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복건(福建) 하문 수성(守城) (2)
원래 홍이포는 영원성의 명장 원숭환이 당대의 영웅 청태조 누르하치를 요동 벌판에 속절없이 묶어놓는데 사용했던 신물중의 신물이었다. 하지만 원숭환이 죽고 산해관이 만주족의 노도와 같은 침공에 함락된 후 이 경천동지할 병기는 만주족의 애병이 되어 청나라가 천하를 석권하는 일등공신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그 홍이포는 해변 앞의 작은 요새가 되어버린 하문성을 비정하게 두들기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예전 거대한 영원성에 올라와 있던 홍이포는 모두 열한 문이었는데, 지금 영원성의 반도 안 되는 하문성을 두들기는데 사용되는 홍이포는 모두 여덟 문이었다.
“모두 성벽에 붙어라! 고개를 들지 마라!”
아침바람을 뚫고 날아온 여덟 발의 포환(砲丸)이 날아가 성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성벽의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고 성벽 위에 머무르고 있던 사내들은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을 받고 그대로 성벽길에 등을 붙이고 속절없이 나뒹굴었다.
당태세 역시 온 몸의 기혈이 진탕하는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붙어 있었다. 포격을 받는 와중에 일어나 사방을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룡 역시 옆에서 비명을 지르며 당태세를 돌아보았다.
“숙부님! 이제 진짜 성이 무너지려나 봅니다!”
“포격만으로 성이 무너진 적은 없느니라!”
당태세는 이렇게 말하였지만 실상 자신도 어찌될 지 자신이 없어보였다. 지금 지키고 있는 하문성은 내성이었고,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토대인지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이었다.
만약 정남군이 독하게 작심한다면 하루종일 포를 갈겨 성벽 한 군데는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태세는 고개를 들어 성의 남쪽을 쳐다보았다. 성 안의 사람들은 이제 목책을 길게 쌓아놓은 성루 뒤로 피신한 상태였고 성루 뒤에는 푸르른 만경창파가 넘실대고 있었다.
아직 배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시 홍이포의 이파(二波)가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정남군의 홍이포는 이제 정확한 각도와 탄착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쇳덩이들이 다시 성벽을 향해 내리꽂혔다.
당태세는 성루에 포탄이 꽂힐 때마다 처마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다. 실로 싸움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근거리에 포탄이 박혔는데 그와 동시에 당태세와 아룡의 몸이 옆으로 붕 뜨며 성벽에 몸이 처박혔다.
당태세는 끄응 신음을 내며 가까스로 손을 짚고 일어나는데,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옆에서 들려왔다.
“성벽이 무너졌다! 다 무너졌어!”
당태세는 기다시피 움직이며 병사가 외치는 곳을 쳐다보았다. 성루의 오른쪽 성벽이 마치 칼로 도려내고 망치로 두들긴 듯 깨끗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부서진 성벽의 잔해가 그대로 성내로 통하는 언덕이 되어버렸는데 마차 두 대는 통과할 만큼 휑하니 뚫린 길이 되어버렸다.
당태세는 바싹 마른 입술을 이로 깨물며 사방에 고함을 질렀다.
“조창수들이 돌입할 것이다! 모두 대비하라!”
당태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바로 대비하고 있던 조창수들이 열을 지어 앞으로 나오는 모습이 눈앞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칼을 뽑아들고 문루에서 내려왔다. 성문은 아직 부서지지 않고 건재하였지만 더 이상 성문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노인은 무너진 성벽의 옆으로 다가가 칼을 빼들고 조창수들의 사격이 끝난 뒤 밀려들 정남군의 병사들을 요격하기 위해 제자리를 잡고 섰다. 당태세의 모습을 보던 병사들 역시 하나둘 성벽 아래로 내려오더니 성벽의 옆으로 붙기 시작했다.
성내에 있던 종리세리 역시 자신의 휘하 병력을 데리고 성벽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철판에 폭우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뚫린 성벽 안으로 바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객가인 사내 하나가 그대로 허리를 부여잡고 풀썩 성 안 마당에 쓰러지는 게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 엄폐물 뒤에 숨으라! 몸을 들지 마라!”
그 순간 기나긴 나팔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독전의 나팔, 진군의 나팔이었다. 나팔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쏟아지며 시커먼 사내들의 그림자가 무너진 성벽을 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태세가 몸을 들며 칼을 허공에 치켜 올렸다.
“싸워라! 한 놈도 안에 들이지 말라!”
노인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들어오는 정남군의 병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남군은 아직 장전된 조창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대열 앞으로 번개처럼 파고들어온 노인을 향해 총구를 들이댈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소도와 단괴가 적진을 헤집으며 무너진 성벽 위의 언덕 위에서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와 함께 성벽 뒤에 숨어 있던 사내들이 튀어나오며 칼과 창으로 정남군을 찌르고 쑤시기 시작하는데 정남군은 엉겁결에 총을 쏘면서 칼을 뽑아들어 그들과 맞서 싸웠지만 이미 선제기습을 당한 정남군은 순식간에 무너진 성벽 앞에서 떼죽음을 당하였다.
화급하게 징이 다시 울리며 조창수와 칼 든 병사들이 화급하게 뒤로 빠지는데 그들은 성벽 너머까지 전력으로 달려 본진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별로 싸움도 안 했는데 왜 저렇게 멀리 달아납니까?”
아룡의 말에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라! 홍이포가 다시 사격할 것이다! 우리가 속았다!”
당태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포대의 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안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 성루의 누각이 직격당하며 박살이 나는데, 그와 함께 무너진 성벽을 중심으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돌과 흙이 사방으로 날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날아가며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땅을 구르며 성벽에서 떨어졌다. 그 뒤로 포탄이 하나 더 떨어졌다. 당태세는 속이 뒤집히며 속에 넣은 것을 다 게워내었다.
땅이 올라와 사람을 치고 사람이 내상을 입고 죽어 넘어가는 중이었다. 당태세가 구르다시피 성벽 근처를 피해 성 안마당으로 구르는데 당태세의 뒤로 포탄이 계속 떨어졌다.
순식간에 성안의 땅이 팥죽처럼 뒤집어지는데 사람과 건물과 목책이 하늘로 날아가며 비명과 굉음을 내뿜었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이곳이 지옥이었다.
“모두 대피하라! 살아남아야 한다!”
목이 터지라 외치는 당태세의 옆으로 사내 하나가 비실대며 다가오더니 그대로 머리를 처박고 땅에 쓰러졌다. 다름 아닌 객가 촌장의 아들이었다.
“이보게!”
하지만 젊은 청년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내의 몸뚱어리는 돌멩이와 총탄이 수많은 상흔을 만들어 놓은 뒤였다. 이를 드러낸 당태세가 다시 성벽을 돌아보았다.
이제 성벽은 온전한 곳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남군은 홍이포로 싸움의 시종(始終)을 마무리하려는 듯 가지고 있는 포탄을 모두 하문성에 퍼부을 심산인 듯 보였다. 포탄은 이제 성벽을 너머 성 안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당태세를 보던 종리세리와 아룡이 다가왔다. 종리세리 역시 이마와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종리세리는 이마가 아니라 왼쪽 눈에서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그의 뒤에는 촌장이 두 손을 모은 채 종리세리를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천호께서 저를 감싸다 이리 되셨습니다. 이리 황망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 전 아들이 죽은 촌장은 살아있는 순천문의 제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촌장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황망한 일이 어디 한둘이오.”
당태세를 바라보던 촌장은 울컥 눈물이 쏟아지며 고개를 돌렸다.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돌아보았다.
“괜찮은가? 종리세리!”
“총알이 스친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선으로 이제 후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성벽은 이제 올라갈 곳도 없습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더니 사방의 사내들을 보며 다시 소도를 흔들었다.
“모두 성루 뒤로 후퇴한다! 목책 뒤로 후퇴하라! 성벽을 버린다! 성벽을 버려라!”
당태세의 말과 함께 병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성을 가로질러 성 끝의 성루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성루를 쳐다보다 자기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성 위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안에서 분전하는 병사와 백성들을 돌아보는 유함명의 모습이 보였다. 유함명은 아예 이제는 싸움에 손 하나 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하문성에서 마음이 떠난 듯 보였다.
“배 타고 섬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생각밖에 없느냐, 이 견자놈아!”
성벽을 넘어온 포탄이 여기저기 박히며 물건과 사람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가옥과 울타리가 부서지고 목책이 깨져나갔다. 이제 정남군은 성 안을 초토화시키려고 작심한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성루의 성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산지사방으로 박살나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포격이 이어졌다. 홍이포는 이제 포격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포신이 녹을 때까지 포탄을 날릴 심산 같았다.
“모두 후퇴! 목책 뒤로 들어가라! 조금만 버티면 배가 온다! 올 것이다!”
백성과 군사들이 무너진 성벽 너머에서 동시에 뛰어오기 시작했다. 홍이포의 포성과 포탄이 같이 떨어졌다. 눈으로 채 쫓을 수도 없는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을 뚫고 땅에 박힐 때마나 땅이 흔들리고 흙과 돌멩이가 머리 위로 튀어 올랐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뒤로 달려오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결국 당태세는 앞으로 다시 튀어나갔다. 목책을 쌓던 여인들과 노인들이 비틀대며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어서 오시오! 뛰라고!”
당태세는 사람들을 부축하며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쓰러진 노인 하나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노인은 허리가 빠졌는지 쉽게 걸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재빨리 그를 향해 달려가 노인의 어깨를 부축하였다.
“숙부님, 위험합니다!”
“아룡, 너는 제 자리를 지켜라!”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당태세와 노인의 옆에 위태하게 서 있던 성벽 중둥이가 시커먼 그림자에 직격당하면서 말 그대로 터져버렸다. 돌덩이와 흙먼지가 순식간에 성난 파도가 되어 당태세와 노인의 머리 위로 덮쳐 내려왔다.
당태세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거센 바람과 함께 육중한 물건이 당태세의 온 몸에 덮쳐 내려왔다. 땅에 등부터 떨어진 당태세는 일순간 시커먼 암흑이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죽는건가.
다시 죽는건가.
노인은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며 두 팔과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순간 사지가 다시 펴지며 몸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었다. 그 순간 자신의 머리와 뺨으로 뜨거운 것이 확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끈적한 피였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을 뻗어 눈에 흘러드는 피를 닦으며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두 눈을 겨우 뜬 노인의 눈에 누런 흙먼지가 가득 들어왔다. 텁텁한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와 저절로 기침이 터지는데 손으로 부채질을 하여 겨우 시야를 확보한 당태세의 가슴 위에는 사내 하나가 누워 있었다.
피칠갑을 한 채 당태세의 배 위에 누워 있던 사내가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시뻘건 얼굴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난 사내의 입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숙부님? 제가 조금 더 빨랐지요?”
“아…아룡?”
“아룡이라니요…무두리입니다.”
당태세의 몸을 감싸고 누워있던 무두리는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나무와 돌덩이들이 폭풍처럼 훑고 간 사내의 등은 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두리는 멍하니 눈을 뜨더니 당태세를 보며 다시 웃어보였다.
“이…무두리는…사내는…자기를 알아주는…사람을 위해 죽는 거…아닙니까….”
“이 미친 놈아!”
정신이 번쩍 든 당태세가 무두리를 껴안고 비틀비틀 뒤로 빠져나왔다. 목책 뒤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던 종리세리가 당태세의 모습을 보며 화급하게 뛰어내려왔다. 종리세리 역시 아룡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아연실색한 채 당태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두리, 아룡은 당태세의 품 안에서 멍한 눈을 들어 계속 당태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숙부님은…제가…아니면…안 된단…말입니다.”
“아룡! 정신차려라!”
“숙부님, 저는 만주인이…되고 싶었습니다! 만…만주인 되어서…이…출세…출세해서……누구보다 출세해서 보란듯이 살고 싶었는데…날 무시하는 놈들…날…무시하지 못한다고! 나를…….”
“틀렸습니다. 문주.”
종리세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종리세리의 얼굴과 어깨에서도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내장까지 다 상했습니다. 더 살수가 없습니다.”
이미 무두리의 머리와 등과 배는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피는 멈추지 않았다. 당태세는 표정을 굳힌 채 아룡의 몸을 잡고 있었는데 경련이 일어나며 아룡의 상체가 점점 위아래로 뛰놀기 시작했다.
아룡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당태세를 바라보며 이를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숙부님! 숙부님…살려주십시오! 살…살려주십시오…저는 여기서 죽으면…안…됩니다!”
“아룡.”
‘숙부님…제발 저를….”
“너는 아륙이 기억나느냐?”
하지만 당태세의 말은 이제 아룡에게 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아룡은 고통으로 온 몸을 뒤틀며 두 손으로 당태세의 팔을 꽉 쥐고 살점을 뜯어버릴 듯 손톱을 노인의 팔뚝에 박아넣고 있었다.
종리세리가 뒤에서 천천히 단도를 꺼내 당태세의 앞에 내밀었다.
“더 길어지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숙부…가지 마세요! 제발! 제발 저를…버리지 말아주십시….”
당태세는 종리세리가 내민 단도를 붙잡았다. 당태세의 굳었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그의 아래에 있는 이는 만리를 같이 다니며 길 앞잡이 노릇을 해준 충직한 종이였으며 그의 하나뿐인 혈육을 죽인 원수였다.
당태세의 손이 단도를 움켜쥐었다. 아룡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며 당태세의 눈을 마주보았다. 이미 눈물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는 사내의 소같은 눈동자를 노인은 마주보았다. 또렷하게 마주보았다. 당태세는 입을 벌려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내의 손에 들린 단도가 그대로 가슴팍으로 밀려들어갔다. 피부와 근육을 뚫고 심장의 단단한 막을 단번에 꿰뚫는 감촉의 노인의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아룡의 눈이 당태세를 본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는…내가…….”
당태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룡의 눈이 천천히 힘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당태세의 부릅뜬 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룡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입은 연신 벌어지며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기력이 다하고 헛김만 뿜어져 나왔다. 한참동안 말을 찾아 허공을 휘젓던 혀가 겨우겨우 앞으로 나오며 가까스로 말을 내뱉았다.
“왜 네가…왜…나에게…왜 이런…….”
노인은 고개를 번쩍 쳐들어 하늘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노인은 아룡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 그것도 온 몸이 부스러지라 껴안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너무하지 않소이까? 왜 이놈을 지금 데려갑니까? 아직 할 말이 있고 풀 이야기가 산더미같은데….”
당태세의 젖은 눈에서 불꽃이 일더니 하늘을 향해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왜 지금 데려가느냐! 네가 무슨 하늘이고 섭리냐!”
당태세는 몸을 불쑥 일으키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입이 바르르 떨리며 쏟아지는 포탄과 흙먼지 사이에 우뚝 서 누렇게 변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비명과 포탄의 굉음이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데 여전히 하늘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 당태세가 찾고 있던 구명(救命)의 목소리는 하늘이 아닌 사람들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배가 온다!”
“배가 보인다!”
사람들이 환호성과 함께 거대한 돛을 활짝 편 그림자가 남쪽에서 빠르게 부두를 향해 올라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