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또 다른 사부
새해의 아침이 밝아왔다.
지난밤까지 멀쩡하던 날씨가 아침이 되면서 부슬부슬 비가 뿌리기 시작했
다. 이곳저곳 피어있던 야생화들이 아침부터 내리는 빗방울에 즐거운 듯이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다.
헉! 헉! 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력으로 달려가는 두 인영이 있었다. 한 사람은 비에
씻겨지기는 했으나 온몸에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었고, 또 한 인물은 불이
라도 끄다가 왔는지 여기저기 물집이 생겨서 부풀어있는 얼굴에 입고 있는
옷에는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들 두 사람의 왼쪽 다리에는 화살이 한 대씩 박혀있었다.
"종천수, 이곳에서 잠시만 쉬었다 가자!"
두 사람은 서둘러 주위를 확인하며 무엇인가를 피하려는 듯 바위로 가려진
틈바구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과 냉면살마(冷面殺魔) 종천수였다. 연동립이 종천
수를 만난 곳은 뜻밖에도 만상투인루의 정문 쪽이었다. 만상투인루가 폭발
하여 무너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종천수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백산을 부르며 뛰어나오는 연동립을 발견했다.
종천수로부터 살인대의 몰살을 전해들은 연동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
고 무심코 쳐내려했으나 그 화살은 엄청난 힘으로 손을 밀쳐내며 그대로 두
사람의 다리에 박혀버렸다.
화살의 위력에 놀랄 겨를도 없이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었고, 다리 쪽에
박혀있는 화살을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그때부터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상대
는 집요했다. 그들이 몸을 세우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화살은 날아들었고,
상대방이 자신들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 유인하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벌써 세 시진, 종천수와 연동립의 입에서 단내가 풍겨나왔다.
석두의 검에 당하고, 화약에 당한 두 사람은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음
을 느꼈다.
"네놈은 누구냐. 백산이란 놈이냐?"
연동립이 참지를 못하고 상대방을 향해서 외쳤다.
쉬익…!
퍽!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언제나 화살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두 사람은
퉁기듯이 일어나 정신없이 내달렸다. 세 시진 동안 매번 이런 식이었다.
차라리 상대와 마주보고 싸움이라도 하다가 죽으면 좋으련만 상대는 지금
껏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들을 사냥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동립과 같이 계속해서 달리던 종천수는 자신이 가고 있는 이곳이 상당히
눈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전에 한번 와보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
릿속에 맴돌았던 것이다.
갑작스레 한줄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추랑객(追狼客)!"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달리던 종천수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제서야 생각이 났나? 언제쯤 생각해내나 했지!"
활의 시위에 화살 두 대를 먹인 상태로 백산이 나타났다.
"바로 이곳이었을 거야, 연동립! 네놈의 지시로 종천수 저놈이 우리 아버
지를 해친 장소가."
두 사람을 노려보는 백산의 눈에 서서히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자, 이제부터 묻겠다. 우리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한 단체는?"
두 사람을 향해서 활을 겨냥한 백산이 나직이 을렀다.
"차라리 무인답게 겨루다 죽게 해다오. 이러고도 네놈이 무인이라 할 수
있느냐?"
연동립의 울분에 겨운 소리와 함께 백산의 화살이 날았다.
퍽! 퍽!
"으윽! 윽!"
두 대의 화살이 정확하게 연동립과 종천수의 무릎에 박히자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뇌산을 울렸다.
"나는 무인이 아니야. 사냥꾼이며 건달일 뿐이야."
백산은 투명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또다시 화살을 재고 있었다. 이번
에는 네 대였다.
"우리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한 단체는?"
"웃기지 마라! 이런다고 나에게서 무엇인가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헛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잔소리하지 말고 죽여라!"
귀조수 연동립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어리며 백산을 향해서 바락바락 소
리를 질렀다.
퍽! 퍽! 퍽! 퍽!
네 대의 화살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고통스런 비명을 질
렀다.
이번에는 양쪽 팔꿈치 부분이었다.
인체의 가장 약한 부분이면서 극심한 고통을 선사하는 자리인 관절, 그곳
만을 백산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오른쪽 발목과 손목, 그리고 어깨다! 말을 하고 안 하고는 네놈
의 자유다.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화살은 아직도 삼십
개나 남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리고는 다시 화살을 재는 백산이었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했다. 자신의 내공을 오 할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얼마든지 이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놈이 던진 벽력탄이 터질 때, 그때의 충격으로 자신의 내공 대부분
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이용해먹은 사부도 이길 수 있다 생각했었다.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흩날려버렸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빗줄기를
떨구고 있다. 자신이 사부로부터 이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달 받을 때도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결국 귀조수 연동립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게 편안한 것을 왜 그렇게 매달리며 안달했던가!"
모든 것을 포기하자 아쉬움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좋다,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겠다. 대신 그 화살로 바로 죽여줄 수 있나?
약속해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죽고자 하는 결심이 섰는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귀조수의 얼굴이 담담해졌
다.
"좋다, 약속한다."
귀조수 연동립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신이 삼십 년 동안 가슴에만 품
고 있었던 회한을….
"종천수, 미안하다. 이렇게 끝나게 되어서…."
결국은 그도 피해자였다. 비록 만상투인루의 루주라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일하는 하수인이었고, 그 나름대로의 한을
가졌고,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혈랑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다만 죽이라는 명령만 내려왔을 뿐."
"네놈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내 아버지를 해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백산이 멀어져간 자리에는 이마에 두 대씩의 화살이 박혀있는 두 구의 시
체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 *
백산의 본거지인 뇌룡현의 홍루.
"야! 석두. 형님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네 좋은 머리로 생각 좀 해봐
라, 앙?"
벌써 이틀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는 백산을 찾기 위해 구두파의 모든 조직
원들에게 비상이 내려졌으나 어디로 갔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 중에서
도 가장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운
이었다.
팽무도와 같이 생활하다가 최근에 백산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는데 정
작 당사자가 보이지 않자 구두파의 조직원들을 향해서 백산을 찾아내라고
이틀 내내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천영은 전낭을 마치 백산인 양 꼭 껴안고 굳어진 표정
으로 상황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참에 팽무도가 홍루로 들어섰고, 그를 향
해서 가장 먼저 뛰어간 사람은 뜻밖에도 지금껏 조용히 있던 조천영이었다.
"할아버님, 말씀 좀 묻겠습니다."
팽무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천영의 신형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조천
영이 사라지면서 사용한 경공을 보며 깜짝 놀란 일휘가,
"석두야, 형수님의 무공이 저렇게 고강했었냐?"
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석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야, 이 자식아. 지금 형수님의 무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야. 이 새끼야!"
석두가 일휘에게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라며 면박을 주고나서는 팽무도를
향해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올 테니 걱정 말거라. 소운아, 우리 들어가자!"
그 시각, 밖으로 나온 조천영은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 내
공을 동원하여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기다란 선이 이어진 듯한 것처
럼 보일 뿐 눈으로는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뇌산(雷山)의 중턱에 있는 나무로 얼기설기 지
어진 조그마한 오두막이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작고 척박해 보이는
오두막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야,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까 잘 안 되네?"
투덜거리며 아궁이를 향해서 열심히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백산의 모습이
보였다. 조천영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자신도 집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
도 오래되어서 기억도 나질 않지만 적어도 이런 곳에서 살지는 않았다.
인간의 집이라기보다는 짐승을 키우려고 지어놓은, 바람만 불어도 사라질
것 같은 조그마한 집이었다. 님이 이런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
하니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저 것은 많이
해본 솜씨다. 결국은 자신이 직접 밥을 해먹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말이 된다.
눈물을 머금은 조천영이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었고, 화들짝 놀란 백산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어? 누님, 마침 잘 왔네! 혼자 밥 먹기가 좀 적적할 것 같았는데."
백산의 말에도 조천영은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울어요. 무사히 일도 끝났는데."
산나물 몇 가지만 올라있는 초라한 식탁이었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두 사람
에게는 여느 진수성찬 부럽지 않았다.
서서히 백산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돌아가신 이야기, 아버지와의 꿈 이야기 등등. 즐거웠던 일, 슬
펐던 일, 백산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누님! 이번 일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야.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힘들
지도 모르고. 적은 무림의 거대 세력이야. 누구도 감히 건들 수가 없는…지
금 당장은 그들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것은 없어. 그러나 자신들
의 목적을 위해서 힘없는 자를 이용한 놈들은 용서할 수가 없어. 반드시 대
가를 치르게 할 거야!"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백산의 몸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분노의
격정에 몸부림치고 있는 백산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려는 듯 조천영이 품으
로 파고들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앞으로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무슨 일
이 있어도…."
조천영이 살며시 속삭였다.
백산은 자신의 눈을 들어 조용히 조천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미
소를 지으며 입술을 포개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서로 옷들을 헤쳐나갔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 난 처음인데."
조천영의 풍만한 가슴을 쳐다보던 백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쓱하게 고
백했다.
"이럴 때는 아무소리 하지 않은 거예요. 순진한 총각님! 나에게 다 맡겨요
, 동생. 자! 이렇게, 이렇게…."
좋은 밤, 황홀한 밤, 어떤 놈 쌍 코피 터지는 밤은 그렇게 조용히 깊어만
갔고, 백산에게는 또 다른(?) 사부가 생기는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먼저 잠이 깬 백산은 이제는 자신의 소유물이 된 조천영의
풍만한 가슴을 이리저리 비틀어보고, 쥐어흔들며 혼자서 장난을 치고 있었
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야릇한 손길에 눈을 뜬 조천영이 고운 눈을 흘기며
백산의 손을 가볍게 밀쳐냈다.
"어젯밤에 그렇게 괴롭히고도 아직도 부족해요? 아침까지 한숨도 못 자게
했잖아요?"
"누님,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거 꼭 밤에만 해야 되는 거야?"
백산이 눈을 빛내며 조천영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건 으음! 아…! 아…!"
조천영의 더듬거리는 말에 다시금 백산의 몸놀림이 대담해졌다.
"어젯밤에 누님이 가르쳐 준 것 다 잊어먹었어. 다시 공부해야 될 것 같아
."
백산의 말에 조천영이 질린다는 얼굴로 고함을 팩 질렀다.
"그 많은 것을 전부 다시 하자고? 안돼요! 한번만! 한번만 하고 내려가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욧."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싫지는 않은지 백산의 몸에 찰싹 엉겨붙었다.
"알았다고요! 엄청 길게 하면 되지 뭐!"
백산의 음흉한 미소는 계속되었고 오두막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야! 빨리 짐 싸. 알았어, 다 되어간다고."
백산의 오두막집 마루 아래에 살고 있던 개미들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평
생을 살아온 이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도대체가 온 집안이 흔들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웬 소리는 그렇
게 질러대는데? 애들 교육상 문제도 생길 것 같고…봐 또다시 집이 흔들리
잖아! 아직 멀었어?"
잠시 후, 백산의 집 앞마당은 집의 진동과 소음을 피해서 이사를 가는 개
미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다시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 버린 다음날 아침, 푸석해진 얼굴의 백산과
뽀송뽀송하니 빛나는 얼굴의 조천영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생, 빨리 가. 모두들 기다리느라 목이 빠졌을 거야. 나 욕먹으면 어떡
해."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했는데 무려 이틀 밤낮 동안을 쉬지 않고
장성을 쌓았으니… 이제 조천영의 어투에서도 제법 애교가 묻어났다.
흐느적거리는 백산과 조천영이 뇌산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백산과 조천영을 기다리고 있었고,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소운과 몇몇 일행을 팽무도가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앗! 저기 온다! 저기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백산과 조천영에게 쏠렸고 이어서 터지는 소운의 말
.
"아니, 오라버니 얼굴이 왜 이리 반쪽이 되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혹
시 언니와 싸웠어요?"
온갖 말을 꺼내며 백산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응! 그게 말이다. 내가 좀 힘들어서 말이다."
소운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으응' 하다가 얼굴이 반쪽으로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백산이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럼, 그 귀조수란 놈과 종천수란 놈이 그렇게 강했어요? 오라버니가 이
렇게 될 정도로?"
"오잉? 그, 그래 맞다, 맞아!"
무슨 말을 해야할까 대답이 궁했던 백산에게 변명거리까지 만들어준 소운
은 연신 괜찮으냐고 물어대며 백산의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그 옆에서 조천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백산아!"
팽무도가 백산을 의미심장하게 부르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는 이 녀석들이 전부 올라가겠다는 것을 이 사부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이렇게 막고 있지 않았겠냐? 그러니 수고비는 좀 주어야겠다. 듣
자하니 저것이 다 돈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팽무도가 씩 웃으며 조천영과 백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알았다고요!"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백산이 그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지 순순히 전낭
에서 전표 몇 장을 꺼내 팽무도에게 건네자 그것을 확인한 팽무도가 인상을
쓰며 다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백산의 인상이 확 구겨지며 다시 전낭 속으로 손을 집어넣을 때 옆에 있던
조천영이 웃으면서 팽무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할아버님, 백랑께서 이 돈은 팽가(彭家)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재건 때
쓰일 돈이라고 했는데요?"
조천영의 말을 들은 팽무도는 자신의 손에 있던 전표 다발을 다시 전낭 속
으로 밀어넣었다.
"그 약속 잊으면 안 된다, 아가야! 인석아, 네놈은 장가는 한번 잘 갔다."
팽무도가 기분이 좋은지 갑자기 밝아진 목소리로 백산의 어깨를 툭툭 쳐대
자 난데없이 끼어든 소운이 두 눈을 치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가? 누가 장가갔어요?"
소운의 말에 당황한 백산이 재빨리 끼어들며 소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
리기 시작했다.
"소운아, 너, 나와 그 녀석들이 싸운 것 듣고 싶지?"
"…?"
"그때 그 연동립 녀석과 종천수가 합공을 하는데 말이다…."
"…!"
"그땐 정말 너의 얼굴도 못보고 죽는지 알았다니까…."
"어머! 저런!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그 녀석의 거시기를 사정없이…."
"어머! 그런 짓을…."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지어내며 백산과 그 일행은 뇌룡현으로 향하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