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복건(福建) (4)
달이 자취를 감춘 하늘위엔 어느 때보다 많은 별이 보였다.
밤하늘은 찬란하게 빛나는 성신(星辰)이 있었지만 달이 자취를 감춘 땅은 지척을 구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야음을 틈타 일단의 사람들이 모두 말없이 일렬로 줄을 선 채 앞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발이 닿는 곳은 땅이 아니라 갯벌이었다. 바닷물이 밀려나 드러난 땅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 언덕에는 넓은 초장이 있었고, 그 초장 위에는 수많은 천막과 무너진 집더미 위에서 피어오르는 군인들의 모닥불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물때를 만나 그대로 걸어가면 하문성 앞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파수를 깨우고 증표를 보이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산중에서 이별하며 임무비가 남긴 마지막 당부가 당태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태세는 이들과 함께 산을 내려와 하문성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뒤였고, 그 뜻을 종리세리와 아룡에게 전하였다. 당태세는 종리세리가 가타부타 말이 없을 것을 기대하였고 또한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기대에 그대로 부응하였다.
하지만 아룡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아니, 우리가 이제 역도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과 합류해야 하는 것입니까?”
“싫다면 여기서 빠지거라. 무두리. 너는 이미 네 할 일을 다 하였다.”
아룡은 당태세의 말이 나오자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더 듣기 싫습니다. 종리사형은 가고 이 무두리는 안 갈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 무두리는 저를 알아주는 사람하고 끝까지 갑니다! 저를 무시하는 사람하고는 백년천년 원수가 되어도 저를 대접해주는 사람이 가자면 지옥도 같이 간다 이겁니다!”
말을 남긴 무두리는 뿔이 난 듯 그대로 짐을 짊어지고 객가인들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뻘밭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저 멀리 선두에서 객가인과 함께 성벽을 향해 걷는 아룡의 모습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그런 아룡을 보며 적잖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알 수 없는 든든함을 같이 느꼈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결국 남은 것은 새로 얻은 제자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카뿐이었다.
“정남왕의 군사도 군기가 상당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종리세리가 당태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막사와 주둔지에 자리잡은 정남왕의 병사들은 야밤에도 둘씩 짝지어 다니며 사방을 훑었고, 바다쪽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당태세의 생각에는 조만간 이쪽 해안가에도 정찰이 내려올 것 같았다.
노인은 입이 바싹 말라붙었다.
지금 하문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장정만 있는 것이 아니고 들어가는 이의 반은 아녀자들이었다. 개중에는 젖먹이 아이도 있었는데 어미들은 아이들이 떠나기 전 젖을 배불리 먹이고 재운 뒤에 그들을 품에 안고 이 위험한 길을 가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무엇이 저들을 이리 절박하게 몰아세워 든든한 토루보다 위험한 뻘을 달없는 밤에 걷게 하는지를 자문해보았다.
결국 그들이 찾는 것은 타인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세상천하 억압이 없는 곳은 한 곳도 없지만 자신과 다른 민족과 규율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공포를 동반하는 법이니, 이들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억압에서 사는 것보다는 대대로 자신들이 인정하고 섬겨온 권위를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 생각의 귀결은 당태세 자신에게 돌아왔다. 노인은 달 없는 밤, 별을 올려 보며 남들이 듣지 못할 독백을 남겼다.
“결국 나는 이제 이 땅에 어울리지 않는 위인이구나.”
그때였다.
고요한 밤하늘 아래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가던 뻘 밭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머리 위 언덕배기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두런대는 병사들의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당태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더니 종리세리를 보고 외쳤다.
“후위로 가자. 사람들을 엄호한다!”
“존명!”
그와 함께 당태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의 바닷가에 길게 휘몰아쳤다.
“어서 뛰시오!”
당태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발이 옆에서 움직이며 진흙을 튀기고 머리 위에서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갑옷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목괴를 이끌고 뒤로 움직이며 언덕 근처로 올라갔고, 종리세리 역시 당태세와 함께 그 앞에서 안모도를 뽑아들었다.
어둔 밤하늘 아래 검은 윤곽으로만 존재하던 해문성의 성문 앞에 불이 켜지더니 하나둘 성루 위에 불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부스럭거리며 횃불을 든 병사들의 모습이 당태세의 바로 앞까지 밀려들어왔다.
“지금이다!”
당태세의 목소리와 함께 목괴가 움직이며 앞장서 있던 병사 두 사람의 머리를 연달아 처올렸다.
두 사람은 채 방비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며 신음을 내뱉자 사방에 있던 불을 올리며 다가오던 병사들이 갑자기 뒤로 빠지며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기습이다! 모두 진을 지켜라!”
당태세의 공격에 순식간에 진영은 뒤집어지고 병사들이 주둔지의 목책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하지만 그와 함께 쓰러진 병사를 구하기 위해 다섯 명의 사내들이 칼을 뽑아들고 튀어나왔다.
모든 사내들이 갑옷을 제대로 받쳐 입고 긴 창과 칼로 무장을 단단히 한 형상이었다. 그들은 당태세의 앞으로 다가오며 허리춤에서 뽑은 군도와 창날을 추켜세웠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검결에서, 그것도 전장에서 어설프게 손속에 정을 두었다가 목이 잘리는 것은 분명 이쪽이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분리하며 단괴와 소도를 양손에 나눠지고 들어오는 적들을 맞받았다.
앞장섰던 사내의 손에 들린 창이 그대로 당태세의 목을 향하자 당태세는 단괴를 들어 들어오는 창날을 막고 단괴의 가지로 창을 걸어 옆으로 젖히고는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갑옷이 없는 목을 일격으로 찌르고 뒤로 빠졌다.
창병이 짧은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는데, 그 옆에 있던 창병 역시 갑자기 언덕 위로 올라온 종리세리의 칼에 의해 손목이 잘리고 목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을 본 병사들은 두 사람을 보며 창을 내뻗는데,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창날을 옆으로 치고 들어가 거리를 좁히더니 그대로 어깨로 창수들을 들이받고 쓰러진 창수의 목을 칼로 찔렀다.
순식간에 부하 넷이 죽임당하는 것을 본 오장(伍長)은 날 벼린 칼을 휘두르며 당태세를 향해 쳐들어갔다.
“죽어라, 역도들아!”
칼이 번득이며 당태세의 머리로 내려오는 순간, 당태세의 소도가 들어오는 칼날을 맞받아 옆으로 흘리며 단괴가 그대로 뻗어 들어가 오장의 태양혈을 그대로 강타했다.
오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부터 땅에 들이박으며 숨이 끊어지는데, 그와 동시에 당태세의 옆으로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성으로 가자!”
종리세리와 당태세가 언덕에서 내려오며 갯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머리 위로 효시(嚆矢)가 날며 군영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갯벌을 날듯이 뛰며 해문성 앞으로 다가가는데 어느새 화전(火箭)이 머리 위로 날며 사방을 밝혔다.
객가의 사람들은 미친듯이 해변가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맨 앞에 앞장서 있던 아룡과 촌장 무리는 성문 앞에 도착하여 성루에 대고 뭐라고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경공을 사용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바닷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가죽신은 푹푹 빠지는 갯벌을 스치듯 자국을 남기고 이동하는데 옆에서 달음질하는 종리세리 역시 당태세의 옆에서 날듯이 뛰고 있었다.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불화살들이 떨어지는 별처럼 쏟아지며 피난하는 자들의 등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들의 비명에 당태세의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려야 했다. 달려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때였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해문성의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옆으로 벌어지며 일단의 군사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앞으로 나온 군사들은 모두 방패를 들고 긴 창을 세운 채 성문과 바닷가 사이의 벌판에 진을 이루는데, 불화살의 불빛으로 언뜻 보이는 병사들의 복색은 옛 명(明)의 군기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방패를 일렬로 늘어세우고 앞에 보이는 정남왕의 진영에 맞서 당당하게 섰는데, 한 줄기 말울음 소리와 함께 긴 창을 든 무장 하나가 튀어나와 방패든 병사들의 뒤를 움직이며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벽이 되고 성이 된다!”
장수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불화살에 이어 한 무더기의 화살이 밤하늘을 찢으며 병사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큰 방패 뒤에 숨어 쏟아지는 화살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버티고 서 있고 병사들이 방패로 가려주는 뒤로 객가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개중 방패 사이를 뚫고 병사의 몸에 틀어박히는 화살이 있는 듯 짧은 신음이 방패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누구 하나 대오를 흐트리는 이가 없었으니 실로 장수가 거느린 병사들의 군기가 서슬 퍼렇기 그지 없었다.
“강병(强兵)이로다.”
당태세가 혼잣말을 남기고 몸을 날려 병사들을 지나 성문 앞으로 들어서는데, 이미 객가인들은 모두 하문성안으로 몸을 넣은 뒤였다.
그제야 성루 위에서 후퇴를 하라는 징소리가 울려 퍼졌고 성 밖에 포진을 했던 방패병들은 장수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성 안으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정남왕의 지휘관은 야간에 군사를 내어 공성(功成)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무두리, 괜찮으냐!”
당태세가 서로를 얼싸안고 있는 객가인들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가 아룡을 찾아내었다. 아룡은 자신을 찾아 다가오는 당태세를 바라보더니만 씨익 하얀 이를 드러내며 두 손을 불끈 들어보였다.
사내는 몸이 멀쩡한 것 보다 당태세가 자기를 찾아 허둥대는 모습이 더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숙부님! 제가 누굽니까! 화살 따위가 어찌 이 청조…무두리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냐, 몸 성하면 되었다.”
“종리사형은 멀쩡하십니까?”
종리세리는 아룡을 바라보더니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촌장은 들어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는 감사함과 애통함이 같이 뒤범벅된 기묘한 표정이 된 채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대협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노야가 아니셨다면 이중에 태반은 갯벌에서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그래도 많은 이가 상하지 않고 성루로 들어와 다행이오.”
그때였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갑주 입은 장수 하나가 뚜벅뚜벅 당태세와 촌장의 사이로 들어오더니만 촌장을 보며 부리부리한 눈을 번득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누구기에 한밤에 이리 성문 앞으로 들어와서 큰 일을 치르게 하였는가? 그나마 상한 이가 별로 없어 다행이나 하마터면 큰 싸움을 벌일 뻔하였다!”
그는 다름 아닌 말을 타고 방패병을 성 밖으로 인솔하였던 장수였다. 촌장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히며 간곡한 어조로 인사를 전하였다.
“장군, 야심한 밤에 죄송하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는 임무비 대인의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온 취산루의 객가(客家)들입니다. 이곳에서 대만으로 넘어가 명조(明朝)의 삶을 이어가기를 희망하옵니다.”
“그러한가. 우리 명조의 백성들은 모두 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니 그대들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순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임무비가 보다 상세하게 전갈을 주어 우리가 먼저 대비하게 하였더라면 더 훌륭할 뻔하였구나.”
촌장은 고개를 한 번 더 숙이더니만 슬쩍 장수의 눈치를 보더니 손을 뻗어 당태세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철비장군. 이 분을 모르시겠습니까? 이 분이 바로 우리를 성까지 무사하게 오게 하신 공훈이 있으신 분이며…….”
장수의 얼굴이 천천히 움직이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향하였다. 노인의 눈과 장수의 눈이 어두운 밤하늘 타오르는 횃불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순간 부리부리하던 장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지며 동공이 상하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촌장의 목소리가 장수의 등 뒤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장군의 스승이라 말씀하시는 당노야십니다. 얼굴이 기억나십니까?”
당태세의 굳은 얼굴이 철비장군. 철비준(鐵飛俊) 유함명의 얼굴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장수의 손에서 철창이 놓이며 땅에 창이 떨어졌다.
이윽고 장수의 무릎이 그대로 땅바닥에 닿더니만 질끈 눈을 감은 장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성루의 문을 울리기 시작했다.
“불초소생 철비준 유함명, 삼가 스승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