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221화 (221/226)

221.  복건(福建) (9)

어스름이 깔린 부둣가는 이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지 못하였다.

사방이 칠흑 같은 가운데 철석이는 번쩍임이 눈에 들어오면 그것이 바다인줄 알 뿐이었고, 말없이 고고한 달과 별이 박혀 있으면 그것이 하늘인 줄 알 정도였다.

나무판자가 얼기설기 조악하게 이어진 부둣가를 달려가는 당태세의 눈에 자그마한 소선(小船)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작기 그지없는 배였는데, 잘 해봤자 열두서너 명이 타고 움직일 정도의 배였다.

배의 옆에는 이미 열 명 남짓한 군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배의 앞으로 다가가는 창을 든 무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한눈에도 그가 유함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태세는 유함명이 뱃전에 닿기 전에 큰 소리로 먼저 고함부터 질렀다.

“유장군! 지금 어디로 급히 가시는가!”

순간 유함명의 얼굴이 뒤를 돌아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당태세를 마주보았다. 당태세는 부두 앞으로 가 밧줄을 막 풀고 있는 배의 앞으로 밀고 들어가 유함명과 배 사이에 버티고 선 채 유함명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외로운 성을 놔두고 지휘관이 어디를 가려 하는가?”

“아닙니다. 제가 가는 것이 아니라 전령을 금문도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금문도에서 병력이 온다하던가?”

“그것은 아닙니다만…….”

당태세의 눈이 가늘어지며 눈동자를 굴려 사방을 쳐다보는 유함명을 바라보았다. 유함명의 표정은 평소의 여유로움과 호기로움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정남군이 들이닥쳐 저 수수깡 같은 성벽을 허물고 들어올 판국인데 어찌하여 지휘관이 이곳에서 얼쩡댄단 말인가. 그리고 원군을 받는 게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전령을 금문도로 보낸단 말인가.”

당태세의 눈은 유함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가 직접 이 배를 타고 금문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말일세.”

유함명은 혀로 입술을 핥더니만 다시 사방을 살피더니 다급한 소리로 말하였다.

“사부님, 잠시 비켜주십시오.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저 자들은 너를 보면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어차피 하문성은 이제 틀렸습니다. 총관도 죽은 마당이고 성은 부실합니다. 배는 이틀 뒤에 오는데 내일 공격 한 번이면 성은 풍비박산나고 사람들과 병사들은 도륙당할 것입니다. 명약관하한 일이예요.”

유함명은 당태세를 바라보며 약속을 받아내듯 힘주어 말하였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요. 살아서 저항을 해야지 이런 의미없는 죽음은 낭비일 뿐입니다.”

“네 병사 아니냐?”

“남명의 병사요. 내 사병이 아닙니다.”

“네 놈이 이럴 것이라 예상하였다.”

당태세는 어느새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사내다운 헌걸찬 말과 화려한 창질이야 언제든 가능한 것이지. 십칠 년 전에는 안 그랬느냐. 너는 원래 지용을 겸비한 무인이었지. 하지만 네놈은 끝까지 사지(死地)에 붙어있을 배짱은 없는 놈이었다.”

“그럼 같이 가시지요. 사부. 여기서 다 죽는 것은 실로 개죽음만 못합니다. 이곳은 이름이 남을 곳이 아니오.”

유함명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하며 내공이 실려 있어 바로 앞에 있는 당태세에만 똑똑히 들릴뿐, 뱃전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병들의 귀에는 들어갈 리 만무하였다.

당태세는 눈을 들어 유함명을 노려보았다. 노인의 시선과 낮은 목소리에 노기가 짙게 드리워졌다.

“네 윗선이 죽으니까 바로 정체를 드러낸다 이것이구나. 철비준. 네놈이 지금 하는 짓이 십 칠년 전 네놈이 내게 했던 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렷다?”

“그를 어찌 악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문주님에게 장절하고 영웅스런 죽음을 마련해 드린 것입니다.”

“너는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고 말이냐?”

“모두가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함명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였다. 당태세는 오히려 그런 유함명의 목소리에 치가 떨렸다. 내가 실로 사람을 잘못 거두었구나.

사람이 아닌 것을 거두고 그에게 무공을 전하며 충효를 논한 것이 아닌가. 애초에 내가 실수한 것이구나. 당태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짐승이 경계하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생사를 각오하고 싸웠으면 어찌 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우리가 이길 가능성도 있었어!”

“희박한 가능성이지요.”

“가능성이 희박하여 책임을 방기하고 종당에는 같은 편의 등을 찌르고 내 스승과 사제가 죽는 것을 보면서 달아나는 것이 네 정의였느냐!”

“어차피 망한 순천문. 문주와 소문주가 같이 죽는 것도 장절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당운천은 사후에 소문주의 지위에 오를 테니!”

“네놈 설마, 네놈이 소문주가 못 될까봐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요!”

순간 철비준 유함명의 얼굴에 당혹스런 빛이 스쳐 지나갔다. 사내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을 얼버무렸지만 당태세의 눈초리는 날카롭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은 엄혹한 스승이 아니라 자식 잃은 아비의 분노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실로 그것 때문이었느냐!”

순간 유함명의 눈초리가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그와 함께 장수의 손에 들린 창에 힘이 들어갔다. 당태세도 자신의 목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키시오 당문주. 허튼소리로 내 발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지나가려면 지나가 보아라.”

“정녕 원하신다면.”

유함명이 말을 마치자마자 잇새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를 신호로 유함명의 곁에 붙어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당태세의 뒤에서 덤벼들었다. 그와 함께 유함명의 창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당태세의 뒤에 있던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번개처럼 뽑혔다.

당태세의 목괴가 앞으로 뻗으며 떨어지는 병사들의 칼을 한 번에 받고 공중에서 빙글 한 바퀴를 돌리자 병사들의 손에 들렸던 도가 한꺼번에 옆으로 쏠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당태세의 목괴가 광풍처럼 휘몰아치니 서너 명의 병사가 가슴팍과 어깨를 얻어맞고 그대로 뱃전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유함명을 향해 뻗어 들어가는 순간, 유함명은 가볍게 상체를 뒤로 젖혀 찔러들어오는 안모도를 피하더니 그대로 창을 뻗어 종리세리의 가슴팍을 노렸다.

순간 종리세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이지도 않는 창날이 야음(夜陰)에 궤적도 남기지 않고 들어와 그대로 종리세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종리세리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창날을 피하였지만 유함명의 창날은 종리세리의 소매깃과 가슴에 이르는 천조각을 단박에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실로 간발의 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철비준 유함명의 창은 십칠 년 전보다 배는 빨라지고 갑절은 정교해진 것 같았다.

당태세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과 종리세리와 대치하고 있는 유함명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를 깨물었다. 철비준 유함명의 공부는 그동안 일취월장한 것이 역력해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번쩍이는 빗살이 허공을 가르더니 당태세와 대적하고 있는 병사들의 가슴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칼을 놓친 병사 대여섯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물속으로 굴러 떨어지는데, 선창의 건너편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비장군은 싸움을 멈추시오!”

다름 아닌 아룡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룡의 주위에는 어느새 활과 탄궁을 가지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은 병사들이 아닌 객가인들이었다.

아룡의 옆에 있던 촌장이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객가의 궁술은 일류라오. 토루에 숨어서 침략자를 상대하려면 활 하나는 잘 쏴야 하거든.”

촌장의 말을 받아 아룡이 유함명을 보며 이죽거렸다.

“철비장군은 남명의 장군이라더니 어찌하여 백성들과 군사를 놔두고 혼자 떠나갈 생각을 한단 말이오?”

“무슨 소리냐! 엄연히 전령이라 말하였거늘!”

“그 전령은 어디 있소?”

“네놈이 방금 전에 죽이지 않았느냐!”

당태세는 아룡과 유함명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더니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목괴를 뻗어 소선 돛대 앞에 걸려있는 등불을 끌어올려 손에 쥐었다. 당태세의 눈이 유함명을 향하였다.

“어차피 전령이 갈 수 없다면 굳이 이 배는 필요 없으렷다?”

당태세가 손에서 등불을 뱃전으로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등불에서 새어나온 기름이 뱃전에 옮겨 붙으며 마른 나무에 불이 확 당겨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함명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당태세는 불타는 배 위에서 부둣가로 건너오며 유함명에게 나직하게 말하였다.

“이게 파부침주(破釜沈舟) 아니겠느냐. 이제 우리에게 올 배는 대만에서 오는 복선 외에는 없는 것이렷다?”

“없겠지요.”

하얗게 질렸던 유함명의 눈에 천천히 독기가 서려오기 시작하는데, 그 살기 띈 눈은 천천히 당태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오며 한때 모셨던 스승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려는 듯 움직였다.

당태세는 유함명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 일을 모든 병사들에게 다 말하기를 바라느냐? 유함명. 보아하니 네 놈은 세상의 이목이 네놈의 대의보다 중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이제 저와 사부님께서는 끝까지 싸워 살아나 대만의 배가 올 때까지 버텨야지요.”

“네 말이 옳도다. 배가 보이게 되면 우리 둘 다 같이 이 지옥도에서 벗어나볼까?”

“둘 모두 말입니까?”

“자리가 모자라면 하나는 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지.”

당태세의 이가 드러나자 유함명 역시 이를 씨익 드러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불초 제자. 그 시간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유함명은 당태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창을 피한 종리세리를 노려보더니만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부하들을 저격한 객가인들을 흘겨보고는 창을 어깨에 얹은 채 저벅저벅 부두를 걸어 성터로 돌아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리세리는 다가오는 당태세에게 자리를 내주며 당태세의 뒤에서 노인을 따랐다.

“꽤 빠른 창법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구나. 저 견자놈.”

당태세 역시 멀어져가는 유함명을 노려보았다. 그의 창법은 신묘할 정도로 빨랐다.

순천문의 창법을 토대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아류였지만 그 속도와 정묘함은 순천문의 굴레는 벗어난 것 같았다. 사형문의 십대제자였던 광풍인 나유박의 창보다 몇 갑절은 빨라보였다.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바라보며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저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선인(善人)은 아닙니다.”

“저 놈은 자신이 악인(惡人)인 것을 모르는 선인이다.”

“네?”

당태세는 저 멀리 창을 들고 병사들의 주둔지로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음에는 협기가 있고, 의로움에 대한 열망이 있으나 자신이 성취하지 못하는 협행(俠行)과 정의는 가치없다 여기는 자이며, 자신의 가치에 반하는 것은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고 배척하는 인생이로다.”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가 눈을 들고 앞을 바라보며 차갑게 대꾸하였다.

“그것은 일그러진 공명심 아닙니까.”

“자기가 원하는 괘가 나올 때까지 서슴없이 인명을 산제물로 넘길 점복(占卜)이로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그때였다. 활을 든 객가인과 그 앞에서 단도를 들고 껄렁대며 다가오는 아룡이 당태세와 종리세리를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전적으로 객가인들을 데리고 온 것은 아룡의 수완이었으니 그 공적이 적다 말할 수 없었다.

아룡은 얼굴을 굳히는 당태세를 바라보면서 씩하니 웃어보였다.

“저 정신 나간 옛 제자 말입니다. 이상한 놈 맞습니다요. 그나저나 저 아니었으면 숙부님은 어쩌실 요량이셨습니까? 이래도 저를 안 쓰실 겁니까?”

당태세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잠시 멍하니 아룡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던 노인은 한참동안 눈을 깜박이며 서 있다가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허락이 아닌 당태세 자신이 다짐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이었다.

“내 뒤에 서라. 무두리.”

“존명! 존명하겠나이다!”

아룡이 이를 다 드러내며 웃는데 당태세는 그의 뒤를 따르던 객가인들을 보며 재차 말하였다.

“미안하외다. 여러분. 내일은 여러분의 힘을 빌려야 할 수도 있겠소.”

“말씀만 하십시오. 문주님. 우리 일족 중 몇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자손을 흥왕시킬 수 있다면 이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소이다.”

촌장의 말에 당태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러분 모두를 꼭 보내드리리다. 약조는 못해도 내 혼신의 힘을 다하겠소.”

어느새 밤은 깊게 물들었는데, 두런대는 사내들의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개전 전야(前夜)였다. 내일은 분명 오늘 서 있는 이들 중 더는 대화가 닿지 않을 이가 있을 터였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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