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84)

제8장 혈우신보(血雨神步)

 언제부터인가 백산은 알몸이었다.

 얼마나 입었는지 옷은 다 헤어져서 입어도 별로 입은 것 같지도 않은 옷이

지만, 그래도 인간이다 보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으면 어색하기도 해서 비

가 오는 날이면 꼭 빨래를 해서 입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말려놓은 옷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날려가버린 것이었다

.

 "우-! 핫! 핫! 핫!"

 혈풍(血風) 속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서는 모두 열

세 개의 물건이 사방으로 뻗어나오고 있었다.

 붉은 빛을 머금고 있는 열두 개의 비도와 아침마다 하늘로 뻗치는 거시기

가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백산은 계속해서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운용하며 바람을 관찰

해 나갔고, 내부의 바람과 외부의 바람을 비교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

았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싶어서였다.

 이제 백산은 바람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자신이 바람이고 바람이 자신인

경지, 바람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파악해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백산은 절벽탐험을 시작했다. 워낙 바람이 많고 거세게 부는 곳

이라 그 흔한 새집 하나 없었다.

 '고기라도 좀 먹을까 했는데.'

 지금까지 절벽을 탐험하고 돌아다닌 것은 육포에 질린 백산이 새라도 있으

면 잡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허탕이었다.

 '오늘은 바닥이나 한번 내려가 볼까?'

 그동안 깨달은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바닥으로 내려와 보니 그곳은 조그마

한 분지에 백색 이끼만 무성하게 덮여있었다. 살아 숨쉬는 짐승을 생각하고

 내려왔건만 풀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가만 이 향기는 어디서 많이 맡아보았던 냄새인데.'

 백산이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에게 익숙한 냄새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특별한 것은 전

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응? 이 이끼가 이상하네? 오호! 바로 이것이었군. 나

에게 익숙한 냄새의 정체가, 바로 약수천(藥水泉)의 냄새였어.'

 백산에게 익숙했던 냄새의 정체는 바로 이끼였다. 사부가 이곳에서 이끼를

 채취하여 동굴 속 온천에 집어넣어 약수천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놈의 것 무지하게 몸에 좋은가 보네? 먹어도 괜찮겠지? 약으로 쓰이는

것인데 뭐 어쩔라고!'

 그곳의 백색 이끼는 만년석균(萬年石菌)이었다. 만년석균을 장복하게 되면

 일반인은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무림인(武林人)은 몸속의 탁기(濁氣)를

 제거하여 공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물! 우물! 캬아-! 바로 이 맛이야. 모름지기 사람은 야채를 먹어야 돼.

 그 빌어먹을 놈의 육포(肉脯)에 이제는 질렸다, 질려."

 천고의 영약이라는 만년석균이 야채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만년석균(萬年石菌)을 잔뜩 먹은 백산은 불러오는 배를 두드리며 이제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련이 끝났다고 바로 올라가자니 그 노인네의 다음 수련이 기다리고 있

을 테고, 이곳도 좋은데 좀 쉬었다 올라가지 뭐!"

 태평스럽게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백산은 며칠 동안 뒹굴면

서 만년석균을 축내며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저기 절벽 중앙에다 이 꽃미남의 얼굴이나 새

겨? 그거 좋은 생각이네! 장차 황젠가 뭔가 하는 녀석이 살고 있는 북경의

밤거리를 평정할 이 몸의 수련장소인데 무엇인가 남기는 것이 있어야지, 암

! 그렇고 말고."

 다음날 백산은 자신의 오두막동굴 집으로 올라가서 자화상을 새길 벽면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오! 저기가 좋겠다. 바람도 적게 치고, 세월이 흘러도 나의 모습이 남아

있을 곳이군. 일단은 평평하게 다져야겠지?"

 "이…얍!"

 바람을 타고 옆으로 이동한 백산은 절벽을 깎기 위한 동작을 취하려다 갑

자기 멈춰 서는 것이었다.

 '이거 처음으로 내가 쓰는 초식인데 너무 밋밋하잖아? 초식 이름이 있어야

지. 무엇이 좋을까…내가 반쯤 미쳐서 터득한 초식이니까 광풍노호? 아니야

. 마지막의 호랑이는 나의 원수인데, 이 초식에 등장하게 할 수는 없지. 그

래! 내 이름의 마지막자인 산(山), 산이 좋겠다. 광풍노산(狂風努山). 오홋

! 정말 멋진데?'

 훗날 강호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광풍노산'의 초식 이름은 이때 지

어졌다.

 "자, 간다. 광-풍-노-산(狂風努山)!"

 번쩍! 번쩍! 파바박! 싸악! 싸악!

 순간 열두 개의 비도(飛刀)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오며 백산의 몸은 절벽

벽면을 누비기 시작했다. 족히 사방 이십여 장이 빙벽처럼 매끈하게 깎여져

 나가 있었다.

 그날부터 백산은 절벽에 자화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렸을 적의

모습이었다. 동경 하나 없는 이곳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길

 없는 백산이었기에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한달 정도의 작업을 마치고 오른쪽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백산(白山)

'이란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 고금제일인이란 글자도 사부가 자신의 호를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나중에 자신이 써먹기 위해서 맞아가면서 배웠던 것

이다.

 백산이 고금제일이란 글자를 다 쓰고, 자신의 이름을 새기려고 하는 순간,

 "백산아, 수련 끝났으면 그만 올라오지 않고 뭐하고 자빠졌느냐?"

 사부였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백산을 부르고 있었다.

 "허거덕! 저 노인네가 연공 끝난 줄을 어떻게 알고, 귀신이 따로 없다니까

."

 "지금 바로 올라오지 않으면 다시 타혈법(打血法)을 시행한다."

 "예! 가요, 가고 있다고요! 에이 시-이, 나머지는 다음에 새겨야겠네. 또

시간이 있겠지 뭐…."

 백산이 절벽 위로 올라오자 팽무도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으면서 백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 왜 자꾸 쳐다보면서 웃어요? 제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어요?

 "크흡! 크크큭! 그래 이놈아, 네 몰골을 좀 봐라."

 거의 이년을 넘게 옷이 없이 생활한 백산은 새까맣게 탄 것은 둘째 치고라

도 엉덩이까지 내려온 머리하며 길어진 수염, 아래쪽에 듬성듬성 나 있는

털들은 한 마리의 머리 긴 원숭이 새끼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크흡! 그래 바람은 보았느냐?"

 "이걸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보았지요."

 말과 함께 눈을 감은 백산의 주위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

풍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강해지더니, 나중에는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던 머

리카락이 산발하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열두 개의 비도는 요사스런 붉은

 빛을 뿜어내며 백산의 몸과 함께 서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백산이 일으키는 광풍(狂風)에 뒤로 밀리던 팽무도는 경악했다.

 지금 백산이 익히고 있는 이것은 자신도 익히고 있었으나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바람을 이용하는 수준이라면 이 녀석은 바람 그 자체로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익힌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팽무도

였다.

 "그만, 그만해라. 그럭저럭 성취가 있었구나."

 "그럼 이제 삼 단계 수련장으로 가자꾸나."

 "에이! 사부님 이제 막 이차 수련을 끝냈는데 조금만 쉬었다가 시작하면

안되요?"

 "이놈이! 한 달간이나 쉬었으면 되었지 무얼 더 바래."

 "허억!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알았어요, 가요! 가! 간다고요!"

 백산은 도살장 가는 소 끌려가듯이 그렇게 사부를 따라가서 도착한 곳은

용미폭포(龍尾瀑布), 생긴 것이 용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부가 지은

이름이란다.

 용미폭포는 백산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생겼다. 백 장이 넘는 엄청난 높이

였다. 상층부의 폭은 거의 사십 장에 달해 보였고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그 폭이 좁아지는 것이 꼭 방갓을 거꾸로 놓고 물을 아래쪽으로 내리는 것

처럼 보였다.

 똑 같은 수량이 좁아진 통로를 지나게 되면 엄청난 압력이 생기게 된다.

때문에 가장 아래쪽에서는 굉음과 함께 수창이 만들어지며 주변의 모든 것

을 파괴시켜버릴 것만 같았다. 용꼬리라고 했던 사부의 말이 이해가 되는

광경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저곳에서 물을 배워야 한. 바람을 익힐 때처럼 물을 느낄

수 있도록 해보아라."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자신도 익히지 못한 무공이고 보니 뭐라고

 해줄 말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라면 나도 하겠다. 모든 것은 너 자신에게 있느니라

."

 혼자서 무어라고 궁싯거리며 백산은 '용미폭포'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

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안쪽에 바위 하나가 남아있었다.

 저렇게 강력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무지하게 단단한 놈인가 보다.

 폭포 위쪽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소뿔을 거꾸로 해놓으면 저런 모양이 되

겠다 싶었다. 양쪽 폭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

전히 미끈했다. 한마디로 모서리처럼 튀어나온 곳이 없다는 것이다. 폭포수

는 어디 하나 걸리는 곳도 없이 일직선으로 아래를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

 "저기 보이는 저 바위 위를 보면 네가 누울 수 있도록 홈이 파여있을 것이

다. 앞쪽과 뒤쪽을 반복해서 시행하도록 하고…."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에 가서 혈풍뇌전심법(血風雷電心法)을 운용하며 하

루 중 여섯 시진은 전면으로 폭포수를 맞고, 나머지 여섯 시진은 후면으로

폭포수를 맞고,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시행해야 한다. 잠은 알아서 자라고 했다.

 내심으로는 씨펄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풍뢰곡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약간

은 마음이 놓이는 백산이었다.

 또다시 백산의 수련(修練)이 시작되었다.

 사부가 알려준 연공방법에 백산은 그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백산의 생각에 이번 연공은 좀 쉬울 것 같았다. 그까짓 떨어지는 폭포 아

래 서 있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폭포 아래로 들어가서는 잠시도 버티질 못했다. 순식간에 피멍이 들

어서 밖으로 기어나올 때 사부를 저주했다. 사부의 타혈법(打血法)은 완전

한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누워서 폭포수를 견딘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

다.

 그냥 들어갔다 나오기를 수백 회, 그가 폭포수 아래에 파여진 곳에 처음

누운 것은 그로부터 이 개월이 지난 후였다. 세월이 흘렀고 일각(一刻)에서

 한 시진(時辰), 한 시진에서 반나절, 반나절이 하루가 되었을 때 백산은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내공을 거두어 갔다.

 백산의 몸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폭포수가 떨어지

는 곳에서 미약하지만 약한 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압력을 가지고 떨어지는 곳에 몸을 방치하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저절로 내공이 그쪽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에 그런 증상이 생기

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금

강불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운공을 하지 않고 폭포수를 맞기 시작한 지 어느덧 육 개월이 흘렀다. 배

가 고프면 풍뢰곡(風雷谷) 바닥의 만년석균을 뜯어다가 먹으면서 수련을 계

속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떨어지는 물에 대해서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오늘도 명상

을 하고 있었다. 간혹 가다 조그마한 물고기가 폭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어쩌다 커다란 물고기라도 보이는 날이면 그날은 고기를 먹

는 날이었다.

 지금도 백산은 폭포를 거스르며 올라가고 있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바

라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보니 눈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고기 주변

의 공기가 미세하게 위로 솟구치는 것같이 보였다.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면

 결코 알아볼 수 없는 미약한 기운이었다.

 백산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마리의 물고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이번에는 더 자세히 확인하려는 듯이 살짝 내공을 운용하여 물고기를 관찰

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물고기 주변의 공기는 물이 떨어지는 속도만큼 위로 올라가고 있

었고, 그 공기의 흐름을 따라서 물고기가 위로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백산의 전신에서 붉은 빛 무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폭포수를 퉁겨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산의 머리는 계속해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아무리 거세게 떨어지는 것이라도 그것의 주변은 그 떨

어지는 물체의 속도에 반하는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엄청난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 중심은 진공상태가 되어 그곳에서는 아무런

힘을 느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쾌검(快劍)의 원리가 바로 이것

이다. 아무리 엄청난 쾌검을 구사한다 해도 검 주변의 공기는 쾌검을 구사

한 본인에게 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밀려가기 마련이다.

 그것을 잡아내면 된다. 보법(步法)도 마찬가지이다. 물이 떨어질 때 파문

이 생기는 것처럼 검이나 암기가 다가오면 공기의 파동(波動)이 생기게 된

다.

 그 파동을 감지(感知)하고 피하면서 몸을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보법(步法

)인 것이다. 형식(形式)이나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보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백산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폭포를 거스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물고기가 올라가

는 것과 흡사해 보였다.

 용미폭포에서 삼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백산은 세 가지를 얻었다. 금강불괴지신과 혈우신보라는 보법,

그리고 쾌의 요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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