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복건(福建) (6)
하문성에 들어온 지 이틀째 아침, 당태세는 성루를 향하였다. 성루에는 이른 아침부터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 부장 철비장군 유함명과 그 수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태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경계를 서고 있는 사내들 앞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은 당태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 창을 바로 세우고 짧게 군령을 붙이며 화답하였다.
당태세는 입맛이 씁쓸했다. 이미 성루의 군사는 물론이고 이 성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당태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가 문루로 다가오는 것을 본 철비장군 유함명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계속 부하들에게 지시사항을 내리고 있었다. 유함명의 지시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여 부리는 재주를 터득하고 있었다.
무재(武才)가 있는 줄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장재(將材)가 있다는 것은 오늘에 와서야 안 일이었다.
“좋은 날씨입니다.”
유함명의 말은 온화하고 일반적이라 너무나도 객쩍었다. 사부의 등에 창을 꽃은 놈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도 한가로운 말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날씨는 정말 좋았다.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푸른 하늘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겨울이 다가오는 황록의 대지 건너편에는 누런 녹영군의 장막이 마치 거북 등딱지처럼 여기저기 산개해 늘어서 있었다.
적지 않은 규모였다. 당태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잠시 갈무리하고 문루에서 보이는 풍경에 대한 감상을 말하였다.
“꽤 되는 숫자의 공성군이구나. 저 정도면 포병(砲兵)도 있을 것이다.”
“홍이포 다섯 문이 있었지만 보름 전에 저희가 야습하며 진지를 부수고 포대를 갯벌에 처박았지요. 하지만 그 덕에 백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습니다.”
유함명은 전과를 논하자 웃음이 사라졌다. 사내는 늘어서 있는 정남왕의 녹영군을 보며 동쪽으로 이어진 대로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사내의 눈에는 근심이 서려있었다.
“임무비의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홍이포가 세 문 정도 복주에서 더 도착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이제는 그들을 요격할 병력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오랫동안 버틴 거지요.”
“버티지 못하면 철수한다고?”
“하문성을 버리고 배를 타고 후방에 있는 금문도로 들어갈 것이며, 금문도도 버티지 못한다면 대만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명(明)의 유신(遺臣)들은 많이 남아 있느냐.”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살아남아 유지를 잇는 자는 채 스물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정성공 도독의 수하와 그가 남쪽에서 거둔 인재들입니다. 그들이 남명을 대표합니다.”
“결국 남명은 옛 깃발을 들고 있는 새로운 이들이구나.”
“젊은이들이 명을 잊지 않음입니다.”
노인은 문루에 서 있는 장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은 철석같은 표정의 장수와 그 위에 펼쳐진 창천(蒼天)을 향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십칠 년 전에는 배신을 해놓고 지금 와서는 이곳에서 신명을 바치는 게냐?”
“그때는 죽을 자리가 아니라 믿었습니다. 모두가 죽기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노인의 차가운 눈동자는 제자의 변명을 일축하였다.
“네가 내 등에 창을 꽂고 탈출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 번쩍이는 장수의 갑옷과 휘하에 딸린 부하들과 권세를 얻은 것이냐?”
유함명은 괴롭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는 이를 악물더니 다른 이들이 들을세라 조심스레 말하였다.
“섣부른 제 오판이었습니다. 끝까지 항전을 원하시는 사부님을 쓰러트려야 새로운 활로가 생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부족한 처신입니다.”
“그래서 나와 내 아들을 그 자리에 묻었는가.”
“아닙니다. 문주께서 쓰러지신 뒤 소혈작 장철오 사형이 문주님의 시신과 사모를 동행해 나가는 것을 호위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후방으로 사부님을 모셔드리고 저는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제야 당태세는 산동의 장철오 혼자서 어떻게 자신을 건사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유함명은 순천문의 다른 제자들이 모두 죽는 것을 방기하고 스승의 시신을 장철오에게 맡긴 채 달아났다는 이야기였다. 당태세의 눈매에 한기가 서렸다.
“네가 나를 배신하도록 시킨 것은 사형문의 유독중이냐?”
“유문주의 말에 힘이 있었고 모두가 그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문주의 말과는 별개로, 저도 황성에서 철수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결국 너는 그들과 같은 배를 탄 것이구나.”
당태세의 눈에서 번쩍이는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유함명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충룡문의 주통산, 구봉문의 오자평, 견정문의 진윤타. 영우문의 전영포, 백룡문의 왕양성, 동성문의 황칠이, 포일문주 마길. 그리고 사형문의 유독중까지.”
유함명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당태세를 쳐다보는데, 당태세는 옛 제자를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차례대로 지옥에 보내고 오는 길이다. 남은 것은 오직 너 하나. 옛 제자 철비준 뿐이로다.”
“사부님.”
“너는 이미 한쪽 발을 명부에 올리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라. 네 명줄을 잡고 있는 것은 나와 함께 하문 성벽을 넘어 들어온 아이들와 여인들이다. 그들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네놈은 이 성벽과 함께 무너질 것이다. 십칠 년 전의 나처럼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유함명은 그제야 찌푸리고 있던 이마의 주름살을 펴고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그제야 옛 제자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제자는 불혹이 한참 전에 넘은 경륜 있는 장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 수 있었다.
당태세는 십칠 년의 세월동안 남으로 내려와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웠을 이 사내를 바라보며 필설로 형용 못할 착잡한 심사가 되었다.
무엇이 그른 것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점점 판단이 어려웠다. 복수는 이제 방점을 찍을 일만 남았는데, 마지막 화룡점정을 내기 위해 손을 뻗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몸은 다 회복되신 겁니까?”
유함명의 말이 침묵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노인의 상념을 깨뜨렸다. 유함명의 눈은 노인의 얼굴과 어깨를 타고 내려가 허리와 다리까지 짧은 순간에 세세한 곳을 모두 보고 있었다.
안위를 묻는 것인가 허점을 찾는 것인가.
노인은 옛 제자의 시선을 빤히 바라보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깨어난 것은 일 년이 채 안되었다. 십칠 년간 나는 비생비사의 몸으로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줄 하나를 걸어놓고 광대짓을 하였다.”
“소혈작 장철오 사형이 그간 간병해 주신 것입니까?”
유함명은 당태세의 말에 미안하다는 말이나 어찌 버텼냐는 투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제자의 안부치고는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번개처럼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던 어젯밤과는 다른 이질감이 밀려왔다.
당태세는 갑주입은 사내를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니면 누가 날 돌봤겠느냐. 순천문에 유일하게 남아 충(忠)을 지킨 아이다.”
“사모님과 자제분은 곁에 없었습니까?”
유함명의 말에 당태세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다시 오르며 이가 드러났다.
“지금 무슨 망발이냐, 유함명. 내 안사람은 역질에 걸려 죽었다만 내 자식이 어찌 되었는지는 네놈이 가장 잘 알지 않느냐. 당운천은 내 앞에서 죽었다. 네놈과 팔대문파의 개자식들 때문에!”
하지만 유함명은 당태세의 독기어린 말을 듣자마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함명은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이를 슬쩍 깨물고 눈살을 찌푸리더니만 말을 이었다.
“태중(胎中)의 아이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뭐?”
“사모님은 회임중이셨습니다. 문주께서는 모르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순간 당태세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지며 경악과 의아함이 가득한 눈이 되어 삽시간에 눈동자가 두 배는 커지는데, 그 모습을 보던 유함명은 입맛을 다시더니 적의 진지와 하늘을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이미 황성에 진군하러 갈 때부터 태중에 아이가 들어있다 하셨습니다. 문주께서 죽었다 생각하신 그 날, 황성이 무너질 때 장사형이 문주님을 수레에 싣고 갈 때, 사모께서는 저를 보면서 기필코 원한을 갚겠다 하셨지요.”
유함명은 자신의 과오를 무척이나 덤덤하고 세세하게 말하는데 오히려 그 태도가 더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지금 그럴 정신이 없었다. 지금 유함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금월방의 장철오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태중의 아이라니. 이게 무슨 이야기냐.
“사모께서는 수레에 타신 채 창을 짚고 있는 제게 말씀하셨지요. 해가 가고 날이 가기를 기다리라고. 태중의 아이가 장성하여 제 목에 칼을 겨눌 그 날을 기다리라 말입니다. 너와 팔대문파가 지아비와 운천을 데려갔으니 다음 사내는 잃어버린 하늘대신 땅이 되어 너를 잡을 것이라고.”
“땅이 되어.”
“소문주 철운적우(鐵雲赤雨) 당운천(唐雲天)의 뒤를 이어 당운륙(唐雲陸)이 나오리라 하셨지요.”
유함명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고통스레 말하였지만 어조가 또렷하여 심중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만 같았다.
당태세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유함명을 바라보더니만 이를 드러내며 성큼 다가서서 유함명의 멱살을 잡았다. 당당한 유함명의 체구는 당태세의 드잡이질에도 굳건히 두 다리에 자리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냐! 지금 네 놈의 입에서 그 말이 그리 쉽게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놈은 나를 죽이다 못해 능멸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문주님의 사후에 다른 이들이 모두 무탈하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장군! 급보입니다! 저 곳을 보십시오!”
그 순간, 성루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나오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지도 않고 연이어 입을 열었다.
“포대(砲臺)가 다시 열렸습니다! 포대에 홍이포가 올라왔습니다!”
순간 유함명과 당태세의 고개가 동시에 상대방에게서 적진으로 향하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과 흰 연기가 정남왕의 진지 앞에서 솟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함명의 입이 열리며 천둥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홍이포다! 포격이 온다! 모두 대비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둥과 굉음이 땅바닥에서 울려 퍼졌다. 바닥이 흔들리며 오장이 뒤틀리는 진동이 밀어닥쳤다. 당태세는 재빨리 몸을 굽히며 문루 밖으로 몸을 피하는데, 뒤에서 유함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포가 끝나면 공성이 들어온다!”
멀리 성벽 근처에서 누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홍이포의 포탄이 성벽 근처에 아슬아슬하니 떨어진 것이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짚은 채 병사들 사이로 몸을 움직이며 바깥을 돌아보았다. 또 다른 포성과 연기가 피어오르며 이번에는 반대쪽 방향으로 탄이 날아들며 흙을 산지사방에 비산시켰다. 지금 정남군은 홍이포의 탄착점을 잡는 것 같았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멀리 보이는 정남왕의 포대에 올라온 홍이포는 세 대, 아직 한 발의 포가 남아 있었다. 그와 함께 일렬로 대오를 맞춘 녹영의 보병대가 천천히 성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마지막 포탄은 성벽에 적중할 것이었다. 그 순간이 오면 녹영군의 돌격이 들어올 터였다.
“당운천이 가고 당운륙이 올 것이라.”
당태세는 마지막에 유함명이 전한 말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어 곱씹고 있었다. 그 순간, 마지막 포성이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성벽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쾅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땅이 흔들리고 지축이 꺾이는 듯한 진동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 아래가 아까와는 판이할 정도로 울리며 땅이 위아래로 넘실대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당태세는 직감적으로 성벽에 포탄이 직격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불쑥 들어올린 당태세의 눈 앞에 왼쪽 아래의 성벽이 흙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녹영군의 군세가 마치 파도처럼 일렬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목괴를 손에 굳게 쥐었다. 그 순간, 갑자기 당태세의 머릿속에 파편 같은 생각 하나가 재빠르게 사고의 편린을 훑으면서 지나가는데 그와 더불어 당태세의 입이 벌어지며 허깨비 같은 혼잣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노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륙?”
녹영군의 함성이 바로 앞에서 쏟아져 들어오며 철비장군 유함명의 고함이 쩌렁쩌렁 성루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병사들이 활을 꺼내들었다.
“정남왕의 병사가 들어온다! 모두 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