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복건(福建) (7)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이 성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터져 나왔다.
한쪽은 성벽을 타넘어 성을 정복하고 역도들을 정남왕의 영토에서 밀어내겠다는 의지 충천한 군사요, 또 한쪽은 끝까지 성을 수성하며 나중에 힘을 모아 권토중래하여 남명의 깃발을 천하에 드날리겠다는 의기 충만한 병사들이었다.
성벽 옆으로 사람 하나가 기어올라 들어올 만한 구멍이 뚫리자 정남왕의 녹영군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창칼을 내뻗으며 달려 들어왔지만 성 안에서 대기하던 남명의 군사들 역시 창을 뻗어 찌르며 적도의 발이 성내를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들었다.
순식간에 고함과 병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태세는 멍하니 성벽 옆에 앉아 있다가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아륙……아륙이라?”
당태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았다. 십칠 년의 세월동안 그가 생사의 가운데에 누워있을 때 그를 간병한 것은 그의 부인이었고, 그가 죽은 뒤 그를 수발든 것은 아룡이 아닌 아륙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륙이 아룡에 의해 죽도록 방기된 것은 아룡의 살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음을 당태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함명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은 당태세가 알고 있던 사실에 천근의 무게를 얹어주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입술이 바싹 마르고 눈앞이 어지러워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그 아륙이 당운륙이란 말인가.
내 아들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종자, 조카를 자청하는 무두리에 의해 죽은 것인가.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과 옆으로 날아드는 화살의 검은 깃털이 마치 꿈처럼 노인의 앞을 스쳐 가는데, 우왕좌왕하며 칼과 창을 들고 뛰어가는 수비병들의 모습이 마치 잔상처첨 느리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고함이 늘어지듯 노인의 귓속에서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온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일어나십시오, 사부!”
순간, 그의 팔을 끌어당기는 사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 자루 안모도를 손에 부여잡고 사방을 돌아보는 종리세리였다. 사내는 성벽 안에 앉아있는 당태세를 보고 부리나케 무너진 성벽을 뒤로 하고 성벽을 올라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적군이 사방에서 들어옵니다!”
“그런가.”
“정신 차리십시오! 어디 부상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아니야. 나는 멀쩡해…….”
“그렇다면 명을 내려주십시오! 성 위에서 분전하는 병사들에게 모두 영이 안 들어갑니다!”
“병사들이…싸우고 있지 않으냐?”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당태세를 바라보던 종리세리가 똑바로 노인의 눈을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순천문주께서는 그런 일을 또 보실 요량이십니까?”
순간, 당태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잡념이 일시에 사라지며 짧은 한 낮의 미몽(迷夢)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당태세의 눈에 다시 번득이는 정기(精氣)가 돌아왔다. 노인의 눈동자가 제자 종리세리를 지켜보더니 짧은 말을 던졌다.
“안 될 말이지.”
종리세리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당태세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불쑥 시석(矢石)이 날아오는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고 좌우를 살피고 다가오는 병력을 보더니만 몸을 돌려 성 내의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부서진 성벽은 철비장군과 그 수하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성벽으로 올라와라! 어차피 저 곳은 구멍이 작아 한 번에 여럿이 들어가지 못한다! 주공은 등성(登城)이다!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는 적이 주공(主攻)이니 성동격서(聲東擊西)에 휘말리지 말라!”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우렁차게 성내에 파도치자 병사들이 일순간 당태세를 향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당태세는 자신의 목괴를 뽑아들고 번득이는 소도를 하늘에 비추더니만 주변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두려워 말고 성벽에 붙어라! 성이 네 방패가 될 것이다! 올라오는 적을 척살한다!”
당태세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기다란 막대 하나가 성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길고 두꺼운 대나무 양쪽에 손잡이가 삐죽삐죽 달려있는 사다리, 죽비제(竹飛梯)가 걸쳐지자 번개처럼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온 정남군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휘둘렀다.
그를 시작으로 수십 개의 죽비제가 성벽에 달라붙더니 등걸에 달라붙은 개미떼처럼 정남군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순간 당태세의 몸이 번개처럼 앞으로 움직이며 정남군의 몸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소도를 휘둘러 정남군의 몸과 죽비제를 한칼에 베어버렸고, 병사와 사다리는 동시에 성의 안팎으로 떨어졌다.
노인의 몸이 창칼을 들고 성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남군에 겁먹은 수비병들을 향해 뛰어가며 소도를 휘둘렀다.
노인의 번득이는 칼날이 사방으로 휩쓸며 지나가자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와 병사들이 빗자루에 쓸려나가는 먼지처럼 사방으로 날아가며 성루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던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태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지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모두 맞서 싸워라!”
노인의 경천동지할 무공 앞에 병사들의 전의가 갑자기 타오르며 승기(勝氣)를 잡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원래 감투(敢鬪)는 동료의 분발에서 나오는 법,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벽에 움츠려 앉아 올라오는 죽음을 기다리던 병사들의 눈이 하나라도 더 적군을 처치하겠다는 결의가 들어찼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일신한 성벽과 문루의 병사들이 올라오는 적병들을 맞아 눈부시게 싸움을 시작하니, 구멍 난 벽으로 들어오는 정남군을 막던 철비장군 유함명 역시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국구대문파 맹주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순천문주가 있으니 성벽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모두 결사 항전하라! 한 치도 내어주지 마라!”
이미 전황은 변해 있었다. 기습을 시도한 정남군의 의도는 틀어진 뒤였다.
성벽 위의 노인은 수비군에게는 신장이었고 공성군에게는 나찰이었다.
사다리를 놓고 성벽 위에 발을 올린 인간은 채 숨을 다섯 번 쉬기도 전에 시체로 변해버렸다. 당태세는 숨을 돌리고 성루와 부서진 성벽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성벽 앞에는 이미 목책이 세워지고 들어온 적들은 유함명과 수하들이 하나씩 착실하게 격살하며 침입자의 확진을 막고 있었고, 성벽 건너편에는 안모도 한 자루를 들고 종횡무진하는 종리세리가 공성군을 말 그대로 도륙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성벽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수비군이 들어온 적들을 맞아 물러나지 않고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훤칠한 키에 단도와 박도를 들고 수비군과 함께 적들에게 맞서 싸우는 아룡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태세의 눈이 가늘어지며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당태세의 눈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대는 아룡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사내에게 다가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노인의 눈은 아룡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성벽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성 안의 건물 하나가 박살나며 하얀 흙먼지가 위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당태세는 정신을 차리고 성 안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흩어져라! 성내에 포가 떨어진다!”
당태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또 한 발이 성루를 넘어 뒤에 놓인 작은 누각을 박살내며 벽돌과 먼지를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정남군은 성벽에서 교전중인 아군을 피해 성 안으로 포탄을 우겨넣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연이어 포탄들이 성 안으로 떨어졌다. 사방에서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고 집이 무너지고 담이 쓰러졌다.
홍이포 세 대는 쉬지 않고 포탄을 날려대는데 어느새 하문성의 안은 싯누런 흙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 정남군의 진지에서 징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니, 이는 후퇴의 신호였다.
“빌어먹을.”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성 밖을 돌아보았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있던 곳으로 올라온 병력들 중 살아서 두 발로 귀환한 공성군은 없었다. 지금 창칼을 내던지고 자신의 군진으로 퇴각하는 이들은 대부분 철기장군 유함명이 사수한 무너진 성벽으로 공략하던 이들이었다.
적들이 물러서자 홍이포도 발포를 멈추었다. 더 이상은 발사할 탄약이 없거나 포를 식혀야 하는 모양이었다.
“승리다!”
유함명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성벽 위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칼을 뽑아들고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데, 그들은 옆으로 당태세가 걸어가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엄숙하게 군례를 올렸다.
오늘 성벽 위에 올라온 당태세의 모습과 무용과 지휘는 일찍이 실체 대신 먼저 전해진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성벽 위의 병사들은 당태세를 무슨 수호신인양 우러러보며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성벽 아래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철비준 유함명은 슬쩍 입맛을 다시며 짧게 혀를 차더니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부서진 성벽 앞에 목책을 대어라! 지금은 물러갔지만 분명 다시 들어올 것이다! 나머지는 성내를 수습하라. 부상자를 간병한다!”
당태세는 성벽에서 적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번 한 번은 공성을 멈추었지만 계속 공격이 이어진다면 이 하문성은 조만간 함락될 것만 같았다.
유함명이 일전에 말한 것처럼, 지금 당태세 일행이 지키고 있는 곳은 원래 하문성의 내성(內城)이었다. 본성만큼 성벽이 높지도 두껍지도 않았다. 홍이포 한 방에 무너질 정도로 약하게 올려진 성벽이라면 조만간 박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나마 적병들의 재원이 모자라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태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종리세리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그에게 다가왔다. 팔기 출신의 사내는 접전 중에도 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별일 없다. 종리세리 너는 어떠하냐?”
“저도 다친 곳은 없습니다. 수비병보다 공성군의 자질이 더 떨어집니다. 별로 싸워본 적이 없는 이들 같더군요. 정남왕의 정예가 아니라 복주에서 모군(募軍)한 이들 같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주님, 아까는 왜 그렇게 계셨던 겁니까? 칼을 드실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입을 굳게 다물고 흙먼지가 자욱한 하문성내를 바라보다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잔뜩 찌푸린 눈이 하늘을 노려보는데, 마치 대역죄인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종리세리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뭔가 더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그때였다. 누군가 성루의 계단을 타고 후다닥 올라오며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향해 함박웃음을 띄며 다가왔다. 한손에 단도를 들고 다른 손에는 시뻘겋게 물든 박도를 쥐고 있는 무두리, 아룡은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며 말하였다.
“아이고! 두 분은 여기 계셨습니까! 이 무두리는 죽다 살아났습니다! 비록 번국이 대청의 명을 받은 곳이긴 하지만 그 병사들은 남명의 병사들보다 형편 없더군요! 역시 팔기가 아니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종리세리가 아룡을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친 곳은 없는가. 아룡.”
“에헤이, 사형. 저는 무두리라니까요! 이 모습을 보십시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최소한 다섯 놈은 해치웠단 말입니다. 제가 이 손으로 말이지요!”
“사람을 죽이니까 기분이 좋더냐?”
순간 당태세의 날선 목소리가 아룡의 웃음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룡은 순간 눈이 둥그래져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룡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룡은 순간 말을 더듬으며 당태세를 쳐다보다 혀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숙부님, 그게 아니고 제가 살려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네가 살려고 사람을 죽였다 이것이냐?”
“그게 그러니까…저도 성벽에서 군사들과 함께 싸우니….”
새파랗게 눈을 부라리는 당태세의 말에 아룡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종리세리를 쳐다보는데, 종리세리 역시 그런 당태세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승님!”
갑자기 성루 안마당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위의 세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가 나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다름아닌 철비장군 유함명이 서서 당태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안 좋은 표정을 아직 누그러뜨리지 못한 채 아래 있는 유함명을 쳐다보았다. 유함명은 당태세를 올려다보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유함명의 표정은 어두웠다.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총관께 일이 생겼습니다.”
유함명의 말에 당태세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꾸중을 듣던 아룡 역시 표정이 변하며 종리세리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다. 당태세의 눈이 여전히 흙먼지가 일어나는 성의 안마당을 보며 중얼거렸다.
“천지신명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