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84)

제10장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

 "옜다! 배우면 폼 나겠다고 원했던 바로 그 도법이다. 지금 너의 성취로

볼 때 익힐 것도 없지만 한 번 읽어보기나 하거라. 네 녀석이 아는 글자만

을 사용하여 다시 정리했다."

 책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써있지 않았다. 안쪽에도 마찬가지로 삼 초의

도법(刀法)과 수련방법만 적혀있을 뿐 그 외의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한스러움이었으리라, 죄스러움이었으리라. 연유야 어찌되었건 자신 때문에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던가!

 제 일초 혈극참(血極慘).

 제 이초 혈극폭(血極爆).

 제 삼초 혈극망(血極忘).

 도법을 읽어본 백산의 입이 턱하니 벌어졌다.

 "이것이 사부님의 도법이란 말이죠, 이런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것이.

이건 무공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분해해버리는 것 아닙니까? 이 도법에

부딪치면 뼛조각까지 다 발라지겠구먼요."

 백산의 치켜세움에 기분이 좋은지 팽무도의 얼굴에 슬몃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공에 대해서 제자가 놀라는 것을 보는 것 또

한 즐거움이었다.

 "그렇다, 인석아. 우리 팽가도법(彭家刀法)에다 혈수천마(血手天魔)의 혈

수도법(血手刀法)을 섞고 거기에 나의 심득(心得)을 더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니 강할 수밖에."

 한 많은 인생일지언정 자신의 업적을 제자에게만은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팽무도의 어투에는 자긍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팔십 평생에 이루

어놓은 단 한 가지 일이다. 원망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가문 쪽에는 고개

도 돌리지 못하며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것도 익히려면 한 이 년은 걸리겠는데요?"

 이럴 땐 사부의 기분을 좀 띄워주자 싶었는지 백산도 한술 더 떠서 사부의

 업적을 치하하고 나섰다.

 "무슨 이 년이야. 이미 그 경지도 다 넘어선 놈이."

 팽무도가 소리를 팩 질렀다.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지 알고 있기 때

문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의 무기는 수천비(手天匕)와 각천비(脚天匕)라고요.

수천비와 각천비로 이 초식들을 완벽하게 펼치려면 도(刀)로 배우는 것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은 걸린다고요."

 "뭐라고? 그 도법을 각천비와 수천비를 이용해서 펼친다고, 그것도 동시에

?"

 "제 무기로 펼쳐야지 뭐로 펼쳐요? 위력도 훨씬 강해질 것 같구먼."

 팽무도는 자신을 뛰어넘고 있는 제자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것이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필요 없을 터, 나는 장 노인에게 가 있으마. 수련(修練)

이 다 끝나거든 뇌룡현(雷龍縣)으로 오너라. 그때 장 노인과 내가 긴히 할

말이 있구나."

 팽무도가 내려가고 백산은 홀로 앉아서 사부의 비급을 펼쳐보았다.

 사부는 자신이 이 비급의 경지를 모두 넘어섰다고 했지만 백산의 입장에서

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지금껏 그가 배운 것은 몸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는

무공이다. 그래서 형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 비급의 무공은 새로운 난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부터 백산은 사부의 삼초 도법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

 제 일초 혈극참(血極慘).

 사부가 삼류무사라 칭했던 도강의 경지를 시전하는 무공이다. 혈극참이 펼

쳐지면 온통 사방천지가 붉은빛의 혈광에 휩싸이게 되며, 일초에 백팔 번의

 칼질이 일어난다.

 그 칼날 아래 있던 상대방은 혈광 속에서 어떤 것이 진실한 강기인지도 파

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분해되는 도법이다.

 제 이초 혈극폭(血極爆).

 사부 말에 의하면 이류무사의 경지로 이기어도(以氣馭刀)를 시전하는 무공

이다. 혈극참에서 일어났던 백팔번의 칼질이 이번에는 허공으로 날아간다.

혈극폭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제 삼초 혈극망(血極忘).

 진정한 고수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던 심도(心刀)의 경지, 더 이

상의 언급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혈극참과 혈극폭이 살

아있는 생물을 말살시키는 무공이라면 이것은 살아있는 것이든 죽어있는 것

이든, 주변의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무공이었다.

 진도(眞刀)가 필요 없이 마음속의 도(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경지가 삼초

 혈극망인 것이다.

 사부가 비급의 이름도 지어놓지 않은 삼초의 도법을 자세히 읽어본 백산은

 도법의 가공함에 놀랐고, 잔인함에 경악했다. 한마디로 이 도법은 모든 것

을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일단은 수천비로 먼저 시전하는 것을 익히고 싶었던 백산은 수천비 세 개

를 한 묶음으로 하여 도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두 개로, 그

리고 양손을, 순차적으로 도법을 시전하는 천비의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고,

 육 개월이 흐른 뒤 드디어 열두 개의 수천비로 각각의 혈극참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혈-극-참(血極慘)!"

 커다란 외침과 함께 그의 비도(飛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장이 넘는

도강을 쭉쭉 뻗어내며 열두 개의 비도가 동시에 혈극참을 시전하자 셀 수

없이 많은 도들이 백산의 전방을 향해서 휘둘러지고 있었다.

 흡사 황혼 속에서 태양의 빛이 사방을 비추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

로 황홀했다. 그의 앞에 있던 바위 하나가 그냥 사라졌다.

 "휴, 대충 펼친 것이 이 정도니 전력으로 펼치면 난리가 나겠군! 그런데

이 정도가 삼류무사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 영감이 사기 친

것 아니야?"

 자신의 무공에 자만심을 가질까 싶어서 적어놓은 것을 백산은 그대로 믿고

 있었다. 혈극참을 다 익히고 이초인 혈극폭을 익히려는 백산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다름 아닌 혈극폭이 어도술(馭刀術)이란 데 있었다. 백산의 천비(天匕)는

모두 자신과 뇌룡사(雷龍絲)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날

려서 어도술을 시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강기의 폭풍이다. 자신의 열두 개의 비도에서 나

오는 도강을 상대에게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모두 천여 개 이상의 도강이

날아가는 장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삼초 혈극망(血極忘)을 익히는 것은 백산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것이 아

니었다. 이미 그 경지는 초월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일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백산은 사부의 삼초의 도법을 완전하게 익

힐 수 있었다. 비록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위력 면에 있어서는 한결 강해진

 도법으로 완성시켰다.

 우뢰봉(雨雷峰)의 정상.

 허공 일장쯤 위에 떠있는 백산의 아래쪽에는 여섯 개의 각천비(脚天匕)가

요요로운 붉은 빛을 뿌리며 거의 바닥에 박혀있는 것처럼 닿아 있고, 그의

손목에서 나온 수천비(手天匕)는 그의 가슴을 감싸듯이 하늘을 향해 서 있

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백산의 눈이 떠짐과 동시에 강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혈극참(血極慘)!"

 "혈극폭(血極爆)!"

 "혈극망(血極忘)!"

 그러자 그의 주변에 붉은 색 물감이 퍼지듯 혈광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며

 손과 발에서는 지금껏 익히고 있던 삼초의 도법이 동시에 펼쳐졌다.

 혈우(血雨), 온 사방을 휘감아버리는 붉은 혈광, 혈광들. 핏빛 도강이 난

무(亂舞)하고 도강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악귀의 춤사위처럼 섬뜩하기만

했고, 너무나 강력한 위력에 살기마저 숨어버렸는지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

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요하지 않았다. 백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먼지로 흩어

져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핏빛 광풍(狂風)이었다.

 '이 백산의 사부가 만든 것인데 저 정도는 되어야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사부에 대

한 칭찬은 인색하다.

 '이제 이놈의 도법 이름을 지어야지. 무엇이 좋을까? 광풍도법(狂風刀法)?

 아니야. 이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그래 사부의 한이 서려있는 무공

이고 또 다음에 팽가에 돌려주어야 할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 그걸로 하자.

 한천팽무도법(恨天彭武刀法), 사부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것 같고 괜찮구

먼.'

 요상한 무공 이름을 지어놓고 혼자서 즐거워 백산은 자화자찬(自畵自讚)을

 하고 있었다.

 모든 수련을 끝마쳤다. 천비비(天匕秘)라 일컬어지는 사문의 최후의 심득(

心得)을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무공 자체가 일정한 초식이 없는 바, 성취여부는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다

. 오직 자신의 느낌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수천비와 각천비로만 펼칠

수 있는 열두 가지의 무공도 다 익혔다.

 그런데 생각보다 위력이 없었다. 사부와 같은 경우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

았으나 딱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오지 않는 위력을 가지고 고

민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연공을 끝마쳤다.

 자신이 느끼기에는 이제 더 이상 천비로 익혀야할 무공은 없는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는 더 이상 꿈을 꿀 필요가 없다.

 이제는 찾을 것이다.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꿈을, 어머니가 잃어버렸던 세

월을, 그것들을 앗아간 놈들에게 하나씩 찾아올 것이다.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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