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
"자! 자! 조용히들 하시오."
만상투인루 지하 삼층 비무장. 오백여 인물들의 긴장된 시선이 단 위에 있
는 인물을 향하고 있었고, 그들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육척이 넘어가는 장신의 거구와는 상반되게 작은 눈을 가진 촌놈하나. 만
두를 입으로 가져가며 오물거리는 것과 장단을 같이 하여 두 다리를 건들거
리는 폼이 결코 한두 해 해본 솜씨가 아니다. 무공으로 치자면 평생을 두고
한 가지 무공만을 고집하여 이윽고 절정의 경지에 든 무인이 자신의 무공
을 펼치게 되었을 때 손과 발이 저렇게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절묘한 장단이다. 백산이었다.
결국 자신의 두 번째 꿈을 위한 시작점에 도착해 있었다.
백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 비무를 하다 죽어 가는 이의 피가 더욱 선명하게 보
이도록 하고자 함인지 하얀 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폭이 거의 이십여 장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있고 관중석보다 일장 정도 아
래쪽에 위치시켜 안전사고를 대비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가.
검(劍), 도(刀), 창 등 각종 무기를 들고 있는 군웅들이 굳어진 얼굴로 전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앞으로 철혈투(鐵血鬪) 기간 동안 여러분들을 통솔
하게 된 냉면살마(冷面殺魔)라고 불리는 종천수(宗千需)입니다."
"오! 저자가 바로 암기와 독의 제왕이라는 냉면살마 종천수?"
"기분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다 강호의 공적이 되어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
아닌가!"
"역시 이곳이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야! 강호공적(江湖公敵)으로 지목되
었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라 벌써 십육 년 전에 이곳에서 투신까지 되었다는 소문이
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백산이 고개를 들어 종천수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앞쪽에서 들린 말 중 십육 년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놈이 십육 년 전
에 투신(鬪神)이 되었고 그리고 일년 뒤 아버지가 살해당하셨다. 지금 자신
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천수란 저놈은 이곳의 심복일 것이다. 너
무 억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종천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소문이 아니라 확실히 십육 년 전의 투신이었죠. 그것도 이 철혈투(鐵血
鬪)에."
거렁뱅이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백산을 향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천수를 쳐다보며 상념에 잠기느라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흔들며 백산은
말을 걸어온 친구를 쳐다보았다.
비록 입고 있는 옷은 남루했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와 깔끔하게 정리된 반
달형의 눈썹, 적당한 코와 작은 입술이 남색을 밝히는 놈들이 보면 입안 가
득 침을 담고 달려들어도 될 만큼 상당히 미남 축에 속하는 얼굴이다.
"안녕하시오! 형씨. 이런 곳에서 인사 나누기는 뭐하지만 구소운(邱小雲)
이요! 강호동도들이 소걸영(素乞英)으로 불러주고 있다오."
"소걸영? 쉽게 말하자면 거지새끼? 우 헤헤헤! 아니, 별호가 거지새끼가
뭐요? 거지새끼가. 얼굴도 예쁘장하게 잘생겼구먼 별호가 왜 그 모양이요?"
강호의 무림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백산이 소걸영이란 말의 의미를 알
리가 없다. 개방 제 일화(一花), 백만 거지들의 웃음이자 행복. 구파일방에
서 가장 강하다는 개방의 신진고수로 무공 또한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그
녀의 별호를 가지고 가타부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얼굴이 붉어지는 구소운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본 백산은, 그가 개방 인
물 중에서 가장 깨끗하게 입고 다니고 더구나 여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자
신이 투신이 되면 비단으로 된 최고급 옷을 한 벌 해주겠노라 떠벌렸다.
"이런! 내 소개를 안 했군. 나 백산이요.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별호를
가르쳐주겠소."
"약속하지요."
구소운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직에서는 나를 다쇠불알이라 부르고 있소."
"다쇠불알?"
"아! 이것 때문이요. 내가 쓰는 무기지. 나는 이것을 뇌룡철구라고 부르는
데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쇠불알이라 부른다니까요."
'취익.'
걸쭉한 침을 한바탕 뱉어낸 백산은 침이 튀어 구소운의 얼굴로 날아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을 내기 시작했다.
"보시오. 구형! 이게 어디 불알처럼 생겼어. 이렇게 큰 불알 보았냐고? 보
았다는 놈이 한 놈만 있어도 나도 쇠불알이라고 인정한다고. 이 개 불알 같
은 자식들이 이 뇌룡철구를 쇠불알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곳 뇌룡현에 소문
이 다 났어. 그래서 쪽팔리기도 해서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아직도 이 다쇠불알을 기억하고 있더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뇌룡철구
라고 불리는 것을 포기했지 뭐요."
점점 힘이 없어지는 백산의 목소리에 구소운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
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인물에 대한 첫 느낌은 당당한
사람이란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형은 이곳 뇌룡현의 뒷골목 조직의 두목?"
"아 두목이기보다는 내가 일을 좀 봐주고 있지요."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하는 폼이 영락없는 삼류건달의 표본이다.
킥! 킥! 하! 하! 하!
"미안하오, 백형. 백형의 별호도 저와 별반 다를 것이 없구먼요. 쇠불알이
뭐요? 쇠불알."
구소운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쇠불알이란 별호는 그렇다 해도 어떻게 무림인도 아니고 뇌룡현에 있는
조직의 두목이 이곳에 참석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있는 반면 자칭 뇌룡현의 조
직 두목이란 이 사람은 마치 놀러나온 사람처럼 전혀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
다.
"백형도 참 한심하구려. 지금 이곳에 와있는 무림인들이 어느 정도인지 알
고 온 거요?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고수들은 물론이고 강호 공적이라
불리는 자들도 꽤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진정한 고수들
은 지금 이 자리에 참석도 않고 있다고 하오."
"에이, 구형도. 이곳에서 싸움은 어떤 꽁수를 써도 상관없다며. 꽁수 하면
이 백산인데. 꼭 무공이 높아야 이기는 것은 아니란 말이요. 걱정하지 마
쇼. 내 여기서 우승하면 거하게 한잔 사지요."
"쿡 ! 쿡! 쿡! 미친 놈.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이 언제부터 네놈 같은 쓰
레기가 와서 노닥거리는 장소로 변했냐?"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백산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크게 보이는 거한
한 명이 자신들을 쳐다보면서 이죽거렸다.
개차반 성질의 표본인 백산이 참을 리가 없었다.
"야! 곰탱이 지금 그 말 나보고 하는 소리냐?"
백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고 그곳에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심으로는 둘이 한판 붙어서 지금의 이 긴장을 조금이
라도 해소시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사뇌영(思雷領) 보고 곰탱이라고 했냐. 쓰레기?"
"헛! 저자가 혈월 사뇌영? 혈월 사뇌영이닷!"
혈월 사뇌영이란 말에 근처에 있던 군웅들의 놀라며 그의 주의로부터 멀어
지고, 사뇌영이라 소개한 인영이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살기를 쏟아내며
백산을 향해 다가왔다.
"귀까지 먹은 곰탱이인가? 이봐 곰 중에서도 말이야 미련한 곰 새끼는 가
장 중요한 쓸개가 없다고 하더군. 혹시 쓸개 있나?"
새하얀 빛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백산의 목에는 사뇌영의 애병인 혈월도(
血月刀)가 살기를 피우며 다가와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아라, 쓰레기."
혈월 사뇌영의 목소리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만!"
그때 종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운이 좋았다, 쓰레기."
사뇌영이 도(刀)를 집어넣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깐!"
백산이 돌아서는 사뇌영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혈월 사뇌영이 돌아
서는 순간 주먹을 날렸다.
퍽! 퍼퍽! 퍼버벅!
사뇌영은 연속적으로 백산의 주먹에 안면을 강타당하며 도(刀)를 뽑을 사
이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런 사뇌영의 아랫도리를 향해서 백산의 오른발에 있던 철구가 힘차게 날
았다.
퍼-억!
"으-아-악!"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사뇌영은 온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백산은 천천히 다가서서는 나지막하지
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말이야 미련한 곰탱이야. 쓸개도 없고, 이제부터는 불알도 없는…
."
"그만! 그만하라고 했지 않나."
냉면살마 종천수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을 죽이거나 부상을 시키면 바로
추방당한다는 것을 모르나? 지금 추방당하고 싶나?"
"어! 그런 규칙이 있었단 말이요? 나는 몰랐는데.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
라도 좀 해주지."
백산은 전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종천수를 쳐다보았
다. 종천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놈의 말이 맞다. 자신은 그 규칙을 알
려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고, 지금은 대전표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저 두
놈은 상대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이곳의 규칙을 어겼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자신을 쳐다보며
빙글거리고 있는 저놈이 그 규칙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아도 혈월 사
뇌영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정지 외침에 중도에서 멈추었던 것인데 저놈은 그것을 깡그
리 무시하고는 사뇌영을 박살내버렸다. 그것도 고자를 만들어 버리면서.
"좋소. 아직은 생사투인전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있으니 이번만큼은 그
냥 넘어가도록 하겠소. 그러나 지금부터 바로 규칙을 적용하도록 할 것이니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제외한 어떠한 싸움도 하지 마시오. 그럼 만상투인
루의 규칙을 알려주겠소."
첫째, 만상투인루에서는 비무장에서의 생사비무를 제외한 싸움은 일절 용
납되지 않는다. 생사비무 이외의 싸움이 벌어지면 그 당사자들은 바로 추방
되며 그들의 상대로 되어있던 투인(鬪人)들도 역시 추방된다.
둘째, 정해진 상금의 지급은 비무하는 상대방이 죽었을 때만 지급이 되며
계속해서 비무에 참석했을 경우에 한한다. 이때에도 진행자의 지시를 철저
히 따라야 한다.
셋째, 생사투인의 활동 범위는 만상투인루와 그 부대시설로 한정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대전표는 이틀 후 일층에 마련되어 있는 대전판에
게시될 거요.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 내가 이야기한 규칙의 더 자세한 사항
까지 적혀있으니 읽어보기 바랍니다."
오백여 명의 군웅들을 천천히 쳐다본 냉면살마는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백형, 이곳에서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았습니까?"
구소운이 백산의 행동에 기가 막힌 듯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감히 나를 건들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해? 냉면살마인가 하는 그 자식만 없
었으면 그놈은 오늘 죽었을 거요. 냉면살마에게 고맙다고 해야 될 거야. 그
리고 내가 그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백산의 표정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이렇게 결말이 나리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백산을 바라보는 구소운의 눈빛에 놀랍
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지금 이 친구가 했던 행동이 미리 계산된 행동이었
다면 단순하게 볼 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보통사람
으로서는 보여주기 힘든 행동이다.
"구형! 구형-!"
백산이 부르는 소리에 구소운은 깜짝 놀라며 자신만의 상념에서 깨어나 백
산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구형은 이런 곳에 뭐 하러 온 거요? 보아하니 돈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구먼."
하고 있는 행색으로 보아서 부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나 행동거지를 보았을 때 특별하게 이런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백산의 말에 흠칫 놀란 소걸영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특별한 임무
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해서 참가했
을 뿐이다. 거지인 자신이 도박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는 노
릇이었고, 결론은 생사투인으로 잠입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 규칙이란 것 말이요! 누가 만들어낸 거요? 비무 중 반드시 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혹시 이곳 루주란 놈 말이요. 어
떤 놈인지 알고 있소?"
말하기를 꺼려하는 구소운을 보며 백산이 곧바로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종천수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의 루주에 대해
서도 알려나 싶어서 물었던 것이다.
구소운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도 궁금합니다. 그가 누군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밝히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십 년 전의 사건에 대해서도.
* * *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오십 평 정도 크기의 대전(大殿).
이곳저곳에 스며있는 눅눅한 기운과 천장에 박힌 푸른빛의 야명주는 이곳
이 지하임을 알려주고 있다.
흑단목으로 만들었는지 새카만 색의 윤기가 번지르르한 탁자를 사이에 두
고 두 인물이 앉아있다.
사-락! 사-락!
그중 복면을 한 인물이 조용히 두루마리를 넘기고 있었다.
천무맹(天武盟) 출신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 천마맹(天魔盟) 출신 마
겸(魔鎌). 천사맹(天邪盟) 출신 혈목괴(血木怪). 종남파(終南派) 출신 정검
자(正劍子) 나후승. 점창파(點蒼派) 출신 천수마검(千手魔劍) 신기운. 녹림
(綠林) 출신 인도부(忍刀斧) 전횡. 하북팽가(河北彭家) 출신 참마도(斬魔刀
) 팽월.
혈의환사(血衣幻邪) 나염. 빙혼마녀(氷魂魔女) 조천영.
…….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위에 있는 열 명이 투신전(鬪神戰) 진출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 자들입니다."
"천무맹의 정천무룡 백무천이 참가했단 말이냐?"
천무맹이란 말을 하는 검은 복면인의 눈에서 원한 서린 한광(恨光)이 줄기
줄기 쏟아져 나오고 불끈 쥔 그의 주먹에서는 푸른색의 강기가 마치 악마의
이빨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유력한 맹주 후보이면서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 이건가? 그렇게는
안 되지… 너희들은 더욱더 치고받고 싸워야 돼. 그래서 너희들이 가진 모
든 힘을 소진시켜야 된다.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만다.'
복면인의 눈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갑자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복면인이 걸음을 내딛었다.
이곳저곳에 박혀있는 야명주(夜明珠)의 희미한 빛이 없다면 무저(無低)의
공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대한 광장. 회색 빛 어둠이 일렁이는 지하
광장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아릿한 독향(毒香)
과 함께 묻어 나왔다.
죽음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곳에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수십 개의 커다란 독들 사이에서 민둥머리의 인영이
독 속에서 무엇인가를 건져내어 옆에 있던 관에 집어넣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색이 된 시체였다.
'휴-! 이제서야 모든 것이 끝났군.'
허리를 펴는 인영의 등에 있는 커다란 혹 하나, 꼽추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수백 개의 관들이 온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한
마디로 전율(戰慄)할 공포였다. 그러나 이 꼽추 노인네는 일상적인 일이라
도 되는 양 사랑스런 눈빛으로 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영원한 어둠만이 있을 것 같았던 광장 한쪽에서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루주님."
꼽추노인이 뒤쪽으로 돌아서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을 향하여 고개를 숙
였다. 저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수고한다, 독인마타(毒人魔駝)! 그동안의 진척사항은?"
"방금 전에 마지막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를 건져냈고 모든 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검강, 도강이 아니면 이놈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습니
다. 한마디로 천하무적이죠."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이 만들어놓은 수없이 많은 관들을 쳐다
보는 독인마타의 얼굴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루주라고 불리는 검은 복면인이 천천히 지하광장을 둘러보고 있다. 천여
개나 되는 관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빽빽하게 놓여있었고 그 관들 속에 자신
의 꿈도 같이 묻혀있다. 관 뚜껑이 열리면 자신의 꿈도 같이 비상할 것이다
.
"수고했다, 독인마타! 이제는 조금 쉬도록 해라. 앞으로 이 개월 뒤에는
또다시 바빠질 테니…."
천여 구의 귀혼마강시가 들어있는 관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에 지하
광장의 어둠이 더욱더 출렁거렸다.
* * *
"와아! 와! 또 터졌다. 저놈은 운도 좋군. 계속해서 오천왕이야."
지하 이층에 있는 도박장. 이곳저곳을 혼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백산은
무엇인가 이상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줄곧 한곳을 쳐다보았다. 아까
부터 자신을 흘긋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눈에 익었기 때
문이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반가운 외침이 터졌다.
"야! 너 낙양 거지새끼?"
"넌? 미친 곰 새끼?"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이게 얼마 만이냐, 표운."
백산의 입에서 격정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를 따라서 중원을 떠돌아다니느라 거의 사람을 사귀지 못했던 그에
게 친구라 불리는 유일한 녀석이다. 비록 삼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영원한 우정을 다짐했었다.
표운과의 만남은 백산이 일곱 살 때였다. 낙양의 한 저잣거리에서 짐승 가
죽을 팔러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소매치기를 하고 있던 표운을 발견
하고 녀석을 뒤쫓아서 싸웠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는지 백산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이곳이
만상투인루라는 생각이 났는지 표정이 굳어지며 표운을 쳐다보았다.
"표운! 네가 왜 여기 있냐? 표사(驃士)가 되겠다던 네놈이 왜 이곳에 있는
거냐고. 그리고 령이는 어쩌고?"
비록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표운에게는 유달리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잦았
던 여동생이 한 명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백산이 표운에게 물었다.
백산과 표운이 처음 만나게 된 것도 동생의 치료비를 위해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백산에게 들킨 것 때문이었다. 령이란 말에 행복한 듯한 환한 웃음
을 지어 보이던 표운의 얼굴이 이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지금은 령이의 성(姓)이 표(彪)씨로 바뀌었다. 표령(彪玲)으로 말이다.
나의 친 여동생이 된 거지. 이제서야 나에게도 친형제가 생겼다. 너무 기쁘
다, 산. 그리고 시집도 갔고… 이제는 더 이상 고생은 없겠지? 아주 부잣집
이니까…."
시집을 갔다고 이야기하는 표운의 마지막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묻어 나왔다.
표운에게는 꿈이 있었다. 부귀영화도 아니고, 만인이 우러르는 무림영웅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조그마한 집에서 령이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고 이제는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어두운 굴레를 안고 태어난 놈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결국은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아주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고? 그거 잘됐네. 이제 네 녀석의 고생도 끝이
났구나."
어두워진 표운의 표정 속에서 이상함을 느꼈으나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마음이려니 하고 그저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걱정 없는데 이곳에는 웬일이냐?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나 알고 온 거냐?"
표운의 표정에 씁쓸함이 어리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설 공자! 그만 들어가시죠."
"아, 예. 백산아,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음에 하자."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몇 번인가를 망설이던 표운이 두 중년인을 뒤따르고
있었다.
"야! 표운!"
백산이 부르는 소리에 가던 길을 잠시 멈춘 표운은 마치 백산의 얼굴을 기
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 공자?"
백산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운이 설 공자로 불리는 것도 이상
했지만 그를 데리고 가는 저 두 사람의 무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후로 백산은 표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표운을 만났으나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
한 백산은 조금은 언짢은 표정으로 도박장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녔다.
'또 만날 수 있겠지. 이곳에서 어디로 가겠어?'
혼자서 중얼거리며 도박장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구소
운이 다가왔다.
"아! 구형. 구형도 이곳에 관심이 있소?"
"아니오. 저 같은 거지가 무슨 돈이 있겠소. 그냥 구경이나 하는 거지."
"가진 옷이 그것밖에 없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생각지도 않고 구소운의 남루한 옷차림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자신에게 돈이라도 있었으면 벌써 새옷을 사 입혔을지도
모른다.
"아! 옷이요? 원래 천성이 너무 깨끗한 것을 싫어하는지라… 그래도 이삼
일에 한번씩은 빨아서 입는다오. 그리고 옷이 너무 깨끗하면 우리 조직에서
는 쫓겨나요. 그러니 백형이 좀 이해해주세요."
"조직? 그럼 구형도 조직에 몸담고 있는 거요? 그래 무슨 파(派)요. 또 근
거지는 어디고. 혹시 북경은 아니겠지? 앞으로 내가 북경으로 진출하려고
하는데 구형과 부딪치면 안 되잖소. 모처럼 만에 생긴 친구인데."
구소운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 친구는 강호
무림에 대해서는 완전 백지다. 강호 방파가 죄다 무슨 조직 폭력배인지 알
고 있다. 하기야 개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
가.
그런데도 직감이란 게 묘해서 이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았다.
무공도 별로 세어 보이지도 않는데 저 자신만만한 표정과 유들유들한 것 같
으면서도 왠지 정감이 가는 얼굴 때문인지 계속해서 이 사람의 주위를 맴돌
게 된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구형, 그럼 우리 환락전인가 뭔가 하는데 한번 가봅시다."
"백형, 돈 있소? 그곳에는 돈이 없으면 가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적어
도 스무 냥은 있어야 술이라도 한잔 할 수 있는데요."
"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합시다. 이 백산이 책임질 테니
까."
백산이 구소운을 끌듯이 데리고 환락전이라는 주루 쪽을 향했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아무리 생사투인(生死鬪人)이라고 하지만 한 푼
도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믿고 술을 준단 말입니까. 거기다 뭐 서역 미인을
대령하라고요?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는지 아시오?"
백산은 구소운을 데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환락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것이 한계였다.
취익!
"에이, 씨팔. 야! 우린 말이야 여기 투인전에 참가하러온 투인이란 말이야
. 첫판만 이기면 바로 갚아준다니까 그러네. 내가 아니면 이 친구라도 갚아
줄 거야. 너 이 백산을 못 믿어? 저 밖에 뇌룡현에 가봐. 이 백산 하면 전
부 공짜야 공짜. 나가서 확인해보면 알 것 아니야. 그러니 여기 술만 좀 가
져다주게. 굳이 여자까지는 필요 없고…."
얼굴이 벌게진 구소운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가려해도 백산이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나갈 수도 없었다.
"안 되니까 지금 바로 나가주십시오."
"이봐요, 백형! 그냥 가자고요.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이요?"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요. 어차피 며칠 있으면 다 갚아 줄 텐데. 그리고
세상 살면서 먹는 것 가지고 저렇게 사람 타박하는 놈들은 반드시 망해요
망해. 두고 보시오, 구형! 이놈의 주루(酒樓) 올해 안에 반드시 망할 테니.
"
환락전에서 쫓겨난 백산은 싫다는 구소운을 끌고 일층 주루까지 와서 또다
시 점소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이야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
지 구소운이 백산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곳 점소이가 술과
안주를 내왔다.
"오! 그래. 자네가 이제야 사람을 알아보는구먼. 내가 다음에 와서 자네
구전까지 꼭 챙겨서 줌세. 그런데 이거 전부 얼마인가?"
"전부 스무 냥인데 공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요. 저기 있는 분이 내는 것
입니다요."
백산이 의아한 눈으로 점소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금의를 입은 잘생
긴 놈이 자신 쪽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구형, 저놈 알아요?"
백산은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사람이라 혹시 구소운이 알고 있나 싶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천무맹 맹주인 검신 화진악의 삼 제자 정천무룡(正天武龍) 백
무천(百武天)입니다. 이번 철혈투의 가장 강력한 투신 후보이기도 하고요."
정천무룡 백무천. 정도 제 일룡으로 불리며 강호의 뭇 여성들로부터 선망
의 대상이 되어있는 자. 천무맹의 삼공자라는 지위도 지위지만 잘생긴 얼굴
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으로 차기 맹주후보 일 순위라는 말이 공공연하
게 돌고 있는 자다. 한마디로 완벽한 신랑감이라 할 수 있다.
"오호! 저 친구 여타 명문정파(名門政派)의 싸가지 없는 놈들하고 다르네?
이 백산을 알아보고 술을 다 보내주니 말이야. 내 가서 인사나 좀 하고 와
야 되겠소. 남이 사주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여기
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쇼."
"고맙소. 이렇게 술까지 보내 주시고. 감사히 먹도록 하겠소."
정천무룡 백무천 앞으로 다가간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입으로는 고맙다고 하고 있지만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고개만 까닥
하며 뒤돌아서는 것을 보고 백무천과 같이 있던 노인 중 한 명이 백산의 뒤
통수에다 대고 기어코 한마디하고 말았다.
"이런 우라질, 방자한 놈 같으니라고. 이놈아, 우리 공자가 세상물정 모르
고 날뛰는 네놈 같은 버러지 먹으라고 준 것인지 아느냐?"
백무천의 그림자라고 하는 공동파의 제일 장로인 운학자(雲鶴子)였다. 공
동파의 독문절기인 복마장(伏魔掌)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로 공동파 문인들
의 특성답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사제인 백무천에 관련된 것
이라면 본인의 일보다 더 흥분하는 인물이다.
명문의 자제들에게서 보이는 정중함도 없고 얼굴에 나있는 흉터 때문에 가
뜩이나 인상도 안 좋은 녀석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고개만 까딱이는 것이
막돼먹은 놈의 표본으로 보였던 터였다.
이것은 분명 자신들의 위신 문제였다. '정천무룡 백무천이 이름도 없는 강
호 무뢰배에게 술을 대접했는데 그 무뢰배가 고맙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 코
방귀만 뀌더라.' 하는 식의 소문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자신들을 아는 강호상의 인물이라면 이렇게 할 수는 없다. 백무천이 누구
이던가, 천무맹의 차기 맹주후보 일 순위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술을 한 병을 선물했다. 자신들에게 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황
송한 표정 정도는 지어야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 것이다.
"이것 보쇼. 늙은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쇼. 내가 언제 술 달라 했소?"
황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백산이다. 공짜로 술을 주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이익!"
"운 사숙! 저런 버러지에게 말한다고 알아먹습니까. 괜히 입만 버립니다.
꺼져라, 이 버러지 놈!"
운학자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옆에 있던 다른 한 명이 운학자를 말렸
다.
쿡! 쿡! 쿡!
백산의 입에서 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술 한 병을 얻어먹은 것치고는 너무 많은 욕을 먹고 있었다. 술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저들이 그냥 버리듯이 인심을 쓴 거에 대해 고맙다고 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온 식구들이 자신을 버러지
라 욕하고 있는 것이다.
"버러지라. 쓰레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버러지군. 좋아, 좋다고. 이봐! 늙
은이. 당신 말이야 말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네가 당신들에게
술을 달라고 했나? 아니면 구걸을 하기라도 했나?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술
을 안기고는 받는 자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거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보다 못하면 전부 버러진가. 그런 너희들은 뭐가 얼마나 잘났
는데? 그 알량한 문파라도 없었으면 지금 나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나?
아마 아닐 거야. 좋은 가문에 훌륭한 사부에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서는
마치 그것이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늙은이.
그 정도의 배경이면 여기 있는 누구라도 너희들만큼은 될 수 있는 거야. 알
았어?
그리고 버러지 버러지 하는데 말이야. 그 버러지들이 꿈틀할 때도 있거든.
혹시 알아? 버러지가 잘못 꿈틀했는데 귀하디귀한 놈들의 대가리가 깨질지
말이야. 좌우간 술은 고맙게 먹지요. 버러지는 그만 물러갑니다."
운학자의 표정이 벌겋게 변했다. 버러지 놈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가
만히 있는 놈들에게 자신들이 술을 주었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
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꼴이 되어버렸다.
다시 폭발하려는 운학자를 막아선 사람은 옆에 있던 백무천이었다.
"그럼 자네는 좋은 조건에 배경이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건 두고 보아야지. 안 그런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 말끝마다 반말이야. 감히 이분이 어떤 분이라고 너
같이 천한 놈이 망발을 한단 말이냐. 이놈!"
백무천의 옆에 있던 운학자를 제외한 네 명의 인물 중 한 명이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콧김을 씩씩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공동 사장로. 운학자와
같은 장로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배분은 운학자에 비해서 한 배분 낮
다.
과거의 공동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울어가는 문파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산에게 소리친 사람은 사장로 중에서 제일 맏이
인 목령자라는 도인이었다.
백무천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들에게는 사숙이 된다. 저런 놈들이 함부로
반말을 할 정도의 위치가 아니다.
"아! 아! 진정하라고 늙은이. 혈압이라도 오르면 곤란하잖소? 다 좋은데
나에게 반말 타령하지 말고 애들 교육이나 좀 잘 시키쇼. 나이도 몇 살 안
처먹은 놈이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반말이나 찍찍하고 그러니 천
마맹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 개 박살이 나지. 잘들 하라고 알았소, 영감.
즐거운 시간이었소. 그럼 이만."
정천무룡 백무천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며 저만치 가고 있는 백산을 향해서
젓가락 하나를 가볍게 퉁겼다.
주루 안의 모든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천무맹 인
물들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배짱이 아니라 만용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자들일수록 자신들의 것을 지키는데 더욱 집착
하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명예라고 일
컫는 그들만의 자만심이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욕해서는 안 되고, 깔봐서도 안 된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눈빛만을 보내야만 한다. 그곳에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그들의 자만심을 백산이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구소운을 향해 가고 있던 백산이 뒤통수에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잠시
몸을 움찔했으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 미안하이, 구형. 말이 너무 길어졌구려."
그때까지도 소걸영(素乞英) 구소운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하여 백무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백무천의 오른손이 가볍
게 흔들리자 뒤통수 쪽에 있던 젓가락이 그 자리에서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물건
을 움직이는 것은 고수라면 웬만큼 한다.
그러나 걸음걸이에 맞추어 천천히 날린 것도 대단한데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였다가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은 일류 고수라고 해도 흉내 내기 힘든
것이었다. 다시 한번 백무천의 공력(功力)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백산은 태연하게 웃으며 얼굴이 풀려가는 구소운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
다.
"이곳에서 추방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구소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어눌하게만 보이는 사람은 백무천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의 규칙에 생사비무(生死比武) 이외에는 다른 생사투인(
生死鬪人)을 해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무모했
다.
"그러다 백형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여기는 말려줄 종천
수도 없습니다."
"저들처럼 대단한 놈들은 말이요, 나같이 하찮은 녀석들은 죽이질 못해.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자신들의 체면이 있거든. 우리들처럼 근본도 없는 놈
들을 죽이면 손만 버린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잖아. 특히 저놈처럼 자신이 최
고라고 착각하고 사는 놈들은 말이야. 굳이 자기 손이 아니더라도 나 같은
놈을 처리해줄 인간은 이곳에도 많이 있거든. 안 그래?"
소운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도 구구절절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파(政派)라는 사람들, 특히 배
경 좋고 힘 있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스스로 힘을 사용하는 법이 없다. 혹
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마저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다른 이
들을 이용하곤 한다.
그런 다음 일이 끝났을 때 조그마한 치하(致賀)의 말마디로 모든 것을 마
무리 짓는다. 그러나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이번
에는 완전히 수수방관해 버린다.
이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다. 바로 일을 처리하려 했던 사람, 그의 형제나
자매, 또는 그가 속한 문파에서 혈안이 되어 그 일을 처리하려고 나선다.
이제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어
버린다.
그래서 모두들 권력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백형도 무서운 사람이군. 결코 쉬운 사람은 아니야.'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구소운을 향해서 백산이 소리를 팩 질렀다.
"뭐해? 잔 받아야지."
생사비무(生死比武).
드디어 생사투인전의 생사비무(生死比武) 대전표가 공개되었다.
지금 대전판 앞에서 백산과 구소운은 열심히 자신들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 대전표는 전부 열 개조로 편성되어 있고, 각 비무의 승자가 한 계단씩을
올라가는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오백 명의 이름이 일렬로 써있는 대전표는 무척이나 길었다. 백산은 십 조
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참마도(斬魔刀) 팽월(彭月)이라는 인물이 있는
조였다.
상대는 사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이란 자였고, 그들의 이름 아래에는 조
그마한 글씨로 백산은 오백 대 일, 사인도 진천은 이백 오십 대 일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백산은 내내 대전표의 이름을 훑고 있었다. 친구인 표
운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표운의 이름은 없었다.
'이상하네. 이 녀석의 이름이 왜 없지? 그때 설씨라고 했는데 혹시….'
이번에는 설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 많았다. 거의
열 명 이상이나 되어있는 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는 백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말았다.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공은 좀 있어 보였으니까….'
"어이! 이봐 구형! 구형은 몇 조야? 그리고 저 숫자는 뭐고?"
구소운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조를 찾았는지 백산을 향해서 웃으며 다가오
고 있었다.
아마도 쉬운 상대를 첫 상대로 만나는 모양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칠 조입니다. 그리고 저 조그마한 숫자는 승률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형이 승리할 확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돈을 받게 되는 배율이기도 하고
요. 이를테면 백형의 이름으로 한 냥을 걸었을 때 백형이 투신(鬪神)이 되
면 오백 냥을 벌게 되는 거죠."
"그래? 그럼 사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인가 하는 놈은 나보다 훨씬 강하
다는 말이네? 이백오십 대 일로 되어있으니. 그럼 구형은 얼마로 되어있는
데?"
"저는 백오십 대 일로 되어있던데요?"
"와우! 구형도 한가락 하네? 몸이 왜소해서 별 볼일 없는지 알았더니."
"그건 그렇고. 자네 돈 있으면 속는 셈치고 나에게 한 냥만 걸어. 혹시 알
아? 집에 갈 때 오백 냥을 들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 싫으면 말고.
그런데 구형의 상대는 누구인가?"
"저는 마도 인물인 구월마도(九月魔刀) 창파입니다."
"창파? 그치 강한가?"
"오백 대 일로 되어있으니까 별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네요."
구소운의 말에 백산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나도 오백 대 일인데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던 구소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백형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고…."
"괜찮아. 구형도 나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뭐."
백산의 얼굴에서 뭔가 섭섭한 표정을 느낀 구소운이 재빨리 말을 바꿔 백
산에게 진천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력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그 친구 성격은 어때?"
"성격요? 성격은 매우 신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자세한 것은 더 알
아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됐어, 됐어. 그 녀석 성격만 알고 있으면 돼."
* * *
시월 초하루.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의 만상투인전 중 그해 최후의 대전인 철혈투(鐵血
鬪)가 시작되었다. 만상투인루의 지하 삼층인 생사비무장(生死比武場)에 단
이 마련되었고, 생사비무 시작 준비가 한창이다.
아직은 비무 초반이라 관중석은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았다. 고관대작이나
강호 유명인들을 위해서 마련된 귀빈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흑색의 복면을 쓴 만상투인루 루주는 행운을 빈다는 소리와 함께 개회를
선언했다. 백산과 구소운은 별도로 마련된 투인 대기석에 앉아서 생사투인
전의 첫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사투인전의 첫 번째 비무는 백무천과
음혈색마(淫血色魔) 반고인(半顧寅)이었다.
"엥! 저놈은 그때 주루에서의 그 금뎅이 놈! 저 자식 이곳의 시선을 한 몸
에 다 받겠군. 잘생기고, 배경 좋고, 무공까지 강한 놈을 왜 처음에 하게
하냐고. 여기 있는 여자들은 죄다 뿅 가겠구먼. 더럽다 더러워."
"백형, 이번 철혈투는 말이오. 대전표를 교묘하게 정과 사의 대결로 짜놓
은 것 같지 않소? 마치 일부러 짠 것 같단 말이오."
"당연하지 이 친구야. 정사 대결장을 만들어야 생사비무(生死比武)에 피가
난무하지. 그래야만 돈 싸들고 구경 온 놈들도 더 재미있어 할 것 아닌가.
여기 있는 우리들은 저들의 심심풀이 장난감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툭툭 던지는 백산의 말은 생사투인(生死鬪人)의 신
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돈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인간들. 인간사 중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사투인들이 처절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위에서 보
는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한마디로 목숨을 가지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
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 시작되었군."
백산은 자신의 품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들고 한 모금을 마시며 같이 사온
만두 한 개를 집어들었다.
"캬! 역시 싸움구경을 할 때는 술이 있어야해."
"암, 그렇지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구경을 하겠나. 헐헐헐!"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소리는 아니고? 누구쇼? 냄새나는 영감은
?"
"아! 사숙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백산과 구소운이 놀란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온 거지노인을 쳐다보았다. 거
의 봉두난발에 가까운 머리칼이며 남루한 옷차림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다 막
나온 사람처럼 지저분했다.
"헐! 헐! 내가 내 발로 간다는데 누가 말려? 야, 이놈아. 쳐다보지만 말고
냉큼 술이나 줘!"
백산은 자신을 바라보며 술병을 달라고 외치는 노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찼
다.
"사숙? 그러니까 이 거지 양반이 구형의 사숙이라 이거지? 이거 원 아무리
같은 동문이지만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하나도 안 틀리고 똑 같냐. 영감은
왜 또 이렇게 냄새까지 나는 거야."
"어이 영감! 옷이 더러운 것은 용서가 되는데 몸이 더러운 것은 용서를 못
해요. 그러니 씻고 오시오. 그럼 술을 줄 테니."
"이것 보게, 소형제. 지금 어디서 씻는단 말인가."
구소운이 사숙이라고 부르는 거지노인은 개방의 전전대 방주인 풍신개였다
. 전전대 방주면 사조라고 부른다. 관속으로 들어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 거지는 아주 정정했다.
풍신개도 소운에게서 이 녀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무공은 별 것 없어
보이는데 묘한 구석이 있는 친구라고. 풍신개가 보기에도 그랬다. 비무장
에서는 죽음의 비무가 펼쳐지고 있는데도 마치 이곳에 유람 나온 녀석처럼
술병을 들고서 낄낄거리며 소운과 노닥거리고 있다.
무엇이 이놈에게 이런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일까. 백산에 대한 풍신
개의 첫 느낌은 참 편한 놈이라는 것이었다.
얼굴에 난 흉터로 보았을 때 세상사 걱정 없는 부잣집 도련님은 절대로 아
니다. 그렇다고 저 어린 녀석이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지도 않고. 백산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삼류건달이라는 말이다.
귀공자든 절대무인이든 삼류건달이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은 오
로지 술만 있으면 된다. 풍신개의 생각이었다.
"소형제, 그러지 말고 술 좀 주게나. 이미 비무(比武)도 시작했는데 가기
는 어딜 가나?"
"아! 글쎄, 비무 시작이고 뭐고 안 돼요. 나에게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
고 그래요. 씻고 오면 드린다니까요."
백산이 풍신개가 누구인지 알 리도 없었지만 혹여 알았다 하더라도 그의
기준에 안 되는 것은 죽어도 안 되는 것이 그였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는.
"이봐, 소형제. 너무 하는구먼. 소운이 말을 듣고 나의 전 재산을 털어서
자네에게 열 냥을 걸었네. 그 정도면 술 한 모금 줘도 될 만하질 않나. 안
그런가?"
"잠깐! 잠깐! 지금 나에게 이 백산에게 돈을 거셨다고 했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쇼. 이렇게 거지새끼처럼 해 가지고는 무슨 돈이 있다고 나
한테 돈을 걸어요. 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고 저쪽으로나 가보
쇼."
"소운에게 물어보면 알 것 아닌가. 나는 못 믿어도 소운이는 믿을 것 아닌
가."
필사적이었다. 술 한잔에 체면도 팽개치고 자존심도 버리고 풍신개는 백산
에게 매달렸다. 구소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백산은 그제야 표정이
풀어지며 입 꼬리를 귀밑에 걸고 풍신개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크 하하하! 좋습니다, 영감님. 이 강호무림(江湖武林)에 드디어 이 백산
을 알아주는 이가 생겼군요. 자 드세요, 영감님. 알고 보면 저도 멋진 놈입
니다. 그리고 영감님은 오천 냥의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이제 영감님은 고
생 끝 행복시작이라고요. 원래는 이익금의 절반을 제몫으로 받아야 하는데
소운이나 영감님이나 형편이 별로인 것 같아 보이니 제 몫을 포기하죠. 이
럴 때 좋은 일 한번 하지 언제 또 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영감님!"
마치 자신의 돈을 투자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백산이었다.
이미 백산의 허풍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구소운은 가만히 있었고, 술을
마시던 풍신개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백산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에고, 조금 있다 가서 돈을 걸어야 되겠구먼. 나중에 탈 나기 싫으면….'
순간의 기지로 술은 얻어먹고는 있으나 백산을 쳐다보는 풍신개의 눈에는
신기한 기물을 발견한 듯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저놈의 허풍이라니,
허풍도 저 정도면 중증에 해당한다. 마치 자신이 투신이라도 된 양 말하고
있는 백산을 보고는 구소운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이놈
원래 이런 놈이냐는 표정으로.
"소형제! 자네 말하는 폼이 꼭 투신이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저기 지금
자네의 경쟁자가 열심히 비무를 하고 있는데 보지 않아도 되나?"
비무대에서는 백무천이 음혈색마 반고인을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
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손을 멈추고 반고인에게 피할 여유를 주고 있었
다.
"저거 봐요. 저 자식은 끝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가지고 놀고 있어요. 적
어도 강자라면 저렇게 해서는 안 되죠. 상대에게 고통 없이 빨리 끝내주는
것이 강자다운 면모 아닌가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렇게 하고 있어요
. 아마 만족감이겠죠? 보아라. 바로 내가 정천무룡이다. 천무맹의 삼 공자
이며 차기 맹주 후보다. 바로 이런 뜻 아닌가요? 저런 나쁜 놈 새끼."
풍신개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이 삼류건달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정파인들의 자만심, 아니 힘깨나 있는 자들의 오만이라고 해야 옳다. 자신
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
. 어쩌면 그런 모습들이 자신들이 강호에서 추방하고 싶어하는 마(魔)이고
사(邪)이고 패(覇)일지도 모른다. 정의(正義)라는 이름으로 켜켜이 포장을
한 나머지 저 깊은 속에 있는 진실한 정의가 보이지 않는 현실, 바로 이것
이 무림과 자신들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이어서 '광!'하는 소리가 들리고, '캐액!'하는 마치 짐승이 죽어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음혈색마 반고인의 머리가 깨져 나갔다.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반고인을 사냥감을 몰듯이 가지고 놀다 죽여버린 백무천은 오만한 표정으
로 관중석을 쳐다보며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자네 백무천의 저 환상적인 보법 보았나? 아예 보이지도 않더구먼. 저것
은 무공이 아니라 환상이었어. 이번에 나는 정천무룡 백무천에게 전 재산을
다 걸었네. 자네도 걸었나?"
"미친 새끼들!"
백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곳인 것 같았다.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즐거워하는 인간들. 자신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
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뭔지 모를 씁쓸함에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영감! 오래 살았죠?"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백산이 느닷없이 이상한 질문을 해오자 풍신개는 얼
떨결에 대답을 했다.
"벌써 한 팔십은 되었으니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말이요. 저렇게 죽으면 자신의 죄 값을 치르고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고인 저 녀석은. 그리고 정파의 신룡(神龍)이라는 저놈은 반
고인을 죽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팔십 년 이상을 살아온 풍신개는 백산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공명심(功名心), 이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이지. 특히 명예와 체
면을 중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풍신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 또한 저놈과 별 다를 바 없는 놈일지도 모르지요. 조금 후에는 나의
상대를 개 패듯이 죽여야 될 테니까. 목적달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자네답지 않게 무척 심각한 것 같구먼."
풍신개가 백산의 모습을 보며 너무 감상에 빠진다 싶었던지 은근슬쩍 농담
을 던졌다.
"맞습니다. 나 같은 놈이 무슨 심각씩이나, 그냥 되는대로 살면 그만인 것
을. 모두가 다 자기 멋에 산다는데 제가 이러쿵저러쿵 할 일은 아니지요.
잠이나 자러 가야겠네요."
구소운에게 비무 전에 깨워달라는 말을 하고 백산은 자신의 숙소로 어슬렁
거리며 걸어갔다. 백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풍신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
났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놈."
"글쎄요. 어떤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니 판단이 서질 않아요
."
"두고 보면 알겠지."
* * *
"어이! 백형! 그만 일어나요. 백형 차례라고요…백형!"
"아이! 누구야 이거 모처럼 만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엇! 구형 구형이 여
기까지 웬일이요. 무슨 일 났소?"
"이 친구가?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자기 비무가 오후인데도 태평스
럽게 잠이나 자고…정말이지 백형은 대책이 안 서는 사람이라니 까요?"
"아! 맞다. 오후에 시합이 있었지. 갑시다, 구형!"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백산은 황망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거야?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아니, 백형.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이건 장난이 아니라 생사비무라고요
, 생사비무.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잠이 와요. 잠이 와? 하여간 백
형처럼 무신경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백산을 향해서 구소운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다.
"허허! 구형. 오늘 잔소리가 너무 심한데. 누가 보면 마누라 바가지 긁는
다고 하겠소."
백산은 구소운에게 농담을 던지며 비무장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사
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은 비무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백산을 유심히 관찰
하기 시작했다.
내심으론 기뻤다. 첫 상대가 이름도 없는 사람이니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만사가 불여튼튼 이라고 모
든 것은 신중하게 해야한다.
그의 눈에 비친 백산이란 저놈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심각한 표정으로
온몸을 덜덜 떨며 관중석의 한곳만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떨림은 정도가 심해서 이제는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
였다. 그러면서도 녀석의 시선은 관중석의 한곳에 고정되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진천은 궁금했다. 저곳에 과연 무엇이 있기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 저놈이 한 가닥 기대의 빛을 보이며 쳐다보고 있는 것인가. 고개를 돌려
서 확인하고 싶었다. 저 녀석이 기대를 걸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
이란 말인가.
진천의 얼굴에 초조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악다물고 백산을
노려보았다. 놈의 상태를 파악해 보기 위해서 전음을 날렸다.
'내가 너 같은 놈들의 생리를 잘 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큰소리를 탕
탕 치다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지금의 네놈처럼 온몸을 떨게 되지
, 죽음이 두려워서 말이야.'
사인도 진천의 전음에도 불구하고 백산은 그의 오른쪽만 뚫어져라 쳐다보
고 있었다.
심판관의 시작소리가 벌써 울렸으나 백산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져갔고,
이제는 관중석에 있는 중인들까지도 알아차렸는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천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백산을 향해서 마지막 전음을 날렸다
.
'관중들도 지겨워하니까 이제 그만….'
순간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백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며 두 주
먹을 힘차게 말아쥐는 것이었다.
진천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백산이 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진천의 귓가에 '바보.' 하는 조그마한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
더니 온천지가 깜깜해졌다.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인도 진천이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무
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앞서서 비무를 했던 두 사람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혈전(血戰)을 기대했던
관중석에서는 너무나 어이없는 결과에 할 말을 잊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한쪽이 죽어야하는 생사비무라지만 비무 상대자 간에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다. 적어도 통성명 정도는 하고 나서 암습을 하든지 독을
뿌리든지 하였던 것인데, 지금처럼 끝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다쇠불알 백산 승리!"
"비겁하다! 이게 무슨 비무냐. 애들도 그렇게 싸우지는 않는다. 집어치워
라!"
사인도 진천에게 돈을 걸었는지 여기저기에서 백산을 향해 비난하는 외침
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관중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비무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인도 진천을 일별한 백산은 관중석을 향해서 환하
게 미소를 지은 다음 유유히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비무장 밖에는 풍신개와 구소운이 백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영감! 이제부터는 외상으로 술 먹어도 된다죠?"
그랬다. 생사비무(生死比武)의 일차전에서 승리한 생사투인(生死鬪人)은
만상투인루의 모든 것을 외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죽음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생사투인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백산 일행이 막 주루로 들어가려고 할 때,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백무천
일행과 맞닥뜨렸다.
"어이! 안녕하신가, 버러지씨. 자네의 비무는 잘 보았네. 역시 버러지에
어울리는 수법이더군."
얼굴에 가득 경멸의 표정을 담은 백무천이 백산을 향해서 이죽거렸다. 역
시 그의 생각 대로였다.
근본도 없는 천한 놈들이 강호 정의를 수호하고 약한 자를 돕는 무림인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는가. 어디서 잔재주 몇 가지를 배워 무림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이런 놈들을 보면 그냥 밟아버리고 싶어지는 백무천이었다.
자연히 이런 놈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개방의 인물에게도 선배로서의 제대
로 된 대접을 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명문정파(名文正派)의 어른께서 어찌 이런 버러지
같은 놈하고 어울리고 계신지요. 많은 후배들이 배울까 걱정됩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한때는 개방
방주였던 풍신개였다.
그런 그에게 처신 좀 잘하라고 충고를 하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로 한동안 백무천을 응시하던 풍신개는 이내 표정을 풀며 어색
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 그게 험험! 소운이하고 친구라서 말일세."
그리고는 휘적휘적 주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짝! 짝! 짝!
백산이 큰 동작으로 박수를 쳤다.
"금뎅이 자네 정말 멋있군. 아무리 연장자고 무림 대 선배라고 해도 장차
무림을 이끌어갈 신룡(新龍)을 몰라보면 자네처럼 그렇게 따끔한 충고를 해
야 돼. 저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가. 정천무룡 백무천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버릇없게 주루 안으로 들어가버리니 말이야. 내가 다시 가서 저 영감에게
훈계를 하도록 하지."
네 녀석이 얼마나 잘났기에 어른에게 훈계냐 하는 백산의 일침이었다. 얼
굴이 붉어지고 있는 백무천을 유심히 바라보던 백산이 묘하게 입가를 씰룩
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일세. 나도 자네 비무는 잘 보았네. 아주 통쾌해 보이더군. 공
포에 절어있는 놈을 쥐새끼 밟듯이 한방에 밟아버렸으니까 말이야. 부모님
께 자랑하면 아주 기뻐할 것 같은데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꼭 말씀드리게."
백무천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도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죽이려
했던 것이 약간 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그도 인정하고 있었고 주루에서 그
의 사형인 운학자(雲鶴子)에게 약간의 질책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음혈색마 반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이런 하찮은 버러지
같은 놈에게까지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놈은 그렇게 죽어도 싸지. 무림을 좀먹는 해충이거든. 그리고 그런
해충을 박멸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말이야. 자네 같은 무식한 놈들은 잘 모
르겠지만 이런 것을 두고 일벌백계(一罰百戒)라고 하는 거야. 그놈 하나를
죽여서 다른 색마가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자네도 그런 해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마지막 말을 하는 백무천의 얼굴에는 네놈도 해충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지
가 표면화되어 살기와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백무천과 운학자 일행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큰 해충…작은 해충. 어떤 놈이 더 해악을 끼치는 것일까? 작은 해충이야
나뭇잎 몇 장만 죽이지만 큰 해충은 나무 전체를 죽이게 되는데….'
멀어져 가는 백무천 일행을 쳐다보는 백산의 눈동자가 깊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무슨 헛생각을. 저놈은 저놈 멋에 사는 것이고 나는 내 멋
에 사는 것인데, 나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큰 해충이든 작은 해충이든
무슨 상관이냐.'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백산은 주루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구두파의 인물들이 백산을 향해서 직각으로 인사하며 맞아들였다.
"어? 너희들이구나. 구두 아저씨 어디 있어? 오! 저기 있었구먼. 내가 한
턱 낼 테니 갑시다."
일행은 주루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이! 아저씨 얼마나 걸었소?"
"무슨 말인가…."
"이 양반이 다 알면서 왜 이러나 이거. 나에게 얼마 걸었냐고요."
"오천 냥 걸었네."
"그것밖에 안 걸었어요? 그러니 평생 그런 꼴로 살지."
백산의 입매가 비틀어지며 강구두를 비난하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참 소운, 시합은 언제야?"
강구두를 노려보던 백산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소운을 쳐다보고 있
었다.
"빨리도 물어보네요. 왜 좀더 노시다 비무 끝나면 물어보지요?"
구소운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는 백산이었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한
감이 있었는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 그게 너무 다른 일에 신경을 쓰다보니…."
"모래 아침입니다."
"아직 많이 남았구먼. 그럼 그때까지 잠이나 좀 자 볼거나?"
강구두를 향해서 인상을 쓴 백산이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강구두와 일행
도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미묘한 표정을 지은 풍신개가 연신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구소운을 쳐다보았다.
"방에서는 저 녀석에 대해서 소식 같은 것 들어온 것이 없느냐?"
"몇 가지가 들어왔어요. 십 년 전에 이곳에 나타나서 강구두를 도와 구두
파를 만들었다는 것과 그때 초인파의 두목이었던 살인비도(殺人飛刀) 마천
택을 제거했다고 하고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백수의 제왕이라는 마령호(魔
靈虎)의 호피를 만금돈노(萬金豚奴) 석숭에게 팔았다는 것밖에는 사문이 어
딘지 사부가 누구인지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어요."
과연 무림의 최대 방파인 개방이었다. 뇌룡현의 촌무지렁이인 백산에 대한
정보가 술술 풀려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실력이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떠버리 허풍쟁이 같고,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란 말이야. 뭐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
닌 것 같으니 두고 보는 수밖에…."
그때 백산은 표운을 찾기 위해서 생사투인(生死鬪人)이 머무는 방들을 뒤
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표운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생사비무(生死比武)는 계속 진행되었고, 만상투인루에는 돈
을 딴 자의 환호와 잃은 자의 탄식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늘은 구소운의 첫 생사비무가 있는 날이었다.
백산은 술과 만두를 사서 풍신개와 같이 앉았다.
"제기랄! 이곳은 술이 너무 비싸요. 가장 싼 화주 한 병에 은 다섯 냥이
뭐요? 순 날강도 같은 놈들."
백산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사온 술과 안주를 주섬주섬 자신들의 앞에 내려
놓았다.
"죽기 전에 원 없이 쓰는 것인데 뭐가 그리 아깝나? 어차피 비무하다 죽어
버리면 다 필요 없는 것인데."
"그래서 가장 비싼 것을 사왔죠."
백산이 내놓은 것은 여아홍 열 병, 만두와 구운 오리 세 마리였다.
"자넨 정말 통이 크군. 분명히 성공할 거야. 잘 먹음세."
만면에 웃음을 지은 풍신개는 게걸스레 오리 한 마리를 들고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아! 이것은 소운이 앞으로 달아놨습니다."
"커억!"
입안에서 열심히 절삭작업을 당하고 있던 오리가 풍신개의 입이 벌어진 사
이에 밖으로 튀어나와 날갯짓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아 그게, 아직은 생사비무 결과를 몰라서 안 된다고 하기에 소운이 못 내
게 되면 내가 대신 낸다고 그랬거든요. 너무 그렇게 감격해하지 말고 빨리
듭시다."
백산은 여아홍 한 병을 입안으로 처넣었다.
"캬 - 아-! 바로 이 맛이야. 우물우물. 영감,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한
잔하쇼."
입안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은 백산이 정신 차리라는 듯이 풍신개의 얼굴을
향해서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살다 살다 거지새끼 벗겨 먹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이고, 이걸
소운이 저놈에게 어떻게 말해야 되나? 이놈이 그랬다면 믿어주지도 않을 텐
데…어이구 골이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풍신개를 현실로 끌어들인 것은 여아홍이 몇
병 안 남았다는 백산의 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풍신개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을 때 죽더
라도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백산이 들고 있던 술병을 거칠게 낚아챈
풍신개는 술들을 입안으로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이때 생사비무장에서는 소운과 구월마도(九月魔刀) 창파의 비무가 한창 있
었다. 관중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창파의 검이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수법으
로 소운의 전신을 노리고 지쳐들고, 소운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간
발의 차로 검을 피하고 있었다.
"앗, 취선보(醉仙步)다!"
"개방에서 실전(失傳)된 취선보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소운의 걸음걸이가 더욱더 현란해지자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검을
소운의 가슴으로 찔러가던 창파의 입에 살소가 맺히고 그의 검(劍) 끝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며 튀어나갔다.
창파의 웃음에 이상함을 느낀 소운이 전력으로 몸을 틀며 허리춤에 있던
손을 힘차게 뿌렸다.
챙-!
암기였다. 창파의 검 끝에서 발사된 암기가 소운의 연검에 막혀서 떨어졌
다. 암기를 쳐낸 소운은 당황하고 있는 창파를 향해서 자신의 검을 맹렬하
게 찔러 넣었다.
푸욱!
살이 찔리는 거북한 소리와 함께 창파의 심장에 소운의 연검이 깊숙이 박
혔다. 창파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관중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휴! 위험했네. 비열한 자식, 꼭 야비한 티를 내요. 취익! 허억! 내가 저
런 더러운 침을 뱉다니. 이게 다 백형 때문이야. 우씨.'
백산의 침 뱉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배워버린 소운은 그것을 백산 탓으로
돌리며 풍신개와 백산이 있는 곳으로 갔다.
투인 대기석에 도착한 소운은 너무나 어이없는 광경에 입이 쩍 벌어진 채
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끄윽! 그러니까 영감한테… 그 무어냐, 피…도 뭐? 아니 피독주라고? 크
읍, 그래 피독주라고…하는 놈이…있다는 것…아-뇨. 꺼-억, 그것은 얼-마-
나 나갈…까요?"
"참, 그리고 네놈이…마령호(魔靈虎)…꺼억…를 잡았…다…고 하…던…데
… 그거 정…말…이…냐?"
인사불성이었다. 주변에는 온통 술병이 나뒹굴고 술병 옆에서 풍신개와 백
산이 서로 술주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쭈우욱-캬아! 엉? 안-주-가- 떨…어…졌…네? 어 저기 점원이 있구먼."
"어이! 점원 여기 오리구이 한 마리 더 꺼-억!"
그러나 백산이 부른 그 점원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야, 이-놈-아. 저 녀석 점-원…이 아닌 것 같-지 않-냐?"
"어?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네-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사숙니…임!"
소운의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비무장을 가득 채웠고 풍신개와 백산은 술이
번쩍 깨는지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구는 비무대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사숙이랑 친구라는 인간
들은 격려는 못할망정 이곳에서 술이나 먹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되요? 말이
되냐고요."
"아이고, 소운아. 이건 절대, 절대 나의 의지가 아니다. 나는 조용히 이곳
에서 응원이나 하려고 했는데 저 웬수 같은 자식이 술을 턱하니 가져오는
거야. 그것도 싸구려 화주가 아닌 여아홍, 그 말로만 듣던 여아홍 아니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아홍 하면 끔벅하지 않냐. 저놈, 저놈이 웬수야!"
"아이고 영감, 무슨 사람 잡을 소릴 하는 거요. 나야 이 술은 소운이 비무
끝나면 자축하려고 사온 건데 영감이 먼저 먹고 있자 해서 시작한 거 아뇨
. 왜 생사람을 잡아요. 나잇살이나 먹은 양반이 어디서 거짓말이요! 소운,
나는 말이야 너의 사숙의 기분 맞춰준 죄밖에 없다고. 잘못은 저 영감에게
있다고."
처절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풍신개와 백산은 입안 가득 게거품
을 물고서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야 인석아, 내가 언제?"
"됐어요. 그만해 내가 뭘 더 바래요. 둘 다 똑같아요."
풍신개와 백산은 서로를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서 전음을 날렸다.
'돈 이야기는 벙긋도 하지 마라. 그것마저 들키면 너와 나는 최소한 사망
이다. 이놈아, 알았냐?'
"알았소."
"알긴 뭘 알아요?"
얼떨결에 풍신개의 전음에 대답을 해버린 백산을 소운이 이상한 눈으로 쳐
다보며 소리쳤다.
"아무 것도 아니야. 힘들 텐데 빨리 가서 쉬라고."
소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백산이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정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소운이 멀어지자 백산과 풍신개는 안도의 숨의 내쉬면서 주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감, 어디 가쇼?"
"그런 네놈은 어디 가느냐?"
"나야 배가 고파서 밥 먹으로 가는 거지요."
"나도 밥 먹으로 간다, 이놈아."
"에이 영감이 무슨 돈이 있다고 밥을 먹으러 가요. 돈이라고는 먹고 죽자
해도 없으면서."
"클클클! 밥은 네놈이 사야한다. 안 그러면 지금 소운이에게 가서 오늘 일
을 전부 일러바칠 거야. 알아서 해, 이놈아."
"치사한 영감 같으니라고. 하여간 누구하고 똑같아요. 그러나 저러나 잘
계시려나?"
백산은 가만히 밖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티격태격하면서도 풍신개
영감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사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사부요. 나이도 많은 노인네가 잘 있나 모르겠네. 날씨가 조금 쌀쌀한 것
같은데…."
"엥? 네놈에게도 사부가 있었냐? 네놈의 사부도 참 한심하다. 너 같은 놈
을 제자라 길러 놓고 얼마나 근심이 많을까."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백산은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백산은 계속해서 비무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어김없이 술과 안
주를 챙겼고, 그 곁에는 언제나 거지 한 명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야 이렇게 자주 술을 먹어서 좋기는 하다만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 비
무장을 계속해서 들리는 거냐. 그것도 설씨 성을 가진 자가 비무할 때마다
오는 것 같은데."
술 때문에 백산을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니었는지 백산이 비무장에 온 이유
를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백산은 말없이 비무장만 주시하고 있었다.
생사비무(生死比武) 일차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 비무대에서는 백산이 찾고 있는 설씨 성을 가진 자 중에서 마지막 인
물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야! 이 녀석아, 술 안 먹고 뭐 하느냐."
조금 전부터 백산은 자신과 친숙한 어떤 기운을 느꼈기에 연신 몸을 움찔
거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백산은 천천히 자신의 감각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자신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던 그 기운이 잡히기 시작했
다.
"비무장, 비무장이다!"
갑자기 큰소리로 외친 백산은 비무대를 주시했다.
"영감, 지금 저곳에서 비무하는 자들이 누구요? 빨리 좀 말해 보시오."
풍신개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에게 경어를 쓰고 있는 백산에 대해 네놈이
웬일로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의뭉스럽게 쳐다보았다.
"지금 비무하고 있는 놈들은 낙양(洛陽)에 있는 무림세가(武林世家)인 설
가장의 장남 설가치룡 설태만과 독안수(獨眼獸) 인육(引六)이란 놈들이다.
네놈이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아닌데…혹시 저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천하제일의 무림세가인 설가장이지만 이곳 뇌룡현의 촌놈과 관련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뭔가 알고 있는지 풍신개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나 백산은 풍신개의 표정
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비무대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설태만? 설? 설 공자. 낙양(洛陽). 그래 저 녀석이 바로 표운이다."
그제야 백산은 표운이 설태만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무대에서는 설태만으로 화한 표운이 상대방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
이내 끝날 것처럼 보였다.
"휴! 괜히 걱정했네. 비무 끝나면 만나서 무슨 사정인지 알아봐야겠네…."
백산은 설태만 아니 표운이 잠시 자신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흡사 어린 시절 표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백산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백산을 향해서 웃어보이던 표
운이 자신의 검을 힘차게 뻗으며 상대에게 뛰어들었다.
"안-돼!"
푸-욱!
백산의 외침소리와 칼로 찌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표운의 심장을 관통한 검이 등뒤로 빠져나와 있었다. 표운을 찌른 인육(引
六)도 자신의 검이 표운의 심장을 관통했다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는지 얼이
빠져있었다.
즉사였다.
백산이 뛰어 들어갔을 때는 표운의 숨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백산을 향
해서 웃음 짓던 그 모습 그대로 죽어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천무
맹에서 그런 마단을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알 수가 없
었다.
백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녀석이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인육이라는 놈은 결코 표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백산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표운의 비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이 바보 자식아!"
백산의 고통에 찬 외침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음날 백산에게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나의 마지막 모습을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은 행운일까? 미안한 걸까? 나
는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네 녀석이 나의 모습을 보아준다고 생각하니
마지막 길이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 같구나.
죽음이라는 것. 빠르고 늦은 차이만 있을 뿐, 그 누구도 피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삶의 과정일 뿐인 것을….
나의 죽음에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니겠냐고. 자꾸만 가슴속을 뚫고 나오
는 삶에 대한 애착을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꼭꼭 묻었다.
나는 결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가슴속에서 살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나
에게 조그마한 삶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곳은 영원한 나만
의 공간이다.
령. 이름자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던 그 이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히 저려온다. 평생을 병치레로 고생만
하다 처음으로 잡은 행복, 차마 그것을 깨트릴 수 없었다.
낙천수사(樂天修士) 표운(彪雲),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백산, 너에게는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나는 많은 시간 너를 잊고 살았다.
사방으로부터 조여오는 삶의 무게가 과거를 추억하도록 놔두지를 않더구나.
네 녀석이 떠나고도 령이와 나의 삶은 변화가 없었다. 령이는 줄곧 아프고
나는 낙양 거리를 헤매며 뭇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의외로 변화가 먼저 찾아온 것은 령이었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그런 그녀가 이곳
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자신의 남편을 구해달라
고,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다고.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에게 무엇인
가를 해달라고 한 첫 부탁이었다.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 그녀의 즐거워하
는 모습, 그녀의 웃음, 그녀의 희열에 찬 표정, 비록 나를 향한 것은 아니
었지만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아니 행복했다는 것이 제대로 된 표현일 거
야.
언제나 병치레로 고달팠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행복감이었다. 나는
하늘에 감사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행복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웃는 모습이 나의 가슴을 따사로이 데우
고 있다.
백산, 나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라. 이제 이곳에서 나는 설가치룡
설태만으로 죽게 되겠지.
너에게도 목숨을 바쳐서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생각한다.
나에게는 령이었다.
령의 행복이 내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것을 위해서 이 길을 선택했고
후회나 아쉬움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네 녀석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
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주 먼 훗날, 오래도록 먼 훗날 다시 만나자, 미친 곰 새끼.
-표운
편지를 읽어주던 구소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병신 새끼, 그렇게 뒈질 거면서. 병신 새끼."
표운을 욕하는 백산의 목소리의 떨림이 점점 커지고 그의 몸으로부터 분노
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고 세상에 대한 분
노의 기운이었다.
'왜 마지막까지 그런 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가. 우리들 같은 천한
놈들은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건가. 왜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싶으면 그것을
시기하는 놈이 나타나는가.'
백산의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정말 개 같은 세상이야."
"백형!"
한쪽 구석에서 백산이 뿜어내는 분노의 기운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구소
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백산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백산은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소운,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쇼. 그 녀석을 데리고 와야겠소."
백산은 표운의 서신을 품속에 넣고는 방을 나서서 표운이 묵었던 방을 향
해 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손을 내밀려는 순간 방안으로부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의 시신은 가지고 가야 되겠지?"
"일단은 이곳에서 가지고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 공자의 죽음을 알
려야 되겠지. 그리고 적당한 곳에 가서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지 뭐."
쾅!
문을 박차며 굳은 표정의 백산이 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백산의 방문에 흠칫 놀란 두 사람이 재빨리 검을 뽑으며 외쳤다.
"누구냐? 누군데 설태만 공자의 영면을 방해하느냐? 썩 꺼져라."
유난히 설태만을 강조하며 백산을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네 친구 표운을 데리러 왔다. 방해하면 죽는다."
백산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자우룩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의 유골
을 찾기 위해서 참고 또 참고 있었다. 자꾸만 사라지려고 하는 이성을 부여
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곳에 네놈 친구는 없다. 그리고 설 공자에게는 네놈 같은 친구도 없었
고…."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백산을 향해서 검을 휘
둘렀다.
자신을 향해서 죽음의 살기를 뻗어내는 검을 가만히 응시하던 백산이 가볍
게 손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그의 손목에 있던 수천비(手天匕)들이 죽음의 빛을 뿌리며 두 개의 검을
잘라냄과 동시에 그들의 목 앞에 멈춰진 채로 있었다.
"선택해라. 남을 놈과 돌아갈 놈을."
순간 백산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던 두 사람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
신들의 눈앞에서 죽음이 빛을 뿌리고 있는 비도(飛刀)를 쳐다보는 두 사람
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선택을 못 하겠다? 그럼 내가 선택하지."
백산이 두 사람의 목에 있던 비도를 천천히 치우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목을 위협하던 비도가 치워지자 두 사람의 몸이 비호처럼 백산을 향해 쇄도
하며 자신들의 최후 절기를 펼쳤다.
방안 가득 난무하는 검광(劍光) 속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왼쪽 놈!"
뒤이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방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오른쪽에 있던 장한 한 명의 이마에는 백산의 사천비(死天匕)가 깊숙이 박
혀있었다.
"가라! 가서 설태만과 그놈의 아비에게 알려라. 내가 찾아갈 것이라고."
백산에게 쏟아져 나오는 살기는 남은 장한의 삶의 의지조차도 빼앗아버렸
는지 고개만 끄덕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백산은 조용히 표운의 시신을 안
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서 강구두를 불러 화장과 유골의 보관을 지시했다.
친구를 보내고 바라보는 밤하늘은 참으로 황량했다.
"그 녀석은 행복할까?"
"그럴 거예요. 알아주지도 않는 상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버린 사람이라면 이제는 행복해야 되겠죠."
만상투인루가 보이는 갈대밭에 백산과 소운이 나란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