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복건(福建) (5)
아직 날이 밝으려면 먼 성루의 안마당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낯같이 밝은 횃불 덕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마당의 가운데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건장한 무장 하나가 있었고, 그 앞에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는 지팡이 짚은 노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조금 전 성문을 통해 들어온 객가의 유민들과 성문의 안팎을 빈틈없이 감시하는 수백의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종리세리는 힐끗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놀라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객가인들은 당태세가 진실로 철비장군의 스승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새삼스레 놀라는 모습이었고, 성 안의 군사들은 자신들의 상관이 처음 보는 늙은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격정에 가득한 건장한 무장의 목소리가 곧이어 횃불 사이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장, 유함명! 스승을 모시고 북경의 성에서 순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남으로 내려와 구차한 삶을 유지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는 그때 어리고 겁많아 제대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위인이었사옵니다!”
유함명을 내려보는 당태세의 눈초리는 엄혹하기 그지없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져보며 등과 가슴을 관통했던 유함명의 날카로운 창날을 기억해냈다. 지금 그 창은 이 하문성의 안마당, 유함명의 손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조금씩 노인의 눈에 살기가 올라왔다. 유함명의 구구절절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지금 네가 그것을 변명이라 한단 말이냐.”
“사부님! 제 잘못된 판단을 목숨으로 갚으라 한다면 지금이라도 갚겠사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이 하문의 성문을 지키는 수장이요, 적게는 삼백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이니 제 가치없는 목숨이 성문과 병사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사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시옵소서!”
“뭐가 어째?”
그 순간, 내성 안에서 한 무리의 병사와 함께 헐레벌떡 성문으로 뛰어오는 장수 하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수염에 배가 불룩 나와 야전(野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형에 아예 투구는 쓰지도 않고 다니는 것이 꽤나 높은 직책이거나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이 같았는데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유함명을 바라보더니만 당태세를 향해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대는 누구관대 수성장(守城將)을 능멸하는가! 무슨 일이냐!”
수십의 병사가 창을 들고 당태세를 향하는 순간, 종리세리가 당태세 옆으로 다가와 몸으로 당태세를 막았고 유함명이 손을 들어 장수와 함께 온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기다리십시오! 이 분은 제가 군문에 투신하기 전, 제게 무공을 전수해준 사부님이오!”
“이 자는 북경성에서 사문과 스승을 버리고 달아난 비겁자요! 게다가 내게는 창까지 겨눈 위인이고!”
“사부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 때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찌 제가 죄값을 치르리까! 이곳을 벗어나 대만에 가게 되면 제가 사부님의 칼을 의연하게 받겠습니다!”
당태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 순간, 투실한 장수가 눈동자를 굴리며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를 듣고 있더니만 슬쩍 당태세의 앞으로 들어오더니 엄숙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노대협은 잠시 분을 멈추시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우리 유장군의 스승 같으신데…….”
“스승이었던 자요.”
투실한 장수는 알겠다는 듯 두 손을 펴서 당태세를 진정시키는 시늉을 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만 낮은 목소리로 당태세에게 말하였다.
“병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심산이시오? 지금 밖에는 시랑(豺狼)같은 정남왕의 군사들이 성벽을 넘을 기회만 엿보는 중이외다.”
장수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아까와는 달리 우렁찬 목소리로 무릎을 꿇고 있는 유함명을 보며 명을 내렸다.
“유 부장(副將)은 일어서라. 전위(前衛)를 맡은 자의 사기가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창을 들어라!”
“존명!”
투실한 장수는 사람 다루는 일에 익숙한 위인 같았다. 그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예를 취하더니 당태세를 보며 말하였다.
“본관은 목천석이라고 하오. 이 하문성의 총관을 맡고 있소이다. 비록 병력은 채 오백이 안 되어도 우리 성이 하문에 남은 최후미의 마지막 보루요. 이곳이 무너지면 우리는 복건의 진영을 다 내주는 꼴이지요. 그리되면 금문도(金門島)와 대만도(臺灣島)만이 남명의 강역이 될 것이외다.”
총관 목천석은 물끄러미 어둠이 내려앉은 하문성의 문루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원래 이곳은 내성(內城)이었소. 저 앞에 이곳의 배가 되는 문루와 성벽들이 있었지. 그게 지난 오년간 쥐에게 볏섬을 갉아 먹히듯 하나하나 정남왕의 군사에게 깎여 나가고 이 모양이 된 거요. 결국 우리는 부두와 작은 성곽 하나에 의지해 정남왕의 군사와 싸우는 외로운 군대가 된 거라오.”
장수는 성을 바라보면서 말하였지만 목천석의 말은 당태세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이 고군(孤軍)을 이끄는 장수에게 왜 지금 과거의 실책을 물어 사기를 떨어뜨리느냐는 말과 다름없었다.
목천석은 무공은 없어보였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은 충분한 장수 같았다.
“그대도 하문을 지키려고 들어온 거 아니오? 객가의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온 게 그대 아니오?”
“……맞소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이곳을 떠나 금문을 지나, 대만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와 함께 뜻을 모아주시오. 일단은 백성이 먼저 아닙니까?”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함명은 목천석의 뒤에서 말없이 창을 들고 목천석의 말에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유함명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인데 그 안에는 실로 비분강개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철비준 유함명 저 녀석이 순간의 판단 실수로 그 일을 한 것이었던가. 진실로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드잡이질을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도 되는 것인가?
수십 수백 가지 생각이 당태세의 머릿속에 꼬리를 무는데 그 때, 뒤에 있던 유함명의 입이 열렸다.
“장군, 저 분이 바로 순천문주십니다. 북경 구대문파를 통솔하시고 끝까지 무너지는 황성에서 선제와 함께 황도를 지키신 분이 바로 저분이십니다.”
“뭐라고!”
목천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태세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목천석의 두 겹 턱이 덜덜 떨리며 목소리까지 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분이 그 유명한 구대문파의 좌장이셨단 말인가! 내가 이런 날을 볼 것이라 어찌 생각하였는가!”
오히려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당태세였다. 당태세는 조금 전까지의 타오르던 분노는 뒤로한 채 총관 목천석의 감격스러운 표정을 보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장군께서는 제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꼬이는 건지 풀리는 건지 알 도리가 없네요.”
침상에 걸터앉은 아룡이 당태세와 종리세리를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당태세 일행은 성내의 작은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새로 들어온 이가 숙소를 배정받는 일은 흔치 않은 일 같았다.
목천석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문성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부둣가의 교두보 역할만을 할 수 있는 작은 요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따로 숙소를 내준다는 것은 그만큼 목천석이 당태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당태세 역시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오기 전까지 목천석은 당태세를 흠모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계속 상찬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실로 우리 남명(南明)의 군사들중에 보국구대문파맹을 모르는 이가 없소이다! 여기있는 철비장군 역시 그 곳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위명이 살아나기도 하지요! 노야(老爺)! 당문주! 실로 우리의 귀감이시오! 우리 하문성은 그대가 있음으로 불굴이 될 것이외다!”
목천석이 말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룡이 인상을 쓰고 있는 당태세를 힐끗 바라보더니 마치 당태세의 심중을 그대로 읽는 듯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숙부님의 명성을 남명인가 하는 이 역적…아니, 이곳 군사들은 다 아는 모양입니다. 딴에는 존경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리 인상을 쓰십니까? 복수가 어려워져서 그러신가요?”
“네 말대로다. 무두리. 첫째는 유함명 그놈에게 다가가 칼을 놓기에는 이제 사람이 너무 많고, 게다가 두 번째는 그놈의 진위가 무엇인지 이젠 알 도리가 없다는 게지.”
“저는 믿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때까지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종리세리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맨 처음 사부님을 보았을 때 놀라던 그 자의 눈매는 그리 순진해보이지 않았습니다. 무골인건 맞지만 교활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 놈이 머리를 잘 쓰는 놈인 것은 맞네. 그렇다고 이런 격전지에서 목숨을 내걸고 백성들을 보호하는데 그것까지 진심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악인이라도 한 가지 선한 점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선한 자라도 악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제가 단견(短見)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쉽게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사부님이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소주까지 가서야 알았으니까요.”
종리세리의 말에 아룡과 당태세는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세리는 정도에서 벗어나는 말은 하지 않았고,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반박하기 힘든 내용만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 유함명을 사적으로 치죄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이었다.
“바깥에는 정남왕 경계무의 군사가 있고, 철비준 유함명은 이곳을 수비하는 부장이니 내가 그를 해치우면 고스란히 그 피해는 백성들이 보지 않겠느냐?”
“이제 숙부님 얼굴 모르는 병사도 없을 겁니다.”
아룡이 말하자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게다가 그런 점을 유함명도 익히 아니 사부님께 그리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종리세리의 말에 끄응하며 당태세는 신음을 흘렸다. 한참동안 이마를 만지작대던 당태세는 결국 맘을 정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보며 침착하게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우리와 같이 들어온 백성들의 목숨이 이 작은 성곽에 달려있다. 내 원한이 아무리 깊다지만 살 곳을 찾아 품 안에 날아든 새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룡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조만간 금문에서 배가와 백성들을 실어갈 것이라 하니 그때까지는 버텨보자. 백성들이 다 나간 다음에는 나도 금문이나 대만에 들러 총관 및 남명의 고관들 앞에서 유함명의 죄를 고하고 검결을 벌여 저 놈의 잔명을 취하든가 저 놈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 오해라면 그 앞에서 죄를 용서하도록 해야겠다.”
“저 자가 진심이 아니라 꾀를 쓴다면 분명 다른 복안이 있을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룡의 말을 들은 당태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더니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까지 만난 놈 중에 궤계(詭計)를 쓰지 않는 놈이 있더냐. 만약 저 놈의 언행이 진심이 아닌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주름속에 파묻힌 노인의 눈이 파랗게 번득였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