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복건(福建) 하문 수성(守城) (3)
남명의 수군도독, 정성공의 복선(福船)은 이틀 뒤 들어온다는 약속을 지켰다.
무너져가는 작은 성곽에 남은 병력은 애초에 오백도 안 되었지만 그들을 구하겠다고 약조한 천생 뱃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약속을 지켜 거대한 배 한 척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한눈에 봐도 집채만 한 배는 하문성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모두 탈 정도로 장대하고 튼튼해보였다. 객가인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 지옥도에서 빼줄 지장보살을 만난 듯 앞다퉈 선창가 부두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켜라, 어서 비켜!”
부두를 향해 대만의 거대한 복선(福船)이 접안하려는 순간, 일단의 병사들이 난폭하게 다른 병사와 백성들을 밀치며 부두를 향해 달려갔다. 다름 아닌 철비준 유함명과 그의 직속부하 삽십여 명이었다.
이들은 치열하던 수성전에 한 발짝도 앞에 나가지 않고 성루에서 온전히 전력을 보전하고 있었으니 그 기세가 흉흉하고 날래었다. 이들이 사람들을 밀치면서 부둣가로 몸을 날리자 누구 하나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직 한 사내만이 그들 앞에 우뚝 서서 백성들과 다친 병사들이 먼저 부둣가로 가는 길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나와라!”
거친 목소리로 앞을 가로막는 사내를 향해 소리친 유함명의 병사가 칼을 내밀어 보이는 순간, 앞을 가로막은 사내의 칼이 번득이더니 유함명의 병사는 소리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순간 병사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나와 바닥으로 굴렀고 그를 보던 객가인들은 비명을 지으며 부리나케 부둣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유함명이 자신의 부하를 참한 사내를 보며 이를 빠드득 갈며 창을 짚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뭐 하는 짓이냐. 이들이 내 직속임을 모르느냐? 당문주의 졸개야.”
“졸개라니. 철비준 유함명, 나도 너와 같은 순천문의 제자다.”
사내는 다름아닌 종리세리였다. 종리세리는 안모도를 뽑아들고 유함명과 그 부하들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종리세리의 몸은 이미 포격전에서 파편을 숱하게 얻어맞은 듯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종리세리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자신의 앞에 선 병사들을 향해 또렷하고 매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물러서라. 유함명. 부상병과 백성들이 먼저다. 그것이 장수 된 자의 도리다.”
“뭐가 어째?”
“갑주를 두른 자들아! 어찌하여 백성보다 먼저 안위를 챙기느냐! 네놈들의 할 일은 백성들이 모두 배에 오를 때까지 신명으로 그들을 보위하는 것이다! 어서 전장으로 돌아가라!”
유함명이 피식 실소를 머금더니 이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종리세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팔기의 찌꺼기 같은 놈아! 어쭙잖은 소리 말고 비켜라! 배를 타야 하는 것은 나다!”
“팔기의 찌꺼기? 네놈이야말로 순천문의 찌꺼기지!”
종리세리는 왼쪽 팔로 오른팔을 움켜쥔 채 안모도를 뻗어 유함명을 가리켰다. 한쪽 눈과 왼쪽에서 피가 흐르고 안모도 역시 이가 나간 상황이었지만 사내의 외눈은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어내며 병사들과 유함명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내 이름은 종리세리, 북경 서림각라부의 선무사 천호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요동 금주성 유격장군 종리부의 아들로, 밀려오는 만주족에 맞서 싸운 사람이니!”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파르르 떨리며 유함명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백성을 등 앞에 둔 적이 없고, 적 앞에 등을 보인 적 없노라!”
“그렇다면 죽을 것이네. 종리세리. 그 몸으로 나와 서른 명의 병사를 대적하겠느냐?”
종리세리는 유함명의 말에 일말의 지체함도 없이 즉각 대답하였다.
“사부의 은혜를 입고 사부의 명을 받았으니 나는 그를 지킬 뿐이다.”
“그럼 죽어라.”
유함명의 손짓과 함께 서른 명에 가까운 갑주 입은 남명의 병사가 종리세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종리세리는 안 보이는 왼쪽 눈과 다친 왼쪽 어깨를 뒤로 빼고 오른발과 어깨를 앞으로 내며 팔을 앞으로 내밀어 안모도를 세운 채 그대로 앞으로 전진하며 들어오는 칼을 튕기고 독사가 먹이를 낚아채듯 목에 칼을 찔러넣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내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다른 두 명의 병사가 칼을 휘두르며 종리세리를 밀어붙였다.
순간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각각 들어오는 칼의 주둥이를 한 번씩 올려치고 아래에서 위로 찍어올리듯 칼을 내뻗었다.
두 명의 사내 모두 턱밑으로 칼날이 들어갔다 나오며 그 자리에 절명한 채 쓰러졌다.
종리세리는 가볍게 두 다리를 낮추고 왼팔을 뒷짐진 채 한 손으로 칼을 다시 뻗고 부둣가를 단단히 틀어막은 채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오라. 대만보다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마.”
유함명의 표정이 매섭게 변하며 들고 있던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모두 같이 쳐라. 어차피 반 병신 아니냐.”
철비준 유함명은 말과 함께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오며 번개처럼 창끝을 내뻗었다.
그림자를 떼어놓고 날아오는 듯한 창의 자격이 종리세리의 안모도에 부딪혀 옆으로 미끄러져나가는 순간, 한 명의 병사가 그 틈을 뚫고 들어와 종리세리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하지만 종리세의 칼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병사의 칼을 막고 병사의 울대를 뚫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내밀며 또 다른 병사의 손목을 날리고 다시 들어오는 유함명의 창을 되받으며 오른쪽에 서 있는 병사의 목을 보이지도 않게 찔렀다.
종리세리는 오직 자격(刺擊)하나 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유함명과 함께 가세한 사내 다섯이 목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여전히 성내에는 홍이포의 포탄이 떨어지며 모든 것을 부수고 있는데, 저 앞 부두 끝에서는 복선에서 내린 사다리와 발판을 타고 객가인과 부상병들이 배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유함명의 눈에 조바심이 차올랐다. 유함명은 몸을 돌려 창을 빼내더니 병사들이 공격하는 종리세리의 옆으로 움직이더니 창날을 뻗어 종리세리의 왼어깨를 찔렀다.
종리세리의 칼이 어김없이 유함명의 창을 막아내는 순간, 유함명의 창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며 어깨가 아닌 종리세리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종리세리가 이를 악무는데 그 사이로 한 병사의 칼이 종리세리의 목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병사의 칼은 채 종리세리의 목에 닿기도 전에 손목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병사의 비명이 터져나오는 순간, 종리세리는 가슴팍에 불같은 통증이 느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종리세리의 왼쪽 사각으로 파고 든 유함명의 장창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파고들며 종리세리의 오른 가슴을 찌르고 빠져나갔다.
“쾌창이로군.”
종리세리는 이를 악물더니 다시 칼을 뻗어 들어오는 병사의 칼을 막고 그의 목을 벤 뒤 또 다른 병사의 칼을 내리치고 다시 팔을 뻗어 병사의 목을 찔렀다. 그 순간 유함명의 창이 다시 앞으로 뻗어왔다.
이번에는 좌우를 번갈아 점하며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찌르기를 반복하는데 순식간에 종리세리의 왼팔과 무릎에서 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종리세리가 이를 악물고 칼을 내뻗는 순간 유함명의 창이 나오는 안모도를 빗겨치고 그대로 들어가 종리세리의 가슴에 다시 깊은 찌르기를 먹였다.
처음으로 종리세리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팔기 복장의 사내는 이미 검은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천천히 칼을 떨어뜨리고는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유함명이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옆에 죽어넘어간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부상당한 사내가 쓰러뜨린 갑주 입은 병사가 무려 열넷이었다.
“검호로구나. 종리세리.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유함명의 말은 고아하기 그지없었지만 사내는 비웃는 표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종리세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유함명을 바라보더니 피식 미소를 지어보였다. 종리세리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몸만 성하면 네놈들 모두를 해치웠을 것이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을 말해서 무엇하느냐. 너는 패자다.”
“어차피 너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양패구상이구나.”
“뭐?”
“그분이 오셨다.”
종리세리의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제야 알아챈 유함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장창을 쥔 무장의 뒤에는 어느새 소도와 단괴를 쥐고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얼굴이 보이는데, 유함명의 뒤에서 장수를 호위해야 할 심복 열다섯은 이미 땅바닥에 사지가 따로 널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함명은 채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 멀뚱히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자신의 뒤에 따라온 객가인 촌장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촌장.”
“네, 문주님.”
“배를 타고 닻줄을 올리라 하시오. 더 태울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문주님…같이 안 가십니까?”
“나는 이놈과 이곳에서 결판을 내려 하오. 어서 가시오.”
“하지만…….”
“같이 죽고 싶은가. 자식을 땅에 묻었으면 그대는 남은 백성을 바다에서 보호해야지!”
촌장의 입술이 굳게 한일자로 다물렸다. 객가의 수장은 눈물 대신 두 손을 꽉 쥐어보이는 것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대신하였다.
촌장이 복선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있던 유함명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그런 유함명을 보더니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귀신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노인의 눈에는 일절 웃음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노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형상이었다.
“왜 그러느냐. 예전같이 네 계책이 통하지 않으니 조바심이 나 미치겠느냐?”
“사부,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같이 죽자고요?”
“나는 궁금하다. 네 놈이 나를 찌르고 떠난 뒤에 네 놈이 홀로 움직였느냐? 아니면 무너진 북경과 죽은 황제 폐하와 망가진 네 사문의 이름을 팔고 다녔느냐?”
“사부.”
“내가 가르쳐준 무공 위에 핏빛 무용담과 눈물을 섞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느냐? 그것으로 네가 네 몸집을 불렸느냐? 정작 네가 한 일은 야심한 밤 홀로 몸을 빼거나, 모두가 궁지에 몰렸을 때 동지의 피로 네 갈 길을 뚫어낸 것이 아니더냐?”
“사…사부. 다, 닥치십시오!”
유함명의 입에서 상소리가 흘러나오자 오히려 당태세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나왔다. 노인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요족하면 사람을 따르고 속내를 감추는 법이다. 아니, 자기 마음이 개심(改心)하여 선한 이를 따른다 생각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조금만 환란이 닥치고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 본심은 다시 드러나는 법이다. 내가 그걸 몰랐다!”
“사부,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진짜 죽여버릴거요!”
“인심(人心)은 철석(鐵石)과 같아 옛것을 바꾸기 힘들고 그 안에 다른 것을 새겨 넣기 힘들지. 사람은 바뀌지 않아서…….”
당태세의 입에서 한숨과 신음이 같이 새어나왔다. 노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후회하고 있었다.
“비인부전 부재승덕 (非人不傳 不才承德)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태세의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뜨고 죽어가는 종리세리와 아룡이 쓰러진 곳을 번갈아 향하더니 눈물 한 방울이 뚝 하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뀌는 놈이 있었네 그려.”
순간, 유함명의 눈동자가 번득이며 흰 창을 뻗어 늙은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렸다. 하지만 당태세의 단괴가 이미 목 앞에서 보이지도 않게 들어오는 쾌창을 막아 위로 올려보냈다.
당태세의 젖은 눈동자는 유함명의 근골을 뚫고 골수를 쪼개버릴 것 같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내가 준 무공을 오늘 받아가마.”
“닥쳐라, 미친 늙은이!”
유함명의 몸이 움직이며 창이 허공에서 땅과 하늘사이를 가르며 바람을 쪼개고 당태세에게 쏟아졌다.
창은 마치 바람을 타는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궤도를 바꾸며 당태세의 몸을 향해 쏟아지는데, 당태세는 들어오는 창날을 소도와 단괴로 막으며 보법을 바꿔 유함명을 향해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유함명 역시 돌아가는 당태세와 거리를 만들며 숨 돌릴 틈도 없이 창날을 뻗으며 휘어치고 베고 때리며 당태세를 창날의 사정거리 안에 묶어두었다.
철비준의 창날은 보이지 않는 섬전처럼 빛줄기를 만들어 당태세의 몸을 사정없이 쪼아대었다. 당태세가 차마 보고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른 초식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당태세는 단괴와 소도를 들어 들어오는 기세에 맞춰 창날을 막아내고 쏟아지는 살기를 피해 어깨와 얼굴을 돌려 들어오는 창날을 피하였다.
순간 예리한 창날이 당태세의 뺨을 스치며 한 줄기 혈흔을 만들었다. 유함명의 창술은 이미 순천문의 범주를 벗어나 다른 경지에 도달한 것임에 분명하였다.
이미 포성은 멈춘지 오래였고, 복선은 부두를 떠나 다시 먼 바다를 향해 조금씩 멀어지는 중인데 흙먼지가 가득한 성의 안마당에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정남왕의 녹영군이 분명하였다.
“개 같은 늙은이 덕에 여기서 명이 끊기는구나! 빌어먹을!”
유함명이 고함을 지르며 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당태세의 목과 어깨와 가슴을 찢어발길 기세로 덤벼들었다. 당태세의 단괴와 소도가 번갈아 눈 앞에서 움직이며 창날과 창준을 받아넘기며 사방에서 불꽃과 소리를 퍼트렸다.
두 사람은 원을 그리며 소도와 창이 만드는 직선과 단괴가 만드는 곡선이 어우러지며 서로를 잇는 선이 되는데 그 선은 서로에게 이어지고 붙으며 닿으며 하나가 되기를 힘쓰는 것 같았다.
실로 제석망(帝釋網)의 현현이 두 사람의 양손에서 이루어지는데 두 사람의 날붙이는 근골의 연장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해체하고 부수는 것에 일심(一心)으로 집중하는 중이었다.
순수한 살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접근을 불허하였다.
이미 정남군의 녹영군이 사방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검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 없었고 누구 하나 조창을 들어 두 사람을 겨누는 이도 없었다.
당태세의 눈빛은 오고가는 창날과 소도의 번득이는 빛살을 따라 유함명의 몸과 목과 눈을 바라보는데 유함명 역시 당태세와 마찬가지 얼개로 자신의 대적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을 터였다.
순간 유함명의 장창이 번개처럼 당태세의 가슴팍을 열고 둘로 쪼갤 기세로 들어오는데, 당태세의 단괴가 들어오는 장창을 받아 걸고 소도가 앞으로 나오며 유함명의 가슴을 찍어 눌렀다.
소도가 유함명의 몸을 뚫기 직전, 유함명의 몸이 옆으로 돌며 장창이 뒤로 빠지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려오며 당태세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떨어졌다.
단괴가 들어오는 장창을 막는 순간, 장창은 다시 회전하며 당태세의 턱 아래에서 바로 위로 솟구치며 당태세의 눈을 뚫어버렸다.
피가 솟으며 당태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젠장!”
당태세의 고개가 촌음의 사이로 젖혀지며 창날은 눈알이 아닌 뺨을 훑으며 지나갔다. 날카로운 통증이 당태세의 온몸을 통과하는데 그 순간 짧은 각성과 함께 당태세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당태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유함명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유함명이 크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란창으로 단괴를 퉁기고 나창으로 칼을 휘감은 뒤 그대로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창을 내뻗었다.
그 순간 유함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퉁겨낸 단괴와 소도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자신이 란나창(欗拿槍)으로 빗겨내었던 당태세의 두 손은 손바닥을 편 채 피리를 불 듯 창대를 가운데 넣고 창날을 목의 옆으로 매고 있었다. 란창과 나창의 회전을 고스란히 병기에 먹인 채 단괴와 소도를 날아가게 놔두고 두 손으로 창대를 잡은 것이었다.
유함명이 깜짝 놀라 창을 단단히 잡는 순간, 당태세의 두 손바닥이 세차게 창대를 비비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순간의 강력이 그대로 유함명의 창날을 쥔 두 손에 전해지며 손바닥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며 손목이 뒤틀렸다. 유함명의 왼손목이 그대로 아래로 꺾이더니 뚝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
외마디 비명을 지른 유함명의 손에서 창대가 벗어나며 창날이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당태세의 오른발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뻗으며 펼쳐졌던 장(掌)의 끝이 휘어지며 호조수(虎爪手)가 되었다.
노인의 열 손가락은 그대로 갑옷을 입은 유함명의 가슴팍을 찍으며 갑주를 찢고 근골을 뚫어버렸다.
“이게…뭐요?”
멍하니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던 유함명의 음성에 당태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옛 제자를 바라보았다. 당태세의 뺨에서 흐르는 핏물은 마치 피눈물처럼 보였다.
“순천문의 소적창전(蕭笛窓前)이다. 창을 배운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절초니라.”
“나는 처음…보는데…당…운천은 배웠소?”
“……황성에서 살아 돌아오면 너희 둘 모두에게 전하려 하였다.”
“아…….”
유함명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에서 창을 내려놓았다. 이미 오른손바닥의 거죽은 다 벗겨져 있었다.
“내가 왜…….”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유함명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더니 천천히 거목이 넘어가듯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유함명의 몸이 쓰러지고 노인 혼자 제자리에 서서 그를 둘러싼 정남군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정남군의 병사들은 모두 말없이 노인과 쓰러진 남명의 무장을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몸을 돌려 여전히 눈을 뜨고 그를 지켜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종리세리에게 다가갔다.
종리세리의 얼굴은 이미 핏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종리세리. 어쩌자고 이렇게 있었느냐.”
“……사문은 사부의 명을 끝까지 따를 뿐입니다.”
당태세는 무릎을 꿇고 종리세리의 몸을 부둥켜 않았다. 노인은 입을 벌리고 한숨을 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요령이라고는 없는 인생이구나. 어찌 그리 살았느냐?”
“그게 저입니다.”
종리세리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당태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왼쪽 눈은 감겨있는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뜨고 있는 오른 눈은 여전히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문주께서는 천수를 누리소서.”
“종리세리.”
“저는 오늘 금주성의 포한을 씻었고, 보국장군이 내린 선무사의 직책을 끝까지 수행하였습니다.”
당태세의 눈이 질끈 감겼다.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노인의 눈물이 뺨의 피와 섞여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종리세리는 눈을 돌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모두가 짐을 벗어던졌으니 어찌……쾌한 날이 아닙니까?”
허공을 바라보던 종리세리의 눈은 닫히지 않았다. 피칠갑이 된 사내는 웃으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태세는 죽은 한인 팔기의 시신을 붙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노인의 구슬픈 울음에 정남군의 지휘관이 다가와 팔기복장의 시신과 죽어 넘어진 남명의 장수와 그들 사이에서 몸을 떨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던 정남왕의 녹영군이 유함명과 노인을 번갈아 가리켰고, 지휘관은 놀랍다는 듯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모두 예우를 갖추어라! 남명의 지휘관을 쓰러뜨린 팔기와 그 스승이라!”
모여있던 병사들이 모두 군례를 올리며 죽은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기렸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하여 흐느껴 울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恨)도 정(情)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은 노인이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모든 것을 다 잃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