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복건(福建) (8)
총관 목천석은 정남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을 때 내성 중앙의 집무실 안에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패물을 챙기고 있었는지 그것은 당태세가 알바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는 확인할 수도 없었다.
몇 시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총관이 머물던 집무실은 이제 기와와 부서진 벽돌이 가득 들어찬 폐허가 되어있었다.
홍이포 한 방에 사방의 기둥이 다 박살나 위층이 그대로 내려앉은 건물은 속에 있는 사람을 꺼낼 엄두도 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목 총관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황당하구만.”
아룡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에서 서성대었다. 말이야 부박하지만 실로 아룡 말처럼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문성의 지휘관이 전사한 것이었다. 지휘관이 날아오는 유시에 맞던가 돌멩이에 맞아 전사하는 일은 병가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 우리 편에서 벌어진다면 심각한 일이 되는 법이다.
“하문성의 지휘관은 유함명 너 혼자인가.”
유함명이 당태세의 말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세리는 뒤에서 두 사람과 주변의 병졸들을 보더니 나직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급하신 와중이니 문주께서도 지휘관의 직위를 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이곳의 많은 이들이 문주님의 위명을 들었고 조금 전의 싸움에서도 지휘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생각에도 숙부님이 지휘를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룡이 뒤에서 말을 던지자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데, 유함명은 자신을 둘러싸고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초리를 훑어보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당문주님! 이곳에서 문주님의 위상을 들었습니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북경에서 외롭게 싸우다가 이곳까지 오셔서 저희를 도와주시다니…….”
촌장은 마지막에 말문이 막혀 말을 채 잇지 못하는데 당태세 역시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촌장의 아들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다가와 당태세 앞에 와 섰다.
“문주님, 저도 옆에서 싸우게 해 주십시오. 어차피 손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너는 네 일족의 안위를 지켜야 하지 않느냐?”
당태세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일전에 저지른 무례함을 꼭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싸울 터이니 내쫓지 말아주십시오!”
당태세가 촌장을 바라보자 촌장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객가의 삶은 늘 생사가 갈리고 거처가 바뀌는 삶입니다. 오직 의리만이 객가다움을 보장하니 문주께서는 제 아들을 거둬주옵소서. 명은 하늘에 맡기겠습니다.”
“촌장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촌장과 그 아들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올리는데, 당태세의 뒤에 서있던 아룡은 그 모습을 보면서 연신 혀를 쩝쩝거리고 있었다.
***
“아니, 숙부님. 그러니까 저는 왜 수비군에서 빼시는 겁니까?”
땅거미가 지고 다시 밤이 찾아왔다. 세 사람은 벽 반이 허물어진 숙소에 모여 병사가 가져온 갈대 잎으로 말아놓은 맨밥을 먹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반찬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 주방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일이었다.
하지만 밥을 먹던 아룡이 당태세를 보며 볼이 퉁퉁 부어 중얼대는 소리를 하자 당태세는 그나마 먹던 밥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아룡을 바라보더니만 말없이 죽통의 물을 들이켰다. 바닷가의 물맛은 비려서 역하였고 아룡의 중얼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당태세의 귀에 들어왔다.
“객가의 자식도 수비군에 넣는데 왜 저는 넣어주지 않으십니까?”
“어서 밥이나 먹어라.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당태세의 입에서 고르고 골라 나온 말은 두리뭉실하고 짧았다. 하지만 당태세의 대답은 아룡의 성미에 맞는 것 같지 않았다.
“숙부님, 저도 아이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금월방부터 칼을 만져봤고 거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저를 왜 전선에 세우지 않으십니까? 숙부님과 종리사형 혼자 사지로 가는 걸 구경하고 있으란 말씀이십니까?”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꾹꾹 누르고는 길게 숨을 내쉬며 아룡을 바라보았다. 금월방이라. 아룡의 눈에는 자기도 두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소망이 가득하였다.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룡은 당태세를 인상쓰며 노려보았지만 그 표정은 증오라기보다는 자신의 쓰임새를 알아주지 않는 친족에 대한 불만과 같은 것이었다.
아룡은 걱정 말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면서 말하였다.
“괜찮습니다! 안 죽는다니까요! 이 무두리는 묘당(廟堂)에 출사하여 대장군의 인(印)을 받거나, 부가옹이 되어 수많은 처첩의 눈물 속에서 죽을 것이지 절대 이런 복건의 갯벌에서 죽을 위인이 아닙니다! 숙부님. 그냥 저를 올려 보내 주십시오. 제가 있어야 숙부님을 돌봐 드릴 것 아닙니까?”
당태세는 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이미 산동 포구를 떠날 때부터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매몰차게 없앨 놈이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던 놈이었다. 게다가 이 놈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절명하게 만든 놈이 분명했다.
당태세는 입을 열고 싶었다. 네가 나를 돌볼 때 같이 있던 아륙을 아느냐, 그 놈이 내 혈육임을 아느냐. 그놈을 죽였으니 너도 그 핏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지금 자기도 모르게 그 몇 마디를 입에서 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륙에 대해 물어보는 순간, 아룡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허나 지금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당태세는 생각을 정할 수 없었다.
일찍 죽였어야만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같이 돌아다닌 것이 패착이었다.
전장터를 같이 돌아다닌 군마(軍馬)에게도 정이 붙는 것이 사람의 성정인데 하물며 같은 사람이라면 오죽하랴.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무는데, 종리세리가 물끄러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아룡 편을 들어주었다.
“사부님, 그러지 마시고 무두리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제 몫은 충분히 하는 놈 아닙니까?”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조금 있을 공성전 중에 없애야 하는가?
이도저도 아니면 다른 방도가 있는가?
종리세리의 눈길을 느낀 당태세가 슬쩍 목괴를 곁으로 가져오며 아룡과 종리세리를 같이 쳐다보았다. 긴 한숨이 새어나온 당태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두 사내는 말없이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태세의 갈무리된 눈빛이 서서히 다시 빛을 되찾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문주님! 순천문주님!”
부서진 벽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묘한 어조의 한어(漢語)를 쓰는 객가인 청년이 큼직한 몽둥이를 들고 부서진 벽 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름 아닌 촌장의 아들이었다.
“무슨 일인가?”
종리세리가 묻자 촌장의 아들은 급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포구 쪽으로 돌리며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구에 배가 하나 들어왔는데….”
“그런데?”
“크지 않은 작은 배가 들어왔는데…….”
촌장 아들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철비장군이 그 배를 타고 진을 벗어나려는 것 같습니다!”
순간 당태세의 눈빛이 바뀌며 촌장 아들을 노려보았다. 노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지금 유함명은 어디에 있느냐!”
“부둣가로 가는 중입니다!”
당태세는 목괴를 부여잡고 쏜살같이 부서진 벽 틈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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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께서 중임을 맡아주신다면 제 짐이 한결 가벼워지겠습니다.”
“네가 널 위해서 그 일을 맡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성 안에 남아있는 병사와 백성이 기백인데 그냥 두기도 뭐한 노릇이다. 종리세리, 너도 내 부장이 되어서 같이 일을 꾸려가야겠다.”
“말씀만 하옵소서. 제게는 생활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팔기의 깃발 아래에서 보낸 세월이 한인으로 보낸 세월과 비슷한 사내는 쓰다달다 말없이 상관이자 스승인 당태세의 명을 받았다. 그를 보고 있던 아룡은 조바심이 이는 얼굴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요?”
“너는 되었다. 그냥 하던 일을 하여라.”
“제가 딱히 할 일이 없는데…….”
머쓱하니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던 아룡을 슬쩍 흘겨보던 당태세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유함명을 쳐다보았다.
지금 살아 숨 쉬는 자들 중 가장 원한을 많이 사야 할 자는 바로 앞에 있는 철비준 유함명이 되어야 할 터이지만 당태세는 왠지 모르게 자꾸 아룡에게로 신경이 쏠리고 있었다. 당태세는 억지로라도 아룡을 보지 않고 말을 걸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어차피 백성들이 배를 타고 나갈 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않겠느냐. 언제 배가 들어오느냐?”
“금문으로 떠나는 배는 이미 스승님이 오시기 전에 들어왔다 가버렸습니다. 이제 다음 배는 대만에서 바로 이곳으로 올 터인데, 복선(福船)은 넉넉하니 커서 여기 있는 병사들과 백성들을 능히 실을 것입니다. 이틀 뒤에 저 뒤의 포구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틀을 버티라는 것이구나.”
당태세는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는 병사들과 여기저기 성읍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돕고 있는 객가인들을 쳐다보았다.
누런 흙먼지가 가라앉아 안개처럼 성안에 깔리자 여기저기에서 참혹한 광경이 드러나는데 시리도록 아름다운 창천(蒼天)은 인간사의 참혹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늙은 무인은 성루바깥의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홍이포가 작심하고 한 번 더 두드리면 성루부터 성벽까지 온전하게 남아있을 것이 없으리라. 이미 그때가 되면 병사의 시신으로 방패를 삼아 겨우 진격을 막고 백성들을 구원할 것인데, 너는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느냐.”
“그게 장수의 군병의 도리니 어쩔 수 없습니다.”
유함명의 말은 당태세의 찡그린 얼굴에 결의를 가져왔다. 여전히 유함명의 말과 생각은 곧아보였다. 십칠 년 전의 과오를 진정으로 속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엄숙하게 끄덕이며 유함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수성의 지휘를 맡겠다. 유장군, 그대는 내가 감독할 병사와 장군이 감독할 병사를 나누고 내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를 말하시게.”
“알아 모시겠습니다.”
유함명의 지휘 아래 남아있는 병사들의 삼분의 일이 당태세의 아래로 배속되었다. 늙은 당태세는 하문성의 성루와 성벽을 맡았고, 유함명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별동대가 되어 침입해오는 정남군을 요격하기로 하였다.
원래부터 수성을 하던 장수가 병력을 더 지닌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태세는 유함명이 그의 병력을 등 뒤에 깔아놓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 놈이 그 때처럼 내 등을 찌르면 이번에는 필경 같이 죽겠지.”
당태세는 혼잣말을 주절대며 내성을 부지런히 걸어 성문을 향하는데, 그 때 무너진 가옥에서 한 사내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하문성에 같이 들어왔던 객가인들의 촌장이었다. 촌장은 당태세를 보더니 마치 오랫동안 격조했던 친족을 보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촌장의 아들 역시 예의 큰 몽둥이를 들고 아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다들 무사합니까?”
당태세의 말에 촌장은 슬쩍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포격으로 열 명 남짓이 돌에 깔려 죽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남은 사람들이라도 무사히 대만으로 갔으면 합니다.”
“갈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