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복건(福建) (2)
“제가 누굴 데려왔는지 한 번 보십시오. 숙부님!”
얼굴이 불콰해진 아룡이 데리고 온 사내는 푸른 장포를 두르고 변발을 매끄럽게 친 살집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객잔 방 안에 있는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보더니 슬쩍 두 손을 올려 예를 표하고는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주루에서 단공자의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문까지 가시기를 원하신다고요?”
사내의 푸른 장포는 값져 보이는 비단이었고 신색은 좋아보였다. 비록 몸을 낮추고 말을 공손히 하고 있었지만 뒷골목을 오가는 상인처럼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당태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종리세리가 당태세 대신 말을 전했다.
“하문까지 갈 수 있는 마편을 원하오. 가급적이면 검문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중년사내는 종리세리의 외모와 행색을 바라보더니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어딜 가든 검문을 받지요. 하문은 무슨 일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오래된 벗을 찾으러 가네.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당태세의 말에 중년사내는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당태세의 말을 경청하는 듯 보였지만 당태세의 말을 십분 믿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당태세 역시 사내의 인상에서 신용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구차하게 말을 더 섞는 대신 마숙영에게 받은 전대를 들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아니면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네.”
중년인은 전대에 슬쩍 손을 대 보더니만 눈을 올려뜨고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푸근한 눈빛과 목소리는 여전하였지만 비단 같은 혀놀림 속에 예리함이 들어있었다.
“돈을 쓰면서까지 만나야 할 벗이라면 필시 중한 관계시겠군요. 혈육이십니까?”
“보아하니 그대는 돈으로 사람과 물건을 움직이는 사람같은데,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인가.”
“검문을 받을 때에 필요하고, 저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문의 사정은 알고 계십니까?”
“해적 정성공의 무리가 활개치고 다녀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다 들었네.”
“모두가 한인이고 한쪽은 다른 왕을 섬기니,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는 곳이 복건입니다.”
청포 중년의 말을 듣고 있던 종리세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에 대한 이야기도 해 보게. 지금 하문으로 가겠다는 이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런데 주루에서 만난 내 사제를 따라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저는 돈을 받으면 무엇이건 옮기는 사람입니다. 장주(章州)든 하문이든 제 안마당처럼 움직일 수 있습지요. 보통 화물을 옮기지만 가끔 이렇게 사람도 받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누가 정성공의 부하이고, 누가 경계무의 부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세작(細作)을 보내며 뭍과 바다에서 사람들을 죽여 바다에 던지지요. 그게 요즘의 시국입니다.”
“우린 정성공의 부하고 경계무의 부하도 아니다. 우린 북에서 내려왔다.”
장포사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의심을 눈초리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친구 분을 만나서 해후를 푸시려 하문까지 가신단 말씀입니까?”
“정리할 것이 있다.”
순간 당태세의 서늘한 눈빛이 웃음을 머금고 있던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방 안에 냉기가 가득 차는 듯한데 미소를 머금고 있던 청포중년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지며 몸이 그대로 멈췄다.
노인의 손가락이 사내의 손바닥 아래 있는 전대를 가리켰다.
“비용은 그것으로 갈음하라. 우리는 용무를 마치면 바로 복건을 떠난다.”
“그, 그러셨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임…임무비라고 합니다.”
“언제 떠날 수 있느냐?”
노인의 눈은 짧은 말보다 수십 배 많은 것을 임무비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임무비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더욱 공손하게 말을 내었다.
“내일 새벽에라도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다. 내일 새벽에 마차가 아닌 다른 게 들어온다면 복주를 다 뒤져서라도 내 돈과 네 목을 받아오겠다.”
“아, 알아 모시겠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만남은 서리가 내릴 정도의 냉랭한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허겁지겁 객잔 밖으로 빠져나가는 임무비를 바라보던 아룡은 입맛을 다시더니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에도 하문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니까요. 그나마 구석에 앉아있던 저 인간이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는 풍문을 듣고 소개받은 것인데…….”
“잘했다. 이런 시국에 움직이겠다는 놈이 어디 평범한 놈이겠느냐?”
당태세가 아룡을 토닥이며 종리세리를 쳐다보았다. 종리세리 역시 슬쩍 수염을 쓰다듬더니 임무비가 사라진 객잔의 마당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조심스레 굴어도 상인의 냄새는 납니다. 저런 사내라면 연줄이 있을 것이니 하문까지는 갈 것입니다. 장사꾼이 아니라면 아예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지요.”
“같은 생각이야. 자기 보신을 확실하게 해 두려는 거겠지.”
당태세는 아룡과 종리세리를 번갈아 보더니 짧게 말을 이었다.
“모두 행장을 싸 두도록 하자. 진짜 장사꾼이든 경계무의 수하이든 내일 아침 일찍 결판이 날 것이니.”
***
당태세의 기우와는 관계없이 임무비는 새벽 일찍 마차를 객잔 앞에 대 놓고 있었다.
서안으로 가던 사형표국의 마차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이 운신할 법한 큰 마차에는 각종 다기와 말린 고기와 곡량이 같이 놓였는데, 임무비는 그들의 행장을 같이 날라주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편하게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옵소서. 아무래도 제 본업이 장사인만큼 물건을 같이 날라야하니 말입니다.”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나중에 경계무의 녹영병이 묻게 되면 두 분은 제 일꾼들과 함께 종자행세를 하시면 되고, 노사께서는 지팡이를 짚고 앉아 계십시오. 근처에 내려드리려고 태웠다고 하면 되는 거니까요.”
임무비와 함께 하문까지 가는 일행 예닐곱은 모두 임무비의 일꾼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근골이 단단해보였다. 허리춤에는 작은 단봉을 차고, 오른손에는 긴 장대를 들었으니 먼길을 가면서 짐승과 도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번국(藩國)이라 하더라도 정남왕의 강역 역시 청(淸)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 한인이 사사롭게 칼을 들고 다니는 게 금지되어 있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건량과 말린 고기 사이에 세워 둔 박도(朴刀)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마차 아래쪽에는 창이 달려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종리세리 역시 자신의 행장에 안모도를 숨겨놓은 채였으니 모두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서로의 무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 같았다.
“아직 전란은 끝난 것이 아니로구나.”
“세상 천하에 전란이 없는 때가 있겠습니까?”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차 안의 박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전쟁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당태세의 말을 뒤로 하고 마차는 번화한 복주를 떠나 천천히 서남을 향해 움직였다. 해문은 복주에서 해안선을 타고 서쪽 아래로 계속 내려가는 길을 따라 사나흘을 가야 도착하는 곳이었으니 그 또한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당태세는 오랜만에 수레 뒤에 앉아 흔들대며 사방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호호탕탕 거칠 것이 없이 검푸른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산은 안개에 가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실로 인간사의 근심만 없다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드는 묘한 곳이었다.
“그나저나 하문이 전장이라면 어디가서 그 철모씨를 찾는단 말인가요?”
아룡이 수레 위 말려놓은 고기를 하나 잡자 죽 찢어 먹으면서 두런대자 당태세 역시 그게 문제라는 듯 수염을 쓰다듬다 말하였다.
“어차피 하문에 도착해 봐야 알 것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뭔 이야기를 하든 탁상공론 아니냐?”
“아무리 그대로 대비를 해 놓아야지요. 하다못해 묵을 곳이라도 찾은 뒤에 일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그런데 성읍이 전란에 휩싸여 있으면 묵을 곳도 마뜩찮은데…….”
“이보게 아룡, 그 건육(乾肉), 계속 뜯어먹어도 괜찮은 것인가?”
종리세리는 아룡이 계속 말린 고기를 씹어먹는 게 영 마뜩지 않은지 눈살을 찌푸리며 아룡을 쳐다보는데, 아룡은 뭐가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형도 참. 이게 뭐 어떻다고요. 어차피 저희가 거마비를 내었으면 식사도 포함되는 것이고…게다가 이건 제대로 묶어 놓지도 않았잖습니까. 파는 물건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리바리 싸 놓은 식자재 아닙니까. 어디 갖다준다고 해도 믿겠구만.”
순간 종리세리와 당태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두 사람이 일시에 표정이 변하자 아룡은 씹던 고기를 입에 넣은 채 눈이 둥그래져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문제가 있나요?”
“사제가 문제가 아니라 이 마차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
종리세리의 말이 끝나자 당태세가 슬쩍 발끝으로 박도들을 건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임무비의 일꾼들 물건이 아닐 수도 있겠구먼.”
종리세리 역시 자신의 행장을 살펴보더니 좌우를 살피고 당태세에 말하였다.
“원래부터 수상했으니 만전을 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치고 들어갈까요?”
“기다려보세. 무슨 이유가 되었든 좀 더 가긴 해야 하니까.”
아룡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눈이 휘둥그레져 씹던 건육을 마차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아닌게아니라 마차 위의 세 사람이 뭔가를 눈치챈 뒤로 마차의 방향은 교묘하게 틀어지며 남서가 아닌 북서로 향하였다.
해안도로가 아니라 마차는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하문이 아니라 산속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한 두시진 즈음을 양편이 막힌 산길로 마차가 계속 달려가자 당태세는 넌지시 마차 앞에 타고 있는 마부와 임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보시오. 임대인. 어찌하여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요?”
순간, 마차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종리세리와 아룡이 재빠르게 사방을 살펴보는데, 어느새 뒤에 서 다가오던 임무비의 일꾼들은 긴 장봉 꺼내들고 마차에 빙 둘러서서 세 사람을 바라보는데, 임무비는 슬쩍 몸을 돌려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짧게 말을 뱉었다.
“조용히 따라오시구려. 노상에서 객사하기 싫으면.”
“어디로 가느냐 묻지 않았소. 안다면 내가 걱정할 이유도 없을 것인데?”
임무비는 당태세를 보더니 싱긋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북경 말씨를 쓰는 분들이 이 복건까지 내려와 사람을 찾는다는 게 영 수상해서 말이지. 게다가 노사 당신 눈매는 사람 꽤나 잡아본 듯 하던데?”
임무비의 눈은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하문까지 내려온다는 이유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시국에 벗을 만난다는 것도 이상해. 내가 말했지 않나. 여긴 세작이 많다고. 그런데 난 세작을 싫어하거든.”
“나는 세작이 아니라 말했을 것인데.”
천천히 당태세가 몸을 일으켰다. 노인이 목괴를 짚고 수레에서 허리를 펴는 순간, 임무비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며 당태세에게 고함을 질렀다.
“당장 그 자리에 앉지 못할까!”
순간, 당태세의 손에 들린 목괴가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사방에 들려있던 일꾼들의 긴 막대와 부딪혔다.
수레 위 노인의 지팡이가 보이지도 않게 움직일 때마다 일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부여잡고 막대를 놓치는데, 순식간에 여섯 명의 손에서 몽둥이가 떨어져 산길 땅바닥을 굴러 내려갔다.
삽시간에 빈손이 되어버린 일꾼들이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노인을 쳐다보며 마치 합이라도 맞춘 듯 수레 뒤로 한 발짝을 물러섰다.
날카롭게 노려보던 임무비의 눈은 어느새 송아지 눈처럼 커지며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수레 위의 노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내가 세작이었으면 이 산골에 우리 셋을 묻어 버리기라도 할 요량이었는가?”
임무비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태세는 사내의 모습을 보다가 슬쩍 쓴웃음을 입가에 지어보였다.
“나는 내 제자를 찾고 있소. 임 대인. 철비준 유함명이라고 들어 보셨는가?”
“철….”
“그를 찾아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네. 보아하니 그대는 관(官)의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구먼. 이 물자들은 분명 관(官)과 대적하는 사람들을 위한 물품일 터. 그대는 여러 곳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오.”
임무비는 이제 멍하니 입까지 벌리고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슬쩍 턱을 들고 임무비를 내려보며 오연히 말하였다.
“하문에 왕래하며 정성공과 정남왕을 다 모신다면 알고 있겠지. 내 제자에 대해 들어는 보셨는가?”
“……노야께서…진실로 철비장군 유함명의 스승이십니까?”
“철비장군?”
“제가 아는 유함명이라는 이름은 철비장군 하나입니다. 지금 정성공 도독 휘하에서 정남왕과 항쟁 중이시지요.”
“정성공의 휘하라고…….”
“네, 남명(南明)의 충신입니다. 그 분이 노야의 제자였다니!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노야!”
임무비의 경탄인지 아부인지 모를 말을 듣고 있는 당태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산속의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 옷자락과 나뭇가지를 당태세의 눈동자가 오가는 방향으로 같이 흔드는 데 두서없는 혼잣말이 노인의 멍한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명의 충신이라고…….”