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최종 투신전
세모(歲暮).
한해의 마지막 날. 송년이다 망년이다 하여 기억할 일도 잊어버려야 할 일
도 많은 날이지만 이곳은 그러한 인간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 후끈한
열기로만 가득 차있다.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자신의 마지막 꿈을 가지고 이곳으로 모인 많은 사람들. 부자가 된 사람도
, 거지가 된 사람도 만상투인루의 마지막 축제인 최종 투신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약간의 술과 음식이 제공되었으며, 죽고 죽이는 비무와는
상관없이 관중들에게는 흥겨운 날임에 틀림없었다.
비무장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밀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과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 그리고 냉면살마(冷面
殺魔) 종천수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의 거구가 무
엇인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우부전노(愚夫錢奴) 만여해가 백산이란 놈에게 금 사억 냥을 걸었단 말이
냐?"
"넷! 통령 각하!"
총관인 서귀(鼠鬼) 주유태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며 한시진 전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투신전(鬪神戰) 최종비무에 돈을 거는 곳인가?"
안을 볼 수 있도록 사방이 투명하게 처리되어 있는 실내의 측면 벽에는 백
산과 광천마승 요불의 주요 전적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가장 위쪽으로는 붉
은 글씨로 그들의 배당률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그곳에 패물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금포에 개기름이 번들번들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헉! 우부전노 만여해?"
서귀 주유태는 직감적으로 '이건 봉이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우부전노 만여해.
중원 삼대 거부의 일인으로 다른 거부들과는 달리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 인간, 수중에 가진 돈을 다 써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수재민을 돕는다는가 하는 빈민구제사업
에는 단 한푼도 쓰지 않는 수전노이기도 하다.
또한 귀가 얇아서 수없이 당한 사기 탓에 우부전노라는 별호가 생겼지만
금력으로 만들어진 관부의 막강한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사기를 친 사
람들을 철저하게 응징해버려서 이제는 감히 그를 속이려 드는 인간은 없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서귀(鼠鬼) 주유태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약간 긴장된
만여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광천마승(狂天魔僧)보다는 이 백산이란 친구가 실력이 낫다 이
말인가? 내가 듣기에는 광천마승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하던데…."
"아이고! 대인 그것이 다 속임수라니까요? 이곳의 소문도 못 들으셨습니까
?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이 무공을 숨기고 들어온 고수라고 말입니다."
서귀(鼠鬼) 주유태는 이 돈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이 인간은 다 넘어온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딴소
리를 해서 주유태의 속을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천마승 요불 쪽에 이미 오억 냥이 다 걸려있어서 더 이상 걸 수
있는 금액도 없습니다. 대인!"
주유태가 최후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더 이상 광천마승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또한 백산 대협의 배당률은 이십 배입니다. 투신전이 치러진 이래로 역대
최고의 배당률입니다."
주유태의 열변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이십 배란 말에 혹했는지 만여해가 백
산에게 걸 수 있는 금액을 물었다.
만여해의 의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백산에게 걸린 돈이 총 천만 냥밖에 없
는데도 삼억 냥이 걸려있다고 부풀려서 대답했다.
"그럼 나는 이억 냥밖에 걸 수 없는 건가? 아쉽구먼. 조금 더 걸려고 했었
는데."
조금 더 걸려했다는 만여해의 말에 주유태의 표정이 변했다.
"얼마를 거시겠단 말입니까?"
"이 정도면 어쩌겠나?"
만여해가 보인 손가락을 본 주유태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
했다. 만여해의 손가락이 네 개였던 것이다.
"사, 사억 냥이란 말씀이십니까?"
주유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봉이 걸린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가 자신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백산이라는 떠돌이에게 거금을 걸려하
고 있었다.
"안되나? 그럼 어쩔 수 없이 내년을 기다려야겠군."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만여해가 자리를 털고 나가려 했다.
"아닙니다. 대인!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
니다."
결국 주유태는 만여해가 백산에게 금 사억 냥을 걸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사람이 이곳 만상투인루의 지불능력을 확인하겠다는 것
이다.
자신이 사억 냥을 걸었으니 백산이 이기게 되면 그의 몫이 팔십억 냥인데,
이곳에서 그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해야만 돈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관인 주유태가 지금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연동립!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팔십억 냥 정도는 되느냐?"
"네.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다! 그럼 우부전노(愚夫錢奴) 만여해에게 확인을 시켜주어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만 대인! 저를 따라오시죠!
주유태가 만여해에게 금고 속에 있는 전표다발과 보석들을 보여주었다. 만
여해는 많은 전표다발과 보석을 보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신의 돈 사억 냥
을 기꺼이 백산에게 걸었다.
* * *
그 시각 백산은 다급한 표정으로 온 방안을 뒤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시펄! 분명히 이곳에 두었는데."
백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욕설을 퍼부으며 온방을 헤집고 다녔
다.
"이놈아! 무얼 그리 찾고 있는 거냐? 시간 다 되었는데."
풍신개가 백산을 재촉하며 물었다.
"내가 먹던 약, 그 광혈단이 없어졌다고요. 분명히 이곳에 두었는데 없어
졌단 말이요. 사람 미치겠네 이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침대 밑까지 확인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
자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이걸 어쩌면 좋아?"
"뭘 어째, 이놈아! 그냥 그대로 나가서 비무를 해야지. 나도 네놈에게 돈
을 걸었다는 것을 명심해라."
백산의 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풍신개가 낄낄대며 먼저 간다며 나가 버
렸다.
"비무 시간 다 되었습니다. 백 대협!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백산이 있던 방을 관리했던 사람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런 사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로 백산을 재촉하는 것
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데리러 온 인물을 따라 나서는 백산
은 무엇인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자네 이름이 장사라고 했나? 혹시 말이야, 내방에 있는 물건 누가 치웠는
지 알고 있나?"
앞서가던 장사라는 인물이 흠칫 놀라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왜 백공자의 장을 치우겠습니까?"
그는 묻지도 않은 옷장 이야기를 했다. 백산은 빙그레 웃었다.
"남의 물건을 손을 댈 때는 그 만큼 각오도 했겠지? 뭐!"
장사라는 인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본 백산은 자신의 품속에서
밤톨만 한 단환 하나를 꺼냈다.
"이것만은 복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장사라는 인물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백산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의 광혈단(狂血丹)과 전혀 다른 색인 빨간색의 단환이
마치 악마의 눈빛처럼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것 아니었다. 광혈단 두 개를 뭉쳐서 빨간 염료를 바른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백산의 표정은 그 단환이 마치 엄청난 약이어서 복용하기를 꺼리는
모습이었다.
백산은 이내 결심이 섰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그 단환을 꿀꺽 삼켰다.
잠깐 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백산을 쳐다보는 장사는 이제 몸까지 부들부
들 떨며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했으나 변화되어 가는 그의 모습에 발이 땅에
붙어버렸는지 움직이지를 못했다.
섬뜩하게 변해가는 백산의 모습에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크악!"
백산이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고, 그의 몸에서는 핏빛 혈
광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참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뒹굴던 백
산이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한 백산의 모습에 깜짝 놀란 장사가 주춤주춤 백산을 향해서 다가가서
는 '공자님!' 하고 툭 건드려 보았다.
순간,
크앙!
괴성이 터져 나오며 마치 맹수가 연약한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백산
의 오른손이 장사의 목을 틀어잡았다.
"크크크! 네놈이 감히 나의 물건을 훔쳤다 이거지?"
우두둑!
장사의 목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캬악!
다시 한번 괴성이 들리고 장사라는 인물의 팔다리가 그 자리에서 찢겨나갔
다. 한 손에 목을 그대로 쥐고는 장사의 팔과 다리를 차례로 뜯어내고 있는
백산은 한 마리의 악귀 그 자체였다.
장사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그의 얼굴이며 온몸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
으나 아는지 모르는지 장사의 사지를 뜯어내고 있던 백산이 갑자기 우뚝 멈
추었다.
"웬 쥐새끼야?"
그의 왼손이 거칠게 휘둘러지며 혈광이 한쪽을 향해서 쭉 뻗어나갔다.
콰앙!
핏빛 강기에 부딪친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뒤로한 채 비무장 입
구로 걸어 들어가는 백산의 뒤쪽으로 장사의 피가 점점이 흩뿌려졌다.
"으음!"
백산의 장력이 강타한 바위 옆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된 물체가
일어섰다.
바로 살수의 제왕이라는 귀살(鬼殺) 마천득이었다.
귀조수(鬼爪手) 연동립의 명령으로 백산을 감시하던 마천득은 자신의 고통
도 잊은 채 멀어지는 백산을 멍하니 쳐다보다 서둘러서 어디론가 사라져갔
다.
비무장의 관중석에서 올해의 철혈투(鐵血鬪)의 최종전을 가슴 졸이며 기다
리고 있던 관중들은 경악하며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광천마승(狂天魔僧)이
기다리고 있는 비무대로 들어서는 백산의 모습이 완전한 혈인이었던 까닭이
다.
철혈투(鐵血鬪)의 투신을 뽑는 마지막 비무이기에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은
그들이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은 눈과 코, 입
의 구분이 안될 정도였고, 그의 의복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비무대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무대를 향해서 들어서던 백산이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을 발견하고는
'크앙!' 하는 괴성과 함께 거칠게 돌진했다.
흠칫 놀란 요불이 백산을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백산의 붉은 철구가 그
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까앙!
살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강불괴!"
관중석에서 외마디의 외침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운수
대통이라 해도 이미 금강불괴인 광천마승에게는 승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천마승을 공격한 당사자인 백산의 얼굴에서는 동요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동요니 뭐니 하는 그런 감정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백산의 철구는 계속해서 광천마승(狂天魔僧)을
가격했다.
그런데 백산의 행동을 자세히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백산은 처
음 공격했던 타격점을 일관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금강불괴지신을 파괴시켜 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지
그의 심사를 알 수가 없었다.
칠 테면 쳐보라는 듯 가만히 있던 요불의 몸이 처음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
러났다.
계속되는 철구의 타격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요불의 몸에서 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요불의 신형은 금빛 운무 속에 완전히 가려서 보이지를 않았고,
금무 속에서 요불의 장엄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반야대승신공(般若大承神功)!"
금빛 좌불(坐佛)의 형상을 한 강기가 천천히 백산을 향해서 밀려오고 있었
다.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은데도 모든 방위를 점하며 백산이 움직일 공간
마저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애로워야할 부처 본연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백산의 눈빛처럼
부처의 얼굴에서도 시뻘건 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혈면(血面)에 금
빛 몸체를 가진 부처, 장엄함과 사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것은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
관중석에서 두 사람의 비무를 보고 있던 풍신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악스런 외침을 토해냈다.
역반야대승마공.
소림사 창사 이래 최고의 영광이자 치욕의 산물이다.
소림 역사상 보리달마 이래로 가장 유능했던 육조 혜능, 그의 손에서 재편
된 소림의 무공은 소림을 무림의 영원한 태산북두(泰山北斗)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찬란했지만 그가 반야대승신공(般若大承神功)을 역으로 해석하여 만
들어놓은 무공은 한마디로 마공 중의 마공이었다.
창안하면서 스스로 익힌 마공(魔功)의 영향으로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고,
자신의 사문인 소림에서 살육을 저지르는 참극을 일으켰다.
자결마저도 거부하는 마공에 의해 살육을 저지르던 혜능은 사부인 백타선
사의 항마후(降魔吼)에 촌각(寸刻)의 시간 동안 정신을 차렸고, 자신의 손
에 죽임을 당했던 사부의 시신을 안고 금마동(禁魔洞)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소림사는 그곳을 영원한 금지 구역으로 정했고, 위치조차도 제자들
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저주의 마공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풍신개의 설명에 조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동생은 괜찮겠죠?"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조천영이 울먹거렸다.
"조 소저, 걱정하지 마시게. 무림에서 저 친구를 어찌해볼 수 있는 인물은
없을 테니까. 그것은 이 철목승이 장담하겠네."
조천영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으나 철목승도 긴장감이
흐르기는 매일반이었다.
차리리 상대가 고금오천무(古今五天武)라면 더욱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
나 인세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소림 최고의 무공이 역반야대승마공(
逆般若大承魔功)이다. 어쩌면 고금오천무보다 우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백산도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혈면금체(血面金體)의 좌불상(坐佛像
)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타의 자비로움과 악마의 사악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더 붉어진 혈광이 아지랑이처럼 넘실대며 백산의 주위를 감싸고 약한
바람이 일었다.
"캬-악!"
괴성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간 백산이 좌불상을 향해 두 손을 거칠게 뿌려
댔다. 붉은 광채에 휩싸인 철구와 광천마승의 좌불상은 두 사람의 중간에서
커다란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콰-앙!
백산과 광천마승 두 사람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뒤로 물러났다가 재차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허공에 떠있는 광천마승(狂天魔僧)의 금무(金霧)
속에서 또 다른 불상이 솟아나와 백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였다.
이번에는 입상(立像)이었다.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얼굴은 역시 핏빛이었다.
동체는 금빛으로 빛나고 머리 부분만 혈광으로 뒤덮인 부처형상의 입상은
괴기 그 자체였다. 자비로 세상을 구원하는 부처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키려는 악불(惡佛)이었다.
아무런 외침도 없이 허공에 있던 백산의 몸이 회전하며 선풍각을 쏟아낸다
. 연달아 회전하는 그를 따라 열두 개의 철구가 춤을 추고 있다.
오른쪽 다리에 있던 세 개의 철구가 입상불의 머리를 박살내고, 오른손을
따라서 돌던 세 개의 철구는 몸통을 갈라 버린다.
붉은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유성우를 만들며 사라진다.
다시 광천마승의 손에서 좌상불과 입상불이 동시에 쏟아지고 두 종류의 이
십여 개의 불상이 백산의 전면을 포위하듯 밀려들었다.
백산의 눈에서 번득이는 혈광이 한결 짙어진다.
허공을 밟고 다시 튀어오르며 등각을 이용해서 철구를 위로 차올리고, 이
어서 왼발을 이용한 편퇴(鞭腿)를 날린다.
또다시 이어지는 회선각, 그의 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리의 움직임과
함께 양손에 있던 철구들도 허공을 가르며 불상들을 박살내버린다. 붉은
얼굴의 불상과 붉은 철구들이 비무대 허공에서 돌고 있다. 한여름의 불꽃놀
이 같았다. 한치의 밀림도 없이 허공을 유영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섰
다.
"놀랍군! 나의 공격을 오십 초씩이나 받아내다니, 네놈의 정체가 뭐냐?"
광천마승(狂天魔僧)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그의 무공을 받아 내리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킥킥킥! 남들이 볼 때는 네놈을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
야. 나의 연극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거든. 그리고 오늘이 지
나면 나는 거부가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그동안 나의 연극을 구경하느
라 고생 많았다. 어떤가? 제물이 될 놈이 너무 오랫동안 버틴다고 생각하지
않나?"
백산의 제물이란 말에 광천마승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제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면서도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인가?"
이내 놀라던 표정을 푼 광천마승이 백산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물었다. 이
제 와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대세는 변함없다는 뜻이리라.
또한 누가 있어 저 전설의 사대금강마저 격파한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단 말
인가. 이제는 소림사의 방장이 와도 두렵지 않은 광천마승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는 뇌룡현(雷龍縣)의 건달 출신은 아무리 무공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그저 삼류건달에 불과할 뿐이다.
반딧불은 영원히 반딧불일 뿐 결코 태양 빛이 될 수는 없음이다.
"자신감이지. 네놈이 얼마나 뛰어나서 소림을 뛰쳐나왔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해. 개구리는 말이지 아주 지그시 밟아 죽
어버리면 되거든. 힘이 하나도 들지 않지. 그리고 오늘부터 귀조수 연동립,
냉면살마 종천수를 비롯한 이곳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것
이 이 백산이 주는 진리야, 이 혈맹 양반!"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들어주는 것처럼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요
불은 마지막의 혈맹이란 말에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요불에게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살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알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 시체라도 온전하
게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금광에 휩싸여있던 요불의 몸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양
손으로부터 나오던 혈면(血面) 불타(佛陀)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이었다.
백산을 향해서 두 팔을 들어올리며 공격자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금빛이던
동체가 차츰 붉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백산의 철구들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다리와 팔을 이용해 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것이었다. 차올린 발 사
이로 왼손의 철구가 지나간다. 왼손의 철구가 지나간다 싶으면 오른손이 옆
으로 빠지고 있다. 마치 사지를 이용해서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숨죽인 관중석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다가오는
결말을 기다리며 두 사람의 한 동작 한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철 동생, 지금 저 녀석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처럼 보이나?"
백산의 이상한 손놀림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생소한 것 같기
도 하자 풍신개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목승에게 물었다.
분명 눈에 익기는 한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글자예요. 천자문(千字文)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글자들 말이에요."
철목승의 옆에서 백산을 주시하고 있던 냉추렴이 대꾸했다. 천자문이란 말
에 풍신개, 철목승, 조천영 등은 일제히 백산의 행동을 주시했다.
과연 그랬다.
휘둘러지고 있는 열두 개의 철구는 글자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이 쳐다보는 그 순간에 백산의 철구는 불(佛)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글자 앞에서 사기(邪氣) 가득한 혈불상(血佛像)이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다시 백산이 허공에다 파(破)자를 쓰자 허공에 머물러 있
던 혈불상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것을 본 철목승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어떻게 저런 것이…."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허공에 그리는 단순한 글자에서 죽
음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다니…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 저 정도 일 줄은 미처 몰랐다.
조천영을 치료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크게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지금 백산이 보이고 있는 저것은 자신
의 투기 자체를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경지를 무어라 표현해야 하나?"
백산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목승에게까지
이런 소리를 들을지 몰랐던 풍신개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백산 저 친구가 허공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저에게는 느껴집니다. 저 친구가 그려내
고 있는 단순한 글자에서 가공할 만한 역세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말입니다.
조금 전 저 친구가 파(破)자를 새길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혈불상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철목승의 말 그대로였다. 백산이 허공에다 새겨내는 글자는 그냥 글자가
아니었다. 천자문을 배운답시고 허공에다 글을 새길 때 그의 사부인 팽무도
가 말리지 않았던가!
그때의 가공할 위력이 지금 발휘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저 친구의 머리입니다. 저를 비롯한 그 누구도 본 실력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도 말이죠."
"저 녀석의 본 실력은 누구도 모르는 게 맞아. 머리 좋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지만… 가르친 사부도 저 녀석의 실력을 완전히 모르는데 뭐! 저 자신
은 알려나 몰라…."
결정타였다.
풍신개의 이 말에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물끄러미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것은 광천마승(狂天魔僧)도 마찬가
지였다.
저것이 무슨 개 같은 무공이란 말인가! 저놈이 그려내고 있는 한 글자에
자신이 쏘아낸 기운이 소멸되어 버렸다. 또 한번의 손짓에 밀려오는 한기,
한기(寒氣)가 온다싶으면 어느 사이 극양(極陽)의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이런 기운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요불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육조 혜능 이래로 소림의 최고 기재였다. 아니 혜능보다도 더 뛰어
났다. 그와 같은 무공을 익히고도 나는 주화입마에 들지 않았다.'
요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금광이 서서히 혈광으로 변해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요불의 귀에 백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요불!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이왕이면 좀 세게 쳐주지 그래.
자네가 너무 약하면 연극하기 힘이 들잖아. 귀조수를 잡아야 되거든? 이번
이 마지막 연극인데 협조 좀 해줘."
백산의 이 말에 요불의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렇다면 아예 가루로 만들어주마!"
요불의 표정이 괴기하게 변해가더니 잠시 후 혈광 속에서 커다란 악마지후
(惡魔之吼)가 터져 나왔다.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 멸(滅)!"
그의 온몸에서 혈불(血佛)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좌상부터 시작해서 입상, 환희불, 고뇌불 등 갖가지 자세의 불상들이 백산
을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정확하게 백팔 개의 혈불상들이 온 비무대를 채우고 있는 광경은 가히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혈불상 하나하나에 전율적인 살
기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혈불상을 쳐다보던 백산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리
는 것 같더니 백산의 입에서도 거칠었지만 분명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천자문(千字文)!"
백산의 팔과 다리가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백산의 모습
은 거의 시선에 잡히지도 않았고, 철구들이 남기는 붉은 잔상만이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중석에 있는 철목승에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백산이 휘두르는 손
과 발에서 무수한 글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많은 글자들이 모여서 또 다
른 하나의 거대한 글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파멸(破滅).
모든 것을 멸한다는 두 글자였다. 거대한 공간에 수놓아진 파멸이란 글자
가 철목승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쿠앙!
백팔 개의 혈불상(血佛像)과 백산이 그려낸 글자가 충돌했다.
"크윽!"
"시벌!"
거친 욕설과 함께 백산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가고, 요불은 그 자리에서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누구냐? 누가 이겼느냐?"
관중들은 누가 이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승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자신이 잃었는지 땄는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어느 누구도 소리를 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침 삼키는 소리
만 들려왔다.
충돌의 여파로 피를 뿌리며 뒤쪽으로 날아가던 백산이 비무대 한쪽 구석에
거칠게 부딪치며 떨어졌다.
그리곤 움직이지 않았다.
"와아-! 와…!"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이 이겼다! 나는 이제 부자다!"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환희와 탄식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미 비무대에서 죽
음의 혈투를 벌인 승자와 패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돈과 앞으로의 꿈만 있을 뿐이었다.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있던 관중석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거지? 요불이 이겼으면 손이라도 들어줘야 되는
것 아냐?"
그랬다. 백산도 요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움직입니다. 루주님! 백산이란 놈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귀조수와 냉면살마가 있는 상층부의 밀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종천수의 말
에 연동립은 황망히 창가로 다가가서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요불은 손을 뻗은 채 그대로 서 있었고, 비무장 벽에 박힌 철
구들 아래로 사지를 벌리고 널브러져 있는 백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백산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백산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그의 양손이 앞으로 쭉 펴지자, 비무장 벽에
박혀있던 여섯 개의 철구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발에 차고 있던 나머지 철구들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 충
격으로 인한 파장이 비무장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 오! 우와! 와! 와!"
처음엔 놀람이, 다음엔 감탄이, 그 후엔 환호성으로 관중들의 함성이 이어
졌다.
퍽! 픽! 퍽! 퍽! 퍽!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요불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멈춘 듯 서 있던 요불의 몸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막아놓았던 물줄기가 터져 나오듯이 피가 솟
아나오고 있었다.
열두 개의 철구가 비무대 바닥으로 떨어지며 만든 진동에 의해서 지금껏
유지되고 있던 요불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퍼억!
핏줄기를 뿜어내던 요불의 사지가 공중분해되어 비무대 바닥으로 흩어졌다
.
백산의 승리였다.
뇌룡현의 평범한 삼류 건달인 백산이 철혈투의 투신이 된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산은 관중석을 향해서 자신의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그 자
리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조천영이 쏜살같이 몸을 날려 백산을 안았다. 이
어서 풍신개, 철목승 그리고 냉추렴이 뒤를 따랐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만상투인루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십 대 일의 대박
이 터진 것이다. 관중들은 한결같이 운수대통 다쇠불알을 외치며 환호했다.
반면에 가장 상층부의 밀실에서는 귀조수 연동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병신 같은 요불 놈. 그깟 마단을 복용한 놈에게 그렇게 당하냐? 그놈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으아악!"
분노한 연동립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내부에 있던 모든 집기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백산 이놈!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가루로 만들어서 마셔버리고 말겠다.
이-놈!"
씹어뱉듯이 살기를 품은 귀조수의 외침소리가 밀실 안에서 맴돌았다.
귀조수 연동립의 저주를 받고 있는 백산은 조천영의 등에서 희희낙락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앞으로 힘없이 처져있는 백산의 손이 자꾸만 조천영의
풍만한 가슴을 스치고 있었던 것이다.
철목승이 데리고 간다는 것을 뿌리치고 굳이 조천영이 업고 가겠다고 우기
는 바람에 백산이 호강을 누리고 있던 터였다.
물컹!
갑자기 백산이 나직한 신음소리를 지르며 조천영의 가슴을 두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조천영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으나 환자라는 생각에 얼굴만 붉
힐 뿐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래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오는 것이었다.
달리면서도 허리 쪽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가만히 백산의 상태를 살
펴보았으나 고통의 신음소리밖에는 들리지가 않는다. 삼십이 넘었고 이미
결혼생활도 해본 그녀, 남자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자
신의 허리 쪽에서 느껴지는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왈칵 얼굴이 붉어진 조천영이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마치 화
끈거리는 얼굴을 찬바람을 이용해서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조천영이 백산을 안고 도착한 곳은 석숭이 머물고 있는 석남장(石南場)이
었다. 석숭의 남쪽에 있는 별장이란 뜻이다. 백산을 별실에 누인 일행은 의
원을 불러온다는 조천영을 별일 아니라며 극구 말렸다.
"이놈아, 그만 일어나라. 주변에 우리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풍신개의 호통소리에 조천영과 냉추렴은 깜짝 놀랐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에게 그만 일어나라니. 그러나 백산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만 커지
고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피곤한 모양인데 좀 자게 그냥 두시죠. 우리도 가서 좀 쉽시다."
풍신개와 마찬가지로 백산의 상태를 알고 있는 철목승이 일행을 데리고 나
갔다. 조천영도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을 상대의 무
공이 역반야대승마공(逆般若大承魔功)이라는 풍신개의 말에 그만 이성을 잃
고 말았던 것이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지금 일어나면 무슨 낯으로 누님을 보나, 그렇게
떡 주무르듯 주물렀는데. 그나저나 몸은 마른 것 같더니만 가슴 하나는 죽
여주게…."
그때의 상황을 상상하는지 백산이 온몸을 비비꼬며 히죽거렸다.
"야! 석두!"
"네, 형님!"
석두가 언제 이곳에 와 있었는지 백산이 부르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며 나
타났다.
"시킨 대로 준비는 다 해놨냐?"
"네, 지금 이곳 석남장은 개미새끼 한 마리 침입이 불가능합니다. 애들 전
부를 이곳에 배치하고 대기중입니다."
화약 매설작업을 마치고 백산이 석두에게 지시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기에 이런 일을 하는지 석두는 알 수 없었으나 물
어본다고 가르쳐줄 인간도 아니기에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는 것이었
다.
"석 대인이 돌아온 이후로 이곳을 얼쩡거리는 놈이나 담을 넘는 놈들은 전
부 이거다!"
"알겠습니다."
백산을 따라 석두가 눈빛을 빛내며 목을 쓰윽 그어 보였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석숭이 많은 짐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백 공자 있는가!"
조천영이 가져다준 죽이 너무 적다고 타박을 하며 허겁지겁 먹고 있던 백
산이 고개를 들자 조그마한 상자를 든 석숭이 들어왔다.
"아이고, 우부전노(愚夫錢奴) 만 대인께서 이곳까지 웬일이십니까?"
흠칫하고 놀라던 석숭의 눈가에 잠깐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빙
그레 웃으며 물었다.
"눈치를 챘구먼. 어떻게 알았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만상투인루의 그놈이 알고 있다는 것
이 문제지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만리추종향(萬里追從香)인가 뭔가
하는 것이 뿌려져 있으니까요."
석숭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친구의 말대로 만리추종향이 뿌려진 것이 사
실이라면 문제가 커진다. 자신의 두 얼굴이 탄로가 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밤만 지나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석 대
인과 그리고 저 둘뿐일 테니까요."
백산의 몸에서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온몸에 한기가 일어남
을 느낀 석숭이 재빨리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백산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제몫이 석 대인이 말한 것보다 두 배 이상으로 많아진 것 같던데
어찌된 거죠?"
"아 그거, 나도 모르게 두 배를 걸게 된 걸세. 우리 같은 상인들은 정확한
수치보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믿고 투자할 때가 있거든…좌우지간 자네는
사십억 냥이나 벌어서 좋지 뭘 그러나?"
"당연하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돈인데요, 뭐."
"여기 있네, 자네의 영약."
상자를 받아든 백산이 가만히 뚜껑을 열어보았다. 역시 예감 대로였다. 괜
히 뒷골이 땡기는 것이 아니었다. 마령호의 내단, 자신이 사부에게 상납한
마령호 내단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슬며시 상자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말
았다.
"아니. 왜? 영약이 맘에 안 드나?"
석숭이 놀란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한 노인의 눈물과 한이 서려있는 이것을 무슨 수로 먹습니까. 빌어먹을
노인네 겨우 오만 냥밖에 못 받아? 오십만 냥 정도는 받을 일이지…."
* * *
무너지는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뭐야? 만리추종향(萬里追從香)이 석숭의 집으로 이어졌다고?"
"네 루주! 석숭과 만여해 두 사람의 흔적이 동시에 석숭의 집에서 발견되
었습니다. 그동안 그 둘의 행적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이번에 확
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동일 인물입니다."
그들도 드디어 석숭의 두 가지 신분을 알아낸 것 같았다.
"크! 하하하! 그놈들이 동일인이라 이거지? 종천수!"
"네, 루주!"
"살인대 전원을 준비시켜라. 석숭을 친다. 석숭을 치고 돈을 찾으면 우부
전노(愚夫錢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우부전노에게 돈을 지불함
으로써 강호에 대한 신용을 지키게 되었고, 우부전노가 아닌 석숭을 죽여서
우리가 잃은 돈을 그대로 찾아온다. 그곳에 개미새끼 하나 남기지 마라.
알았느냐?"
냉면살마(冷面殺魔) 종천수가 나가자 혼자 남은 귀조수(鬼爪手) 연동립은
자꾸만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다.
자그마치 팔십억 냥의 돈을 한순간의 실수로 날린 것이다. 물론 잘못이야
요불이 했지만 이미 죽어버린 놈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살아있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완
벽하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석숭이란 자가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초저녁에 보이던 달이 어느 사이 먹장구름 속으로 숨어버리
고 칙칙한 어둠만이 납작 드리워진 밤. 석남장 담벼락이 보이는 곳에 검은
복면의 그림자들이 솟아나듯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의 이백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맨 앞에 있던 복면인이 손짓으로 무엇인가 지시를 하자 무리 중 절반이 고
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드디어 오셨군, 불나방들!"
석두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담을 넘어 들어오고 있는 자들을 주시하고 있었
다.
백여 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오고 나자 더 이상 담을 넘어오는 자들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석두의 손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바닥이 불쑥불쑥 일어나며 그곳으로부터 검들이 튀어나와 다가서던
복면인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에서 핏물이 튀고 목이 잘린 시체들이 정원 바닥으로 쓰
러져 나갔다.
"매복이다- 앗! 으윽!"
피가 쏟아지는 자신의 목을 붙잡으며 복면인 중 하나가 외쳤다.
석남장의 여기저기에서 불이 환하게 켜지고 침입자와 침입을 막는 자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 장원 뒷문 쪽에서 매복을 했던 일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복면인을 일도(一刀)에 베어내고는 적의 우두머리를 찾기 시작했
다.
저만큼 뒤쪽의 나무 아래에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서 있었다. 일휘의 신형
이 순간적으로 튀어 나가면서 나무 아래를 향해 일도를 휘둘렀다.
일휘의 도에서 붉은 광채가 나무 아래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 나무 아래 있던 귀살(鬼殺)은 기겁을 했다. 적의 우두머리를 잡기 위해서
나무 아래의 사각지대에 은신하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도강이 물밀듯이 밀
려온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는지 간신히 도강을 피할 수 있었으나 자
신의 앞섶이 비스듬히 잘려나간 것을 보고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
꼈다.
"이봐 쥐새끼! 부하들이 다 죽어가는데 대장이란 놈이 나무 그늘에 숨어있
으면 되겠어?"
일휘가 자신의 도를 빙빙 돌리며 귀살을 향해서 이죽거리며 다가가고 있었
다. 일휘의 말을 들은 귀살은 장내를 둘러보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칼부림을 하고 있던 부하들이 보이지 않았다. 목이 없어진 채
로 전부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수하를 베어버린 녀석이 동료들에게 늦게 끝냈다며 구
타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귀살은 하도 놀라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
는 놈을 보고도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살인대(殺人隊)가 어떤 인물이던가! 강호에 나가면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공 실력과 네 명의 합공이면 자신도 장담 못할 정도다.
강호에 나갔을 때 대문파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루주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직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순식간에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멸
하고 만 것이다. 비록 매복에 의해서 많이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상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놈들이 한꺼번에 둘러앉아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초수
를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야! 난 오 초에 다섯 문!"
"난 십 초에 다섯 문!"
"난 이십 초에 열문!"
"……."
순간 이십 초라고 말한 동료에게 일행의 주먹이 쏟아졌다.
"야 이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떻게 저런 놈한테 이십 초나 걸
리냐?"
동료들의 일방적인 구타를 피해 일휘 쪽으로 도망을 치던 놈이 자신의 동
료들에게 외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패지만 말고 내 말도 좀 들어! 그동안 일휘 형님이
너무 심심했잖냐. 모처럼 만에 재미있는 장난감이 왔는데 그렇게 쉽게 끝을
내겠냐? 너희들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 잔말 말고 난 이십 초에 열문이야,
이 새끼들아!"
순간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십 초에 걸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귀살은 굴욕감에 머리 쪽으로 뜨거운 열이 몰리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호에서 살수제왕이라 불렸던 자신을 마치 장
난감처럼 취급하는 그들을 보며 모든 내공을 쏟아내 일휘를 향해서 뛰어들
었다.
"난 삼 초!"
일휘가 내기를 하고 있던 일행을 향해서 손톱만 한 은덩이 하나를 툭 던지
며 빗살처럼 뛰어오는 귀살을 향해서 힘차게 일도를 휘둘렀다.
카앙!
"일 초!"
일휘의 외침과 함께 귀살의 몸이 땅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옆으로
밀렸다.
"이 초!"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은 일휘가 귀살의 얼굴을 향해 도를 찔러 넣었다. 순
간적인 기습에 깜짝 놀란 귀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이미 그의 가슴
팍까지 파고든 일휘의 왼손 정권이 귀살의 턱에 박혔다.
"삼 초!"
귀살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이미 머리 내부가 박살이 나버린 까닭이다.
귀살의 상태는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돌린 일휘는 자신의 부하들이 모여있
는 곳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내 돈 내놔!"
석남장의 앞뜰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정리가 되었고, 냉면살마(冷面殺魔) 종천수만이 남아있
었다.
그의 복면은 찢겨져나간 지 오래였고 석두의 검에 의한 상처로 온몸에 선
혈이 낭자했다. 얼굴에 한일자로 죽 그어진 상처에서는 쉼 없이 피가 흘러
내렸다.
"야! 석두 뭐하냐? 빨리 안 끝내고!"
일휘가 석두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놈은 형님 거야. 그래서 못 죽여, 임마! 그리고 어디 이런 놈 만나기가
쉽냐? 이럴 때 실전 연습 좀 해야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실전연습이 아니었다. 아니 일방적인 싸움이었던
것이다.
종천수가 아무리 암기를 날리고 독을 사용해도 석두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독이라면 대습지에서 신물나게 먹었던 그들이다.
실전연습이란 석두의 말에 부러워진 일휘가 자신의 부하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네 녀석들이 내기를 하는 바람에 그냥 끝내버렸잖아.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식들아."
검 부딪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나온 풍신개와 철목승 일행은 밖의 상
황을 보고는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는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강호의 이
름 있는 문파에 가도 몇 명 있을까 말까 하는 검강, 도강의 고수들이 무더
기로 있었다. 아니 있는 녀석들 전부가 검강과 도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이다.
백산의 부하들에 대해서 이미 팽무도에게 들어 알고 있던 풍신개도 놀라자
빠질 정도이니 철목승이나 석숭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강호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야! 종천수라고 했냐? 이제 그만 가라! 재미없다."
검을 거둬들인 석두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야,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라고. 나도 네 녀석을 죽여주고 싶지만 그렇
게 되면 내가 우리 형님에게 맞아죽거든. 그리고 빨리 집에 가봐라. 우리
형님이 그쪽으로 가셨거든? 너의 루주가 위험해!"
나지막이 속삭이는 석두의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종천수에게는 감
로수였다. 그 다음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
승이 더 좋은 것이다.
일단은 살아야 산수갑산을 가도 갈 것이 아닌가?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 종
천수를 바라보던 석두가 조천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 우리 불꽃놀이 구경이나 가지요?"
"불꽃놀이?"
조천영이 빙그레 웃고 있는 석두를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아, 글쎄 나이가 몇인데? 그래도 불꽃놀이를 꼭 해야 한다고 그렇잖아요?
빨리 가야 돼요! 늦으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게 된다고요! 야 너희들은
돌아가서 완전한 삼류 칼잡이가 되기 위한 수행이나 계속해라."
"삼류무사?"
풍신개와 철목승이 석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삼류무사가 무슨 뜻인가를….
* * *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일 년 내내 불야성을 이루는 이곳이 유일하게 어둠에 잠기는 때가 있다.
한해가 시작되는 신년 초이다. 주방에서 일하던 일꾼들조차도 모두 휴가를
주어 내보낸 지금 만상투인루는 침묵의 성처럼 조용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오층.
귀조수 연동립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만상투인루 최고의 특실. 황제가
사는 황궁보다 더 고급스런 자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연동립의 개인실
이다.
귀조수 연동립은 초조한 듯이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살인대 이백이면 웬만한 문파 하나 정도도 박살낼
수 있거늘…."
그때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주님, 저 주유태입니다."
"오 그래! 종천수가 돌아왔느냐?"
마음이 급했다. 자신의 회생이 종천수에게 있음이다. 주유태의 표정을 살
필 겨를도 없이 종천수의 귀환여부만 묻고 있다.
"불! 불입니다, 루주님!"
주유태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불이라니? 끄면 되지 웬 호들갑이냐?"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얼굴을 돌린 연동립이 사색이 된 주유태의 얼굴을
보고 일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불이 났다는 말이냐?"
"지하 이층에 있는 술 창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도저히 불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공기 속에 메케한 기름 냄새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기름
을 태울 때 나는 냄새였다.
연동립과 주유태는 잽싸게 지하 이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이미 불의 지옥이었다. 시뻘건 화마가 넘실대며 무서운 속도로 번
져가고 있었다.
"아니, 이건? 흑유?"
연동립이 시선 자락에 시커먼 흑유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위로
붉은 화마가 엄청난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
연동립은 자신도 모르게 주유태의 머리를 쳐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운용된
그의 귀조수에 주유태는 머리에 구멍이 뚫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돌아
오지 않는 종천수를 기다리는 초조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었
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죽어
간 주유태의 시신을 저만치로 차버렸다.
불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고 있었다. 실화가 아닌 방화였
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흑유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어떤 육시랄 놈이…헉!'
혼자서 지껄이던 연동립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
은 곳을 통하여 재빠르게 지하 사층으로 내려갔다.
"이것을 찾고 있나?"
지하 사층에 도착했을 때 한 손엔 조그마한 철구를, 그리고 다른 쪽 손에
는 그가 찾으려고 했던 책자를 들고 희미하게 웃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네놈은…백산? 어떻게 네놈이 여기에 있는 거지?"
연동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네놈이 이 불을, 이 불을 질렀단 말이냐?"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나? 불꽃놀이 하기에는 말이야?"
"정녕 네놈이 이불을 질렀단 말이냐? 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연동립이 백산을 향해 으르렁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석숭을 잡으러 갔던 자네의 졸개들 이야긴데 아
마도 돌아오지 못할 거야! 한 녀석만 빼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연동립을 보고도 백산은 딴소리만 하고 있다.
"뭐라고? 그것까지도 알고 있단 말이냐? 그들이 어떤 수준인데. 풍신개나
철목승이 있다고는 해서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백 명의 살인
대면 강호상의 한 문파도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백산을 향해서 비웃음을 흘리는 귀조수 연동립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살인대(殺人隊)는 자신의 비밀세력이다. 이곳 투신전에 참가했던 무림인
중 고르고 골라서 뽑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개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들의 합공은 정녕 가공할 만했다.
그래서 철목승이라는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인대를 자신 있게 보
냈다. 몇 명이 철목승을 막고 있는 순간에 나머지가 일을 처리하면 되기 때
문이다. 그리고 무림의 세력이라고는 없는 이곳 뇌룡현(雷龍縣)에서 그들을
어찌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연동립은 백산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네놈이 이곳에 불을 지른 이유가 무엇이냐?"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이유나 알자 싶은 마음이었다.
강호에는 이곳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직접적인 원수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의 형제 또는 사(師)형제들이 이
곳의 투인전에 참여했다가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한뿐이지 이곳을 어찌 해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망이 정당한 결투에 의한 것이고 자신들이 원해서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놈은 직접 이곳에 뛰어들어서 불을 지르고 자신의 목숨
보다도 더 소중한 연판장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생사투인전에 참가한 것부
터가 계획된 일이었다는 말이 된다.
연동립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지하 이층에 난 불이야 끄면 그만이다. 설령 끄지 못하더라도 이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된다. 어차피 너무 오래돼서 개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이곳 지하 사층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
다. 그리고 저 연판장, 혈맹도 모르게 비밀리에 만들어놓은 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유일한 담보물이다. 그것을 저놈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네놈이 했던 것이 모두 계획적이었단 말이냐? 광혈단까
지도?"
짝! 짝! 짝!
"정확하게 한치도 틀림없이 맞췄다. 그래도 한때 천무맹의 대제자라서 그
런지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구먼? 나는 이곳에서 무엇인가가 필요했지. 그런
데 너희가 그냥 주지는 않을 것 같고, 또 돈도 조금 필요했고 말이야. 그래
서 광혈단이란 놈을 이용했지. 그런데 의외로 잘 넘어가더군, 운수대통이란
별호까지 만들어주면서. 덕분에 나는 강호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부
자가 되었고 말이야.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할지 …."
백산의 말이 진행될수록 귀조수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는 강해졌고, 백산의
말이 끝날 즈음해서는 온 방안이 귀조수의 살기로 넘실댔다.
"더 이상의 것은 없나? 아는 대로 전부다 이야기해 보거라."
"어? 화났나보구먼? 얼굴까지 퍼래진 것을 보니… 보통 우리는 열 받으면
얼굴이 벌게지는데 자네는 파랗게 변하는구먼? 아! 아! 좀 진정하고 이야기
는 마저 들어야지. 또 알고 있는 것이라…아! 맞다 그거? 자네가 맹이라는
곳에도 속해있고 혈맹이라는 곳에도 속해있는 이중 첩자라는 것과 귀혼마강
시(鬼魂魔彊屍)로 이곳 뇌룡현에서 중원으로 가는 길을 혈로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지. 그리고 이것은 또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네가 이곳으로
찾으러 올 정도의 대단한 것이고 말이야."
온몸으로 살기를 발산하는 귀조수를 향해 비아냥거리며 하나씩 뱉어내는
백산의 말은 연동립의 이성을 더 이상 묶어두지 못했다.
"나머지는 네놈을 잡아놓고 묻겠다."
연동립은 외침과 함께 백산을 향해서 녹색 빛을 띤 귀조수를 뿌려댔다. 백
산은 앉은 상태 그대로 쭉 물러나며 귀조수를 그대로 허공으로 흘렸다. 그
런 백산의 모습에 흠칫 놀란 연동립이 내공을 한층 더 끌어올리자 그의 주
변으로 새파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 성질 좀 죽이래도 그러네. 아직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내가 너희들
에게 얻을 게 있다 했잖아. 그리고 내 손에 있는 것은 벽력탄이야. 함부로
하면 저쪽 문밖에 있는 사랑스런 자네의 인형들이 다친다고!"
벽력탄이란 백산의 말에 재차 공격하려던 연동립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벽력탄이라고?"
잠시 멈칫하던 연동립이 벽력탄이 하나 밖에 보이지 않자 비웃는 듯한 표
정을 지었다.
"이곳은 네놈의 생각보다 훨씬 넓은 곳인데?"
벽력탄 하나 가지고는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던질 테면 던져보라는 심
사였다.
"벌써 십 년을 준비해 왔는데 이것 하나 가지고 왔을라고? 무림이란 곳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실망인걸? 저 위
에 이런 것이 백 개 정도 있다면 믿으려나?"
이어서 백산은 귀조수 연동립에게 비무장에 있는 이천 관의 화약과 외부에
묻혀있는 화약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연동립은 자신의 머릿속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휘청
거렸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저놈의 말 대로라면 이곳은 완전히 끝장이
난다. 지금껏 양 세력의 눈치를 보며 자신만의 힘을 키워놓았던 것이 모두
무너질 것이다.
자신의 삼십 년 세월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명문의 제자로, 그 다음에는 맹주의 제자로, 한때는 악을 처단하는 것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사부인 맹주의
계획을 듣고도 일고의 망설임 없이 흔쾌히 따랐던 것이다.
사부가 가져다준 마공이 귀조수(鬼爪手)란 저주의 마공인 것을 알았을 때
도, 귀조수(鬼爪手)를 연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무고한 양민을
살해했을 때도, 귀조수(鬼爪手) 연공 사실이 밝혀져 강호 공적으로 쫓길 때
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갖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잊혀져간 사람은 다시는 기억되기 힘든 것인지, 오 년 정도만
고생하면 모든 것을 복원시켜 주고 이곳 만상투인루를 없앤 영웅이 될 것
이라는 사부의 약속은 십 년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단지 맹에서 그에게 내려주는 것은 자신의 희생 덕분에 무림 평화가 유지
되고 있다는 찬사의 말과 함께 맹에서 필요한 자금을 보내라는 말뿐이었다.
이곳을 없앨 준비가 끝났다며 회신을 달라고 수없이 전서구를 보냈지만 조
금만 기다리라는 회신만 올 뿐이었다.
더 이상 맹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부가 구결만 전
해주었고,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조금 익히고 있었던 귀조수(鬼爪手)를 본
격적으로 연성하기 시작했다.
귀조수(鬼爪手)를 익히려고 마음을 먹자 이곳 만상투인루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오성까지 익히기에 필요한 죽은 시체도 풍부했고, 생독을
흡수하기 위한 산사람은 생사투인전에서 부상을 당한 이들 중에서 구했다.
그리고 오 년 만에 귀조수를 완벽하게 터득했다. 귀조수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독을 흡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귀조수(鬼爪手)는 대단한 무공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어떤 무공보다도
그 위력이 강력했다. 과거 자신이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문파의 장로들이나
장문인마저도 이미 초월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사부였던 맹주마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호의 누구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
은 세력뿐이었다.
그럴 즈음 강호에 자신의 기반을 세워준다는 조건과 함께 혈맹이라는 단체
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때마침 맹에서는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 제조
법을 보내왔다.
어쩔 수 없이 혈맹의 수하로 들어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귀혼마강시 제조
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자신만의 감춰진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다시 십 년이 흐른 지금, 모두 천여 구의 귀혼마강시를 제조했다. 그중
삼백 구는 맹이나 혈맹에서 알고 있는 수치이고 나머지 칠백 구는 자신만의
세력인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세력도 완성되었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헛된 몸부림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좋다! 우리 협상을 하자. 네 녀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돈이냐? 돈은
원하는 만큼 주마."
일단은 이 무식한 놈을 달래놓고 나중에 처리하자는 생각에 연동립은 다급
한 음성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이곳에는 돈이 없던데 무슨 돈이 남아있다고 그러나? 우부전노(愚夫錢奴)
, 아니 석숭이 찾아간 돈만 해도 팔십억 냥이더구먼."
백산이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연동립이 따로 숨겨둔 돈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층을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아주
실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 손으로 돈을 준다고 하니 백산의 입이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 내가 따로 숨겨놓은 돈이 있다. 이곳 오층의 내 방에 있단 말
이다. 십억 냥, 십억 냥이면 어떠냐?"
돈 이야기에 백산이 솔깃해하자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지 연동립이 적극적
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아! 머리 좋은 양반이 왜 이러시나? 현금을 봐야지! 현금을…어?"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동립이 사라졌다. 아마도 돈을 가지러
갔으리라.
"우와! 어젯밤 꿈이 너무 좋더라니. 아니지, 이거 틀림없이 누님의 가슴을
주물러서 이렇게 된 것일 게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여자의 가슴은 행운
을 가져다준다!"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백산은 뭐가 좋은지 연신 헤헤거렸다.
잠시 후 연동립이 커다란 전낭 하나를 들고 와서는 백산을 향해서 던졌다.
"십억 냥이다. 이거면 네놈부터 시작해서 자자손손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
을 것이다. 이제 조용히 나가라. 그러면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하면 되니까
."
연동립이 가져온 전낭을 확인한 백산은 귀조수를 향해서 두루마리 하나를
던졌다. 그것은 백산의 아버지를 죽게 했던 그 첩지였다.
"이 돈은 고맙게 쓰도록 하지! 하지만 네놈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어
. 그 첩지를 받고 네놈이 죽이라고 명령한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였단 말이
다!"
일순간 백산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손을 휘두르자 새하얀 빛이 연동
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첩지의 내용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연동
립이 깜짝 놀라며 옆으로 피하는 사이에 출입문 쪽으로 다가간 백산은 재빠
르게 몸을 돌리며 연동립을 노려보았다.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니 이곳에서 죽지는 않겠지? 부디 살아서 나와
라. 그래야 내가 즐겁지."
들고 있던 벽력탄을 천장 부근의 상자를 향해서 던지고는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백…산! 너 이-놈! 반드시 죽인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반
드시…."
콰앙! 콰앙! 콰콰쾅!
새해가 밝아옴을 축하라도 하는 듯 거대한 폭음이 뇌룡현의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그 폭발음 속에 귀조수의 외침은 묻혀갔고, 버섯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피
어오르며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는 화마와 함께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멀리 만상투인루가 내려다보이는 갈대밭에는 이 모습을 지켜보는 몇몇의
인물들이 있었다.
"야 일휘! 너무 멋있는 것 같지 않아? 저것이 바로 여기 절대천뇌(絶代天
惱) 석두님과 백산 형님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다. 비록 한번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영원히 기억에 남을 대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석두가 주위를 둘러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야! 이 새끼야. 왜 너와 형님만이냐? 나도 거들었고 여기 있는 구두 아저
씨도 같이 했잖아. 안 그렇습니까, 아저씨?"
일휘가 자신도 공로가 있다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있을 즈음,
"그래 너 잘났다, 이 녀석아."
하며 커다란 전낭을 하나 걸머진 백산이 나타났다.
"어서 오게! 어서 오십시오!"
그곳에 있던 강구두와 석두, 일휘가 백산을 반겼다.
그들이야 백산과 같이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참여했으니 별반 놀라
지도 않았으나 풍신개와 철목승 그리고 석숭은 놀라운 눈으로 백산을 바라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망연자실, 아직도 시뻘건 화마가 널름거리며 타고
있는 만상투인루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 같이 공포라는 단어가 각인되었다. 저 넘실거리는
화마가 아니고 바로 백산이라는 인간에 대한 공포가….
그가 저곳에서 무엇인가 하려고 했다는 것은 여기 있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저 모습일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
했다.
만상투인루의 모습은 처참했다.
오층의 건물로 위풍당당하게 중원을 향해서 서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
지고 화약 폭발에 의해 기둥뿌리 하나 남지 않았다. 폭발에 의해서 만들어
진 공동은 마치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재앙의 현장
같았다.
잔해만 남아서 불타는 만상투인루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물경 오십 년간을 저곳에 존재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꿈을 삼키고 있
었던가. 수없는 죽음과 한을 먹고 자라온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그 거대
한 괴물이 한줌의 재로 변해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에게 휴가를 주듯이 시킨 단 한번의 살인, 어떤 이들에게는 아
주 사소한 일이었을지라도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될 수 있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연동립에 의해 뿌려진 씨앗이 자라서 만상투
인루라는 거대한 괴물을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누님! 이거 우리 살림 밑천."
조천영에게 다가간 백산이 불쑥 자신이 들고 있던 전낭(錢囊)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조천영이 의아한 눈길로 전낭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야? 전표잖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조천영이 토끼 눈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뱉은 돈이란 말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연동립, 그놈이 그동안의 수고비로 준 돈인데 거의 십억 냥 정도라고 하
던데? 이따 한번 세어보지 뭐. 그리고 누님, 그것은 우리의 살림 밑천이니
까 절대 잃어버리면 안되요. 그것을 노리는 놈이 있으면 돌아가신 우리 아
버지가 살아와도 얼려버리세요. 알았죠?"
얼려버리라는 말을 하면서도 백산의 시선은 유독 풍신개를 향하고 있었다.
조천영이 눈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풍신개가 '안 만진
다, 안 만져. 치사한 놈!' 하며 침을 탁탁 내뱉었다.
일휘와 석두는 제 돈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을 헤벌쭉 벌리며 즐
거워했다.
"백-산 -이-놈!"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외침소리가 만상투인루의 폐허 쪽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궁금해했다. 그 음성 속에는 인간이 쏟아낼
수 있는 모든 한이 들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놈의 무덤자리는 제가 따로 보아놓은 곳이 있거든요. 일휘, 활!"
백산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일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충천하는
화광(火光) 탓만은 아닌 듯했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일휘가 공손하게 철궁과 화살을 담는 전통 그리고 옷가지 몇 개를 꺼내서
백산에게 건넸다.
잠시 후, 털옷과 모자와 전통까지 둘러멘 채 철궁을 들고 있는 백산은 사
냥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감회가 깊은 듯 철궁을 가볍게 한번 쓰다듬던 백
산은 전면을 주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제 사냥할 시간입니다. 십 년 만인가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
어요. 시작합시다, 아버지! 지금부터 제가 짐승을 몰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저놈은 아주 작은 짐승일 뿐입니다. 더 큰놈들은 따로 있어요! 일단은 작은
놈으로 만족하세요. 다음에 다음엔….'
갑자기 백산 주변으로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랑거리는 미풍(微風)
으로 시작되었던 그 바람은 점차 거세어지더니 마침내는 주변 사람이 서 있
기조차도 힘든 광풍(狂風)으로 변하여 빗살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는 광풍 속에 살기를 머금고 있는 백산이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이제는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다. 팽무도, 이 자식은 저놈을 어
떻게 키웠기에 저런 괴물이 됐냐?"
풍신개가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날아가는 백산을 쳐다보았고, 괴
물이란 풍신개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지 나머지 일행도 고개만 끄덕이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