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세월(歲月)
"어떻게 할 테냐?"
"그 정보 어느 선까지 알려졌습니까?"
"아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천리표국에 있는 상인들에 의
해서 우연히 접수된 것을 바로 알려왔다."
오층의 공동파 일행이 머물고 있는 천실. 운학자와 백무천이 심각하게 이
야기를 하고 있다.
"사형, 정말 천선비도(天仙秘圖)가 나타났다면 투신전이 문제가 아니지 않
습니까?"
'천선비도(天仙秘圖).'
고금오천무(古今五天武) 중 일좌를 차지하는 무공. 오백 년 전 천검(天劍)
담사월(潭士月)의 독문 무공인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가 묻힌 곳을 표기
한 지도가 나타났다 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공동파는 고금오천무 중 두 개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럼 소림 무당을 누르고 공동파가 강호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얻어야지요. 힘으로라도 빼앗아야 합니다."
정천무룡 백무천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자신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천검무극류라는 희대의 보물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다. 그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잡는 자만
이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이 백무천의 인생철학이고 삶의 방식이었다.
고금오천무 두 가지를 익히고 있는 자신을 누가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강호상에 우뚝 솟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지 백무천의 얼굴에는 미
소가 어리고 있었다.
"좋다. 나머지 세 개 문파에는 내가 따로 이야기하마. 너의 내상 때문에
비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아직 돈을 걸지도 않았으니
까 손해도 없을 것 같고… 빠른 시일 내에 떠나기로 하자."
운학자가 다른 문파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방을 나갔고 객실에는 정천무룡
백무천만이 홀로 남았다.
'내가 운이 좋은 건가? 천무비고(天武秘庫)에서 우연히 익힌 무공이 고금
오천무인 것도 그렇고, 또다시 이런 행운이 굴러들어 오다니… 그래! 모두
가져주마. 무공도, 맹도 그리고 강호도, 큭큭큭!'
소리 내어 웃으면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이 달아나기라도 할 것 같아 속으
로 웃음을 삼켰다.
* * *
청면혈마와의 싸움 때 입은 내상으로 더 이상 비무를 지속할 수 없다는 백
무천의 공식선언으로 그에게 돈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과 한숨 속
에 투신전의 일회전은 모두 끝이 났다.
투신 일회전을 통과한 무인들은 과거 투신출신이 네 명, 생사투인전에서
올라온 네 명으로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오행마공(五行魔功)을 연성하여 전신이 금강불괴 수준에 이르렀다고 알려
진 오행마(五行魔) 지대철, 살수 출신인 귀살(鬼殺) 마천득, 천마맹 출신으
로 삼 년 전의 철혈투 출신인 혈검마(血劍魔) 나극, 소림 출신의 파계승 광
천마승(狂天魔僧) 요불 이상 네 명이다. 생사투인전 출신으로는 천마맹의
마겸, 점창파 출신의 천수마검(千手魔劍) 신기운, 천사맹 출신의 혈목괴(血
木怪) 다음이 백산이었다.
투신전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정천무룡 백무천이 내상으로 비무를
포기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빙혼마녀 조천영은 비무 자체를 포기했
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 중의 하나가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
이었다.
* * *
투신전 이차 전 첫 비무가 있는 날, 백산은 조천영과 함께 오늘도 여전히
비무장에 나와서 만두를 먹고 있었다.
이번 비무는 귀살(鬼殺) 마천득(馬千得)과 천수마검(千手魔劍) 신기운(申
奇雲)의 대결이었다.
"누님! 저놈들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쳐다보자
니 따분한 것 같아서…."
대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나왔다. 백면마 냉추렴이 자신의 사부와 같이 백
산이 있는 쪽으로 오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귀살 마천득은 살수 출신으로 강호에서 그가 행한 열 번의 살수행은 지금
도 청부업계의 전설로 남아있어요. 그가 암살한 인물들은 전부가 강호 백대
고수에 들어있는 강자들이었기에 그를 중원 최고의 살수라 불렀죠. 반면에
천수마검 신기운은 정파의 고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손속이 잔인하여 그의
별호에 마검이란 칭호가 붙었고, 그의 독문 무공인 천인검 또한 극악하기
짝이 없는 무공인 바 마공으로까지 불리기도 하죠."
"오늘은 어찌 자네하고 조 소저만 있나. 구 형님은 어딜 가고?"
철목승이 백산 앞에 있는 만두 하나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철목승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두를 끝까지 주시하던 백산은 앞에 있던
만두 접시를 조천영 쪽으로 천천히 밀어놓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만두 하나에 은화 한 냥짜립니다. 철 대협이 함부로 드실 물건이 아니
란 말입니다. 그리고 풍신개 영감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습니
다."
조천영을 위해서 사온 만두이니까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땀 한방울 안 흘리고 은 이백만 냥을 벌 텐데 그깟 만두 하나 가지고 쫀
쫀하게 굴어서야 쓰나. 그럼 이 술은 나 혼자 마셔야겠구먼. 추렴아, 술 이
리 주렴."
냉추렴이 백산을 향해서 혀를 날름 내밀고는 술을 꺼내서 철목승에게 건네
주었다.
"앗다! 그 양반, 어린 후배가 그런 소리 좀 했다고 금방 삐쳐 가지고는.
누가 이런 사람을 대인이라고 한 거야? 자 만두 여기 있습니다. 같이 드시
죠."
삐쳤다는 백산의 말에 철목승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감히 자신에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해대는 백산의 행동에 기가 찬 것이다.
조천영과 둘만 있을 요량으로 술을 가지고 오지 않은 백산은 이때다 싶었
는지 탁자 아래에서 만두 한판을 꺼내 냉추렴 쪽으로 밀어놓으며 재빨리 술
한 병을 빼앗아 바로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그런데 자네 이곳에 무엇 하러 왔나? 상대방의 전력탐색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했던 사람이 자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혹시… 조 소저 때
문에 온 건가?"
철목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엥? 어떻게 아셨소, 결혼도 못해 본 사람이?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미
있는 것 두 가지가 불구경하고 싸움구경 아닙니까? 그 중의 하나인 싸움구
경인데 반드시 봐야죠. 거기다 누님하고 같이 볼 수도 있으니 이거야말로
마당 쓸고 돈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즉 고상한 말로 일석이조라고들
하더군요. 안 그렇습니까, 냉 소저!"
백산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일석이조란 말 한마디를 쓰고는 너무나 자랑
스러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도 못 해본 사람이란 백산의 말에 철목승의 얼굴이 붉어졌다. 풍신개
가 없으니 백산의 싹수없는 말투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을 한 철목승
은 갑자기 풍신개가 그리워졌다.
"후후.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누가 있어 자신의 사부에게 삐쳤다는 말과 결혼도 못 해본 사람이란 말을
함부로 할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나오는 대로 뱉
어내고 있다.
그런 이 사람이 예의가 없다거나 무식해 보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분명히 저 순진하게 생긴 얼굴 때문일 거야.'
거친 입담에도 불구하고 백산의 평범한 얼굴이 나쁜 인상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 있다고 여기는 냉추렴이었다.
어찌되었건 이 사람은 연구대상임에 틀림없다.
사실 백산이 이곳에 나올 이유는 없었다. 그의 성격상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에 나설 놈도 아니거니와 그럴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않다.
오로지 조천영이란 여자 때문에 이곳 비무장까지 행차를 한 것이었다.
여자와 같이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고 머릿속에 든 것이라고는 뇌룡현의
삼류 건달들의 생활밖에 없으니, 말주변도 없는 백산은 슬슬 무료해지기 시
작했다.
그런 그에게 하라는 싸움은 접어둔 채 무엇인가를 가지고 열심히 설전을
벌이며 기세 싸움을 하고 있는 마천득과 신기운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주변에서 점차 살기가 강해지고 긴장감이 커지고 있는데도 백산
은 느끼지를 못하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 새끼들아! 보는 사람 생각해서 빨리 한바탕하지 않고 뭐해?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돈이 아깝다. 이놈들아!"
백산이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기(氣)싸움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석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
져 나왔다.
"저런 무식한 놈. 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
"운이 좋아서 이곳까지 온 놈이 기세(氣勢)가 무엇인지나 알겠어?"
"어떤 새끼야! 숨어서 이야기하지 말고 이리 나와봐! 이 새끼들아 주둥아
리를 확 찢어버릴 테니까. 나와! 나오라고!"
백산이 뒤쪽으로 돌아서서 얼굴을 붉히며 욕설과 함께 고함을 고래고래 지
르자 저번에 팔다리를 부러뜨린 백산의 무식한 행동 탓인지 순식간에 주변
이 조용해졌다.
"개자식들! 앞에서는 한마디로 못하는 놈들이 뒤통수 까는 일은 잘도 해요
!"
"큭큭큭! 자넨 역시 물건이야. 누가 감히 저 많은 인원에다 대고 그런 말
을 할 수 있겠나? 그나저나 누가 이길 것 같은가?"
자신의 옆에 어떤 사람이 있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백산의 행동
에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철목승이 물었다.
"귀살!"
이미 생각이라도 해둔 듯한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묻자마자 대답하는 백산을 향해서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저 둘은 실력이 비슷한 것 같고… 그러니 지 목숨 중요하게 챙기는 놈이
이기는 거지 뭐!"
철목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산이 말은 무식하게 했지만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한쪽은 정의감이란
명목 하에 검을 들었고, 다른 한쪽은 오로지 돈을 위해서 칼을 들었다. 돈
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치고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귀살은 오로지 돈과 자신을 위해서 지금껏 살아왔을 것이다. 반면에 천수
마검 신기운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참가했는지는 몰라도 악인처단을 자신의
의무인 양 생각하는 그의 사고의 틀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범주로 볼 때 귀살 또한 구미에 딱 맞는 먹이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예견대로 승부는 바로 갈렸다. 내내 밀리기만 하던 귀살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신기운의 검을 무시하고 그의 목을 향해서 검을 날렸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였다.
귀살의 생각지 못한 행동에 신기운은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귀살의 소맷
자락 속에서 무엇인가 번쩍 튀어나와 신기운의 미간에 그대로 박혀버렸다.
방심도 아니었다. 한 순간의 멈칫거림이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비열함이,
비겁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은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이다.
정파인들의 탄식과 마도와 사파인들의 함성이 장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괜스레 개 폼 잡으면 저렇게 되는 거지. 꼭 부처님 같구먼."
이마에 암기가 박혀서 피가 맺혀있는 모양이 부처님 얼굴 같아 보이는지
백산이 비아냥거렸다.
잠시 후 일행은 주루로 와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철 대협, 혹시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귀혼마강시? 그건 왜 묻나?"
백산의 물음에 철목승이 깜짝 놀라하며 물었다.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던
백산에게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
과거 천사련의 사혈마강시(邪血魔疆屍)보다는 약할지라도 전신이 극독으로
덮여있어 일명 독강시라고 불리기도 했던 마물 중의 하나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림인의 시체에 시술을 걸어 독혈 속에 오 년 이
상을 담갔다가 꺼내면 완성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강시는
생전의 자신의 무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무서운 점은 시전하는 모든 무공에 독이 포함되어 있어 제거하는데
무척이나 까다롭다는 것이다.
과거 남만에 있던 독문이라는 문파에서 귀혼마강시 백여 구를 제조하여 강
호상에 풀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강호 무림에 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이에 격분한 정사 무림 고수들이 남만에 있는 독문까지 가 그들을 멸망시
킴으로서 그 제조 방법이 실전되었고, 귀혼마강시 사건은 일단락 되었던 것
이다.
"그럼 이곳처럼 따끈따끈한 시체가 많은 곳이라면 귀혼마강시인가 뭔가 하
는 놈들 만들기는 아주 쉽겠군요. 이곳을 보면 일 년에 못해도 천여 명의
무림인이 죽어나가는데 그 시체를 처리한 흔적이 없어요. 이곳은 습기가 많
은 지역이라 시체도 금방 썩어서 악취가 심할 텐데…."
마치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한 백산의 말에 철목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과 같은 강자에게는 귀혼마강시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 마물이 만들어졌다면 자그마치 오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만상투
인전이다.
연간 백여 구만 만들어도 거의 오천여 구, 백산의 말로 보건데 귀혼마강시
가 이곳에 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만일 그것들이 강호로 풀린다면 과거 독
문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 강호 무림이 문제가 아니라 중원 전체가 멸망
할 수도 있음이다.
"형님, 형님은 어디 가셨나? 형님을 만나 보아야겠네."
철목승이 자신을 찾고 있는 그 순간에 풍신개는 소운과 함께 우뢰봉(雨雷
峰)을 향해서 질주하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 * *
"남궁 아우, 아직 멀었나?"
조급증이 난 얼굴로 풍신개가 남궁세우를 재촉하고 있었다. 무려 오십 년
간을 기다려온 세월이었지만 지금 당장 몇 각의 시간이 더욱 참기가 힘들었
다.
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가만히 숨을 내쉬어 본다. 꿈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
시금 조급증이 밀려온다.
"이제 다 왔습니다. 바로 저깁니다, 형님!"
우뢰봉(雨雷峰)의 정상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을 가리킨 남궁세우는 가만
히 소운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끌었다.
오십 년 만에 재회하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으로 뛰어들던 풍신개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도저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장장
오십 년 만이다. 강산이 변해도 다섯 번을 바뀌었을 시간이고, 천하도 주(
朱)씨로 바뀌었다. 악을 소탕하겠다며 백살대에 들어가서 연공을 마친 후
두어 번 그를 만났었다. 그때 무련이를 소개시켜주기도 했었다.
잡힐 듯이 자꾸만 멀어지는 과거의 추억, 그 추억을 먹고 살아온 세월이
오십 년이다. 이제 그 세월을 만나려 하고 있었다.
풍신개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도 있는가! 날새 구칠이, 이 못난 매형 칠이가 왔네. 너무 보고…."
조용히 시작한 풍신개의 말투에 점점 물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급기야는
조금씩 흐르던 눈물과 미어지는 가슴에 풍신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우뢰봉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벌컥!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덜커덕 열렸다.
순간 서로를 마주본 두 사람은 마치 석상인 양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 세상이 제것인 양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삼십 대에서 이
제는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팔십 노인이 되어 두 사람
이 다시 만났다.
지난 오십 년의 세월이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더니 이제는 입까지 굳어버렸나? 이 무정한 놈아!"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풍신개였다. 순간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서
로에게 뛰어간 두 사람은 와락 부둥켜안았다.
"너 정말 구칠이구나! 그 지저분했던 구칠이!"
"무도, 이 녀석 정말 많이 늙었구나. 이제는 옛날 모습이 하나도 안 남았
어. 살아있어서 정말 고맙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속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
었다.
오십 년의 세월이, 지난 세월의 한(恨)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소운도 남궁세우도 눈물을 흘렸다.
"소운아 인사하거라. 이분이 네 할머니의 오라버니이다. 너에게 할아버지
뻘 된다."
"인사드립니다, 할아버지"
눈물 가득한 얼굴로 소운이 팽무도를 향해서 절을 올렸다.
"오! 이 아이가 무련이의 핏줄이란 말인가? 무련이를 쏙 빼닮았어. 마치
무련이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
팽무도도 울고 소운도 울고 모두가 울고 있었다.
* * *
"그래서! 너와 나를,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그대로 두자는 말이냐?"
분노한 표정의 풍신개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팽무도를 향해서 고함을 질렀
다.
"너는 어쩔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무련이와 나는 채 이년을 살지 못했다.
자식을 낳고 조금씩 변해가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다 타서 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보고 그러더구나. 이제 그만 보내달라고, 더 이상은 참
기가 힘들다고. 나는 말이다 네놈하고는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일
곱째로 태어나서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내 것이
란 것이 생겼다.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행복이었다. 개방 방
주? 그건 개나 주라고 해라. 한데 그렇게 사랑했던 무련이의 가슴에 내 손
으로 바로 이 검(劍)을 찔러넣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고 있더구나, 고맙
다는 표정으로…."
풍신개의 두 손에는 백산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새카만 칼 한 자루가 쥐
어져 있었다. 피가 굳어서 검게 변한 칼을 바라보는 풍신개의 얼굴이 분노
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맹세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찾아내서 반드시 돌려주
겠다고.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말이다. 자 보아라."
풍신개가 자신의 웃통을 벗어 젖혔다. 온몸에 칼로 그은 흉터들로 가득했
다.
너무나 징그러운 광경에 소운은 고개를 돌려버렸고,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얼굴은 급격히 경직되어갔다.
"내 손으로 만든 상처다. 그녀를 찔렀던 이 칼로 그녀에 대한 기억이 희미
해지려 할 때마다 내 자신을 찔렀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약해질 때마
다 내 몸을 잘랐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놈들을 잊지 않고자 했다. 네 제자
놈을 만났다. 그놈이 그러더구나. 하늘은 결코 죄지은 놈들을 벌주지 않는
다고. 죄지은 놈도 인간이고 벌주는 놈도 인간이라고. 이제 나의 마지막 길
은 정해졌다. 네놈이 안 도와준다면 나 혼자서라도 한다."
풍신개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서렸다. 몰랐으면 모르되 모든 것을 안 이상
,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죽기 전까지 무엇인가 해보아야 할 것이다.
무련이에게 더 이상 미안하지 않도록.
풍신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온몸엔 찔린 상처부터 일직선으로 내려그은 흉터들로 가득했다. 여태 아물
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소운, 소운이는 어쩌고. 네놈이 그렇게 죽으면 혼자 남은 소운이
는 어쩔 거냔 말이다. 나도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에게 누명을 씌운 놈들은 천무맹 놈들이지만 내 가슴에 칼을 박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자식에 대한 신뢰보다 가문의 명예가 더 중요했던 당신, 과연
내가 누구에게 칼을 들어야 하지? 그건 여기 있는 남궁 동생도 마찬가지이
다. 우리에게는 복수할 대상이 없어져 버린 거야."
회한 서린 말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백산을 제자이기 이전에
혈육처럼 여기지 않았더라면 그 녀석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죽이려했던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자신의 가슴
에 박혀있던 아버지의 애도,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분노했다. 미칠 것 같았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때의 감정은 사십이
넘어 오십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겁이 났다. 자신의 부친을
향해서 도를 뽑을까봐. 그래서 이곳에 자신을 묻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고, 제자도 키웠다. 이제는 당신을 이해하려 노력하
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묻어버렸다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백산에게도 나의 복수니 뭐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
놈이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 작정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놈이 강호
를 향해서 칼을 뽑아들면 강호는 어느 때보다 무서운 피바다가 될 거다, 엄
청난 죽음의 피바다가. 나는 그것이 무서운 게야."
겉보기에는 덤벙대는 것 같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마령호를 잡을 때 보여준
주도면밀함을 알고 있는 팽무도였다. 그리고 무공을 익힐 때 내비친 그 집
요함, 사부인 자신에게마저도 전부를 보여주지 않은 신중함, 자신의 제자이
지만 살 떨릴 정도로 영악한 놈이었다.
"너도 그 놈이 파멸안(破滅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냐?"
"파멸안?"
의아한 표정의 팽무도가 남궁세우를 쳐다보았다.
머리로 생각하거나 지식이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나 남궁세우가 그의 궁금
증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지금 파멸안이라고 하셨습니까? '출(出) 파멸안(破滅眼) 지옥강림(地獄降
臨)-파멸안이 나타나면 지옥이 강림한다.' 이 문구 속에 있는 그 파멸안 말
씀하십니까?"
"파멸안, 그게 뭐죠?"
남궁세우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소운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동시에
물었다. 아차 싶었던지 풍신개가 황망히 소운의 수혈을 짚어서 잠을 재우고
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남궁 아우, 자네는 파멸안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네, 어렸을 적에 어떤 고서에서 우연히 읽었습니다. 글로만 쓰여져 있었
는데도 너무 섬뜩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글의 첫머리에
쓰여진 글이 바로 출(出) 파멸안(破滅眼) 지옥강림(地獄降臨)이었습니다."
남궁세우가 과거를 회상하듯 아득한 눈동자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 책이 서술한 내용에는 오백 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는 천오백 년 전이 되는 것이죠."
백색의 눈동자 파멸안.
그가 지나는 곳은 피와 살육만이 남아있었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난무하는 지옥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의 혈로는 장장 오 년 간
이나 계속되었고,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무림은 거의 멸망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백색의 괴인. 처음에는 백색이었던 그의 눈이
암흑색으로, 또다시 핏빛으로 변했을 때는 이미 세상의 종말이었다.
그 많던 강호인들이 그를 피해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텅 비어버린 강호 무림.
텅 빈 대륙에서 피를 찾으려 횡단하는 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남자
인지 여자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세인들은 그 구세주를 광명안(光明眼)
이라 불렀다.
그들이 싸웠는지 알려진 바 없었으나, 그 이후로는 백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흑의를 입고 온몸에서 혈광을 내뿜으며 투명한 눈빛으로 생명체를 멸하던
그 모습을 사람들은 파멸안(破滅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파멸안의 세 가지 상태를 백색지안(白色之眼) 일성(
一城) 멸(滅), 흑색지안(黑色之眼) 일국(一國) 멸(滅), 광혈지안(狂血之眼)
세상(世上) 멸(滅)이라고 하더군요."
남궁세우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팽무도와 풍신개는 멍한 얼굴로 남궁세우만 쳐다보고 있었다.
"놀랍군. 파멸안에 그런 비밀이 있는지는 몰랐는데…중원에 있는 각 문파
에도 파멸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네. 다만 각 문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인데… 그러
나 한가지만 정확하게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네. 백색 눈동자가 나타나면 신
분여하를 불문하고 처단하라고 말이야."
풍신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단순하게 저주마안으로만
알고 있던 파멸안에 그런 내막이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입니다. 누가 썼는지도 확실치도 않고요. 그리고
백산이 그런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맞네.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아. 운명? 그게 뭔데.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것도 그놈의 운명 때문인가? 모든 것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야. 파멸안이든
악마안(惡魔眼)이든 그놈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거야. 지가 파멸안이 되
고 싶으면 되는 것이고, 싫으면 그만인 게야."
제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설령 믿을 수 없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천지에 유일하게 정을
준 녀석이다. 파멸안이면 어떤가, 그것이 헤쳐나가야 할 인생의 짐이라면
뚫고 나가야 할 것 아닌가.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은 나 하나로 족해. 그 놈은 이길 수
있을 거야. 반드시…."
중얼거리는 팽무도의 얼굴에는 굳건한 의지가 배어있었다. 마치 자신의 제
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