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결미(結尾)
하늘은 무심하면서도 엄정하여, 땅 위의 인생이 풍파를 짊어지고 생멸을 거듭하여도 그들의 삶에 결코 눈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하늘은 인생에 후박(厚薄)함이 없으니 계절의 운행과 주야의 교대가 엄정하였고 그 덕에 사람들은 일 년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늘은 겨울에 노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여름 장마에 큰 물이 지면 병마를 보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쪽에서 사람이 죽으면 북쪽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서쪽에서 병란이 있으면 동쪽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누군가는 원한이 있었고 누군가는 감사함이 있었다. 세상 천하는 변하는 것이 없었고 변한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혹 누군가가 뛰어난 오성과 믿지 못할 집념으로 범인이 하지 못한 일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소문과 칭송은 십 년을 넘어가지 않았으니, 사람의 인생은 채 십 년을 추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바뀌어갔다. 이는 북경의 황실부터 남쪽의 촌로까지 모두 피할 수 없는 섭리였다.
“오전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소. 모두 물러가시오.”
어린아이의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함께 나이 지긋한 대신들은 고개를 숙인 채 어전에서 물러났다.
나이 차가 적게는 다섯에서 많게는 아홉 배 열 배는 차이 나는 신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용상의 사내아이는 모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풀쩍 자리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하였다.
용상의 꼬마가 움직이는 것을 보던 한 노인이 비둔한 몸을 이끌고 비틀대며 그를 향해 달려나갔다.
“폐하! 폐하! 기다려 주옵소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병부상서. 따로 할 말이 무엇이오?”
“중요한 전언이옵니다!”
“그건 조례(朝禮)때 했어야지. 중요한 전언을 가지고 왜 독대를 하려 하시오?”
선제가 급서하고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거대한 제국의 보좌를 맡게 된 황제, 애신각라 현엽 (愛新覺羅 玄燁)은 작고 깡마른 아이였다. 하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는 눈빛과 배짱을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비록 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지만 태후가 자리를 비우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조례를 주관할 정도로 대담하였고, 늙은 중신들의 말을 따지고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정도의 지력도 있었다.
몇몇 대신들을 꼬마 황제를 기특하다 여겼지만 대부분은 그런 황제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뛰어오는 늙은 병부상서. 과이가 오배(瓜爾佳 鰲拜)역시 황제의 성격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권신 중 하나였다.
“중요한 일인 듯 보입니다만 이 첩보의 제공자가 제 조카라서 그렇습니다.”
과이가 오배는 자신이 품에 가지고 있던 봉서(封書)를 황제에게 전달하였다. 황제는 전각 난간에 기대어 병부상서가 가져온 봉서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어린 황제는 봉서를 순식간에 읽더니만 종이를 둘둘 말아 자신의 소매 안에 밀어넣고 병부상서를 바라보았다.
“누가 줬다 하였는가?”
“소신의 막내 질자(姪子) 과이가 태문이 보내왔습니다. 지금 항주 팔기에 파견을 나가 있는데…이 글을 전한 자는 제 조카와 막역지우라 들었사옵니다.”
“이 종리세리라는 자는 한인 같은데?”
“서림각라부의 팔기였다 들었습니다. 조카의 말에 따르면 이미 죽었다 하옵니다.”
어린 황제는 슬쩍 과이가 오배를 보더니 물었다.
“군령을 따라 죽었소. 핏줄을 따라 죽었소?”
“팔기의 용사답게 죽었다 들었습니다.”
어린 황제는 병부상서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소매 안의 봉서를 두들겨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부상서가 슬쩍 미소를 머금고는 황제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황당한 내용의 첩보여서 말씀드리기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숨기는 것보단 아뢰는 게 맞다 여겼습니다.”
“병부상서의 판단을 존중하오.”
황제의 말에 병부상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하였다.
“나이가 어리지는 않지만 조카 태문의 도량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딱 만성의 총관 정도면 적당한 크기지요. 하도 간청을 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폐하께 보인 것입니다만.”
과이가 오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일이옵니다.”
“어찌하여 그렇소?”
“오삼계는 효웅이나 이미 늙었고, 평서왕이 다스리는 운남은 천리 밖의 외지이옵니다. 그들이 거병할 리도 만무하고,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우리 팔기의 손바닥 안이지요.”
“나도 평서왕 오삼계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때 명의 불패맹장이었다가 안팎으로 우겨쌈을 당해 우리 청에 귀부한 사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전공을 세우고 자신의 봉토를 얻어낸 걸물이고 말이오.”
“페하의 공부는 완벽에 가까우십시다. 선대의 역사를 모두 꿰고 있으시니 가히 성군의 자질이 있다 할 수 있지요. 이 늙은 몸은 그저 기쁠 따름이옵니다.”
과이가 오배는 어린 황제의 옆에서 거구를 움직이며 투실한 얼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마치 그 모습은 인자한 늙은 숙부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작고 어린 황제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가 두 번 다른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려울 것이며, 만약 두 마음을 품었다 한다면 범인(凡人)이 눈치챌 정도로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까?”
순간 과이가 오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작은 황제의 조그만 눈동자가 예리한 바늘처럼 아래에서 위를 향하며 늙은 병부상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여덟 살밖에 안 된 황제의 눈 속에 황문(皇門) 애신각라의 장대한 위엄과, 잔혹무정한 서기(瑞氣)가 실려 있었다.
한때 맨주먹으로 소를 때려눕힌 무용을 자랑하는 불굴의 장수, 과이가 오배는 이유모를 한기가 온 몸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하였다.
“효웅이라 칭할 정도라면 그에 걸맞은 감시를 하시오. 병부상서. 나는 그대 조카의 충심을 믿고 싶군.”
“예, 폐하.”
“그리고 그런 조카의 친우(親友)라면 당연히 믿을만 하겠지. 원래 초록은 동색이 아닌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평서왕부에 보내는 조정의 사신들을 모두 젊은 사람으로 교체하오, 만의 하나 일이 벌어질 경우 사천으로 바로 뛰어올 수 있도록 문무겸전의 인물로 보내시오. 또한 사천 만성에 발빠른 파발을 준비하고, 황성까지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수륙양로를 정비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공사가 벌어지면 너무 많이 남겨먹지는 마시고.”
과이가 오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차마 대답을 못하고 다시 황제를 돌아보았다. 어린 황제는 과이가 오배의 시선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돌려 전각의 다른 곳을 향하였다.
분명 황제는 장서각으로 행보를 옮길 것이었다. 아직 어린 황제는 천하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장서각에 들렀다 나올수록 하루하루 신료들이 대하기 벅찬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늙은 병부상서 과이가 오배는 그런 황제의 뒷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어린아이인가, 반룡(蟠龍)인가.”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
청의 고관대작은 북경성의 서쪽에 모여 살았다.
북경의 주요 물자는 서문인 광안문을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이 관례였고 그 덕에 물자의 유통이 많으니 부상대고도 많이 들어오고 재물의 융통이 빠르고 원활하였다.
돈이 있는 곳에 권세가 모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으니, 귀한 사람들부터 작은 상인들이 모두 모여 서문의 앞은 늘 인산인해였다.
그 중에 가장 상업이 발달한 곳은 서단패루를 중심으로 큰 길이 뻗은 서단대가가 중심이었으니, 이곳은 큰 상가가 양쪽 대로에 들어서고 작은 골목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말도 많고 말이 많으면 물건과 고함이 오가는 것이 시장의 생리였다. 오늘도 서단대가의 작은 골목 안에서는 여인의 새된 고함이 오가는 중이었다.
“오늘도 쌈질이냐! 허구한날 쌈질이야!”
“아냐, 엄마! 내가 싸우고 싶어 싸운 게 아니야! 철물점 장씨 아저씨를 그 놈들이 두들겨 패고 있길래 내가 보다 못해서 그 자리에….”
“그래서 그 자리에 가서 대신 맞았냐? 아이고! 잘 한다! 네가 맞으러 태어난 놈이야?”
시장 상인들은 늘 벌어지는 똑같은 곡조에 똑같은 고함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서단대가의 작은 골목 안쪽에 위치한 송가병점(宋家餠店)은 이 골목 허기진 사람들이 들러 주전부리나 끼니로 한 끼를 때우는 떡집이었는데 지금 이 고함소리는 그 집의 여주인이 내는 소리였다.
여인은 자신의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허우대 멀쩡한 아들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엄마의 우렁찬 소리에도 아들은 기죽지 않고 엄마를 보며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고 있었다.
“그럼 그 아저씨가 맞는 걸 보란 말이예요? 그 놈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쳐요, 있지도 않은 보호세 타령은 지겹다고! 왜 우리가 그런 놈들에게 돈을 내야해?”
“거 말 잘한다. 아호(阿虎)! 아주 듬직하기 그지없어!”
뒤에서 이를 구경하던 신기료장수가 아들의 일에 맞장구를 치자 여주인은 신기료장수를 노려보더니만 빽 소리를 질렀다.
“상대가는 지금 무슨 말이예요! 그런 말 할 거면 같이 싸워주던가! 허구한날 이 골목에서 매 맞고 다니는 애는 우리집 애뿐이예요! 아이고 세상에, 지 아비가 죽은 걸로 모자라 이제는 네 초상까지 어미가 치뤄야 하겠니? 응?”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목소리에 힘이 사라지자 아이의 고개가 수그러드는데, 여기저기 멍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 소득없는 싸움은 그만두고 어미 일이나 도우렴. 어제까지 집에 누워있지 않았니.”
“맞은 데가 쑤셔서 아픈 거잖아. 그리고 평소에는 엄마 일을 내가 돕는데…….”
“잔말 말고 이 떡이나 저 두 번째 골목 안의 끝 집에 주고 오너라. 갈색 쪽문이 달린 집이다.”
“응? 이게 뭐야?”
“보름 전부터 우리 집에서 떡을 대고 드시는 노인이시다. 홀로 계시는 분이니 가서 적적하지 않게 말동무 좀 해 드리고….”
“노인 말동무라고? 세상에 요즘도 그런 일을 하는 애가 있나?”
아이는 투덜대면서도 어미가 싸 준 떡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고 떡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기료장수 상씨가 송가병점의 여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호만한 아이가 서단패루에 없소. 효성이 모자라오 사람이 막 되어먹었소? 부지런하기까지 하니 나중에 부인의 큰 복이 될 거요.”
“착하면 뭐해요. 쓸데없는 일에 고개 들이밀다 칼이나 안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의협심 아니오?”
신기료장수의 말에 여인은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인은 골목 안으로 사라진 아이의 자취를 보면서도 차마 시선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힘도 없는 놈이 마음만 대나무같으니…….”
여인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
소년은 작은 쪽문을 열고 몸을 어깨부터 밀어 넣었다.
어른이 드나들기에는 작은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자그마한 마당이 딸린 조그만 안채가 있는 집이 모습을 보이는데, 조촐한 안채 하나만이 이 집의 전부인 것 같았다.
하잘것없는 살림이 소년의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은 작은 마당의 의자 위에서 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년은 어미가 싸 준 떡을 들고 조심스레 노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주름투성이에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뒷머리에 따넘긴 변발도 새하얗게 변해 있었는데 이상하게 뒤틀린 오른발과 의자에 기대놓은 지팡이가 유독 눈에 띄는 깡마른 모습이었다.
소년은 노인의 오른발을 물끄러미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고는 조용히 떡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고있는 노인의 귓가에 입을 갖다대고 조용히 말하였다.
“노사, 송가병점입니다. 주문하신 떡을 가져왔습니다.”
노인은 선잠이 아니라 깊이 잠이 들었는지 소년이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나라에서 아예 출타하실 생각이 없구먼.”
소년이 슬쩍 노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뒤로 물러서 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뚝배기 깨지는 듯한 걸걸한 소리가 소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참을 헤맸네. 떡집 개야, 네 놈을 오늘 잡으러 왔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인상을 쓰며 이를 드러내었다. 소년의 뒤에는 되는대로 웃옷을 걸쳐 입은 껄렁한 사내들이 한손에 몽둥이를 든 채 쪽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여긴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네 놈이 떡집에서 나오는 걸 보고 따라왔다. 사흘 전의 빚은 갚아야지? 네놈 덕에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 네놈을 반 병신 만들어 네 에미에게 보여준 뒤, 철물점 장가를 죽여놓을 요량이다.”
소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 때와는 다른 살기가 넘쳐 흐르는 말투였다. 소년은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자신을 찾아온 하오배 세 명을 보고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싸우면 여기 계신 노사가 다칠 것이니 자리를 옮기자!”
“웃기는구나. 떡집 개야. 그냥 군소리하지 말고 두들겨 맞으면 되는 것이다. 무슨 자리를 옮기고 어쩌고 하는 거야?”
“내가 왜 너희에게 또 맞느냐! 나는 맞으러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래? 그럼 이래도 안 맞을테냐?”
하오배 놈들은 소년 대신 슬쩍 떡 받은 노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뢰배들은 노인의 멱살을 잡더니 슬쩍 의자에서 밀어 노인이 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잠에서 깬 노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오는데, 하오배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몽둥이를 들어 노인의 머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만둬! 뭐하는 짓이냐!”
순간 노인의 몸 위로 소년이 덮쳐올라 노인의 몸을 감쌌다. 투닥대며 소년의 등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더니 떨어지는 몽둥이에 온 몸이 들썩거렸다. 소년을 두들겨 패는 하오배들의 웃음소리가 외진 골목 안에서 피어올랐다.
“그래! 네놈은 이렇게 등짝을 두들겨 맞으러 태어난 거다!”
“그제는 야장을 감싸고 맞더니 오늘은 노인을 감싸고 맞는구나! 네놈은 살아있는 이불이라도 되는 게냐?”
“하! 먼지나 잘 털어줄 테니 조금만 더 그러고 있거라!”
소년은 이를 악문 채 노인이 행여 다칠까봐 온 몸으로 노인을 감싸고 떨어지는 몽둥이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소년의 눈에서는 분함과 고통을 못 이겨 곡절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소년의 품 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노인이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되었다. 비키거라. 꼬마야.”
“어르신…위험합니다…조금만…이러고 계시면 다 끝나오니….”
“비키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울던 소년이 눈을 번쩍 떴다.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눈빛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눈빛같이 광채가 번득였다.
엉겁결에 소년이 놀라 몸을 굴리며 옆으로 벗어나는데, 깡마른 노인의 손이 훌쩍 위로 올라가더니만 자기 위로 떨어지는 방망이 하나를 손으로 덥석 잡아버렸다. 하오배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뭐야, 늙은이? 맞고 싶어 좀이 쑤시냐?”
그 순간, 노인이 한 손으로 바닥을 치는가 싶더니만 훌쩍 튀어올라 왼발을 땅에 디디더니 학처럼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외다리로 중심을 잡았다.
하오배가 멀뚱하니 노인의 앞에 서 있는데, 몽둥이를 잡은 노인의 손이 한 바퀴 급하게 원을 그리자 하오배의 팔뚝이 반대로 꺾이며 몽둥이와 노인의 손 사이에서 기이한 각도로 돌다가 뿌드득 소리를 내었다.
무뢰배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는 순간, 옆에 있던 두 명의 사내가 노인에게로 눈을 돌리는데, 노인은 어느새 뺏은 몽둥이로 오른쪽 사내의 턱을 후려치고 몽둥이를 겨드랑이 사이에 넣더니만 그대로 탁자에 팔을 처박았다.
두 번째 사내의 팔에서도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미친 늙은이가!”
마지막 남아있던 하오배가 정신을 차리고 몽둥이를 집어드는 순간, 노인의 몸이 슬쩍 옆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몽둥이를 올렸다가 후려쳤다.
순간 하오배의 손목이 딱 소리를 내며 아래로 꺾이고 두 번째 타격에 팔뚝이 기묘한 각도로 휘어졌다.
마지막 사내 역시 자신의 부러진 오른손을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며 울부짖는데, 노인은 자신의 손에 들린 몽둥이를 땅바닥에 버리고는 팔 부러진 세 하오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밥은 왼손으로 먹어라. 한 번 더 내 눈에 띄면 발로 밥을 먹게 될 것이다.”
하오배 셋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 쪽문으로 나가겠다고 난리를 치며 도망가는데, 이 모습을 멍하니 뒤에서 보고 있던 소년은 아직도 한 다리로 꼿꼿이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야(老爺), 지금…무슨 조화를…….”
“낡아빠진 공부다. 신경쓰지 말고 가거라. 떡은 잘 먹을테니.”
“네, 네…제 엄마가 만든 떡이예요! 방금 전에 찐 것이라 맛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만든 떡은 시장 제일입니다!”
“네 놈이 송가병점의 자식이구나.”
소년은 노인이 자신의 가게를 안다는 것을 알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벌어지더니 그 자리에 넙죽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노인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을 바라보는데, 소년은 무릎을 꿇더니 노인을 올려다보며 절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송가병점의 송천호라고 합니다! 노야!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뚱딴지같은 놈이로구나. 무슨 무공이냐. 그저 배울 것 없는 절름발이의 기예니라.”
송천호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무공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무공입니다! 노야!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게 무공을 알려 주십시오! 우리 서단패루의 상인들은 늘 하오배들에게 자릿세를 뜯기고 살고 있는데…….”
노인은 송천호라는 소년의 말을 듣더니만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세사에 관심을 끊고 사는 지 오래니라. 내 하찮은 재주는 곧 썩을 내 육신과 함께 사라질 것이야.”
“노야!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주야장천 그 놈들에게 맞고 사는 게 업입니다!”
“네가 처신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매일 시장의 어른들을 두들겨 패고, 아이와 여인들을 울리는 놈들인데 어찌 사내가 되어 그런 횡포를 보고 외면한단 말입니까! 비록 의분은 있을 지언정 배운 것이 없고 몸이 따르지 않아 계속 맞고만 살고 있는데….”
어느새 자신의 말에 취한 송천호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어찌 장부가 싸우다 죽을지언정 그들의 눈을 피하는 처신을 한단 말입니까! 재주가 없음이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노인은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 때, 송천호가 노인의 성한 발을 붙잡고 다시 애걸하였다.
“노야! 제발 제게 공부를 가르쳐 주십시오! 평생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싸 온 떡을 배사(拜謝)의 예물로 올릴 것이니! 제발 제게 무공의 오묘함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돈 내고 산 떡을 예물로 바친다고?”
노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송천호는 당황하며 말문이 막혀 허둥대었다.
“아니…그게요. 그러니까 엄마한테 말하면 공짜로….”
“지금부터 어머니라 말하여라.”
“아, 네. 어머니에게 말하면…그러니까…허락을….”
“허락을 받지 못할 것이면 오지 마라. 난 스승 노릇 할 생각도 없거니와…네놈에게 그런 일을 하고 싶지도 않구나.”
“아닙니다! 허락을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를 제자로 삼아주셔서 무공을 전수해주십시오! 평생동안 노야를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이의 새까만 눈에는 어떤 사특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허튼 말을 내뱉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의 태도는 부박하지만 태생으로 나오는 공손함을 최대한 보이는 중이었다. 노인은 물끄러미 소년의 태도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며 땅을 바라보았다. 이때다 싶었던 송천호의 목소리는 더욱 간절하게 변해있었다.
“노야! 아니, 사부님! 제발 제게 한 가닥 절기만 가르쳐 주신다면…….”
“누가 네 놈 사부야!”
“지금부터라도 사부님이 되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아, 노인의 입에서 뜻 모를 한숨이 자포자기한 듯 흘러나오더니 결국 노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오냐, 네가 정녕 그렇다면 내일 오시(午時 11:00-13:00)까지 우리 집으로 오너라. 그때 내가 너를 시험하고 사제지례를 열도록 하겠노라.”
송천호의 입이 함박웃음을 짓더니만 이내 다시 한 번 꾸벅 절을 올리더니 감격에 찬 목소리로 노인에게 고하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찌 제가 소홀하게 인연을 여기겠습니까! 내일 이 자리로 다시 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송천호를 바라보던 노인은 말없이 하늘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이 신이 나 쪽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보던 노인은 땅바닥을 뒹구는 몽둥이를 바라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짧지도 않은 세월에 잔명만 길더니……참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인생이로구나.”
***
다음날 새벽, 묘시(卯時 05:00-07:00)어름에 작은 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쪽문을 열고 몸을 낸 노인의 등에는 간략한 행장이 매어져 있었고, 노인의 오른손에는 기묘한 모양의 가지가 달려있는 긴 지팡이가 잡혀 있었다.
구부러졌던 노인의 다리는 어느새 곧게 펴져 있었고, 노인은 지팡이를 땅에 짚으며 좁은 골목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성큼성큼 다리를 옮겼다. 장부의 헌걸찬 발걸음이 바닥을 내디딜 때, 노인의 오른다리에서는 기묘한 쇳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순간, 노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앞에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앞에는 한 사내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떡을 한 보따리를 들고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송가병점의 소년, 송천호였다. 송천호는 쪽문을 열고 나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렇게 나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어찌 내 행보를 알고 있느냐?”
“예전에 유후 장량 자방의 고사를 보니 스승 황석공에게 기연을 얻을 때, 약속시간보다 한참 전에 나가 스승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분명 노야께서도 그런 기인(奇人) 이사(異士)가 분명하시니, 제가 서둘러야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허!”
노인은 자신의 수가 읽혔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이는 겉보기와 달리 생각이 보통이 아니었고, 일신의 학문도 어느 정도 들어있었다. 노인은 말없이 송천호를 바라보는데 송천호는 자신이 싸 온 보따리를 내보이며 노인 앞에서 공손히 말하였다.
“어머니께서 사부님께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어제 사부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네 놈 말투가 바뀌었구나.”
“삶이 바뀔 것인데 당연히 생활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참…….”
노인의 찌푸렸던 이마가 천천히 펴지며 아이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노인은 지팡이에 힘을 주고 허리를 펴더니 송천호를 보며 짧은 물음을 던졌다.
“……무공을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데?”
“무공을 배우면! 우리 장시(場市)에 돌아다니는 불한당들을 혼내주겠습니다! 힘없는 약자를 울리고 갈취하는 놈들을 없애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네! 하오배들이 다시는 이 성시에 얼씬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테냐? 주변을 평안케 한 뒤에는 무공으로 뭘 할 것인데?”
“무공으로 뭘 합니까? 그냥 무공 수련을 하는 거지요?”
“치부(致富)나 권세 쥔 자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송천호는 물끄러미 노인을 보더니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돈은 떡을 팔아 벌 것입니다. 어찌 사람을 때려 높은 사람에게 아부를 한단 말입니까? 이상한 말씀이십니다.”
“이상한 말이렷다.”
“네, 정말로 이상합니다. 저는 그저 무공만을 원하옵니다.”
“허…….”
송천호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눈은 아이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슬슬 여명이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늘은 참으로 얄궂구나. 모든 것을 없앴으니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네?”
노인은 대답대신 송천호를 바라보았다. 수염까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은 마치 옛 고사에서나 나올 법한 영기(靈氣)와 표표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는데, 송천호가 지금 앞을 가로막지 않으면 언제라도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아 보였다.
“어둠이 지나고 밝음(明)이 다가오니 오히려 하늘은 푸르기만 하구나. 나는 청천(靑天)을 좋아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거늘…….”
송천호가 감히 노인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하고 공손히 자세를 취하는데, 노인은 한참동안 하늘을 보더니 잠시 눈을 깜박거리고는 턱에 힘을 주었다. 노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더니만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야.”
“네.”
“떡을 내 놓아라.”
“네?”
“내가 그 떡으로 너를 샀으니 너는 이제부터 내 제자로다.”
“네?”
소년은 입이 저절로 귀 옆으로 벌어지는데,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이름은 당태세, 순천문의 귀린갈 당태세다. 내 땅에 맺어 놓았던 모든 굴레와 포한을 벗어 던지고 아무런 미련 없이 종생만을 꿈꾸고 있었는데, 오늘 하늘이 다가와 내 늙은 손에 씨앗 하나를 다시 던져주는구나.”
“사부님!”
소년의 앞에 선 노인은 근엄한 목소리로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말하였다.
“앞으로의 과정은 실로 험난하여 땀과 눈물의 연속일 것이다. 네가 그를 알고 감내할 수 있겠느냐?”
“감내하겠습니다!”
소년의 말에 당태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학문과 같으니 실로 지난하여 쉽사리 뜻을 얻지 못한다. 세월이 주는 고단함과 한없이 반복되는 지루함을 네가 능히 견딜 수 있겠느냐?”
“견뎌 보이겠습니다!”
노인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무공은 너와 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으며(非人不傳) 재주가 뛰어나도 덕을 앞서지 못할 것이니(不才承德) 네 재목이 그르다 생각되면 무공을 폐하고 공부를 멈출 것이다. 이를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당태세의 마지막 말에 송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어머니와 제게 생을 주신 아버지께 맹세컨데, 재주가 모자랄 지언정 사람이 할 일만을 하고 살겠습니다!”
소년의 마지막 말에 당태세는 눈을 깜박이며 소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노인은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닫고 눈을 깜박이며 잠시 하늘과 땅을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등을 돌렸다. 다시 목괴로 땅을 짚으며 작은 쪽문이 있는 자신의 집을 향해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들어오너라.”
노인과 소년은 작은 쪽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문이 굳게 닫히고 골목 안은 다시 조용하게 변하였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막힌 골목 위로 조금씩 햇살이 떠오르며 세상의 모든 것을 깨우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을 둘러싼 공기가 천천히 푸근하고 따스하게 바뀌는 중이었다.
봄이었다.
바야흐로 봄이 다시 오고 있었다.
- 완(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