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16화 (17/84)

제1장 투신전(鬪神戰)

 쏴아!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혼백을 씻겨주기라도 하려는

 듯 억수비가 쏟아진다.

 사방으로부터 조여오는 어둠은 빗소리에 묻혀 한결 깊은 침묵으로 다가들

고,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한 고요함만이 감도는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는

 이따금 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곤 한다. 마치 세상을 비

웃고 있는 악마의 모습처럼 괴기하기만 하다.

 지하 사층.

 여전히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만상루주 앞에 냉면살마(冷面殺魔) 종천수

가 부복하고 있었다.

 "어제로 끝난 생사투인전에서는 뇌룡현 출신인 백산이란 놈이 참마도(斬魔

刀) 팽월을 물리치고 투신전(鬪神戰)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 예견

된 인물들이 그대로 진출하였습니다."

 "백산?"

 만상루주가 관심 어린 눈빛을 내비치자 냉면살마 종천수의 설명이 이어졌

다.

 "이차전까지는 그저 운이 좋아서 이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놈인데 삼차

전 들어서는 무슨 약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광기를 발휘하며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이겼습니다. 또한 무림인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수

법들을 사용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 건달이란 소문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혈월(血月) 사뇌영과의 비무에서는 주방에서 사용하던 식도를 훔쳐 암습을

 가하는 등 뒷골목의 건달들이 사용하는 그런 방법을 가지고 투신전까지 올

라왔습니다."

 "약?"

 "네. 그놈의 이상함을 보고 같은 패거리에 속하는 일행을 조사했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과거 잔독문(殘毒門)에서 쓴 독단인 광혈단(狂血丹)을 사

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독인마타(毒人魔駝)에게 보였더니 확실한

 광혈단이라 했습니다."

 "광혈단이라…."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만상루주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우리의 재물은 백산 그놈으로 한다. 나머지 투신들에게도 전달하도

록 해라."

 "옛! 알겠습니다, 루주님."

 "그리고 오층 상황은?"

 "특별실 인원이 많이 늘었습니다. 우선 천마맹(天魔盟)의 부맹주인 철혈전

마(鐵血戰魔) 철목승(鐵木承)이 그의 제자와 함께 투숙했으며, 천사맹(天邪

盟)에서는 환사(幻邪)와 그의 수행원들이 도착했고, 녹림의 대력패왕 등이

와있으며, 그리고 명문 정파 중에서는 종남파(終南派), 청성파(靑城派), 점

창파(點蒼派)의 인물들과 함께 강호 거부들도 서서히 몰려들고 있습니다."

 "철혈전마 철목승이 이곳에 왔다? …정말 의외의 인물이군."

 철혈전마 철목승, 흔히 전마라고 불린다. 지위는 천마맹의 부맹주로 되어

있으나,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천마맹 내에는 적수가 없다고 알려져있는 인

물이다.

 일설에는 과거 마도의 신이라고 불리던 천마(天魔)의 천마심공(天魔心功)

을 이었다고도 한다. 마인이라기보다는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무공광(武

功狂)에 가까워 정파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을까? 그냥 구경 차…? 어쨌든 계획에

는 차질이 없겠지… 그런 인간이 많을수록 이번 축제는 더 빛이 날 테니까.

 죽음의 축제가….'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있던 만상루주가 퍼뜩 깨어나면서 종천수를 바라보았

다.

 "강시건은?"

 언제나 질문은 간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외에는 묻지 않는다.

 "이미 독인마타와 함께 삼백 구의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를 대월산(大越

山)과 대습지에 배치 완료했습니다. 이곳에 참가한 모든 인물에게 만리추종

향(萬里追從香)도 살포가 되었고요."

 "좋다, 착오가 없도록 확실히 해라.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늘로

비상을 하게 될 거다."

 말을 하던 만상루주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별안간 고개를 돌리며 천장 쪽을

 향해 번개처럼 손을 뿌렸다.

 "누구냐?"

 …….

 그러나 어떤 움직임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긴장해 있나? 이곳까지 누가 들어올 리가 없지.'

 지금 이곳은 만상투인루의 지하 사층, 기관이 중첩되어 있어 이곳의 지리

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듯이 고개를 끄덕인 만상루주가 재차 종천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지금 이 시간 천무맹 놈들도 모여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정천무룡 백무천이 머무는 천실(天室)에서 모

이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     *     *

 "지금 이곳에는 구대문파 중 네 개의 파가 모여있습니다. 우리만으로도 얼

마든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자신이 천무맹(天武盟)의 맹주라도 되는 것처럼 정천무룡 백무천이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구대문파

 중 네 개 파가 모여있으니 천무맹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사명(使命)이 무엇입니까? 바로 마도 척결과 정의 수호입니다. 그

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바로 일신의 안락함만을 추구하

는 맹내의 퇴물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이곳 만상투인루에서부터 마

도 척결을 시작할 것입니다."

 백무천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점창파(點蒼派)의 점창일검(點蒼一檢) 곡

현수, 청성파(靑城波)의 청성일수(靑城一手) 문일창, 그리고 종남파(終南派

)의 냉살검(冷殺劍) 정철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마도 척결의 시발점은 지금 이곳에 와있는 철혈전마(鐵血戰魔) 철목승으

로 정했습니다. 물론 저와의 비무로부터 시작해야 되겠지요."

 네 명의 인물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백무천의 몸에서 영웅의 기세가 흘러

나왔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백무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인들은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건 너무 무모한 것 아닌가? 그는 공히 천하제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

이고, 천마맹 소속임에도 그의 공명정대한 성격은 정파인들에게조차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일세."

 점창일검(點蒼一檢) 곡현수가 놀라는 표정으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철목

승을 제거하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강호무림의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 전쟁의 시기라면 그럴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평화의 시대다. 더구나 서

로 불가침협정마저 맺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조만간 전쟁은 일어나게 됩니다. 누가 일으키려 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역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강호 무림인들 모두가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그 계기가 없어서 전쟁

이 시작되지 않을 뿐이지 천마맹과 천무맹의 상태는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천마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천마맹주인 개천신마 악

천도, 늙은 구마도 아닙니다. 바로 철목승입니다. 그가 천마맹의 모든 것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천무맹에서 보는 철목승의 가치는 천마맹의 삼할 전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력이 거의 없는 그가 거대 단체의 삼할을 차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대

형으로 모시는 무욕인(無慾人)이라는 단체와 마도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생

각할 때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에 그의 제자를 인질로 삼아서 그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

각됩니다. 물론 우리가 했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겠지만요."

 "그건 정파인으로서 너무 비겁한 짓 아닌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러한 비밀

이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그릇이 큰 인물인지 앞 뒤 분별없는 무모한 인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는 것이 삼파 인물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철목승을 정당한 비무에

 의해서 제거하게 되면 백무천의 명성을 더욱 올라갈 것이고 그가 천무맹의

 맹주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비겁한 수를 이용해서 상대를 해쳤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파장은

자신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천무맹이 전쟁에 승리를 하더라도 그는

 영원히 비겁한 인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백무천을 밀었던 자신들도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같은 배를 타기로 했는지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천무맹의

맹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문파가 번영을 누리게 되고 자신들도 명성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기호지세(騎虎之勢)라 하던가?

 "마도를 타도하는 것입니다. 마인을 제거하는데 이 방법이면 어떻고, 저

방법이면 어떻습니까? 결과만 같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시고 마도척결만 생각하십시오."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은 정천무룡 백무천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는지 자신들의 문파를 출발할 때 장문인이 병력을 늘려

 주었었다. 철혈전마의 제거가 목적이 아니었을지라도 이곳에서부터 마인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네 개 문파의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투신전(鬪神戰)에 관한 건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금액이 전부 얼마 정도 됩니까?"

 "우리 세 파가 합쳐서 전부 삼억 냥 정도일세."

 "좋습니다, 저희들의 돈까지 합쳐서 전부 십일억 냥이 되는군요."

 십일억 냥이라는 백무천의 말에 세 사람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삼억 냥을

제외하면 팔억 냥. 그 중에서 천무맹에서 지원해 준 이억 냥을 뺀다 하더라

도 육억 냥 정도를 공동파에서 만들어 온 것이다.

 그 정도의 돈이면 천무맹(天武盟)을 삼 년이나 꾸려 나갈 수 있는 거금이

다. 자신들은 일억 냥을 모으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얼마 남지 않은 속

가제자들을 쥐어짜다 못해 무공비급까지 팔아서 마련한 돈이었다.

 그런데 공동파에서는 무려 자신들의 여섯 배나 되는 금액을 만들어 왔다.

오직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이란 이름이 만든 돈일 것이다.

 새삼 백무천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부 저에게 걸어 주십시오. 이번엔 제가 무조건 우승합니다. 투신전이니

 만큼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배의 배당은 되겠지요."

 생사투인전에서는 백무천이 너무 강했기에 배당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었

다.

 그러나 투신전에서는 과거 투신들과의 비무가 열리게 되므로 승리의 향방

을 점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생사투인전보다 더 많은 배당이 있을 것이라

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백무천의 확신에 찬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투신전을 마무리짓고 나서 천천히 추진해 보도록 하죠."

 세 사람이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고 실내에는 정천무룡 백무천만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 백무천! 내년에 맹으로 복귀하게 되면 그것으로 나의 세상

이 열린다. 이 백무천의 시대가 화려하게 시작되는 것이다. 풋 흣흐흐."

 백무천이 득의에 찬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또 하나의 야망자가 만상투인루를 발판 삼아서 비상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

 어제부터 내린 장대비는 멈출 생각이 없는지 여태껏 줄기차게 내리꽂고 있

다.

 오층의 특별실에 투숙한 고객만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층의 주루. 부

와 권력을 두루 갖춘 최고의 사람들을 위한 장소인 관계로 모든 집기들이

최고급으로 비치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류층의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곳답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술 따르는 소리와 조용히 담소하는 소리 외에는 소란스러움은 없

었다.

 이러한 평온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일말의 소성이 주루 입구 계

단에서 들려왔다.

 실내에서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몰렸다.

 온통 비에 젖은 옷과 산발한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진흙이 더덕

더덕 붙어있는 신발은 그가 걸어온 경로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한 명과

 몇몇 인물들.

 백산과 그 일행이었다.

 "아, 그러기에 일층에서 먹자니까 뭐 하러 이런 곳까지 올라와요? 여기서

먹는 술은 보약이라도 된답디까?"

 입이 반쯤 튀어나온 백산이 기어코 비싼 이곳으로 끌고온 풍신개를 노려보

았다.

 "뒈지면 없어질 돈인데 좀 쓰면 어디가 덧나냐? 그리고 네놈 평생에 이번

이 아니면 언제 이런 곳을 구경하겠느냐. 잔말 말고 가서 앉기나 해. 너 때

문에 이곳 분위기가 다 망쳐지잖아."

 이곳의 총관으로 보이는 장한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백산과 그 일행을 쳐

다보았다. 여기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예의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은 처음이다.

 큰소리로 떠드는 것은 그렇다 쳐도 저 희멀건 놈의 꼴은 무엇인가!

 서역에서 수천금을 주고 들여온 융단이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렸다.

 퍼억!

 이런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굳어져 있던 총관은 안면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해! 새끼야. 나 같은 미남 처음 봐? 손님이 왔으면 빨리 자리로 안내해

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수건도 한 장 가져오고. 빨리 안 뛰어? 캬악! 취-익

!"

 총관의 콧잔등에 주먹을 날린 뒤 바닥에다 가래침을 찍 뱉어낸 백산은 주

위를 휘둘러보았다.

 "저런 더러운 놈! 예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놈! 이래서 천한 놈들하고

는 같이 못살아."

 "쉿! 저놈 성질을 알고도 그런 소릴 하나? 저번 참마도 팽월과의 비무 때

못 봤어? 죽이라고 외치는 관중 다섯을 시끄럽게 군다고 그 자리에서 팔 다

리를 분질러 놓지 않았나. 정말 상종 못할 놈이야. 저놈은."

 백산과 참마도 팽월과의 거래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사부에게 당한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사부의 후손인 참마도(斬魔刀

) 팽월을 제자로 삼아버린 것과 비무에서 져줄 것 대신에 한천팽무도법(恨

天彭武刀法)의 삼 초 구결 전수였다.

 백산은 참마도 팽월을 복날 개 잡듯 팼고, 구결을 다 암기한 팽월이 그 자

리에서 기절해버렸다. 팽월이 기절하자 백산은 손을 멈추었으나 이미 흥분

할 대로 흥분한 관중들은 죽이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백산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화난 관중

몇이 '이 후레자식아! 죽여! 죽이란 말이야. 이 새끼야!' 하는 욕설을 해댔

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백산이 순식간에 관중석으로 뛰어올라가 자신에게 욕

설을 한 다섯 명의 팔다리를 분질러버리는 만행을 저질러버렸다.

 백산은 규칙을 어긴 것이 없었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상금이 지급되

지 않을 뿐 생사투인전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결국 냉면살마 종천수가

와서 조용히 해결하는 선에서 끝이 났지만 그 다음부터 관중석의 만행을 목

격했던 군중들은 백산만 나타나면 슬슬 피해다녔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자

들은 그래도 한가락 하는 자들이다 보니 그런 백산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

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신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백산을 몰랐다. 백산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신분이나

 지위는 발톱에 낀 때보다 못한 것이라는 것을.

 총관이 가져온 수건으로 머리며 얼굴을 닦다가 백산이 소리나는 쪽을 향해

서 고개를 홱 돌리고는 거친 욕설을 쏟아냈다.

 "야 이 새끼들아! 할 말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와서 해. 아무리 좁아터진

구멍에서 나왔다고 뒷구멍에서 소리치면 되겠어. 앙? 나와! 나와보라고! 이

 새끼들아."

 정정당당, 백산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껏 생사투인전에서

갖은 약은 수를 다 써서 투신전에 진출한 자신이 아니던가.

 그때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의 일행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인물 중 한

 명이 웃으면서 백산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나왔다 이거지. 시팔 한번 해보자고!"

 백산은 묶어 놓았던 철구들을 풀어내리며 싸울 준비를 했다.

 퍼억!

 뒤통수에 가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확 쓰면서 백산이 재빠르게 돌아섰다.

 "어떤 십쉑이 암습을 하는 거야?"

 "이놈의 자식은 주제도 모르고 아무 때나 나서요. 조용히 안 찌그러질래?"

 풍신개였다. 그가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백산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게, 철 동생.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자네가 이 지저분한 곳까

지 웬일인가? 앉게 앉아!"

 "오랜만이에요, 철 숙부."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구 형님. 소운이 너도 이젠 어른이 다 되었구

나."

 풍신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중년인이 자리에 앉았다.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 중년인이 누구이던가? 모든

무림인들이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하는 철혈전마(鐵血戰魔) 철목승이다.

 그런 그가 풍신개를 향해서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개방의 인물과 천마맹의 인물이 호형호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상대는 천하제일인이다. 그런 자에게 누가 감히

나서서 시비를 건단 말인가.

 "이씨, 아는 사람이었어? 그럼 그렇다고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쪽 팔리

게 백산이 실수를 하다니 이게 다 영감 때문이요?"

 앞 뒤 분별없이 날뛰는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미는 백산의 상투적인 수

법이었다.

 "안녕하쇼! 백산이요."

 백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반갑네. 나 철목승이네. 자네 목소리가 대단히 우렁차더구먼."

 그 순간 옆에 있던 강구두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 그럼 철혈전마 철 대협이란 말씀이십니까?"

 "강호 동도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만."

 강구두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은 보기에도 처량

할 정도였다.

 "어이 구두 아저씨, 왜 얼굴에 핏기가 없어. 저 양반이 귀신이라도 돼? 빨

리 자리에 앉으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떨고 있는 강구두를 보며 백산이 소리를 질렀

다.

 "백 공자 저분이 누구인지 아는가? 천마맹의 부맹주이고, 강호인들이 천하

제일인으로 인정하는 전마 철목승 대협이시네. 우리 같은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니네."

 자신들 같은 삼류건달은 어떤 무림인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

양민을 등쳐먹는다고 해서 그들의 표적이 되곤 한다.

 그런 그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사람과 합석을 하게 생겼으니 건달 역사에 길

이 남을 일이었다.

 "이것 봐요, 아저씨. 도대체 당신의 과거가 뭐야? 하는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분명히 정파 쪽의 인물이었을 거야. 허례허식 좋아하고 체면과 신분을

 중요시하는 그런 습성이 몸에 배어 있어."

 백산은 앞에 있는 술을 마시며 자신의 말에 얼굴이 흠칫 굳어지는 강구두

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아저씨 나이가 오십이 넘은 걸로 알고 있소. 그 나이면 아

무에게나 고개를 숙일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아저씨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면 천하제일인이 아닌 철목승 대협에게 고개를 숙이셔야 합니다

. 천하제일인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천마맹의 부맹주니까 고개를 숙이고,

천무맹주니까 무조건 존경해야 되고, 그런 것들은 존경이 아닙니다.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갈 뿐이지요.

 우리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렇게 살지는 맙시다. 어찌되었든지 아저

씨도 구두파의 대장이라고요. 대장이라는 것 아무나 하는 것 아니요. 이곳

에 대장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쇼.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천하제일인이라

는 철 대협도 부맹주밖에 안 된다며? 제발 이름에 자신을 가지쇼."

 강구두의 얼굴이 놀람과 당혹스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백산이 자신을

치켜세우며 감싸주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고, 구두파를 무림삼천(武林三天)

과 비교를 하는 백산의 무지함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다.

 "이 친구의 말이 맞습니다. 강 대협, 자! 앉아서 술이나 한잔하시죠."

 이래서 거인이란 말을 듣는 것인가? 비록 백산의 말이 맞다고는 하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다분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 백산의 말을 가벼운 미소로 받아낼 수 있는 모습은 진정한 대인의 풍

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안하우. 저기 덜 떨어진 금뎅이와 같이 있기에 일행인지 알았소."

 백산은 철목승을 향해서 고개를 까닥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백산이 보기에도 철혈전마 철목승은 대단해 보였다. 내공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있음에도 자신이 위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강

함을 가진 이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백산의 뇌리 속에서 맴돌았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그건 비밀인데? 다른 걸 물어보시오. 나이만은 절대 말할 수 없소. 내 나

이를 알면 뒤집어질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석두와 일휘 등을 두고 한 말이리라.

 '그 녀석들은 잘하고 있겠지? 일단은 강해져야 한다. 이 세상은 강한 자에

게는 한없이 나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너무나 힘든 곳이다.'

 그가 철목승을 보고 느낀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천마맹의 인물이라면 마

인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에게 적의의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 심지어는 천무맹의 인물인 백무천 일행도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함.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서른!"

 옆에 있던 풍신개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우씨! 누구 혼삿길 망칠 일 있어요? 이 얼굴이 어떻게 서른으로 보이냐고

요."

 백산이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해보려고 강구두와 주위에 있는 일행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풍신개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한 번도 깎지 않은 수염이며 머리, 간간이 검은 색이 조금씩 내비치

는 빛바랜 백산의 옷 등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게 했다.

 "그럼 안 되겠네? 예쁜 여자를 소개시켜 주려했는데."

 "스물다섯!"

 예쁜 여자라는 철목승의 말에 자신의 나이를 바로 밝히는 백산이었다. 스

물다섯이란 백산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풍신개도 아니고 철목승도 아닌

바로 강구두와 그의 패거리였다.

 바로 백산이 벌였던 뇌룡현(雷龍縣)의 참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강구두 옆에 있던 주판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지천(池川) 참극 때 형님의 나이가 열다섯 살? 세상에…."

 "주판!"

 입을 떡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는 주판을 백산이 날카롭게 불렀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강구두도 주판을 향해서 힐난의 눈빛을 보냈

다.

 강호 생활을 많이 경험했던 그도 그런 처참한 장면은 처음 보았다.

 사방에 널려있던 수많은 살점들과 온몸에 피와 살육으로 덧칠한 것 같은

백산의 모습, 지금도 그때의 장면들이 악몽으로 나타나 잠에서 깨어나곤 한

다. 벌써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개방인의 특성인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풍신개와 소운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풍신개는 조금이라도 백산을 파악하기 위함이고, 소운은 백산에

대한 것이라면 일단은 관심권에 두고 있는 것이다.

 "별일 아니오.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고…."

 씁쓸한 미소를 띠고는 있으나 백산의 말투는 단호했다. 백산에게 더 이상

물어봐야 분위기만 망친다고 파악한 풍신개가 재빠르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철 아우, 자네 제자는 소개 안 시켜주나?"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형님도 처음 보시는군요. 추렴아, 이리 와서 인

사하거라."

 정천무룡 일행과 앉아서 계속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추렴이라 불리는 소녀

가 다가왔다.

 "추렴아, 인사하거라.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풍신개 구칠 형님이시다."

 "안녕하십니까, 백부님. 냉추렴이라 합니다."

 쓰고 있던 면사를 벗으며 풍신개를 향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오!"

 주루 이곳저곳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면사를 벗은 냉추렴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마중제일화라 불리고 있지. 무공 또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

고…."

 철목승의 목소리에는 제자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바로 이런 여자야. 이렇게 생긴 여자가 진짜 여자야."

 놀라운 표정으로 냉추렴을 쳐다보던 백산은 주접을 떨며 냉추렴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나 광풍노룡(狂風努龍) 백산이요!"

 냉추렴의 주위를 몇 바퀴 돌던 백산이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광풍노룡이 아니고 다쇠불알이다. 속지 말아라. 그러면서 손이나 한번 잡

아보려고? 속 보인다, 이놈아. 어디서 그런 얄팍한 수를 부려?"

 "빌어먹을 영감탱이 남 잘되는 것은 죽어도 못 봐. 캬! 마중제일화의 손을

 잡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밀고 있던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던 백산은 입

맛을 쩝쩝 다시고는 못내 아쉽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크억!"

 백산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허벅지에서 오는 강렬한 통증, 곁에

 있던 소운이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었던 것이다.

 "그래. 이런 곳까지 자네가 웬일인가?"

 어느 정도 소개가 끝나자 풍신개가 철목승을 향해서 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철목승이란 사람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절대 아니었기 때

문이다.

 "저 녀석이 구경 가자고 조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나왔습니다. 맹내의 문

제도 좀 있고요…."

 풍신개는 고개만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도 천마맹(天魔盟) 내

의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제자를 핑계 삼아서 도망치듯이 나와버렸을 것이다.

*     *     *

 며칠 간 지독하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이 무척이

나 반갑게 느껴지는 십이월 초, 드디어 투신전(鬪神戰)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시작은 여전히 정천무룡 백무천이었고 상대는 날카로운 눈매에

매부리코를 가진 꽤나 늙어보이는 인물이었다.

 "능력 있는 사람과 있으니까 자리가 달라지는구먼. 사람은 역시 잘나고 봐

야 돼."

 철혈전신(鐵血戰神) 철목승 덕분에 귀빈석에 자리한 백산과 그 일행이었다

. 백산은 얼마 전에 텅 빈 귀빈석을 쳐다보며 욕하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

고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편한지 손으로 건드려보기도 하고 몸을 굴리기

도 하면서 풍신개에게 들으라는 듯 주절거렸다.

 "저기 금뎅이 녀석과 비무하는 저 늙은이는 누구요?"

 백산은 가만히 있기가 심심했던지 백무천의 상대를 가리켰다.

 "청면혈마(靑面血魔) 조탁(曺鐸)이라는 자다. 벌써 구십이 넘었을 거다.

강호 공적으로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자인데 이곳에 건재하고 있구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백산이 뒤쪽에 있는 보자기 속에서 술

을 꺼내서 철목승과 풍신개에게 한 병씩을 나눠주고, 자신도 병째 들이켜며

 풍신개를 향해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하여간 욕 많이 처먹는 놈치고 일찍 죽는 것을 못 봤어요. 영감도 무지무

지 오래 살겠구먼?"

 커억!

 백산의 야릇한 말에 마시던 술을 벌컥 쏟아낸 풍신개가 사납게 눈을 부라

렸다.

 "인석아, 다음이 넌데 지금 술 처먹어도 되는 거야? 하여간 네 녀석은 진

지한 구석이 없어."

 "모르시는 말씀 마시오. 술이 있어야 피가 빨리 돌고. 피가 빨리 돌아야

약 기운이 빨리 퍼질 것 아뇨. 그리고 싸울 놈은 부딪쳐 봐야 알지 연구한

다고 질 놈이 이기는 것 봤소?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놈아 너의 상대는 혈승이야 혈승. 혈승은 말이다 이십 년 전에 포달랍

궁의 최고 고수인 미륵파 대라마를 살해했던 놈이야. 금단의 마공인 악마사

사공(惡魔邪死功)을 극성으로 익혔다. 조심해야 된다."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백산에게 상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콰앙!

 비무대에서 들리는 폭음이었다.

 충돌로 창백해진 청면혈마(靑面血魔) 조탁과 정천무룡 백무천이 비틀거리

며 서로 반 보씩 물러났다. 그들의 앞 대리석 바닥에 깊숙이 찍힌 발자국들

은 두 사람의 공력 깊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든 기파가 비무대 주변에서 회오리치고 그들의 의복이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정도 최고의 신성이라 해서 대단한 줄 알았더니 아직 애송이에 불과 하구

나. 쿡! 쿡! 쿡!"

 "노 마두! 소문보다 훨씬 약한 것 같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이 자리

에서 죽는다."

 서로를 노려보며 두 사람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로 인하여 주변의 대리석 조각들이 부서져 떠올랐다.

 이어서 터지는 쌍방의 커다란 외침.

 "청혈마라장(靑血魔羅掌)!"

 "제왕천운장(帝王天雲掌)!"

 푸른빛이 일렁이는 강기덩어리와 여린 황금빛이 감도는 백무천의 장공이

그들의 중앙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계속되는 그들의 공수는 한 시진이 지나도록 끝날 줄

을 몰랐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말이 어울리는 그러한 접전이었다. 관중석 여기저

기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일부 무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산이 앉아있는 곳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느냐? 백무천이 금황신공(金黃神功)을 사용하지 않

고 저렇게 잔재주만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저러다 손해만 보게 될 것 같은

데?"

 풍신개도 백무천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산에게

 말을 건넸다.

 "그게 공… 뭐라고 하더라. 그래 공명심 그것 때문이 아니오. 멋있게 처리

하고 싶겠지. 강호의 대마두라고 알려져 있던 청면혈마를 자신의 손으로 처

리해서 강호인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시키고 싶은 것 아니겠소? 하여간

정파 놈들이란…."

 뿌연 잔영만 남기고 움직이던 그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청면혈마 조탁의 몸에서 청색의 운무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백무천의 몸에

서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황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황신공이닷!"

 관중석의 누군가가 감탄을 연발하며 외쳤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철목승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냉추렴이 백산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물었다.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자세하게 설명해주겠소."

 백산은 말을 걸어준 냉추렴에게 호감을 표시하며 제 곁에 앉히기 위해서

수작을 걸었다. 와락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깜짝 놀란 백산이 진땀을 흘

리며 황망히 입을 열었다.

 "지금 저 금뎅이 녀석 엄청 후회하고 있을걸요? 처음부터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금황신공인가 하는 것을 썼더라면 쉽게 끝냈을 텐데, 폼 잡느라 너무

많은 진력을 낭비했어요. 지금 보니 저 금황신공인가 뭔가 하는 것도 완벽

하지도 않구먼."

 곁에서 듣고 있던 냉추렴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도 백무천이 이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

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금황신공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말은 그녀

로서는 믿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사부인 철목승을 쳐다보자 그 또한 놀란 눈빛으로 백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공이 강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청년. 자신보다 높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데도

그의 무공 수준은 파악되지 않는다. 묘한 청년이었다.

 "그럼 백무천이 자만심 때문에 자신의 무공을 완전하게 발휘하지 않았다가

 피해를 본다는 말씀이세요?"

 자신에게 꼬치꼬치 물어오는 냉추렴에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백산이 고

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백산의 생각 대로였다. 지금 백무천은 후회막급이었다. 자신의 자만심이 일

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금황신공이 아닌 평범한 무공으로 청면혈마

를 처치하려 했던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상대였던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차기 맹주후보인 정천무룡 백무천이 아닌가. 백무천의 표

정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백무천이 청면혈마 조탁

을 향해서 커다랗게 외쳤다.

 "청면혈마! 다시 태어나거든 부디 선하게 살아라! 금-황-신-공-!"

 청면혈마는 그 나름대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 약관밖에 안 되는 놈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현재 십 인의 투신 중에

서 자신이 두 번째로 강하다. 그래서 저놈을 맡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결코 혼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 다음대의 천무맹(天武盟)의 맹주감이라는 네놈과

함께 가는 거다.'

 청면혈마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내공을 짜냈다.

 청광 속에 묻혀있던 그의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서 곤두섰고 그의 옷이

거세게 펄럭였다.

 "청-혈-마-마-공!"

 백무천과 청면혈마의 강렬한 외침이 투신전의 대기를 갈랐다.

 백무천의 양손에서는 일곱 마리의 금룡(金龍)이 튀어나와 청면혈마를 향해

서 날아가고, 청면혈마의 양손에서는 수십 개의 반월형의 강기덩어리가 쏟

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머금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날

아가는 금빛 용과 푸른색의 강기는 보는 사람에게는 묘한 아름다움을 선사

하고 있었다.

 기이한 정적.

 두 개의 강기에서 관중석까지 전해지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빛살 같은 속도로 상대방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픽!

 미약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강기가 부딪쳤다.

 터져 나오는 황금빛 광휘와 푸른빛 무리가 보는 이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

한 가운데 긴장 속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백산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

다. 반월형의 청색 강기를 부수며 돌진하는 금빛 용과 그 용을 피하며 나아

가는 청색의 강기 하나.

 이윽고 금빛 용과 청색 강기가 서로에게 작렬하는 순간 청면혈마(靑面血魔

) 조탁의 몸은 얼굴 쪽부터 가루로 부서져내리기 시작했고, 백무천은 한 사

발이나 되는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서서히 금빛과 푸른빛이 사그라지고 드러나는 장내의 정경.

 "우-우-우! 와! 와아! 정천무룡이 이겼다. 역시 정파 최고의 신룡 정천무

룡(正天武龍)이다."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감탄의 환호성이 흘러나오고, 무릎을 꿇었던 정천무

룡 백무천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면혈마를 바라보았다.

 상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지를 밟고선 청면혈마의 다리만이 싸

움의 승자와 패자를 알려주고 있었다.

 천천히 관중석을 향해서 눈을 돌린 정천무룡 백무천이 쏟아지는 환호에 답

례라도 하듯이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백무천은 웃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예상외로 내상이 심한 것 같았다. 칠성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던 금황신공,

 진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그것마저도 완전하게 전개하는 데는 무리가 있

었다.

 그래서 호신강기를 완전하게 펼치지 못했고, 자신의 가슴을 향해서 달려드

는 청색 강기를 보면서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자만심의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정신이 아득해진 백무천은 후들거리는 다

리를 이끌고 비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랍군. 이곳에서 고금오천무(古今五天武) 중의 하나인 금황파천신공(金

黃破天神功)을 목격하게 되다니…."

 철혈전신(鐵血戰神) 철목승이 놀란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고금오천무? 그것은 또 뭐요?"

 철목승의 말에 백산이 궁금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고금오천무 무림사(武林史) 이래로 가장 강했던 다섯 개의 무공을 말한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거라 했던 다섯 가지의 무공.

 고금오천무 중 하나라도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될

수 있다고 알려진 무공으로, 천마심공(天魔心功),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

功),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 사사지옥혈공(邪邪地獄血功), 금황파천신공(

金黃破天神功)이 그것이었다.

 "그럼 벌써 고금오천무의 세 가지가 나온 셈이네요?"

 곁에 있던 냉추렴이 철목승의 말을 듣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빙혼마녀, 정천무룡은 알겠는데 나머지 한사람은… 바로 철 숙

부군요?"

 냉추렴의 말을 듣고 있던 소운이 재빠르게 끼어들면서 백산의 말을 가로막

았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백산이 득의양양하게 빙긋 웃고 있는 소운을 노

려보며 입을 열었다.

 "고금오천무란 이름만 거창했지 별것도 아니네 뭐. 저 금뎅이 자식이 펼친

 것을 보니까 금색 용인가 하는 것 대가리가 부수면 없어질 것 같더구먼."

 "그것은 자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일세. 내가 보기에는 정천무룡이 금황파

천신공을 완벽하게 익히지를 못한 것 같네. 그래서 저렇게 약해 보인 것이

고."

 "그 말이 맞을 거야. 거의 칠성 정도 익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금

황신공(金黃神功)이란 것이 고금오천무인지는 나도 몰랐네 그려."

 철목승의 말에 풍신개가 맞장구를 쳤다.

 정천무룡이 익힌 무공이 고금오천무 중의 하나인 것을 풍신개도 모르고 있

는 것 같았다.

*     *     *

 "괜찮으냐. 사제?"

 운학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을 것 같습…."

 운학자는 말을 흐리며 푹 쓰러지는 백무천을 부축하며 안타까운 듯이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층의 공동파의 숙소 천실.

 침상에 누워있는 백무천을 내려다보며 운학자와 공동사장로의 맏이인 목령

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럼 백 사숙이 더 이상 비무를 계속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운 사백!"

 "호신강기로 온몸을 보호했다 해도 청혈마마공을 정면으로 받았네.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지. 이 정도인 것만 해도 다행인 게야. 본인이 일어나봐야

 알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더 이상의 비무는 무리인 것 같네."

 안타가운 심정으로 백무천을 내려다보는 운학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

했다.

 "으음!"

 "정신이 드느냐? 사제."

 "아 사형!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처음에 자만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백무천은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직 정확한 몸 상태를 알

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심하게 당한 것 같았다.

 아무런 걱정도 없던 사형에게 근심거리를 안겨주고 말았다.

 그도 잘 알고 있다. 천무맹 내에서 공동파의 위치를. 말이 좋아 구파일방

의 하나이지 그 대우는 일반 군소방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힘있는 문파들의 냉대 속에 그의 사부와 사형들은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이름 없는 군소방파이었다면 그들의 냉대와 무시를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들의 자존심이 다른 문파들의 냉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공동파가

 어떤 곳이던가, 사마의 처단과 강호정의 실현이라는 단어 앞에는 항상 공

동파가 있었고 공동 문인들의 죽음이 있어왔다.

 오십 년 전에 백살마대(百殺魔隊) 출현 때도 그랬다. 늘 싸움의 선두에는

공동이 있었고, 그로 인한 피해 또한 극심했다. 그러한 이유로 오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공동이란 이름만 가지고 구파일방에 끼어있을 뿐이었다

.

 그 모든 것이 정천무룡(正天武龍)이란 이름 하나로 변했다. 강호 후기지수

 중 최고의 인물로, 차기 맹주감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맹내에서 이 만상투인전에 대해서 탐

탁찮게 여기는 이들이 꽤 있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의 문파에서 보

낼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질시일 뿐이었다.

 그래서 참가를 결정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 이것을 복용하고 일단 운기부터 해보아라. 몸 상태를 먼저 보아야 앞

으로의 일을 결정할 것 아니냐. 그리고 너무 투신전에 연연해하지 말거라.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지 꼭 투신이 되려는 것은 아니질 않느냐."

 사제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이 투신전 참가에 대한 의미를 애써 축

소시키려 하고 있으나 얼굴에 나타나는 씁쓸한 표정은 지우지 못했다.

 "그 버러지 같은 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백무천이 백산의 근황에 대해 운학자에게 물었다. 운

학자는 그런 사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무맹(天武盟)의 삼 공자인 그가

왜 그렇게 삼류건달 녀석에게 신경을 쓰는 것인지….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백산이란 녀석은 그의 말대로 밟아버리면 없어지는 버

러지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개방의 인물인 풍신개와 어울리는지는 모르

지만 전혀 신경 쓸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무공 같지도 않은 요상한 방법과 암습으로 상대를 물리치고 투신전까지 왔

지만 어느 누구도 그놈의 무공이 높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의 별호가 운수대통으로까지 불리고 있질 않는가! 순전히 운에

의해서 투신전까지 올라왔다 여겼고, 운학자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녀석에게 신경을 쓰느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운학자가 백무천을 향해서 힐난의 눈초리를 보

냈다.

 "글쎄요. 저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석만 보면 기분이 나빠

집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데도 공연히 싫어지는 느낌이

 드는 경우 말입니다. 그놈이 그런 경우 같아요. 주는 것도 없는데 미운 놈

입니다. 그놈은…."

 백무천의 말에 운학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자신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보통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사람은 평생의 호

적수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적수는 자신만이 알아본다고 백무천이 그런 감

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그런 놈을 호적수로 느낀단 말인가?

 운학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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