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생사비무(生死比武) 이차전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 이백오십 명이나 되는 인간들의 목숨을 삼켜버린
공포의 괴물. 스멀거리며 달려오는 새벽안개 속에 칙칙한 회색 빛을 토해
내며 오늘도 중원(中原)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죽어간 영혼들의 흐느낌이런가.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대지를 휘감고, 또
다른 죽음을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는 시작되었다.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 이차 비무가 시작된 날.
이차 비무는 역시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대문파의 화려한 무공을 선보인 그는 상대방을 간단하게 처리하고는 유
유히 비무장을 나갔다.
정천무룡 백무천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의 환호성 속에 이름 없는 무사는
홀연히 사라지고, 또 다른 피의 향연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 또한 아니고, 거 참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어렵네?"
자신의 철구를 이리 저리 던졌다 받고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백산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에이, 내가 언제 남들 무공 연구하고 싸웠냐. 그냥 부딪쳐보면 알겠지."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백산은 잠이라도 자려는 양 다리를 뻗으며 고개를
의자 등받이로 젖혔다. 그의 눈에 풍신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어울리지 않게."
"아, 마침 잘 왔소. 금방 저놈이 펼쳐 보였던 검법 말이요. 소림의 달마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혹시 그 검법 알고 있소?"
"이놈아 내가 누구냐, 천하의 풍신개 아니냐. 내가 모르는 무공은 무림의
어떤 놈도 모른다. 그것은 달마삼검이라는 소림(少林)의 검법이다. 달마삼
검이란 소림에 있던 유일무이한 검법인 달마십삼검의 정수만을 뽑아서 정리
한 것으로, 절대의 수비초식이며 공격검법이다. 소림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달마가 창시한 검법답게 공격보다는 수비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
는 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의 수비초식이라고? 에이 거짓말하지 마쇼. 내가 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던데. 자 보시오."
백산이 백무천이 펼쳤던 달마삼검을 시전해 보이면서 그 허점을 짚어가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휘두를 때는 여기 바로 불알에 허점이 생기게 되지? 또 이렇
게 뻗을 때는 가슴이 비지 않소."
"예끼 이놈아, 그 자리가 빈다고 공격이 가능할 것 같으냐? 그것이 가능했
다면 절대수비 초식이란 말을 쓰지도 않았어."
풍신개도 그런 허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점이 있음
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불가능하다. 허점을 공격하기 위해서 손을 쓰게 되면
자신이 먼저 당하고 만다.
그래서 허점 아닌 허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래서 무림인은 안돼요. 왜 꼭 검이나 도를 가지고 공격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면 평생 동안 무공을 익혀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어요. 영감이 이야기하는 달마삼검인가 하는 것
은 무림인들이 흔히들 하는 직선 공격에는 천하무적의 수비초식일지 몰라도
곡선 공격이나 이렇게 몸으로 하는 공격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것 같은
데, 안 그렇소?"
풍신개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이 건달 같은 놈이 절대무적인 달마
삼검의 약점을 공격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 검이나 장공 등 직선적으로 공격하는 것에는 약점이 없다.
하지만 곡선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면 제압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실력
자체가 비슷한 상황이라야 되겠지만.
그러나 저러한 방법은 무림인의 사고로는 결코 제시할 수 없다. 모든 무림
인들은 검이나 도, 그밖에 여러 가지 무기 등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선은 자
신의 무기를 가지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고정 관념에 익숙해져 더 큰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허허, 지난 육십 년간을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이 단순한 놈이 생각해 내
다니. 이놈의 사부가 누구인지 궁금하구먼.'
"아, 그렇다고 너무 감탄하지는 마쇼. 훌륭한 사부 밑에서 초식위주로 배
운 친구들은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오로지 길바닥에서 뒹굴며 싸워본
놈만 보이는 것이요."
"됐다, 이 녀석아. 어째 네 녀석은 인상이 좀 바뀌려고 하면 꼭 초를 쳐서
원점으로 돌려나요. 싸가지 없는 놈."
언제나 그랬다. 이 백산이란 놈은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할 만하면 쓸데없
는 자화자찬으로 자신을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버린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한 모습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성, 바로 말 바꾸기다.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라치면 재빨리 화제를 다른 것으로 전환하여 생각하는 것을 막아버
린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기 말이요. 저기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저 자리는 뭐요? 앉아있는 놈들
이 하나도 없던데."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만 되어있는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보아도
아주 멋지게 보이는 곳을 보며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저곳은 우리들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쳐다보기도 힘든 높은 놈들의
자리다. 아마도 천마맹, 천무맹, 천사맹이나 강호무림의 유명문파 떨거지
들이 앉는 자리겠지. 그놈들은 투신전(鬪神戰)이나 시작되어야 보일 것이다
. 너 같은 하류들을 보려고 어려운 발걸음하겠냐?"
"시펄 놈들, 지들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저런 데서 구경을 한단 말이
야?"
백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표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별
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강호무림인들에 대해 까닭 모를 적개심까지 심어주
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냐. 네놈이 생사비무를 보고 있고?"
"내가 보아야 될 놈이 있어서 말이요. 나와 조금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
고. 오! 이제 나왔네."
비무대에는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장손인 참마도(斬魔刀) 팽월(彭月)과 그
의 상대인 독인마도(毒刃魔刀) 갈후승(葛厚承)이 삼 장을 마주하고 서 있었
다.
"네놈이 하북팽가의 기대주라는 참마도 팽월인가? 과거 오천맹(五天盟)의
후예라고 하던데 다시 화려한 옛날을 꿈꾸고 있나보지?"
참마도 팽월은 아무 말 없이 독인마도 갈후승의 눈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애도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빼어들고는 일도직파(一刀直破)의 수법으
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번쩍 하는 빛 무리가 독인마도 갈후승을 향해서 빛살처럼 쭉 뻗어 나갔다.
갈후승은 감히 맞받아치지를 못하고 간신히 옆으로 구르는 것으로 피해냈
다.
"나는 말이다. 입으로 싸우는 놈들을 제일 싫어해. 무인은 무기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자, 오너라!"
외침과 함께 팽월이 덩치에 걸맞지 않은 빛살 같은 속도로 독인마도 갈후
승에게로 다가가며 제 이격을 날렸다. 이번에도 조금 전과 똑같은 일도직파
의 수법이었다.
좀 전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두 가닥의 도기(刀氣)가 형성되
어서 앞으로 뻗어나간다는 것이었다.
끼르릉! 하는 거북한 소리가 들리면서 자욱한 돌가루가 피어올랐다. 독인
마도 갈후승은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당황한 모습으로 자신의 도(刀
)를 쳐들어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카-앙!
도(刀)와 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갈후승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 모
금의 피를 토해냈다.
"커억! 대단하구나, 팽월. 그러나 이 정도 가지고 나를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지."
이어서 터지는 독인마도 갈후승의 거대한 외침,
"묵운(墨雲)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 묵천사-인(墨天斜刃)!"
동시에 갈후승의 몸 주위로 시커먼 묵기가 생성되면서 검은빛의 도기가 팽
월을 향해서 죽 뻗어나왔다.
이에 뒤질세라 팽월도 방금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다섯줄기의 도기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콰과쾅!
비무대가 들썩일 정도의 폭음과 함께 두 개의 기파(氣波)가 중앙에서 부딪
쳤다.
크윽! 큭!
연속해서 두 마디의 신음소리와 함께 팽월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갈후
승은 무려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다.
명백한 팽월의 승리였다.
"대단하군, 팽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갈후승은 도(刀)를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가슴 정 중앙에 일자로 세웠다.
전보다 더 진한 묵운이 피어오르자 팽월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자신의 오
호단문도를 머리위로 치켜든 채 방금 전과 같은 일도직파의 형식을 취했다.
"묵천마-인(墨天魔刃)!"
"무극-도(無極刀)!"
두 사람의 외침과 동시에 갈후승의 묵빛 도에서는 수십 개의 도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도기를 향해 팽월의 도에서 나온 것은 한 가닥의
강기 덩어리뿐이었다.
그 강기 덩어리는 갈후승의 도기를 가닥가닥 자르며 전진하여 가슴을 그대
로 갈라버렸다.
"앗, 도강!"
외침소리와 함께 풍신개가 벌떡 일어났다.
도강에 의해 가슴이 쩍 벌어지며 찢겨버린 갈후승은 그대로 서 있다가 천
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와! 와아!"
비무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백산 주변에 있던
다른 투인들도 얼굴이 굳어진 채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강이라니. 칼은 잡은 무인이라면 강기의 경지를 얼마나 원하던가. 무수
한 영약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뛰어난 오성, 이런 것이 없다면 감히 꿈을
꿀 수도 없는 경지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강기는 새로운 무공의 경지라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강기이하의
단계는 무공이라 하지 않고 무술이라고 하며, 강기의 단계부터를 진정한
무공이라 칭한다.
"저게 그렇게 대단한 거요? 저 자식은 저거 한번하고 지쳐서 헥헥 거리는
데?"
백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풍신개를 쳐다보며 의문을 표했다. 자신
의 사부인 팽무도가 이야기하기를 저 정도이면 기껏 삼류무사의 경지밖에
안 되는데,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도강도 대단하지만 저 나이에 도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거지. 아마 십 년 혹은 이십 년 후에 우리는 새로운 도제(刀帝)를 보게 될
거야. 네놈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다, 이놈아."
"오호! 그래요? 이 영감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나?"
자신의 사부에게 부쩍 의심이 가는 백산이었다.
"그런데 말이요. 내가 알기로는 그 강기가 뭔가 하는 놈을 시전하게 되면
그 당한 부위가 매끄럽게 된다는데 저기 독인마도란 놈의 가슴은 왜 저렇게
걸레가 되어있는 거요?"
"그것은 저 참마도(斬魔刀) 팽월의 도강의 경지가 초입이라서 그렇습니다.
"
어느 결에 왔는지 구소운이 하는 소리였다.
"일단 강기 초입에 들어섰으니 일이 년 후에는 도강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겠지요. 이곳에서 살아만 남는다면…."
"남 걱정하지 말고 소운, 너 비무가 내일 아니냐. 구룡편(九龍鞭) 현무일
이란 놈이던가? 그놈 되게 강해 보이던데 대책은 있냐?"
"대책은 무슨 대책, 겪어보면 알겠죠.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는데 뭐!"
그러며 백산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나를 쳐다봐! 나는 말이다 투신(鬪神)을 노리는 놈이야. 벌써부터 상
대를 의식해서 준비할 수준은 아니라고. 너와는 수준이 달라, 수준이. 근데
그 사독(死毒)이란 놈 좀 하냐?"
"왜? 이제 좀 겁이 나느냐? 사독 장서이란 놈은 말이다. 독에 있어서는 사
천당문(四川唐門)과도 견줄 수 있는 놈이다. 네놈은 각오해야 할게야. 나에
게 비책이 있는데 가르쳐주리?"
풍신개가 백산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독주로 생색을 내려고 했다.
"됐어요, 됐어. 영감의 머리에서 나올 게 뭐 있다고. 내가 뭘 바라겠소."
백산은 풍신개의 말을 무 자르듯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소운을 쳐다보
았다.
"야, 소운아. 내가 저번에 그 새끼 싸우는 것을 한번 보았거든. 그놈의 약
점은 말이야 휘두르는 채찍의 중앙에 있더라. 채찍 끝은 무지하게 무서운데
그 끝을 피하면서 접근만 한다면 승산이 있어 보이던데.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한번 해볼래?"
"일단 들어보고요."
"자, 그럼 이쪽으로 와봐. 거 영감도 이쪽으로 오시오."
백산은 두 사람을 자신의 옆에 앉히고는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러다 말로 해서는 이해를 시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바닥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채찍이 말이야, 이렇게 쭈욱!"
백산이 바닥에다 손으로 줄을 그었다.
청석으로 되어있던 바닥에는 마치 칼로 두부를 내리그은 것처럼 기다란 선
이 생겼다.
풍신개와 소운이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도 자신의 방법이
먹혀들어 간다는 생각에 흥이 오른 백산은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시 손가락으로 청석 위를 헤집으며 더욱 열을 내어 설명하고 있었다.
"일단 여기 끝을 피하고 그놈 오른손의 바깥쪽 방향으로 이렇게 몸을 회전
시키면서 빠르게 접근하는 거야. 이때 중요한 것은 엄청난 회전력이야, 여
기 있는 구룡편의 강기를 튕겨버릴 정도로. 그러면 그놈이 당황할 것 아냐.
그때 너의 그 연검에 회전력의 여파를 실어. 그 다음에는 뎅겅 하고 그놈
의 목을 자르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자신이 손으로 파놓았던 구룡편 현무일의 목 부분을 횡으로 그어
서 잘라버렸다.
청석 바닥은 그의 손가락 장난으로 그야말로 낙서장이 되어있었다.
풍신개와 구소운이 넋이 나간 얼굴로 백산을 빤히 쳐다보자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먹혀 들어갔다고 생각한 백산은 싱글벙글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생각이 어때요. 굉장한 수죠?"
백산이 만들어놓은 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풍신개가 느닷없이 호칭을 사용
하여 백산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이, 백 공자! 백 공자!"
"나?"
백산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풍신개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린 저 그림 말일세…."
"정말이지 너무 멋진 수 아니요? 저렇게만 하면 구룡편 현무일 그 녀석은
꼼짝없이 저승으로 가게 되어있어요."
답답해진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도 말 좀 하자 이놈아. 말 좀 잘라먹지 마라. 앙?"
"너 지금 이 바닥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아느냐?"
"무엇은 그냥 흙바닥이지. 엉! 이건? 흙이 아니고 돌이었나?"
"그것도 이놈아, 그 단단하고 단단하다던 청석이다. 이놈아, 한데 이 청석
위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손가락으로 새겨? 네놈 나에게 뭐 할 말
없냐?"
"이게 청석? 에이 거짓말하지 마쇼. 이게 청석이면 이렇게 쉽게 지워지겠
소?"
하면서 자신이 손가락으로 새긴 그림을 발로 쓱쓱 지워버렸다. 그러자 마
치 흙에서 그림을 지우듯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냥
지워진 것이 아니라 청석의 표면이 가루로 변했다가 다시 굳어서 붙어버린
것이다.
이에 얼이 빠진 풍신개는 백산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어! 어! 어!'만
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돌이 아니고 흙을 굳혀서 만든 것일 거야. 그 비싸다는 청석을 이
런 곳에다 쓸 리가 없잖아? 야 소운, 가자 배고프다."
자신의 실수를 얼렁뚱땅 넘겨버린 백산은 배가 고프다며 서둘러 주루를 향
해서 걸어갔다. 아직도 얼이 빠져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풍신개와 소운이
어기적거리며 백산을 뒤따랐다.
'하아! 어쩌자고 거기서 그런 짓을 했냐, 이 등신아. 아이고, 이 등신.'
백산은 줄곧 자책하면서 주루 쪽으로 가고 있었다.
'소운이 녀석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거기서 그런 짓은 안 했을 텐데. 장가
한번 가볼 욕심에 너무 과했어. 으이그 이 바보, 이제 이걸 어떻게 수습하
냐고?'
며칠 전 측간에 가다가 우연히 소운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하려고 하는데
여자들만의 장소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지금껏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소운이 여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보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다 자신의 무공이 들통나고 말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좀더 먹으라는 소운을 뿌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와서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어이 백산, 방에 있는가?"
'으이그. 저 영감은 또 왜 오는 거야?'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싫어서 자는 체하고 있었으나 이어지는 풍
신개의 말에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문이나 내 볼거나?"
"원하는 게 뭐요?"
"자네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음세. 비밀은 엄수하지."
"정말이요? 약속했소, 영감. 그 약속 어기면 영감은 고자요. 고자 알겠소?
"
"그게 말일세. 요즈음 몸도 허하고 술도 당기고 해서 말이네."
"알았소. 내 이름 달고 먹을 만큼 드쇼. 영감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 알아서 하쇼, 젠장."
풍신개가 벙글거리며 나가자 백산은 젠장을 연발하며 벌렁 드러눕고 말았
다.
"아이고! 내 피 같은 돈. 사부 저승 갈 때 저 영감도 같이 데리고 가시오.
제발 부탁이요."
* * *
광기 가득 찬 인간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백산과 풍신개는 씁
쓸한 표정을 지은 채 투인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나도 비록 장사치들의 등을 처먹고 사는 놈이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닌
데, 이건 숫제 인간이 아니라 짐승 새끼들이구먼. 아니 짐승보다 더해."
백산은 관중들의 모양새를 쳐다보면서 씨부렁거렸다.
"네 말이 맞다. 이 세상에 인간처럼 탐욕스러운 동물은 없다. 어떤 이는
돈이 필요해서 왔을 테고, 어떤 이는 피를 보는 욕망을 즐기기 위해서 이곳
으로 왔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저 바닥에 보이는 피처럼 인간을 흥분
하게 하는 것은 없지. 결국 인간의 욕망의 끝은 바로 이곳이야. 아마도 인
도부(人刀斧)란 놈하고 혈목괴(血木怪)란 놈이 오늘 나왔나 보구나. 인도부
란 놈은 상대를 완전하게 해체시켜버렸고, 혈목괴란 놈은 찢어버렸어, 그것
도 여자를. 그래서 저렇게들 광분하고 있는 거야. 몹쓸 사람들."
풍신개가 탄식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인간의 죽음을 보고 저렇게 즐거워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은 공식적으로 살인을 즐기는 자리이다. 죽음을 놓고 내기를 하는 곳
이기에 자신이 돈을 걸었던 인물이 상대를 죽이는 것에 대해 환호성을 질러
도 누구 하나 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벌었다는 것에 환호성을 지르기는 했지만 그 이면엔
붉은 피로 인한 광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비무대 위에서는 구소운과 구룡편(九龍鞭) 현무일(玄無一)의 생사비무(生
死比武)를 준비하느라 여기저기 널린 살점을 쓸어내고, 바닥에 고인 피를
닦아내며 새로운 죽음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붉은 피에 익숙해진 관중들은 인간의 내장과 팔다리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마치 도살장에서 죽어나가는 짐승을 보고 있는 듯 담담하기만
했고, 더욱더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라도 하는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번
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관중들과는 상반된 표정으로 묵묵히 비무장을 주시하는 인간들의 집
단이 있었으니 바로 투인 대기석에 있는 생사투인들이었다.
비록 자신들이 원해서 이곳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저곳에 있는 살과 피가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의 표정은 침중하게 굳어있었
다.
그들 속에 있는 풍신개와 백산의 표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풍신개로서는 무림인이라는 자긍심 하나면 만족해했던 무인들이 돈을 위해
서 목숨을 팔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웠고,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사냥꾼일
수밖에 없는 백산은 저러한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추악한 인간의 행태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을 때는 꼭 필요한 것이 하나있다. 바로 술이다.
맹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풍신개와 백산은 묘한 기대감을 가진 눈빛으로 서
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네…!"
"저어…!"
서로를 향해서 동시에 입을 열었던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
적이며 곧장 입을 다물어버렸다.
"영감! 무슨 할 말 있는 거요? 말해보쇼."
"아닐세. 자네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먼저 이야기해보게."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할 말이 있으면서도 서로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영감! 소운에게 맞으면 되게 아프겠죠?"
"그럼! 내 다른 건 몰라도 미친 개 잡는 방법 하나는 확실하게 가르쳤거든
."
소운에게 구타당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잠시 동안의 침묵에 이어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냥 이렇게 보기는 너무 심심하지 않겠소?"
"피 냄새 때문에 영 목이 컬컬하구먼."
드디어 서로 간에 속셈을 털어놓았다. 술이 고프기는 한데 소운의 후환이
두려워서 그렇게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가도 가기 전에 맞기부터 하다간 습관이 될 수도 있는데….'
뭐라 혼자 중얼거리던 백산이 드디어 마음을 굳혔는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먹고 봅시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냉큼 다녀오겠소."
백산과 풍신개의 주사(酒邪)를 경험했던 주변의 생사투인들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자리를 옮겨버렸고, 백산과 풍신개의 술잔치는 다시 시작되었
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안다. 술 마실 때 나중일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일단 한잔 술이 목으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세상사 근심
걱정 모두가 술잔 속으로 녹아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아이고. 의자가 왜 이리 흔들리나?"
질펀하게 술에 절은 두 사람이 비무대를 쳐다보기 위해서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런…저런…꺼억…."
구소운의 행동이 안타까운지 백산과 풍신개는 비틀거리면서도 탄성을 연발
한다.
그때 비무대 위에 있는 구소운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구룡편을 피하기
에 급급해하고 있었다. 구룡편을 피하다 보니 어느새 등이 벽면에 맞닿는
것을 느꼈다. 바로 풍신개와 백산이 앉아 있는 곳 바로 아래쪽이었다.
아무리 취선보(醉仙步)를 이용하여 부지런히 움직여도 구룡편의 편두는 눈
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하게 자신의 심장을 노리며 쫓아다니고 있었다.
헉! 헉! 헉!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구소운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나에게는 무리인가? 아니야 할 수 있어! 자세히 보자. 무엇인가 허점이
있을 거야. 허점.'
무너지려는 자신을 추스르며 으스스한 살기를 머금고 다가오는 구룡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흐름이 있었다. 마치 파도가 치듯 일정한 흐름을 가지
고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의 뱀이 나아가듯 그렇게 구룡편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미리 선점하고 있다!'
순간 구소운은 보았다. 자신의 몸이 방향을 트는 순간 구룡편 현무일의 손
이 교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래! 바로 그거다! 나는 지금 취선보를 펼치고 있다. 술이 취해서 움직
이는 사람은 방향을 정해놓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를 못했
다. 그래서 방향을 읽히고 있었던 것이다.'
구소운의 눈이 번쩍 빛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몸이 넘어질 듯 멈추고 다
시 앞으로 꼬꾸라질 듯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만취한 술꾼 그 자체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소운은 취선보의 새로운 경지를 터득하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도 구소운의 호흡이 구룡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지금껏 심장을 노리던 거대한 뱀의 머리가 미풍이 되어 구소운의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장이나 되는 구룡편을 피하고 상대에게
접근하여 공격한다는 것은 요원하기만 했다.
'결국은 백 공자가 이야기한 방법밖에 없는 건가?'
편두를 타고 회전해서 접근하라던 백산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구룡편을 향해서 조금씩 회전을 걸어보았다. 자신을 압
박해오던 힘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구소운의 변화에
흠칫 놀란 구룡편 현무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결국 나도 밑천을 다 보여야 하겠군.'
지금 상태로는 구소운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구룡편 현무일의 움직
임이 격렬해지고, 뒤이어 '구룡만편!'이란 외침을 토해낸 현무일은 편을 잡
고 있던 팔을 열십자로 힘차게 휘둘렀다.
구룡편 현무일이 자신의 최후의 수를 펼치기 위해서 가졌던 순간적인 틈을
이용하여 구소운이 구룡편의 왼쪽을 향해서 극성의 취선보를 전개하며 뛰
어들었다.
새파란 강기에 휩싸인 구룡편의 아홉에 달하는 편두가 구소운의 심장을 노
리고 있었다.
순간 관중석에서는 '아!' '저런!' 하는 탄성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관
중들이 안타까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나약해 보이는 구소운의 몸이 구룡
편의 편두를 향해서 무모하게 뛰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이구!"
바로 그때 의자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쳤는지 풍신개와 백산이 동시에 비
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편 구룡만편이란 현무일의 외침과 함께 뛰어들었던 구소운은 자신의 심
장을 향해서 새파란 독기를 머금고 날아오는 아홉 개의 편두를 보고는 입술
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뛰어들었고 회전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 전진하게 되면 자
신의 왼쪽 어깨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문득 한쪽 팔이 없어진 자신의 모습 위에 백산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떠올
랐다.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곳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
았다.
서글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도 못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여인이기 이
전에 무인이라는 말을 되뇌며 회전을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내공을 뽑아 올려서 회전을 시작하자 바닥의 대리석판이 부서
지며 돌가루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무
서운 속도로 구룡편의 흐름을 따라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구룡편 현무일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구소운의 심장으로 편두를 찔러 넣으려는 순간, 무엇인지 모를 힘에 의해
편두의 방향이 틀어지며 허공을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시선에 구소운
이 구룡편의 흔들림과 똑같은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지쳐들고 있는 것이 보
였다.
바윗덩어리도 잘라버릴 정도의 강기가 서려있는 구룡편을 극도의 회전력을
이용하여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현무일이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자신의 구룡편의 움직임을 바꾸기 위해
서 몸을 움직이는 순간 턱 아래로 흰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현무일의 눈에 편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몸뚱이가 보였다
'아니, 어떻게 내 눈에 나의 몸이 보일 수 있는 거지?'
현무일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비무대 바닥
으로 쓰러지며 머리가 없어진 목으로부터 피가 솟아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
이다. 회전력에 의해서 얻어진 구소운의 쾌검은 현무일의 목이 떨어진 상태
에서도 잠시 동안 사고의 기능을 유지시켜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관중석에서는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임기웅변과 과감한 판단력으로
자신보다 강자를 물리친 구소운에 대해서 진정으로 열광과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결과와 급격한 회전력으로 정신이 없던 구소운은 헐떡
거리는 숨을 가다듬고 백산과 풍신개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십
여 개의 술병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풍신개와 백산은 둘이 포개져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구소운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지고 눈동자가 홱 돌아갔다. 그 순간 자신
의 내상에도 불구하고 극성의 취선보(醉仙步)를 발휘하여 투인 대기석으로
날아간 소운은 술에 절어있는 두 짐승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퍼억!
"아악!"
퍽!
"으악!"
파악!
거의 일 각여 동안 두 사람을 구타한 구소운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숙
소로 가버렸다. 잠시 후 풍신개와 백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이구! 눈이야. 웬 놈의 여자가 저렇게 손이 매워요. 이러다 내일 비무
에 지장 없으려나 모르겠네."
백산이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풍신개를 쳐다보았다.
"이놈아. 그래도 네놈의 허리는 한 대도 안 때리더라. 하지만 나 좀 봐라.
허리, 얼굴 할 것 없이 온몸에다 대고 미친개 잡는 권법을 난사해버렸어.
아이고, 허리야!"
백산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은 퉁퉁 부은 얼굴로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
서 투덜거렸다.
"네놈이 보냈냐."
"영감도 보냈잖소."
"나는 완전하게 처리하지 못했어. 다섯 개나 되는 것을 네놈이 다 처리하
는 것 같더구먼."
"여자 아니요, 여자. 여자 몸에 상처 나는 것은 못 봐요."
풍신개와 백산은 뜻 모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백산과 풍신개는 그 놈의 술 땜에 완전히 개가 됐다.
잠시 후 일층에 있는 주루의 주방에서는 달걀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두
인간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했다.
* * *
"어디 있어요! 빨리 피독주 내놔요!"
"아 글쎄, 이놈이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인단 말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 피독주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소운의 앞에
서 풍신개가 쩔쩔매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백산의 비무에 있었다.
비무 상대가 독공을 연성한 사독(死毒) 장서이(張瑞二)였기 때문이다. 백
산에게 주기 위해 풍신개에게 피독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까지는 분명히 있던 피독주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강호에서 풍신개의 품을 뒤져 물건을 빼내갈
만큼 간 큰 놈은 절대로 없다. 그렇다고 그걸 모를 풍신개도 아니었다.
그런데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가슴속에 있던 것도 아니고 아랫도리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것이 없어져버렸다.
"백 공자 나갈 시간 다 되었는데 빨리 빨리 내놔요! 빨리 내놓지 않으면
앞으로 얼굴도 보지 않을 거예요?"
소운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윽박질렀다.
"글쎄, 없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나도 정말 답답하구나. 일단 가자. 가보
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그놈의 술 때문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풍신개와 소운은 백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안하이. 미리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놈이 어디로 빠졌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매섭게 쳐다보는 구소운의 눈빛에 찔끔거리던 풍신개는 백산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되겠죠. 그럼 가보겠소. 행운이나 빌어주쇼."
잔뜩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의 허탈함과 불안한 표정으로
소운만을 쳐다본 백산은 새파래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뒤로하
고 비무장으로 들어섰다.
이미 장서이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무 시작 소리와 동시에 백산은 그대로 사독 장서이에게 뛰어들면서 양손
의 철구를 휘둘렀다. 장서이는 뭔가 어설퍼보이는 동작으로 달려드는 백산
의 공격에 괴이한 웃음을 흘린 채로 양손을 살짝 살짝 흔들며 뒤로 물러서
고 있었다.
장서이를 곧 죽이기라도 하듯이 거칠게 몰아치던 백산의 공격이 어느 순간
부터인지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백산의 얼굴에
조그마한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럴 즈음에는 힘에 겨워서 더 이상 철
구를 휘두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독에 중독된 모양이었다. 이윽고 백산의 거구가 천천히 비무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사독 장서이는 곧장 백산에게 다가가지를 않았다. 저번
비무 때 백산이 쓰던 야비한 수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맴돌고 있던 장
서이는 백산의 얼굴이 검게 죽어가자 그제야 안심한 듯 다가섰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백산의 가슴팍을 향해서 발을 힘껏 날렸다. 데굴데굴
굴러서 한쪽 구석으로 처박히는 백산의 입에서 피화살이 솟구쳤다.
장서이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 나왔다.
"아직은 네놈의 정신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버러지 같은 놈, 백 공자가
그러더군. 벌레를 밟아 죽이듯이 아주 천천히 죽여주라고 말이야."
한편 투인 대기석에서는 구소운이 풍신개를 쳐다보며 울먹였다.
"이제는 어떡해요. 어떻게 좀 해봐요. 강호의 대기인인 풍신개잖아요. 저
러다 정말 죽으면 어떡해요."
자신이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구소운은 풍신개를 쳐다보며 본래의
여자 목소리로 백산을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백산이 다치는 것이 안타깝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속상했다.
'이 녀석이…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소운의 얼굴을 바라보는 풍신개의 얼굴이 아련하게 변했다. 언제나 어린애
로만 알고 있던 소운이 어느새 다 커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소운아, 잠시만 기다려라. 저 녀석의 실력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의 비무 때 마지막 편두의 방향을 바꾼 놈도 저 녀석이었다. 여
기서 저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아라.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공격이 너무 어설프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니 조금만 더 두고 지켜보도
록 하자구나.'
풍신개도 전음을 이용하여 소운을 안심시키고 있었으나 불안하기는 매일반
이었다. 평생을 강호를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명예란 허울에 물
들지 않고, 명리를 초월하고 있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독주까지 주려고 했는데 그것이 감쪽같이 사
라져버렸다. 내심 당황하고 있던 그는 백산의 어설픈 공격에 어느 정도 마
음을 놓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상대가 사용하는 무공이 독공이라는 사실 때
문에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구소운과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서 우려와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비무장에서는 장서이가 쓰러져 있는 백산의 오른손 위로 자신의 발을 올려
놓고 있었다.
"네놈의 사지를 하나씩 밟아주마. 우선은 네놈의 오른손부터다."
발에다 힘을 주려고 한 순간, 장서이는 백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
는 것을 발견하고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쉬익-!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철구 하나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커-억!"
철구를 피했다고 생각한 장서이의 아랫배에 강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위
쪽으로는 철구가 날아가고 백산의 왼 주먹이 장서이의 아랫도리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이윽고 손을 털어낸 백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중-독 되-지 않-았-더-냐."
피가 철철 흐르는 아랫도리를 감싼 장서이가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놈이 보인 증상은 분명 그가 하독(下毒)한 인면
부시독(人面腐屍毒)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중독이야 되었지. 그러나 나에게 이것이 있거든."
백산이 자신의 입안에 담고 있던 구슬을 꺼내 잇새로 끼웠다.
"피독주?"
장서이의 표정이 경악스레 일그러졌다.
풍신개와 소운이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피독주가 백산에게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굳어있는 장서이를 향해 씩 웃어보인 백산의 왼발이 가볍게 앞으
로 날았다.
퍽!
백산의 철구 중의 하나가 장서이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그대로 박혀버렸다.
"다음에 태어날 땐 진짜 개로 태어나라. 긴 꼬리를 달고서."
아직도 피독주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장서이가 비무대 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정적….
함성과 환호성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의 적막은 아니
었다.
"우씨, 왜 내가 이길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거야?"
백산은 자신에 대한 관중들의 부당한 대우에 열이 받았는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관중석을 향해서 두 주먹을 휘둘러댔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함만 흐르고 있는 관중석.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본 관중들은, 혼자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백산을 이상한 동물 쳐다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호인들의 수치였다.
어떻게 이곳 뇌룡현(雷龍縣)의 삼류건달이 강호무림인을 이길 수 있단 말
인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
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혼자서 발광을 하던 백산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입안이 불편했던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손위로 뱉어내고 관중석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이 몸이 이겼으면 최소한 박수 정도는 쳐야 되는 것 아
냐? 그리고 너희들 전부 죽을래?"
어디론가 시선을 보내며 외친 백산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재빨리 입안으
로 집어넣었다.
짝! 짝! 짝!
"형님, 잘하셨습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강구두 패거리 네 명이 그 자리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
으며 백산을 향해서 외쳤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흔들고 있는 백산을 향해 투인석에 있던 한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쏘
아져 들어왔다.
"야. 이 도둑놈아! 내 피독주 내놔!"
풍신개였다. 피독주 때문에 소운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백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제야 관중석의 관중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뇌룡현(雷龍縣)의 삼류 건달인 다쇠불알 백산이 사독 장서이를 이긴 비밀이
밝혀졌다는 표정들이었다.
사독 장서이의 시체를 옆에 두고 두 골통들은 이리저리 뛰면서 연신 말다
툼을 해댔다.
"이놈아, 훔쳐갔으면 훔쳐갔다고 말을 해야지. 빌려달라면 안 줄까 봐서
그걸 훔쳐? 그것 때문에 내가 소운이한테 깨진 것을 생각하면…."
주루까지 오면서도 풍신개의 요란한 푸념은 그칠 줄 몰랐고, 그 옆에서는
소운이 백산의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사람 걱정시킨다고 쫑알거렸다.
"아-따! 이 영감 되게 그러네. 그런 것이 있었으면 진작 줄 것이지 뭐 그
리 대단한 것이라고 감춰놓고 있어요. 그것도 지저분하게 사타구니 속이 뭐
요? 그 더러운 걸 입에 물고 있었으니 아직도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구
먼. 야! 여기 술 안 가져오고 뭐해?"
여태껏 피독주를 입에 물고 있던 백산이 풍신개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더러운 걸 왜 아직도 주둥이에 쳐 넣고 있어? 빨리 내놔?"
"내 몸에 독 찌꺼기가 아직도 남아있으면 어떡하고요? 더러워도 물고 있어
야지."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지 피독주를 뱉어낸 백산의 고개가 이번에는 강구두
일행을 향해서 돌아갔다.
"너! 이 새끼들 전부다 대가리 박아! 그동안 오냐오냐했더니. 빨리 안 박
아! 야 주판, 손 뒤로 돌려 새끼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강구두를 제외한 주판과 나머지 세 명은 주루 바
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어지는 백산의 일장 연설은 주루 안을 순식간에 웃
음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취-익! 너희 이 새끼들 잘 들어라. 나는 말이야 조직을 살리기 위해 비무
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응원 한 마디도 없어? 그래놓고 너희들
이 의리 있는 놈들이냐? 앞으로도 계속 그리 할 거야? 대답을 해, 새끼들아
!"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판과 그 일행은 자신들을 데려온 강구두를 원망하며 머리를 박고 있는
상태에서 주루가 떠나갈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 이후 백산이 비무를 할 때마다 '행님 이겨라! 백산 잘한다!'라는 구호
가 비무 끝날 때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여어! 다쇠불알인지 버러지인지 애들 교육을 무-척 잘 시키는구먼? 다음
번까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쟤들이 응원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백산을 향해서 비웃음을 흘리며 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산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버러지라 표현한 인물을 쳐다보았다.
"누구신지…."
"아! 나? 다음에 너 버러지와 비무? 아니 싸울 쾌비도(快飛刀) 마추(馬秋)
다."
쾌비도 마추, 비도의 달인이며 정사지간의 인물. 일명 무영비도(無影飛刀)
라도 일컬어지고 있는 자로 그의 마지막 비도술인 무영비도술(無影飛刀術)
은 강호 일절로 알려져 있다.
순간 백산이 얼굴이 풍신개를 향해서 돌아가고,
"영감이 허구한 날 나 무시하니까 이런 좀만한 새끼까지 날 씹는 것 아뇨.
어떻게 무림인이란 새끼들은 주둥이만 살아있어요. 취-익!"
쾌비도 마추의 발 옆으로 침을 뱉어낸 백산이 거만한 표정으로 마추를 노
려보자, 모욕적인 말을 들은 마추의 얼굴이 붉어지며 양손이 소매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백산은 아직 멀었다는 듯이 연신 빈정거렸다.
"오! 여기에도 꼬랑지 없는 개새끼 한 마리가 있었네? 이봐 개새끼 할 말
있으면 비무장에서 칼로 하라고. 이런 곳에서 짖어봐야 네놈 잘났다고 해줄
놈 하나도 없어. 그리고 그 배경 좋은 놈에게 말해. 이런다고 겁먹을 백산
이 아니라고. 할 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하라고 해 알았어?"
백산의 개새끼란 말에 잔뜩 붉어진 얼굴로 살기를 날리며 쾌비도 마추가
다가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루 안은 긴장감에 휩싸여들었다.
"잠깐!"
막 주루(酒樓) 안으로 들어서던 정천무룡 백무천이 쾌비도 마추를 제지하
고 나섰다.
"이봐 버러지, 나는 배경만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야. 좋
은 사부와 훌륭한 무공이 있다고 모두가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라는 것을 알아야지. 뛰어난 오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네. 너희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노력 말이야."
백산을 향하는 백무천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많은 명문제자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치열한 암투를 거치고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온 자신들이다.
그런고로 그들의 자존심은 어떤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고,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처럼 될 수 없다는 우월
감이었다.
백산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래서, 그런 노력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우리 같은 버러지들은
너를 우러러보아야 한다 이거냐? 나보다 나이도 어린놈을 떠받들어주지 않
았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가. 지금까지 네 녀석이 만난 모든 사람
들이 너를 인정해주고 알아서 모셨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인지도
모르는 촌놈 하나가 너를 무시하니까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버러지가 되는 것인가? 그런 건가."
정천무룡 백무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 타오를 것 같은 백무천에
게 백산은 기름까지 붓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 오늘의 정천무룡 백무천을 있게 한 것은 정파 최고
무공이라 알려진 금황신공(金黃神功) 때문이라고 말이야. 만약 금황신공이
없었다면 백무천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 말은 맞는 것 같더구먼. 네가 보여
주었던 달마삼검(達磨三劍)인가 하는 검법 말이야 형편없었어. 그 정도라면
나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비웃듯 하는 백산의 말에 백무천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잇새로 말을 뱉었
다.
"그럼 네놈이 내가 시전하는 달마삼검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이냐?"
"아니?"
백산의 부정적인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백무천과 그의
일행은 백산의 다음 말에 얼굴빛이 썩은 대춧빛으로 변해버렸다.
"네가 달마삼검만으로 나와 싸운다면 비무대 바닥에 눕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지?"
쿡! 쿡! 쿡! 프! 하하하!
정천무룡 백무천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림인 같지도 않은 애들 두 명 이겼다고 간이 부었구나, 버러지. 좋아,
내가 하나 약속하지. 정천무룡 아니 천무맹(天武盟)의 이름을 걸고. 만일
너와 내가 비무를 하게 된다면 그땐 무조건 달마삼검만을 사용하지. 왜 내
가 정천무룡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하마. 물론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거든. 앞으로
도 이백 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고 되어있어. 저 하늘에도 그렇게 적혀있
다더군."
백산이 웃으면서 주루의 천장을 가리켰다.
정천무룡 백무천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말로는
이놈을 당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버러지 같은 놈이다. 무공실력도 배경도
형편없는, 말 그대로 삼류건달일 뿐이다. 만일 이런 곳이 아니라면 결코 만
날 수도 없고, 이렇게 신경전을 벌일 일도 없을 것이다.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 그냥 밟아버리면 된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주변의 누군가가 벌써 밟아 없애버렸을 것이다. 이
곳에서 투신이 되어 그 여세를 몰아 맹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참아야만 한다
. 하찮은 생사투인(生死鬪人)을 죽여서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이고자 한다면 정식으로 생사비무를 통해서 죽여야 한다.
백무천은 입을 굳게 다물고 쾌비도 마추를 쳐다보았다. 백무천의 시선을
받은 쾌비도 마추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말만으로는 천하제일이구나. 부디 무공실력도 네놈의 말발과 같았으면 좋
겠군."
백무천이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대단하구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비무에 대해서 벌써부터 준비를 하
고 있으니 말이다. 저 자존심 강한 놈을 자극해서 금황신공을 못쓰게 만든
다. 정말이지 대단한 잔머리라 아니 할 수 없구나."
대책이 안 선다며 고개를 흔들고 있는 풍신개를 향해서 백산이 조용히 말
을 건넸다.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한 놈은 살아남는 거지요. 사냥의 법칙이기도 하고
요."
사냥의 법칙이라는 백산의 말에 풍신개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만 갸웃거
리고 있었다.
* * *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한 손에 만두 접시를 들고 있는 백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
며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놈아!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와서 무게를 잡고 있느냐?"
"쉿!"
백산이 입에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처연히 갈대밭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에게 무게는 무슨. 저 여자가 누군 줄이나 알고 이러
고 있는 게냐?"
풍신개가 백산의 행동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남자 보기를 벌레 쳐다보듯 하고, 스치기만 해도 얼음 조각으로 부서지게
되는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이란 마공을 익힌 빙혼마녀(氷魂魔女) 조
천영(趙川英)이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이놈아."
빙혼마녀 조천영. 고금오천무 중 하나인 빙천수라마공을 익힌 여 고수. 특
히 남자에게는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고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잔인
한 손속에 마녀라고까지 불리는 여자. 누구인가를 찾아서 중원을 헤매고 다
닌다고 알려져있다.
"영감, 빙혼마녀는 여자 아닌감? 여자들이 다 가지고 있는 가슴이 없는 거
야. 아니면 밑이 잘못 된 거야. 저 몸매 좀 봐. 자고로 여자는 저 정도는
돼야지. 안 그렇소, 영감."
빙혼마녀 조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산의 눈은 몽롱하게 풀어져서 그
녀의 움직임만을 쫓고 있었다.
"저렇게 고독하고, 외롭게 보이는 여자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그놈은
남자가 아니지. 거시기를 떼서 개를 줘버려야 돼. 암 그렇고 말고."
멍한 표정의 풍신개를 뒤로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백산은 조천영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이 다가갈수록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가 강해
지고 있었다.
백산이 귀찮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을 몸으로 보여주는 백산의 발걸음은 멈출지
를 모르고 진군을 계속해 나갔다.
"저, 소저.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허락하신다면
저도 소저가 안고 있는 고뇌의 바다에 같이 빠지고 싶습니다만. 이왕이면
이 만두라도 같이 들면서요."
뿌듯했다. 자신이 생각하기도 너무나 멋있는 말이었다. 고뇌의 바다라니,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급 언어에 고무된 백산이 가만히 조천영의 반응
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백산을 향해서 돌아서던 조천영은
백산의 이상한 몰골에 가소롭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훗!"
잔물결이 치듯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조그마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사
람의 얼굴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백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조천영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조천영의 귀밑머리가 살짝 날리고 이에 놀란 주변
의 갈대들이 스슥거리며 아우성을 친다.
"그렇게 웃고 사십시오. 소저가 웃으니까 따뜻한 바람이 불고, 갈대들도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백산의 말에 약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조천영의 얼굴이 원래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소를 지은 것은 자신 앞에 나타난 이 평범하
게 생긴 청년의 몰골 때문이었다.
덩치는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컸지만 얼굴에 비해서 작은 눈이며
입이, 그리고 흉터 등 아무리 잘 쳐주어도 보통 이하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거기다 고독의 바다라니 어디 신파극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으며 수작을
거는 모습이 너무나 촌스러웠다. 심지어 팔다리에 고정시켜 걸을 때마다
위 아래로 흔들리는 철구는 또 무엇인가. 마치 유량극단의 광대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손에 있는 식어빠진 만두 두 개.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불쌍한 몰골이었다.
"여자에게 수작 부리기에는 당신이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나
요? 그리고 당신 모습을 보면 있던 여자도 도망가게 생겼는데. 안 그런가요
? 공자!"
화들짝 놀란 백산이 손가락을 펴서 자신을 가리켰다. 그 무섭다던 조천영
의 목소리는 의외로 포근했던 것이다.
"에이 모르시는 말씀 마시오, 누님! 사람이란 말입니다. 여기 이 얼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가슴속을 봐야 된다는 말이지요. 거
허우대만 멀쩡한 놈들 말이요. 열에 아홉은 사기꾼이에요. 대부분의 여자들
에게 마음고생만 시키죠.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백산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쳐댔다. 누님이란 소리에 흠칫하던 조천영은
이내 표정을 풀며 재미있다는 듯이 백산을 쳐다보았다.
"공자의 말이 맞기도 하죠.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더 좋아한답니다, 이 숙맥 공자님."
마지막 말은 우스갯소리처럼 흘렸으나 얼굴 표정은 씁쓸함이 가득했다.
"이런데서 여자 꼬실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나 하는 건 어때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는 운이 좋거든요. 그리고 오래 살
아야 될 숙명을 타고나서 빨리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해요."
확고한 표정을 지으며 딱히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닌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백산을 가만히 응시하던 조천영이 떠나면
서 한마디 했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웃어보기도 하고."
"누님! 누님은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조천영을 향해서 백산이 소리쳤다.
조천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백산은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워 버렸
다.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평생을 사냥꾼으로만 살다간 아버
지와 이제는 얼굴마저도 희미해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들었다. 돌
아가신 어머니의 얼굴과 너무나 흡사해서인지 그녀에게 친숙감을 느꼈던 것
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이가 저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오래오래 살아야죠. 아버지 어머니 몫까지 살아가려면 아직도 많은 세월
이 남았어요. 그 전에 두 분을 그렇게 만든 놈들한테는 반드시 돌려줘야죠.
그놈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이 우리 사냥꾼의 법
칙이니까요. 이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뭐해요? 이럴 시간 있으면 빨리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어때요? 그 여자하고는 잘 안됐나 보죠?"
입이 한자나 튀어나온 소운이 백산을 쏘아보고 있었다.
"소운? 아! 그 여자. 남들이 빙혼마녀가 어쩌고 하기에 얼굴이나 한번 보
려고."
백산이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만 가자고."
"찬 데서 그렇게 누워있으면 어떡해요…."
백산의 등에 붙어있는 갈대 잎을 털어주면서 구시렁대는 소운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영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백산이 남기고 간 자리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 * *
"저번에 주루에서는 대접 잘 받았다. 너무 지루한 시간이었다. 진정한 무
림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버러지 새끼."
자신의 소맷부리 속으로 두 손을 깊숙이 찔러놓고 있던 쾌비도 마추가 무
엇이 못마땅한지 온몸을 움찔움찔 떨고 있는 백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주루에서 당한 모욕을 갚아줄 때가 된 것이다
. 비무의 시작 소리와 함께 비수를 발출(發出)하려던 마추가 백산의 이상한
모습에 멈칫 섰다.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잔 떨림을 보이고 있던 버러지의 모습이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눈으로부터 청광(淸光)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동공
이 사라지고 시퍼런 광채만 남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으
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온몸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백산의 머리가 허공으
로 치솟아 오르며 다 헤어진 옷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을 견디다 못한 철구들이 마치 무엇인가가 밀치기라
도 하듯이 비무대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절로 움직이는 철
구의 모습은 까닭 모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야수였다.
"크크크!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백산의 입에서 거북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끌시끌하던 관중석의 소음도 딱 멈추었다. 백산의 변화된 모습에 하도
놀라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
려오고 있었다.
야수처럼 변한 백산의 모습에 흠칫하던 마추가 표정을 풀면서 가볍게 응수
했다.
"준비를 많이 했군. 연출도 훌륭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네놈이 죽는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아."
번쩍!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추의 양손으로부터 네 줄기의 빛이 터져 나왔다. 두
줄기는 시퍼렇게 빛나는 백산의 눈을 향하고, 나머지 두 줄기는 백산의 가
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캬악!"
귀찮다는 듯이 괴성과 함께 휘둘러진 철구에 의해 네 개의 비도(飛刀)들이
나가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백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몸놀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육안으로는 거의 확인할 수도 없는 가공할 속도로 쾌비도 마추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뒤이어 허공을 유영하는 백산의 철구들. 새파란 빛을 발
하고 있는 열두 개의 철구는 마추의 모든 움직임의 방위를 차단하며 거세게
몰아쳤다.
계속해서 뒤로 밀리기만 하던 마추는 자신의 비도를 발출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피하기에만 급급해했다. 비도를 날리기 위해서는 한 호흡이 필요한
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백산의 공격에 호흡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의 철구가 얼굴을 스쳤는지 뺨으로 끈적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피이리라.
마추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가 알고 있던 놈의
실력은 단연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비도를 한번 발출하기
만 하면 그것으로 끝낼 수 있는 실력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고 있었
다.
처음 던진 네 개의 비도는 잠시 겁이나 주자 싶어서 가볍게 던진 것에 불
과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단 한번의 비도를 던질 기회마저 잡지 못하고 있
었다. 간밤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일 것인가에 대해서 계획을 세웠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살아있다는 것을 저주하도록 해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가. 저놈은 비도를 뽑을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고 있다. 벌써 일 다경 이상을 속수무책으로 피하고만 있다.
마추는 이를 악물었다.
'좋다. 네놈이 정 그렇다면 살을 주고 뼈를 받는다.'
철구가 자신의 왼쪽을 노리고 날아오는 순간 마추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선 채 자신의 오른손을 힘차게 내뻗었다.
"허! 아!"
관중석에서 한숨 섞인 탄성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굳어진 마추가 날아
오는 철구를 보고도 그대로 멈춰 섰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기 위
해서 오른쪽 어깨를 움찔하는 것도 같았으나 몸이 움직이지를 못했다.
퍼억!
백산의 철구가 와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왼쪽어깨가 부서진 마추는 엄청
난 고통에 입을 벌렸으나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
낀 마추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보았다. 완전히 부서졌는지 너덜거리며 흔들
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하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마추는 시선을 돌
려 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새파란 광채를 쏟아내며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
었다.
자신이 던진 비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비도를 찾던 마추는 오른손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비도를 던진 동
작에 의해 앞으로 내뻗고 있어야할 그의 오른손이 너덜거리는 왼팔의 소매
속에 그대로 있었다.
"인면부시독(人面腐屍毒)이닷!"
"사독(死毒) 장서이(張瑞二)의 인면부시독에 당했다!"
관중석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가?"
힘겨워하는 목소리로 마추가 백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당해보았는데 아주 효과적이더군. 자! 이제 마무리를 지어볼
까?"
새파랗게 빛나는 백산의 철구들이 무차별하게 마추를 강타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갖지 못한 몸뚱이가 그대로 비무대 바닥에 쓰러졌다
.
백산은 시선을 들어 천천히 관중석의 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 굳어진 얼굴의 백무천이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잡혔다.
"사형! 저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갑자기 전에 비해서 몇 배나
강해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버러지의 죽음을 만끽하기 위해 나왔다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백무천의 말을 듣고 있던 운학자(雲鶴子)도 백산을 뚫어
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온몸에서 잠력(潛力)을 뽑아내는 듯한 폭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
은 사악한 마단을 복용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저렇게 폭발적인 효과를 끌어내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사령마단(邪靈魔
丹)이나 혈마단(血魔丹) 또는 광혈단(狂血丹)을 복용했을 때만 저러한 현상
이 나타나게 되는데…."
"사령마단이라면 오십 년 전에 무림공적이었던 백살마대(百殺魔隊)가 복용
했다는 그 저주의 마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옆에 있던 목령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백살마대.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선배들로부터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
다.
온몸이 핏빛 강기에 휩싸인 채 인성을 잃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질렀던
그들,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살인귀들의 집단이었다고 했다.
"그런 저놈이 복용한 것이 사령마단이란 말입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사령마단이라 보기에는 그 효력이 너무 미약해. 더욱
중요한 것은 저놈의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쪽을 쳐다보
고 있지 않느냐."
운학자의 말처럼 머리와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청광이 사라진 백산은 몹시
맥 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숨을 고르는 듯했다. 으레 그러했듯 환호성도 없
는 관중석을 한번 바라보고는 터벅터벅 비무대를 빠져나갔다.
* * *
"이놈아! 네놈이 처먹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더냐? 무엇을 먹었기에 그렇게
반미치광이가 되었고, 지금은 왜 또 이렇게 힘이 없냐고?"
백산의 방에서 풍신개와 소운이 백산을 다그쳤다.
백산을 걱정하는 소운과는 달리 풍신개는 백산이 복용한 약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은지 계속해서 약에 대해서만 물었다.
"혹시…네놈, 그 사령마단인가 하는 그 저주의 마단을 복용한 거냐?"
순간 백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태껏 힘없어 보이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영감도 사령마단이란 걸 알고 있었소? 그렇군. 어쩌면 그 당사자들 중의
한 사람인지도…."
백산의 뒷말은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으나 곁에 있던 풍신개는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 사령마단이란 것은 천무맹과 천마맹에만 있는 것인데 나 같은 촌무지
렁이가 어디서 그 귀한 것을 구하겠소."
어쩌면 풍신개를 통해서 백살마대의 진실을 밝힐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백산은 그를 떠보기 위해서 천무맹과 천마맹을 들먹이며 알은체를
했다.
풍신개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그도 오십 년 전의 백살마대 사건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때의 주재자였고
피해자라 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내막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방주자리마저 내던지고 백살마대의 생존자를 찾
아서 강호 전역을 헤매고 다녔으나 어디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백살마대의 탄생에는 사령마단이라는 마단과 천무맹,
천사맹. 천마맹 즉, 현재의 무림삼천(武林三天)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백살마대를 탄생하게 했던 사령마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을 만난 것이었다.
"네가 사령마단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아느냐?"
얼굴이 굳어진 풍신개가 다그치듯이 백산을 향해서 다가섰다.
"영감도 많이 알고 있군. 다 지나간 일인데 새삼스럽게 관심은 무슨 관심
이요?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쇼? 어차피 천무맹과 천
마맹 세상이 되었는데, 그들이 바라던 대로 말이요. 혹시 모르지 영감도 같
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당신도 그때 천무맹의 일원이지 않았냐는 소리였다.
"네 이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게냐?"
얼굴을 붉힌 채 고함을 치던 풍신개는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보였다.
옆에 있던 소운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심각
해지는 풍신개를 보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아! 영감 진정하고 생각 좀 해봅시다."
풍신개를 진정시키며 백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시대는 말이요. 오천맹(五天盟)의 세상이었소. 강호 최대의 세력인 오
천맹의 후예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사령마단을 복용했겠소. 그것도 한두 명
이 아닌 전원이 다 그것을 먹을 정도로 절박한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니죠.
그들은 가만히 있어도 무림의 최고가 되게 되어 있었소. 그런 그들이 단체
로 미쳤다는데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음모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소
.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도륙(屠戮)하기 시작한 거지.
말로는 정의 수호니 악인 처단이니 하면서 자신들보다 잘난 놈들을 없애
버린 거야. 그리고 오천맹의 수뇌들도 그들의 자식들이 패악을 저지른 분명
한 증거가 있으니 음모니 뭐니 하는 말도 못 꺼냈겠지. 오히려 강호 무림의
신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자식들에게 검을 날렸지.
어떤 말로 핑계를 달아도 결국에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저질러
진 일이란 말이요. 그래서 그런 놈들이 싫소. 정의를 위한다며 자기 이름을
날리기를 원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며 사욕을 채우는 그런 위선적인 놈들
말이요."
풍신개는 할 말을 잃었다. 늘 덤벙대기만 하던 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
는 것도 놀라웠지만 백살마대 사건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이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게 했다.
그래서 백산을 더욱더 다그쳤다.
"백산 자네, 그것들 전부를 누구한테 들었나?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
풍신개의 말투가 절박한 애원조로 바뀌었다. 그러나 백산의 눈빛은 요지부
동 변함이 없었다.
"알아서 어쩔 거요. 설령 그것이 음모였다 하더라도 오십 년이나 지난 지
금에 와서 무얼 어쩔 것이오. 다 늙어서 오늘 내일 하고 있는 노인네하고
삼류건달밖에 안 되는 나 같은 놈하고 증거를 찾아낸들 무슨 방법이 있는
게요. 아무 것도 없소, 다 부질없는 짓이요. 결국 영감은 허송세월 한 거요
, 지난 세월을…."
백산도 느끼고 있었다. 이 강호 노기인의 삶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그것 하나가 이 노인네를 지탱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노인네는 백살마대의 음모가 일어났던 그 시대의 개방의 방주로
서 천무맹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그것이 음모였다면, 진정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는 밝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내가 하다가 안 되면 하늘에 빌어서라도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풍신개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야겠다는 희
망을 가진 얼굴로 변해갔다.
"하늘이라고 하셨소. 지금껏 살아오면서 하늘이 벌주는 것 보았소. 결코
하늘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소. 권력을 잡고 싶은 놈, 힘을 갖고 싶은
놈들이 하늘을 핑계 삼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오. 죄를 짓는 놈도 인
간이고 벌하는 놈도 인간이며,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오."
하늘이란 놈을 믿지 않는다. 정녕 하늘이 있어서 죄 지은 놈을 심판한다면
왜 인간에 의해서 고통 받는 사람이 생겨나겠는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순박하던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수백의 인물들이 죽어갔는데
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
건을 무마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가진 자가 더 잘 사는 세상, 없는 자는
더 힘든 세상이 바로 인간사인 것이다.
"이놈아,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누구냐고. 그것만 얘기해라."
백산이 고개를 돌리고 침대에 누워버리자 풍신개가 고함을 빽 질렀다. 그
간 거의 포기했었다. 어느덧 오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천무맹의 일원이어서 조사할 수 없었고, 그 후론 백살마
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정도 무림의 금기로 취급되고 있어서 조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주자리마저도 버렸다. 일생을 통틀어서 그가 단 한번 사랑했던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
렀다.
"영감도 나에게 전부 이야기한 것은 아니잖소. 서로에게 조금씩 비밀이 있
는 것 같으니 그 이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둡시다. 영감 말대로 밝혀져야 할
거면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풍신개는 힘없이 백산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은 그 당시 천무맹 소속인 개방의 방주 아니었던가.
"그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중에. 오십 년을 기다렸는데 이까짓 며
칠 정도를 못 기다리겠느냐."
풍신개가 힘이 없는지 소운의 부축을 받으며 되돌아 나갔다.
"이야기해줄 걸 그랬나? 괜히 찜찜하네. 나중에 이야기해주면 되지 뭐."
복잡한 것을 피하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
다. 풍신개는 오십 년 전의 개방 방주였던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변했다고
는 하지만 그때 백살혈겁사건의 중심에 있던 사람임에는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요, 영감.'
* * *
풍신개와 백산이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앙금을 풀어내지 못한 채 생사투인
전은 계속되었다. 자신이 돈을 걸었던 무인이 이겼을 때는 환희와 열광이,
패했을 때는 실망과 눈물이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에 흐르고 있었다.
새파란 청광을 쏟아내며 달려드는 백산의 상대는 없었다. 생사비무 시작
전의 첫 모임에서 백산에게 구타당했던 혈월(血月) 사뇌영은 채 십 초를 넘
기지 못하고 주방 칼에 암습(暗襲)을 당해서 이번에는 완전하게 저 세상으
로 가버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산의 별호 앞에는 운수대통이란 말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백산에게 걸기만 하면 운이 좋게도 돈을 번다는 뜻에서 생긴 별호
이다. 아울러 이곳 뇌룡현의 삼류건달이 생사비무에서 쟁쟁한 무림인들을
물리치고 아직 살아있는 것도 대단하거니와 오차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어 운 때가 좋은 놈이란 뜻이었다.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
이것이 이곳 만상투인루에서 새로 생긴 백산의 별호였다.
이제 백산은 생사비무 최종전인 참마도(斬魔刀) 팽월(彭月)과의 비무만 남
아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십일월의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갈대들을 희롱하
고 있었다.
"내일이면 어차피 만나게 될 텐데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이오?
"
중앙에 조그마한 공터가 만들어져 있는 끝없는 갈대밭에서 참마도 팽월과
백산이 도 위에 손을 올린 채 마주보며 서 있었다.
"왜! 여차하면 그 도(刀)로 나를 벨 텐가?"
특유의 유들유들함이 사라진 백산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팽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백산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팽월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일말
의 감정도 담겨져있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끝 간 데 없는 심해처럼 깊디
깊은 눈동자였다.
팽월은 과거에도 저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인 도왕
(刀王) 팽인덕(彭仁德)의 눈빛이었다.
바로 절대자의 눈빛이었다.
참마도 팽월은 약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애도인 오호
단문도(五虎斷門刀)를 꽉 움켜쥐었다. 가문 최고의 보물이었던 혼원벽력도(
混元霹靂刀)가 큰아버지와 함께 사라지고 난 후 그가 가지고 있는 오호단문
도가 팽가의 최대 보물이 되었다.
바로 할아버지인 팽인덕이 그가 열 살 때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며, 결코
이용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며 쥐어주신 도이다.
그때 보여주었던 눈빛이 바로 저 눈빛이었다.
"팽무도라는 사람을 아느냐?"
쾅!
팽월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면서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팽-무-도!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영광이자 수치인 이름 석자.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에서 백살마대(百殺魔隊)의 대주로, 아버지의 도를 가슴으로 받아야 했던
비운의 인물. 자신의 가문에서는 그 누구도 팽무도란 이름 석자를 입에 담
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팽무도란 이름은 가문의 금기가 되어버렸다.
"팽무도란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누-누구요, 당신은. 어째서 그분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이오."
"백살마대의 대주였던 대마인 팽무도의 이름은 강호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닥쳐라! 어느 누구도 그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팽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뽑아들었다.
"그래도 가족이라 이건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분을 모욕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참마도 팽월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흥분한 마음을 바로 추스
르며 자신의 도에 집중하는 모습은 역시 명가의 후예다웠다.
참마도 팽월이 일도직파(一刀直破)의 도법으로 또다시 무극도(無極刀)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도에서 한 치 정도의 도강이 새어 나오면서 백산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본 팽월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까닭
이리라.
백산은 준비해왔던 도를 뽑아들고 가볍게 막아내고 있었다.
팽월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나 큰 실력 차이였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
격을 가볍게 쳐내버린 상대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생각
으로 온몸의 진기를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끌어올렸다. 그의 도에서 다섯
치 정도의 도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잠깐! 이것을 먼저 보고 판단을 해라."
백산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의 일초인 혈
극참(血極慘)이었다. 백산의 평범한 도에서는 일장이 넘는 도강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스치는 모든 것은 가루가 되어 날렸다.
눈이 찢어질 듯 커진 팽월은 가문의 최고 보물이며 자신의 손에서 절대로
떼어놓지 말아야할 오호단문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보았다. 시뻘건 혈광 속에 녹아있는 하북팽가 최고의 도법이며 자신의 큰
할아버지의 독문 무공이었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을.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 제 일초 혈극참(血極慘)이다."
한천팽무도법이라 했다. 하늘을 원망하는 팽무도의 도법이라고 했다. 팽월
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분, 그분은 살아 계십니까?"
도법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팽무도의 생사만 물었다.
팽월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빙긋이 웃었다.
"너, 나랑 거래를 한번 해야 되겠다."
다음날 참마도(斬魔刀) 팽월은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
고 백산에게 걸레가 되도록 얻어맞고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를 떠났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떠나는 팽월을 보며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 아무런 말도 없이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그의 모습에 그저 비무에 진 충
격으로 실성했다고 치부해버렸다. 그 누구도 더 이상 팽월을 기억하지 않았
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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