놈
새끼 지랄한다며 석두에게 정말로 개 박살이 났다.
불쌍한 인생들, 한 놈은 백산을 원망하고 또 한 놈은 석두를 원망하며 홍
루의 밤은 깊어갔다.
* * *
"아무리 타혈법(打血法)을 시전해준다지만 동생들을 그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조천영도 고수인지라 일휘와 석두를 구타하는 백산의 행동이 타혈법을 시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을 좀더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만 다른 동생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급적 피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지 딴소리만 하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그만 두어야 하겠어. 그 녀석들 몸에서 제법 반탄력이 느
껴지고 있단 말이야."
이제는 백산도 반탄력이란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정권이 닿
는 곳에서 약간씩 밀어내는 힘을 느꼈던 것이다. 석두와 일휘의 경지가 외
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해
서 타혈법을 그만하려 하고 있는데 일휘는 더 맞을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
다.
앞으로 맞게 되면 자신의 몸에는 효과가 없고 아프기만 할 텐데… 이래저
래 머리 나쁜 놈 몸만 고생한다는 말이 증명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백랑."
"백랑? 언제부터 언니가 오라버니를 보고 백랑이라 부르게 됐죠?"
옆에서 졸고 있는 것 같던 소운이 어느새 조천영의 말을 들었는지 재빨리
끼어들었다. 순간 얼굴이 붉어진 백산과 조천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소
운을 쳐다보았다. 소운이 옆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당연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그건…왜 저번에 갔던 뇌산의 우리 집 있잖냐? 그곳에 있던 개미들이 이
사 가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풍신개 영감은 뭐하고 있
냐?"
"할아버지? 지금 철 숙부와 뭔가 상의하고 있는 것 같던데…?"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풍신개의 근황을 묻는 백산의 말에 무의식
적으로 대꾸를 하던 소운이 뭔가 허전한 듯 갸우뚱하더니 별안간 소리를 내
질렀다.
"그러니까 그때 이틀 동안 안 내려오더니 오라버니가 사고를 쳤다 이거죠?
순진한 언니를 꼬드겨서."
그때부터 백산은 소운의 맹렬한 꼬집힘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다녀야 했다.
이내 토라진 소운이 먼저 잔다며 나가버리자 미적미적 뒤따르려는 조천영
의 팔목을 백산이 잡아끌었다.
"누님, 이제 소운이에게도 들켰는데 그냥 이곳에서 자요!"
"그래도…."
못이긴 척 조천영이 백산을 따라서 침대로 들어온다.
백산은 급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지 모른다고 산에서 내려온 이
후로는 이것저것 눈치가 보여서 단 한번도 합방을 하지 못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의 나이가 아닌가. 한참 혈기왕성할 나이이고, 이틀 동
안을 해대도 얼굴만 약간 삭을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아침이면 불쑥
솟아오른 거시기를 붙잡고 진땀깨나 흘렸던 것도 사실이다.
자연 백산의 손놀림이 급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사이 두 사람은 알몸이 되
어 서로 눈길을 교환하고 있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거칠어진
호흡에는 본능적인 욕망만이 있었다.
우선 밤일의 시작은 가벼운 입맞춤부터 시작한다. 천천히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이 격정적인 몸놀림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두 개의 혀가 똬리를 틀
고 서로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입안을 헤집는다. 잠시 한숨을 몰아쉰
백산의 혀가 이번에는 조천영의 온몸을 유영하고 달빛을 받은 새하얀 동체
가 갓 잡아올린 은어처럼 파닥이며 자지러진 비명을 질러댄다.
타는 듯한 목마름.
힘든 일이 아닌데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증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물
을 마신다고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갈증이 아니다.
탐닉.
타는 듯한 갈증을 풀기 위해서 더욱더 깊숙이 엉겨붙는 두 나신, 산을 지
나서 계곡을 찾는 탐닉의 행위는 그칠 줄 모르고 서로를 찾는 그들의 탐험
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내의 목울대가 꿈틀대고 은어의 격렬한 움직임이 뒤를 따른다. 이내 갈
증이 해갈되었는지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으나 아직은 뭔가 불만인 표
정이다.
진입.
두 사람의 동체가 결렬하게 얽히며 은어와 사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
리가 흘러나온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영혼이 하나가 되어 천상의 화음을 만
들어낸다.
"에헤라 디야! 에헤라 디야!"
그날 밤 홍루 전역에 울려 퍼진 조천영과 백산의 신음과 비음소리에 오십
명의 광풍대원들은 처음엔 누가 쳐들어왔는지 착각하고 검과 도를 빼들고
나왔다가 잠시 후엔 자신들의 아랫도리만 붙잡고 사라져갔다.
백산의 방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 속에 나직한 한숨소리가 흘러나오
는 곳이 있으니 바로 풍신개와 철목승이 있는 곳이었다.
"형님! 그 친구에게도 비밀로 할 작정입니까?"
"그래야겠지. 알아봐야 좋은 일도 없으니…."
"그렇지만…."
"자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네. 하지만 말이야,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어.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몰라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알았네. 더 이상은 참고 있지 않을 걸세."
"……."
"알겠습니다, 형님!"
풍신개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철목승의
한숨소리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문제없을 걸세. 녀석은 강하니까. 그나저나 저 녀석들 밤일도 요란하게도
하네…."
젊었을 때가 생각났는지 풍신개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백산의 방에서는 더욱더 격렬해진 신음소리가 홍루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
었다.
뒷날 아침 백산의 방밑에 있는 개미들이 또다시 이삿짐을 싸는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고 식사 도중 팽무도가 꺼낸 한마디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
른 조천영을 황망히 도망치게 해버리고 말았다.
"백산아, 앞으로 너희 둘이 잘 때는 미리 말을 해라. 내공으로 귀를 막고
자던지 할 테니까…."
모두가 간밤에 한숨도 못 잤는지 벌건 토끼 눈을 하고 있던 광풍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팽무도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들이었다.
이럴 때면 언제나 입바른 소리를 해서 매를 벌었던 일휘가 가만히 있는데
이번에는 소살우가 백산을 향해서 큰절을 올리며 입을 연다.
"큰 형님! 정말 존경합니다. 비결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밤새도록
할 수 있는 비결을. 그것이 안 되면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좀…."
소살우의 어이없는 행동에 식당 안은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광풍대원 중에서 유일한 숫총각이 바로 소살우였기 때문이다.
써먹을 일도 없는 놈이 밤새도록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으니 요절복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밤새도록 하는 방법 알아서 뭐하려고? 알아봐야 손바닥에
굳은살만 더 단단해지지…."
자신이 묻고 싶었던 걸 먼저 선수 친 소살우가 미웠던지 이상한 소리를 해
대며 구타하고 있다.
"시펄! 내가 언제까지 오순이 신세만 질줄 아쇼?"
일휘의 주먹세례를 받으면서도 소살우의 입도 쉬질 않고 있었다.
"그만!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모았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다 못한 백산이 고함을 질러 실내를 진정시키고 광풍
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북경으로 가는 것만 남았다. 일부는 내일 나와 같이 출발할
것이고 나머지는 몇 달 후에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북경행을 막고 있
는 놈이 하나있다."
이번에는 일휘였다.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휘가 벌떡 일어나며
씩씩하게 외치며 사방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어떤 새낍니까? 형님! 제가 완전히 죽여버리겠습니다."
"바로 네놈이야, 새끼야!"
백산이 소리를 지르며 앞에 있던 밥그릇을 일휘의 면상을 향해 던졌다. 그
것마저도 타혈법으로 생각한 일휘는 얼굴은 절대 아니라는 석두의 말을 기
억해내고는 그 자리에서 펄쩍뛰며 얼굴 대신 몸으로 막았다. 그리곤 한 마
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형님!"
"완전히 맛이 갔어. 아니야, 돌았어."
매를 맞고 좋아하는 일휘를 보고 소살우가 이죽거리자 광풍대원들도 옳은
말이라며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일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알고 있는 백산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내뿜고 있는 살기다. 앞으로 육칠 개월의 여유를
주겠다. 그동안 그 살기를 죽여라. 몸에서 조금이라도 살기를 풍기는 놈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다. 알았나?"
"넷!"
"방법은 너희들이 사부라 부르는 영감께 물어라."
"석두와 광견조(狂犬組)는 오늘밤 송별식 해라. 내일 나랑 같이 간다, 이
상!"
* * *
다음날, 온몸에 피멍이 들고 얼굴이 퉁퉁 부은 석두와 광견조는 달걀로 얼
굴을 문지르며 출발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갈 테냐?"
팽무도가 백산을 향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연히 맺어진 인연으로 이 녀석이 자신의 제자가 되었고 기대 이상으로
커버린 놈, 비록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제자 놈 하나만큼은 세상의 누구보다
잘 키웠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세상을 위해서 사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남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보다는 가족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이 더욱 맘에 들었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조차도 돌보지 못한 자들
이 세상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냥 평범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런 제자가 이제 자신의 인생과 꿈을 찾아서 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새삼 감개무량해지는 팽무도였다.
"네, 사부님! 중원 일이 정리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보중하
십시오."
"아니다, 조만간 내가 찾아가마."
"아닙니다. 사부님처럼 연로하신 분께는 너무나 먼 길입니다. 제가 찾아오
겠습니다."
백산과 팽무도의 신경전이 또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사부의 중원행을 결사
적으로 막는 백산과 중원으로 가겠다는 팽무도.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사
부가 중원에 오면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에 묶어두려 하고 있는 것
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먼저 폭발한 사람은 팽무도였다.
"야! 이놈아 내가 간다면 가는 거지! 네가 뭔데 자꾸 막아, 이 새끼야. 아
예 이곳에서 그냥 죽으라고 해라. 이 못된 놈아!"
퍼억! 퍽!
팽무도의 주먹이 백산의 안면에 작렬했다.
"사부님 편할 대로 하십시오."
결국은 얼굴 가득 멍이 든 백산이 항복을 했고, 일행은 북경을 향한 여로
에 올랐다.
"살우! 나도 달걀!"
열심히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소살우에게 달걀을 받아든 백산이 입으로는
연신 시펄거리면서 혹여 멍이 커질까봐 조천영에게 멍든 위치를 물어가며
꼼꼼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이를 쳐다본 소살우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 * *
멀리 뇌룡현(雷龍縣)이 내려다보이는 대월산(大越山)의 정상,
거의 이십여 명에 달한 인물들이 뇌룡현 쪽을 쳐다보며 감회에 젖어있다.
홍루를 떠난 백산과 광견조, 그리고 이번 중원행에 일행으로 합류한 석숭과
철목승이었다.
"저곳이 우리가 자라왔던 뇌룡현이다. 가슴에 잘 간직해 두거라. 우리 모
두는 이곳에다 지금까지의 불행과 서러움은 모두 두고 간다. 단 한 가지 원
한(怨恨)만을 가지고 간다. 그 하나만 빼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다 잊어
라."
백산의 말에 모든 광견조(狂犬組)원과 석두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인생 실패자들의 종착지(終着地)인 뇌룡현. 그 실패자들의 자손이었던 이
들. 서로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고
멸시받았던 녀석들이 광견조원들이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름 석자조차도 없는 이들이 무공의 고수
가 되었고, 드디어는 이 섧디설운 땅덩어리를 떠나려고 하고 있다.
"우…!"
백산의 입에서 커다란 장소성이 터져 나온다.
"우…! 우! 우…!"
이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광견조(狂犬組)들의 장소가 대월산 곳곳
에 메아리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한번의 외침으로 살아온 세월의 한이 씻길 리야 없겠지만 그들의 외침
은 마치 그동안의 설움과 불행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끊이질 않았다.
백산 일행은 그들의 마차가 있는 곳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
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이곳저곳에 인사를 하느라 늦어진 이유도 있었고,
백산이 무엇을 사러간다며 암시장을 다녀온 것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
이라 감회도 있고 해서 천천히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모두 야영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불을 쬐고 있는 백산을 향해
소살우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는 다가왔다.
"큰 형님! 오늘 애들에게 귀 막고 자라고 할까요?"
철목승과 냉추렴의 입에서 마시던 찻물이 밖으로 쏟아지고 웃음이 터져 나
왔다. 같이 가게 된 석숭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했고, 조천영
의 얼굴은 붉은 빛에 더욱더 발개졌다.
퍼억! 퍽! 퍼벅!
"이 새끼야! 일휘가 없으니까 이제 네가 사람 속을 긁어대냐?"
순식간에 쏟아진 백산의 연타에 떡이 된 소살우는 맞아서 벌게진 얼굴을
하고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 큰 형님!'을 외치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소살우의 행동에 웃음을 짓던 석두가 백산의 얼굴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
고는 양손을 휘저으며 잽싸게 변명을 해댄다.
"그게 아닙니다, 형님! 때리지 말고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일휘와 나누었던 타혈법(打血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니까 일휘 녀석이 웃음탱이에게 나의 화를 돋워서 쥐어터지라 했다
이거지? 맞는 것이 몸에 좋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형님!"
"금방 백랑이 때릴 때도 정확하게 혈도만 가격하여 진력을 불어넣었어요."
조천영이 백산을 볼 때마다 놀라는 점이다. 혈도의 명칭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람이 동생들에게 타혈법을 할 때 보면 정확하다. 잘못하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곳임에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
언젠가 한번 백산에게 그 비결을 물었을 때 빙긋 웃으며 삼 일에 한번 정
도를 맞게 되면 저절로 터득된다고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혈도의 위치는
몸으로 배웠다는 소리다.
"그럼 나도 모르게 타혈법을 시전해버렸다는 소리네? 석두랑 일휘 자식들
때릴 때마다 타혈법을 하다보니 그게 완전히 손에 익어버렸나 보구먼?"
백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에고! 어쩔 수 없지 뭐. 다 내 새끼들인데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진다면
내 한 몸 희생해서 열심히 패야지 뭐! 이러다 변태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
모두들 잠이 들었는지 광견조 일행의 고른 숨소리와 조용한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대월산 정상.
낮에 일행과 같이 왔던 이곳에 백산 혼자 올라 조용히 어둠에 잠겨있는 뇌
룡현(雷龍縣)과 뇌산(雷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이후 처음으로 정착한 곳, 아버지와 살았던 곳이고 아버지
를 잃었던 곳. 아마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끝난다 해도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 이젠 칠성리 어머니께로 돌아가십시오.'
홀로 남은 자식이 걱정되어서 이곳 하늘을 헤맸을 것 같았다. 다가오는 운
명에 거역할 힘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야 했던 아버지. 자식이라는 짐이 없
었다면 더 빨리 편안한 세상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분이셨다. 자식 앞에서만은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떠오른다.
백산의 몸에서 열두 개의 천비가 조용히 뽑혀져 나왔다.
백산의 몸이 각천비를 다리 삼아서 천천히 떠오르고 그의 주위에서 서서히
미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보십시오! 이곳 뇌룡현에서 추는 마지막 춤입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백산의 춤사위는 시작되었다.
오행마비(五行魔匕)라 불렸던 각천비에서 오색의 서기가 흐르고, 손에 있
는 수천비(手天匕)에서는 붉은 혈광이 흘러나오며 밤하늘을 물들여 간다.
내리 뻗고 다시 품는 그의 비도들의 현란한 춤사위는 끝날 줄을 모르고,
주위의 모든 경관이 변해가고 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산의 춤사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한 밤중에
시작한 그의 춤사위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산 정상에서 들려오는 광음
과 하늘을 물들이는 오색서기와 붉은 혈광에 모든 일행이 넋을 잃고 쳐다보
고 있었다.
그 누구 하나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이 걱정되어서 올라가 보
려는 일행을 철목승이 만류하고 나섰다.
"저 녀석의 한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혼자 저렇게 두는 것이 낫다
. 자신도 이곳에 무엇인가 남기고 싶겠지. 그것이 한이던지, 미련이던지….
"
동쪽으로부터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면서 백산의
춤사위도 점점 격해지고 있는지 산 중턱에 있는 그들에게까지 거대한 역도
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엄청난 바람소리와 함께 온통 붉은 혈광으로 뒤덮인 백산
의 몸으로부터 분출되는 광폭한 기세를. 십 장 높이까지 올라간 백산의 몸
이 바람을 따라 자연스럽게 회전하며 핏빛 강기를 사방으로 쏟아내기 시작
한 것이다.
"혈극 참ㆍ폭ㆍ망!"
모든 것을 토해내려는 듯 백산의 외침은 강렬했지만 아래쪽에 있던 일행들
에게는 왠지 서럽게 들리는 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든 혈광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백산의 몸이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사
랑하는 사람의 아픔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위로만 받았다
는 생각에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러워 눈물만 흘리고 있던 조천영이 대월산(
大越山) 정상을 향해서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음 가루로 부서지고 겨울이라고는 없
는 이곳에 때 아닌 눈가루가 사방 천지에 날리고 있었다. 백산이 있는 곳에
도착한 조천영은 허공에서 내려오는 백산을 가슴에 품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는지 두 눈 가득 눈물을 쏟아내며 조천영이 미안
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됐어! 다 됐어. 속이 다 후련해진 것 같아. 자 내려갑시다, 천영 누
님!"
조천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며 아래로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조천영의 뒤를 따라왔던 구소운은 새롭게 만들어진 평지에 깜짝 놀랐으나
이내 표정을 지우며 재빨리 백산의 팔짱을 끼며 두 사람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백산이 조천영과 구소운을 양 옆에다 끼고 천천히 내려오자 그 모습을 바
라보던 철목승이 웃으면서 백산을 향해서 이죽거렸다.
"자네는 재주도 좋구먼! 누구는 이 나이 되도록 장가 한번 못 가보았는데
벌써 두 사람씩이나 있으니 말일세."
"순 색마라니까요!"
옆에 있던 냉추렴도 철목승을 거들고 있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조천영과 구
소운을 부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긴 제가 한 인물 하지요. 거기에다 밤일은 누구도 못 따라올 정도로 절
륜하지, 그러니 여자들이 좋아 할 밖에요."
순간 백산의 양 옆구리에서 맹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조천영과 구소운이
동시에 백산의 옆구리를 꼬집고는 휙 하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좋았는데….'
자신의 양팔을 통해 느껴지던 팽팽한 육봉의 느낌이 사라지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은 백산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직도 피워진 불 옆으로 다가가
누군가 마시다만 찻잔을 들어 홀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