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84)

제6장 다(多)쇠불알 백산

 "이곳 뇌룡현(雷龍縣)에 있는 초인파(超人派)의 근거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먼저 흑웅(黑雄) 역기세(力氣勢)가 행동대장으로 있는 용지시장(龍池市場

), 청목수라(靑目修羅) 부시온이 행동대장인 암시장… 현재 초인파(超人派)

의 두목 두 놈이 모두 만상투인루에서 벌어지는 철혈투(鐵血鬪)를 구경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지금이… 포위되어 있는 암시장은 쉽게 깨트릴 수 있

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구두파(久讀派)의 근거지인 홍루(紅樓) 삼층 회의장에서 강구두와 오구 그

리고 행동대장들이 한창 초인파 섬멸을 위하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석두 저 자식 원래 저리 똑똑했냐?"

 석두가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산이 자기 딴에도 석두의 말

이 너무나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연신 감탄하며 일휘를 향해서 물었다.

 "저 녀석을 형님이나 저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지금 처지는 저래도

 한때는 잘 나가는 귀족 집의 도련님으로 신동소리를 듣던 놈이래요."

 "그래? 일휘! 그런데 거기서 왜 너와 내가 비교 대상이 되는 거냐?"

 백산이 눈을 부라리며 일휘를 쳐다보았다.

 "아이, 형님도.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형님이나 나나 글을 모르는 것

은 피차일반이라 이거죠."

 "이 자식이? 그래도 나는 오백 자 이상이나 되는 글자를 알고 있어 임마.

너와 같냐?"

 점점 백산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었지만 일휘는 상태파악을 하지 못하

고 폭탄의 심지를 건드리는 결정적인 소리를 하고 말았다.

 "에이 형님도. 글자를 알고 있으면 뭐해요 쓸 줄을 알아야지. 한번 써보세

요. 여기다 한번 써보라니까요?"

 석두가 일휘를 쳐다보며 연신 입 다물라고 손짓을 했지만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일휘는 멈출 줄을 모르고 백산의 염장을 질렀다. 별안간 흰자위

가 번뜩이고 온몸을 부르르 떨던 백산이 일휘를 쳐다보자 일휘는 두 손으로

 입을 딱 막으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혀- 형님!"

 일휘는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나룻배요, 밥이 되어 버린 쌀

이었다.

 "그래, 이 자식아. 나 글 못쓴다. 한 자도 못쓴다. 나 글 못 쓰는 데 네가

 보태준 것 있냐. 이 새끼야?"

 백산은 일휘를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퍽! 퍼버벅!

 백산의 손과 발이 정신없이 날아가고, 일휘는 백산의 주먹과 발을 피해보

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오구가 이미 투신이라고까지 인정한 백산의 공

격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강구두와 오구가 간신히 백산

을 뜯어말렸을 때 일휘는 이미 반쯤 걸레가 되어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수

십 번의 손과 발이 날아간 것이다.

 "이보게, 백 공자. 참게, 자네가 좀 참아. 형이라는 사람이 이러면 되나?"

 강구두가 백산을 한쪽으로 밀어붙이며 진정시키려 했다.

 "저 새끼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잖아. 제놈이나 나나 글 못쓰는 것은 똑같

은데 같은 처지에 있는 놈이 나를 무시해?"

 백산은 여전히 씩씩대면서 일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강구두와 오구는 어이가 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왜 그렇게 잘해 가지고."

 "내가 왜? 하기야 내가 좀 똑똑하기는 하지."

 홍루(紅樓)의 한쪽 구석에는 표정이 잔뜩 구겨진 일휘와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석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휘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숫제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그 옆에서

석두가 미소를 지으며 달걀을 하나씩 건네주고 있었다.

 "야 임마! 그렇다고 형님의 성질은 왜 건드리냐."

 "아 쓰발 내가 그렇게 될지 알았냐? 말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

지. 아무리 그렇다고 동생을 이렇게 걸레를 만들어 놓냐?"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너를 이렇게 만드냐?"

 석두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독종이야 독종. 요즘도 계속해서 지하 연무장에서 살아. 철구 움직이는

것과 원수가 졌나 거의 광인이라니까? 잠이나 자나 몰라."

 오구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는데도 백산의 연습은 끝날 줄을 몰

랐다. 특별히 상대해줄 사람이 없자 수십 개의 인물상을 양쪽으로 세워놓고

 그 사이를 달리며 원하는 부위를 철구로 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냐? 형님은 형님대로 그렇

게 살아야할 사연이 있겠지. 얼굴에 흉터 봐라."

 자신들도 사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없을 것인가. 더구나 얼굴을 가로지르

며 나 있는 흉터는 섬뜩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잘생긴 사람들은 그런 흉터가 생겨도 더욱더 강하게 보인다는 둥 하면서

좋아하는데 생긴 것이 없는 사람에게 얼굴에 난 흉터는 그야말로 재수덩이

다. 차라리 복면을 쓰고 다니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다. 백산의 흉터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되었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가 없다. 형님 동생 가릴 때는 움직임이 보였는데

 이제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     *     *

 다음날부터 뇌룡현에서는 조폭들의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싸움의 제일 선두에는 언제나 열두 개의 철구를 휘두르는 백산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해도 될 싸움마저 모두 백산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산에게 다쇠불알이라는 희한한 별호도 생겼다.

 싸움방식 때문이었다. 백산이 용지시장 패거리와 싸울 때 한꺼번에 열두

명이나 되는 초인파(超人派) 패거리들의 불알을 박살내버린 사건이 일어났

다. 모름지기 남자라는 동물은 팔이나 다리보다는 아랫도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팔이나 다리 없는 남자의 마누라는 남아있지만, 아랫도리 부실한 남자는

무조건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런 남자들의 불알을 한꺼번에 열두 명씩이나 박살을 내버렸으니, 용지시

장의 흑웅(黑雄) 부하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이 당연한 일

이었으리라. 그 이후로 초인파 패거리들이 백산을 부를 땐 다쇠불알이라 부

르게 되었고, 남들은 하나밖에 없는 불알이 열두 개나 된다고 했다.

 지난 두 달여에 용지시장과 투전로 쪽을 정리하여 구두파(久讀派)로 병합

시켰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삼 개월, 이제는 백산에게도 어느 정도 건달들의 습

성이 몸에 배기 시작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고 한쪽 다리를 건

들건들한다든지, 침을 '취익!' 하고 뱉는다든지, 쓸데없는 것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용지시장과 투전로를 구두파로 흡수한 강구두 일당은 청목수라(靑目修羅)

부시온이 있는 암시장을 향해서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싸움에 이력이 붙었는지 혼자서 상대를 찾아다니던 백산에게

청목수라의 부하들 십여 명이 반병신이 되어버렸고, 이에 격분한 암시장 패

거리들은 혈안이 되어 백산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오리무중, 어느 곳에서도 백산은 찾을 수가 없었다. 초인파(超人派

)의 등살에 견디다 못한 장사치들이 아버지와 같이 여러 번 이곳에 와서 물

건을 사가곤 했던 백산을 기억하고는 암묵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백산은 암시장의 한쪽에서 조그마한 만두가게를 하고 있는 장 노인

의 가게에 와서 만두를 먹고 있었다.

 "백산아, 괜찮겠냐. 네가 이렇게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고맙지만

잘못되면 네 아버지를 어떻게 보냐. 그러니 부디 조심해라."

 장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백산에게 만두 한 판을 더 내주면서 물었다.

 "참! 할아버지도 걱정하지 마시래도요? 저놈들은 저의 상대가 안되요. 제

가 이렇게 피해다니는 것은 혹시라도 장사하시는 분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러는 거라고요."

 암시장의 최대 상회인 만물전(萬物廛) 뒤, 만두가게를 나서면 언제나 이

길을 이용한다. 골목을 따라서 천천히 걷고 있는 그에게 이상한 느낌이 전

해지고 있었다.

 '이거 왜이래, 기분이 영 찜찜하네. 어째 뒤통수가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

 사냥과 싸움으로 단련된 백산의 감각에서 무엇인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고 신호를 보내왔다. 아마도 청목수라의 패거리가 자신을 찾아낸 것 같았다

.

 백산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며 서서히 전투 상태로 만들어 갔다.

 '한두 놈이 아니다. 이 자식들이 아예 떼거지로 몰려왔나 보구나. 공터까

지 나가면 불리하다.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한다.'

 지금 백산이 걷고 있는 곳은 두 개의 담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이다. 골목

을 지나가면 십여 장 정도의 공터가 있는데 그곳까지 가면 위험하다는 생각

에 이곳에서 승부를 결하려 하고 있었다.

 "나와라!"

 계속해서 걷던 백산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백산의 앞뒤에서 칼과 쇠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일단의 무리들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네놈이 다쇠불알이라는 그 애송이 놈이냐. 이번에 우리 애들을 많이 건드

렸더구나.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그 무리의 수는 대략 이십여 명 정도 되어보였다.

 "너희들 정도로 날 어찌 해보겠다고. 꿈도 크군.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자

 와라."

 좁은 골목에서는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공격을 해도 앞뒤로 네 명밖에 안

된다. 그 정도의 공격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장 패거리들

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암시장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마. 전부 공격해라!"

 백산의 앞뒤에 있던 패거리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맨 앞에 있던 도를 든

두 명이 백산의 다리 쪽을 쓸어오고 그들의 뒤쪽에 있던 또 다른 두 명이

자신의 앞에 있는 패거리를 뛰어넘으면서 백산의 상체 쪽을 공격해왔다. 뒤

쪽에 있던 패거리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야 이거 굉장한데. 마치 진법을 보는 것 같아. 연습 많이 했겠어?"

 다급한 와중에도 백산은 주절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양손을 앞뒤로 거칠게

휘둘렀다.

 카가캉!

 앞뒤에서 날아오던 네 개의 도가 백산의 철구에 맞아서 골목의 벽 쪽으로

날아가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바닥을 힘있게 차며 공중으로 떠오른 백산이 양쪽다리를 일자로 펴

면서 그대로 회전을 하자 발목에 달려있던 여섯 개의 철구가 바람소리를 내

며 허공을 갈랐다.

 빠악! 뻑! 퍽! 빡!

 몇 번의 타격음과 함께 공격하던 패거리 중 네 명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적이 틈을 보이면 그때는 인정사정없이 공격하라. 그래야 목숨이 보존된다

. 우리 같은 싸움꾼에게는 상대에 대한 어쭙잖은 동정심은 금물이다.'

 오사부가 해주었던 말이다.

 곧바로 옆에 있는 벽으로 돌진했고 그 벽을 타고 돌면서 회선각(回線脚)을

 이용해 오른발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상대의 상태를 확인함도 없이 다시

한번 그의 동체가 앞으로 물레방아가 돌듯이 회전하며 왼쪽 발을 아래로 내

려찍는다.

 여기저기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단 두 수만에 암시장파 여섯 명

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번 공격을 시작한 백산은 연속동작으로 공격해나

갔고, 패거리들은 우왕좌왕하다 이렇다할 대항 한번 못해보고 모두 그 자리

에 쓰러졌다.

 취익!

*     *     *

 나른한 오후.

 백산이 암시장을 워낙 거칠게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요즘 들어서는 암시장

 패거리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자 모두들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지하 연무장.

 연무장 안을 가득 채운 인형들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며 손과 발을

휘젓고 다니는 인물이 있었다.

 백산이었다. 인형들의 상태를 확인한 백산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 왼손은 턱 바로 아래쪽에, 오른손은 허리 쪽에 붙인 채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서 펴고 있는 입상의 인형들의 손과 머리 위에는 촛불이 하나씩 켜져

있었다. 철구를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촛불을 꺼뜨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

다.

 다시 한번 자세를 잡으며 전진하려는 순간 무도장 문이 열리며 석두가 들

어왔다.

 "형님, 잠깐 나와 보십시오."

 밖으로 나온 백산을 기다리는 것은 조그마한 어린애였다.

 "어? 소팔아.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소팔이는 백산이 자주 가는 암시장의 장 할아버지의 만두가게에서 심부름

하는 아이였다. 소팔이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백산을 향해 울먹거렸다.

 "형, 큰일 났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 자식들한테 잡혀갔어요."

 소팔이가 백산에게 서찰 한 장을 내밀었다.

 백산이 석두를 향해 눈짓을 하자 석두가 재빨리 종이를 건네받아 읽어 내

렸다.

 다쇠불알 보아라.

 만두가게 장 노인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

 이 노인네를 살리고 싶거든 지천으로 와라.

 혼자서 지금 당장.

 -청목수라(靑目修羅) 부시온.

 "이런 개새끼들, 죽으려고…."

 석두가 읽어주는 편지의 내용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백산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형님, 잠깐요. 갈 때 가더라도 이야기나 좀 하고 가요."

 석두가 백산이 나가는 것을 막고 나섰다.

 "비켜!"

 무심하게 변해버린 백산의 섬뜩한 말투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던 석두가

아무 소리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순간적인 느낌이

었지만 알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

로 살기였다.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서 나오는 살기가 아니라 육식을 하는

동물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전율적인 살기가 백산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형…님!"

 간신히 말을 꺼냈으나 백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 각 정도 지난 후 백산이 도착한 곳은 지천(池川), 그 곳에는 삼십여 명

에 달하는 무리들과 청목수라 부시온이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며 백산을 기

다리고 있었다.

 "장 할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백산은 도착하자마자 만두가게 장 노인을 찾았다.

 "저쪽에 있다. 뭘 좀 알아볼 것이 있어서 물었더니 대답을 않더군. 그래서

 잠깐 만져주었지."

 청목수라 부시온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혈

인 한 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쪽으로 뛰어간 백산이 장 노인 끌어안았다. 온몸이 부서져서 팔다리가

흔들리고 있는 노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으으윽, 백산이냐? 이 녀석 네가 왔구나. 무엇 하러 왔느냐, 저런 무식한

 놈들한테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 상태가 되어서도 백산을 걱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말씀하지 마세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끌어안고 쳐다보는 일밖에는 아무런 손도

쓸 수가 없었다.

 "백산아, 매사에 웃으면서 살아야 한다. 웃음이란 놈은 말이다 행복을 가

져오게 하는 씨앗이야 씨앗."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 장 노인이 백산을 향해서 생생한 목소리로 하는 말

이었다. 백산을 가만히 쳐다보던 장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더니 힘없이

 떨어졌다.

 이곳 뇌룡현에서 몇 안 되는 친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고 불쌍한 노인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만두가게 하나, 자

식도 없는 그가 평생을 걸쳐 이루어놓은 유일한 것이었다. 자식이 없어서인

지는 몰라도 유독 백산에게 잘해주셨던, 마치 친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그런 장 노인이 자신의 품에서 엉망으로 망가진 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장 노인을 안고 있던 백산의 온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살기는 주변을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혈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온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분노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혈풍뇌전심법(血風

雷電心法)이 운용되고 있었다.

 "죽인다! 이 불쌍한 노인을 이렇게 만든 놈들은 다 죽인다."

 이곳에 와서 백산은 단 한번도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공연마의 연장이라 생각했지 조직들 간의 싸움에

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공을 운용함이 없이 순수한 힘만으로

싸웠던 것이다. 어쩌면 내공을 운용한 상태에서 적과 싸우다 보면 실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백산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공을 운용함

에 따라 그의 철구들도 조금씩 붉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쳐다보던 초인파의 패거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백

산에게서 뿜어지는 투기와 살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위축되어 뒤로 한 걸음

씩 물러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청목수라 부시온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 실력이 있으면 죽여봐라. 여기 있는 이들은 초인파의 최정예로 삼십

 명이다. 지금까지 네놈이 용지시장에서 상대했던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친

구들이단 말이다. 다쇠불알이라고 했던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놈이 바

로 네놈이야 알았나?"

 청목수라의 말에 동요하던 초인파 패거리들이 표정을 풀며 백산을 향해 다

가서기 시작했다. 기껏 한 놈에게 위축되었던 자신들에게 더욱 화가 났음이

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인원수는 삼십 명이고 이미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실전의 명수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만두었어야 했다. 자신들 삼십 명을 한꺼번에 물러나게

 했던 백산의 살기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삼십 명이고 저놈은 혼자다. 밟아 버리자! 더 이상 두 다리

로 설 수 없도록!"

 누군가의 외침에 고무된 무리들이 살기(殺氣)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죽여라!"

 청목수라 부시온의 외침에 따라서 삼십 명의 인간들이 백산을 향해서 밀려

들었다.

 "크크크! 크 핫핫핫!"

 백산의 입에서 분노한 광소(狂笑)가 터져 나오고 눈동자가 투명한 유리처

럼 변해가며 뒤이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한 인물을 향해 그는 오른손을 원을 그

리듯이 휘둘렀다. 일순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달려들던 인물의

얼굴과 양다리가 그 자리에서 부서지고 사방으로 피가 튀기 시작했다.

 너무나 약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삼류건달들의 몸놀림은 백산에게 아무

런 위협도 될 수 없었다.

 한번에 한 놈씩, 열두 개의 철구로 오로지 한번에 하나씩이었다. 교대로

뻗어가는 그의 팔과 다리는 앞에 있는 인간이건 뒤에 있는 인간이건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있었다.

 철구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을 향해 퍼져나가는 핏물이 석양빛을 받으며 더

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투명해진 눈으로 오로지 전방만을 쳐다보며 백

산의 붉은 철구가 날아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죽음과 파괴가 있었다. 일방

적인 도살은 거의 반 시진 이상이나 계속되었고, 청목수라 부시온을 제외하

고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참혹했다.

 온 사방에 널려있는 살점들, 마치 맹수 떼가 습격하고 지나간 자리처럼 모

든 것이 찢겨져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직

 분노만이 지배하고 있는 그의 투명한 백색 눈동자는 수없는 죽음을 대하고

도 무표정하기만 했다.

 부시온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아랫도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서 알싸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도 자신의 모양새를 알지 못한 채 떨리

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악마 같은 놈, 네놈은 인간도 아니야!"

 부시온은 공포 속에서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힘이 풀려버린 그의

두 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청목수라. 조금 전 그 기세는 전부 어디 갔나. 자 어서 와라. 장 할

아버지의 사지를 부러트린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해봐라. 자 부시온."

 나지막하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짙게 배어있는 감정은 모든 것을 잘라

버릴 듯한 살기였다.

 "으아악!"

 두려움에 견디다 못한 부시온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백산을 향해

서 돌진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극한에 이른 살기

를 극복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래야지."

 부시온을 바라보는 백산의 입가에 살소가 맺혔다. 그의 철구가 움직일 때

마다 사지가 하나씩 부러져나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이성마저 마비되

어버린 부시온은 자신의 두 팔이 부러지는 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가! 부시온, 두 팔이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 이제는 네놈의 두 다리

야, 기대해도 좋아."

 시뻘건 백산의 철구 하나가 부시온의 왼쪽 발목을 갈랐다.

 빠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임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지하지

를 못하는 것인지 몸이 기우뚱거리면서도 비명소리가 없었다.

 "아아! 안되지, 아직 아니야."

 다시금 백산의 철구가 그의 오른쪽 발목을 부셔버렸다.

 "으윽! 죽여라, 이 악마 같은 놈."

 부시온은 혀를 깨물어 자살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백산을 향해서 죽여달라

고만 외치고 있었다.

 "네놈들이 불쌍한 노인네를 그렇게 만들 때는 어떤 표정이었나? 지금과 같

은 표정이었나? 아니면 즐겁게 웃고 있었나. 그때의 표정을 지어봐라, 부시

온. 그럼 빨리 죽여주겠다."

 백산의 철구가 부시온의 양 무릎을 부숴 놓았다.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이

꿇고 이제는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때 강구두와 그 일행이 지천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 혈광이 이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구

두파 모두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일부는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며 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온몸에 일부러 피를 바른 것처럼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머리며 어깨 등에는 인간의 살점으로 보이는 고깃덩어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백산의 모습이 있었다.

 "자 빨리 웃어라, 부시온. 장 노인을 고문할 때의 표정을 지어라. 어서 어

서 지으란 말이야 이 새끼야!"

 다시금 백산의 철구가 날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부시온의 온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단 한

군데 얼굴만 빼고 온몸의 뼈란 뼈는 모두 다 부러진 채로 부시온은 그렇게

죽었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백산이 뒤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돌아섰다. 온몸이 경

직되어 있는 채로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는 일행을 보고는 살소인지 미

소인지 구분하기 힘든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는 붉은 철구.

 "갈! 정신 차려라!"

 백산의 미소가 살소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구두가 고함을 내지르자 비로

소 정신이 들었는지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그만 하자, 백산아."

 그래도 두목이라고 가장 강단이 있는 강구두가 백산을 향해 다가가서 어깨

를 감싸 안았다.

 "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나 때문에…."

 강구두에 안겨 가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

다.

 "네 잘못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정해라."

 백산을 위로하느라 말은 하고 있지만 자신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육덩어리로 변해버린 암시장 패거리들의 시체들, 마치 거대한 괴수가 훑

고 지나간 자리처럼 처참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들을 처리할 때 보여

준 백산의 상태는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자신도 한때는 무림인이었기에 무림인의 몸에서 나온 살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백산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은 무림인들의 몸에서 나온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생명을 멸하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엄청난 살기였

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은 백색 투명한 눈, 쳐다보

는 것만 해도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가자!"

 그러나 두려움에 젖어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석두

와 일휘가 떨리는 몸을 이끌며 장 노인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안고는 백산의

 뒤를 따르고, 구두파 일행은 천천히 살육의 현장에서 멀어져 갔다.

 백산이 저지른 최초의 살인이었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만들어

낸 도살이었던 것이다.

*     *     *

 원단(元旦).

 세상 어디에서나 신년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곳 뇌

룡현(雷龍縣)에서 새해는 일반인들의 신년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다르다.

 세상의 중심인 중원(中原)으로부터 쫓겨와 더 이상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이 이곳에 정착한 수많은 사연들, 그 사연들이 소원을 비는 때가 원단이

다.

 올해는 제발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리하여 이곳 뇌룡현

에서 중원이 가장 가까운 곳을 '중원을 향하는 길'이라는 뜻의 '추중로(追

中路)'라 명명했다 한다.

 홍루 삼층 회의장, 그곳에는 커다란 제사상이 차려져 있고, 그 앞에서 많

은 무리들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먼저 향을 태우고, 그 다음은 술을 따르고 그리고 절을 두 번 하거라."

 관혼상제(冠婚喪祭)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강구두의 지시에 따

라서 경건하게 절을 하고 있었다.

 태생이야 비천하든 아니든 다 같은 인간일진데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도 모

른 채 지금껏 살아왔던 많은 인생들이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록 부모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구인가가

 너희들을 낳아주었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살아오는 동안 그 만큼 원망했으

면 이제는 용서들 하거라. 더 이상의 원망은 자신을 해칠 뿐이다."

 그 무리들 속에 백산과 석두 그리고 일휘도 있었다. 백산은 오늘 강구두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냥 건달패로만 보이던 강구두가 이런 자

리까지 마련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절을 하던 백산의 머릿속에 세상을 향해 꿈을 꾸시던 아

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꿈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꾸었던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지켜보십시오.'

 아버지의 꿈, 백산의 꿈, 그리고 사부의 꿈.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쉬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란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제사를 끝내면 으레 그러하듯 모두들 둘러앉아 제사음식과 술을 마시며 신

년을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자 한잔 받아라."

 "형님! 제 술도 한잔 받으십시오!"

 그 뒤를 이어서 일휘가 술 한잔을 백산에게 권했다.

 "형님! 형님! 형님!"

 이어지는 구두파 동생들의 술 한잔, 초인파 일당 삼십 명의 몰살 사건 이

후로 백산의 무서움에 슬슬 피해다니던 구두파의 조무래기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백산에게 술을 권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어쩔 수 없이 거절하지 못하고 전부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깨질 듯한 머리를 싸안고 들어선 식당에는 강구두를 필두로 구두파

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여있었다.

 "어이 잘 왔다, 백산아. 안 그래도 지금 깨우러 사람을 보낼 참이었다."

 "새해부터 무슨 역적모의를 하려고 이렇게 다 모였소? 좀 쉬엄쉬엄 하지."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형님."

 "무슨 일인데?"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럼 한판 하면 되지 무슨 문제냐고? 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새해부

터 이렇게 호들갑이야, 재수 없게스리."

 "그쪽에 있는 두목들이 과거 무림인(武林人)이었네."

 흑부 야무기였다.

 "초인파의 두목은 두 명일세. 실질적으로 초인파의 두목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비도(殺人飛刀) 마천택(馬千擇)과 그냥 명목상으로 마천택을 도와주고

 있는 섬전수(閃電手) 장한수(張漢洙)라고 하는 자이네. 살인비도 마천택은

 최대 열두 개의 비도를 날리는 자로, 지금까지 다섯 개 이상의 비도를 날

려본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네. 물론 무림인이 아닌 우리들의 기준이지만…

."

 섬전수 장한수는 청성파(靑城派)의 검술인 단섬쾌영(斷閃快影)을 극한까지

 익히고 있다는 소문은 있으나 지금껏 그가 검술을 펼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한다.

 과거 한때 그래봐야 두 달 전이지만 그래도 한솥밥을 먹었다고 야무기가

초인파 두목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모두들 심각하게 굳어있는 얼굴을 보고도 어제 먹어본 술이 맛있었던지 혼

자서 몇 대접을 꿀꺽꿀꺽하더니 급기야는 점심때도 되지 않아서 그대로 곯

아떨어지고 말았다.

 벌써 이틀째 아침이면 머릿속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백산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공(武功)을 익힌 놈들이라, 무공…무공…검술…비도술….'

 "으악! 미치겠네. 삼류건달들 간의 싸움에 왜 무림인(武林人)이 있냐고!"

 백산은 팩 고함을 지르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자신의 철구-백산은 뇌룡철구(雷龍鐵球)라고 우긴다-가 과연 무림인(武林

人)에게도 통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제는 철구를 마음대로 다스리고 자신의 손보다도 더 능숙하게 다루고 있

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떤 안타

까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수십 개의 인형들 손에 촛불을 켜놓고 하던 연습도 끝이 났다.

 이제는 철구를 마음대로 다룰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무림인

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무공이란 것을 익히고는

있지만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을 옥죄

여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으면서 생각하자. 무슨 수가 나겠지 뭐.'

 꿈을 찾던 아버지의 몸부림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능력 밖의 일은 빨리 포

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준비는 한다. 할 수 있는 것만.

 "구두 아저씨! 초인파의 마천택에게 도전장을 보내요. 날짜는 두 달 후로

하고요."

 이제 구두파에서는 백산이 가장 강자였다. 강구두만이 검술을 좀 하기는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백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상대는 무림인이

라 한다. 조금이라도 무공을 익히고 있는 백산이 나설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우리 애들 중에 비도술(飛刀術) 좀 하는 애들 열 명만 골라

놔요."

 "이 정도에서 협상을 하면 투전로를 공동으로 관리를 하는 것으로 끝날 수

도 있는데, 협상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석두가 백산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협상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너 같으면 네 밥그릇 뺏어간 놈이 한 이불 덮고 자자면 같이 잘 수 있겠

냐.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머리 좋다는 놈이 왜 이래 이거?"

 "그건 백산의 말이 맞다. 그들은 한때는 무림의 고수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무림인 하나 없는 우리들이 무엇이 무서워서 이익을 나누겠느냐. 어

차피 머리만 없애면 나머지는 모두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텐데."

 그래도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오구가 백산의 말에 동의를 했다.

 "이곳은 어차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곳이다. 즉 전무(全無)가 아니면 전부

(全部)이다. 죽든지 살든지 싸워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들의 살길이다."

 다시 이어지는 오구의 말에 모두들 동의하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표정들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은 시작했고 끝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무림인이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무기의 말을 듣고 보니 더 큰 위압감으로 작용하는 것이

었다.

*     *     *

 "음! 너희들인가, 비도술(飛刀術)을 한다는 친구들이?"

 "네, 형님!"

 지금 백산의 앞에는 구두파 내에서 비도술에 일가견이 있는 떡대들 열 명

이 와있었다.

 "좋아, 좋아. 앞으로 너희들이 나의 수련을 좀 도와주어야 하겠다."

 형님이란 소리에 기분이 헤벌쭉 좋아졌나 보다. 갑자기 목소리가 쾌활해졌

다.

 백산은 그들을 다섯 명씩 이 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때로는

따로따로 순서와 개수에 상관없이 그 자신을 향해서 던지도록 시켰다.

 쉬-익! 쉭!

 자신의 방을 향해 가고 있던 백산을 향해서 동시에 이십 개의 비도가, 움

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면서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며 두 팔과 두 다리가 거의 동

시에 휘둘러졌다.

 따다당!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이십 개의 비도가 튕겨 나가고, 그 순간

백산은 뒤통수 쪽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다가섬을 느꼈다.

 순식간에 앞으로 무너지듯 쓰러지면서, 그 탄력을 왼발에 집중하며 뒤쪽으

로 힘차게 꺾었다. 열 개의 비도(飛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상태로 백산의

몸은 거꾸로 재주를 넘듯이 다리를 위로하여 솟아올랐다.

 다시금 그의 머리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비도(飛刀) 이십여 개, 바닥으로

내려오는 백산은 그대로 다리를 쭉 뻗으며 상체를 바닥으로 붙였다. 순간적

으로 그에게 날아왔던 비도의 수는 총 백여 개, 그 모든 것을 백산은 모조

리 피해버린 것이다.

 지난 삼 개월 동안의 실전이 격투술의 기본을 완벽하게 숙지시켜 주었고

또한 감각은 오감(五感)을 뛰어넘어 육감(六感)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몸놀림은 일류고수를 능가하는 솜씨

를 보이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열 명의 떡대들은 백산을 향해서 수시로 비도를 던져대기 시

작했다. 비도의 수도 다양하게 변해갔고 때로는 한꺼번에 마흔 개 전부를

던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단 하나의 비도만 던지기도 해서 백산의 주위를

분산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육감에 눈을 뜨기 시작한 백산을 잡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매일 반복해서 해온 일이지만 밤이면 사문의 내공심법(內功心法)

인 혈풍뇌전심법(血風雷電心法)을 익히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욱더 박차를 가해서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연마하고 있었다.

 오늘도 백산은 정좌(定座)하고서 한 달간의 수련에 대해서 정리를 하기 시

작했다.

 지금까지는 피하고 막는 것에 주력하여 어떠한 형태의 공격도 다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공격할 틈을 찾기 못했다.

 '공격하지 못하는 무공은 있으나 마나한 반쪽짜리 일뿐이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공격을 해야한다. 공격할 틈을 만들어야 한다. 그 틈을 만드는 것

이 마지막 한 달의 과제다. 결국은 비도(飛刀)를 던지고 난 후의 촌각(寸刻

)을 이용해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자리에 누워서도 백산은 쉴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는 자신이 잠들 때까지

명상훈련을 쌓는다. 백산의 머릿속에서는 비도가 날아오는 위치를 정하고

그 비도를 피하고 공격하는, 자신만의 비무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나도 조금씩 공격을 해보겠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해온 그대

로 내가 너희들에게 다가가든지 멀어지든지 계속해서 비도를 던져라"

 비도를 던질 인원은 두 명을 더 추가해서 열두 명. 일인당 가지고 있는 비

도의 수는 스물 네 개씩, 일인이 한번에 던질 수 있는 비도의 수도 최대 여

덟 개, 한번에 백산에게 날아올 수 있는 비도의 수는 총 구십여섯 개의 비

도이다.

 이번에는 비도의 날을 전부 제거했다. 백산의 부상을 고려해서 석두의 고

집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첫 번째 비도가 날아온다. 사방에서 사십팔 개의 비도가 날아오고 있었다.

 처음이라 일인당 네 개씩만 던진 것 같았다. 백산의 양손이 번개처럼 수십

 번을 움직이자 모든 비도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목표는 가운데 있는 이사(李四)다.'

 그들이 서 있는 제일 가운데는 그들 중 비도술이 가장 뛰어난 이사란 녀석

이 서 있었다.

 첫 번째 비도를 쳐냄과 동시에 백산이 일보를 전진했고, 그들이 다시 비도

를 찾는 순간에 일보를 전진했다.

 이어서 쏟아지는 비도들, 완전히 비도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백산의 온

몸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그의 손과 발이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각도에

서 휘둘러지고 있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수십 번이나 들리며 백산의 몸은 앞으로 나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백산은 자신의 심장부위에 음습한 기운을 느끼고는 재

빠르게 몸을 틀었다. 이사 녀석이 웃고 있었다.

 그가 던진 비도가 백산의 왼쪽 어깨를 강타한 것이었다. 육안으로는 확인

할 수 없었던 하나의 비도가 전진하던 백산의 심장부위로 날아든 것이다.

그동안 훈련된 감각으로 그 비도를 감지하고 어깨 쪽으로 돌렸다. 연습이었

기 망정이지 실전이었다면 어깨에 칼을 맞는 사태가 발생 할 뻔했다.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훈련을 했지만 이사가 던지는 마지막 하나의 비도는

 피할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백산이 이사를 붙잡고 언제 비도를 던졌냐고

물었지만,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다보면 자

신도 모르게 비도가 날아간다고 한다.

 결국은 이사의 마지막 하나의 비도를 피하지 못한 채 결투(決鬪)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이 개월 전에 백산이 청목수라와 그의 부하들을 갈가리 찢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 구두파와 초인파의 패거리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양측의 거리는 오

장여로 삼백오십여 명의 인간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네가 다쇠불알 백산이란 놈이냐? 나이 어린 녀석이라더니 덩치는 어른이

구나. 내 밑으로 들어와라, 최고의 대우를 해주마."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인지 초인파(超人派)의 두목 살인비도 마천택의 어투

에는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취익!

 "댁이 초인파의 대장이라는 살인비도 마천택이요? 거 다 아실 만한 양반이

 좋은 밥 처먹고 쉰 소리를 하는 거요? 이곳에서 이기면 뇌룡현이 전부 내

것인데 댁 같으면 싸워보지도 않고 '예. 알겠습니다요, 형님'라고 하겠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리고 나잇살이나 처먹었으면 물러날 때도 알아

야 될 것 아뇨. 언제까지 그 자리에 그러고 있을 참이요. 남은 생이라도 편

하게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떠나야 할 거요. 괜스레 어린놈한테

 당하고 저승가면 옛 친구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시오. 살인비도 나

리."

 마천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자신이 이곳에서 건달들의 두목을 하

고 있지만 한때는 비도 하나로 무림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고 다녔다. 새

카만 어린놈한테 우롱당할 위치는 아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목숨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지

금 죽기는 나이가 너무 아깝지 않느냐."

 "걱정 마쇼. 나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니까. 자 자! 헛소리 그만하고

 시작합니다. 나이가 아까운 것이 아니고 시간이 아깝소."

 백산의 말에 굳어진 얼굴을 한 마천택이 양 소맷부리 속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백산도 마천택이 도는 방향을

 따라 돌면서 온몸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며 마천택의 눈을 노려보았다.

 마천택은 이 개월 전 백산이 일으킨 참혹(慘酷)한 상황과 청목수라의 시체

를 보았기에 감히 방심할 수 없었고, 백산은 백산대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과의 첫 결투라는 것이 부담감으로 작용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

다.

 팽팽한 대치 속에 극도로 긴장한 두 사람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

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땀을 식혀주려는 듯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마른

갈대 잎이 마천택과 백산의 사이로 날아들어 두 사람의 시야를 차단시켰다.

 순간 마천택의 손이 힘차게 뿌려졌다.

 쉬-이-익!

 순간 백산의 미간(眉間)과 명치 그리고 단전(丹田)을 향해 세 줄기 차가운

 기운이 쏘아져왔다. 백산은 그동안의 훈련으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비

도(飛刀)를 피하면 그것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맞받아치며 공격을

해야한다.

 생각보다는 몸이 더 빨랐다. 백산의 왼쪽 다리가 전방을 향해 힘있게 휘둘

러지며, 세 개의 비수를 쳐냄과 동시에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살

인비도의 두 번째 손짓이 시작되었다.

 날아오는 비도를 향해 세 걸음을 전진하면서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전

부 여덟 개의 비도를 쳐냈다. 왼쪽 팔에 비도가 스치고 지나갔는지 핏방울

이 날리고 있었다.

 마천택에게 가까워질수록 백산의 몸에선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그의 철구

도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물러나면서 비수를 던지던

 마천택이 갑자기 앞으로 전진하면서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

로 양손을 세 번 휘둘렀다.

 마천택과 백산과의 거리는 불과 이장, 이 거리에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비도(飛刀)를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바로 그때 백산의 손놀림과 발놀림이 시작되었다. 느린 듯 하면서도 정확

하게 비도의 진로를 막아내는 그의 철구. 춤을 추는 듯, 곡예를 부리 듯,

약간은 어설프게 보이는 백산의 특이한 움직임이 살기를 감추고 백산을 향

해서 다가서던 비도를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특이한 싸움이었다. 일장이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비도를 날리고 또 그것을

 막아내고 있는 두 사람. 마치 검과 도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천택의 놀라움은 컸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이 거리에서 자신의 비도

를 막아낸다는 것은 무림의 고수라고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비도의

기운만을 가지고 위치를 파악해서 쳐내야 한다. 그런데 이 어린놈은 해내고

 있었다. 비도를 가진 자와 싸울 때 피하기만 하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조금씩 전진해왔던 것이다.

 또다시 그의 눈에 놈의 허점이 들어왔다. 열두 개의 철구가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는 사이의 조그마한 틈, 그곳이 바로 심장과 일직선으로 자신

의 눈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서로 근접전을 펼치고

있을 때부터 줄곧 보이던 허점이었다.

 그러나 마천택도 그곳을 향해 마음대로 비도를 날릴 수가 없었다. 그곳에

비도를 뿌리다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허점도 그대로 드러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놈의 심장이 어서 비수를 날려달라며 자신을 유혹하고 있

었다.

 '좋다. 날리고 물러난다. 기회를 잡아야 한다, 기회를….'

 왼손으로 쉴 새 없이 비수를 날리면서도 마천택의 눈은 백산의 심장어림에

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노리던 순간이 왔다. 놈의 몸이 약간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지금껏 품속에만 들어있던 마천택의 오른손이 눈

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뿌려졌다.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린 나이치고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

었지만 무림인을 상대하는 데는 역부족이라 여겼다.

 "훗!"

 자신의 심장을 향해서 날아오는 섬뜩한 기운.

 백산의 얼굴에 약간 차가운 미소가 어리는 듯했다. 드디어 노리던 기회가

온 것이다. 계속해서 이곳의 허점을 보이며 공격을 유도했는데도 놈은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보법을 약간 흩뜨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놈이 걸려들었다.

 백산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며 살인비도를 향해 왼손 일수(一手)를 힘껏 뿌

렸다.

 퍼-억! 퍼-억! 퍼-억!

 세 번의 타격음이 들리고 두개골이 깨진 마천택이 바닥으로 서서히 넘어지

고 백산의 왼쪽 어깨에는 마천택의 마지막 비도(飛刀)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

 "조금 전에 왜 공격하지 않았죠? 나를 죽이기에는 좋은 기회였는데."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섬전수 장한수를 보고 물었다.

 그가 공격을 해왔더라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은 어차피 건달들의

싸움이었고 어떻게든 이기기만 하면 끝이 난다. 장한수의 입장에서 보면 백

산이 마천택과 마지막 공격을 주고받을 때가 최고의 기회였다. 그런데 그리

 하지 않았다.

 "글쎄, 이제는 등뒤에서 남을 공격하는 것에 질렸다고 할까? 나도 이제는

사람같이 살아 보고 싶었네."

 백산과 마천택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

고 반문을 해보았다. 과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인가. 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어서는 무공을 익혀 강호협객(江湖俠客)으로 이름

을 날리는 꿈을 꾸었고,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서 자신의 전부였던 문파(門

派)에서 파문(破門)을 당하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베었다. 자

신을 비롯해서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베었다. 마지막으로 흘러든 곳이 바로

 여기였고, 마천택이 그를 필요로 했기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곳에 발을

담갔다.

 "사실 마천택은 무공으로 보면 나보다 조금 아래에 있었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한 수, 자네의 왼쪽 어깨에 박혀있는 그 비도는 나로서도 막을 자신

이 없다네. 자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투지가 솟아나더군.

그래서 자네와 정당하게 겨루고 싶어졌네. 그것이 암습하지 않은 이유이기

도 하고…."

 그랬다. 마천택의 비도를 피하며 목숨을 담보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백

산의 현란한 움직임을 보고, 처음에는 약간은 어색한 듯 보였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의 보법에 경탄을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에서 소름이

돋고 투기가 솟아남을 느꼈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고 또 버리려고 노력했던 무인(武人)의

혼(魂)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점점 더 거세지는 투기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도

모르게 백산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생겨났다.

 "조건은 똑같네. 이긴 쪽이 모든 것을 다 갖는 거지. 나도 이들에게 신세

를 지고 있었으니 밥값 해준다 생각할 것이네. 자 시작하세."

 장한수도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자식을 가졌더라

면 저 정도는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공도 형편없고, 그런 면에 있어서는 미

안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무인으로서 백산은 이미 자신에 필적할 만했다.

 자신에게 투지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인에게 있

어서 나이는 상관이 없다. 오직 실력만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 뿐이다.

 장한수가 그의 검을 뽑아들고 조용히 자신의 가슴 쪽에다 일직선으로 세웠

다. 무저갱처럼 깊어진 그의 눈빛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

치 그의 몸 자체가 검이 되어버린 듯했고, 주위의 모든 것이 그에게 빨려가

는 것 같았다.

 백산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수십 회의 싸움을

했고, 초인파 패거리 삼십 명을 전부 격살(擊殺)하기까지 했지만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것은 결코 목숨이 아까워서 생기는 그런 긴장감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한, 그런 강함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이고 공경(恭敬)이었다.

 '내가 느끼는 부족함이 바로 이것이었나?'

 백산은 자신의 머리가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싸움을 할수록, 시

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알 수가 없었던 것

의 실체를 잡은 것 같았다.

 꽉 틀어쥔 주먹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백산은 공격을 감행할 수밖

에 없었다. 이 상태로 계속해서 가만히 있으면 공격도 못 해보고 패할 것

같았다. 장한수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래, 해보는 거다. 이 다쇠불알 백산이 가만히 서서 패할 수는 없잖아?'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별호인 다쇠불알을 되뇌며 공격을 시작했다.

 거칠게 뛰어나가면서 철구를 휘둘렀다. 동시에 아홉에서 열두 개로, 열두

개에서 열여덟 개로, 그의 모든 철구들이 장한수 주위에서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백산의 공격은 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무희(舞姬)의 한바탕 아름

다운 춤사위였다.

 지난 오 개월 동안 배운 모든 것이 그의 철구에서 녹아나오고 있었다. 하

나가 뻗어가면 두 개가 돌아오고, 다섯이 돌아오면 세 개가 나가는 단순한

주먹질이 이제는 어느 정도 투로와 격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한수는 역시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선 그런 고수

였다. 열두 개의 철구가 칠십이 개로 늘어나서 공격을 가해도, 뒤쪽에서 돌

아오는 철구가 공격을 해대도, 어떤 위치, 어느 장소에서도 그에게 들어오

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백산은 즐거웠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느끼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생각에 지금 자신의 처지도 잊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던 그 무엇인가가 채워지고 있는 성싶었다. 완전히 무

아(無我)의 경지(境地)에 빠져버린 백산에게는 목숨이란 거추장스러운 존재

인지도 모른다.

 공격을 하는 백산과 수비를 하는 섬전수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목

숨을 건 비무가 아니라 누가 더 아름답게 춤을 출 수 있는지 경합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딱 멈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빙그레 웃었다. 한 사람은 무인으로서 잊었던 혼을 찾았다는 만족감에, 또

 한사람은 그동안 부족했던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희열에 그렇게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너무 우리 둘만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 같군."

 "그렇군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 시작해야죠?"

 삼 장 거리를 마주하고 선 두 사람은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아마 마지막 공격이 되리라. 백산은 호흡을 가다듬

고 있었고, 섬전수는 표정이 없었다. 힘찬 고함 소리와 함께 둘은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왜 심장을 노리지 않았나?"

 "그런 대협께서는 왜 심장을 노리지 않았습니까?"

 섬전수의 어깨에는 비도(飛刀)가, 백산의 왼쪽어깨에는 섬전수의 검이 박

혀있었다.

 "자네에게서 살기가 느껴지기 않았기 때문이지"

 "헤헤! 제가 졌네요."

 "아니야! 자네가 이겼어. 자네의 그 비도가 조금 빨랐지.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그 순간에 자네 어깨에 박혀있는 그 비도를 이용할 생각을 했지?"

 장한수는 너무 놀랐다. 물론 자신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대

로 무공도 익히지 않은 녀석이 대적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어깨에 박혀있는 비도를 이용했다. 어깨에

있는 비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떤 무림고수라도 결코 생각

할 수 없는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아! 그 비도요! 저는 사냥꾼이거든요. 사냥꾼은 자신의 주변의 모든 사물

을 다 이용할 수 있어야 해요. 심지어는 요 앞에서 일렁이는 바람까지도요.

"

 "그럼 아까 그 비도(飛刀)를 맞은 것은 나를 겨냥하고 일부러 한 것이겠군

."

 "엥? 들키고 말았네요. 비도에 관해서는 훈련을 많이 했거든요. 마지막 하

나의 비도를 잡을 수 없었는데 마천택과 싸울 때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 그들이 비도를 던질 수 있는 기회를 내 자신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

고요. 그래서 몇 번을 시도해보았더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제 스스로

가 그들에게 공격의 허점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

을 역이용한 거죠. 즉 허점을 보이고 그곳으로 공격을 유도한 거죠.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백산을 바라보는 장한수의 얼굴은 금방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의 얼굴이

아니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형님의 얼굴이었다.

 "제가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백산의 느닷없는 말에 장한수가 깜짝 놀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안 되는 건가요?"

 무안한 표정으로 백산이 장한수를 쳐다보았다. 왠지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

 "안되긴 자네 같은 동생이 하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암 그렇

지."

 "그럼 지금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절 받으십시오."

 "그래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도 이제는 가족이 생긴 것이다. 나이 사십이 다 돼서야 가족이 생겼다.

고아로 자란 그에게 가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구인가가 그를 낳아주었겠

지만 그가 철들 때부터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무공을 배울 때도 혼자였고,

 파문을 당할 때도 혼자였다. 누군가를 걱정할 수 있는 가족이 생긴다는 것

이 이렇게 기쁠 줄은 정말 몰랐다.

 "야 인석아, 왜 네가 혼자야?"

 '어떤 십쉐이, 허헉! 으악! 저 영감쟁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갑자기 오한이 확 밀려온다. 그동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사부가 불쑥

나타났다. 그것도 정확하게 뇌룡현을 구두파에서 접수하는 날.

 "사부님이 이곳까지 웬일이세요? 돈이 생기셨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자신을 구두파에 팔아먹은 것을 빗대놓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이 싫다 이거냐. 오랜만에 사부님을 보았으면 문안 인

사부터 할 일이지 무어가 어쩌고 어째. 이 녀석이 그동안 좀 풀어놓았더니

간덩이가 붓다 못해서 불어터졌구나. 간이 부은 병을 고치는 데는 타혈법(

打血法)이 최고다, 이놈아."

 팽무도의 지팡이가 백산을 향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뇌산(雷山)

에서 얻어맞던 백산은 아니었다.

 휘익! 휘익! 싸악! 싸악!

 "에잉! 피해?"

 "헤헤, 이 백산을 옛날의 백산으로 착각하시면 오산이라고요. 이제 사부님

의 파리 잡는 수법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요-홉! 야…합!"

 백산은 연신 주절거리며 사부의 지팡이를 피했고, 팽무도의 혈압을 높이고

 있었다.

 "호호! 네놈이 좀 늘었다 이거지? 그래도 이놈아, 내 눈에는 굼벵이가 기

어가는 것처럼 보여."

 팽무도의 지팡이 놀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은 백산은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고는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 후에도 팽무도의 매질은 한식경이나 계속되었고,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서야 백산에 대한 타혈법(打血法)을 멈추었다.

 "보았느냐?"

 장한수를 향한 팽무도의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팽무도의 손짓을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장한수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번에는 강구두를 보고 하는 소리다.

 "어르신 저는 보아봐야 필요없…."

 "보았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예, 보았습니다. 확실히…."

 황급히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강구두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어검의 경지를 말하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오히려 가슴만 답답해지는 것인데.

 "과거는 과거일 뿐인 거야. 과거에 연연하다보면 현재도, 미래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두 잃게 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장한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단순한 서책에 나와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경험에 의해서 만

들어진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백산과 비무하기 전에 한 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의 검법이 청성파(靑城派)의 검술인 단섬쾌영(斷閃快影)인 것

도 알아본 것 같았다.

 "석두라고 했느냐? 네 녀석은 잠시 나 좀 보자."

 석두가 엉거주춤 백산의 사부인 팽무도를 따라서 갔다.

 장한수는 경악했다. 백산의 사부가 백산을 때리는 수법은, 강호(江湖)의

일류고수도 하기 어렵다는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이었다. 그것도 삼백

육십 개나 되는 혈도(穴道)를 정확하게 타격하는 솜씨는 신의 경지에 이르

러 있었고, 단순한 타격만이 아닌 섬전수 자신에게 검법을 시전해 보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갈망했던 경지를….

*     *     *

 "야, 석두! 너 요즈음 무슨 기분 좋은 일 있냐? 왜 혼자서 벙긋벙긋 웃고

다니냐?"

 요즈음 줄곧 싱글거리는 석두를 쳐다보던 백산이 아연해하며 다가왔다.

 "그럴 일이 조금 있어요."

 그는 형님의 사부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를 회상해보았다.

 "네가 석두라고 했지? 백산을 많이 도와주고 있더구나."

 석두는 떨리는 마음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위엄이

 이 노인네에게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백산이 너에게 내공심법을 들려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익혀봐

야 너나 일휘라는 녀석에게는 별로 도움이 못된다."

 석두는 기겁을 했다. 백산이 자신들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준 철없는 행동

에 이 노인네가 화가 났나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내공을 파괴시키려고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심법 자체가 너무 어렵고 난해하여 별로 익힌 것

도 없지만 그래도 요즈음은 단전(丹田)쪽이 조금씩 따스해지고 온몸이 시원

해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어르신, 형님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제가 우겨서,

어쩔 수 없이 형님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만 벌하시고 백산

형님은 나무라지 마십시오."

 석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조금 전에 백산

을 때려서 기절시킨 것을 본 석두는 겁에 질려 무릎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아, 내가 너를 부른 건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을 주기 위해

서다."

 팽무도가 내놓는 것은 세 권의 책이었다.

 석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이름이 없는 두 권의

 책과 혈우창궁검법(血雨蒼穹劍法)이란 붉은 색의 글이 쓰인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석두가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그 세 권의 책자는 한(恨)으로 엮어진 책이니라. 한 권은 두 가지를 익히

기 위한 내공심법이며, 한 권은 도법이고, 또 한권은 혈우창궁검법이란 검

법을 적어놓은 것이다. 백산이 너희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을 때는 그만큼 너

희들을 믿는다는 뜻일 터, 다시 백산을 만날 때까지는 이것들을 완벽하게

익혀야할 것이다. 내 제자 녀석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서책은 완벽하게 암기한 후에 태우거라. 알겠느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세 권의 책을 안고는 엎드려있는 석두를 뒤로하고

팽무도는 백산에게 산으로 올 때에 장 노인에게 들려서 오라고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임마."

 백산은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자신은 쇠불알을

 열두 개나 차고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데 자신의 동생들은 가르쳐준 내공심

법으로 너무나 편안하게 무공을 연마하는 듯했다.

 그래서 언젠가 이제는 형님이 된 장한수에게 신검합일(身檢合一)에 관해서

 물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의 대답이 자신의 무기를 몸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을 때를 통칭해서 신검합일의 경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때 백산은 자신의 경지가 바로 그러한 경지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보내고자 하는 곳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철구가 가있

는 경험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돌려주

기로 했던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들이 신검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이 형님이 알려주고 떠나기 위해서 불렀다."

 요컨대 백산이 알려준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손잡이 부분에 손을 집어넣

을 수 있는 형태의 속이 빈 검이나 도를 만든다.

 그런 다음 그 통로 속으로 단단한 줄을 집어넣어서 검이나 도 끝에 연결될

 수 있도록 하고, 검이나 도 끝에는 물건을 집을 수 있도록 하는 간단한 장

치를 만든다. 그런 연후에 그것을 손에다 장착하고 무공수련이 끝날 때가지

 생활한다.

 "어떠냐, 내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자랑스럽다는 듯 백산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지고 반면에 석

두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형님, 그럼 식사나 화장실 등 기본적인 볼일을 볼 때에는 그것을 풀어놓

아도 되겠지요."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너의 팔하고 똑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이 철구처럼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 지금 당장 만들러

 가자."

 그렇게 해서 훗날 석두와 일휘를 비롯한 백산 일당이 될 오십여 명은 한쪽

에 검이나 도의 형태를 띤 물건을 차고 생활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석두와 일휘는 그것들을 떼어버리고 싶어도 백산이 떠나며 마지막으로 하

고 간 한마디 말 때문에 감히 떼어낼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다시 내가 이곳에 왔을 때 검에서 강기 같은 것이 나오지 않는 놈은 팔을

 전부 잘라버린다."

 답답한 마음에 석두가 섬전수(閃電手) 장한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장한

수도 그러한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며 백산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말을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     *     *

 "장 할아버지! 저 왔어요."

 백산이 석두에게 전한 사부의 말을 듣고 장 노인의 대장간으로 갔다. 아버

지 때부터 화살촉을 만들어준 곳이기도 하고, 백산이 마령호(魔靈虎)를 사

냥하려할 때 거대한 쇠뇌를 만들어준 곳이기도 했다.

 "오! 백산이냐. 그동안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컸구나."

 장 노인이 백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뇌룡현(雷龍縣)에서 네 녀석의 활약상은 들었다. 정말 대단했다며? 자 이

리 오너라. 오늘은 네 녀석의 그 불알들을 전부 떼어내야 하겠다. 이제 네

놈은 고자가 되겠구나. 허허허, 가만있자 이것들이 어디로 갔나?"

 장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쪽 구석에서 꺼내놓은 것은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열두 자루의 비도(飛刀)였다.

 "그럼 이놈들을 저의 발목과 손목에 채운다는 거예요? 이렇게 날이 시퍼렇

게 서있는 놈들을? 할아버지! 누구 죽일 일있어요?"

 백산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에끼, 인석아 네놈이 죽긴 왜 죽냐? 이제는 철구에도 적응이 다되어 재미

도 없을 것 아니냐. 그리고 철구가 이놈들로 바뀐 것뿐인데 뭐가 걱정이야.

 내가 이놈들을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알면 그런 말은 못한

다. 빨리 이리와! 나 바빠!"

 "그럼 그렇지. 그 노인네가 남 잘되는 꼴을 못 봐요. 이제는 철구에 좀 익

숙해졌는가 싶더니, 저걸 어떻게 달고 다니냐? 휴…! 에라 모르겠다. 무슨

수가 생기겠지. 건강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지 뭐."

 성질 고약한 사부와 생활하느라 백산이 배운 심오한 인생철학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그 상황을 즐겨라 그래야 인생이 즐거

워진다-였다.

 어쩔 수 없이 백산은 엉거주춤 장 노인을 향해서 걸어갔고, 백산이 양팔과

 양다리에는 철구 대신 시퍼런 비도가 달려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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