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복건(福建) 하문 수성(守城) (1)
날이 밝았다.
밤이 지속되더라도 오지 않기를 빌었던 해는 어김없이 동해에서 머리를 내밀었고, 천천히 성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서쪽으로 밀려나며 죽어있던 빛깔들이 다시 자신의 색을 찾았다.
당태세는 아룡이 가져다준 차를 성루 위에서 마시고 있었다. 어떻게 끓여왔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다향이 남아있는 물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끓인 겁니다.”
아룡의 말에 당태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아룡을 자신의 옆에 두기로 하였지만 여전히 속내는 복잡하였다.
이 아이는 원수로다. 내 혈육의 원수로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면 지금이라도 칼을 뽑아 아룡의 목을 치는 것이 상례건만, 손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당태세의 머리는 옆의 아룡을 생각하면서도 눈은 저 멀리 해안가에 도열해 있는 정남군의 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저들은 도열을 끝내고 포대의 포를 정비하고 있었다. 짧은 아침을 거하게 먹고, 성을 향해 밀려들 것이었다.
정남왕의 군사들은 정성공의 군대를 역도라 생각하고 밀려올 것이니 그 칼에는 자비가 없을 터였다. 우리 또한 살기 위해 싸워야 하니 이쪽도 무자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태세는 아무쪼록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살심이 저 진지를 향하기를 바랐다. 그 창끝이 아룡을 향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지금은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룡과 유함명은 여지까지 같은 장소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 싸움이 끝나고 당태세는 자신이 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나머지 모든 일들을 청산할 시간과 장소가 남아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전에 그에게는 더 큰 일이 남겨져 있었다. 십칠 년전에 하려다 실패한 과업은 여전히 당태세의 마음에 남아있는 바, 이번에는 기필코 완수하려는 욕심 또한 보수설한(報讐雪恨)의 욕망 못지않게 큰 것이었다.
“전에는 황제폐하를 지키지 못하였으나 이번에는…….”
당태세는 혼잣말을 멈추고 슬쩍 성루와 성내의 마당을 지켜보았다. 성루 위에는 갑주를 걸쳐입은 병사들과 그 옆에 궁시를 든 객가인 사내들이 같이 번을 서고 있었고, 성 안마당에서는 객가인 여인들이 밥을 하고 여기저기 군사들을 향해 밥을 나르고 있었다.
노인과 나머지 사내들은 성 안에 또 다른 목책을 쌓고 있었다. 성벽이 무너질 때를 대비하며 마지막 남은 내측의 성루를 중심으로 또 다른 목벽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내성의 성루 뒤에는 바로 부두가 이어지며 그 부두로 백성들을 실으러 들어오는 배가 올 것이었다. 그 배는 백성을 구해 만경창파로 나갈 것이니, 그 항해야말로 당태세의 삶에 걸린 마지막 과업이라 해도 될 법하였다.
“이번에는 지킬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할 것이다.”
당태세는 다짐하듯 독백을 내뱉고 옆에 있는 아룡을 반사적으로 쳐다보았다가 다시 전방을 향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철비준도 남겨놓았는데 하물며…….”
“무슨 말씀이십니까? 숙부?”
“……아니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후방도 봐야 합니까? 그 유 뭐라는 장군놈도 감시해야 하나요?”
“그 놈은 종리세리가 보고 있을 것이다.”
“사형이 저기 오십니다. 그런데 옷을 호복(胡服)으로 갈아입었네요?”
당태세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뒤를 쳐다 보았다. 성루의 계단을 타고 종리세리가 올라오자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 종리세리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예전 장사에서 당태세를 맨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인 검은 팔기의 평복을 입고 있었는데, 오히려 종리세리의 옷태는 한인의 장포를 입은 것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종리세리는 자신의 옷을 보더니 피식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제 창에 옷이 찢긴 뒤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 옷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팔기의 것은 모두 버렸다 하지 않았느냐?”
“서림각라의 일족은 이미 벗어던졌고 천호의 직 역시 관두었지요. 지금 여기 있는 것은 한인 종리세리입니다만…….”
사내는 성내의 주민들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선무사(宣撫使)의 직은 임무가 없어져야 소멸하는 법이니 그 직을 마지막까지 수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태세의 눈길은 부두 근처에 있는 마지막 성루와 그 앞에 서 있는 철비장군 유함명에게 가 있었다. 당태세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병사를 독려하고 백성을 위무하게. 그리고 저 놈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말게. 분명 곱게 내보내진 않을 것이니.”
“존명.”
종리세리가 명을 받고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아룡이 슬쩍 전방을 보며 당태세를 힐끗거렸다. 말은 호기롭게 내뱉었지만 아룡으로는 처음 겪는 전쟁이었고, 성루에 올라와 밀려온 적군을 바라보는 것 역시 일생에 다신 없을 일이었다.
“저 놈들 엄청나게 밀려오겠죠? 막을 수 있을까요?”
아룡의 걱정스러운 말에 당태세는 지그시 성문 밖의 군사들을 보며 짧게 답하였다.
“막을 수 있다 생각하여라. 생각이 몸을 움직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청명한 하늘 아래 포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여 전방을 쳐다보았다. 이미 평지위에 올라와 있는 포대에서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당태세의 날카로운 고함이 울려 퍼졌다.
“포격이다! 모두 자세를 낮추고 방호하라!”
당태세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천지가 진동하며 흙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홍이포의 포성이 연달아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개전(開戰)은 벽력과 같은 굉음으로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성벽 이곳저곳에서 돌덩이가 튀고 흙먼지가 날리기 시작하는데 용케 전날처럼 일격에 무너지는 성벽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당태세가 주변을 바라보며 다시 외쳤다.
“포격이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들지 마라! 끝나면 적이 돌격해 온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왼쪽 끝의 성루는 공교롭게도 성벽의 끝이 직격당했는지 성벽 위가 날아가고 그 뒤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당태세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자신의 목괴를 부여 쥐었다. 아룡 역시 단도와 몽둥이를 쥐고 당태세의 뒤에 붙어 있었다. 일고여덟 발의 포탄이 성벽에 떨어지자 다시 성 밖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당태세는 홍이포의 포격이 멈춘 것을 알았다. 병사들도 하나둘 고개를 성 밖으로 내밀고 적진의 동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하나 울려 퍼지더니 당태세의 옆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풀썩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병사의 이마에는 둥그런 구멍이 나 있었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창(鳥槍)이다! 조창병이 밖에 있으니 머리를 들지 마라!”
당태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총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성벽의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기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조창병은 명군의 화기였고 자부심 강한 만주족은 화기를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문성의 바깥을 포위한 것은 팔기가 아닌 정남왕의 녹영군이었다. 녹영군은 활대신 조창을 더 많이 사용했으니, 지금 저들은 명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며 하문성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조창소리가 그치면 성을 타넘어 올 것이다! 모두 대비하라!”
사다리들이 하나둘 성벽 위로 얹어지는 것이 당태세와 아룡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병사들과 객가인의 눈에도 훤히 보일 터였다. 하지만 사다리를 끊고 치울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조창의 탄환들이 거센 폭우처럼 성벽을 휘몰아치며 돌가루를 날리고 성루의 처마 수십 곳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미 녹영군은 사다리의 반절 이상 올라와 있을 터였다. 당태세는 칼을 뽑았다.
아룡 역시 당태세의 하는 일을 보더니 단도를 꽉 움켜 쥐었다. 조창 소리가 순간 멈추었다. 당태세는 웅크린 채 사방을 보다가 시커먼 인영이 불쑥 성벽 위로 모습을 내놓자 마자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반격하라!”
웅크리고 있던 당태세의 몸이 튀어나오며 갑주 입은 병사의 목을 한 번에 찌르고 성벽 밖으로 밀어내었다. 거의 동시에 사다리에서 병사들이 성벽으로 기어 올라왔다.
성벽의 방어병들이 창을 뻗고 칼을 뻗으며 사내들을 막아서는데, 선봉으로 치고 들어오는 녹영의 군사 역시 전란에서 닳고 닳은 역전의 용사였다. 순식간에 성벽 위에서 난전이 펼쳐졌다.
“두려워 말라!”
당태세가 단괴와 소도를 빼들고 성루부터 성벽을 향해 뛰어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적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상대방의 칼이 당태세를 찔러오는 순간, 당태세의 단괴가 칼을 막고 소도가 번개처럼 뻗어 갑주가 덮이지 않은 목과 겨드랑이를 순식간에 찌르고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도끼를 휘두르던 병사가 그대로 당태세의 머리를 찍어누르는 순간 당태세의 소도가 도끼날을 튕기고 노인의 어깨가 그대로 병사를 들이받고는 단괴로 병사의 목을 잡아채어 돌려버렸다. 두둑하는 기분 나쁜 감촉과 소리가 단괴를 잡은 손을 통해 올라왔다.
당태세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그대로 앞으로 나가며 성벽으로 올라오는 적들은 번개처럼 척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노인이 움직이는 곳마다 적의 시신이 즐비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있던 병사들 역시 용기백배하여 칼을 휘두르고, 객가인 궁수들이 몸을 성벽 아래로 내밀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성벽으로 올라왔던 병력의 대부분이 도륙 당했다. 순간 조창소리가 다시 울리며 사방에서 콩 볶는 소리와 함께 돌이 튀기 시작했다.
“몸을 숙여라! 엎드려!”
멀리 적의 진지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성에 동원되었던 병력들의 후퇴신호였다. 당태세는 성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성벽길 위는 이미 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는데 사방에서 보이는 것은 대부분 정남군의 시신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옆에 있던 아룡이 안부를 묻자 당태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은 여기저기 피가 튀었지만 자신의 피 같지는 않았다. 손에 들린 몽둥이도 시뻘겋게 변한 것으로 봐서 아룡 역시 분투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심해라.”
“걱정마십시오. 저는 숙부님 뒤에만 있을 거니까요.”
당태세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룡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이는 왜 그런 것일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그 일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서로의 등을 맞대고 의지하는 싸움에서 왜 나는 저 아이에게 격려의 말 하나를 못해주는가.
당태세는 아룡을 쳐다보고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저 멀리서 객가인 촌장이 당태세를 보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객가인들은 누구 하나 성벽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화살은 넉넉하오?”
“넉넉하지 않으니 정확하게 쏠 뿐입니다!”
“적들은 점심을 먹고 다시 들이칠거요!”
촌장은 당태세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라지요!”
하지만 당태세의 예상과는 달리 정남군은 점심나절이 다 지난 뒤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조창병들이 바로 성 앞까지 몰려와 성벽에 총알을 뿌리고 돌아가는 것 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성벽 총안에 숨어 진지를 바라보는 당태세와 아룡 옆으로 슬쩍 종리세리가 올라온 것은 이미 미시(未時13:00~15:00)가 다 지난 때였다.
“맙소사.”
종리세리는 군진 앞의 조창수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포대와 그 너머에서 움직이는 포대를 보고 있었다. 종리세리는 손을 뻗어 포대 옆을 가리켰다.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뭔가를 같이 나르는 중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종리세리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저들은 지금 홍이포를 더 가져오고 있습니다. 저게 어디서 난 물건입니까?”
“세상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아룡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당태세는 실눈을 뜨고 포대를 유심히 보더니 이를 악물고 한숨을 뿜어내었다.
“유함명이 갯벌에 처박았다는 홍이포 다섯 문이 있었다.”
“그걸 끌어올리는 모양입니다.”
“모두 합해 여덟 문이 되겠군요.”
지키는 쪽도, 빼앗으려는 쪽도 모두 큰 싸움 한 번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저들은 오늘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저녁, 어쩌면 내일 새벽, 정남군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포성과 함께 온 힘을 한 번에 모아 성을 뚫어버리고 남명의 졸개들을 무너뜨리려 할 터였다.
그리고 당태세는 철석같이 버티며 대만에서 배가 들어와 백성들을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을 빼앗기지 않으면 남명의 승리가 될 것이오. 폐허속에 모두를 도륙하여 묻어버리면 정남왕의 승리가 될 터였다.
“오늘 밤은 쌍방 누구도 잠을 못 자겠구나.”
당태세의 독백이 서쪽으로 흘러가는 해와 함께 사위었다.
시나브로 해는 떨어지고 다시 달이 뜨고 하늘에 은하가 지나가고 별이 반짝이며 땅을 쳐다보는데, 땅 위의 사내들은 별이 사라지고 해가 올라올 때만을 기다리며 서로를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밤은 적적하였고 평온하였으나 그 아래 생명들은 안식을 얻지 못하였다. 늙은 절름발이와 성마른 청년과 만주족도 한족도 아닌 칼잡이는 각자 밤하늘과 여명을 바라보며 기나긴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내었다.
그리고 아직 해가 채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을 때, 정남군의 포대 첫 번째 포문에서 불과 포성이 터져 나왔다. 쇠와 불꽃이 시커먼 용을 토해내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묵룡(墨龍)이 하늘로 쏟아져 나와 성을 침노했을 때 사람들의 입이 열리며 성벽이 울기 시작했다.
“공격이다!”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하문성의 새벽을 깨웠다. 두 번째 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