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215화 (215/226)

215.  복건(福建) (3)

“사실 제가 정남왕과 정도독 둘 사이에 이문을 취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심 저는 정도독의 편이지요! 제가 비록 이렇게 상인집안입니다만, 제 선친께서는 직접 양주에서 청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셨단 말입니다. 청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번왕 정남왕도 마찬가지고요.”

임무비가 통솔하는 수레는 계속 산길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구불대는 산길은 이제 얕은 구릉을 타고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이어진 언덕배기를 타넘는데, 임무비는 당태세를 바로 뒤에 앉히고는 연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복건 사람은 보수적입니다. 해안가의 상인들만을 만나본 사람들이 우리 복건 사람들이 세사에 적응을 잘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건 하나만 보는 겁니다. 우린 심지까지 바꾸지는 않습니다.”

마차는 어느새 얕은 오르막으로 접어들었는데, 슬쩍 저녁의 안개가 끼어들며 은은하게 수레바퀴 아래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니 마치 세상을 떠나 선계(仙界)로 들어서는 초입과 같았다.

“복건인들은 비가 오면 우산을 두 개 들고 나갑니다. 하나는 비를 맞는 사람에게 팔 물건이요. 하나는 자신이 쓰기 위한 것이지요. 지금 저는 제 우산에 노야를 같이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순간 당태세의 앞에 커다란 토성(土城)이 하나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대한 토성은 마치 커다란 원통을 세워놓은 것처럼 사방에 각이 하나 없는 둥근 형상이었는데 지붕이 딸린 높이까지 합하면 사오층은 되어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나무문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취산루(聚散樓)라고 써있는 붉은 현판이 보였다.

마차가 그 앞으로 다가가자 붉은 대문이 천천히 열리며 마차를 안으로 들였다.

열린 문으로 들어간 토성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오층의 원통형 누각이었는데 맨 아래층에는 화덕이 연이어 이어지며 사람들이 저녁을 하고 있고 그 위층은 창고인 듯 사방이 꽉 막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부터는 칸칸이 막힌 방에 아이들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으니 이곳에서 기거하는 이들만 해도 기백은 되어 보였다. 당태세가 처음 보는 토성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피는데 임무비가 낮은 소리로 당태세에게 말을 건넸다.

“천천히 내리십시오. 이들은 외지인을 별로 신용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무엇이고,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객가(客家)이며, 이곳은 객가의 은거지인 토루(土樓)입니다.”

임무비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복건을 떠나 정성공 도독에게 가기를 소망하는 이들이지요.”

당태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천히 토루의 안쪽 계단을 타고 장정들이 여기저기에서 걸어나왔다.

삼층 가옥의 난간 너머에서 아이들과 여인들이 고개를 내밀고 도착한 사람들을 살펴보는 중인데 중앙의 광장으로 걸어 나온 사람 숫자보다 여인과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 보였다.

광장에 모인 백여 명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마르고 근골이 단단해 보였는데 개중 호리호리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임무비를 바라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날이 급해 식량을 보내달라 하였더니 왜 외지인을 데려왔는가?”

사내의 말투는 발음과 성조가 기이하였다. 임무비는 목소리를 낮춰 호리호리한 사내와 말을 나누더니 슬쩍 턱으로 당태세를 가리켰다.

호리호리한 사내는 이곳의 촌장인 듯 보였는데 임무비를 말을 듣자 눈을 돌려 당태세를 보더니 스읍 하고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고는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하였다.

“철비장군의 스승 되신다 들었소이다.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은 여기에서 따로….”

순간, 당태세의 등 뒤에서 바람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당태세는 슬쩍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몸을 빙글 돌려 들어오는 사내의 막대기를 피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섰다. 종리세리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눈치 챈 당태세는 짧은 소리로 사문의 새 제자에게 주의를 주었다.

“되었다. 내가 한다.”

당태세를 습격한 사내는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장한이었다.

발놀림도 꽤나 재빨랐다. 일격에 당태세를 노리는데 실패한 사내는 다시 몽둥이를 두 손으로 잡고 당태세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낼 듯 달려왔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달려드는 사내를 보고 있다가 목괴를 허리 뒤로 감추고는 왼손을 내밀어 주먹을 불끈 쥐고 떨어지는 몽둥이를 향하였다.

몽둥이가 왼주먹에 닿자마자 나무 기둥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몽둥이가 박살이 나며 허공으로 비산하였다.

당혹감에 장한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순간, 몽둥이를 부순 왼손이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장이 되어 장한의 갈빗대를 그대로 후려치는데, 사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만 그대로 가슴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실로 정중동의 절학이었다.

모여 있던 모두의 입에서 경탄이 튀어나오는데, 당태세는 등 뒤로 돌렸던 목괴를 두 손으로 잡더니만 갑자기 소도를 뽑아들고 무릎 꿇은 사내의 목을 향해 치켜들었다. 임무비가 깜짝 놀라 두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노야! 안됩니다! 참으십시오!”

“이유 없이 이빨을 드러낸 놈은 살려두지 않는다.”

그 순간, 호리호리한 촌장사내가 당태세의 앞으로 튀어나와 무릎을 꿇고 엎드리니 사내는 다급하게 당태세를 보며 낯선 말투로 외치기 시작했다.

“노사!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천하에 아무도 믿고 살지 못해 모든 것을 눈 앞에서 확인해 봐야만 하는 족속입니다. 우리 객가(客家)의 편협함을 용서하시고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아들이라.”

“독자입니다! 제발 목숨 하나만 살려주옵소서!”

수그린 아비의 등을 보던 당태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후 노인의 소도가 다시 목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 별이 올라오는 하늘을 바라보는데, 이를 보던 촌장이 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서 식사를 가져오라! 귀인이 오셨다! 취산루에 귀인이 오셨다! 우리 손님이다!”

죽은 듯 조용하던 거대한 토성 안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원래 우리 객가는 중원에서 살다가 진나라 시절부터 호인(胡人)들에게 땅을 잃고 사방으로 유리하며 핍박받는 혈족입니다. 우리는 대대로 호적이 없고 물려받은 땅도 없습니다. 우리끼리 모여 우리의 습속을 지키며 살아가지요. 그것은 노야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객가 출신의 협객을 중원에서 만나본 적도 많소.”

당태세는 임무비의 수레에서 가져온 쌀과 야채로 떠들썩한 잔치판을 벌인 객가인들 사이에서 촌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느새 잔치판에서 술이 돌았고 그제야 마음이 안정된 아룡이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종리세리 역시 묵묵히 찬을 먹는 것을 바라보며 당태세는 촌장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명(明)대에도 우리 삶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난리가 있었어도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이 취산루를 지키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 그 삶을 바꿀 때가 온 겁니다. 다시 토루를 비우고 새 삶이 있는 곳으로 가야할 시점인 거지요. 객가가 다시 움직일 때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는 거요?”

“우리는 명의 사람입니다.”

촌장의 말은 짧았고, 당태세의 눈은 촌장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청의 강호를 종횡하며 처음으로 들어오는 옛 백성의 말이었다.

“우리는 고향이 없지만 한족(漢族)입니다.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어 밀고 올 때 우리는 저항했습니다. 산골에서 저항했지만 결국 다시 토루 안으로 달팽이처럼 숨어 들어왔지요. 만주족은 우리를 학대합니다. 하지만 복건을 잡아먹은 경씨 일가보다 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십칠년 만에 모든 중원의 백성이 청의 신민이 되었는데 지금 자신의 앞에 사라진 옛 명(明)의 사람들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촌장은 그런 당태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린 이 토루에 뼈를 묻을 각오였습니다. 청이나 정남왕에게 복종하며 살 바엔 이곳에서 같이 살다 하나씩 죽을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때, 하늘의 계시가 온 거지요. 마조낭랑(媽祖娘娘)의 도우심으로 정성공 도독이 대만도(臺灣島)를 남명의 강역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대만(臺灣)?”

“하문과 금문에서 뱃길로 20리 조금 넘는 곳에 위치한 큰 섬인데 그 크기가 한 성(省)에 필적한다 들었습니다. 가히 옮겨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요.”

당태세의 머릿속이 갑자기 어둠 속에서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섬이라.

남명의 강역이라.

명(明)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새로운 영토가 눈앞에 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십칠년 만에 깨어나 처음 본 낯선 이민족의 왕국이 아니라 십칠년 전에 자신이 받들고 살던 나라의 유업(遺業)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임무비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조만간 이 취산루의 주민들은 모두 하문으로 옮겨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문에서 배를 타고 금문도를 지나 대만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대만도로 옮겨갔습니다.”

“가능한 일인가? 누구나 갈수 있는 것이고?”

“명(明)의 부흥을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당태세의 가슴이 마치 혈기방장한 청년처럼 두근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갈 길을 찾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십칠년 전의 과오를 벗어던지고 다시 명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태세가 눈을 크게 뜨고 탁자를 노려보다시피 하며 말없이 앉아있자, 옆에 있던 촌장이 임무비를 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실은…오늘 떠나는 것이 어떨까 생각 중이었소이다.”

“뭐라고요?”

임무비가 놀라 물었다.

“오늘은 삭일(朔日)이라 달도 없고 우리도 짐은 다 꾸려놨소이다. 무엇보다 영 안 좋은 소문도 들려오고 해서 말이오.”

“정남왕이 하문을 친다는 소문 말이오? 언젠가는 치겠지. 목구멍의 가시같은데 안 치겠소?”

“무슨 말인가?”

당태세가 묻자 임무비와 촌장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남왕 경계무는 조만간 해문을 치고 정성공의 주둔군을 몰아낼 계획입니다. 정성공 도독은 그렇게 되면 금문도로 병력을 뺄 것인데, 그리되면 우리들은 대만에 갈 수 있는 방책이 없지요. 하문성 포구에서 배를 타고 대만도로 건너야 하는 일입니다. 금문도까지 갈 수가 없어요.”

“철비장군이 하문성을 지키는 동안 우리가 그리 넘어가야 합니다.”

임무비가 당태세를 보면서 말했다.

“노야의 제자, 철비장군은 하문성의 장수입니다. 그곳에서 적들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그리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취산루에서 그대로 아래 언덕으로 내달리면 하문은 지척입니다. 저희는 모두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가야겠지.”

한참 뒤에야 입을 연 당태세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는 그 곳으로 가야 하는 사람이오. 임대인의 말대로 합시다. 지금 출발하면 되겠소?”

세 사람의 눈빛이 어두운 밤 별빛 아래에서 말없이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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